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모사만운 성사채운謀事萬雲 成事採雲
이미 한참 전에 목욕을 끝내고 먼저 방에 든 채운은 초조하고 예민한 기분으로 강희를 기다렸다.
그런데 달이 떠오르고 있는데도 오늘따라 강희는 방에 들어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이 여자가 이젠 침소에 드는 것조차 피하려는 것인가 싶어 채운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때 강희가 방문을 살짝 두드리고 들어왔다.
그는 우선 거슬리던 것에 대해 차갑게 말을 던졌다.
“앞으로 그럴 필요 없소.”
“네?”
“방에는 그냥 들어오면 될 일이지 일부러 먼저 방문을 두드릴 필요까진 없다는 말이오.”
“하지만 서방님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홀딱 벗고 있기라도 할까 봐 그러냐?’라고 대꾸하려던 채운은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에 자신이 정말 그런 천박한 말을 할 뻔한 데 놀라고 있었다.
점점 치졸해져 가는 자신이 못내 보기가 싫었다. 강희 때문에 화내고 옹졸하고 초조하게 변하는 자신이 너무나 못나고 바보 같기만 했다.
왜, 이 여자가 뭐라고?
간신히 제 맘을 진정시킨 채운이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오.”
“네…….”
탁자로 향하는 조심스러운 그녀의 몸짓이 나비의 날갯짓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부글거리던 마음이 강희를 보는 순간 다른 의미로 들뜨는 것 같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이는 격랑은 익숙해지거나 덜함이 없이 날로 거세지고만 있었다.
“물어볼 것이 있소.”
“네, 말씀하시어요.”
그의 미처 숨기지 못한 사나운 기색을 감지한 강희가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선 채 손을 맞잡고 대답했다.
“당신은 도대체, 도대체 어쩔 생각이오?”
“네?”
“이러는 저의가 무엇이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서방님?”
그 서방님이란 호칭부터 묻고 싶었다. 당연한 호칭까지 들먹이고 싶을 만큼 채운은 강희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고 다 따지고 싶었다.
“도대체 이러다 어떻게, 대체 무슨 이유로 이혼을 청할 것이냔 말이오?”
따지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았으나 차마 다 물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열심인 것이냐, 만운이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처음 만났던 그날 찾아왔던 진짜 저의는 무엇이냐, 무엇을 사과한 것이었냐, 이렇게 노력하는 이유가 혹시라도 이혼에 대한 말을 엎으려는 것인가.
그리고 그가 했던 생각 중 가장 어이없는 것은…….
당신 정말 성강희라는 그 여자가 맞는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은 그녀가 다른 사람이길 바라면서까지 그녀가 저지른 짓을 없었던 일로 부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 해서 아무 문제없이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동그랗게 눈을 뜬 강희는 입만 벙긋거리고 선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채운은 그녀를 다그치듯 탁자 위에 손을 얹고 가까이 다가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재촉했다. 그때 가까이 선 그들 사이로 그녀의 아직 조금 덜 마른 머리에서 향유 냄새가 퍼졌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채운이 그녀의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을 잡아 올렸다.
헉하고 놀라는 강희의 모습에 채운은 제 이성을 배반한 손이 기어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냥 뒀으면 그대로 코에 대고 깊게 향기를 들이마셨을지도 모른다.
“미안하오, 내가 이 무슨 추태를.”
당황한 그가 강희에게서 한 발짝 뒤로 크게 물러났다. 제 손을 얼른 뒤로 감춘 그가 탁자에서도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강희는 순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어리둥절했다.
설마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던 것인가?
그러나 강희는 채운이 소스라치게 물러나며 자신이 한 실수에 경악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혹, 머리카락에 무언가 묻어 있었던 걸까? 벌레라도 한 마리 딸려 왔는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였지만 강희는 제 감정을 숨기기에도 급급해서 그를 자세히 살필 여력이 없었다.
채운은 제 황망함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다시 그녀를 재촉했다.
“답하시오!”
화가 난 듯한 그의 목소리에 움찔한 강희가 황망히 답하기 시작했다.
“저, 그건…… 저는 성강희니까. 제가 이혼을 청해도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이해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
제 입으로 자신의 악명을 주워섬기는 그녀의 모습은 처량맞기 그지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그런 황당한 제안을 하러 나타났을 땐 가장 추문에 휩싸였던 시기였기에 이 변명도 이상하지 않았었다. 성강희란 그런 여자였다.
“성강희……. 그래, 당신이 바로 그 성강희였지. 하, 그래, 당신의 악명을 이용하는 계획이라……. 내 짐작은 했지만 당신의 그 잘난 선행을 감추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소? 그럼 이 집 사람들에겐 어쩔 작정이오? 당신 아버지는? 그리고 벌써 당신을 강아지처럼 따르는 만운이에게는 뭐라 말할 작정이란 말이오!”
강희는 사납게 몰아치는 그에게서 뻣뻣해진 고개를 돌리고 양손을 꼭 쥐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혼인 후 강희는 그가 이토록 언성이 높아지고 화가 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여태 무심하고 무뚝뚝하게 지나치던 그를 자극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았다.
언감생심 흐르는 마음을 감추지 못해 그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간지도 몰랐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여야 했는데, 이것도 실수한 것만 같았다.
언젠가 해야 할 말이었지만 이 말만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다. 부정한 여자라니, 생각은 그리하고 있었지만 차마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늦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건…… 저,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어요.”
하지만 강희는 생각해 둔 것이 있다는 말만으로도 채운의 화를 부채질했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하는 말에 그의 얼굴이 더욱 무섭게 굳어지고 있음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제 생각엔 성강희란 여자……. 그러니까 저의 오명이 하나 더해진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부정한, 그러니까 제가 다른…….”
채운은 그녀가 하려는 말을 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그만!”
“저, 저는…….”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말을 하려는 거라면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요.”
“…….”
“이미 달고 있는 오명에 하나 더 꾸민다고 해서 별로 놀랍지도 않을 거라고? 그래서 그런 일을 꾸미겠다는 거요, 당신! 만약 앞으로 그 비슷한 말을 더 한다거나 일을 꾸며 당신을 따르는 내 동생을 상처 입히고, 나와 그 애를 모욕한다면 난 당신의 목을 비틀어 버릴 거요!”
채운은 실로 치솟는 화를 참기가 힘들었다.
생각해 둔 것이 있다는 것부터가 속이 터질 지경인데, 이어지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어렵게 더듬거리며 하려는 말이 뭔지 짐작되고도 남았다.
‘감히 뭐를 어쩌겠다고?’
너무 화가 나니 오히려 목소리가 더 낮아지는 것 같았다. 그것이 그의 더 큰 분노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이 딱한 여자를 어쩌지는 못하고 대신 붙잡은 의자의 등받이 부분만 그의 손에서 부서지기 직전이 되었다.
“당신, 당신이 날 서방이라 부르는 한 내가 당신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은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안 그러면 당신이 그동안 좋게 바꾸려 노력했던 당신이란 여자뿐 아니라 나와 당신 아버지, 만운과 나아가 나의 주군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칠 것이오. 당신이 정말 악녀의 탈을 벗은 거라면…… 지금 내게 하려던 그 작은 머릿속에 든 생각을 지우는 게 좋을 거요. 알아들었소?”
주체할 수 없는 화를 삭이는 동안 채운의 손등에 혈관은 튀어나올 듯 불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한참 노려보며 서 있던 채운은 옷을 챙겨 들고서 방을 나가고 말았다.
크게 닫히는 방문 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치는 것 같았다.
불같이 화를 내는 채운의 모습은 꼭 꿈속의 그를 연상케 했다. 다시는 그를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그를 위한답시고 한 생각이 오히려 그의 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강희는 힘이 빠진 다리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 생각을 할 때만 해도 이것이 다른 이들에게 이혼을 설명할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에게 오명 한 가지가 더 얹어질 뿐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허나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자신이 부정한 여자가 된다면 그것은 그도 함께 써야 할 오명이 되는 것이다. 그 또한 얼마나 그를 모욕하는 일이겠는가. 그리고 만운이 입을 상처라는 말에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강희는 짧은 생각에 또 한 번 그를 욕보일 뻔한 제 어리석음에 저를 나무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자신은 언제까지나 죄인이기만 한 것 같았다.
채운은 그날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 *
채운이 그렇게 뛰쳐나간 뒤로 사흘이 지났다.
강희가 밤을 꼴딱 새운 것도 그만큼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주인의 급작스런 출타에도 하인들은 그리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만운이 태연하게 오가며 평소와 같은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린댁과 이 집사는 길석도 모를 정도로 급히 나간 주인께 무슨 일이 있다고 짐작하긴 했지만 그들도 만운이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운의 생활은 그리 태평스럽지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는 형수와 매일 무섭게 칼을 휘두르며 병사들의 기강을 잡는 형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지켜보기만 해 왔지만 저 두 사람은 보는 이가 답답할 정도였다. 그냥 둬서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 꼬이는 것만 같았다.
둘 사이가 그리된 것이 정략혼 문제라거나 소문 무성한 형수의 과거가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심각한 무언가가 더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든 내버려 두기엔 본인의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만운은 모종의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를 도와주는 이가 바로 왕세자 수였다.
오늘도 궁에서 집으로 갈 생각을 않고 있는 채운을 몰래 훔쳐본 만운과 수는 아주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밤인가?”
“네, 오늘이요.”
두 사람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그날 밤, 궁에서 헐레벌떡 뛰어온 만운이 강희를 급히 불러 댔다.
“형수, 형수!”
“무슨 일이신가요, 도련님?”
“형수님, 큰일 났소, 큰일 났소! 형, 우리 형이…….”
“서방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일단 빨리 갑시다! 형수가 가야 하오. 우리 형 좀 살려 주시오.”
“무슨 일인가요? 서방님께서 어떻게 되신 건가요?”
“가 보시면 아오. 빨리 오시오, 한시가 급하오!”
만운은 사색이 된 강희를 잡아끌었고, 그녀는 갑자기 저를 잡아끄는 만운을 따라 함께 말에 올랐다.
만운이 꽤 빨리 말을 달려 무서울 법한데도 강희는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미지의 어떤 사고를 당한 채운이 혹시 사경을 헤매는 건 아닌지 그게 더 무서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강희는 궁까지 이르는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지금은 하필 꿈속에서는 그녀가 송국에 유람―도피―을 하고 있던 때라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아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더 불안한 생각만 드는 것이다.
설사 이때 일어난 일 중에 아는 일이 있다 해도 그들이 혼인한 이후 모든 일이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에 강희가 대비할 수 있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안타깝기만 했다.
그래서 말 위에서 달리는 동안 미래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지금부터라도 들추고 대비해야 할 거란 생각을 하며 채운에게 생긴 일이 제발 최악의 상황이 아니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형수, 빨리 서둘러 주시오.”
궁에 도착한 만운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강희를 내려 주고는 또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강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답도 듣지 못한 채 엉겁결에 무작정 궁에 있는 채운의 숙소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하자 만운은 무작정 그녀를 방 안에 밀어 넣고 밖에서 문을 쾅하고 닫아 버리고는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형수, 우리 형 살려 주시오! 우리 형, 미약에 당했소. 안 풀어 주면 죽을 거요. 내 형수만 믿소! 형수밖에 없소. 제발, 우리 형 살려 주시오!”
문밖으로 만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방 안엔 솟아오른 열기를 미처 내보내지 못한 채운이 식식 큰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밖에선 이 모의를 꾸민 만운이 성벽 꼭대기에서 형이 있는 쪽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있었다. 이제 드디어 형과 형수가 답답함을 풀고 일을 제대로 치를 테다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면 정말 야단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미 일은 벌어졌다.
만운은 모든 걸 각오하고 이번 일을 꾸민 것이다.
왕세자에게 솔직하게 형에 대한 일을 털어놓고서 형이 마실 술에 미약까지 타서 준비한 건 모험 이상이었다.
자신이 직접 그 술을 권할 수도 있었지만, 궁에 있는 한 경계를 풀 형이 아니기에 왕세자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야밤에 형수를 데려오고 거사를 치르려는 일에 왕세자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이 일의 직접 가담자로 끌어들인 것이다.
수는 처음엔 만운의 계획에 염려를 표했다. 아무리 형을 걱정하여 벌이는 일이지만 약을 쓰기까지 하다니, 무리가 있어 보였던 것이다.
“과연 자네 형이 그런 수에 당할 것 같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저하께서 권하시는 것입니다. 형님이 의심이나 하겠습니까?”
“그거야…….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겠는가?”
“며칠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대로 놔두는 게 낫겠습니까?”
“그거야 아니네만. 헌데 이 일이 성사된다 해도 나야 상관없으나 자네 형이 자네를 가만두겠는가?”
“지금 저를 걱정해서 이렇게 망설이셨던 겁니까? 소장, 저하의 성은에 망극하옵니다. 형이 안다 해도 설마 저를 때려잡기라도 하겠습니까, 하하하하!”
“원, 참, 자네도.”
만운의 웃음엔 특유의 장난기와 유쾌함이 담겨 있었다. 또한 형과 형수를 걱정하는 애정도.
아무리 아끼는 수하이자 벗이라지만 왕세자인 자신이 직접 채운의 사생활에까지 참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만운이 벌이는 일에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가 있었다.
그날 저녁.
만운과 왕세자가 함께하는 조촐한 만찬이 벌어졌다. 그리고 수가 주는 대로 넙죽넙죽 술을 들이켜던 채운이 어느 순간 타는 목을 잡고 의자를 쓰러뜨리며 일어나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앗, 형!”
“이 무슨 일인가!”
“헉, 독이야, 형?”
“도, 독이 아니라……. 이것은…… 미약의 일종인 것 같다!”
“뭐? 미약?”
“술에 그런 약이 섞여 있었던……, 윽.”
정작 그 약을 먹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지만 채운은 얼굴이 붉어진 채 만운과 왕세자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두 사람 다 죄책감에 가슴이 죄어 들어왔다. 하지만 약까지 먹이고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만운은 형이 자신의 목을 잡는 순간부터 어떻게든 놀라고 당황스런 모습과 걱정과 분노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연기는 성공이었는지 형은 자신만 그 약에 당한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약기운에 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약은 형과 형수를 위해 그가 심혈을 기울여 구한 것이다. 허니 대항하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진실은 알고 있었다.
약은 돌파구일 뿐, 이후 그가 벌인 일의 뒷수습은 형의 진심만이 풀 수 있다는 걸.
오늘 형은 형수와 큰 산은 넘어야 할 것이다.
만운은 이 일이 돌파구가 되건 바보 같은 참견이 되건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그리 절절한데도 손가락 하나 닿을까 무서워 서로를 외면하는 형 내외의 모습을 더는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야단을 맞을 땐 맞더라도 이리 일을 벌이고 볼 작정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힘든 짐을 지고 자신을 돌보며 무예를 단련하는 데만 자신을 쏟고, 나라 전역에 영웅의 칭호를 받은 지금도 본인을 채찍질하는 형이 이제는 그만 행복해졌으면 했다.
형에게 그 행복의 지수가 형수라면 형수를 갖다 바칠 것이다. 형에게 그런 눈을 하는 형수도 꺼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형, 미안해. 하지만 언젠가 고마워할 거라 생각해.’
만운은 서궁의 가장 외곽 꼭대기 불침번을 서는 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형과 형수는 다른 의미로 불침번을 서리라 기대하면서.
“다, 당신이……. 허억, 당신이 여기에는 어쩐 일이오!”
아무리 가을에 접어드는 계절이지만 여름의 끝자락에 발을 걸치고 있는 지금 더운 열기에 창 하나는 열 법도 한 때였다. 그러나 채운의 방은 문도 하나 열지 않은데다 그는 열기에 허덕이고 있었다.
“서방님, 많이 편찮으시어요?”
“당신이 여기에 어떻게 온 것이오!”
“만운 도련님이……. 서방님, 세상에, 얼굴이 너무 붉으셔요!”
“만운이가…….”
채운은 헉헉거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눈살을 찌푸린 채 마구 고개를 저었다. 강희가 가까이 다가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오, 아니오!”
“서방님? 어머, 이 땀 좀 봐.”
방을 밝히는 호롱불에 채운의 식은땀이 잘 보였다. 강희는 저도 모르게 그의 땀을 닦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만하시오!”
버럭 소리를 지른 채운의 음성에 강희가 움찔했지만 아직 그녀는 만운이 오는 내내 하던 부탁을 잊지 않고 있었다.
“형수, 형수가 아니면 우리 형 죽소! 우리 형 좀 살려 주시오!”
오는 길에 ‘제가 어떻게 하면 되냐’고 몇 번을 물어도 만운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형에게 가면 안다며 제발 형을 살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채운은 그녀가 다가오는 걸 질색하며 거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강희는 그의 곁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한눈에 봐도 채운은 지금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내내 걱정하던 것처럼 어디를 크게 다친 건 아니어서 일단 안심은 했지만 그의 붉어진 얼굴과 거친 숨소리로 보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알 수 있었다.
“나가시오!”
“서방님?”
“당장 나가란 말이오!”
“서, 서방님!”
절박한 그의 고함에도 강희는 그의 상태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형을 살려 달라 울부짖던 만운의 애원도 그냥 무시하기에는 심상치 않았었다.
“가!”
“서방님!”
“가라지 않소! 왜, 지금 나를 유혹하는 것이오? 이런 천한 몸이나마 하룻밤 정도는 허해도 될 것 같소?”
채운은 어떻게든 그녀를 내보내기 위해 일부러 비열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강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강희는 만운이 그녀를 들여보내며 말한 ‘형이 미약을 먹었다’란 말이 이제야 이해되는 중이었다. 형을 살려 달라며 거의 흐느끼던 만운이 바라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다.
“처음 제가 당신을 만났을 때 했던 부탁은 딱 두 가지였어요. 전 첫 번째 것을 지킬게요. 그러니 당신도 저의 부탁을 들어주셔야죠.”
“강…… 희?”
채운은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강희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 그때 강희가 무슨 말을 했더라?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비워진 채 생각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온몸을 빠르게 달음박질치는 피가 한곳에 몰리는 걸 안간힘을 다해 저항하고 있었는데, 약기운은 그의 뇌까지 점령한 건지 점점 참을성이 바닥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약을 먹게 되었는지 알게 된 순간, 연무장으로 향하려 했다. 몰아지경으로 칼을 휘둘러 약기운을 발출시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수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수는 채운이 먹은 약의 확실한 정체를 알아야 한다며 의원을 부르고 진찰을 하게 했다. 그러느라 채운은 약기운을 뺄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의원에 의해 미약에 당한 게 확실하다는 진단이 내려지기까지 또 시간이 한참 걸렸다.
의원은 이런 때는 여인을 품는 것이 최선이라는 다 아는 얘기만 늘어놓았고, 수는 그 때문에 만운이 달려갔다는 말과 함께 채운에게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지시하고 그를 홀로 두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렇다.
채운은 수에 의해 방에 감금된 것이다. 그는 약기운 때문에 치미는 열기와 다투느라 수와 의원의 행동이 굼뜨며 다분히 연극조인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만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갑자기 강희가 그의 눈앞에서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만 그동안 맨 정신으로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이 약기운의 힘을 빌려 밀려난 데다 강희도 그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강희가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이제야 처음 만났던 그때 강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부탁……. 다른 여자를 품지 말라고 했던가. 그럼 다른 여자 대신 당신은 가능하다는 말이었소?’
그를 바라보고 서 있는 강희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순간 이성을 이긴 그의 욕망이 강희에게로 손을 내뻗어 그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에게 손을 잡힌 강희는 그대로 끌려 들어가 침상에 뉘어졌다. 안 그래도 더운 방인데 열기가 오른 채운의 손에 잡힌 곳은 더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뜨거움이 두렵지는 않았다.
“강희.”
“네…….”
강희는 입만 벌려 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대답했다.
“강희.”
“네.”
강희가 또 똑같이 대답했다.
그의 색색 몰아쉬는 숨소리에 따라 강희의 숨도 거칠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짧게만 마주치고 고개를 돌리던 그녀가 지금은 그 매혹적인 눈동자를 바로 하고서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희의 눈동자엔 망설임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자신의 눈을 비추고 있었다. 강희를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벗어던지자 오롯이 그녀를 원하는 자신의 마음이 똑바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가 굴복한 것은 약기운의 힘이 아니라 강희 때문이었다.
그녀를 잡아당기는 순간 이성을 날려 버렸으나 약기운에 지배당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를 잡아당겨 품에 가두자 이제야 그를 어지럽게 하던 혼란스러움의 정체를 확실히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여자를 정말 간절히 원하고 있다!’
채운이 그녀의 볼을 살그머니 쓸었다. 손가락에 처음 닿는 그녀의 느낌은 생각보다 보드랍고, 기분이 좋았다.
그의 손짓에 강희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지만 그것은 그를 거부하는 몸짓이 아니었다. 낯선 느낌에 수줍어하는 여인의 모습이 그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거칠어진 숨을 내쉬느라 강희의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다.
그 입술을 살짝 매만진 채운이 그곳에 곧 자신의 입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이 한입에 딸려 오는 것 같았다. 촉촉한 그 입술이 닿자 이대로 온몸이 불타 버릴 것만 같았다.
채운은 허겁지겁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런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 어림을 더듬고 있었다.
난생처음 닿는 낯선 느낌에 강희가 헉 하고 신음을 질렀다.
꿈속에서 경험하지 않았었느냐고 저에게 말했지만 그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꿈을 지켜보느라 공유한 몇 가지 감정은 가져왔지만 그때 그녀가 직접 경험한 어떤 것도 지금의 강희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떨림처럼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새로울 뿐이었다.
급해진 그의 손길이 그녀의 옷섶을 여느라 분주해졌다. 다급한 남자의 손에 그녀의 가슴을 여민 호박 단추와 안의 매듭이 거의 찢어지며 벗겨졌다. 꽉 눌려져 있던 그녀의 동그란 가슴이 튕기듯 헤쳐 나왔다. 닫힌 창이 달빛을 가렸지만 방 안에 다른 두 개의 달이 떠오른 것 같았다.
절로 손이 가 매만진 가슴은 그의 손에 꽉 들어찼다. 부드러운 그 느낌은 그의 다음 행동을 종용하고 있었다.
탐스런 그녀의 가슴을 입에 머금고 그녀의 치마만 걷은 채 그대로 그녀를 찍어 누르고 싶은 욕심이 채운의 마음속에서 불쑥불쑥 일어나고 있었다.
“강희…….”
마주친 입술 사이로 이름이 불리자 강희가 화답하듯 서방님 하고 속삭였다.
절정에 다다른 약기운이 이대로 그녀의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라 성화였지만 이런 식으로 강희를 덮칠 수는 없었다. 이것이 그들의 첫날밤이었다.
수줍음에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강희를 두고 채운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찌 손을 놀렸는지도 모르게 급하게 벗어 던진 옷을 침상 아래로 마구 던져 버렸다.
“이번엔 당신 차례요.”
그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강희의 옷을 벗기는 데는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다. 한 꺼풀씩 벗길 때마다 드러나는 그녀의 나신에 그녀를 덮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강희의 나신이 완전히 드러나자 채운은 그녀를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랐다.
마주친 입술 사이로 단내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그 안의 말캉한 혀를 잡아당기자 쏙 딸려 온 그것이 오히려 그를 진하게 희롱하는 것 같았다.
“강희!”
“네, 서방님.”
“강희.”
“네, 네, 서방님……, 헉!”
가슴과 배를 지나 그 아래로 내려간 그의 손에 강희가 놀라 떨고 있었다.
“미안하오. 내가 더 참을 수가 없어.”
“아하, 핫!”
높은 신음과 함께 그의 긴 기다림과 혼란의 끝이 찾아왔다. 짧은 애무와 거친 파열에 강희가 힘들어 했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한차례 거친 허릿짓에 달뜬 열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한 번으로 그의 혼란을 모두 잠재울 수는 없었다.
첫 경험에 힘든 강희를 배려해야 했지만 채운은 높이 떠오른 달이 넘어갈 때까지 그녀의 품에서 남은 열기를 계속 쏟아부었다.
* * *
서궁 안에서는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강희는 항상 일어나던 시간에 눈을 떴다. 번쩍 뜨인 눈 바로 앞에 자신을 감싸고 누운 그의 드러난 가슴이 보이고 있었다.
‘핫!’
순식간에 어젯밤의 일들이 반추되었다.
어젯밤의 그는 거칠었지만 섬세했고, 다정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를 향한 제 마음을 알기에 어젯밤 일을 후회하거나 망설이지는 않았지만 눈을 뜬 그에게서 후회나 경멸의 눈빛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아, 벌써 아침이 되었구나!’
강희는 진실로 아침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설핏 잠이 들면 내내 이상하고 야릇한 꿈을 꾸면서도 그와 함께하는 미래는 보이지가 않았다.
재영이 나타나 이는 운명대로 흘러가는 것뿐이니 행여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 호통 치는 소리를 들으며 서러움에 눈물이 났고, 그 아이가 붉은 눈을 한 채 나타나 비웃음을 퍼붓는 걸 가만히 들으며 가슴을 쥐어 잡았다. 그리고 그 일을 알게 된 만운이 네가 우리 누나와 부모를 죽게 한 원수냐 목을 죄려 했다.
“…….”
그에게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으나 결코 이런 일을 벌일 마음은 없었는데……. 이 일로 책임감 강한 채운이 고민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와 혼인이란 이름으로 엮인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 그를 마음에 담았다 해서 그의 용서를 구하고 평생 아내라는 이름으로 살 염치 같은 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른 마음이 드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었다.
‘만일, 만일 그가 그 일을 용서하고 받아만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어떻게 그 일에 용서를 구할 수가 있지? 설사 그가 용서한다 해도 만운은, 도련님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 사람의 말이 맞았다. 만운을 다시 상처 입힐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런 가당찮은 오명을 안고 있는 자신도 받아 준 만운이다. 그는 활달하고 쾌활한 듯 보였지만 언뜻언뜻 정에 굶주린 듯 보이곤 했다.
만운은 이 일이 위급한 형의 침상에 당연히 형수를 밀어 넣은 거라 생각했겠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얼마나 기겁할까. 그 여자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여자란 걸 알게 된다면…….
여러 생각을 해 보아도 강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고른 숨소리로 잠든 그의 콧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있었다. 조금 답답하여 바르작거리며 고개를 돌린 강희의 눈에 어젯밤 마구 벗어 던진 옷가지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더 자도 되오, 부인.”
채운이 눈을 감은 채 그녀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당기며 속삭였다.
“……!”
강희는 숨소리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그리 말하고서 다시 잠든 것 같았다.
어젯밤 그리 더웠던 방이 아침이 되자 서늘한 공기로 채워진 것 같았다. 허나 채운과 맞닿은 채 한 이불 속에 있는 그녀는 아직도 더운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만운의 말로 그가 어제 약에 당한 것이라 했으니, 어젯밤 그녀와 치른 일은 채운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어제 분명 자신을 내보내려고 애를 썼었다. 그런 그에게 오히려 다가간 건 자신이었다.
강희는 그를 보며 계속 눈을 뜨고 있으려 했지만 지난 사흘간 거의 잠들지 못했던 몸은 수마에 지고 말았다. 강희는 그렇게 남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래서 강희는 몰랐다.
잠시 후, 채운이 일어나 그녀를 한참 내려다보며 그녀와 같은 고민을 했다는 걸. 그리고 잠든 그녀의 몸에 이불을 올려 준 그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입맞춤을 그녀의 입술에 남기고 방을 나간 것도.
강희는 왕세자가 보낸 하녀들이 시중을 들러 올 때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형, 몸은 괜찮아?”
싱글벙글한 만운의 얼굴을 보며 채운은 어젯밤 벌어진 일이 모두 동생에 의해 꾸며진 사건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정말 미약에 당한 거라면 비록 이렇게 멀쩡히 일어날 수 있었다 해도 흉수를 찾겠다며 펄펄 뛸 만운이었다. 그런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좋아 죽겠다는 저 얼굴을 보니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너, 각오는 됐겠지?”
“각오? 우히히, 각오라니? 응? 뭐?”
“너 당장 칼을 들고…….”
“그만! 형제들끼리 아침부터 대련이라니, 너무 힘이 넘치는 것 아닌가. 힘이 넘칠 리가 없을 텐데……. 안 그런가?”
두 사람 사이에 어느새 나타난 수가 끼어들어 채운을 말렸다.
싱글싱글 웃는 그 얼굴이 주군만 아니라면 한 대 치고 싶을 만큼 수의 얼굴에도 놀리는 표정과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도 어젯밤 일에 깊이 관여했음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만운과 죽이 잘 맞는 주군에게 동생의 장난기가 옮겨 가 이렇게 된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금방 냉정을 되찾은 채운은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자신이 오죽 못난 꼴을 보였으면 이렇게까지 할까. 자신의 일을 왕세자께 고해 이런 일을 벌인 동생이나 그것을 함께 도모한 주군이나 보기가 민망해지고 말았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거참, 거하고 뜨거운 밤을 보낸 사람에게 이런 말이나 들어야 하다니. 이럴 땐 정말 놀리는 맛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수의 말에 크게 동의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만운은 채운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웃고 있는 제 입을 가렸다. 그러면서도 몰래 수와 눈을 마주치며 푸헤헤 가볍게 웃는다.
채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만운은 생각 같아선 왕세자의 농에 한 마디 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지금 너무 까불었다간 방금 형을 말려 준 그의 노력이 소용없게 될지도 몰랐다. 제대로 체벌이 될 경향이 아주 강한 대련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겠지만 아침부터 땀나게 형의 칼 아래 목숨을 위협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설마 이 일로 죽기야 하겠어?’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만운은 형 몰래 고개를 돌리고 히죽 웃었다. 아무튼 지금 형이 팔팔한 모습일 수 있는 건 그가 벌인 일이 성공한 덕이었다.
만운은 스스로의 성공에 혼자 자축했다. 지금 당장은 이렇게 대련을 하자 덤빌 형의 칼을 두려워하지만 언젠가 두 사람 다 그에게 감사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이제 두 사람도 답답한 모습에서 벗어날 것이다. 어젯밤 일로 조카라도 생긴다면 금상첨화이리라.
만운은 희망적인 내일을 관측했다.
“성 부인.”
“앗, 왕세자비마마! 마마를 뵙습니다.”
강희는 시녀들에 의해 단장을 마치자마자 들어선 여인에게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어젯밤 급히 궁으로 들었다는 말은 들었어요, 성 부인. 퍽 놀랄 만한 일이 있었다지요?”
“저, 그게…….”
차마 미약에 당한 남편을 위해 달려와 밤새 약기운을 소진하느라 그와 함께 침상에 들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세자비는 부드럽게 웃으며 강희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말하기 곤란한 일에 굳이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내가 굳이 알 일은 아니지요. 그 덕분에 저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이자 벗인 윤 장군의 부인을 이리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난 그게 더 반갑습니다.”
“황공하옵니다, 왕세자비마마.”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여인인 내 눈으로 봐도 참으로 곱습니다, 성 부인. 윤 장군은 본신의 강한 무예뿐 아니라 아름다운 부인을 가진 것만으로도 뭇 사내들의 시샘을 받겠습니다.”
“황공하옵니다.”
강희는 소문이란 말에 움찔했다. 왕세자비는 칭찬을 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강희는 저 자신에 대해 떠도는 소문을 다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일부러 그녀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한 왕세자비에게 그 소문의 진상을 말할 수는 없었다.
“마마야말로 현숙한 아름다움이 절로 비춰 보이십니다.”
“고마워요. 우리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고 있는 건가요, 호호호.”
왕세자비 하 씨가 기쁘다는 듯 입을 가리며 웃었다.
첫인상의 왕세자비는 명랑하고 귀여운 사람인 것 같았다. 성도종 대감이 애초에 강희를 차비로 들이려 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이렇게 웃으며 대해 주다니, 관대하며 어진 성품도 엿볼 수가 있었다.
문득 강희는 꿈에서 본 왕세자비가 생각났다.
꿈속의 그녀가 왕세자비를 처음 본 것은 그와 혼인식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왕세자의 초대에 어쩔 수 없이 채운과 함께 연회에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왕세자비를 비롯한 다른 장수들과 부인들의 눈총만 사다 자리를 떠야 했다.
당시의 연회는 거의 채운을 위한 것으로, 그가 주역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는 재집결한 왜의 해적 무리를 토벌하고 돌아온 장수들을 치하하는 연회였다. 그의 혼인식 때문에 연회 자체가 미루어질 정도로 해적 토벌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채운이 제일 빛나는 영예를 받는 자리였다.
그런데도 꿈속의 그녀는 그런 자리에서까지 더러운 혈통의 평민과 한자리에 앉는 것조차 싫다는 걸 서슴없이 표현했다. 그리고 대놓고 제 남편을 경멸하는 기색을 보였으니, 누구에겐들 밉보이지 않았겠는가.
‘참으로 어리석은…….’
이젠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을 한탄하면 무엇 하겠는가.
강희는 그보다 연회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깨닫자 중요한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새롭게 결집한 해적 무리의 저항이 워낙 거세어 그들을 와해시키기까지 토벌에 긴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었다. 훗날 해종―청왕―의 마지막 업적이라 불린 이 원정은 종전하기까지 엄청난 인력과 물질적인 소요와 반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토록 중요한 사건을 잊고 있었다니!’
꿈속의 그녀가 가졌던 빈약한 기억이 떠오른 강희는 제 몸치장 말고는 세간의 일들이나 정치적으로 벌어지는 나라의 중요한 사건에 아둔했던 그녀―자신―가 새삼 원망스러워지고 있었다.
“부인, 차가 다 식습니다. 어서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생각에 잠긴 동안 벌써 많이 식은 차가 입안으로 쉽게 넘어갔다. 그러나 방금 떠오른 기억의 중대성에 빠져 있던 강희는 왕세자비의 말에 차를 넘기려다 목에 걸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어제는 왕세자마마께서 왕궁 안에 신방을 마련해 달라고 하셔서 놀랐어요. 어머, 성 부인?”
“쿨룩, 쿨룩, 소, 송구합니다.”
확 붉어진 강희의 얼굴은 누가 봐도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 부끄러워하는지라 왕세자비는 더 이상 그에 관한 농을 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송구는요.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황공합니다, 마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강희의 등을 두드려 주던 왕세자비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강희의 목덜미에 붉은 흔적을 언뜻 본 것이다.
지난밤, 윤 장군 혼자만 좋을 수는 없다며 자신을 안아 주던 남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구석이 있었다.
“성 부인, 집에서 궁이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종종 놀러 오세요. 일단 한 번 발걸음을 했으니 어렵게 생각지 마시고요.”
“아녀자가 어찌 궁에 함부로 출입을 하겠습니까.”
“누가 윤 장군 부인 아니랄까 봐 예의에 엄격한 건 부부가 똑같으시네요, 호호.”
“망극하옵니다.”
“그럼 내가 초대하는 걸로 하지요. 그렇게 되면 오실 수 있지요?”
“황공하옵니다. 당연히 받들겠습니다, 마마”
“앞으로 알아 가면 되겠지만 나 그렇게 딱딱한 사람 아니에요? 내가 몇 살이 더 많으니까 언니처럼 성 부인은 동생처럼 그렇게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마마, 정말 황공…….”
“그만. 이제 더 이상 황공은 받지 않겠어요. 알았지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요.”
흐뭇하게 웃는 왕세자비의 얼굴은 꿈속의 그녀를 보던 얼굴과는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강희는 호감이 가득 담긴 왕세자비의 얼굴을 보며 장담할 수 없는 미래가 더욱 아련하게 와 닿는 것 같았다.
강희는 또다시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와 지금 왕세자비와의 관계가 달라진 것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록에도 남기지 않았던 꿈속의 기억을 맹렬히 되짚으며 이때쯤의 사건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것은 연회에서 장수들끼리 채운을 가운데 두고 떠들던 말이었다.
‘맞아. 마지막 순간까지 일반 포로들 속에 숨어 있던 해적 부두목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별명이 턱수염, 말총머리, 애꾸, 외다리, 외팔……. 무엇이었더라?’
혀끝에 맴도는 그 포로의 별명이자 특징이 잘 생각나지 않아 답답했다. 강희는 목구멍에서 간질간질하니 나오지 않는 그 이름이 떠오를 듯 말듯 도통 생각나지 않아 속이 탈 지경이었다.
지금 채운의 얼굴은 멀끔하지만 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채운을 암습하려던 놈 때문에 입은 상처가 그의 눈 밑에 남은 것이다.
꿈속의 기억으로 그것이 언제, 왜 생긴 줄 알고 있는 강희로서는 그 원인을 꼭 막아야 했다. 그리고 만운도.
‘세상에 그것도 그때였구나! 어떻게 도련님이 입은 그 큰 상처가 언제였는지 떠올리지도 못했을까?’
그녀의 송국 유람과 원정의 시간이 겹쳤기 때문이었지만 그 시기를 제대로 생각해 내지 못한 건 자신의 어리석음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꿈속의 그녀가 만운을 싫어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당한 부상 때문이었다. 그녀는 만운의 상처를 보며 혐오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제 옆에 오는 것조차 질색했다.
강희는 채운이나 만운이 또다시 그런 상처를 입게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만운을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 둔 것도 있으면서 그게 이때였는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그런데 당장 코앞으로 닥친 것이다.
그 꿈이 정말 미래의 일이라면 자신으로 인해 파생된 문제는 바뀔 수도 있지만 해적들의 소요 같은 국가적인 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흘러간 시간들로 미루어 봐도 그것은 꿈이라고 단순히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시간을 대충 가늠해 보니 원정은 당장 내일이라도 출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윤채운의 이름만으로도 기세가 죽는 해적의 토벌에 채운이 가지 않을 리가 없다.
강희는 지금 당장 원정을 떠나는 서방님과 도련님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이 갑자기 바빠졌다.
“성 부인, 오늘도 궁에 머무를 건가요? 기왕 오신 김에 성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고 싶은데…….”
“마마, 정말 송구하오나 제가 미리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무례를 저질러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다음에 기별을 하고 정식으로 찾아뵙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려는지요?”
“그러겠어요? 그럼 다음을 기약하지요.”
왕세자비는 급해진 마음에 난처한 기색이 완연한 강희에게 흔쾌히 작별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강희는 그때에야 왕세자비의 배를 볼 수 있었다. 여태 긴장하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는 왕세자비의 부푼 배를 보고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본 왕세자비가 또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머, 여태 몰랐어요? 그리고 성 부인, 이제 갓 혼인한 새색시가 너무 노골적으로 부러운 눈을 하는 거 아니에요? 호호, 저하께서 윤 장군을 자주 붙잡아 두시긴 하지만, 설마 이리 고운 새색시를 윤 장군이 그냥 둘 리 있겠어요? 성 부인도 곧 좋은 소식이 있겠지요.”
침상과 강희를 오가며 눈빛을 빛내는 왕세자비의 말에 강희는 한순간 강렬한 희망을 가졌다가 고개를 숙였다. 날짜를 따져 봐도 그렇고, 좀 전부터 살금살금 배를 뜯는 고통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꿈속에 나타난 재영은 운명대로 흘러가는 것뿐이라 했지만 어제의 일로 그녀가 임신하게 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니 피눈물을 흘리던 그 아이도 다시 볼 수 없으리라.
그건…….
아마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강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못하는 왕세자비는 여전히 쾌활하게 말했다.
“정말 정식으로 초대할 테니 다음에 꼭 보기에요?”
“네, 저도 다시 뵐 날을 기다리겠사옵니다.”
왕세자비를 보낸 강희는 집으로 갈 채비를 했다. 그녀는 집에 가기 전 채운과 만운에게 인사를 하고 가야 할지, 만약 인사를 하고 가게 된다면 그전에 채운의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건 그의 후회하는 얼굴만은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성 부인, 윤 부장님이 오고 계십니다.”
‘윤 부장?’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잠시 생각하던 강희는 그것이 만운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강희에게 만운이 곧 올 거라 고한 시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간의 소란과 함께 열린 문 사이로 만운이 달려 들어왔다.
“형수, 나 좀 살려 주소!”
시녀는 만운이 강희에게 매달려 하소연하는 걸 보며 다시 무언가 말할까 말까 입을 벙긋하다 방글방글 웃음만 짓고 방을 나갔다.
곧이어 둔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채운이 안으로 들어왔다. 만운의 바로 뒤로 채운이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아이고, 형수, 나 죽소! 우리 형이 나를 죽일 작정인가 보오! 아침부터 나를 쫓아다니며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하는 통에 뼈가 노곤해질 지경이오.”
“도련님?”
“만운, 너 이리 나오지 못하겠느냐?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냐?”
“내 살고 싶어서 그러지 않소!”
“내가, 너를, 죽이기라도 한다더냐?”
입술도 거의 벌리지 않고 이를 갈듯 말하는 채운은 정말 단단히 화가 난 듯 보였다.
바들바들 떠는 만운의 행동이 과장되게 보이기도 했지만 채운이 칼을 든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보니 만운이 정말 숨을 곳을 찾게도 생겼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산만한 덩치로 가녀린 강희의 뒤에 숨어 웅크린 모습은 충분히 우스꽝스러웠다. 시녀들은 이 모양을 보지 않고도 웃고 있었던 걸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예상했던 모양이다.
“형수, 형수, 제발.”
“서방님?”
“강희……. 부인, 놀랐겠소. 별것 아니오. 그저 동생의 버릇을 고치려 하는 것뿐이니.”
“하지만 칼을 드시고 어찌…….”
“정신이 해이해져서 그런 탓이오. 대련을 통해 무예로 다지는 것이 녀석의 못난 버릇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오.”
왜 이런 변명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채운은 치솟는 화를 최대한 억누르고 강희에게 답해 주었다.
다시 눈을 뜨고 밝은 햇빛 아래 그녀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이른 아침부터 여태 만운을 두드리는 대련을 계속해도 어젯밤 자신의 열기를 받아 주던 강희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만은 확실했다.
“옆으로 물러서시오. 내 녀석을 얼른 치워 주겠소.”
“아, 안 돼요! 그럼 저 정말 죽어요!”
만운은 강희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바닥을 구를 태세였고, 채운은 그런 만운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강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 안 됩니다!”
“어?”
“네?”
강희의 외침에 두 형제 다 놀라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련님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칼은 아닙니다! 차라리……. 그래요, 차라리 종아리를 치십시오!”
강희의 말에 놀란 건 형제 둘 다였다. 채운도 그랬지만 종아리를 치라는 형수의 말에 만운의 입은 딱 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둘보다 순간 저가 무슨 말을 했나 싶은 강희가 더 놀라고 말았다. 만운이 말한 대련을 빙자한 구타라는 말에 꿈속의 그 아이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채운의 앞을 막아섰던 것이다.
“소, 송구합니다, 서방님.”
“아, 아니오, 부인. 내 여태 그런 방법을 몰라서…….”
“형수우!”
만운은 저의 편이 되어 막아서 주던 형수가 차라리 종아리를 치라며 물러나자 곧 울상이 되었다.
“너무하오, 형수.”
만운이 벌떡 일어나더니 대련보다 더 무서운 것을 권한 강희를 원망스레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문밖에선 여느 날처럼 무언가 잘못하고 대련을 하자는 형을 피해 뛰는 만운을 보고 시녀들이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방 안에선 울상으로 뛰쳐나온 척했던 만운은 그곳에서 한참 멀리 벗어나자 씨익 웃었다.
아침 내내 정말 삭신이 노곤할 정도로 두드려 맞긴 했지만 일을 벌이며 그만한 각오가 없었을까. 아무튼 당장 집으로 보내야 하는 형수에게 차마 가 보지 못하고 또 칼을 드는 형을 피해 형수에게 도망친 건 잘한 일 같았다.
“크크크, 아직도 서로 눈도 못 맞추고 있네. 내 둘이 저럴 줄 알았지. 어떻게 밤을 보내도 저 모양이냐?”
만운은 희색이 만연한 채 형과 형수가 있는 방향을 향해 히죽 웃었다.
“하지만 이 똑똑한 내가 도와주는데 둘이 무슨 문제가 있든 풀어야 할 거야. 내 이리 도와주는데……. 으으, 형수, 이런 식으로 갚는단 말이오! 종아리를 치라니! 내 이래 봬도 천 인人의 병사를 호령하는 천부장이란 말이오!”
멀쩡히 웃던 만운의 표정이 아까의 울상으로 도로 변하고 말았다. 형수가 형에게 권한 형벌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말이다.
허나 하늘을 향해 형수에 대한 원망을 토로하는 만운에게 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오늘 이후 형이 자신을 혼낼 일에 대련 대신 회초리를 선택할 가능성이 생긴 마당에 슬프게 종아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형수를 집에 데려다 주라는 형의 명을 받을 때까지 맞지도 않은 종아리를 애달프게 주무르고 있었다.
“…….”
“…….”
두 사람만 남은 방에는 어색한 침묵이 짧게 흘렀다.
“부인, 몸은 어떻소? 저, 내가 어젯밤 너무…….”
“서방님, 저는 괜찮습니다. 서방님이야말로 괜찮으신지요?”
“나…… 야 당연히 괜찮소.”
강희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채운은 무안해지고 말았다. 만운이 그에게 먹인 약이 단순히 두 사람의 첫날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만운이 꾸민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니, 그녀에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부인.”
“서방님.”
동시에 말한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한 채로 서 있었다. 강희가 먼저 그에게 말했다.
“서방님은 이제 혼자 몸이 아니십니다. 항상 보중하소서.”
‘혼자 몸이 아니라…….’
저 말은 지어미가 지아비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라의 영웅인 윤채운 장군을 걱정해 하는 말이었다. 그 정도는 이제 채운도 알 수 있었다.
채운은 기대와는 다른 말을 하는 강희에게 묻고 싶었다. 남들이 아닌 바로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냐고.
허나 그녀에게 직접 그런 질문은 하지 못했다. 날아오는 화살도 쳐 낼 강단이 있는 그이지만 강희의 마음을 확인하는 일만은 계속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어젯밤 강희를 안으며 그녀를 볼 때마다 혼란스러움이라 가정하던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은 이상, 채운은 자신을 속이는 일은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이 강희도 같은 거라면, 만일 그녀가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거라면…….’
속으로만 묻기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질문을 하기엔 죄를 물을 수도 없었던 오래된 원한이 그를 자꾸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꾸만 그녀를 받아들이고 싶은 자신의 마음에 만운에게 죄스러워졌다.
무엇보다 제 마음이 어떤 것이든 어젯밤 일이 생긴 다음에야 그녀의 생각도 확인해 봐야 했다.
약은 그녀에게 향하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게 했을 뿐이지 다른 마음을 조작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정신은 또렷했던 그는 어젯밤 그녀의 몸짓, 표정, 그녀가 했던 말 하나하나도 다 기억하고 있었다.
나가라 소리치던 그에게 강희가 했던 말.
“전 첫 번째 것을 지킬게요. 그러니 당신도 저의 부탁을 들어주셔야죠.”
처음 막사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귀족가 여인네의 오만한 자존심이라 해석했었다.
헌데 지금 생각하니 앞에 한 말도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그녀가 말한 첫 번째 것이란……. 강희는 처음의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 것일까?
“당신과 나, 우리 둘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소.”
올 것이 온 것이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은 강희는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지고 있었다.
“어제의 일은…….”
그때 누군가 달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방 앞에 한 병사가 무릎을 꿇으며 채운을 급히 불렀다.
“장군님, 세자 저하께서 급하게 부르십니다! 마천의 남부 도사에게서 급한 전령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알았다. 곧 가마.”
궁에서 저리 뛸 정도라니 큰일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강희에게 할 말은 아쉽지만 미룰 수밖에 없었다.
“부인은 집에 가시는 게 낫겠소. 집에는 혼자 가지 말고 반드시 만운과 함께 가시오. 오늘 밤 얘기합시다.”
“네, 서방님.”
강희도 채운이 나가자 채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남부 도사에게서 온 전령.’
강희는 방금 뛰어온 병사가 말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까 왕세자비와 함께 있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정말 그 일이 당장 닥치고 말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모든 게 사실이었던 것이다.
강희는 그 꿈이 단순한 꿈으로 치부할 것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현실로 다가오자 무섭고 당황스러워졌다.
우선 이 길로 어서 아버지를 만나 전에 부탁했던 그것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필요한 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그리고 입가에 뱅뱅 맴도는 해적 부두목의 별명도 빨리 기억해 내야 했다. 놈이 바로 채운을 습격한 자였다. 허니 그를 조심하라 채운에게 미리 경고를 해야 한다. 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한지 기억을 더 샅샅이 살피고 더듬어 봐야 했다.
채운은 자신에게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강희는 그가 오늘부터 집으로 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원정을 결정하고도 그가 남부로 떠나는 건 수일이 걸릴 테지만 총책임자가 될 채운이 집에 들를 시간 같은 건 없을 것이다.
만운도 지금 함께 집으로 보낸다지만 어서 궁으로 복귀해야 했다.
그러니 물건을 찾고, 습격자의 별명도 빨리 떠올려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궁에서 왕세자비가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강희는 마부에게 빨리 달리라 계속 재촉했다. 그러자 만운이 의아한 듯 그녀에게 물었다.
“형수, 왜 이렇게 서두르시오?”
“도련님은 다시 빨리 궁으로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 급하지 않습니다, 형수. 저 집에서 밥을 먹고 천천히 갈 생각인데요?”
“네, 그렇게 하시려면 서둘러야지요.”
“하하. 네에, 네, 저 맛있는 거 많이 해 주시려는 거죠?”
“네, 도련님.”
만운의 너스레에 강희가 그제야 방긋 웃음을 보여 주었다.
형과 형수가 똑같이 답답하니 이 지경에 이른 것이긴 했지만, 만운은 일단 일을 치른 다음에야 두 사람이 전처럼 내외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형이 누군가.
바로 일신의 무예로 단신으로 해적들의 소굴에 들어가 두목을 해치우고 살아 돌아온 사람이다.
그런 형이 그 약에 못 이겨 형수를 취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만일 형수가 절대로 싫었다면 형은 제 몸에서 피를 봐서라도 결코 형수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에 본 형은 혼자 힘으로 약기운을 견뎌 낸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 그가 의관醫官까지 동원해 은밀히 구한 약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낯선 궁에 와서 늦잠을 자는 형수라니…….
첫날밤에 너무 과했던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너무 예민한 두 사람이라 첫날밤이 어땠느냐 놀릴 생각도 못한 것이다. 얼굴만 내밀었다 하면 죽일 듯이 칼을 드는 형에겐 놀리기는커녕 도망가기 바빴고, 형수는 이상하게 초조해 보이기까지 하니,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다.
‘히히.’
그래도 만운은 형수의 목덜미 쪽 옷깃에 덜 가려진 흔적을 보고는 히죽 웃었다. 아침 내내 있었던 대련에 쑤신 몸을 하고서도 제가 한 일이 무척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저러고도 아닌 척하기는.’
생각할수록 자기가 무척 기특한 일을 한 것 같았다. 형수의 과한 소문이야 들어 알지만 지금의 형수만 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만운은 강희가 아직도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모든 게 다 잘 풀릴 것이다.
* * *
강희가 서두르는 기색이었던 것이 그를 보내고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이 많아 마음이 급했던 거라는 걸 알지 못했던 만운은 식사를 마치고 곧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새로운 해군 기지로 떠오르고 있는 마천에서 올라온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형이 목숨 걸고 한 일이 원상태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시 해적 세력이 와해되었을 때 그토록 완전한 소탕을 하자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제 잇속만 차리는 권신들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닌가. 그나마 세자 저하의 강력한 주장에 나라의 최남단에 있는 마천을 해군 기지로 성장시키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게 권신이란 놈들의 머리통들을 열어 생각이란 걸 쑤셔 넣어 놔야 한다니까! 당장 육지에 올라 침략을 하지 않는다고 그놈들을 또 그냥 놔두자고 한 놈들 아니오! 그런 식으로 해적들을 수수방관하는 저 대신들의 머리통들을 다 으깨 버려야 하오! 백성들이 노략질당하는 건 당하지 않는 거란 말인가. 제 몸의 살 한 점 내주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지 봐야 하오!”
“지금 네가 분노한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 어찌 되겠느냐? 방금 즉시 중앙궁으로 소집하라는 어명이 계셨다. 놈들이 일부러 우리 려국에 오는 상선들만 습격하여 터는 모습이 예전의 뱃길을 고립시키며 하던 짓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아. 벌써 서서국瑞西國 스위스과 석란국錫蘭國 스리랑카, 덕국德國 독일의 상선들이 당했다. 이는 놈들이 또 세력을 규합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너도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거라.”
“네, 형님.”
이를 가는 만운을 남긴 채 채운은 왕세자와 함께 중앙궁으로 들었다.
그날 국정에서는 빠른 시일 내로 해적 토벌을 위한 원정을 떠나기로 결정되었고, 웬일로 최사립 대감 측도 별 이견을 내지 않아 한 번에 가결되었다. 감히 반박하기엔 여론도 만만치 않았고,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왕의 진노가 엄청났던 것이다.
제 재산과 사병을 조금이라도 축내는 것을 꺼리는 최사립 대감도 이번 일엔 군말 없이 해적 토벌에 앞장서야 했다. 그만큼 해적 세력의 재결집은 나라의 국운을 걸 만큼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채운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만운에게 그날 회의의 결과를 알려 줬다.
“세자 저하도 출전하시기로 했다.”
“형님, 그럴 순 없소! 저하가 그런 전장에 가시다니요!”
“가흔 왕자도 가기 때문에 저하께서도 가셔야 한다. 그리고 우리 용호군 대부분이 출전하기 때문에 이런 때 도성에 남아 계시기보다 같이 떠나시는 게 나을지도 몰라.”
“빌어먹을 놈들, 머리를 썼군.”
“그래, 일은 저들이 키워 놓고, 이 한 번의 출전으로 민심을 챙기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민심이라는 것이 보여 주는 식의 출전 한 번으로 어디 쉬이 돌아선다더냐. 아무튼 단단히 채비하고 서둘러라. 수일 내로 출발해야 한다.”
“네, 형님.”
* * *
그 시각.
강희는 우선 아버지께 달려가 만운을 위해 특별히 주문하여 만들어 두었던 외짝 철장갑을 찾아왔다. 그것은 그녀가 만운을 실제로 처음 만난 날 꿈에서 본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다른 걸 보고 그때부터 준비한 것이었다.
강희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소지품 깊숙이 숨겨 두었던 기록을 다시 뒤졌다.
하지만 역시나 지금 원정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꿈속의 그녀에게 빈약한 기억을 가졌다며 원망할 만큼 기록 중에는 이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기록의 마지막에는 그녀가 죽기 직전 또 다른 반역에 관한 내용이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다만 자세한 내용도 아니고, 지금은 별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 기록은 이제 쓸모없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길석이 달려와 궁에서 벌어진 정황을 알리고,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리고 혼인식이 며칠 남지 않아 어제도 혼례복을 꺼내 보던 수란과 눈물의 이별을 했다.
꼭 무사히 살아 돌아와야 한다며 길석을 붙잡고 우는 수란을 보던 강희는 꿈속에서 한 번도 길석을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맙소사! 강희야, 강희야,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니.’
전에 수란과 길석이 혼인한다고 할 때 기억나지 않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강희는 길석의 부재를 깨닫자마자 다행히도 그가 당했던 것이 무엇인지 금방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이 너무 안타까웠기에 식솔들이 여러 번 길석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 것이다. 그는 전투 중에 등 뒤에서 날아드는 화살에 심장이 꿰뚫려 전사했다고 들었다.
잘 모르지만 만일 길석이 전사하는 이유가 그것일 뿐이라면 허술한 장비 때문일 것이니, 살릴 방법이 있었다. 이번 원정이 많은 인명의 손실을 가져오는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채운의 주위 사람만은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강희는 미래가 바뀌지 않는 한 채운이 무사히 돌아올 걸 알면서도 걱정되고 두려운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 동동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채운뿐 아니라 천부장의 직위를 가진 만운도 원정을 위한 준비에 감히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강희는 원정 마지막 날까지 두 사람을 보지 못한 채 길석이 오가며 간간이 전하는 소식만 받을 수 있었다.
* * *
길석과 수란은 그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혼례식을 치렀다.
예정된 날에 하지 못하고, 급하게 당겨 겨우 치른 혼례식이었지만 원정 준비를 하느라 몸을 빼기 힘든 길석을 위해 채운이 배려해 준 덕분에 무사히 혼례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장 전쟁을 앞둔 터라 혼례식은 다른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래도 수란과 길석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드디어 대례복을 입고 나타난 신부의 모습을 본 하객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게 어떻게 된 일이래? 신부 옷 좀 봐!”
“그러게. 하녀가 어떻게 저렇게 고운 옷을 장만해 입었지?”
수란이 입은 옷은 일반 평민이 입기엔 확실히 과분한 옷이었다. 여성댁과 애심이 급한 혼례에 다른 혼수는 모두 다 간소화하고 대신 신부를 꾸미기로 합의를 보고 아주 작심하고 꾸민 것이니 오죽하겠는가.
강희의 엄금에 사연을 아는 집안사람들은 이것이 누구 덕분인지 말하고 싶은 걸 입술을 깨물며 참아야 했다. 그래서 애심의 입술은 바로 이전 마님의 혼례식 때와는 정반대의 이유로 수난을 당했다.
하지만 하객 중 그 옷의 출처를 알아보는 이가 몇 명 있었다. 사실 하녀인 수란이 입을 만한 수준의 옷이 아니었기에 짐작을 하기가 쉬웠다.
“세상에나, 저거 혹시 이 집 마님이 입었던 바로 그?”
“그래, 맞아.”
“뭐? 그럼 그 성 부인이 정말 저 옷을 빌려 줬단 말이야!”
“그럼 빌려 줬으니 입었겠지, 아니면 훔쳐 입었겠어?”
“어, 그건 그렇겠지만…….”
강희가 수란에게 옷을 빌려 줬다는 사실이 잠시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도느라 식장이 술렁거렸다. 그러는 새 혼인식은 끝나고, 신랑, 신부가 하객의 인사를 받을 차례가 왔다.
하지만 길석은 하객들의 덕담을 들을 새도 없이 다시 궁으로 복귀해야 했다.
그래서 이 혼인식의 분위기가 다른 때와 달랐던 것이다. 경사스런 축복의 장이며, 이별의 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길석의 사정 때문에 하루 종일 즐겨야 할 잔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수란의 눈물로 침울하게 끝났다. 허나 그녀와는 별개로 하객들에겐 잔치 음식이 제공됐고, 그들은 수란에게 덕담을 해 주는 대신 오늘의 가장 놀랄 만한 일을 주제로 삼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 성 부인이 하녀의 혼례를 위해 옷을 빌려 줬다네!”
“난 다른 옷 한 벌도 더 빌려 준다고 들었는걸?”
“마님의 대례복은 이 집 하녀들이 혼인할 때 입고, 인근에서 혼인하는 처자에게도 다시 빌려 준다고도 들었네.”
“뭐? 그게 정말이야?”
“그래, 집사 어른께서 이장 어른을 만나 하는 얘기를 내 이 귀로 똑똑히 들었네.”
“허, 세상에나!”
“그래, 정말 ‘세상에나’지! 그래도 좋은 세상에나가 아닌가?”
“어, 그건 맞으이.”
대례복을 빌려 주려는 강희의 의도는 생각대로 되고 있었다.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혼례식 날에 신부가 빛나는 일은 모든 사람들이 무척 열렬하게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강희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면 평판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동안 새 안주인의 자자했던 악명 때문에 두려워하던 인근 소작인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며 그녀를 칭송하는 말들이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엔 실제로 자신들 중 누군가가 그 대례복을 입고 혼사를 치르면서 적어도 이들 사이에선 강희의 악평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건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고, 칭송을 받을 강희가 여기 없을 때의 일이었다.
* * *
대군을 위한 원정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떠날 날이 되었다. 남해의 급보를 받은 후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도성의 많은 인파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성문으로 몰렸다. 강희도 이 집사와 애심, 하인 재웅을 대동하고 준비한 물건을 전하고 무사히 돌아오란 인사를 하기 위해 배웅 길에 나섰다.
재웅이 길석을 먼저 찾아내고, 곧 만운이 강희에게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형수. 형님은 지금 만나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가시는 모습이나마 멀리서 배웅해 드리려고 온 것뿐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무사히 다녀올게요! 그리고 형님도 제가 반드시 무사히 지켜 드리겠습니다.”
씩 웃으며 제 강건함을 자랑하는 만운을 보며 강희는 걱정에 목이 메었다. 행여 자신의 꿈이 맞지 않으면 어쩌나 자꾸 방정맞은 생각만 드는 것이다.
강희는 만운의 무사를 빌며 준비한 것을 내밀었다.
“그러셔야지요. 당연히 무사히 오셔야지요. 그러실 겁니다. 그러고 말고요. 그렇지만…… 여인네의 여린 걱정에 기우라 하셔도 좋으니 이걸 받아 주세요.”
“무언데 그러세요, 형수?”
“그냥 철장갑이에요. 도련님 손에 맞춰서 만든 거라서 다른 사람 주시면 맞지도 않으니 꼭 도련님이 쓰셔야 해요? 그리고 숲 속에서 말을 달릴 때 귀찮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끼어 주세요. 네?”
“엇!”
만운은 형수가 준 선물을 풀어 보고는 놀라 외쳤다.
예전에 한 번 진흙 반죽에 앞뒤로 손을 눌러 보라 하던 것이 무슨 장난인가 했더니, 이런 걸 준비하려던 것이었던가.
울컥 감명을 받은 만운이 그것을 받아 쥐었다. 왼손 외짝인 것은 칼을 쓰는 그를 위한 배려인 것 같았다. 당장 손에 끼었더니 꼭 맞는데다 다른 이가 일부러 길들여 놓은 듯 편하기까지 했다.
“네, 그러지요, 형수. 형수가 날 위해 준비한 건데 내 피부같이 아낄게요.”
“꼭이요, 도련님?”
“네, 그러지요.”
만운은 유별난 형수의 다짐에 그러마 재차 대답해 주었다.
그러다 강희는 그 해적 부두목의 별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만운이 철장갑을 낀 모습을 보자 머릿속을 뱅뱅 돌며 애를 태우던 그것이 드디어 생각난 것이다.
“그리고 도련님, 서방님께 텁석부리 짝귀, 그를 조심하라 일러 주세요!”
“네? 무슨 말씀이에요?”
“이것도 제 어리석은 노파심에 하는 소리라 생각하셔요……. 하지만 무시하지는 마시고 꼭 전해 주세요. 그리고 도련님, 그 철장갑도요. 아셨죠?”
“알았소. 내 형수의 마음을 왜 모르겠소. 이건 정말 내 몸같이 끼고 다닐 테요. 텁석부리 짝귀? 알겠소, 형에게 꼭 전하겠소. 형수, 형수도 몸조심하시오!”
“그럼요. 전 여기 이렇게 안전하게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서방님과 도련님이…….”
강희는 더 이상 목이 메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참, 형수도. 무조건 조심하고, 안전하게 돌아오겠소. 아셨죠?”
“네……. 네, 도련님.”
말을 하면서도 강희의 눈은 멀리 채운이 있는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었다. 눈이 절로 그의 모습을 좇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의 근처로 그녀가 보였다.
한재영!
세상에, 왜 그녀가 지금 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