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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폭발 (14/38)

14. 폭발

배가 언덕에서 바다로 미끄러지는 순간, 사람들은 숨을 멈춰 가며 배가 물 위에 뜨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뚜르르르르.

거대한 몸체가 비탈진 언덕에 받쳐진 곧은 원목들 위를 유유히 타고 흘러 바닷속으로 돌진했다.

첨벙.

철썩, 쿠르륵, 쿨럭.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도 잠시간의 정적이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우렁찬 용트림 소리를 내던 거대한 배가 물 위에 떠오른 순간,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크게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

양광포를 울리는 함성은 다음 왕이 될 왕세자를 위해 울리는 것이었다.

함성 사이로 누군가가 거대한 배가 바다에 뜨면서 생긴 포말이 왕관 모양 같다며 신기한 듯 떠들었다. 그러자 그 말을 받아 사람들은 너도 나도 그것은 왕세자가 이룬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라 떠들어 댔다.

정말 물거품이 그런 모양으로 퍼진 것인지까지는 알 도리 없이 군중들은 그것마저 감탄에 섞어 왕세자를 찬양하고 있었다.

청왕의 의지가 제대로 발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열광하는 군중들의 모습에 최사립 측의 사람들은 표정이 굳은 채 펴질 줄을 몰랐다. 포말에 관한 말을 처음 한 이는 명을 받은 자였고, 이는 재영의 기지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최사립 측 사람들은 더욱 분해 했을지도 모른다.

최사립은 다른 이들처럼 표정이 굳어 있는 가흔 왕자에게 다가가 은밀히 속삭였다.

“왕자님, 분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로 끝날 일입니다.”

“하지만 외조부님, 저들의 열광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형님은 해적 토벌을 위한 원정을 가기 전부터 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형님은 이전부터 해적 토벌에 신경을 쓰셨던 분입니다. 그러니 저도 원정에 참전했어도 저에 관한 소문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고, 오로지 형님 저하와 윤채운에 관한 지지만 높아졌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그 무슨 약한 말씀이십니까? 거사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이요. 수가 아무리 지지를 받는다 해도 저 어리석은 백성들 몇몇의 지지일 뿐입니다. 오늘 거사만 성공한다면 수는 물론 그와 친분이 있는 귀족들을 모조리 날려 버릴 수 있단 말입니다. 몽땅 다 말입니다!”

최사립은 불경하게도 왕세자를 ‘수’라 지칭하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가흔 왕자가 왕이 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대세가 이렇게 기울어진 이상 이대로 수가 왕이 된다면 그들은 모두 쫓겨나거나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오늘 일을 성사시켜 가흔 왕자가 왕이 되도록 만들 것이다.

“외조부님,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아니, 정말 형님 저하를 밀어내야 하는 것입니까?”

“마마, 왜 자꾸 나약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오늘만 지나면 다 마마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이 외조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네, 외조부의 말씀이 맞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지요. 그럼 그들은 잘 준비되어 있는 겁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가족들이 우리 손에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거사 후엔 놈들도 다 죽을 테니 비밀도 새어 나갈 염려가 없습니다. 혹시나 살아난다 해도 입을 다물기 위해 자결할 놈들입니다. 특히나 조타를 잡은 놈은 제 아들이 관군입니다. 정체만 까발려도 제 가족까지 반역자로 몰릴 판인데, 놈은 결코 도망도 칠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군요……. 이제 정말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세자 저하!”

최사립이 미리 올리는 존칭에 가흔 왕자는 움찔했다. 그는 이미 일이 성사된 것처럼 웃고 있는 외조부를 따라 함께 웃을 수가 없었다.

이는 수많은 인명이 스러질 일이었다.

원정에 참전했던 가흔 왕자는 눈앞에서 펼쳐진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 버리는 일에 무척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언제나 가장 안전한 지휘소 안에서 그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하루하루 갈수록 전쟁의 참상은 끔찍하기만 했다.

그런데 외조부는 전쟁이 아닌데도 그 많은 생명을 한 번에 없앨 방도를 강구하고, 오늘 그 일을 강행하려는 것이다. 이전엔 형님 저하만 없으면 저가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외조부의 의견에 따라 모든 걸 수긍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외조부를 말릴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형님께 이것을 알릴 수도 없었다.

외조부 말대로 이 일만 성공하면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솔깃했지만, 한꺼번에 제 손으로 없애라 명령할 그 많은 생명의 무게가 두렵기도 했다.

“마마, 무얼 하십니까. 우리도 배에 올라야지요!”

왕세자가 진수된 배에 오르는 뒤로 가흔 왕자도 함께 뒤따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세자가 선착장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에서도 몰려든 군중들은 함성과 찬양의 소리를 그칠 줄 몰랐다.

왕세자의 옆으로 왕세자비가 함께했고, 채운을 위시한 왕세자의 측근들과 그의 부인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중엔 강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만운은 육지에서 계속 대기 중이었다. 재영은 그를 도와 금방 나빠질 날씨를 대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왕세자의 무리 뒤로 가흔 왕자가 최사립과 호위를 거느린 채 따르고 있었다.

헌데 순간 그들이 지나는 자리가 썰렁하고 조용해지고 있었다. 군중들은 가흔 왕자와 최사립이 지나는 것에서 고개를 돌리고 그들이 지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장면을 보던 가흔 왕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너무 뒤처졌지 않느냐! 서둘러라!”

끝까지 가흔 왕자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최사립은 그것을 보며 한쪽 입술을 삐죽 올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리고 있던 외손주 왕자께서 드디어 마음을 굳힌 게 보였다.

군중들의 차별적인 반응은 오늘 망설이는 가흔 왕자의 마음을 다시 잡아 준 것이다.

저 지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에 어찌 평생을 그냥 왕의 동생으로 살라 할 수 있을까. 그 때문에라도 가흔 왕자는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귀빈들이 진수한 배까지 타고 갈 조각배에 오르면 가흔 왕자는 타자마자 곧 심한 뱃멀미를 겪게 되어 되돌아오기만 하면 되었다.

최사립은 이미 다 된 것 같은 거사에 미소를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

* * *

다섯 척의 작은 배에 십여 명씩 나누어 탄 귀빈들은 진수된 배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왕세자는 배가 진수되기 전에 이미 그 안을 탐방해 보았지만 정말 배가 바다에 떠오르는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리고 바다 위에서 오른 느낌은 육지에서와는 사뭇 다른 감동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저하, 가흔 왕자마마는 저기 오다가 되돌아가셨습니다.”

왕세자의 호위부장이 미심쩍은 가흔 왕자 쪽의 동태를 보고했다.

“뭣이?”

“선착장을 떠나 조금 지나자 갑자기 웅성거리더니 뱃전에서 가흔 왕자가 마구 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우리 측 배를 멈추게 하고, 왕자마마께서 미령하시어 되돌아갈 것을 알렸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가?”

“제가 보기에도 심하게 토하고 안색이 창백해 보이긴 했지만…….”

“미심쩍어 보였던 게지.”

“네, 그렇습니다.”

채운이 호위부장의 뒷말을 대신 이으며 선착장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

수도 그들 쪽을 보며 말했다.

“역시 여기서 일을 벌일 작정인가?”

“하지만 여긴 바다 위입니다. 이 배에 오른 이들은 다 저하의 측근들이며, 가족들이고, 선원들은 배에 오르자마자 다시 수색했습니다.”

확실히 다 점검했다는 호위부장의 말에도 채운은 안심할 수 없었다.

“저하, 지금이라도 되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심스럽긴 하지만 오늘 일을 망칠 수는 없네. 오늘 이 행사는 백성들에게 이 배의 위용을 보이고, 새로운 희망을 주는 자리야. 이 배는 오시 중반11~13시까지 나가야 바다 위에 안착할 수 있어. 백성들은 바다 위에 배가 안착되는 순간까지 지켜볼 것이야. 의심스럽다고 하여 도망칠 수는 없네.”

“저하, 그럼 아까 말씀드린 것보다 서두르셔야 할 것입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조각배들을 계속 따르게 하시고, 예정된 시간보다 더 일찍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채운의 심각한 표정에 수도 더 이상 일정을 다하자 주장할 생각은 없었다. 저들이 꾸미려는 일을 아는 마당에 무리하게 진행할 수는 없음이었다.

“그럼 이 배가 저기 곶만 지나면 되돌아오도록 하지.”

수는 양광포를 천혜의 만으로 만든 곶의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곶은 우뚝 솟은 바위들이 절벽을 이루고 있어서 사람들의 접근이 용이치 못한 곳이었다. 허나 그곳에도 이미 자객들을 대비해 병사들을 포진시켜 놓았다.

헌데도 수가 그곳을 가리킨 순간, 채운의 가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아직 돛도 달지 않은 배는 노를 저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채운의 신경은 배가 움직일수록 더욱 날카로워지며, 가까워지는 곶의 끄트머리를 맹렬히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때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방님.”

“강희! 아, 부인, 무슨 일이오?”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 다른 이의 눈을 의식해 지레 딱딱한 말이 나오고 말았다. 아침에도 곱다, 그 한마디를 먼저 해 줬어야 했는데 아차 싶었다.

그녀가 혼례식 때 말고 성장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강희는 아름답다는 말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리 곱게 차린 모습에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두근거렸던지.

이 급박한 순간에도 지난 며칠간 배출하느라 애쓴 그 독한 약효를 다 없애지 못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를 당장 품에 안아 들고 싶었다.

허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는 강희가 입을 열자 그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서방님, 저의 짧은 소견입니다만 만약에 배가, 화약을 채운 배가 다른 배라면 어떻겠습니까?”

“무슨 말이오?”

“서방님이 저 끝을 계속 바라보시기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다른 배가 이 배와 충돌하거나 바싹 붙인 채 그 배에서 화약을 터뜨린다면 어떨까 하고요.”

“……!”

채운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계속 뒤따르던 배만 생각했지, 앞서 가서 기다릴 거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미리 기다렸다가 가까이 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허나 저 곶의 바깥쪽이라면?

이전에 그 생각도 했다가 지웠었다. 순식간에 스친 생각이라 오래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저곳 곶의 끝에도 병사들을 보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게 했고, 또 그 바깥쪽은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강희가 말한 곳은 그 절벽 아래로, 곶의 특성상 배를 대고 기다릴 수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배라면…….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이들이라면…….

있었다!

바로 이전 달까지 그들과 토벌전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길석아, 부장들을 불러 모아라! 어서!”

“네? 무슨 일이십니까?”

“저 앞에서 왜의 해적선이 나타날 것이다. 급히 저하를 뫼시고 피신하도록 해라!”

“넵!”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길석이 뛰었다.

만의 끝에 거의 다다른 배는 갑자기 멈춰 서고 말았다. 배의 방향을 틀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왕세자의 피신은 뒤따르던 작은 배들로 해야 할 것이었다.

“앗!”

그때 한 병사가 아찔한 비명을 지르며 배 밖으로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도 곧 합세하여 활을 날리더니 한 병사는 배에서 그대로 바다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대감, 큰일 났습니다. 뒤따르던 사공들이 모조리 죽었습니다!”

“뭣이라고?”

“갑자기 한 사공이 활을 꺼내 들더니 다른 사공들을 향해 활을 날려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바른 화살을 날려 다른 배들에 날리고, 가까운 배로 건너뛰어 배를 부수었습니다.”

제일 처음 그걸 발견한 병사가 활을 날린 것은 그 가짜 사공을 향해서였다. 가짜 사공은 배가 멈추는 듯하자 다른 사공들을 죽임과 동시에 다른 배도 모두 침몰시키려 했던 것이다.

“어찌 그런 가짜 사공을 미리 잡지 못했단 말인가!”

사공 따위가 무기를 숨기고 올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송구합니다!”

분통을 터뜨려 봤자 늦은 일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 당장 닥칠 저들의 만행에 대처해야만 했다.

“배는 몇 척이나 남았나?”

“두 척이 멀쩡한 것 같습니다. 놈이 부수던 배는 벌써 물이 들어차고 있었고, 불을 붙인 배는 수병이 뛰어내려 급히 불을 껐습니다만 놈이 탔던 배는 벌써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놈은 제 배부터 미리 구멍을 내 놓고 사공들을 죽인 것 같습니다.”

처음 출발한 조각배는 다섯 척이었다.

그런데 가흔 왕자가 탄 배가 도중에 되돌아가 네 척이 남았는데, 그중 두 척이 완전히 망가진 것이다.

“어서 서둘러라! 저하부터 모셔야 한다! 그리고 이 배의 비상용 배도 살펴라!”

“네!”

왕세자 부부와 귀빈들이 급히 피신을 위해 배를 옮겨 타고 있었다.

곶의 끝이 멀지 않아 배가 선회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도 없을 것이다. 이 배가 그곳에 닿을 시간을 가늠하고 있을 놈들이라면 지금이라도 저 앞으로 돌아올 것이다.

“해적선이다!”

생각과 동시에 벌써 배 한 척이 만 안쪽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적선이 나타났다! 모든 병사들은 갑판으로 올라와라. 서둘러라. 어서 왕세자 저하와 대신들을 대피시켜라!”

“어서 서둘러라!”

사방에서 큰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울렸다. 선원들을 제외하고도 거의 쉰 명은 되는 인원 가운데 부인네들이 열 명 정도 되기에 그들의 비명 소리가 더해져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해적선이 나타나자마자 피신 상황을 지휘하던 길석이 달려왔다.

“저하와 비마마는 모셨느냐?”

“지금 거의 다 내려가셨습니다!”

“다른 비상용 배는?”

“선원들이 타고 온 배 한 척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비전투원들이었다. 여기 있으라는 건 죽으란 소리와도 같았다.

“그럼 두 배에 몇 명이나 탈 수 있겠는가?”

“귀빈들은 다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정원보다 많이 타야 해서 조금 느려질 것입니다.”

진수식에 배에 함께 오른 귀빈들은 왕세자 부부를 포함하여 스물한 명, 채운 이하 무장과 병사들이 스물여덟 명이었다. 기본적으로 한 배에 경호할 무사들이 귀빈 수와 맞춰 비등하게 배치되어야 하나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은 가짜 사공이 침몰시킨 배 한 척이 아쉬운 때였다.

허나 이나마 빨리 알아채어 다행이라 해야 했다. 가짜 사공은 배가 멈추는 것 같자 급히 일을 벌인 것이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일이라 사공들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배 두 척은 구할 수 있었다.

“해적들을 맞을 준비를 하라. 각자 몸을 의지할 널빤지를 떼어 준비하고, 수영을 못하는 병사는 귀빈들과 함께 배에 타서 노를 잡아라. 어서 서둘러!”

“네!”

길석은 곧장 달려 나가 소리를 지르며 부하들을 분류했다.

왜의 해적이 아무리 신출귀몰하다 하나 그들의 노략질은 서남해 지방에 국한되어 있었다. 도성 인근의 양광포까지 왜의 해적선이 무사히 올 수 있었다는 것은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저것은 바로 이번 원정에서 나포된 해적선이었다.

최사립이 말한 준비된 이들이란 이번 원정에서 잡은 포로들이었다. 원래 해적이 아니라 일반 백성이 납치되어 해적이 된 자들 중에 나라 백성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해적이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나라의 반역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납치되어 끌려간 것도 억울할 일이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 자체가 위협이었던 것이다.

토벌 원정에는 가흔 왕자 측도 함께 참전한 덕분에 그런 포로들은 물론이고, 포획한 왜의 해적선 한 척쯤 숨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최사립은 이번 일을 도모하기 위해 그들을 따로 모아 왜의 배와 함께 산화시킬 작정을 했던 것이다.

양광포의 만을 지나 먼바다에서 지킬 해군의 배가 한 대라도 있었더라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오늘은 진수하는 배를 위하여 미리 큰 배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 양광포는 거의 텅 빈 상태였다.

제국과 경계하는 바다 쪽을 지키는 배 하나 없는 것을 보면 그동안 송국에 얼마나 기대며 경계하지 않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일면이었다.

이번 진수식을 거행하는 이 배는 바로 그 해군선을 부흥시키는 시초가 될 배였다.

다른 해군의 배들이 이곳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나마 있는 배들은 원정에서 많이 낡고 파손되어 모두 수리에 들어갔고, 멀쩡한 배들은 모두 남해와 구마도에 분할되어 있었다.

해적에게서 나포한 배들 또한 모두 따로 모아 개조하여 다시 해군을 위한 배로 재탄생시킬 준비에 한창 바빴다. 또 작은 조각배 이상의 배들에 운행 자료는 오늘 진수식에 맞춰 특별히 더 경계하고 있던 사항이라 이곳에 올 수 있는 배가 없었다.

그러니 가흔 왕자 측에서도 자신들이 나포한 배 중 하나를 몰래 빼돌린 것이 틀림없었다. 오늘의 일로 봐서 그들은 이미 원정을 떠나기 전이나 원정 시에 이 일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라 보아야 했다.

저들은 왕세자 저하와 그 측근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킬 계획을 세운 것이다. 허나 왕세자 저하를 해하는 데 실패한다 해도 이 배에 탄 인물들이 상한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었다.

온갖 가능성을 예측하던 중 한 가지를 놓친 실수가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

채운은 이를 악물고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았다.

“저들이 최대한 다가올 수 없게 해야 한다! 버텨라! 육지에서 곧 이상 기운을 느끼고, 다른 배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폭발이 일어난 다음이라면 이미 늦을 수 있었다. 해적의 배는 새로 건조된 배보다 작았으나 대신 빨랐다. 그러니 이만한 거리에서 배를 충돌하려 한다면 충돌을 피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배 안에서 화약에 불을 붙이는 것은 아예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때 병사가 아닌 중년의 남자가 채운에게 와 무릎을 꿇고 말했다.

“대감, 저희도 남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저는 배를 움직일 자신은 있습니다. 제가 어찌하면 되는 것입니까!”

“선장!”

“선회하기에 이미 늦었다는 것은 압니다. 허나 저희들이 사력을 다해 저들이 배를 붙이는 것은 막을 수는 있습니다.”

“저들이 위험한 건 이 배를 침범하기 때문이 아니오. 이 병사들이 저만한 해적들을 당해 내지 못하겠소? 허나 저 배 전체가 커다란 화약 창고요. 저것이 다 터진단 말이오!”

채운의 말에 선장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선장이 더욱 결연하게 소리쳤다.

“그럴수록 저희의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무리 저들이 다가오려 해도 저희들이 배를 움직여 가까이 붙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허니 힘을 보태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힘을 보태다. 말이 좋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목소리였다.

선장은 아버지와 형제들을 왜의 해적 때문에 잃은 사람이었다. 그 원한이 다른 이들보다 약하겠는가. 허니 해적선을 보자 눈에 불이 붙는 것이다.

그런 사정까지 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채운은 선장의 도움을 거절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귀빈들이 모두 배에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았지만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허나 다른 선원들은…….”

“걱정 마십시오. 모두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입니다. 바다에서 맞는 마지막을 윤 장군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자체로 모두 배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없이 저놈들이 이 배를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어쩝니까.”

선장의 말이 맞았다. 그 전에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수군들이 그걸 막기야 하겠지만 당장 전투에 손이 비게 된다.

“좋소. 고맙소.”

선장은 선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저 배가 터지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이제 남은 건 시간 싸움과 폭파의 여파에 얼마나 더 많이 살아 남느냐였다.

“어서 노를 저어라, 어서!”

왕세자와 귀빈들을 태운 배는 오늘 진수한 배를 방패로 삼아 서둘러 육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노를 저었다. 올 때는 새 배에 오르는 유람 기분에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돌아가는 거리는 멀기 그지없었다.

헌데 두 배에 어느 곳에도 강희가 없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강희도 원래는 이 배 중 하나를 타려 했다. 귀빈들을 피신시키는 와중에 길석이 그녀를 모시려 했던 것이다. 당시 길석은 급한 나머지 강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마님, 서두르세요. 마님은 저쪽 배에 타시면 됩니다. 제가 내리는 것을 거들겠습니다!”

그 순간 강희의 앞에서 참지정사의 부인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위기를 맞으며 받은 충격에 못 이겨 기절하고 만 것이다.

“부인!”

바로 옆에 있던 참지정사가 아내를 부축하려 했으나 문관인 그의 가늘고 노쇠한 몸은 아내를 바로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길석아, 부인을 업고 내려가라. 나는 혼자 움직일 수 있으니 걱정 말고.”

“허나 저 배는 당장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마님을 내려 드릴 손이 없습니다.”

여인들은 배에서 내리는 데 남편이나 병사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허나 채운은 배에 있어야 하고, 길석은 강희를 내려 주고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선원들의 배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 배로 함께 가겠으니 어서 부인부터 모셔 줘!”

“마님, 그럼 저쪽으로 가십시오. 아까 선원들의 배가 있는 곳을 보셨죠? 절대 놓치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어서 서둘러.”

순간 참지정사의 눈에 고마운 빛이 서렸다. 급한 나머지 길석은 강희의 명에 따라 참지정사의 부인을 업고 내려가 배에 내려 주고 돌아왔다.

그동안 강희는 부산한 병사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선원들의 배를 찾아 함께 내려갈 준비를 했다.

허나 탈출하라 명을 받은 선장이 마음을 돌려 채운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강희는 선원들의 빈 배에 몸을 숨긴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 * *

한편 선착장 쪽에서는 이미 난리가 나고 있었다.

멀리 낯선 배가 나타나며 누군가 해적선이라 소리친 것이다.

배가 나타난 걸 본 순간, 육지에선 급히 다른 배를 보내 지원을 하려 했다.

그러나 최사립 측은 이번 거사의 물밑 작전으로 육지에서 해상에 지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차단하는 것부터 했다. 자신들이 탔던 배는 물론 선착장에 있는 모든 배에 손을 써 놨던 것이다.

바다 위에서는 화약을 터뜨릴 방법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이번 경계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그래서 육상에서의 방비를 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국가적인 행사이기에 그들과 선착장의 치안을 나눠 맡은 것이 첫 번째이고, 진수 의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다른 배들을 거의 치워 버린 것이 다른 지원 수단을 앗아가 버렸다.

“어서 배를 찾아라, 배를!”

만운은 병사들을 재촉해 왕세자와 측근들이 탄 배가 오기 전에 나갈 방도를 찾고 있었다.

허나 만운이 배로 향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가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오고 있는 배가 도착하면 다시 그 배를 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 멀리서 오고 있는 배가 돌아오는 시간은 매우 느렸고, 앞에 나타난 해적선은 빠르게 새 배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필시 저 해적선이 터지리라는 건 만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저기 작은 배들이 오고 있는 것을 보면 세자 저하는 무사할 것이다.

허나 형이 문제였다, 형이.

저 위험에서 왕세자가 무사히 빠져나온다면 적들은 그의 가장 큰 날개인 형만은 반드시 없애려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더욱 형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형, 혀엉!”

바다로 뛰어드는 그를 말리느라 병사 서너 명이 달려들어 붙잡고 있었다.

그가 목이 터져라 부르는 것에 대답하는 것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시커먼 구름뿐이었다.

최사립은 배가 가다가 멈추고 작은 배들이 도망쳐 오늘 걸 보며 왕세자는 이미 놓쳤다는 걸 알았다.

허나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필히 저 배에 윤채운이 남아 있을 것이다. 최사립으로선 왕세자는 물론이지만 윤채운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가흔 왕자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통과의례였다.

윤채운은 감히 왕의 신임과 백성들의 민심을 동시에 얻고 있는 인물이었다. 원정 이전에도 그랬지만 멀리 영토까지 넓히는 성공적인 원정을 다녀온 지금은 그 이름이 최씨 가문을 위협할 정도로 더 높아졌다.

‘천한 평민 출신인 주제에!’

그것만 해도 최사립은 결코 그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 사냥 대회 때 그를 희롱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은 독약 따위가 아닌 확실한 힘의 위용으로 이루어야 했다. 오늘 이 일은 그 힘의 위용을 보이는 데 더없이 훌륭한 볼거리를 선사할 것이다.

그가 오늘 죽어야 왕세자를 찍어 낼 수가 있었다. 혹여 훗날 반정을 도모해야 하더라도 이 순간 그를 없애야만 일이 수월해질 것이다.

오늘 이 일은 엄청난 시간과 돈과 노력을 기울인 계획이었다. 놓친 큰 물고기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대신 오늘 윤채운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 * *

해적선의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저들이 이 배를 스쳐 지나가 피신하고 있는 이들을 공격하려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가 무색하게 해적선은 나타나자마자 일직선으로 곧장 이쪽 배를 향해 곧게 돌진하고 있었다.

배가 사정거리에 들며, 병사들이 화살을 날려도 해적들은 반격조차 없었다.

해적들은 전투를 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지며 해적의 얼굴이 선명히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 그들의 표정에 깃든 절망과 두려움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공격엔 관심도 없이 오로지 조타를 잡은 이와 돛을 조정하는 이들만 보호하며 곧장 이쪽 배를 향해 달려왔다. 무조건 충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선장과 선원들이 안간힘을 썼지만 작정하고 충돌하려 들어오는 해적선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완전히 피해서도 안 된다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라도 충돌은 불가피했다.

쿠쾅, 빠지직.

거대한 몸체의 배 옆 귀퉁이가 해적선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물론 새 배가 더 튼튼하여 해적선이 더 많이 부서졌지만 충돌의 목적은 충분히 이룰 수 있었다. 두 배가 서로 끼어 얽힌 것이다.

다른 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순간 해적들과의 접전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충돌과 동시에 미리 내려 두었던 명이 떨어졌다.

“모두 배에서 뛰어내려라!”

“모든 선원들은 즉시 바다로 뛰어내려라!”

배를 지휘하던 선장도 선원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충돌의 여파로 휘청거리던 사람들은 곧장 바다로 뛰어들었다. 미리 명을 받았던 터라 갑판에 있는 병사나 선원들뿐 아니라 노를 젓는 이들까지 다들 탈출할 수 있었다.

해적들도 배가 부딪히자마자 바로 바다로 뛰어들고 있었다. 충돌과 동시에 배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허나 무사히 배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던 해적은 갑판 위에 있던 몇 사람뿐이었다. 갑판 위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화살을 맞아 죽었고, 해적선 안에서 노를 잡고 있던 이들은 배에 사슬로 발이 묶여 있었다.

어느 편이든 모두 바다로 뛰어듦과 동시에 불길한 소리와 함께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치치치칙, 쾅!

화약의 양이 어마어마했던지 폭발은 상상 이상이었다. 저 해적선 전체가 화약과 기름을 실은 창고였던 것이다.

커다란 배는 천둥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것처럼 엄청난 소리와 함께 폭발하며 폭포수 여러 개를 합한 것 같은 물보라를 솟구치게 만들고 있었다.

해적선에 실려 있던 화약은 불발도 거의 없이 충실히 제 몸을 사르고 있었다. 워낙에 엄청난 양의 화약은 해적선뿐 아니라 단단한 목재로 새로 지은 배도 천 조각 찢듯 부수기 시작했다.

폭발의 여파로 거센 공기가 사방을 휘저으며, 파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다음 순간.

바다 위는 자욱한 먼지와 파편으로 순식간에 암흑천지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아직 가라앉지 않은 부분에 불이 붙으며 물 위로 화염이 충천하고 있었다.

폭발에 찢긴 것은 배뿐만이 아니었다. 터지던 파편이 사방으로 가리는 것 없이 날아가 어떤 것은 물속으로, 어떤 것은 다른 파편에, 그리고 어떤 것은 사람을 때렸다.

바다 위에는 시커먼 먼지와 배의 파편뿐 아니라 사람의 몸체 일부도 떠다니고 있었다. 미리 대비하고 모두들 뛰어내렸건만 주변은 곧 비명과 신음이 난무하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허나 공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저들은 배에 탔던 이들을 최대한 죽이기 위해 암살자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해적선이 이쪽 배로 부딪히기 직전, 작은 배가 해적선 뒤로 빠져나간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배에 탄 이들은 윤채운이나 귀빈들을 위한 척살조였으며, 해적들을 감시하다 혹시라도 살아난 해적이 있는지 청소하는 역할을 맡은 이들이었다.

최선의 상황이었다면 왕세자의 척살조가 되었겠지만 새 배가 만을 벗어나기 전에 미리 멈춘 것부터 왕세자는 목표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허니 지금 그들의 가장 큰 목표는 윤채운이었다.

혹여라도 윤채운이 배의 폭발로 죽었다면 그들의 임무는 성공이지만 해적 왕을 홀로 죽이고 돌아온 그가 이것으로 죽었을 리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육지에서 다른 배가 오기 전에 어떻게든 채운을 찾아 없애고 달아나야 했다.

허나 폭발의 여파가 워낙 거세어 거리를 띄워서 준비하던 그들의 배도 전복하고 말았다. 혹시라도 나를 파편에 대비해 방패를 두르고 있었지만 그들 열 명 중 운이 없던 두 명은 날아오는 파편을 온몸에 맞고 그대로 절명했다.

암살자들이 다시 배를 뒤집고, 채운을 찾아 나섰을 때는 채운 측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폭발 직전 배가 부딪힌 충격에 갑판 위는 아수라장이었다. 충격에 대비하고 있었는데도 여기저기 부딪혀 넘어진 선원들과 병사들은 깨지고 찢어진 상처를 입고 있었다.

허나 상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 뛰어내려야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다.

모두들 배 밖으로 뛰어내고 있을 때, 선원들을 본 길석은 그제야 강희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헛, 마님! 마님!”

배는 불안정하게 기우뚱거리고 있었고, 부딪힌 충격으로 넘어졌던 길석은 온 사방에 부딪히며 강희가 있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최후까지 남아 있던 채운은 뛰어내릴 준비를 하던 마지막에 길석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마님?’

채운은 대신들을 피신시킬 때 길석이 강희를 이끌고 가던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마님이라니!

그는 길석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나 해적선에서는 벌써 폭발음이 울리고 있었다.

“벌써 배가 터지고 있습니다, 대감. 어서 뛰어내리십시오!”

수군 부장 이화응이 채운을 배 밖으로 밀며 함께 뛰어내렸다.

공교롭게도 채운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해적선을 부순 파편이 가장 먼저 날아와 떨어지고 있는 채운의 머리를 쳐 버렸다. 채운은 바다에 떨어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대감, 대감!”

채운을 구해 배에서 멀어진 이화응이 그를 몇 번이나 흔들어 깨웠다. 채운은 아직까지 들리는 폭발음과 여기저기 쏟아지고 있는 파편 사이에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대감!”

“고맙네.”

“괜찮으십니까?”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지? 상황이 어떤가? 폭발은 무사히들 피했는가?”

“아주 잠시 동안입니다. 배는 보시다시피 둘 다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사상자는 아직 파악할 수 없습니다만 희생자가 많을 것으로……, 어흐윽.”

순간 이화응이 말을 하다 말고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방금 전까지 채운을 부축하고 있던 그의 가슴 앞으로 화살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이 부장, 이 부장!”

채운이 그를 애타게 불렀으나 이미 숨을 거둔 이가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화응의 시신 뒤로 배 위에 탄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커억!”

“아악!”

“기습이다! 모두 적의 기습에 대비하라!”

채운보다 누군가가 먼저 소리치고 있었다.

물 위에는 또 다른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암살자들이 파편 사이를 유유히 움직이며 물 위에 떠 있는 이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었다.

물속에서 빠지지 않게 널빤지 등에 매달린 이들이 배를 탄 이들의 공격을 막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겨우 살아남은 병사들이 암살자들의 화살과 칼에 맞아 죽어 가고 있었다.

“이놈들!”

채운은 소리치며 허리에 찬 칼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윤채운이 저기 있다!’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들리며, 그가 있는 쪽으로 화살 몇 발이 날아왔다. 물 위에 뜬 채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려니 영 움직이는 것이 어려웠다.

우선 그 화살을 쳐 낸 채운은 물속으로 잠수하여 여기저기 떠다니는 파편 아래로 몸을 숨기며 그들 쪽으로 헤엄쳐 갔다.

“윤채운이 어디 있어?”

“보이지 않아!”

“물속에 숨은 거야?”

“찾아!”

“어두워서 보이지가 않아!”

상황이 꼭 암살자들에게만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자욱한 먼지는 아직도 비산하고 있었고, 새까맣게 몰려든 구름은 시야를 어둡게 했다. 그리고 한 줄기 물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침의 날씨만 봐도 아무도 갑자기 나빠지는 이런 날씨를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허나 재영은 예측했고, 그녀가 예측했던 것보다 날씨는 더욱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지금 불고 있는 바람은 그녀가 말한 대로 태풍에 비기는 강력한 폭풍의 전조였다.

폭발이 멈춘 바다는 다시 거센 풍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채운은 파편들 사이에 교묘하게 몸을 숨기며 놈들의 배 쪽으로 다가갔다.

배 위에 있는 자들은 일말의 증거라도 없애기 위한 것인지 왜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해적이라니, 어림없는 소리였다. 저들은 계속 려국의 언어로 떠들고 있었다.

모두들 고개를 내밀어 물속의 그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숨을 들이마신 채 그들 바로 아래 숨어 있던 채운은 배 아래로 칼을 휘젓던 놈 하나를 잡아 내리며 배 안으로 튕겨 들어갔다.

“앗!”

순식간에 배 위에 있다는 우위를 빼앗긴 놈들은 채운의 칼에 목숨을 달리했다. 단지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어 먼저 배에서 떨어뜨린 놈 말고도 순식간에 세 명을 해치웠는데도 넷이나 남은 이들이 반격을 해 오기 시작했다.

챙챙.

좁은 배는 혈투를 벌이기에는 좋지 않았지만 채운은 다시 둘을 더 해치웠다.

“윽!”

하지만 거센 풍랑은 채운까지 넘어뜨리고 말았다. 팔에 입은 상처도 다 낫지 않은 마당에 그가 배에서 뛰어내릴 때 머리에 입은 부상도 심상치 않았다.

“지금이다!”

한 놈이 제 목숨을 도외시하며 채운이 칼을 잡은 손을 붙들고 늘어지며, 남은 한 놈이 이를 기회로 그의 몸을 찌르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긴 장대가 채운을 공격하던 이의 팔을 치고 지나갔다.

“대감!”

생각지도 못한 배 한 척이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그를 공격하려던 놈의 팔을 쳐서 막은 건 그 배를 젓던 노였다.

“길석?”

“서방님, 뒤에요!”

‘강희?’

강희의 목소리에 따라 반사적으로 몸을 피한 채운은 귓가로 무언가가 스치는 걸 느꼈다. 처음 배에서 떨어뜨린 놈이 그에게 단도를 던진 것이다.

그가 몸을 피하는 순간, 노에 맞아 공격이 무산됐던 놈이 다시 그를 공격해 왔다.

접전은 짧았다.

채운은 마지막 발악으로 공격하던 놈의 목을 베고 칼을 던져 물속에서 헤엄쳐 도망가려던 놈까지 해치울 수 있었다. 더 이상 적이 없는 걸 확인하는 그때, 강희의 울음 섞인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길석아!”

“강희? 부인!”

“서방님, 길석이가 저를 대신해 칼에…….”

채운이 강희의 목소리에 피한 칼은 그녀를 향해 똑바로 날아갔었다. 그것을 길석이 몸으로 막아 강희를 구한 것이다.

채운은 배의 노를 찾아 서둘러 강희에게로 향했다.

그사이 강희의 비명 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었다.

“길석아!”

뱃전에 앉은 길석이 어쩔 줄 모르는 강희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님, 저……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원정에서…… 저를 살린 갑옷을…… 누가 만들어 주셨던 건지요.”

“말하지 마! 말하지 마, 길석아!”

길석은 울컥거리는 목으로 피를 게워 내고 있었다.

“감사…… 합니다. 덕분에 제가 아버지가 된다는 것도 알게 해 주시고……. 이렇게 은혜를 갚는군요.”

“안 돼! 죽지 마, 길석아!”

쿨럭!

길석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핏물이 더욱 진해지는 것 같았다. 강희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지만 길석은 마지막 말을 위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마님, 수란을…… 부탁드…….”

미처 말을 다 하지도 못한 길석의 목이 꺾이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마침내 겨우 배를 옆에 댔던 채운이 바다로 떨어지려던 그의 몸을 받아 안았다.

길석을 배에 똑바로 눕게 한 채운은 강희가 혼자 타고 있는 배로 건너가 주변을 경계했다. 미칠 듯 마음이 울적했지만 그는 당장 길석의 죽음에 반응을 할 수 없었다.

몇 년을 함께하던 수족 같은 수하의 죽음보다 강희가 무사한 것에 마음의 추가 기우는 것이 채운은 못내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강희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다른 기습이 더 있을지도 모르고, 바다도 심상치 않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당장 그녀를 이 위험한 곳에서 구해 내야 했다.

강희는 건너편 배에 누운 길석을 바라보며 망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앉으시오, 어서! 몸을 최대한 배에 붙이고 웅크리시오!”

강희가 그의 말에 따라 얼른 앉으며 몸을 웅크렸다.

거세지는 빗줄기에 당장 몸을 덮을 것이 필요했다. 채운은 그녀가 앉은 자리 옆에 배를 덮는 것으로 보이는 방수 천을 볼 수 있었다. 이 배가 선원들의 배라 다행이었다.

강희에게 그 천을 덮어 준 채운은 이제 사방에 대고 소리를 쳤다.

“생존자는 응답하라!”

비와 바람 소리에 채운의 목소리는 묻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서 곧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습니다! 부부장 안길연입니다!”

“수병 장성재입니다!”

“수병 민석기입니다!”

“상장 김혁신입니다!”

“수병 김소강입니다!”

“상장 우영탁입니다!”

“우, 우리도 살아 있습니다! 저는 갑판의 선원 오중선이라 합니다.”

“저는 노잡이 유조백입니다!”

“저도 노잡이 김소달입니다!”

“저는……!”

살아남은 이들이 제각각 자신의 이름을 목청껏 소리 지르며 자신의 생존을 알렸다.

“이곳에 배가 있다. 모두들 어서 이곳으로 모여라!”

“배가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온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건 가까이서 들렸지만 대부분 멀게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려왔다.

“침몰한 배 쪽으로 오라! 다들 자기 주변에 알리도록 소리를 질러라! 침몰한 배 쪽으로 오라 외쳐라!”

이 배에는 길석이 던져 버린 것이 다였는지 노가 없었다. 채운은 다시 길석이 있는 배로 건너가 노를 집어 들었다.

그때 강희가 되돌아오려는 채운에게 말했다.

“서방님, 그 배가 더 큽니다. 그 배를 끌고 가세요!”

“그럼 당신도 이쪽으로 오시오!”

그의 말에 강희가 몸을 일으켰지만 순간 요동치는 배 위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가까이 붙여 댔던 배가 훌쩍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대로 주저앉은 강희는 채운에게 소리쳤다.

“서방님, 어서 그 배부터 대고 다시 와 주세요.”

말하는 중에도 배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강희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그러니 움직이느니 이대로 있는 것이 나았다. 안타까웠으나 당장은 강희의 말대로 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알겠소. 몸을 최대한 수그려서 배에 붙이고 기다리시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길석의 모습이 채운의 마음을 죄어 왔다. 허나 홀로 위태로운 배 위에서 기다리는 강희를 생각하며 채운은 바짝바짝 타는 속을 하고서 급히 노를 저었다.

생존자 확인에 맨 먼저 대답을 했던 부부장 안길연이 먼저 배에 올랐다.

“대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 헉, 길석 상장!”

안길연이 누워 있는 길석을 보고는 놀라 소리 질렀다.

“적의 암습에 당했다. 이 배는 해적의 뒤를 따라온 암습자들의 배다. 그들은 해적이 아니라 려국 사람이었다. 부상자들도 있을 것이다. 날씨가 심상치 않아. 곧 더 거센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서둘러라! 네가 지휘를 하여 사람들을 구조하고 빨리 돌아가라!”

“네? 대감께서는요?”

“내 아내가 탈출하지 못하고, 선원들의 배에 있었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올 테니 서둘러 생존자들을 구하라.”

“네!”

“내가 오지 않더라도 먼저 출발하라!”

“대감!”

채운이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안길연이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벌써 몇 명이 배를 향해 헤엄쳐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거센 물결에 다들 지친 행색이었지만 필사적으로 배를 향해 오는 이들의 얼굴엔 살았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안길연 다음으로 처음 배에 오른 이가 채운을 찾았다.

“대감께서는요?”

“마님께서 탈출하지 못하고, 선원들의 배에 계셨다고 하네.”

“네?”

“지금 마님을 모시러 가셨어.”

“저런!”

“지금 이럴 새가 없어. 바람이 심상치 않아. 대감께서는 이것이 폭풍이라 하셨어. 그러니 서둘러!”

“네!”

배에 오른 이들이 늘어나면서 여기저기 소리를 질러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다. 시간이 갈수록 거칠어지는 풍랑에 배는 더욱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애를 쓴 덕에 채운에게 답했던 사람들 말고도 몇 명이 더 구조되었다. 상황만 허락된다면 주변을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심상치 않은 바다에는 거센 빗줄기와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누군가 묻는 소리에 안길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채운이 향한 방향으로 배가 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긴 했지만 무사히 당도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가 받은 명은 생존자들을 구조해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가자!”

안길연의 명에 사람들은 그가 바라보던 방향을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이 배에는 유능한 노잡이 세 사람을 포함하여 모두 열일곱 명이 타고 있었다. 아니, 길석의 시신까지 모두 열여덟 명이었다. 너무나 거센 비바람에 다른 시신들은 건져 올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산 사람이나마 무사히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가 출발하자 그들은 곧 팔이 잘린 채 기절하여 바다에 떠 있는 한 사람을 더 구할 수 있었다. 헌데 부상자를 구하고 보니 해적 복장을 한 이였다.

“이런 죽일 놈!”

누군가 놈의 복장을 알아채고 도로 바다에 던져 넣으려 했다. 하지만 복장은 그래도 머리 모양이나 신음을 흘리며 하는 말은 왜의 말이 아니었다.

“그만!”

안길연은 노련한 장수였다.

‘헌데 해적이 려국 사람?’

그는 채운의 말을 떠올리자마자 저자의 정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저놈의 상처를 보살펴라!”

저 해적은 중요한 증인이 될 것이다.

안길연도 굳이 해적의 목숨을 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채운의 명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노를 젓지 않고 있는 다른 병사들에게 명했다.

“잠깐, 너희들 옷을 벗어 이놈의 옷과 바꿔라. 누구든 이놈에 대해선 입 밖에 내선 안 된다. 알았느냐?”

“네!”

거센 풍랑에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배는 점점 육지로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육지와 반대 방향을 보며 소리쳤다.

“앗!”

“무슨 일인가!”

“저기 배가!”

안길연이 병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그도 위태롭게 흔들리던 작은 배가 만 밖으로 밀려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감!”

“대감!”

안길연이 지르는 소리에 몇 명이 더 달려들어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아무리 목이 터져라 불러도 닿지 않을 거리였다. 배는 점점 더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돌풍입니다! 돌풍에 휩싸인 겁니다. 따라갈 수 없을 겁니다!”

한 선원이 멀어지는 배를 보며 소리쳤다.

“대감!”

이쪽 배도 완전히 무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철썩거리는 파도가 배를 삼킬 듯이 덤비고 있었다.

“몸을 수그리고 앉으십시오!”

누군가 지르는 소리에 안길연도 병사들에게 붙잡혀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노련한 선원들이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 육지로 향했다.

* * *

이날, 채운과 함께 배에 남았던 스물두 명의 무장 중 귀환할 수 있었던 병사들은 단 열 명이었다. 민간인인 선장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채운도 그중에 든 것으로 알려졌다.

안길연은 모두에게 입을 막으라고 명한 채 왕세자에게만 조용히 채운의 마지막 모습을 알렸다. 확실히 본 건 아니지만 그는 마님이 타고 있다던 그 배에 채운도 같이 타고 있었던 것이라 믿고 있었다.

채운이 탔다는 배가 한 척 더 있었다는 사실조차 이들만 알고 대외적으론 숨기고 있었다. 채운의 생존 가능성을 점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무사히 살아 있기만 하다면 생존 가능성을 숨기는 것이 나았다.

봄의 폭풍은 재영이 예고한 대로 태풍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거센 위력을 동반한 채 이틀을 꼬박 불고 나서야 숨을 잠재웠다. 진수 행사를 이날로 잡은 천문관들의 목이 몇 날아갔지만 그것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애꿎은 처사였을 뿐이었다.

국정에서는 해적선이 이곳까지 오게 될 수 있었던 데 대한 질타와 공방이 벌어졌으나 최사립에게 죄를 물을 증거가 없었다. 그들이 동원한 배는 해적선이고, 일을 벌인 이들도 모두 해적들이기 때문이다.

배를 폭발시킨 화약에 대한 말도 나왔으나 영악한 최사립은 이미 진수 행사가 있기 며칠 전 말을 맞출 증거를 만들어 둔 상태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잔치에서 축포 몇 개를 쓴 것 가지고 자신을 모함한다며 그 말을 꺼낸 대신에게 죽일 듯이 반박했다.

그 대신은 바로 강희 덕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부인의 남편인 참지정사 김승언이었다. 허나 김승언이 꼿꼿하게 최사립에게 맞섰어도 불행히도 최사립의 말 말고는 증거가 없었다.

왕세자가 확보한 유일한 증인은 다행히도 최사립에게 들키지 않고 몰래 빼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팔이 잘린 채 구조된 해적은 며칠이 지나 깨어나고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에게는 고문조차 할 수 없었는데, 감시가 소홀하기만 하면 죽으려 하는 터라 그를 제대로 살려 내는 일이 우선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후 몇 날에 걸친 수색으로 시신 몇 구를 더 찾을 수는 있었지만 생존자는 없었다.

그런데 시신 중 몇몇 몸이 온전한 해적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복장이 명백히 왜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더욱 왜의 소행이라는 결론으로 몰아갈 뿐이었다. 최사립 측은 저들이 배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일을 조장했다며,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 목청 높여 떠들고 있었다.

차라리 그들이 선착장에서 일을 벌이기라도 했으면 확실한 반역의 증거를 잡아 몰아칠 수 있기라도 하련만, 그들은 배를 망가뜨린 것 말고는 너무나 얌전히 있었다. 만운을 위시한 경계가 너무나 센 탓도 있었고, 아직은 건재한 왕의 병사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후 왕세자는 먼바다에까지 나가 채운과 강희를 찾도록 했다. 그러나 그 드넓은 바다에서 폭풍에 밀려 나간 작은 배 하나를 찾을 길은 요원했다.

강희의 실종은 행사에 참석했던 몇몇 부인의 입소문을 타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채운이 죽은 것이 어리석게도 탈출하지 못한 못난 부인을 구하려다 그런 것이란 소문이 떠돌았다.

참지정사가 나서서 강희가 배에 남은 이유가 자신의 부인을 먼저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이는 별로 없었다.

형과 형수를 한 번에 잃은 만운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바다를 헤매고 다녔다.

왕세자도 처음엔 애가 타서 도왔지만 그렇게 한 달이 넘도록 하루가 멀다 하고 바다를 뒤지는 만운을 나중엔 강제로 말려야 했다. 그대로 두면 멀쩡하던 만운까지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만운은 수색을 멈추고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안길연에게 들은 형과 형수의 마지막 모습이 그래도 배 위에 있었다는 데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어디든 떠내려가서 무사할 것이다,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렇지, 형? 그렇지요, 형수?”

만운은 먼바다를 향해 매일같이 그런 주문을 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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