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뉘시오?
“저는…….”
입을 벙긋거리던 강희는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생각들이 정리가 되지 않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오. 사실 난 지금 떠오르는 생각들이 너무 희미하여 아무것도 뚜렷한 게 없소.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소.”
채운의 말에 강희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가 깨어나지 않을 때도 걱정이었지만 이는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은인들을 만나 당장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이곳은 지금 적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의원이 그녀의 출신을 맞춘 것에도 강희가 그토록 경계했던 것이다.
우선은 그가 위험을 인지하고 주위를 경계하는 것이 먼저였다. 강희는 저를 바라보는 채운에게 그의 이름부터 알려 주었다.
“당신은 윤씨 성에 채 자, 운 자 이름을 가지신 분입니다. 려국의 중서문하평장사이며, 용호군을 책임진 상장군의 직위도 갖고 계십니다. 허나 이곳은 송국입니다. 다른 이들에겐 결코 당신이 누구인지 밝혀서는 안 됩니다.”
“평장사? 상장군? 윤…… 채운?”
윤채운.
그는 낯선 벼슬 이름은 뒤로하고 윤채운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렇게 몇 번을 계속 중얼거리자 누군가 자신을 그리 부르는 장면이 스치듯 떠오르고 있었다.
희미하고 답답한 기억이었지만 다행히도 채운은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윤채운……. 그렇소. 내 이름은 윤채운이오.”
갸웃하면서도 서서히 기억을 되살리는 그의 모습에 강희는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다행입니다! 오, 다행이어요. 하지만 무사히 귀환하실 때까지 절대 당신이 누군지 밝히지 마셔요. 당신은 송국에서도 노리는 우리 려국의 중요 인물입니다.”
“내가?”
강희는 그에게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녀는 최사립이 동원한 화약이 어디 출처인지 잊지 않고 있었다. 나라에서 엄격히 통제하는 화약을 그 정도로 수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송국에서 은밀히 도와준 것이라 보아야 했다.
송국은 자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독립적으로 활발히 상업 활동을 하는 려국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 때문에 송국의 황실에서는 해적 토벌을 하고 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하려는 수 왕세자가 려국의 왕이 되는 것을 극히 꺼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혹시라도 왕세자의 심복인 윤채운이 부상당한 채로 자국에 피신한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결코 그냥 두지 않으려 할 것이다.
“네, 몸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절대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 런 거요?”
채운의 어눌한 대답에 강희는 더욱 애가 탔다. 그의 찡그린 얼굴은 희미한 기억 때문인지 두통 때문인지 풀어질 줄을 몰랐다.
“네, 무사히 돌아갈 때까지는 절대로요. 우선은 몸을 회복하는 게 먼저입니다. 서……, 대감께서는 지금 머리의 부상이 가장 심각하고, 어깨와 갈비뼈에도 금이 가 있다고 해요. 그리고 왼쪽 팔에 자상이 있어서 그곳에 화농이 져서 열이 오르는 것이라고요.”
강희는 그에게 서방님이라 부르려던 제 말을 급히 바꾸었다.
당장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보다는 차차 생각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다가 금방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던가.
의원에게 물어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이는 분명 일시적인 증상일 것이다. 그러니 그의 몸이 회복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터였다.
지금 채운이 저토록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면 그녀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그의 기억이 혼미한 것이 일시적이라 해도 채운은 의원이 두 달을 더 요양해야 한다 할 만큼 부상이 심각한 상태였다. 이제 그의 안위는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기간…….
두 달이라니.
그 기가 막힌 우연에 강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는 그와 약속한 기간이 지난 후였다.
‘아아!’
그의 앞이 아니라면 강희는 그 절묘한 시간의 맞춤에 펑펑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녕 하늘이 허락한 시간이 그때까지뿐이라고 알려 주기라도 하려는 듯 의원이 제시한 기간은 바로 그 시기에 맞물려 있었다.
평생을 죄책감 속에 짓눌려 산다 해도 그의 곁에서 살고 싶었다. 그를 은애하며 같은 집에서 살고, 매일 그를 기다리며, 그와 함께 평생을 늙어 가고 싶었다.
재영의 일만 없었다면 뻔뻔스레 그에게 매달려 보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이 제 욕심이라는 걸 재영이 알려 준 것만 같았다. 그와의 첫날밤에 그녀가 꿈에 나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생 가슴을 죌 죄책감에 결코 오지 않을 그의 사랑을 재영과 나누며 살 수가 있을까?
그날 정자 위에서 서궁의 시녀들이 말하던 그녀와의 일을 들은 이후 몇 번을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성강희, 넌 그를 다른 여인과 나눌 수 있어?’
그때마다 강희는 고개를 저어야 했다. 그를 붙잡고 싶다는 이기심과 재영을 질시하는 자존심이 치열하게 마음속에서 다투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와의 미래는 한 번도 그릴 수가 없었다. 도리어 제 꿈속의 비참했던 인연만 생각나 덜컥 겁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보다 그의 무사 귀환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짐짓 우호국인 양 하면서도 뒤로는 십여 년간 나라의 힘을 꺾어 왔던 송국에서 탈출하는 데 그녀의 모든 생각을 모아야 했다.
일단은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것으로 희망이 보였다. 두통 또한 조금 가셨는지 채운의 얼굴에는 이지가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채운은 주변을 살펴보더니 그녀에게 묻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오?”
“여기는 송국의 동남 지방 어촌 마을인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 열일곱 명이 다라고 하더군요. 이 집 주인 부부가 폭풍에 휩쓸려 온 우리를 구해 주었습니다.”
‘폭풍?’
그냥 다친 것이 아니라 폭풍에 휘말렸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두 사람이.
채운은 전말이 궁금했지만 우선 급한 거부터 먼저 물었다.
“그럼 여기가 그들의 집이란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두 분 다 일하러 나가시고 안 계십니다. 그리고 이곳은 송국 중 가양성에 속한 작은 마을이라고 합니다. 워낙 외진 곳이라 태수가 사는 마을까지 꼬박 이틀은 더 걸린다고 하더이다.”
공교롭게도 가양성은 이전 성강희가 도피 행각을 벌였던 유라성의 바로 이웃에 있는 곳이었다. 이웃이라 해도 이곳은 유라성과도 대충 열흘 정도의 거리라 짐작되니, 려국까지와의 거리가 계산되는 것이다.
“가양성이라…….”
“네, 이곳은 려국까지 육로로 대략 한 달쯤 걸리는 곳이에요. 하지만 대감의 상세가 위중하여 몸을 낫게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채운 또한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아까 의원 얘기를 했지 않소. 이런 외진 마을에 의원이 있었소?”
“네, 마침 떠도는 의원이 이웃 마을에 있었다고 합니다. 멀지 않은 곳이라 의원은 그곳에 머물며 매일 한 번씩 보고 가는데, 보통 점심때가 되기 전에 옵니다. 잠시 뒤에 올 거예요. 하지만 의원이 오더라도 대감의 신분에 대해서 말씀해서는 아니 되십니다. 의원은 자신이 려국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결코 다 믿지 마소서.”
“알겠소.”
채운은 잠시간의 대화에도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짧은 시간 깨어나 일어나 있던 것도 그에게는 아직 무리였던 것이다.
강희는 그의 피곤한 기색을 알아채고 그가 자리에 눕는 것을 도왔다.
“누우셔요. 한숨 푹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더욱 좋아지실 거예요.”
“고맙소.”
채운은 그녀의 도움을 받으며 몸을 누었다. 머릿속에서는 기억의 부재에 너무나 큰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감자 곧 수마가 달려들며 그를 깊은 잠속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채운은 그녀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낯선 곳, 기억에 없는 폭풍, 그리고 아무도 믿지 마라.
그래,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그럼 당신은? 당신은 믿어도 되는 거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지?’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문을 떠올린 채 채운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채운이 잠이 든 후 강희는 문밖에서 서성이며 의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에 깨어났던 채운은 고르게 숨을 쉬며 잠에 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강희는 그의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정신을 잃은 건 아닌지 몇 번이고 또 확인하느라 그녀는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부인, 남편분은 분명 잠드신 거 맞아요. 그러니 그만 식사를 하시고 부인도 좀 쉬셔요. 안 그래도 마른 몸이 더 핼쑥해지셨어요.]
며칠이 지나서야 이름을 알게 된 누엔 부인이 채운의 곁에서 꼼짝을 않고 있는 강희에게 계속 식사를 권했다. 그녀의 성화에 강희는 겨우 식사를 하고 이렇게 나와 의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강희는 이들 부부에게 계속 신세만 지는 것 같아 미안하기 그지없었지만 채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서방님이 다 나으실 때까지는 은인들의 도움이 꼭 필요해.’
그녀는 깨어난 지 이틀째인 엊그제야 겨우 누엔 부부에게 작은 패물 조금으로 사례를 할 수가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강희가 폭풍에 휩싸일 당시 지니고 있던 패물이 거의 다 무사하다는 것이었다. 한 쌍의 귀걸이가 약값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비싼 만큼 강희가 몸에 지녔던 패물들은 모두 값진 것이었다.
그녀가 이 집에서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엔의 옷으로 갈아입은데다 머리도 푼 상태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패물이 안 보이는 줄도 사실 몰랐다. 당장 찾으려 한 것도 아니었는데 강희가 제 빈손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누엔이 급히 방을 나가더니 조그만 보자기를 하나 가져왔다.
[부인의 패물은 모두 제가 다 빼 두었습니다. 옷도 갈아입혀 드리고 빨아 놓긴 했지만 바닷물에 젖어 제 모양이 나질 않았습니다…….]
누엔은 그 아름다운 옷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까웠던지 계속 아쉬움을 표하고 있었다. 그래도 옷이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니라 일부분은 다시 재활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몇 번을 더 안타까워했다.
누엔 부인이 건네준 작은 보자기엔 그녀의 말대로 귀걸이를 뺀 강희의 다른 패물들이 모두 있었다.
먼 외국에 몸만 따로 떨어져서 그 패물이나마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한 끼 음식을 살 재물도 없어 고생했던 꿈속의 일이 생각나서 강희는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부부는 이것 모두를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은인들이었다.
허나 귀환의 여정을 생각해 그중 비녀 두 개만 뺀 채 통째로 다시 누엔에게 건네주었다.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일말의 보답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은인들의 것입니다.]
누엔은 강희가 내미는 것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 수보는 강희가 하던 것처럼 보석 중 머리꽂이 두 개만 뺀 채 다시 강희에게 돌려주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니 보답을 받을 일도 아니나 부인의 성의이니 이것만 받겠습니다. 없던 이에게 갑자기 많은 재화가 생기면 도리어 화가 될 겁니다. 저흰 이걸로도 당장 살림이 펼 겁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정중한 태도에 강희도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
수보가 말하는 태는 보통 촌부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더 이상 권하면 무례가 될 거라 여겨질 정도였다. 강희는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더 감사를 표하고 미소를 나누었다.
부부는 가난한 어민의 생활이 다 그렇듯 며칠은 고기를 잡고 며칠은 농사를 지으며 겨우 끼니를 잇는 이들이었다. 헌데 말하는 품새도 그렇고, 집 안에 보통 촌부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귀한 책들이 꽂혀 있는 걸 봐도 그렇고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들 같았다.
허나 그런 사연은 강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들 부부를 만난 것이 자신들에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 강희는 이들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시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아무튼 이들은 대단히 바쁘게 살고 있었다. 강희가 깨어나고 제대로 움직이자 누엔도 그동안 홀로 일하러 나가던 남편을 따라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저녁에야 돌아왔다.
부부는 강희와 채운을 위해 의원을 불러올 때 말고는 다른 곳으로 내왕도 잘 안 하던 이들 같았다. 찾아오는 동네 사람도 없었고, 다른 이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런 이들의 시간을 빼앗고 적지 않은 누를 끼친 것 같아 강희는 그제 저녁부터 그들의 식사를 손수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누엔이 대경하며 그녀를 말리려고 했다.
[이러면 안 되셔요! 귀한 객께 이런 걸 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귀하다니요, 청하지도 않은 객인걸요. 그리고 은인께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일이니 괘념치 마라 주세요. 이렇게라도 움직이고 싶어서 그런답니다. 제가 하는 음식이 정 맛이 없으면 그만둘게요. 하지만 정말 하고 싶습니다.]
부부는 그렇게까지 말하는 강희를 더 말리지 못했고, 이틀 동안 그녀에게 식사를 맡겼다. 그리고 어제저녁엔 강희가 솜씨를 발휘해서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하여 모두들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송국은 려국보다 밀이 흔한 곳이었다.
강희는 어제 그것을 만들면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채운을 생각하며 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오늘 그가 깨어났으니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의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희는 의원이 오는 걸 기다리면서 며칠간 자신이 했던 말을 맹렬히 되짚어 보았다.
그의 앞에서 채운을 뭐라 칭했던가? 혹, 그를 서방님이라 말한 적이 있던가? 부부란 말을 했던가?
의원의 힘이 필요하긴 했지만 채운이 온전하지 못한 상황이라 강희는 더욱 경계심이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입으로도 이곳이 려국과 한 달이나 걸리는 곳이라 한 만큼 먼 곳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만약 최사립 측에서 일부러 맘먹고 추적을 한다면 할 수도 있는 거리였다.
물론 만운 도련님도 그들을 찾으려 애쓸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알릴 방도가 없었다. 자칫 인편을 보냈다가 최사립에게 먼저 발각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처음으로 되돌아가 채운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 지금은 그저 서방님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려야 해.’
이런 낯선 타국에 와서 만난 고국 사람이 왜 반갑지 않겠냐마는, 강희는 이전 성강희 시절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에 의원을 이토록 경계하는 것이었다.
꿈속의 그녀가 유라성에서 우연히 만난 려국 출신 의원도 최사립의 밀정이었다. 나중에 그 의원이 도성으로 돌아와 거대한 약방을 내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지만 딱히 기록할 만한 일은 아니라 책에는 적지 않았었다. 헌데 여기서 려국 의원이란 사람을 만나니 그것이 퍼뜩 생각난 것이다.
‘혹시 모른다. 서방님을 치료해 준 의원도 최사립의 끄나풀일는지.’
그렇게 최사립은 송국 곳곳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 두고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희는 려국말을 하는 의원이 더욱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이 머나먼 곳에서 이런 의심이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누엔 부부는 이미 자신들의 관계를 알고 있지만 의원에게는 채운과의 관계를 위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 큰 배가 폭발한 사건에 대해 여기까지 알려지려면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그 전에 이곳을 떠날 필요도 있었다.
그의 몸이 운신할 정도만 되면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하리라.
‘그나저나 의원과 함께 있을 때 무슨 말을 얼마나 했더라?’
강희가 채운과의 관계를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드디어 저만치서 조랑말을 탄 의원의 모습이 보였다.
‘저 의원도 은인이라 해야 할진대…….’
그런데도 이런 의심이나 하고 있자니, 그 중압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허나 지금은 그녀가 채운을 구할 때였다. 말도 안 되는 의심이라 할지라도 채운이 회복하고 돌아갈 때까지 강희는 그 누구에게든 경계를 풀 마음이 없었다.
의원은 강희가 그를 발견한 지 한참이 되어서야 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마치 유람하듯 조랑말을 천천히 이끌고 있었다. 강희는 그의 유유자적한 모습에 더욱 미덥지 못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울타리 근처에 채 당도하기도 전에 조랑말에서 내린 의원이 천천히 걸어오며 강희에게 말을 걸었다.
“어찌 이리 나와 계십니까?”
“환자께서 새벽에 잠시 깨어나셨다가 다시 잠드셨습니다.”
“그래요? 잘되었군요.”
의원은 강희에게 환자의 상세에 대한 말을 듣고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눈썹을 치켜세우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애가 타는 강희와는 반대로 느릿느릿 조랑말을 묶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녀는 내심 마음속으로 조바심을 쳤지만 혼자 서두른다고 달라질 건 없는 상황이라 그저 의원을 지켜보며 조용히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의원은 잠든 채운의 머리를 짚고 눈을 뒤집어 보더니 짐짓 미소를 지으며 강희에게 말했다.
“새벽에 깨어나셨다고요?”
“네, 잠시지만 말씀도 하시고 다시 잠이 드셨습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머리가 많이 아프시다고요.”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열이 많이 내렸어요. 그래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겁니다. 아무튼 워낙 건장하시고 체력이 좋은 분이니 정신을 차린 이상 빠르게 호전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의원님.”
그 말에 강희는 걱정이 조금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비록 미덥지는 못하나 그가 약재를 지어 주고 치료를 해 준 이가 이 의원인 것은 사실이었다. 강희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음.”
그때 채운이 눈썹을 찌푸리며 눈을 뜨려 했다.
“깨어나신 겁니까!”
강희가 눈을 뜨는 채운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채운은 낯선 사람이 한 방에 있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의원이시오?”
“네, 그렇습니다.”
“고맙소.”
“별말씀을요. 타국에서 이렇게 고국의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 인연 아닙니까. 그것도 이렇게 좋은 인연으로 뵙게 되었으니 저는 좋습니다, 하하하.”
“…….”
채운은 의원에 너스레에 아무 반응 없이 일어나 앉은 몸을 추스르며 바르게 자세를 가다듬을 뿐이었다.
의원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정색을 하고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타국에서 이리 뵌 분이니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리 남의 나라에 떠도는 의원이 되긴 했지만 원래 북계도의 서경에 살던 사람으로, 서호근이라는 의원입니다.”
“나는…… 양광도 출신의 김상진이라 하오. 양주목의 군부에 있었소.”
강희는 채운이 엉뚱한 이름을 대는 것에 짐짓 놀라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김상진이라는 장수의 이름은 강희도 들어 아는 이름이었다. 채운은 잠들기 직전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귀담아들은 것 같았다.
허면 그는 기억이 다 돌아온 것일까?
강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의원은 채운의 소개를 듣고는 짐짓 반갑게 인사하며 웃었다.
“아하, 역시 군부에 계신 분이셨군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그렇소?”
“네, 그럼요. 손만 봐도 항상 검을 연마하시는 분인 걸 알 수 있는데요. 기도가 상당히 헌헌하신 것이 높은 직위를 갖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냥 일개 장수요.”
의원의 날카로운 안목에 듣고 있던 강희가 다 놀랄 정도였지만 채운은 그 상황을 잘 넘겼다.
의원은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럴 것까지는 없소.”
자신의 신상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다는 걸 무뚝뚝하게 알리는 채운에게 의원, 아니, 서호근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제 본연의 임무를 보기 시작했다.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하셨다고요? 그것은 머리의 외상과 열이 오른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니 일단 고비는 넘긴 셈입니다. 그러니 몸만 잘 보하시면 완쾌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친 곳이 머리이고, 상한 뼈들이 있으니 오래도록 요양하셔야 합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으오?”
“최소한 두 달은 요양을 하셔야 완전히 회복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기간에 채운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난…… 우리는…… 이곳에 그만큼이나 머물 수는 없소.”
“아아, 그러십니까. 제 소견이 그렇다는 겁니다. 다만 뼈가 상했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다간 통증이 오래가고 잘 낫지 않을 겁니다. 두 달이 힘드시다면 최소한 한 달은 움직이지 말고 요양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사람이 가벼워 보이다가도 이런 부분에서는 의원답게 딱 부러지게 진단을 했다. 때문에 채운도 더는 말하지 못하고 수긍했다.
“알겠소……. 고맙소.”
“하하,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을요. 그럼 또 약재를 두고 가겠습니다. 지어 드리는 약재는 뼈가 잘 붙게 도와주는 것과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약이 들었습니다.”
채운이 다시 두통이 밀려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본 서호근은 그의 이마를 짚어 열을 재고 목의 맥을 짚으며 다시 진맥을 했다.
“두통이 심하십니까?”
“견딜 만…… 하오.”
허나 채운의 표정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그에 걱정스러워진 강희도 덩달아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여기는 방향을 전혀 가늠할 수 없는 폭풍에 휩쓸러 온 곳이었다. 그리고 저이는 이 머나먼 타향에서 우연히 만난 의원이었다. 혹, 그가 최사립의 밀정이 맞다 해도 채운의 정체만 모른다면 당장은 탈이 날 것이 없었다.
그를 경계하기보다 우선은 채운의 상세를 더 자세히 살펴 낫게 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강희는 물을지 말지 잠시 망설이다 채운의 상세에 대해 질문했다.
“의원님, 지금은 환자분께서 저리 말씀을 하시지만 처음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계시다가 곧 기억해 내셨습니다. 그건 어떤 징후인지요?”
“아, 그러셨습니까?”
의원은 채운이 기억이 없었다는 말에 잠시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채운의 머리와 눈동자를 다시 자세히 살펴본 그가 확인하듯 되물었다.
“본인에 대한 기억도 없다가 금방 기억해 내셨다고요. 그렇습니까, 무장님?”
“그렇소. 처음엔 그러했지만 차츰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소.”
“머리의 외상으로 봐선 드문 일은 아닙니다. 곧 기억을 떠올리셨다니, 크게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런 거요?”
“혹시 몇 년 전의 일도 기억나지 않고 그런 것 아니신지요?”
“그렇진 않은 것 같소. 아까는 정말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다가 곧 기억이 떠오르고 자고 일어나니 더 명확해지고 있소.”
‘명확해지다? 그럼 이젠 다 기억하시는 걸까?’
강희는 그가 자신을 보고 누구냐 물을 때 놀랐던 가슴이 다시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휘청거리는 걸 의원이 보고 그녀를 부축했다.
“어허, 이런, 누우시지요. 부인께서도 걱정이 많으시지요?”
“부인?”
호근이 강희를 지칭한 말에 채운이 그녀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아, 아직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부인이 아니십니까? 제가 실수를 한 건 아닌지?”
그러나 의아해 하는 의원의 말에 강희는 계속 그것을 생각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벌써 이리 말하는데, 그녀가 채운과의 관계를 위장하려던 건 오히려 어리석은 일인지도 몰랐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관계를 숨기려는 게 더 바보 같은 짓은 아닐까? 하지만 만약에 귀환 전에 최사립 측의 추적이 있다면?
강희는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당황한 사이 채운이 그에게 대신 답했다.
“아, 아니오. 내 아내가 맞소. 내가 아직 정신이 덜 깬 모양이오.”
호근은 조금 갸웃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아직 회복이 덜 되셔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혹 기억에 공백이 생긴 것 같으면 곧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사고 당시의 일이 잘 생각나지 않소. 거기에 대한 기억은 조금 흐릿하기도 하고…….”
“음,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강한 충격을 받으면 당시의 상황을 중심으로 간혹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너무 심할 때는 그 사고를 당하게 된 원인을 영영 잃기도 합니다만, 보통은 차차 기억이 돌아옵니다. 그것은 약으로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오늘 당장 기억날 수도 있고, 한 달, 일 년, 혹은 영영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장께서는 징후로 보아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알겠소. 고맙소.”
의원에게 곧잘 말을 하던 채운은 이제 무척 피곤해 보였다. 그를 눕게 한 호근은 곧바로 잠이 든 채운을 잠시 더 지켜보다 방을 나섰다.
그러나 채운의 잠든 모습은 편안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은 통증 때문이리라. 강희는 걱정을 떨치지 못한 채 의원의 뒤를 따라나섰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네, 부…… 인.”
호근이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 조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정말 그의 부인인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부인이란 말에 의아해 하다가 조금 뒤에야 인정하던 채운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설명할 일도 아니고, 채운이 회복되기만 하면 이곳을 벗어나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장 그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지만.
“의원님, 허면 음식은 어떻게 드리는 것이 좋을까요?”
“일단 하루 정도는 미음을 드시게 하고, 지켜보다가 조금씩 된밥을 드시게 하면 됩니다. 그건 제가 경과를 보면서 조절해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환자분께서 깨어나셨으니 저는 이제 매일 오지는 않아도 될 듯싶습니다. 물론 제가 머무는 곳에 가까이 계시는 게 더 좋긴 한데……. 제가 가진 약재도 떨어져 가고 하니, 환자분께서 약간이라도 운신이 가능하시게 되면 여기보다는 조금 큰 도시로 가시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 말에 강희는 다시 덜컥 겁이 났다.
“아까는 운신은 되도록 하지 않으시는 게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의원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것이다.
“그야 물론 려국까지 돌아가는 원거리 여행을 말씀드린 것이지요. 그리고 제가 받은 사례가 얼마나 큰데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하겠습니까.”
“네, 서방님과 의논하여 보겠습니다…….”
“일단 일어나셨으니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제가 이래 봬도 어디 나가면 명의 소리를 듣는 자란 말입니다, 하하하하.”
호근이 일부러 농을 하며 또 실없이 웃었다.
환자의 보호자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그만의 노력인지도 모르지만 강희에게는 더 미덥지 못한 느낌만 들었다. 제 얼굴에 금칠에다 환자를 두고 느긋한 행색하며, 가벼운 모습이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니 이 의원과는 어서 헤어지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사실 떠도는 의원 노릇을 하는 이가 제대로 된 의원의 실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허니 의원의 말대로 채운의 몸이 움직일 정도만 된다면 큰 곳으로 나가 제대로 된 의원을 만나야 할 것이다.
호근은 저의 농에도 얼굴이 펴지지 않는 강희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가벼운 몸짓들 또한 나이 든 사람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아마 수염에 가려진 모습을 정돈한다면 실제로는 보기보다 더 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소한 것들에서도 호근은 강희의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전에 이상이 있다면 이 댁 아저씨께 말씀을 하시면 됩니다.”
“네, 살펴 가십시오.”
그녀에게 인사를 한 호근은 올 때처럼 또 느릿느릿 조랑말을 끌고 돌아갔다. 강희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쳐다보며 정리되지 않는 생각에 또다시 잠겼다.
그리고 그날.
종일 잠을 자던 채운이 저녁때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운은 두 번째 깨어나게 되자 정신이 더욱 맑아진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동안의 일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강희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는 금방 졸리기도 했지만 의원도 믿을 수 없다 하여 자세한 사항을 묻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은 이곳이 송국이라고 했는데, 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오? 난 사고에 대한 기억이 분명치가 않소.”
강희도 그럴 거라 짐작하고 있어서 처음부터 설명을 했다.
“최사립 대감이 새로 진수 의식을 하는 왕세자 저하를 음해하기 위해 화약을 들여왔습니다. 그것을 해적선에 싣고 폭파시켰습니다.”
“뭣이라!”
“그것도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모르겠소.”
“허면 진수 의식은 생각나십니까?”
“그것도…… 모르겠소.”
강희는 자신의 염려는 숨기고 짐짓 태연한 기색으로 채운에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새 배의 진수 의식은 새로운 해군력 성장의 발돋움을 나라 안에 널리 알리는 큰 행사였습니다. 왜의 해적을 완전히 토벌하고, 나아가 영토를 확장한 기념으로 온 나라 안의 귀족들과 백성들이 행사를 함께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말 중 채운은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실이 번뜩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해적 토벌?”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모르겠소.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직은 잘 모르겠소.”
아무래도 그는 기억이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강희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져 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해적 토벌은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원정이었습니다. 대감께서는 가을부터 봄까지 장장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섬 하나를 점령하고, 해적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혁혁한 공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소?”
“원정엔 최사립 대감 측도 함께 참전하였는데, 그들은 망극하게도 왕세자 저하를 해할 욕심으로 해적선 하나를 감춰 두었다가 그 배에 화약을 싣고 진수된 배와 충돌시켜 폭발시킨 것입니다. 다행히 저하는 탈출하신 듯하나 시간을 벌던 여러 장정들과 선원들이 그 자리에서 상하였습니다.”
상황이 다시 떠오른 강희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그때를 되짚으며 길석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중 길석도 죽었지요. 저를 구하려다가요. 그리고 당신께서도 저를 구하려다 이 지경이 되신 것이고요.’
강희가 회상에 잠긴 사이 채운는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것이로군. 그럼 지금이 며칠이나 된 줄은 아오?”
“경술년 사월 삼십 일입니다.”
오늘은 사고가 나고 나서 열흘이 훌쩍 지난 날이었다. 강희는 어제 누엔에게 확인해서 정확한 날짜를 알려 줄 수 있었다. 바다에서 표류한 시간과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던 시간을 알고서 그녀도 무척 놀랐었다.
그러자 채운이 제가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날을 말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시간은…… 기유년 정월인데…….”
그 말에 강희는 헉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혹시나 했던 기억의 공백은 바로 자신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그의 기억이 없는 기간이 그녀가 혼인 얘기가 오가는 때부터였던 것이다.
허면 그는 자신과의 기억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헌데 의원도 그러하고, 난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아 묻겠소. 혹시 당신은…… 당신이 내 아내요?”
‘아직은요. 하지만 곧 아니게 되지요.’
강희는 채운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기억의 공백이 딱 저만큼에 이혼이 성립될 시기와 겹치는 회복 기간.
기억이 그 안에 돌아온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니 이리된 마당에 무어라 답해야 할까.
순간 강희는 의원을 상대로 채운과 위장할 관계를 생각하느라 고민하던 게 떠올랐다. 부부는 아니되 부부인 척하는. 그와의 사이를 설명할 가장 적합한 관계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을 채운과 자신의 상황도 딱 그러하지 않은가. 자신은 결코 그의 아내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사람들에게 그리 말하긴 했으나……. 아, 아닙니다. 아무튼 나중에 기억을 찾게 되시면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 렇소? 그렇긴 하오만,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답답하기만 하오.”
그에 대한 생각을 정하고 나자 강희는 흔들리던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기억이 내일 당장 돌아올 수도 있고, 한 달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조급해 하지 마시고, 어서 몸을 추스를 생각부터 하십시오.”
“의원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도 했지 않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꿈에서도 약한 소리를 한 적 없는 그가 하는 절망적인 말에 강희는 저도 모르게 그를 다그쳤다.
그런 그녀를 채운은 물끄러미 쳐다보다 물었다.
“허면…… 당신은 뉘시오? 어찌 나와 함께 여기 있는 거요?”
다시 듣는 누구냐는 질문에 강희는 명치 아래가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허나 지금 대답을 잘해야만 할 것이다.
그의 기억이 곧 돌아온다 해도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이 차라리 편할 것이다.
“폭발에 휩쓸린 후, 혼자 배에 올라 있는 저를 대감께서 구해 주셨습니다.”
“어찌 당신이 그런 위험한 곳에 홀로 있었던 거요?”
채운은 의혹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저도 진수식에 초대받았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왕세자 저하와 다른 귀빈들은 다 탈출했으나 저만 탈출하지 못하여……. 저만 아니었으면 대감께서도 이리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대감은 저를 구하시다가 함께 폭풍에 휩쓸렸습니다.”
거짓이 섞인 진실들이었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목숨을 잃은 길석의 생각이 다시 떠올라 가슴이 저며 왔다. 차마 길석의 얘기까지는 하지 못한 강희는 고개를 숙인 채 채운과 눈이 마주치는 걸 피했다.
채운은 뭔가 더 물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런데 그때 그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강희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고프시지요? 의원께서 아직은 묽은 죽을 드시라 하였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소서. 죽을 가져오겠습니다.”
“……알겠소.”
방을 나가는 강희를 바라보던 채운의 눈이 흐려지고 있었다. 아내가 아니냔 질문에 부인하던 그녀의 표정이 못내 마음에 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잠든 와중에 끊임없이 꿈속에 찾아든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여인이었다.
그 사람이 저 여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자신의 질문에 그녀는 더 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어머나, 일어나셨군요. 부인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십니까?]
채운이 일어나 앉은 것을 보며 누엔이 반갑게 수선을 떨었다.
“뉘…… 신지요?”
[어어, 이런! 남편분께서는 혹시 송국의 말을 못하시는 겁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소.”
당황한 채운은 강희를 쳐다보았다. 언뜻언뜻 아는 말이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낯설었던 것이다.
“송국어를 할 줄 모르냐 물으십니다.”
“아, 나는 모르오.”
[서방님은 송국어를 모르십니다.]
[부인이 하실 줄 아는데요, 뭘. 아무튼 다행입니다. 이렇게 일어나셔서.]
“일어나셔서 다행이라 하십니다. 이분은 누엔 부인이라 하시는데, 저희를 구해 주시고 내내 돌봐 주신 분이십니다. 남편분의 성함은 수보라 하십니다.”
누엔과 수보.
작게 이름을 되뇐 채운은 곧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하오. 은혜를 잊지 않겠소.”
[감사하시다고요.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강희가 전하는 말에 누엔은 웃으며 대꾸했다.
[정말 부인과 어쩜 그리 똑같은 말을 하신답니까. 그런 인사는 이제 그만하시고, 어서 몸이나 쾌차하셔야지요. 하루 빨리 나으시기만을 바라겠습니다.]
강희는 그렇게 계속 누엔 부부와 그의 말을 통역하여 전했다. 그러고도 몇 마디 감사 인사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데 대한 축하가 오고 갔다.
잠시 후 부부는 피곤한 환자를 고려해 나가고, 방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날 저녁, 채운은 수보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서 혼자 용변을 볼 수 있을 만큼 거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용변을 보며 깨달은 사실에 채운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누엔과 수보 부부가 처음 자신들을 구한 후 돌봐 준 것은 맞는 듯했다. 하지만 부인 행세를 하는 그녀도 처음엔 혼절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깨어난 이후에는 그들 부부는 계속 평소와 같이 일하고 바쁘게 생활을 했다고 했다.
자신은 부부가 돌본 이틀 말고 사흘 내내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니 그때 이후의 모든 시중은 저 여인이 한 것이다.
헌데 그의 몸 상태는 깨끗한 편이었다. 먹고 씻기는 일까지야 그렇다 치지만 양가 댁 처자가 과연 외간 남자의 가장 원초적인 시중까지 들 수가 있는 것일까?
그녀의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기녀나 천민은 아닐 터. 분명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왜, 무엇을 숨기려는 것일까?
아무도 믿지 마라…….
그것은 그가 왕세자의 청에 의해 궁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들은 말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당장 경계심이 들었다.
그녀가 말해 준 것들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일을 꾸며서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허나 그녀가 숨기는 일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자신과 그녀와의 관계가 기억나지 않는 공백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자 그녀가 들어와 침상 아래 이불을 펴고 눕는 걸 보며 채운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바로 옆에서 그녀가 바닥에 눕는 소리, 잠들기 전의 긴장된 숨소리, 그리고 곧 잠이 들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모든 과정이 익숙한 일이라는 기시감이 들었다. 그녀의 잠든 숨소리가 들리자 그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강희의 옅은 숨소리에 채운의 편안한 숨소리가 겹쳐졌다.
* * *
채운은 꿈에 어떤 여인이 자신에게 서방님이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를 더 가까이 보고 싶었지만 안타까이 부르는 그녀는 음성은 자꾸만 더 멀어지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음성도 사라지고 말았다. 아침이 되었을 땐 여인의 모습이 다시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일까? 꿈속의 그 여인은?’
자꾸만 그 여인이 옆에 있는 저 여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거의 공백이던 그의 기억은 조금씩 더 돌아오고 있었다. 원정을 떠나던 것, 해적과 싸우던 것, 그리고 진수된 배 위에 오르던 장면들도.
그것은 아직 뒤죽박죽인 상태라 왼쪽 팔뚝의 상처를 자신이 만든 것은 알아도 왜인지까지는 모르는, 띄엄띄엄 조각난 그런 상태의 기억들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기억이 다 돌아오면 알게 되리라.
그에게 무언가 숨기려고 하는 저 여인에 대한 것도 모두 다.
- 강희 2권 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