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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귀환 (11/38)

11. 귀환

“마님, 국수를 왜 말리시나요?”

“지난번 너무 많이 만들었다가 남은 적이 있어 해 본 적이 있잖니. 그걸 응용해서 다른 걸 시도해 볼 생각이야.”

“아예 마른국수를 만드시게요?”

“응.”

주렁주렁 널린 모습이 빨래를 연상케 했지만 그것은 국수 가닥들이었다. 반죽을 늘려 가늘게 뽑은 면발이 대나무 발에 걸려 겨울 해에 마르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볕도 좋고, 겨울 같지도 않게 바람도 많이 차지 않아 정말 잘 마르겠는데요?”

“봄이 다가오잖니…….”

“네, 곧 봄이에요. 음, 공기도 다른 것 같아요.”

애심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옆에서 한 남자가 그런 애심을 보며 웃고 있었다. 재웅은 강희가 주문한 국수 말리는 발을 짜고 나르고 너는 걸 거드는 중이었다.

그와 애심은 봄이 되는 다음 달 혼례를 치르기로 한 사이였다.

애심은 수란이 입었던 활옷 대신 강희가 혼례식 때 입었던 원삼을 입고 혼사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애심의 혼삿날이 잡히고, 그 뒤에 그 옷을 빌릴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애심의 바로 뒤엔 벌써 부엌 하녀인 세원이 예약을 한 상태였다.

다행히 아직 길석의 전사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를 위해 심장 뒤쪽을 세 번 접어 두드린 철로 가린 갑옷을 만들어 주었지만 소용이 닿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방법이 어디 그 하나뿐일까.

‘그나저나 봄이 오면 정말 이 전쟁이 끝날까?’

해적의 본거지는 구마도 남쪽으로 이곳보다 더 따뜻한 곳이니 아마 지금쯤 한창 전쟁 중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이렇게 한적하게 국수나 말리고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그곳에서 피를 흘리는 이들이 나라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마님, 이걸 다 말리면 궁에 가져가실 건가요?”

“글쎄다, 애심아. 왕세자비께서는 말씀을 그리하시긴 하셨지만 몸보신을 한창 하셔야 할 이때 이런 걸 드시면 되겠니? 이건 귀한 밀로 만든 것도 아닌걸.”

“이게 어때서요? 사골 국물에 고기와 떡을 듬뿍 썰어 놓고 국수를 넣어서 드시면 얼마나 맛있겠어요?”

“그럴까?”

애심의 말에 강희는 푸른 하늘을 뒤로하고 말라 가는 국수 가닥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새해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세자비 하 씨가 드디어 출산을 했다.

처음 그녀를 만나던 날, 자신도 그러는지 몰랐던 강희는 부른 배를 부럽게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세자비의 말에 자신이 무의식중에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날 바로 시작한 달거리에 부질없는 희망이었지만.

며칠 전, 강희는 드디어 방문을 허락받고 새 왕손의 탄생 경하 인사를 드리며 아기를 안아 볼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신기하고 아름답지요?”

“……네, 마마.”

품에 아기를 안고 홀린 듯 쳐다보는 강희에게 왕세자비가 웃으며 말했다.

“성 부인, 너무 그렇게 부러워하지 말라니까요. 호호호, 성 부인도 어련히……. 어머, 내가 주책이군요. 성 부인 눈빛이 조금 서글퍼 보여서 농을 하려다 도로 민망하게 되었어요. 윤 장군은 반드시 이기고 무사히 돌아올 거예요.”

전장에 가서 새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을 걱정하느라 눈빛이 흐려진 거라고 짐작한 왕세자비의 말에 강희는 살포시 웃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걱정되고 초조한 마음이 큰 건 사실이니까.

강희의 품에서 입을 오물거리던 아기는 금방 잠이 들었다. 아기를 받아 옆에 눕힌 왕세자비는 아직도 정신없이 아기를 바라보는 강희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사실 이 아이가 딸이길 바랐어요.”

“마마!”

강희는 저도 모르게 놀라 소리쳤다. 왕손의 탄생에 사람들은 경사라며 축하를 했지만 왕세자비의 씁쓸함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는 까닭이었다.

“내가 임신했을 때 저하께서 무얼 가장 걱정하셨는지 아세요?”

“…….”

“저하는 지금 왕손과 내 뱃속에 새로 잉태된 아기의 미래가 걱정되어 정말 몇 날을 고민하시며 염려하셨죠……. 미래가 내 힘으로 좌지우지되지는 않겠지만 난 그분께 약속을 드렸어요. 세손은 반드시 지금의 왕손이 되실 것이며, 절대 저하께서 겪는 고통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말이에요.”

“마마.”

왕세자비는 염려스런 표정을 하는 강희에게 걱정 말라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하께서 윤 장군을 가까이하시는 이유 중 하나가 윤 장군이 그분의 동생과 사이가 더할 나위 없이 돈독하기 때문이에요. 그 모습이 부럽기 때문이라고 하셨답니다.”

강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가 돈독하다뿐이겠는가. 세상에 다시없이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형제였다.

형이 절 때리려 한다며 궁이 소란스러울 정도로 뛰어다녀도 시녀들이 웃으며 볼 수 있을 만큼 누가 봐도 정이 넘치는 형제였다. 그런 형제의 앞을 가로막으며 차라리 종아리를 치라 했던 자신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세상에 오직 두 분뿐이니까요.”

그리 답하는 강희의 눈은 또다시 죄책감으로 흐려지고 말았다.

그렇게 만든 게 누구인가. 어린 계집애의 알량하고 단순한 심술이…….

그런 악연을 어떻게 거둔단 말인가.

‘이미 쫓아 버린 가실을 핑계 삼아 피할까?’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에 강희는 제 편리한 합리화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이전의 성강희와 똑같은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한순간이라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어떤 핑계를 대도 그렇게 되도록 만든 건 자신이다. 벗어날 수가 없다. 그를 마음에 두었다면 더욱 진정으로 속죄를 하기 위해서라도 이 악연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한다.

‘매달려 사죄하며 용서라도 빌 수 있다면 좋으련만.’

붉은 기가 도는 눈으로 꿈속 그녀의 목을 틀어쥐고 이대로 꺾어 버리고 싶다던 만운의 원한을 잊을 수가 없었다. 너를 눈앞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내 팔이라도 한 짝 바치겠다던 채운은…….

볼 수가 없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만운은 아직 모르니 그런 호의와 애정을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채운은…….

아마도 그는 그 하룻밤에 많은 책임과 의미를 둘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이혼에 관해서 다시 생각해 보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잊은 척하려 해도 어디서든 누이와 부모님과 비슷한 또래나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허전함에 그것이 누구에 의한 짓인지 상기하게 될 테지.

그리고 이전과 같은 운명으로 굴러가고 있는 걸 확인이라도 시키듯 그의 옆에 있는 그녀를 보았다.

한재영. 그녀가 전쟁터에까지 같이 갈 줄이야. 같은 마음이기에 멀리서 본 분위기만으로도 그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행복할까?

하지만 지금 이런 생각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어찌 되었든 서방님과 도련님이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무슨 생각해요, 성 부인?”

“네? 송구하옵니다, 마마.”

“아니, 누구 생각하는지 어련하겠어요. 전장에 두 분을 보내고 오죽 마음이 타겠어요. 이럴 때일수록 더욱 몸이 바빠야죠. 요즘도 집에서 국수만 만들고 있어요?”

“소인이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호호, 그게 아니라 윤 장군이 즐기는 음식이라 그런 거 다 알아요. 거기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그 가는 손목으로 직접 반죽을 하고 늘리느라 무리한 것 아니에요?”

왕세자비가 소매에 가려진 강희의 슬쩍 내비친 손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마마.”

강희가 얼른 소매를 내려 감추는 걸 보는 왕세자비의 눈이 곱게 휘었다.

“아니라 해도 그런 거 다 안다니까요. 그러니 다음번에 궁에 올 땐 그 정성 가득 들어간 별미를 나도 같이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왕세자비의 농 같은 진심 어린 말에 강희도 짐짓 따라 웃으며 답할 수 있었다.

“미흡한 솜씨지만 성심으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는 말아요. 난 단지 성 부인과 오붓하게 한 끼 식사라도 하고 싶을 뿐이니까.”

“황공……. 네, 감사합니다.”

말을 바꿔 인사하는 강희에게 왕세자비가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강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이 날로 따사로워지는 것 같았다.

강희도 그녀가 좋아지는 중이었다. 처음엔 왕족이란 신분에 조금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요즘 강희는 이런 것이 친구가 아닐까 저 혼자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궁에서 물러난 뒤로 더욱 여러 가지로 국수 만들기를 시도해 본지도 모른다.

애심은 강희가 다음에 왕세자비와 국수를 함께 들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새로 말리고 있는 이것을 강하게 추천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늘게 뽑은 것 말고 꼬들꼬들한 국수를 조금 말렸다가 삶아서 건지고 나중에 육수를 넣기도 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렇게도 하니?”

“네, 시전에서 보니 그렇게 하던걸요?”

“아, 그런 수도 있구나.”

“마님은 참. 처음 음식 만드는 걸 배울 때부터 국수 생각밖에 없으시네요. 그거 주인님이 좋아하신다는 거 알고서 그러신 거죠? 대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마님?”

“응? 알긴…….”

내심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강희는 당황스러워 말을 흐렸지만 애심은 그냥 한 말인 듯했다.

“하긴 아실 리가 없긴 하네요. 하지만 이런 걸 보면 마님과 주인님은 천생연분이 아닌가 싶어요. 마님이 처음 배우기 시작해서 제일 잘하는 음식이 주인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이라니.”

“그렇게 생각되니?”

“그렇고말고요.”

“그렇구나.”

또 손이 느려지며 먼 하늘을 보는 강희를 보며 애심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별로 아는 바는 없지만 원정을 떠난 군사들이 고마인지 구마인지 이상한 이름의 섬 하나를 점령하고 계속 이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부러 그런 소식들만 전하는지는 모르지만 해적 무리를 얼마나 섬멸했으며, 해적선을 몇 척 불태웠다는 것까지 해적의 소굴에서 산더미 같은 금궤를 발견했다는 소문도 떠돌고 있었다.

덕분에 성 대감님은 이전보다 더한 거부가 되었다고 했다.

얼마 전 성 대감님과 만나고 오신 마님은 무언가 언질을 받은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 소문에 성 대감님은 이제 나라 안 십 대 부자가 아닌 최고 부자가 되었을 거라 했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성 대감님은 지난해 예성 지방을 훑고 지나간 전염병에 효험이 있다고 소문이 난 비누를 이번에 다시 모조리 사들여 도성 인근의 빈민촌에 나눠 주었다. 그런 걸 보면 단순히 헛소문만은 아닌지도 몰랐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면 돈도 많이 있어야 할 테니.

아무튼 마님이 바뀌시더니 성 대감님도 통 크게 인심을 쓰시고, 정말 두 분 다 여간 변하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애심은 지금 생각해도 마님이 처음부터 시작하여 그토록 고생하며 알아낸 비법까지 왕세자께 다 바친 것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님이 비누를 만든 덕분에 이 집 하인들과 식솔들은 풍족하리만치 쓰긴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몽땅 다 바칠 생각을 하신 걸까. 마님은 ‘나는 비누 만드는 것보다 국수 만드는 게 더 좋아’라고 하셨지만.

“마님, 그런데 이렇게 국수를 널어 말릴 생각은 어찌하신 건가요?”

“그야 송국에서 본 적이…….”

‘있으니까’라고 답해야 했지만 송국에 갔던 건 꿈속의 그녀였지 강희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 나라 밖으로 한 발짝도 움직여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송국에서 들여온 책에서 그런 걸 본 적이 있었으니까.”

“아아, 그러셨군요. 마님은 송국 책도 보실 줄 아시고, 그 나라 말도 하실 줄 아시고……. 참 부럽습니다.”

“그래, 필요한 걸 남에게 묻지 않고 내가 알 수 있으니 좋긴 하구나. 송국말이 교양이라 나도 억지로 배운 것이야. 배울 땐 그리 즐기지 않았지만 이럴 땐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헌데 너도 알려 주련? 내 너만 좋다면 가르쳐 주마.”

“아이고, 마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제가 그 나라 말을 왜 배웁니까? 갈 일도 쓸 일도 없는데요!”

“그러니?”

질겁하며 손을 흔드는 애심을 보며 강희가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라도 잠시 웃는 강희를 애심은 가린 손 사이로 몰래 훔쳐보았다.

그러나 잠시 웃던 마님이 주인이 원정을 떠나신 이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곧 다시 먼 하늘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얼굴이 되는 것을 보고 애심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 * *

애심이 들은 소문은 들뜨거나 부풀려진 소문만은 아니었다.

그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을 즈음, 수는 일부러 성도종 대감을 청해 독대를 했다.

“성 대감, 대감은 요즘 권신들의 귀감이요, 부러움을 한 몸에 사는 이라 합디다. 게다가 도성 인근에도 비누를 나누어 줘서 백성들의 인심도 얻으셨다지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예성 지방에서도 이미 하신지라 사람들이 성 대감의 인품을 극찬한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저하? 귀감이라니요, 그런 말씀은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비누를 나눠 준 건 다 저하께서 생산하신 것을 제가 헐값에 살 수 있게 해 주신 덕분 아닙니까. 백성들도 그것이 누가 누구를 위해 만든 것인지 이제 확실히 알았을 것입니다.”

“대감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내가 오히려 더 부끄럽군요. 그것은 애초에 성 부인이 모두 이룬 것을 받은 것뿐인데, 나는 앉아서 이득만 얻는군요.”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는 다 성군이 되실 자질을 지닌 세자 저하의 복입니다.”

“하하하, 고맙소이다.”

성도종 대감은 왕세자와의 독대도 처음 있는 일이지만 이리 친근한 자리를 가지기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대화의 시작이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되어 서로에게 호의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서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헌데 내 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소.”

“말씀해 보시오소서.”

“대감은 어찌 기약도 없는 전쟁에 그 많은 재산을 다 헌납할 생각을 하셨소?”

보는 이들마다 다들 똑같이 묻는 말이니, 성 대감은 왕세자가 무엇을 물을지 미리 알고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질문을 한 다른 이들에게는 앞일을 내다본 투자라 큰소리쳤지만 이제 거래 상대가 아닌 충성을 바칠 차기 왕께 진실로서 답하지 못할 게 없었다.

“본시 전쟁이란 것이 기약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내놓은 것은 전 재산이 아니옵니다. 제집도 그대로 있고, 하인들과 땅은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단지 가지고 있던 금전과 모든 상점의 물건들을 내놓았을 뿐입니다.”

성 대감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설명대로라면 집과 땅이야 움직일 수 없는 재산이라 둔 것이지 말 그대로 모든 재산을 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라에서 손꼽는 거부인 성 대감이 말한 양은 가히 어마어마할 정도였다.

그는 신색을 더욱 바로 하고 정중하게 손을 모은 채 왕세자께 답을 올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다른 이들에게 답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소신, 지금부터 성심으로 답을 올리겠나이다. 일전에 제가 딸에게 들은 바가 있어 비누라는 것을 예성 지방의 빈민들에게 푼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 그 지방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긴 하오나, 그때 돈 병이 무언가 때를 맞춘 것인 양 몸이 깨끗하기만 하면 막을 수 있는 전염병이라 그것이 효과를 보았습니다. 비누란 것이 만병통치나 모든 병의 예방이 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저는 단지 딸이 비누를 만든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감명받은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때 전 과거와 정말 달라진 딸을 볼 수 있었고, 저 또한 조금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인색한 제 부를 조금 풀자는 마음에 겨우 그런 일을 한 것인데, 바로 그때 그곳을 지정해 그런 병이 돌고, 백성들이 병에서 피해 갈 수 있었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

왕세자는 성도종 대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것이 하늘이 제게 무언가를 알려 주려는 지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딸아이와 윤 장군의 혼사를 추진하며 거래를 한 것은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제 딸이 이전에 어땠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 딸 강희가 그렇게 저를 일깨운 탓에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해적들이 뱃길을 막고 설친다는 소식에 곧 원정을 할 거란 예상을 미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먼저 원정에 대비한 모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걸 준비하며 저는 제 일생 동안 이룬 모든 걸 걸었습니다. 그렇게 다 내놓고 망하면 어쩔 거냐, 많은 우려들을 들었지만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어차피 혼자 사는 집, 집은 좀 작게 하고, 논밭이 건재하고, 옆에 착한 딸이 있으니, 걱정이 없었습니다. 또한 이번 원정에 저의 모든 것을 거는 일이 하늘이 저에게 내린 명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전쟁이란 기약이 없다지만 그땐 무작정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다 잃는다 해도 후회도, 두려움도 없이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숨소리조차 방해가 될 정도로 길게 저의 심정을 털어놓는 성도종 대감의 말에는 흐트러짐도 없었고, 가식도 없어 보였다.

“소신의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너무 장황하게 말씀을 올린 것 같습니다. 귀를 어지럽혔다면 용서하시오소서.”

“허허, 용서라니요. 그리고 어지럽히다니, 그 무슨 말씀이시오.”

왕세자는 앞에 조아린 노신의 어깨가 그토록 커 보일 수가 없었다.

남들은 그가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재산을 두고 도박을 하여 더 큰 부를 이루었다 부러워할지 모르나, 성 대감은 도박이 아닌 사명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 부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는 넉넉함이 이 사람을 더 여유 있고, 큰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지도 몰랐다.

비누가 좋은 물건이긴 하지만 당장 빈민들에게 먹을 것도 아닌 그것을 일부러 사서 그들에게 준 것만 해도 그렇다.

비누란 원래 강희가 만든 것인데, 아버지인 성 대감이 그걸 만들 수 없어서 왕세자에게서 산 것일까?

강희는 왕세자에게 비누 사업을 넘기며 널리 만드는 법을 알리면서 개인이나 여럿이 공동으로 품앗이를 하여 만드는 건 허용하되 상단에서 사업적으로 만드는 건 금하게 해 달라 청했다. 말 그대로 국영사업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 성 대감도 그만한 양의 비누를 구하려면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 대감이 이번에 더한 부를 가질 수 있었다 해도 빈민들에게 구휼 양식도 아닌 비누를 사서 나눠 준 의도도 생각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것을 나눠 준 성 대감도 칭송이 자자하지만 이 일로 인해 비누란 것을 누가 생산하고 있는지, 왜 만들게 되었는지 더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장에 귀한 비누를 식량과 바꿔 먹을 수도 있었기에 궁한 이들에게 그런 걸 주고 생색을 내려 한다는 욕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예전의 성 대감은 거부란 말을 듣는 이로서 특별히 더 모질거나 악한 이는 아니었으나 덕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왕세자는 이 시간부로 그런 마음을 지우기로 했다. 이전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성도종 대감은 덕이 있고, 그로 인해 빛이 나는 사람이 되었다.

아울러 그에 맞춰 운도 따라 주었다. 성 대감은 잃는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베푼다 생각하니, 그만큼 따라온 것이 아닐까.

중요 문건을 다루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왕세자로서 수는 이번 원정에 국가 지원을 빼고 권신들이 내놓은 군자금의 반이 성도종 대감의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공에 따른 포상도 가장 큰 것은 성도종 대감의 차지였다.

아직 끝나지는 않았으나 이번 원정은 거의 이긴 전쟁이었다. 구마도는 완전히 려국의 차지가 되었으며, 해적의 무리는 다시는 려국의 바닷길을 막는 장난을 칠 수 없을 것이다. 그곳을 기지로 삼아 항상 그들을 감시하고 원천 봉쇄할 것이기 때문이다.

잔당을 소탕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원정을 떠난 군사들은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번 전쟁은 대승이다.

봄이 옴과 동시에 승전하고 돌아오는 장군들을 크게 맞을 연회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 * *

온 나라에 훈풍이 불고, 언 땅에 녹음과 새싹이 움트는 것과 함께 개선 소식이 전해졌다.

백성들에게까지 전해진 소식은 온 나라 안의 사람들을 흥분하게 할 만했다. 새로 바닷길을 막고 횡포를 부리던 가장 큰 해적 무리를 완전히 소탕함과 동시에 쇼군에게서도 항복을 받아 내고 재발 방지와 피해 보상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청왕이 직접 파견한 사신이 쇼군과 공식적, 구체적인 마무리를 짓고 종전 협상을 함으로써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이로써 채운은 한 섬을 나라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바닷길을 완전히 정복한 개선장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정을 떠난 지 꼬박 반년이 더 지나 드디어 집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죽은 이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을 입은 이들이 많았지만 오늘만큼은 모두들 감격과 흥분에 빠져 기쁨의 함성을 지르게 되는 날이었다. 병사들이 돌아오는 걸 반기려는 건지 봄꽃들도 때를 맞춰 경쟁하듯 흐드러지게 피어 그들의 길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저기 기가 보인다!”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도성 입구의 성문 꼭대기에서 한 병사가 돌아오는 원정군의 기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백성들의 함성이 그 뒤를 이었다. 몰려든 인파는 배웅하는 길과는 다르게 환희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었다.

개선한 장수들은 곧장 왕이 있는 중앙궁으로 향했다.

궁 앞에는 오랜만에 병세를 완전히 떨치고 일어난 기운이 넘치는 왕이 입구에까지 직접 나와 개선하는 장수들을 반기고 있었다.

왕은 말에서 내려 부복한 채운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내 장군이 이기고 돌아온다는 소식에 항상 떨쳐지지 않는 두통도 사라지는 게 느껴졌네. 그냥 느낌이 아니라 어의도 놀랄 정도야. 장하네, 장해!”

“모두 전하의 성은이 있었던 덕입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직 그런 인사는 이르네. 자, 안으로 드세.”

전쟁의 공과와 상벌은 채운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논의되어 있었다. 해서 그날 당장 공에 대한 상이 내려졌다. 정말 이날을 위해 일어난 듯 강건한 때가 드물던 왕이 모든 상을 직접 내리고 싶어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왕족들과 대신들과 장군들과 일부 고위 귀족의 가족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여 개선장군들의 공을 치하하고 축하했다.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상벌을 어찌 내릴지 결정하는 것도 또 다른 전쟁과도 같은 일이었다.

채운은 상장군을 겸임하면서 훨씬 윗줄인 중서문하평장사에 봉해졌고, 만운은 낭장으로 승직했다. 각각 어마어마한 특진이었다. 채운이 중앙에서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신이 됨으로써 왕세자 쪽도 막강한 최사립 측과 대립각을 세우는 데 한층 더 힘이 실리게 되었다.

개선하고 돌아온 채운을 크게 반기고, 그의 직책을 파격적으로 올려 준 이가 바로 왕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채운의 공을 크게 산 청왕은 그를 중앙궁에서 머물게 하며, 개선장군들을 위한 연회에 참석하란 명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그 연회에서 왕이 손수 내리는 어주를 가장 먼저 받는 영광을 누렸다.

연회는 국가의 경사에 준할 정도로 성대하고 크게 벌어졌다. 이 연회의 주인공 격인 개선한 장군들을 위해 그들 가족의 입궁까지 허락되었지만 그 자리에서 강희는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다시 사람들의 입을 탔다. 낭군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음에도 그를 맞으러 오지 않는 강희에 대해 수군덕대며 흉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연회가 어떤 자리인데, 이런 자리에까지 나오지 않다니.

이것은 역시나 그녀가 평민 출신인 지아비를 업신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끔 왕세자비를 보러 다니는 것 말고는 두문불출하는 강희에 대한 소문은 혼인 전과 여전했다.

그래서 누군가 그런 말을 하자 강희에 대한 말은 더욱 악화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여기저기 베풀며 칭송을 받기 시작한 성도종 대감을 언급하며, 그의 인품이 그런 딸자식 때문에 먹칠을 당한 격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내 저놈들의 아가리를!”

“그만.”

채운이 당장 달려들듯 하는 만운을 말렸다.

왕이 베푼 연회에서 난동을 부릴 수도 없어 참아야 했지만 화를 완전히 참지 못한 만운의 손에서 술잔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지고 있었다.

“이 자리만 벗어나면 가만두지 않겠소!”

“참아라. 네가 나서면 더 우스워진다.”

“뭐요, 형도 들었잖소? 알지도 못하고 형수에 대해 저리 떠드는 놈들을 내 가만두고 보란 말이오?”

“알지도 못하고 떠드는 게 아니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형!”

“저들은 네 형수에 대해, 아니, 성강희란 여자에 대해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니란 말이다. 너도 혼인 전에 내 상대가 누군지 알고 분통을 터뜨렸지 않았느냐?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나서면 꼴이 더 우스워진다는 것이다.”

“뭐? 그래서 형수가 길석이가 모시러 갔는데도 일부러 오지 않은 거란 말이요?”

“그럴 수도.”

“에잇, 이전 일이잖아! 지금 형수는……!”

만운은 분한 기분을 다스리려 우그러진 잔을 던져 버리고 주위의 아무 술병이나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채운은 그런 동생에게 지금 네 형수가 오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변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라고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처음 그를 찾아와 했던 제안에 매여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분통을 터뜨리는 만운을 말리긴 했지만 채운도 속이 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전쟁 내내 집으로 돌아오고 싶게 만든 이가 누구였던가.

‘그런데도 그녀는…….’

강희를 볼 수 없다는 짜증과 불안감이 점점 엉뚱한 생각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그것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천한 출신인 자신과 계속 부부란 이름으로 엮여 있는 것이 싫은 것일 수도 있었다. 이혼이란 불명예를 감수할 만큼 그가 싫은 것일 수도.

이후 채운이 잡은 술잔도 여러 개가 우그러지고 말았다.

연회는 더 이어졌지만 왕이 다시 자리에 눕는 바람에 흥할 수가 없었다. 이전처럼 심각하게 쓰러진 것이 아니라 쇠약해진 몸이 연회의 흥을 이기지 못해 피로하여 그런 것이긴 했지만 사람들은 이제 왕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조심스럽게 짐작하고 있었다.

연회의 종료와 함께 물밑에서 움직이는 세력들의 은밀한 수신호가 오가고, 그것은 금방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이들에게 또 다른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다.

* * *

“주인님과 만운 도련님이 오시어요!”

꾸덕하게 마르고 있는 국수 가락을 살피던 강희에게 애심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철퍼덕.

이제나저제나 서방님의 귀환을 기다리던 강희는 거의 다 마른국수 가락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뛰어갔다. 저리 애타게 기다리던 마님이 며칠 전 길석이 모시러 왔을 땐 왜 가지 않으셨는지 모르겠다며 애심도 강희를 따라 뛰었다.

강희가 대문 앞에까지 달려갔을 때 말을 탄 채운과 만운이 마침 들어서고 있었다.

‘서방님!’

강희는 속으로 그를 한껏 외쳐 불렀다. 무사히 돌아온 그의 모습에 감출 수 없는 환희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사실 며칠 전 강희는 많은 사람들의 인파에 치이면서도 그가 돌아오는 모습을 몰래 보러 갔었다. 그 좋은 날에 배웅하는 날처럼 눈에 뜨일까 저어되어 애심의 옷을 몰래 입고 나선 그녀를 다행히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멀리서나마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더랬다.

그리고 여러 병사에게 둘러싸인 채 귀하게 모셔지며 오고 있는 그녀도 볼 수 있었다.

강희는 활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는 재영의 모습을 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행복한 미소에 강희는 그 험한 전쟁터에서 고생한 재영에게 질투가 다 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리는 옹졸한 제 속을 나무라려 했지만 이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강희는 그의 성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하자, 스스로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더 서 있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날부터 하루가 사흘처럼, 일 년처럼 흘렸다. 지난 반년이 넘는 시간보다 요 며칠이 더 길게 느껴졌다. 다른 이에게 내주자 각오하고 있었으면서도 아직 남은 짧은 시간만큼은 내 것이라고 마음속으로는 강짜를 놓고 싶을 만큼 그토록 욕심이 났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집에 온 것이다.

가까이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강희의 마음은 아리게 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채운은 감히 다가오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강희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강희가 겨우 대문까지의 길을 뛰어오다가 도중에 벗겨진 신발을 애심이 슬쩍 전해 주는 모습도 다 보았다.

세 발짝쯤 떨어져 있는 강희에게 채운보다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만운이 달려갔다. 그는 그녀를 거의 안을 듯이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형수, 나 왔소!”

“도련님.”

강희는 인사보다 만운을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만운의 멀끔한 얼굴과 멀쩡한 손을 눈으로 더듬으며 가슴 벅찬 기쁨에 눈물이 솟아올랐다.

꿈속의 그녀가 보는 것조차 싫어하며 경멸하던 만운은 이 전쟁으로 큰 부상을 입었었다. 얼굴엔 눈 밑으로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얼굴의 반을 갈라놓은 줄이 그어졌고, 왼쪽 손은 반 토막이 났던 것이다.

허나 지금 전장에서 돌아온 만운은 숱하게 입은 자잘한 상처도 모두 나은 채 깨끗한 모습이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만운을 반기며 인사를 하는 강희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과 얼굴을 매만질 듯 진정으로 안도하고 기뻐했다.

채운은 그런 강희의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강희가 자신도 살피듯 보고 안도하는 모습 또한 놓치지 않았다.

또 그는 길석을 집으로 보낼 때 그녀의 표정과 반응이 어땠는지 자세히 살펴보라 명령을 내렸었다. 길석은 그녀가 자신이 살아 돌아왔음을 몇 번을 되풀이하며 기뻐했다고 전했다.

길석은 등에 활을 맞고도 살아난 이후로 다른 전투에서 한쪽 귀가 반이 잘리고 볼을 크게 가르는 상처를 입었다. 그렇지만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고, 곧 아버지가 될 것이다.

길석과 헤어질 때처럼 다시 눈물 바람으로 상봉한 수란의 배가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형수, 내 형수 덕에 무사할 수 있었소.”

“아니어요, 아니어요, 정말.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만운이 강희를 만나자마자 전쟁 내내 하고 싶었던 말로 말문을 열었다. 강희도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런 두 사람을 채운이 말렸다.

“만운아, 들어가서 얘기하자.”

“형수, 형이랑 내가 온다고 맛난 거 많이 준비해 놨겠지요? 집 밥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궁에서 호화로운 음식이 그렇게 나와도 지척에 집을 두고 있으니 내 온몸이 근지러웠다오. 그러니 어서 듭시다.”

이 기쁜 날에도 멀뚱거리며 서 있는 부부야 어쩌든 말든 만운은 강희를 앞세워 가며 신나게 떠들어 댔다.

만운은 형이 안으로 들자며 저의 말을 막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거야 형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는 하고 싶었다.

형수가 그들에게 준 것들은 결정적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이 전황을 바꿨을 거라 예상할 만큼 엄청난 것이기도 했다.

어찌 맞춘 듯 미리 그런 걸 알고 있었는지 의혹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허나 이 자리에서 말할 만한 얘기가 아니기도 했다.

집안의 모든 하인과 하녀들이 나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돌아온 주인과 도련님을 기쁘게 맞았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그 살벌하고 험한 전쟁을 치르고 낭장의 호칭을 단 만운이었지만 한 해가 더 지나 한 살을 더 먹었어도 그는 아직 열아홉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만운은 궁에서와는 또 다르게 마음껏 잔치를 즐겼다. 보이는 이들마다 모두 술을 건네고 받아 마시며 젓가락을 두들기고 목청껏 노래하는 모습에 다들 함께 흥겨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정말 만운의 말대로 집안사람들만 모인 이 왁자지껄한 자리가 궁에서보다 더욱 정겹고 즐거웠다. 그리고 소박하긴 해도 음식도 더 맛이 있는 것 같았다.

춘풍이 부는 봄이지만 저녁이 되자 쌀쌀한 날씨에 모두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거두고,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채운은 오랜만에 돌아온 내 집의 음식을 먹고, 내 집의 술을 마시고, 내 집의 목욕탕에서 씻는 기분이 그간의 모든 시름을 달래 주는 것만 같아 그답지 않게 느긋해졌다.

그 음식과 술을 내온 것이 자신의 아내이며, 목욕탕에서조차 그녀의 향취가 나는 것 같았다.

방에 들자 그의 침의를 올려놓고 나가려는 강희가 보였다.

“어디를 가시오?”

“제 방으로…… 갑니다.”

“뭣이라?”

기분 좋던 채운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오늘부터 전 부속채의 제 방에서 지내겠습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채운은 그렇게 말하며 물러나는 강희의 손을 낚아챘다. 만운이 흥겹게 떠들며 노래하는 걸 지켜보며 마신 그 많은 술이 일시에 깨는 것 같았다.

“어딜 간다고? 당신 방? 당신 방이 어딘데? 흥, 사람들이 떠드는 말이 맞는 거였소? 아무리 장군으로 불리고, 그보다 윗줄인 벼슬을 받는다 해도 천한 피가 어딜 가겠느냐, 이 말이오? 그래서 절대 그 귀한 몸을 이 몸과 엮을 수 없다, 그 말이오?”

“서방님!”

“서방님, 서방님, 입으론 잘도 그리 부르면서. 왜? 그 몸을 이 미천한 몸에 닿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겠지. 지난번엔 만운의 눈도 있고 해서 엉겁결에 실수로 나를 허락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다는 것 아니오?”

“그, 그게 아닙니다, 서방님.”

“아니라? 그럼 당장 그 말을 증명해 보시든지!”

강희를 잡은 그의 손이 그녀를 세게 잡아당겼다. 침상에 앉은 그의 위로 강희가 풀썩 넘어지듯 안겼다.

그녀를 다시 만나면서부터, 아니,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내내 탐하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입술이 바로 그의 턱 아래 벌어져 있었다.

강희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바르작거리지도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그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했다.

채운은 저를 보는 물기 어린 눈동자를 보며 그 눈매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 얼굴이, 이 눈이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그와 강희의 달뜬 숨결이 서서히 섞였다.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대자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잠깐 탐한 그녀의 입술은 달기 그지없었다.

확인하듯 입술을 떼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강희가 헛하니 숨을 들이쉬는 게 보였다. 조금 놀란 것처럼 보이긴 했으나 그를 거부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눈빛이 무어든 간에 그녀가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는 한 절대 거부한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채운은 다시 다디단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가 강희의 입술 안으로 혀를 집어넣자 흠칫하며 놀라는 몸짓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침입에 곧 익숙해진 듯 보이자 그는 부드럽고 말캉한 그녀의 혀를 자신의 입안으로 끌어들였다.

허겁지겁 빨아들이며 정신없이 탐하는 와중에도 그의 등 뒤를 파고드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강희가 그의 등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도 정말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제 그를 방해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이제 무어라 하든, 저가 그녀에게 했던 손대지 않겠다던 다짐 같은 건 필요도 쓸모도 없었다.

단지 그녀와 이 달콤한 숨결을 합치는 것이 중요했다.

언제나 마음을 억누르던 그것이 해방되자 성난 그의 몸은 그녀를 빨리 차지하라고 아우성을 쳐 댔다. 허나 오늘은 지난번처럼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강희의 가쁜 숨소리와 체향이 반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날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급하게 그녀에게 몸을 묻던 그날.

힘겨워 하면서도 그를 받아 주던 그녀는 아픔에 찡그린 얼굴을 했지만 원망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랬다 해도 이번엔 찡그림 대신 기쁨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들의 집, 그들의 침실…….

그리고 약기운 같은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 오늘이 진짜 그들의 첫날밤이나 마찬가지였다.

강희에게 그날이 아닌 오늘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리라.

전장의 하루하루 타는 듯한 숨 막히던 그 긴 시간 동안 매일 기억하고 원하던 입술이었다. 그 오랜 시간 참고 이제야 허락된 그녀의 입술인데, 이 밤이 새더라도 놓아주고 싶겠는가.

심장은 터질 듯 계속 달음박질쳤지만 그는 그를 갈증 나게 하는 그녀의 입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좀 더 부드럽게 핥았다. 금방이라도 낚아채고자 하는 맹금의 날갯짓인 걸 숨긴 채 유유히 비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도록 그녀의 입술과 그 안을 탐했다.

어느 쪽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혀로 서로의 입안을 오가며 오랫동안 그녀의 몸을 적셔 나갔다. 그의 감질 나는 부드러운 움직임에 오히려 애가 탄 강희가 그의 등을 잡아당기며 욕심껏 그를 안았을 정도로.

그녀는 그저 자신을 허락하고 허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잡아당기는 사소한 동작에도 그녀의 온 마음을 대변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날 원해.’

작은 깨달음이 찾아오며 그의 온몸을 희열감이 관통하는 것 같았다.

그는 강희에게 정말 날 원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로 이 순간을 방해를 할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지금은 작은 신음과 탄성이면 답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말로 그녀를 채근하기보다 오늘만큼은 천천히, 천천히 강희에게 기쁨을 주며 안고 싶었다. 한마디 말이라도 할 양이면 그의 그런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단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숨쉬기 위해 잠시 입을 뗀 사이로 그는 생명줄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강희…….”

매일 밤 전장에서 어둠 속에서나 소리 내어 불러 보던 이름.

그녀를 부르기 위해 잠시 멈춘 그의 입술을 마치 떨어지기 싫다는 듯 뒤따라오는 강희의 입술에 그는 빙긋 웃을 수 있었다. 제 욕망에 뒤지지 않을 만큼 그녀가 자신을 원하고 있음을 그녀는 말로 하지 않고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부르고 싶었다. 언제나 대답 없이 속 울림으로만 부르던 대상을 직접 불러 확인하고 싶었다.

“강희.”

“네?”

다시 부른 이름에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입술을 붙였다가 떼고 다시 그녀를 불렀다.

“강희.”

“네, 서방님.”

강희가 달뜬 눈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답하고 있다는 게 이 현실을 다시 자각하게 만들었다.

여기는 언제 당장 병장기를 들고 뛰쳐나가야 할지 모르는 전장의 막사 안이 아닌 그의 집, 그의 침상이었다. 그리고 매일 상상으로만 떠올려야 했던 강희가 그 어여쁜 입술을 열어 실제로 답하고 있었다.

“강희.”

“네, 서방…….”

다시 부름에 답하던 강희의 입술은 남자의 뜨거운 입술에 포개어진 채 말소리가 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그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리고 이후론 그녀를 부를 새도 없이 겹쳐진 입술 사이로 가쁜 숨만 간간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둘 사이를 방해하는 이 옷가지들을 처치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입술을 맞댄 채 강희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그녀가 살짝 굳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잠시 멈추고 그가 이마를 맞대고 몇 번 더 가볍게 입술을 빨아들이자 다시 긴장을 푸는 게 보였다.

그는 다시 그녀의 고름을 풀고 옷섶을 열었다.

그리고 목덜미에 숨을 불어넣고, 그곳에 입을 맞추었다. 강희는 헛하니 숨을 들이쉬었다.

밤새도록 탐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달콤한 입술에서 입을 떼는 것이 아쉽기만 했지만 그녀에게는 손으로 쓸어 보고 입술로 탐하고 싶은 다른 데도 많았다.

벗겨진 웃옷 아래 적삼이 보이고, 그 안에 매듭이 또 숨어 있었다. 그 매듭을 찾아 풀며 그녀의 목덜미 아래 움푹 파인 곳에 혀를 대었다.

“아흣.”

달뜬 신음 소리가 머리 위로 들리며 강희가 그의 머리카락을 양손 가득 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머리카락 속을 파고드는 느낌도 그를 자극하는 또 다른 미약인 것만 같았다.

맘 같아선 끊어 버리고 싶은 나비매듭이 그의 뭉툭한 손 아래 요리조리 도망 다니고 있었다. 급한 나머지 매듭의 반대 방향을 잡아당겨 오히려 더 꽁꽁 묶여 버린 그것을 푸는 데에는 인내심이, 정말 큰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의 성난 몸이 그에게 반항을 해 댈 만큼 힘겨운 싸움이었다.

손가락과 이를 사용해 마침내 그것을 풀어 버렸지만 그 안 또 한 겹의 속적삼이 숨어 있었다.

“아흐!”

실망스런 그의 신음에 강희가 쿡쿡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배에 닿아 있는 그의 몸이 웃느라 떨리는 그녀의 몸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강희는 아까부터 그의 어깨를 잡고 반쯤 들어 올려진 채 그에게 꼭 안겨 있어서 그녀의 움직임과 반응이 자세히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천천히 하겠다던 저의 마음이 별안간 휙 돌아서고 마는 것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성난 몸이 벌써부터 터질 것 같은 제 욕심을 채워 달라 아우성이어서 그의 돌변한 마음을 반기며 어서 손을 움직이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역시 무리였다. 이 갈망을 참는 것은.

욕심을 부리는 그의 손이 허둥대며 그녀의 몸 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아직 속적삼 아래로 맨살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가슴을 한 손에 움켜잡고, 욕심껏 손안에 쥐고 주물렀다.

헛하는 그녀의 신음이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가 그의 머리를 안으며 그 위로 자신의 얼굴을 파묻는 게 느껴졌다. 새털 같은 부드러운 느낌이 그의 이마 위 머리 위로 훑고 지나갔다.

강희가 그의 머리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채운의 마음도 울컥하면서 반드시 강희에게 오늘을 기억하게 만들겠다던 다짐이 다시 떠올랐다. 이대로 멋도 없이 짐승처럼 옷도 덜 벗긴 채 그녀에게 몸을 묻을 수는 없었다.

성난 몸에게 잠시만 더 참으라고 말했다.

인내심은 바닥났지만 더듬거려 겨우 찾은 속적삼의 매듭을 채운은 적군의 진영을 살필 때처럼 공을 들여 풀었다.

이번엔 매듭의 끝을 제대로 찾은 것이다. 드디어 속적삼까지 벗겨 그녀의 맨 어깨가 드러났으나 이번에도 실망의 신음이 그의 입을 비집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허.”

이 여자는 무슨 옷을 이렇게 많이 입고 있단 말인가!

자신은 웃옷 하나만 벗으면 당장 알몸이 될 수도 있는데 강희의 옷은 지금까지 그토록 어렵게 세 겹이나 벗겼는데도 아직 가슴을 가린 천이 동여매진 채 그녀의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가 좌절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정확히 들렸다.

“후후!”

채운은 고개를 발딱 들어 강희의 눈을 들여다봤다.

멈칫하고 웃음을 멈춘 강희가 제 눈을 피하다 끌려오듯 그의 눈을 찾았다. 그러고는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는다.

더 참지 못한 채운은 미처 감추지 못하고 봉긋 솟아 있는 젖무덤에 손을 집어넣어 맨 가슴을 매만졌다.

“아…….”

강희가 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렀다.

처음이 아닌데 처음처럼 느껴졌다. 예전의 그때는 들은 적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신음 소리였다.

한 손에 가슴이 잡히긴 했지만 아직도 그를 답답하게 하는 가리개를 다른 손으로 잡아당겼다. 다행히 그것은 그가 잡아당기는 대로 스르르 벗겨졌다. 매듭을 찾지 못하는 그 대신에 강희가 재빨리 그것을 풀어 주었던 것이다.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보며 그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곧장 입에 덥석 물고 제 욕심을 조금 채웠다.

그녀의 신음 소리가 조금 더 거세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남은 것이 있었다.

그녀의 치마를 벗기는 손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한 꺼풀, 두 꺼풀, 속바지와 속곳, 마지막 작은 가리개까지…….

모든 걸 벗긴 그의 아래 그녀가 누워 있었다.

흐린 불빛 아래였지만 그녀를 보기엔 충분했다. 부끄러움에 눈을 꼭 감고 있는 발간 그녀의 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입술을 겹치자 강희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가 원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강희의 옷을 벗기는 데 집중하느라 그는 아직 맨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와 입술을 붙인 채로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허겁지겁, 나중에는 잡아 뜯을 듯이.

도검술을 연마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던 그녀의 옷 벗기기에 비해 그의 옷은 한순간에 쉽게 벗을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와 같은 알몸이 된 그가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아직 눈을 감고 있는 강희의 고개를 돌리고 새털같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를 보시오.”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말에 강희가 살며시 눈을 뜨는 게 보였다.

“…….”

“…….”

그녀의 눈에 든 긴장이 보여 채운은 그 눈꺼풀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 눈을 한 번 들여다보고, 다시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리고 곧이어 그녀의 온몸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의 성난 몸은 이미 한계라며 아우성을 쳤지만 그녀를 정성 들여 애무하는 이 시간을 생략할 마음은 없었다. 욕심을 채우는 건 그녀를 충분히 달군 후로도 충분했다.

그의 입술과 손가락의 움직임에 강희의 신음이 거세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인내한 그가 드디어 그녀 깊숙이 몸을 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강희의 긴 신음 소리가 방을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반항 직전인 몸을 겨우 달래 줄 수 있었다.

밤은 짧지만 또 길기도 했다.

이전의 제 욕심만 채운 것과는 달리 그는 강희의 가쁜 탄성을 들으며 밤을 지새울 수 있었다.

새벽에 닭이 울어도 일어나지 못하는 강희의 안에서 그는 한 번 더 깊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만족스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의 진정한 귀환은 이렇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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