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들의 사정
채운은 약천의 초입으로 들어서기 전 칼을 꺼내 허리에 찼다. 그가 칼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건 누엔과 수보가 그들이 타고 왔던 배 위에 떨어져 있던 칼도 정성껏 챙겨 준 덕분이었다. 이전 마을까지는 칼을 차는 것이 더 눈에 띄기 때문에 꺼내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부터는 필요했다.
그것은 당장 도움이 되었다.
채운이 강희와 바꿔 조랑말에 타고 뒤따르고 있는 상태라 그는 달구지를 탄 사람들을 지키는 호위 무사 정도로 보이게 되었다. 그는 다시 안대 같은 것을 하지는 않았으나 머리를 헝클여 얼굴을 반쯤 가리고, 수염도 깎지 않은 상태라 현재 그의 모습은 꽤 험상궂게 보일 정도였다.
달구지가 성안으로 들어서자 그들 주위를 서성이며 염탐하는 무리가 있었다. 약천에 낯선 촌민이나 여행객들이 들면 그들을 집적거려 등쳐 먹는 왈짜패들이었다.
허나 날 선 채운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도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겨우 조랑말이나 타고 있는 정도야 하고 덤비려던 놈들도 채운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일행은 왈짜패들의 목표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채운의 상태는 썩 좋지가 않았다. 이틀의 강행군이 회복되어 가던 그의 몸을 도로 악화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해가 거의 저물어 빨리 쉴 곳을 찾아야 했다. 멀쩡한 장정인 호근도 지친 마당에 강희와 누엔도 문제였고, 한시 빨리 수보를 뉘어 편히 쉬게 해야 했다.
[일단 약방 근처 여각에 행장을 푸는 게 낫겠습니다. 수보 형의 숨소리가 거칠어졌습니다. 통증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몸이 나을 때까지 몸을 거할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의원님이 약방 근처에 여각을 잡고, 주인아저씨의 몸을 치료할 계획이랍니다.”
“알겠소.”
호근은 강희가 채운에게 통역하는 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다 채운과 눈이 마주치자 또 씩 웃었지만 채운은 응대하지 않고 모르는 척했다.
두 남자의 미묘한 눈치를 강희나 누엔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도 저잣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고 있었다. 호근이 인상 좋아 뵈는 상인 한 사람을 붙잡고 약방이 모인 거리와 그곳과 가까운 여각을 물었다.
호근이 여각을 알아보느라 잠시 멈춘 동안에도 지나치는 사람들은 다들 이쪽을 한 번씩 쳐다보며 가고 있었다. 초라한 차림에 다친 환자가 달구지 위에 누워 있으니 그렇기도 했지만 가끔씩 강희를 쳐다보는 남정네들의 눈길이 길어지는 것 같았다.
그 시선들이 불편해진 채운이 앞을 막아서며 그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그리해도 당신은 너무 고운 것 같소. 무슨 방법을 더 취해야 할 것 같소.”
“네? 네…….”
채운의 얼굴이 편치 않아 보였다.
그에 강희는 저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양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이유에서건 이곳에서 눈에 띄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아까 호근은 장난삼아 농으로 말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녀의 얼굴에 점을 하나 그려 넣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강희는 그가 남들의 시선에서 그녀를 가리는 이면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눈에 띌까 경계함도 있지만 그가 정말 불편한 까닭은 제 여자가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사는 것이 싫은, 남자로서의 본능이 발동해서였다. 때문에 괜한 자책에 빠졌던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또다시 곱다 한 말은 지나치고 말았다.
아무튼 알건 모르건 지금 이것은 강희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허락한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그의 넓은 등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모습이 이토록 듬직할 수가 없었다. 차마 그 등에 손 한 번 대지는 못할지언정 그가 자신의 곁에 있는 이 순간순간이 모두 소중하며 애틋하기만 했다.
조금만 욕심을, 용기를 낼 수만 있다면 거의 닿아 있는 그의 등에 머리를 숙여 기대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아내도 정인도 아니라는 여인이 그런다면 그는 얼마나 놀랄까.
그런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희는 좋았다.
타국이며, 위험한 이 상황을 잊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이 순간이 조금 더 길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호근은 자신의 장담대로 정말 여행 경험이 충분하여 그런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여각을 잡았다.
이번엔 한 방이 아닌 두 개의 방에 여자들과 남자들이 따로 들게 되었다.
이곳까지 꼬박 하루 반나절의 시간이 걸렸지만 날씨가 쾌청했고 길이 험하지 않아 그나마 쉽게 온 것이라 보아야 했다. 덕분에 모두 몸은 지쳤어도 무사히 온 것으로 평안히 쉴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보의 예후가 나쁘지 않았다.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가 먼 길을 온 것이라 그것이 가장 걱정되었지만 호근의 처치는 훌륭했다. 수보는 고통을 호소하긴 했으나 단단히 고정한 그의 발끝까지 피가 잘 통하고 있었고, 발가락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대로 잘 아물기만 하면 이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은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그냥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호근이 가진 것 중 마지막 약재로 지어 준 약을 먹고 잠들어 있었다. 내일 새벽에 당장 새 약을 사서 지어 줘야 할 것이다.
채운은 피곤하고 지친 몸에도 아직 잠들지 않고 있었다. 어제 마진이라는 마을에 들렀을 때 호근과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더라도 이젠 그와의 관계를 확실히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고, 오래 보지는 않았지만 그 실력과 성품만 보면 믿어 보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어제 머물 곳을 찾던 그 짧은 시간 동안 호근은 채운에게 직접 대놓고 물었다.
“부인껜 아직 기억을 다 찾은 걸 말씀 않으셨지요?”
그 질문에 채운은 걸음을 멈출 정도로 놀랐다. 순간 뒤에 세워 놓은 강희가 듣지는 않았을까 뒤돌아볼 뻔하기도 했던 것이다.
“기억의 공백이 생긴 부분은 부인과 관계된 것이었던 게 아닌지요? 처음엔 부인을 기억하지 못하시던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소.”
“하지만 이제 기억을 완전히 다 찾으신 것이지요? 언제 기억을 다 찾으신 겁니까?”
“서 의원, 그대가 여인들의 말을 엿들었을 때요.”
“하하하하, 저만 엿들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역시 무장께서도 송국말을 할 줄 아시는군요?”
호근은 일견 채운의 무력에 기가 죽은 척하면서도 채운도 엿들었음을 의뭉스레 돌려 말했다.
‘저를 탓하려면 자신부터 탓하라는 것이렷다.’
채운은 그의 배짱이 좋아졌다.
“말을 잘할 줄은 모르오. 다만 들어 이해하는 건 할 수 있소.”
“그럼 왜 모르는 척하신 겁……. 하하, 이거이거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기억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그리 빠르게 판단을 하셔서 사실을 감추시다니. 하긴 그래서 알게 된 사실도 있지만요.”
사실 처음에 송국말을 모른다 한 것은 그래서가 아니었다. 처음 혼란스런 정신에 띄엄띄엄 들리는 말이 거의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그리 대답했던 것이다. 그래서 호근의 말처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무튼 호근이 뒤에 한 언급은 매우 거북했다. 이는 무척 사적이며, 심각한 일이었다.
채운은 그것에 대해선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그 말은 언급하지 말아 주시오.”
“네에, 당연하지요. 제가 입이 가볍긴 해도 할 말 못 할 말은 가린답니다, 하하하!”
그리하여 호근은 오늘 출발하고부터 그가 강희와 같이 있을 때마다 얄궂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딱히 방해를 하는 건 아니라 두 사람만 있게 자리를 피하는 등 배려도 해 주었지만 그는 장난스런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채운이 하는 행동이 장난이 아님을 알기에 방해는 않지만 종종 그를 향해 짓궂은 웃음을 보이는 것이다.
채운이 보기에 서호근이란 이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이대로 의심도 신용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계속 그를 대할 수는 없었다.
“서 의원, 자오?”
“아닙니다. 무장께서는 많이 피곤해 보이셨는데 왜 잠들지 않으시는 겁니까?”
“서 의원에게 할 말이 있소.”
“말씀하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리다. 그대는 최사립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오?”
그의 질문에 호근은 잠시 멈칫하다 피식, 웃음과 한숨이 섞인 소리를 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채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 물어보시나 했습니다. 다른 건 모르지만 저는 최사립의 밀정은 아닙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요.”
채운도 그를 보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호근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리하셔서 무장께서는 누워 계시는 게 낫습니다.”
“…….”
달이 밝아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도 어스름하게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매일같이 허허거리며 웃던 그가 지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채운의 어깨를 누르는 손에서는 의원으로서의 배려가 느껴지고 있었다.
채운은 편히 누운 상태로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럴 것 같았소. 아니면 애초에 내 이름도 말해 주지 않았을 것이오.”
“네? 아셨단 말입니까? 그럼 처음부터 말씀하시지요? 이거 최사립의 밀정 취급을 받는다 생각하니, 억울했단 말입니다!”
호근은 짐짓 화가 난 척했지만 그리 성을 내는 말투는 아니었다. 허나 채운은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하오.”
“엇, 그렇다고 바로 사과를 하시다니요. ……대감께서 미안해 하실 일이 아니지요. 이곳 송국에서 려국 사람을 만난다면 그것부터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일인 것을요. 더구나 대감 같은 분이라면 말입니다. 제가 만난 려국 사람들 태반도 최사립의 후원이나 명령으로 떠도는 이들이었는데요.”
“그렇소.”
“부인께서도 보통은 아니신 것 같았습니다. 장군의 부인이라 그러신지도 모르지만 보통 규방의 여인네들은 이곳 송국에서 만나는 자국의 사람은 반가워하기부터 하는데, 부인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려국 사람이라 밝히니 경계하시는 눈치셨습니다.”
“그랬소?”
하긴 채운이 처음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가 한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에 정체를 숨기라는 말부터 했고, 또 호근이 려국 사람이니 그를 믿지 말라고 했다.
보통 규방의 여인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걸까? 그것도 그녀가 미리 꿈꾸었다는 삶 때문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채운은 강희가 누엔 부인에게 고백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머릿속을 가리던 막이 깨지면서 기억이 완전히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그를 옭아매던 원망과 아픔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녀가 그들 가족의 불행의 원인이라는 걸 아는 이는 자신뿐이었다. 그가 사건의 전말을 아는 이유는 그때 그곳에서 도망치는 그녀의 하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강희가 설혹 당시에 그 사건을 알고 있었다 해도 이후에 가족들에게 겹친 불행까지 알 리는 없었다. 허니 그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강희가 그 모든 걸 안다는 것은 그녀가 꿨다는 그 꿈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꿈에서 정말 어떤 삶을 겪은 것일까?
호근은 어느새 다시 얼굴에 웃음기를 두르며 말하고 있었다.
“헌데 어찌 저를 향한 의심을 거두신 겁니까? 제가 밀정이 아닐 거라고요?”
채운은 강희에게로 흐르는 상념을 접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
“우선은 당신이 의관이기 때문이었소. 의관에게 겨우 밀정 노릇을 시킨다는 건 낭비가 아니오? 그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떠돌이 의원을 한다기에 밀정이라 의심하기보다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겼소. 그리고 아내와 내가 이곳에 온 것부터 천재지변으로 인한 우연인데, 그것을 어찌 알고 이 외진 곳까지 밀정을 배치해 둘 수가 있었겠소. 또한 당신을 의심하여 심력을 낭비하기보다는 내 몸을 맡겨 빨리 회복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소.”
그리고 오는 길 내내 수보의 상태를 확인하고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그가 진정 의원임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었다. 환자를 대하는 그의 열정은 꾸미기엔 너무나 진지하고,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또 말 못하는 짐승인 조랑말이 제 주인을 그리 따르는 것도 왠지 그에게 신용이 가게 만들었다. 그는 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허면 이곳에서 다른 의원을 찾으실 것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내 실력 높은 의관을 두고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나라 의원을 찾겠소. 안 그렇소?”
“아, 하하하! 갑자기 저를 이리 높여 주시니 감사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저를 이리 믿어 주셔도 되겠습니까?”
“그대도 궁에 있어 봐서 알지도 모르지만 궁이란 밀정들이 판을 치는 곳이오. 그 밀정들을 찾아 잡아내는 것도 나의 임무였소. 나의 감이 당신은 아니라 하오. 그리고 서 의원, 당신에게 있다는 사연도 최사립과 연관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내 이름을 들었을 때는 반가움과 같은 감정을, 그리고 최사립에 대해 말할 때는 감추지 못할 원망과 증오의 감정을 드러냈소. 어떻소, 내 말이 틀리오?”
“…….”
최사립은 벌써 십 년 이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태사 직에 있을 만큼 권력의 최고 핵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눈앞에 없다 해도 일개 의원이, 그것도 궁에 있던 자가 그의 이름에 어떤 존칭도 붙이지 않고 최사립이라 칭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최사립은 그만큼 입지가 강하고 어렵고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호근은 무의식중에 그를 단지 최사립이라 불렀다.
“혹시 장군께서는 무력이 높은 것이 아니라 도력이 높은 것이 아닙니까, 하하하하.”
그리 말하며 웃는 호근이었지만 힘이 없고 딱딱 끊어지는 그의 웃음에서 지어낸 것이란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말해 줄 수 있겠소? 말하기 힘든 것이면 하지 않아도 되오. 허나 말해서 응어리가 풀린다거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소.”
“하하…….”
호근은 한숨 대신 웃음소리 비슷한 것으로 길게 숨을 고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오 년 전 스물다섯 나이에 의관에 합격하였습니다…….”
호근은 당시 의관 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채운이 아직 왕세자와 만나기 전이었다. 채운은 잘 알지 못하는 일이었으나, 그해 열 명이 합격한 의관 시험에 최연소이자 수석으로 합격한 호근은 일각에선 꽤나 유명한 이름이었다.
호근은 수석 합격자로서 합격자 중 단 두 명만이 남게 되는 궁에 있을 수 있게 되었고, 출세를 보장받았다. 단순히 의원이라면 그리 촉망받지 못하는 일이었으나 의관은 벼슬을 하지 못하는 귀족보다도 더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호근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다.
의관이 되자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쏟아지는 매파의 홍수에도 혼사에는 별 관심이 없던 호근이었다. 헌데 그가 우연히 만나 마음을 두게 된 여인이 있었으니, 팔품 문관인 직사관直史館 왕의 언행과 고사를 기록, 사료와 실록의 보존과 관리를 맡은 사관 벼슬의 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송래연이라 했다.
래연의 아버지는 미관말직이나 궁의 서고를 담당하는 이였기에 자주 숙직을 하고 종종 코피를 쏟는 일이 있어 의관을 찾는 일이 가끔씩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옷가지를 가져다주거나 식사를 챙기기 위해 가끔씩 궁에 들르던 래연과 호근이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이 쌓이기 시작했고, 호근은 래연에게 혼인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래연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가 겨우 열일곱이라 이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음만 키워 오다 어렵게 청혼을 했던 것이다.
허나 래연은 호근을 만나기 위해 자주 궁에 왕래하며 다른 이의 눈에도 띄게 되었다. 바로 최사립의 여덟 번째 아들인 최필극이었다.
최필극은 최사립의 세 번째 부인의 아들로, 이미 부인을 둘이나 갈아치운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허나 그는 최사립의 아들이었다. 그가 원하는 여인이 그를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래연이나 래연의 아버지 모두 바라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녀는 최필극의 부인이 되어야 했다. 말이 부인이지 첩실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호근이 그녀에게 청혼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전 궁을 떠났습니다. 그녀를 볼 수도 없었고, 장인이 되실 뻔한 그분도 뵐 수가 없었지요. 처음엔 고향으로 돌아갔었지만……. 그래도 최사립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를 알 수 있었고, 더불어 가끔씩 그녀의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전 그녀에 대한 소식이 들리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떠나오게 된 곳이 남의 나라였고, 이곳에서조차 한곳에 있을 수가 없어 정처 없이 떠돌았습니다.”
최필극.
그는 채운도 아는 자였다.
최사립의 자식들은 정계나 군부에 한자리를 차지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최필극도 그중 하나였고, 치부나 권력을 탐하는 그들 일가 중에서도 그는 다른 무엇보다 지저분한 염문으로 유명한 자였다.
호근이 사랑했던 여인도 결코 행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근은 그녀를 구제해 주지도 못하는 처지에 소문을 듣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을 것이리라.
누엔과 수보 부부도 그랬지만 호근도 후벼진 상처가 깊이 파여 흉터가 크게 보이는 이였다. 사연을 듣긴 했으나 어찌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 일의 모든 원흉인 최사립을 꺾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의 원한이나마 조금은 풀어질 수 있으리라.
“허면 앞으로는 어찌할 생각이오?”
“사실은 몇 달 전 저의 본가에 연락을 했다가 받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녀도 결국 최필극에게서 쫓겨났다는 소식이었지요.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리한다고 그녀가 반길지도 걱정이었고, 저도 그때와 다르지 않은 마음인지 추스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사실은 장군을 만날 때까지는 그녀를 다시 만나겠다는 마음 같은 건 생각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때도 계속 떠돌던 중이었으니까요.”
“허면 지금은 마음을 먹은 것이오?”
“네. 만약 래연을 다시 만나 서로가 전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면 그녀와 다시 시작해 보고 싶습니다. 정말 그녀가 허락만 해 준다면……. 그런데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장군께서 이끌어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말이오?”
“그럼요, 그럼요.”
호근은 저에게 확신시키듯 대답하며 아련히 래연을 떠올렸다.
사실 그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최초의 원인은 강희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녀가 채운과 부부인 듯 아닌 듯 묘한 관계를 보이던 것부터 해서 나중에 엿들어 알게 된 그와의 사연에 그녀에게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만일 그녀가 말한 이유로 결국 채운이 그녀와 갈라서게 된다면?
그러면 자신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도 되지 않을까.
그는 잠시지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리해서 이룰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러고 싶을 만큼, 그녀는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물론 다음 날 채운이 ‘내 아내’라 칭하는 말에 당장 그런 생각을 버렸지만.
채운은 호근이 감히 그녀에게로 흘끔거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태세였다. 녹록지 않은 사연을 가진 부부였으나 자신이 기억을 찾은 것을 감추고 자신의 여자를 감싸는 그를 보면 저들 부부에게는 분명 돌파구가 있을 것이다.
손을 내밀다라…….
아주 잠시였지만 다른 남자의 부인에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럼 래연은? 권력자의 욕심에 저의 뜻은 상관없이 취해졌다 버려진 그녀는 누가 위로하며 위해 줄 것인가. 덕분에 호근의 생각이 애써 잊고자 했던 그녀에게로 다시 향하게 된 것이다.
이젠 도망치기 위해 떠도는 짓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돌아가서 그녀와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미래를 설계해 보고 싶어졌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매번 함께 오던 회한과 죄책감이 아니라 희망이란 감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상처는 분명 남아 있었다.
당시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지 못한 자신의 한심함이 상처로 남았고, 사모하는 여인을 첩실처럼 들였다 결국 쫓아낸 최필극에게 향한 원한이 상처로 남았다.
희망과 함께 매일 저를 죽이느라 허허 웃음으로 숨겼던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상처는 그의 마음을 계속 좀먹고 있었다. 묻어 두려고만 했던 원한이 독기가 되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전 같으면 복수 같은 건 생각으로나 끝날 일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왕세자의 오른팔인 장군이라면…….
나라의 영웅인 윤채운이라면 무슨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윤채운은 호근에게도 동경하는 인물이었다. 나라의 영웅인 장군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최사립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윤채운과 왕세자만이 현재 횡포를 휘두르며 양민들의 피를 빠는 최사립 일파를 부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머나먼 타향에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이 윤채운 장군을 만나고, 그를 구할 수 있었다는 건 운명이었다. 이는 어쩌면 그에게도 하늘의 기회가 주어진 것과도 같았다.
그를 도우려면 확실히 도와야 할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의 몸을 최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첫째이고, 그의 안전한 귀환길을 살펴 주는 것이 두 번째였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먹은 이상 장군께서 려국으로 돌아가실 때 저도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소?”
“원래부터 회복 때까지는 제가 힘쓴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 끝이 조금 달라진 것뿐입니다.”
“고맙소. 그리고 내게는 계속 무장이라 칭하는 게 나을 것 같소.”
“아, 그렇군요. 내일부터는 제가 좀 바빠져야 할 것 같습니다. 어서 주무십시오, 김 무장님.”
호근이 일부러 채운의 위장한 이름을 강조하며 확인하듯 불렀다.
“고맙소……. 주무시오.”
대화가 멈추며, 잠시 후 채운은 먼저 잠이 든 듯했다. 그의 숨소리가 그리 평안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하긴 편할 수가 있겠는가. 폭풍에 천행으로 살아나게 되었다지만 그 안의 모종의 사연도 분명 최사립과 관계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일부터는 그를 낫게 하는 데 그가 가진 의술을 최대한 동원해야 할 것이다.
호근은 수보의 신음 같은 숨소리에 그를 들여다본 후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그에게도 곧장 수마가 몰려오며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 * *
한밤의 대화로 호근과 채운은 무언의 언약과 동맹을 맺은 듯이 보였다.
이른 새벽.
잠이 깬 채운은 호근이 보이지 않는데도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호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손에 한 아름 약을 안고 들어왔다. 그는 새벽부터 두 환자, 수보와 채운을 위한 약을 찾으러 돌아다닌 것이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머리가 많이 아프시지요?”
“어찌 알았소?”
“주무시는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계시더군요. 그리고 수보 형의 신음 소리도 커지고 있고요. 해서 서둘러 급한 약재들을 공수해 왔습니다.”
“고맙소.”
“하하, 빨리 나으십시오. 그게 절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러겠소.”
“빨리 나으시려면 많이 드시고, 많이 주무시고, 적당히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지금은 급한 대로 여각을 잡은 것이지만 계속 묵기엔 불편할 것입니다. 적당한 약방과 거래를 성사시키게 되면 느긋하게 두 분을 치료할 만한 집을 빌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해 주시오. 하지만 그럼 비용이 더 필요한 것 아니오?”
“장군께는 통이 큰 부인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게 무슨, 아!”
달구지를 빌리러 간다는 그에게 강희가 가락지를 내민 것을 말함이었다.
강희가 갖고 있던 패물은 하나같이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왕세자비가 특별히 언질을 하여 일부러 최상의 것들로 최대한 꾸민 것이기에 누엔 부부에게 준 머리꽂이만 하더라도 평민들이 평생 벌어도 사지 못할 값진 것들이었다.
“다음부터는 부인께 셈을 치르게 하지 마십시오. 그런 식이면 아마 살림을 거덜 내실지도 모릅니다.”
그 말엔 채운이 절로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그렇지는 않소.”
“아차차,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냥 농이었습니다.”
강희의 흉에는 어지간히도 민감한 채운이었다.
호근은 그의 정색한 표정에 당황하며 채운의 안색을 살폈다. 채운도 별것 아닌 말에 정색한 자신이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연회에서 들리던 추문들도 참았건만 농으로 하는 한마디에 울컥한 자신이 생소했다.
호근은 모르는 척 다른 말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제가 큰돈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부인께서 주신 귀걸이와 가락지를 처분할 것입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내게 허락을 얻을 일이 아니오. 그리고 그것들은 아내가 이미 치료비로 드린 것이니, 그것은 서 의원, 당신의 것이오.”
“그리 생각하신다면 편하게 처분하겠습니다.”
이후 호근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용 있는 약재상을 통해 한 벌로 된 귀걸이와 반지를 처분하자 그것은 저잣거리에 있는 집 한 채가 넘는 가격으로 돌아왔다. 약재상과 중개인이 각각 이득을 취한 뒤에도 그만한 돈이 들어온 것이다.
그는 그 돈을 자신과 채운, 강희가 각각 나눠서 지니게 한 후 자신이 가진 돈으로는 저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빌렸다. 그리고 빌린 집 앞에 간판을 달고 의방을 열었다.
몸이 나을 때까지 이곳에 있을 생각이라면 머무는 동안 이곳 주변을 방비해야 했다. 왈짜패들이 처음에야 채운을 보고 물러났다지만 호근이 패물을 처분한 것이 소문이 난다면 그들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돈을 나누는 걸 사양하고, 가지고 있던 패물을 더 처분하려는 강희도 말렸다. 또 집까지 빌려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외지인들이라면 분명 탈이 날 수 있었다.
그러니 의방을 차린 것은 모든 이목을 피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약천의 특성상 이렇게 반짝 세워졌다 사라지는 의방은 수두룩했다. 혹시 누군가 그들을 찾으려 한다 해도 설마 의원과 합류하여 의방에 숨은 부부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호근도 이제부터 최사립의 눈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방비를 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그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냈다.
그것은 바로 강희가 할 일이었다.
“병사病舍를 꾸민 것 말고도 다른 한 가지도 더 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입니까?”
“부인께서 도와주셔야 할 수 있는 일인데, 하실 수 있으실지…….”
“말씀해 주세요.”
강희는 서방님의 안전과 무사 귀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호근도 그런 강희의 결심을 읽었는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바로 말해 주었다.
“부인께서는 의방의 옆에서 팔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해 본 적이 없으시니 힘들 테지만 파는 것이야 이웃에 있는 아이들 몇을 고용해 시키면 될 것이고, 부인께서는 음식을 만드는 시늉을 해 주십시오.”
영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자 강희는 놀라 물었다.
“허면 음식을 만들어 팔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꼭 장사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에 계속 있기에는 그 방법이 좋을 듯합니다. 부인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더할 수 없이 좋습니다.”
이는 채운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만약 강희가 하겠다고만 하면 위장으로서는 거의 완벽한 방법이었다. 누엔과 수보야 송국 사람이니 이럴 필요가 없었지만 강희와 채운에게는 다른 한 겹의 위장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 이유를 짐작한 강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호근은 모르고 한 말이었겠지만 강희는 음식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해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비록 꿈속의 일이었다고는 하나 그녀 또한 이혼 후 음식 장사를 생각했었다.
강희는 어떻게든 꿈속의 일들 몇 가지는 현실에도 되풀이되는 것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무엇을 만들어 파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까?”
“부인께서 가장 잘하시는 음식이 좋을 듯한데……. 아, 저는 그날 부인께서 해 주신 수제비가 무척 맛있었습니다.”
“그럼 수제비와 국수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헌데 누엔 부인이 우리가 음식 장사를 해야 한다고 하면 기껏 드린 머리꽂이도 내놓으실지 모릅니다. 뭐라 말씀드려야 할까요?”
누엔에게는 귀걸이와 가락지를 처분하여 받은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릴 수 없었다. 그녀를 믿지 못한다기보다 자신들의 사정에 연루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니 위장을 위해 장사를 한다는 말도 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채운이 만들어 주었다.
“누엔 부인께는 의원의 일을 돕기 위해서 그런다고 하시오. 나도 당신이 준 것을 돌려받고 싶지는 않소.”
“그러면 될 것입니다.”
호근도 그의 말에 찬성했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의원의 병사에서 음식을 만들어 파는 일이야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상황을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전 관에 다녀오겠습니다.”
관에서는 의방을 열었다는 형식적인 신고와 함께 의방에 딸린 식구로서 채운과 강희의 거주 증명서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는 임시이긴 하나 이곳을 떠나 국경 지대를 거칠 때 신분 증명을 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호근이 나선 덕분에 채운은 몸이 회복되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할 일이 밀어닥친 강희는 누엔과 상의해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야 했다.
“서방님도 쉬셔요.”
“잠시 기다리시오.”
“네?”
마음이 급해 빨리 누엔을 찾아 밖으로 나가려는 강희를 부른 채운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그윽한 눈길에 강희는 또 명치끝이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엔 부인의 집에서 이곳으로 오는 며칠 동안 그는 계속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그윽하며 다정하고 또 감미롭게.
“강희, 당신의 귀한 패물들을 이런 식으로 처분하여 속상할 것이오. 허나 그 패물들은 내가 꼭 다시 해 주겠소. 우리나라에 되돌아가면 시전의 제일 이름 있는 곳으로 함께 가서 직접 골라 주리다. 아니, 원한다면 그 물건들을 되찾아 줄 것이오.”
생각지도 않았던 말에 순간 놀란 강희는 턱 막힌 가슴에 입만 벙긋거렸다. 그녀는 잠시 후 가까스로 말을 할 수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그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한 말은 일견 잃은 물건 대신 되갚겠다는 말로도 들렸다.
하지만 그런 뜻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그와 함께 패물을 골라 걸치는 상상만으로도 강희의 가슴엔 환희의 감격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저 생각만 하는 데만도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처분해야 했던 패물들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귀한 물건? 그렇긴 했다. 꿈속의 그녀가 아이와 바꾼 그 패물이었으니, 오죽 귀한 것일까. 호근이 처분한 가격은 사실 제값의 반의반도 되지 않을 만큼 값진 물건이었다.
허나 강희에게 그것은 그의 말 한마디보다도 값지지는 않았다. 만일 그가 다시 해 준다면 길거리의 구리 반지 하나라도 그게 더 귀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와 그것들을 고를 기회가 생기기는 할까?’
“어허, 이거 참! 어흠, 어흠!”
채운에게 할 말이 있어 되돌아왔던 호근이 일부러 과하게 헛기침을 했다. 요즘 채운은 아주 보란 듯이 강희에게 다정한 티를 내고 있었다. 부인이라 부르는 말에도 정겨움이 한껏 담겨 있더니, 두 사람만 있을 땐 아내의 이름을 마구 부르는 것 같았다. 그것도 갑자기 불쑥 되돌아와 처음 본 것이었다.
그 장면을 보자 호근은 갑자기 정말 샘이 울컥 솟았다.
래연. 그도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아, 별건 아니고,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호근이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여인들만 남겨 두고 가는 건 썩 내키지 않았으나 채운은 대문을 단단히 잠그라 이르고 그를 따라나섰다.
뒤에 남은 강희는 아직 멍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어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함께 낯선 타국에 떨어진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이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호의와 다정함이 꿈같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된다면? 그가 기억을 다 되찾게 된다면 처음에 사실을 숨긴 것에 분노하지 않을까? 뉘에게 마음을 보인 걸까, 환멸을 보이지는 않을까?
처음에 말한 거짓이 점점 더 그녀의 목을 죄는 것 같았다.
‘허면 이제라도 고백해야 할까, 자신이 성강희임을?’
그리고 그와 혼인한 사이이며, 일 년의 기한을 두고 이혼하기로 했음을. 그 기한이 이제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라지만 이 꿈결 같은 행복을 놓치기가 싫었다. 그가 내일이라도 당장 기억을 되찾게 되면 다가올 일들이 두렵기도 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그녀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채운이 되돌아올 때까지도 강희는 답을 내지 못했다.
호근이 따로 할 말이란 바로 누엔과 수보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완전히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누엔이 한 고백과 호근이 약 두 달 전 들었던 유라성 전 태수의 따님에 관한 일화와 일치하더라는 것이다.
“허면 유라성의 전 태수라는 사람이 따님을 찾고 있다는 말이오? 그것도 바로 이웃한 가양성에서 말이오?”
“그렇습니다.”
“허면 누엔 부인에게 좋은 소식 아니오?”
“사실 좋은 소식일지…….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쭤 보는 것입니다. 누엔 부인이 집에서 도망칠 당시의 상황은 분명 절박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렀고, 지금 부인의 아버지가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필요라……. 딸을 그리워해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로군.”
“그리워할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필요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집안의 후계 문제에 얽히게 되는 것이라 가문에 돌아간다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정말 알리기도, 그렇다고 알리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오.”
“네, 그래서 알릴지 말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것은 누엔이 말했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다.
허나 사실을 감추는 것이 그녀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알려 주고,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여야 할까?
그녀의 아버지가 예전의 일을 반성하며 순수하게 딸을 그리워하는 것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지만 상황은 꽤나 고약했다.
유라성의 전 태수는 장희여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장자, 그러니까 누엔 부인의 친동생은 지금 죽어 가고 있었다.
이제 겨우 삼십삼 세. 아직 젊은 이였으나 더 이상 손쓸 방도로 없이 죽음만을 앞두고 있었다. 장희여는 몇 년을 병석에 누워 말라 가는 아들을 살리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아무도 그를 고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호근도 마찬가지였다.
호근은 의원으로서 그의 집에 들렀다 그 집안의 사정을 조금 알게 된 것이다.
장희여의 장자에게는 열 살 난 아들과 여섯 살이 된 딸이 있었다. 그중 손자는 매우 총명하여 가문을 이을 영특한 자손이라고 어른들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장희여는 자신의 아들은 잃더라도 첫째 손자에게 힘을 실어 가문을 물려주고 싶어 했다.
허나 그에게는 후처에게서 낳은 아들들이 두 명 더 있었다. 그들 또한 가문을 탐내고 있었다. 장희여로서는 아들이기에 내칠 수는 없었고, 손자는 지켜야 했다.
그래서 이제 와 생각난 것이 십수 년 전 호위 무사와 도망간 딸이었던 것이다. 딸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라 손자를 키워 줄 사람으로 그보다 더 적합한 이가 없었다. 해서 백방으로 딸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엔 부인이 거부한다면 그것도 소용없는 일 아니오?”
“그거야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딸의 성정을 모르고 찾겠습니까. 또한 유일한 친동생의 혈육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데요. 수보라는 사람도 왕년에 호위 무사였고, 두 사람은 아이가 없는 부부이니, 손자의 보호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딸을 보호자로 선택한 것입니다.”
누엔이 이 사실들을 안다면 혈육의 부름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찾는 이유는 씁쓸할 테지만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또 그것이 단순히 조카들을 보호하는 일이 아니라 후계 싸움이 벌어지는 치열한 다툼에 끼어드는 일이어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며칠 겪지 않았지만 누엔과 수보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물론 누엔 부인의 선택에 따를 일이지만 제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장희여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그는 전 태수를 지내기도 했지만 아직 막후의 위세가 막강한 사람입니다.”
“허면?”
“그는 딸을 찾아 주는 이에게 포상을 약속했습니다. 가문을 맡길 차기 후계자를 보호하는 일이니 그녀를 찾는 데 도움을 주거나 찾아 주는 이에게 원하는 포상을 단단히 해 줄 것이라 공언하였습니다.”
“그에게 어떤 포상을 얻고자 하는 것이오?”
“만약을 대비하여 끈을 만들어 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군, 무장께서 처음에 저를 경계하셨던 것이 당연할 만큼 송국엔 최사립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앞으로 지나가야 할 유라성과 귀와성, 그리고 국경 부근에 이르게 된다면 그들의 눈이 더욱 많아집니다. 그러니 만약을 대비하자는 것입니다.”
“……서 의원의 생각은 알겠소. 허나 힘 있는 관리와 끈을 만들기 위한 일은 서 의원이라면 가능하지만 나는 안 되오. 우리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그 사람의 도움을 빌릴 수는 없소. 장희여라는 이도 결국 송국의 관리요. 최사립만큼 송국의 사람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요.”
왜의 해적들은 송국에서도 골치 아픈 존재였다. 하지만 송국에선 그들의 세력을 역으로 려국을 고립시키는 데 이용했다. 그리하여 려국은 점점 송국에 종속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 굴종의 고리를 끊어 버린 이가 제 나라에 있다면?
아마 송국에서 직접 나서서 윤채운을 잡아 없애거나 최사립에게 넘길 수도 있었다.
“아!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아니오. 서 의원께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 주시는 걸 잘 알고 있소.”
“그럼 그쪽으로는 생각지 말아야겠군요. 허면 누엔 부인께 말씀드리는 것도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로군요. 오히려 이쪽을 노출시키지 않아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또 다른 일인 것 같소. 우리와 상관없이 알게 한다면 되는 일 아니겠소?”
“허면 알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까?”
“……선택은 누엔 부인과 수보 형의 몫인 것 같소.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 수보 형의 다리가 회복된 다음인 것이 좋겠소.”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집안의 사정을 안다면 누엔 부부는 돌아갈 것이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에 뛰어드는 일이었다. 수보의 상태가 아주 좋다 해도 어려울 텐데, 지금은 안 될 일이다.
두 사람은 그 일을 잠시 동안 더 함구하기로 했다.
관에서의 일은 단지 돈이 조금 드는 것으로, 형식상의 일이었다. 허나 이것으로 채운과 강희는 호근의 의방 식구로 확실히 묻힐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