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꿈을 만나다 (13/38)

13. 꿈을 만나다

“어서 오세요, 형수!”

만운이 날듯이 다가와 강희를 반갑게 맞았다. 가마에서 내리는 강희를 일부러 왼손을 내밀어 부축하는 모습이 그의 지금 심정이 어떤지 솔직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백 마디 감사의 말보다 강희의 마음을 더 울컥하게 만들었다. 만운이 감사해 할수록 그녀는 더욱 마음이 죄어 왔다. 어떤 말로 포장해도 그 일과 만운의 이것은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윤 낭장, 상봉은 엊그제 한 것이 아니었나? 누가 보면 전쟁터에서 이제 돌아와 상봉한 걸로 보이네.”

강희를 너무 반갑게 반기는 만운에게 왕세자가 한마디 했다. 강희의 입궁에 궁의 입구에는 왕세자를 비롯해 궁의 대단한 사람들이 마중을 와 있었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성 부인. 성 부인이 오셨으니 내 그 별미를 다시 먹어 볼 수 있겠구려.”

“황감하옵니다.”

“별미라니요?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그런 게 있네. 윤 낭장은 몰라도 되네.”

“앗, 어린 충신을 이리 홀대하시는 겁니까! 저는 아직 자라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또랑또랑한 얼굴로 묻는 만운의 얼굴은 저만 간식을 주지 않아 심술이 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걸 또 수가 제대로 받아 주고 있는 것이다.

“참, 자네는! 성 부인이 누군가. 자네 형수 아닌가? 내가 별미라 하는 걸 자네는 원하는 때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앗, 그렇군요. 송구하옵니다.”

전혀 송구하지 않은 얼굴과 목소리로 뻔뻔스레 말하는 만운을 보며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강희까지 궁으로 피해야 할 정도로 긴장감이 감도는 이때 저런 농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활력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까부는 만운을 그냥 두고 볼 채운이 아니었다.

“만운아.”

“넵, 평장사 어른. 소인, 지금부터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만운이 지레 냉큼 답하며 제 입을 막았다.

형제의 공방이 재밌긴 하지만 계속 보고 있기엔 할 일이 많았다.

“어서 드세. 오랜만에 성 부인이 온다고 왕세자비가 기다리고 있다네.”

“네…….”

그리 답하는 강희의 눈이 채운을 지나 뒤에 서 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그걸 본 것인지 방금 입을 다물겠다던 만운이 두 여인을 소개하기 위해 나섰다.

“아, 참, 형수, 여기 이분 처음 뵙지요? 한재영이라는 아가씨에요. 제 선배인 한만식 중랑장님의 여동생이고요. 이제부터 형의 서기 일을 하실 거예요.”

‘전에 원정길에 뵌 그분입니다, 참모로 함께 갔던’이라고 만운이 그녀를 소개하며 귓속말로 재영에 대해 부언했다.

“서기…… 요?”

“네, 얼마나 똑똑한 아가씨인데요.”

만운의 사심 없는 감탄에 재영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재영 아가씨, 우리 형수요. 우리 형수, 참 예쁘지요?”

강희를 자랑하는 만운은 열아홉이 아닌 아홉 살인 것처럼 보였다.

“만운아!”

그를 다시 부르는 채운의 음성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아, 헙, 네! 이쪽은 한재영 아가씨, 이쪽은 우리 형수입니다.”

형의 제지로 만운이 깔끔한 소개를 마친 것 같았지만 두 여자는 서로 예를 갖춰 인사하며 각기 충격에 빠져 있었다.

가까이에서 처음 대면한 재영의 모습은 강희의 정신을 번쩍 깨우는 것 같았다.

재영의 당당한 아름다움은 내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꿈에서도 보았지만 한재영이란 여인에겐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궁의 입구에서 별궁 응접실까지 잠시 걷는 길에서도 지나치는 궁인들과 웃으며 인사하는 것만 봐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강희는 꿈에서 본 사람들을 새로 만날 때마다 그 꿈이 정말 미래였다는 충격을 받아 오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 중 재영은 채운 다음으로 그녀를 가장 크게 뒤흔들고 있었다.

강희는 이전에 그녀가 어떻게 채운의 곁에 있었는지 이제야 알 수가 있었다. 그렇게 성강희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운명이 같은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재영 하나뿐이었으면 싸워 볼 생각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이미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족쇄가 되어 있었다.

꿈에서 본 것이라 하나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울던 그를 잊었단 말인가. 하룻밤을 더 그와 보냈다고 그새 욕심을 부리려 하다니.

재영을 보자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내던 욕심을 깨달으며 정신이 번쩍 뜨이게 되었다.

재영은 전쟁뿐 아니라 계속 채운의 곁에서 그를 돕고 있었다. 더구나 이전의 이 시기라면 아직 성강희와 혼인하기 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이때부터 벌써 싹텄을 것이다. 그런 사이에 성강희와의 혼사가 진행되었을 것이고, 성강희가 그에게 마지막 선을 넘어 버린 사고 이후 온전히 그녀를 지워 버린 그가 재영을 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재영이 그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꿈에서 내가 어땠더라?’

아마도 둘째 부인을 들인 남편에 대한 모멸감에 길길이 날뛰었던 것 같긴 했다. 그러나 그것이 질투가 섞여 그런 것인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 날뛰었던 것도 의무감으로 그랬던 것인 양 금세 회복하여 재영에게 철저히 경멸과 모멸감을 주는 것으로 제 성질을 풀었던 것 같다. 그녀는 제가 낳은 아이도 더러운 핏줄을 이었다 하여 하녀들 손에 맡긴 채 버려두다시피 했으면서도 아이에게 재영의 손이 닿는 건 또 눈에 불을 켜고 막았다.

강희는 생각할수록 꿈속 그녀의 끔찍함에 치가 떨렸다.

꿈속의 자신은 그녀에게 죄책감과 기억 몇 가지를 남겨 준 것 말고는 도무지 편히 생각할 만한 구석이, 지금의 자신과 일치시킬 만한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또 남의 일 생각하듯 혐오스러움을 전가하고 있는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악을 떨던 성강희를 자신과 분리해 생각하는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다 한들, 과거의 일은 뭐라 변명하겠는가.

강희는 미래로 흘러가는 운명이라는 마차에서 못돼 먹은 성강희를 쫓아낼 수는 있어도 그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재영의 얼굴만 보아도 남의 것 위에 서 있는 자신에게 진짜 주인이 나타나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직접 눈앞에서 보게 된 재영이 채운을 바라보는 눈빛은 강희의 마음에도 아리게 박혀 오고 있었다.

그를 놓아주겠다고 말한 기한이 다가옴과 동시에 그의 옆에 당당하게 있게 된 재영을 만나게 되자 강희는 자꾸만 위축되고 있었다. 헤어날 수 없는 죄책감과 재영을 보는 순간 틀어박힌 질투가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기에 강희는 이미 자신으로 인해 바뀐 미래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영은 만운이 제 형수를 반기는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왕세자의 말을 빌리자면 방금 전 형수가 탄 가마가 보이자 뛰어가는 만운의 모습은 커다란 강아지가 겅중거리며 사람을 반기는 모습이었다.

“낭장이란 직위가 무색하군. 덩치나 일신의 무력은 장정 몇을 해 넘겨도 저런 걸 보면 아직 애야.”

수의 말에 채운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만운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꾸밈이 없는 솔직한 이이기에 그가 보이는 친근감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리고 직접 만난 그의 부인은 도성 인근에까지 널리 퍼진 유명한 소문과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의 여인으로 보여 재영은 그것에 가장 놀라고 있었다.

성강희에 대한 나쁜 소문은 혼인 직후에도 계속 양산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아직 호사가들의 입담에 올리기 좋은 사람이라 어찌 안 것인지 각방을 쓰는 것까지 소문이 났었다. 그것에 대해서도 평민 출신 남편을 천대하여 그렇다더라, 라는 소문이 돌아 ‘역시나 성강희’라는 말을 들었다.

요즘 강희는 혼인 후 두문불출하여 다른 소문이 더 퍼지지는 않았지만 아직 그녀에 대한 평판은 바뀐 게 없었다.

즉, 말하자면 강희는 채운의 짐작처럼 이혼장을 서슴없이 내밀어도 모두들 혀만 차고 말 정도로 형편없는 평판을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것이다.

재영이 알고 있는 채운의 부인 성강희라는 여자는 그랬다.

허나 실제로 만난 성강희라는 그의 부인은 단 한 가지 아름답다는 것 말고는 소문과 맞는 얘기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실제 두 사람의 부부 관계가 어떤지까지는 모르지만 그녀 자체로 풍기는 분위기만 보더라도 그토록 망종이며 패악을 떠는 여인이라 상상하기 힘들었다.

또 만운이 대놓고 자랑하듯 형수를 소개하면서 보이는 그 친밀감은 새삼 놀랍기만 했다.

그것은 재영에게 또 다른 충격이었다.

재영은 만운이 자신과 특별한 친밀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장의 그 두렵고 공허한 시간에 일부러 그녀에게 자주 말을 걸어 주고 도닥여 준 이가 바로 만운이었다. 서로 간에 남녀의 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남매처럼 친분을 다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면 친오라버니보다 만운이 더 남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허나 그 긴 시간 동안 만운이 해 준 재밌고 즐거운 얘기와 가벼운 농들 중에는 한 번도 형수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다. 재영은 그것이 소문의 그런 여인이 형수이기에 말하기 싫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만운은 자신의 형수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까워 아무 소리도 않은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 얘기를 입 밖에라도 내면 울음을 참지 못할까 봐 차마 하지 못하는 여느 병사들처럼, 만운도 그런 것이었다.

만운이 형 옆으로 최대한 가까이 의자를 끌어다 놓고 제 형수를 앉게 하곤 흐뭇한 얼굴을 하는 게 보였다. 만운이 그녀를 어머니, 누이, 그리고 형수로서 무척이나 친애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몰래 쳐다본 채운의 눈을 본 재영은 까닭 없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이는 눈치 못 챘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부인을 보는 그의 눈은 아리고 아파 보였다. 그러나 부인을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를 보는 감정과 그가 아내를 보는 모습이 비슷해 보여 재영은 그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에게 감히 다른 마음을 품으려 한 건 아니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부인을 은애하는 것에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또 왜 그리 아픈 눈을 하고 있는 것일까?’

* * *

별궁의 응접실에는 왕세자 부부와 채운, 강희 부부, 만운과 재영 여섯 명만이 모여 있었다.

기쁘게 웃으며 한담을 나누는 모습은 문을 닫는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시녀가 내온 차를 마시는 사람도 없이 그들은 바로 코앞에 닥친 왕세자의 일정에 생길 수 있는 위협에 대해 논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논의는 주로 화약의 양과 유통할 수 있는 경로, 그리고 설치할 장소와 왕세자의 일정 중 어느 곳을 공략할 것인지 그 예상을 하는 것이 중점이었다.

벌써 어제부터 밤새도록 토의해 온 일이지만 직접적인 수색을 하기엔 막연하고, 닥친 일들은 코앞이라 가장 가능성이 많은 곳을 파악하여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정황만으로 저들의 처소를 수색할 수도 없고, 설사 수색해서 찾는다 하더라도 다른 목적으로 구했다 발뺌하면 그만일 일이었다. 또 수색을 해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그러니 저들이 일을 벌이는 순간에 잡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성 대감이 가져온 자료에 의해 저들의 음모가 알려지자 행사를 취소하자는 논의가 먼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저들의 발칙한 행동에 지레 무서워 피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라는 의견으로 막혔다.

그리고 이번에 피한다 해도 저들은 언제든 다시 일을 도모할 것이다. 아직 이쪽에서 화약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을 모를 테니 이때 잡아들이는 것이 나았다.

저들의 행동은 역모였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저들의 교활한 만행을 잡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했다. 증거만 제대로 잡을 수 있다면 이것으로 최사립 측을 완전히 몰아낼 수가 있었다. 그런 수의 확고한 의지에 왕세자가 참석하기로 예정된 행사는 그대로 진행하게 되었다.

채운은 어제 입궁하자마자 최사립 측에 날랜 병사들 여럿을 은밀히 보내 놓았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소식을 가져오는 이가 없었다.

“우선 저들이 가장 많이 해 왔던 암습의 유형을 살펴본다면 가장 유력한 곳은 사냥터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약을 사용하는 것과 연관 지어서는 사냥터가 가장 거리가 먼 곳이기도 합니다.”

만운도 제 의견을 피력했다.

“그렇지만 사냥터가 화약을 쓸 만한 장소로 적합지 않다 해도 저들의 암습이 가장 용이하고, 도발할 가능성이 많은 곳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 허나 우리의 경호 태세는 그런 일에 항시 대비가 되어 있지 않느냐. 지금 우린 저들이 화약을 터뜨리려고 하는 곳을 찾는 중이다.”

“허면 저들이 미리 설치한 장소로 저하를 유인하려는 계책이라면 어떨는지요?”

재영의 말은 확실히 일리도 있었고,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허나 채운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유인한다 해도 화약이 터질 시간이 필요하오. 그동안 저하께서는 탈출할 시간을 충분히 벌 수가 있소.”

채운의 말이 맞았다. 일정 장소에 유인한다 해도 막힌 건물이나 구덩이 같은 함정에 빠지는 게 아니라면 최악의 경우라도 왕세자는 살릴 수 있었다.

저들의 목적이 왕세자의 목숨이라면 아무래도 사냥터는 화약을 사용하는 곳으로는 적합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 닷새 남은 사냥 대회는 전과 같은 수준의 경호에다 한 조를 더 배치하여 주변 경계를 더 샅샅이 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낫겠소.”

왕세자의 결론에 다른 세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머지 두 곳의 일정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군요.”

그들은 그 이후의 도발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재영이 어제 성 대감이 보낸 화약을 보고, 저들의 도발은 한 달 안에 벌어질 것이라 장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서기, 어제도 그랬지만 한 서기는 저들이 늦어도 한 달 안에 일을 벌일 거라 장담하던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지금 저들이 가진 화약의 특성 때문입니다. 저들은 그것을 몰래 들여와야 하는 입장이라 군사적인 사용 목적이 아닌 행사용 폭죽으로 들여왔습니다. 그것도 대단위 규모로 말입니다. 성도종 대감께서 구해 오신 표본이나 유통 방법 등을 보더라도 행사용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나라에서는 아직 화약을 취급할 수 있는 기술자가 적어 행사용으로 들여온 것을 거대한 폭발이 가능하도록 가공하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양이 위험할 정도의 수준인 건 확실하나 지금 우리나라의 날씨로 보아 그 화약은 한 달 내에 사용하지 않으면 사용이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재영의 막힘없는 설명은 듣는 이들을 감탄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여인이 어찌 화약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상세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덕분에 이런 논의를 하는 자리에 함께하는 것이지만 볼수록 빛나는 여인이었다.

수는 재영을 반드시 측근과 혼인시켜 보위에 오르고도 그녀의 명석함을 길이길이 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군.”

“그럼 사냥 대회 다음은 배를 진수하는 행사인데, 그곳은 어떻소?”

“배는 한정된 공간이라 화약을 설치하기에 가장 좋으면서 또 발각되기도 쉽습니다. 또 수기에 쉽게 침범당할 수 있는 곳이라 미리 설치할 수가 없고, 그만한 양을 옮기려면 많은 사람들을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미리 배 안에 설치한다면 가장 찾기 쉽겠군요.”

“그게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 몸에 지니고 한곳에 모아 제 몸을 사르는 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 만약 배에 설치한다고 생각한다면 미리 선원들과 인부들의 몸을 철저히 수색해야 하겠군요.”

만운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그래도 이것은 가능성 중의 하나였다. 저들도 언제까지나 이쪽에서 화약의 존재를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가능성들도 알아봐야 했다.

“사신들의 영접 장소도 유력하군요.”

“허나 그곳도 제한된 장소라 미리 설치하여야 한다면 발각되기가 쉬울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 쪽에서 화약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세 경우의 어느 쪽도 발견하고 증거를 잡아 치죄할 여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쪽에서 화약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걸 안다고 가정하면 어떤 기발하고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할지 모릅니다.”

수색의 범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저들이 이쪽에서도 화약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덤빈다면 과연 시도할 방법이란 기상천외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해 봐야 했다.

“지금까지 확실한 건 하나뿐이오. 그 화약을 터뜨릴 시기가 스무 날 안쪽이라는 것. 그러니 당장 저하의 행차 세 곳 모두 위험 수위는 같다고 보면 될 것 같소. 또 저들이 우리가 화약의 존재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따라 모든 경우가 다르다 해도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하를 안전하게 모시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 되는 것이오. 화약은 폭발의 무서움 때문에 위험한 것이지, 그것에 대해 미리 대비한다면 결코 저들은 세자 저하를 해할 수 없을 것이오. 소신, 어떤 일이 있어도 저하를 무사히 뫼실 것입니다.”

여러 논의가 이어진 가운데 마지막으로 채운이 정리를 하며 좌중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화약을 쓰려 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실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화약조차 저들의 도발 방법 중 하나였음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소, 윤 대감. 역시 윤 대감이 내 곁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든든하오. 저들이 화약을 터뜨리려 한다는 자체로 이렇게 흥분하여 논의할 일은 아니었던 것 같소. 그건 저들의 수많은 도발 중 한 가지 방법이 더 늘었을 뿐이오. 그러니 우린 사전에 그것을 설치할 구멍을 미리 차단하고 찾아내면 되는 것이오. 우리, 저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연회를 더 성대히 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여 줍시다.”

“그렇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요히 있던 왕세자비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을 보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시녀가 들어와 연회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알렸다. 오늘의 주역인 여섯 사람이 드는 것으로 서궁에서 벌이는 공식적인 개선장군들을 위한 행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강희가 서궁으로 초대된 이유는 개선한 윤채운과 장수들의 가족을 위한 축하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연회는 왕세자비와 강희가 주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세자비와 함께 연회 장소로 향하는 강희는 고개를 쳐들었다. 혼인 후 처음, 아니, 꿈에서 깬 이후 처음 참석하는 연회였다. 연회에는 개선한 장군의 부인이 아닌 소문의 주인공인 강희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강희로선 또 다른 의미의 전쟁터로 향하는 것이다.

연회장에 왕세자 부부가 입장하자 모두 일어서서 인사를 한 이후 제각각 무리를 지어 모여 있었다.

강희가 왕세자비의 바로 뒤를 따라 들어서는 순간엔 그녀에게 쏠리는 시선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강희가 왕세자비와 함께 그들 앞을 지나 자리에 앉자 한 장수의 부인이 다른 부인에게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혼인한 이후로 요즘은 패악을 부리지 못하고 있다지요?”

“그거야 윤 대감님이 단속을 잘하셔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쥐 죽은 듯이 자중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자중하기는. 대신 왕세자비마마를 자주 찾아뵈며 아양을 떨고 있다더군요. 저기 보세요. 오늘도 비마마의 곁에 앉아 친밀함을 과시하려 하는 게 보이지 않나요?”

“그렇군요.”

주어가 빠진 대화였지만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강희에게 쏠려 있었다.

그들로서는 티 나지 않게 보고 있는 줄 알겠지만 강희는 그들의 시선을 따끔따끔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바로 왕세자비와 처음 눈도장을 찍었던 이와 비슷한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최대한 점잖게 말한다 해도 모든 이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특히 윤채운의 수하 가족들을 얼마나 업신여겼던가.

채운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영웅들과 그 가족들에게마저 제 아랫사람 대하는 마냥 패악을 부렸으니, 윤채운은 그녀가 아내라는 사실조차 부끄러워했다.

채운의 부장들과 가족들은 벌써 서로 인사를 나누고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부상으로 아직 치료하느라 참석하지 못한 이도 있었고, 맹사강처럼 안타깝게도 전사하여 올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원정에 함께 참전한 한만식과 최영락, 이세오는 각각 중랑장과 낭장으로 승차했고, 참전하지 못한 좌우부장 김상진과 나응호도 뒷받침을 든든히 한 공을 사서 낭장이 되었지만 맹사강은 중랑장에 추서되었다.

오늘의 이 연회는 그들 모두를 칭송하고 위로하는 자리였다.

연회가 시작된 얼마 후, 한 젊은 여자가 서너 명의 젊은 부인들과 아가씨들 사이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녀가 바로 맹사강의 부인이었다.

맹사강은 벌써 지난해 구마도를 점령하던 전투 중에 전사했다. 처음엔 의젓하게 버티던 그의 부인도 늠름한 다른 장수들을 보다가 기어이 눈물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몇몇 부인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달래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강희는 다른 부인들보다 먼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수심이 가득한 부인의 얼굴을 눈치채고 몰래 시녀를 불러 이것저것 챙겨 주기를 명하긴 했지만, 결국 부인이 북받치는 슬픔에 터뜨리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순간 강희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다른 부인이 그녀를 발견하고 가는 걸 보고는 얼른 모르는 체 고개를 돌렸다.

강희는 꿈에서와 같이 오만하며 부족하기만 한 자신의 실수는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저에게 향하는 시선을 바꿀 마음도 없었고, 바꿔서도 안 됐다.

이 연회는 왕세자와 윤채운의 사람들이 주축인 연회라 청왕이 베푼 연회와는 다른 자리여서 강희에 대한 험담은 그때처럼 노골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시선이 좋지도 않았다.

왕세자비도 남편을 잃은 부인에게 한마디 위로를 해 주는 자리에서 강희만 고개를 돌리고 있으니,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세자비 외엔 모두 무시하는 듯한 오연한 태도를 보이는 강희 때문에 잠잠해지고 있던 성강희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양산되고 있었다.

만운은 부인네들의 이상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왕세자와 말을 나누면서도 강희에게 집중하고 있던 채운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있었다.

‘설마 강희는 아직도 그것에 매여 있는 것인가?’

채운은 아직 태워 버리지 않은 강희의 이혼장이 그의 집무실 어딘가에 잠자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집으로 귀환하던 날 강희를 다시 안는 순간, 아니, 그 이전 만운의 장난에 넘어가 초야를 치르던 때 그것은 이미 무효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강희는 아직도 그것에 매인 듯이 보였다. 그래서 제 평판―악평―을 유지하려고 저토록 애를 쓰는 게 아닌가.

사실 채운의 눈에는 그녀가 실제로 어쩌고 있는지가 다 보였다. 강희는 남들이 안 보는 것 같으면 안타까움이 가득하여 맹사강의 부인 쪽을 쳐다보다가 누군가 자신을 보는 것 같으면 눈을 새치름히 뜨고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약간 치켜 올라간 강희의 눈은 그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오만하게 보여 그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충분히 오해를 살 만했다.

‘저 여자를 정말!’

이 일만 끝나면 당장 그것을 찾아서 강희 앞에서 불태워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강희는 계속 저렇게 바보짓을 할 것이다.

강희와 인연이 이어진 것도 다 하늘의 뜻이다.

혹시 다른 이들 말처럼 평민 출신 남편을 혐오하는 것이라서 부득불 이혼을 강행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자신의 품에 안겼던 강희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품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런 표정까지 거짓으로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강희는 분명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저토록 그것에 매달려 있는 것인지.

그것을 그녀가 보는 앞에서 불사르고, 그녀에게 직접 확인해 봐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최사립 측의 도발을 막는 게 먼저였다.

연회는 지방에 있는 장수의 가족들이 오고 가는 시간들이 포함되어 사흘이나 더 이어졌다.

겉으로는 연회를 치렀지만 만운과 채운, 휘하 장수들과 병졸들은 사냥터를 샅샅이 누비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냥 대회는 일 박 이 일 일정으로 용수산 기슭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였다. 보통의 사냥 행사에는 부인들이 따라가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안전을 위해 여인들을 배제하기로 하여 왕세자비와 강희는 계속 궁에 머물게 되었다.

허나 재영은 사냥터에서도 시녀 복장을 한 채 채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그들 측의 장수 한 사람의 몫을 하는 사람이었다. 칼 부딪히는 쇳소리가 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도 발한 그녀의 안목이 수행원으로 따라온 여인들 사이에 숨은 간자들을 찾아내는 데에도 활용되고 있었다.

허나 사냥 대회 당일까지 최사립 측의 다른 도발의 조짐을 찾을 수 없었다.

* * *

“열심히 찾아들 보라지.”

왕세자와 채운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최사립의 입가엔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그의 둘째 아들 최필선이 그들 쪽을 보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왕세자와 윤채운이 우리에게 화약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 양이 들어오는 데 모를 리가 있나. 그러니 저렇게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발바리처럼 구덩이를 파 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발바리요?”

“그래, 발바리. 재롱을 피울 때는 귀엽지만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사방을 파헤치며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성가신 존재가 되는 거지. 처음엔 봐주지만 주인의 눈에 거슬리면 결국 식탁에 한 접시의 요리로 올라오는 것밖에 더하겠는가.”

“주인…… 말입니까?”

“그래, 주인. 지금 이 나라에 다음 주인이 뉘가 되셔야 할지 아직도 모르고 있는 저들이 바로 발바리일세. 그런데 제가 주인이라 착각하는 개는 결국 무엇이 되어야 하겠는가?”

“그렇지요, 한 끼 요리. 역시 아버님의 비유는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하신 것 같습니다.”

“아부할 필요는 없다. 아무튼 왕세자와 윤채운이 저렇게 찾아다니는 걸 보면 화약을 찾는 게 확실해. 하지만 여기 있지도 않은 화약을 어찌 찾겠는가?”

“하하하, 그렇지요. 그리고 다음에도 절대 찾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숨긴 데가 어디인지 절대 찾지 못할 것이라는 듯 최필선의 표정엔 확실한 자신감이 들어차 있었다.

“그래, 저들이 기를 쓰고 찾는 걸 우린 구경이나 해야지. 하지만 저리 열심인데, 그냥 구경하기도 심심하여 내 재미있는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

“네? 선물이라니요?”

“저기 가장 열심히 움직이는 발바리에게 좋은 경험을 하게 해 줘야지. 어차피 왕세자야 너무 철저해 걸러질 뿐이니, 윤채운에게 쓰는 게 좋을 것이야.”

“아버님, 뭘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왜, 궁금한가?”

아들을 향해 웃는 최사립 대감의 눈가는 음모를 꾸미는 자답지 않게 여유 있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네, 궁금합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윤채운이 성도종의 사위라는 걸 말이야. 헌데 그 여식이 윤채운의 출신이 천하다 하여 잠자리조차 않는다고 들었어. 그러니 내 그에게 여인을 품게 해 줄 생각이야. 그러니 선물이 아니고 뭐겠는가?”

“여인이라니요? 그자는 기방에도 유곽에도 가지 않는 자라 여인을 들이는 시도조차 해 보지 못했지 않습니까?”

“누가 여인을 들여 준다 했는가. 여인을 품게 해 준다는 거지. 내 얼마 전 송국에서 온 아주 좋은 약을 구한 게 있어. 오늘 밤에 윤채운에게 써 줄 생각이야. 그럼 좋은 구경이 생기지 않겠는가?”

“좋은 약이라니? 허면…….”

“아주 효과 좋은 미약이지. 제아무리 목석같은 사내라도 그 약을 먹고 제정신으로 버티긴 힘들 것이야. 대쪽같이 바르고 성인군자인 양 하는 이가 사냥터에서 아무 하녀나 덮쳤다면 참 볼만하지 않겠는가. 그게 왕세자의 시녀들 중 하나라면 참으로 더 꼴사나울 것이야. 어떤가? 이만하면 온 사방에 제 사위 자랑만 해 대며 으스대는 성도종도 다시는 나대지 못하겠지?”

“하지만 윤채운, 그자에게도 웬만한 독은 다 걸러지지 않습니까?”

“그건 일반적인 독을 판별하는 정도로는 걸러지지 않는 것이야. 효과가 그토록 빠르지 않다면 왕세자에게도 써먹어 볼 수 있을 텐데……. 조금 아쉬워.”

“그런 것이로군요. 하하, 그야말로 재미있는 선물이 되겠군요. 윤채운의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줄에 정말 좋은 선물이 되겠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다음엔 펑! 접시의 요리가 될 일만 남은 것이지.”

최사립은 폭발의 순간을 손으로 표현하고 싶은 듯 양손을 쥐었다 활짝 폈다.

아이가 하는 행동이라면 재롱으로 보이겠지만 최사립의 손이 벌이는 일은 끔찍한 만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을 알아본 것처럼 채운이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한순간 최사립의 눈과 저 먼 곳에 서 있는 채운의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최사립의 작은 손짓을 알아본 채운의 눈이 무섭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 채운을 노려보는 최사립의 입가에 맺힌 미소에는 진득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 * *

“화약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찾지 못했습니다.”

“저도 찾지 못했습니다.”

채운의 병사들이 속속 보고를 하고 다시 경계를 위해 돌아갔다.

채운도 미리 사냥터를 탐색하는 척하며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대규모로 화약을 묻은 흔적은 없었다. 더구나 어제까지 연이틀 비가 내린 바람에 설사 설치했다 해도 화약은 쓸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재영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병사님들과 왕세자 저하께서 다니실 곳을 모두 둘러보았지만 몰래 저격할 수 있는 곳은 몇 군데 경계하게 했어도 화약을 설치할 만한 곳은 찾지 못했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그럼 다음과 다다음을 찾아봐야겠군.”

“이제 저들도 우리가 화약을 찾는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간자도 많았고, 저들도 경계하고 있는 바에야 우리가 찾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알겠소. 오늘부터 저들도 우리가 안다는 걸 가정하에 다시 생각하고, 수색 범위를 넓혀야겠소.”

“사냥의 공과는 저들에게 준다 해도 오늘은 부디 예정된 지역만 다니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굳이 공과를 넘길 생각까지는 없네. 내 저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생각이야.”

“송구하옵니다, 저하. 그저 걱정에 올린 말씀입니다.”

“아니네. 괜찮아.”

그때 한 시녀가 따끈한 차를 내왔다.

이 사냥 대회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시녀들은 모두 왕세자비의 심복들로, 재영이 일개 시녀가 아닌 평장사 대감의 서기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었다. 덕분에 재영은 막사 안에서만큼은 편하게 논의할 수 있었다.

“한 서기님도 차로 목을 축이며 하셔요.”

“고맙습니다, 해령 시녀님.”

“별말씀을요. 그리고 그냥 해령이라 부르라니까 왜 자꾸 말씀을 높이셔요.”

눈치 빠른 시녀는 재영에게 그렇게만 말하고 곧 자리를 피해 주었다.

곧이어 사냥 대회를 알리는 나팔이 울렸다.

그날의 사냥에는 한만식이 가장 큰 성과를 올렸다. 궁술에 탁월한 조예가 있는 그가 사냥물의 종류와 숫자, 크기에서 사냥 대회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제치고 가장 월등한 성적을 낸 것이다.

왕세자는 자신의 경호에 사냥은 생각도 못하고 있는 채운 형제 대신 그들의 휘하 장수인 한만식이 우승한 것을 크게 기뻐했다.

재영은 오라버니께 다가가 축하 인사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차마 가까이 가지 못했다.

한만식은 여동생의 공을 무엇이든 보상해 주고 싶어 하는 왕세자의 의지와 그가 양보하면 최사립 대감 측에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정치적 계산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중랑장의 자리를 수용해야 했다. 허나 남들은 부러워할 엄청난 승차라도 그는 자신의 공이 아닌 여동생의 공에 편승한 것에 심한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재영을 더욱 싫어하고 멀리하고 있었다.

“내 힘으로, 나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연회에서 마주친 오라버니는 그리 말하고 돌아섰다. 재영은 그런 오라비니와 더욱 냉랭하고 멀어지기만 하는 틈을 메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 궁에서 벌어지는 연회와 다른 소박한 술자리가 있었다.

재영은 모두들 둘러앉은 자리에서 형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접시를 밀고 동생에게 술 한 잔을 따라 주며 기특하게 보는 윤씨 형제의 모습을 부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맞은편에선 수가 재영과 똑같은 시선으로 그들 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커읍, 커억.”

온몸이 타는 것 같았다.

채운은 방금 전 마신 차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토하려 해도 빠른 약효는 이미 피를 따라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들끓기 시작하는 열기는 곧장 그의 하복부로 몰렸다.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 약의 정체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이 약은 만운이 일을 벌이려고 술에 섞었던 그런 수준의 약이 아니었다. 만운의 약은 궁의 의원과 의논하고 조제하여 정말 한밤에 칼춤을 추면서 가라앉힐 정도의 것으로 몸을 보하는 약이기도 했다.

허나 이것은 오로지 남자의 정욕을 뿜어내기 위해 만들어 멀쩡한 사람을 당장 발정 난 짐승으로 만들 수도 있을 만큼 지독하고 고약한 약이었다. 잘못하면 광증에 이를 수도 있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채운이 마시는 차에 이것을 넣을 수 있었다는 건 방금 전 차를 가져온 시녀가 매수되었거나 그녀도 모르는 새 약이 섞여 있었다는 말이다.

채운은 지금 그런 걸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그리고 그 시녀를 찾는다면 약에 대한 걸 추궁하기보다 이 미친 약효를 시녀에게 풀어 버리고 싶을 것만 같았다.

모두들 경계를 서거나 자러 간 이때,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채운은 그저 만운이 오늘 왕세자의 막사를 지키는 당번이라 없기 때문에 그 차를 마셨던 것이 혼자인 게 다행이란 생각만 막연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커흡!”

참을 수 없는 신음이 새어 나오며 그의 이마엔 비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런 수작을 벌인 것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를 리가 없는 채운은 의원을 부를 생각도 않고 혼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사실 광증을 일으킬 정도로 센 약기운에 그는 올바로 걸어서 누군가를 부를 수도 없었다.

몸은 당장 여인을 품으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정말 그러지 않고서는 손끝까지 피어오르는 열기를 주체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가장 현실적이고 이 열기를 방출할 최선의 방법이라면 당장 칼을 쥐고 밖으로 뛰쳐나가 검을 휘두르는 걸로 이것을 뿜어내는 것이다.

허나 이 밤에 막사를 나가 칼을 들고 설친다면 그 소란을 구실로 저들에게 괜한 빌미만 주게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치솟는 정욕 때문에 혼미해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저들에게 구경거리를 주고, 목적을 이루게 해 주는 셈이었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이 안에서 약기운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주먹을 쥔 손바닥 안으로 손톱이 파고들어 가 상처를 내고 있었다. 그런 정도로 날 이길 수 있겠느냐는 듯 약기운은 그의 혈관을 돌며 그의 하복부를 계속 쾅쾅 내리쳤다.

“크으으으으!”

이를 악물어도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는 다 막을 수 없었다. 그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감, 평장사 대감?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오, 오지 마시오!”

“대감?”

“으윽!”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것에 맞춰 춤을 추는 양 그의 몸은 곧 터질 것같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심상치 않은 신음 소리를 들은 재영은 그냥 뒤돌아설 수가 없었다.

“대감!”

한눈에 보아도 그에게 무슨 일인가 벌어진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주먹을 쥔 채 팔을 늘어뜨리고 웅크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떠는 것같이 보이는 그를 보고 달려간 재영은 채운을 부축하려다 사납게 밀쳐지고 말았다.

“저리 가!”

그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무서운 목소리로 그녀를 쫓아내고 있었다.

“대감…….”

“어서 나가시오!”

“무슨 일입니까, 대감. 제발 돕게 해 주십시오.”

“차에 약이……. 미약이오. 아주 독한. 그러니 어서 나가시……, 으흑!”

“대감!”

고꾸라지며 바닥에 엎드린 채운을 잡으려던 재영은 순식간에 붙들려 확 넘어지고 말았다. 호롱불에 비친 그의 눈은 핏발이 선 채 붉게 물들어 있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그녀의 팔을 붙들고 있는 그의 손아귀 힘이 너무 세서 아픈 나머지 재영에게선 절로 신음이 나오고 있었다.

그 신음 소리를 들은 채운이 다시 그녀를 밀쳐 버렸다. 그리고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약기운과 싸우기 시작했다.

“미안…… 하오. 사죄는 나중에 하겠소. 지금은…… 나가 주시오.”

“대감.”

“어서!”

“지금 대감은 그 약기운을 풀지 못하면 결코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대감의 모습으로 보건대 분명 그것은 풀지 못하면 광증을 일으킬 수도 있는 치명적인 약인 것 같습니다. 이대로 계시면 위험합니다.”

“그럼 어찌하라고. 당장 그대라도 품으라는 것이오?”

“……그리하소서.”

“한 서기!”

“전 대감의 위중함을 벗어나게 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말도 안 되오. 나가시오, 제발!”

참기 힘든 욕망과 싸우는 장부의 입에서 듣는 애원은 재영의 마지막 마음을 무너뜨렸다.

“저는…… 제가 바라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만 이렇게라도 좋습니다. 다른 무엇을 더 바라는 건 아닙니다. 대감, 소녀는 대감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한 서기!”

약기운과 싸우느라 황망한 가운데서도 그녀의 고백은 그의 귀에 왕왕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든 재영의 체취가 겨우 억누르고 있는 약기운을 곧장 자극했다. 그의 붉어진 눈이 크게 떠지며 팽창한 하복부는 어서 여인을 취하라 악을 써 대고 있었다.

“대감.”

채운은 벌떡 일어나 재영의 팔을 거머쥐었다. 수줍게 고개 돌리는 그녀의 목선이 보이며, 목깃 사이 언뜻 보이는 속살 그 안도 어서 취하라 내밀어져 있었다.

순간 재영을 품에 끌어당긴 채운은 그녀의 체취가 밀려듦과 동시에 그녀를 확 밀쳐 냈다. 그리고 그는 곧장 침상 옆에 걸린 칼을 빼내 들었다.

“대감!”

재영이 뭐라 더 소리치기도 전에 칼은 피를 보고 말았다. 날카로운 칼은 팔부터 손등까지 깊게 긋고 피를 콸콸 솟구치게 만들었다.

“아악, 대감!”

재영의 비명에 누군가 막사 안을 열어 보고는 다시 뛰쳐나갔다.

이윽고 만운과 의원이 달려오고, 소란이 일었다.

채운은 의원이 그의 팔을 치료하며 다행히 힘줄은 무사하단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정신을 잃어 갔다. 마지막으로 정신을 놓기 전 그는 탁자 위 찻잔을 가리키며 그 차를 가져다준 시녀의 이름을 알려 줬다.

만운이 그 시녀를 잡으러 달려갔을 때, 그 시녀는 외진 구석에서 이미 목이 졸린 채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시녀가 죽은 건 필시 전문가의 솜씨였다. 그녀의 죽음에 사냥 대회 다음 날은 불미스런 정황 때문에 그대로 종료되었지만 살인자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시녀가 매수된 이인지 속아서 단순한 심부름을 하게 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채운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 * *

채운의 부상은 감춰졌다. 그리고 시녀의 죽음으로 엉망이 된 사냥 대회 때문에 채운에게 일어난 일은 아무도 모르게 지나갈 수 있었다.

최사립 측에선 교활하게도 벌써 죽은 시녀와 과거에 연관된 사내를 끌고 와 그녀의 죽음이 치정에 의한 살인 사건이었던 것처럼 몰고 있었다.

그것으로 채운에게 약을 먹인 사실을 덮음과 동시에 죽은 여자가 서궁의 시녀임을 이용해 왕세자의 흠집을 내는 역공을 해 왔다.

진범을 잡을 수 없었던 수와 채운은 그런 최사립 측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번에 벌이는 그 일을 잡기만 한다면 그들을 몰아내는 것도 이젠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억울한 것인지 어떤지조차 알 수 없는 시녀의 죽음은 이런 식으로 덮어지게 되었다.

“형, 의원 말로는 그거 보통 독한 약이 아니래. 형이 피를 본 고통에 위기는 넘어가긴 했지만 잔재분이 남아 있을 거래. 그러니 지금이라도 형수에게 가서…….”

“그만해라, 만운. 난 다시는 약기운을 빌려 강희를 안고 싶지 않다.”

“아, 그건 정말 미안해, 형.”

“아니다. 지금 와서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자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그때는 오히려……. 아, 아니다.”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채운은 그 말을 입속으로 삼켰다. 꼭 약의 도움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차피 강희와는 일어날 일이었다.

그러니 그 순간을 약 때문인 것처럼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냥 대회가 그렇게 엉망으로 끝나고, 서궁으로 돌아온 지 거의 하루가 지났지만 그는 아직 강희를 볼 수가 없었다.

채운은 지독한 약의 후유증으로 정신을 잃은 이후 내내 펄펄 끓는 열에 시달리다 이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힘줄은 무사하다지만 팔뚝의 상처가 너무 깊은 터라 쉬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보여 강희의 걱정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본다면 만운 말대로 아직 남아 있는 약기운 때문에라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형수가 걱정이 많을 텐데…….”

“그래서 보이고 싶지 않은 거야.”

“알겠어. 하지만 형수를 아까 아침에 만났는데, 형이 안 보이니까 무지 걱정하는 것 같더라.”

“……그래.”

“우리 예쁜 형수,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눈 밑이 새까맣더라니까. 하지만 내가 잘 둘러댔어. 형이 저하의 다음 행사지에 가야 해서 당분간 오기 힘들다고. 그러니 형도 빨리 나아야 해!”

“…….”

만운이 저리 말하는 이유가 걱정과 울분을 감추려는 것임을 왜 모를까. 아무튼 저리도 제 형수를 좋아하는 걸 보면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저 다혈질에 강희가 그 못된 계집인 걸 알면 얼마나 상처받고 힘들어 할까.

채운은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만운이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형…….”

“응?”

“한 서기님, 재영 아가씨랑 무슨 일이 있었어? 어제 형이 쓰러지고 나서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색도 좋지 않아. 물어도 대답도 않고, 나랑 마주쳐도 피하는 것 같아.”

“그…… 래?”

채운은 만운이 그녀의 이름을 꺼내는 걸 듣고서야 이제껏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대감, 소녀는 대감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황망 중에 그녀의 고백의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 들은 말이 아니었던가.

곧 약에 취해 한순간 완전히 이성을 잃고 그녀를 덮칠 뻔했던 것도 생각났다. 그리고 품에 잡아당긴 여인이 강희가 아닌 다른 여자라는 걸 알고 밀쳐 버린 일도.

“앞으로 어찌 대해야 할까?”

“응? 형,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야.”

“형은 아까부터 무슨 말을 계속 하려다 말아? 정말 한 서기님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내가 어제 무얼 먹고 이렇게 된 건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아차!”

하마터면 오해를 살 상황이었다.

의원의 말에 따르면 형이 먹은 것은 그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극악한 미약이라 했다. 그리고 먹은 양도 황소 두세 마리 정도는 충분히 날뛸 정도로 위험할 정도였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 같으면 밤새 여인을 품고도 다음 날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을 것이라 했다.

그때 형은 바로 앞에 재영 아가씨를 두고 있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건 위험한 발언이었다. 형의 저 길게 그어진 팔뚝의 상처는 당시 형이 얼마나 긴박한 순간이었는지를 다 말해 주고도 남았다.

의원은 정확히 ‘그걸 먹고도 여자가 앞에 있는데도 가만있을 남자는 바로 그것일 겁니다.’라고 했었다.

그것이라니! 그것이라니! 설마 형이 여인을 품지 못할 거란 말인가? 화를 내려던 만운은 그의 사나워진 기색에 의원이 흠칫 움츠러드는 걸 보면서 분을 삭였다.

화를 낼 대상이 의원은 아니지 않은가. 원흉을 잡아 그 목을 치기 전 직접 그 약을 목구멍에 쑤셔 넣고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원흉이 누구인지 알고도 남았다.

그 상황을 자세히 아는 것은 채운과 재영, 두 당사자와 만운과 의원뿐이었다.

왕세자도 나중에 제대로 전해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옆 막사에서 있던 시녀들이 아는 건 윤채운 대감이 미약을 먹었고, 재영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약의 효과가 극악하여 여인을 품지 않고서는 광증이 돋는다는 것까지 종합하여 그들은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 * *

강희는 애심을 기다리느라 나와 있던 정자 위에서 잠시 깜빡 졸고 있었다. 궁에선 하루도 편히 자 본 적이 없어 그녀는 계속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게다가 사냥 대회에선 시녀가 살해되는 불미스런 일도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지라 마음이 계속 불안하기만 했다.

살해된 시녀는 강희도 안면과 이름을 익혀 아는 이여서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다 왕세자 저하와 만운도 돌아왔는데 채운만 보이지 않아 걱정과 불안에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에 치러질 진수 행사에는 강희도 참석해야 했다.

이번 진수 행사는 해적 토벌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한 것이라 일부러 더욱 성대히 치러지는 자리였다. 왕세자비는 그 자리를 더욱 빛내기 위해서라도 강희에게 최대한 아름답게 꾸미고 참석해 달라 부탁했다.

그래서 강희는 혼인 후 처음으로 치장을 하기 위해 애심에게 패물과 예복을 가져오라 일렀다.

그러자 애심은 신이 나서 집으로 날듯이 뛰어가는 것이다. 애심의 번득이는 눈을 봤을 때 아마 패물함을 통째로 들고 올지도 모를 일이다.

애심은 혼인식 때 말고는 가실처럼 패물이나 비단옷을 만져 볼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기껏해야 강희의 머리를 땋아 준다거나 혹은 옷을 짓는 일을 거들거나 주인을 따라 부엌을 오가고 힘이 많이 들고, 냄새가 고약한 비누를 만들기까지 했으니. 가실과는 확실히 비교될 정도였다.

그런 걸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과하게 꾸미진 않을 텐데…….’

하지만 다시 오기 힘든 기회에 애심은 아마 단단히 벼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잠깐 졸았다.

그때 누군가 모여 말하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본격적으로 아래쪽에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죽은 우경이만 불쌍하지. 최 대감 측에선 억울한 누명을 씌우질 않나. 웃전들은 그 아이를 의심까지 하시는 모양인데, 우경이가 그럴 리가 없어.”

“지선아, 네가 우경이와 친해서 그러는 건 알지만 웃전들께서 괜한 의심을 하시는 건 아니야.”

“하지만 해령 언니, 우경이가 어디 그럴 아이입니까? 해령 언니도 아시잖습니까. 그렇지, 계화야?”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우경을 두둔하는 목소리는 지선이란 시녀인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듣자니 우경이란 시녀가 탄 약에 누군가가 당할 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우경이가 탄 차에 그 몹쓸 약이 섞인 건 사실이잖니. 그러니 웃전에서 의심하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래도 대감께서는 무사하신 것 같아 다행이지, 뭐.”

“네. 그 약이 보통 독했던 게 아닌가 봐요. 오늘도 의원이 다녀가시고…….”

“그래도 만운 낭장님 얼굴이 펴신 걸 보면 회복에는 문제가 없으신 것 같아.”

‘응? 만운 낭장님? 설마 도련님이?’

화들짝 놀랐던 강희는 아침에도 그녀에게 힘차게 인사하며 오늘 행사장에선 형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씩씩하게 웃던 만운이 생각났다. 그리고 사냥 대회 바로 다음 날 돌아온 도련님은 멀쩡해 보였는데?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예요. 그럼 계화, 넌 우경이가 감히 평장사 대감께 그런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평장사 대감!’

그 말에 강희는 뛸 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렇다면 서방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너도 알잖니? 우경이가 본래 평장사 대감을 얼마나 마음속 깊이 사모했는지. 그런데 그 애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다고 믿다니, 너무한 것 아냐!”

“지선아.”

“너무해! 정말 너무해요!”

지선은 우경을 두둔해 주지 않는 두 사람을 원망하며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계화와 해령은 그런 지선을 달래며 계속 울고 있는 지선을 토닥이고 자신들도 함께 울다가 서서히 그쳐 가고 있었다.

강희는 채운에게 일이 있었다는 것에 철렁했던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서방님은 그래서 같이 돌아오지 못하신 걸까? 허면 왜 알려 주지 않은 걸까? 무슨 몹쓸 약을 드셨다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회복된 것 같다는 말은 듣게 되었지만 그녀는 요즘 계속 불안했던 예감이 적중한 것 같아 쉬이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죽은 시녀가 서방님을 사모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가끔씩 왕세자비를 만나러 방문했을 때는 몰랐지만 궁에서 며칠 머물게 되자 윤씨 형제를 좋아하는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건 너도 그렇잖니?’

강희는 채운이 당한 일에 걱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서방님에 대한 제 마음을 새삼 확인하고 있는 자신이 딱하기까지 했다.

그때 시녀들의 훌쩍임이 가라앉더니 소곤소곤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번엔 누가 들을세라 해령이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경이는 평장사 대감께 그 약이 든 차를 드리고서 곧 막사를 나갔을 테지?”

“우경이가 알고 한 게 아니라니까요!”

“내 말은 그게 아냐. 단지 그 이후의 일을 따져 보는 거야.”

“네,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요?”

반발하는 지선을 계화가 말리며 해령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럼 그 약을 드신 평장사 대감께서는 약효에 휩싸이셨을 텐데……. 거기엔 재영 아가씨가 계셨다고 하지 않았니? 계화야, 네가 본 사람이 분명 재영 아가씨, 아니, 한 서기님이 맞았지?”

“네, 전 한 서기님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달려갔던 거니까요.”

“계화야, 네가 보았을 때 평장사 어른과 한 서기님은 어떻게 하고 계셨니?”

“경황이 없어서 잘 보진 못했지만 평장사 대감이 웅크리고 계신 것 같았어요. 한 서기님이 평장사 어른을 부축하고 계셨고. 생각해 보니 한 서기님이 무척 흐트러져 계셨던 것 같아요.”

“그때 이후 본 건 더 없어? 의원님과 만운 낭장님을 불렀다고 했잖아?”

“낭장님이 모두 막사에 오지 못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전 그 이후엔 몰라요.”

“음.”

“……?”

“……!”

“내 생각이지만 말이야. 지금 평장사 대감님이 저기 구석 별채에서 몰래 요양하고 계시면서 부인껜 알리지 않는 것이 그날 있었던 일 때문인 것 같아.”

“네?”

“사실 난 만운 낭장님과 의원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거든. 평장사 대감이 드신 약은 당시에 풀어 주지 않으면 거의 광증에 이를 만큼 독한 약이었다고 말이야. 황소도 몇 마리 발정하게 하는 약이라 들었어.”

“세상에나!”

“설마?”

“그럼 그때 거기 한 서기님이 계신 이유가…….”

“맞아요. 요즘 재영 아가씨, 한 서기님도 꼼짝도 않으셔요. 기운도 없어 뵈고, 우릴 봐도 웃지도 않으시고.”

“내가 생각하는 거 너도 같이 생각하는 거 맞지?”

“응. 그 정도 독한 약에 시간도 없고, 당장 앞에 자신을 좋아하는 여인이 있다면…….”

“어? 지선아, 너도 알고 있었어? 한 서기님이 평장사 대감을 연모한다는 거?”

“나는 몰랐지만 우경이는 알았어. 그래서 저도 짝사랑하는 주제에 한 서기님이 되도 않는 짝사랑을 한다며 얼마나 흉을 봤는데.”

“헉, 그럼!”

“쉿, 지선아! 계화야!”

제가 이 큰일 날 이야기를 끌어내 놓고 해령이 외려 입단속을 시키려는 듯이 쉬쉬 굴었다.

“네, 알아요, 언니.”

지선과 계화가 동시에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정말 입을 다물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때 멀리서 세 시녀들을 향한 불호령이 떨어졌다.

“거기서 뭣들 하는 게냐! 내일 행사를 위한 채비가 당장 바쁜 게 보이질 않느냐!”

“네, 갑니다!”

“네!”

세 여인들이 후다닥 뛰어갔다. 그녀들을 부른 궁인도 우경의 죽음 때문에 심란해 하고 있는 이들을 더는 책하지 않고 그저 서두르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정자 위엔 얼어붙은 강희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녀는 문득 서방님은 왜 오시지 않느냐는 말에 곤란한 얼굴을 하던 만운 도련님의 모습이 생각났다.

‘시녀의 죽음, 최사립 대감 측의 수작, 위험에 빠진 서방님과 그를 연모하는 재영…….’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후려친 것 같았다. 덜컹. 떨어지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부여잡은 가슴 아래로 컥컥 숨이 막혀 올라오지 않았다.

재영이 서방님을 연모하는 감정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서방님과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 놓아주자. 순리대로 흐르게 두자. 마음먹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은 다 자신을 속이는 거짓이었던 것이다.

이토록 마음이 깨질 듯이 아플 줄은 몰랐다. 심장이 뜯기는 것 같았다.

“어흐윽!”

폐부에서부터 짜내는 것 같은 울음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솟구쳐 올라왔다. 감히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신음이 그녀의 목구멍을 할퀴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흐르는 것이었다. 자신을 떨어뜨려 낸 운명의 바퀴가 제 갈 길로 달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 운명의 마차의 방향을 비틀기 위해 발버둥 치던 자신은 떨어지자마자 바퀴에 치인 것 같았다.

저만치 툭 떨어진 자신이,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심장이, 자신의 미래가 모두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붉은 눈을 한 아이가, 그리고 돼지 여물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쏘아보며 비웃고 있었다.

‘너, 감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그와 약속했던 기한이 멀지 않았는데, 감히 그를 욕심낸 것을 경고하려는 모양이었다. 운명은 그녀를 매섭게 후려치며 미래를 다시 일깨워 주고 있었다.

저 멀리 하늘을 쳐다보는 강희의 눈이 눈물조차 머금지 못하고 공허함으로 멈춰 있었다.

화창한 봄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축축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강희는 그것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애심이 와서 그녀를 부를 때까지 강희는 그 자리에서 숨을 쉬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넋을 놓고 있었다.

* * *

“마님, 정말 고우셔요. 오늘 마님처럼 아름다우신 분은 안 계실 거예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말해 주다니요? 저는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님이 원래 아름다우신 분인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리 꾸미시니 더 빛이 난다는 말씀이에요.”

“그래, 고맙다.”

“호호, 마님도!”

예쁘다는 말에 유독 쑥스러워 하는 강희에게 이후로도 애심은 곱다, 예쁘다, 아름답다, 선녀가 하강한 것 같다, 입에 담을 수 있는 찬사를 모두 다해 그녀를 찬양했다.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강희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 자체로 빛나는 아름다움에다 머리에 장식한 아름다운 보석들이 강희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짙은 자줏빛 비단에 금사로 입힌 장식 수는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만큼 고급스러웠고, 날씬한 자태가 옷맵시를 더욱 살려 주었다.

그리고 과하지 않게 걸친 패물들이 그런 강희의 모습을 더 우아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귀에 늘어진 귀고리나 목을 휘감고 내려간 목걸이, 손가락과 손목에 각기 얹어진 옥과 비취, 진주는 그 화려한 장식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빛나는 것 같았다.

애심의 말처럼 오늘 강희의 모습은 정말 하강한 선녀처럼 누구든 인정할 정도로 참으로 아름다웠다.

일찍부터 서둘러 행사가 치러지는 양광포에 도착한 강희는 드디어 채운을 만날 수가 있었다. 며칠 만에 본 그는 정말 조금 수척해진 듯이 보였다.

“오셨소.”

“네, 서방님.”

찬찬히 살펴본 강희는 그가 수척해진 것 말고는 여전히 꼿꼿한 모습을 보며 마음을 쓸어내렸다.

허나 그에게 있었던 일을 간접적이나마 전해 들은 그녀는 그가 겪은 고초에 가슴이 찡하면서도 심장을 찔러 대는 질투에 가슴이 죄어들었다.

하지만 안다 해도 그런 것을 어찌 따질 수 있단 말인가.

불가항력의 일을 핑계 삼아 당신이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으니 나도 이혼해 줄 수 없다 떼를 쓰기라도 해야 할까?

채운이 자신과 밤을 보낸 것에 책임을 지려 한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처럼, 그가 재영에게도 책임감을 가질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재영과의 일이 불가항력에 그를 구하기 위한 일이었다 함은 그를 더욱 구속할 것이 분명했다.

다시 그 일이 반복될까? 재영이 다시 그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는 걸까?

꿈의 그녀는 애초부터 별채를 따로 짓고 나가 살았던 터라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그녀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싫다!

무어라 다른 말로 싸맨다 해도 질투에 휩싸인 알량한 자존심은 재영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코 그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는 내 것이다,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들끓던 강희의 마음은 채운의 뒤로 나타난 재영을 보자마자 당장 풀썩 꺼지고 말았다. 그녀의 끓던 마음이 화톳불이라면 재영의 등장은 억수로 퍼붓는 장대비와도 같았다.

재영은 그와 강희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후 채운에게 말을 건넸다.

“평장사 대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강희는 재영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도 없었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해 어디론가 달아나고만 싶었다.

“그럼 저는 제 자리에 찾아가겠습니다.”

“그러시오.”

그의 손짓에 길석이 강희에게 달려와 그녀를 왕세자비의 옆에 있는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말하시오.”

재영은 그 짧은 순간에도 그가 부인이 제 자리를 잘 찾아가고 있는지 살피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며칠간 그의 막사에서 있었던 필사적인 순간에 그로부터 거부당한 충격과 떨림, 부끄러움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다시 그의 앞에 얼굴을 들고 나설 수 있을지,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을지 생각도 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오늘 그녀가 본 것은 반드시 전해야 할 사항이었다. 당장 위급 지경인데도 제 생각에 빠져 있느라 너무 늦게 본 것이다. 연민과 부끄러움에 빠져 어젯밤에 본 하늘의 움직임도 지나치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며 느낀 을씨년스런 공기에 이제야 부랴부랴 달려온 길이었다.

당장 채운에게 얼굴을 보이기가 부끄러웠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만운이 보이기라도 했으면 건너서라도 전할 수가 있었지만 그는 벌써 왕세자와 함께 배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전할 말은 일개 병사들에게 시킬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직접 채운을 찾아 헤매던 중 가마에서 내리는 부인을 맞고 있는 그를 볼 수가 있었다.

그의 부인이 내리는 순간, 사방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국가적인 행사라 나라의 귀부인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지만 오늘 그의 부인은 그중 어느 여인보다 더 빛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 자신의 부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재영은 자신의 어리석은 욕망과 욕심이 새로이 부끄러워졌다.

허나 지금은 그런 감정보다 임무가 우선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고선 그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곧장 그에게 달려오는 길이었다.

“대감, 아직 화약의 흔적은 찾지 못하셨습니까?”

“아직 찾지 못했소.”

“오늘 미시13~15시까지 찾지 못한다면 저들의 거사는 오늘도 아닙니다. 허나 저하께서도 미시 이전에 철수하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지금은 화창한 날씨이지만 신시15~17시부터 날씨가 급격히 나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유시17~19시 이후부터는 태풍에 비기는 폭풍우가 몰아칠 것입니다. 저들이 날씨까지 예측하지는 못한다 해도 만약 오늘 화약을 터뜨리려 한다면 그 이전일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니 그 시간 전에 화약을 지닐 만한 곳이나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하도 그 이전에 반드시 육상으로 귀환하셔야 합니다.”

“급하게 되었군.”

원래 왕세자가 바다 위에 머무는 일정은 신시 초까지였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지금에 와서 말하는 것은 많이 늦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재영의 사죄는 그에게 거절당한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소임을 다하지 못한 용서를 구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채운은 그녀의 대범함에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저하께서 그녀가 남자가 아님을 한탄하실 만큼 재영은 깊은 역량을 갖춘 인재였다. 그 일을 다시 입 밖에 내는 건 서로에게 좋을 일이 아니었다.

채운은 그녀와 있었던 일은 모르는 척 잊기로 했다.

“아니오. 한 서기의 능력이 아니라면 뉘가 그런 시간까지 미리 알아 예측을 할 수 있겠소. 아직 사시9시~11시 초이니 대처할 시간은 충분하오. 다만 저들이 오늘로 날을 잡은 것이라면 시간이 더욱 촉박하게 되었소.”

“송구합니다.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수고하였소.”

채운은 재영이 급전을 전하러 다가옴에 따라 강희의 안색이 어둡게 침잠하는 것은 볼 수 없었다. 오늘 정신을 쏙 뺄 정도로 아름답게 성장하고 나타난 강희 자체만으로도 마음을 뺏긴데다 눈앞에 닥친 사항이 너무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사냥터는 화약을 터뜨릴 곳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자신이 호되게 당하고 말았다.

이번엔 결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저들의 역모의 행위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잡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왕세자가 탈 배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화약은 찾을 수 없었다. 배에 탄 모든 이들의 소지품이나 몸수색까지 마쳤으나 화약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이 아닌 다음 장소를 노리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해 봐야 하지만 채운은 반드시 오늘일 거라는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강희가 꿈에서 일어났었던 일이라 말해 줬던 이야기는 이제 그에게 강한 확신을 주고 있었다.

배. 배와 연관된 행사는 오늘이었다.

그러니 화약은 반드시 오늘 터질 것이다. 그런 가정하에 아직 찾을 수 없는 다른 가능성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불붙은 화약 몇 개를 배 위로 던진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위협은 될 테지만 왕세자를 지키는 무장들이 그만한 것을 쳐 내 버리지 못할 리는 없었고, 왕세자도 자신을 지킬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배에 화약을 설치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러나 채운이 아직 그것을 찾지 못한 채 오늘 왕세자가 의식을 거행할 배는 바다를 향해 육지에서의 마지막 걸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