33. 꿈의 마지막 파편
강희와 채운이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었다.
그동안 계절만 바뀐 것이 아니라 왕도 바뀌고 있었다. 청왕이 양위를 발표한 후 최사립 측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채운이 돌아오면서 그들의 기세는 꺾이고 말았다. 때문에 양위에 대한 절차가 차질 없이 진행되어 오늘 수왕이 려국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강희도 즉위식이 거행되는 궁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손길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전날 떠난 남편은 함께 갈 수 없지만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만운이 올 것이다.
“마님, 정말 고우셔요!”
그녀에게 달라붙어 치장을 돕던 수란과 애심은 제 손으로 꾸민 강희를 보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임신한 지 다섯 달이 넘어선 강희는 약간 배가 나오긴 했지만 성장을 한 상태에선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강희는 지난봄 행사를 하러 나갈 때보다 더한 치장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몸에 달려 있던 패물들이 요긴하게 쓰였다.
하지만 다시 치장을 하고 있자니, 당시의 무섭고 두려웠던 순간이 되새겨지는 것 같았다.
망망대해에서 정신을 잃은 그와 거센 파도. 밧줄에 묶여서도 흔들리던 그를 꼭 붙잡고 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끔씩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함께 있었기에 모두 견딜 수 있었던 시련이었다. 그가 지금 자신의 옆에 있고, 자신도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를 빈 것은 채운뿐이라 만운을 볼 때면 아직도 그 가슴을 죄는 죄책감이 떠나지 않았다.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을 좋아해 주는 만운을 보는 것은 너무도 괴로웠다.
그 일은 만운에게 밝히는 것도 죄였다.
채운도 그녀에게 만운에게는 함구할 것을 다짐시켰다.
채운은 매일 밤 그녀의 배를 만지며 태교를 함께했다. 느끼지 못할 만큼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그녀의 배를 확인하는 것이 그의 매일 밤 즐거움이었다. 잠시 위험했다가 안정기에 접어든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제 다시 달밤에 대나무 숲 근처의 연무장에 갈 필요가 없다는 말도 되었다.
“마님, 또 대감 생각을 하고 계신 거죠? 그새 대감이 보고 싶으세요? 어쩜, 두 분이 서로 은애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아세요?”
조금은 아슬아슬하게 보이던 주인 부부께서 고난 끝에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 모양이라며, 애심과 수란 이하 집안사람들은 모두 좋아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애심의 말에 강희는 순간 수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수란도 애심이 하는 말에 동조하듯 함께 웃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돌아와 수란의 슬픔을 헤아리느라 마음이 아팠지만 수란은 다섯 달이 지난 만큼 조금씩 슬픔을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강희는 조금 부끄러운 질문에 두 여인 사이에서 살포시 웃기만 했다. 그것은 애심의 말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여서 세 여인은 또 한 번 같이 웃을 수 있었다.
수란에 대한 죄책감도 오래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함께 웃을 수 있는 것부터가 복이다. 그녀는 서서히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마님.”
“응, 왜?”
“마님은 아기씨가 아들이길 원하세요, 아니면 딸이길 원하세요?”
“그걸 굳이 물어야 해? 당연히 대감 닮으신 아드님이 먼저 나오시면 좋지.”
수란의 물음에 애심이 제가 먼저 나서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강희는 그 말에 잠시 생각을 해 보고 있었다.
“……난 딸이었으면 좋겠어.”
“네?”
“왜요, 마님?”
“첫째는 딸인 게 좋다잖아. 그래서…….”
“아, 그렇지요? 저도 이 아이가 딸이었으면 해요, 마님.”
애심이 부푼 배를 토닥이며 말하자 수란이 반박했다.
“아들 낳은 난 어쩌고!”
“이미 낳았는데 그만이지, 어쩔 건데?”
강희는 두 하녀가 민감한 주제를 살며시 비껴가며 수다를 나누는 걸 즐겁게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볼 때면 길석의 생각도 났지만 종경에 있던 가실의 생각도 나곤 했다. 가실은 악독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가 버린 여인이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이 두 사람은 모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마님을 닮은 따님이 태어나시면 아기씨는 또 얼마나 예쁠까요? 그렇지?”
“그러게. 정말 따님이시든 아드님이시든 두 분 다 훤칠하시고, 예쁘셔서 태어나실 아기씨도 기대되어요.”
두 여인은 각기 즐겁게 떠들었다.
하지만 강희는 수란의 질문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딸일까, 아들일까?
그것은 강희도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이 아이가 아들이라면…….
그는 그 꿈을 운명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생각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재영은 어찌 된 것일까? 아직 그녀에 대한 말은 다시 들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궁에 다시 가면 뭔가 다른 말이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때 밖에서 하린댁이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서 의원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드시라 해.”
호근은 단장을 끝낸 하녀들이 물러나며 드러난 강희의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와!”
“그리 쳐다보시면 민망합니다.”
“하지만 이게 시작일 거란 걸 아셔야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종일 마님을 다 이렇게 쳐다보고 감탄할 거란 말입니다.”
“마님이라니요. 서방님도 서 의원께는 격식을 차리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데, 자꾸 그리 말을 올리시렵니까?”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요. 마님을 잘못 불렀다가 작은 장군께 얼마나 혼났는데요?”
작은 장군이란 만운의 이야기였다. 호근도 줄곧 여기에 살았던 것처럼 다른 이들과 같은 호칭으로 만운을 부르는 것이다. 아무튼 그리 칭하는 말에는 친근함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채운에 대한 호감을 그대로 만운에게 옮긴 듯이 보였다.
헌데 만운은 호근이란 낯선 사내에게 형 내외가 보이는 친근함을 묘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사람이 당분간 한집에 살게 된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짜증이 솟구치곤 하여 그에게 괜히 심술을 부렸다. 허나 그 때문에 채운과 연무장을 이용하고서 지금은 그에게 눈만 부라리고 있었다.
강희는 도련님이 은인인 서 의원을 싫어하는 것 같아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서방님의 말로는 만운이 막내라 형 부부가 저 말고 다른 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 질투하는 거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긴 했다.
만운이 호근을 딱히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에게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서 의원이 보이지 않으면 자신이 나서서 찾아 챙기는 걸 보면 둘의 관계도 참 복잡하고 묘하게 보였다.
호근이 머무는 곳만 봐도 그렇다. 그는 현재 만운의 옆방에 머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채에 있었는데 매번 식사 때마다 그를 찾아다니기 귀찮다는 이유로 만운이 그를 자신의 옆방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주인 식구와 함께 식사하는 것도 그렇고, 만운이 일일이 그를 찾아다니곤 하여 호근은 다른 이들에게 단순한 손님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호근은 요즘 도성에서 의방을 차릴 계획으로 자리를 보고 있었다. 약천에서 차렸던 거짓 의방이 아닌 진짜 그의 의방을 차리려는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이 집에서 계속 같이 머물 참이었다.
“자, 손을 내밀어 보세요. 오늘은 아기씨가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봐 드리지요.”
호근이 강희를 찾아온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방을 차릴 때까지는 매일 강희의 상세를 봐 주면서 집안에 상주한 의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 돌팔이 의원 아니오? 왜 우리 형수 손목을 그토록 오래 잡고 있소? 떼끼, 어서 그 손을 놓으시오!”
그런데 언제 온 것인지 따라 들어온 만운이 강희의 손을 잡고 있는 호근에게 인상을 쓰며 툴툴거리는 것이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라 호근은 놀라지도 않고 능숙하게 응수했다.
“하하, 제가 돌팔이라 조금 오래 걸리는 거랍니다.”
“돌팔이, 돌팔이, 제 입으로 그러면서 무슨 의방을 차리겠다는 거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만운이 아무리 툴툴거리며 대들어도 호근은 이렇게 웃을 뿐이었다. 그가 만운을 보는 표정은 꼭 어린 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만운은 제 형도 아닌 자가 저를 또 그리 본다며 더 길길이 날뛰는 것이다. 어쨌든 만운은 호근이 진맥을 하고 난 후에는 항상 그 결과를 재촉하며 제가 먼저 듣고 싶어 했다.
“어떻소? 우리 형수랑 조카는 오늘도 좋은 것이오?”
“네, 그렇습니다. 태아의 심박도 우렁차게 울리고, 마님도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십니다. 하지만 아시죠? 절대로 무리하시면…….”
“그건 염려 마시오. 내가 잘 지키고 있다가 모시고 올 거요.”
“네, 그러시겠지요.”
호근은 만운의 급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항상 시비만 걸어서 밉상이다가도 사실 만운은 형과 형수만 없으면 그를 챙기는 데 더 열심인 이였다. 그래서 동생이 없었던 호근에게 만운은 무척 생소한 존재로서 무얼 하든 귀엽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호근의 진단에 비로소 만족한 만운은 강희를 궁으로 가는 마차에 조심스레 태웠다. 호근은 두 사람이 가는 것을 대문에서 배웅했다.
“저도 따라가서 계속 보살펴 드리면 좋겠지만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새 왕의 등극을 경하드립니다.”
그는 상진과 함께 려국으로 귀환하며 황감하게도 왕세자의 환영도 받을 수 있었다.
허나 지금 그가 궁에 얼굴을 드미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 최필선을 향해 통렬하게 비웃어 준 것으로 최씨 일가에게 단단히 찍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궁은 아직 최사립 일파의 그림자가 너무 짙은 곳이었다. 제 한 몸 겨우 건사할 정도의 의원 한 명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져도 모를 곳이기도 했다.
허니 호근은 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사려야 했다. 그가 채운의 집에 머무는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네, 전하께 서 의원의 인사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강희와 만운이 탄 마차가 멀어졌다.
돌아서며, 호근은 오늘의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아 둔 의방은 터는 좋았지만 건물은 다 낡아 아무래도 허물고 다시 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누엔 부인의 아버지에게 받은 돈은 약재를 사고도 많이 남았다. 남은 돈은 그곳 상단에 맡겼기 때문에 약재가 들어오면서 받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의방의 터를 사고, 새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돈은 오늘 새 왕이 되시는 왕세자께도 받았다.
그래서 당장 일을 추진하기 위해 오늘은 목수를 불러 집을 허물고, 새로 지을 계획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들은 모두 갖춰진 것이다.
허나 아직 하지 못한 일이 한 가지가 남았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래연을 찾아 헤맸지만 그녀도 그녀의 가족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래연이 최필극에게 버림받고, 가족과 함께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것은 혼자 힘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채운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의외로 그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만운이었다. 즉위식만 무사히 마치면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준다고 했으니, 곧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래연…….”
호근이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름은 대답해 주는 이 없이 허공 속에 스러져 버렸다.
오늘 하늘은 청명한 날씨를 뽐내려는지 유독 높고 파래 보였다.
* * *
탕!
탁자를 내리친 최사립은 분노로 꽉 쥔 주먹을 떨고 있었다. 그는 아직 버리지 못한 야욕을 가진 채 오늘의 즉위식으로 새 왕이 등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결국은 양위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양위를 막을 명분도 기세도 잃고, 지엄한 자리를 내주는 꼴을 봐야 하였어!”
필선과 필민, 두 아들이 그의 노화를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아버님, 때는 또 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때는 다시 올 겁니다.”
“이전이라면 양위를 하더라도 때가 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윤채운이 놈이라도 없앴으면 기회를 만들기가 수월해질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어렵게 되었다. 이제 남아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이전은 원정을 떠나기 이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원정으로 도리어 모든 명분과 기세를 새 왕에게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말았고, 이제 남아 있는 하나뿐인 방법이란 바로 반역을 뜻함이었다.
여태 그것만은 피하려 했건만 이제 다른 수가 없었다. 저들의 반격이 곧 시작될진대 이대로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먼저 쳐야 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님. 우리에겐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명을 내리시면 제가 선봉에 설 것입니다!”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이냐?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 된다. 명분이 필요해, 명분이! 그걸 세우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다.”
“하지만 새로 등극한 수왕은 곧바로 해적선에 대한 것을 다시 조사하고 터뜨릴 것입니다. 아직 임봉곤, 그놈을 숨겨 두고 내놓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일 겁니다.”
최사립 측도 결국 해적선에서 살아남은 자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여러 방면으로 감시하던 중 임봉곤의 가족들이 통째로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그 정도로 찍어 넘어갈 최사립이 아니었다.
최사립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정도는 이미 대비해 두었다. 단지 증인 하나로 우리 가문을 무너뜨릴 수는 없어.”
“허나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윤채운은 물론 요즘 목소리가 높아진 김승언을 비롯한 자들이 우리를 공격해 댈 것입니다.”
“임봉곤, 그놈이 감히 대전에 발을 디디기 전에 없애면 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에게 다시 맡겨 주십시오, 아버님.”
필민은 임봉곤을 찾아 없애기 위해 이미 여러 차례 시도한 바 있었다.
허나 왕세자가 그를 얼마나 은밀히 숨겼는지 아직도 어디 있는지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대전에 들이려면 밖으로 나와야만 한다. 그 틈을 노려 없애겠다는 말이었다.
“지금은 늦었다. 놔두어라. 그러다 덜미가 잡히면 우리만 더 골치가 아파져. 놈이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부인하면 그만이야. 그놈이 감히 나와 대질하는 자리에서 나를 넘어설 수 있으리라 보느냐?”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가진 최사립이다. 그의 눈에 든 기세만으로도 웬만한 사람들은 감히 오금을 펴지 못했다. 이토록 오만할 수 있을 만큼 그는 힘과 권세가 있는 자였다. 그만큼 뻔뻔스럽기도 하고.
그러니 증거가 없는 한 이번 일도 넘어갈 수 있었다. 허나 수왕이 등극한 이상 저들의 공세에 이쪽 사람들이 밀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버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윤채운이, 그놈이 나서서 아버님을 탄핵하려 할 것입니다.”
“내가 새파란 그놈 하나 이기지 못할 것 같으냐? 걱정 마라. 내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다.”
“네? 그게 무엇입니까?”
그가 묻는 말에 최사립은 필민과 눈빛을 나누며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필선은 자신이 아버지의 신임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송국까지 가서 채운을 잡지 못한 것 때문에 질책을 피하지 못했다. 유라성의 관리들을 매수하느라 상단의 일 년 치 수입을 모두 쏟아붓고도 윤채운과 강희를 눈앞에서 놓쳤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나중에 필민에게 채운이 가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 주긴 했으나 그것도 실패했다.
호근에게 속아 도중에 시간을 낭비한 것이 추적이 실패한 원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채운보다도 오히려 서호근이란 작자를 찾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허나 이미 놓친 새는 잡을 길이 요원하기만 했다.
“다음에 네가 할 일을 다시 알려 주마. 저쪽에서는 근시일 내에 임봉곤이 놈을 국정에 세워 나를 탄핵하려 할 테지만 그놈 말고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때까지만 몸을 숙이고 있다가 그날이 지나면 반격할 기회를 얻을 것이야. 수는 왕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마땅히 우리 가흔 왕자께서 오르셔야 한다.”
이미 왕의 즉위식이 끝났는데도 왕의 자리에 대한 최사립의 집착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가 가지기 힘들게 멀어진 듯 보이자 그의 욕망은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가들 보거라. 너희들 각자의 일들을 착실히 하고 있거라. 조만간 그날이 올 것이다.”
“네, 아버님”
“네!”
그런데 필선이 제 처소로 향하는 걸 확인한 필민이 다시 방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최사립과 은밀히 얼굴을 맞대며 속삭이는 것이다.
“그가 넘어오고 있습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일 뿐, 아버님이 한 가지만 자극을 주신다면 그는 곧바로 넘어올 것입니다.”
“수고했다. 허나 일이 성사될 때까지 절대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직접 움직이고 있습니다.”
“알았다. 나가 보아라.”
필민이 문을 닫고 나가는 걸 보고 있던 최사립의 입가에 예의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그는 아무도 듣는 이가 없는 방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것은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기분 좋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역시 큰일엔 계집이 들어가게 마련이야. 계집이 끼는 일에는 시기도 질투도 생기는 법이지.”
그의 살기 어린 속삭임에 더위가 물러간 방 안엔 으스스한 기운까지 감돌고 있었다.
* * *
수왕의 즉위식엔 송국은 물론 왜뿐 아니라 멀리 법국에서도 사신이 참여하여 축하했다.
뱃길이 열리며 나라의 위상이 예전처럼 높아질 것은 모두들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더구나 원정으로 구마도를 점령하여 왜의 해적을 완전히 눌러 버린 왕세자가 왕이 된 사실에 축하의 물결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거의 열흘간 이어진 축하 행렬과 인사가 끝난 후 용상에 오른 수왕과 채운이 독대하는 자리였다.
주위를 모두 물린 자리에서 군신이 아닌 벗으로 청한 채운은 감격스런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인사를 올렸다.
“자네에게 그 호칭으로 불리다니, 참으로 감개무량해. 이날이 정말로 오게 된 것이군.”
“당연히 오르실 지위에 오르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선왕께서 강건하시어 뒤를 지켜 주시니 전하께 더욱 홍복입니다.”
“그래. 아바마마는 별궁에 계시는 것이 더 편안해 보였네. 그리고 덕분에 조금 더 오래 사실 수 있을 것 같으이.”
“그리하실 것입니다.”
채운은 강희가 꿈속에서 겪기로는 이때 청왕이 이미 사망하여 왕세자가 급작스럽게 왕위를 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와 대조하면 지금이 얼마나 좋은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해적선을 폭발시킨 일 같은 건 강희가 말했던 것과 달리 너무 이르게 당겨진 일이었지만 그것은 원정의 성과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강희에겐 그것을 운명이라 여기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의 꿈대로 현실이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그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시기는 당겨졌어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
허면 그녀가 한 마지막에 한 말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화약의 일이 당겨진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일도 언제 터질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채운은 더 이상 상념에 잠길 새가 없었다. 수왕이 굳은 결의를 담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허나 이제부터가 반격일세.”
“전하, 저들도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잠잠한 것은 무언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연회는 끝났다. 이제 내일이면 대소 신료들이 모두 모이는 국정을 열 것이야. 그 자리에서 최사립과 그 일파가 저지른 죄가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다. 임봉곤, 그자는 차질 없이 대기하고 있겠지?”
“그러하옵니다. 허나 최사립이 그의 증언만으로 꺾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고 있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정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어 있어.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기세를 꺾어 버리고 밀어낼 수 있을 것이야.”
왕의 말은 맞았지만 말 그대로 기세를 꺾는 수준일 뿐이다. 해서 채운은 수보에게 부탁했던 것을 그 자리에서 내놓을 수 있기를 강력히 바라고 있었다.
채운이 수보에게 부탁한 것이 바로 최사립이 들여온 화약에 관한 것이었다.
수보는 어촌 촌부일 때도 그랬지만 명망 있는 한 가문을 맡게 되면서 무시하지 못할 기세를 뿜어내는 사내로서의 면모를 뚜렷하게 보여 주었다. 더군다나 그와는 서로 은인으로 묶어 있는 사이. 호근과 더불어 믿을 수 있는 이였다. 그 믿음 덕분인지 그는 과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장희여 집안의 실세로 완전히 등극했다.
최근 그와 닿은 연락에선 화약의 밀수선을 은밀히 추적 중이라는 소식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화약의 취급은 송국에서도 민감한 문제였고, 더구나 그것이 이곳으로 흘러들어 온 상황은 기밀 중에서도 기밀이었을 것이다.
만의 하나 그가 증거만 잡아 준다면 최사립을 꼼짝없이 반역으로 붙잡을 수 있었다. 단지 불분명한 사실이기에 아직은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채운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대비를 하여야 했다.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저들이 품은 역심이 최악의 형태로 나타날까 봐 그것이 저어되고 있습니다.”
“또 나를 암살하려 할 것이란 말인가?”
“네, 그보다 더한 것은 내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네. 최사립은 결코 용상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을 인물이야. 허나 아바마마가 살아 계신 한 내란의 명분이 없어. 필시 나를 해할 궁리를 하고 있겠지.”
청왕의 생존!
채운은 강희의 꿈과 가장 크게 다른 그 사실을 떠올리며 선왕의 안위를 다시 살펴야 함을 깨달았다. 저들이 반역을 하려면 선왕의 존재가 걸림돌이 될 것이다. 또한 반역의 가능성이 너무 높기에 경계를 늦출 틈이 없었다.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왕비 전하는 물론 두 분 왕자마마와 공주마마의 경비에도 인원을 더 늘리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지. 인원도 인원이지만 누구를 들이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지금 사람을 늘리다가는 저들이 들어설 틈을 줄 수도 있음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항상 하는 것이지만 수왕과의 이야기는 최사립과의 분쟁으로 인한 이쪽 사람들의 보호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내일의 국정에 관한 첫 번째 주제는 단연 최사립의 성토가 될 해적선의 폭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미 여러 번 나눈 얘기였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논의가 끝날 수가 없었다.
“전하, 취침하실 시각이옵니다.”
밖에서 내관이 걱정스럽게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 연회에 연일 잠이 부족한 왕이 충신이자 벗인 윤채운 대감과 또 밤을 새울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리되었군. 내 성 부인에게는 참으로 면구스러워. 매일 자네를 붙들고 보내 주지 않으니 말이야. 이만 부인께 가 보시게.”
“전하께서도 옥체를 살피시려면 숙면을 취하셔야 합니다.”
“내 그리하지. 어서 가 보시게.”
왕에게 목례를 하고 나온 채운은 서둘러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강희가 조금 익숙해진 서궁도 아닌 이곳 중앙궁의 별실에서 머문 지 벌써 열흘째였다.
인물의 경비, 경계에 대한 것은 선왕이나 왕비, 그 아래 직계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누구보다 채운의 신변과 가족들이 그들의 위협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강희는 즉위식 이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작년 청왕이 쓰러져서 비상사태가 벌어진 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어찌 됐든 다행인 것은 강희가 지척에 있고, 잠시라도 그녀에게 돌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채운의 발걸음이 점점 급해지고 있었다.
채운은 강희가 있는 처소가 눈앞에 보이자 문득 궁에 떠돌던 황당한 소문을 떠올렸다. 혹시 그 소문을 그녀가 알게 된 건 아닌가 하고 내심 걱정이 되었다.
소문은 한재영이 사냥 대회에서 불미스런 사건으로 그와 밤을 보냈으며, 곧 두 번째 부인이 될 거란 이야기였다.
채운은 왜 그런 소문이 난 것인지 당시의 상황을 되새기며 생각해 보았다.
당시 한 서기가 자신에게 고백한 일이 있긴 했다. 허나 그것은 단 두 사람만 아는 일이었고, 그 후에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그녀는 꽤 의연하게 감정을 정리한 것 같아 채운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허나 떠도는 소문이 꽤 구체적이라 이것도 최사립 측이 만든 건 아닌가 추측되었지만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들이 만든 소문이라면 장인인 성 대감과의 사이를 벌리려는 수작일 것이다.
채운에게 한재영은 여인인 것이 정말 아까운 최고의 군사였고, 함께 일하는 수하이며, 동반자였다.
헌데 그런 여인과 난 뜬소문이라니.
그것은 그녀의 처신에 대한 의심이며, 모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런 소문을 강희가 들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듣고, 좋은 음식만 먹어도 힘든 것이 태교라는데, 그동안 강희가 겪어 온 시간은 힘들기만 했다. 이제 겨우 안정되려는 때지만 칼날 같은 정국 때문에 집도 아닌 낯선 궁에서 머물러야 하는 그녀가 그는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런 황당한 소문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이 동요할 것이란 말인가. 괜한 오해라도 듣는 자체가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궁에 같이 있다지만 강희와 얼굴을 대면하는 건 늦은 밤,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잠을 설치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자라고 수차례 타일러도 봤지만 그녀는 낮잠을 충분히 잔다며 한 번도 먼저 잠들어 있는 적이 없었다.
오늘도 그럴 것이다.
“강희?”
“서방님!”
강희가 작은 천 조각을 들고 있다 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여과 없이 보여 주는 그녀의 기뻐하는 얼굴은 매일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그를 편안하게 해 주는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오늘은 더 늦었는데……. 아직도 안 자고 기다린 거요?”
“저는 낮에 많이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방님을 기다리는 것이 정말 기쁜걸요?”
강희는 요즘 제법 말로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그가 잠들었을 때만 몰래 속삭이던 연심을 이젠 곧잘 말로 하곤 하는 것이다.
“나도…….”
‘당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기쁘오’라는 말을 생략한 채운이 익숙하게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사랑을 나누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매일 그녀를 품에 안고 자는 것이 이젠 자연스런 습관이 되고 있었다.
새벽에 먼저 일어나 그녀를 두고 나가더라도 그녀가 또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하루가 충만했다.
한참 탐하던 입술을 떼자 그녀가 품에 얼굴을 기대며 안겨 왔다. 붉어진 젖은 입술이 등불에 더욱 유혹적으로 보였지만 지금 그녀를 더 탐하다간 이야기를 할 짧은 시간을 놓치고 말 것 같았다. 강희의 소소한 일과를 듣는 이 시간도 매일의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방금 손에 들고 있던 것은 무엇이오? 등이 너무 어둡지는 않소?”
“괜찮습니다. 손에 익은 것이라……. 그리고 아기의 저고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벌써 여러 벌 만드는 것 같더니, 또 만들고 있었소?”
“아기는 계속 크니까요. 그래서 크기를 조금 더 크게 해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왕비 전하께서 아기 옷은 아무리 많아도 많은 게 아니라 하셔서…….”
“그렇군. 누차 말하지만 무리해서는 안 되오? 아셨소?”
“네.”
채운은 불을 끄고 강희와 함께 누웠다.
그녀는 얇은 침의만 걸치고 있었다. 그는 사실 그조차도 없는 것이 더 좋았다. 뱃속의 아기를 느끼기에도 옷 위보다 맨살을 만지는 것이 훨씬 잘 느껴지는 것이다. 쉽사리 그녀의 옷을 벗긴 채운은 달싹거리는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며, 그녀의 온몸을 애무했다.
예민한 만큼 금방 달아오른 강희는 그를 쉽게 받아들였다. 헐떡이는 숨을 입안으로 들이마신 그는 그녀의 옆에서 길게 몸을 뻗고 누웠다.
강희는 가라앉는 숨소리와 함께 그대로 잠들었다. 내일도 그가 일어날 때 배웅하려 하겠지만 눈을 뜰 수 없어 입맞춤만 겨우 하고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아니, 그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결코 저들의 시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의 암살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수왕께서 보위에 오른 지금 그것은 더 은밀하고 치명적으로 진행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응?’
순간 채운은 강희가 꿈의 마지막에 소문으로 들었다던 말이 내심 걸리기 시작했다.
‘나의 측근. 친척 혹은 인척이라?’
강희가 한 말에 자신의 친척들 모두를 떠올려 생각해 봤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의 곁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라도 있는 이가 만운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운은 애초에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강희도 만운은 아니었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허면…… 인척?’
인척이라 함은 혼인으로 파생된 관계이다.
허나 강희가 말한 인척이 그녀의 친척들은 아닐 것이었다. 꿈속의 그때 성 대감은 이미 몰락했고, 그들 가문과는 아예 인연을 끊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
문득 떠오른 생각에 채운은 눈을 감고 있는 강희를 다시 쳐다봤다. 그녀는 꿈속에서 그에게 두 번째 부인이 있었다고 했다.
‘두 번째 부인이라니?’
그러자 자연스레 떠도는 소문이 생각났다. 한 서기와의 망측한 소문은 꿈속의 그녀에게는 그냥 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은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만약 사냥 대회 때 그들의 농간에 넘어갔더라면 소문은 사실일 수도 있었다. 일이 벌어졌다면 그녀를 그냥 버릴 수도 없었을 테니까.
강희의 꿈은 달라질 수 있었던 현실을 무섭게 보여 주고 있었다.
“강희, 자오?”
“네…….”
반쯤 잠이 든 강희가 몽롱하게 답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녀를 그냥 자게 두었을 테지만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혹시 당신, 궁에 도는 소문을 들었소?”
“네?”
그 말에 잠이 깨었는지 대답을 하는 강희의 목소리가 꽤 또렷해져 있었다.
“내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 치부하여 모른 척하려 했지만……. 그리고 당신도 괜히 심란하게 여길까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알아야 할 것 같소. 한 서기가 내 두 번째 부인이 될 거란 소문이 있던데, 당신도 그걸 들었소?”
순간 노곤히 누워 있던 강희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채운은 대답을 굳이 듣지 않아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는 한 번도 내색하거나 그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묻는다면 기정사실임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우선 당신이 알아야 할 건 그녀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이오. 전혀, 단 한 번도! 그녀는 단지 나와 전하께 필요한 재원이며, 인재요. 알겠소?”
“……네.”
울음이 묻어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채운은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강희는 그 사실을 체념한 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럼 한 가지 더 묻겠소. 그것에 대해 다시 묻는 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 될 것이오. 그 꿈속의 내 두 번째 부인이 한재영, 그녀였소?”
“네…….”
아직 목소리가 잠긴 강희가 속삭이듯 답했다.
채운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들이는 데도 따지지도 못하고 속앓이만 하며 슬퍼했을 그녀가 절로 그려져 강희를 끌어안고서 말했다.
“강희, 내가 당신에게 내 마음을 준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준 것이오. 그러니 당신 말고 다른 여자에게는 나의 어느 한구석 줄 것이 남아 있지 않소.”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이것을 만져 보시오. 이 눈은 당신만을 바라보며, 이 코로는 당신의 체취만 맡을 수 있을 뿐이소. 그리고 이 귀로는 당신의 애모만 들을 것이고, 또 이 입으로는 당신에게만 입 맞추고 당신에게만 연모를 표할 것이오.”
채운은 그녀의 손을 잡고 차례로 그의 눈과 코, 귀, 입술을 쓸게 했다. 그리고 다음엔 얼굴 아래의 자신의 온몸을 더듬고 샅샅이 훑으며 모든 것을 만지게 했다.
“어느 하나 남에게 줄 것이 없소. 그러니 이 몸은 다 당신 것이오.”
“서방님…….”
그녀가 주르륵 흘린 눈물이 맞닿아 있는 그의 얼굴까지 적시며 흘렀다.
“사랑하오, 강희. 사랑하오.”
“사랑합니다, 서방님. 사랑합니다.”
채운은 조용히 울고 있는 강희를 토닥이며 계속 사랑을 고백했다. 강희의 속앓이가 얼마나 된 것인지 모르지만 흐느끼는 그녀의 울음소리에는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잠시 후.
잠든 강희를 자리에 눕힌 채운은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측근을 의심하긴 싫지만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그리고 한재영을 그 자리에 대입하자 당장 떠오르는 이가 생기는 것이다.
‘정말 그였을까? 하지만 왜?’
꿈속의 시간과도 맞지 않은 지금, 그를 의심하는 것이 옳은지도 알 수 없었다.
강희가 잠든 중에도 가끔씩 소스라치며 흐느끼고 있어서 채운은 그때마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달래 주었다. 허나 그 또한 내일 접전을 생각해서라도 쉬어야 할 때였다.
채운은 그녀의 옆에서 눈을 감고 짧지만 달콤한 숙면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