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7. 고백
18. 낯선 여인으로
19. 그들의 사정
20. 홀로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야 하는 이유
21. 그들을 찾는 사람들
22. 응답이 들릴 때까지
23. 조금, 조금만 더
24. 추적
25. 가시굴 피난처
26. 운명과 인연
27. 용서해 주세요
28. 그림자 끝의 추적자
29. 탈출
30. 형!
31. 재회
32. 여정의 끝
33. 꿈의 마지막 파편
34. 꿈과의 이별
35. 빛나는 웃음
종장. 그 후 이야기
외전. 그날 기방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후기
17. 고백
채운이 깨어난 이후 의원은 이틀 후 다시 왔다 갔고, 다음에는 그 사흘 뒤에야 왔다. 그 후로도 의원은 대략 이틀이나 사흘 걸러 불규칙적으로 오고 있었다.
강희는 제 간호가 충분한 것인지 애가 탔지만, 채운은 의원을 자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라며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채운은 깨어난 다음 날부터 당장 죽과 약을 먹고는 전날보다 훨씬 편안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가 잠이 들었을 때도 찡그린 표정이 가시질 않았던 것이 풀어지자 강희는 조금씩 안도했다.
약이 효험이 있는 것인지, 그는 이틀 후부터 부축 없이도 혼자 일어서서 움직일 정도가 됐다.
채운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서야 강희는 서호근이란 의원의 실력만큼은 믿어도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다시 며칠 뒤.
강희가 내심 미덥지 못하게 생각하던 의원을 다시 보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여느 날처럼 강희가 채운에게 식사를 가져다주고 집안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누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부인,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제 남편이, 남편이 다쳤어요!]
다급한 목소리에 놀란 강희가 달려 나갔다.
거기엔 거의 산발이 된 누엔이 헐떡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어디에서요? 어떻게요?]
[산에요. 오늘 산에 일군 밭을 보러 갔던 참이었습니다. 헌데 올무를 걷던 남편이 뱀을 밟아 물리면서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어요. 그 탓에 남편의 다리가, 다리가 이상하게 꺾였습니다. 제힘으론 혼자 어찌할 수가 없어서 달려왔습니다. 남편이 사람을 먼저 불러오라 했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어딘가요? 같이 가세요!]
“무슨 일이요?”
채운도 누엔 부인의 목소리를 듣고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요즘 제법 혼자 거동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수보 아저씨가 뱀에 물려 언덕 아래로 떨어졌는데, 다리가 부러진 것 같습니다. 함께 가 보려 합니다.”
“잠깐, 잠시만 기다리시오. 당신은 내 침상에 있는 얇은 이불을 들고 오고, 부인께는 묶을 수 있는 끈을 찾아 달라 하시오. 어서!”
강희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갈 것 같은 누엔 부인을 붙잡고 끈을 찾아 달라고 했다. 헌데 잠시 후 채운도 낫을 들고 그녀들의 뒤를 따라 같이 산에 오를 차비를 하는 것이다.
“서방님, 서방님은 아직 환자의 몸이십니다. 어찌 그런 험한 곳으로 가신다는 겁니까?”
“지금 이런 말로 실랑이할 때가 아니오. 우선 부상자가 있는 곳만 알려 달라 하고, 누엔 부인에게는 어서 의원을 불러오라 하시오. 오늘 서 의원이 오는 날이니, 혹시 도중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오.”
“아, 알겠습니다.”
강희는 너무나 경황이 없는 나머지 그를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실수를 한 것도 알지 못했다. 의원이 있는 자리에선 일부러 그를 부르지 않으려 애썼고, 혹 그와 둘만 있을 땐 대감이라고만 칭하던 것을 다급한 순간에는 원래 하던 대로 부른 것이다.
‘서방님?’
채운은 그 말이 새삼 마음에 걸렸다.
꿈속의 여인과 같은 목소리로 똑같이 불린 호칭이었다.
그녀에게 그리 몇 번 불리긴 했으나 그것은 의원이 있는 앞에서뿐이었다. 그것도 어색한 호칭을 억지로 꾸미는 것이라 갸웃거리는 의원의 시선을 여러 번 받아야 했다.
헌데 다급한 순간 자연스레 불린 호칭에 채운은 안개 속 같던 머릿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멈춰 서서 조금만 더 집중한다면 기억의 가닥이 풀리면서 무언가 더 떠오를 듯했다. 그가 가진 기억의 공백은 저 여인이거나 서방님이라 불린 그 호칭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끈을 찾아왔어요. 빨리, 남편이 혼자 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허옇게 질린 누엔 부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재촉하고 있었다. 잡힐 듯 말 듯한 기억은 다시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누엔을 따라 달려간 언덕 아래로 수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멀찍이서 보아도 과연 이상한 방향으로 다리가 꺾인 채 힘없이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채운은 곧장 남편에게 가려는 누엔 부인에게 소리쳤다.
“부인, 어서 가서 의원을 모셔 오시오!”
[누엔 부인, 어서 의원을 모셔 오세요!]
강희가 송국말로 소리치자 누엔이 남편이 있는 쪽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뒤돌아서서 달려갔다.
그런데 채운은 곧바로 수보에게 달려가지 않고 가져온 낫으로 곧은 나무를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개의 나무 사이에 가지를 엮고, 그 위에 이불을 걸친 후 끈으로 묶은 후에야 수보에게 다가갔다.
‘아, 그렇구나.’
그는 수보가 당한 부상 상태를 간단히 듣고도 곧장 들것을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언덕은 꽤 미끄러운 상태였다. 채운이 수보의 근처로 내려가는 걸 강희도 어렵게 따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가까이 가서 보게 된 수보의 상태는 끔찍했다. 언덕을 구르며 이곳에 있던 바위에 심하게 부딪힌 듯 보였다. 그의 오른쪽 정강이 아래가 부러진 채 뼈가 돌출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생각보다 부상이 심하오. 조금 부러진 정도가 아니라 출혈도 심하오.”
그나마 수보의 다리 위엔 무언가 묶어 놓은 것이 보였다. 누엔은 남편의 말을 듣고 곧장 사람을 부르러 왔다 했으니 본인이 한 것이 틀림없었다.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재 수보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것이 출혈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무엇이든 위급한 상황이었다.
채운이 그의 다리를 다시 더 꽉 묶어 지혈시키고 있을 때, 언덕 위에서 호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내가 내려가 보겠소!”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호근의 모습은 평소의 느긋하고 느릿느릿하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언덕을 거의 구르다시피 내려온 그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수보의 상세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채운이 묶은 곳의 압박 정도를 확인하더니 상처 부위를 감싸 막았다.
“뱀에게도 물렸다고 하오.”
“어딥니까?”
“여기인 것 같아요!”
강희가 수보의 반대편 다리 종아리를 보여 주었다.
호근은 다리의 부은 모습과 물린 상처를 보며 말했다.
“독이 없는 뱀이오. 이건 나중에 봐도 됩니다. 이제 환자를 들것에 옮기게 도와주십시오!”
뒤따라온 누엔 부인과 강희도 거들어 수보를 들것에 무사히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네 사람은 언덕의 비교적 완만한 곳을 돌아 올라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호근이 항상 타고 다니던 조랑말이 보였지만 그는 놈을 쳐다보지도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도착한 호근은 수보를 침상으로 옮긴 다음 저 혼자 알아서 주인을 따라온 조랑말에게서 자신의 보따리를 내렸다. 그리고 수보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즉시 다리 부위의 상처를 싸맸던 것을 열었다.
평소의 느긋하고 껄렁껄렁하던 호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정말 의원처럼 보였다.
“무장께서는 환자의 발목을 잡아 주십시오. 꽉 잡아 주셔야 합니다.”
누엔은 남편의 부상 부위를 보고는 질겁하여 혼절하고 말았다. 강희는 누엔을 자리에 눕히고 다시 의원이 치료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은 끔찍했지만 당장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호근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부인은 깨끗한 물을 떠 오시고, 인두를 불에 달궈 준비해 주십시오. 그리고 부목이 될 나무와 붕대를 많이 준비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강희는 며칠 새 눈에 익은 이 집의 살림을 뒤져 호근의 지시대로 준비했다.
침상 위의 뼈와 피가 튀던 장면은 그날 바다 위의 참상을 연상케 했다. 허나 지금은 아무도 구할 수 없었던 그날이 아니라 의원이 옆에서 수보를 살리려 하고 있었다.
호근은 이마에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되게 흘리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강희는 중간중간 의원의 심부름을 하며 그의 경건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에 매우 감탄스러워 하고 있었다.
도중에 정신이 깬 누엔도 열심히 물을 떠 나르고 피를 닦아 내며 수술을 도왔다.
호근이 환자의 상처를 마지막으로 봉합하고 다리에 붕대를 감기까지 몇 시진이 흐른 것만 같았다. 뱀에 물린 상처까지 본 후 마침내 호근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수보는 창백하긴 하나 안정된 숨소리로 잠이 든 상태였다.
부상자가 무의식중에라도 발버둥치지 않게 끝까지 발을 잡아 주었던 채운이 호근을 보고는 감탄하며 칭찬했다.
“훌륭하오, 서 의원. 병영에서 이와 비슷한 무수한 부상들을 보아 왔지만 이런 중증의 부상을 이렇게 신속하고 깔끔하게 치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소.”
“다 무장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그리고 아직 치료가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상처 부위가 감염되지 않게 살펴야 하고, 통증이 엄청날 테니 약재도 더 써야 합니다. 아무튼 무장께서 서둘러 환자를 옮길 방책을 마련하신 덕분에 치료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독이 없는 뱀에 물린 것도 다행이지요. 만약 독사였다면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한 것이야 별것이라 하겠소. 헌데 어찌 그리 빨리 오셨던 게요?”
채운은 호근의 치사에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출발하여 오던 참인데……. 그게 다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나 봅니다. 아무튼 오늘 무장께서도 무리를 하시어 덧나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호근이 특유의 웃음기 어린 표정을 거두며 걱정스레 물었다. 방금 전 수술을 할 때만 해도 그렇고, 환자를 대함에는 진지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조금 뻐근하지만 견딜 만하오.”
“하하, 그 이상인 것을 압니다. 오늘 무리하셨으니 내일 다시 일어나기 힘드실지도 모릅니다.”
“감수해야지요.”
사실 채운은 지금도 어깨와 가슴 부위가 상당히 아파 오고 있었다. 겉보기엔 모를 상처인데, 호근은 그의 상태를 정확히 짚고 있었다.
“아무튼 저분들과 무장 부부께서는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저 부부는 무장 부부를 구하시고, 무장께서는 주인아저씨를 구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오. 허나 이 정도로 은혜를 갚았다 할 수는 없소.”
“하하하하하.”
서호근은 여느 때처럼 별스럽게 크게 웃었다.
허나 강희는 이제 그의 그 웃음이 달리 보이고 있었다. 채신없이 가벼워 그 속을 보이는 그런 웃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시름을 그것에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서호근은 성강희가 이전에 만났던 무늬만 의원이었던 그 밀정과는 달라 보였다. 그는 환자를 대함에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움직여 그를 살리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수보가 자신들을 발견하고 의원을 부르러 갔을 때도 그는 오늘처럼 뛰어와 자신들을 살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자 강희는 그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이런 이를 최사립의 밀정이 아닌지 계속 의심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렇다고 곧장 그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진 않겠지만 그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 건 사실이었다. 가볍고 미덥지 못한 사람에서 진중하고 신망 있는 사람으로.
“아, 역시 저는 선견지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은 낮잠을 마다하고 이렇게 왔지요. 물론 촌장이 술동이를 헌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아차, 술동이! 그거 저를 준다고 했는데……. 이런, 해가 다 져 버렸습니다! 아이고, 아까워라.”
환자가 조금 평안해진 것 같자 호근은 평소의 가벼운 제 모습을 금방 되찾았다.
허나 곧바로 가벼워진 호근을 보면서도 강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에 대해 섣불리 평가하던 마음을 반성하고 있었다. 제가 가진 오만한 잣대로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고 얕보았던 것이다. 경계나 의심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를 함부로 평가한 것은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아무튼 지금 돌아가서 술을 얻어먹기도 글렀고 하니, 전 오늘 여기서 자야겠습니다. 환자 옆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오늘 제가 부인의 잠자리를 빼앗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잠자리라뇨! 저야 이 집 안 어디서든 잘 곳이 없겠습니까. 의원님이 제 남편을 위해 머물러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호근이 하는 말에 누엔은 반색을 하며 고마워했다.
서호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자 강희는 그가 하는 저 술 이야기도 일종의 배려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강희는 누엔 부인이 남편의 자는 얼굴을 보며 걱정되고 안타까운 표정을 하는 걸 봤다. 그 모습이 자신이 그랬던 것과 겹쳐 보였다.
그녀도 얼마나 놀라고 죽을 만치 무서웠을까. 그리고 또 지금 얼마나 초조하고 걱정이 될까.
오늘은 힘든 하루였다. 모두들 지치고 배가 고플 것이다.
강희는 서둘러 부엌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촌 마을이라 해물이라도 항시 풍족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는 우선 말간 조개 국물에 약간의 쌀을 넣고, 밀가루 반죽을 떼어 여럿이서 먹기 좋은 수제비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조개 몇 개와 팔뚝만 한 생선 대여섯 마리를 굽고, 수제비를 함께 차려 내니 꽤나 푸짐한 한 상이 되었다.
“우왓, 부인, 정말 맛있습니다! 맛있어요!”
호근이 또 촐싹대며 입안에 음식을 쓸어 넣었다. 그의 먹는 모습만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까지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그는 그 많은 음식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고도 아쉬운 눈빛을 했다. 그러면서 연신 맛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채운도 조용히 제 몫을 비우고 강희에게 잘 먹었다고 한마디 해 주었다. 그녀는 그의 한 마디에 마음이 부푸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곡식이 담긴 독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부부만 단출하게 살던 집에 불청객이 들면서 강희가 매일 이것저것 만들며, 식량이 빠르게 줄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일반 백성들이 가장 어려운 생활을 할 때인 춘궁기였다.
누엔과 수보 부부는 강희가 준 머리꽂이를 처분한 것 같지도 않았고, 사실 그럴 새도 없었다.
강희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앞으로 그녀가 가진 패물을 몇 개 판다 해도 이 낯설고 외진 곳에서 그런 귀한 것을 처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들은 어차피 도움이 필요한 처지였다.
그리고 서호근은 강희가 가진 패물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었다. 그녀는 채운만 허락한다면 서 의원에게 패물의 처분을 부탁해 볼 마음을 먹었다.
* * *
채운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 수보를 구하기 위해 무리하게 움직인 터라 덜 아문 뼈가 다시 통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거기다 낮부터 사납게 몰아친 기억의 폭풍에 완전히 잠이 깨고 말았다.
옆을 돌아보자 그녀는 이불도 펴지 않은 채 방에 든 기척도 없었다.
잠시 뒤 방문 앞으로 가자 밖에서 조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누엔과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문을 열자 그의 생각처럼 눈물짓고 있는 누엔을 위로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가 오늘 일로 잘못되었더라면 전 더 이상 살지 못했을 거예요.]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걱정이 되시는 마음은 알아요. 저도 그랬는걸요. 남편분은 반드시 이겨 내실 거예요. 그러니 이제부터 남편분과 의원님을 믿어 보세요.]
[하지만 저 사람은 저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예요. 모두 저 때문이에요.]
[……무슨 사연이 있으신 건가요, 부인?]
강희의 나직한 어조에 누엔은 가만히 생각을 고르다 이윽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에겐 아이가 없어요. 그건 저 때문이지요. 전 열여덟 살에 시집을 갔다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스물한 살에 소박을 맞고, 친정으로 쫓겨난 처지였어요. 그대로 있었다면 전 아마도 어디 첩실 자리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자결을 선택해야 했을지도 몰라요. 그런 저를 가엽게 여겨 주고 구해 준 이가 바로 남편이었어요. 하지만 그조차도 저의 아버님은 용납해 주지 않으셨어요. 저는 이름뿐이라 하나 귀족의 여식이었고, 그는 우리 집안 상단의 호위 무사였으니까요.]
누엔의 숨겨진 신분에 강희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한 부부였기에 좋은 집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던 이유가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두 분의 신분이 달랐던 것이군요.]
[신분? 그것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저는 시집을 가서도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고,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사는 게 지옥이었습니다. 첫 번째 남편이 다른 여인을 들이고 쫓겨날 때는 살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때 일을 떠올리며 말하는 누엔의 목소리엔 아직도 지우지 못한 고통이 서려 있었다.
[또 친정에 돌아온 저는 집안의 수치가 되었어요. 그런 삶에 신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용단에 저는 외가에 가는 척을 하고, 그대로 그와 함께 도망을 쳤어요. 당시 마차 안에 들었던 것이 재산의 전부였지요. 비록 가진 게 없이 가난했지만 부지런히 일한 덕에 주리지 않고 먹을 정도로는 살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답니다. 이대로 그와 함께 늙어 죽을 수만 있다면 저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저리되었으니……, 흑!]
집 안에 있던 어촌 천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책, 그리고 기품 있는 행동거지에는 그런 사연이 얽힌 것이었다.
역시 짐작처럼 단순히 순박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남달랐던 누엔 부인의 말씨는 천민들에게서 보기 힘든 교양과 품격이 있었다. 하지만 신분도 부귀도 다 버리고 서로만 의지하며 살던 부부에게 이런 일이 닥쳤으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을 터였다.
[괜찮아지실 겁니다. 남편분은 반드시 쾌차하실 거예요. 두 분이 처음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이렇게 변하지 않을 연모의 정이 가득한 부인을 두고 어찌 가시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정말 그렇겠지요?]
누엔이 강희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 희망적인 어조는 강희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어찌 그녀의 심정을 모르겠는가. 강희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확신 어린 어조로 답해 주었다.
[네, 나으실 겁니다. 저도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돕겠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누엔 부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고맙다니요. 저희가 받은 은혜만 해도 아직 반절도 갚지 못한걸요.]
[그런 말씀 마셔요. 그래도 부인의 남편께서는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어 가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모두 누엔 부인 덕분입니다.]
[처음에야 조금 도움을 드렸지만 모두 부인의 지극한 정성 덕분이 아닙니까? 저야 그렇다 하지만 부인이야말로 남편분에 대한 연모의 정이 지극하신 것 같습니다. 남편분을 정말 많이 사랑하시지요?]
그녀의 말에 강희는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하느냐고?’
왜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의 몸짓, 손짓, 목소리, 털끝 어디 하나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차올랐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쁘고, 가까이 있기만 해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자신의 것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강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부인은 무엇이 그리 괴로우신가요?]
누엔은 자신도 그랬지만 강희에게도 깊은 사연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며칠간 남편을 지극히 보살피는 강희에게서 그에 관한 애정뿐 아니라 종종 서글픈 눈빛으로 애타 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도 그 오래도록 묵은 비밀을 강희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번엔 강희가 생각을 고르며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서방님께 죄인입니다.]
[부인께서요?]
[저는 감히 서방님을 연모할 자격도 없습니다.]
[부인…….]
[전…….]
강희는 자신의 터질 듯한 속마음이 목까지 차오른 것같이 느껴졌다. 평생을 지고 가야 할 죄였지만 오늘 이 기회를 빌려 한 번은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제가 어린 시절 알량한 심술과 질투를 부렸습니다. 그 일로 전…… 서방님의 가족을 해쳤습니다. 그때는 그럴 줄 몰랐다는 말도 소용이 없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비극이 벌어졌기에, 그에 대해선 어떠한 말도 변명일 뿐입니다.]
[……!]
누엔은 자신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비극일 수 있는 사연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강희는 아직 먼 곳을 바라보며 과거를 다시 회상하고 있었다.
[그때 전 아홉이나 열 살쯤이었을 겁니다. 아마 여느 날처럼 몸종을 데리고 시전에 놀러 갔을 때일 겁니다. 그때 다정한 오누이가 제 앞에서 가고 있었지요. 남매는 열대여섯 된 소년과 저랑 비슷하거나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소녀였어요. 저는 여동생이 넘어지는 걸 오라버니가 잡아 주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다정함에, 그리고 소녀의 울상에도 네가 제일 예쁘다며 오라비가 칭찬하는 모습에 질투가 생겼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소녀가 천한 평민임에도 정말 저보다 더 예뻐 보이는 것 또한 시기하였습니다…….]
누엔은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계속 강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마 그때 전 몸종에게 이렇게 묻고 말했던 것 같아요.]
“쟤가 더 예뻐?”
“그럴 리가요, 아씨. 세상에서 아씨처럼 예쁜 소녀가 어디 있답니까?”
“흥, 그런데 제깟 게 더 예쁜 척을 해? 저것의 얼굴을 좍좍 그어 줬으면 좋겠어. 확 짓눌러 주면 다시는 저리 까불지 못할 거야!”
[참으로 잔인하고 큰일 날 소리였지만, 전 제 말에 담긴 위험도 잘못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겐 그런 저의 말을 항상 실천하는 몸종이 있었지요. 그 몸종은 제가 하고자 하는 심술이나 패악을 항상 대신 저질러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전 그 말 또한 몸종이 새겨듣고 있다는 걸 별스럽게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그녀가 그 소녀에게 했던 그 모질고 못된 말은 가실만 새겨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 말을 할 때 미처 옆을 다 지나치지 않은 채운도 그것을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후의 일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 날 저는 시전에 나갔다가 그 여아를 또 보았습니다. 그 소녀는 그 또래의 여아가 다 그렇듯 잘 넘어지고 잘 부딪히고 그랬을 겁니다. 전 일부러 그 여아에게 가까이 갔다가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몰래 가까이 가서 발을 걸었던 것이지요.]
거기까진 별일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소녀는 제 쪽으로 넘어졌습니다. 제 잘못으로 소녀가 넘어졌는데도 그녀는 제게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섭게 화를 내었습니다. 저는 항상 남들을 괴롭혀 왔지만 제 손을 더럽히지도 않았어요. 제 몸종이 다 해 주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날엔 직접 소녀에게 손찌검과 폭언을 하고도 모자라 그 뒤를 몸종에게 맡기고 돌아섰습니다.]
뒤이어 벌어진 일을 말하기 전……. 강희는 메이는 목을 삼키며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녀는 그 일에 대해 말을 할수록 새삼 자신의 죄가 점점 더 크게 짓눌러 오는 것만 같았다. 이런 고백이 처음이기에 더욱 여실히 느껴지는 것이다.
[제가 시전을 다 벗어나자 뒤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 것 같았습니다. 그 소리에 돌아보는 순간, 어제 봤던 소녀의 오라비가 다른 방향에서 뛰어오는 게 보였지요. 하지만 전 그 이상 무슨 일이 있는지 볼 생각도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어요. 나중에 제 몸종은 그저 소녀를 제대로 혼냈다고만 했고, 전 그런가 보다 하였지요. 나중에, 정말 나중에야 알았지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그다음 해야 할 말에 강희는 한참을 더 망설였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녀의 목을 죄는 원죄인 것이다.
[그때 그 소녀는 제 몸종에게 떠밀려 벌겋게 달궈진 화로 위로 쓰러졌습니다. 제가 독살스레 말한 것처럼 얼굴이 망쳐진 것이지요. 그 사건이 어떻게 유야무야된 건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아마 제 몸종은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 겁니다. 소녀는 당시 살아나긴 했지만 산목숨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제 얼굴이 그렇게 된 데 비관하여 죽었고, 또 그녀의 어머니 또한 딸을 잃은 충격에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딸과 부인을 잃은 아버지도 다음 해 따라가셨다지요. 가족 중에 남은 사람은 그 소년과 채 열 살이 되지 않았던 그의 어린 동생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원흉이― 바로 저입니다.]
메인 목에 여러 번 목소리가 끊기면서도 강희는 끝까지 고백을 했다.
뭐라 말하든 그것은 채운과 그 가족에게 차마 감당키 힘든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끝에 부부로 맺어진 인연이라니.
누엔 부인은 두 사람 사이에 얽힌 비극에 할 말을 잃고 대신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통탄과 회한의 한숨을 쉬면서도 차마 울지도 못하고 있는 강희 대신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의 아버지가 그를 탐내셨습니다. 그래서 서방님과 제가 혼인했던 것입니다. 그런 악연인 저와 혼인까지 해야 하다니, 서방님께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부…… 인.]
[목숨이 스러진 일만 아니면 매달려 용서라도 빌겠지요. 그러나 이런 죄인을 어찌! 이런 제가 감히 서방님을 연모한다 말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런 악연조차도 모르고 제멋대로 날뛰던 꿈속의 그녀는 그와 혼인 후 뒤늦게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네가 내 누이와 부모님을 가시게 만든 책임이 있다’라고 따지는 만운에게 가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끝까지 발뺌만 했다. 그 때문에 채운의 마지막 인내심까지 자극하여 기어이 집에서 쫓겨난 것이다.
[서방님은 그날 벌어진 일과 이후에 벌어진 일을 제가 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십니다. 혼사가 결정되기 전까지 저도 여태 모르고 있기도 했고요. 하지만 서방님께 어찌 원수나 마찬가지인 저를 평생 지어미라 부르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제가 서방님께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떠나는 것…….’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누엔은 강희가 연모의 정과 함께 보인 그 서글픈 감정이 바로 이 때문이란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울지도 않는 강희를 대신해 그녀가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강희는 누엔의 눈물에도 망연히 앉아 있기만 했다. 항상 그녀를 억죄는 속을 털어 냈지만 그 자리엔 후련함도, 죄를 사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다. 단지 자신의 죄를 재차 확인한 먹먹한 기분뿐.
그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무장님?]
누엔이 그를 먼저 보고 불렀다.
강희도 뒤돌아보자 거기엔 채운이 문설주를 붙잡고 서 있었다.
순간 강희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는 않았는지 너무 놀라 숨이 턱 막혔다가 곧 안도했다. 그는 송국말을 모른다고 했으니 지금까지 누엔 부인과 한 대화를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순간 생각을 정리하며 안도한 강희는 그가 자다가 깨어 나온 것에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대감, 무슨 일이십니까? 혹, 어디 편찮으십니까?”
“괜찮소. 잠시 목이 말라 잠이 깬 것뿐이오.”
“그냥 저를 부르시지 않고서요. 잠시만요!”
강희는 허둥지둥 서둘러 그릇을 찾아 물을 떠다 그에게 갖다 주었고, 그는 물을 달게 받아 마셨다. 그는 물을 다 마시고서도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선 채 그녀를 보았다.
주위가 어두워서 그의 눈빛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강희는 몸이 따끔거릴 정도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보다 그가 문설주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오늘 무리하셔서 어디 편찮으신 것은 아닙니까?”
채운은 걱정스럽게 묻는 그녀를 계속 바라보다 조금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오……. 괜찮소.”
“대감, 그럼 어서 주무셔요. 많이 주무시고, 많이 쉬셔야 빨리 낫는다고 했습니다.”
“알겠소. 당신도 잠을 자야 하지 않소?”
“네, 누엔 부인도 저와 함께 주무시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시오.”
[누엔 부인, 잠이 오지 않으실 걸 알지만, 그래도 부인이 쉬셔야 환자분의 간호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잠을 청해 보세요.]
[네…….]
순식간에 다시 남편에 대한 걱정이 밀려든 누엔은 강희에 대한 생각을 뒤로 밀쳐놨다. 정말이지 그녀의 몸이라도 성해야 남편을 간호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든 좁은 방에선 각자의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이 조용히 얕은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다 먼저 여인들의 숨소리가 낮아지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잠들지 못하던 채운은 낮부터 계속 헤매던 안개 속을 다시 헤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잠이 든 강희를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
* * *
찢어진 창호지 사이로 달빛이 부서져 들어오는 방 안엔 좀 전까지 환자 옆에서 우렁차게 울리던 코골이 소리가 뚝 멈춰 있었다.
누엔과 수보의 집은 흙벽에 겨우 칸이나 가려 놓은 집이었다.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들려온 사연들은 호근의 귓가에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채운과 여인들이 다 방으로 들어간 걸 듣고 있던 그는 버릇 같은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호오, 지지난달 만났던 유라성 전前 태수의 따님이 이런 곳에 숨어 살고 계시다니, 뉘가 찾을 수 있었을까? 송국이 아무리 넓다 하나 또 좁기도 하구만. 그나저나 저쪽도 그래, 대감이라……. 그냥 일반 무장이 아니시로군. 아무튼 저 부부도 만만치 않은 사연을 가진 듯한데. 이거이거 정말 재미있겠는걸?”
짧게 혼잣말을 한 호근은 또 피식 웃었다. 그러다 금세 다시 잠이 든 건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옆에서 잠든 수보가 통증 때문인지 낯선 소리 때문인지 움찔움찔했지만 호근의 코골이 소리는 그에 아랑곳없이 새벽까지 우렁차게 이어졌다.
* * *
한편 려국에서는 만운이 인근 바다와 주변 섬, 먼바다까지 할 것 없이 몇 날 며칠 동안 두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였다.
그의 정황을 포착한 최사립은 윤채운의 암살이 실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운에게 계속 사람을 붙여 그가 찾는 것이 시체가 아닌 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망할!”
최사립은 하인이 말을 전하고 물러나자 탁자를 치며 분노했다. 그러자 하인과 마주치며 들어온 최필선이 분노하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버님?”
“윤채운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돌아오지 못했지 않습니까? 암살조가 성공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냐. 생존자들도 있잖은가. 그들에게서도 윤채운이 당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 왕세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윤채운이라도 반드시 죽이라 명했건만! 놈의 눈치가 너무 빨랐던 것부터가 문제였어. 배가 너무 빨리 멈춘 것이 탈이었던 거야. 그래서 왕세자가 탈출할 시간을 너무 앞당겨 벌어 줬어!”
“그래도 그날 분 폭풍을 생각하면……. 놈이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 해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여태까지 발견하지 못한 것도 그렇고요.”
“아냐. 다른 배가 하나 더 있었어!”
“네? 설마요!”
다른 배가 있었다면 왕세자와 귀빈들이 탄 배를 그런 식으로 무리해서 위험하게 운행했을 리가 없었다. 나중에 폭풍에 휩쓸리기 직전 돌아온 생존자들이 타고 온 배도 암살조의 것이었다.
“윤만운이, 놈이 제 형을 그토록 찾아 헤매는 것이 수상하여 알아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놈은 시신이나 생존자를 찾는 게 아니라 어딘가 떠내려간 배가 있는지 그걸 찾고 있더군. 그러니 배가 한 척이 더 있었던 게야. 성 대감의 여식도 함께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어.”
“네? 그 망종이라는 계집 말입니까?”
“망종인지는 잘 모르겠고…….”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게 있어.”
최사립은 시중에 떠도는 묘한 소문을 들은 게 있었다. 조금 이상한 소문이라 그것을 제대로 파 보게 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성도종이 사서 시중에 풀었다던 비누에 관한 것이었다.
그걸 처음 만든 이가 성도종의 여식이라는 것이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문이라 무시하려 했다. 성도종과 왕세자 쪽과의 결합을 공고히 하려는 속셈으로 그런 소문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의를 파악해 두고자 알아보던 차에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돈이 되며 막중한 사업이 왕세자의 손에 들어가서 국영사업이라 묶인 것도 기가 막힐 일인데, 그 원 제작자가 그 욕심 많고 돈 밝히는 성도종의 여식이라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정말 그렇다면 그것이 왜 성도종의 사업이 아니라 왕세자에게 넘어간 것일까.
그런 의문을 가진 차에 요즘 윤만운의 행세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여식에 대한 것을 몇 가지 더 알 수 있었다.
윤만운은 왕세자와 함께 배를 탔다 귀환한 여인들이 퍼뜨린 소문에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런 소문을 퍼뜨린 병사 몇을 아작 낸 것을 필두로 제 형수를 두둔하며, 제 형수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는 자들은 앞으로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 천명했다고 했다.
성도종의 승승장구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 여식에 관한 소문 또한 좋지가 않았다. 윤채운과의 혼인이란 결합도 그의 여식의 됨됨이에 잘될 거라 여기지 않았건만, 그런 일이 있다면 지켜볼 일이었다.
성도종과 애초에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았으련만.
그와 틀어진 계기도 혼사 문제였다. 십여 년 전 성도종이 그의 두 딸 중 하나와 최사립의 넷째 아들을 혼인시키기는 것이 어떤가 하고 매파를 넣었을 때 매몰차게 거절한 일이 있었다.
그때 거절하더라도 별것 아닌 장사치 나부랭이란 소리만 하지 않았으면 그의 남은 여식이나마 자신의 손자와 엮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속 좁은 성도종은 이후 그와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척을 진 사이가 되고 말았다. 당시의 거절이 이렇게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아 최사립은 내심 입맛이 썼다.
요즘 국정에서 해적선이 도성 인근까지 온 것에 자신들을 의심하여 매번 반론을 펼치는 참지정사 김승언도 거슬렸다. 그는 이번 사건 이후로 중립의 입장에서 완전히 왕세자에게 돌아선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은 김승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성도종의 여식이 그의 부인을 위해 제가 몸을 피할 기회를 놓치고 배에 남았다는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김승언의 완전한 입장 변화가 아무래도 성강희라는 아해와 관계가 있다는 심증이 들었다.
생각지도 않은 복병을 만난 것 같았다. 전엔 그런 계집이야 있든 없든 상관없었지만, 아니, 살아서 계속 불화를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달리하게 만든 것이다.
만약 그 계집이 한 척 더 있었다는 배에 윤채운과 함께 타고 있었다면 아마 제 서방과 생사도 같이할 것이다. 살아 있다면 윤채운은 물론 그의 부인인 성도종의 여식도 돌아오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선아.”
“네, 아버님.”
“윤만운의 뒤를 따라 은밀히 윤채운을 찾으시게. 폭풍에 떠밀려 간 것이니 어디로 간 것인지는 그 방향을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나라 인근 해역을 샅샅이 뒤지는 것은 물론 멀리 왜나 송국까지 찾아야 한다.”
“헌데 아버님, 왜까지 가게 된 거라면 아무리 배가 있다 해도 그 거리를 감안하여 볼 때 살아 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라. 그쪽에서 우리나라로 귀환한다고 생각하고, 그 길목에 사람을 심어 두어라. 나라 내에 있는 거라면 윤만운보다 반드시 먼저 찾아야 한다. 만약 송국이라면 우리가 유리하긴 한데…….”
“그렇지요. 그럼 곧장 사람을 풀겠습니다.”
“송국에 있는 모든 밀정에게 두 사람의 용모파기를 알리고, 육로로 귀환할 경계 지역에 사람을 심어라. 윤채운이 송국에 있다면 우리가 먼저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려국의 땅을 다시 밟기 전에 반드시 없애야 한다!”
“네, 아버님!”
“잠깐.”
명을 받들기 위해 돌아서려는 아들을 최사립이 다시 불렀다. 아들이 간과하고 있는 인물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었다.
“윤채운뿐만 아니라 성도종의 여식도 함께 처단해야 한다. 둘 다 돌아와선 안 돼!”
“……?”
필선은 생각지도 않은 명에 의아했지만 그것도 잠시, 곧 부복하며 읍했다.
굳이 까닭을 말해 주지 않으시는데 그가 알아야 할 일은 아니었다. 첫째인 형님을 제치고 자신이 아버지의 후계로 지목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명에 의문은 접었고, 반발은 생각지도 않았다.
지금 현재 이 나라의 권세는 그의 아버지 손에 있었다. 아버지의 명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 그는 그저 명에 따르고, 새 주인을 세우는 데 충성을 다한다면 된다. 그러면 이후의 영화는 모두 자신에게로 오게 될 것이다.
그때 이 나라를 이끄는 이는 바로 최필선, 자신이 될 것이다.
필선은 히죽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그 웃음은 그의 아비인 최사립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 * *
벌써 스무 날을 넘게 바다를 뒤지며 선착장 근처에서 유숙하고 있는 만운에게 재영이 찾아왔다.
“윤 낭장님, 그분들은 살아 계실 겁니다.”
“네, 당연히 그렇지요!”
“두 분의 무사 귀환을 위해서라도 윤 낭장님이 더 건강하고 무탈하게 계셔야 합니다.”
“네, 압니다,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최사립 대감 측이 윤 낭장님의 추적을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뭘 의심해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두 사람을 찾느라 핏발이 선 만운의 눈은 마주하기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재영은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낭장님이 대감을 찾는 모양새가 사람이나 시…… 신이 아닌 배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시신이란 말에 미간을 찌푸리려던 만운은 재영이 하는 말의 심각성을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뭐요!”
“이제 저들이 먼저 추적을 하려 들 것입니다. 저들은 결코 대감의 귀환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육시랄 놈들!”
“저들이 먼저 찾게 되면 위험합니다.”
“내가 먼저 찾으면 되오. 형은 분명 어딘가 살아 있소. 그러니 내가 반드시 먼저 찾을 것이오!”
“그래야지요. 분명 어딘가에서 무사히 잘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근처는 샅샅이 뒤져도 아직도 찾을 수가 없으니, 분명 먼 곳으로 가신 듯합니다.”
“혹,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습니까?”
벌써 재영에게 여러 번 물어본 것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만운은 다시 애타게 물었다. 허나 아무리 재녀라도 폭풍의 방향까지 짐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제 먼 곳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나 송국 쪽으로요.”
“왜? 만약 그곳으로 향했다면 거기까지 무사히 살아서 갈 수나 있었겠소?”
만운의 절망감 어린 질문에 재영은 고개를 숙였다. 그쪽이라면 생존 가능성이 거의 무無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왜 쪽으로 향한 것이 아니기만을 바라야 했다.
“네, 왜은 아무래도 너무 멀지요. 그러니 나라 내가 아니라면 송국 쪽을 생각해 보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아직 우리나라 해변을 다 뒤지지도 못했소이다.”
“윤 낭장님은 지금도 너무 무리하고 계십니다.”
“무리라니, 형과 형수의 일이에요. 헌데 최사립이 추적할 거라는 거지요? 송국, 그곳이라면 찾기가 힘들 텐데.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네, 최사립 대감도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송국이라면 그들 측이 사람을 찾기에 더욱 유리할 것입니다.”
“내 반드시 먼저 찾을 것이오, 반드시!”
재영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하고 있는 만운을 차마 더 말리지 못하고 쓸쓸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말려도 지금의 그에게 자신의 말은 소용없었다. 정말 그가 쓰러지기 전에 왕세자 저하의 도움이라도 받아 강제로 쉬게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재영도 윤채운 장군의 생사가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꼭 살아 계셔서 한 번 더 그 얼굴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그가 송국에 있다면…….
그렇기만을 빌 뿐이다. 그곳이 현재 그의 생존 가능성을 가장 높게 점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도 함께 있겠지?’
재영은 이런 순간에도 그가 부인과 함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해지는 저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가졌던 수많은 학문의 지혜와 고고한 자존심도 한 사내를 향한 연모의 정에는 모두 별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에게 거절당하고서도 다시 쳐드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무사한가 아닌가가 더 중요했다. 어서 그를 찾을 수 있게 최대한 생각을 해야 했다. 최사립 대감이 이쪽 상황을 읽고 있듯 왕세자도 그들의 정황을 조금을 읽고 있었다.
허니 그것을 이용해야 했다.
재영의 머릿속은 이미 최사립의 추적을 역이용할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만운과 일별한 재영은 이제 거의 자신의 숙소와도 같이 변해 버린 채운의 집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