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형!
만운은 미탁이 마지막으로 보낸 전서구를 받았다. 거기엔 중경에서 이틀 거리에 와 있으나 상황을 봐서 그곳에 다다를 것이란 소식이 적혀 있었다.
“형, 드디어!”
만운은 열흘 전 채운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최사립의 밀정을 통해 얻었던 뜬구름 같던 소식 대신 정말 채운을 대면한 이들로부터 온 소식이었다.
“만운 무장님, 무슨 좋은 소식이 있어요?”
어느덧 만운과 친해진 담영은 친숙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만약 담영의 부모가 보았다면 경을 칠 일이었으나 후원의 우물가에 있을 때면 항시 이렇게 편히 부르곤 했다.
“담영 아가씨, 여긴 또 웬일이야?”
“해가 점점 짧아져요. 여름도 다 간 것 같아요.”
밖에서 놀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아쉽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담영은 그가 왜 웃고 있었는지 궁금증을 꼭 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혼자 웃고 있었던 거예요? 뭐 좋은 일이 있어요?”
“응, 좋은 소식이 있단다. 그런데 좋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해.”
“뭐가요?”
“형이랑 형수가 집에 돌아온대. 그런데 나쁜 놈이 두 사람을 잡으려고 해.”
“앗, 그럼 무장님이 나쁜 놈을 막아야 하잖아요!”
“그래야지. 그런데 그 나쁜 놈은 저 건너편에 있어. 나는 많이 알려진 사람이라 함부로 넘어갈 수가 없어.”
“저런, 어떡해요! 저는 갈 수 있는데, 도와 드릴까요?”
“뭐? 너 또 국경을 넘었다는 거야!”
“아코!”
담영은 저도 모르게 한 말실수에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국경을 함부로 넘나들며 노는 것은 부모님에게는 물론 만운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평민 아이들은 국경에서 너와 나 구분 없이 송국 아이들과 섞여 잘 놀았고, 담영도 아이들과 어울려 그렇게 놀았던 것이다.
허나 그녀가 수령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송국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최사립 일파뿐이었다. 최근에는 송국과 보이지 않는 마찰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그런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담영이 그곳에서 사고라도 일어나 찾으러 갈 상황이 발생한다면 자칫 큰 문제로 비화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너,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그렇긴 한데…….”
“다시는 가지 마라. 약속해, 어서!”
“네, 안 갈게요.”
담영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짐을 했다. 이것은 그녀가 부모님에게 야단을 맞을 때 항상 하던 표정이었다. 만운에게도 같은 표정을 하자니 왠지 서러운 생각이 든 담영은 급격히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담영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만운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여 주었다.
“약속했으니 됐어.”
“헤헤.”
이것으로 된 것이다. 담영은 그가 머리를 헝클여 주자 금세 웃었다.
보통 둘이 나누는 대화는 남들에게는 비밀이었다.
담영은 어린 마음에 남모르게 비밀을 나누는 어른 친구가 생긴 것에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신을 완전히 믿는 자그마한 이의 신의에 만운도 그가 한 말이 남들에게 새어 나갈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야단은 맞았어도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다. 그것 말고도 할 말은 많았다.
“그런데 그 여자는 정말 밉상이에요! 오늘도 영혜를 때렸다니까요?”
대뜸 그 여자라고 하는 걸 보면 오늘 처음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담영이 지금 이야기하는 여자는 지난해 이곳에 왔다는데 겉모양새는 하녀였지만 사실 군관들에게 몸을 팔며 일신의 안위를 사는 여자였다.
담영이 그것까지 아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여자가 관청官廳 주위에 있다는 건 확실히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놓고 몸을 파는 것도 아니고, 관계하는 군관들이 그녀를 옹호할 기세라 내쫓을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담영의 어머니가 모질게 마음만 먹으면 쫓아 보낼 수도 있으련만, 인정 많은 부인은 그 여자의 다리가 불편한 걸 이유로 쫓아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어린아이의 이야기라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그녀의 행실이 그냥 보아 넘기기 힘들 정도로 못된 여자이긴 했다. 또 담영이 이토록 분개하는 이유는 영혜가 제 절친한 동무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또 그랬어?”
“네, 어머니께 아무리 말씀 드려도 그때뿐, 소용이 없어요. 어머니는 다리가 불편한 여자라 이해하라 하시지만 그렇다고 저보다 약한 어린아이를 막 때리는 걸 이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영혜가 잘못이라도 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그저 뛰어가다가 그 여자와 스쳤을 뿐이라고요. 사실 부딪히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영혜를 불러다가 따귀를 때렸다니까요! 어른이 뭐 그래요?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예전 같으면 이 정도로 넘어가지도 않았다나요? 따귀를 때린 것도 모자라 무슨 더 심한 짓을 하겠다는 건지, 원.”
“그래서 어떻게 했니?”
“전 맞고서 울지도 못하고 있는 영혜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했어요. 그 여자랑은 말을 섞기도 싫어요. 제 아버지가 누군지 아니까 저한테는 함부로 하지 못하지만 동네 아이들 중 그 여자에게 한 대 맞지 않은 애들이 없어요. 저번에는 영혜한테 말을 안 들으면 화로에 넘어뜨려 얼굴을 지져 버린다는 소리도 했어요. 옛날에도 그런 적이 있다면서 더 어린아이들쯤은 문제도 아니라고 그렇게 엄포를 놓는데, 영혜는 그 말을 듣고 며칠을 무서워서 울었어요. 그게 할 소리에요? 그런데도 그 여자를 왜 그냥 두는지 정말 모르겠다니까요?”
만운은 담영에게 그 여자와 몸을 섞는 남자들이 꽤 지위가 있는 군관들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담영의 어머니가 마음이 약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녀를 쫓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그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가 했다는 그 말은 마음에 걸렸다.
열네 살, 꽃다운 나이인 자신의 누이가 바로 그렇게 당하는 비극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파생된 가족의 비극은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었다.
헌데 그런 걸 새까만 어린아이들에게 태연히 으름장이라고 하는 여자라니.
담영이 말처럼 정말 그냥 두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단지 그는 여기 계속 머물 사람이 아니라서 간섭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 여자가 오고 나서부터 아이들은 마음 놓고 놀지도 못한다니까요? 그 여자가 스스로 떠벌리기로, 자신은 원래 도성의 대가 댁에 살았대요.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아직도 대가 댁 하녀인 줄 알고 설치는 게 정말 꼴 보기 싫어요.”
“그래, 알겠다. 하지만 말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담영 아가씨? 그러니 거기까지. 그리고 피한 건 잘했다.”
“……네.”
만운의 칭찬에 말괄량이 담영도 수줍은 얼굴이 되었다. 순하게 대답하는 담영에게 잘했다고 웃어 주고 만운은 다음 용건을 꺼냈다.
“그런데 앞으로 며칠은 내가 바쁠 거야. 그러니 여기 나와도 날 볼 수 없어.”
“그래요? 음, 형님이 오시고 있기 때문인 거죠?”
담영은 그 영특한 머리로 쉽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
“네, 알겠어요. 어, 그러면 혹시 형님이랑 만나고 나면 만운 무장님은 도성으로 다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렇게 될 것 같다. 왜, 내가 보고 싶을 것 같으냐?”
“피! 흥, 가면 그만이지 왜 무장님이 보고 싶겠어요!”
속상함을 감추지 못한 담영이 빽 소리를 지르면서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만운이 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귀여운 담영 아가씨, 난 널 더 못 보면 서운할 것 같은데…….”
피식 웃은 만운은 담영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곧 표정이 굳어 버렸다.
빠르면 이틀, 어쩌면 그 이상 걸릴 수도 있지만 그 시간만 지나면 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헌데 저들이 형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형이라면 어떻게든 국경을 넘을 방법을 찾을 것이다.
제발, 넘어오기만 하면 된다.
초조하게 기원하는 만운의 눈에 다시 예전처럼 핏발이 서고 있었다.
* * *
“군관님, 군관님은 현령님을 싫어하시지요? 그래서 다른 편이신 거죠?”
“어허, 그게 무슨 소리냐?”
저의 맨 등을 만지던 여자가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군관이 그녀를 밀치며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밀쳐진 건 아랑곳없이 여자는 그에게 계속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군관님이 어제 펼쳐 보시던 그것이요. 저 그 여자 알아요.”
“뭐?”
“군관님은 그 여자를 잡으려고 하는 거지요? 그림만으로 알아보기는 힘들 텐데요. 저라면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뭣이? 네가 어떻게?”
“흥, 거의 십 년을 바로 옆에서 수발을 든 사람인데, 모를 리가 있나요. 군관님이 갑자기 도성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고, 그걸 건네받은 이유가 그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때문 아닌가요?”
“너!”
방금 전까지 몸을 섞던 여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어디까지 엿들은 거지?”
“아마 거의 다요?”
다 엿들었다는 말을 하는 여자는 그 정도야 대수롭지 않다는 양 교태를 부리며 웃기까지 했다.
남자는 저를 보며 웃는 여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 손에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여자의 목쯤 바로 꺾어 버릴 수 있었다.
허나 당장 목이 잡혀 죽을지 모르는데도 여자는 나른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민종성. 그는 이곳 현령인 민영회의 육촌으로 중간관리직의 군관이었다. 그는 애초에 이런 변방에서 말단으로 구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허나 행실에 문제가 있어 본가가 있는 도성에서 쫓겨난 몸이었다.
그리고 본인의 원래 버릇을 못 버리고 그와 비슷한 이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제 만난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 여자에게 알려져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의 본가는 고위직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대로 무관을 배출해 낸 가문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현왕을 섬기며 정치적 중립에 서 있는 입장이었다.
헌데 최사립이 정권을 장악하며 그들 가문은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정도를 표방하는 이 가문이 자신들의 말을 잘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실력 있고 무위가 높은 민영회가 거의 십 년간 도성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 변방에서 국경이나 지키고 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최사립 측에서 종성에게 손을 뻗쳐 왔다. 그 용모파기에 있는 이들이 국경을 넘어오기 전에, 혹은 만운과 만나기 전에 해치우도록 도와준다면 그가 다시 도성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다.
종성은 처음엔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서 무척 놀랐지만 지금 자신을 도성에 불러 줄 수 있는 것은 최씨 가문의 힘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 밀담을 한 것이 어제였다. 헌데 그 밀담의 내용을 이 여자가 다 엿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크나큰 문제였다. 가문은 항상 중립의 입장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왕세자의 편으로 돌아서 있었다. 만약 자신이 그들과 밀담을 한 것이 현령인 민영회나 본가에 알려지게 된다면 그는 가문에서 완전히 축출당하고 말 것이다.
종성은 여자의 목을 죈 손에 힘을 가했다.
그런데 여자는 숨이 막혀 캑캑거리면서도 저항 없이 그대로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종성은 제 목숨이 경각에 달렸어도 너무나 자신만만한 여자의 모습에 손의 힘을 풀어 주었다. 무엇보다 여자가 한 말에도 관심이 생겼던 것이다.
“너! 내가 그들을 만나는 걸 다른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느냐?”
“아니오. 그랬다면 군관께 이런 말씀을 올릴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
종성은 잠시 그녀를 노려보다가 손을 거두었다. 우선 여자의 말을 들어 보고 난 후 여자를 어찌할지 생각해 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자, 말해 보아라. 네가 정말 그 용모파기의 여인의 수발을 들었다는 말이냐?”
“네, 자그마치 십 년이라니까요. 십 년을 조금 못 채웠긴 하지만. 아무튼 그 긴 시간을 모셨는데 품삯은커녕 제 다리를 이 꼴로 만들어 쫓겨나고 말았지요.”
여자는 그 말을 하며 원독을 뿜어내고 있었다.
쫓겨난 사정이야 알 것 없지만 그녀의 다리가 상한 것은 저 말대로 그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이 지방 군관이고, 국경을 순찰하는 것은 일과이기 때문에 몰래 넘어오려는 이들을 찾는 일엔 최적이었다. 게다가 부인의 얼굴을 아는 이 여자가 자신을 돕는다면?
“너, 그럼 그 부인이 어떤 모습이든 한눈에 알아볼 자신이 있다는 것이냐?”
“네, 그렇다니까요! 십 년을 모셔 온 주인인데, 모르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뒷모습만 봐도 알아볼 정도이지요. 어때요, 이만하면 제가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종성은 마음을 정하며 그녀의 속을 떠봤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만 날 돕는 대신 네가 바라는 것이 있을 것 아니냐?”
“군관께서 도성에 가실 때 저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군관님께 저를 책임져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더 좋겠지만요.”
도중에 생긋 웃은 여자는 다시 종성에게 매달렸다.
“저는 이곳이 싫습니다. 전 거의 평생을 도성에서 살았는데, 이런 촌구석에서 살자니 정말 미칠 것 같단 말입니다. 그리고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운지요. 이번 겨울을 다시 이곳에서 맞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그것뿐이냐?”
“네, 그것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정말 다른 건 더 바라지 않습니다.”
여자는 나긋나긋하게 종성의 가슴을 쓸며 정말로 더 바라는 게 없다고 확인시켰다.
종성은 그녀의 손짓에 경계가 풀렸다. 저 정도의 바람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좋다. 그럼 오늘 밤부터 너는 나와 함께 국경 지대를 순찰하자. 알겠느냐?”
“네, 그녀가 제 앞으로 지난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자의 확답을 들은 종성은 다시 고개를 드는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아 저에게로 당겼다.
“그렇지만 아직 시간이 있구나. 우리 잠시만 더 있다 가자꾸나, 가실아.”
“네, 군관님!”
방금 전 제 목을 쥐던 사내에게 여인, 아니, 가실은 목 뒤로 손을 뻗쳐 그를 끌어안았다. 종성을 안은 가실의 눈이 표독스레 빛나고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바로 강희의 몸종이던 가실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종성과 그들의 밀담을 자세히 엿들었다. 그래서 그림 속의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그들을 왜 찾는지, 그들을 찾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들에게 잡히기만 하면 아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사라지리라.
암, 그래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이 꼴로 쫓아낸 앙갚음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로 자신은 도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빈 몸이라도 도성에 돌아가기만 하면 살길은 충분했다. 이렇게 제 몸 위로 쓰러지는 사내들을 받아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새 흥분한 남자가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가실은 익숙하게 비음을 흘리며 거짓 신음을 흘려 댔다. 잠시 후 끙끙거리던 종성이 숨을 헐떡이며 무너졌다.
두 남녀는 그렇게 다른 때보다 더 질척한 정사로 모종의 계약을 맺었다.
* * *
“미탁아!”
“걱정 마십시오. 저는 잡혀도 밀무역을 하는 상인이라 우기면 그만입니다. 반드시 살아서 뵈올 것입니다. 그러니 대감도 무사하셔야 합니다. 마님, 마님도 부디 몸 보중하십시오.”
미탁이 마지막 유언 같은 인사를 하고는 그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살금살금 기어 나갔다. 그러고는 거리가 벌어지자 일부러 기척을 내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기다, 쫓아라!”
이곳은 아직 송국 안이건만 쫓는 이들이 하는 말은 려국 언어였다.
상단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채운 일행은 보따리 상인인 척 분한 상태였다. 그리고 몇 번의 검문을 지나치고 몰래 잘 빠져나왔다.
하지만 결국 국경 인근에서 거미줄처럼 쫙 깔린 최사립의 사병들에게 걸리고 만 것이었다.
그들은 도망치다가 풀숲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저들의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때문에 미탁이 저들을 유인하기 위해 이렇게 빠져나간 것이다.
사람들의 기척이 모두 사라지자 강희가 크게 숨을 한번 내쉬었다. 허나 채운은 더욱 몸을 숙이고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잠시 후, 그들이 숨어 있는 앞을 지나가는 이들이 더 있었다. 미탁이 간 것이 혹시 유인이 아니었는지 뒤를 지키던 이가 더 있었던 것이다.
채운은 그들이 지나가고서도 한참을 더 숨어 있다가 숲을 나왔다. 이젠 행색을 더 꾸밀 것도 없이 아예 강희를 들쳐 업고 있는 상태였다.
채운은 장검 하나를 들고 아예 없는 길을 개척해서 걷고 있었다.
방향은 똑바로 국경을 향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아예 배제하고 가고 있었다. 때문에 길은 험하기 그지없었다.
강희는 자신의 몸무게가 험한 산길을 걷는 그에게 부담을 줄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채운은 쉴 때를 빼고는 한시도 그녀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들이 미탁과 헤어진 지도 꼬박 한나절이 지난 때였다. 산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채운이 등 뒤에서 까무룩 잠든 강희에게 말했다.
“강희, 여보, 드디어 다 왔소.”
“네?”
강희는 채운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 있는 작은 초소엔 횃불이 켜져 있었고, 그 앞을 병사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려국의 국경 초소다.
허나 두 사람은 그곳을 통과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들이 현재 찾아갈 곳은 중경의 현청이었지만 그곳에 도착하여 만운을 만날 때까지 그 누구의 눈에 띄거나 발각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 마지막까지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잠시만요, 서방님. 여기서 조금만 쉬다가 가셔요.”
강희가 등에서 내려서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채운을 올려다보는 모습에 그가 얼마나 고될지 걱정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렇지만 사실 그녀 덕분에 더 힘이 나는 것을 강희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럽시다.”
잠시 쉬기 위해 앉은 채운은 강희의 배에 손을 얹었다. 어젯밤에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배 안에서 아기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이였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이렇게 그녀의 배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안 움직여요.”
“엇!”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움찔하는 느낌이 있었다. 꽤 활발히 여러 번 움직이는 터라 채운은 태동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 신비로운 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순간에 귀하게 찾아온 자식이라.
태어나면 얼마나 더 귀할 것인가. 벌써부터 한껏 기대가 되었다.
쉬는 틈에 아기의 태동을 느끼고, 자신들도 간단히 요기를 한 두 사람은 다시 출발했다.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아 사방이 풀숲이어서 그들이 몸을 숨길 곳은 많았다.
초소를 피한 그들은 다른 쪽으로 빙 둘러 돌아서 가기 시작했다.
* * *
서호근은 영리한 사람이라 최필선에게 잡혔을 때 채운과 강희를 만난 사실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마진을 넘어 약천에 들어서서 헤어지고, 소식을 모른다고 한 것이다.
허나 기태성에게는 그런 이들을 본 적이 없다고 한 말이 걸리고 말았다. 처음에 한 거짓말 때문에 그는 최필선의 문초를 피할 수가 없었다.
사실 호근은 최필선에게 잡히면서 문초를 당할 것을 예견했다. 그 때문에 진실을 섞은 거짓으로 채운의 행방에 대해 실토했으나 최필선이 그대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호근이 모진 매를 맞는 문초를 당한 다음 날, 그는 창고 사이로 은밀히 날아든 서신을 받았다.
안에는 윤채운 대감이 그날 당장 려국으로 출발했으며, 자신들은 그의 수하들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대감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곧장 구해 주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최필선이 그를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틈이 생길 거라는 것이다.
호근은 그동안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는 그러기 위해 누엔 부인을 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다시 문초를 당하기 위해 끌려 나온 호근은 최필선에게 누엔 부인을 찾으라는 말을 했다. 최초에 윤채운 부부를 구한 누엔 부부에게 물으면 확실할 거라는 게 호근의 주장이었다.
누엔 부인이 뉘인가.
이곳 유라성에서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전 태수 장희여의 따님이 아니시던가.
이들이 정말 확인하러 그녀를 찾는다 해도 일반 백성도 아닌 누엔 부인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확인을 위해 가양성에 다녀오게 되면 그동안 시간은 확실히 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호근이 생각한 것만큼 시간을 벌어 주지 못했다.
유라성의 관리를 매수한 최필선은 굳이 가양성에 가지 않고도 호근의 말을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전서구를 통해 호근과 함께 있던 여인이 정말 기적처럼 찾은 장희여의 따님인 것을 확인했다.
장희여 쪽에 보낸 첫 연락의 답은 호근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확인은 해 주었지만 그래도 채운의 행방과는 관계가 없었다. 채운과는 약천에 오면서 바로 헤어졌다는 호근의 실토가 사실인지도 확인해야 했다.
최필선이 유라성에 보낸 연락은 총관이 처리했다. 장희여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딸을 찾은 건 사실이었고, 그녀에 대해 캐묻는 것이 아니라 서호근이 정말 그녀와 같이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냥 사실이라고 알리는 것으로 일을 처리했다.
허나 두 번째 날아간 전서부터는 수보가 맡게 되었다. 그들 부부가 원래 살던 곳에서 구해 준 사람에 대해 정중하게 묻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최필선은 거의 닷새 만에 답변을 받았다.
답변은 실망스럽게도 어떤 부부를 구한 적은 있지만 이후로는 잘 알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그토록 오래 걸릴 답변이냐 따지고 싶은 정도로 간결하고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고서도 얻은 답이 겨우 모른다는 내용이라니, 허망할 정도였다.
이로써 최필선은 다시 벽에 막히게 되었다. 직접 누엔이나 그녀의 남편을 만나 묻는다면 좋겠지만 거리도 문제였고, 그들이 너무 지체 높은 사람들이라 만난다 해도 이 정도의 대답 이상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는 새 벌써 열흘의 시간이 지났다.
곰곰이 고민하던 최필선은 다시 호근에게로 관심이 돌아갔다. 누엔 부부 말고 같이 있었다는 부부가 윤채운이나 성강희와 비슷하기라도 했다면 그쪽이라도 의심할 테지만 그것은 직접 봐서 확인한 일이었다.
허나 서호근이란 자는 필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문초를 하긴 했지만 매질을 조금 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굶기기만 했을 뿐 크게 상한 곳은 없었다.
결국 문초가 약한 것이란 결론을 내린 최필선은 오태령을 불렀다.
“곳간으로 가자!”
“네, 의원이라는 그자에게 가시는 겁니까?”
“놈에게 다시 물어야겠다. 제깟 놈이 의술을 한다는 놈이라면 제 팔이 귀한 줄은 알겠지.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손을 잘라 버리겠다고 해라. 그러면 실토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모른다고 하거나 답이 없으면 그냥 잘라 버려라!”
“네.”
호근은 그 길로 오태령의 부하들에게 끌려 나왔다. 누엔을 판 이후로 며칠은 조용히 있을 수 있었지만 며칠간 거의 먹은 게 없는지라 그들이 이끄는 대로 비척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납게 날이 선 최필선이 호근을 향해 다시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정녕 실토를 하지 않겠느냐!”
“대감,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정말 아는 대로 다 말씀을 올렸습니다.”
“역시 말로는 안 될 놈이로다! 저놈의 팔을 잘라 버려라!”
그러자 장정들이 호근에게 달려들어 양쪽에서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오태령이 다가와 칼을 빼 들었다.
호근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팔이 잘린 자신이 무얼 하겠는가. 의원이 아닌 자신은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제 권력과 욕망을 위해 남을 핍박하고 희생시키며,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 바로 최씨 일가였다. 지금 와서 실토를 하건 안 하건 저들의 행사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호근은 어차피 이렇게 끝날 바에야 저들이 찾던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놓친 사실을 알려 주고, 그 일그러지는 얼굴을 통렬하게 비웃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만큼 시간을 번 이상 최필선이 윤채운을 추격할 수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토? 실토를 하오리까? 좋소이다! 하지요! 나으리께서 직접 만났지 않소? 그날 본 그녀가 바로 대감의 부인이었소!”
“뭐라?”
“그녀의 이름이 성씨 성에 강희, 아니었소? 바로 당신이 밀친 그 부인이 성강희였단 말이외다.”
“거짓말 마라! 그녀의 남편이라 나타난 자도 다른 이였다!”
“거기에 대해선 나도 모르오. 아무튼 윤채운 대감과 그 부인은 그때까지 나와 함께 있었소. 허나 내가 여기 잡혀 온 이후 두 분은 바로 떠났으니, 지금쯤 려국으로 돌아갔을 것이오. 어디 쫓아가 보시지, 하하하!”
여태 매 한 대에 벌벌 떨며 두려움에 떨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웃음소리를 내며 호근은 통렬하게 비웃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뻗친 최필선이 소리쳤다.
“이, 이, 괘씸한! 저놈의 오른팔을 자르고, 왼쪽 팔, 그리고 다리도 모두 잘라라! 아예 저놈을 파묻어 버려!”
상관의 잔인한 명령에 오태령은 약간 이마를 찌푸렸을 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칼을 들어 올리는 순간, 갑자기 안채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불이야! 불이야!”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엇, 불이 크게 난 것 같습니다. 대감이 머무시는 곳에서 연기가 나고 있습니다.”
“뭐라?”
최필선은 제 방에서 난 불이라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오태령도 호근을 부하에게 맡기고 필선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멀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오태령의 부하는 건물 뒤로 너울거린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소리 높여 외치려는 순간 그는 목을 움켜잡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목에 화살이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엇?”
같이 있던 병사가 놀라며 소리를 지르려는 새 그의 목에도 단도가 꽂혔다. 한쪽에선 최필선의 집무실에 불을 지르고, 이쪽에서는 상진이 나타난 것이다.
“너무 늦게 구하러 와서 미안하오.”
호근을 구한 상진은 곧장 담을 넘었다. 여태 호근을 구할 기회는 있었지만 채운이 떠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를 방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저들이 벌이는 짓거리를 보며 최후의 시간이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계획을 서둘러 호근을 구해야 했던 것이다.
허나 호근이 상진과 함께 담을 넘는 모습을 본 하인이 있었다. 그 때문에 상진과 호근은 최필선의 부하들에게 쫓기게 되고 말았다.
최필선은 자신이 윤채운을 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이대로 놓쳐서도 안 됐다.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강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싫지만 명주성에서 대기하고 있는 셋째의 손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윤만운이 국경에 와 있다는 것은 바로 윤채운이 탈출할 경로를 지키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유라성에서 가장 출입하기 좋은 곳은 명주성이었으나 윤채운이 그곳으로 향할 리가 없다.
그래서 윤만운이 중경에 있는 것이다.
허나 아직 윤채운을 잡을 기회는 남아 있었다.
최필선의 손을 떠난 급보가 최사립의 셋째 아들 최필민에게로 날아갔다. 지금으로 봐선 윤채운이 중경으로 향한다고 보아야 했다.
필선의 급보를 받은 필민은 중경으로 갈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허나 만운이 차지하고 있는 중경에는 그들이 들어갈 명분이 없었다. 그 난데없는 도적단 토벌은 이를 위한 준비였던 것이 틀림없다.
중경은 오롯이 왕세자의 안마당과도 같았다.
결국 필민이 선택한 방법은 몇 명의 암살자를 파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왕세자의 안마당이 된 곳이라 해도 그곳에도 이용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민종성이었다.
* * *
만운은 일반 순시를 하듯이 작은 초소를 지나고 있었다. 그가 이끌고 다니는 수하들은 만운을 필두로 겨우 스무 명 남짓한 무리였지만 벼려진 기세는 남달랐다.
그들이 지나면 느슨하게 서 있던 병사들도 다들 바짝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중경은 원래 사람의 왕래도 드문데다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군기가 셀 필요가 없었다. 허나 만운이 온 뒤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자 종경의 군사들은 그가 어서 도성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형이 거의 왔을 거야.”
만운은 혼잣말처럼 속삭이고 있었다.
그는 혹시라도 형이 자신을 보게 되면 알아보기 쉽게 항상 말을 타거나 높이 서서 국경 쪽을 둘러보곤 했다. 그것은 형을 만나기 위해 벌인 일이었지만 덕분에 다른 도적이나 밀수꾼들이 몸을 사리게 되기도 했다.
헌데 만운이 작은 초소를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가실과 함께 있는 종성이었다.
그리고 종성의 뒤쪽으로는 최필민이 보낸 암살자 열 명이 은밀히 숨어 있었다.
그는 벌써 며칠째 가실과 놀아나기 위해 나온 것처럼 위장하고 각 초소들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에도 그가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초소를 지키는 병사들의 의심을 살 일도 아니었다.
허나 윤만운과는 마주치면 만들어 둔 핑계조차 소용없게 된다. 만운이 확실히 지나간 걸 확인한 종성은 가실을 데리고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왔다.
가실은 초소를 통과하는 사람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이틀 동안 허탕을 쳤다.
그러자 가실이 쓸모 있는 생각을 내놓았다. 국경 저쪽부터 그들을 찾으려 기를 쓰고 있을 텐데, 그들이 이렇게 드러나 있는 초소로 들어오겠느냐는 것이다.
그때부터 종성은 초소 외에 국경을 드나들 수 있는 길목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웬만한 길목마다 만운과 그의 수하들이 지키고 있긴 했지만 종경의 구석구석을 더 잘 아는 것은 종성이었다.
그는 그 점을 이용하여 만운의 눈을 피해 길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종성의 뒤를 암살자들이 쫓고 있는 것이다.
허나 만운의 눈을 피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형을 찾고 있는 그가 잠시도 쉬지 않고 국경 주위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성이나 암살자들은 길목들을 훑는 한편 만운을 피하느라 자신들 뒤를 따르고 있는 아이들은 무시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서든 불쑥 나타나 저희들끼리 놀고, 또 사라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렇게 놀고 있던 아이들 무리 중에는 담영도 끼어 있었다. 담영은 다 늦은 저녁이라 부모님의 야단을 들을 걱정을 해야 했지만, 나흘 전을 끝으로 다시 얼굴도 볼 수 없는 만운을 혹시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그가 가는 곳을 졸래졸래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담영의 이맛살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팍 찌푸려지고 말았다. 저만치서 꼴도 보기 싫은 그 여자가 보이는 것이다. 더구나 그 여자의 옆에는 재당숙인 종성 숙부가 함께 있었다.
“저 여자가 또…….”
직접 만나진 못해도 멀리서 만운을 쫓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담영은 가실이 보이자 흥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가실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꽥꽥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어?”
가실이 가리키는 방향엔 단지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가 작은 소년을 업고 있긴 한데, 그게 뭐 어떻다고 저리 난리란 말인가. 그런데 얼마나 고함을 지르는지 담영이 있는 곳까지 가실이 지르는 소리가 다 들리고 있었다.
“맞아요, 바로 그 여자에요! 저기 업힌 사람이 바로 그 여자라고요! 성강희!”
‘응? 소년이 아니라 여자라고?’
담영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을 포위하며 각자 칼을 빼 들었다.
그러자 소년, 아니, 여인을 업었던 남자도 그녀를 내려놓고서 자신도 칼을 뽑아 그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담영은 갑자기 여러 사람이 칼을 들고 우르르 몰려갈 때부터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저들이 누구건 가실이 난리를 치는 것만 봐도 이대로 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좋은 의도로 일을 벌이는 꼴을 못 본 것이다. 게다가 갑자기 나타나 칼을 빼 든 이들은 다들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떳떳한 사람들이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담영은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뛰기 시작했다.
만운이 이곳을 지나간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얼른 뛰어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담영은 숨이 차는지도 모르고 달리기 시작했다.
‘늦으면 안 되는데……. 만운 무장님, 너무 멀리 가 있지 말아요!’
얼마나 달린지 모르지만 담영은 다행히 곧 만운을 볼 수 있었다. 담영은 그가 보이자마자 목청껏 부르기 시작했다.
“무장님! 만운 무장님!”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만운이 말을 멈췄다. 목소리도 귀에 익은 어린아이의 것이어서 돌아보니, 뛰어오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엇? 담영 아가씨 아니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이런 곳에 다니면 안 된다고 했지? 그리고 지금은 해가 다 졌단 말이다!”
“그, 그게 아니라 저기에서 사람들이 칼을, 헉, 칼을 들고서 두 사람을 해치려고. 헉, 아무튼 싸우려 해요!”
숨이 찬 담영은 캑캑거리며 연신 손가락질을 했다.
한 마디 더 타이르려던 만운은 입을 다물었다.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기도 했고, 불현듯 어떤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만운은 아직 숨을 고르고 있는 담영을 들어 올려 자신의 앞에 앉혔다.
“어디냐?”
“저쪽이요!”
만운은 담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수하들도 그를 따라 말을 달렸다.
‘형이야? 정말 형이 온 거야?’
어제부터 수상한 사람들이 보이면 이렇게 달려가곤 했지만 이번엔 정말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형이 정말 온 거라면…….
지금 형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말이었다.
‘감히 누가!’
아이 걸음으로 뛰어온 길이었지만 담영이 알려 주려는 곳은 금방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한 걸음을 천 리같이 달리자 담영이 어떤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에요!”
그곳은 풀숲과 나무에 가려져 혼자 달려왔다면 그냥 지나칠 법한 으슥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선 정말 커다란 바위를 등진 남자가 예닐곱 명의 남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벌써 접전이 벌어졌는지 두 명의 남자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지만 바위 뒤쪽으로도 다른 두 명의 남자가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막 바위에 오른 한 남자가 뒤쪽에 숨어 있던 작은 인영을 공격하려 했다.
말발굽 소리가 주의를 끌었지만 암살자들은 포위를 풀지 않았다. 누가 오든 일단 눈앞에 보이는 목표를 반드시 죽이려는 것이었다.
“꽉 잡아!”
“하압!”
“꺄악!”
만운은 고삐를 바싹 죈 채 암살자들 사이를 타고 넘었다. 그의 기합 소리와 담영의 비명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사람들을 타고 넘은 말은 포위하고 있던 이를 한 명 넘어뜨리고, 암살자들과 그들을 혼자 상대하던 사람의 사이를 갈랐다.
말이 공중에서 뛰어내린 동시에 만운은 바위 위에서 공격하려던 이에게 단도를 던져 쓰러뜨리고 암살자들과 대치했다.
“형!”
만운은 포위한 이들과 대치한 채로 눈도 돌리지 않고서 소리쳤다. 빛도 거의 없어 어스름한데다 저렇게 후줄근하고 얼굴 가득 수염이 난 형이라도 그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왔다!”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