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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응답이 들릴 때까지 (22/38)

22. 응답이 들릴 때까지

려국에 있는 그들의 집은 아직 봄일 테지만 이곳은 단 며칠 만에 날씨가 부쩍 더워졌다.

그에 가장 고생스러운 것은 강희였다. 부엌에 매여 있는 그녀는 매일 두 시진씩 뜨거운 솥과 씨름하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고는 했다.

채운은 팔을 조금 쓸 수 있게 되자마자 강희를 위한 목욕탕부터 짓기 시작했다.

송국 사람들은 려국 사람들만큼 목욕을 즐기지 않아 집집마다 목욕탕이 있는 집이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이 의방에도 집은 제법 커도 안채에 우물이 하나 더 있을 뿐 목욕탕은 없었다.

채운이 뚝딱거리기 시작하자 호근이 그가 아직 덜 아문 어깨를 쓸까 봐 울며 겨자 먹기로 망치를 잡고 일을 거들어 목욕탕을 짓는 일은 금세 끝났다.

우물 옆에 칸막이만 두르고 겨우 작은 목간통 하나만 들여놓은 것이었지만 이제 강희도 편하게 목욕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참 정성이십니다.”

다 된 목욕탕을 바라보며, 호근이 짓궂게 이죽거렸다.

하지만 저가 더 많이 일을 거들고 하는 소리라 그리 얄밉지 않았다. 채운은 그의 농에는 답하지 않고 대신 걱정스런 소리를 늘어놨다.

“휴우, 아내가 걱정이요.”

처음부터 그랬지만 채운은 강희가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이 점점 싫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의방에 사람이 많아 그 뒤치다꺼리를 하는 거라면 일을 그만두게라도 하겠지만 이건 주객이 전도되어 식방이 주主고, 의방이 부副가 된 상황이라 그만두게 할 수도 없었다.

이 일은 이곳의 왈짜패의 눈을 가리기 위해, 그리고 만약이라도 있을 수 있는 최사립이나 송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시늉으로 시작한 일이다.

헌데 강희를 점점 힘들게 하는 것 같아 채운의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요즘 아내가 너무 피곤해 보이오. 어젠 다리가 퉁퉁 부었는데, 그래서 잠든 중에 신음을 흘리기도 했소.”

‘끙.’

호근은 실소를 내뱉으며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처음과 달리 채운은 놀리는 말에도 별 반응이 없어서 참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생각나는 대로 불쑥 한마디 해 주었다.

“그럼 다리를 주물러 주셔야지요. 서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요. 계속 뭉치면 앞으로도 다리가 계속 아플 겁니다.”

“그런 거요?”

호근은 단지 농으로 한 말이었지만 채운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어떻게 제대로 주물러 줄까 고민하는 듯이 보였다.

“엇, 정말 주물러 주시게요?”

“주물러 주라고 하지 않았소? 그것도 농인 게요?”

“아, 아니, 그냥 농은 아니지만…….”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식하여 잠들기 힘들었었다.

그것은 갓 혼인 후 처음 한방을 쓰던 때를 떠올리게 하며 채운이 밤중에 칼을 들고 나가지 못하는 걸 빼고는 그때의 일과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헌데 그녀는 점점 잠드는 시간이 짧아지더니 요즘 강희는 베개에 머리를 대는 순간 잠이 드는 것이다.

“그럼 해 주는 게 좋다는 말이구려. 사실 요즘 아내는 눕자마자 잠이 들고, 또 깊이 잠들어서 내가 주물러 주어도 모를 거요. 그래서…….”

호근은 채운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해 주고 싶다는 말이로군. 긴 치마에 숨겨진 어여쁜 마님의 다리가 부은 걸 어찌 알았는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다. 그리 깊이 잠이 든다니, 몰래 들춰 본 것일 수도?’

속으로 웃던 호근은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눕자마자 깊이 잠들어?’

보지 않아도 두 사람이 든 침실에는 긴장이 완연할 것이 뻔한데, 눕자마자 잠들다니.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진맥을 해 봐야겠지만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은 채운에게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었다. 확실히 확인이 되면 그때…….

호근은 그를 놀리는 게 실패하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저도 돌아가면 만들 겁니다, 이 목욕탕. 이렇게가 아니라, 정식으로 근사하게요.”

다 된 목욕탕 앞에서 호근은 뿌듯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를 생각하고 그러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훗, 그러시오. 난 이미 만들었다오.”

“그야 대감님의 집에 어련히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나도 아내가 집에 들어오고 나서야 만들었소. 그때 이미 알았어야 했는데…….”

‘무얼?’

호근은 홀로 추억에 젖는 채운을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모든 이야기가 부인에게로 향하는지. 저것도 중증이다 싶었다.

헌데 아내와 한집에 살고 나서야 만들었다고 하는 걸 보니, 이것도 그때를 생각해서 만든 것 같았다. 그럼 이것이 두 사람만의 추억 되살리기였던 것인가?

일을 도운 게 후회되는 건 아니지만 호근은 괜히 또 심술이 날 것 같았다. 아니, 그토록 안타까운 척하면서 그동안 할 건 다 했다는 거 아닌가!

제대로 심술이 돋은 호근은 호기 좋게 말했다.

“이거 만드느라 땀을 많이 쏟아서 제가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장께서도 같이 하실까요? 서로 물을 끼얹어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호근의 얼굴엔 누구를 위한 것이든 내가 먼저 써 봐야지, 그런 심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채운은 그런 그의 얼굴에 만운의 얼굴이 겹치고 있었다.

제가 먼저 목욕탕을 쓰겠다며 좋다고 하다가 바로 꼬리를 내리던 만운.

나이는 자신보다 많은 이였지만 호근은 가끔 이렇게 만운을 생각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제 딴에는 심술을 부린다고 하는 것도 장난이었고, 농일 뿐이었다.

그는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의원으로서는 매우 진중한 사람이었다.

해서 채운은 그저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러시지요. 수고하신 서 의원이 먼저 씻으시는 게 당연하오.”

“아, 저, 그…….”

호근은 시원스런 채운의 대답에 입만 벙긋거렸다.

‘이게 아닌데?’

갸웃거리는 호근은 악동이 장난을 치다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을 의아해 하는 표정이라 일면 귀엽게도 보일 정도였다. 채운은 그런 호근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시 만운이 보고 싶어졌다.

강희는 급조된 목욕탕을 보며 감격스러워 했다. 아마 그녀도 자신들의 집에 있는 그 목욕탕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젯밤, 채운은 목욕탕 앞에서 그를 부르며 흐느끼는 강희의 울음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있었다. 그녀가 서방님, 하고 부를 때마다 문밖에서 채운은 그녀의 부름에 속삭임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응답은 그녀에게 들리지 않았다.

채운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강희는 아직 그가 응하는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채운은 그녀의 흐느낌 소리를 들으며 아직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벼운 칭찬이나 다정한 말 한마디, 또 자주 마주치는 것들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듯했다.

다음 날 채운은 다시 무언가를 만들었다.

어제 목욕탕 칸막이를 하고 남은 널빤지와 밧줄을 들고, 또 뚝딱거리는 것이다.

“이번엔 무얼 하시는 겁니까?”

호근의 질문에도 채운은 빙긋 웃더니 그냥 도와 달라고만 했다. 잠시 후 널빤지는 다리가 없는 의자 모양이 되었고, 네 귀에는 밧줄이 매달렸다.

“이걸 잡고 저기 위에 올라가 주겠소?”

호근은 저에게 밧줄 끝을 내미는 채운을 보며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에 채운은 멀뚱히 서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내가 올라가고 싶지만 나는 아직 나무에 올라서는 안 될 것 아니오. 허니 부탁하겠소.”

“허, 이젠 하다하다 별걸 다!”

밧줄을 잡고 나무에 오르는 호근은 구시렁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돌아가면 이것보다 더 예쁜 걸 만들 거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채운이 목욕탕을 만든 것처럼 이번에도 흡사 경쟁심이 붙기라도 한 듯 자신도 연인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다.

잠시 후.

나무 아래 걸린 것은 두 사람이 앉을 법한 기다란 의자가 매달린 그네였다. 마당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큰 나무라 그 아래엔 원래 평상이 있었지만 그걸 치우고 대신 그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어제는 목욕탕에 오늘은 그네. 설마 내일은 또 다른 걸 만들 건 아니지요?”

호근의 삐딱한 질문에 채운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생각나는 게 있으면 또 만들어 주고 싶긴 했다.

어제의 목욕탕은 그녀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이긴 했지만 눈물을 주고 말았다. 채운은 그녀가 좋아하며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가 문득 쓸쓸한 표정을 짓자 호근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헌데 어제 부인의 다리를 주물러 주시긴 하였습니까?”

“……그랬소.”

채운의 대답이 느렸던 건 무안해서가 아니라 어제 일을 회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새 목욕탕에서 씻고 들어온 강희는 약간 부은 눈을 감추려 계속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채운은 그런 강희의 기색을 모르는 척해 주었다.

허나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희.”

“네?”

“요즘 몸이 어떠시오? 나야 환자로 편히 지내고 당신의 수발까지 받고 있지만 당신은 고되어 보이오. 너무 힘들게 일하고 있는 것 아니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소. 당신 요즘 점점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것 같소. 이보시오, 밖에서는 넓은 옷을 입어 모르겠지만 당신 몸이 더 마른 것 같단 말이오.”

채운이 강희의 손을 잡고 손목을 한 손에 가볍게 쥐었다. 채운의 손에 잡힌 강희의 손목은 그의 손가락 안에서도 아주 헐렁해 보였다.

그에게 손이 잡힌 강희의 얼굴이 한순간 붉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하지만 채운은 손을 빼려는 그녀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고 매만지듯 꼭 잡고 있었다.

강희는 잡힌 손목에 심장이 이사라도 간 듯 두근거리며 그곳이 화끈거리고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그는 아직도 대답을 기다리는 기색이었다.

“식방을 찾는 이들이 더 많아져서요. 그리고 일을 돕는 아이들이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습니다.”

“강희, 난 당신에게 음식 장사를 시키고 싶지 않소. 처음에야 이목을 가리고 쉽게 정착하기 위해 시작한 것일 뿐이었지 않소. 그런 일에 당신 몸을 축내면서까지 계속하고 싶지는 않소.”

강희는 결국 제 심장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라도 말을 해야 했다.

“서방님, 이 손을…….”

“아, 송구하오.”

채운은 마지못해서 그녀의 손을 풀어 주었다. 그러면서 손가락이 스치는 느낌에 강희는 온몸에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사라졌다.

“하지만 나도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소. 잠시만 뒤돌아 주겠소?”

“네?”

“당신이 걱정할 것 같아 나는 왼손만 쓸 것이오. 혹시 아프거든 말하시오.”

“서방님!”

강희의 항변을 막은 채운은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며칠 전 부엌에서 한 말은 농인 줄 알고 지나쳤건만 그는 역시 농이란 할 줄 모르는 진지한 사내였던 것이다.

“저, 정말 이러지 않으셔도…….”

황망하여 계속 꼼지락거리는 강희에게 채운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받기만 하는 내 심정을 생각해 주시오. 아니, 혹시 음흉한 사내의 손이라 싫은 것이오? 아니면 본래 천한 내가 감히 당신을…….”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해…… 주십시오.”

강희는 그가 하려는 말을 서둘러 막으며 더 이상 꼼지락거리지 않고 가만히 등을 맡겼다.

만약 그녀가 뒤돌아서 그의 표정을 보았다면 의심이라도 했겠지만 짐짓 처량한 음성으로 은근하게 말하는 그의 말을 부인하느라 바빠 미처 채운의 얼굴을 살필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채운이 잡은 강희의 약점이었다.

내가 천하여 거부하는 것이냐는 말에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채운은 자신이 강희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빙긋 웃었다. 그것은 엉큼하게도 보이는 웃음이었다.

긴장하며 그의 안마를 받던 강희가 잠시 후 졸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강희는 아무리 피곤해도 원래는 이럴 사람이 아니었다. 채운은 그녀의 건강에 무언가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정말 걱정되기 시작했다.

강희를 자리에 눕히고 채운은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강희는 그것도 모르고 벌써 정신없이 잠이 든 상태였다. 덕분에 그녀의 입술은 오늘도 채운의 차지가 되었다.

요즘 점점 대담해진 채운은 잠든 강희의 입술 안쪽을 탐험했다. 몰래 입술만 훔치는 것이 점점 감질나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든 여인을 탐하다니, 치한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고는 인내하는 그 긴 밤을 달래기가 힘들었다.

호근이 혼자 심술궂게 웃는 것처럼 채운은 정말 한방에 잠든 강희를 그냥 두고 보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강희가 자신의 마음을 확신할 수만 있게 된다면 그때는 진정한 제 속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니었다, 아직은.

“으음.”

강희가 작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다니느라 다리가 부었기 때문일 것이다.

‘쯧, 그래서 내 말리는 것이 아니오.’

채운은 내처 강희의 치마를 걷고 그녀의 다리를 드러나게 했다.

아무리 그의 마음이 보답해 주고 싶다고는 하나 어깨를 주무르는 것과 아녀자의 다리를 주무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민망하고 자극적일 수도 있는 일이라 그녀는 이것을 결코 맨 정신에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채운은 망설임 없이 강희의 다리를 잡고 딱딱하게 굳은 종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살살 주무르자 뭉친 근육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쪽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다리에 힘을 주며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기어이 강희가 깬 것이다.

여태 숱한 입맞춤을 한 번도 들키지 않은 것이 더 용할 지경이었다.

“서…… 방님? 지, 지금 무얼 하시는?”

당황한 강희가 황급히 다리를 굽히고 치마를 끌어내리면서 물었다.

채운은 일부러 더 정중한 표정을 했다.

“송구하오. 내 당신이 파렴치한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소. 하지만 요즘 매일 밤 당신이 신음하는 것이 안타까워…….”

강희가 다리를 움츠리긴 했지만 그녀의 종아리는 아직 그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부터 불이 붙어 심장까지 타 버리는 것 같았다. 맨살에 닿은 채운의 손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제, 제가 그랬습니까?”

어색하게 떨리는 음성에 채운은 할 수 없이 그녀의 다리를 놓아주었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오. 아, 아니오. 사실 다른 뜻이 있소. 강희, 난 당신이…….”

“그, 그만하셔요.”

강희가 그가 하려는 말을 서둘러 막았다. 채운이 호의를 넘어선 감정을 말하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녀는 얼굴엔 괴로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이러다 강희가 자신의 정체를 말할 수도 있다.’

비겁하지만 할 수 없었다. 채운은 다시 그녀의 약점을 꺼내 들고 말았다.

“나는 당신에게…… 안 되는 거요?”

그러면서 채운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조금 물러나 앉았다. 그러자 강희가 멈칫하며 그를 안타까이 쳐다보았다. 그는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미안하오.”

“아닙니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내가 너무 면구스런 일을 한 것 같소. 하지만 정말 당신이 걱정되었소. 내 잠시만 나갔다 오리다. 오늘은 다시 하지 않겠소.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몰래 그러지 않으리다. 그러니 걱정 말고 먼저 주무시오…….”

채운이 나가고 강희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가 아까 안마를 해 줄 때도 느꼈지만, 그리고 요즘 내내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가볍지가 않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마음을 주고 있어 그런 것이라니!

채운이 하지 않겠다 말한 것은 ‘앞으로’가 아니라 ‘오늘은’이었다. 그러니 계속, 또 몰래만 아니라면 허락을 받고는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일까?

강희는 습관처럼 날뛰는 심장 어림에 손을 얹고 진정하길 기다렸다.

그가 저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누군지 몰라 그런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에게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강희의 마음이 다시 차오르는 죄책감으로 어지러이 엉키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 버렸지만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혼란스러움이 덮치며 잠이 다 달아났다.

허나 마음의 혼란은 아랑곳없이 강희의 몸은 지쳐 있었다. 곧 잠이 몰아치며 일어나 앉아 고민에 잠길 힘도 나지 않는 것이다. 그 엄청난 혼란보다 그녀를 찾아온 수마가 더 강력한 듯싶었다.

강희는 쓰러지듯 누운 채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잠시 후 방에 돌아온 채운은 잠든 강희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번엔 정말 깊게 잠든 것처럼 보였다. 채운은 웅크린 채 잠이 든 강희를 반듯하게 눕게 해 주었다.

마지막에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아쉽게 살짝 스쳤다.

그것이 어젯밤의 일이었다.

채운이 잠시 답을 멈칫하는 사이에 호근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허허, 역시 아닌 척하면서 할 건 다 하는 사람이라니까. 잠든 부인의 다리를 몰래 주물러 주기도 한다니.’

그의 첫인상에서 어디 그런 걸 상상이나 했느냔 말이다. 돌조각 같은 사람이란 첫인상은 머릿속에서 다 부숴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역시 하셨군요?”

“그런데 아내가 도중에 깨어 버렸소.”

“네에? ……그래서요?”

그 상황이 절로 그려진 호근이 더 당황하여 물었다. 그러나 채운의 표정은 태연하게만 보였다.

“그, 부인께서…….”

호근은 차마 치한이라 그러진 않았느냐고 묻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암. 지금 이 답답하고 복장 터뜨리는 부부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인지 자신만큼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호근이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 사이, 채운이 답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먼저 자라고 하고 방을 나왔소. 헌데 잠시 마당만 거닐고 들어갔는데, 그녀는 다시 잠들어 있었소. 그래서 건강에 무슨 이상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오.”

채운의 표정엔 정말 걱정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호근은 기운이 쭉 빠졌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이해가 되었다. 자칫 민망하며 어색해질 순간을 잠으로 넘기다니, 뭔가 좀 이상하긴 했다.

뭘 몰라서 그렇지 채운은 역시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호근은 자신이 의심하고 있는 것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제가 부인을 잠시 진맥을…….”

그때 채운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무, 무슨 일 있습니까?”

“저기…….”

채운이 부엌 쪽을 손가락을 가리키다 바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가 가리킨 방향엔 강희가 부엌 한쪽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졸고 있는 강희를 보는 채운의 마음은 짠하기만 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그녀를 보자니 식방 같은 건 다 걷어치우고 어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호근의 말로는 아직도 주기적으로 왈짜패가 주변에서 어슬렁거린다고 했다. 놈들은 드나드는 손님이라도 없으면 언제 덮칠 계획을 세울지도 몰랐다.

왈짜패 몇이야 처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위험을 자초할 수는 없었다. 호근도 제 한 몸 지킬 수 있는 호신술은 갖췄다고 했지만 강희를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역시 이곳을 빨리 떠나는 것만이 해답이었다.

채운은 강희를 안아 들었다. 변장 탓에 풍성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들어 올린 그녀의 무게는 너무 가벼웠다. 채운은 다시 마음이 선득해지고 말았다.

강희가 이렇게 가벼웠던가.

그녀는 정말 깊이 잠들었는지 부엌에서 안뜰까지 들어 안고 오는데도 깰 줄을 몰랐다. 낮에 그녀가 이토록 깊이 잠든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일이 너무 고된 것일까?’

채운은 막 완성된 그네에 그녀를 앉히고, 자신도 옆에 같이 앉아 그녀를 기대게 했다. 그가 걱정스럽게 강희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옆으로 다가간 호근이 그녀를 같이 살피고 있었다.

헌데 호근이 강희를 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언제나 빙글거리며 한마디 농을 건네곤 하던 그가 채운이 이렇게 기대어 눕게 한 걸 보면서도 농 한마디 건네지 않고서 진지한 표정이었다.

“정말 어디 아픈 건 아닌지 모르겠소.”

채운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할 수 있다면 그가 대신 아파 주고 싶은 눈치였다.

호근은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강희의 손목을 잡았다.

“잠시 부인을 진맥해 보겠습니다.”

“그래 주시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이렇게 떠드는데도 강희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채운이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호근이 강희를 진맥했다. 그리고 호근은 강희를 진맥하며 어제부터 자신이 의심하던 것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속이 탄 채운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호근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무슨 일이오? 아는 병이오? 괜찮겠소?”

“대감, 잠시만요.”

호근이 잠시 자리를 옮기길 청했다. 채운은 기대어 잠든 강희를 다시 안아 조심스럽게 평상에 누이고, 호근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헌데 호근은 잠든 강희에게서 멀어지자마자 채운에게로 뒤돌아서더니 씩 웃는 것이다. 채운의 애탄 얼굴에 그는 더 미루지 않고 진맥 결과를 알려 주었다.

“하하하, 경하드립니다!”

“경하라니, 무슨 말이오?”

“부인께서는…… 회임하셨습니다.”

“뭐요?”

채운은 전혀 뜻밖의 소식에 말을 잃고 멍해지고 말았다.

생각이 멈춘 듯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멈춰진 머릿속에 방금 들은 소식이 서서히 전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라니, 자신과 강희의 아이? 그녀가 요즘 유독 피곤해 하며 졸던 것이 그래서였던가?

‘본인은 알고 있었을까?’

속으로 궁금증만 더해 가던 채운은 마지막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피곤해 보인다고 말을 하자, 강희는 그저 안 하던 일을 해서 그런 것일 뿐이라며 곧 괜찮아질 거라 애써 씩씩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임신한 걸 숨기려 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히려 피곤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어제오늘 더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강희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제가 진맥하기로는 벌써 거의 석 달쯤 되신 것 같습니다.”

호근은 충격이 가시면서 제대로 생각하기 시작한 채운에게 조심스럽게 말해 주었다. 아내가 처음 임신한 사실을 안 것치고는 좀 과하게 놀라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채운의 얼굴에 서서히 기쁨이 서리기 시작한 것을 본 것이다.

“……그렇겠지요.”

석 달 정도? 그럴 것이다.

모든 과거를 묻고 강희를 완전히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긴 전쟁을 끝내고 귀환했던 그날, 아이는 그때 생긴 것이다.

그의 마음에 충격이 가시면서 기쁨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 시작했다.

‘아이라니.’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바보 같은 일 아니겠는가.

허나 기쁜 마음도 잠시, 현재 상황을 생각하니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 자신의 진심을 꽤 전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직은 강희의 마음을 돌리기 전이었다.

아기는 그녀가 떠날 수 없는 명분으로는 확실했지만 그가 바라던 방향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 강희는, 아내는 아직 모르는 것 같던데…….”

채운은 잠이 들어 미동도 없는 강희를 바라보며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거의 종일 누엔 부인과 함께 지내시니 부인이 먼저 알아차릴 법도 한데……. 아마 누엔 부인도 본인이 잘 몰라서 알려 주지 못했을 겁니다.”

“우선 아내에게 일을 그만두게 해야겠소.”

“네, 곧 접어야 하니 그러는 게 좋긴 하겠습니다.”

채운은 당장 강희가 부엌에 들어가 일하는 것부터 그만두게 할 생각을 했다. 더 이상 강희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차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녀를 업고 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아직 서로 마음을 전하기 전에 임신 사실부터 알게 된다면 미래를 함께하고자 하는 이유가 아이 때문이라 곡해될 가능성이 컸다.

채운은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며 호근에게 진지하게 당부했다.

“서 의원, 아직 아내에게는 임신 사실은 말해 주지 말아 주었으면 하오.”

“네? 하지만 임신 초기인데……. 본인이 아셔야 몸 관리를 더 잘하실 텐데요?”

“며칠만이오, 며칠만.”

채운의 간곡한 부탁에 호근은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부인을 생각하는 이가 그녀를 위태롭게 만들 리가 없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헌데…….”

“무엇이오?”

“곧 떠날 채비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임신 초기라면……. 원행은 무리일 것입니다. 자칫 태아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였다. 채운과 수보의 경과가 많이 좋아져서 길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알게 된 강희의 임신 사실은 계획을 강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채운이 놀라 물었다.

“뭣이오? 저런! 그러면 언제가 좋을 것 같소?”

“태아가 자리를 잡는 다섯 달 정도가 좋긴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 그렇게 오래 계실 순 없으니, 그래도 넉 달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달은 꼬박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로군.”

채운의 얼굴이 고민으로 일그러졌다.

“그럼 혹시…….”

“……?”

“무장께서 려국에 혼자 먼저 가셨다가 사람을 보내 부인을 모시러 오시는 건 어떨는지요?”

호근의 제안에 채운은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언뜻 보기엔 그 방법이 좋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강희의 안전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호근이 남아 그녀를 돌보아 줄 것 같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오. 서 의원의 약방도 그럭저럭 안정이 되었으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나을 듯하오. 그러니 식방을 접는다 해도 이만하면 염탐하려던 이들의 눈도 가릴 정도는 될 것이오. 또 나도 곧 칼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왈짜패 정도는 더 이상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또 수보 형의 다리도 계속 살펴야 하지 않겠소.”

“네, 그렇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사실 호근은 제안을 하면서도 말을 꺼내자마자 거부될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리되면 그동안 채운이 아내에게 노력하던 것이 모두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참 어려운 부부였다. 뭐가 이리 복잡하고 힘든 것인지.

앗, 그러고 보면 남의 말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 돌아가서 래연에게 어찌 대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호근의 얼굴이 급격히 우울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채운 쪽을 바라본 호근이 빙긋 웃었다.

‘저기 좋은 본보기가 있지 않은가.’

그랬다. 채운이 부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레 안은 채 그네에 앉았다. 따끈한 햇살을 피한 두 사람의 모습은 더없이 정겹고 평화로워 보였다.

‘저들을 보고 배우면 되는 것이지.’

다만 저 부부의 아슬아슬한 긴장과 복잡함만큼은 안 닮았으면 좋겠다고 호근은 생각했다.

강희는 꿈에서 그와 함께 배를 타고 물 위에 떠 있었다. 잔잔한 바다 위에서 산들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그의 다리를 베고 누운 꿈이었다.

꿈이라지만 흔들리는 느낌이 잔잔하여 마음을 달래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현실처럼 느껴지는 둥둥 떠 있는 느낌은 이곳까지 떠밀려오게 한 그 무섭던 풍랑을 꿈처럼 여기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꿈에서의 느낌이 참으로 오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점점 잠이 깨면서 뒤척이던 강희는 그 느낌이 단순히 꿈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강희가 잠이 깨면서도 아직 꿈이라 착각했던 이유는 배를 타고 있다고 느끼던 붕 뜬 느낌 때문이었다. 헌데 그것은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다리를 베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깨어났소?”

머리 위에서 울리는 소리에 강희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기울어지는 해를 부채로 가린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이런 세상에!”

“앗, 서둘러 움직이지 마시오. 여긴 그네 위라오. 당신이 너무 곤히 자길래, 내 이리로 모셔 왔소.”

“서방님?”

아직 잠이 덜 깬 강희가 바르작대며 그를 부르는 모습에 채운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강희를 일으켜 세우는 걸 돕는 척하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앗!”

그는 강희가 놀라며 들이쉬는 소리를 모른 체하며 그녀를 안아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고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

“어.”

그녀의 짧은 비명은 지를 새도 없이 목 안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번엔 그가 드디어 제대로 입술을 훔친 것이다. 그동안 짧게 몰래 훔치던 순간들은 안타까움만 더 키운 것 같았다. 일단 입술을 겹치자 그는 거의 삼킬 듯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다.

강희의 생각은 그대로 멎었다. 그녀는 감히 그를 거부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깊어진 입맞춤에 두 사람은 이곳이 훤히 트인 바깥이란 사실도 잊고 있었다. 그래서 누엔이 그녀를 부르러 왔다가 그 장면을 보고선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것도 몰랐다.

누엔은 두 사람을 위해 일부러 자리를 피하느라 급히 돌아선 것이지만 허둥대며 돌아서느라 인기척이 났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강희가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볼이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강희를 채운이 고개를 잡아 돌렸다.

“나를 보시오.”

“저, 저는…….”

“충동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오.”

“서, 서방님.”

“강희.”

“네?”

“날 저어하지 않는다면…… 날 받아 주시오. 당신을 내게 주시오.”

“하지만, 하지만 전…….”

“당신이 날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어떤 이유도 듣지 않겠소. 어쩌겠소?”

“그보다 전, 제가 누구인지 아셔야…….”

“되었소.”

채운은 기어이 제 정체부터 밝히려는 강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반동에 그네가 출렁거리며, 강희가 그의 품으로 넘어지듯 안겨 왔다.

“하지만 전 바로…….”

강희의 입은 다시 닫히고 말았다. 그녀의 고백을 효과적으로 막는 직접적인 수단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이어지는 깊은 입맞춤에 강희는 반대의 이유를 잊고 말았다. 그녀는 몽롱한 정신으로 그의 입술만 느끼고 있었다. 그의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을지, 그런 바람은 상상일 뿐이었다. 이제는 다시는 어려울 거라 체념하고 있었다.

헌데 이것이 그 상상일까, 정말 현실일까.

몽롱함에 파묻힌 두 사람은 서로를 탐하느라 또 주위를 잊고 말았다. 이곳이 아무리 안채의 안마당이라지만 방금 누엔이 왔다 간 것처럼 얼마든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훤한 곳이라는 것도 잊은 채 둘의 입맞춤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엉큼한 채운의 손이 강희의 옷 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다만 그가 부풀려 놓은 옷 아래로는 생각처럼 그녀가 느껴지지 않았다. 강희의 변장은 여러모로 그를 짜증나게 했다.

그는 저가 매일 매만져 이제는 푸는 게 쉽기만 한 매듭을 풀고, 그 안으로 손을 넣었다.

“허업!”

놀란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어느 쪽 가슴이 더 심하게 뛰는지 잘 모를 정도였다.

그 순간 무언가에 놀란 고양이가 기겁하는 소리를 내며 담을 뛰쳐나와 그들 옆으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음.”

“…….”

순식간에 분위기를 깬 고양이 때문에 채운은 아쉬운 신음을 흘리고, 강희는 그의 다리에서 내려섰다. 귓불까지 빨갛게 물든 그녀는 그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핑계를 주워섬기더니 그대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저, 저녁 식사 준비를…….”

채운은 허전한 품에 손을 뻗으며 고양이가 달아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하필 이때 고양이가…….”

아쉽게 탓을 했지만 이미 달아난 강희를 다시 붙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직 오늘이 다 지난 것은 아니다. 채운은 그네를 발을 굴러 몇 번 밀고는 빙긋 웃으며 일어섰다.

호근은 방금 전 채운 부부를 부르러 갔던 누엔이 얼굴이 붉어진 채 되돌아온 것을 보고는 그녀가 무얼 본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임신에 대해서 밝히지 말고, 며칠만 시간을 달라더니…….

그가 당장 부인을 확실히 사로잡을 시도를 할 모양이었다.

그 두 사람은 지켜보자니 참으로 흥겨운 연애사를 지니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장난을 치거나 농이라도 한마디 해 주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이 순간만큼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허나 그 매듭이 이렇게 당장 풀릴 수 있을까?

한쪽은 마음을 숨기려, 또 한쪽은 마음을 전하려 하고 있으니 그 줄다리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은 둘 다 승자이거나 둘 다 패자일 수밖에 없는 묘한 겨루기였다.

흐뭇한 상상에 빠진 호근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정확히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누엔 부인이 어떤 걸 본 것이지?

호근은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래도 저녁은 먹게 해야 할 것이다. 임산부가 밥을 굶어서야 되겠는가.

방해를 하지 않겠다던 호근의 발이 설렁설렁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의원님?]

[네?]

[어디로 가시려는지…….]

[식사는 다 같이 해야지요.]

[그렇긴 한데, 그것이…….]

[잠시만 계세요, 금방 올게요.]

[앗, 저 그게 아닌데…….]

누엔은 호근을 붙잡으려 애를 쓰긴 했지만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호근은 난감해 하는 누엔을 보며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방을 나섰다.

아, 이것은 의원으로서 가는 것이다.

결코 너무 궁금해서라거나, 농할 거리를 찾는다거나, 방해를 하는 것이 아니다. 암! 방해는 안 하지. 그저 무얼 하는지 살짝 보려는 것뿐이다, 살짝.

어슬렁어슬렁 안마당 쪽으로 가던 호근은 거의 달려오고 있는 강희와 마주칠 수 있었다.

“엇, 부인? 그렇게 뛰시면…….”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강희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강희가 그 부풀어 오른 변장이 무색할 정도로 날렵하게 지나쳤지만 그는 그녀의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과 젖은 입술을 볼 수 있었다.

호근의 눈이 새치름하게 변하며 미소를 띠었다. 강희가 달려간 쪽을 보며 웃던 호근은 뒤에서 갑자기 들린 헛기침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채운을 바라보는 호근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짓궂은 장난기가 채 가시지가 않은 것이다.

강희를 아쉽게 놓친 바람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채운은 짐짓 심술이 난 척 그를 불퉁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호근은 불똥이 튈까 지레 준비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 무장님, 제가 아까 잊고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요. 하하, 임신 초기의 부부 관계는 몇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 속이 보이는데다 노골적인 표현에 채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조심할 것이라?’

사실 따지고 보면 본인도 모르고 있는 임신이라 중요한 일이었다.

암묵적인 용서에 호근은 정말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고, 채운은 주의 사항을 귀담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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