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조금, 조금만 더
“할 말이 있소.”
다섯 사람이 모여 식사를 마친 자리에서 채운이 말을 꺼냈다. 이미 합의하여 알고 있던 호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안마당에서 입맞춤을 나눈 후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던 강희도 그를 쳐다보다가 도로 고개를 숙였다.
채운은 아까부터 계속 그를 의식하며 볼을 붉히는 강희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그의 손안에서 파르르 떨리던 손이 곧 잠잠해졌다.
“부인, 내일부터 식방을 접을까 하오.”
“네?”
채운의 말에 놀란 강희는 저가 그의 눈을 피하던 것도 잊고 바라보았다. 채운은 그런 강희를 보며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젠 더 이상 당신이 음식 장사를 하게 할 수 없소. 오늘도 피곤하여 그리 졸았던 것이 아니오.”
강희도 식방에 대해선 어렴풋이 그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 의원이 말한 그의 회복 기한이 거의 다 차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일을 차츰 그만두자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 집과 식방은 누엔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요즘 그녀가 무척 활기 있고, 이 일을 좋아하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접으라니? 그리고 그 이유가 나 때문에?’
번뜩 고개를 들었던 강희는 지그시 손을 잡는 그의 눈길에 또 고개를 떨구었다. 열기가 들어찬 그의 눈빛을 마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
매일 일을 하느라 피곤한 덕에 잠잘 수 있었던 것인데. 식방을 그만두면 앞으로 그와 한방에서 어찌 잘까? 요즘 잠시라도 그의 자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잠들어 속상했건만 이제 그 반대가 걱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누엔 부인과 수보 형께 드릴 말씀은 서 의원이 이어서 하시는 것이 좋겠소. 아내가 피곤한 것 같아 우리는 먼저 물러나겠소.”
“네, 그러시지요. 쉬십시오.”
채운과 호근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제 누엔에게 말할 때가 된 것이다.
채운이 강희를 부축한 채로 방을 나가자 누엔은 걱정스런 얼굴이 되었다. 이전에 강희의 고백을 들어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무장께서 부인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우려하는 일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요즘 자주 졸았던 것이 단순히 피곤한 탓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어디가 정말 아픈 것일 수도 있었다.
[무장님의 몸이 거의 회복되어서 우리는 곧 려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려고 합니다. 곧 갈 건 아닙니다. 앞으로 보름이나 한 달 정도 말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부터 당장 식방을 닫으려 합니다.]
짐짓 무슨 말이 나올지 가늠하고 있던 수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겠지요. 슬슬 그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손님이 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식방을 닫아도 될까요?]
식방을 연 이유가 의방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주와 부가 바뀐 상태였다. 잘되고 있는 장사를 갑자기 접으려니 매일 찾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아무튼 강희의 생각이 맞았다.
누엔은 십수 년을 숨어 지내다 이렇게 사람 상대를 하고 지내는 것이 활력이 넘치고 기분 좋았던 것이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집에서 찾는다 해도 아마 모른 척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은 계속 이렇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호근도 그런 누엔의 심정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이해시키기 위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들에겐 식방을 책임지는 찬모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하면 됩니다. 일하는 아이들도 종종 성 부인이 피곤해 하는 모습을 봐서 별로 의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강희가 요즘 들어 자주 피곤해 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건 부엌을 오가는 누구에게나 보인 모습이라 오늘 밤에라도 갑자기 쓰러졌다고 하면 모두 납득할 것이다.
[아! 네, 그렇군요. 그럼 내일 대문에 그렇게 방을 붙여야겠네요.]
[네, 그래 주십시오.]
아쉬워하는 누엔 부인의 모습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도 지금부터 들을 말에 식방 따위는 생각도 못할 것이다. 호근은 지금 할 말이 그녀의 행복을 깰 수도 있을 것이라 망설여졌지만 알고서도 말하지 않는 것도 천륜을 막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누엔 부인, 그리고 수보 형,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예? ……말씀하시지요.]
[먼저 두 분께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호근이 사뭇 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내자 두 사람도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
[……?]
“흠.”
호근은 심호흡을 내뱉고는 걱정스레 쳐다보는 부부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누엔 부인, 부인께선 혹시 유라성 전 태수이신 장희여 님의 따님이 아니신지요?]
순간적으로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숨을 들이마신 놀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저도 모르게 남편의 손을 꼭 쥔 누엔의 반응으로 봐선 호근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온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생각하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수보가 목발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이전의 호위 무사 출신이라 하더니 목발을 잡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여차하면 그것을 무기로 뛰쳐나갈 기세였다.
[역시 맞으시군요. 그렇게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몇 달 전 태수님의 집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병자가 있어서 갔던 것이지요. 그래서 몇 가지 사연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어쩌다 부인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으로 태수님이 찾는 분이 누엔 부인일 거라는 짐작을 했던 것이고요.]
[네? 제가 하는 말을 들었다니?]
[댁에서 여기로 떠나기 전날 밤, 두 분 부인께서 하시는 말씀이 들리더군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엿들은 꼴이 되었습니다.]
그 말에 누엔 부인은 해연히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누가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세상에!]
[사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태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고요. 수보 형의 상태도 좋지 않기 때문에 아신다 해도 당장 가시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떠날 때가 되었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무, 무슨……. 제 아버지께서 혹 병에 걸리기라도 하신 겁니까?]
상황이 좋지 않다니. 아무리 모진 분이라 하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강압을 피해 달아난 것이지만 당신께서 아프시냐는 물음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마음이 울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연세에 비해 정말 건강하십니다. 그게 아니라 부인의 동생께서…….]
[네?]
호근은 좋지 않다는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픈 이는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동생이란 것, 그 동생이 불치의 병에 걸려 새해를 맞이하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그녀를 찾는 이유까지.
호근은 누엔이 혼자라면 별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장희여가 찾는 이는 정확히는 수보와 누엔 둘이 함께 있는 경우였다.
누엔 부부는 차기 가주의 보호자로서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본신에 자식을 둘 수 없는 이들이 친동생의 자식인 조카를 사랑할 것은 당연한 일.
[모른 척 그냥 떠날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태수께서 워낙 많은 사람들을 풀어 본격적으로 두 분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찾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해서 미리 준비할 시간을 드리고 싶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부부의 얼굴은 이제 호근보다도 더 심각해졌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십시오. 어찌 됐든 이 집은 부인께 넘겨 드리고 떠날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정하시면 이곳에서 식방을 계속하셔도 될 것입니다. 결정은 두 분의 몫이고, 두 분의 미래입니다. 그분께서 부인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돌아간다면 조카님의 방패막이로 얼마나 많은 위협을 당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수보 형의 다리도 성치 않은데 지금은 갈 수도 없는 일이니, 두 분이서 신중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허어.]
호근의 말을 듣다 다리가 풀린 누엔이 의자 밑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여보!]
수보가 서둘러 아내를 부축하려 했지만 부목을 대어 뻣뻣한 다리는 힘을 전달하지 못해 팔이 잘 닿지 않았다. 불구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인 부상이다. 다리가 많이 낫긴 했으나 아직 이 모양이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수보는 호근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상세한 상황을 그릴 수 있었다. 호근의 말이 맞았다. 이런 다리로 찾아간다는 건 당장 누엔의 이복동생들과 그 어미에게 자신들의 목을 한입에 털어 넣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누엔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닌 하나뿐인 동생, 장무린이 아픈 것이다.
게다가 무린이 죽어 간단다.
그러니 언제일지 돌아갈 날을 가늠해야 했다. 어서 자신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야 했다.
[감사합니다. 알면서도 여태 말씀하지 않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감사 인사를 받을 일은 아니지요.]
누엔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아내를 안고 토닥이는 수보를 보며 호근은 밖으로 나왔다.
누엔 부부에게 참으로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았다.
‘그냥 알리지 말고 떠날 것을 그랬나?’
부부에게 엄청난 폭탄을 던져두고 나온 호근의 입가에는 한참 동안 씁쓸한 기색이 떠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대문에는 당장 식방을 잠시 닫는다는 방이 붙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문 앞에 붙여 놓은 공지에 실망하고 돌아갔지만 일을 돕던 아이들의 집에서 재빨리 똑같은 가게를 차리자 당장 찾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쉽게 생기고 쉽게 사라지는 식방이었다. 잠시 닫는다 했지만 이곳은 곧 잊히게 될 것이다.
더불어 식방 덕에 겨우 명맥이나 유지하던 의방도 손님이 끊기게 되었다. 그야말로 채운 일행이 원하던 방향으로 되고 있었다.
채운은 이제 호근에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루에 잠깐씩은 칼을 들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너무 쉬어 뻣뻣해진 어깨가 굳을 지경이었지만 다시 칼을 들고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강건함이 변함없어 보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수보는 다음 날부터 몸에 좋다는 것은 스스로 나서서 챙겨 먹고 있었다. 빨리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의자에 앉아서 손에 봉을 들고 휘두르는 낌새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의 다리만 성하다면 같이 칼을 겨눠 보고 싶은 정도요. 오랜 세월 칼 대신 농기구와 그물을 들던 사람이 칼도 아닌 봉을 들었는데도 그 기개가 벌써 달라 보이오.”
“그렇습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다리를 디딜 수 없으니 많이 답답하실 겁니다. 저분은 지금 칼을 들고 있는 무장님이 무척 부러우실 겁니다.”
채운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목발을 짚지 않는 것만 해도 앞으로 한 달은 걸릴 거라 하지 않았소?”
“네, 생각보다 빨리 낫고 있긴 하지만……. 시간을 갑자기 단축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그가 목발을 짚지 않을 때 떠나면 되겠군.”
식방을 닫은 지 불과 사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름 한가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수보가 마음을 다잡자 누엔도 남편을 따라 곧 마음을 잡은 것 같았다. 그녀가 가끔씩 허공을 보는 모습이 보이곤 했지만 더 이상 처음 소식을 들었던 때처럼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네. 헌데 어깨는 어떠십니까? 쑤시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조금 쑤시긴 하지만 아픈 건 아니오. 견딜 만하오.”
“음, 허나 통증이라 생각이 되면 참지 말고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소. 고맙소.”
“하하, 많이 고마워하셔야 합니다? 나중에 다 갚으라고 할 겁니다.”
“하하하, 그러시오.”
호근의 너스레에 채운도 따라 웃었다.
두 남자가 웃고 있는 곳으로 강희가 과일을 간 음료를 담아 가지고 왔다.
송국에 있어서 좋은 점은 바로 과일이 풍부하다는 것이었다.
요즘 강희는 화미과메론과 닮은 중국 과일와 노란 수박에 아주 푹 빠져 있었다. 그녀는 불편한 변장 때문에 직접 장을 보러 가지 못하고 누엔이나 심부름하는 아이들이 사다 놓은 것만 먹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먹기엔 충분했다.
며칠 전부터 강희의 먹는 양도 그렇고, 과일을 부쩍 달고 사는 것에 누엔은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요즘 그녀는 자신만의 일로 강희가 왜 그러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채운은 강희가 준 음료를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은 후 그녀를 그네에 앉게 하고는 자신도 옆에 앉았다.
“과일이 떨어지지는 않았소?”
“아직 있습니다.”
“얼마나 있소? 필요한 건 다 사 가지고 오리다. 아니면 나와 같이 나가 보겠소?”
“아닙니다, 서방님. 번거로우실 겁니다.”
“번거로울 게 무에…….”
“으흠, 흠.”
부부의 달짝지근한 공방에 호근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허나 채운은 호근의 빈 잔을 확인하며 불퉁하게 한마디 건네기만 했다.
“아직 거기 계셨소?”
기가 찬 호근은 입을 딱 벌렸다.
“무장님, 그 과일 사시려면 제가 필요할 겁니다!”
“아차!”
그러자 채운이 정말 놀란 것처럼 크게 탄성을 질렀다. 호근은 기가 살아서 일어났다.
“흥, 전 이만 갑니다.”
“앗, 서 의원?”
“오늘은 안 갈 겁니다.”
호근은 채운이 부르는 소리에도 삐친 척 성큼성큼 가 버렸다. 하지만 돌아서는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 부부끼리 있고 싶으니 대놓고 가라는 소리까지 하는 윤채운 장군이라니. 처음 만났을 때의 채운은 분명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본성이 드러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배운 것인가.
하지만 후자의 누군가― 라면 자신밖에 없었다.
‘그럼 내 탓인가?’
우울하게 중얼거린 호근은 다시 먼 하늘을 바라봤다. 이젠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서방님!”
“하하하하하!”
호근이 그리 가 버리자 강희는 민망함을 담아 그를 불렀다.
그런데 채운은 소리 내어 크게 웃고 마는 것이다. 그런 그를 보며 강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장난스럽고, 크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그녀에게 채운은 언제나 무겁고 진중하며, 어두운 표정을 하던 사람이었다. 특히나 그 눈길이 자신을 향할 때면 다른 때보다도 짙어졌다.
헌데 요즘의 그는 정말 다른 사람과 같았다. 그래서 그가 기억을 잃은 것을 새록새록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서 의원이 많이 속상해서 간 것 같습니다.”
“아니오. 정말 속상했다면 말도 없이 그냥 갔겠지. 그도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줄 핑계를 찾아 그렇게 간 것이오.”
“그와는 정말 많이 친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오?”
“네.”
“그는 내게 저하와는 또 다른 의미의 벗인 것 같소. 저하는 무겁고 진지함을 겸비해야 하는 벗이라면 서 의원은 서로 가벼운 농을 할 수 있는 친구요. 그렇다고 그저 가벼운 관계만이 아니라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도 될 수 있고 말이오.”
“다행입니다. 평생의 지기知己는 하나로도 족하다는데, 이 먼 타국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요.”
“그렇소. 여러 가지 의미로 그를 만난 건 행운이요.”
강희는 채운의 얼굴을 보며 진정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는 친구는커녕 온통 둘러싸인 적들에게서 주군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서 의원의 존재는 그녀도 정말 고마웠다.
“헌데 며칠 쉬니 좀 어떻소? 당신만 고생시켜서 내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른다오.”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강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채운은 그런 모습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런 말 마시오. 당신이 쓰러지듯 잠든 모습을 보면 많이 속상하였소.”
“지금은 괜찮습니다.”
“거 보시오. 몸이 피곤했던 게요. 아무튼 지금은 괜찮소? 먹는 건 불편하거나 싫은 거 없소?”
“오히려 너무 잘 먹어서……. 이러다간 서 의원님 말씀처럼 정말 변장이 필요 없을 만큼 살이 찔 것 같습니다.”
정말 요즘은 너무 많이 먹고 있었다. 강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채운이 그런 강희의 이맛살을 펴 주며 말했다.
“많이 먹고 체력을 비축하시오. 그리고 그리 찌면 어떻소? 난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좋소.”
“서방님…….”
그의 노골적인 고백에 강희는 안색이 창백해지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 그네를 처음 만들어 준 날부터 그는 이렇게 노골적인 말을 툭툭 던지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힘들지만 또 난생처음 겪는 기쁨에 이토록 가슴이 떨리는 것이다.
얼마나 행복한지 마음이 콩닥거리며, 이제라도 그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되뇌어도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면 고백은 또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강희?”
“……네?”
“날 다시 불러 보시오.”
“…….”
“어서.”
“서방…… 님.”
“거부감이 드오? 싫소?”
“그게 아닙니다!”
“강희, 날 정말로 그렇게 불러 주시오. 난 당신의 남편이고 싶소.”
저에게 고백하는 채운을 보며 강희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속으로만 못다 한 말을 하염없이 내뱉었다.
‘사실은 정말입니다. 당신은 저의 서방님이시고, 저는 당신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강희의 눈빛에 점점 물기가 어른거렸다.
“하지만!”
채운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를 저어하는 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도 듣지 않겠다고 했소. 알겠소? 그 무엇도.”
“서방님…….”
“나의 소중한 사람이 되어 주시오. 아니, 이미 당신은 나의 소중한 사람이오. 그러니 내가 말한 이외의 어떤 이유도 당신을 내게서 뺏어 가게 만들지 않겠소. 알겠소?”
“서방님.”
“강희.”
채운이 그녀의 입술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훤한 대낮이라도 두 사람을 방해할 이는 없었다. 수보는 식방을 접은 후 마당에서 땀을 흘리며 몸을 단련하고 있었고, 누엔은 남편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호근은 방금 나갔으니 이곳은 그들만이 있는 것이다.
곧 겹쳐진 입술이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왕래가 끊긴 후 변장을 풀고 나온 강희도 본래의 모습이라 그녀를 더듬는 손길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한때 여름이라 얇은 옷을 입은 그녀를 원망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투박한 옷감에 그녀의 살결이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물론 호근이나 수보가 있는 자리에서 그녀를 드러낼 수도 없지만 말이다.
그가 강희에게 마음을 표현한 이후, 이제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것에서 점점 도가 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채운이 방도 아닌 마당에서 그녀를 덮친 것은 자신의 자제력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술일지 사실일지 모르지만 임신 초기에 조심하란 말을 들었으니 아직은 참아야 했다.
‘이런 마음으로 방에서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젠 무엇으로도 무를 수 없소. 강희, 알겠소?”
“…….”
“어서 대답하시오.”
“네…….”
‘당신이 날 알기 전까지, 당신이 기억을 찾을 때까지!’
강희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습한 더위가 등줄기로 땀을 불러왔지만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등 뒤로 그가 토닥이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예 강희는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채운은 자신에게 기대어 잠든 강희에게 부채를 부쳐 주고 있었다. 호근은 임신 초기에 이렇게 잠이 많아지다가 어느 순간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하지만 강희가 유독 잠이 많아진 것이기도 하단다. 그래도 입덧이 없이 잘 먹는 걸 보면 고생을 반은 던 것이라며 축하할 일이라 했다. 이러다가도 입덧이 찾아올 수 있지만 아무튼 강희는 잘 먹고 잘 자는 산모라 축복받은 경우라 했다.
아무렴, 축복이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이라 생각하니 그녀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만운이 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강희와 잠자리를 하게 만들려 그런 일을 꾸몄던 만운이다. 아마 정말 아이가 생겼다면 펄쩍펄쩍 뛰며 좋아라 할 것이다.
어서 빨리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처음 급하게 만들었던 그네는 다시 손을 봐 더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바닥에는 푹신한 방석과 베개를 갖다 놓아 본격적으로 잠들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혼자 누워 잠자도 안심할 수 있게 아예 가림막도 만들어 놓았다.
집에 돌아가면 당장 이와 같은 그네부터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뜨거운 해도 기세가 꺾이며 산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늘의 방향이 바뀌며, 이제 그네 쪽으로 해가 비치고 있었다.
“이제 우리도 안으로 들어갑시다.”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강희가 번쩍 눈을 뜨며 일어났다.
“제가 또 잠들었습니까?”
“나른한 오후요. 나도 같이 졸았소.”
“요즘 제가 너무 자주 조는 것 같습니다.”
“허면 서 의원에게 진맥이라도 받아 보겠소?”
채운은 짐짓 시치미를 떼고 물었지만 강희는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드디어 그녀도 자신의 몸이 이상한 걸 눈치챈 것이다. 단순히 피곤한 것이 아니라 병에 걸린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허면 임신 사실을 알리고 자신도 기억을 찾은 것을 알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강희, 당신이 내 아내이니 다른 생각은 말라고 다시 다짐을 해야겠지.
채운은 강희가 재영 때문에라도 떠날 결심을 확고히 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재영이 그의 집무실에 있던 이혼장을 발견하고 충격에 빠져 있다는 것도. 또 그것이 우연히 만운의 손에 발견되리란 것도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자, 잠이 깼으니 안으로 듭시다. 서 의원도 속상하던 마음이 다 가라앉아 돌아올 때가 되었소. 저녁에 그늘이 지면 다시 나옵시다.”
“네.”
생각에 잠긴 강희는 채운이 이끄는 대로 일어났다.
두 사람이 그네에서 일어난 그때였다. 안으로 통하는 문이 벌컥 열리며 호근이 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