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흐르는 마음
만운이 제가 집에 있느냐 마느냐는 놓고 내린 결심은, 그러나 다른 여건이 도와주지 않았다.
다음 날.
시찰을 나가던 왕세자를 습격한 자객이 있었던 것이다.
습격은 실패했고, 자객 세 명은 모두 그 자리에서 잡히거나 생포당했다.
그런데 자객 중 하나가 바로 만운과 교대한 호위 중 한 사람이었다. 자객 중 홀로 생포된 그는 가흔 왕자 측에 매수된 사람인 것이 확실했다.
그가 증거를 남기지 않고 자살하는 바람에 가흔 왕자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게 되었다.
“순간의 방심으로 이런 사태를 초래했으니 이는 저의 불찰입니다.”
사건을 정리한 후, 채운이 왕세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청했다.
“아니오, 윤 장군. 그대는 용호군을 통솔하는 장수이지, 호위 책임자가 아니지 않소? 그리고 만운에게 책임을 묻고 싶지도 않소.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열여덟이오. 그보다 경험 많고 출중한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린 장수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 위의 장수들이 뭐가 되겠소.”
“…….”
왕세자는 채운이 만운에게 책임을 물을 것에 대비해 미리 선을 그었다. 사실 왕세자의 말대로 이 일로 만운을 벌한다면 그 위의 장수들도 모두 처벌해야 했다.
만운이 왕세자의 곁을 지켰든 아니든 벌어졌을 사건이기도 했다. 저들이 누구를 매수할지, 그리고 왕세자를 최측근에서 지킬 만큼 신임을 얻은 이가 그렇게 배신할지 그것까지 미리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하필 만운이 없을 때 벌어진 일이라 채운으로선 더욱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신이 직접 저하의 곁을 보필하겠나이다.”
“그럼 용호군은 어쩌려고 그러시오. 내 가진 무력이 용호군이 다인데, 그걸 맡길 사람이 윤 장군, 그대밖에 더 있소? 첩자를 더 철저히 색출하고, 호위대는 내가 더 철저히 꾸릴 것이니, 경은 그런 생각일랑 마시오.”
채운은 왕세자의 말에 고개를 숙인 후 물러났다.
그러나 왕세자의 말대로 그냥 맡길 일은 아니었다. 이는 그가 강희와 혼인한 후 성도종 대감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왕세자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경계한 가흔 왕자 측의 수많은 도발 중 하나였다. 직접 자객을 보낸다 함은 이쪽의 커지고 있는 힘을 저지할 방편을 찾지 못해 대놓고 벌인 일이라 볼 수 있었다.
“만운아.”
“네.”
“넌 오늘부터 집으로 가서 네 형수의 옆을 지켜라. 호위한다는 인상은 주지 말고, 요령껏 잘 따라다니거라. 난 지금부터 집으로 들어가기 힘들 테니 적당히 임무가 있어 그런다고도 알려 주어라.”
채운의 명에 만운도 진지한 신색으로 답했다.
“네, 형님.”
형의 명령에 짚이는 바가 있었던 만운은 크게 흥분했다.
“혹시 놈들이 우리와 성도종 대감과의 밀착을 끊기 위해 형수를 해코지할 것 같아 그러오?”
채운은 동생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 네 형수를 잘 지켜라. 그들이 얼마나 무도하고 파렴치한 놈들인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힘없는 여인네라도 얼마든지 해칠 놈들이다.”
“그렇지요, 그러니 감히 왕세자비마마를!”
그렇다. 왕세자의 정비도 지난해 가흔 왕자 측의 술수에 암살을 당하고 만 것이다. 실제로는 가흔 왕자가 주도한 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최사립이 벌인 일이겠지만 어찌 됐든 원흉은 바로 그들이었다.
왕세자비는 어린 아들과 딸의 앞에서 피를 토하며 절명하고 말았다. 그때도 측근의 시녀를 매수한 가흔 왕자 측의 술수였지만 알면서도 증거가 없어 분만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성 대감과의 유대가 이루어지는 이때 강희가 혹시 변을 당한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그런 일을 꾸밀 수 있었다.
채운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선뜩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위협이 다른 이도 아닌 강희에게로 향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불같이 화가 일고 있었다.
“그럼, 가 보겠소. 걱정 마, 형. 내가 형의 일은 알아서 잘 설명할 테니, 형 몸이나 잘 건사하라고.”
“알았다.”
자칫 심각하고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띄우려 만운은 일부러 가볍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하지만 뒤에 남은 채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왕세자는 자신의 비를 깊이 사랑했기에 당시 엄청난 상실감을 겪었었다. 왕손과 궁주는 차비가 거둬서 다행이었지만 그 일로 한때 왕세자가 폐인이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걱정할 만큼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채운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 상실감이 무엇인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강희를 그런 식으로 잃을 수는 없었다. 강희가 그에게 있어 왕세자가 비마마를 사랑한 것처럼 극진히 사랑하여 자식까지 가진 부인이 아니어도 그런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한 침소에 들고 며칠이 지날 동안 강희는 꽤 오래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녀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녀도 그와 한 공간 안에서 누워 있는 시간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면에 그는 피 말리는 시간이, 새벽닭이 울 때까지 눈을 말똥거리는 시간이 더욱 길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밤중에 대나무 숲 사이를 서성거리다 들어온 것이 몇 번인지 몰랐다.
목욕탕을 새로 완공하고서 그곳을 가장 애용한 건 강희도 만운도 아닌, 바로 그였다.
그러나 목욕탕에도 그녀에게서 언제나 풍기는 은은한 난초향이 남아 있어 바로 침소에 들지 못하고 다시 칼을 들기가 몇 번인지 모른다. 그런 기분으로는 침소에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 그대로 침소에 들었다면…….’
떠오른 생각을 지우려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채운은 평소 목간통 같은 걸 쓸 일이 없었다. 우물에서 갓 길어 올린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그의 더운 땀방울을 식혀 주었다. 요즘은 특히나 자주, 수시로 찬물의 신세를 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방에 들면 잠든 강희가 다시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도 그는 모기장 속에서 새근거리며 잠든 그녀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아이 같은 천진함과 매혹적인 여인의 향기를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눈에 든 그런 모습에 그의 안에 잠자고 있던 사내가 울컥거리고 일어나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칼을 들고 밖으로 향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건 무심이 될 때까지 칼을 휘두르고 녹초가 된 그때뿐이었다.
‘그녀와 혼사를 치른 지가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었구나.’
시간은 간사하게도 제멋대로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녀와 헤어질 때까지 무한정 길게 느껴진 게 언제였다고, 지금은 어느새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름의 시작에 시작한 그녀와의 생활이 더위의 절정을 관통하는 동안 어찌나 빨리 지나는지 시간이 훌쩍 달아나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왕세자의 습격에서 시작된 상념이 어느새 강희에게로 이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흠칫하고 말았다. 충심을 다하여 모시는 주군의 안위에 대한 걱정 대신 떠올리는 것조차 꺼려야 할 여자에 대해 고심을 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걸 깨닫고도 무의식중에 하고 있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럴 줄은 몰랐다.
정략혼이야 딱히 마음에 둔 이가 없었으니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성강희라는 여자였다는 것은 치 떨리게 싫었었다. 성도종 대감이 지레 알아서 지참금을 더 내놓을 정도로 악명 높은 여자라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하필 혼사 상대가 그 성강희라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하지만 채운이 그녀와 혼인하지 않으면 성 대감은 그녀를 왕세자의 차비로라도 들이려 했다.
사실 성 대감은 차비였던 하 씨 부인이 정비가 된 후로 왕세자가 더는 차비를 들이지 않고 있었기에 애초에 그 자리를 노렸던 것이다.
물론 처음엔 성 대감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연을 잇지 않으면 성 대감은 가흔 왕자 측에 붙을 기색이었고, 만일 그렇게 되면 힘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채운은 원수와 다름없는 강희와의 혼사를 결정하며 언젠가 가질 수도 있었을 자신만의 가정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었다.
그런데 병영에 대뜸 찾아와 제안과 부탁이 있다는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슬픈 듯, 죄스러운 듯…….
그때 그녀가 건네던 인사가, 그때의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당시에는 그냥 지나쳤지만 그 말과 표정이 문득문득 떠올라 그의 마음을 계속 적시고 있었다. 겨우 그것 하나가 그의 오래도록 얼어붙어 있던 원한을 다독여 녹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진심은 무엇이며,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혼란은 그를 자꾸만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인연으로 얽히기 싫은 여자가 그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묶였는데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매일 빨라지고 있었다.
‘집이라…….’
이전까지 그에게 집이란 조금 모자라고 가난했지만 항상 어머니가 계시며 반겨 주던 그곳이었다. 추억 속의 그곳만이 진짜 집인 줄 알았다.
이 집을 하사받았을 때도 이곳은 그저 머무는 곳.
집이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엔 이 집에서 옛날 어머니가 계실 때 느꼈던 집 안의 공기가 다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런 감정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강희로 인해서 생긴 것이었다.
다만 옛날의 집과는 달리 모자란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소리 내어 잘 웃으시던 어머니의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까르르 웃던 누이의 종달새 소리 같던 웃음.
지금 이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면 옛날 그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집의 분위기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혹시 그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일까.
머리를 저으며 밀쳐 버리고자 했지만 상념은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강희는 웃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단 한 번 들었던 웃음소리는 몰래 엿들었던 것이었고, 그녀가 그의 앞에서 웃는 모습을 보기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도 최근엔 만운의 장난스런 너스레에 종종 미소를 짓곤 했지만 그것이 자신 때문이 아니어서 그런지 마음이 불편할 때도 종종 있었다.
요즘 들어 가끔씩은 만운의 활달한 성격이 부럽기도 했다.
새 적삼을 같이 갈아입던 날, 소매를 대보며 제 색시에게도 나중에 수를 놔 달라고 할 거라고 하더니, 당장 형수에게 떼를 쓴 건지 어느새 만운의 소매에도 은색 실로 ‘운’ 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걸 보고 채운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옷소매에 놓인 금빛 수를 한번 매만졌었다.
만운은 대놓고 형수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고, 강희는 만운의 말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이며 신경을 써 주었다.
저 애는 강희가 누군지 몰라 저렇지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만운이 영영 모르고 그녀에게 좋았던 기억만 갖길 바라게 된다.
만운에겐 절대 그녀에 대한 걸 알릴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강희가 가고 나면 그녀에게서 받았던 다정함을 잃는 것만 해도 만운으로서는 충분히 힘들지 모른다.
‘그러니 그녀와 헤어질 때를 대비해서라도…….’
순간 채운은 짜증이 솟구쳤다.
도대체 그 여자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이혼이란 불명예가 여인에게는 결코 쉬운 것도 아닌데, 그런 걸 턱하니 내놓다니. 도대체 제정신인가 말이다!
사실 그때는 자신도 그 이혼장을 냉큼 받아 들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녀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지금 하는 모든 것이 위선이 아니라면 그것도 정말 오롯이 그를 위한 제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조건처럼 따르는 부탁이란 말에 크게 성이 났었지만, 그것도 자신을 모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탁을 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후 한 번도 그를 모욕하고자 하는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 정말 그것이 그 여자의 수작이라면 진짜 대단한 계교야.’
채운은 이미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의무인 양 그 생각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런 부탁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성 대감도 그 큰 부를 갖고 있으면서도 첩을 들이거나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유하고 힘 있는 대부大夫들이 축첩을 하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공공연하게 내세울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때 강희는 자신이 당장 그러기라도 할 것처럼 왜 그런 황당하고 기분 나쁜 조건을 건 것일까. 어디서 무슨 이상한 소문을 들은 것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 제안이란 것만 하기에는 맹숭맹숭해서 그냥 덧붙인 것이었나?’
그것도 일견 타당한 이유 같긴 했지만 그래도 시원한 답은 아니었다. 어찌 생각해도 강희는 이도 저도 알 수가 없는 여자였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한 말에 다시 생각이 미쳤다.
제안, 제안이라 했었다.
그래서 이혼장이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이다. 때가 되어 그녀가 다시 작성하여 왕에게 내밀지 않는 한 누가 그걸 강요한다는 말인가.
당시 그녀의 말대로 해석하자면 이혼장은 그를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뜻이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가 부인에게 버림받은 남편이란 오명을 쓰게 만드는 것도 최선은 아니질 않은가.
길어진 생각의 끝은 이혼이라는 선택에서 멈춰 열심히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채운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너무 고민하지 말게. 저들의 이 정도 도발이야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나도 내 한 몸 지킬 여력은 있어.”
어느새 그가 서 있던 망루에 오른 왕세자가 채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채운은 차마 왕세자에게 아내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바로 옆에 큰일을 치를 뻔한 주군을 두고서 여자 생각에 빠져 있는 자신이라니, 차라리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만운은 집으로 보냈다지? 잘했네. 내 생각에도 지금 저들의 도발 이유가 내가 성 대감과 세를 합친 때문이야.”
채운의 심각한 얼굴을 바라보는 수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다음번에는 자네 부인이 표적이 될 수도 있음이야.”
“네…….”
이 충직한 사내가 어련히 더 잘 알고 있을까.
수는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기보다 자신이 먼저 찌푸린 얼굴을 펴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난 자네가 도성에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하네. 무슨 일이 생겨도 이렇게 당장 볼 수가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아직 혼례를 올린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신혼에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 내 자네 부인에게 체면이 서지 않으이.”
“저하, 그것이 어인 황감하신 말씀이십니까.”
“하하, 자네 같은 새신랑을 궁에만 묶어 두는 게 미안하여 그러하네.”
“저하의 안위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 말씀은 마소서.”
“그래, 알았네, 알았어.”
왕세자는 채운에게 농도 통하지 않는 꽉 막힌 사람이라며 가볍게 나무라는 척하고는 화제를 덮었다.
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악명 높은 성강희를 생각하며 농으로라도 신혼이 즐겁냐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채운이 자신 대신 성강희에게 코가 꿰인 것이나 마찬가지라 미안한 탓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채운이 만운을 보내 강희를 지키게 했어도 그것이 부인을 아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다.
또 만운도 오해했듯이 혼인 후 채운의 더욱 날이 선 기색은 신혼의 달콤함을 풍기는 새신랑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것 또한 수의 죄책감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제 서북 병영을 꾸미는 일도 다 마무리가 되어 가지? 이참에 나도 성 대감이 가진 자금의 위력을 제대로 맛보았네. 새로 진급한 부장들이 서북 병영을 책임지고, 네 천부장들이 궁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곳은 더욱 철벽 수비가 될 것이야.”
“네, 그렇습니다. 내일 네 천부장들의 입성과 함께 용호군의 재편성과 사열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서북 병영은 도성 밖 임시 병영을 꾸렸던 그곳이었다. 항상 임시 병영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그곳은 일대를 대대적으로 갈아엎고, 정식으로 건물을 짓고, 신병들의 훈련 병영으로 만들고 난 이후 정식으로 서북 병영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가히 봐줄 만할 것이야. 자네가 직접 지휘하는 사열식이라니. 놈들이 오금 저려 하는 모습이 기대되는군. 내 가장 앞에서 똑똑히 지켜보겠네.”
“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그동안 피땀 흘려 이룩한 위용을 자신들과 저들에게 알리는 자리였다. 백성들에게도 정당한 왕통과 강한 힘을 지닌 왕세자에 대한 더 깊은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열식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자객의 암습으로 그렇게 불씨가 하나 던져진 데 이어 곧이어 더 큰 불덩이가 던져지고 말았던 것이다. 안 그래도 건강이 불안했던 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왕세자는 사열식 도중 중앙궁으로 불려 가게 되었다.
* * *
누가 왕이 되건 아침에 일어나 농사를 짓고 길쌈을 하고 장사에 전념하는 백성들의 삶은 달라질 게 없었다. 그렇지만 서궁에선 현왕이 쓰러진 일로 자객 사건보다 더한 비상 체제에 돌입해 있었다.
이를 기회로 가흔 왕자의 외조부인 최사립 대감은 정국을 더욱 들쑤시고 있었다. 가흔 왕자의 모후인 여은 왕후의 입김도 워낙 강하여 멀쩡한 후계인 왕세자를 밀어내고 자신의 아들인 가흔 왕자를 보위에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자 승계 원칙의 정당한 후계 명분과 윤채운 장군을 최측근으로 둔 왕세자가 가진 민심을 갖지 못했다.
왕세자 수는 멀쩡한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수 없기도 하거니와 권력과 부에 남다른 욕심을 가진 최사립 가문에 더욱 강한 힘을 실어 줄 가흔에게 왕위를 양보할 수도 없었다. 지금도 힘겨운 일반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과 징병을 주장하는 이들이 왕의 최측근이 된다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송국과 연계하여 대륙에 대한 의존도를 높인 것도 그들이었다.
채운이 홀로 해적 왕을 죽이기에 앞서 해군의 힘을 길러 해적들을 처치하고자 했다면 못할 일도 아니었던 것을 득세한 그들이 번번이 방해하는 바람에 오늘날 형편없는 해군력을 갖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보위를 갖기 위해 호시탐탐 왕세자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었다. 저들은 반정의 명분을 세울 수 없어 드러내놓고 일을 벌이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허나 이대로 넋 놓고 앉아서 그들에게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송국과의 유착을 끊기 위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왕이 되어야 했다.
왕이 되어 저들의 세력을 몰아내고, 병사의 질을 더욱 높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왜 해적들의 방해 같은 것을 받지 않고, 또한 송국에 의존하지 않도록 나라를 정비할 것이다.
이 나라는 다시 이전의 광영을 되찾게 될 것이다.
더위가 하늘을 찌를 때 쓰러진 왕은 다행히 국상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람들의 걱정을 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이 쓰러진 이유가 어쩌면 더위 때문이었는지 아침저녁으로 꽤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요즘 불편하지 않게 거동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갓 쉰을 넘긴 왕이 자주 자리에 눕는 것은 나라 안에 많은 우려와 불길한 징조를 낳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왕은 대놓고 첫째 아들을 밀어 주지 못하는 것을 못내 미안해 했다. 아마 가흔 왕자 측의 거센 반발만 아니었으면 양위를 하고 요양하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련만 그럴 만한 사정이 못 되기에 억지로 보위를 붙잡고 있는 형편이었다.
양위냐, 승하에 따른 승계냐.
어느 쪽도 피 튀기는 접전이 벌어질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 된 것이다.
미처 다 보지 못하고 뛰쳐나간 자신 때문에 다시 한 번 이루어진 사열식에서 수는 채운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이 읊조렸다.
“나는 반드시 왕이 될 것이다.”
도열한 병사들이 ‘충!’하며 외치는 구령에 맞춰 채운도 함께 구호를 외치며 부복한 채 충언을 올렸다.
“네, 저하께서는 왕이 되실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뉘가 그의 말을 감히 오만하다 말하겠는가. 충직한 수하이자 벗인 채운을 바라보는 수의 눈에는 든든한 신뢰가 가득했다.
“자네를 만난 것이 나의 가장 큰 복일세.”
“왕이 될 자질과 인격을 갖춘 이는 저하뿐입니다. 당신은 이미 저의 왕이십니다.”
“고맙네.”
“신하 된 자로서 당연한 도리에 그런 일로 제게 고맙다 하지 마시옵소서. 다만 왕위에 오르신 후 제게 한 잔의 술을 하사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하하하, 그래, 고맙다는 말은 이르지. 내 술 한 잔만 내리겠는가? 백 동이라도 하사하지.”
“네, 그래 주소서.”
“하하하하, 내 자네가 그리 욕심이 많은 줄은 몰랐는걸?”
“송구하옵니다.”
“자네에게 술 백 동이, 천 동이야 못 주겠느냐만 자네 부인이 좋아할는지는 모르겠군.”
“왕께서 하사하시는 일에 아내도 감읍할 것이옵니다.”
자신의 농에 정색하고 대답하는 채운의 말에 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만운이라면 세 번쯤 받아쳤을 농에 도무지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운은 딱딱한 제 형을 종종 놀리며 까불곤 하는 걸 보면 그것이 과연 형제인가 싶었다.
그 결과가 비록 대련으로 인한 신음 소리로 이어진다 해도.
그런데 수는 요즘 저 대신 팔려 간 채운에게 계속 미안해 해야 하는지 의심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이었다.
채운이 만운의 편으로 소문의 그 성강희가 보냈다고 보기엔 좀 의심스러운 옷가지와 음식들을 받은 일이 있었다. 헌데 그때마다 표정에 별 변화가 없던 그가 조용히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신기했던 것이다.
물론 채운의 그런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미리 은밀히 형을 한번 살펴보라는 만운의 언질에 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만운이 고운 은사로 ‘운’ 자가 새겨진 각반과 토시, 두건을 두르고서 채운의 코앞에 드밀며 자랑을 늘어놓다가 생긴 일을 보고는 그 의심이 더 깊어졌다.
“이것도 형수가 해 줬고, 이것도 형수가 해 준 거다! 곱지? 그냥 곱기만 해? 튼튼하기도 한 것이 그냥 장식이 아니야. 어때, 정말 좋지?”
“…….”
만운의 끝없는 자랑에 채운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지고 있었다. 본래 형에게 잘 까부는 만운이라 그는 제 장난이 도를 넘는지 아닌지 아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헌데 오늘은 장난이 심한 것도 아닌데, 채운의 한계에 아슬아슬하게 다다른 것 같았다.
“앗, 형, 설마 형수가 내 것만 해 줬을까 봐? 형 것도 있어, 여기!”
만운은 본래 형에게 먼저 줘야 했을 그것을 내놓고는 도망치듯 달려가며 소리쳤다.
“형수가 오늘 친정에 가기로 해서 빨리 가 봐야 해. 갈게, 형!”
“그래, 경계에 주의하고, 매사에 잘 살펴라.”
“네, 장군님!”
언제나처럼 만운이 채운에게 붙이는 장군이란 호칭은 꼭 친한 이들 사이의 별명처럼 친근하게만 들렸다.
결과만 보면 그냥 평상시와 같아 보였다.
헌데 수가 느끼기에 크게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가 보기에 만일 만운이 자랑만 늘어놓고 내놓은 것이 없었다면 또 한바탕 형제의 살벌한 칼춤을 봤을 거란 예감이 강하게, 아주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채운도 자신의 것을 받았기에 수위를 넘나들고 있던 만운의 장난을 그냥 곱게 보내 준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설마 다른 이도 아닌 윤채운이 그렇게 유치할 리가…….’
그러나 수의 의심은 곧 사실로 밝혀졌다. 그날 저녁 채운의 방에 불쑥 찾아갔다가 만운이 놓고 간 보따리에서 꺼낸 걸로 보이는 두건을 쓰다듬는 채운을 봤던 것이다.
‘설마가 아니었던가! 채운의 부인에 대한 짐작도 다시 해야겠군.’
요즘 채운의 얼굴은 까칠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척에 집을 두고도 한 달 넘게 집에 들어가지 못해서 그럴 거란 짐작이 가장 타당한 답이었지만 그것도 별로 옳은 답 같지는 않았다. 장군의 신분임에도 병영의 신병들과 함께 구르고 거친 벌판에서 하늘의 별을 보고 자는 일도 허다하게 많았던 사람이 겨우 이 정도로 까칠한 얼굴을 보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는 만운 덕분에 이런저런 정황을 충분히 살피고서 채운이 저런 얼굴이 된 원인이 지금 물밑으로 벌어지는 가흔 왕자 측과의 암투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부인의 영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이 치르고 있는 전쟁은 야상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도성을 둘러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암투였다. 직접 대군이 맞부딪혀 칼을 대는 건 아니어도 어둠 속에서 치열하게 흘린 피가 적지 않았다. 왜의 해적이 무너진 상황에 이때를 틈타 완전히 정벌하지 못하는 것도, 송국의 견제와 압박에 정식으로 항의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내분 때문이었다.
수가 그들과의 분쟁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아직은 안간힘을 쓰며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아바마마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있었지만 자국의 내정에 야금야금 파고드는 송국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만일 아바마마가 당장 승하하기라도 한다면 가흔 측이 어떤 식으로 나오게 될지 모를 일이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반란이라도 일으킬 수도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명분과 민심을 얻지 못한 그들은 쉽사리 그런 일을 벌이지 못할 것이다. 단, 그들의 결집된 세력이 너무 강하여 쉽게 꺾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뱃길이 열린 마당에 내분에나 신경을 쓰고 있자니 분통 터질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쪽도 이제 성도종 대감의 합류로 상당한 힘이 실리게 되었다.
성 대감은 그만한 부를 가진 이로서 여태 가흔 측과 손을 잡지 않은 드문 세력이었다. 그 이면에 숨은 이유가 있긴 한 것 같지만 성 대감이 그곳과 손을 잡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 때문에 수로선 성 대감이 내민 손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헌데 그렇게 정략혼을 한 것이라 해도 부부간에 정이 있는 듯하니, 이 아니 기쁜 일인가.
채운은 결코 자신의 안사람 일을 어디 가서 말할 이도 아니고, 그를 통해서는 전혀 내막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만운이 오가며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채운의 부인은 소문과는 다른 여인일지도 몰랐다. 패악을 떨기는커녕 다려 보낸 옷가지와 정갈하게 담긴 음식을 보면 절로 손이 갈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가 오늘 궁에 들여온 것 또한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이 참으로 갸륵해 보였다. 강희가 만운을 통해 보낸 것은 훈련받는 병사들을 위한 주전부리였다.
과연 부잣집 여식이라 그런지 보낸 양이 배포도 커서 거의 시전의 가게 몇을 통째로 털어 보낸 듯싶었다. 덕분에 훈련받던 병사들은 모두 말린 간식들을 한 주머니씩 챙겨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병사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만운이 다가왔을 때였다. 형수의 심부름을 마친 만운이 매우 난처한 얼굴로 그녀의 전언을 전했다.
“저하, 이건 형수님이 용돈이 남은 게 있어서 성 대감 상단 가게의 물건들을 한꺼번에 싸게 산 것이니 부담을 갖지 않으셨으면 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저하께 바친 것이니, 송구한 말씀이오나 형수님이나 형수님 아버님의 이름은 언급하지 말아 주셨으면 했습니다. 정말 그것만은 간곡히 바란다고요. 그저 겸양이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병사들은 성강희가 주는 걸 반기지 않을 이가 더 많다고도 하셨습니다.”
전언에 ‘절대’, ‘제발’이라는 말은 들어 있지 않았지만 강희가 그것이 저의 진심임을 완곡하게 표현했다는 것을 만운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강희가 궁에 보낸 것은 흔한 주전부리 종류로 만운의 도움을 받아서 산 것들이었다. 실제로 병사들과 같이 구르고 생활하는 만운이라 그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물건을 고르는 데는 적임자였던 것이다.
만운은 그 많은 것을 사면서 쓴 돈을 형수가 용돈으로 충당하는 것에 부러움과 감탄을 표했다.
그러자 형수가 물건을 다 사고도 남은 용돈을 모두 자신에게 주겠다고 내밀었다. 만운은 그 말에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느라 한참 실랑이를 했다. 대신 형수가 몇 번이나 권하는 새 장화를 못 이기는 척 산 것까지는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물건을 전달하는 과정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서인지 전언을 전하는 만운의 얼굴엔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수는 강희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하며 그러겠노라 했지만 채운은 그녀의 말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가 보였던 것이다.
그는 이제 강희가 정말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제 악명을 가려 줄 일들이 알려지는 걸 꺼리는 것은 개과천선해서가 아니라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제 악평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강희는 혼인한 후 필요한 일 이외에는 거의 두문불출했다. 그것은 자신의 달라진 모습에 대한 소문을 최대한 억제하는 효과를 가지기도 했다. 그녀가 아무리 그와 만운에게 잘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도 결국엔 헤어짐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형, 형수가 정말이지 달라진 걸 나중엔 사람들도 다 알 거야, 아하하하.”
만운은 그렇게 말하다 왕세자의 앞인 걸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채운은 왕세자의 앞이 아니어도 그 말에 동의해 줄 수 없었다.
‘네 형수가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해 줘야 하는 거냐? 아니면…….’
강희에 대한 생각을 하자마자 채운에겐 예의 그 혼란스러움이 찾아왔다. 그녀가 알 수 없는 여자인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채운이 그녀를 보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볼 수 없는 지금도 혼란의 깊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강희를 보지 못한 시간이 길어지자 묘한 갈증까지 일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강희는 혼인한 후 두 달 가까이 되어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왕세자의 암습 사건 이후 채운이 궁으로 가서 아예 집으로 오지 못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채운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버지를 뵙고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려던 계획대로가 아니라 용건만 전하듯 사업적인 얘기를 주로 하게 되었다.
“아버지!”
“오, 강희야!”
부녀는 한집에 살 때보다 더욱 정겨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강희의 도착이 알려지자 대문 앞까지 달려 나온 성 대감이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가 아버지의 손을 잡는 강희나 옆에서 보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딸이 손을 잡아 줄 줄 몰랐던 성 대감은 잠시 놀랐지만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강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 아버지, 만운 도련님이 함께 오셨어요.”
“응? 최연소 천부장 직위를 달고 있는 어린 장수 말이더냐? 아, 아니지. 우리 사돈총각이 같이 오셨다고?”
“모처럼 휴가를 받으셨다는데, 굳이 저를 지켜 주시겠다며 동행해 주셨어요.”
“그러하느냐?”
성도종 대감도 최근 왕세자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시기에 만운 같은 장수에게 단순히 휴가를 줄 리가 없었다. 이는 일부러 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사위와 왕세자의 배려였다.
성 대감은 강희가 만운이 저를 지켜 준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런 사정까지 아는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딸을 굳이 그런 대화로 놀라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서 오셔요, 아씨.”
“어서 오십시오.”
여성댁과 남지상 집사가 아버지의 뒤에서 그녀를 맞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들은 부녀가 맞잡았던 손을 이채롭게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런 광경은 꿈속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지금 웃고 있는 그들은 그녀가 친정에 쳐들어올 때마다 어떻게든 그녀와 최대한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까 궁리했던 이들이었다. 그만큼 꿈속의 그녀는 떼도 심했고, 요구도 많았고, 매우 자주 들락거리기도 했다.
“여성댁, 남 집사도 오랜만이야. 반가워.”
“아씨. 아니지, 마님, 그새 더 고와지신 것 같습니다.”
“아이 참, 여성댁도……. 그보다 우리 도련님을 대접할 준비를 해 줘. 내가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여기저기 안내도 해 드리고.”
“네에, 만운 부장님의 안내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고마워, 남 집사.”
수란의 소식이 궁금했던 매영이 고개를 내밀고 강희의 뒤쪽에서 애심을 찾았지만 당연히 항상 주인을 따라다녀야 할 애심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매영의 기색을 알아챈 강희가 미리 애심에 대한 소식을 전해 줬다.
“매영아, 도련님과 난 금방 가야 해서 애심이를 데려오지 않았단다. 나중에 내가 수란이나 애심이를 따로 보내마. 그때 회포를 풀련?”
“정말요, 아씨?”
“매영아!”
그러려던 건 아니지만 강희의 말을 확인하려는 듯한 버릇없는 행동에 여성댁이 매영을 나무라는 소리를 들으며 강희는 그들에게 웃어 주었다.
그때 만운이 들어서며 서글서글하고 싹싹하게 인사했다.
“대감, 저도 왔습니다.”
성 대감과 만운은 궁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사이였지만 사가에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건 새삼스레 반가운 일이었다.
“오오, 우리 젊은 부장님, 예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듭시다.”
강희가 혼인하기 전, 여성댁이나 다른 하녀들은 하루아침에 아씨가 달라졌다며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성 대감은 처음에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딸의 평판에 일조한 가실이란 계집을 쫓아낸 것도 변덕이었을 뿐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강희가 달라진 시작이라니.
제 언니들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성대한 식을 하겠다던 아이가 모든 패물을 간소화하고, 그 대신 노인들을 불러 대접하는 혼사를 치른 것부터가 크게 달라진 일이었다. 하지만 성 대감은 사실 그때까지도 긴가민가했었다. 헌데 혼인 후 여태 발걸음을 않은 것도 그렇고, 한마디 말이 나지 않게 조신하게 사는 강희를 보자니, 정말 딸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여성댁과 남 집사도 진심으로 딸을 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다.
또한 강희가 자리에 앉자마자 금방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서 이 아이가 지금 상황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항상 곁에서 수발을 드는 애심이도 데려오지 않은 걸 보면 더욱 확실했다.
강희는 농담처럼 만운이 저를 지켜 준다고 가볍게 말했지만 그가 왜 제 곁에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킬 이를 적게 하려고 그런 것이리라.
달라진 딸은 모든 일에 세심히 배려하고, 생각 또한 깊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런 시기에 발걸음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음이었다.
만운은 성 대감에게 간단히 인사만 하고 남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집 구경을 하러 나갔다. 일부러 부녀간의 돈독한 시간을 주려는 배려도 있긴 했지만 보는 것만 해도 감탄을 금치 못할 화려한 성도종 대감의 집 구석구석을 보는 것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서로의 안부와 어찌 지내는지 일상을 묻고 답한 후, 강희가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 제가 혼인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것이 있어요.”
“혹시 네가 용수산 기슭에 마련한 창고에서 하는 일을 말하는 게냐?”
“아버지, 벌써 다 알고 계시는군요?”
강희가 놀라며 물었다. 저는 다른 이들 모르게 한다고 진행했는데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성도종 대감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다마다. 그리고 네가 내 도축장의 비계와 시전의 기름까지 몽땅 모으고 있으니, 무슨 일인지 여러 사람이 오히려 내게 묻더구나. 아궁이까지 긁어 재를 모은다니, 무슨 일을 하려는 게냐? 나도 궁금했다.”
아버지가 관심을 보이자 강희도 쉽사리 입을 열 수 있었다.
“사실은 제가 비누를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비누?”
강희는 아버지께 비누를 만드는 법과 그걸 만들려는 이유, 그리고 사업적인 이문을 떠나 백성들의 생활에 보급되기를 바란다는 점 등을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재료의 수급을 위해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말이다.
만드는 법을 알기만 하면 일반 백성들도 스스로 만들어 쓸 수 있고, 그 방법도 널리 알릴 계획이라는 것도 덧붙였다. 아직은 계속 시험을 하고 있으며, 얼마 전엔 송국에서 들여오는 것과 비슷한 제품도 만들어 냈다는 말도 했다.
이는 채운에게 말한 후부터 집에서 여러 차례 시험해 본 일로, 바로 며칠 전 사용 가능한 비누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강희가 꿈속의 기억을 기록하며 가장 상세하게 적었던 것이 바로 비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농도와 재료의 비율을 맞추고 숙성하는 기간까지 여러 가지 실험을 반복해야 했고, 이제야 처음 성공작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께 직접 선보이려고 몇 개 가져오기도 했다.
만들어진 것이 있다면 설명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강희는 저의 첫 성공작을 자랑스럽게 꺼냈다.
“이걸 보세요.”
강희가 꺼낸 비누는 성 대감이 알던 비누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향기도 썩 좋지가 않았고, 투박한 모양으로 딱딱하게 굳은 두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비누라고?”
“생긴 게 보시던 것과 달리 투박하지요? 하지만 이건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가격이 저렴해서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보급할 수 있어요. 향기는 좀 떨어지지만 성능은 틀림없는 것이에요.”
강희의 설명을 들을수록 성도종 대감의 놀람은 커져만 갔다.
“이걸 정말 네가 만든 것이냐?”
“네, 만드는 법만 알면 누구든 할 수 있어요.”
강희는 자신이 비누를 만들려고 하는 의도와 만드는 재료와 방법, 보관상 유의점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으로 실제 쓸 수 있는 비누를 만들어 낸 강희의 설명은 천생 상인인 성 대감이 듣기에도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고, 매력 있는 사업이었다.
성 대감도 만드는 방법의 원 출처가 법국이란 것을 강희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송국에선 자기네 고유의 생산품이라고 절대 알려 줄 수 없다며 비싼 사치품으로 팔아 이득을 챙긴 것이다.
아무튼 성도종 대감은 장사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강희가 꺼내 든 이것에서 엄청난 돈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바로 발견했다.
비누가 고급 사치품이 아닌 일상용품이 된다면 그 사용자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사치품은 귀족에 한하여 수요가 결정되지만 만약 온 백성들이 모두 사용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면 그 수요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전 비누 제조 사업이 완전히 성공하게 되면 백성들에게 모든 제조 방법을 공개하는 한편, 왕세자 저하께 이 사업 자체를 넘기고 싶어요. 그래서 각 개인이 만드는 건 허용하되 상단이 만들어 파는 건 금지하고, 고을마다 관청에서 만들거나 아니면 국가 산하의 기관에서 만들어 팔 수 있게 했으면 해요.”
“……그렇다면 넌 비누를 국영 상품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구나.”
“네, 그럼 그것이 고스란히 세금이 될 테니 세수 증가에도 도움이 되고, 중간상인이 장난칠 수도 없어 백성들에게 계속 싸게 보급하는 일도 가능할 거예요.”
성 대감은 이 아이가 제 딸이 맞는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이건 기특한 걸 넘어 대단할 지경이 아닌가.
“허허, 참, 우리 딸이 이렇게 생각이 깊을 줄이야. 참 대견하구나.”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성 대감은 작은 칭찬에 수줍게 볼을 물들이며 기뻐하는 딸을 보며 기분이 정말 새로웠다.
사실 성 대감은 강희가 하는 말처럼 비누와 전염병의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그리 깊다고는 보지 않았다. 하지만 빨래를 더 쉽게 하고, 몸을 청결히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 비누는 그 본래의 효능 자체로 충분히 좋은 물건이었다.
아무튼 비누를 만든다 해도 그 사업을 국영사업으로 만들고, 그것을 널리 보급하고자 한다면 먼저 실효성을 입증하는 것이 중요했다.
“강희야, 네가 앞으로 대량으로 생산이 가능하다면 내 생각엔 군대보다 예성 지방에 먼저 사용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겠느냐?
“네? 아버지가 그런 생각이시라면 저는 상관없지만…….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요?”
“네 말대로 그 실효성을 증명해 보고 싶어 그런다. 귀족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잘 씻고 살 수가 있다만 일반 백성들은 그러지 못하질 않느냐. 요즘 특히 외국 상인들의 출입이 잦은 예성 지방의 백성들이 먼저 사용하게 하면 네가 걱정하는 만약의 전염병도 예방할 수 있지 않겠느냔 생각이다.”
“네, 그렇군요. 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역시 아버지께 상의 드리길 잘했어요.”
“그래, 그리고 재료를 모으는 일도 걱정 마라. 내 전담할 사람을 따로 붙여 주겠다.”
기분이 썩 좋았던 성 대감은 호기롭게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다. 어렵게 부탁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강희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아버지, 정말 감사드려요.”
이토록 생글생글 웃는 딸아이를 본 일이 얼마 만인가.
게다가 성 대감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일로 강희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것도 참 새로운 기분이었다.
딸이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한 자체가 낯설기는 하지만 이전의 못된 딸도 딸, 지금의 착한 딸도 그의 딸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다른 이들도 인정하며 다른 눈으로 보게 되는 지금의 딸이 훨씬 맘에 들고 더 애정이 갔다.
그동안 돈만 좇느라 망종 소리를 듣는데도 딸아이를 무심히 방치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동안의 제 허물을 갚는다는 취지로, 또 제힘으로 직접 다른 이들을 위한 사업을 구상하고 실천하려는 딸이 얼마나 기특한가.
그러니 당연히 도와줌이 마땅했다.
또한 이 사업이 돈이 될 가능성이 보여도 성공시킨 후 왕세자에게 넘긴다는 것 또한 반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아니어도 그에게는 다른 사업들이 많았다.
문득 아등바등 욕심을 부리며 돈을 좇는 자신보다 개과천선하여 달라진 딸이 하려는 일이 마음을 더 흡족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 윤 장군, 윤 서방과는 잘 지내느냐?”
“……네, 아버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린 강희는 마냥 수줍은 새색시처럼 곱게 홍조를 띤 볼을 하고 있었다. 그와 한방을 쓰는 동안 잠을 못 자 조금 홀쭉해진 볼도, 그가 없는 집이 쓸쓸하여 더욱 바삐 움직여 피곤해 보이는 것도 모두들 새색시니까, 하고 그리 보였다.
한방을 쓰지 않던 주인과 마님의 합방에 처음엔 조금 놀라던 하인들도 곧 흐뭇하니 기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빠르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강희의 얼굴에 떠오르는 점점 서글퍼지는 기색은 막을 길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채운을 가까이서 볼 수도 없는 때였다.
허나 남들이 보기엔 그런 기색도 지금 새신랑이 집에 없어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선이었다. 성 대감도 그렇게 이해하고 생각보다 금슬이 좋은 딸아이를 보고 마냥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네가 온다고 여성댁이 어제부터 가지가지 음식을 준비한다고 부산을 떨더구나. 그러니 어서 맛보러 가자꾸나. 네가 일찍 돌아가야 한다니, 내 더 이상 붙잡지 않으마.”
이날의 방문으로 강희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비누 사업을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강희의 비누 사업은 탄력을 받으며 규모부터 크게 늘었다.
그리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기 직전.
여러 가지 용도로 만들어진 비누의 대량 생산이 일차로 성공하고, 예성 지방 백성들이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보게 되었다.
* * *
나중의 일이지만 성 대감의 제안으로 비누를 예성 지방에 먼저 보급한 일은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 대감은 강희의 사업 취지에 크게 감명을 받아 예성 지방 빈민들에게 비누를 무료로 배급했다. 아무리 저렴해도 비싸다는 인식이 강한 비누가 처음부터 잘 팔릴 리가 없기 때문에 실효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린 특단의 조치이기도 했다.
빈민들은 그것조차 팔아 식량과 바꾼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비누를 기쁘게 사용했다. 올해는 식량 사정이 좋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그 일대에 전염병이 돌았다. 이 병으로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건 아니지만 전염성이 강해 급속도로 번지며, 많은 이들이 병에 시달리게 됐다.
그런데 병이 돌기 시작하면서 평민들의 마을이나 귀족들이 사는 마을까지 수많은 발병자를 낳게 되었으나, 오히려 빈민 마을에 발병자가 적게 나타나는 기현상을 보였다. 대개 전염병이 돌면 열악한 생활환경 때문에라도 가장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던 빈민촌에서 가장 적은 수의 사람들만 발병한 것이다.
그것으로 비누의 효용은 당장 증명되고 말았다.
그 전염병은 주로 평소 위생이 불결한 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 많이 발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비누를 접한 빈민가의 아이들이 신기한 맛에 그것을 한 번이라도 더 사용해 보고자 씻는 데 열심이었던 덕분에 아이들의 발병률이 현저히 줄었다. 덩달아 어른들도 같이 씻게 되니 빈민가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할 새도 없이 수그러들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도 전염병이 빈민층 마을을 비껴간 것을 우연이나 운으로 치부하는 식자들이 더 많았었다. 다만 이후 백성들 사이에선 우연이든 운이든 비누가 전염병을 막는다는 속설까지 생겨났다.
* * *
왕이 다시 쾌차하여 일어나자 서궁의 비상 체제도 그제야 풀릴 수 있었다. 채운도 덕분에 근 한 달간 궁을 지키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자 집안사람들 모두가 안도와 환영으로 얼굴이 밝아졌다.
“어서 오시어요.”
언제 온다는 말도 없이 채운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리에 강희는 앞치마도 벗지 못하고 달려 나갔다.
강희는 그와 한방에서 자는 며칠 동안 문득 깨었다가 그가 자는 모습을 보며 다시 잠을 청하곤 했었다. 어두운 밤, 모기장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누워 있는 형체, 자는 숨소리를 들으며, 밤이 너무 길기도 또 너무 짧게도 느껴졌었다.
어떨 땐 그가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후 물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일도 볼 수 있었다. 그럴 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몰래 훔쳐보곤 했다.
채운이 없는 동안엔 계속 그의 침상에서 혼자 잠들며 매일 그가 누워 있던 자리를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밤을 지새우는 일이 허다했다. 그가 가까이 누워 있다는 두근거리는 긴장보다 그가 없다는 허전함이 그녀를 더욱 잠들지 못하게 했다.
“왔소.”
그녀의 인사에 채운은 짤막하게 답하며 안으로 들었다.
그 뒤로 총총 쫓아가며 강희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 걸음걸이, 살짝 쥐어진 주먹과 감히 가까이 가서 맡을 수 없는 체취까지. 모두가 그녀의 가슴을 꽉 메우는 것 같았다.
강희는 그가 없는 동안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제 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를 다시 보자 확 밀려드는 반가움과 그리움이 얼마나 컸던지 새삼스레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 갈수록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남몰래 흘린 눈물과 깊어지는 회한으로 괴로웠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타들어 갔고,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야 함을 항상 되새겼다.
‘하지만 당신께 절로 흐르는 마음이 잡히지가 않네요.’
강희는 채운의 뒤를 따르며 속으로 가만히 속삭였다.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고, 이렇게 보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제 마음을 제가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제 마음을 숨겨야지, 억눌러야지 다짐에 다짐을 하는 강희의 눈은 점점 애처롭게 변하고 있었다.
“어서 오시어요.”
채운은 그녀의 인사말을 들으며 비로소 자신이 집에 돌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인사를 하고선 금방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잠시 마주한 눈에서 그녀의 속내도 알 수 있었다. 강희는 자신의 속마음을 거의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반가울까? 혹시라도 날 기다렸을까?’ 하고 그를 괴롭히던 의혹이 강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 강희는 무엇을 하다 나온 것인지 넓은 앞치마를 두르고 조금 지친 모습이었지만 그것도 그녀의 고운 모습을 다 가리진 못했다.
앞서 걷는 내내 자신을 따르는 그녀의 타박거리는 작은 발소리를 듣는 것이 이토록 마음을 푸근하게 해 줄 줄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단련하며 항상 엄격함을 유지하던 그의 입매가 저절로 풀리면서 편안한 미소까지 지어지고 있었다.
처음 이곳을 하사받고도 집이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오고 싶은 곳이란 생각이 들게 한 것은 확실히 혼사를 치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꼭 강희 때문인 것일까? 강희가 아닌 다른 여자와 혼인했어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혼사라는 엄청난 구속력이 이런 마음을 들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를 자꾸만 용납하려 드는 이유도 그녀를 아내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
누굴 속이려고.
내면에서 속살거리는 거짓을 향해 채운은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쳤다.
강희가 아닌 다른 여자를 아내라 놓고 생각해도 정녕 그러할 거 같은가. 자기 혼자 있을 때도 속마음으로는 그녀를 아내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가 섬돌에 발을 올리자 자신의 신발을 정리하기 위해 강희가 옆으로 서는 것이 보였다. 까맣게 그을린 자신과 이 뜨거운 여름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뽀얀 얼굴을 한 강희가 한껏 대조되어 보였다.
‘이 여자는 나를 남편으로 생각할까?’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일 년짜리, 이제 십 개월도 남지 않은 임시 동거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허면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 정말 아내라도 되는 양, 내가 정말 남편이라도 되는 양 서방님이라 부르며, 오가는 길을 반기는 짓은 왜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왜 만운에게 이렇게 정을 주는 것이지? 정말 일 년 뒤에는 어떻게 하려고!’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며 가슴에 또 불이 지펴지는 것 같았다.
‘오늘은 정말 따져 봐야겠다!’
섬돌에 발을 올리려다 멈춘 채운은 강희를 강하게 쏘아보았다.
“내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
갑작스럽게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에 강희가 흠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그대로 그녀를 보고만 있는 것이다.
“서방님?”
의아한 듯 쳐다보는 강희의 약간 치켜 올라간 눈매가 그의 눈에 박히듯 선명했다. 언뜻 새치름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갸웃하는 모습은 귀엽고…….
조금은 요염한 듯도 보였다.
“서방님.”
채운은 움찔거리는 손을 꽉 쥐었다.
강희가 저리 부를 때마다 그녀를 불쑥 잡아당기고도 싶고, 내치고도 싶었다. 왜 그리 부르느냐 따지고도 싶고, 품 안에 당겨 더 가까이서 듣고 싶기도 했다.
“아니오. 이따 얘기합시다.”
거칠게 신을 벗은 채운이 안으로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온 강희가 그가 갈아입을 옷을 내주고 곧 방을 나갔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만운이 강희가 채운을 맞는 순간부터 두 사람이 방에 들어갔다가 그녀가 서둘러 나오는 것까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했다.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다.
다만 마음에는 서로가 한 가득이나 도통 풀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만운의 얼굴이 짐짓 어두워지고 있었다.
모처럼 오랜만에 세 식구가 다 모여 식사하는 자리가 되었다.
창마다 내린 발 사이로 모기 쫓는 연기가 들어오면서 향이 실린 바람이 어느새 서늘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여름이 다 간 것 같아.”
“아침저녁으론 시원하니 그런 것 같다.”
“형수도 시원하니 살 만하지요? 매일 그 뜨거운 창고 안에서 너무 고생이 많았어요.”
“응?”
단음절로 모든 의문을 표한 채운의 질문에 만운이 길게 설명을 시작했다.
“비누 말이야, 비누. 그게 작업장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아?”
“그건 용수산에서 만들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지 않소?”
“네, 그렇긴 하온데…….”
“그거야 대량 생산용이고, 시험 제작은 형수가 다 일일이 직접 하고 있다고. 내가 전에 가져간 것들 중에 상품上品 있지? 그건 형수가 직접 만든 것들이야.”
“그래?”
강희는 채운이 없는 동안 내내 비누 만들기에만 매달렸다. 지금도 강희는 부엌에 있던 것이 아니라 작은 창고에서 비누를 만들다 나온 것이었다.
채운도 강희가 만운을 통해 보낸 비누를 보며 절로 감탄이 나왔지만 누구보다 그것을 반긴 것은 바로 왕세자, 수였다.
우선 군의 병사들에게 사용하게 하려 했는데, 성도종 대감이 재료비만 치르고 사는 형식으로 빈민층에 모두 나눠 줬다는 데는 다들 놀라고 말았다. 가진 부에 비해 인색하다는 평을 받던 성 대감이 빈민에게 공짜로 무언가를 나누어 준다니, 그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장사에 이력이 있는 성 대감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파급 효과에 따른 부가가치를 높게 산다는 뜻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재료비라는 것도 버리는 것들을 활용한 것이었고, 따로 사람을 들인 것이 아니라 집안의 하인들을 동원하여 인건비가 더 든 것도 아니었다. 이것만 해도 사업 자체가 벌써 흥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강희가 궁으로 보낸 것은 상품, 중품, 하품 세 가지로 표본을 따로 골라낸 것이었다.
그중 하품이 빈민층에게 무료고 나누어 준 것이고, 중품이 시장에 팔리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상품은 향기도 좋거니와 모양도 그럴듯하게 갖춰진 것으로 송국에서 비싸게 들여왔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강희가 직접 만든 것이라니!
“너, 그걸 궁에 가져와서 그런 말은 하지 않았잖느냐?”
“그거야 형수가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것도?’
채운이 만운의 말에 멈칫하는데 강희가 난처한 목소리로 제 시동생을 부른다.
“도련님…….”
“왜요? 형에게는 말해 줘도 되잖아요. 형인데. 그치, 형?”
“……그래.”
만운이 일부러 말하지 않았으면 강희가 저에게는 말하지 않으려 했다는 걸 알자 채운은 머릿속이 어그러지는 것 같았다. 감히 자신을 따돌리고 비밀리에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 묻기엔 강희의 의도가 너무나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어든 제가 잘한 일은 덮어 버리고, 이혼을 쉽게 하려는 것일 테지.’
형의 불쾌해진 감정을 민감하게 읽은 만운이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아이 참, 형수는! 왜 형수는 형수가 좋은 일 한 건 다 덮으려 하는 거요? 하여간 난 형수가 고급 비누를 만들면서 세심하게 적어 둔 그 기록 절대 받지 않을 거고, 내 거로 할 생각 추호도 없소! 알았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이게 무슨 말이오, 부인?”
강희는 일부러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꺼낸 만운에게 난감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채운은 그녀의 그런 표정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이것도 숨기고 몰래 하려는 일 중 하나겠지. 도대체 이 여자는!’
“저, 그게 비누를 잘 만들게 되거든, 그걸 왕세자 저하께…….”
더듬거리는 강희의 말이 답답했던지 만운이 냉큼 그녀가 하던 일을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아, 글쎄, 형수가 비누 사업이 성공 궤도에 오르면 저하께 바친다고 하지 않소? 성 대감도 허락한 일이라 하고 말이오. 그리고 성 대감이 재료의 수급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기로 했소. 그거야 그렇다 치고, 형수가 나보고 그 책임자가 되라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형수가 여태 일일이 실험해서 성공한 비법들을 적어 둔 기록을 내게 넘긴다는 거요. 나 참, 난 칼 휘두르는 게 좋지, 어디 그런 게 어울리기나 하오?”
“하지만 정말 도련님이 저보다 눈썰미도 좋고, 문양에 대해 생각해 내시는 것도 그러하고. 저보다 더 세심하게 잘하시는 듯하여…….”
“그거야 형수가 하니까 옆에서 지켜보며 조금 거드는 게 재미있어 그러는 거지, 나더러 책임을 떠맡으라니. 으, 형수는 이 어린 시동생을 창고 안에 가둘 셈이오?”
“아, 아니, 저 그게 아니고 저, 저는…….”
강희보다 딱 한 살이 적은 저를 스스로 어리다 표현하는 만운이었다. 저리 농을 해 대는 걸 보니 그가 없는 새 강희와 어지간히도 친해진 모양이었다.
자신의 농에 당황한 강희가 더듬기까지 하는 것을 보고 만운이 ‘우히히!’ 경망스럽게 웃자 그녀도 따라서 샐쭉 웃고 있었다.
채운은 아까부터 불편해지던 속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없을 때 둘이 공유한 시간을 두고 저와 같이 웃는 모습에 마음이 뾰쪽한 모서리에 턱턱 걸리는 것 같았다. 강희를 잘 지키라고 했지, 누가 같이 노닥거리라고 했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주먹을 꽉 쥔 손의 손톱이 손바닥 안을 파고들어서야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하, 이 무슨 옹졸한 생각인가.
자신이 이렇게 속 좁은 인간인 줄은 몰랐다.
그녀가 비누 사업이란 계획을 내놓고 나 몰라라 내팽개칠 거라 속으로 미리 욕한 옹졸함이 부각되는 것만 같고, 미리 책임자까지 선정하여 제 비법까지 모두 내놓고 저는 쏙 내뺄 준비까지 하는 저 여자가 얄밉기까지 했다.
정말 떠날 거면 기억 속의 그 잔인한 소녀처럼, 아니, 소문처럼 못되고 방종한 짓거리나 하다 갈 일이지. 왜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인가.
오늘은 정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오늘 밤엔 강희에게 꼭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도대체 무슨 핑계로 이혼을 청할 거냐고!
채운은 만운과 함께 웃는 강희의 미소조차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