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림자 끝의 추적자
송국에 들어온 김상진 일행은 마진에서 허탕을 치고 다시 유라성의 모처에 모여 있었다.
김상진 일행은 성도종 대감의 주선으로 작은 장원을 빌려 물품을 실어 나르는 척하며 유라성 곳곳을 헤집고 있었다. 성 대감의 상단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면 좋겠지만 그러다 보면 최사립의 밀정들의 눈에 반드시 띌 것이다.
그리고 이미 상단 쪽에도 그들의 눈이 심어져 있었기에 접촉도 꺼리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채운이 이곳으로 오게 되면 성 대감의 상단을 피해야 할 텐데, 그것을 알릴 방법도 없었다. 어디 있는지는 고사하고 무사한지조차 알 수 없으니 이쪽도 속이 탈 뿐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유라성에 모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최사립의 아들인 최필선이 와 있는 것을 알아냈다.
“최필선?”
“그를 아십니까?”
도성 밖에서 막사도 없이 훈련을 받던 훈련병에서 어엿한 병사가 된 고영천은 김상진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발하는 수하로 자라 있었다.
발 빠르고 눈치껏 움직이는 영천이 최사립의 밀정의 꼬리를 역으로 잡아 누가 채운을 추적하는 지휘를 하고 있는지 알아 온 것이다.
최사립의 둘째 아들 최필선.
영천의 질문에 김상진은 이마를 찌푸렸다.
“잘 알다마다.”
최필선은 최사립의 가장 충성스런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이로, 지략이 뛰어나고 집요하며, 또한 그만큼 악랄한 자였다. 그에 대해 아는 바를 몇 가지 떠올릴수록 상진의 미간은 더 찌푸려졌다.
“최필선이라……. 골치 아프게 되었어. 대감께서 이곳으로 오시는 것도, 또 무사히 벗어나는 일도 힘들게 되었군.”
심각해 보이는 상진에게 영천은 다음에 보고할 말 또한 좋지 않은 소식이라 송구할 지경이었다.
“지금 유라성의 관문에는 최씨 가문의 밀정들이 와글거리고 있습니다. 저도 미행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뭣이?”
“걱정 마십시오. 미행은 떨쳤습니다. 헌데 저들과 같은 공간에서 몰래 대감을 찾으려니, 더욱 운신이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도, 대감을 찾고 있다는 것도 들켜서는 안 된다. 만약 저들이 알게 된다면 무슨 명목이든 우리의 발목을 잡으려 할 것이다.”
“네.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영천이 거듭 다짐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중랑장님!”
그때 방으로 급히 들어서며 상진을 부르는 이가 있었다.
그는 상진이 영천과 함께 데려온 미탁이란 인물로, 손재간이 좋은 자였다. 좋은 말로 손재간이지, 그는 사실 소매치기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재주는 이곳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바로 최씨 가문 밀정들의 정보를 터는 데 그 기술이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허, 이곳에선 그냥 나으리라 부르라 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헌데, 이것을 좀 보십시오!”
미탁이 품에 든 종이를 펼쳐 보였다. 거기엔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용모파기가 아닌가? 이걸 왜?”
“저들이 품에 고이 갖고 다니던 것입니다. 관문에서 이걸 펼쳐 보며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비교하고 있는 걸 보고 제가 몰래 빼내 온 것입니다.”
“그래?”
저들이 갖고 있는 용모파기는 대감과 성 부인의 것인 걸로 알고 있었다.
헌데 대감과 부인을 찾는 일에 다른 사람들의 용모파기라니?
“왜 이들을 찾는 것일까?”
“분명 대감을 찾는 것과 연관이 있는 일일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상진의 물음에 미탁이 대답했다.
“저는 이것을 다른 이에게서 훔친 것이지만 제가 관문에서 본 이 용모파기로 사람을 찾는 자의 뒤에는 대감의 용모파기도 함께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최씨의 밀정들이 각자 이것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저들은 이 사람들을 대감과 같은 일행으로 여기고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탁의 말에 상진도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감이 잡혔다.
“그럼 이들이 대감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럴 수 있습니다. 대감을 찾을 수 없으니 이 사람들을 찾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이 사람들을 중요하게 찾는 걸 보면 우리도 이 사람들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사립 측과는 달리 사람도 부족하고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진 일행은 무작정 채운을 찾기만 했다. 이렇게 가끔씩 최씨 밀정의 뒤를 터는 것 말고는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없었다.
그러니 더욱 이 정보를 유용하게 이용해야 했다.
“그럼 모두들 이 용모파기의 사람들을 숙지하도록.”
“네!”
그 용모파기는 호근과 누엔, 수보의 것이었다.
상진 일행도 이제 호근과 누엔, 수보를 찾기 시작했다.
허나 용모파기는 특징을 잡아 놓은 그림일 뿐 자세한 초상화 같은 것은 될 수 없었다. 얼굴을 아는 채운과는 다른 것이다.
낯선 남의 나라에서 어디 있는지도 모를 채운을 찾는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이 최씨 밀정들을 피해서 해야 하는 일이라 더욱 힘들었다.
채운이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은 갖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었다.
상진과 수하들은 또 무작정 채운을 찾기 위해 관문을 돌았다.
* * *
최필선이 송국에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나면서 이곳 관리들의 도움을 더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송국의 관리들도 처음엔 최사립의 금력에 움직여 도움을 줬지만 명분도 없이 남의 나라 장군을 찾는 일이 길어지자 난색을 표했다. 죄인도 아닌 이를 이렇게 찾아다니다가 자칫 국가 간의 문제로 불거지면 낭패가 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만일 왕세자 측에서 그를 찾는다면 방해를 할 수는 있지만 이 정도에서 송국 관리들은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최필선은 이제부터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채운을 찾아야만 하게 되었다.
허나 실마리를 찾은 이상 추적할 단서를 얻게 되었다.
최필선은 기태성의 제보를 끝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던 밀정들을 다시 유라성으로 모여들게 했다.
기태성의 제보는 마진을 끝으로 뜬구름 같았던 소식들에 비해 채운을 쫓는 가장 유력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가 만났다는 려국 출신 의원은 여러 가지로 의혹이 많이 가는 이였다.
몇 달간 계속 채운을 추적하는 데만 온 힘을 써 온 최필선은 그 의원이 채운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라고 생각했다.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사실들이 많았지만 그를 잡으면 채운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윤채운이 귀환했다는 소식이 없으니, 그는 아직 송국에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뤄 볼 때 그는 아직 유라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반드시 이곳을 지날 것이야. 허니 이곳을 지키고 샅샅이 뒤져라. 그리고 기태성이 봤다는 그 의원 놈부터 찾아. 그 의원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 아니, 놈이 그를 숨겨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윤채운과 그 의원 놈을 찾아!”
“네!”
최필선의 명령에 오태령과 휘하의 병사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도 매일 관문에서 똑같은 사람들만 찾다가 새로운 소식을 접하며 활기를 얻은 것이다.
최필선은 수하들이 나가는 걸 지켜보며 며칠간 제대로 다듬지도 못한 수염을 쓸어 넘겼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반드시 놈을 찾는다!”
최필선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자주 본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그의 얼굴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젠 옆에서 지나치기만 해도 그를 당장 알아보고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채운은 아버지가 그토록 껄끄러워 할 만큼 목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지금 본국에서는 아직도 폭파된 해적선을 놓고 말들이 많았다. 그 일과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계획하고, 왜의 해적선까지 끌어다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그 일을 아버지와 연루시키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증인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만약 증인이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윤채운까지 합류한다며 일이 자칫 위험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이후로 송국으로 와야 해서 더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해 답답했지만 최필선은 지금 자신이 맡은 일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민심의 향방을 쥐고 있는 윤채운을 잃은 왕세자는 가장 큰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윤채운을 결코 려국에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이 일을 성공시켜야 셋째의 야욕도 부술 수 있을 텐데…….’
치고 올라오려는 셋째를 꿈도 못 꾸게 만들려면 자신은 이 일을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채운을 찾는 일에 더욱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 관원이 아니기에 유라성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뒤질 수는 없었다.
허나 관의 협조를 받아 수상한 일행은 모두 뒤질 수 있게 손을 써 놨다. 그러기 위해 유라성 관부에 이곳 상단의 이익금을 모두 바쳐야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윤채운은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하리라.
채운을 찾기 위해 흩어졌던 밀정들이 다시 유라성으로 모이는 데 거의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들이 모이는 중에도 유라성에서는 관문과 여각, 의방들을 뒤졌지만 아직 들어온 소식은 없었다. 그들은 특히 의방을 중점으로 뒤지고 있었다. 채운이 추적이 시작되기 전에 려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이유가 그가 크게 부상당한 것 때문이라 짐작하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그 의원의 존재가 유독 더 걸리는 것이다.
지금 유라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그의 사람들이 거의 한 곳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태성은 오태령과 함께 가양성과 이어지는 가장 큰 관문에 배치되었다. 그가 그 떠돌이 의원의 얼굴을 가장 확실히 아는 자였기 때문에 그 의원이 유라성에 오기만 하면 그를 잡을 수가 있었다.
허나 기태성의 제보를 끝으로 한 달이 지나는 동안 다시 소식은 끊겼다. 서호근이라는 의원이 어디를 갔는지 아는 사람을 볼 수 없었고, 그 의방에 있었던 사람들의 행적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최필선은 다시 이전처럼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허나 아직 본국에서 윤채운이 귀환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으니, 그는 송국에 있다. 혹은 영 엉뚱한 방향을 짚고 들쑤시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폭풍에 정말 바다에서 죽은 것이라면…….
‘그럼 이 모든 일들이 모두 헛수고였다.’
최필선은 얼핏 든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그가 살아 있을 것이라 하셨다. 그 작은 마을에서 발견된 배에 그가 타고 있었고, 살아 있다고 확신하셨다. 그러니 엉뚱한 생각은 말고 다시 그를 찾아야 했다.
채운뿐 아니라 감쪽같이 사라진 의원을 찾는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 했다. 설사 채운이 이미 물귀신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의원은 분명히 존재하는 이가 아니던가.
“여봐라, 누가 게 있느냐!”
“네!”
그의 부름에 하인 하나가 재빨리 들어왔다.
최필선은 들어온 하인에게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도록 일렀다. 마음이 바쁘고 달아오른 그는 더 이상 장원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관문을 순시하듯 도는 것이다.
오늘도 최필선은 일과처럼 송국의 관리인 양 그들의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채운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뜨거운 한낮의 더위가 후끈하게 달아올랐지만 채운을 찾는 그의 눈길은 매섭기만 했다.
아직 국경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지루하고 반복되는 추적이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채운을 찾는 일을 계속했다.
* * *
수보가 배려해 준 마차와 객잔, 길잡이 겸 마부는 채운 일행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어 주고 있었다.
비록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준 것이라지만 임신한 강희가 안정기에 접어들 동안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되어 주기도 했다. 이제 서로 각자의 길로 헤어지게 되었으나 그들 부부는 분명 좋은 인연이었다.
강희와 채운의 가장 큰 갈등이 해소되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고, 관계도 안정된 상태였다. 다만 강희는 재영 때문에 아직 생각할 거리가 남아 있었지만 이곳에서만은 그 고민을 잠시 밀쳐 두고 싶었다.
지금은 집에 돌아가는 일이 더 급한 것이다.
수보가 객잔에서 얼마든지 머물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마부에게 떠날 날짜만 통보하면 일행은 그쪽 상단과 함께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장희여의 상단과 동행하는 한 그들을 건드릴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덕분에 유라성까지 가는 길의 안전과 신분의 보호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나 유라성부터가 문제였다. 수보도 아직 그곳에서 힘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곳까지 무사히 스며들 수 있는 것부터가 얼마나 다행인가.
려국에서 최사립의 밀정이 아무리 많이 왔다 한들 이곳은 송국이다.
이 땅을 자신의 손바닥처럼 뒤지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그들이 추적하는 한 유라성을 벗어나는 것과 국경에 접어드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객잔에 머문 지 이틀째에도 세 사람은 향후 귀환 방향에 대해 계속 의논하고 있었다. 유라성까지는 수보의 도움에 기댈 수 있다지만 그 이후부터는 그들의 힘으로 경계해야 했다.
호근이 송국에 있은 지 오래되기도 했고, 많이 돌아다니기도 해서 귀환의 행로를 잡는 일은 주로 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고 있었다.
“이곳에서 유라성까지의 거리는 대략 열흘 정도입니다. 그리고 유라성에서 국경까지 다시 열사나흘이 걸립니다. 이것은 도중에 쉬는 날 없이 주파했을 때의 시간입니다. 날씨나 기타 돌발 상황을 감안하면 약 한 달의 시간은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예상하던 것이지만 채운은 거기에 고려할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지금 아내가 임신 중이라 무리한 일정은 잡을 수 없을 것이오.”
“네, 그것을 감안하여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무래도 지금 저 사람들과 함께 움직인 것처럼 유라성에서도 려국으로 향하는 다른 상단과 동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러는 게 좋겠소.”
상단이라, 수보는 일부러 생각해서 자신들을 성 대감의 상단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만 일행은 오는 도중 오히려 그곳을 피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저들이 그 외진 곳까지 추적해 온 이상 성 대감의 상단 또한 그들의 눈이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부터는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유라성에서는 기태성처럼 무장님의 용모파기를 가진 자가 더 많이 득시글거릴 거라 생각됩니다. 이제 유라성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제가 머물 곳을 수소문해 두겠습니다.”
“그리해 주시오. 서 의원께 계속 신세를 지게 되었소.”
채운은 고마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러자 호근이 제 머리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허, 참, 무장님도. 그것 다 제가 여기에…….”
“적어 두고 있다는 거 알고 있소. 그러니 잘 적어 두시오.”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운이 호근의 말을 대신 끝내 주었다. 그러자 호근의 입이 쭉 앞으로 튀어나왔다.
“엇, 제 말까지 미리 다 하시면 저는 어쩌라고…….”
“하하! 그리고 부인, 당신의 용모파기도 있었다 하니 당신도 그 변장을 계속해야 할 것 같소.”
채운은 객잔 안에서조차 계속하고 있는 강희의 풍만한 복장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거치적거리는 옷자락에 걷는 것도 불편할 텐데도 강희는 여태 그에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또한 여인네가 자신의 용모를 망가뜨리는 일이 달가울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강희는 그런 불만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미안한 듯 쳐다보는 채운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가장 어려운 고백을 한 강희는 그에게 종종 웃어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처연한 모습보다 그리 웃는 그녀는 또 얼마나 예쁜지.
채운은 지금 중요한 논의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니면 호근을 당장 쫓아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그의 마음을 모른 채 호근은 논의를 이어 갔다.
“만약의 상황에도 대응하려면 제가 말씀드린 관계도 계속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부인은 저의 오랜 스승님의 따님이시고, 무장께선 그분의 말썽이 많은 사위십니다.”
“알고 있소.”
“네, 허면 제 이름도 새로 정해 둘까요?”
강희가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할 겸 한마디 제안했다.
그러자 호근은 얼마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생각나는 이름을 답했다.
“이름이요? 하하, 그럼 송연희라고 할까요?”
송래연.
당장 연인의 이름을 부를 수 없으니 그녀의 이름에다 강희의 이름을 넣어 즉석에서 지어낸 것이다.
“송연희. 네, 필요하면 이 이름을 말하겠습니다. 허면 고향은 어디로 할까요?”
“제가 살던 곳이 북계도의 서경이니, 그곳으로 하시지요. 그리고 스승님의 함자는 송씨 성에 현 자, 성 자 쓰시고…….”
호근은 만약의 상황을 위해 꾸미던 강희의 신분에 래연의 이름과 가족들, 그들의 사는 환경까지 줄줄이 읊고 있었다. 장난처럼 이어지는 설명에 자신의 연인의 모습을 자세히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처럼 그녀의 이야기를 하는 호근은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채운과 강희는 호근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그리고 려국에 돌아가면 호근이 그녀와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은 누엔과 수보처럼 호근도 진정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세 사람은 추적자의 존재도 확인했고, 용모파기도 있다는 것을 알고서 더욱 경계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허나 다른 이도 아닌 최사립의 이인자 최필선이 이곳까지 와서 그들을 찾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최필선이 새로 배포한 용모파기에 기태성의 설명을 곁들인 호근의 얼굴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행로를 정한 세 사람은 이틀 후 객잔을 떠나 유라성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자 드디어 유라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만약 이들이 자신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던 관문을 태연히 지나친 것을 알게 된다면 최필선은 분명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최필선은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유라성에는 그가 사방에 심어 둔 눈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짜여 있었다. 엄청난 사람과 돈을 써서 뿌려 둔 사람들 중 하나가 기어이 호근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들이 탄 마차는 상단 일행과 헤어져 호근이 아는 외진 객잔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는 마부가 상단과 합류하며 헤어지면서 호근이 몰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마부석에 타고 있는 호근을 누군가 보게 된 것이다. 채운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들의 끈질긴 추적이 성과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호근을 찾았다는 소식은 최필선에게 득달같이 전해졌다.
“서호근이라는 이를 찾았다고 합니다!”
“뭣이?”
아직 채운을 찾았다는 소식은 들은 것이 없었다. 마진에서 본 사람도 채운과 비슷한 사람이라 짐작될 뿐 확신한 적이 없었다. 확실한 사실은 려국에서 밀려온 배가 있었다는 것과 그 배에 타고 있던 누군가를 치료했다는 의원이 있다는 것.
그 의원이 채운을 확인하고 찾을 수 있는 모든 열쇠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를 찾았다는 것이다!
“가자!”
최필선은 수하들을 이끌고 호근을 발견했다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만약이라도 채운이 함께 있을 수가 있으니 그 상황에 대비하여 그가 데리고 있는 수하들을 모두 이끌고 움직였다. 윤채운의 무위를 생각하면 십여 명은 우습게 해치울 수 있었다. 허나 계집이 함께 있다면 인질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제발, 윤채운이 있어라. 그가 있어야 한다!’
최필선은 속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곳에 윤채운이 있다면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기에 말을 타고 움직이는 것도 삼가고 두 발로 뛰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상진과 영천, 대평이라는 상진과 함께 온 다른 수하였다.
“중랑장님, 저들이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심상치가 않다. 저들이 혹시 우리 대감을 찾은 것은 아닐까?”
“아, 아닙니다!”
상진의 의혹에 어디서부터 뛰어온 것인지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미처 다 숨기지 못하는 미탁이 말했다.
“저들이 새로 그려서 가지고 다니는 용모파기의 인물이요! 바로 그를 찾은 것입니다.”
“뭐, 그 사람을?”
“네, 저도 그 사람을 봤습니다. 제가 쫓는 밀정들의 움직임이 부산하기에 그들이 몰려가는 곳에 가 봤더니 그 남자가 마차를 몰고 있었습니다. 제가 봐 둔 작은 객잔에서 멈추고 있었습니다. 헌데 마차 안에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상진의 머릿속에도 번쩍하고 강한 예감이 지나갔다.
“누군지는 보지 못했느냐?”
“네,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뛰어라! 그분이실 게다. 우리가 먼저 가야 한다!”
“네?”
“어서!”
상진은 미탁에게 어서 안내하라 소리쳤다.
상진이 지르는 소리에 미탁은 얼결에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누가 보든지 상관없이 마구 달리고 있었다. 저들보다 반드시 먼저 도착하여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호근은 마차를 세우고 채운과 강희를 내리게 했다. 그러나 유라성에 든 때부터 되도록 그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을 가리면서 객잔 안으로 들게 했다. 그 때문에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밀정은 호근이 누군가를 내리게 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들의 얼굴까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근을 발견한 순간부터 그의 얼굴엔 희열이 나타나고 있었다.
‘나으리께서 오실 때까지만 잘 지키고 있으면 된다.’
저토록 초조하게 찾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제보한 것이니 그 보상 또한 만만치 않으리라. 처음 호근을 찾은 걸 알린 밀정은 객잔 앞에서 숨죽이고 지키고 있었다.
헌데 공교로운 일이 발생했다.
잠시 후 밖으로 다시 나온 호근이 마차에 탔던 사람이라 생각되는 여인을 마차에 다시 태우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어, 안 되는데?’
멀리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마차는 바로 앞의 시전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밀정은 기다리던 곳에 표식을 남기고 마차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숨이 차게 뛰어온 김상진이 객잔에 도착했다.
“어서 대감을 찾아!”
작은 객잔의 주인은 뛰어 들어온 무장들을 보며 언뜻 두려운 눈길을 했다.
허나 상진과 무장들은 객잔 주인의 생각까지 고려할 틈이 없었다. 송국말을 유창하게 할 줄 아는 대평이 나서서 그에게 급히 물었다.
[여기 방금 전에 손님이 들지 않았소? 우린 그분을 찾으러 왔소.]
[네? 그분은 방금 나가셨는데요.]
[뭐요?]
[방금 전의 손님은 여성분과 함께 잠시 무얼 사러 가신다고 나가셨습니다. 아, 그런데 일행분은 한 분 남으셨습니다.]
[방이 어디요?]
[네? 그건…….]
장정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해코지를 할 것 같아 보이지 않자 안심한 주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모처럼 든 손님을 빼내 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대평이 그에게 재빨리 돈을 내밀었다. 돈을 받은 주인은 대번에 얼굴이 밝아지며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 방입니다.]
주인은 안내를 하자마자 희희낙락하며 돌아섰다.
상진은 주인이 사라지자마자 문을 두드리고 기다릴 인내심도 없어 급히 문을 열었다.
“헉!”
상진의 목 끝에는 간발의 차로 칼끝이 서 있었다. 방 안에는 수염이 덥수룩하여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채운이 서 있었다.
“대감!”
상진은 목에 닿기 직전이 칼도 아랑곳 않고 반갑게 소리쳤다. 이곳에서 정말 자신들이 채운을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부장, 김상진을 만난 채운도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지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저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뭐라?”
“어서요!”
“안 돼! 지금 아내가 밖으로 나갔어. 아내를 찾으러 가야 해.”
채운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달려 나갈 기세였다.
“이곳부터 벗어나고 나서요. 서둘러 주십시오!”
절박한 상진의 목소리에 채운은 그대로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정말 저들이 이곳까지 온 것이라면 당장 강희부터 구해야 한다.
주인은 우르르 몰려나가는 장정들을 멀뚱거리며 보고 있었다.
상진이 채운을 빼내 객잔을 벗어나자마자 최필선이 객잔 앞에 다다랐다. 시전에서 필요한 음식을 조금 산 호근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밀정도 한발 먼저 다시 객잔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채운과는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저 마차입니다. 바로 저 마차에 그 남자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차가 도착하며 호근이 강희를 내려 주었다.
그 순간 마차 주위를 에워싼 최필선이 칼을 내밀며 호근에게 다시 마차를 타도록 손짓했다.
“객잔도 뒤져!”
“네!”
그의 명령에 마차를 포위한 나머지 병사들이 객잔 안으로 몰려들었다. 마차를 포위함과 동시에 객잔 뒷문까지 막아선 그들은 주인을 위협해 방마다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허나 상진과 이미 빠져나온 채운은 마차를 포위한 최필선을 이를 갈며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 저들을 모두를 쳐 버리고 싶었으나 지금 상황에선 나설 수 없었다.
우선 호근의 대처가 중요했다.
“나으리, 저 여자도 데려갈까요?”
마차와 호근이 포위되며 밀쳐진 강희는 고개를 숙인 채 구석에서 떨고 있었다. 그녀는 넘어진 충격이 아기에게도 가해졌을까 두려워 계속 배를 감싸고 있었다.
“나으리, 저 여자는 그때 제가 봤던 그 여자 같습니다.”
최필선의 뒤를 따라왔던 기태성이 옆에서 참견했다. 그는 용모파기에서 호근을 알아본 이후 최필선을 자주 찾아와 당시의 일을 자세히 떠벌리곤 했다.
그때 인상적으로 본 여자가 바로 변장한 모습의 강희였던 것이다.
“으흠, 고개를 들어라.”
강희는 떨리는 고개를 겨우 들어 최필선과 마주했다. 매서운 최필선의 눈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희가 얼굴을 들자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몸을 봐서도 짐작할 만했지만 고개를 들자 뚱뚱한 몸의 웬 추녀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얼굴은 터질 것 같은 볼살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 눈 밑에는 좁쌀만 한 점이 하나 붙어 있었는데, 그걸 가리려고 한 모양인지 허옇게 분칠한 모습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혹시나 이 여자가 성강희가 아닐까 의심하던 최필선은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허나 확인할 것이 있었다.
“너는 이름이 무엇이냐!”
“소, 소녀는…… 송연희라 하옵니다.”
강희는 최필선의 매서운 눈에 지목당한 터라 더듬거리면서도 천천히 너무 늦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최필선에게 잡히자 그녀는 얼어붙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호근이 지어 준 이름이 겨우 생각났다. 미리 정해 둔 이름이 없었다면 그녀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난스레 지은 이름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그렇지만 일단 이름을 말하자 호근이 말해 준 다른 것들도 생각이 났다.
“너는 어디에서 왔고, 이자와는 어떤 관계이냐?”
“전 원래 북계도 서경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 의원께서 예전에 제 아버지께 의술을 배우셨습니다. 헌데 아버지께서 절 서 의원께 보내셔서…….”
“네 남편도 함께 있다고 들었는데, 맞느냐? 네 남편은 어디 있느냐?”
“제 남편은…….”
강희는 그것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변장은 성공일지 모르지만 채운을 잡으려 눈에 불을 밝히는 이들에게 그를 보일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가 먼저 몸을 피한 것 같기는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때 강희의 대답에 다른 이가 대신 답하고 나섰다.
“날 찾으시오? 뉘시오? 뉘신대, 백주 대낮에 여인네를 이리 무릎 꿇린단 말이오?”
최필선은 그들 앞에 건들거리며 나타난 남자를 보며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호근이라는 의원을 잡으면 채운은 쉽게 찾게 될 거라 기대했는데, 일이 쉽게 풀릴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네가 이 여인의 남편이냐?”
“그렇습니다만, 나리께서는 왜 그러시는지요?”
갑자기 강희의 앞에 나타나 거들먹거리던 그는 최필선이 고압적으로 말하자 허리를 숙이며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너는 서호근이라는 의원과 무슨 관계냐?”
“저치요? 저야 저 사람과 별 관계가 없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나으리?”
순식간에 몸을 낮추고 조아리는 그의 태도는 전형적인 소인배처럼 보였다. 허리에 칼을 차고 있긴 하지만 무장처럼 보이지도 않고, 호근이 기태성에게 말했듯이 투전판에나 열중한다는 파락호라는 설명이 어울리는 이였다.
최필선은 윤채운과 성강희가 아닌 이상 이들에게는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넌 알 것 없다. 그만 가자!”
“엇, 하지만…….”
“무엇이냐!”
“하지만 저치가 우리의 물주……. 아니, 우리의 보호자인뎁쇼. 어쨌든 그런 이를 데려가시려는 것 같은데, 여기 머무는 돈도 다 저자가 가지고 있어서…….”
허탕에 불쑥 화가 치밀었지만 때문에 저들은 더 필요 없게 되었다. 최필선은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오태령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에게서 돈주머니 하나를 받아 든 남자는 그것을 열어 보더니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무장들이 여태 자신의 보호자 역할을 한 남자를 데려가는 데도 그는 호근에 대해서는 일말의 걱정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빌어먹을! 의원이나 족쳐 봐야겠어.’
최필선은 호근이 갇혀 있는 마차에 타고는 그들 부부와는 일별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다. 당장 그를 심문하여 채운의 행방을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