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낯선 여인으로
사위가 이제 막 밝아지기 시작하는 새벽.
호근은 옆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난밤 혼절했던 수보가 정신이 들며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가진 약재도 부족했고, 그가 머무는 이웃 마을에도 필요한 약재는 거의 다 떨어져 가는 중이었다.
“낭패네.”
호근은 중얼거리며 가진 약재 중 마지막을 수보의 입에 털어 넣었다.
약기운이 돌 때까지 환자는 조금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수보는 고통 때문에 정신이 들고서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누엔 부인이 뛰어들어 왔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는 수보를 보며 호근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제 남편이 지금 왜 이러는 겁니까?]
[혼절에서 깨어나서 그럽니다. 하지만 상처가 위중하여 그 고통이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을 완화할 약을 대량으로 처방해야 할 터인데…….]
[그럼 어서 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하지 않으십니까. 혹시 약값이 부족하여 그러십니까? 제가 가진 걸 다 드릴 것이니 그건 걱정 마시고요, 제발!]
[약값이야 뭐 어떻게든 해 주실 것이라 압니다만……. 문제는 제가 가진 약재가 다 떨어져 간다는 겁니다. 그건 어제도 말씀드리긴 했는데, 아무래도 큰 도시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약재가 충분해야 치료를 더 할 수 있습니다.]
[으으으!]
이를 악문 수보의 신음 소리에 누엔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여보, 여보!]
[지금은 그냥 두세요. 일단은 약을 먹었으니 잠시 후에는 진정되실 겁니다.]
[하지만 남편은……. 이렇게 아픈데 이 몸으로 움직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여기서 버티기보다는 최대한 방비를 하고 가는 것이 낫습니다. 일단 일차적인 치료는 잘했으나 완전히 나으려면 최상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의원님, 하지만 저흰, 저흰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그때 뒤따라온 강희가 누엔을 보듬으며 말했다. 그녀는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던 누엔이 남편의 신음 소리가 들리자 부리나케 일어나 달려가는 걸 보고 쫓아온 것이다.
[부인, 여력이라니요. 제가 도와 드린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희도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으니 근간에 큰 도시로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하지만…….]
누엔도 남편의 목숨이 걸린 일에 사양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십수 년 간 숨어 살던 곳에서 나가는 것이 두렵긴 해도 남편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누엔의 눈엔 빛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강희와 의원에게 차례로 말했다.
[허면 부디 도와주십시오. 제 남편은 어찌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까?]
마냥 울고 있을 것만 같던 누엔의 변화에 호근은 이채를 띠고는 곧장 그녀에게 대답해 주었다.
[일단 탈것을 빌리거나 사는 게 좋겠습니다. 음, 당장은 제가 머무는 촌장 댁에서 달구지를 얻는 게 어떨까 합니다.]
[아으.]
[앗, 여보!]
그때 수보가 다시 신음 소리를 흘렸다. 누엔은 그런 남편의 손을 붙잡고 환자보다 더 괴로운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보고 지체하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호근이 일어났다.
[지금은 제가 더 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남은 약이라도 서둘러 가져와야겠습니다.]
[네, 네에.]
“의원님, 탈것을 얻는 셈으로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강희가 품에서 옥가락지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강희의 귀걸이와 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호근은 그 가락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받아 들고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대가가 너무 과하군요. 저는 마차도 아닌 달구지라고 하였는데요. 설마하니 이걸로 촌민들에게 셈을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려다간 큰 경을 치실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강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리 비싼 패물을 아무렇게나 턱하니 내놓으시니 하는 말입니다. 촌민들에게 이런 건 가당치도 않고 화만 부를 물건이지요. 아, 촌민들은 이것의 가치를 잘 모르겠지만 혹 누군가 이 물건을 알아보고 더한 욕심이 생길 수도 있어요. 만약 이 물건을 알아본 누군가가 이것의 출처를 묻는다면 그들은 무어라 답하겠습니까? 낯선 귀부인과 남편인지 호위인지 모를 남자에게서 얻었다 하겠지요?”
호근은 그리 말하며 씩 웃었다.
그의 놀리는 듯한 웃음에 강희는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호근의 말이 단순한 비웃음이 아닌 경고로 들리는 까닭이었다.
‘무엇을 경고함인가?’
도적? 아니면 도적으로 돌변할 사람들? 아니, 그런 단순한 이유보다 더 나쁜 것이라면?
“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때 채운이 그녀의 뒤에서 나타나며 상황을 정리했다.
“되었소, 부인. 이건 내가 알아서 하리다.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으니 부인은 누엔 부인과 떠날 채비를 해 주시오. 난 서 의원과 함께 달구지를 얻어 오겠소.”
“대감?”
채운이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호근은 놀라지도 않고 있었다. 그는 채운이 온 것을 미리 알고서 그런 말을 한 듯했다. 그리고 그는 채운에게도 빙긋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안색이 좀 창백해지신 걸 보니 지금 가슴 쪽이 많이 아프시지요?”
“견딜 만하오. 그러니 갑시다.”
“에고, 제가 혼자 휑하니 다녀오면 되는 것을요.”
허나 그의 너스레에 채운은 일절 대꾸도 않고 있었다. 고집스런 채운의 눈을 보던 호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그와 함께 집을 나서면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환자의 열을 식혀 주시고, 깨끗한 옷가지와 푹신한 짚과 이불을 준비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대감, 정말 괜찮으셔요?”
“걱정 마시오. 다녀오리다.”
그녀의 걱정에도 채운은 호근을 재촉하여 달구지를 가지려 가는 길에 함께 출발했다.
강희는 길가에 서서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걱정스레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방으로 들어가자 누엔 부인은 아직까지도 남편을 살펴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수보가 미미하게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계속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정신을 잃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찌푸린 눈매를 보면 그가 고통을 참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엔 부인, 서방님이 의원님과 함께 달구지를 가지러 가셨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채비를 하여야 합니다. 일단 여기를 떠나 있게 되면 얼마나 있어야 할지 모르니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기시고, 이웃에 부탁할 것이 있으면 해 두고 가세요.]
[그렇군요. 제가 이리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누엔은 숨소리가 조금 잦아드는 수보의 손을 꼭 잡고는 벌떡 일어났다.
강희도 그동안 자신들이 머물던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빈 몸으로 왔는데도 약 보름간 머문 공간에는 그새 챙길 물건들이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단출한 짐이었지만 다 챙기고서 방을 나서자 누엔 부인이 짐을 챙기다 말고 남편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보…….]
아내를 부르는 수보의 입가가 말라 있었다.
강희는 남편에게 손이 잡힌 누엔 대신 얼른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을 감사히 받아 든 누엔이 남편의 입가에 물을 흘려 넣어 주자 수보는 다시 아내에게 힘겹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보, 걱정 마시오. 내 꼭 멀쩡히 살아나리다.]
[그러셔야지요, 그러셔야지요, 서방님. 전 당신이 없으면 한시도 살 수 없는 몸입니다. 아시지요?]
[나도 그래요. 나도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다오. 그러니 당신을 혼자 버려두지도 않을 것이오.]
[여보, 여보!]
누엔이 수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수보는 고통에 찌푸린 눈을 하고서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아내를 토닥였다.
부부의 남다른 애모의 정에 강희도 왈칵 눈물이 치솟을 것만 같아 얼른 자리를 피했다.
저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당장 위태로운 상태로 몸이 나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지경인 사람들인데도 저들의 사랑이 정말이지 부럽기만 했다.
이것이었던가? 강희는 이제 누엔이 말한 행복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서로를 연모하고, 그것을 나누는 기쁨이 그녀가 말한 행복이란 것을.
자신은 과연 그런 행복이란 걸 알 수가 있을까?
강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다른 이가 가진 행복에 부러움을 넘어 자신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
누엔 부인의 말이 옳다. 행복은 제각각에게 달리 주어지는 것이다. 누엔 부인은 남편과 서로 애모하는 것이 행복이고, 자신의 것은 또 다른 것이다.
‘나의 행복이라…….’
그것은…….
채운이 행복하면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행복 또한 작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가 정녕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질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와 서로 연모하는 감정을 함께 나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그 미소를 되돌릴 수 있다면. 그에게 사모한다 한 번이라도 고백할 수 있다면.
상상이나마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뿌듯한 행복에 가슴이 떨려 왔다.
비록 상상을 하는 것일지라도.
“훗.”
강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욕심이 다시 고개를 쳐드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 될 일이다. 그런 허망한 꿈으로 그를 붙잡아서는 안 된다.
강희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그리고 누엔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곧 그녀를 도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허나 그러는 와중에도 마음 한쪽에 그와의 미래를 꿈꾸는 한 자락 욕망이 솟는 걸 무시할 수는 없었다.
두 여인이 바지런히 짐을 꾸리고 집에서 할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바깥에서 달구지를 끄는 소리와 조랑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운과 호근이 돌아온 것이다.
* * *
배웅을 하는 강희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채운은 호근의 멱살을 붙잡고 길가 나무에 밀어붙였다. 아무리 부상당한 몸이나 그가 마음만 먹으면 호근과 같은 의원 하나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호근은 채운에게 목이 잡힌 채 캑캑거리며 당황하여 소리쳤다.
“왜, 왜 이러십니까, 무장님?”
“어제 여인들의 이야기는 잘 들었소?”
“네? 그게 무슨?”
“코 고는 소리가 딱 멈추더군.”
“아! 아하하하하, 하하, 저 그게 말입니다…….”
“행동거지를 아무리 가볍게 포장해도 당신은 보통 의원이 아니오. 솜씨로 보나 쓰는 기구들로 보나 일반 의원의 것이 아니었소. 정체가 뭐요?”
“저야 떠돌아다니는 의원이라고……. 제가 이름과 출신도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무장님.”
“당신은 어제 내 아내가 나를 부르는 호칭도 들었소. 그렇지 않소?”
“어, 허허허, 그것도 아셨습니까?”
호근은 부인도 않고 냉큼 들은 것을 다 시인했다.
그의 말이 가볍다 하여 행동도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채운은 그에게 더욱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강희가 처음 호근에게 느꼈던 의심 정도가 아니었다. 채운은 지금 자신들이 처한 위기에 대해 강희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만약 그들의 뒤를 쫓는 추적꾼이 붙는다고 가정한다면 귀환길은 생각보다 더 어렵고 위험한 행로가 될 것이었다.
서호근이라는 자가 자신들의 신분을 파악할 만한 단서를 갖고 있는 한 결코 그를 이대로 둘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누군지 아는 그를 뒤에 남겨 둔다면 그들의 귀환은 불안하고 불확실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우선은 서호근이라는 자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그럼 그 의료 기구는 다른 이의 것이오?”
“아닙니다! 그것은 내 것이오!”
다른 무엇에도 허허하며 가볍게 웃던 호근이었지만 의료 도구에 대한 것만큼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채운은 그것으로 그가 원래도 의관이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채운이 호근의 정체가 원래 의관이 아니었던 건가 의심한 것은 그가 쓰는 도구 때문이었다.
그것은 채운 정도의 신분이라면 궁에서 여러 번 보아 알 만한 물건이었다. 호근의 도구 중에 나라에서 내주는 낙관이 찍힌 기구가 있었던 것이다.
려국에서 의관들이란 꽤 드문 사람들이었다. 그 시험이 워낙 엄격하고 어려워 통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허나 수가 드문 만큼 실력이 높고, 대우가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의관이 쓰는 기구들은 모두 독특한 인을 새긴 것들이 내려지고, 녹봉도 많이 받으며, 신분도 보장되었다.
헌데 그것을 다 떨치고 달랑 기구들만 들고 천시당하기 십상인 떠도는 의원 행세라니. 사연이 있거나 정말 의심해 볼 만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않은가.
“나는 내 한 몸뿐 아니라 내 아내의 안위를 함께 보존하여야 하오. 그래서 당신의 진정한 정체를 알지 못한다면 함께 다닐 수가 없소. 다만 당신이 나를 치료해 준 은혜가 있어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오. 만약 당신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 판단되면 우리가 본국에 무사히 귀환할 때까지 이곳에 가두거나 묶어 두고 갈 수밖에 없소.”
채운의 칼날 같은 어조에도 호근은 그를 담담히 쳐다보았다. 당장 제 목을 꺾어 버릴 수 있는 장수의 손 아래 목이 쥐어져 있는데도 그의 눈엔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서호근은 역시 제가 꾸미는 겉모습같이 가벼운 이가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큰 사람이거나 혹은 기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전자라면 최사립의 밀정일 것을 의심해야 할 것이요, 후자라면 저만의 사연을 가진 선량한 사람일 것이다.
“저는, 제 이름은 서호근입니다. 대감께서 짐작하시던 것처럼 의관이었지요. 허면 대감, 대감은 뉘십니까?”
채운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젊은 무장에 대감이라 불리는 사람. 그가 혹 최사립의 사람이라면 그것만 가지고도 그가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난 윤채운이라 하오.”
“……!”
채운의 이름을 들은 호근이 눈을 부릅떴다.
“정녕 당신이 윤채운 장군이십니까?”
“그렇소.”
“하, 이런 인연이.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정말 서호근입니다. 북계도의 서경에 잠시 살았던 것도 맞고요. 오 년 전에 의관 시험에 통과하여 도성에 자리 잡고 있었지요.”
“…….”
호근이 재차 자신을 소개했지만 채운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다만 목을 죈 손을 풀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호근은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감께서 왜 제 정체를 궁금해 하시는지, 왜 저를 그토록 경계하시는지 압니다. 최사립 대감 때문이지요?”
“……!”
이번엔 채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하지만 그런 채운을 보고도 호근은 쓰게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무슨 사고를 당하셨는지, 왜 이런 곳까지 오시게 되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저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지요. 두 분을 보게 된 건 폭풍이 물려간 직후였으니 폭풍 때문에 오신 것이고……. 그것만 봐도 척하니 답이 나왔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낯선 나라에 왔다, 그런데 그곳이 정적의 주 무대인 곳이다, 그 정적은 윤 장군을 눈엣가시로 여긴다, 당연히 그 정적의 눈을 피하여 귀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맞지요?”
“어찌…… 알았소?”
“대감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의관 출신입니다.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이 머리 하나는 비상하게 돌아간단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엔 별로 필요하지 않았지만 궁 안에서 의관 노릇을 하려면 눈치라는 걸 키워야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대감의 성함만 듣고도 이리저리 쉽게 꿰맞춰지는군요.”
그와 최사립의 관계를 안다는 건 서호근이 송국을 떠돈 것이 오래된 일이 아니란 얘기였다.
윤채운이 왕세자와 처음 만난 것은 사 년 정도 전의 일이지만 그가 왕세자의 가장 신임을 받는 수하이자 벗이라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송국에 있은 지 얼마나 되었소?”
“지지난해 유월에 떠났으니, 거의 이 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시간으로 보아선 얼추 믿을 수 있는 말이었다. 허나 당장 그를 믿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위급한 상황이오. 당신이 최사립 측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당신을 가두거나 계속 함께 다니는 수밖에 없소.”
“하지만 제가 무어라 말한들 증명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래서 당신이 선택하길 바라오.”
“그리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찌 선택이란 걸 하겠습니까? 전 갇히기 싫습니다!”
그리 말하는 호근의 얼굴엔 어느새 웃음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심각한 상황도 가볍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치료를 할 때는 진중하며, 그 밖의 상황에 대해선 활달하고 유쾌하니 의원으로서 드물고 귀한 재주라 해야 할 것이다.
“미안하오. 하지만 항상 내 눈앞에 있으시오.”
“네에, 네, 그러지요.”
호근은 빈정거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체념이라도 한 것인지 다시 빙글거렸다.
정말이지 상황 판단이 빠르며, 포기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것이 정말 포기인지 혹은 결단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호근이 머물던 마을로 향했다. 호근은 조금씩 식은땀을 흘리는 채운을 보며 그가 그냥 제자리에서 기다렸으면 했지만 ‘눈앞에 있으라’라는 경고는 괜한 것이 아니었다. 말을 꺼내려고 걸음을 멈출 때마다 새파랗게 날이 선 눈빛이 날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발을 놀려 어서 도착하는 것이 나았다.
촌장 집에 도착하기 직전, 마을 입구에 선 호근은 채운의 모습을 보며 잠시 가늠해 보았다. 그러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이것을 눈에 하세요.”
“이게 무엇이오?”
“지금 대감의 모습을 보면 대감이 윤채운 장군이라는 걸 당장 떠올리지는 못하겠지만 곧 눈치챌 겁니다. 그보다 더한 특징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등도 좀 굽히시고, 머리도 풀고요. 거기에 한쪽 눈을 가리면 어디서 떠밀려 온 해적이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그런 이를 뉘가 귀한 신분이거나 무장으로 생각하겠습니까?”
“……알겠소. 고맙소.”
채운은 그에게서 안대를 받아 들고 곧장 그의 말대로 머리를 풀고 등을 굽혔다. 그렇게 하자 안대를 포함하여 초라한 꼴을 한, 어디선가 봄 직한 부상자처럼 보였다.
“앞으로 같이 다니실 작정이라니, 아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고 보면 제가 꽤 쓸 만할 겁니다, 후후.”
채운의 변장 모습을 지켜보던 호근은 또 저를 스스로 칭찬하는 척 경박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채운은 이제 정말 그를 가벼이 보지 않았다. 왜 떠도는 의원 노릇을 하는지까지는 알지 못하나 그가 정말 최사립의 사람만 아니라면 욕심이 나는 인재였다.
그는 제 말대로 매우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도 낯선 마을 사람들에게 추레한 모습을 보일 생각을 하긴 했으나 안대 생각까지는 못했다. 만일 누군가 자신에 대해 묻는다 해도 사람들은 가장 큰 특징인 안대에 대해 말할 것이다.
허나 이런 호기심도 당장은 쓸모없는 것이다. 이곳은 송국이다. 그러니 귀환길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추적자나 최사립의 밀정을 조심해야만 했다.
마을로 들어서는 채운의 신경은 긴장으로 빳빳하게 일어서 있었다.
“저기가 제가 머물던 촌장 집입니다.”
호근이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자 촌장이 뛰어나오며 그를 매우 반갑게 반겼다.
[어이구, 서 의원, 어디 있다 이제 오는 거요? 어젯밤 술동이를 내놓고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오?]
어젯밤 호근이 허풍처럼 늘어놓던 술동이 얘기는 거짓이 아니었나 보다.
전날 밤에 돌아오지 않은 호근을 붙잡고 반갑게 떠드는 촌장의 얼굴엔 행여 그가 떠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서려 있었다.
이렇게 외진 마을에선 의원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간혹 떠돌이 의원이 마을에 오곤 했지만 엉터리인 경우가 많았고, 금방 떠났기에 호근은 이들에게 정말 매우 귀한 존재였다. 게다가 촌장의 집에 상주하며 오랜 지병을 갖고 있는 이들도 의원을 항시 찾을 수 있었으니 환영받고말고였다.
호근이 수보의 얘기를 하며 달구지를 내 달라고 하자 촌장은 섭섭함에 그를 붙잡고 울기까지 했다. 당장 염려하던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실력 있고 친절한 의원이 떠나려 한다니, 아쉽기도 할 것이다.
허나 사정이 그리하니 붙잡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환자가 있고, 호근도 가진 약재들이 떨어져 간다 하니 보내 주어야만 했다.
촌장은 호근이 달라는 달구지를 흥정도 없이 내주었다. 호근은 정당한 셈을 치르려 했지만 촌장은 그럴 거면 차라리 살려 준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라며 손사래를 치는 것이었다. 그 호근이 쩔쩔맬 정도의 기세였다.
호근은 나중에 몰래 촌장의 부인에게 돈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그가 떠난다는 소식에 배웅 나온 마을 사람들에게 채운이 함께 온 이유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호근은 그를 치료비 대신 일하는 일꾼이라 소개했다. 차라리 채운을 두고 호근이 혼자 움직였더라면 설명조차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정체를 들킨 채운은 신용이 없는 호근을 눈 밖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채운은 실제로 호근의 뒤를 따르며 모든 수발을 들고, 그를 감시하며 짐을 챙겨 함께 달구지에 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몰려나온 것 같았다. 채운과 호근 두 사람은 어촌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 채운은 달구지에 기대 가슴을 눌렀다. 전날 수보를 구하기 위해 무리한 것과 오늘 마을까지 걸어온 것 때문에 막 회복되어 가던 몸을 도로 상하게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면서도 한시도 호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대감, 괜찮으십니까? 눈이라도 좀 붙이시지요.”
“나는 괜찮소.”
채운은 무뚝뚝하게 답하고는 가슴에 올린 손도 내렸다.
고집스런 채운을 보며 호근은 내심 혀를 차면서도 묵묵히 달구지를 끄는 데 전념했다. 속으로는 채운이 저녁에 먹을 약재를 좀 세게 하여 오늘 밤은 푹 재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달구지가 덜컹거리며 다가오는 소리에 강희와 누엔이 뛰쳐나오며 돌아오는 두 남자를 마중했다.
달구지에는 튼튼한 소 한 마리와 호근과 채운이 함께 타고 있었다. 주인이 저를 버리고 간 탓에 수보의 집 앞에 매여 있던 조랑말이 그를 반기며 소리 높여 울었다.
[준비들 다 하셨습니까?]
[네, 이불과 짚은 준비했지만 충분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호근이 두 여인을 향해 두루 묻자 누엔이 대답했다. 남편의 부상에 혼절하는 모습을 보아 기가 약한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막상 움직여야 할 상황이 되자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차피 길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가시는 길 내내 부인이 남편분의 다리를 받치고 붙잡으셔야 할 겁니다.]
[네, 그러지요. 그리할 것입니다.]
사실 환자의 안정도 중요하지만 약이 떨어진 관계로 서둘러 움직이려는 것이었다.
새벽에 움직이기 시작하여 달구지까지 가지고 온 지금, 아직도 해가 중천이었다. 오늘 내로 가고자 하는 약방까지 가지는 못하겠지만 서둘러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강희가 지친 채운의 모습을 보며 식사를 먼저 권했다.
[우선 식사들을 하셔야지요.]
[무장님과 전 촌장님이 차려 준 것을 거하게 먹고 왔습니다. 먹을 것도 많이 챙겨 주셔서 가는 동안 음식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어제 못 먹은 술까지 챙겨 주시더라니까요, 하하하!]
호근은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듯 더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강희는 채운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만 보였다. 어차피 가양성의 약방까지 가는 길은 당장 출발한다 해도 오늘 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들었다. 잠시라도 그를 쉬게 하고 싶었다.
그런 강희의 기색을 알아챈 호근은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부인분들은 식사를 다 하셨습니까?]
[이제 먹으려 합니다.]
[저런, 아직도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고요? 오늘 갈 곳은 가양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진이라는 마을입니다. 그곳에는 해가 지기 전에만 도착하면 되니 두 분께서는 천천히 식사를 하시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먼 곳을 가야 하니 두 분께서는 더욱 체력을 보충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누엔과 강희는 식사를 한다는 생각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음식을 입에 넣었다. 제대로 맛을 음미할 정신도 없었다.
두 사람이 음식을 뜨기 시작하자 호근은 먼저 미음을 먹고 쉬고 있는 수보에게 가져온 약을 먹게 했다.
빠르게 먹을 것을 씹어 넘긴 두 여인은 각자의 남편에게로 달려갔다. 누엔은 수보가 약을 먹는 걸 지켜보며 마음을 졸였고, 강희는 수건을 들고 가 얼른 채운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생각 같아서는 식사고 뭐고 당장 그의 이마부터 훔쳐 주고 싶었지만 아까 막 도착했을 때는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걱정스레 그의 이마를 닦아 주는 강희의 손에 채운이 자신의 손을 포갰다.
“나는 괜찮소. 걱정 마시오.”
“그럴……. 네, 그럴 것입니다.”
강희는 그의 다정한 말에 울컥 치솟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처럼 나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가 무리해서 힘든 모습을 보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본인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오히려 그녀를 안심시키려 하니 마음이 울컥해지는 것이다.
“대……, 서방님의 약도 달여 놓았습니다. 약을 드시어요.”
가까이 있는 호근을 의식한 강희가 그를 어색하게 부르며 말했다.
채운은 강희가 자신을 어색하게 부르는 모습에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녀와 포갠 손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놓아주며 말했다.
“……그렇소? 어서 주시오.”
강희는 약을 가지러 돌아서며 이번엔 다른 기분으로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에게 잡혔던 손에서 갑자기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와는 두 번이나 잠자리를 한 사이였지만 손을 잡힌 것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콩닥거리고 있었다. 그와 숨결이 겹치던 그 순간이 상기되어 심장이 두근두근 떨리는 것이다.
‘설마 기억을 되찾은 걸까?’
아직 그런 기색은 없었다. 아니면 혹 의원이 있어 말을 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물어봐야 할까? 허나 확인하기엔 괜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 순간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죄가 있는 자신을 잠시 감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한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녀는 지금 이 짧은 순간이라도 그에게 성강희가 아닌 낯선 여인이고 싶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겠지?’
그가 기억을 되찾는다면 왜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느냐 따질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아 기억을 찾는 게 느려졌다 원망을 받을 수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알려 줘야 하는 것일까? 왜 처음엔 아니라 했느냐고 물으면 뭐라 해야 할까?’
계속 드는 혼란스러운 생각에 강희는 또 혼자 고개를 저었다.
옹졸한 생각일지라도 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귀환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이 알량한 소망을 조금은 더 갖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나중에 원망 받는 건 두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을 조금이나마 연장하고 싶었다. 낯선 빛으로 보는 그의 눈빛도 아프지만 그에게 죄인의 몸이 아닌 다른 사람이고 싶었다.
약을 따르는 강희의 고운 이마가 고민으로 찌푸려져 있었다. 그것을 채운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호근이 그런 강희와 채운을 돌아보고는 피식 웃는 것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 * *
사람이 걸어가는 것과 비슷한 속도를 내는 달구지는 천천히 움직였다. 사람 넷과 짐들을 싣고 달구지를 끄는 소는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강희는 제 주인이 달구지에 오르자 아쉬워하는 조랑말을 대신 이끌고 가고 있었고, 채운과 호근이 번갈아 달구지의 마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속도가 느려서인지 그들이 목표로 한 마진이라는 곳은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환자를 태운 상태로 속도를 낼 수도 없는 일이라 천천히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거의 쉬지 않고 움직인 덕분에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마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장님, 저와 함께 방을 빌리러 가시지요. 이곳도 큰 마을은 아니라 여각연안 포구에 상인들의 숙박, 화물의 보관, 위탁 판매, 운송 따위를 맡아 보던 상업 시설 같은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전에 이곳을 지나친 적이 있기 때문에 머물 곳은 구할 수 있을 듯 보입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소.”
안내를 하며 먼저 앞선 호근의 입은 한시도 쉬지를 않았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손짓까지 어지럽게 바쁜 수다를 이어 가고 있었다.
“신세라니요. 저 이것 다 기록해 둘 거랍니다. 앞으로 제게 톡톡히 갚으셔야 할 겁니다.”
“……그리하겠소.”
“뭘 또 그리 진지하게 답하십니까, 겁나게.”
“뭐가 겁나오?”
“혹, 저를 의관으로 붙들 생각이신 게 아닌가 하여……. 설마 그런 건 아니시겠지요?”
“…….”
“앗, 맞는가 보군요. 설마 정말 그런 생각이시라면 그만두십시오. 제가 머리 하나는 믿을 만하여 의관이 되었지만 머리만으로 할 짓이 아니더군요. 궁은 저와는 맞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떠난 것이오?”
“뭐, 그보다 더 바보 같은 사연이 있긴 하지만……. 지금 말씀드린다고 하여도 믿지는 않으실 겁니다. 다만 혼인하고 싶은 여자와 잘 안 된 것만, 그것만 말씀드리지요. 그러니 거 제발 노총각 가슴에 불 지르는 거 그만 좀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여길 봐도 서방님, 저길 봐도 서방님. 양쪽에서 쌍쌍으로 불타오르고 있으니, 미장가未丈家인 저는 눈 둘 데가 없습니다.”
사뭇 진지해지다 갑자기 놀림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하소연을 하던 호근은 제 손으로 눈을 가리며 앓는 소리까지 냈다.
허나 여인들의 고백들을 둘 다 엿들은 호근이었다. 사연을 다 알면서 하는 이 말은 그의 능청 중 하나일 뿐이었다.
“…….”
채운은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또 그만 제가 한 말에 대한 대답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어허! 거참, 그렇게 안 봤는데, 무장께선 그럼 이 노총각의 애간장을 태우는 짓을 계속하시겠다는 겁니까?”
“…….”
혼자 묻고 혼자 답하고 알아서 다 하는 호근이었다.
마지막 질문에는 채운도 놀라 짐짓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호근의 장난스런 눈빛에 채운도 그와 같이 피식 웃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호근의 다음 말에는 채운도 걸음을 멈추고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매우 중요한 몇 마디가 오고 갔다.
“…….”
“…….”
잠시 후.
“서 의원, 당신은 궁에서 의술보다는 눈치를 더 키운 것 아니오?”
“맞습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하하하!”
“훗.”
약간의 여유가 생긴 채운도 짐짓 그의 웃음을 따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호탕하게 큰 소리로 웃은 호근은 어느 집 앞에 멈춰 서서 문을 두드렸다. 채운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언제고 다 말해 줄 날이 있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반색을 하고 호근을 반겼다. 서둘러 안으로 들이고자 하는 주인에게 호근이 상황을 설명하고 방을 내 달라 청하는 모습을 채운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주인은 흔쾌히 호근의 청을 들어주었다.
호근의 장담대로 숙소를 구할 수 있었던 그들은 방 하나에 모두 함께 들게 되었다. 그것은 호근을 계속 눈앞에 두려는 채운의 의도와 남편들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여인들의 각오가 모두 채워지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이 되면서 채운은 호근이 짐작했던 대로 다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안정을 취해야 할 몸에 환자를 옮기느라 뛰어다니고 힘을 쓴 것, 달구지를 가지러 걸어 다닌 것에다 먼 거리를 움직인 것까지 더하여 확실히 무리한 것이다. 오히려 약을 충분히 먹은 수보가 더 편히 잠이 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호근은 채운의 약을 다시 지어 주며 채운에게 직접 말했다. 의심을 사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이롭게 할 일이라도 숨기는 일이 있는 것은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약재에는 깊이 잠이 드는 약이 들었습니다. 이걸 드시면 오늘 밤 푹 쉬시고 내일 편히 일어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호근의 약을 받느냐 아니냐는 채운에게 도박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것은 그를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 시험하는 것과도 같았다. 아니, 이곳이 외진 곳이라 시험해 보기도 좋은 상황이었다. 도시에 들어서게 되면 정말 그와 완전히 헤어지거나 더욱 경계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약을 주어 심하게 졸렸다면 자지 않으려고 기를 쓰느라 진을 뺐을 것이다. 호근은 그에게 약을 먹고 마음 편하게 자느냐, 아니면 먹지 않고 버티느냐의 선택권을 준 것이다.
채운을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주시오. 먹겠소.”
채운의 말에 강희는 호근에게서 약을 받아 달였다. 두 남자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른 건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채운은 그날 깊이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가양성 태수가 사는 인근 도시인 약천이라는 곳이었다. 가양성만큼 번화한 곳은 아니나 꽤 큰 약방 몇이 모여 있어 이름도 약천藥泉이라 불리는 곳으로, 치료를 목적으로 하기엔 이곳보다 적합한 곳이 없었다.
“잠시만 쉬었다 들어가십시다.”
약천의 성벽이 보이는 산 중턱에 들어서자 채운이 처음으로 먼저 휴식을 청했다.
호근은 그가 며칠간 무리하더니 기어이 탈이 난 건 아닌가 싶어 돌아보았다. 하지만 채운은 조금 창백하긴 해도 이상은 없어 보여 호근은 고개를 갸웃했다.
호근의 무언의 질문에 채운이 답했다.
“도시로 들어서기 전에 우리 모습을 조금 더 바꿀 필요가 있겠소. 누엔 부인께는 내 아내의 용모가 너무 눈에 띄니 귀환까지 탈이 없게 모습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설명해 주시오.”
“아아, 그러지요.”
조금 억지스럽지만 사실 강희의 모습을 보자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눈에 불을 켜고 채운을 찾으려는 사람이 없다 해도 이런 타향에서 고운 처자를 데리고 다니면 괜한 시비가 붙을 수 있었다. 채운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달을 사전에 막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채운의 말을 전한 호근의 설명에 누엔 부인도 강희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강희는 눈에 띄는 미인이라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가실을 앞세워 거들먹거리며 다닌 탓도 있지만 그녀 자신이 화려한 치장과 생김새만으로도 눈에 띄었다. 지금처럼 꾸민 모습이 아니라 해도 그 바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누엔은 호근의 설명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다만 혼자 조랑말을 타고 있던 강희는 달구지를 멈추고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에 제 몸에 뭐가 묻기라도 한 것인가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채운이 손을 내밀며 그녀가 말에서 내리게 해 주었다.
“이대로 도시로 들어가면 당신은 너무 눈에 띌 것이오. 그러니 당신의 모습을 좀 변화시켜야 할 것이오.”
“그런 것입니까? 그럼 전 어찌해야 할까요?”
생각도 못하고 있던 것에 강희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내가 도와줄 것이오. 허니 옷가지를 다 챙겨서 이리 오시오.”
채운은 강희가 옷가지가 담긴 보따리를 챙겨 들자 그녀를 달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끌었다. 옷을 벗는 것은 아니지만 호근이 보는 앞에서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신 옷 속에 옷을 채워 넣으려 하오. 조금 답답하겠지만 최대한 당신의 몸을 부풀어 보이게 할 것이오.”
“네.”
그의 의도를 이해한 강희는 옷가지를 풀고 그것들을 겹쳐 입으려 했다.
하지만 채운이 그런 강희를 말리고 자신이 해야 모양을 잡을 수 있다며 직접 해 주었다. 그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옷을 채워 넣고 움직이기 편하게 묶어 준 후 마지막으로 큰 옷을 한 번 더 덧입혀 주었다. 덕분에 강희는 순식간에 뚱뚱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그의 손이 온몸에 스치듯 닿는 터라 강희는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에게 다른 의도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닐 텐데도 그녀는 심장이 튀어 나갈 듯 그의 손길을 심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를 이리저리 돌려세운 채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솜씨를 감상하듯 말했다.
“팔다리를 움직여 보시오.”
“네? 네…….”
어둔하여 답답한 감도 있지만 움직일 만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답답할 것이오. 덥기도 할 것이고. 하지만 잠시만 참으시오.”
“네, 참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곱군.”
“네?”
제대로 들은 것일까? 잘못 들었나 싶어 의아해 하는 강희를 채운은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오. 혹시 떡 남은 것이 있소?”
“찾아보겠습니다.”
“떡이 있으면 양 볼에 떡을 하나씩 물고, 없으면 당신이 입던 옷을 잘라 비단 천을 입안에 물고 있으시오.”
그것도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하면 볼은 부풀어 오를 테고, 살찐 여인처럼 보이는 것은 물론 인상도 완전 달라 보일 것이다.
“아! 네, 알겠습니다.”
“당신 머리도 조금 헝클이는 게 좋겠소.”
채운은 지금 강희의 모습을 최대한 망치려 하고 있었다. 여인으로서는 기겁할 일이나 지금은 고운 여인의 자태를 뽐낼 때가 아니었다. 그의 말에 강희는 당장 머리를 묶은 끈을 풀기 위해 손을 올렸다.
“아, 아니오. 이것도 내가 하는 게 나을 것이오.”
그러면서 채운이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그가 직접 그녀의 땋은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빼내어 주었다. 잘 묶인 머리를 헝클이려는 행동이었지만 세심한 그의 손길은 무슨 장식을 해 주는 양 섬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단지 변장을 도와주는 것뿐인데.’
귓가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강희의 심장은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무심한 듯 스치는 그의 손길에 닿은 곳마다 불이 이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하는 행동일 텐데, 그녀 혼자 떨리고 의식하니 민망하기만 했다. 강희는 그를 한 번 더 말렸다.
“서, 서방님, 제가 해도 됩니다.”
그녀는 이제 둘만 있을 때도 채운을 자연스레 서방님이라 불렀다. 그가 호근에게나 사람들에게 완전히 부부로 보여야 한다며 그리 불러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외려 꾸며 부르던 것이 더 어려웠던 강희에게는 그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사실 그녀로선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기억이 없는 그에게 마음껏 서방님이라 부르는 것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니오, 내게 맡기시오. 강희, 당신은 동경을 볼 수도 없지 않소?”
그가 부른 이름에 강희는 또 움찔했다.
채운은 오늘 둘만 있을 때 내내 그리 부르고 있었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녀는 심장이 떨리는 것 같았다. 어제부터도 그랬지만 오늘 그와 함께 있는 내내 이렇게 두근거리며 설레고 있었다.
오늘 그는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 질문은 자신의 정체를 묻는 말과도 같았기에 강희는 어찌 대답할지 잠시 고민을 했다. 성강희라는 이름을 말한다면 그가 모든 걸 알고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자신이 부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성강희라는 이름만으로도 그에게는 악몽일 것이라 또 걱정이 됐다.
그 이름을 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이름을 말해 주었다.
제 이름은 ‘강희’라고.
다행히 그는 성이 무어냐 되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의 이름을 입속으로 가만히 되뇌었다. 그리고 다음엔 실제로 소리 내어 그녀를 불렀다.
“강희.”
혼인 후 처음 그렇게 불렸을 때처럼 강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그가 자신을 알아본 건 아닐까? 기억을 다 되찾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는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불러 보았을 뿐이었다.
“네…….”
“그것이 당신의 이름이로군.”
“네, 그렇습니다.”
“알겠소, 강희. ……하지만 내 이름과 마찬가지로 당신 또한 그리 불러선 안 될 것 같소. 어차피 다른 이들이 볼 때는 부인이라 부르면 그만이니 상관없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 둘이 있을 땐 이름을 부르고 싶소. 그리해도 되겠소?”
“네, 그리하셔요.”
“좋소, 강희.”
“……네.”
그에게 다시 이름이 불리다니, 얼마나 꿈만 같은지.
손이 닿은 것도 아주 가까이 선 것도 아닌데,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도 그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의 입을 통하여 불리는 이름에 답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품을 한 번 훔친 느낌이었다. 순간의 헛된 꿈일지라도 그에게 이름이 불리는 이 기분을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었다.
잠시 꾸는 꿈인데 어떠랴.
‘이 순간만큼은 조금 욕심낸다 한들 하늘도, 그도 용서해 주지 않을까?’
그리고 그는 그렇게 오늘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의 손으로 손수 이렇게 변장까지 시켜 주며 그녀를 다독여 주는 것이다.
강희가 두근거리며 있는 그동안.
달구지 위에서 히죽거리며 떠드는 호근의 말을 그녀가 들었더라면 강희는 기겁을 했을지도 모른다.
수보는 일부러 약기운을 빌려 잠들게 한 상태였지만 호근과 누엔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별 변장이랄 것도 없는 그것을 멀지 않은 훤히 보이는 곳에서 하고 있으니, 저절로 보이는 것이었다.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까지 들릴 거리는 아니었으나 아무튼 채운이 하는 말에 곱게 웃는 강희를 보는 호근의 얼굴이 점점 푸들거렸다.
[저 부부는 갈수록! 아니, 무장께 이 노총각 염장 좀 지르지 말라 그리 부탁을 했건만, 일부러 더 하시는 것 아니오? 부인을 저리 조물조물하며 다독이는 품이 예사가 아닙니다!]
[저, 의원님, 제가 보기엔 부인을 뚱뚱하게 변장시키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둘 다 같은 걸 보고 있었으니 그거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호근은 그녀의 말에 혀까지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변장을 시키면 시켰지 이런 벌건 대낮에 왜 부인을 저리 끌어안고 있느냔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머리카락을 헝클이시느라…….]
[그거야 저도 보여요. 그런데 그걸 저리 감싸 안고 할 일이냔 말이에요. 또 뭘 저리 오래한단 말이오? 갈 길이 바쁜데!]
‘감싸 안고?’
누엔은 그리 오래는 아니라는 말은 하려다 삼키고 말았다. 호근의 눈에는 다분히 장난기가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스스로 노총각 염장이라 했으니 그리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이 의원은 이런 식으로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인 것 같았다. 누엔은 호근의 분노(?)에 동조하진 못했지만 같이 따라 웃을 수는 있었다.
변장을 끝내고 돌아온 강희의 모습은 자못 우스웠다. 마지막에 강희가 비단 천을 입안 가득 무는 걸 보게 되자 누엔도 한바탕 크게 웃고 말았다. 덕분에 그녀는 수보가 다친 후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워낙에 고운 강희의 얼굴은 그 정도로 완전히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채운은 아직도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걸 본 호근은 붓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며 한술 더 뜨는 말을 했다.
“코 옆에 손톱만 한 점을 하나 찍으십시오. 그럼 더 확실한 변장이 될 것입니다.”
심술이었다.
호근은 제 얼굴에 더덕더덕한 장난기와 음흉스런 미소를 보이며 제 속내를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건 채운이 그의 말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가 정말 점이라도 찍으려는 듯 자신을 쳐다보자 강희는 질겁했다. 다른 이도 아닌 채운에게 그런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설마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서방님, 정말 그…… 리하실 것입니까?”
입안 가득 천을 물어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는 강희였다.
아마 이 모든 상황을 무시할 수만 있었다면 채운은 그녀를 품에 가둬 안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마저도 그녀는 정말 곱게 보였다. 그는 내심 그녀의 얼굴에 진흙이라도 바를까 하던 생각을 접고 시선을 피한 채 짧게 답했다.
“……아니오.”
순간 강희에게서 작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에 다시 그녀를 달래기도 전에 옆에서 다른 소리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하하!”
붓을 든 채운과 질색하는 강희를 본 호근이 산새가 떠나갈 정도로 박장대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엔도 고개를 돌리고 호근을 따라 몰래 웃고 있었다.
강희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었고, 채운은 겸연쩍어 했다.
긴박하게 달려오던 이들에게는 잠시의 휴식과도 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