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가시굴 피난처
호근의 서신은 엄청난 돈을 들인 덕분에 장희여에게 무사히 전해졌다. 그리고 야밤에 서신을 펼쳐 든 장희여는 다음 날 새벽 당장 마차를 보내 딸 부부를 데려오게 했다.
약천과 가양성을 잇는 길은 반나절 정도의 거리였지만 환자―수보―가 있는 마차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모시러 온 화려한 마차 옆에는 호근이 빌린 마차에 강희와 채운이 함께 타고 있었다.
수보가 빨리 가지 못하는 덕분에 강희가 탄 마차도 쉬엄쉬엄 따라가느라 힘들지 않은 여행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여행이 며칠씩 장기간이 된다면 정말 힘들 것이다. 환자도 그렇지만 임산부라면 더더욱 이런 여행을 오래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채운은 적지나 다름없는 이 나라에서 강희가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가장 꺼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들만 머무는 곳이 아닌 장희여의 그늘 아래에 숨어야 하니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그곳에선 강희의 몸 상태를 감안해 적어도 한 달 이상 머물러야 했다. 때문에 채운은 그동안 강희가 사람들 앞에서 꽁꽁 감춰질 완벽한 포장을 궁리하고, 그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임산부요?”
“그렇소. 당신은 이제 누엔 부인의 집에 들거든 주어진 거처 말고는 다니기 힘들 것이오. 허나 멀쩡한 사람이 그렇게 있다간 의심을 사기 쉬우니 이유를 만든 것이오. 서 의원이 절대 안정이란 처방을 내렸다고 말을 거들 터이니, 당신은 사람들과 왕래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아, 그런 거로군요.”
강희는 채운의 설명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
“하지만 서방님의 시중이나 식사 같은 것은 어쩌지요?”
“그런 건 걱정 마시오. 우리는 누엔 부인의 집에 손님 자격으로 가는 것이오. 시중드는 이가 따로 있을 거라 했으니, 당신은 임산부 역할에 충실하면 되오.”
이 설명은 채운이 그녀를 특별히 더 보호하려는 이유에도 부합되어 여러 가지로 유용했다. 따라서 강희의 현재 모습은 식방에서 대외적으로 보이던 변장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첨가한 상태가 된 것이다.
‘임산부 역할이라…….’
강희는 그 말을 속으로 곰곰이 되풀이해 생각해 보았다.
지난번 자신이 조금 피곤해 했다고 앞으로 다시는 식방 같은 것을 시키지 않겠다고 하더니,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한 것 같았다.
“네, 명심할게요.”
“그래요. 정말 명심하시오.”
그렇게 말하는 사이 마차가 다시 덜컹했고, 채운은 그녀를 감싸 안으며 그녀가 행여나 충격을 받지 않도록 조심했다. 정말 임산부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지루한 마차여행이 계속되며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채운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풍광을 보는 것도 질리기 시작하는 즈음, 강희는 그가 새로 정해 준 자신의 설정을 다시 생각해 보다가 강한 의혹에 들기 시작했다.
‘임산부?’
채운은 그것이 변장에 더해진 조건이라고만 했지만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모르고 있을 때는 전혀 생각도 않고 있었지만 그 말과 자신의 증상을 대조하기 시작하자 가슴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한 것이다.
‘임신? 내가 혹 임신한 것은 아닐까?’
임신에 대해선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혈흔이 비쳤을 때 아니라고 포기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혈흔이 비친 것은 잠깐으로, 그 양이 무척 미미했다.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많이 졸고 많이 잤는지, 또 갑자기 식욕이 증가해 얼마나 많이 먹게 되었는지 생각하니 서서히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수란이 임신했을 때 이랬던 것 같았다. 수시로 졸고, 많이 먹고. 어떤 땐 밤에도 애심을 깨워 부엌에서 몰래 무엇을 해 먹곤 하다 하린댁에게 들킨 적도 있었다.
하린댁은 고자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란의 상태를 짐작하기에 그 일을 알렸다. 덕분에 이후 수란은 임산부로서 먹고 싶은 것을 그렇게 몰래 먹지 않아도 됐다.
정신이 번쩍 든 강희는 자신의 증상을 다시 일일이 짚어 보았다. 그러자 자신도 그때 수란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수시로 쏟아지는 잠.
머리만 기대면 낮이고 밤이고 그대로 잠이 들곤 했다.
많이 먹기?
생각해 보니 그가 먹는 양과 거의 같은 양을 먹다니 보통이 넘고말고였다. 또 평소엔 그리 좋아하지 않던 과일들을 먹어 대던 것도 임신의 징후였다.
‘그렇구나!’
수란과 여러모로 직접 비교해 보니 임신이 맞았다. 한 가지 다르다면 수란은 마음 놓고 먹으라고 하니 오히려 입덧 때문에 물만 마시고도 토하곤 했지만 자신은 그런 건 없는 것 같았다. 대신 얼마나 잘 먹는지.
‘세상에!’
며칠 전엔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닌가 저어되어 서 의원에게 진맥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 그것을 채운과 의논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태성을 보았다는 말에 여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젠 진맥을 받지 않아도 자신의 증상으로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내가 임신이라니!’
강희는 자신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고 있는 채운을 올려다봤다. 그의 굳어 있는 표정은 앞으로 귀환할 날까지 장희여의 집에서 있을 일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엔 부인이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처음엔 그 어촌 마을로 간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닌 본래의 집에 가는 것이며, 그 숨은 사정까지 듣게 되자 그녀의 처지가 너무나 기구한 것 같았다.
그러나 위로하기엔 누엔 부인의 표정이 너무나 설레고 흥분되어 보였다. 비록 필요에 의한 것이라지만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화려한 마차에 들어가 있는 그녀와는 말을 나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신분이 역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채운은 자신이 그들을 모시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했다.
앞으로의 일에 굳어 있는 그의 이마를 만져서 풀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짐작일 뿐이지만 임신이 사실이라면 어떨까?
강희는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서방님, 저 임신했어요.’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강희를 어느새 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불편하오? 관도가 잘 닦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산길을 지나야 해서 많이 힘들 것이오. 내게 기대서 충격을 완화해야 하오.”
“네, 지금도 그러고 있는 걸요?”
“강희?”
“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것이오. 장희여라는 사람은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아직도 권세가 대단한 사람이라 하였소. 그가 운영하는 상단도 송국에서 몇 번째 안으로 꼽히는 큰 곳이라 하고 말이오.”
“하지만 제가 알기로 최사립 대감은 송국의 관리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 서방님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 이상 관리는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강희는 못내 그것이 걱정되었다.
그녀의 걱정을 이해한 채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 생각을 바꾼 이유도 설명해 주었다.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해서 그쪽은 피하려고 하였소. 하지만 일단 현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니 우리에게 신경 쓸 가능성은 적어지고, 추적자가 있다는 걸 안 이상 우리는 꽁꽁 숨어 시간을 벌 필요가 있소. 아무리 그들이라도 설마 우리가 송국 권력자의 집에 숨어 있으리란 생각을 하겠소?”
“아, 그렇군요.”
그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느냐는 믿음이 더 컸지만 채운이 이유를 설명해 준 덕분에 강희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몸을 추스르면 당장 귀환할 것 같다가 더 머물게 된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저들의 매서운 추격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아닌가. 또한 공교롭게도 덕분에 자신의 임신과 더불어 안정기까지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그것이 공교로운 것이 아니라 주된 이유라는 걸, 강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시간이 지나면 이곳에 몰린 밀정들과 추적자들이 분산될 것이오.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아직 이곳에 더 있어야 하오.”
역시 그랬다. 채운은 그녀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며 더 머물러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강희는 그의 계획은 이해했지만 불쑥 걱정이 솟았다.
“그렇다면 국경은 어떻습니까? 여기까지 추적해 온 저들이라면 그곳에도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국경까지 가게 되면 일이 풀릴 것이라 생각되오. 내 생각이지만 만운이 그곳에 있을 것이오. 내 어떻게든 당신과 무사히 돌아갈 것이오. 그러니 그런 걱정스런 얼굴 마시오.”
‘아, 만운 도련님.’
맞다. 만운 도련님이 형을 얼마나 찾고 있겠는가.
잠시지만 그를 잊고 있었다.
강희가 만운을 떠올릴 동안 채운도 동생을 생각하며 마음이 울적해진 것 같았다.
“만운이가…… 많이 걱정할 것이오.”
“…….”
‘보고 싶다’란 말이 생략된 그 말에 강희는 울컥 눈물이 나왔다.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그의 감정이 절절히 느껴져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흐읍, 흑!”
소리 내지 않고 울려는 노력에 어깨가 더 떨리고 있었다. 분수처럼 뿜어진 눈물은 옷깃을 다 적실 정도로 줄줄 새어 나와 달래 주려는 채운의 소매까지 다 젖고 있었다.
“저런, 내가 괜한 소리를 했소. 울지 마시오. 울지 마시오, 부인.”
그러면서 채운은 속으로만 이런 말로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우리 아기가 엄마 따라 슬퍼하겠소. 그러니 울지 마시오.’
그로부터 강희는 한참을 더 흐느꼈고, 채운은 그녀를 계속 달래 주었다. 처음 강희가 운 것은 채운과 만운을 생각해서였지만 그다음엔 자신 때문이었다.
‘이제 어떡하나, 어떡하나, 어떡하나.’
강희는 이제 고백할 용기마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임신한 몸으로서 내가 당신 아내다, 성강희다 말하면 그를 붙잡겠다고 용을 쓰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말이다.
그를 놓아주겠다는 처음의 각오는 슬며시 잊어버리고, 그가 기억을 잊은 틈을 타 제 욕심을 차리고 있었지 않은가.
그리고 또 가슴이 아픈 것은 아이 때문이었다.
피눈물을 흘리던 그 아이의 한을 풀어 주고 싶었다. 이번에는 제 손으로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좋은 어미가 되어 정말 많이 사랑받는 아이로 직접 키워 내고 싶었다.
강희는 자신의 배를 소중히 감싸며 웅크렸다.
채운이 그녀가 배를 감싸 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물이, 그리고 이 행동이 강희도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게 해 줬다.
그는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강희는 잠이 들고 말았다.
약 스무 명 남짓의 호위들과 다섯 명의 시중인들, 그리고 채운 일행까지 약 서른 명의 일행이 움직인 행렬은 별 탈 없이 가양성으로 향했다.
환자를 위해 천천히 가던 마차는 반나절이 지나자 가양성의 관문을 지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시진 남짓 더 가서야 거대한 장원에 도착했다.
바로 장희여의 본가에 도착한 것이다.
그토록 찾던 딸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을까. 미리 달려갔던 수행원이 딸의 도착을 알린 것인지 새벽부터 사람들을 닦달해 딸을 모셔 오라 했던 장희여가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과연 딸이 반가운 것일까, 아니면 생각대로 딸을 이용할 수 있을지 살펴보려는 것일까?’
호근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생각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마는 약 두 달간 보아 온 누엔 부부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생면부지인 타인을 구하려 뛰어왔던 그 정성부터가 그랬고, 이후에 보여 줬던 순박함과 정직함도 그랬다.
채운이 말하기로 강희가 보답하기 위해 내민 패물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했다. 그들은 정말 자신들이 가진 최소한의 것으로 행복을 꾸리는 이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후계 싸움을 둘러싼 치열한 전쟁터를 어찌 헤쳐 나갈지 걱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해 줄 수도 없고, 옆에서 계속 지켜봐 줄 수도 없는 현실에 착잡한 마음만 들었다. 그리고 윤채운 부부도 이곳에 몸을 숨겨야만 했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왔느냐?]
[소녀, 이제야 아버지를 뵙습니다.]
십오 년 만에 이루어진 부녀간의 상봉에 주위는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숙연한 분위기로 부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두 부녀가 손을 잡고 말로는 다하지 못할 십오 년의 세월을 나누고 있을 때, 수보가 호근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리는 모습을 보던 장희여의 얼굴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는 그의 모습이 가당찮게 보이는 것이다.
[자네도…… 왔는가.]
[죄송합니다, 태수님.]
[난 지금 태수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이젠 태수라 부르지 말아야지, 안 그런가?]
누엔과 그를 번갈아 보는 모습은 자신을 다른 호칭으로 불러야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목발을 짚은 그의 모습에 찌푸린 아버지 때문에 가슴이 철렁했던 누엔은 가슴을 졸이며 그를 반기는 아버지의 손을 다시 꼭 붙잡았다.
[그래, 잘 왔네. 헌데 그 다리는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려 송구합니다. 넘어졌다가 부러진 것인데, 이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운 좋게 실력이 좋은 서 의원님을 만나서 말입니다.]
[서 의원?]
[안녕하십니까?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호근은 장희여가 자신을 보는 틈을 타 재빨리 인사를 했다. 장희여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서호근.
바로 이자가 자신에게 서신을 보내 딸의 행방을 알린 자였다.
[자네가 내게 서신을 보낸 자인가?]
[네, 그렇습니다.]
장희여는 반들거리는 서호근의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근이 따님을 찾았다며 보내온 서신에 온갖 미사여구가 들어 있었지만 보상을 바라는 제 뜻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돈푼이나 좀 쥐여 주면 될 것이다.
호근은 장희여의 머릿속에서 쉽게 잊히고 말았다.
[허허, 고맙군.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다들 들어가지.]
그가 딸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뒤로 채운이 수보의 등 뒤에 서서 함께 걸었다. 자신의 하인들과 호위 무사들 말고도 칼을 든 무사를 본 장희여의 눈이 다시 찌푸려졌다.
무기를 든 낯모르는 무사를 함부로 집 안에 들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저자는 누구인가?]
[앗,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저 사람은 저의 동행입니다. 사정이 있어 저의 옛 스승께서 제게 맡긴 그분의 딸 내외입니다. 헌데 여기로 오게 되었다고 하니 저 파락호, 아니, 무장께서 수보 형의 수발을 들어 주시기로 하였습니다. 수보 형의 다리는 다음 달 정도면 거의 나을 것이라, 그때까지는 수발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기에…….]
호근이 일부러 실수하는 척 채운에 대해 내뱉은 말에 장희여는 마뜩잖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채운이 무장이든 파락호든 별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서호근의 사정 따위야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허나 그가 칼을 들고 자신의 집에 드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그런가? 으흠, 차 무위의 수발을 들어 줄 이는 여기 얼마든지 있네. 그리고 내 집에서 내 무사 이외에 다른 이에게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일은 허락하지 못할 일이야.]
‘차 무위?’
누구인가 잠시 생각하던 호근은 곧 그것이 수보를 가리킴을 알 수 있었다. 장희여의 헛기침에는 호근이 수보를 지칭한 호칭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기색이 있었다.
그것은 당장은 고무적인 반응이었다. 수보를 사위로서 우대하겠다는 말과도 같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 아무렴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호근은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고는 당장 달려가 채운에게 지금은 칼을 치우라 작게 속삭였다.
호랑이 굴인지 아닌지 모를 곳에 들어가면서 몸에서 칼을 떼라는 건 위험한 선택일 수 있었다. 허나 수보를 지키기로 약속했으니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중에 허락받더라도 지금은 칼을 치워야 했다.
장희여는 채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행원에게 칼을 내미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다시 안으로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운의 한 발짝 뒤에서 강희가 따라 걸었다.
장희여는 호근의 스승 딸이라는 여인에 대해선 관심을 보일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십오 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딸과 사위를 맞는 일이 더 중요했다. 호근 일행에게 방을 내주라 이른 그는 누엔과 수보를 데리고 안채로 들어갔다.
상봉은 가족들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호근과 채운, 강희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작은 방에 들어가 쉴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장희여의 집에 안착한 것이다.
* * *
강희가 누엔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건 이틀이 지나고 나서였다.
[부인!]
[부인! 세상에, 어쩜.]
누엔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입었던 수수하고 허름한 옷가지를 벗고 성장을 한 누엔은 목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강희는 뜰 안으로 들어서는 누엔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섰던 시비 두 사람이 강희를 막으려 했다.
[물러나라! 내 손님이다. 너희들이 함부로 할 분이 아니시다!]
누엔의 단호한 명령에 시비들이 물러났다. 다정하고 온화하기만 한 줄 알았던 누엔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 강희는 잠시 놀랐으나, 자신을 보며 여전한 눈으로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부인, 정말 아름다우셔요.]
[고마워요. 부인도 머무는 동안 편히 지내어요, 부디.]
[부인…….]
두 사람은 시비를 멀찍이 뒤로 물리고 뜰의 정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여인이 뜰에서 만나는 동안 안으로 든 수보와 채운, 호근도 한자리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나누었다.
[수보 형, 아니, 차 무위님, 어떠셨습니까? 사람들은 많이 만나셨습니까?]
수보는 장희여의 뜻대로 누엔과 돌아오자마자 그의 이전 신분을 회복하여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돌아올 때보다 도리어 더 좋지 않았다.
[처음 서 의원께서 왜 우리에게 아버님이 찾는 걸 알리는 걸 힘들어 했는지 충분히 알 만한 시간이었지요. 허나 아직은 처남이 살아 있고, 아버님이 강건하시오. 난 이 다리가 낫는 시간 동안 저들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방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호근의 침음에 수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선 이곳 사람들에 대해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서 의원도 보셨다시피 처남은 올해를 넘기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부인께서 상심이 크셨겠군요.]
[네. 그래도 처남은 오랜만에 누이를 보고, 또 제 자식들을 맡길 보호자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화색이 돌아온 듯싶었습니다. 그런 일도 드물었다고 하던데……. 어젠 일어나 앉아 아내와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아내는 그런 처남을 보고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안 되더군요.]
[그러셨겠지요. 허면 아이들도 만나 보셨습니까?]
[네, 아내는 아이들을 보고 또 울지 않으려 애써야 했습니다. 그때도 결국 울었지만요. 장조카는 아주 잘생긴 아이였습니다. 어머니도 일찍 잃고 아버지도 곧 잃을 걸 알면서도 열 살답지 않게 매우 의젓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이는 아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귀여운 딸아이였습니다. 아내가 아이들을 안고 있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돌아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때 수보와 같은 이야기를 하던 누엔은 강희와 서로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모시게 된 주인이 연신 울기만 하기에 시비들은 익숙하게 찬 수건을 대 주고 물러났다.
그리고 수보는 안과 밖에서 또 자신들을 위협할 이들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이복동생들은 오천과 층천이라고 합니다. 각각 서른한 살, 스물일곱 살입니다. 그 사이에 딸이 있지만 시집갔고요. 하지만 아내의 서모아버지의 첩께서 아직 정정하십니다. 또 오천과 층천은 처남이 자리보전을 하자 본격적으로 가문을 이을 야욕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온 것을 보고 싫어하는 기색을 감추지도 않더군요. 둘째가 머리가 딸려 단순하고 우직한 반면 첫째는 매우 교활합니다. 제가 오전에 잠시 목발 없이 걸어야 했던 것도 층천이 제 목발을 집어 던져 그리된 것입니다. 헌데 그것은 분명 오천이 시킨 것일 겁니다. 제 다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고 싶어서요.]
[뭐라구요!]
벌떡 일어난 호근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본신에 무위는 쥐뿔도 없으면서 자신의 환자에 관한 한 이렇게 화를 낼 줄 아는 이였던 것이다.
오늘 호근의 일면을 새롭게 알게 되자 채운은 빙긋 웃었다. 저만 하면 가끔 대련을 하자 해 보아도 될 듯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남자가 일신에 무예를 갖추는 것은 미덕이었다. 아무리 칼을 쥐어 본 적이 없다 해도 지금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호근은 알 수 없는 소름이 목덜미를 쓰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저가 화가 난 탓일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화가 나는데, 왜 이렇게 오싹한 것일까.
[아, 별일 아닙니다. 그건 귀엽게 보면 장난이라 볼 수도 있지요. 허나 곧 장난이 아니게 될 겁니다. 허니 이제 두 분이 제 곁에 계셔야겠습니다. 처음은 단순히 목발을 집어 던진 것뿐이지만 오천의 눈에 스친 빛을 놓칠 수가 없더군요. 기회를 봐서 저를 해코지하려는 것 같습니다. 워낙 오랜만에 돌아온 곳이라 저도 아직은 누가 누구의 사람인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허니 지금 믿을 분은 두 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같이 온 것 아니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렇지요, 무장님?]
호근은 제가 나서서 지킬 듯 큰소리를 치더니 마지막엔 채운을 슬며시 보는 것이다. 누가 보면 그가 수보의 호위인 줄 알 것이다.
채운은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네, 믿습니다. 부디 이 다리가 나을 때까지만 부탁드립니다.]
“아…… 닙니다. 제가 부탁드립니다.”
채운의 말은 려국말이었지만 수보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하하하, 아, 그리고 제가 서 의원님께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세 분은 곧 거처를 옮기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아버님께서 당장 제 다리를 살펴보게 하셨습니다. 네, 의원님 생각이 맞습니다. 제 다리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그걸 보기 위함이었지요.]
호근의 일그러지는 얼굴에 답하고는 수보는 담담히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의원이 아버님 앞에서 서 의원의 솜씨에 계속 감탄을 했습니다. 더구나 저의 상태가 사고 직후 당시에는 어땠는지 아내가 설명하자 이토록 빨리 나을 수 있었던 것은 천행이라 입이 닳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래서 다 나을 때까지는 서 의원에게 계속 치료를 받겠다고 말할 수 있었지요.]
[그렇군요. 아무튼 좀 길게 걸으셨나 봅니다. 다리가 조금 부었습니다. 헌데 어떠셨습니까. 걸어 볼 만했습니까?]
수보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의 다리부터 살펴보았던 호근이었다. 헌데 갑자기 부어오른 다리가 저들의 몹쓸 장난 때문이라니. 그리고 그것이 곧 장난이 아니게 될 거라는 말도 심상치 않게 와 닿았다.
[네, 저릿했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럼 이제 며칠 내로 목발 없이 걸어 보기 시작하겠습니다.]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그래도 오늘부터 사흘은 이쪽 발에 절대 힘을 주지 마십시오!]
[네, 어느 분 말씀이라고 안 듣겠습니까.]
[하하하, 그렇지요? 의원의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것 아닙니까?]
호근의 너스레에 세 사람은 같이 웃었다.
수보가 들어간 방 밖으로 정겨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누엔과 강희도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숙소는 누엔과 수보가 머무는 별채 옆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추적자들도 채운의 행방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 * *
“형은 언제 돌아올까?”
만운은 혼자가 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또 중얼거렸다.
그는 송국에 가지 못하기도 했지만 당장 국경으로 갈 수도 없었다. 직접 형을 찾으러 갈 수 없는 것만 해도 머리에서 열이 솟을 것 같은데, 다른 일이 또 터진 것이다.
“미친놈, 제가 뭐라고 또 죽으려고 해! 목숨이 그렇게나 가벼워? 죽일 놈!”
금방 형을 생각하며 그리움을 표하던 만운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욕이 나오고 있었다.
바로 해적선이 폭파될 때 살아남은 해적, 아니, 최사립의 이용물만 되고 불구가 된 채 간신히 살아 있는 그에게 하는 욕이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그도 더 이상 죽으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다시는 죽게 만들지 못할 사람이 곧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또 한 마디 욕이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죽일 놈!”
“앗, 저 죽이시려고요?”
사방이 음습한 막힌 공간이었지만 만운이 홧김에 내뱉은 말에 답하는 이가 있었다. 서궁의 지하 감옥에 갇힌 해적, 크나다가 그 말에 답을 한 것이다.
“왜, 죽여 주랴?”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안 죽고 싶으면 저리 비켜!”
두 손에 쇠사슬이 감긴 크나다는 만운을 피해 옆으로 슬금슬금 피하고 있었다.
크나다는 처음엔 탈출을 위해 발광을 하기도 하고, 간수가 오기만 하면 공격하며 난동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얌전한 상태였다. 그는 원래 생에 집착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채운의 소식을 알지 못한 지 오래라 완전히 최저인 상태의 만운에게 덤볐다가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맞은 것이다.
이후로 크나다는 만운만 나타나면 슬슬 기는 중이었다.
크나다가 갇혀 있는 벽 뒤에는 폭파된 해적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가 있었다. 서궁의 은밀한 모처에 있다가 바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헌데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된 날, 크나다가 그자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를 안다는 표시를 한 크나다는 만운에게 당장 멱살이 잡히고 말았다. 머리가 좋은 자답게 그는 협상도 잘하는 이였다. 허나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만운에게는 그런 협상이나 사정이 통하지가 않았다.
주먹을 드는 만운에게 크나다는 크게 외쳐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내, 내일부터 식사에 떡을 하나씩만 넣어 주십시오! 그러면…….”
“말하겠다?”
“네…….”
비록 해적이라지만 책사라는 긍지와 자존심을 가졌던 그였건만 배고픔과 외로움은 견뎌 낼 재간이 없는 것이었다.
아무튼 크나다가 소신껏 한 협상은 통한 것 같았다. 만운은 그가 내건 조건보다 더 관대한 포상을 걸었다.
“저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 주기만 한다면 매일 떡을 넣어 줌은 물론, 그날은 술 한 병도 줄 것이다.”
“우와!”
만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크나다는 환성을 지르며 말했다.
“저 사람은 조타수입니다! 이름은 김봉곤? 임봉곤? 아무튼 봉곤이 맞습니다. 사람들이 봉곤 형님이라 불렀거든요. 그리고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은 자신과 같이 배를 몰지만 작은아들은 관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원래 살던 곳은 서남해의 어디라 하던데, 그것까지는 잘…….”
“네놈이 도움이 될 때도 다 있군.”
“그럼요,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써 보시면…….”
“왁!”
만운의 외마디 노성에 크나다는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이토록 겁이 많고 몸을 사리는 주제에 처음 그 고문은 어찌 견뎠는지 모를 일이었다.
“알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 확인되길 기다려야 할 것이다.”
“허, 허면…….”
반색을 하는 크나다에게 만운은 찬물을 끼얹었다. 먼저 그의 말을 확인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네가 말한 그곳 서남해에 다녀와 봐야 할 것 아니냐?”
“예, 그런…… 것이지요.”
급격히 우울해진 크나다에게 만운이 다가가 어깨에 팔을 걸쳤다. 자신의 어깨에 얹힌 손에 또 움찔했던 크나다는 이어 만운이 하는 말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넌 이제부터 감방 동기가 생기는 것이야. 그러니 저치를 잘 지켜. 물론 안에서 그를 지키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도 그를 같이 지키는 것이야. 넌 살고 싶어 환장한 놈이지만 저놈은 죽으려 환장하는 놈이거든. 네 쪽에서 저놈을 볼 수 있는 구멍을 하나 만들어 둘 테니 잘 살펴. 그러다 이상이 있으면 지키는 이에게 알리고. 여긴 많은 사람이 알면 안 되기 때문에 기껏해야 나와 지금 놈을 데려온 이, 두 무장만 여기로 다닐 것이야. 알겠지?”
만운이 크나다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지켜보던 두 무장들은 표정을 굳히고 있느라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 순간 초를 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 누가 이런 윤만운을 감히 어리다고 얕보겠는가.
“네,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잘해 봐. 혹시 알아? 네놈 덕에 최사립을 끌어내리게 된다면 넌 다시 광명을 볼 수도 있을 게야. 알겠어?”
“그런 것입니까?”
“그런 것이다.”
데룩데룩 눈을 굴린 크나다는 팔과 다리가 하나씩 없는 감방 동기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저 우직한 무장은 무식하게 때리긴 해도 결코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 이였다. 최사립을 끌어내리느니 마느니 하는 말이 허황되게도 들렸지만, 저 ‘감방 동기’가 중요한 증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사는 것은 물론 다시 환한 빛을 볼 수 있다니!
새로운 희망에 크나다는 감방 동기를 매일같이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 그의 자살 시도를 소리쳐 알리고 만운이 내려온 것이다.
“죽일 놈!”
“살려야 한다면서요.”
“입 좀 다물어! 너, 서남해의 그 많은 바닷가를 돌면서 임봉곤인지 김봉곤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을 찾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앗, 찾으셨군요. 앗싸!”
주먹을 불끈 쥔 크나다는 다시 환성을 질렀다.
드디어 오늘부터 떡 맛을 보고 포상으로 술도 한 병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쯧, 크나다를 일별한 만운은 오늘 또 자살 시도를 한 이를 보고 있었다. 바닥에 제 머리를 박으려다 저지된 그는 사지가 결박되어 침상에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 만운은 속삭이듯 말해 주었다.
“이제 너의 자살 시도도 별 소용없게 되었다. 너의 정체를 알게 되었어.”
“무어…… 어?”
“것 봐. 그러니 왜 그렇게 혀를 깨물고 난리냐고!”
재갈이 물려진 그의 입에선 제대로 된 소리가 날 수 없었다.
“임봉곤. 나이 사십오 세. 사는 곳은 을남도의 마주. 그리고 아들 셋과 딸 둘이 있는데…….”
“우우, 우우, 우우…….”
고개를 마구 젓는 임봉곤을 보며 만운은 다시 혀를 찼다.
“당신 둘째 아들이 마주현의 관병이더군. 그래서 그토록 악착같이 입을 다물었던가? 당신의 정체가 알려지면 가족들이 다 죽을까 봐?”
“우우우!”
임봉곤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도리질 쳤다. 그 눈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들어 있었다. 제 정체가 밝혀진 데 대한 두려움과 가족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일이라면 더더욱 말해야 했을 것 아냐! 당신은 최사립 측에 붙잡힌 포로였지? 이런 멍청한! 해적이라고 다 같은 해적인가? 당신들은 납치된 것이잖아! 이런 어리석은 백성 같으니. 지난 원정에서 우리 쪽에 잡힌 우리 백성들은 다 죄를 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어. 당신도 그럴 수 있었다고!”
만운의 말에 임봉곤이라 밝혀진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털썩 고개를 젖히고 말았다.
“놈들은 구출된 당신네들에게 해적이라고 하고, 자살하라고 하면서 화약을 실은 배를 몰라 명했지? 안 그러면 가족들을 다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말이야.”
“크허헉.”
삼킬 수 없는 통한이 재갈 밖으로 넘쳐 나오고 있었다. 어리석게 속아 그들의 반역에 이용된 것이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울분이 치솟다가 곧 저와 같이 속은 다른 동료들이 불쌍하여 눈물만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만운이 말을 이었다.
“당신 가족들도 그들의 감시 아래 있더군. 그 해적선에서 당신들 중 한 사람이 살아남은 것은 알게 되었지만 그게 누군지는 알지 못한 모양이야. 아마 당신이 살았다는 걸 알았으면 당신 가족들은 모두 당장 죽었을 거야. 하지만 걱정 마. 우리가 그들을 안전한 곳에 모셔 두었어.”
가족들을 모두 옮겼다는 말에 그의 눈이 다시 부릅떠졌다.
“걱정 말라니까. 세자 저하를 결코 최사립과 같은 망종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당신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옮긴 것이야. 그들은 안전해.”
임봉곤의 눈에서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들 생각에 죽으려던 것이다.
헌데 가족들이 안전하다니…….
그때 뒤에서 크나다가 누군가에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엇? 당신 누구야! 낭장님, 여기 누가 못 보던 사람이 왔는데요!”
“아버지, 아버지!”
크나다의 목소리와 함께 들린 목소리에 임봉곤의 눈이 다시 부릅떠졌다. 살아생전 다시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 아들의 목소리였다.
“아다, 나 아…….”
“이젠 재갈을 빼도 되겠어? 설마 아들 앞에서 자결할 건 아니지? 당신이 지금 여기서 죽으면 그것이 바로 반역이 되는 거야. 지금도 모반 사실을 마음속에만 묻고 죽고 싶은 건 아니지?”
여태 죽은 눈을 하던 이의 눈이 갑자기 달라졌다.
만운은 고개를 심하게 도리질하는 임봉곤의 재갈을 빼 주었다. 재갈이 빠지자 그는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광민아! 광민아!”
“아, 아버지!”
문이 열리며 한 젊은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아버지의 참담한 모습을 보며 크게 울기 시작했다.
“이 어찌, 이 어찌……. 아버지, 아버지!”
부자는 함께 통곡하기 시작했다.
비록 한쪽 팔만 남았지만 우는 아들을 토닥여 주고 싶었던 임봉곤은 아직도 꽁꽁 묶여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그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며 원한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속아서 이렇게 된 처지지만 그래도 저들에게 갚아 줄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무장님, 이제 저는 다 말하겠습니다. 다 말하겠습니다.”
“그러시오. 당신의 죄는 없소. 당신의 증언이 최사립의 반역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될 것이오. 당신 가족들은 저하께서 반드시 보호해 주실 것이오.”
만운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이제부터 그는 해적선을 몰고 왕세자를 시해하려던 죄인이 아닌 증인으로 바뀐 것이다. 허나 임봉곤은 그것을 알아들을 정신도 없었다.
“네, 그리해 주십시오. 제발 그리해 주십시오.”
임봉곤은 다시 철철 울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크나다는 입을 딱 벌린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정말 해를 보고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 *
“뭣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였는데 마진을 끝으로 그들의 머리끝 하나 발견하지 못했단 말인가!”
수하가 보고를 하러 들어올 때마다 최필선이 앉은 탁자의 물은 항상 엎어지고 말았다. 최필선의 이마에는 핏줄이 설 지경이었다.
아버지께 이렇게 매번 허탕이라는 소식만을 전할 수는 없었다.
유라성의 장원 하나를 빌려 진을 친 최필선은 송국에 온 이후 하루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그가 마진이란 곳에 직접 다녀왔겠는가.
하지만 그 이상의 소식을 접할 수가 없었다.
배를 발견했다는 배월이란 곳에도 가 보았지만 다만 배만 확인했을 뿐, 그곳에선 오히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이 없었다. 주인이 떠난 빈집 하나가 누군가 살았다는 것을 알려 줄 뿐, 그들이 돌아왔다는 보고는 없었다.
“떠돌이 의원이란 의원은 다 찾아 뒤져 보고 있습니다. 허나 마진에서 발견한 이후 그들의 종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시 찾아보아라! 찾고 또 찾으란 말이야! 생각해 보라. 마진에서 만난 촌장은 그때 분명 위중한 환자가 있다고 했다. 허면 그들이 어디로 향할 것이란 말이냐!”
“동락과 파조, 그리고 약천, 가양성에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하필 확실한 정보를 주었던 마진은 외진 마을임에도 갈 수 있는 길이 네 군데로 나뉜 곳이었다. 그래서 그 넓은 곳을 다 수색해야만 했다.
“그럴 필요 없다. 이제부터 행방을 찾을 방향을 줄인다. 동락은 마진의 서쪽에 있는 곳이다. 분명 려국으로 귀환할 예정이었으니 그곳은 아니다. 그리고 파조는 이곳 약천에 비해서 너무 멀다. 환자가 있다고 했으니 굳이 그곳까지 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파조도 제외한다. 그러니 남은 곳은 두 곳이다. 약천과 가양성. 가양성은 약천보다 조금 더 멀긴 해도 이곳까지는 충분히 넘어올 만한 거리다. 그리고 약천은 말 그대로 의원들의 천국인 곳이다. 이곳도 가능성이 많다. 두 곳을 뒤져라. 사소한 단서도 상관없다. 마을 입구에는 여행객들을 털려고 상주하는 왈짜패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찾아봐. 상금을 걸어라. 좋은 정보를 주는 이에게 먼저 보상을 약속해. 그리하면 무슨 소식이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곳, 유라성을 철저히 뒤져라. 그들의 행적을 놓친 것이라면 이곳을 지났을 수도 있다. 분명 아직 귀환한 것은 아니다. 놈은 무언가 때문에 발이 묶인 상태야. 여태 움직이지 않은 걸 보면 부상이 심할 수도 있다.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돼! 그러니 찾아라.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
“넷!”
“앗, 아냐. 잠깐!”
나가려는 수하를 붙잡은 최필선은 한 가지 생각난 것을 더 지시했다.
“용모파기를 하나 더 그려라. 채운과 계집을 찾을 수 없다면 의원과 그 부부라도 찾아야 할 것이다. 허니 도공을 불러서 그 세 사람의 특징을 그려 오도록 해!”
“네!”
최필선의 심복 오태령은 주인의 앞에서 물러나자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그 부부와 의원이라는 자를 찾고 있긴 하지만 소득이 없으니 용모파기를 만들라는 말이었다. 그 먼 마진과 배월, 개밀이라는 곳에 다시 한 번 다녀와야 하는 것이다. 일반인인 도공을 데려가야 하기 때문에 왕복으로 꼬박 이십 일은 걸릴 것이다.
한시가 급하다지만 놓치고 나면 소용없으니, 이렇게라도 수를 써서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