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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탈출 (29/38)

29. 탈출

최필선과 무장들이 떠나자 남자는 아직도 엎드려 있는 강희를 붙잡고 일으켰다. 그리고 사방에 들리도록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왜 아직도 처자빠져 있는 거야, 저치랑 헤어지면서 이렇게 돈도 생겼는데!”

강희가 배를 감싸고 움츠려 있는데, 남자가 작게 속삭였다.

“마님, 저는 대감의 사람입니다. 아직 저들의 눈이 있으니 조심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크게 지르는 소리와는 달리 부축하는 순간 속삭인 목소리는 정중했다. 남자는 강희가 일어서자 홱 떨치고는 먼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얼결에 그를 따라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알려 주지도 않은 방을 먼저 찾아 들어간 남자는 문 앞에서 망설이는 강희를 잡아당기고 급히 문을 닫았다.

“마님, 저는 정미탁이라 하옵고, 김상진 중랑장의 수하입니다. 대감께서는 지금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마님은 어서 짐을 챙겨 주십시오.”

채운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강희는 우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저들에게 잡혀간 호근이 걱정되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 의원, 서 의원은요?”

미탁이란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그를 구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우선 마님을 모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서요. 제발, 서둘러 주십시오.”

짐을 챙기는 강희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객잔에 갓 도착했던지라 여장을 풀 시간도 거의 없었기에 미탁이 대신 옷가지들을 마구 주워 담았다.

“조심해서 나오십시오. 뒷문으로 나갈 겁니다.”

강희를 뒤따르게 하고 조심스럽게 앞장선 미탁은 방금 전 최필선의 앞에서 건들거리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채운과 함께 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들은 이야기로 적절한 순간 나타나 그에 맞는 모습으로 강희를 구할 수 있었다.

허나 그의 말대로 미탁이 서호근을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대감과 마님의 안위였다.

미탁이 강희를 데리고 뒷문으로 나섰을 때, 그곳에는 상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님!”

상진은 강희를 보고는 순간 당신은 누구냐고 물어볼 뻔했다. 자신이 아는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그녀가 정말 강희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던 것이다.

강희에 대한 의심은 채운을 만나자마자 풀어질 수 있었다. 그녀를 모시고 몇 번이나 꺾어지는 골목을 지나 장군이 기다리는 곳에 당도하자 채운이 그녀를 끌어안았던 것이다.

“괜찮소? 많이 놀라지 않았소? 이런, 아직도 떨고 있지 않소! 걱정 마시오. 당신을 눈앞에서 놓친 이상 그들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소. 그리고 서 의원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어떻게든 잘 둘러댈 것이오. 또 우리가 반드시 구해 낼 것이오.”

“네, 네…….”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짠 강희는 채운의 소맷자락을 왈칵 움켜쥐었다.

병사들이 둘러싸며 호근에게 칼끝을 내밀던 순간, 내려앉는 그녀의 가슴은 자신의 걱정보다 채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저들에게 발각되고 만 것인가? 혹시라도 그가 잡혔을까?’

최악의 상상이 덮치며, 앞이 아득해졌다.

남편이 어디 갔는지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나서야 그가 무사한 것을 알았다. 허나 그녀는 아직도 충격에서 다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소매를 잡은 손이 계속 떨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을까.

채운은 할 수만 있었다면 그녀를 힘껏 끌어안아 계속 달래 주었을 것이다. 허나 수하들 앞이라 그리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는 강희가 저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보며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자신이 아닌 강희가 저들의 손에 떨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느꼈던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도 싫었다.

이성을 잃고 뛰쳐나가려는 것을 상진이 필사적으로 막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제야 그 자리에 다른 이를 보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미탁은 짧은 설명만으로 상황을 알아들고서 제 역할을 수행했다. 채운은 그가 무사히 강희를 데리고 객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호근을 생각하면 미안할 뿐이었다. 이런 순간에 대해서는 그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 있었지만 그가 정말 잡혀갈 줄은 몰랐다.

어디선가 호근에 대한 정보가 샌 것이 틀림없었다.

수보와 누엔 이상으로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를 구할 수 있을 때까지 그가 온전한 모습으로 버텨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채운은 강희에게 더 어쩌지 못하고 내심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보는 김상진은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언제나 엄격하고 표정에 크게 변화가 없는 상관이 크게 동요하는 것도, 그리고 이토록 살가운 면이 있다는 것도 처음 본 것이다.

언뜻 보기에도 민망하게 흉한 마님의 모습은 아직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 덕분에 그 매서운 눈의 최필선도 지나칠 수 있었으리라.

허나 이곳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이 되지 못했다.

그는 입을 열어 채운에게 말했다.

“어서 자리를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하지.”

그동안 상진이 유라성에서 한 일은 성의 지리를 익히고 최적의 탈출로를 모색하며, 최필선의 눈들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 성과가 발휘된 듯 그는 채운과 강희를 데리고 무사히 자신들의 모처로 향할 수 있었다.

허름한 장원의 대문을 두드리자 그 안에서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박하게 나간 상진이 아직 소식이 없어 이쪽도 불안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뉘시오!]

“나다, 김상진. 대감과 마님을 모시고 왔다.”

“네?”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채운과 강희, 미탁과 상진이 들어섰다. 네 사람이 들어가자마자 문은 재빨리 닫혔다.

“대감!”

“대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이더니 채운을 보며 반색했다. 수염과 머리가 많이 자라 모습이 가려진 상태였지만 그들은 채운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어서 안으로!”

상진의 재촉에 대문을 지키는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자신의 상관인 채운이 어디서 볼까 무서운 뚱뚱한 여인을 데리고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들은 채운이 웬 여자를 거의 안다시피 부축한 모습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보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본 상진은 그들에게 고개를 저으며 여인에 대해선 의문을 접게 했다.

그들도 여인보다는 기적 같은 지금이 더 중요했다. 그들이 찾고자 한 윤채운 대감이 정말 송국에 있었으며, 이렇게 무사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만 한 것이다.

“영천과 희태는요?”

안으로 들어가는 채운의 뒤에서 누군가 상진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최필선의 집을 감시하러 갔다. 나머지는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넓은 방이 하나 있었다.

단출한 방에는 가구 하나도 없이 한구석에 이불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허름하고 따로 수발을 드는 이도 없는 이곳에서 이들은 스스로 먹고 입을 걸 해결하며, 채운을 찾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이다.

“대감!”

“대감!”

“대감을 이리 무사히 뵙다니. 소장, 눈물이 다 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리 무사히 계셔서 감사합니다!”

대문을 지키는 이와 최필선을 감시하러 간 둘, 그리고 정보를 캐러 다니는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명의 무장들이 채운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이들이 이 먼 곳까지 오게 된 이유와 그동안의 고생을 짐작하고도 남은 채운도 잠시 목이 메어 왔다.

그러나 감격에 겨워 울 시간이 없었다. 그동안 고국과 왕세자 저하의 안위에 얼마나 가슴 졸이고 있었던가.

채운은 가장 먼저 왕세자의 안위부터 물었다.

“세자 저하는 무사하신가?”

“네, 저하는 무사하십니다. 그리고 최근에 국왕 전하께서 양위를 선언하셨습니다.”

“뭐라? 저들은 어떻게 하고 있단 말인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채운은 크게 놀라며 물었다.

“물밑으로 무산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폭파 사건에 발목이 잡혀 제대로 힘을 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폭파! 그래, 배를 폭파한 범인은 잡았는가? 그때 몇 명이나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는가?”

“암살단은 모두 죽었고, 범인이 잡혔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당시에 되돌아온 이는 배에 탄 선원들을 합하여 열일곱 명입니다. 나머지는…….”

채 잇지 못하는 다음 말은 다른 이는 다 죽었다는 뜻이었다.

채운은 마지막 순간 목숨을 함께 걸었던 선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원들과 병사들 중 반도 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렇군. 길석은?”

“그의 장례는 저하께서 직접 치러 주셨습니다. 시신을 찾지 못한 이들도 많아서 그는…….”

차마 시체라도 건져서 다행이란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는 강희가 흐느끼지도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길석의 죽음에 느끼는 죄책감에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님!”

“울지 마오. 울지 마시오.”

채운은 강희를 보듬고 토닥여 주었다.

눈에 익지 않은 상관의 다정한 행동에 무장들은 다들 눈길을 돌렸다. 사실은 보기 흉하기까지 한 마님의 모습이 민망하기도 했던 것이다.

“모두들 고맙다. 헌데 어떻게 내가 이곳 송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

“처음엔 나라 인근을 뒤졌습니다. 허나 한 달이 지나도록 부서진 배의 파편도 찾을 수 없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더군다나 최사립 측에서도 대감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방향이 송국이라 의심한 것입니다. 저희는 그들보다 불리한데다 저들과 제국 측의 방해가 있을 것이 뻔해 공식적으로 대감을 찾을 수는 없고. 해서 저들의 밀서를 훔쳐 대감이 송국에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훔쳐?”

“네! 저희가 훔치고, 만운 낭장님이 우리를 잡으셨지요!”

상진의 뒤에 있던 무장 하나가 상진 대신 대답했다. 상관 대신 답을 가로채는 무례였지만 그의 얼굴엔 채운을 다시 만난 기쁨만 한 가득이었다.

“계영, 네가 도적질이라도 한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하하, 밀서를 찾을 때까지 상단과 보따리상을 가리지 않고 수십 번은 털었습니다.”

계영의 즐거운 표정을 보아하니 그 안에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헌데 만운의 얘기를 들으니 그는 더욱 동생이 보고 싶었다.

“만운은 어찌 지내는가?”

아마 채운이 가장 먼저 안부를 묻고 싶은 이는 만운이었을 터였다. 허나 뒤늦은 질문에도 그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상진은 채운의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말해 주었다.

“만운은 아주 씩씩하게 잘 있습니다. 처음 한 달은 미친 듯이 대감을 찾아 헤매느라 몸이 축날까 걱정했지만 대감의 소식을 알게 된 이후로 안정되었습니다. 아, 그동안 한 서기님이 만운을 많이 거두셨습니다. 최사립 측의 밀서를 찾는 지략을 생각해 낸 것도 한 서기님이었습니다. 지금 만운은 다시 국경에 가 있을 것입니다. 저희도 이곳에 온 이후로 연락이 닿지 못하여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만운과 연락하여 돌아갈 길을 잡으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채운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만운의 얼굴이 생각난 것이다.

“그렇군. 만운이 국경에 와 있단 말이지.”

“헛!”

훈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누군가 헉하고 놀라는 소리를 질렀다.

비명을 지른 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는 강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위의 다른 이들도 강희를 보며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희의 얼굴이 쫙 찢어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녀가 길석의 이야기를 듣고 울었을 때 하얗게 칠한 분이 눈물과 함께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그 사이로 얼굴이 쩍 갈라진 것이다.

다들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자 당황한 강희는 고개를 숙였다. 채운은 그녀의 고개를 들고서 볼과 눈가에 붙은 얇은 무언가를 떼어 내고는 소매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본래 얼굴이 드러났다.

“이런, 그래도 얼룩덜룩하구려. 찝찝하니 당장 세안을 하시는 게 낫겠소.”

“네…….”

아직 얼굴에 변장한 흔적이 남아 지저분한 상태였지만 그녀의 미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강희가 일어서자 계영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물을 떠 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수건을.”

계영뿐 아니라 다른 무장들까지 서로 질세라 세수하러 나가는 강희의 수발을 들고자 나서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진 상진이 그들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채운은 빙긋 웃으며 강희에게 말했다.

“어서 다녀오시오.”

강희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는 아내를 보며 채운이 상진에게 말했다.

“저래서 여태 변장을 하고 있었지.”

“그러셨군요.”

상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도 새삼 부인의 미모에 놀란 것이다. 그리고 누구의 부인인지 알면서도 홀린 듯한 수하들의 표정을 보니 그녀의 미모를 가려야 했던 이유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헌데 몸집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안에 대나무로 틀을 만들었지. 괜찮은 변장이었지만 저들의 눈에 띄었으니 이젠 쓸 수 없을 것 같군.”

“네, 하지만 마님의 본래 모습으로 다녀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당장 부하들의 반응을 봐서도 강희는 너무 눈에 띄는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 용모파기 때문만이 아니라 저대로 다니면 온갖 치근대는 이들로 말썽이 생길 거야.”

“그렇겠군요.”

채운은 잠시 강희의 다른 변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호근과 세 사람일 때와 상진과 함께인 것은 다른 상황이었다. 상진과 움직이게 되면 모두들 남자들 속에 강희가 있는 것이 더 눈에 띌 수도 있었다.

“그렇군, 다들 남자이니……. 아내도 남장을 시켜야겠어.”

“네, 좋은 생각입니다.”

사실 그것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상진은 처음 채운이 조난당했다는 사실에 그녀를 무척 원망했다. 아직 강희에 대한 선입견을 벗지 못한 상태라 설혹 그녀를 찾는다 해도 짐이나 될 것이라 넘겨짚은 것이다.

헌데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를 흉하기까지 한 변장으로 가린 것만 봐도 그녀가 새롭게 보였다. 소문처럼 허영과 이기심에 가득한 여인이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 무엇보다 채운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이전의 그런 생각들을 모두 접지 않을 수 없었다.

강희의 다음 변장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 사이, 그녀가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 채운과 상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무장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세수만 하고 온 것인데도 강희는 빛을 발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과연 남장이 어울릴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어쨌든 강희의 변장을 주제로 무겁던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허나 귀환길에 오르기 전에 중요한 일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이대로 우리만 떠날 수는 없다. 서호근, 그를 구해야 한다.”

채운의 말에 강희도 강한 긍정의 뜻으로 채운의 손을 맞잡았다.

서 의원을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저들의 손에 잡혀 갔으니, 무슨 수난을 당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그러나 상진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서호근이요? 그는 누구입니까? 어떻게 대감과 일행이 된 것입니까?”

“그는 의원이다. 내가 처음 송국에 왔을 당시에 부상을 당했었다. 우리를 구해 준 건 그 어촌의 부부였지만 나를 직접 치료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준 건 서 의원이야.”

이들은 최사립 측이 추적하기 전에 채운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서호근이 그런 이라면 이들 모두의 은인이라 할 만했다.

채운은 더욱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를 찾기 위해 최필선이 직접 이곳까지 왔다. 서 의원을 잡은 것을 보면 서 의원을 나를 찾을 실마리로 여기는 것이 틀림없어. 그를 이대로 뒀다가는 그들의 손에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가 상하기 전에 구해야 해.”

상진은 채운이 부상을 당했으리라는 건 짐작했지만 그 말을 직접 듣게 되자 가슴이 철렁했다. 현재 그의 모습은 무탈해 보였으나 아직 상처가 있을 수도 있었다.

“많이 위중하셨습니까? 지금은 어떠십니까?”

“지금 나는 괜찮다. 그는 의관 출신의 뛰어난 의원이야. 나를 구한 공도 있지만 그 재주도 출중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그를 구하려다가는 대감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상진도 채운의 뜻에는 공감했지만 지금 당장은 뾰쪽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채운은 단호했다. 그는 호근을 저대로 버려두고 갈 생각이 없었다.

“그가 잡힌 것은 나 때문이야. 은인인 그를 이렇게 버릴 수는 없어.”

채운의 말이 맞았다. 은인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다만 상진은 채운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우선 대감은 먼저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대감이 계신다 해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마님을 생각하셔야죠.”

“……!”

강희를 생각하란 말에 채운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호근도 중요하지만 강희를 다시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더구나 강희는 임신한 몸이 아닌가. 가장 안정적으로 몸을 보존하여야 할 이때, 더 이상 그녀를 불안하고 위태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상진이 그를 다시 설득했다.

“제가 남을 것입니다. 허니 대감은 먼저 떠나십시오. 미안하지만 저들의 눈이 의원이라는 그에게 집중되어 있는 지금이 이곳을 벗어날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가 그를 반드시 구할 것입니다. 저를 믿고 대감은 돌아가십시오. 저하와 만운, 그리고 백성들이 대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감!”

“대감!”

“대감!”

무장들은 한목소리로 채운에게 떠날 것을 부르짖었다. 망설이는 그에게 상진이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제가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감!”

“……너의 목숨도, 그의 목숨도 상해서는 안 된다.”

채운도 상진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자신이 직접 호근을 구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었다.

“부탁한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채운은 상진을 손을 굳게 맞잡았다.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시겠지만 지금 떠나시는 것이 적기입니다. 대감을 찾는다면 바로 떠나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리가 한꺼번에 떠나면 눈에 띄지 않겠는가?”

“관문을 나설 때는 각각 따로 나갈 것입니다. 관문 밖에서 성 대감의 상단과 합류하여 떠날 계획입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곧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것입니다. 그때까지 식사도 하시고, 조금이나마 쉬십시오. 나머지는 저희가 다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세.”

채운을 찾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끝나는 것이다.

상진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영천과 희태, 계영이 이곳에 남는다. 그리고 미탁이 대감과 함께 갈 준비를 지휘해라. 나머지 무장들과 상단에도 계획한 대로 알리고 서둘러라!”

“네!”

강희의 미모에 몽롱해 하던 것도 잠시, 방을 나서는 무장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어리기 시작했다.

송국과 밀착한 최사립인지라 이곳은 용담호혈이었다. 빨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부인, 지금 당장 떠날 수 있겠소? 아까도 너무 놀라 충격을 받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소. 이럴 때 서 의원이 옆에 있어야 하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서방님. 걱정 마십시오. 놀라긴 했지만 서방님이 무사하셔서 괜찮아졌습니다.”

상진은 채운의 목소리가 유난히 걱정스러운 듯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마님의 안색이 아직 좋지 않아 보였다.

“혹, 마님께서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채운은 잠시 머뭇거리다 상진에게 말해 주었다.

“지금 아내는…… 임신 중이다.”

“네?”

“이제 약 넉 달 정도 되었어. 아직 완전히 안정기에 접어든 것이 아니라서 원행에 극히 주의해야 하네.”

상진은 입을 딱 벌린 채 강희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의 뜨거운 눈빛에 강희는 채운의 뒤에서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좋다면 축하부터 할 텐데……. 앗!’

무심코 그런 생각을 떠올린 상진은 바로 인사부터 올렸다.

“경, 경하드립니다, 대감.”

“경하는 돌아가서 마저 받지. 무장들이 알면 부담스러워 할 수 있으니 함구해 주게.”

“앗, 하지만…….”

“조금 쉬고 바로 출발하려면 서둘러야지. 준비해 주게.”

“네? 네.”

대답을 한 김상진이 비척거리며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강희가 임신했다는 말에 그는 꽤나 놀라고 있는 것 같았다.

상진이 나가자마자 채운은 당장 몸을 돌려 강희를 끌어안았다.

“아직도 떨고 있는 것 같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서방님이 무사하신 것만으로도 다 좋아졌습니다.”

강희는 객잔에서 자신과 마주하던 이가 최필선이라는 건 여기 오면서 알게 되었다. 그의 앞에서 뜨겁게 달궈진 땅바닥에 엎드렸던 순간엔 몸서리가 쳐졌지만 채운의 든든한 품 안에 안기자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소. 내 생에 결코 당신을 잃을 수 없다는 것이오. 결코 당신을…….”

채운은 그예 다시 입을 맞췄다. 말로 다 표현 못할 감정이 입술에서 입술로 전해지고 있었다.

강희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꿈같이 달콤한 순간을 만끽했다.

송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때가 오리라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불운한 일로 오게 된 곳이었지만 그의 사랑을 받는 행복을 맞이한 곳이기도 했다.

처음 말했던 일 년이란 기한은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만약 이곳에 오는 일이 없었다면 그 이혼이 성립되었을지 어땠을지 지금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그를 떠날 생각을 굳히고 강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의 뜨거운 숨을 들이쉬고 감히 바랄 수 없었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극적으로 두 사람만 동떨어진 곳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이제 돌아가는구나.’

그렇다고 이곳이 좋을 수는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이렇게 쫓기며 마음 졸이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다만 계획과는 다르게 자신들끼리 떠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서 의원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정말 걱정돼요.”

“상진이 그를 구한다고 약속했소. 내가 남아 있는 것보다 빨리 떠나서 귀환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오히려 서 의원을 구할 수 있는 길일 것이오. 그러니 그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서두릅시다.”

“네, 믿겠습니다. 모두들, 부디 무사히 오기를.”

“그렇소, 그래야지.”

채운은 힘들고 많이 놀랐을 강희가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지금부터가 추적을 피하는 일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 당분간 수하들과 함께하는 동안엔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질 수도 없을 것이다. 채운은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의미로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상진이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알릴 때까지 한참 동안 입맞춤을 나누었다.

* * *

최필선 측에서는 호근이 채운과 함께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바로 그날이 관문을 벗어나기에 최적기였다. 약천에서부터 강희가 계속 같은 변장을 하고 있었고, 그 변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의 나라에 와서 죄인처럼 쫓기는 신세가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었지만 귀환을 하고 모두 다 잡으면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귀환길의 시작은 순탄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유라성을 빠져나온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중간에 쉬는 날도 없이 일행 모두 강행군을 하면서 목적지를 곧 눈앞에 두게 되었다. 국경과 접하고 있는 귀와성에 들어선 것이다.

채운은 강행군을 하는 동안 강희의 몸 상태가 걱정되었지만 그녀는 자신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를 챙기고 여정을 독려했다.

앞으로 이틀만 더 지나면 국경을 지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경에 다다르기 직전이 가장 위험하기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쉽게 보내지 않겠다는 듯 최필선이 있는 곳에서도 일이 터졌다는 연락이 왔다.

미탁이 상단 전서구를 통해 상진에게서 받은 연락을 알렸다.

“쫓기고 있군.”

“네, 이번이 마지막 연락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 의원은 무사히 구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국경에 도착하면 그를 구출하기로 되어 있는데 먼저 구했다는 것은 그에게 이변이 있었다는 말이야.”

“네, 자세한 상황은 현재 알 수 없습니다만, 그 때문에 대감도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제부터 상단과 헤어져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를 구출하는 것으로 저들도 그가 대감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니, 대감이 국경으로 향한 것도 짐작할 터입니다. 저들은 대감이 국경에 다다르기 전에 찾기 위해 발악을 할 것입니다.”

채운도 그 의견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 그럴 것이다. 만운은 종경에 있다고 하였지?”

“네, 일부러 교역이 활발한 명주성을 피해 그곳에 계신 것이지만…….”

“저들이 알게 된 이상 만운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유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그곳을 지나는 길도 안전하지는 않을 것이야.”

저들은 국경 너머에서 자유롭지만 만운은 국경을 넘을 명분이 없었다. 송국은 갑작스레 별안간 오게 된 곳이지만 벗어나는 것 또한 쉽지가 않았다.

“이제부터 일행을 분산하여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무장들을 반으로 나눠 마님은 그대로 상단과 함께 움직이고, 나머지는 대감과 가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럴 수는 없다. 만약 아내가 저들에게 들키면 내가 잡히는 것과 같아. 아내는 나와 함께 움직여야 해. 다만 인원을 나누는 건 맞다. 나와 아내만 따로 가도록 하지.”

미탁은 강희를 자신과 하나로 놓는 채운에게 다른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며칠 안 되는 기간 동안 본 것이지만 마님은 소문에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 군에 보급되고 있는 비누를 마님이 만들었다는 말도 떠돌았는데, 그것이 마님을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 위험한 때 두 분만을 떼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건 안 됩니다! 반드시 대감을 지척에서 모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은밀히 움직이려면 사람이 많은 것보다 적은 수가 움직여야 해.”

“그럼 무장 두 명이라도…….”

“한 사람만 함께 가도록 하지.”

“그럼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겉보기에 건달처럼 보이기 쉬운 미탁은 채운이 소매치기를 하는 어린 소년을 발견하고 수하로 받아들인 이였다.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그는 채운에게 받아들여진 후에도 그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이였다.

그런 그를 떼어 놓고 가기는 어려웠다.

끓는 듯한 미탁의 눈을 바라보던 채운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미탁을 필두로 세 사람은 이때부터 일행과 헤어져 따로 움직이게 되었다.

채운과 함께하던 여덟 명의 무장 중 한 명만 옆에서 모실 수 있다는 말에 서로 자신이 모시겠다며 다투려 했지만 이미 결정 난 일에 다들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아직 무사한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떠나는 미탁과 채운을 편한 얼굴로 볼 수가 없었다. 그들도 뒤따르긴 하겠지만 제일 위험한 곳에서 나뉘게 되었으니, 상황이 정말 좋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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