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홀로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야 하는 이유
호근이 빌린 집은 꽤 컸다.
의방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집이었고, 방이 여유가 있으니 이제 부부들은 당연히 각각의 방에 들게 되었다. 각자의 잠자리에 들기 위해 자신들에게 배정된 방으로 가던 강희는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얇은 벽 하나만 두른 누엔 부인의 집과는 다른 곳이었다. 두 사람이 은밀한 공간에 들게 되는 것이다.
강희로선 채운에겐 부부 사이가 아니라고 했으니 잠자리를 함께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의식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채운은 이제 정신을 잃고 있는 환자의 상태가 아니기에 그가 더욱 사내로, 정인으로 의식되는 것이다.
또 강희는 낮에 그로 인해 겪었던 두근거림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그녀는 혼인 초기에 만운이 집에 온다 하여 처음 그와 한방에 자던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그때 채운이 그녀를 불렀다.
“강희.”
“네?”
긴장으로 신경이 당겨져 있던 강희는 그가 부른 것만으로도 움찔했다.
“당신은 많이 불편할 것이오. 외간 사내와 계속 한방을 쓰게 해서 송구하오.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계속 부부처럼 보여야 하니 조금만 더 참아 주시오.”
그의 말에 강희는 맥이 빠졌다. 자신은 그가 의식되어 숨도 크게 못 쉬고 있었는데 그는 그녀가 불편할 것을 걱정할 뿐이었다.
“네…….”
그러자 아까 하던 고민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고백해야 할까?
‘……해야겠지?’
허나 그리 마음먹어도 입속에서 뱅글뱅글 도는 말은 쉽게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해야 할 말이다. 강희는 눈을 찔끔 감고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릴 말쓰…….”
그런데 채운이 그녀를 다시 불렀다.
“강희.”
“네?”
“조금만, 조금만 참아 주시오. 나는 내가 이곳에 살아서 올 수 있었던 것이 하늘의 보살핌도 있지만 당신 덕분이라 생각하오. 당신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소. 세상은 나를 장군이라, 영웅이라 칭송하지만 나도 별수 없는 사내이고, 약한 인간인가 보오. 당신이 있기에 의지가 되고, 안심이 되고, 힘이 나고 있소. 당신에게 여러모로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오. 무엇보다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오. 덕분에 난 빨리 낫겠다, 무사히 돌아가겠다는 용기를 얻고 있소.”
상상도 못했던 말에 강희의 고백은 입 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도로 들어가고 말았다.
‘내 덕분이라니. 내 덕분에 힘을 내고 용기를 얻다니.’
이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인가.
그 반대가 아니던가. 그가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냔 말이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그가 아끼는 길석이 죽었다. 그런 일을 두고 덕분이라는 말을 듣다니, 이럴 수는 없었다.
‘허나 고백을 할 수도 없어.’
거짓된 감정이라 하나 그가 자신 때문에 힘을 얻는다 하지 않는가. 그의 마음이 좋다지 않은가.
그런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할까?
그와 악연 중의 악연인 성강희가 자신임을?
안 된다! 아니 될 일이었다! 아직 환자인 그에게 성강희란 여자가 옆에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스스로 기억을 되찾는다면 모르지만, 최소한 그가 나을 때까지, 혹은 귀환할 때까지 제 입으로 자신에 대한 고백을 할 수는 없었다.
강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고백을 하지 않게 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이런 핑계를 대더라도 이 한정된 순간을 조금이나마 연장할 수 있는 것이 마냥 기뻤던 것이다.
“나는 그렇다오.”
“송구합니다.”
“아니오. 내 마음을 꼭 말하고 싶었소. 이제 주무시오. 서 의원이 많이 자고 편히 쉬는 게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 하였소.”
“네, 주무셔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각각 방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떨어져 누웠다.
허나 눈을 감았다고 누가 옆에 있는지 잊는 것도 아니고, 잠이 빨리 찾아들지도 않았다. 긴장된 여정에 편히 쉴 곳을 마련했다는 것은 그나마 평안을 주는 일이었다. 더구나 채운과 함께 있다는 것은 강희에게 두근거리는 긴장도 주지만 안심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곧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채운도 잠이 든 듯했다. 허나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잠든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가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데도 강희는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참기 힘들었던 채운은 그녀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강희가 꿈결인 양 그를 속삭여 불렀다.
“서방님…….”
그에 채운은 하마터면 그녀의 입술을 더 깊게 탐할 뻔했다. 하지만 최대한 인내를 발휘해 잠시 짧게 입을 맞추고 억지로 입을 떼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방금 전 그녀가 고백하려는 걸 겨우 막을 수 있었다. 당장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나서 그녀가 어찌할지 그린 듯 눈에 보였다.
그 이혼장의 얘기를 꺼낼 것이고,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절차를 밟으려 할 테지.
해서 장황한 설명으로 그녀가 고백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강희가 뒤척이는 바람에 훌쩍 물러난 채운은 잠시 강희를 더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늘 호근과 집에 돌아오다가 산 것을 그녀의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흔한 장신구도 패물도 아닌 단지 머리끈 하나였다. 붉은 줄에 금사가 섞여 알록달록한 머리끈은 이곳 송국의 여인들이 머리를 묶는 데 쓰는 것이었다.
패물 얘기를 했었지만 당장은 너무 먼 얘기였다. 고운 그녀를 더 꾸며 주고 싶었으나 꾸며서도 안 되는 지금, 무엇이든 주고 싶어 산 것이었다.
‘그녀는 이것을 좋아할까?’
강희에게 처음 하는 선물이 겨우 이런 것이라니, 민망할 지경이었다. 허나 열 살 소년이 살 법한 그 선물처럼 그의 마음도 그렇게 설레고 있었다.
강희가 이것을 받는다면 그녀의 고운 입술이 다시 ‘서방님’이라 부르며 열릴 것 같았다.
강희가 다시 몸을 뒤척이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는 그녀가 깬다면 할 말이 없었다. 채운은 할 수 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누워 잠을 청했다.
누운 채로도 그는 강희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계속 그녀를 쓸었다. 언젠가처럼 당분간은 이렇게 다시 불면의 밤이 이어질 것 같았다.
* * *
다섯 사람이 약천에 정착한 것은 성공한 듯 보였다. 도시에서도 외진 곳에 연 의방은 별 견제도 없었고, 몇 사람이 작은 상처로 간혹 찾아들 뿐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런 곳을 고른 것이었지만 하루 종일 수보와 채운만 진료하는 호근은 조금 무료해 보였다.
그는 원래 작은 마을들을 떠돌면서 의원으로서 꽤 바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간혹 찾아오는 환자들을 무척 반갑게 맞이하고 정성껏 돌봤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는 천생 의원이라 해야 했다.
며칠이 지나며 가장 반가웠던 일은 수보의 상세가 단 며칠 만에 무척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아직 부러진 다리에 통증이 있긴 했으나 그는 처음처럼 심한 고통을 호소하지는 않았다. 좋은 음식과 약재, 그리고 훌륭한 의원의 치료가 그를 빠른 시일 내에 정상으로 돌려놓은 것으로 보였다.
강희는 사람들 앞에선 여전히 뚱뚱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급하게 옷가지를 겹쳐 만들었던 처음과는 다르게 가슴과 배 부분에 대나무로 골조를 대고 부풀려서 그녀는 지금 전보다 더욱 뚱뚱하게 보였다. 게다가 얼굴 쪽에는 얇은 가죽으로 부푼 볼을 만들고, 머리엔 두건을 써서 철저히 변장을 한 상태였다.
처음엔 강희가 굳이 그런 식으로 모습을 감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 했던 누엔이 나중엔 더 적극적으로 그녀의 변장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의방을 차린 며칠 후 처음 약천에 들어설 때 어슬렁거렸던 왈짜패가 집안을 기웃거리는 것을 본 것이다.
음식을 사 먹으러 왔던 한 사람이 그 왈짜패를 알아보고는 누엔에게 한마디 해 준 일이 있었다. 얼굴 반반한 여인네들은 그냥 넘기지 않는 악질들이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희는 더욱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고, 겨우 마당에 나설 때에도 변장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후 나서야 했다.
하지만 그 변장도 강희의 부푼 마음을 어쩌지는 못했다. 두건 속에 머리를 꽁꽁 묶은 한 가닥 붉은 끈이 요란한 겉치장보다 그녀의 마음을 더 크게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집에 온 첫날, 자고 일어난 그녀의 머리맡에는 머리끈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뉘가 준 것인지, 왜 준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강희는 그걸 쥔 채 울컥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가 그녀를 위해 사 준 것이다. 감히 구리 반지 하나라도 바랄 수 있겠느냐 애달아 했는데, 그것이 현실로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녀는 그 선물이 너무나 귀하고 아까워 팔에 감아 묶고서 소매로 가렸다. 그것을 몸에 지닌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 떨리는 것 같았다.
먼저 일어나 나간 채운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침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차마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강희는 상을 치우고 홀로 부엌에 앉아서 계속 멍한 기분에 들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호근이 슬쩍 다가오더니 한마디 건넸다.
“혹시 무장께서 어제 무언가 주시지 않았습니까?”
“네?”
“어제 저와 함께 나가셨다가 무장께서 시전에서 머리끈 하나를 아주 유심히 고르시더이다. 무장께서는 그런 걸 사 본 적이 없어 그러시는지 쩔쩔매시는 걸 제가 도와주었지요.”
“서방님께서…… 그리하셨습니까?”
그 모습이 절로 상상된 강희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발갛게 볼이 상기되고, 머리끈이 감긴 제 손목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강희가 그 머리끈을 어쨌는지 알게 된 호근의 입가에도 슬슬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 부부를 잘되게 해 주면 자신에게도 필경 복이 돌아올 것 같았다. 나중에 저 혼자 있을 때면 저만 혼자라 서럽다, 샘이 난다 팔짝 뛰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열심히 도울 작정을 하고 있었다.
“저라면 선물이 아무리 하찮아도 제 정인이 그걸 머리에 묶어 주는 게 더 기쁠 것 같습니다.”
“하찮다니? 그런 게 아닙……, 아!”
그 말에 펄쩍 뛰던 강희는 항변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하찮다니? 아까워서 차마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근이 진짜 하려는 말은 알 수가 있었다.
그도 정말 그러길 바랄까? 정말 이것으로 머리를 묶는다 해도 두건을 써서 보이지도 않는 것을. 그래도 방 안에서는 두건을 벗으니 그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강희의 설레던 맘이 그가 정말 보아 줄까 하는 의문으로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채운은 호근을 일러 눈치가 빠르고 괜찮은 사람이라 했다. 려국에도 함께 돌아갈 것이라 했고, 돌아가서는 인재로서 거두고 싶은 이라고도 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가끔 장난기가 있고, 실없이 잘 웃기도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네. 감사합니다, 서 의원님.”
“감사하긴요. 하하, 오늘도 맛있는 식사 부탁드립니다. 혹, 오늘도 국수를 만드실 것입니까?”
“네, 시늉을 하더라도 번듯하게 보일 음식을 내놓으려고요.”
“하하하, 덕분에 제 입이 호강하고 있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리하여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강희의 대외적인 모습 아래 그 정표는 그녀의 머리를 한시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채운은 무심한 듯 보였지만 그녀가 제가 준 머리끈으로 매일 머리를 묶는 것을 한 번씩 확인하고 있었다.
머리끈은 강희가 만들어 파는 국수 한 그릇의 값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의 가치는 호근에게 주었던 패물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강희가 체념하며 놓아주려고 하던 두 사람의 붉은 인연이 한 발짝 그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 * *
채운은 몸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강희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한 획을 긋고 있는 중이었다.
강희와 누엔의 고백을 들은 그날, 채운은 기억을 모두 다 찾는 동시에 그녀가 기어이 이혼을 강행할 것이란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야 왜 강희가 처음 그를 찾아왔을 때 이혼장을 내밀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죄스러워 했는지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또 그녀가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모두 아는지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녀의 신묘한 꿈 때문일 것이다.
만운을 구하고, 그가 당할 위험을 경고하고, 전황을 바꿀 만큼 중요한 인물에 대한 것을 알려 주었던 그 꿈. 바로 그것 때문에 그 일 또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 말고는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 옛날의 불행한 사건의 전말을 그토록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강희는 꿈에 대해 이후의 몇 년을 더 살았다고 말했다.
‘말하지 않은 부분에 뭔가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겠지.’
그가 처음에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화를 냈던 그 이상한 제안도 아마 그 꿈에서 겪은 일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대체 꿈속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하지만 그 궁금증을 채우기보다 먼저 할 것이 있었다. 그녀가 누엔 부인에게 했던 고백을 들은 이상, 그가 먼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제 마음의 응어리와 원한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전엔 그냥 묻어 버리려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채운에게 그것은 전자와 후자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전자는 앙금이 남을 일이고, 후자는 모두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앙금이 완전히 풀려야 그녀와의 진정한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이 그토록 쉽게 용서될 일이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제가 행복한 미래를 꿈꾸려면 강희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있어야 했다.
마음이 풀리면서 그 사건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었다. 자신들에게 벌어진 일은 정말이지 불행한 사고였다. 그녀가 원인이 되기는 했으나 그녀는 어렸고,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새 그는 그렇게 그녀를 용서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중엔 그녀와 솔직하게 서로 얘기하고, 그녀를 용서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응어리질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사모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마음의 정리는 빠르게 되었다.
‘그래도 되겠지, 내 착한 누이야? 어머니, 아버지, 제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절 용서해 주실 거죠?’
매번 죽기 전에 문드러진 얼굴로 괴로워하던 모습만 생각나던 누이가 해사한 표정으로 웃어 주었다. 마지막 순간 슬픔에 잠겨 있던 어머니, 아버지 대신 행복했던 그때의 두 분이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상태로 귀환하게 된다면 그녀는 떠날 마음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 그녀가 그 사건을 알고 죄스러워 한다는 걸 알았다면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노력을 미리 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돌아가기 전에 이혼까지 약조했던 기간이 끝난다.’
그들 사이엔 감정을 키울 시간이 너무 없었던 것이다.
단 두 번 있었던 잠자리로 그녀를 잡는다면 강희는 그것을 의무감이라고만 여길 것이다. 허니 그보다 더한 감정의 여지를 만들어야 했다. 이미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한 것 같으니 강희에게 그것을 확인시키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기억을 다 찾은 사실을 숨겼다. 지금의 강희는 결심이 너무나 확고하여 여지를 만들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자신과는 서로 잘 알지 못하는 남남인 상태가 나았다. 죄책감에 힘들어 하는 그녀가 오롯이 저만 볼 수 있도록, 이 윤채운이라는 사내만 보며 더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도록 그리할 작정이었다.
강희의 생각을 돌리려면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알려야 했다. 그러기 전까지 그녀가 계속 정체를 밝히려는 고백을 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것은 첫날 한방에 들었을 때 그녀의 말을 막은 것처럼 환자인 자신의 상태를 이용하면 가능할 거 같았다. 연약해진 몸과 마음에 그녀를 의지하고 있다는 한마디로 그 고백을 막을 수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이 성강희임을, 그리고 꾸미는 것이 아닌 진짜 아내인 것도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강희는 거의 매일 그가 기억을 다 찾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호근이 그녀가 듣는 데서 은밀하게 묻는 척 기억의 공백을 재확인시키는 식으로 잘 막아 주고 있었다. 또 환자의 안정에 부인의 역할이 지대하니 마음을 다독이라는 말에 그녀의 시도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요즘은 그보다 강희가 서방님이라 부를 때마다 종종 그녀를 안고 싶은 것을 참는 일이 고역이었다. 평생을 함께할, 그리고 자신이 연모하는 사람이란 생각에 그녀를 품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제 겨우 시작하는 중이다. 지금은 서로에게 마음을 키우고 보여 줄 시간이니, 제 욕망은 잠시 눌러야 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하며 기뻐하고 놀라고 웃는 강희를 채운은 절대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찌 이렇게 얽힌 악연이 있을 수 있을까 가슴이 패일 것 같다가도 강희를 떠나보내는 일을 생각하면 그것 또한 그런 상처로 남을 것 같았다.
상처에 상처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한 만운이 제 형수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만운을 생각하니 또 가슴이 쓰리듯 아팠다. 언젠가 너무 화가 나고 슬펐던 날, 그때의 못된 귀족 계집애가 했던 말을 만운에게 해 주었던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하지만 만운은 그것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니 강희와 자신만 서로 덮는다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운이 보고 싶었다.
‘형과 형수가 사라져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하지만 워낙 밀정들이 많으니 만운에게 연락하는 것은 더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최소한 몸을 제대로 추스르고 나라 안에 들어간 다음이 되어야 연락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폭풍 이는 바다에서는 이틀을 헤매다 온 곳이지만 돌아갈 길은 그것보다도 멀고 험했다.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강희와의 시간을 벌어 주기도 했다. 돌아갈 때는 진정한 남편과 아내로서 귀환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집무실에서 아직도 때를 기다리고 있을 이혼장을 그녀의 손으로 직접 불태우게 해야 할 것이다.
* * *
호근의 의방은 한마디로 불황이었다. 찾는 이가 거의 없다는 말이었다.
하긴 약천이란 곳이 워낙에 쟁쟁한 의방이 많은 곳이었다. 떠돌이 의원이 차린 의방에 중한 병이 든 손님이 드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일행에게는 정착과 위장, 편안한 장소가 모두 충족되었다.
대신 의방의 ‘의醫’ 자 옆에 작게 붙은 ‘식食’ 자를 보고 찾는 이들은 늘고 있었다.
치료를 목적으로 온 이들에게 제공하려던, 아니, 사실은 강희와 채운의 신분을 완벽하게 가리기 위해 급조한 음식 장사였지만 이쪽이 도리어 꾸준히 손님이 늘고 있었다.
수보도 상세가 안정되고 있는 중이라 누엔은 강희의 음식 장사에 적극적으로 손을 돕는 중이었다. 그녀는 강희가 부엌에 묶인 대신 바깥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거의 다 하고 있었다. 무엇에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누엔이 적극적으로 나선 덕에 강희의 장사가 더 잘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 손님은 의방 근처에서 다리를 새로 쌓는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었다. 그리고 며칠 만에 입소문을 타더니 덕분에 주객이 전도되어 의방에 손님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음식 장사는 금방 시늉을 넘어섰다. 처음 음식을 나르기 위해 고용한 아이 말고도 며칠 만에 일할 아이를 한 명 더 구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여기 국수 네 그릇 내주소!]
[어허, 우리가 먼저요. 국수 두 그릇!]
[네, 네, 갑니다! 넌 저쪽 음식 가져다 드리고, 넌 저기 빈 상 치워라.]
이는 채운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물론 강희를 사람들 앞에 내놓는 건 하지 않아 그녀가 직접 음식을 팔고 돈을 받는 일 등은 하지 않았지만 채운으로선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제법 장사하는 티가 날 정도가 되었으니 자신들의 신분을 가리는 것으로선 잘된 일이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가 되었다.
[부인, 여기 국수 여섯 그릇 빨리요!]
[네, 바로 내 드릴게요!]
누엔 부인의 재촉에 강희는 뜨거운 솥에서 육수를 퍼서 재빨리 국수 여섯 그릇을 만들어 창으로 내놓았다. 안 그래도 껴입어서 움직이는 것도 불편할 텐데, 불 옆에서 일하느라 그녀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은 귀족 여인네라면 생각도 못할 천한 일이었다.
그것이 비록 시늉이라 할지라도 채운은 강희가 처음부터 고민도 하지 않고 하겠다던 것에 놀라고 있었다. 지금은 시늉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강희가 종종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 많은 반죽을 치대고 동동거리며 일하느라 강희의 손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가끔씩 지친 모습으로 쪼그려 앉아 있는 걸 보면 다 집어치우자고 소리치고 싶었다.
가끔씩 덮치는 두통과 잘 낫지 않는 어깨의 통증만 벗어난다면 채운은 그 즉시 귀환길에 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에 칼을 들고 조금 휘둘러 보려다가 뻐근한 느낌에 금방 멈춰야 했다. 그 모습을 본 호근은 괜히 무리해서 움직였다가 덧날 수가 있다며, 조금만 더 참으라 했다. 지금 누군가에게 추적당하는 것도 아니니 안전한 장소에서 몸을 회복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는 혼자 몸이 아니었다. 강희도 함께 돌아갈 길이니 그의 몸을 최고인 상태로 되돌리는 데 힘을 써야 했다. 안전이 더 중요한 것이다.
‘후우, 그렇다 해도 앞으로도 한 달은 더 남았으니……. 너무 길다.’
호근이 처음 말했던 건 최소 두 달이었다. 그중 거의 한 달이 다 지나고 있었다. 남은 한 달의 시간 동안 이 지긋지긋한 두통과 통증들을 털어 버리고, 몸을 예전의 상태로 되돌릴 것이다.
앞으로 한 달.
한 달만 더 인내하고 참자.
* * *
모처럼 한가한 오후.
강희와 채운, 호근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수보는 아직 거동이 불편하여 누엔이 시중을 드느라 식사는 보통 세 사람이 함께하게 되었다.
채운은 세 사람이 되는 이때에 세상에 다시없을 다정한 남편이 되곤 했다. 두 사람만 있게 되면 어색하고 수줍고 또 죄스러운 표정을 하는 강희 때문에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던 채운이었다.
헌데 세 사람이 되는 순간, 저 사람이 정말 그 엄격하고 딱딱한 윤채운 장군이 맞는가 하고 뒤돌아볼 정도로 사람이 돌변했다.
“부인, 오늘 식사는 유독 더 맛있구려.”
채운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강희에게 칭찬을 건넸다.
그들이 막 식사를 마친 상에는 몇 가지 나물과 잡곡밥, 그리고 오늘도 여지없이 면 요리가 있었다. 음식은 한 가지도 남지 않고 모두 깨끗이 비운 상태였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니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매일 먹다니. 이곳은 밀이 꽤 흔하지만 려국에서는 매우 귀하지 않소? 난 어릴 적부터 국수를 무척 좋아했다오. 꼭 밀로 만든 걸 더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당신 덕분에 매일 잔치 음식을 먹는 기분이라오.”
“서방님께서 맛있게 드셔서…… 저는 더 좋습니다.”
기분 좋은 칭찬에 강희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부부가 점점!’
호근은 두 사람 사이에서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둘 사이는 날이 갈수록 점점 도가 심해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 어림이 간질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것도 유독 자신이 있을 때만 더하는 거다.
‘아닌 척하지나 않으면!’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내나 수줍게 웃는 여인이나 도무지 그를 참을 수가 없게 만들고 있었다.
“저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호근이 냉큼 끼어들며 말했다. 계속 그냥 두고 보았으면 아마 제 손으로 칼로 째고 심장을 벅벅 긁고 싶은 말이 몇 마디 더 오고 갔을 것이다.
애초에 그녀에게 환자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부인이 옆에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더 빨리 회복된다고 말해 준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거짓은 아니지만 그걸로 그녀가 채운에게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확실히 막을 수 있었다.
헌데 그 일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정말이지 저 돌조각 같은 사내가 제 여자를 저리 살뜰히 귀애하는 모습을 보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도저히 질투가 나서 보아 주기 힘들었다.
“네…….”
순간 강희는 당황하고 말았다. 채운에게 홀려 누가 옆에 같이 있는지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호근이 옆에 있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채운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매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한시적이라 제 마음을 다독이려 했지만 그래도 이 행복이 너무나 소중했다.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속이는 죄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그것도 모두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그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것만이 문제일 뿐.
“다 드셨지요? 그럼 저는 이만 차를 내겠습니다.”
강희는 발개진 얼굴로 후다닥 방을 나갔다.
그 뒤에서는 채운이 호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무서운 눈빛은 왜 괜히 방해를 하느냔 말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러게 좀 적당히 하시지.’
호근은 짐짓 따지는 듯한 채운의 눈빛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미처 소리로 내지 못할 항변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아내의 변장을 봐 준다며 꼼꼼히 더듬는 건 방 안에서 다 하고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인의 흐트러지지도 않은 두건을 괜히 풀어서 다시 묶어 주는 것도 하루에 세 번 이하로 하면 좋겠다.
‘그것만 있는 게 아니지. 방금까지 자신의 안마를 받은 팔이 뻐근하다며 매만져 달라는 것도 제발 나는 듣지 않게 하면 안 되겠냔 말이다!’
돌조각 같은 사내의 상상도 못할 다정한 모습에 누엔 부인은 흐뭇해 하고 있었지만 호근은 아니었다.
제가 도운 일이면서도 속에서 열이 치솟는 중이었다. 혼자 있는 노총각 생각은 조금도 해 주지 않는 것이 괜스레 심술이 돋을 정도였다.
‘음, 그만큼이나 도와줬는데 이런 자그마한 방해 정도는 당연한 것이다. 당연하고말고!’
단지 한 가지 위로할 것이 있다면, 저 음흉한 장군도 자신의 기억 상태를 꾸미느라 부인과 잠자리까지 하지는 못할 것이란 사실이었다. 처음에야 몸 상태가 나빠 참을 필요까진 없었다지만 요즘은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그런 이때 제 마음을 온전히 주고 있는 정인, 그것도 아내를 그냥 두고 한방에서 자자니…….
“흐흐흐.”
호근은 심술궂게 웃었다.
그러니 왜 노총각 앞에서 그리 염장을 지르고 있느냔 말이다. 이건 이전에도 한 번 부탁했던 일 아닌가. 이 방에도 저 방에도 서로 죽고 못 사는 부부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그녀가 더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나도 래연이 있단 말이다!’
호근은 홀로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