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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다리다 (10/38)

10. 기다리다

관모를 쓰고 고개를 숙인 옆모습이었지만 그녀는 한재영이 확실했다. 강희는 급히 행렬로 돌아가려는 만운에게 그녀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도련님, 그런데 원정길에 여인들도 가는 건가요?”

“네, 찬모와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 따라가게 마련이죠. 그리고 이 행렬에는 눈에 띄지 않겠지만 병사들의 욕구를 해소시켜 줄 유녀들도 따라붙을 거고요.”

“…….”

“아, 형수, 걱정 마오. 형이 그럴 리 절대 없을 테니까. 내가 이전에 한 번 그런 곳에 선임을 따라가 보려 했다가 형에게 죽을 뻔한 일이 있소. 그러니 형이 그럴 거란 걱정은 안 하셔도 되오. 혹시 그러려고 마음먹는다 해도 내가 눈에 불을 켜고 지킬 테니 걱정 마시오, 하하하.”

“네, 도련님. 그런데…….”

“네?”

“저기 관모를 쓴 사람은 여인이 아닙니까?”

“아, 재영 아가씨? 어, 일부러 남장을 하고 있는데도 형수는 어찌 용케도 알아보셨네요? 내 선배 장수 중에 한만식 부장이라고 계시는데, 그분 여동생이지요. 그런데 머리가 엄청나게 좋답니다. 행세 꽤나 한다는 남자들 한두 사람은 찜 쪄 먹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래요. 그래서 산술 책임자로 따라가는 거랍니다.”

그녀에 대한 만운의 설명에 강희는 놀랍기만 했다. 이전 성강희도 그녀가 똑똑한 사람인 건 알았지만 그 정도였던 건 몰랐던 것이다.

재영이 그런 여자였던가?

꿈속의 그녀는 그렇게 오랫동안 한집에 산 사람인데도 재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단지 그녀가 칭송받는 일들을 질투하여 시샘하기만 바빴던 것이다.

그녀를 향한 만운의 친근한 표현도 낯설지 않았다. 이전에도 재영과 만운은 남매 사이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관계였다. 지금도 재영을 향한 눈엔 호감이 가득한 채로 만운이 그녀에 대한 설명을 더 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 해도 여인이 함께 가도 되는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형과 왕세자 저하께서 그녀를 시험해 보고, 옛 현인 공명의 환생이 아닌가 극찬했다고 합니다. 재영 아가씨는 산술뿐 아니라 기상과 천문도 볼 줄 아는지라 이번 전투에 크게 도움이 될 거라 벌써 기대들이 대단합니다. 본인도 전투에 도움이 되길 간청하여 이렇게 함께 가게 된 것입니다. 앗, 하지만 비밀입니다, 형수님?”

“그런…… 건가요?”

한재영. 그녀가 왜 저 원정길에 함께 있는지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원정에서 공을 세운 것이 분명한데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바로 만운의 마지막 말 때문일 것이다.

“네, 간자들이 많으니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말단 관리로 위장하게 했지만 걱정스럽긴 해요. 그래서 되도록 형과 저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게 할 생각이에요. 두 분 정도가 되어야 저 예쁜 아가씨도 안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운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예쁜 아가씨라는 말이 강희의 가슴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네……. 그렇지요.”

“형수, 나도 가 봐야 하오. 정말 몸 성히 살아올 테니 걱정 마세요.”

“……걱정 안 할게요.”

“하, 참! 그러란다고 형수가 걱정 안 할 리는 없으니 내 제대로 말하겠소. 형수, 걱정은 조금만 하고, 몸단장 잘하고 기다리시오. 아셨죠? 예쁘게 하고 기다려야 형이 얼른 달려올 것 아니오? 하하하하!”

“네, 부디 몸 성히…….”

만운이 돌아서서 일행에 합류하자 강희는 채운이 있는 곳을 보며 최대한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의 바로 근처에 있는 그녀도 보였다.

다른 이는 모를 테지만 이 멀리에서도 강희는 그녀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 파묻히고, 또 꽤 먼 거리였지만 말에 오른 재영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였구나. 벌써 이때부터 그녀가 서방님의 곁에 있었던 것이구나.’

그와 잠자리를 하던 날 꿈속에 재영이 나타난 이유가 이것을 경고하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 서방님을 마주하며 두려워하던 후회의 눈빛 대신 대화를 하자던 것에 조금 기대를 했지만 그런 기회도 날아간 것이다.

강희의 눈에서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흘렀다.

드디어 대군이 움직이며 원행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눈물 바람에 이별을 하는 가족들과 꼭 살아오라, 잘 싸우라 격려를 하는 외침이 쏟아졌다.

사실 본래 군사들의 원정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발로 떠난 병사들은 이미 이틀 전에 도성의 양광포에서 출발하여 마천에 거의 도착했다.

이런 보여 주기 위한 행사를 개최한 것은 바로 최사립 대감 측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이것은 가흔 왕자가 해적 토벌을 떠납네 하고 여기저기 알리는 행사였던 것이다.

유치한 짓거리였지만 백성들에게 파급되는 효과는 지대했다. 왕세자 측은 그들의 떠벌리기 식 행사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행사에 합세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백성들은 해적 토벌을 위해 떠나는 선두에 선 것이 윤채운 장군이라는 사실에 더욱 희망을 걸고 열광했다.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함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때 강희의 옆에서 한 아이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엄마에게 소리쳤다.

“엄마, 저 여자, 성 씨 그 못된 여자 맞지요?”

“응? 어, 맞다. 성 대감댁 아씨구나. 아니, 시집을 갔다던가.”

“저 여자한테 저번에 내 동무 상선이가 부딪혔다가 호되게 뺨을 맞는 걸 봤었는데……. 엄마, 저 여자 근처에 가면 안 돼요.”

“쉿, 조심하렴. 괜히 들리면 치도곤당할라.”

“네, 엄마.”

하지만 강희는 소녀와 그 아이 엄마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함성이 커서 소리가 묻히자 아이는 크게 소리를 질렀고, 엄마도 딸에게 대답하기 위해 같이 목청을 높였던 것이다.

“아니, 저것들이!”

옆에 서 있던 애심이 그들에게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며 달려가려 했지만 강희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못 들었다. 못 들은 것으로 해라.”

“하지만 마님, 저 망할 것들이 누굴 보고 감히…….”

“함부로 나서지 마라. 가실이가 이런 일로 행패를 부리고 다닌 걸 모르느냐. 여기서 나서면 더 우스워진다. 못 들은 것이다. 알겠느냐?”

“허업, 네…….”

애심은 강희가 가실을 언급하자 당장 수그러들고 말았다. 강희가 이전 자신의 행실을 질색하듯 가실에게 그만큼이나 당한 애심이 그녀와 똑같은 행동을 할 뻔한 데 기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강희는 그래도 분한 기분을 풀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애심에게 가자, 하고 몸을 돌렸다. 벌써 행렬의 선두는 성문을 다 빠져나간 뒤라 서방님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인파를 헤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강희의 눈엔 서방님의 뒤를 따르는 재영의 모습이 눈에 아리게 밟혀 왔다.

그녀가 전쟁을 하는 데까지 도움이 되는 여인이었다니…….

방금 전 어린아이에게도 손가락질당하는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그 괴리에 강희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성강희, 너 왜 그렇게 살았니? 성강희…….’

남들은 토벌전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지만 강희는 이것이 내년 봄에나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떠난 저 병사들은 겨울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야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살아 있다는 전제하이지만.

채운은 살아 돌아왔으니 강희와 혼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전의 것을 봤다 해도 한 치 앞도 모를 전쟁터에 가는 것이라 강희는 무작정 안심하며 기다릴 수 없었다. 그리고 기다림에 마음 설레기보다 그녀가 내민 기한이 코앞에 닥쳤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채운을 따라가는 한재영.

그녀를 보지 못했다면 조금이나마 다른 기대를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부러 꿈에 나타나 했던 경고는 역시 괜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어긋나게 시작했을 뿐 그들의 인연은 이전과 같은 수순을 착착 밟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제 입으로 그를 놓아주겠다고 한 약조를 무슨 수로 번복하겠는가.

집으로 돌아가는 강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리고 그녀의 괴롭고 애끓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 * *

채운과 만운이 해적 토벌을 위해 떠난 뒤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똑같은 시간인데 한편으론 너무 길었고, 또 한편으론 너무 빨리 지나갔다. 외롭고 초조하고 안타까운 시간들이 지남에는 너무 길었고, 일 년 기한을 생각하면 덜컹덜컹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듯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 쪽에 기울어도 강희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원정대가 떠나고 한 달 동안 전해진 소식은 거의 같았다. 결집했다는 해적들의 무리는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적만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본거지를 찾았다는 말도 들리고, 섬 하나를 점령했다는 소식도 들려왔지만 두 달, 석 달이 지나도 토벌에 대한 희망적인 관측은 나오지 않았다.

성도종 대감은 이번 원정에 가장 많은 군자금을 내놓은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해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나온 전리품으로 그 공을 돌려받을 수 있다지만 그만한 전리품을 얻는다고 누가 장담하고 저렇게 많은 자금을 내놓을 수가 있겠는가.

만약 해적 토벌에 성공하지 못하거나 혹여 원정에서 지기라도 한다면 성도종 대감은 쫄딱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허나 성도종 대감이 장담할 수 없는 전쟁에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거액을 선뜻 내놓자 다른 거부들도 눈치들을 보며 군자금을 보태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거부들 중에 최사립 측의 인물들이 반수 가까이 포함되었음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덕분에 원정을 떠나는 군사들의 피복과 갑옷이 튼튼해졌으며, 병장기와 먹을 것도 풍족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거나 다치는 이들이 생기지 않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자 남편, 동생, 오라버니가 죽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었다.

겨울이 되자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왕자들은 돌아왔지만 장수들과 군사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봄이 되자마자 완전한 토벌을 위해 해상 전투를 벌일 예정이라 훈련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강희는 왕세자비 하 씨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강희는 겨울에 접어들며 비누 사업에 대한 인력, 재료, 비법 등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넘기고, 내년부터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사업으로 확장시키기로 했다.

비누 사업은 처음 강희의 생각대로 병사들에게 비누와 함께 만드는 법도 보급하기로 했으나 강희의 비법엔 고급 비누에 관한 것도 있어 그것은 따로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으로 활용하기로 방향을 수정한 것이다.

강희는 비록 법국의 책을 보고 배운 거라고 겸양했지만 상품의 비누를 만들기까지 수많은 실패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그런데 그 비법과 숙달된 인력까지 조건 없이 바치는 것에 왕세자비는 크게 감동했다. 숙달된 인력이란 하인의 신분에서 궁에 편입되며 처우가 격상되는 일이기에, 그들에게도 기꺼운 일이었다.

때마침 돌아온 왕세자는 강희가 정말 비누 사업을 넘긴 것을 크게 기뻐하면서도 채운과 만운 형제가 함께 돌아오지 못했음을 미안해 했다.

이때가 강희가 왕세자와 처음 만나게 된 때였다.

알고 보면 강희는 채운이 아니었다면 그의 부인이 될 뻔한 사이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엄두에 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강희를 처음 본 왕세자는 그녀의 미모에 감탄한 나머지 정신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부인 하 씨에게 허리를 살짝 꼬집힌 여담이 있었지만.

그것은 서로 모른 체할 일이었다.

“윤 장군 형제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해적들은 도망가기 바쁘다오.”

왕세자는 채운과 만운을 두고 혼자 돌아온 대신이라며 강희에게 최대한 자세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버지를 통해서, 그리고 드물지만 만운이 전하는 서신을 통해서 간간이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왕세자를 통해 직접 듣는 전장의 소식에 강희는 새롭게 긴장되기도 했다.

해적의 토벌은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더 많다고 했다. 처음엔 해상 전투로 시작하지만 국가 단위의 해군 병력이 몰린 전함을 해적선 몇 척으로 감히 덤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투는 추격전과 추적에 의한 추살이 주된 것이 되었다.

진작 이런 방법을 썼더라면 해적 세력이 그만큼이나 커지지 않았겠지만, 지금처럼 국론이 하나로 일치해 병력과 재화를 모을 수가 없었던 것이 이런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더구나 해상을 벗어나 육지로 넘어갔다는 것은 남의 영토를 넘은 것이기에 이것은 단순한 해적 토벌이 아닌 전쟁이었다.

지금까지 전쟁의 가장 큰 성과는 왜가 점하고 있던 구마도를 점령해 려국에 편입시킨 일이었다. 그곳은 나라에서 인근 해양으로 나갈 때 처음 만나는 섬으로, 본래 해적들의 기착지였던 그곳이 지금은 려국 병사들의 해상 훈련을 하는 곳으로 변했고, 이젠 나라의 최남단에 있는 자국의 영토가 되었다.

채운과 만운 등 주 전력인 장수들이 겨울에도 움직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곳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겨울이 되어도 구마도는 나라 본토에 비해 그리 춥지 않아 천혜의 군사적, 상업적 요충지로 앞으로도 전략적 가치가 엄청난 곳이었다.

“성 부인, 정말 성도종 대감은 부에 관한 한 타고났다고 봐야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내놓은 군자금만큼 전리품에서 이득을 취하기로 하지 않았소? 내가 지금 말한 구마도. 아, 이름은 바뀌겠지만 아무튼 그곳을 점령했으니 그곳 또한 전리품이지 않소? 기착지로서도 최고의 위치에다 섬의 절반은 국유지로 하더라도 남은 절반은 군사 자금을 대준 이들에게 나눠 줄 텐데, 그중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할 이가 누가 되겠소, 하하하.”

“아, 세상에.”

감탄은 왕세자비의 것이었다.

강희는 멍하니 벌린 입을 가리며 이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아버지의 엄청난 배포에 그녀도 놀랐지만 그것이 이렇게 돌아오게 되다니!

강희도 섬 하나를 점령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설명을 듣자하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꿈속에서의 그녀는 구마도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 섬을 점령했다는 것은 이전의 그녀가 알던 것과 다른 무언가가 작용했거나 이전에는 점령했다 다시 빼앗긴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일단 왕세자의 반응으로 봐선 이번에는 후자의 가능성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미래가 바뀐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미래가 바뀐 거라면 무엇이 바뀐 것일까. 엄청난 군자금의 지원? 아니면 전투에 뭔가 다른 요소가 가미된 것일까?

‘앗!’

자신이 알던 것과 미래가 크게 바뀐 걸 알게 된 강희는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당연히 무사히 돌아올 거라 생각한 서방님과 그 처참한 부상으로 불구가 되었던 만운 도련님의 부상에 대비했던 것이 소용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달라진 미래에 이제 봄이 오면 전쟁이 끝나고 서방님이 돌아 오시리란 기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도련님은?

이전과는 또 다른 부상을 입는 것은 아닐까? 길석은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제발, 서방님, 무사하시길!’

강희는 바뀐 미래에 가슴을 죄며 봄이 되기를 다른 때보다 더 초조하게 기다렸다.

* * *

싸움은 장수가 하는 것이지만 전쟁은 병력의 운용뿐 아니라 하늘이 돕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대업이다.

하늘이 돕는 대업이란 날씨를 뜻함이었다. 날씨는 한 전장에 있는 것이라면 아군이나 적군에게나 똑같이 닥치는 것이지만 차지한 지형이나 대비에 따라 승패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는 엄청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돕게 일을 꾸밀 수 있는 이가 바로 재영이었다.

재영은 기상을 읽고 왜로 향하는 배를 띄우는 시기를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바로 태풍의 영향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보는 다음 날 어느 정도의 기온과 비가 오는지까지 예측함이 거의 정확했다.

태풍이 빈번히 몰려올 수 있는 이 시기에 원정을 떠나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었으나 재영의 예측을 따른 이후로 날씨는 더 이상 모험이 아닌 이용할 대상이 되어 주었다.

그녀의 존재 가치는 처음 배를 띄우던 때부터 몇 번의 전투를 치르지 않아 금방 증명되었다. 재영은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물론 험하고 낯선 전장에도 두려움 없이 따라와 지질과 지형을 살피고, 폭우를 이용해 원하는 곳에 산사태를 낼 수 있는 지략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위험한 왜의 습한 기온과 위험한 독충, 먹을 수 있는 열매와 못 먹는 것까지 구분하여 예방하는 법을 알려 주는 한편, 간단한 의술로 병사들의 질병을 다스리기도 해서 왕세자 이하 수뇌부는 그녀에게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나뭇가지 몇 개로 층을 지게 받친 숯이 담긴 천 세 장을 이용해 오염된 물을 거르는 법을 선보여 대군이 먹을 물을 해결한 것도 그녀였다. 타지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식수를 해결한 것이다.

이제 재영의 가치는 알려짐에 따라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는 귀한 존재로서 더욱 비밀리에 극진히 모셔지게 되었다. 이미 출발 때부터 남장을 하며 그녀를 숨겨 왔지만 그 존재와 역할을 처음 한정된 사람 말고는 더는 알 수 없게 더 꽁꽁 숨겨질 수밖에 없었다. 가흔 왕자 진영에도 재영의 존재는 은밀하게 숨겨진 상태였다.

재영의 여러 가지 기지와 정확한 날씨 예측 덕분에 윤채운 장군이 선두로 이끄는 군들은 왜의 구마도 이북에 비교적 쉽게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정확한 예측 때문에 가흔 왕자 측도 채운의 지휘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례로 화창한 날에도 바다에 나가지 않자 가흔 왕자 쪽에서는 겁쟁이냐 비아냥거리며 난리를 친 일이 있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고, 흐리고 추적추적 비가 오는데 배를 띄워 출항한 적도 있었다. 화창함에도 배를 정박했을 때는 몇 시간 되지 않아 내리는 폭우와 비바람을 만났고, 비가 오던 날씨에도 배를 띄우면 곧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그들을 반겼다.

그 때문에 가흔 왕자 쪽에서는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 어리석게도 밀정을 보내 누가 그런 귀신같은 예측을 하여 왕세자 쪽을 돕는지 알아보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시의 칼날 같은 군기 속에 숨긴 재영의 존재는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고 병사들 사이에 결국 그녀가 여자라는 게 밝혀지자 재영은 아예 여자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아무튼 재영은 이번 원정의 가장 큰 변수로서 처음부터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쟁에 대해선 성강희가 아는 것이 없긴 하나 인적, 물적 자원이 훨씬 많이 충원되었음에도 여기까지는 이전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두 달이 지나 구마도를 반쯤 점령했을 때부터의 일이었다.

소규모의 해적 무리를 추격하던 만운의 눈에 저녁 해에 비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만운이 그것을 잡았을 때, 그 반동으로 그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말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만운이 소리쳤다.

“함정이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말을 멈춰라!”

만운이 떨어지며 함정이라 소리침과 동시에 뒤를 따르던 장수들도 말을 멈추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는지 그의 옆에서 말을 달리던 장수 하나가 벌써 교묘하게 설치된 가는 철사에 걸려 목이 잘리고 말았다.

추격전을 하던 터라 워낙에 빠르게 달리던 순간이어서 말을 멈추거나 고개를 숙이는 것이 조금 늦었던 다른 장수들도 앞을 막고 있는 철사를 손을 들어 막거나 칼로 막았지만 칼로도 끊어지지 않는 철사에 말에서 떨어지고, 손을 들어 막은 이들은 손이 반쯤 잘렸다.

“형수!”

바닥에 떨어져 뒹굴던 만운은 얼얼한 손을 내려다보며 여기 있지도 않은 강희를 불렀다. 손가락 하나가 금이 가거나 부러진 것 같긴 했지만 일단 그의 손은 멀쩡했다.

허나 맨 앞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고 있던 그가 만약 이 철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더라면…….

만운은 목이 잘린 장수와 손이 잘린 장수 둘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바로 겹쳐 보였다. 그만한 속력이었으면 막았다 해도 손이 잘림은 물론 목도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형수, 설마 이런 것을 미리 알고서 내게 이것을? 하지만, 하지만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철장갑은 형수의 애타는 마음이 담긴 선물이기에 만운이 전투 내내 내 몸같이 아끼며 손에 끼고 다니던 것이었다. 형수가 일부러 손가락 크기까지 재어 만든 정성도 그러하거니와 손가락을 구부리는 마디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져 별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이 자체로도 주먹의 위력이 강해져 적을 치는 데 매우 유용하기도 해서 정말 잠잘 때 빼고는 항시 착용하는 중이었다. 헌데 이것의 진짜 효용이 바로 이것이었다니.

만운은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순식간이었다. 이미 철사 함정을 설치하고 그들을 유인한 재빠른 해적들은 추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더 이상 그들의 뒤를 쫓는 건 무의미했다.

“철수한다! 장수의 시신을 거두고 부상자를 챙겨라!”

추적에 실패하고 별 소득 없이 장수들만 죽고 다친 일이었지만 만운은 그 실책보다 철장갑에 담긴 의미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그의 생각이 다른 것을 기억해 내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약 형수가 이것을 선물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한 것이라면 형에게 전하라던 그 말도 단순히 경고의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텁석부리 짝귀…….’

생각해 보니 일개 무부나 평범한 뱃사람의 천한 별명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이름을 여염집 아낙인 형수가 입에 올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형수가 너무나 진지하게 당부한 것이라 형에게 전하긴 했지만 그는 철장갑에 정신이 빠져 어린애처럼 자랑하며 장난스럽고 가볍게 말했던 것이다.

“우와, 형수는 이걸 어디서 주문해서 만들었을까. 좋지? 근데 형에게도 형수의 선물이 있었어. 히히, 형의 선물은 전언인데……. 텁석부리 짝귀? 그런 이를 조심하라던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 말을 곧 잊었고, 형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은 것 같았다. 아녀자의 기우라 생각해도 좋다는 말에 어느 용한 무녀라도 찾아가 복채를 주고 들은 말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형도 아마 그리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말에 이 철장갑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다면 결코 그렇게 흘려들을 만한 가벼운 것이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러자 형에게 형수의 말을 다시 일깨워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오늘 추적에는 실패했으나 큰 깨달음이 있었다. 전쟁에 임하는 매 순간이 그렇지만 만운은 이번 일이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강한 느낌이 왔다.

그는 본진으로 돌아가자마자 장수로서 채운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히 보고하고, 형에게 철장갑 덕분으로 함정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과 형수가 전한 말을 반복하여 전했다.

채운도 강희가 전한 말이라기에 완전히 흘려듣진 않았지만 오늘 만운이 겪을 뻔한 위험에 그녀의 말을 다시 되새겼다. 그것이 뜬구름 잡기 식의 말이라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당장에 만운이 손이 잘리는 대신 가벼운 부상만 입었으니 믿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만운 또한 부러진 손가락을 치료받으면서 더욱 그 말을 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텁석부리 짝귀…….”

채운도 강희가 전한 그 말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장군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만운이 치료를 받는 막사의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운의 허락이 떨어지자 추레한 시녀 복장을 한 한 여인이 들어왔고, 그녀도 만운의 손을 염려스럽게 살펴보았다.

군의가 나갈 때까지 지켜보기만 하던 그녀는 의원이 나가자마자 만운의 손을 보며 걱정을 표했다. 군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 세 사람만 남게 될 때까지 그녀는 말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놈들이 일부러 해가 지는 틈을 타 검은 철사를 나무 사이에 걸어 두었다지요? 보통 영악한 놈들이 아닙니다.”

“군사께서 비책을 마련해 주시겠지요.”

부러진 손가락 때문에 통증이 꽤 심할 텐데도 만운은 특유의 너스레로 재영에게 웃으며 말했다.

“군사라니요?”

“그래, 맞다. 여긴 막힌 공간이 아니니 말을 조심해라.”

재영의 존재 가치를 아는 세 사람, 왕세자, 채운, 만운은 그녀를 군사로서 깍듯이 대했다. 그러나 그걸 입 밖에 내는 건 어디서건 조심해야 했다.

“넵, 장군님!”

형제간의 친근한 말투에 마음이 절로 푸근해진 재영이 만운의 손에 다시 걱정과 우려를 표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저야 손가락이 부러진 것뿐인걸요. 목숨을 잃은 장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손이 잘린 장수가 둘이나 있지요. 한 장수는 칼로 막았지만 말에서 떨어지며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정말 위험한 함정이군요. 우선은 정찰을 더 철저히 해야겠지만 같은 함정을 만나도 대처할 무슨 수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저는 이것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는데, 이걸 다른 장수들도 활용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만운은 강희가 선물한 철장갑을 재영에게 보여 주었다.

재영은 그것을 받아 들고는 세심한 세공과 맞춤으로 만든 철장갑에 직접 손을 넣어 보고 손가락을 구부려 보면서 연신 감탄했다.

“정말 훌륭하군요.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있게 한데다 손목은 사슬을 엮어 만들다니, 참으로 기발하군요. 그 철사 함정을 저도 보았는데 이 정도로 미리 준비한다면 대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철장갑을 낀 장수는 손으로 쳐도 그것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끊지 못하더라도 손이 잘리거나 하진 않겠지요. 더 굵은 철사를 설치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함정이 되지 못할 테니 소용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말을 탄 장수 전원에게 이런 세심한 철장갑을 만들어 줄 시간이나 재원이 없으니 이것을 단순화하여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러니까 음…….”

벌써 어떤 생각이 떠오른 건지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며 장갑을 유심히 살피는 재영을 보고 만운은 장갑을 아예 그녀에게 맡겼다.

“제가 손이 이래서 며칠간은 장갑을 끼지 못하니 가지고 가서 보셔도 됩니다. 하지만 분해는 하지 마세요?”

“그, 그럼요.”

“하하하!”

만운은 농을 하며 기분 좋게 웃으면서도 재영에게는 형이나 수에게처럼 굳이 그것이 형수의 선물이라는 자랑은 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어리고 장난스러워도 가족의 일로 도움을 받거나 친인의 자랑을 하는 것은 왕세자까지가 그의 선이었던 것이다.

“섬의 점령지 지도는 완성되어 가는 중이오?”

채운의 질문에 재영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네, 이곳은 눈이 오지 않는 기후이지만 대신 비가 엄청 많이 오는 곳으로, 지금까지 습지 두 군데를 발견하였습니다. 습지는 빠지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어 위험한 곳이기도 하지만 주변에 귀한 약초가 자라기도 하고, 홍수나 가뭄, 물의 정화 작용을 하기도 하니 경계만 두르고 메울 필요까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서쪽과 남쪽의 해풍과 해류를 살피고 있는데, 모레쯤 다시 큰 비가 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섬에 처음 왔을 때처럼 태풍이 오진 않을 것입니다. 올해의 태풍은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캬, 역시 모르는 게 없으시네.”

만운은 감탄으로 연방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채운은 보통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가끔씩 궁금한 점을 묻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무엇이든 대답해 주었고, 간혹 자신이 모르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내서 알려 주었다.

이 섬에 무사히 안착한 것부터 빠르게 점령해 나가고 있는 것까지 모든 것은 용맹하게 싸운 장수들의 덕분이지만 그 뒤에서 사전 정황을 살피고 최선의 전략을 내놓은 그녀의 기지가 돋보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수고했소. 아직도 가흔 왕자 쪽에서 이쪽을 정탐하는 눈치이니 어서 나가 보는 것이 좋겠소.”

“네…….”

재영은 회의하느라 여느 날처럼 마시지도 못한 차를 바닥에 붓고 막사를 나갔다.

* * *

재영은 이렇게 하녀 행색으로 몰래 그의 막사를 오가는 처지라도 이 순간이 좋았다. 아무리 무뚝뚝한 대답 한마디라도 그의 곁에 있는 이 순간이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자객이나 밀정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매일 마시지도 못할 차를 들고 들어갔다가 버리고 돌아서야 했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같이 한잔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행복한 것이다.

재영은 왕세자와 채운이 놀랄 정도로 똑똑하고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지만 출사를 할 수 없는 여인의 몸이라는 사실에 저 자신을 감추고 사는 여자였다.

평민이었어도 남자이기만 하면 제 능력을 펼칠 기회라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애초에 여인에게는 정치나 군사 쪽으로 남자들을 돕는 것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처음부터 박탈된 기회를 얻는다는 건 무리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깨달았고, 너무 똑똑한 동생이기에 얻는 건 없이 오라버니의 박대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전쟁에 자신을 드러낼, 아니, 만인의 앞에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재주를 써 주는 이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재영은 처음 그를 만났던 때가 자기 인생이 변하는 기회의 순간이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프셨을 때도 오지 않는 오라버니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을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후로 계속 신경 쓰이던 마음이 그녀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처음 본 그는 영웅의 풍모뿐 아니라 부하의 가족에 대한 배려와 자비심까지 엿볼 수 있는 이상적인 지도자였다. 잠시 서서 몇 마디 나눈 말도 없이 스친 정도였지만 그는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곧 혼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당시엔 그것이 왜 그런지는 알지 못했다.

이후 채운의 배려로 뚱한 표정의 오라버니가 집에 다녀갔고, 그것만으로도 어머니는 힘을 얻고 다행히 자리보전에서 일어나실 수 있었다. 낳은 정은 아니지만 기른 정으로 그렇게 살뜰하게 정을 쏟는 어머니를 오라버니는 얼굴 한 번 비추는 것으로 끝냈지만 지금도 어머니는 내 아들 덕에 나았다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얼마 후 그에 관한 다른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의 혼인 상대자가 어떤 여자인지…….

고위 귀족 여인네들이라면 그런 경향이 다들 조금씩은 있다지만 평민과 자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피를 갖고 태어난다고 믿는 여자. 평민과 한자리에 있는 건 물론 말을 섞는 것도 스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이 싫어한다는 여자. 바로 그런 여인과 그가 혼인을 한다는 것이다.

성강희.

그녀는 재영이 사는 도성 맞은편의 멀리 떨어진 그곳까지 이름만 말해도 다들 알 정도로 소문이 자자한 여인이었다. 성강희라는 여인은 저를 본 일이 없을 테지만 재영은 이전에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재영이 본 것은 그녀가 다른 영애들과 물놀이 소풍을 하는 광경이었다.

헌데 그중 한 하녀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 그녀의 하녀에 의해 배 밖으로 내쳐지고 만 것이다. 하녀는 수영을 못하는지 살려 달라며 허우적거렸지만 그녀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때 물가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 중이던 남자 하인이 뛰어들어 그 하녀를 구하긴 했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그 하녀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제 옷에 물이 튀었다면서 짜증만 내고 있었다.

그날 재영과 그것을 함께 목격한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들 생김새는 어여쁜 아가씨의 매몰차고 잔인한 처사에 혀를 찼다.

그런 여인과 혼인하게 되다니, 재영은 그의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을까 생각만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혼사 소식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가 혼례를 치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재영은 단 한 번 스친 그에 대한 이야기에 왜 가슴이 떨리고, 아프고, 미어지는지 그때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제 마음도 모르고 한 번은 감사 인사를 꼭 직접 해야겠다는 바보 같은 핑계를 대고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벌써 어머니가 쾌차하신 것까지 알고 있다는 그의 말에 부하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극진한지 또 한 번 알 수 있었고, 다시 뵌 헌앙한 모습이 마음 깊은 곳에 콱 틀어박혔다.

재영은 그때야 알았다.

왜 그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소식만으로도 제 마음이 쓰리고 아팠던 것인지. 갓 혼인한 그의 눈가가 그렇게 초조하며 어두운 기색인 걸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그를 향한 제 마음이 깊어졌다는 것을.

규중의 처녀가 감히 혼인한 남자에게 무슨 마음을 먹는 것이냐 속으로 채찍질하며 마음을 돌리려 수만 번도 더 애썼다. 하지만 볼 수 없는데도 매일 밤 그의 모습만 그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을 돌릴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

그는 왜 그토록 쓸쓸한 눈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도성 외곽 병영에서 서궁으로 들어가게 되어 집으로 돌아온 오라버니에게서 스치듯 전해지는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오라버니께 일부러 묻지 않아도 주 임무와 일과가 모두 장군이 중심이기에 그에 대해 가끔씩 들을 수 있었다.

재영은 몰래 듣는 한 마디 한 마디에도 그에 대한 마음을 점점 더 키워 나갔다. 그리고 그가 해적 토벌을 위해 원정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말에 재영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가 전쟁터에 가게 되다니!’

재영은 앞뒤 분간할 정신없이 서궁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멀리 법국까지 오가는 외교 사신이었다. 허나 해적들이 해상 길을 막기 시작할 무렵, 그 해적들에게 당하여 시신도 찾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때문에 왜의 해적들은 그녀의 오랜 원수이기도 했다.

국가 차원의 원정이다. 해적에게 원한을 갚을 기회였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이 마음의 주인이 되어 버린 윤채운 장군이 나가는 전쟁이다.

그가 전쟁터에 나간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오라버니의 핀잔도 두렵지 않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느끼지 못했다. 그동안 왜에 대해 공부하며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진 수많은 전투를 직접 치러 낼 자신도 있었다.

그녀는 곧장 서궁을 찾아가 대범하게도 왕세자와 채운 장군을 만나기를 청했다. 그리고 그녀가 한만식 천부장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원정 준비로 급한 와중에도 대면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재영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질색하며 반대할 인물이 오라버니였는데, 오라버니의 이름 덕분에 그 만남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다시 그러라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재영은 왕세자와 그를 만날 수 있었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쓸모를 최대한 피력했다.

왕세자와 그의 앞에서 자신을 피력하던 그 순간이 그녀 인생의 가장 떨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숨기던 자신의 영특함을 가장 열심히 역설한 순간이었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자신이 배우고 공부하고 상상 속에 치른 전투에 대해 모든 것을 말했을지도 몰랐다.

왕세자와 그는 처음에 그녀가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당연히 난색을 표했다. 아마 멀쩡하게 생긴 규방 처녀가 과연 제정신이긴 한 건가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의심하는 그들에게 이번 원정을 떠나는 시기와 이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태풍을 피할 수 있는 날짜, 그리고 그들이 공략하리라 점찍어 둔 섬, 구마도에 대한 자료들을 내밀었다.

그것은 구하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 어린 시절부터 십여 년간 모으고, 최대한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인근 해상까지 직접 가 보며 만든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또한 그녀는 원행에 자신이 짐이 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과 말을 내줄 수 없다면 걸어서라도 쫓아갈 수 있다고 강력히 소망했다. 혹, 지략이 필요하지 않다면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으로 써도 되니, 제발 저를 써 달라 사정했던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용기를 낸 결과, 재영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됐다.

그의 막사에서 나오자 저만치서 자신을 쏘아보다 돌아서서 가는 사람이 보였다.

오라버니였다.

“…….”

한만식은 재영이 원정에 함께 가는 걸 알게 되자 경악했고, 그녀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재영의 참전에 오라버니인 그의 재가가 필요한 일이라 불려온 그 자리에서 이미 그녀를 참모로 들이고 싶어 하는 왕세자와 상관의 눈을 읽고서 마지못해 허락했을 뿐, 그녀를 다시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만식이 그녀에게 했던 최후의 말은 ‘결국 네가 이렇게 주제넘은 짓까지 하는구나’였고, 마주친 눈빛은 저렇게 못마땅한 경멸을 비추고 있었다.

허나 지금도 계속되는 오라버니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재영은 일생일대의 용기와 도박으로 이루어 낸 이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

전장의 탁하고 음습한 공기가 코를 찔렀지만 병장기들의 쇠 냄새와 피고름 냄새조차 그녀의 이 행복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저 그의 곁에 있는 이 순간이 그녀를 살아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저를 알아주고, 귀히 써 주는 것도 좋았고,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가 마시는 공기를 함께 들이쉬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희망이었다.

‘성강희…….’

그의 부인이 그 아씨만 아니었어도 이런 도의에 어긋난 상상과 마음을 키워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무슨 이유를 대건 핑계다. 알고 있었다.

허나 이미 그를 마음에 담은 이상 떨칠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든 그의 옆에만 있을 수 있게 해 달라, 재영은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다.

재영이 여인들의 막사로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길석이 몰래 뒤를 따르며 그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전장의 수발에 고단한 몸을 눕히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었지만 재영은 들고 간 철장갑을 살피며 장수들에게 줄 쉽고 빨리 만들 수 있는 장갑을 고안하느라 잠들 새도 없었다.

그녀에게 밤은 짧기만 했다.

* * *

“참 똑똑하고 예쁜 아가씨야.”

오늘도 제 막사는 버려두고 옆에서 잘 준비를 하는 만운을 보며 채운은 피식 웃고 말았다.

뜬금없이 하는 말은 또 재영에 관한 것이었다.

한재영. 세기의 천재이자 그들의 귀한 군사, 참모이기도 한 그녀가 제 발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이 전쟁을 반드시 이기라는 하늘의 계시와도 같았다.

그녀는 정확한 기후를 예측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도움을 주었지만 모든 장수들이 바라는 냉정함과 똑똑함을 갖춘 그야말로 타고난 군사였다.

그리고 가진 지식이 출중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단아한 미모 또한 사내들의 마음을 흔들 만했다. 당장 그녀가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내내 칭찬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니 만운 또한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녀가 만운보다 두 살 많긴 하지만 동생에게 마음이 있다면 배필로 생각해 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응, 그렇지.”

“그런데…….”

“응?”

만운이 약간 망설이는 어조로 말을 흐리며 말할까 말까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런데 말이지. 재영 아가씨, 형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거 아닐까? 형을 향한 눈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단 말이야?”

“훗, 네 눈에는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고?”

채운은 동생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 뜸을 들이는 건가 보다가 별 싱거운 소리 다 듣는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혹시 만운이 그녀에게 마음이 있어서 실망해서 그런 건 아닌가 싶어 쳐다보았지만 그런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혹시나 해서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그래, 네 말대로 똑똑하기도 하고, 무척 예쁜 아가씨지. 혹, 네가 그녀에게 마음이 가는 게 아니냐?”

“응?”

그의 질문에 당황하지도 않고 눈만 껌뻑이는 만운을 보자니 채운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엉뚱하게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채운은 세상이 형인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동생이 아직 어리고 귀엽게만 보였다. 만운이 아무리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장수라 해도 그에게 만운은 천생 어린, 막내 동생일 뿐이었다.

‘이 아이는 실제로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기도 했고.’

헌데도 전쟁터에 따라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두고 온다면 몰래라도 따라올 동생이란 걸 알기에 함께 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 벌어진 일로 만운이 당할 뻔한 걸 생각하면 가슴이 지금도 뜨거웠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만약의 순간이 불쑥불쑥 치밀며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전장에 나온 장병 누군들 소중한 목숨이 아니겠느냐마는, 하나뿐인 친혈육인 동생만큼 소중할 수는 없었다.

채운은 붕대를 감은 만운의 손을 보며 절로 강희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운도 오늘 그녀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 어여쁘고 똑똑한 재영을 보다가 괜한 생각을 해 본지도 모른다.

“만운아, 그녀는 네 선배 장수의 여동생이고, 귀족 아가씨다. 괜한 상상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너도 그녀가 왜 참전했는지 알지 않아? 난 그녀가 단순히 복수를 하겠다는 알량한 생각이 아니라 오랜 기간 왜의 해적들에 대해 연구하고, 언젠간 이 섬을 공략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곳의 기후에 대해 연구하고 최대한 자료를 모아 온 그 점에 감명받았다. 그녀가 만나 본 서남해의 뱃사람들이 백 명이 넘었다지? 처음에 난 그것이 과장된 말인 줄 알았지만 너도 봤듯이 그 말도 겸양인 듯싶구나.”

“그런…… 가?”

“그래. 그러니 혹시라도 괜한 오해로 그녀에게 짓궂은 장난 같은 건 하지 마라.”

“형은, 내가 애유?”

“지난번에도 그러는 거 내 다 봤다.”

그 말에 만운은 당장에 벌떡 일어나며 항의했다.

“그럼 형은 쥐 잡아먹은 것처럼 새빨간 입술을 한 그 여자를 그냥 놔둘 작정이었소? 하! 내 형수한테 다 이를 거요! 남부 도사, 그 양반 생긴 건 음전하게 생긴 사람이 어디 원정을 떠나는 장수들 침상에 호리 낭창한 기생을 밀어 넣는단 말이오!”

만운은 이렇게 화를 내고 있었지만 사실 남부 도사는 관례를 따랐을 뿐이었다. 가흔 왕자 쪽의 장수들은 당연히 그날 들어온 기녀들을 취했고, 어떤 이는 침상에 든 여인이 그날 접대에서 자신이 점찍었던 기녀가 아니라고 화를 내며 바꿔 달라 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세자 저하께 치도곤을 당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네가 그 여자들에게 좀 심한 건 사실이지.”

“머리끄덩이 조금 그을려 준 것 말고 말짱하게 걸어 나갔는데 그 정도면 됐지. 얼마나 더 많이 봐줘야 한다는 거요?”

만운은 봐줬다지만 채운의 침상에 든 기녀는 말 그대로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쥐 잡아먹은’ 입술이 문질러져 벌에 쏘인 것처럼 부은 데다 긴 머리채에 ‘우연히’ 갖다 댄 초에서 장식으로 꽂은 꽃에 불이 옮겨붙어 머리가 타는 바람에 걸어 나가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기어 나갔다.

그러나 굳이 그런 것까지 다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전쟁이 한창인 이곳에서도 원정을 따라온 여인들 중 가끔 그의 막사에 몰래 들려는 여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만운이 그의 옆에서 같이 자면서 그렇게 몰래 들어온 여자들을 붙잡아 간자니 암살자니 소리소리 질러 가며 거의 알몸으로 혼비백산 쫓아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운이 그를 이토록 철통같이 지키는 바람에 여인들은 이제 가장 큰 먹이로 보이는 그를 다시 노릴 시도도 하지 못했다.

채운은 가끔씩 설마 저 녀석이 여자들을 감시하려고 그와 같이 자는 것을 고집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전투에 나갔다가 돌아와 옆에서 함께 잠드는 숨소리를 들어야 안심이 되고, 다음 날 다시 싸울 힘을 얻는다는 녀석의 말은 거짓된 것이 아니었다.

안심이라…….

말하다 말고 어느새 잠든 만운의 숨소리에 정작 안심이 되는 건 자신이었다.

채운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돌아가리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 * *

“타앗!”

“와아아아아아!”

말을 달리는 장수들에 쫓겨 대항하던 해적들이 모두 흩어졌다. 장수들은 각자 한 손에 손을 반쯤 가리는 철장갑을 두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해적들이 설치한 처음 단 한 번 효과를 본 철사 함정은 소용없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난전이 벌어지자 각자 장갑에 달린 철 가시를 무기로 적에게 주먹을 날려 해적들이 피를 뿜고 나가떨어지는 것을 전장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해적들은 정규 군사들이 아니었지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는 해적들이 좌지우지하는 겨우 나라의 명맥만 갖춘 곳이었으나 제 영토라 칭한 구마도가 점령당하자 기를 쓰고 달려들며 항전했던 것이다. 물론 그 항전의 주체는 해적이었다. 사실 항전이 아니라 저희들 침략에 이제야 뒤늦게 반격을 하는 우둔한 적―려국―이 가소로워 몰아내고자 함이었는데, 그 가소롭게 여긴 적이 생각보다도 너무나 센 것이다.

구마도는 벌써 삼분지 이 이상 점령당한 상태였다.

섬의 점령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적 무리를 소탕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이 섬을 점유하는 것이 이번 원정의 중요한 승패를 좌우하는 일이었다. 또 전쟁으로 얻은 영토를 돌려줄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나라는 없었다. 이제 이곳은 려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이번 전투로 드디어 구마도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장군님, 남은 해적들이 모두 섬을 탈출해 도망갔습니다!”

“여기를 버린 것이군.”

“네, 이제 이곳은 우리의 차지가 된 것입니다!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채운의 앞에 고개를 조아린 장수가 기쁘고 피 끓는 심정으로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그래…….”

수많은 피가 전장에서 스러졌지만 원정을 온 일차적인 목표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일부만이 배를 타고 도망간 것이라 배에 타지 못하고 버려진 해적들의 잔당이 많습니다.”

해적을 소탕함에 있어서 모두 척살함이 원칙이었지만 그들 중엔 해적이 아닌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포로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했다. 일반 양민이었을 그들까지 전투가 아닌 상황에 처형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포로들을 다 포박하고, 잘 구분하여 감시하라!”

“충!”

포로의 구분은 세 가지로 나눴다. 당장 처형할 대장 격의 해적들과 노역에 처할 일반 해적들, 그리고 그들에게 급하게 끌려온 양민들.

첫 번째는 당장 처형할 이들이었고, 두 번째는 노역을 시키거나 본국으로 끌고 가 노예로 삼거나 정 교화가 안 되면 처형할 이들, 세 번째는 자기네 본토인 왜로 돌려보내거나 려국의 백성으로 회유할 이들이 될 것이다.

첫 번째로 분류된 이들이 모두 처형된 다음 날, 만운이 채운에게 달려왔다.

“형, 형이 볼 사람이 있어.”

만운의 안내로 포로가 가둬진 곳에 함께 간 채운은 놀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텁석부리 짝귀?”

“맞지? 형수가 말한 그놈.”

“……!”

“형, 저놈 웃긴다? 지금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멀뚱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내가 모르는 줄 아나 본데, 저놈, 우리말 다 알아들어.”

“뭐?”

“형수가 그랬지, 텁석부리 짝귀. 그런 놈을 보면 조심하라고. 내가 포로를 분류하던 중에 그 특징에 딱 맞는 저놈이 진짜 있는 걸 보고 정말 놀랐어! 헌데 저놈은 세 번째로 분류되더라고. 생긴 것도 별명에 맞지 않게 선량한 척 생겼잖아? 아무튼 내 저놈 발견하고 은밀히 살펴봤지. 그랬더니 보통 음흉한 놈이 아니더라.”

놈은 두 사람의 시선을 비켜 려국말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만운의 말에 놈이 흠칫하는 걸 보니, 말을 다 알아듣는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맞습니다. 음흉하지요. 숨어서 여기를 감시하는데, 저쪽 해적 무리에 있는 제 부하들에게 은근슬쩍 신호하는 걸 저도 보았습니다.”

만운의 뒤를 따라온 길석이 증언을 보탰다.

채운이 그를 바로 노려보자 놈은 움찔하더니 체념한 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놈에게 길석이 다가가 덥석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세 번째 부류로 분류된 포로라 그는 갇혀 있기만 하고 포박되어 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장군, 지난번 장군님을 향해 화살을 쏜 것도 바로 이놈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화살 깃입니다.”

“화살 깃?”

“네. 지난번 그때 제가 등에 맞은 화살을 아직 갖고 있는 건 아시죠?”

“그래.”

해적들과 싸우는 전투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매복과 함정, 습격이 있기도 하는 등 매번 그 모습을 달리하며 젊은 피들을 원했다.

만운이 철사 함정에 손가락이 부러지며 전투에 참전하지 못한 바로 다음 날 벌어진 전투에서 채운의 뒤를 향해 곧장 날아온 화살이 있었다. 칼로 쳐서 날려 버릴 수 있을 만도 했지만 뒤돌아서 있던 채운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그때 길석이 화살을 날리는 적을 먼저 보고서 채운의 등 뒤를 몸으로 가리며 막았다. 그 화살은 정확히 길석의 심장 쪽에 꽂혔다. 등에 화살이 꽂힌 길석은 비명과 함께 기절했다.

맞다, 기절이었다.

길석의 등에 박힌 화살은 갑옷 안에 숨겨진 철판을 뚫지 못했던 것이다.

“제가 그 화살을 심장에 맞고도 살았기 때문에 부적으로 여기고 가지고 다니는 거 아시죠? 그런데 그 화살 깃 쪽에 특별한 문양이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길석이 갑자기 놈의 손을 잡아당겨 팔목을 걷어 보였다. 그곳엔 길석이 부적처럼 애지중지하는 화살에 박혀 있는 것과 같은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화살 하나하나에 제 표식을 새겨 넣다니, 보통이 아니었다. 하나의 화살에도 그만큼 의미를 둔다는 것이기도 하고, 그만큼 실력과 여유가 있는 이라는 뜻이었다.

“그 그림이 이것인가?”

채운도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갔다.

놈은 낭패한 표정으로 길석의 손에 얌전히 잡혀 있는 척하다 채운이 가까이 다가가자 별안간 그에게 덤벼들었다. 틀어 올린 머리카락 속에 꼬챙이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죽어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단도처럼 양쪽에 날이 서 있는 놈의 꼬챙이는 이미 채운의 손에 막혀 있었다. 제 회심의 공격이 막히자 놈은 발광을 하며 다시 덤벼들었지만 길석과 만운, 그리고 주위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놈을 완전히 제압했다.

“어떻게 알 수 있었지? 나를! 나를?”

놈은 억양도 거의 없는 완벽한 려국말로 외쳤다. 붙잡혀 포박당한 상태에서도 몸부림치던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심문장으로 끌려갔다.

놈을 잡은 건 큰 수확이었다. 그는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원래 생포할 수 없는 자였다.

놈은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반항하며 제 정체에 대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으려 했으나 다른 포로들을 통해 그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다.

이카치아 크나다란 이름을 가진 그는 이미 처형한 다른 대장 격 해적들보다 훨씬 거물이었다. 놈은 이번에 바닷길을 막는 사건을 다시 일으킨 주 세력의 부두목 격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해적들도 그에 대해 아는 이가 드물 정도로 크나다는 미리 경계하고서 주시하지 않았다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을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신체적 특징이 그토록 뚜렷한 데도 언뜻 보기엔 선량한 인상의 일반 백성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또한 주먹이 아닌 머리로 부두목이 된 인물이었다. 주먹이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영리하고 영악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섬이 반쯤 점령당했을 때, 그 잔인하고 고약한 철사 함정을 설치한 것도 크나다였다.

그리고 그는 탈출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남은 것이었다. 기회를 엿보다 본진에 반격할 때를 알리기 위해 일부러 포로가 된 것이다.

크나다가 무서운 인물인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지략뿐 아니라 무예 또한 무시하지 못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제 정체를 들키자 뽑아 든 단도도 그토록 철저한 수색에도 발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공격을 미리 예상하지 않았으면 채운도 자칫 당했을지 모를 만큼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아마 그대로 방심한 채 모르고 있다가 놈이 은밀히 누군가를 암살하려 했다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번 화살로 노린 것이나 마지막 기습 공격을 보면 아마도 그 누군가는 채운이 되었을 공산이 컸다.

포박된 채 여러 명의 병사에게 끌려가면서도 반항하는 놈을 바라보던 채운의 눈이 순간적으로 만운의 철장갑과 길석의 갑옷을 스치며 지나갔다.

크나다를 잡은 것을 기점으로 구마도의 점령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왕의 선포가 남았지만 이제 구마도는 명실상부한 려국의 영토가 되었다.

기쁜 날이라 장수들과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던 채운은 촛불도 다 꺼진 어두운 막사에서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강희…….”

언제나처럼 잠들기 전 주문처럼 외는 그녀의 이름이 오늘은 더 특별한 것 같았다. 그녀는 보지 못했겠지만 그는 배웅 길에 나와서 만운과 이야기를 나누던 강희를 보고 있었다.

헌데 그녀가 그들의 원정길에 전한 것은 단순한 인사 이상이었다. 그것이 세 명의 목숨을 구했다.

만운, 길석, 그리고 오늘 자신…….

그녀는 어떻게 안 것일까? 정말 그 모든 걸 정확히 알고 한 것일까, 아니면 우연의 산물일까?

알고 했든 우연이든 그녀가 해 준 것 모두가 목숨과 직결된 일이었다. 그 선물의 직접적인 영향에 만운의 말처럼 소름이 끼칠 것 같았다.

만운의 일도 그랬지만 길석이 화살을 맞은 그 자리는 일부러 그곳에만 접쇠가 덧대어져 있었다. 마치 길석이 그곳에 화살을 맞을 걸 아는 것처럼.

만운의 철장갑에 이어 두 번째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그녀가 전한 말은 더 이상 우연이나 기우 같은 단순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크나다의 별명 텁석부리 짝귀. 그것은 왜인들이 그에게 쓰는 별명이 아니라 자국의 백성들이 쓰는 표현이었다. 만약에 나중이라도 그를 잡은 다음이라면 그런 별명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나다는 모르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처럼 보이는 이였다.

길석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갑옷도 그렇다.

길석은 그 갑옷을 수란이 준 것이라 했지만 일개 하녀가 그런 갑옷을 준비할 여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것도 강희가 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길석은 모르는 것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강희에게서 받은 놀라운 선물에 대해선 만운과 자신 둘만 알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녀에게 무슨 비밀이 있든 남들이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섬을 점령한 기쁨과 오늘 강희가 말해 준 일로 인해 겪은 놀라움과 흥분 등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 자신의 탁자 위엔 얹어진 채 오늘도 한 줄도 쓰지 못한 편지를 생각했다.

편지엔 딱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잘 있소? 난 무사하오. 그러니 걱정 말고…….

최초에 그만큼 작성하다 거기서 끊긴 편지는 아직도 그대로였다. 일을 보다 마저 이으려 해도 뒤의 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만운이 강희에게 전하는 소식에 자신의 안부도 함께 전하게 했다.

많게는 수백, 적게는 수 명 이상이 거의 매일 죽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강희에 대한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것만 같았다.

“강희…….”

채운은 다시 한 번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러면 그날 자신에게 안기던 그녀가 다시 떠올랐다.

계속 강희의 생각에 잠겼던 채운은 오늘도 옆에서 잠든 만운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내일부터는 크나다의 심문을 하고 본거지를 알아내야 했다.

* * *

크나다의 심문과 회유는 며칠간 계속 이어졌다.

놈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로 이번 전쟁의 지속 시간과 나아가 성공 여부도 갈릴 수 있었다. 해적의 본거지와 그곳의 지형, 전투 인원 등 중요 정보가 모두 놈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전쟁의 목적은 구마도의 점령이 아닌 해적의 완전한 소탕이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정보를 얻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재영만큼은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똑똑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고, 웬만한 회유는 먹히지도 않았다.

결국 그의 회유 방향을 잡기 위해 재영이 투입되었다. 처음부터 하녀로 위장하고 있던 재영이 막사에 드나드는 일은 항상 있어 왔기에 포로의 음식을 갖다 주는 일은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재영이 크나다가 잡혀 있는 막사에 갔다 와서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매우 치세요!”

분노한 재영의 얼굴로 봐선 희롱당한 여인네의 원망 서린 한마디 같게도 들렸다. 하지만 제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서 들어간 그녀가 중요한 일에 감정을 내세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저런 자는 제가 참을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정해 둡니다. 그리고 워낙에 영리한 자라서 고문을 참을 수 있는 강도도 심리적으로 스스로 조절해 두는 거지요. 지금까지의 고문은 참을 수 있을 정도였고, 엄살을 섞어 기절하는 척하며 그 고통의 한계 안에서 멈추게 했을 것입니다. 그 한계를 넘으면 됩니다.”

재영의 냉정한 설명에 채운은 장수들에게 명해 그를 향한 회유를 당장 멈추고 다시 고문을 시작하게 했다.

크나다는 재영의 말처럼 처음엔 버티는 척하다가 기절하기를 몇 번 했고, 그래도 계속된 고문에 드디어 실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려국에선 겨울의 절정, 이곳에서는 벌써 훈훈한 춘풍이 부는 어느 날, 채운의 군대는 해적들의 본거지를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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