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운명과 인연
“누엔 부인께 들었는데…….”
“차 무위께 들었는데…….”
“말씀해 보시오.”
동시에 말하던 두 사람은 서로가 알게 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호근의 짐작대로 누엔이 집에 돌아온 사정은 그리 좋지가 않았다. 두 사람이 도주를 하게 된 것은 용서받고 받아들여지긴 했으나 그것은 조건부인 것이다.
“내일 거처를 옮기기로 하였소. 서 의원이 차 무위의 치료를 계속하게 되어 나도 그의 수발을 드는 역을 하기로 했소. 사실은 호위 역이지만 말이오.”
“네, 허면 저들에 대해서는 좀 알아보셨습니까?”
“그렇소. 차 무위의 처남이라는 자가 당장 그의 목발을 집어 던졌다는 걸 보면 곧 행패를 시작할 것이오. 아직 누엔 부인의 아버지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술수를 쓰기는 힘들겠지만 분명 무슨 해코지를 하려 들 것이오. 차 무위는 이제부터 이곳 사람들을 장악해야 할 사람이오. 그러자면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나고 많이 움직여야겠지. 태수는 누엔 부인보다 그녀의 남편인 차 무위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소. 그래서 다리가 온전히 나을 수 있는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하오. 그가 나을 때까지 지키는 것이 나의 할 일이오”
강희는 그가 강하고 누구보다 뛰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서방님의 고초가 크실 것입니다.”
“각오한 일 아니겠소? 차 무위는 생각보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촌부였던 그가 그토록 다른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소. 그의 서슬 퍼런 명령 한마디에 하인들이 조아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소. 그 모습을 태수가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웃더이다.”
“누엔 부인도 그래 보였습니다.”
“그래요……. 어질면서도 강한 사람들이니 잘할 것이오.”
“네, 우리의 은인 아니십니까. 꼭 잘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려고 온 것 아니오. 잘될 것이오. 자, 그분들은 그렇고, 당신은 오늘 어땠소? 몸은 괜찮소?”
“……!”
채운의 살뜰한 말에 강희는 붉어져 고개만 숙였다.
“지난번 진맥을 받아 봐야 할 거라 하지 않았소. 어제도 그제도 당신은 계속 피로해 보였소. 아, 생각난 김에 지금이라도 서 의원을 불러오리다.”
“아, 아닙니다. 내일도 뵐 수 있을 텐데요. 이제 막 쉬시려 할 텐데, 내일 여쭈지요.”
“그러겠소?”
“네…….”
강희는 당장 호근을 부르겠다는 그를 겨우 만류할 수 있었다. 임신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그에게 어찌 말할지는 아직 가늠할 수가 없었다.
채운의 시선을 피하고 고민하느라 강희는 그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강희?”
“네?”
“사람들에게 당신이 임산부라고 한 것 말이오.”
“네?”
놀란 나머지 번뜩 고개를 든 강희는 그의 눈빛을 마주할 수가 없어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 말을 하면서 생각해 보았소. 그게 사실이면 좋겠다. 정말 당신이 아이를 가진다면……. 그 아이가 내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말이오.”
“그, 그것은…….”
“두건도 별 소용없는지 당신을 쳐다보는 사내들을 볼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소. 이제 거처를 옮기면 당신은 여인들만 있는 후원에서 생활할 테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서방…… 님.”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두건을 벗겨 버린 강희의 맨머리를 쓰다듬으며 한탄하듯 속삭였다. 그러다 그는 슬쩍 손을 뒷덜미로 옮기더니 볼을 쓰다듬으며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도록 했다.
서서히 입을 맞추는 그에게 강희는 감히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농밀하게 입을 맞추는 사이로 그녀는 온몸에 열이 오르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피부가 화끈거리며 열기가 솟아오르던 강희는 점점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강희!”
“……네.”
채운은 젖은 입술을 거의 떼지 않은 채 몽롱하게 쳐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날 어찌 생각하시오.”
“전…….”
“내가 싫소?”
“아, 아닙니다!”
“그럼 날 연모하오? 아니, 내가 먼저 말하리다. 난 그대를 연모하오, 강희!”
“허억!”
강희의 눈이 동그래지며 숨넘어갈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허나 채운은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더 주지 않고 다그쳤다.
“그러니 말해 보시오. 나를 연모하오?”
“네, 네……. 서방님을 연모합니다. 하지만…….”
“되었소, 되었소. 그 밖의 이유는 듣고 싶지 않소.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허니 반대하고 싶다면 날 밀어내시오, 연모하지 않는다, 싫다고만 하면 되오. 그럼 내 그만두리다.”
채운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려는 듯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나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격정적으로 입술을 점령당한 강희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허공에 대고 그렸다. 그러다 곧 그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아 당기고 말았다. 그를 밀어낼 기회도 이렇게 사라진 것이다.
그녀는 맞닿아 있는 그의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이도 나처럼 이렇게나 가슴이 뛰는 것일까? 나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고, 기쁜 것일까? 그도 나처럼 심장이 터져 나갈 듯 원하고 있는 것일까?’
굳이 답이 필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다급한 그의 손길은 어느새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의 그날처럼 성마르고 다급한 손길이었지만 이번엔 그녀의 옷을 쉽게 벗기고 있었다. 매일같이 그녀의 옷을 직접 매만져 주는 것을 일과로 하더니, 이전처럼 매듭이 어디 있는지 힘들게 찾지 않고도 제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그녀와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진 채운은 그녀의 예민해진 가슴부터 점령했다. 그때까지 조금은 생각이란 걸 하던 강희도 이성이 하얗게 탈색하며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대를 연모하오, 강희.”
그의 격정적인 고백에 강희는 다른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오늘만은 솔직해지자. 이 순간만큼은 내일을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네, 저도 서방님을 연모합니다. 연모합니다, 서방님.”
“그것으로 된 것이오!”
몇 달 만에야 다시 안은 그녀의 하얀 나신은 그를 향해 온전히 열려 있었다.
이 순간엔 강희가 아기를 가졌다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임신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 일로 아이를 만들 수도 있음이다.
오늘은 이전과는 또 다른 밤이 될 것이다. 이것으로 이제는 더 이상 기한을 따지는 그녀를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방 안엔 두 사람이 몰아쉬는 숨소리 사이사이로 새어 나온 신음 소리만이 가득하게 되었다. 간간이 들리는 신음에 자지러지는 소리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먼저 잠든 부인을 두고 서성일 채운을 만나러 왔던 호근은 그들의 방 밖에 왔다가 서둘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에 안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가 함께 들리며, 호근의 얼굴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오, 오늘이었어?’
호근은 남의 부부의 잠자리를 엿본 것 같은 무안함에 저가 더 민망하고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부리나케 제 방으로 뛰는 호근은 며칠 전 누엔 부부의 방에서도 이 소리를 들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 다시는 밤에 부부의 방에 찾아가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으아아아!”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 호근은 제 방에 뛰어 들어가 혼자 울부짖었다. 달을 보고 혼자 우는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곧이어 개가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이, 이!”
뭔가 더 분하고 서글픈 생각이 든 호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잠을 설치게 되었다.
그러나 만족스런 밤을 맞은 채운은 이제야 제대로 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는 진이 빠져 잠든 강희를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그녀를 옆에 두고 불면의 날을 보내지 않아도 되리라.
만족스럽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는 처량하게 내려간 호근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 * *
임봉곤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이제 해적선이 도성 인근까지 올 수 있었던 일의 전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에 의해 희생된 이는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무고하고 애꿎은 백성들만 희생시키고, 모든 일의 주모자인 최사립은 빠져나갔다. 최사립은 결코 용서받을 수가 없는 자였다.
“윤 낭장, 어쩌겠는가. 자네가 이 일을 지휘해 보겠는가?”
증인의 보호와 그에 대한 보안상의 문제가 겹치자 왕세자는 만운이 이 일을 맡았으면 했다.
허나 아무리 재영이 도와준다 해도 이 일은 만운이 맡기에는 너무 경험이 부족했다. 불같이 돌진하며 거칠 것 없는 만운은 최사립 측의 허점을 뜯어보기에 적합하긴 했으나 그만큼 그들의 경계가 심했고, 무엇보다 현재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저하, 그런 중한 일을 맡기엔 아직 제힘이 미흡합니다. 그리고 이미 증인이 우리에게 있는 이상 다른 여죄와 함께 저들을 송두리째 뽑아내려면 서두를 것은 아니라 봅니다. 또한 그 일을 추진함에 적임자는 제 형인 윤채운 장군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그를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왕세자도 만운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음, 일리가 있네. 허면 곧 북방으로 떠나려 함인가?”
만운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제 뜻을 피력했다.
“네, 저들도 지난번 도적 사건 이후 제가 북방으로 떠나기로 한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제가 가야 합니다. 또 증인의 가족이 모두 사라진 이상 그들도 누가 그 해적선의 생존자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니, 그를 찾는 데 더욱 혈안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제가 계속 여기에 있으면 그들의 눈을 피하기가 힘들 것이고요. 차라리 국경에 가 있는 것이 이곳에서 일을 도모함에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군. 자네 말이 옳아.”
왕세자는 조리 있게 제 생각을 말하는 만운이 일견 대견하게 보였다. 만운은 형을 잃더니 단숨에 훌쩍 커 버린 것 같았다.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 형제들은 어찌 이다지도 복된 이들일까.
기특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채운이 돌아와 이렇게 훌쩍 성장한 만운과 함께 자신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왕세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만운의 마음은 한시가 급했다.
“저는 내일 당장 떠나려 합니다.”
“그럼 가기 전에 한 서기를 만나 보고 가게. 자네가 송국에 가지 못하는 대신 그곳에 관한 자료들과 국경에 대한 정황, 그리고 이것저것 준비한 모양일세. 지금은 자네가 사람 몰골을 하고 있지만 이전엔 어땠는지 아는가? 정말 귀신이 따로 없었다네. 한 서기가 자네 걱정을 정말 많이 했어. 그녀의 정성이 보통이 아니야.”
“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냥…… 감사한 것인가?”
“네?”
수는 혹시나 싶어 만운의 뜻을 떠보았으나 그는 영 감도 못 잡는 눈치였다.
‘저런, 아닌가? 한 서기와 윤만운이라면 정말 좋은 짝이 되었을 텐데.’
아쉬웠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면 관심을 접어야 했다.
“아, 아닐세. 어서 가 보게. 내일 떠나기 전에 다시 봄세.”
“네.”
부복하고 물러나던 만운은 마지막 왕세자의 의미심장한 말에 고개를 갸웃하다 피식 웃었다. 저하도 혹시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허나 만운은 그녀의 마음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 이전부터 짐작해 오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형의 실종에 거의 정신이 나가 버린 자신만큼이나 혼이 나간 듯한 그녀를 보았다. 원정을 떠났을 때도 그랬고, 사냥터에서 있었던 일도 흐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한 서기, 재영 아가씨의 마음은 확실히 형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요즘 형의 집무실 옆에 방을 꾸며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형을 찾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쯧, 한 서기님도 그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 텐데…….’
허나 그녀의 마음은 결코 보답받을 수 없을 것이다. 형과 형수가 서로를 보는 것이 그토록 애틋하며 절절한데, 그녀가 낄 틈이 없는 것이다.
한 가지 이상한 건 형과 형수가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도 애모하면서 왜 가끔 그렇게 아픈 눈을 하는 것인가였다.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형과 형수에게 다른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은 같이 있겠지?’
얼마 전, 자신의 발이 묶인 대신 형을 찾을 사람들이 유라성으로 출발했다. 형이 아직 귀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걱정되긴 하지만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모쪼록 무사하기만을 빌 뿐이었다.
그러나 최사립 측이 추적을 시작했으니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형이 어느 경로로 돌아올지 알 수 없지만 송국만 무사히 빠져나온다면 국경을 통과하는 것이 최종 귀환의 관건이 될 것이다.
생각이 또 그곳으로 향하자 만운의 마음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재영에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마음은 계속 국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헌데 형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매일 이곳에 살다시피 하는 재영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차를 들고 들어오던 시녀가 만운에게 그녀의 전갈을 전했다.
“서기님께서는 잠시 서고에 다녀오신다고 하였습니다. 혹시 윤 낭장님이 오시면 대감님의 집무실 탁자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두셨다고 먼저 보시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고맙소.”
만운은 시녀에게 인사하고 차를 마시며 탁자의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송국에서 돌아올 수 있는 경로들이 다각도로 그려져 있었다.
해로海路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형이 형수를 데리고 와야 하는 길에 불확실한 바닷길을 택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현재 형이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북방 경계를 지키려는 것이다.
탁자에 펼쳐진 지도에는 길만이 표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 요지에는 최사립 측의 사람과 중립의 사람, 그리고 왕세자의 사람들이 누가 있는지 적혀 있었다. 지도만 숙지하더라도 누구를 피하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과연 한재영은 같은 정보를 가지고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합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데 뛰어난 사람이었다.
툭.
그때 쌓아져 있는 것들이 많은 탁자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주우려던 만운은 탁자의 맨 밑 서랍 사이에 끼어 있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다. 살짝 구겨진 것 같아 제자리에 넣기 위해 꺼내어 본 만운은 몇 개의 글자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여인의 글씨 같아 보였는데, 요즘 익숙하게 보던 재영의 글씨도 아니었다.
‘형의 집무실에 여인의 서간이라니?’
그래선 안 될 것 같았지만 문득 궁금함이 인 만운은 그것을 펼쳐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줄 읽지 않아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은…….’
서신이 아니었다. 모월 모일 윤채운과 혼인한 성강희가 려국의 왕께 보내는 이혼장이었던 것이다.
“이, 이게!”
작성한 날짜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이 형에게 있은 지 이미 오래된 것 같았다. 이 청구서를 보아하니 두 사람은 일 년이란 기한이 되자마자 이혼하려는 모양이었다.
“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신음 소리 같은 의문 한마디가 만운의 입에서 새어 나왔지만 그 말에 답을 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있는 만운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까 차를 가져왔던 시녀가 그런 만운을 지켜보고는 다시 방을 나갔다. 그가 마음을 겨우 정리하고 그 이혼장을 서랍 속 깊숙이 넣어 버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을 때, 재영이 돌아왔다.
재영은 만운과 둘러앉아 국경에서 만운이 머물 곳을 짚어 주었다.
그녀가 구겨진 채 끼워져 있던 서신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하는 것을 만운은 알지 못했다.
* * *
만운이 혼란을 감추고 국경으로 향했을 때는 아직 아무런 소득이 없음에 화가 난 최필선이 탁자를 쓸어 버리기만 할 때였다. 그리고 기태성이 막 호근의 의방을 방문했고, 청왕은 정식으로 양위를 선언했다.
이때는 강희의 꿈에서도 왕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았던 때이기도 했지만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아직 청왕이 살아 있는 것이다.
비록 최사립에게 정권을 장악당하고 왕권을 위협당한 왕이었지만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다. 왕세자의 세력에 자신의 힘을 보태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정국은 양위 소식에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양위는 청왕의 강한 의지에 의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국경에 다시 온 만운은 도적단 토벌 이후 북방의 주요 국경 도시인 종경終京 땅의 경계가 끝나는 곳의 현령 집에 머물게 되었다.
사실 송국과 가장 가깝고 교류가 잦은 곳은 명주성이었으나 그곳은 처음부터 배제했다. 채운이라면 분명 최사립을 경계하여 다른 귀환 경로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채운이 귀환 경로로 잡을 곳으로는 종경이 가장 유력했다.
그리고 종경의 현령은 도적단을 함께 토벌한 사람으로, 왕세자의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윗줄의 군수는 중립보다는 최사립의 색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현령인 민영회는 패기 있는 무장으로 북방에 십 년 이상 재직하여 이곳의 사정에도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만운이 온 실사정이 채운을 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총력을 기울여 돕고 있었다.
만운이 북방 지역에 다시 온 명분은 도적단이 생긴 연유와 민심을 살피는 일이었다. 최사립 측도 그가 실제로 왜 온 것인지 충분히 알겠지만 그를 막을 명분은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민심에서 멀어져 있는 최사립 측이 만운의 행사를 드러내 놓고 방해할 수는 없게 된 확실한 이유였다.
이후 만운은 매일같이 국경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덕분에 조무래기 밀수꾼부터 장물아비, 도적, 죄를 짓고 도피하는 자들까지 매일 종경의 옥사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만운의 활약에 진짜 사람들을 털던 도적은 물론 최사립의 밀정들도 운신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허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많은 정보들을 수집했다고는 하나, 형과 형수의 소식은 더 이상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김상진과 그의 휘하 부하들 십여 명이 유라성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마진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끝으로 새로운 소식은 전혀 없었다.
만운은 형과 형수 걱정에 매일 속이 타고 있었지만 요즘은 그것에다 다른 것이 하나가 더 섞여 들어 있었다.
‘왜?’
형의 집무실에서 본 그 이혼장은 가만있다가도 문득 울컥거리며 그의 생각을 비집고 들어오곤 했다. 그것은 답답한 의문으로 타는 속을 더 타게 하고 있었다.
허나 따지든 말리든 형과 형수가 돌아오고 나서의 일이다.
오늘도 일곱 명의 밀수꾼들을 잡아 감옥에 넣고 나오던 만운은 우물가에 앉아 버릇처럼 한탄했다.
“형, 빨리 오기만 해, 빨리. 엄청 따져 주고 싶단 말이야. 그러니 어서 와!”
그런데 만운의 말에 화답하는 소리가 있었다.
“뭘 따져요?”
“누구냣!”
부리나케 고개를 든 만운은 눈앞에 있는 작은 인영에 팽팽하던 긴장을 풀었다. 작은 인영은 벌써 여러 번 본 적 있는 현령의 막내딸이었다.
“민담영이요, 아시죠? 그리고 제가 여기 먼저 와 있었어요.”
“꼬마 아가씨, 야밤에 우물가에 있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어제도 밤에 돌아다닌다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걸 봤는데?”
“히잉, 제발. 어머니께 암말 않으실 거죠? 제가 낮에 여기다 예쁜 돌을 주워다가 놨단 말이에요. 지금 그걸 가지러 온 건데…….”
“이것 말이냐?”
“네!”
만운이 우물 옆에서 매끈한 돌 하나를 집어 주었다. 아이는 기쁜 듯 소리치며 그것을 건네받았다.
만운은 피식 웃고는 한마디 했다.
“어른들 걱정하신다. 그러니 밤에 돌아다니지 마라.”
그러나 어른들의 걱정에는 아랑곳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는 제가 늦게까지 놀아야 하는 이유를 피력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놀기 좋은 때도 드물단 말이에요. 여긴 봄까지도 눈이 오고 가을만 깊어져도 눈이 또 와서 지금 말고는 놀고 싶어도 못 놀아요.”
어제도 현령의 부인이 남편과 천방지축에 왈가닥인 딸아이에 대해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만운의 눈엔 아이가 활동적이고 열정적이라 귀엽게만 보였다.
아이들은 저처럼 뛰어놀아야 한다. 자신도 어렸을 땐 그랬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걱정을 사는 건 곤란하겠지?
문득 매일같이 쏘다니던 자신을 야단치고 달래던 어머니의 음성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만운은 짐짓 담영을 야단치는 시늉을 냈다.
“어허!”
“에헤!”
해가 다 졌지만 샐쭉 웃는 아이의 얼굴이 희게 빛나고 있었다. 만운은 어이가 없어 허 하고 헛웃음을 웃고 말았다.
“그런데 무얼 따지신다는 건가요? 무장님 형님은 무장님보다 더 세세요? 무장님보다 더 크신가요? 전 우리 아버지보다 더 큰 사람은 무장님이 처음이에요.”
정말 뭐가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 다다다 질문을 쏟아 내는 아이는 천진해 보였다. 만운은 아이의 높은 목소리에 모처럼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느긋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른들 사정은 알 것 없단다.”
“피, 우리 아버지랑 똑같은 말씀이네요.”
입을 삐쭉 내미는 아이는 참 귀여웠다.
문득 말 상대가 필요했던 만운은 아이의 뒤를 이은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우리 형은 말이지. 당연히 나보다 더 세지. 이 나라 무장 중에 형보다 더 센 사람은 없을걸?”
“에이, 우리 아버지가 제일 세요!”
“음, 그래? 하지만 네 아버지께도 여쭤 봐!”
“피!”
아이는 제 아버지가 약하다는 말은 듣기 싫었는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만운은 아이의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다. 아무튼 덕분에 말상대가 생긴 만운은 어린아이처럼 다시 제 형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말이지. 형이 나보다 더 큰지는 모르겠지만 난 항상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람처럼 보였어.”
모처럼 형 얘기를 부담 없이 할 수 있게 된 만운은 형이 스승님을 만나고,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무예를 배우면서 형과 함께한 시간들을 재밌게 풀어냈다.
가끔은 수련하기가 싫어 산을 오르며 토끼를 잡아 구워 먹은 것하며, 산돼지를 만나 줄행랑을 쳤던 이야기, 그리고 지금은 그 산돼지도 때려잡는다는 이야기에 담영은 또랑또랑한 눈을 빛내며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담영을 찾는 하녀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무장이 저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준 것은 물론 재밌는 이야기를 해 준 것에 담영은 감격했다. 그래서 담영은 이후 틈만 나면 만운을 찾아와 또 이야기를 해 달라 졸랐다.
만운은 형에 이어 도성의 이야기, 왕세자 저하의 이야기도 해 주고, 형수의 얘기도 해 주며, 제 시름을 달랬다. 그가 입을 다물면 담영이도 제 얘기를 조잘거렸다.
가만 보면 담영은 며칠에 한 번씩은 회초리를 맞는 종아리를 주무르며, 눈꼬리에 눈물을 찍었다. 남들은 왈가닥이라 부를 테지만 만운은 그런 아이가 정말 귀엽게 보였다.
만운에게 담영과 나누는 대화는 형 내외가 실종된 이후 처음으로 맞는 안식과도 같았다.
이때 채운과 강희는 누엔의 집에서 한창 적응 중이었다.
* * *
강희는 이제 자신의 임신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겪은 미래는 그녀의 삶을 많이 변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또 어떤 것들은 어떻게 하여도 피할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임신도 그중 하나라 생각되었다.
허나 그때와 아주 큰 것이 달랐다.
‘정말 이것이 현실일까?’
지금 강희는 사람들이 말하는 신혼의 달콤한 열정에 젖어 있었다.
그날 밤 이후 채운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람들―특히 호근―이 볼 때면 오히려 데면데면해 보일 정도였지만 두 사람이 되는 순간 그는 그녀를 그냥 두는 일이 없었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은 버릇처럼 되었으며, 그녀의 몸 어느 한구석이든 스치듯 만지지 않고는 못 배겼고, 어디든 닿아 있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의 손길 어느 하나 기껍지 않은 것이 없었다. 쑥스럽고 용기가 나지 않아 차마 먼저 손을 내밀지는 못하지만 그가 내민 손을 잡는 일에는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한 번은 그들의 방에 들었던 하녀를 거의 쫓아내다시피 한 그가 직접 그녀의 목욕 시중을 든 적도 있었다.
누가 알까 조마조마했던 것도 한순간, 젖은 수건으로 직접 등을 문질러 주는 그의 손길에 모든 생각이 날아가고 말았다. 결국 등 뒤에서 앞으로 넘어온 손길 때문에 그 목욕 시중은 제대로 끝마칠 수가 없었다.
나중에 그녀는 물바다가 된 목간통을 보고 그를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홀로 목욕을 마쳐야 했다.
‘우리 집이면 이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때 그가 아쉽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강희는 기겁했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해도 만운 도련님 보기가 부끄럽고 민망하여 어찌! 허나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절로 가득 차는 것 같은 행복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행복함에 젖어 한가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강희는 누엔 부인에게 들어 그가 하고 있는 일을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이복동생이라는 오천과 층천은 패거리를 만들어 그녀의 남편을 괴롭히고 있다고 했다. 채운은 그런 속에서 수보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종일 시달리는 채운이 걱정스러웠지만 그는 그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녀에게 낮엔 누엔 부인과 함께 있으라 했고, 저녁엔 방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 때문에 가끔 답답할 때면 약천에 있는 의방의 그네가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한가한 산책이나 오수를 즐길 곳이 못 되는 곳임을 알고 있었다.
강희는 그 답답함을 모두 견딜 수 있었다. 대신 채운이 그녀의 저녁과 밤 시간을 모두 차지했기 때문이다.
강희는 이 소중한 순간들을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이 행복은 원래 자신에게 허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 집’이라면 자신은 당장 대문 밖만 나가도 어린아이에게도 손가락질당하는 성강희이다. 그런 자신에게 이런 행복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그것도 누구도 아닌 가장 큰 상처를 준 윤채운, 그에게서?
그래서 언제나 마음속 깊이 멍울진 죄책감과 회한이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단지 이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들이 강희에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이 추억을 가지고 있다면 어디서든 자신은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하루가 지날수록, 하루만 더, 하루만 더 기억을 쌓고 싶었지만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았다. 그가 주는 사랑이 황송하고 기쁘긴 하여도 그것이 모르고 쌓는 감정이라면 거짓된 연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잖은가.
이젠 모든 것을 고백할 때였다.
마음을 정하자 오히려 평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헌데 그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레기 시작했다.
채운이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에 면포를 감은 채 방 안에 들어섰다.
“서방님, 이제 들어오셔요?”
“이리 오시오, 강희.”
성큼 들어선 채운이 그녀를 부르며 당겨 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강희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세차게 뛰는 것을 듣고 있었다. 흥분한 그의 숨소리가 거세지며, 그녀는 어느새 침상에 누워 있게 되었다.
이것이 그날 이후 이어진 일과와 같은 것이었다.
금방 씻고도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가쁜 신음 소리들이 서로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에 격정의 숨을 뿜어낸 그가 옆으로 누운 채 숨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입술로 계속 강희의 얼굴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그녀의 배 주위를 감싸며 가만히 매만지고 있었다.
“서방님.”
“쉬.”
채운은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어루만지며 후희를 즐기고 있었다.
등과 가슴을 토닥이며 쓰다듬기도 했지만 오늘따라 그는 유난히 배 쪽을 어루만지며 오래 쓰다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그가 만지는 손길이 단순한 애무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납작한 배지만 그 안에선 두 사람의 결실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혹시…….’
강희는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채운을 불렀다.
“서방님?”
“으음?”
‘맙소사, 그가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든 의문에 강희는 가슴이 철렁했다.
허면 그가 기억을 찾은 것 아닐까? 하지만 기억을 찾은 그가 자신에게 이리 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혹시…….”
“음.”
그러나 나른한 채운의 음성을 듣자니 그는 이미 반쯤 잠이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순간만이 그가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다. 내일 또 저들의 치졸하고 비열한 공격을 막으려면 그는 편히 숙면을 취하고 쉬어야만 했다.
그렇게 핑계를 대자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던 고백이 다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강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배에 손을 얹었다.
채운 일행이 안채 가까이 거처를 옮긴 뒤로 평소에 웃음을 달고 사는 호근마저 삭막하게 변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칼바람이 스칠 것 같은 긴장에 싸여 있게 되는 것이다. 더위가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데도 그 긴장 속에 있다 보면 저절로 식은땀이 흐르게 되곤 했다.
아직 누가 누구의 편에 서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초기에 수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호근과 채운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방에 있을 수만 있는가. 수보는 후계자를 보호할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자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그들과 소통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보의 발걸음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목발을 짚어서가 아니라 그 목발을 공격하는 일이 쇄도하기 시작한 것 때문이었다.
누엔의 두 이복동생들은 수보의 다친 다리를 공격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어린아이 장난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은밀하고 심각한 공격까지, 그의 다리가 완쾌되기 전에 다시 부수려는 행위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당을 걷고 있을 때 발을 거는 것은 애교 수준이고, 훈련을 한다며 수시로 대련을 하다 실수로 비껴간 칼이 날아오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그 공격들은 채운 때문에 모두 무위가 되고 있었다.
채운은 수보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있는 듯 보였으나 항상 때에 맞춰 그가 넘어지지 않게 부축해 주었다. 아마 수보가 넘어졌다면 놈들은 그걸 기회로 다리를 밟아 부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수로 날아온 칼이나 넘어진 장작 가래, 심지어 멀쩡한 지붕을 수선하며 떨어진 기와까지 모두 채운을 비켜가지 못했다. 아직 칼을 돌려받지 못한 채운이었지만 그들의 공격은 봉 한 자루를 든 그의 방어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기실 이 유치한 행각에 수보의 다리가 다시 부러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공격을 막느냐 막지 못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부상이 다 낫기도 전에 또 다친다면 당장의 행보에도 지장이 있을 뿐 아니라, 지금 지켜보고 있는 장희여의 눈밖에도 날 것이다.
장희여는 오천과 층천의 장난을 자신의 사위를 시험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리의 부상이야 다 완치될 것이란 확진을 받았으니 그동안 처남들에게서 제 한 몸을 지킬 수 있는지, 그래서 조카들을 지킬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후계자인 장무린과 아이들 사이에 있는 누엔 부인은 감히 해코지할 수 없었으나 장희여가 일부러 방치하다시피 한 수보는 그녀의 두 이복동생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의도를 알게 된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공격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강희는 누엔에게 이럴 것이라면 그의 다리가 다 나았을 때 들어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우려를 표시했다. 괜히 자신들 때문에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누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지금 제 동생은 하루가 달라요. 의원의 말로는 앞으로 채 석 달을 못 넘길 것 같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당장 내일 깨어날 것도 장담할 수가 없어요.]
[저런!]
[동생이 살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어서 기쁜걸요. 그리고 이런 말하긴 싫지만…….]
누엔은 끝이 다 와 있는 동생의 미래에 떨리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이건 우리 부부가 나중에 왔어도 겪을 일이에요. 하지만 동생이 있고 없고가 달라요. 우린 무린이 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돌아왔어야 했어요. 동생이 가고…… 나면 당장 그 애가 갖고 있던 재산에 대한 상속과 후견인이 정해져야 해요. 우리가 이 집에서 빨리 자리를 잡아야 무린의 아이들의 후견인이 될 수 있어요. 아니면 예전에 야반도주했던 염치없는 딸로서 내쳐지면 그만이거든요.]
장무린이 죽을병에 걸리면서 어느덧 파가 갈린 가문의 사람들은 무린의 아들과 그의 이복동생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든든한 보호자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어린 무린의 아들 쪽에 사람이 적었다.
장희여가 살아 있다지만 그도 손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아들이 아프면서 장희여도 점점 기력이 쇠약해지며, 자리에 눕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헌데 바로 이때 수보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 꽤 많았다.
그가 돌아오자 무린은 가끔씩 정신이 맑아지는 때 뒤를 맡길 수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인계하기 시작했다. 과연 하루가 급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지 거의 한 달이 지나며, 수보는 부목을 떼어 내고 지팡이만 짚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더욱 활동적으로 나다니기 시작했다. 수보가 사람을 만날수록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늘었고, 그 말은 반대로 오천과 층천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어떤 방법으로도 수보를 해코지할 방법이 막힌 두 형제는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수보가 장조카의 후견인으로 확정되고 나면 자신들이 후계로 올라설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어떻게든 그 전에 그를 해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차라리 암살을 하거나 했으면 좋겠지만 집 안에서 그 방법을 쓸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해치웠다면 좋았을걸. 그땐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이였다. 집에 온 이상 그 방법은 이미 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눈감아 주는 선의 수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수보를 암살하려다 들통 나게 된다면―필시 들통 나게 되어 있었다.― 자신들은 후계는 고사하고 집에서 쫓겨나거나 심하면 관에 끌려갈 수도 있었다. 아버지, 장희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의원이란 작자가 데려온 호위 무사라는 이는 정말 눈엣가시였다. 한 번은 수보가 걸어오는 방향에서 거의 열 명은 되는 호위 무사들을 몰고 훈련을 핑계 삼아 정신없이 뛰어다니게 했다.
그러나 그 호위들은 수보의 몸을 스치지도 못했다.
정말 아무도 스치지도 못했다!
독이 오른 그들은 또다시 채운과 호근을 대동하고 걸어오고 있는 수보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다가갔다. 항상 하던 시비였지만 오늘은 작정을 한 터라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그 말을 듣고도 네가 그냥 갈 수 있는가 보자.’
오천의 눈이 흉흉하게 빛나며 층천에게 눈짓을 했다.
[안녕하시오.]
수보가 그들에게 먼저 인사했다. 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지만 이들을 피하여 뒤를 보이느니 차라리 이렇게 마주치는 것이 나았다.
안 그러면 더 거머리처럼 붙는 형제였다. 이제 괜한 시비와 말꼬리 잡기와 모욕 등은 일상화가 되어 있을 정도로 이들과 부딪히는 것이 불쾌한 것은 사실이었다.
[안녕하시오라니. 제깟 주제에 감히 우리더러 안녕하시오란다.]
[그러게, 형.]
상종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수보는 다시 고개를 까닥하고 돌아서려 했다. 허나 이렇게 끝날 이들이 아니었다.
[역시 소박 받고 돌아온 하자 있는 여인과 함께 살려면 저런 주제밖에 더 되겠어? 하긴 그런 여인을 데리고 산다는 건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 거지. 안 그래, 형?]
[그래, 맞다. 뱃속이 시커먼 자야. 필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다.]
누엔 부인은 비록 배는 다르나 제 누나였다.
헌데 제 누나를 그리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과연 고위 관리의 자제로 태어나 자란 귀공자들이란 말인가. 건들거리며 이죽거리는 그 모습은 시정잡배 뺨 칠 정도였다.
그예 수보가 그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있을 사내가 어디 있겠는가. 누엔은 자신의 미래를 맞바꿔 평생을 사랑한 여인이었다.
자신에 대한 어떤 비웃음이나 조롱도 감수하던 그였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네 이놈들!]
수보가 목발 대신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집어 던지고 칼을 들고 말았다.
상황은 당장에라도 불붙을 것만 같이 급변하고 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수보가 곧이라도 달려들 듯 나설 태세였다.
[오호, 네가 왕년에 한가락 한 솜씨만 믿고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네 솜씨를 보자. 어때, 한번 덤벼 보시지?]
바로 이것이었다.
과연 바라던 대로 수보가 덤벼들자 층천이 비웃으며 제 호위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때 채운이 그 앞으로 나서며 수보를 가로막고 섰다.
[이건 뭐야?]
오천의 패거리에게서 이죽거리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동안 이 작자가 아무리 요리조리 잘 막아 왔다지만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것들이었다.
헌데 이쪽은 두 형제의 무리와 호위를 포함해 열 명이 넘는 패거리가 각자 칼까지 들고 있었다. 그런 자신들에게 겨우 봉 하나를 든 채운이 앞을 막아섰으니, 가소롭게 보이는 것이다.
숱하게 노려 왔던 수보를 이자 때문에 여태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기회를 잡은 오천은 때를 노려 무리에게 다시 눈짓했다.
‘당장 수보가 안 되면 이자부터.’
형제의 호위 무사 네 명이 채운을 포위하고 둘러섰다. 팔다리 어디 하나 베어 버리거나 실수로 목을 베어 버리면 다시는 덤비지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 수보를 해치우는 건 식은 죽 먹기가 된다.
무사들이 나오는 순간, 호근은 재빨리 수보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칼이 날아다니는 상황은 채운에게 맡기면 될 것이다.
헌데 채운과 호위 무사들이 대치하는 순간에 호근의 옆에 누군가 슬쩍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어어?”
“쉬.”
“타앗!”
호근의 옆에 온 자가 조용히 하라며 손짓을 함과 동시에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합 소리와 함께 네 명의 남자들이 동시에 채운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맨 앞의 무사를 피한 채운은 그 바로 뒤의 무사의 손에서 칼을 잡아채고, 나머지의 손과 발을 매섭게 후려쳤다.
채운이 처음 피했던 호위 무사가 뒤돌아섰을 때, 그는 채운과 단둘이 마주 서고 있었다. 시작과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엇!”
마지막 남은 그가 채운에게 덤볐지만 그도 채운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호위 무사들의 굴욕에 두 형제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이 모자란 것들아, 저놈을 치라니까!]
호근이 보고 깜짝 놀란 그는 채운이 호위 무사들을 쓰러뜨리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장희여의 오른팔이자 이 집안의 총관을 맡고 있는 장해서라는 사람이었다.
층천이 굴욕을 당한 제 호위 무사들에게 소리 지르고 있을 때, 오천이 그를 보았다.
[앗! 장 총관!]
오천이 자신을 지목해 부르자 그제야 장해서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도련님들을 뵙습니다.]
읍을 하는 총관에게 두 형제가 채운을 가리키며 소리치기 직전,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방금 태수님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차 무위님의 손님께 칼을 차도록 허용한다고 하셨습니다.]
[뭐, 뭐라고요?]
[태수께서 조만간 차 무위님의 호위를 새로 붙여 주실 모양입니다. 그때까지만 손님께 부탁드린다고 하셨습니다. 보아하니 지금 손님과 대련을 하고자 하신 모양인데, 제가 참관자가 되어 드리지요. 기왕이면 봉보다 칼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어떠신지요?]
[뭐요!]
층천은 장해서의 기함할 소식에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수보가 호위 무사가 아닌가! 일개 호위에게 호위를 붙이다니, 그럼 그를 정녕 사위로 인정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소리 아닌가!
[아, 아니오. 가벼운 유흥이었소.]
허나 더 빨리 충격에서 벗어난 오천이 층천을 말렸다. 그리고 층천과 패거리들을 수습하여 재빨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굳이 아버지의 오른팔인 장해서를 통해 아버지의 의중을 전한 것은 그 뜻을 알고도 남을 일이었다. 재빨리 자리를 떠나는 오천의 뒷모습은 분기로 떨리고 있었다.
[요즘 일이 벌어지는데, 빨리 조치를 취하지 못해 드려 죄송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장해서에게 수보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채운이 손님이 아닌 그의 호위였다는 것을 누구인들 모르고 있겠는가. 그동안 형제의 짓거리를 빤히 알면서 이제야 인심을 쓰듯 손님에게 칼을 허용하다니.
다만 자객에 의한 암살이나 밤에 이루어지는 암습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 장희여 나름의 공정한 시험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려야겠습니다.]
[네, 그러시지요.]
장해서는 그때까지 멀뚱하게 아무 말 않고 있는 채운을 보고는 돌아섰다. 그 시선이 이채를 띠고 있었지만 채운은 그의 눈빛에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장희여를 만나고 나온 수보는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장인과의 대화는 짧았지만 유익했다. 이전에 같이 일한 두 사람을 자신의 곁에 두게 된 것이다.
마지막에 장희여는 내심 수보가 자신의 손님이라 데려온 채운을 호위로 삼을 줄 알았는지 의문을 표했다.
[헌데 자네 손님을 호위로 들일 생각은 없는가?]
[아닙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갈 사람입니다. 더구나 송국말을 할 줄 모르기에 곁에 오래 둘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이로써 수보는 며칠 내에 호위 무사를 갖고, 완전한 장희여 집안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것은 수보에게 좋기도 나쁘기도 한 소식이었다. 보호막을 하나 세워 주는 대신에 다른 보호막을 거둘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수보의 다리는 지팡이만 조금 의지할 정도로 거의 나아가고 있었다. 또 이전에 알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입지를 다지고, 그와 함께 장희여의 장손자의 후견인으로서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자 두 패로 나뉘어져 있던 가문 사람들의 추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수보와 누엔에게 유리한 쪽으로. 허나 장희여의 보호막이 거두어지는 순간부터 상황은 어려워질 것이다.
이후의 상황에는 채운이 관여할 수 없었다.
수보의 호위 무사가 정해지면 채운은 더 이상 머물 구실을 잃게 되며 떠나야 했다. 또한 강희가 원행을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한 시간만큼 머문 후였다.
다만 이후 수보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채운은 그와 함께 사람들을 만나고 장희여의 상단들을 둘러보며, 그 규모의 거대함에 감탄하고 놀라고 있었다. 그의 상단의 규모는 려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성도종 상단 서넛을 합쳐 놓은 것과도 비슷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규모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취급하는 품목 중 자국에선 결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던 그것을 보게 된 것이다.
수보에게 그것에 관한 것을 묻자 그는 그 품목이 취급이 까다롭고, 경로를 알기 힘든 것이라 했다. 그런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권을 잡아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장손의 후견인으로 확정되기만 하면 그는 당장 장희여 집안의 실세에 들게 될 일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알아보고 도와 드리겠소!]
수보는 진심을 담아 적극적으로 약속했다.
이는 호근도 강희도 모르게 몰래 알아볼 일이었다.
수보의 은밀한 약조에 채운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만일 수보의 도움으로 이것에 대한 흔적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이는 최사립을 처리할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를 쳐 낼 명분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수보가 확실히 이 집안에서 우뚝 서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드디어 귀환길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새로운 각오가 샘솟았다.
‘강희.’
어제도 머뭇거리던 그녀는 끝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언제 말하는 것이 좋을까?’
때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 일부러 숨겨 온 일이기에 그로서도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이제는 충분히 마음을 전했으니 또 떠날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무엇보다 강희의 배 속엔 우리 두 사람의 결실인 아이도 있잖은가.’
매일 밤, 조금씩 허리선이 굵어지는 그녀를 만지는 일은 생소하면서도 뿌듯했다. 그나저나 어떤 녀석이 들었기에 이렇게 적절하기도 하고 위태롭기도 한 순간에 찾아온 것일까.
궁금하고 사랑스러웠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강희와 더욱 함께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