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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용서해 주세요 (27/38)

27. 용서해 주세요

오천 형제의 마지막 도발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났다. 수보의 호위가 정해지고, 그는 곧잘 지팡이도 없이 다닐 정도로 회복된 상태였다.

수보의 호위로 선출된 사람들은 그가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긴 했지만 함께 생활하는 데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이 끝나면 채운은 이제 떠날 것이다.

아무튼 그들이 수보와 함께 있게 되자 채운은 이제 확실히 자유 시간이 생기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이른 오후에 거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모처럼 한가한 이때 강희와 함께 목욕을 하거나 오수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떠나기 전 한가함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채운은 모처럼의 여유를 호근을 따라 며칠째 다닌 약재상을 둘러보고 다니는 데 다 쓸 수는 없었다. 또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한곳에 오래도록 얼굴을 내비칠 수도 없었다. 채운의 얼굴엔 일부러 기른 수염이 가득했지만 수보의 호위를 위해 머리는 단정하게 다듬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면 알아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 핑계로 채운은 호근이 따라붙기 전에 서둘러 강희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호근은 장희여에게 딸의 행방을 알려 준 데다 수보의 다리를 고쳐 준 데 대해 상상 이상의 금전을 보수로 받게 되었다. 수보의 다리를 치료해 준 호근의 실력을 장희여가 높이 산 덕분이었다.

덕분에 약천에서 머물던 의방 다섯 채는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게 된 호근은 채운을 졸라 약재상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려국에 돌아가게 되면 살 수 없는 귀한 약재들을 미리 사서 이송하고자 하는 것이다.

허나 만일 이때 최필선이 호근의 용모파기를 그려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들은 이리 한가롭지 못했을 것이다.

추적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 *

최필선이 상금을 내밀자 약천에서 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감감무소식이던 중에 드디어 제대로 된 정보가 들어온 것이다.

가장 신빙성 있는 소식은 마진에서 본 것과 같은 달구지를 탄 다섯 명의 사람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 한 의원이 무언가 귀한 것을 팔아 큰 집을 빌려 의방을 차렸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러나 용모파기와 같은 여자와 남자는 없었다는 말에 맥이 빠졌다.

하지만 그 때문에 호근의 의방은 다시 그들의 손에 철저하게 뒤집어졌다.

호근이 열었던 의방이 조사를 당하는 것은 당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위의 누구도 그곳 사람들이 떠난 것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없었다. 누구는 식방이 폐업하며 망해서 야반도주를 했다는 이도 있었고, 누구는 가마를 타고 떠났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냥 사라졌다고도 했다. 정확한 소식이 없는 것이다.

시간이 또 지나고.

그사이 오태령이 용모파기를 그려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것은 다시 추적자들의 손에 전해지게 되었고, 유라성에 돌아온 기태성도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앗!”

외마디 소리를 외친 기태성은 호근과 그의 옆에 그려진 여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용모파기에 있는 여인이 그날 호근의 의방에서 음식을 날라다 준 여인과 비슷하게 보인 것이다.

‘혹시?’

기태성은 이것저것 가늠하고 상상하다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본 것만 얘기하면 될 것이다. 판단은 그가 할 일이 아니었다.

기태성은 그 길로 한달음에 최필선에게로 달려갔다.

“네가 아는 사람이 있다고?”

추적을 시작한 지 근 두 달 만에 드디어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최필선은 집무실 바깥부터 기태성을 맞아 안으로 들였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최필선과 같은 거물의 엄청난 환대에 오금이 저린 기태성은 달싹거리는 입을 겨우 열 수 있었다.

“저, 저, 저 이자를 압니다!”

용모파기에 있는 호근의 얼굴을 짚은 기태성이 자랑스레 소리쳤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가 누구인가?”

“이자는 서호근이라는 떠돌이 의원으로 려국 사람입니다.”

“뭣이?”

떠돌이 의원 중에 려국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마진이나 개밀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어느 누구도 의원이 려국 사람이라 한 이는 없었다.

만일 기태성이 제대로 짚은 거라면 이 떠돌이 의원은 분명 송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일 것이다.

“네가 아는 것을 자세히 고하라!”

기태성은 호근을 만났을 때부터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두 번이나 만난 것, 그의 초대에 집으로 찾아갔던 것, 그리고 집을 살피고 돌아 나온 것까지.

“그가 원래 너와 친한 자였더냐?”

“아닙니다. 이곳에서 스친 적이 있어 얼굴과 이름만 아는 자입니다.”

“헌데 일부러 초대를 했다?”

의심이 가기 시작하니 그자가 기태성을 일부러 집에 불렀다는 것도 결코 자연스럽게 생각되지 않았다.

“네, 그래서 전 그의 집 안까지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있는 것도 보았고요. 하지만 용모파기와는 달라서……. 헌데 이 여인은 새로 나눠 주신 용모파기에 있는 그 여인과 비슷해 보입니다.”

점점 확신이 오고 있었다.

최필선은 마진에서의 소식 이후 이제야 처음 듣게 된 윤채운에 관한 소식에 심장이 떨리는 것 같았다. 때문에 기태성에게 재차 확인해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서려 있었다.

“그런가?”

“네, 남자는 보지 못했지만 제가 보기엔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 수고했다. 나가는 길에 오 무위를 만나고 나가라. 그리고 넌 네 거처에서 대기하라.”

“네, 감사합니다!”

오태령 무위를 만나고 가라는 것은 보상을 주기 위함이렷다. 그리고 거처에서 대기함은 나중에 서호근, 그자를 찾는 데 자신을 다시 쓰고자 함일 것이다.

기태성이 좋아서 입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을 때, 최필선은 의자에 앉아 크게 웃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

그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는 집무실 밖으로 나오는 기태성에게까지 들릴 만큼 큰 웃음소리였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 * *

최필선이 그렇게 웃는 동안 누엔의 집에선 다른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엔의 동생 장무린이 결국 숨을 거둔 것이다.

앞으로 삼 개월을 버티기 힘들고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장무린이었지만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장씨 집안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허나 그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피를 나눈 형제가 죄악을 저질렀고, 채운이 그들이 흘린 음모의 끝자락을 잡았다.

수보가 호위를 들이며, 이제 그에 대한 오천 형제들의 섣부른 공격 따위는 물 건너가게 되었다. 이후 수보가 후계 구도에 본격적으로 오르게 될 것 같자 그들은 최후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대로 뒀다간 정말 집안의 실권이 그의 손에 다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이제 겨우 열 살 난 어린 꼬마에게 이 집안이 넘어가게 생겼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도망갔던 누이가 조금만 더 늦게 왔어도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병신 꼴로 목발을 짚고서 찾아온 꼴이라니. 처음엔 비웃었다.

하지만 그 다리를 하고서도 사람들을 잘도 설득해 넘기고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 장무린이 정신을 차리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줄 줄이야. 어디 생각이나 했으랴.

아버지마저 그 천한 호위를 사위로 받아들였다. 이러다 내일이라도 무린이 또 정신이 깨어 정식으로 후계 선언을 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오천은 수보에게 호위로 붙은 사람들을 보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저 호위가 아니었다. 바로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보가 장손의 후견인으로 발표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오천은 이제 최후의 수단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층천아, 이래서는 안 되겠어.]

[뭐, 어떻게 하려고?]

[무린 형 말이야. 계속 간다간다 하면서 너무 오래 버티는 것 같아.]

[뭐? 형, 어쩌려고 그래?]

겁을 먹은 층천에게 오천은 수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놈은 차씨야, 장씨가 아니라고. 우리 조카의 후견인은 너나 나 둘 중에 한 사람이 되어야지. 안 그래?]

[하지만 무린 형이 이미 저치에게 넘기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층천은 마뜩잖은지 무린 형을 들먹였다. 오천은 콧방귀를 뀌었다.

[무린 형? 흥, 그가 정신이 있는 시간이 얼마나 돼? 그리고 그 꼴에 아직 인계가 마무리는 되지 않았을 거야.]

무린을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는 오천에 층천은 놀라 외쳤다.

[형!]

[뭐 어때? 어차피 가는 사람이야. 조금 시간을 당겨 주는 것뿐이야. 그 방법밖에 없어.]

오천은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독한 그의 눈빛에 층천도 슬그머니 넘어가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마침 상단 약재상에 비소보다 좋은 게 들어왔어. 고통도 거의 느끼지 못할 거야. 빠른 시간에 갈 수 있어.]

비소라는 말에 다시 겁을 먹은 층천이 제 형을 걱정스레 보며 물었다.

[형, 정말…… 할 거야?]

[그럼, 넌 이대로 앉아서 다 넘겨주자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오천이 살기 어린 눈으로 째려보자 층천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럼 넌 내가 하는 대로 가만있어!]

[으응. 하지만 형, 그럼 언제,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런데 너, 무린 형의 처소에 드는 연앵이란 계집과 잠자리를 하는 사이지?]

[응? 어, 어…….]

[오늘 밤, 내 처소에 그 계집을 불러 놔.]

[응, 알았어.]

말을 마치며 막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던 둘은 같은 곳으로 들어서려던 채운과 마주쳤다. 그들과 마주친 채운은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나 길을 양보했다.

[흥, 재수 없는 놈!]

층천이 움찔하더니 그에게 욕을 하며 삿대질을 했다. 허나 고개를 젓는 오천 때문에 뭐라 더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무어라 하던 채운은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길에서 비켜서 있을 뿐이었다.

채운을 지나 한참을 떨어진 곳에 오자 층천이 오천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형, 어떻게 해? 우리가 한 말을 들었을까?]

[듣기는? 너 아직도 몰라? 아버지가 차 무위, 그놈에게 왜 저자를 호위로 쓰지 않느냐 물었더니 송국 말을 몰라서 안 된다고 하더래. 놈은 우리말을 몰라. 그리고 안다 해도 뭘 들었겠어? 혹, 마지막 말을 들을 수는 있었겠지. 그걸로 뭘 알겠어?]

[그렇지?]

[그래.]

채운이 들은 말은 바로 이 대화의 끝이었다.

오천은 이렇게 마지막 수단으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제 형을 죽여 버린 것이다.

당장 내일을 장담하지 못하던 장무린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여파가 컸다. 사람들은 장례를 준비하면서도 무린이 남긴 아이들의 후견인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누엔도 슬퍼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동생의 유지를 이유로 당연히 자신이 보호자가 되기로 나섰지만 오천과 층천, 그들의 어머니까지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무린의 유지는 정식으로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반대만으로도 사람들의 찬반이 갈리고 있었다. 장희여의 한마디만 있으면 무마될 일이긴 했지만 그는 아들의 죽음에 맥을 놓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장손의 후견인으로 삼기 위해 일부러 딸을 찾으려 애쓴 그였지 않은가. 허나 장희여는 막상 아들이 죽자 딸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았다.

그가 침묵하는 사이, 오천 형제의 어미와 그 집안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집을 떠나 도망쳤던 딸과 사내에게 장손을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누이 부부에게 맡긴다고 무린이 직접 수결한 유서도 장희여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침묵은 수보와 누엔에게 점점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수보가 그동안 기울여 왔던 그의 입지가 한순간에 되돌려진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장희여가 계속 침묵하고 있다면 장손의 후견인이 될 사람은 오천과 층천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무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태도가 돌변한 장희여의 생각은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마지막 순간 딸과 수보를 믿지 못하게 되어서인지.

장희여의 침묵과 함께 사람들은 장손의 후견인에 관한 논의로 무린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제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 전날 의심스러운 대화를 들었다는 채운의 말에 호근은 조의를 표한다는 명목으로 은밀히 시신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급히 수보에게 사실을 알렸다.

[독살입니다!]

[뭣이요!]

[시신의 손톱에 흰 반점이 있었고, 입가에 피거품이 묻어 있었습니다. 닦아 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중을 드는 하녀가 그것을 숨긴 것으로 보입니다.]

[아뿔싸, 빨리 그녀를 잡아야겠습니다!]

수보는 그 길로 호위들을 보내 연앵을 잡아들였다.

벌써 멀리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연앵이었지만 간발의 차로 그녀를 잡을 수가 있었다.

문초를 한 결과, 그녀가 무린에게 독을 먹이고 피를 토한 흔적을 지워 낸 자백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이는 곧장 장희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얼마 살지 못할 제 형제를 죽인 아들들을 보는 장희여의 눈엔 회한만이 가득했다. 여태 그가 침묵했던 이유는 바로 아들의 죽음에 의심을 가져서인지도 몰랐다.

그는 당장 관아에 보내 두 아들을 처형시키겠다며 펄펄 뛰었지만 그렇다고 장무린이 다시 살아올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아들들을 살려 달라 비는 아내와 함께 두 아들을 아예 집안에서 내쳐 버렸다.

장례를 치르다 말고 난데없이 두 아들과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장무린의 죽음에 저들이 관계된 것이다. 이는 집안의 불명예이며, 치욕이었다.

슬픔에 잠긴 장희여는 장례에 집중하겠다는 이유를 들어 집 안에 있던 손님들도 모두 내쳐 버렸다. 그중에 채운과 강희, 호근이 포함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채운 일행은 떠날 시기를 잡고 있긴 했으나 갑자기 쫓겨나듯 그 집을 떠나야만 하게 되었다.

채운 일행이 떠나게 되자 수보만이 그들을 배웅했다. 누엔은 고아가 된 아이들과 아들을 모조리 잃은 아버지의 수발을 드느라 곁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떠나시게 하여 정말 송구합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의원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수보는 채운을 향해 절절한 감사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또 호근에게는 말로 표현 못할 감사를 눈빛에 담고 또 한 번 깊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또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네, 그래야지요, 그래야지요.]

[저희들을 구해 주신 은인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강희의 인사에 수보도 같이 인사했다.

[부인께서 주신 머리꽂이는 지금 아내가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까지나 무장님과 부인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엔 그것이 보답이었으나 이젠 두 부부 간의 말로 못할 정표가 된 것이다. 그것을 주었을 때, 그리고 이 부부가 그것을 받았을 때가 떠오르며 새삼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장님.]

[네.]

[감사합니다. 제가 두 분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우연하고 쉬운 상황이었는데, 저는 무장님께 수백 번 목숨을 빚졌습니다. 무장께서 부탁하신 건 내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알아서 연락드릴 것입니다.]

[목숨 빚이라니, 가당치도 않으십니다. 은인께서 먼저 저희의 목숨을 구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알려 드릴 것입니다!]

호근은 자신도 알지 못했던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의아한 듯 쳐다보다 곧 고개를 돌렸다. 필시 채운의 사정에 의한 것이니, 굳이 알려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강희는 아니었다.

채운은 지금 수보의 말을 통역도 없이 알아듣고 있는 것은 물론 어눌하긴 하지만 송국말로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면?

“허억!”

강희는 몇 달 전의 그 밤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누엔과 서로 숨은 과거를 고백하며 눈물짓던 그 밤. 그때 채운이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다 들은 것일까? 그럼 그는 다 알고 있었을까?

‘그럼, 기억은?’

그는 기억을 다 찾은 것일까?

그 의문은 수보의 다음 말에 밝혀졌다.

[인근 객잔에 머무실 수 있도록 수배해 놓았습니다. 마부가 그곳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계시고 싶은 만큼 계시다가 떠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가 유라성에 있는 성도종 대감의 상단 지부가 있는 곳까지 안내할 것입니다. 모쪼록 무사히 귀환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내를 혼자 오래 둘 수 없어서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귀환하시거든 꼭 서신을 주십시오.]

‘아, 아버지의 상단?’

수보의 입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이름에 채운이나 호근 아무도 놀라지 않고 있었다. 이미 모두들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

수보가 들어가는 것을 보며 세 사람은 돌아섰다.

채운은 경악한 채 눈을 휘둥그렇게 뜬 강희를 돌아보았다. 상황을 알게 된 호근도 두 사람 사이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우선 마차를 탑시다. 객잔에서 앞으로의 일을 논의해야 할 것이오.”

앞으로의 일은 단순히 귀환 일정에 관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 든 이중의 의미를 알아들은 강희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채운은 강희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그가 뻣뻣하게 굳은 강희를 자연스럽게 부축하여 마차에 타는 모습을 보며 호근도 뒤따라 올랐다.

세 사람은 마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희에게 혼란과 충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기에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부는 고급스런 객잔으로 마차를 몰았다.

이미 방이 예약되어 있는지 세 사람은 곧장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 안내되었다. 하지만 호근은 방만 확인한 채 금방 두 사람이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안내하던 객잔의 하녀도 내보내고 세 사람이 되자 호근은 당장 강희의 손목을 잡고 진맥했다.

“……맥박이 빠르고, 식은땀도 흘리고 계시군요. 많이 놀라셨습니다. 진정하십시오. 드실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약은 저녁을 드시고 나서 드시면 됩니다.”

“아, 아기는?”

당장 너무 놀랐던 나머지 강희는 본능적으로 가장 걱정되는 배를 감싸며 아기의 안위를 물었다.

“역시 부인도 알고 계셨지요? 전 혹시나 모르시고 또 전처럼 힘들게 움직이실까 걱정했습니다.”

“네?”

“아, 저는 이만 나가지요. 이제 두 분이 말씀을 나눌 때인 것 같습니다.”

호근이 나가면서 문을 닫아 주었다.

그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강희는 다시 한 번 입을 막으며 신음을 삼켰다. 제 입으로 임신한 얘기를 꺼낸 데다 그 사실마저 호근은 물론 채운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오고 말았다. 서로 숨기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할 때였다.

호근이 나가고 나서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강희는 채운을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 강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채운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서로 할 말이 많은 것 같소.”

“서…… 방님?”

채운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지고 있었다. 바짝 마른입에 그를 부르는 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채운은 얼른 물을 따라 그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조심해서 천천히 드시오.”

그녀는 살가운 그의 목소리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용서받기도 전에 기대고픈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너무 메말라 텁텁한 목은 물을 원했다. 강희가 입에 닿은 물 잔에 절로 입을 열자 그가 살그머니 잔을 기울여 주었다.

‘왜 이 순간 불현듯 혼인식 날 물을 떠 주던 그가 생각나는 것일까.’

그러나 떨리는 몸은 입에 대 주는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마구 흘리고 있었다.

“저런, 사레들겠소. 천천히, 천천히…….”

채운은 그녀가 물을 마시는 중간중간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의 토닥임이 또 너무나 다정하기에 강희의 눈시울은 왈칵 붉어지고 말았다.

허나 이 순간 눈물을 흘려 그의 동정을 살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강희는 잔에 가득한 물 한 잔을 뜨거운 차 마시듯 천천히 다 마셨다.

그녀가 물을 한 잔 다 마시는 걸 본 채운도 그 잔에 물을 가득 담아 자신도 마셨다. 그도 강희만큼은 아니지만 목이 탔던 것이다.

“강희…….”

“…….”

그의 부름에 가만히 고개를 든 강희는 그를 바라만 보았다. 그녀는 채운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두 눈만 감정으로 일렁이는 강희에게 채운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짐작하겠지만 난 기억을 찾았소.”

“……!”

강희는 작게 입을 벌린 채 또 할 말을 잃었다.

‘언제일까? 그리고 내가 임신한 것은 또 언제, 어떻게? 그는 차 무위와 송국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허면 그 밤 누엔 부인과 나누었던 대화도 다 들은 것일까? 서방님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일까?’

속으로 수십 가지 질문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채운에게 어떤 것도 물을 수 없었다.

입만 벙긋거리는 그녀에게 채운이 말했다.

“내 그동안 일부러 말하지 않았소. 내가 기억을 찾은 건 아마 당신도 짐작하는 그때일 것이오. 약천으로 떠나기 전날 밤, 누엔 부인과 서로의 과거를 털어놓던 그때…….”

짐작? 사실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그동안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에게 죄인임을 감추기 위해 부부간임을 말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는 모든 걸 알고서도 그동안?

“……송국말을 할 줄 아셨군요.”

강희는 겨우 그 말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말밖에 내뱉지 못하는 제가 한심스러워졌다.

‘맙소사, 할 말이 고작 이것뿐이란 말인가. 그에게 왜 그 사실을 숨겼느냐 따지는 것 같지 않은가. 그가 무슨 이유로 그랬던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무슨 자격으로 이런 걸 묻는 것이냔 말이다.’

하지만 채운은 속으로 자책하는 강희에게 대답처럼 말해 주었다.

“그렇소. 처음엔 아무 기억이 없어 모르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내가 이 나라 말을 할 줄 안다는 걸 알게 되었소.”

“……!”

역시 그는 그날 밤에 했던 말을 다 들었다.

강희는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탁하고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 짓누르고 있던 죄스러움과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비겁하게 묻고 떠날 생각은 했어도 그에게 고백하고 죄를 청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서로가 모든 걸 알고 있는 이상 더 이상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아직 멍한 정신으로 있는 강희에게 채운이 가장 껄끄러운 그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일. 난 당신이 그 사건을 알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소. 나중에 듣기에 주로 당신의 그 하녀가 일을 치르고, 당신의 집에서 무마시켰다고. 그와 비슷한 일들도 다들 알고는 있지만 쉬쉬하였소. 허나 정작 당신은 그 일을 모르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허면 그것도 역시 당신의 그 꿈에서 알게 된 것이오?”

강희는 아픈 기억의 반추에 마지막에 그가 무엇을 묻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노도와 같이 춤추는 감정은 생각을 어그러뜨리고 이성을 마비시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회한과 후회, 죄책감들이 춤추는 어지러운 마음뿐이었다.

그와 마주 앉아 있는 것도 황감한 일이었다.

무슨 염치로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강희는 걸터앉은 의자를 밀치고 바닥에 엎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찌, 어찌하오리까. 저의 죄입니다. 제가 잘못, 잘못했습니다. 용서를 바랄 수도 없습니다. 이 큰 죄를 어찌!”

채운은 바닥에 엎드리는 강희 때문에 기함하며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이러지 마시오! 강희, 당신 몸을 생각하시오!”

“아!”

퍼뜩 정신을 차린 강희는 배를 감싸 안았다.

방금 전 그녀는 서 의원의 진맥으로 짐작만 하던 임신에 대한 사실을 확인했다. 허나 감격보다 여태 가슴 밑바닥에 묻어 온 죄를 터뜨린 충격이 더 컸기에 기뻐할 새도 없었던 것이다.

그가 일으켜 세우는 손길에도 강희는 망연하게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채운은 차마 울지도 못한 채 먹먹한 표정을 한 강희를 품에 당겨 안았다.

허나 강희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물러서며 피하는 몸짓에 채운은 새삼 상실감이 느껴졌다.

“강희!”

“제가…… 아기를 가진 것도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그렇소. 그래서 누엔 부인의 집에 가기 전에 당신의 변장을 새로 꾸민 것이오. 실제로는 꾸민 것이 아니기도 하고 말이오. 그리고 내가 전에 말했지 않았소? 당신이 아기를 가진다면 정말 기쁠 것이라고. 난 정말 기쁘다오.”

채운은 그녀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허나 강희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 거리를 유지한 채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방님, 저의 죄를 다 아시면서 저를 어찌 견디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시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떠나겠다는 것이오? 처음에 내게 이혼장부터 들고 찾아온 이유가 그것이었소?”

그녀는 그렇다, 대답할 수도 없었다.

허나 그건 대답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강희는 그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보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다. 그동안 그가 보인 다정함과 애정은 그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에게서 연모한다는 말을 들은 그날, 죄책감에 종종 가슴을 뜯곤 했다.

헌데 그 모든 걸 다 알고서도 한 말이란 것인가?

그러자 마음 깊숙이 숨겨 뒀던 욕망이 불쑥 솟아 나왔다. 이대로 그와 미래를 꿈꾸어도 되지 않을까? 서방님이 이렇게 그 사실을 덮고 용서해 주시려 하는데…….

‘헉, 용서? 용서라니!’

말도 안 된다. 그 일이 어떻게 용납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한동안 너무나 달콤한 그와의 신혼 생활에 젖어 있다 보니 감히 용납하지 못할 꿈을 꾸고 있었다.

이전의 성강희가 저지른 가장 큰 죄가 바로 그에게 행한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그와의 미래를 생각한단 말인가.

자신이 그 ‘꿈’에서 깨고 나서 그와 다시 혼인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처음 다짐한 것이 그를 놓아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지도 못한 것은 바로 자신이 그를 이토록 맹목적이며, 절절하게 연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그를 놓아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재영이 있는 이상 이미 비참한 미래는 예고되어 있었다. 그가 모진 선택을 하기 전에 자신이 해 주어야만 했다. 그것이 애초에 다짐한 것이고, 그에게 약속했던 것이다.

“전, 서방님, 전…… 안됩니다. 전 서방님과 함께 있어서는……. 어차피 전 서방님과 함께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운명?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혹시 당신의 그 꿈을 말하는 것이오? 덕분에 나와 만운이 무사할 수 있었고, 큰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단지 그뿐이오. 꿈을 어찌 운명이라 말하는 것이오?”

“그것은…….”

미래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 말해야 하는 것인가?

지금 자신은 그에게 모진 말로 대들고 상처 입히려 포악을 떨던 그 여자는 아니었다. 또 꿈에서나마 그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건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채운은 그녀가 숨기고자 하는 것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혹, 꿈에서도 나와 혼인해 살다가 헤어지기라도 한 것이오?”

너무나 날카롭고 정확한 질문에 강희는 흠칫했다. 그 반응만으로도 채운은 자신의 짐작에 대한 긍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희는 그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허나 그것은 지난 원정에서 자신과 만운이 구함을 받은 것으로 이미 소용을 다했다. 강희가 그 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채운은 그녀가 살았다는 그 꿈속의 삶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강희.”

“네?”

계속 흠칫하는 강희에게 채운은 더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의자에 앉게 하고, 자신은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이젠 나도 알아야 할 것 같소. 당신은 그 꿈에서 어떤 삶을 살았소?”

“그건…….”

“말해 주시오. 부탁이오.”

채운은 그렇게만 말한 채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말해야 하나?’

꿈속의 그녀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떠드는 별명이 딱 맞는 그런 여자였다. 그리고 그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이전에 그에게 저지른 죄도 끔찍한데, 정말 그것까지 밝혀야 한단 말인가? 허나 그는 반드시 듣겠다는 듯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하자. 가장 큰 죄 앞에 무엇을 더 아득바득 숨기려 함인가.

‘하지만 어떻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강희는 생각을 고르기 시작했다.

“못된 망종, 성강희. 꿈속의 저는 그 말에 딱 어울리는 여자였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입이 바싹 마른 강희는 다시 물을 입에 머금고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당신과 혼인한 것을 끔찍하게 여겼고, 그게 싫어 도망도 쳤습니다. 허나 아버지를 끝까지 거역할 수 없었던 전 혼사를 피할 수 없었지요. 당신과 혼인하지 않으면 그동안 누려 왔던 허영과 사치를 누릴 수 없었으니까요.”

채운은 강희의 이야기가 그리 놀랍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인 강희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이전의 소문과는 맞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꿈을 꾼 것이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후로 그녀가 달라진 것이리라.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고 계속 들어 주었다.

“혼인 생활은…… 팔 년이었습니다. 제 입으로 차마 표현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신분의 우월함을 내세워 매사에 서방님을 모욕하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혼인 후에도 제 허영을 채우고 사치를 계속하느라 재산을 탕진하고, 아버지께 손을 벌렸습니다. 그리고 서방님뿐 아니라 만운 도련님의 반 토막 난 손을 보고도 무시하며 욕을 하고 모독하였습니다.”

‘그래서였구나!’

토막 난 손이라는 말에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일을 보고 겪은 듯 진저리를 치는 강희를 보니, 그녀가 원정에서 귀환할 당시 보인 반가움과 안도의 깊이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저는 당신께 원수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느 날 사고로 당신이 수치스러워하는 하룻밤에 아이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강희는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이가 태어난 배경과 그 아이가 어미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난 것. 그가 두 번째 부인을 들이고, 완전히 남남으로 생활했으며, 이후로도 계속 같은 관계를 지속한 것. 그리고 아버지, 성도종 대감이 반역을 꾀하는 데 힘을 보태다 도리어 잡힌 것. 그때 그녀가 저지른 씻지 못할 죄를 밝혔지만 그래도 뻔뻔히 부정하던 것, 그리고 집에서 쫓겨난 것, 아버지가 이 년을 더 사시다 돌아가신 것까지.

강희는 그러고도 이후 이 년 후에야 그 꿈이 끝났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아들을 천대하여 버렸다는 것도 목소리가 떨리는데, 마지막에 아이를 훔쳐보러 갔다가 피눈물을 흘리던 걸 본 이야기는 차마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가슴에만 담아 둘 이야기였다.

놀라운 사실들이 이어졌지만 채운은 한 번도 그녀를 제지하거나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이야기하는 도중 맥이 빠지고 정신이라도 놓으면 어쩔까 싶어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두 번째 부인을 들였다는 대목에서 놀라긴 했지만, 그건 그녀가 처음 찾아왔을 때 왜 다른 여자를 언급했는지 의문을 풀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다른 부인이라……. 그는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물어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강희가 느끼는 죄책감의 중요한 오류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의 일을 가장 크게 생각하며 죄의식을 갖는 것은 맞았다. 허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꿈속의 이야기를 하는 강희의 얼굴엔 이전의 죄를 고백하던 그것과 같은 표정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꿈에 사로잡힌 이유를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 보니 강희는 그 꿈을 꿈이라 말하면서도 그것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간직한 것이다.

허나 그것을 당장 부인하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보다는 그녀에게 스스로의 마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희.”

“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

그 긴 이야기 끝에 그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강희는 가슴이 떨렸다.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그의 질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네…….”

“날 어찌 생각하시오. 그 꿈에서처럼 비루한 신분에 벼락출세한 천것이 감히 귀한 당신을 탐한다 생각하시오?”

강희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그가 물은 건 그녀가 각오한 어떤 것도 아니었다. 허나 그에 대한 감정을 부인당하자 강희는 당장 가슴이 북받치는 서러움이 몰려왔다.

“세상에, 어찌,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아니어요! 절대 아니어요!”

“그럼 말해 보시오, 나를 어찌 여기는지.”

강희의 눈에 당장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허나 그의 굳은 얼굴은 답을 들을 때까지 이 질문을 거두지 않을 것 같았다.

“지난번엔 내게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당신은 내가 잠이 든 것 같으면 내게 또 속삭여 주지 않았소? 말해 보시오. 다시 한 번 그 말을 듣고 싶소.”

‘앗, 그는 매일 밤 그녀의 속삭임을 들었던 것일까?’

그녀는 그와 사랑을 나누고 그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면 그를 한 번씩 불러 보곤 했다. 그리고 대답이 없는 그에게 속삭이곤 했다.

“서방님, 저는…….”

“내가 또 잠들어야 해 줄 것이오? 저런, 나는 오늘 일찍 잠들 생각이 없는데…….”

“서방님, 저는 서방님의 가족을 망친 장본인입니다. 그런 큰 죄를 지은 저를 용서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그러니 빌어 보시오. 용서해 달라 청해 보란 말이오! 아니면 내가 당신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 매달려 사정하길 바라오?”

“어흑, 서방님.”

“어서, 또 무릎은 꿇지 말고……. 해 보시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강희를 저지했다. 이런 순간에도 아기를 가진 그녀를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떠나기를 결심한 것보다 용서를 청하는 것이 더욱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허나 이것이 그가 내어 준 기회였다. 강희는 덜덜 떨리는 손을 마주 잡고 탁자 위로 고개를 숙이며 엎드려 죄를 청했다.

“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시어요. 용서해 주세요, 서방님.”

강희는 엎드린 채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

채운은 흐느껴 울며 용서를 비는 강희를 잡아 일으켰다. 채운은 수건을 적셔 강희의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당신을 많이 미워했소. 이제 와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오. 그것은 사고였소. 그렇게 생각하려 하오.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말을 곡해한 그 하녀가 저지른 일이지 당신이 한 일이 아니지 않소? 그렇게 가슴에 묻고, 그렇게 용서하고 싶소. 그러고 싶을 만큼 내가 당신을 사랑하오.”

“서방님!”

“그러니 내가 아까 듣고 싶다던 말을 해 주시오. 말해 보시오, 강희, 응?”

기어이 눈에 가득 찬 눈물이 그의 얼굴을 뿌옇게 가리고 말았다. 허나 목 안 울음이 가득해도 그를 향한 연모의 고백은 해야만 했다.

“서방님, 서방님을 연모합니다. 연모하고, 연모하고, 또 연모합니다. 제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내세에도 또 사랑할 겁니다. 사랑합니다, 서방님.”

“그래 주시오. 그래 주시오. 날 계속 사랑해 주오.”

“서방님, 서방님을……, 흐윽.”

용서를 청하는 것보다 더 길어질 것 같던 강희의 고백은 결국 흐느낌에 막히고 말았다. 채운은 그녀를 품에 가만히 안고 토닥여 주었다.

“쉬, 진정해요. 엄마가 너무 울면 분명 아이에게도 좋을 것이 없을 것이오, 쉬.”

그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강희를 안고 계속 토닥여 주었다. 오랜 시간 묵혀 온 거짓과 숨은 진실과 마음을 토해 낸 강희는 기진하여 그에게 기대 있었다.

“이제 당신은 그 꿈을 잊으시오. 분명 그 꿈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이제 꿈으로 묻어 둡시다. 그건 더 이상 미래가 아니오. 운명이니 뭐니 하는 말도 하지 마시오. 이젠 모두 털어 낸 이상 그것에서 벗어나시오.”

“서방님.”

“알겠소?”

“……네.”

이제 다시는 그에게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일이 없을 것이다.

허나 그녀는 문득 말하지 않은 한 가지가 생각났다. 그건 지금 말고는 이야기할 기회도 없을 것이고, 취할 정보인지 버릴 정보인지는 그가 정할 것이다.

꿈은 떨쳐야 하는 것인데도 왜인지 그에게 이것을 꼭 말해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만큼 그 일은 강희의 마음속에서도 계속 걸리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할게요. 그 꿈이 끝나기 직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제 와서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죽기 직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강희는 실수한 말을 서둘러 부인하려 했지만 그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녀의 꿈이 왜 끝난 것인지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미래가 아닌 꿈속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는 강희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고 계속 들어 주었다.

“……수왕을 또다시 암살하려던 시도로 왕께서 크게 다치셨습니다. 헌데 그 범인이 서방님의 측근이란 소문이 돌았어요. 측근이 서방님의 인척이란 말도 있어서 소문이 흉흉했어요. 아, 만운 도련님은 절대 아니에요!”

“그렇소?”

채운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측근이라니, 몇 안 되는 신뢰하는 부하들을 말함인가?

“혹시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일까요? 시간적으로도 아직 멀었고, 아직 있지도 않은 일인데, 괜한 의심으로 심력만 낭비할 일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강희의 얼굴은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후회가 가득했다. 허나 강희의 처음 생각대로 이것을 취하거나 버리거나 그가 판단할 문제였다.

“아니오. 생각할 만한 문제였소. 저하께서 왕이 되고서도 최사립이 계속 득세하고 모략을 꾸민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한시도 방심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이제 이것으로 되었소. 당신의 그 꿈은 이것으로 끝이오. 앞으로는 나와 함께 새로 꾸는 꿈만 이야기하시오. 알겠소?”

“네.”

채운은 아직 젖은 눈으로 빨개진 강희의 눈가를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리고 볼을 쓰다듬으며 잘근잘근 깨물어 부풀어 오른 입술도 매만져 주었다.

허나 손가락으로만 매만지기엔 그 입술이 너무나 탐스럽게 부풀어 있었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달뜬 신음이 삼켜지고 있었다. 이제 임신한 사실도 밝혀진 터라 그가 배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그 애정이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허나 그녀의 배를 사랑스럽게 쓰다듬던 손은 곧 농밀하게 바뀌게 되었다.

채운은 그녀를 안은 채로 곧장 품을 헤쳤다. 손안에 한가득 잡히는 가슴을 어서 밖으로 내어 입에 물고 욕심껏 빨아들이고 싶었다. 그의 품에서 바지락거리는 그녀의 손도 그의 품을 더듬고 있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은 서로의 품을 헤집던 채로 딱 멈추고 말았다.

지금은 아직 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일행도 있었다. 혹시나 싶어 옆방에서 노심초사 한참을 기다리던 호근이 식사 시간을 핑계로 방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식사는 이곳으로 가져오도록 주문했습니다. 제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시…… 잠시만 계시오!”

채운이 급히 소리치며 강희의 옷매무새를 급히 고쳐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풀어 헤쳐진 옷을 단정히 하고는 마지막으로 강희의 입에 깊게 입을 맞추고서 호근을 들였다.

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강희는 끝내 재영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재영에 대해 입을 여는 순간 그녀를 다시 그의 두 번째 부인으로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채운도 두 번째 부인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재영의 이야기를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잊으라지만 그 꿈은 정말 운명이 아닌 걸까?

피할 수 없는 몇몇 운명들이 재연된 걸 봤기에 강희는 두려웠다. 또다시 재영에게 모든 걸 내주고 돌아서야 했던 자신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용서받고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해도 그녀를 끼워 생각하는 순간 미래는 다시 암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로 이 순간을 망칠 수는 없었다.

* * *

호근은 강희의 붉어진 눈매와 젖은 입술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두 사람의 얼굴에서 무언가 후련하게 해소된 듯한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거면 되었다. 잘된 것이다.

그는 엄청난 갈등을 해소한 후에 부부가 무슨 일을 했을지 상상하지는 않으려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문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 들린 다급한 음성을 생각하면…….

‘아니, 상상하지 말자.’

이제부터가 긴장 넘치는 귀환길의 시작임을 생각하면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한다.

허나 수줍게 고개를 돌리고 있는 부인의 얼굴을 보니 절로 상상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 부부와 함께 있을수록 외로워지는 것 같았다.

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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