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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녀, 재영 (12/38)

12. 그녀, 재영

언제나 새벽을 일찍 시작하는 주인 내외가 아침이 되어도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자 애심은 두 사람의 방 앞에서 기척을 내며 인사했다.

“마님, 나리, 기침하셨습니까?”

“형, 배 안 고파? 형수도 배고프겠다. 밥 먹자!”

애심의 목소리에 퍼뜩 잠이 깨니 그 바로 뒤로 본채를 왕왕 울리는 만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희는 깜짝 놀라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이 그녀를 더 당겨 안았다.

바로 그날 그 아침처럼.

살며시 그의 팔을 치우고 일어나려는데 밖에서는 계속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배고픈 게 대수겠느냐, 몇 달 만인데’하는 소리와 ‘원체 안 그러시던 분들이니 걱정이라’는 둥, ‘방해를 하지 않는 게 낫지 않겠느냐’,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들이 모두 들리고 있었다.

“정 방해를 하고 싶지 않거든 멀리 나가서 떠들든지, 바로 방 앞에 와서 떠드는 건 무슨 심보야.”

“서, 서방님?”

일어나려는 강희를 다시 잡아당겨 눕힌 채운이 아직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는 새벽까지 그녀를 품고서 아직도 놓아주기 싫다는 듯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깊게 입을 맞춰 왔다.

처음 맞는 달콤함이 이리도 소중하고 귀하건만, 귀한 걸 더 확실히 알리려 함인지 바깥의 소란은 가실 줄을 몰랐다. 특히 소란의 주범은 만운.

“형, 안 깨우고 싶지만 말이야……. 성도종 대감 댁에서 방금 기별이 왔어. 조금 있다가 오신대.”

“아직은 아니잖습니까.”

“이때 말고 언제 또 형을 깨워 보겠어?”

“도련니임…….”

“하하하하!”

일부러 짓궂게 형 부부를 깨우려 드는 만운과 그를 말리려는 하린댁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하린댁이 만운을 몰아낸 것에 성공했는지 잠시 뒤 왁자지껄하던 마당이 다시 조용해졌다.

잠시만이라도 이대로 더 누워 있고 싶었지만 일어날 시간이 한참 지났다. 그는 이런 소란스러움이 궁의 연회보다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환영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 그래도 안 나오면 정말 다시 와서 문이라도 두드릴지 모르니 내 먼저 나가 보리다.”

그녀에게 물어볼 것도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채운은 쉽게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그녀의 몸 전체를 쭉 훑고선 억지로 손을 떼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뚝뚝 묻어나는 아쉬움은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그녀와 침상에서 육 개월이라도 보내고 싶다는 기색이었다.

채운이 나간 뒤, 침상에 남은 강희는 생각에 잠겼다.

저 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젯밤은 약기운이나 실수로 평할 무엇도 없었다. 그가 술을 마시긴 했으나 밤새 그녀를 안았던 그와 지금 이렇게 나가는 모습에서 실수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마지막으로 스친 그의 눈에 든 고뇌와 갈등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못 볼 수가 없지.’

밤새 그녀를 품으면서도 언뜻언뜻 보이던 외로움과 괴로움을 그녀가 왜 모를 것인가. 사랑스러운 듯 그녀를 쓰다듬다가도 간혹 괴로운 눈빛으로 누군가를 떠올리는 그를 그녀가 왜 모르겠는가.

그가 누구를 떠올리고 있을지 강희는 너무나 잘 알았다.

누이의 미소, 어머니의 손길,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

그것만 아니었으면 그에게 매달려 보고 싶기도 했다.

마음이 가는 것을 숨기지 못한 것이겠지. 그에게도 자신의 마음이 비춰 보였음이 틀림없었다.

‘바른 사람…….’

만약 그녀가 매달린다면 그는 자신의 책임을 떨치지 않을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을 받아 달라 한다는 건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다.

그를 가져라 속삭이는 유혹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제가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했던 그토록 끔찍했던 성강희처럼, 그를 욕심내는 이 마음만큼은 그 성강희처럼 채우라고 갈급하게 요구했다.

당장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 만운 도련님의 개구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런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너는 저분께 용서를 구할 자신이 있느냐?’

그러나 이미 다 알고 있는 서방님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를 좋아해 주는 도련님께 더 용서를 구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마음으로 평생을 속이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 생각에 잠겨 있을 수도 없었다. 바깥에서 만운의 목소리가 또 들려오는 것이다.

“형수는 왜 나오지 않아?”

그에 채운이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왁, 설마 이런 날도 대련을 하자는 건……. 아, 형, 형님! 장군님, 아니, 평장사 어른!”

“마님, 기침을 거들러 왔습니다.”

만운의 소리가 멀어지고 애심이 방 밖에서 그녀에게 기척을 냈다. 애심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 안에 웃음이 깃든 걸 알 수 있었다.

보지 않아도 밖에서는 다른 모두도 웃고 있으리라.

불현듯 모든 걸 잊고 그냥 이 순간에 묻히고 싶었다. 그에게 일어난 불행의 원인을 모르는 양 이대로 그의 품에 안주하고 싶었다.

방금 전 밀친 생각을 제치며, 또 꾸역꾸역 치미는 욕심이 이 행복을 잡으라고 속살거렸다.

‘행복? 뉘에게?’

그 단어가 그녀의 욕심을 멈추게 했다. 그가 평생 그 고뇌에 시달리면서 행복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마님? 들어가겠습니다.”

생각을 너무 오래했는지 애심이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내가 나가마.”

“네…….”

강희는 아버지가 방문하시는 까닭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혼인하고서 아직 한 번도 딸의 집에 오신 적이 없었다.

헌데 궁에서 이미 만나 봤을 채운을 굳이 다시 만나러 오는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채운이 해적들을 와해시키고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도성에 떠들썩하던 며칠 전, 그녀는 성 대감의 갑작스런 호출로 아버지를 뵙고 왔었다. 그가 무사히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 시점에 미리 연통도 없이 부르신 까닭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는데, 짐작대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만일 아버지의 우려가 사실이라면, 이제 그녀가 꿈에서 봤던 것들은 아무것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우선 전쟁의 기간이 그녀의 예측보다 더 길어졌다.

꿈속의 그녀는 관심이 없어서 알지 못했다 해도 백성들 사이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섬의 국토 편입, 재산을 몽땅 다 바치다시피 하여 얻은 아버지의 공, 그리고 혼인과 그의 귀환 시간이 차이 난 것 등이 모두 달랐다.

꿈대로라면 이 시기 그녀는 송국 유람을 끝내고 돌아와 혼례 준비를 하던 때였다. 그때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과 비교라도 해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성강희는 혼인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 이상 더할 수 없이 사치에 열을 올리느라 주위 상황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었다.

강희가 기억하는 건 먼 미래에 아버지가 연루되었던 사건에 대해 조금 아는 정도와 성강희가 죽기 직전 떠돌았던 단편적인 소문 한 조각뿐이었다.

아버지의 우려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얘기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강희는 미래의 예측이 모두 틀어진 지금 꿈에서 아버지가 연루되었던 그 반란의 기미가 현재로 당겨진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런 생각에 불안해지고 급한 마음에 나온 강희는 밖에서 대기하던 애심과 얼굴이 마주쳤다. 주인 내외 부부가 어떤 밤을 보냈는지 알기에 기쁘게 웃는 애심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그녀로서는 조금 민망한 일이었다. 강희는 그녀의 눈치를 모르는 척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서둘렀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정말 너무 늦게 일어났다.

* * *

세 사람은 간단한 아침을 먹고 차를 들인 후 다른 하인들을 모두 물렸다. 하린댁과 이 집사까지 모두 멀리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만운이 문을 닫고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만운은 강희가 새로 만든 말린 국수로 한 요리에 대해 떠들며 웃고 있었다. 이건 형수가 형을 위해 준비한 거냐, 형이 좋아하니 이런 것만 생각하는 거 아니냐, 마른 거라 가지고 다닐 군량미로 하는 것도 좋겠다, 놀리는 건지 칭찬인 건지 수다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다시 자리에 앉은 만운은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눈을 빛내던 이가 아니었다.

“형수, 고맙소!”

“도…… 련님.”

대뜸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만운에게 강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런 강희에게 만운이 다시 확인시키듯 제 왼손을 척 내밀며 그녀 앞에 보이는 것이다.

“이것 보세요. 저 멀쩡하지요? 형수, 형수는 알고 있었소. 그렇지요?”

“제가 뭘……?”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를 말이오. 그런 장갑은 만드는 데 두 달은 넘게 걸린다 하더이다. 그건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형수는 일부러 내게 강조했소. 아무리 귀찮더라도 숲에서 말을 달릴 때면 꼭 끼고 다니라고 말이오. 그러니 형수는 전쟁이 일어날 것과 내가 당할 일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요. 맞죠?”

“아, 아니, 저 그건…….”

“형수, 난 형수를 추궁하려는 게 아니오. 형수가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었는지 물으려는 것도 아니오. 사실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으려오. 단지 형수 덕분에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걸 다시 한 번 인사하고 싶었던 것이오. 정말 감사합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만운은 그녀에게 크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며 씩 웃었다. 당황하는 강희에게 채운도 말을 보탰다.

“만운의 말이 맞소. 당신을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오. 정말 고맙소.”

“저기, 전…….”

“들어 보시오. 당신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듯싶지만……. 만운이 당할 뻔한 일에 장수 몇 명이 당했소. 그래서 같은 식의 함정을 방비할 목적으로 당신이 준 철장갑과 같은 것을 만들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내보였었지. 그랬더니 만운의 말처럼 그리 오랜 시간 걸려야 만들 수 있는 물건이라 하더군. 그리고 그 강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말도 했소. 대장장이 말로, 그것은 각 판이 모두 접쇠로 되어 있어서 움직이기 편하게 만든 것뿐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화살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좋은 쇠라고 감탄을 하더이다. 장갑의 목적이 그것이었소?”

채운이 부드럽게 의문을 표하자 강희는 얼결에 답했다.

“제가 생각한 건 그저 방패 대신…….”

“맞소. 훌륭한 방패 역할을 했으니. 아마 만운이 처음 그 함정을 막지 못했더라면 당신의 짐작처럼 손은 물론 얼굴도 크게 상했겠지. 아니면 더 최악으로 당했을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런!”

철장갑을 준 목적이 너무나 명백했기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는 강희였다. 뭐라 변명을 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길석도 그렇소.”

“네?”

“길석은 내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느라 등 뒤를 맞았지. 그런데 길석의 갑옷도 접어 두드린 것으로, 다른 것보다 강도가 세서 화살이 뚫지 못할 정도였지. 그런 쇠를 만들 줄 아는 이가 흔한 것도 아니고, 원정 준비하는 데 나라의 모든 장인들이 동원된 국가적인 사태였으니, 일개 병사에게 통짜로 된 것을 만들어 주지는 못했을 거요. 그래서 단 한 곳, 바로 그가 화살을 맞을 바로 그곳에만 그것을 대어 주었던 것이 아니오. 맞소, 부인?”

“그게…….”

“한 가지가 더 있지 않소.”

“네?”

“당신이 말해 놓고 도로 묻다니…….”

채운이 짐짓 웃으며 말하자 만운이 대신 설명해 주었다.

“텁석부리 짝귀요. 지금은 길석이 그 별명에 더 어울리게 됐지만요.”

“맞소.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를 미리 잡아낸 덕분에 점령한 섬을 다시 뺏기지 않고 해적의 본진을 공격할 수 있었소. 놈을 그냥 두었더라면 전황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송국의 경계가 심한 이때, 더 긴 전쟁을 치를 수는 없었을 테니, 우린 해적들에게 려국의 엄중한 위세를 알리고 재발을 억제하는 수준으로 그치고 돌아왔을 것이오. 허나 우린 해적의 본진까지 진출해 그들을 소탕하고 돌아올 수 있었소. 그를 미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지.”

강희는 전쟁이 이전보다 길어진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꿈에서의 채운은 종종 다시 출몰하곤 하는 해적 때문에 자주 남해로 향했었는데, 이젠 다시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번 원정에서는 그 뿌리를 아예 뽑고 온 것이다.

“세상에.”

몇 날 며칠 생각나지 않던 그 이름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 줄 정말 몰랐다. 정 생각나지 않으면 그저 포로를 조심하라는 정도로만 얘기하려 했었는데.

그 이름이 그런 성과를 내게 했을 줄이야!

“당신도 그것에 관해선 자세히 몰랐었군. 그럼 그가 날 공격했던 곳은 어디요? 만운처럼 손이나 혹은 팔이오?”

“아니오. 서방님은 거기가 아니라 눈 밑…….”

채운이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말에 무심코 대답하던 강희는 다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방금 끝까지 우연이라 우길 수 있었던 일에 대해 스스로 실토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그저 채운과 그가 아끼는 모두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었다. 그 한 가지만 단순하게 생각하여 이런 의혹을 받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꿈에 막연히 본 것이 이토록 정확히 맞을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되도록 안전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전황을 바꿀 정도의 중요한 사실이었다니!

만운은 어색해 하고 당혹스런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강희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이 할 말이 많을 듯하니 난 밖에 있을게요. 나를 포함해 두 분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이대로 쭉 오붓한 시간을 계속 가지면 더 좋고요.”

만운은 보란 듯이 그녀에게 왼손을 들어 흔들며 눈을 찡긋하고는 나갔다. 만운의 말대로 이번에는 강희가 말을 해야 할 차례였고, 그녀의 고백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자리를 피한 것이다.

하지만 강희는 뭐라 말해야 할지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이 그리 당혹해 하니 묻지 않고 싶기도 하지만……. 사실은 무척 궁금하오. 그걸 어찌 안 것이오?”

채운은 부드럽게 말머리를 시작하며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큰일을 당할 것을 피했고, 전황까지 변한 것이라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철장갑은 어찌 둘러댄다고 쳐도 다른 것들은 정말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더구나 그의 유도심문에 넘어가 버린 지금,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바보 같을 것이다.

만운에게 철장갑, 길석에게 갑옷을 만들어 주고, 채운에게 그 말을 전하라 했을 때는 전쟁을 떠나는 그들의 생사가 너무 불안했던 나머지 앞뒤 분간할 재간이 없었다. 지금 이런 상황을 맞게 되리라는 걸 알고도 그랬을까.

하지만 아마 알았다 해도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품은 작은 비밀이 그들의 안위보다 중하지는 않았다.

‘단지 무어라 말해야 할까?’

자신이 미래에 겪은 삶을 꿈에서 봤다고? 그렇게 말한다면 믿어 줄 수 있을까? 꿈 말고 다른 이유 무엇을 댈 수 있을까?

“저는 다만 몇몇 사실만 단편적으로 아는 것뿐이에요.”

힘겹게 말을 꺼내는 강희에게 채운은 편안한 웃음으로 그녀의 긴장한 마음을 풀어 주려 애썼다.

“그리 말할 줄 알았소. 허나 당신이 해 준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오. 만운과 길석의 미래를 좌우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이었다오.”

만운이 있었다면 부러졌던 제 새끼손가락을 주무르며 열렬히 동의했을 것이다.

“당신이 정 곤란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되오. 내 더는 묻지 않으리다. 다만 당신에게 감사는 하고 싶소. 정말 고맙소.”

그의 인사를 받는 강희의 마음은 더 불편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감히 그와 만운에게 이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 채운의 말대로 추궁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의문을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말하지 않겠다면 더는 묻지 않겠다는 말도 진심으로 보였다.

그런 마음들이 보이자 강희는 비로소 말할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저, 사실은…… 믿기 힘드실 거예요.”

말하면서도 눈을 내리까는 강희를 보고 채운은 그녀가 하는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당신이 해 준 말을 믿었기 때문에 우린 이기고, 무사히 돌아왔소.”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강희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꿈에서 봤던 경멸과 증오, 짜증 대신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자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가만히 숨을 골랐다.

다 말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닌가. 믿기 힘들 테지만 사실을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찾아오는 일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도 있었으니, 어차피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믿지 않으셔도 되고, 흘려들으셔도 돼요. 제가 아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

“전, 그러니까 얼마 전에 꿈을 꿨어요.”

“꿈?”

강희는 이제부터 할 말을 다시 고르며 한 번 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꿈에서 봤던 일들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전쟁이 일어났던 것과 만운과 길석에게 벌어졌던 일, 마지막에 그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실까지.

“저도 꿈에서 깨고 나서 처음엔 혼란스럽고, 그게 사실인지 믿기 어려웠어요. 저는 며칠 동안 그 이상한 꿈을 꿨고, 얼마 동안은 그것이 단순한 꿈인지 아닌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몇 가지가 꿈에서 본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막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구마도의 일도 그렇고, 이 이후는 꿈과 또 달라서…….”

꿈의 일에 대해 말하면서 강희는 조금씩 두려워지고 있었다. 그가 당장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 그리 되물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채운은 그녀의 말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군. 꿈이라…….”

채운은 그것이 예지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 이후가 꿈과 다르다니……. 그럼 강희가 한 일이 작용해 전쟁의 방향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서궁의 지하 감옥에 들어가 있는 크나다를 잡는 일이 그만큼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꿈이 예지몽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하지만 그녀의 귀한 꿈으로 얻은 목숨과 공은 밝힐 수가 없었다. 이 일이 남들에게 알려진다면 강희를 보는 눈길에 또 새로운 의혹이 덧씌워질 것이다.

아마 십중팔구 무녀가 될 여자가 신기로 꾼 꿈이라 할 테지.

채운은 강희가 그렇다 해도 상관없지만 그녀에겐 또 다른 치명적인 오명이 붙게 되는 것이다. 귀족 영애에게 천한 무녀가 가진 신기가 있다니, 그것은 이혼녀보다 더한 불명예였다.

강희의 비밀에 대해선 만운과만 나누고 덮는 게 나았다. 만운이야 저가 당한 일이 있으니 말해 주어야겠지만 그 외엔 아무도 알 필요가 없었다.

“잠깐만, 부인.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도 한 적이 있소? 아버님께는?”

“아니오. 아무도요.”

“그럼 우리만 알도록 합시다.”

“네, 서방님.”

강희가 안도의 표정으로 답했다. 어지간히도 말하기 힘들어 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이 집사가 방문자의 도착을 알렸다.

“나리, 성도종 대감께서 오셨습니다.”

“알겠네.”

성 대감이 오겠다고 알린 시간보다 훨씬 이른 도착이었다.

밖의 소란스러움으로 보아 벌써 성 대감은 안쪽 가까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어서 아버님을 맞으러 나갑시다.”

“네, 서방님.”

서방님. 채운은 새삼스레 저 말이 달리 들리고 있었다.

밤새 그녀가 달뜬 신음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저 단어뿐이었다. 이젠 저 호칭에 날을 세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차피 강희는 그 일을 모를 테고, 자신만 덮는다면 만운도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채운은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아버지!”

“오냐, 강희야.”

사람들은 며칠 전에 보고서도 반가이 인사하는 부녀의 모습을 모두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강희는 다른 무엇보다 아버지의 넉넉해진 표정에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항상 무언가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꽉 쥐어져 있던 손이 느슨하게 펴져 있는 것도 아버지의 변화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이제 가진 게 많아 거부가 아닌 이전보다 큰마음을 가진 거부가 되신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아버님.”

채운의 인사에 성 대감이 묘한 눈을 하고 웃었다. 궁에서 아무리 친한 척을 하고 인사를 해도 깍듯이 대감님, 대감님 하던 사위가 처음으로 그를 아버님이라 부른 것이다.

이것도 자신에게 생긴 변화처럼 딸로 인해 생긴 변화일 거란 짐작이 들었다. 그렇지만 성 대감은 굳이 이를 입에 담지 않을 정도의 아량이 있었다.

“강희가 그렇게 오라고 해도 내 주인 없는 집에는 오고 싶지 않아 이제야 발걸음을 하였네.”

“제가 미리 모셔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마음이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오늘도 미리 나가서 마중하지 못한 점 매우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아니네. 자네가 어디 날 부를 시간이나 있었는가. 그리고 오늘은 내 기별한 시간보다 너무 일찍 오지 않았나. 서둘러 오고 싶어서 이리 빨리 왔다네.”

“잘 오셨습니다.”

채운은 기꺼운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성 대감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졌다.

“헌데 와서 보니 강희가 친정에 올 때마다 뭐가 그리 좋다고 빨리 집에 돌아가려 했던지 이제야 알 것 같네. 이리 정갈하고 포근한 맛이 있어 그런가 보이.”

“이전엔 아니었습니다. 다 부인이 이렇게 만든 것이지요.”

“하하, 그런가? 허허, 우리 강희가 그런 재주도 있었단 말이지?”

성 대감은 집 안을 둘러보며 느껴지는 분위기에 절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말은 그저 빈말이 아닌 듯 주위를 둘러보는 눈에는 흐뭇함이 가득했다. 윤채운의 집은 그의 집처럼 화려한 아름다움은 없으나 아늑하고 정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만든 것이 딸 덕분이라니, 그 또한 기분 좋은 말이었다.

“그런데 둘러보기는 할 테지만 날 계속 여기 세워 둘 셈인가?”

“아, 아닙니다. 어서 드십시오.”

“하하, 농이네, 농. 드세.”

뻣뻣한 사위에게 한 마디 농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성 대감은 크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의 방문이라면 처음 온 집에 집 안 구석구석을 안내하고 한담을 나누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허나 성 대감은 오늘 다른 목적이 있어 온 것이었다. 궁에서 말을 해도 되긴 했으나 워낙에 은밀하고 민감한 사항이기에 일부러 온 것이니, 의례적인 일로 시간을 낭비할 새가 없었다.

식사를 한 다음 한담을 나눌 시간에 성 대감은 모든 이들을 물리게 하고, 채운과 만운만 함께 자리한 채 방문한 목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관리이기보다 상인인 것을 알고 있을 걸세.”

그리고 이어지는 성 대감의 말에 채운과 만운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최사립 측에서 무언가 큰 사건을 획책하고 있다는 성 대감의 감에 그들도 동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딱 골라서 최사립 대감이 들여온다고 한다면 증거나 잡을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어서 나도 처음엔 몰랐네. 최종적으로 모이는 곳을 보고 나도 알게 된 것이야. 그들이 들여오는 화약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어서 걱정이네. 내가 총괄하는 영역이 넓은 상인이 아니라면 이런 건 낌새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한 움직임이었네. 그렇지만 저들이 워낙 은밀하게 들여오는데다 그 양이 너무 많아서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구먼.”

“저하께 이 일을 알리셨습니까?”

“아니네. 나도 파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네가 곧 온다고 하기에 기다렸네. 내 저들이 의심하지 않으면서 의논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을 잡은 것이 오늘이야.”

“정말 잘하셨습니다. 저하껜 제가 알려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저들이 들여온 양이 어느 정도일 거라 보십니까?”

“내가 파악한 것만 해도 성벽 하나는 무너뜨릴 정도이니……. 그 배는 되지 않을까 생각되네.”

“그 정도 양이면 단순히 습격을 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혹시 저들이 그것을 사용할 만한 큰 행사나 행차가 있습니까?”

“세자 저하께서 주최하시고 행차하시는 행사로 보면 될 테지. 우선 엿새 후에 용수산의 사냥 행사가 있네. 그리고 열흘 후에 양광포에서 새 배의 진수식을 하고. 그리고 또 보름 후에는 사신들과 접견 행사가 계획되어 있네. 내가 아는 한 달 내의 공식적인 행사는 그러한데, 그 밖의 일정은 세자 저하와 직접 말씀을 나눠 보는 게 좋겠네.”

이전이라면 성 대감이 왕세자의 일정을 이 정도로 안다면 의심을 샀을 것이다. 정보가 빠른 상인이라 혹 알 수도 있다지만 왕세자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다는 건 결코 좋은 눈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성 대감은 왕세자와 자주 독대를 하는 인물이었다. 이제 그도 완전히 왕세자의 사람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일단 어느 시간, 무엇을 노리는지 알아야 하겠군요.”

“분명 세자 저하를 해하려는 수작이니 저하의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보존하면 될 것입니다!”

분개한 만운이 소리치자 성 대감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수색을 하는 기미를 알아채는 순간 저들은 숨을 걸세. 그리고 다른 기회를 엿보겠지.”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만운아, 그건 우리가 생각해야지. 아버님, 이만큼이라도 소중한 정보입니다. 정말 애쓰셨습니다. 아버님은 이 이상 아는 체하시지 않는 것이 저들의 눈을 피하기에 좋을 것입니다. 아버님이 파악하신 화약의 흐름만 저희에게 주시고, 이대로 모르는 척해 주십시오.”

“그래도 되겠는가? 내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힘을 보탤 수 있네만.”

“아버님이 아무런 낌새를 보이지 않는 것이 저희를 돕는 길입니다. 움직이는 건 제가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조심하게.”

성 대감은 짧은 방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성 대감이 돌아간 후 만운은 즉시 궁으로 향했다. 성 대감이 전한 말을 왕세자에게 은밀하고 빠르게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채운도 함께 가야 했으나 이런 일을 주도하고자 한 놈들이라면 채운의 주변을 주시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평상시 같은 아침도 아니고, 한 번도 없었던 성 대감의 회동에다 그가 떠나자마자 형제가 함께 움직이는 건 그들에게 경계심만 심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당면한 일의 심각함에 강희와 채운은 자신들의 문제를 이야기할 상황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성 대감이 던져 주고 간 일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 채운은 강희가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이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할 말이 있소?”

“제가 꿈에서 본 일 중에 이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이오?”

“네, 그런데 제가 꿈에서 본 그것은 지금이 아니라 팔 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 일에 화약을 썼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는지라…….”

‘팔 년 후?’

지금 생각해 보니 강희는 꿈에서 몇 년을 겪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럴 새도 없었지만 꿈의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꺼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꺼리면서도 어렵게 말을 꺼내는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도 이번 일도 화약을 쓰는 게 같은지라 맘에 걸린다는 말이오?”

“네, 시간 차 때문에 완전히 다른 사건이라 보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그때 저들이 쓰려고 한 장소가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나 아니라면 오히려 방해만 되는 허황된 정보가 되는 것이라 그것이 저어됩니다.”

“말해 보오. 판단은 내가 내리리다.”

“그때 그들이 목표로 한 것은 전하, 지금의 세자 저하께서 타실 배였습니다…….”

강희는 자신의 기억과 기록을 더듬어 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 만들었던 기록은 미래가 바뀐 걸 알게 된 후로 아궁이에서 불쏘시개가 되었다. 그냥 두었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 날 내용들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꿈속의 그녀는 다른 사건은 모르지만 그 사건만큼은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화약을 운반한 사람이 바로 성 대감이었고, 그것을 찾아내고 잡은 이가 채운이었기 때문이다.

청왕은 그의 마지막 치세라는 원정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아 만조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교지를 내리고 쓰러졌다. 그리고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바로 승하했다.

덕분에 왕세자는 아슬아슬한 정쟁 속에서도 피를 흘리지 않고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불안한 불씨는 그대로 가진 채였다.

가흔 왕자 측은 청왕이 마지막 숨을 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데 쓰고 죽었기에 명분이 없어 왕위 계승의 기회를 얻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내 왕위를 찬탈할 욕심을 내고 있었다. 때문에 수왕은 최사립 측과 점점 더 각을 세우고 대치했고, 항상 국론의 분열이 있었다.

이전의 원정은 무력시위 이상의 효과를 내지 못했고, 흩어진 해적 세력은 다시 뭉쳤다 나라에서 출전하면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때문에 나라의 해군 전력은 언제나 불쑥불쑥 출몰하는 그들을 막느라 인명의 피해가 많았다. 많은 군비를 해적들과 싸우는 데 썼기에 국력은 세질 수가 없었고, 다시 이전처럼 송국에 의존하며 송국의 문화를 우선으로 치는 이들이 늘었다.

그 대표가 되는 것이 최사립 대감이었다.

그의 세력은 안 그래도 가흔 왕자를 내세워 왕과 대치를 이루는 큰 힘을 갖고 있었다. 수왕이 아무리 젊고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있어도 최사립 측의 막강한 권력을 거꾸러뜨릴 힘은 부족했다.

가흔 왕자와 최사립 측은 왕위에 대한 욕심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수왕을 향한 숱한 암살 시도는 물론이고, 화약을 써서라도 기어이 왕을 죽일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대놓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뿐이지, 은밀하게 왕을 사死하려는 행동은 멈추지 않은 것이다.

화약은 드물고 귀한 것이었다. 또한 폭발력은 상당하나 정확한 목표를 공격하기엔 아직 문제가 많은 무기였다. 터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동안 미리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장소를 미리 정해 두고 설치하지 않고서는 암살에 이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용할 최적의 장소를 찾았다.

최적이라 하기에는 무리이나 의심받지 않고 설치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를 찾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배란 말이오?”

“네. 그때 해군함을 여러 척 새로 만들어 진수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걸 주관한 것이 수왕 전하셨지요. 그들은 왕께서 탈 배가 바다에 나간 순간 배를 터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것이 미수로 끝나고 만 것은 그 전에 화약이 설치된 것이 발각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화약을 들여온 성 대감은 반역의 주범이 되어 집안이 몰락했고,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인 신세가 되었다.

그 일은 최사립 대감 측과는 증거를 엮을 수 없어 성도종 대감 혼자만 무너진 사건이었다.

강희는 차마 그때 화약의 출처가 바로 아버지였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날엔 오히려 그녀의 아버지가 이 일을 먼저 알아채고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하신 것이다.

아직 그때 사건이 있었던 만큼 시간이 흐른 건 아니지만 강희는 완전히 뒤바뀐 미래에 아버지의 몰락도 피해 간 것 같아 그 점은 마음이 놓이고 있었다.

“배라…….”

채운은 강희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화약을 터뜨릴 곳으로 삼기엔 의외인 만큼 생각지도 못할 곳이었다. 하지만 현재 왕세자의 일정 중 배를 진수하는 데 참석하는 행사도 있었다.

미래의 흐름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같은 이들이 같은 종류의 사건을 벌이는 것이라면 같은 계책을 쓸 생각도 할 수 있었다.

‘그래, 같은 이들이 꾸미는 음모이니 비슷하다고 해도……. 근데 꿈이 정말 자세하구나.’

사건에 집중해야 하지만 채운은 별안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강희의 꿈은 예지몽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세하고 길었다. 그리고 강희는 꼭 그 인생을 살다가 온 것처럼 기억을 더듬어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 소문 속의 성강희와 완전히 다르게 변한 것도 그녀의 꿈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다른 생을 겪고 변한 것은 아닌지, 꿈에서 무슨 참담한 일을 겪은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물을 일도 아니고, 물어도 말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스스로 그 일은 덮기로 했으니 묻지 않는 것이 옳았다.

‘언젠가 말해 줄 날이 오겠지.’

지금은 저들의 음모를 막는 일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 * *

이번에 배를 만든 일은 꿈속의 그때와 영 다른 일은 아니었다. 구마도를 점령했다는 소식에 이를 크게 기뻐한 왕이 해상 전력을 더 보강하는 차원에서 그곳에 보낼 배를 새로 건조하라 명했던 것이다.

만약 이전의 원정에서처럼 구마도를 도로 빼앗겼거나 해적 본거지를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다면 배를 건조한 일은 무리한 낭비라며 실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꿈에서 이 일은 배 일곱 척을 만들고도 국고가 휘청거릴 만큼 낭비로 지적되었다. 그래서 해적을 토벌하는 원정을 이끈 왕세자가 질타를 당하고 원정을 다녀온 공을 상쇄할 만큼 입지도 좁아지고 말았다. 그리고 강희가 꿈에서 말한 시기인 팔 년이 지날 때까지 다시 배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앞으로 왜에서 배상금 조로 들여올 물자와 광물, 보석 등으로 충당될 것이고, 이전에 해적들의 본거지에서 찾아낸 전리품이 상당하기에 배를 건조하는 정도의 자금은 문제없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일곱 척이 아닌 열두 척의 배가 건조되었다. 그만큼 배를 만들 자금을 다 충당하고도 남으니, 저들이 왕세자를 공략할 근거가 없었다.

더욱이 왕은 배를 진수하는 자리를 더욱 크게 하여 왕세자로 하여금 행사의 주역이 되게 했다. 본격적으로 첫째인 왕세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함이었다.

청왕은 여전히 자주 자리에 눕긴 했으나 그때처럼 목숨을 걸고 왕위를 물려준다고 천명하는 대신 양위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가흔 왕자와 최사립 측에서는 입지를 점점 굳히고 있는 왕세자에게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전이라면 왕세자가 왕이 되더라도 찬탈할 기회를 엿볼 수 있었으나 이대로라면 그들은 점점 압박당할 것이 뻔했고, 결국 자리를 잃게 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번번이 막히는 암살 시도를 계속하는 대신에 대대적으로 일을 벌일 결심을 한 것이다.

강희의 예상처럼 이제 미래는 그녀가 본 것으로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알던 것이 다 달라졌어도 이번 일은 일단 비슷하게 시도된 일이라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채운이 전쟁 전에 미리 알았던 사실들에 대해 묻지 않았더라도 이에 대한 언질은 그에게 해 줬을 것이다.

“고맙소. 당신의 말대로 시기상으로 완전히 다르니 다른 사건으로 보는 게 옳지만 생각해 볼 만한 일이오. 아무래도 시간이 급박한 듯하니 나도 저하께 가 봐야겠소.”

“네, 어서 가 보시어요.”

강희의 눈이 걱정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채운은 걱정하지 말라 한마디 하려고 내밀려던 손을 애써 거머쥐었다. 지금 손을 내밀면 다시 떼어 내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이제 차갑게 식었을 그들의 침상에 다시 들기는 요원해지고 말았다. 그가 그 일을 가슴에 묻는다 해도 주위의 정황이 그들의 앞날을 쉬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을 무사히 막고 나면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말해 볼 시간이 오리라. 원한이라는 앙금이 남지 않는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처음 강희가 그의 막사에 찾아와 했던 제안 같은 것들은 던져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은 강희의 안전을 강구할 방도부터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당신도 당분간 서궁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좋겠소. 당신도 함께 간다면 중앙궁에서 못다 한 연회를 함께한다는 명분이 있소. 만운과 내가 둘 다 집을 비우는 지금 당신도 궁에 있는 것이 안전할 것이오.”

“네, 그럼 서방님 먼저 가시어요.”

“당신은 어찌하려 하오?”

“저는 다음 날 왕세자비마마를 찾아뵙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겠어요. 가끔 찾아뵙기도 했으니 이렇게 가는 것이 의심도 덜고, 나을 것 같아요.”

“알았소. 그럼 내 먼저 가리다.”

밖에는 벌써 왕세자가 보낸 전령이 와 있었다. 일부러 호탕하게 웃으며 기쁜 행색을 하고 있는 이였지만 은근슬쩍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채운은 전령과 함께 일부러 천천히 서궁으로 향했다.

다음 날 왕세자비가 보낸 가마에 오른 강희가 서궁에서 내렸을 때 제일 처음 눈에 띈 이는 채운의 뒤를 따르고 있는 재영의 모습이었다.

* * *

한재영이 이번 원정에서 이룬 공은 공식적으로 치하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냥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여성이라 정계에 내보일 수 없다는 것이 정말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의 공이야말로 이번 원정을 이길 수 있었던 숨은 일 등 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선 원정의 출발 시에 날씨를 맞혀 무사히 항해할 수 있었던 점. 그것은 이번 전쟁에서 해적들을 선제 공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군사로서의 역할은 눈부실 정도였다. 전투가 책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나 그녀는 고래로 역사에 빛날 전략가들의 병법을 두루두루 꿰고 있었다. 그녀는 그 병법들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사용해 아군은 최소한의 피해로 적군에게는 최대한의 피해를 입혔다.

어느 목숨인들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겠냐마는 전쟁이라 함은 피를 흘린 수에 승패가 오고 가는 것이다. 그녀의 전략은 마지막 전투에까지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토록 유능한 인재이면서도 그녀는 여인이기에 숨겨질 수밖에 없는 비운의 천재였다.

그래서 왕세자는 한재영의 공을 치하할 다른 방법을 찾았다. 공의 일부를 그녀의 오라비인 한만식에게 더하는 식을 취한 것이다. 덕분에 한만식은 일개 천부장에서 중랑장으로 승직했다.

한만식이 원래 공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최사립 측은 자신의 사람이 아닌 채운의 부하가 그런 자리를 차지하게 된 데 엄청난 반발을 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의 참모가 한만식이었다는 것으로 발표되면서 그의 위상이 크게 높아져 중랑장이란 직책이 오히려 작게 보일 정도였다. 다만 그것도 여동생의 공을 자신의 것으로 하여 얻는 자리가 불편했던 한만식이 극구 사양하여 타협한 것이 바로 중랑장의 자리였다.

왕세자로선 재영에게도 무엇이든 상을 내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왕세자비 하 씨와 함께 있는 자리에 일부러 재영을 초대하여 그녀의 청을 듣고자 했다.

“한 규수, 무엇이든 그대가 원하는 걸 말해 주겠소? 내 처자에게 사사로이 전답이나 집을 내릴 수도 없고, 그대의 오라비인 한 중랑장은 극구 사양하니, 무엇이든 그대가 원하는 걸 말해 보오.”

“따로 내려 주신 금전도 적지 않사옵니다. 이미 주신 걸로 과분하옵니다.”

“나는 왕세자이고, 이 나라의 대통을 이어 왕이 될 사람이오. 그리고 그대에게 그걸로 충분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소. 관직을 제수할 수는 없지만 그대가 원한다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

“진정, 정말이시옵니까?”

“설마 저하께서 허언을 하시겠어요. 한 규수가 그리 총명하다니 그 재주를 아껴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송, 송구하옵니다, 저하, 비마마.”

“하하, 나는 그저 그대의 공을 치하하고자 하는 말이오. 그러니 그대가 원하는 걸 말해 줬으면 하오. 정 없다면 모르지만 그대의 총명함을 썩힌다는 건 이 나라의 군주가 될 사람으로서도 아까운 일이라오.”

“망극하옵니다.”

“그러면 한번 얘기해 보시오. 그래도 그대가 사양한다면 내 다신 조르지 않으리다.”

짐짓 조르기를 그만둘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수의 말에 재영도 마지막까지 묻어 두기만 했던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다시는 얼굴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오라버니와의 결별도 감수하고서 뛰어든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지략을 수용해 주는 장수를 만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일이었고, 평생 잠자야만 하는 지식을 운용할 수 있는 한풀이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멈추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려국의 영토가 된 곳이지만 그 먼 타국 땅까지 가서 험한 전쟁을 겪으며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원수를 갚음이나 한풀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먼저 돌아가라는 선발의 배편을 뒤로하고, 본진과 함께 귀향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술을 짜고, 군을 이동시키고, 싸울 장소까지 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던 것은 행복했지만…….

그보다는 그, 윤채운 장군의 옆에 있는 것이 더 행복했다.

그에게 부인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굳이 다른 마음을 먹자는 것도 아니었다. 또 그는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참모 이외에 다른 눈으로 자신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그의 옆에 있을 수 있기만 하다면.

“허면…….”

“말해 보시오.”

재영에게서 드디어 본인의 청이 나오려 하자 왕세자가 반색하며 답했다.

“저는 평장사 대감의 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기?”

“감히 그 직책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오. 헌데 윤 평장사는 직책은 그렇지만 이전과 하는 일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보위에 오르기 전까진 아직 이 서궁의 안보와 군을 통솔하는 일에만 신경 쓸 것이기에 그의 서기라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것이오.”

“저는 그저 평장사 대감의 일을 돕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렇소?”

고이 읍하며 답하는 재영의 말에 왕세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궁 내부의 일을 달라 해도 주었을 것을, 굳이 평장사의 서기라니?

“저하께서도 그곳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분 말고 세상 어디에 편견 없이 저의 의견을 수용해 주시는 분이 더 계시겠습니까.”

“하하, 걱정 마시오. 한 규수, 난 그대가 원하는 일이 있는 것이 더 반갑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 드리리다.”

“망극하옵니다, 저하.”

“내가 청하고 그리 인사를 받다니, 그래도 되겠소? 아무튼 내 평장사에게 일러 그대를 서기로 삼으라 하겠소. 이번 원정도 함께하여 이기고 돌아온 평장사이니 그대와 뜻을 합친다면 뭐든 크게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망극하옵니다, 저하.”

수는 재영을 거두며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큰 공을 세우고도 마땅한 상을 내리지 못하여 안타까웠는데, 이렇게나마 본인이 원하는 걸 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만일 재영이 남자라면 바로 관직에 제수해도 부족함이 없는 인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엄연한 여인이니 그럴 수 없는 것이 진정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녀는 혼기가 찬 여인이라 곧 짝을 찾아야 할 것이고, 왕세자는 그녀가 되도록이면 자신의 측근과 이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재영은 그 총명함도 대단하지만 생김도 고아한 미인이니 그녀를 바랄 장수나 관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며, 어울릴 만한 이가 누군지도 이미 생각하기 시작했다.

왕세자와는 달리 왕세자비는 재영의 청을 달리 해석하고 있었다. 여인이기에 같은 여인으로서 그녀의 눈에 든 숨길 수 없는 감정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재영이 평장사를 입에 담을 때 떠오른 것은 분명 연모의 감정이었다.

그녀는 미래의 왕이 될 남편이 욕심을 낼 정도의 인재였지만 아무리 뛰어난 여인이라 하나 그것이 제 감정까지 어쩌지는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녀는 감히 이룰 수 없는 감정에 애를 태우는 재영이 그저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강희가 남편을 향해 보내던 눈빛과 겹쳐 보여서 더욱 애잔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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