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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여정의 끝 (32/38)

32. 여정의 끝

만운은 도성까지 닷새의 여정 동안 놀림도 놀림이려니와 형과 형수를 살피느라 긴장의 연속이었다. 혹시라도 도성에 가자마자 그 불길한 이혼장 이야기가 나올까 봐 노심초사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형과 형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는 안타깝긴 하지만 다정해 보였다. 사실 집을 떠나기 전보다 오히려 사이가 눈에 띄게 좋기만 해 보여 안심이 될 정도였다.

그래도 가끔 안타깝게 보이는 것은 서둘러 도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만운은 채운이 없는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알리기에 바빴다.

청왕이 양위를 발표한 것과 해적선이 폭파된 배경에 최사립 측이 의심을 받아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 완전히 밀어붙이는 방법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폭파된 해적선에서 잡은 이를 확보한 것까지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포로의 신병을 확보하고, 그자가 증언을 하기로 했지만 증언만으로는 부족해. 다른 확실한 물증이 더 필요할 거야. 하지만 저들이 송국 측에서 들여왔다는 화약이나 그 양에 대한 물증이 없어.”

“……그래, 우선 저하의 양위가 무사히 이루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증인의 신병에는 앞으로 네가 더욱 신경을 써라. 화약에 대해선 내가 더 알아보마.”

채운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왕세자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 그는 도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국정에서 연일 양위에 대해 거센 반발을 하던 이들이 내일 윤채운 장군이 도성에 들어온다는 소식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 것이다.

최사립 측은 결국 채운의 귀환을 막지 못하자 양위도 막을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다시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채운의 귀환은 왕세자가 직접 도성 입구까지 나와 마중하는 것으로 일부러 국가적 행사처럼 벌였다.

보이기 위한 행사는 최사립 측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왕세자는 채운이 도성으로 귀환하는 순간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했다. 건재한 모습의 채운을 보이는 것은 백성들에게 새 왕의 등극과 그의 뒤를 든든히 받쳐 줄 장군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이리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마우이!”

이미 첫 해후에 반가운 인사를 나눴던 왕세자는 궁에 돌아온 후에도 채운을 다시 얼싸안고 반가움을 표했다.

“소신, 이렇게 늦게 귀환하여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이 없다니.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네, 고마워!”

“헌데 상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미탁이나 다른 무장들은요.”

“상진에게선 돌아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네. 그리고 알아보니 미탁은 밀무역을 하는 자로 취급되어 명주성에 잡혀 있었어. 걱정 말게. 자네가 돌아온 덕분에 모두 무사해.”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채운은 무엇보다도 호근이 상진에게 구출되어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했다. 누구보다 걱정하고 있는 강희에게 어서 이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허나 저녁이 되기 전까지 그녀를 만나기는 힘들어 보였다. 강희는 다른 사람들의 일정에 차질을 줄 수 있다며 집에 돌아올 때까지 임신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만운에게는 말하자고 했지만 그가 알면 일정이 더욱 늦어질 것 같다며 집에 돌아가자마자 알리자고 했다.

만운이 얼마나 좋아할지 생각만 해도 흐뭇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곳까지 간 것이고,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게야. 자세히 좀 알려 주게.”

만운과 하고 또 한 이야기였지만 채운은 왕세자에게 다시 이야기를 반복하여 하게 되었다.

이미 그 이야기들을 다 들은 만운도 옆에서 다시 한 번 형과 형수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하고 분노하며 기뻐했다.

이것은 왕세자비와 만나고 있는 강희도 마찬가지였다. 강희도 자신들을 구하러 왔던 사람들과 호근이 함께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세상에나, 그럼 서호근이라는 의원이 두 분이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하신 것이군요!”

“네, 처음 저희를 구해 주신 부부만큼이나 그에게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또 마지막 순간에 저희 대신 잡혀갔기에 더욱 고초가 심하셨을 것입니다.”

“그가 꽤 출중한 실력을 갖고 있다죠? 그 의원이 돌아오면 꼭 궁으로 초대해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두 여인의 담소는 계속 이어졌다. 새로 태어난 왕손 아기씨가 자란 모습과 양위를 하면 중앙궁으로 옮겨 가야 하기에 바쁠 거라는 이야기 등이었다.

입을 달싹이던 왕세자비는 끝내 마지막 말을 삼켰다.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강희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 거라면 빨리 알아야 하지 싶기도 했다.

채운이 조난당하며 그와 재영에 관해 궁에 떠돌던 소문은 잠잠해졌지만 그의 귀환과 함께 그 소문이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채운이 돌아오고 있으며, 또한 부인과 함께 오고 있다는 소식에 그럼 한 서기는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 나돌고 있었던 것이다. 은밀하게 도는 소문이었지만 측근의 시녀들이 떠드는 소리를 왕세자비가 모를 리가 없었다.

강희는 조금이라도 늦게 아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왕세자비는 입을 다물었지만 강희가 재영과 마주치는 것은 막을 수는 없었다.

강희가 왕세자비와 있는 동안 그녀에게는 시녀들과 다른 무장의 부인들, 그리고 대신의 부인들이 인사를 하러 다녀갔다. 그중엔 강희가 배에서 피신을 할 때 양보하여 무사할 수 있었던 참지정사의 부인도 있었다. 그녀 덕분에 강희가 마지막 순간 배를 떠나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된 다른 부인들도 강희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함께 인사를 왔던 것이다.

사람들의 축하 방문의 물결과 왕세자비와의 담소에 피곤을 느낀 강희는 이만 쉬고 싶었다.

그때 한 사람이 더 그녀를 방문하여 인사를 했다.

시녀들이 떠드는 소문은 점점 파다해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 재영에게서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긍정도 부인도 않는 그녀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소문에 진실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생사가 불투명하다가 귀환하는 기쁜 날, 남편의 측실이 될 수도 있는 여인을 만나는 건 반갑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해서 왕세자비는 재영을 부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재영이 궁에 있는 이유는 채운의 측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멀리서도 찾아오는 다른 이들에 비해 궁 안에 있는 그녀가 강희에게 인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마주쳐야 할 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한 서기.”

재영은 먼저 왕세자비에게 인사한 후 강희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축하 인사를 했다.

“부인, 부인의 무사 귀환을 경하드립니다.”

“한 서기님…….”

“많은 분들이 방문하셔서 피곤하실 것 같아 나중에 오려 했는데, 오늘 댁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왔습니다.”

“네, 그러셨군요.”

“귀환을 다시 한 번 경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한 서기님.”

강희도 돌아오는 도중 재영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까지 당당히 찾아온 그녀를 본 순간 맨 먼저 든 생각은, 바로 올 것이 왔다는 것이었다.

여태 다른 부인들을 만나며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고 인사를 하던 강희였다. 그런데 한재영과 만나고 난 후 동요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강희를 본 왕세자비는 그녀도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재영은 강희의 치하에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양했다. 그리고 강희가 피곤하고 힘들어 보인다며 곧 물러났다.

왕세자비는 짧은 대면을 하는 두 여인 사이에서 묘한 감정의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강희는 재영을 무척이나 의식하고 있었고, 재영은 정중하며 깍듯했지만 인사를 하는 내내 약간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다.

재영은 나갔지만 다리에서 맥이 탁 풀린 강희는 일어설 수도 없었다.

왕세자비는 그런 강희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그동안 송국에 있었기에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재영이 나간 문을 바라보는 강희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왕세자비는 강희를 어서 쉬게 해 주어야 할 것 같아 이만 인사를 하고 시녀를 부르려 했다.

“부인, 이제 그만 쉬셔야…….”

“…….”

“앗, 성 부인!”

왕세자비가 쓰러지는 강희를 붙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안색이 좋지 않던 강희가 얼굴이 더 새카매지며, 의자 옆으로 쓰러진 것이다.

“부인, 성 부인! 여봐라, 어서 의원을 불러라! 어서!”

쓰러진 강희는 얼굴을 두드리는데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왕세자비의 비명이 다시 크게 방 밖을 향했다.

그 시각.

왕세자와 헤어져서 나온 채운의 뒤로 만운이 따라가고 있었다.

물어볼까, 말까? 허나 사실이면 어쩌지?

만운은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형에게 물었다. 이대로 불안하게 속으로 끙끙거리느니 대답을 듣고 속 시원하게 풀어 버리고 싶었다.

“형.”

“응?”

“형, 형수랑 이혼해?”

“뭐? 그게 무슨 소리냐?”

만운이 할 말이 아니었다. 이혼이라는 말은 강희와 둘 사이에서 끝난 일로 다른 이는 결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만운이 어떻게 알고 하는 말일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형의 집무실에서 봤어, 그걸.”

“뭘 봤다는……, 아, 그것!”

만운이 한 말을 알아들은 채운이 탄식을 흘렸다.

한때는 강희의 앞에서 불태워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럴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강희와 얘기를 할 때 다시 떠올리긴 했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이 없애는 것을 되새겼을 뿐이었다.

헌데 그것이 어찌 만운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네가 어떻게 그걸? 아니, 아니다. 잊어라. 그건…… 없었던 일이다.”

“그래, 그런 거지? 당연히 그래야지.”

형의 부인에 만운은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허나 그 이유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하지만 알아야 할 것 같은 어떤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형, 애초에 왜? 왜 형수가 그런 걸 만들었던 거야?”

“그건…….”

“설마 형수가 다른 맘이 있어서 그런 거야?”

“아니다, 그건!”

채운은 만운의 의심에 생각할 여지도 없이 부인했다. 강희의 생각을 말해 줄 수는 없지만 그 의도를 곡해하게 만들 수도 없었다.

“……형이 말하기 힘들다면 다시 묻지는 않을게.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싶어. 형이랑 형수, 그런 일은 영영 없는 거지? 그렇지?”

“그야 당연……!”

채운은 그의 앞에서 웅성거리며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왕세자비의 시녀들이었고, 함께 달려가는 자는 궁의였다.

헌데 그녀들의 입에서 갑자기 성 부인이란 말이 들려왔던 것이다.

달려가는 방향도 현재 강희가 있는 왕세자비의 처소 쪽이었다. 지금 그도 강희를 데리러 가던 길이었기에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의원의 뒤를 따라 함께 달려갔다.

재영은 자신이 미처 다 나가기도 전에 안에서 들린 왕세자의 비명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시녀들이 의원을 부른다며 달려가기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왕세자비의 목소리가 들렸으니 일이 난 것은 성 부인일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재영은 오도 가도 못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때 의원을 부르러 갔던 시녀들이 돌아오며, 사람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재영이 멀리서밖에 보지 못한 채운이 함께 오고 있었다.

“부인!”

쓰러진 강희를 본 채운은 그녀를 크게 부르며 뛰어 들어갔다. 아내를 부르는 처절한 음성에 그의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드러나고 있었다.

“잠시만요, 대감. 대감, 제가 마님을 살펴보겠습니다.”

의원은 저를 제치고 강희를 안고 있는 채운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채운은 강희를 침상에 뉘어 주고 의원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뒤에서 왕세자비는 성 부인을 너무 오래 붙들어 두어 그런 것은 아닌가 하고 자책하고 있었다.

뒤따라온 만운이 채운의 뒤에서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었다. 형수는 처음 해후했을 때도 초췌해 보이긴 했지만 금방 씩씩함을 보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자신 때문에 여정을 늦출 순 없다며 재촉하던 형수였다.

그런데 다 와서 의식을 잃다니.

게다가 쓰러진 형수를 바라보는 형의 안색도 형수만큼이나 좋지 않게 보였다.

“계속 괜찮다고 한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서 의원과 계속 같이 있어서 무의식중에 의원에게 보이는 건 그에게 보인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진작 의원에게 보였어야 했는데…….”

“형, 형수가 어디 안 좋은 거야?”

만운도 걱정이 되는 나머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강희는 지금 임신 중이야.”

“뭐?”

가만히 속삭이고 있던 만운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건 진작 말해 주지, 이건 이혼이니 마니 하는 소리들은 아예 쑥 들어가게 하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보통 사람도 힘든 길을 임산부인 형수가 주파해야 했다는 말이었다. 국경을 통과하는 일만 있었는가. 그 이전엔 송국에서 긴장의 연속을 넘나들며 더 긴 여정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형수…….”

채운의 걱정이 만운에게로 옮겨 왔다. 그는 이제 형수 한 사람만이 아닌 배 속의 조카도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의식이 깨어나지 않는 강희를 보며 채운은 자책하고 있었다. 제법 자신을 챙기는 것 같아 안심했건만 괜찮다는 그녀의 말만 믿은 것이 잘못이다. 강희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었다.

임신을 서로 밝힌 후의 강희가 어떠했던가.

잠시 혼자 있는 모습을 봐도 그녀는 배에 손을 얹은 채 배 속의 아기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때의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그도 함께 손을 얹고 그녀의 입술을 훔치곤 했다.

만약에 이 일로 아이를 놓친다면……. 그녀는 그 충격을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다.

“으음.”

계속 강희의 얼굴만 쳐다보던 사람들의 귀에 그녀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부인, 나 여기 있소!”

눈을 뜬 강희는 채운을 보며 물었다.

“서방님, 이게 어떻게 된…….”

강희가 깨어나자 안도한 의원은 채운에게 옆자리를 비켜 주면서 말했다.

“긴 여정에 피로가 겹친 데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 그런 것입니다. 게다가 홑몸이 아니시라. 그래서 걱정했지만 정신이 드시면서 맥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절대 안정을 취하시고 쉬셔야 합니다.”

강희는 그제야 채운 말고도 주변에 다른 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의원이 무어라 말하는 것은 들렸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눈앞이 까매졌던 것이 생각났다.

“아, 아기! 우리 아기는요?”

“괜찮소, 괜찮소.”

“마님, 배 속의 아기씨는 무탈하십니다. 단지 마님의 몸이 쇠약해져서 긴장과 피로를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단단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강희가 뭐라 답하기 전에 만운이 고개를 드밀었다.

“형수, 그 좋은 소식을 왜 말하지 않았소! 그럼 더 쉬엄쉬엄 올 수 있었을 것 아니오!”

“송구합니다, 도련…….”

“녀석, 안정을 취하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느냐!”

“아, 맞다. 좋아서요, 좋아서 그래요.”

히죽거리는 만운의 얼굴은 이제야 본래 그의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았다.

채운이 실종된 이후 그의 모습은 이전의 잘 웃고 쾌활하던 청년이 아니었다. 헌데 오랜만에 채운에게 야단을 맞는 순간 이제야 형이 돌아왔다는 실감을 하며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세자비도 강희가 쓰러진 진짜 이유를 알게 되며 안도할 수 있었다. 만운도 지금 알게 된 사실을 자신에게 어찌 알리지 않았느냐 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걱정하던 마음이 안도와 기쁨으로 바뀌며 흔쾌히 축하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성 부인, 경하드려요.”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마님, 대감.”

함께 있던 시녀들과 의원까지 가세해 그들 부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바깥에서 동동거리던 다른 시녀들도 안을 기웃거리며 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모든 관심이 강희와 채운에게 기울어져 있던 그 순간, 재영은 고요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이혼장을 봤을 때, 그리고 만운이 발견할 수 있도록 놔두었을 때, 감히 품을 수 없는 꿈을 잠시 꾸었다.

허나 그의 부인이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아니, 그 전에 그가 미친 듯이 아내를 부르며 달려가는 얼굴을 본 순간, 그것은 헛된 꿈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잘못된 소문이나 그와의 사이에 말이 도는 것을 방치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비열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재녀일지는 모르나, 현명하거나 좋은 여자는 아니었다. 적이라 싸우는 최사립 대감 측과 비견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재영은 씁쓸함을 담은 채 고개를 떨구고 왕세자비 처소를 빠져나왔다. 급전을 듣고 오던 왕세자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 * *

강희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그 후 사흘이 지나서였다. 도성에 도착했을 때, 아니 국경을 넘어 종경의 현청에 갔을 때도 이제 안심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정말 꿈에 그리던 집에 와서야 돌아왔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강희와 채운이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집안의 모든 종복들이 나와 그들의 귀환을 반기며 눈시울을 붉혔다.

애심은 배가 부른 모습으로 강희를 붙잡고 펑펑 울었고, 수란은 갓 낳은 아기를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옆에 함께 서 있지 못하는 빈자리를 발견한 강희는 수란과 아기를 안은 채 울며 용서를 빌었다.

“미안해, 수란아.”

“마님, 마님이 왜 제게 사과를 하시는 겁니까.”

“길석이, 길석이 날 위해, 나 대신에…….”

철철 울고 있는 수란이 강희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모르는 일은 아니었다. 허나 왕세자가 나서서 장례를 치러 준 일에 어찌 더 원망을 남길 수 있겠는가.

단지 그의 마지막 유언이 있었는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마님이 돌아오고 계시다는 말에 남들보다 더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있습니까?”

“너와 아이를 부탁한다고…….”

차마 피를 게워 내던 길석이 고맙다고 하던 말은 할 수 없었다. 허나 그의 마지막 말을 전해 들은 수란은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랬군요. 그가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님.”

부부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은 강희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래서 집안 가솔들과의 해후의 자리는 곧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진정하시오. 의원이 반드시 안정하라고 하지 않았소. 아이를 생각해야지.”

결국 채운이 나서서 울고 있는 강희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식솔들은 그가 한 말에 다들 한순간 놀랐다가 왁자하게 기쁨을 나누었다. 주인의 귀환에 겹친 경사였던 것이다.

“아기씨요?”

“세상에, 마님!”

사람들은 임신하여 떠받들려도 모자랄 때 그 머나먼 길을 힘들게 와야 했던 강희에게 놀람과 걱정, 축하의 인사를 하기 바빴다.

사월 말 폭풍에 휩쓸려 단 이틀 만에 송국에 떨어졌던 그들은 거의 넉 달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 * *

강희가 마지막으로 눈물의 해후를 한 사람은 구마도에 갔다가 돌아온 아버지였다.

성 대감은 잃은 줄 알았던 딸이 돌아온 것은 물론 아이까지 가진 걸 알고서 두 손을 쳐들며 감격해 했다. 자식은 다들 똑같이 귀했지만 강희는 막내여서인지, 혹은 달라진 모습이 기특해서인지 더욱 귀하고 애틋한 존재였다.

강희가 여기 없는 새 달라진 것도 있었다.

아직 담장 밖의 사람들에게 그녀는 여전히 악독한 여인이었지만 그 인식이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우선 제일 처음이 바로 참지정사 김승언의 부인이었고, 그들 주위의 부인들도 궁에서 강희를 직접 만나 인사하며 인식을 바꾸었다. 또 채운의 봉토를 붙이는 사람들은 식솔들에 의해 그들이 새로 맞은 여주인이 악하거나 무서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왕세자는 강희가 사라지고 악소문이 돌았을 때, 비누가 만들어지고 퍼질 수 있었던 것이 누구로 비롯된 것인지 그 공을 널리 밝혔다. 때문에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달라진 강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시 시간이 흐르며, 김상진과 송국에 갔던 나머지 무장들, 그리고 서호근과도 재회했다. 그중엔 끝까지 그들을 보좌하며 길 안내를 하던 미탁도 있었다.

그는 포위를 따돌리려고 유인했다가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명주성에 갇혀 있던 그를 상진이 빼내 온 것이다.

이렇게 기적처럼 송국에 갔던 모든 사람들이 무사히 귀환했다.

전쟁도 아닌 최사립의 야욕으로 벌어진 해적선 폭파 사건으로 너무나 아까운 장병들을 잃은 채운은 그들의 귀환이 그토록 귀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자신을 위해 그 먼 타국까지 와서 그들 중 누구라도 하나 희생당했다면 그 뼈아픈 고통이 이전보다 더 묵직하게 가슴에 얹어졌을 것이다.

다른 이들도 그렇지만 강희는 특히 자신들 때문에 고초를 겪어야 했던 호근과 기쁨의 해후를 나누었다. 그녀는 그가 무사히 온 것에 반가워하면서도 그가 겪었을 고초에 연신 눈물을 글썽였다.

“반갑고, 죄송하고……. 또 무사하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갇혀 있는 게 조금 불편했을 뿐 무장님들 덕분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호근은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강희는 그가 숨긴 고초를 생각하며 한참 동안 눈시울을 붉혔다.

채운은 상진에게서 모든 것을 들은지라 최필선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 저 재주 있고 유능한 젊은 의원의 팔을 잘라 버릴 생각을 하다니.

그는 백성들의 위에서 제멋대로 군림하며 핍박하는 저들을 반드시 몰아내리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호근에게는 여러 가지로 감사할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들 부부에게 중요한 인연으로 자리매김한 사람이었다. 이 흔치 않은 인연을 평생 이어 갈 생각이었다.

채운은 호근과 굳게 악수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숱한 인사들을 전했다.

이들이 돌아옴으로써 송국에서의 기나긴 여정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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