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추적
숨이 찬 듯 헉헉거리며 호근이 다급히 채운에게 다가왔다. 호근은 아까 삐친 척 나가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오?”
“무장님, 큰일 났습니다! 제가 오늘 아는 자를 보았습니다. 그는 유라성에 있는 기태성이라는 의원인데, 말만 의원이지 사실 최사립의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입니다. 그런데 그가 용모파기를 들고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자신의 친척을 찾는 거라 둘러댔지만 그 용모파기에 든 모습은 바로 윤채운 장군 당신이었습니다.”
“뭐요, 정말이오?”
최사립의 밀정이 바로 그들 근처에서 그들을 찾고 있다니!
혹시라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생긴 것이다.
“정말로 날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로군.”
채운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우려는 했었지만 내심 이곳까지 진짜 사람을 풀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국경 즈음에서나 조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사립 측은 역시 방심이라는 걸 모르는 집요하고 무서운 적이었다.
“네, 용모파기에는 부인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내 아내까지 말이오?”
그때 강희는 무엇보다 호근이 말한 이름에 놀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기태성, 그자가!’
놀란 강희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공교롭고 놀랄 일이었다. 꿈속의 성강희가 유라성에서 만났다던 이가 바로 기태성이었다. 의원 행세를 하고 있긴 했지만 별 실력도 없어 최사립의 밀정 노릇을 했다던 바로 그 사람이다. 꿈에서 그를 만났었기에 처음 서 의원을 만났을 때도 그를 의심하고 경계했던 것이다.
이곳은 유라성과도 멀고, 원래의 시간상으로 보면 기태성이라는 자는 려국에 돌아가 있을 사람이었다. 헌데 이곳까지 와서 그의 이름을 듣게 되다니!
하지만 이건 강희와도 관계된 일이었다.
원래 꿈에서의 기태성은 유라성에서 강희를 만나 그녀의 행방을 알린 ‘공’을 세웠었다. 최사립 측에선 불화를 일으킬 성강희가 채운과 혼인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기태성의 정보로 그녀가 아버지께 끌려가 채운과 혼인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기태성은 아무런 공도 없으니, 아직까지 송국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남들보다 빨리 공을 세울 기회를 찾기 위해 발 빠르게 여기저기 움직이느라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강희의 꿈속과 현재는 상당히 틀어져 있었지만 이런 걸 보면 운명이란 만나게 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감이 여기 있다는 것까지 아는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가 제게 묻기로, 떠돌이 의원을 하면서 배에 떠밀려 온 사람을 치료한 적이 있느냐, 배월이란 마을에 간 적이 있느냐 하였습니다.”
“그런 것까지 물었다고요?”
“네, 어찌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었을까요?”
“허면 그들이 우리가 배월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 아니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그걸 어찌 알았을……. 엇!”
의아해 하던 채운은 생각나는 것이 있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호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무언가 생각나신 것이 있습니까?”
“배요!”
“네? 배라니요?”
“놈들은 아내와 내가 떠밀려 왔던 배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소. 허면 저들은 우리 일행의 특징을 찾을 수도 있소.”
배!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호근도 그랬지만 강희는 그 외진 곳까지 추적해 배를 찾아낸 저들이 무서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호근의 얼굴도 시커멓게 변하며 우려를 표했다.
“네? 세상에나! 아, 그는 제가 떠돌이 의원인 것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저에게 그런 걸 물었다는 것 자체가……. 허면 그자가 저를 의심한다면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뭐라고 하고 오셨소?
“저는 떠돌다 횡재할 일이 있어 의방을 차렸지만 워낙 외진 곳에 차린지라 재미를 보지 못했다 했습니다. 의방의 수입이 변변찮아 식방도 겸했다가 찬모가 쓰러지는 바람에 그 일도 접어 떠날 수밖에 없다고 둘러대고 왔습니다만…….”
“한 번은 이곳에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로군.”
“그럴 것 같습니다.”
유라성에서 이곳까지 온 자다. 호근의 말만 믿고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 짐작처럼 그들이 만약 배를 찾았다면 그들은 우리 일행의 조합을 뒤쫓아 온 것일 게요. 또 우리가 지나쳤던 곳에 들렀다면 쉽게 행적이 드러났을 수도 있소.”
“마진! 바로 그곳입니다. 그곳만 아니면 배월이나 개밀에서는 우리의 행방을 모를 텐데…….”
호근도 짚이는 바를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때부터 행적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했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환자 둘이 있는 일행을 떼어 놓거나 숨기는 것은 정말 여의치 않았다.
채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까지 추적해 온 이들이 그곳을 피했다고 볼 수는 없소.”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곳은 꽤 큰 도시입니다. 우리가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고, 우리 일행을 기억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들이오. 또 서 의원 당신을 알아본 사람도 있고. 이곳이 발각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요.”
보통 끈질기고 무서운 이들이 아니었다. 최사립의 필살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호락호락 그들에게 목을 빼고 넘겨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채운은 마음을 정했다.
“그렇다면 찾아오길 기다리기보다 우리 쪽에서 먼저 맞는 게 낫겠지. 내일이라도 당장 그와 우연히 마주쳐 주시오. 그리고 식방이 문을 닫았지만 한 번은 초대하고 싶다고 해 주시오. 타국에서 고국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워 그렇다고 한다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를 역으로 이용해 우리의 위치를 확실히 숨길 생각이오. 내일 아내를 다시 예전처럼 꾸며서 뒷모습만 보여 줘야겠소.”
강희는 식방을 접고 사람들을 다 내보낸 뒤로 더 이상 변장을 할 일이 없었다. 채운이 그녀가 마당 밖으로 나갈 일도 만들지 않고 꽁꽁 싸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변장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앞으로 이곳을 떠날 때만 다시 그리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 순간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강희는 려국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 변장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
채운이 생각하는 바를 알게 된 호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채운은 어쩔지 궁금해졌다.
“그럼 무장께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용모파기가 있다고 하니 나는 아무래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할 것 같소. 그들도 우리가 아직도 처음 동행했던 일행이 함께하리란 생각은 않겠지만, 수보 형은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낫겠소. 그리고 누엔 부인은 의방의 일을 돕는 사람으로 꾸며 주시오.”
“아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나가 보겠습니다.”
“부탁하겠소.”
호근은 나가는 길에 급히 들어오다가 문 앞에서 떨어뜨린 망태기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강희가 특히나 좋아하는 노란 수박이 하나 들어 있었다. 달큼한 향내만 맡아도 그것이 얼마나 단 수박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세게 내동댕이쳐진 터라 먹을 수 없는 건 분명해 보였다.
호근은 망태기를 줍다 말고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과즙을 잠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
좀 전에도 웃고 농을 하며 먹던 똑같은 과일이건만, 깨어진 과일은 뜬금없이 래연을 떠올리게 했다. 그 참담함이 래연과 연관 지어 보이는 것이다.
속으로 굳은 다짐을 중얼거리는 호근의 눈에 핏발이 솟고 있었다.
‘내 작은 힘이나마 보태어 반드시 윤 장군을 무사히 모셔 갈 것이다. 그래서 최필극, 아니 최사립! 그 집안의 몰락을 내 꼭 지켜보고야 말 것이야.’
호근은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밖을 내다보고는 마음속으로 기태성에게 할 말을 정리하며, 다시 대문 밖으로 발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깨진 수박을 쏟아 버린 망태기가 들려 있었다.
“들었다시피 우린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소.”
호근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채운은 강희가 아직도 놀라 창백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무엇에 놀랐는지 놀란 숨을 가늘게 쉬며 가슴을 쥐고 있었다.
“앗, 강희, 무슨 일이오?”
“그게…… 제가 너무 놀라서요.”
강희는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채운은 호근과 너무 놀랍고 심각한 이야기에 집중했던 나머지 강희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그는 떨고 있는 강희를 와락 끌어안고 달래 주었다.
강희는 처음부터 최사립 측의 추적이 있을까 경계했다.
헌데 그것이 정말 닥치다니. 만약을 대비하느라 이토록 꽁꽁 숨어 있었는데 놈들의 발톱을 바로 앞에서 보게 되니, 얼마나 놀랐을까.
“오, 이런! 괜찮소, 괜찮아. 걱정 말아요. 우리는 이 땅에서 결코 그들과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오. 내가 결코 그렇게 두지 않겠소.”
강희가 아직 품 안에서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참을 안고 두드리는 그의 손길에 그녀도 차츰 진정되었다.
“송구합니다.”
“아니오. 정말 그들이 이곳까지 쫓기 위해 나타나다니. 많이 놀랐을 것이오.”
“그보다 아, 아는 이름을 들어서…….”
채운은 정말 놀랐다. 아는 이름이라니. 강희가 생각보다 두려워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란 말인가?
“누구 말이오? 혹시 기태성이라는 그자 말이오?”
“네…….”
“당신이 그를 어떻게?”
채운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규방의 여인이 려국도 아닌 남의 나라 송국에서 최사립의 밀정 노릇을 한다는 이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헌데 강희는 아직 저의 이상함을 숨길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빨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는 눈썰미가 좋고 끈질긴 사람이에요. 여기는 모르지만 유라성 밤거리의 하부 조직 하나에도 줄을 대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예전에도 그 사람 때문에 집으로 끌려간……. 아, 아니 저…….”
강희는 실수로 내뱉은 말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당황하여 그가 물을 때조차 말하지 않았던 꿈속의 일을 얘기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을 채운이 이미 들은 후였다.
“그럼 그자도 그 꾸…….”
강희의 실수에 채운도 하마터면 그녀에게 예전에 말한 그 ‘꿈’에서 만난 자냐고 물으려다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강희에게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그걸 먼저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네?”
다행히 강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정신에 두렵고 무서운 것을 간신히 진정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아니오.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유라성을 반드시 지나야 하는데 더욱 유의해야 할 것 같소. 고맙소.”
“아닙니다.”
“마음이 좀 진정되오?”
“앗! 저, 저…….”
강희는 이제야 제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깨닫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숨소리가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며 강희를 놓아주지 않았다.
강희는 사실은 굳이 벗어나고 싶지 않은 그의 품에서 잠시 더 쉴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도 비로소 안정되었다.
두 사람 다 호근에게 그녀의 몸을 진맥해 보자고 한 것은 잊은 채 잠시 더 그렇게 앉아 있었다.
* * *
호근은 기껏 산 수박이 깨져서 다시 사러 나왔다는 핑계로 기태성을 또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벌써 두 번이나 만났으니 이번엔 그냥 갈 수는 없다며, 내일 낮에 점심이나 먹으러 집에 꼭 들르라 초대했다.
기태성에게 집도 자세히 일러 주며 꼭 들르라 다짐한 호근은 망태기를 휘적휘적 저으며 그와 헤어졌다.
다음 날, 초대한 시간에 맞춰 집에 온 기태성은 무언가를 보고는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
“좀 작게 웃으시오. 다 들리겠소!”
“몸이…… 몸이 저게 뭐요?”
기태성이 부엌에서 언뜻 보인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는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리 웃으면서도 그의 눈은 주위를 둘러보며 제가 원하는 정보와 맞는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기태성은 강희가 말한 대로 꼼꼼하고 끈질긴 자였다. 그는 혹시나 채운이 있는 것은 아닌지 염탐하기 위해 먼저 이곳이 호근의 말대로 진짜 식방을 하던 곳인지부터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웃에 물어보자 이곳은 불과 며칠 전까지도 식방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꽤나 장사가 잘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어제 호근을 만났을 때부터 그를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떠돌이 의원에 장년 부부와 젊은 부부라는 정보를 호근과 아무리 일치시켜 보려 해도 조금씩 빗나가고 있었다.
일단 려국의 손꼽히는 거부의 딸인 여자가 식방 따위를 할 가능성은 없었다. 아니, 백번 양보하여 일말의 가능성은 있을 수 있었다.
기태성은 남에게 들은 말로 정보를 확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직접 본 바로는 떠돌이 의원과 젊은 부부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말고는 찾는 이와 일치하는 것이 없었다. 알아본 바로도 이 식방의 음식을 만드는 것이 저 뚱뚱한 여인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아닌 건 알 수 있었지만…….
“푸흡.”
아직도 웃음이 피식피식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근은 그가 웃는 걸 보고 더 말리지도 않고 푸념하기 시작했다.
“저런 튼실한 몸이라면 좀 더 잘 버틸 줄 알았더니, 웬걸! 덥다고 쓰러지는 것 아니겠소? 그나마 손님 드릴 거라도 내놓으라고 해서 오늘 겨우 일어난 것이오.”
“튼실? 서 의원, 말이야 바른말이지. 저것은 튼실이 아니라 비대하다고 해야지요!”
“쉿, 그만. 듣는다니까요!”
“좀 들으면 어떻소. 어차피 찬모 주제에 안 쫓겨나면 다행이지.”
그러나 호근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쫓아낼 수나 있소? 저래 뵈도 내 옛날 스승님의 따님이시라오.”
“뭐요?”
은근히 목소리를 낮춘 호근이 그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저이도 사실 옛날엔 참 예뻐서 나도 좋아한 적도 있었소. 하지만 난 거절당하고, 후에 그녀가 어디 파락호 같은 한량을 만나 혼인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오. 그런데 얼마 전 이곳에서 다시 만난 것 아니겠소? 나도 뭐 좋아서 같이 있는 줄 아시오? 스승의 전갈을 들고 온 터라 나도 처음엔 얼결에 반갑다 하였지요. 하지만 그 파락호 같은 남편이 좀 무서워야지. 쫓아낼 엄두도 못하고 있소.”
“에? 남편도 있소?”
“에고, 있으면 뭐하오. 건달이라 칼을 좀 쓰는 모양인데……. 하도 사고를 쳐서 이곳에서 잠시 몸을 피신하고 있으라고 보내신 모양이오. 하지만 또 어디서 술이나 먹고 투전이나 하고 있을 거요. 일은 다 아내에게 시키고 말이오.”
“저런.”
원하던 정보를 다 얻은 기태성은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나마 입맛에는 꽤 맞아 한 그릇을 다 먹고도 염치없게 그리 비웃던 여인에게 한 음식을 더 달라 하여 배를 가득 채웠다.
“아아, 잘 먹었소. 저 둔한 몸에 볼거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음식은 할 줄 아는가 보오?”
“그래서 버틴 것이지요. 하지만 식방을 며칠 닫겠다고 하자마자 바로 옆집에서 같은 종류의 식방을 열었소. 허니 이젠 식방도 더는 못할 일이오.”
“방금 음식을 내온 아주머니도 있지 않소?”
음식을 내온 사람은 물론 누엔 부인이었다.
“아무나 다 음식을 할 줄 알면 좋게요? 차라리 내가 할 줄 알면 되지도 않는 의방 대신 식방이라도 대신할 것을…….”
어깨를 으쓱하는 호근의 말에 호기심을 다 채운 기태성도 관심을 접었다.
“하하, 식방을 하는 의원이라……. 아무튼 잘 먹었소.”
“다음에 날 보시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지요?”
“허허, 당연하지요.”
속으로 ‘겨우 밥 한 끼 주고 뭘 바라는 것이냐? 너 같은 비렁뱅이를 아는 척이나 하겠느냐’라고 비웃은 기태성은 곧바로 인사를 하고 그의 집을 나섰다.
이들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 잘못 짚은 것일 뿐 약천이란 곳을 다 돌기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윤채운이 여기 있다면 다른 누구보다 반드시 자신이 먼저 찾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 팔자가 펴는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내가 찾으리라.’
의방을 힐끗 보며 돌아서는 기태성의 눈에는 야욕이 빛나고 있었다.
호근은 기태성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옆에 채운이 다가와 섰다.
기태성은 자신의 속이 어떤지 뻔히 보이는 것을 모르고 자신은 잘 숨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드러난 표정은 채운과 호근에게 다 읽히고 있었다.
일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된 것 같았다. 그에게서 호근과 함께 있는 이들에 대한 의심을 지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저자 하나를 물리친 것이지, 이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사방에 최사립의 밀정이 깔려 있으니 언제 다른 이들이 또 들이닥칠지 모르게 된 것이다.
“이곳을 당장 떠나야 할 것 같소.”
“허나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추적을 시작했다면 이 근방은 최사립의 밀정으로 꽉 차 있을 것입니다. 아니, 송국의 관리들도 함께 추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관리!”
“네, 그런데 무슨?”
“장희여. 그 사람이 유라성의 전 태수였다고 했지 않소?”
“네, 그랬지요.”
“우리도 관리를 이용하는 거요.”
채운의 뜬금없는 말에 호근은 일순간 그의 생각을 예측할 수 없었다.
“네?”
채운은 굳은 표정으로 생각을 다시 정리하고는 호근에게 말했다.
“헌데 그러자면 누엔 부인의 결심과 도움이 필요하오. 부인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 것 같소?”
“네, 제가 보기엔 그렇긴 한데……. 어쩌시려고요?”
“누엔 부인께 집으로 전갈을 보내라고 해 주시오. 이곳에 있으니 모시러 오라고.”
“네에?”
호근은 예상 밖의 말을 하는 채운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두 사람만 집으로 보내는 것이라면 걱정되겠지만 내가 그들의 호위 역을 하겠소. 부인은 죽어 간다는 동생을 하루라도 더 빨리 보고 싶지 않겠소? 또한 우리가 떠나는 길도 누엔 부인에게 묻혀서 최사립 측의 눈을 피할 수 있게 되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야 할 누엔 부인과 저들의 눈을 피해야 할 우리,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보오.”
“아!”
호근도 이제 채운의 계획을 이해했다. 채운이 순간적으로 내린 판단은 모두에게 이로운 생각이었다.
“그렇군요. 그거 기발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엔 부인과 동행이 될 수 있는 명분을 잘 만들어야 할 것 같소. 그리고 그곳에서 소개할 우리 부부에 대한 설명은 아까 기태성, 그자에게 했던 걸 똑같이 이용하면 될 것 같소.”
호근이 기태성에게 지어낸 설명은 아이들이 붙인 별명에 맞춰 채운이 설정한 것이었다.
‘뚱보 여인과 기둥서방.’
호근은 그것을 듣고 배를 잡고 웃기만 했지 이런 것은 생각도 못했다. 헌데 채운은 그 우스꽝스러운 별명마저 상황에 이용할 소재로 삼았다.
문득 그때가 다시 생각난 호근은 여유를 되찾고 큭큭거리며 웃었다.
이런 순간에도 웃을 수 있는 호근은 채운에게 장난 좋아하는 만운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동생이 언제나 조금 도를 넘어 연무장 신세를 면치 못하던 것도.
호근에게 다행인 것이라면 그가 평생 칼을 잡아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제법 넓은 뒤뜰이 연무하기에 좋은 공터인 걸 생각하면 호근은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농은 잠시뿐, 생각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누엔 부부도 계속 이곳에 머물며 몸만 추스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수보는 자신들이 떠날 때, 그러니 목발만 벗어나게 되면 당장 누엔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허면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을까.
“아무튼 좋은 생각입니다. 흥, 두고 봐라. 저들만 관리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군요.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장희여, 그 사람은 현직 태수 이상의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를 잘 이용만 한다면 우리도 조국에 돌아갈 때까지 저들의 눈을 피해서 더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채운의 계획에 호근도 기운이 솟는 눈치였다. 그는 신이 나서 계속 떠들었다.
“그리고 우리 려국 최강의 장수가 호위라니, 누엔 부부에게도 분명 좋은 일입니다. 저분들이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방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무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봅니다.”
“부탁하오. 어렵고 귀찮은 것은 다 맡기는 것 같아 송구하오.”
“하하, 다 적어 두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훗날 크게 갚으시라니까요!”
호근은 적어 둔다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면서 웃었다.
갚으라니. 당연한 것을.
그가 일부러 마음을 가볍게 해 주려는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채운은 호근이 갚으라는 것이 앞으로 그와 왕세자가 할 일, 최사립을 쫓아내고 대업을 이루라는 말이라는 건 몰랐다. 허나 그가 보이는 진정은 가슴 깊이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누엔 부부를 만나려고 함께 나섰다.
[무장께서 몸이 거의 회복되시어 곧 본신의 무력을 거의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허면 돌아가시게 되더라도 두 분을 지켜 줄 수 있게 됩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가능할 것 같으면 당장 돌아갈 마음이 있으십니까?]
채운은 송국의 말을 알아듣긴 해도 말하는 능력이 딸리는 관계로 호근이 그의 대변인으로 말하고 있었다.
[네? 허면 당장 집으로 갈 수 있게 되는 겁니까?]
누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채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집에 가고 싶은 숨길 수 없는 열망이 출렁였다.
‘정말 당장, 지금 당장 돌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 긴 세월 동안 잊고 살아온 집이다. 아니, 잊으려 애써 온 집이다.
누엔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지며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빨리 돌아가고 싶어졌다. 조카들, 그 아이들 생각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더 간절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몸이 성치 않은 남편 때문에 독촉할 수가 없었다. 제 발로 온전히 걷지도 못하는 남편이 이런 몸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버지가 원하는 일에도 지장이 있었다. 강건한 모습이 아니기에 이복동생들에게 얕보일 수 있었고, 자신들의 쓸모에 의심을 받고 내쳐질 수도 있었다.
동생과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결코 내쳐져서는 안 됐다. 한없는 미안함을 담고 말하는 서 의원의 표정에는 결국 필요에 의해 이용을 당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었지만 누엔은 상관없었다.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낳지는 않았지만 핏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남편은 집으로 돌아간 뒤의 일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원래 아버지의 호위로서 무장들과 인맥이 두텁고, 친분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누가 장조카를 지키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시의 사람들 중 누군가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용하려는 것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하지만 당장 제 몸을 지킬 힘도 없는 사람이 누구를 지킬 것인가.
‘남편이 몸을 추스르고 아버지께 인정받을 수 있는 시간을 벌 동안 무장께서 도와준다면?’
누엔은 당장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보는 갑자기 동행을 청하는 일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의원님께, 아니면 무장님 부부께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수보는 과연 장희여가 후계를 맡길 생각을 할 정도로 날카로운 판단을 할 줄 아는 이였다. 던져진 작은 정황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이다.
채운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눌하나마 자신이 직접 대답하기 시작했다.
[네, 그렇습니다. 우선 드릴 말씀은…… 제 아내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러고는 려국말로 다음 말을 이었다.
“그동안 이 나라 말을 아는 걸 숨겨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흘렀습니다.”
표현이 자유롭지 않은 채운이 그렇게 말하자 호근이 통역하여 그의 말을 옮겨 줬다.
[네?]
수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누엔은 크게 놀라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놀란 것이 채운이 이 나라 말로 대답하는 것과 그가 한 말, 어느 쪽에 더 놀랐는지 모를 정도였다.
아마도 전자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인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것처럼 채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누엔도 정황을 완전히 이해하게 됐다.
부인도 모르는 일을 왜 숨겼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채운이 사실을 숨긴 이유도 부인을 위한 것이란 걸 알게 되면서 그가 말한 것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
[오오, 이런 축복받을 일이! 엇, 헌데 부인은 아직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던데요? 얼마 전만 해도 피가 비쳤다 사라졌다며…….]
[아! 그래서 여태 모르고 계셨군요.]
호근이 이유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르다니요?]
[그건 제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부인의 몸이 안정될 때까지 현재는 조국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한 달 이상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하게 되었습니다.]
호근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그에 수보가 짚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거론했다.
[허나 무장님의 몸도 좀 더 회복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정을 짐작하시겠지만 아내의 집은 당장 맞설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협이 만만치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저희야 지금 당장 돌아갈 수 있다면 좋긴 하겠지만 무장님을 무리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수보의 지적은 타당했고, 채운을 바라보는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수보가 장희여의 집으로 가겠다고 결정한 이후 그는 더 이상 작은 어촌의 어부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상황과 이쪽의 패를 다 살피며 이득을 끌어내는 지도자의 풍모를 보이고 있었다.
채운은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자신 있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저의 몸은…… 거의 회복되었습니다. 저희가 더 머물고자 하는 이유는…… 아내를 위해서입니다.]
채운의 어눌한 발음과 느린 설명에 호근이 말을 이었다.
[무장님은 요즘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분은 려국에서 한 손에 손꼽히는 무위를 지닌 분이십니다. 수보 형께서 몸을 추스르시는 동안 무장께서 두 분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긴 하지만 그건 목숨과 관련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저희들의 문제에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수보는 그래도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아닙니다. 폐가 아니라 저희를 도와준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사실 우리 쪽에서도 몸을 의탁하고 쉴 곳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네? 몸을 의탁하시다니요?]
그 말에 수보와 누엔, 두 사람 다 놀라는 표정이었다. 채운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자신들의 사정을 말했다.
“도움을 바라는 처지에 숨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선 제 소개를 다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려국 왕세자 저하의 신하, 려국의 용호군을 맡고 있는 상장군 윤채운이라 합니다.”
호근이 통역한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입을 딱 벌렸다. 워낙 오지에 살았기에 윤채운이라는 이름은 모르지만 상장군이란 직위가 보통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님, 아니, 장군께서는 우리 려국에서 중요한 분입니다. 헌데 그가 돌아오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지요. 하지만 반드시 무사히 돌아가셔야만 합니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요!]
누엔 내외는 호근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고로 우연히 송국에 온 젊은 장수. 그리고 그가 결코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적.
처음에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호근이 그를 저토록 위하는 걸 보면 나라와 백성 운운하는 말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백성들에게 신망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럼 우리가 서로의 피난처와 보호자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두 분의 안전에 관한 한 장군……. 아니, 무장님을 믿으셔도 될 것입니다.]
호근이 채운을 지칭하는 말을 당장 되돌리는 것도 그 적을 경계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보는 이제 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저들도 피난처가 필요하기 때문에 서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음, 좋습니다. 그러면 내일 당장 돌아갈 것이라 전갈을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서로에게 처해 있는 정황을 살펴보면 이는 확실히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받기 위해선 서로가 알아야 할 사항이 많았다.
그때부터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대외적으로 서로 맺어질 관계와 그 주변 정황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호근이 쓴 서신은 가양성에 살고 있는 장희여에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