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그들을 찾는 사람들 (21/38)

21. 그들을 찾는 사람들

최사립과 만운의 추적은 이제 송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배에 타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거센 폭풍에 채운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드물었다. 허나 최사립이나 만운은 완전히 정반대의 바람을 가지고 양측 모두 송국에서의 채운의 생존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만운보다는 오랜 세월 송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곳곳에 밀정을 파견하여 정보를 얻고 있는 최사립 측이 단연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최사립은 채운이 살아 있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쓰는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송국의 모든 해안을 뒤져서라도 그의 행방을 찾아 반드시 척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사립이 채운과 강희를 찾는 일을 지시하자마자 일은 바로 진행되었다.

용모파기가 그려진 전서를 가진 밀정들이 속속 송국 쪽으로 향한 것이다. 그들은 우선 해안 쪽의 마을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 달 전의 폭풍에 떠밀려 온 배나 사람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드물었던 거센 봄의 폭풍에 남의 나라에서 떠밀려 온 배를 찾는 일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송국의 해안 마을을 다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이 없었다는 소식이라도 들어야 했다. 그 일을 행할 만큼 최사립은 인적으로나 물적으로 자원이 충분했다. 그 일엔 최사립과 깊은 연관이 있는 송국의 관리들도 동원되었다.

그러자 그 넓은 바닷가를 뒤지는 일임에도 추적의 눈은 곧 누엔과 수보가 살던 외진 마을로까지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추적자들은 기어이 채운과 강희가 타고 왔던 배를 발견하고 말았다. 려국과 송국의 배의 모양이 서로 달랐기에 려국의 배라는 건 확실했고, 근처에는 사람들도 드물어 낯선 타지인이 들고 나는 일도 오랫동안 인상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강희와 채운이 정말 이곳에 오게 되었고,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추적을 시작하고, 한 달 남짓 만의 일이었다.

그 소식은 바로 최사립에게 전달되었다. 윤채운의 추적을 지휘하는 그의 아들 최필선이 그 소식을 전했다.

“뭐라! 정말 배가 있었어?”

“네, 그렇다 합니다.”

“그곳이 어딘가?”

“가양성 인근에 있는 배월이란 어촌 마을인데, 사람이 채 스무 명도 살지 않는 작은 곳이라고 합니다.”

“가양성?”

“네, 배월이란 곳은 지명이 표기되지 않을 정도로 가양성에서도 며칠 걸릴 만큼 아주 외진, 정말 작은 마을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인근 마을인 개밀이란 곳에 갔다가 그곳에서 의원이 오간 얘기를 들어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원이라니?”

“네, 개밀이란 곳에 떠돌이 의원이 머물렀다고 합니다. 헌데 어느 날 배월에서 사람이 떠밀려 왔다며 누군가 의원을 찾으러 왔답니다.”

“사람이 떠밀려 왔다?”

“네. 그래서 확인하러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려국의 배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계집도 함께 있다던가?”

“아직 자세한 것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배만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아니야. 혼자든 둘이든 살아 있다면 분명 놈일 것이야. 지금 왕세자가 이렇게 치받고 올라올 수 있게 만든 그 눈엣가시 같은 놈!”

“그런데 의원이 며칠을 두고 계속 오가고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어딘가 많이 다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치다니, 윤채운이? 아니면 계집이? 아, 아직 잘 모른다고 했지.”

난생처음 조급해 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최종으로 왕세자만 없애면 되는 일 아니던가. 하지만 아버지는 윤채운을 없애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최필선은 의아함을 감추고 평정을 유지했다.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중 하나가 그럴 수도 있고요. 누가 떠밀려 온 것인지까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내 직감엔 놈이 맞다. 놈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의원이 오갔다는 걸 보면 하나든 둘이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살아 있다는 말이겠지. 만약 그곳에 있다고 한다면 귀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탈것이 무엇이냐에 달렸지만 보통 넉넉잡아 한 달은 걸릴 것이라 합니다.”

“헌데 놈이 실종된 지 거의 두 달이 흘렀다. 살아 있다는 것이 놈이 아닌 계집 혼자이거나 놈이 어디 크게 다쳤다는 말일 테지. 더 자세히 알아 와!”

“네, 알겠습니다!”

최사립은 필선이 나가는 걸 보며 흥분을 삭이느라 주먹을 꼭 쥐었다.

‘살아 있는가? 네놈이 정말 살아 있어?’

설마하며 의심하긴 했지만 놈은 바다에 수장되어 죽었으리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헌데 천재지변이라는 폭풍에 휩쓸려 그 먼 곳까지 가서도 살아 있다는 말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죽이려고 시도하지 않은 때보다 더 나빴다.

놈이 되돌아온다면 그 일을 다시 캐려 할 것이 분명했다. 해적의 일로 몰아 유야무야 덮어 버리려 했으나 그것을 아직도 물고 늘어지는 이가 있었다.

‘참지정사 김승언, 빌어먹을 중립파 놈들!’

김승언이 왕세자의 손을 들어 주면서 중간 세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왕세자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해적의 배가 폭발한 사건도 최사립이 저지른 일이란 소문이 돌며 왕세자와 함께 배에 타고 있다 피신한 중립 세력은 모두 왕세자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골치가 아픈 일이 있었다.

얼마 전 밀정을 통해 왕세자에게 증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윤채운과 왕세자를 없애기 위해 침투시켰던 척살조는 놈들을 청소하는 역할도 했지만 놓친 놈이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오히려 척살조의 배를 빼앗기까지 하며 생존해 돌아온 이들 중에 해적선에 있던 이 중에도 생존한 놈이 섞여 있었다.

‘도대체 누굴까!’

설마 조타수 그놈은 아니겠지? 하지만 살아남았다면 갑판에 있었을 그가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는 이 일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이였다.

아니, 누구든 상관없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이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가 누구든 왕세자는 그를 증인으로 내세울 것이다. 어떻게든 놈을 없애야 했다. 헌데 아무리 찾아도 왕세자가 꽁꽁 숨긴 그놈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업에 생긴 흠집에 최사립의 이마가 심하게 찌푸려졌다.

이는 왕세자의 계략이었다. 증인이 살아 있는 것을 일부러 흘린 것이다. 그 때문에 왕세자 편으로 돌아서는 이들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어느 놈인지 알기만 하면 놈의 가족부터 빨리 처리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청왕도 문제였다. 오늘내일하던 청왕은 배 폭파 사건이 있은 후 대노하여 쓰러져 거의 승하 직전에 이르렀었다.

허나 다시 깨어난 후에도 정사를 보기 힘들다며 왕세자에게 국정을 일임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양위의 얘기까지 오가고 있었다. 그토록 막아 오던 일이었으나 지금 돌아가는 정국을 돌릴 만한 방안이 아직 없었다.

거기에 윤채운이 되돌아오기까지 한다면?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다. 이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윤채운이 살아서 려국에 발을 디딜 수는 없게 해야 한다.

며칠 후, 최필선이 다시 채운의 행방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 최사립의 집무실로 들었다.

“말해 보아라.”

“배월이란 곳에서는 오히려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을 사람 자체도 적었지만 그 배를 발견한 부부도 사람들과 왕래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진이라는 마을에서 그들이라 의심되는 일행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젊은 부부와 장년의 부부, 의원이 한 사람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의원과 두 쌍의 부부들이라……. 그 먼 곳의 일을 자세히 알기엔 힘든 일이었다. 허나 채운이 그 일행이라면 현재 놈은 려국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부부라?”

“네, 둘 다 살아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향할지 더 추적해 봤는가?”

“마진에서 갈 수 있는 방향으로는 동락, 파조, 약천, 가양성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양성에는 우리 측 사람들이 너무 적어 알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려국으로 귀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라성을 지나야 귀환할 수 있으니, 그곳을 잘 지켜야 할 듯싶습니다.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도와줬다는 부부가 다쳐 함께 떠났다고 합니다. 허니 인근 마을을 뒤지면 그들의 행적이 나올 것입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런 식으로 먼 곳에서 앉아서 방관할 수는 없음이야. 네가 직접 가서 놈을 확실히 찾아야 할 것 같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내일 바로 떠나겠습니다.”

직접 가라는 아버지의 명에 최필선은 눈을 빛냈다. 송국이 멀다 하나 마다할 길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중책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왕세자와의 힘겨루기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이때, 윤채운이 절대 살아 돌아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최필선의 눈빛에 필살의 살기가 어리고 있었다.

* * *

만운은 채운이 실종되고 한 달 동안이나 그 인근 해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왕세자의 명에 형을 찾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종결되었을 뿐 추적은 다른 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바다를 뒤지는 대신 인근 해안 마을에 사람을 보내는 일은 계속하면서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바로 송국으로.

허나 송국을 뒤진다는 건 그들로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었다. 또 송국 조정에서 윤채운을 찾는다는 걸 안다면 방해만 받을 일이었다. 아니, 방해만 받으면 다행일 것이다. 정말 채운이 송국에 있다면 아마 최사립과 연계하여 그를 잡으려 들 테고 오히려 위험해지지 않을까 몸을 사려야 할 정도였다.

이에 재영이 다른 수를 냈다.

채운이 송국에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 최사립의 추적을 역으로 이용할 생각을 한 것이다. 최사립이 송국으로 추적꾼을 보내지 않는다면 쓸 수 없는 방법이긴 하나 직접 송국에서 찾을 수 없다면 그것에 기대해 볼 수밖에 없었다.

채운이 송국에 살아 있는 데 추적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윤 낭장님, 국경에 도적단을 준비시켜 주세요.”

“도적단이라니요?”

“저들의 전서를 탈취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궁이나 최사립 대감의 집은 불가능하지만 국경에선 가능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낭장님은 새 도적단을 꾸려서 무작위로 상인들을 습격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적단이요? 아무나 다 습격을 한단 말입니까?”

“네, 무작위로 다요. 물론 최사립의 밀정이 섞인 곳을 습격해야 하지만 최사립 대감 측의 의심을 피하려면 정말 도적단이 되셔야 합니다. 나중에 그 도적단의 토벌은 낭장님이 직접 하시고, 선량한 피해자들에게는 물건을 되돌려 주시거나 돈을 되돌려 주시면 될 것입니다. 아무튼 밀정이 가진 서신을 가로챌 수 있어야 합니다. 전서구로 오는 것도 잡는다면 좋겠지만 거의 불가능하니 현재로선 그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만운은 당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 저하와 의논해 보겠소이다.”

이후 국경엔 갑작스레 신출귀몰한 도적단이 날뛰게 되었다. 인원도 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 도적단이지만 그들의 출몰로 송국을 오가는 국경이 시끄럽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나자 도적단의 출몰은 국정에까지 오르게 될 정도가 되었다.

관에서 그들을 잡기 위해 잠복도 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물건도 값지고 가벼운 것만 터는 통에 이동도 빨라 도통 잡을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신출귀몰하며 점점 피해가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왕세자는 형을 잃어 침체되어 있는 윤만운 낭장을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는 이유로 상당히 그럴듯하기도 했고, 최사립 쪽에서는 만운이 도성을 나가는 일이니 반길 소식이었다. 눈엣가시 같은 채운에다 만운까지 왕세자의 곁에 없다면 아직까지도 화약이 터진 일로 행방을 좇고 있는 저쪽의 일 처리가 아무래도 조금은 느슨해질 것이다.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허나 만운이 도적 토벌을 하러 떠난 이후에도 국경의 요상스런 도적들은 잡히기는커녕 그 행적이 더욱 귀신같아진 것 같았다. 만운이 있는 곳을 속속 피해 나타나는 도적들의 행보를 보자면 관이나 상단들에 도적의 끄나풀이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운은 밀정을 잡겠다며 오가는 상단들까지 수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밀정의 소식을 골라낼 합법적이며, 확실한 명분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값진 보석 외에 서신이란 서신은 죄다 터는 도적들에게서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만운은 도적을 토벌하기 위해 국경에 도착한 후 열흘이 지나지 않아 찾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최사립에게로 향하던 채운의 행방을 알리는 서신을 찾은 것이다.

혹시나 하는 희망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최사립 측에서 이 일이 돌아가는 행태에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도적단은 곧바로 만운의 손에 소탕되었다.

도적단을 소탕한 만운은 그 길로 바로 도성의 왕세자에게로 돌아와 채운의 소식을 보고했다.

“그가 살아 있다고?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야?”

왕세자는 만운이 내민 밀지를 보면서도 만운에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만운도 희열에 가득 차서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다 합니다. 형은 살아 있습니다!”

“어딘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밀지에 따르면 형님을 마진이라는 곳에서 본 것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게 확인된 것만 해도 어딘가.”

“네, 그렇습니다. 마진이 어디인지 알아보니 거리상으로 우리 려국과 최소 한 달은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현재까지 귀환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슨 일이라니?”

“폭풍이 몰아친 것은 려국에서는 사흘, 송국에서는 이틀이었다고 합니다. 허니 가는 도중 문제가 있었거나 배에 탈 때 사고가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현재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형이나 형수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소식과 함께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사실을 말하는 만운의 얼굴이 급격히 침울해지고 있었다.

왕세자도 만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와 시간을 계산해 보면 채운의 부상에 관한 짐작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허면 우리도 사람을 파견해야겠네. 그를 무사히 오게 하려면 은밀히 움직여야 할 것이야.”

“저하,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만운은 한시도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형이 살아 있다는데, 그리고 형수도 함께 있다는데 어떻게 혼자만 편히 앉아 마냥 기다리고 있겠는가.

만운은 반색하며 외쳤다. 허나 그의 말에 왕세자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 맘은 알지만 자네는 안 되네. 만운, 자네가 직접 송국으로 간다는 건 저들에게 너무 눈에 띄어. 그렇게 되면 오히려 저들의 방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제가 어찌 이곳에 이렇게 앉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형과 형수가 사지에 계시는데요!”

“나도 채운을 구하고 싶어. 그러나 장소가 문제야. 자네가 말했듯이 그곳은 사지나 마찬가지인 송국이라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일세. 최사립이 그 넓디넓은 제국을 저 혼자 힘으로 뒤져 그의 행적을 찾은 것이라 보는가? 분명 송국 관리들이 힘을 쓴 것일 게야. 그 힘을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단순히 남의 나라 장군을 찾아내기 위해? 그게 아닌 걸 자네가 더 잘 알지 않은가. 송국에서는 내가 려국의 다음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해. 내가 저들의 손에서 벗어날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지. 그 힘의 주축이 누구던가?”

왕세자의 무력의 중심, 다음 왕을 향한 충심을 가진 가장 강한 수하이자 벗, 백성들의 민심을 얻으며 현재 왕세자의 지지 세력이 모이는 주축이 바로 윤채운이다.

최사립이 송국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나 그것은 비공식적인 일이었다. 허나 만일 왕세자가 송국에 공식적으로 윤채운을 찾기 위해 사람을 파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송국에 채운을 찾아 노릴 수 있는 명분을 주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왕세자가 보낸 사람들을 무슨 수를 써서든 방해할 것이다.

공개적인 추적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반드시 은밀히 움직여야만 했고, 그렇게 은밀함을 요하는 일에 지금 가장 부적합한 사람이 바로 만운이었다.

“자네가 바로 채운의 동생이기에 안 된다는 것이야. 안타깝고 마음 졸이는 일이겠지만 그 일에 자네는 안 돼.”

만운은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왕세자의 말은 이해한다.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허나 왕세자는 반발하려 머리를 쳐드는 만운에게 고개를 저었다.

“대신 자네는 다시 국경에 가 있게. 그곳의 도적이 왜 생겼는지 민심을 살핀다고 하고, 국경을 지켜. 제국에는 다른 이들을 보낼 테니, 만운 자네는 채운과 자네 형수가 오는 길을 지키게.”

내려진 명에 만운은 눈을 질끈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로선 정말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형을 찾는 일에 자신이 오히려 나설 수가 없다니.

하지만 왕세자의 말은 무엇 하나 그른 것이 없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신 자네가 직접 송국에 보낼 사람을 선별하게. 믿을 만한 소수 정예로 뽑아서 연락 체계를 갖추고. 인솔자는 무예도 중요하지만 송국말에 능통하고, 임기응변이 강하고, 어떤 일에도 대처할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네, 알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서궁의 대전에 들어섰던 만운은 무거운 기분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채운이 살아 있다는 소식만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이에 만운은 그제야 처음으로 잠을 취할 수가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애가 타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가. 당장 형을 찾으러 직접 갈 수는 없었지만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맞을 채비를 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왕세자도 채운이 실종된 뒤로 처음으로 축배를 들며 자축했다. 채운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예전에 농으로 했던 술을 정말 백 동이라도 하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나 이쪽에서 채운의 생존 소식을 안다는 것은 비밀로 해야 했다. 최사립이 먼저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 만운의 행보에 방해를 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을 사전에 차단해야 했다.

그래서 이 사실은 성도종 대감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딸의 실종에 허망하게 물러앉았던 성도종 대감은 이후 속속 왕세자 쪽으로 돌아서는 중립파에 아낌없이 지원하기 시작했다. 왕세자를 돕고 그 힘을 탄탄하게 하는 것이 딸을 잃은 슬픔을 딛고 복수도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덕분에 왕세자 측은 점점 더 국정에서 큰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고, 청왕의 양위설이 힘을 얻고 있었다.

허나 최사립의 정보를 빼앗을 계책을 낸 재영에게는 채운의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재영은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기쁜 감격을 혼자 추스르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지만 감격의 눈물도 잠시, 이제부터 할 일이 더 많게 되었다. 그녀는 우선 만운을 도와 송국에 보낼 인물들을 같이 선별했다. 그리고 이제 거의 자신의 집무실이 되어 버린 채운의 집무실을 그의 무사 귀환을 위해 필요한 작전을 짜는 곳으로 탈바꿈시켰다.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그의 물건 어느 하나 움직이지도 못하던 재영은 기쁘게 그곳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랍을 정리할 때였다.

깊숙한 서랍 안쪽에서 겉봉투에 정갈한 여인네의 필체로 쓰인 무언가가 툭하고 튀어나왔다.

‘그의 집무실에 여인의 서신이라니.’

재영은 그것을 집어 들고는 잠시 망설였다.

‘부인일까? 부인의 것일까?’

아마 부인의 것일 게다. 그냥 넣어야 하는 걸 알고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그것을 그냥 제자리에 넣어 두라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허나 제 손가락은 이성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궁금했다. 그가 어떤 여인의 서신을 이리 깊숙이 보존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인지 알고 싶었다.

소중한 내용이라 이리 보관할 것일 게다. 읽으면 마음이 더 아플지도 모른다. 자학일지도 모를 짓을 왜 하는지 모르지만 떨리는 손가락은 천천히 서신을 펴고 있었다.

재영은 미처 다 빠져나오지도 못한 짧은 내용을 살그머니 펼쳐 보았다. 첫 줄을 읽으며 조심스럽게 빼던 겉봉투가 툭하고 떨어졌다.

재영의 입에서 비명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맙소사.”

털썩 주저앉은 재영은 다시 한 번 서신을 확인하고는 같은 탄성을 흘렸다.

“맙소사!”

* * *

약천에서 의방으로 꾸민 집에 든 이후, 강희는 매일같이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옷가지를 빨고, 맨몸으로 온 그를 위해 새 옷을 짓고, 그를 위한 음식을 만들고, 게다가 장사를 위한 음식도 만들어야 했다.

음식을 파는 시간은 점심 한때만 하고, 국수와 수제비 단 두 가지 요리만 하기로 했기에 간단할 듯싶었지만 그것도 손님이 늘어 점점 음식 할 양이 늘자 조금 벅찰 정도가 되었다.

채운은 처음부터 그녀가 음식을 내가는 것은 절대로 하지 못하게 말렸다. 아무리 시늉이라 하나 그녀가 뭇 사람들의 시중을 들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변장이 남에게 보일까 그것을 매우 저어했다. 부엌을 오가는 심부름을 해 주는 아이도 따로 고용했기 때문에 강희는 식방을 열 때면 매번 그 불편한 변장을 계속해야 했다.

허나 강희는 이 변장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몸을 부풀린 대나무 골조는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며칠에 한 번씩 부러지곤 했다. 그러면 그가 다시 정성스럽게 고쳐 매만져 주곤 했다. 옷 위로 만지기에 살갗에는 전혀 닿지 않는 손길이지만 그가 매만져 줄 때면 그의 손이 직접 닿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에 눌러써야 해서 불편한 두건도 그가 종종 고쳐 주곤 했다.

바로 이렇게.

강희는 머릿수건을 만져 주느라 가까이 붙어 선 채운의 앞에서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강희.”

“네?”

“더워져서 정말 불편할 것이오. 당신만 이리 불편한 변장을 시키고 고생시켜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아닙니다, 서방님.”

“얼굴에 붙이는 건, 그만둬야 할 것 같소. 점점 더워지는데 뾰루지가 생기면 어쩌오? 이 고운 얼굴에 이 무슨 짓인지. 내 낫기만 하면 당장 이곳을 벗어날 것이오.”

“네, 그러셔야지요.”

강희는 가끔씩 이곳을 빨리 떠나야 한다는 채운의 말이 반갑지 않게 들렸다.

‘언제 다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에 잠길 새도 없이 곧 그녀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두건을 다시 매어 주느라 더 가까이 온 탓에 그의 숨결이 바로 얼굴 위에서 느껴진 것이다.

“잠시만. 아, 되었소. 부엌이 너무 더워서 그런 것 같소. 두건이 자꾸 헐렁거리지 않소?”

“괜찮습니다.”

“아니오. 내가 자주 보는 게 낫겠소.”

그러면서 채운은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의 모습이 얼마나 눈부신지 강희는 저도 모르게 두 눈 가득 그의 모습을 담뿍 담고 있었다. 허나 민망하게도 그의 뒤에서 오던 서 의원이 그들을 보며 입을 딱 벌리는 게 보였다.

“저, 저는 이만.”

순간 그의 품에 기대고 싶다는 유혹을 간신히 벗어난 강희는 부엌으로 다시 종종걸음을 쳤다. 보기에 흉한 여자를 붙잡고 뭐하는 건가 싶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순간 실수라도 그의 가슴에 고개라도 기댔다면 얼마나 더 민망스러운 꼴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서방님이 더 놀라겠지.’

가끔씩 스치는 손길에 종종 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허나 발목을 죄는 기한이 미래를 한정 짓고 있었고,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재영이 생각나 명치에 불덩이를 들여놓은 것 같았다.

재영. 그녀는 이번 생에도 아이를 가졌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 아니었다. 며칠 전 적지만 또 혈흔이 비친 것이다. 달마다 거의 정확하던 것이 약 이틀 정도 적은 양으로 곧 사라져 이상하긴 했다.

누엔 부인에게 물어보자 너무 놀랄 일이 있으면 그럴 수 있다며, 걱정 말라고 말해 주었다. 자신도 그런 적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요즘 몸이 많이 지친 것 같았다. 피곤함을 자주 느껴 낮에도 깜빡 졸기도 하고, 밤에는 너무 빨리 잠들곤 했다. 뒤척이지도 않고 자는 그를 바라보며 잠들고 싶었지만 눕는 순간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부엌일을 돕는 이로 따로 부리고 있는데 종종 쏟아지는 잠을 도통 쫓기가 힘들었다. 매일 반죽과 씨름하고 불을 가까이하면 녹초가 되곤 했다. 아마 하지 않던 일들을 해서 몸이 아직 적응하지 못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 음식 장사라는 말에 두 가지 요리를 선택한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으로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원 없이 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맛있소.”

그는 상을 내갈 때마다 그 말을 빠지지 않고 해 주었다. 그리고 정말 맛있게 먹고 있는 그를 보면 자신이 더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엔 그리 좋아하지 않던 음식인 국수를 그녀도 퍽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어제저녁엔 아무 생각 없이 먹다가 그와 거의 같은 양을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문득 놀라고 말았다.

그걸 본 호근이 당장 농을 하며 놀렸다.

“와, 이러다 부인은 그 변장할 필요가 없게 될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이 드시는군요, 우하하.”

강희의 얼굴이 붉어지는데 채운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내는 그리해도 고울 것 같소. 지금은 너무 말랐소. 정말 변장이 필요 없게 된다 해도 좋으니 많이 드시오.”

채운의 팔불출 같은 소리에 호근은 입을 딱 벌렸다. 그러고 잠시 후에 말했다.

“아니, 정말 그렇다 해도 그렇지! 혼자 있는 노총각 앞에서 굳이 부인을 그리 애틋하게 보고 싶으십니까?”

“서 의원, 그대도 연인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내 돌아가면 서 의원은 어떨지 두고 보리다.”

호근은 웃지도 않고 농을 하는 채운에게 가슴을 치며 분한 표정을 했다. 그런 것 또한 호근의 장난 중 하나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곧이어 채운과 호근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나 강희는 쿵쿵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가 또 자신을 곱다고 하는 것이다. 이전엔 그에게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었지만 요즘은 아무 때나 쉽게 그리 말해 주곤 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 듣는 것과도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그리고 연인이라니, 호근의 연인처럼 자신도 과연 그에게 같은 의미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문득 드는 생각에 강희는 다시 가슴이 싸해지는 것 같았다. 어리석은 미련과 욕심에 자꾸만 그를 잡고 싶은 생각이 커져 가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이 거짓을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어서 그가 저렇게 순수한 호의를 보이는 것이다.

그를 더 이상 기만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가 보내는 호감을 받고 싶은 욕심을 막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기억을 찾은 거라면 좋으련만. 그는 아직도 자신에 대한 건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채운에게 혼인한 것을 제외한 지난 일 년간의 정세와 이곳에 오게 된 원인인 사고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주었다. 그중 그가 가장 궁금해 한 것은 이곳까지 오게 된 배 위에서의 일이었다.

왜 그 일을 가장 알고 싶어 했는지는 모르지만 강희는 짧게 말하고 말았다. 허나 나중에 누엔 부인이 그녀가 배에 묶인 그를 꼭 붙잡고 있었다는 걸 말해 줘서 그는 그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배 위에서 정신을 잃은 동안 살 수 있었던 것이 그녀 덕분이라 치하했지만 애초에 그녀가 아니었으면 이곳까지 올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녀도 망망대해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건 그가 없었다면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길석에 대해서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말해 주지 않았다. 슬픈 소식은 귀환해서 들어도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행여나 그의 회복에 차질이 있을까 저어되어 말할 수가 없었다.

길석의 죽음은 그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생각지도 않은 음식 장사를 타국에 와서 하게 된 것도 그렇고, 기껏 막았다고 생각했던 죽음이 기어이 찾아온 것도 운명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생각만 해도 가슴을 쥐어뜯게 되는 그와 재영과의 일.

그렇다. 그녀도 있지 않은가.

허니 그와의 미래도 원래의 운명에서 아주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같은 결말이라면 그가 더 행복하게, 또 자신도 쫓겨나는 것보다는 모양새 좋게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돌아갈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불어 그와 헤어질 날도 다가오고 있었다.

저릿해진 가슴이 눈물 한 방울을 지어내고 있었다.

* * *

의방에 정착한 지도 어느새 스무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송국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난 것이다.

채운의 회복은 중간에 수보 때문에 무리하여 조금 악화되기는 했지만 다행이 곧 순조롭게 회복되었다. 부러졌던 갈비뼈는 이제 다 붙어 약간의 저릿한 통증만 남아 있었고, 어깨도 나아가고 있었다.

팔의 회복은 더딘 편이라 아직 칼을 들고 휘두를 정도는 못 되었다. 그래서 호근은 그가 훈련하는 건 절대 말리는 중이었다. 괜히 시간을 단축하려다 부작용으로 영영 팔을 못 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채운은 훈련을 할 수 없는 대신 강희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건 어떻소? 나도 제법 잘하지 않소?”

채운이 방금 치댄 반죽을 보여 주며 물었다.

“서방님, 제가 하겠습니다. 무장이신 분이 이런 일을 하시다니요?”

강희가 부엌의 한편에 선 그를 쫓아내지도 못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아니오? 그리고 해 보니 제법 힘이 드는 것 같소. 그런데 당신에게만 매일같이 이 힘든 걸 맡기고 얻어먹기만 하다니, 염치도 없지 않소?”

“서방님, 제발…….”

“하하, 내가 있는 것이 그리도 불편하오?”

좁지 않은 부엌이지만 그가 들어오자 공간이 꽉 차 보였다. 아니, 이곳이 넓은들 그가 있는데 그녀에게 꽉 차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사람들이 흉을 보옵니다.”

“뉘가 흉을 본다는 말이오?”

채운이 묻자마자 답을 하는 것처럼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봐. 저 아저씨 또 부엌에 들어갔다!]

[뭐, 정말? 생긴 건 멀끔한 양반이 왜 또 부엌에서 저러고 있대?]

[아마 부인을 누가 낚아챌까 걱정돼서 그러는가 보지, 뭐.]

[뭐? 저 그악하게 뚱뚱한 여자를 누가 채 간다고 그래?]

[그런 사람이 있대. 부인만 졸졸 따라다니고, 다른 사람이랑 말만 나눠도 괜히 두드려 패고.]

[엑? 두드려 팬다고?]

[그건 모르지. 우리 엄니가 그러시는데, 저런 사람은 대개가 그런 사람이래.]

[이상한 사람이네?]

[그렇지.]

아이들의 대화를 들은 강희는 채운이 그 말을 들었을까 걱정되어 더 어쩔 줄 모르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가 송국말을 몰라서인지 아이들의 수다에 아랑곳없이 치댄 반죽을 덮고는 더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서방님…….”

“알았소. 내가 예 있는 것이 그리도 불편하오?”

“그게 아니라…….”

거의 울상인 강희의 목소리에 채운은 결국 밖으로 나가야 했다.

“아무튼 지금은 가리다. 하지만 당신 손목이 왜 부었는지 확실히 알았으니, 오늘부터는 내가 주물러 주겠소.”

“앗!”

채운이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말했다. 너무나 친근하며 자연스런 행동이라 어색함을 느낄 새도 없이 강희는 놀라서 굳어 버리기만 했다.

“이따 봅시다.”

채운은 문간에서 몇 번 안을 훔쳐보던 아이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서늘한 눈매에 아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그날 소곤거리던 아이들은 금방 그에 대한 새 별명을 지어내고 말았다.

“기, 기둥서방이요? 무장님이요? 푸하하하하!”

호근이 채운을 앞에 두고 배를 잡고 웃었다. 방금 전 동네 사람들에게 그의 별명을 듣고 와서는 기운 좋게 거의 일각한 시간의 사분의 일. 곧 15분을 말한다 동안 계속 웃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도 채운의 별명은 뚱보 아줌마의 기둥서방이었다.

그 별명의 출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부엌에서 강희의 일을 돕는 아이들이 한 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이없기도 하고, 호되게 꼬집는 말이기도 했다.

매일 동동거리는 강희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채운. 별명이 만들어지기엔 충분했다.

아이들 눈에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매일 부인의 뒤를 쫓지 않으면 뒹굴거리고 있으니, 그를 보는 시선이 자연 곱지 않았다. 그야말로 부인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놀고먹는 사내의 전형이 아닌가.

호근이 낄낄거리며 웃는데도 채운은 그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 의방에서 지금 가장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이가 채운이었다.

호근은 한가롭긴 하나 의원이란 직책을 갖고 있었고, 수보는 환자였으니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누엔과 강희는 매일 음식을 만들어 파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채운의 역할은 왈짜패의 시선에서 이들을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지만 허리에 칼을 차고 가끔 돌아다니는 것이 일하는 걸로 보일 턱이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말마따나 강희의 옆에 붙어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러니 그런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붙을 만도 했다.

“푸흐흐흐흐흐.”

“으흠, 흠!”

채운이 계속 웃고 있는 호근에게 그만두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나도 알고 있었소.”

“네? 알고 계셨다고요?”

“최근에 손님이 더 많아지며, 아내가 힘들어 하는 것 같았소. 주변을 돌다가 그녀의 일을 돕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소.”

호근에겐 차마 부엌에서 일을 도우려다 쫓겨났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정말이오? 하, 하! 그 뚱…… 보 아줌마라는 소리도요?”

호근은 계속 웃느라 말을 더듬고 있었다.

흘끔거리며 계속 킥킥거리는 호근에게 채운이 기어이 한마디 했다.

“이제 그만하겠소?”

“푸, 흐흐흐. 네에, 네.”

채운은 저가 듣는 기둥서방이라는 말보다 곱기만 한 자신의 부인이 뚱보 소리를 듣는 것에 기분이 더 나쁜 눈치였다. 허나 제 손으로 아내를 그리 만들어 놓고 그것에 불만을 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나저나 내 아내는 이제 일을 그만해도 좋지 않겠소?”

‘내 아내’라 칭하는 그의 말에 호근은 오싹할 정도의 소유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부인은 그날 누엔 부인과 했던 고백으로 제 마음을 다 보인 이상, 달아날 기회도 없게 된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아직도 가끔 우울해 보이는 그의 부인이 호근은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네, 슬슬 그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이곳을 누엔 부인께 드리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갑자기 접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누엔 부인께도 사실을 말해야 할 텐데……. 수보 형의 다리 상태는 어떻소?”

“이제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긴 합니다만, 최소 한 달 정도는 더 있어야 목발을 떼고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목발 없이 걷게 된다 해도 완치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수보가 이전과 같은 상태가 될 때까지 이후 또 최소 한 달은 더 걸려야 할 것이다.

그래도 아마 그때 수보가 호근을 만나지 못했다면 다리가 이 정도로 회복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호근만큼 솜씨 좋은 의원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다리를 절거나 최악에는 절단해야 했을지도 모를 중한 상처였다. 당시 호근이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었다. 그만큼 호근의 실력은 출중했다.

이 모든 것은 채운이 그들의 집에 머물며 호근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수보와 누엔은 채운과 강희의 은인이었지만 그들이 베푼 은혜 덕에 자신들도 덕을 볼 수 있었다고 봐야 했다.

허나 수보는 아직 회복 단계에 접어든 것이 아니라 누엔 부인의 아버지가 그들을 찾는다는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본가에 돌아간 후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최소한 수보가 걸어 다닐 만큼은 회복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군. 그럼 우리가 떠날 즈음 얘기하는 것이 좋겠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차츰 이 집을 정리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집은 누엔 부부에게 맡기고, 그냥 떠나는 게 좋지 않겠소? 우리가 그 일을 말해 준다 해도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리가 나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아니오. 며칠 전에도 왈짜패들이 기웃거리는 것을 보았소. 아직도 우리 일행을 넘보고 있는 것인지. 정말 끈질긴 놈들이오. 노리는 것은 돈을 가지고 있다 소문난 서 의원 당신일 테니, 우리가 떠나면 그들 부부는 노리지 않을 것이오.”

“괜찮은 생각입니다. 다만 놈들이 아직도 기웃거리고 있으니, 떠난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웃음으로 시작한 대화가 끝은 진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정말 떠날 때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채운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가 최사립의 추적자들이 인근 해안을 수색하며 그의 행방을 찾고 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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