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알려 줄까?
만운은 말을 꺼낸 지 이틀 후 집으로 들어왔다.
만운으로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고, 강희로서는 시댁 식구를 처음 맞아 대접하는 자리라 거의 잔칫상이 차려졌다.
상에는 돼지고기와 소고기, 꿩 백숙 등 고기 요리에다 말린 조기, 꽃게탕과도 같은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졌고, 귀한 밀가루로 만든 면과 여름에 어울리는 시원한 콩물도 올라와 있었다.
그중 형제가 가장 좋아한 건 시원한 콩물에 말아 먹는 면 요리였다.
채운이 좋아한 건 국수요, 만운이 좋아한 건 여름 별미인 시원한 콩물이었으니, 두 사람의 젓가락은 그쪽으로만 부지런히 움직였던 것이다.
아무튼 형제가 똑같이 한 가지 음식을 좋아하니 다른 성찬들은 별로 사랑받지 못했다.
눈치 빠른 만운은 설마 형 혼자 매일 이렇게 떡 벌어지게 먹는 건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부지런히 먹기에 바빴다. 골고루 이것저것 먹는 시늉을 했지만 배부르게 먹고도 콩물만 두 번 더 떠먹는 걸 보면 만운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충분히 알 만했다. 그러고도 만운은 상을 물릴 때 배가 불러 더 먹지 못하는 콩물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하린댁은 채운과 만운 둘 다 무엇이든 잘 먹기는 하지만 특별히 찾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각각 한 가지씩 좋아하는 음식에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모습을 보니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가끔씩 오갔다지만 몇 년을 모셔도 자신은 여태 모르던 것을 마님은 대번에 알아맞힌 것이다. 그녀로서는 놀랍기만 했다.
“잘 먹었습니다, 형수. 이 많은 걸 다 차리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어요. 도련님이 잘 드셔서 고맙고, 보기 좋았어요. 그리고 저야 옆에 있기만 했지 다 준비하고 차린 건 하린댁과 부엌 식구들인걸요?”
“네, 그래도 잘 먹은 건 잘 먹은 거지요. 아, 하린댁, 고마워요!”
“아유, 아닙니다. 도련님과 주인님이 제일 즐겨 드신 음식은 마님이 다 직접 하신걸요? 저야 마님이 하란 대로 한 것뿐인데요.”
모처럼 만운이 온 자리라 시중을 들기 위해 섰던 하린댁이 제게 공을 돌리는 강희의 말을 부인하며 치하를 돌렸다. 자신은 여태 알지도 못한 채운의 특별한 식성과 만운이 좋아하는 음식을 한 상에 차려 내놓을 수 있는 강희는 현명하고 사랑받을 안주인이었다.
만운은 저와 형이 즐긴 음식을 형수가 직접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채를 띤 눈으로 강희를 보았다.
그러다 곧 그런 눈치를 숨기고는 이번엔 묘한 분위기의 형과 형수 사이를 몰래 살펴보았다. 형이 형수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는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방향이 참으로 미묘했던 것이다.
‘이것 봐라?’
만운은 혼인 전의 강희가 어땠는지 단순한 소문뿐 아니라 신빙성 있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형의 혼인 생활에 대해 염려가 되었고, 그래서 날카로워진 형을 보면서 허영심 많고 건방진 그녀가 형을 업신여기고 패악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집에 와서 다시 만난 형수는 혼인식 때 본 다소곳하고 현숙한 분위기 그대로였다. 그리고 서로 내외하는 것 같긴 하지만 형과의 사이에 풍기는 묘한 분위기도 수줍고 애틋한 새색시의 그것이었다.
무엇보다 형수가 형을 곁눈질로 몰래몰래 살펴보는 모습은 흡사 처음 연정을 가진 여인들의 눈에서 발견하던 그 빛과도 같았다.
누가 본다면 겨우 열여덟 살에 뭘 알겠느냐 하겠지만 남녀 간의 연애사야 병영의 심심풀이로 숱하게 오르는 화제였고, 동기들 간, 선후임 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했다. 또 형이 영웅으로 부상한 뒤에 형을 바라보는 여인네들의 얼굴에서도 그런 걸 많이 봐 왔기에 잘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 형 잘났지, 그렇고말고. 그러니 형수야 그럴 수 있다지만…….’
신기한 건 그런 감정이 형수에게서만 비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만운은 진수성찬을 받고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면서도 볼 건 다 보고 있었다.
세상에, 천하에 목석인 줄만 알았던 형이…….
바로 그의 형 채운이 아닌 척하며 형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것 아닌가.
오늘 형수가 특별히 해 준 맛있는 음식은 어릴 적 엄마 생각이 나게 해서 그리움도 솟았지만 형과 형수를 보느라 감상에 젖기도 힘들었다. 형이 형수를 보는 모습을 보고―채운이 알면 어이없어 할 일이지만― 연애에 서툰 노총각 아들의 행복을 보는 듯 자랑스러운 기분이었는데다가 제 여자를 향한 불길 또한 형의 눈에 담겨 있는 걸 보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린댁이 자신들이 제일 좋아했던 음식을 마님이 만들었다고 하자 형이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걸 만운은 똑똑히 보았다.
그걸 본 만운은 눈을 비빌 뻔했다.
그러면서 형의 눈은 형수가 음식을 씹는 모습, 숟가락을 놓는 모습, 젓가락으로 다른 반찬을 집어 드는 것까지 좇으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형은 형수가 입에 넣는 음식도 예뻐 보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집에 가기만 하면 형을 괴롭히는 그 예쁜 얼굴에 줄을 그어 줘야겠다고 단단히 다짐했던 결심은 당장 철회되고 말고였다.
아니, 철회된 정도가 아니다.
혼인식 날 괜스레 굳은 것 같은 형에게 저런 신부를 얻게 되어 얼마나 좋으냐고 했던 말은 더 이상 농이 아니었다. 평생 강한 무인이며 충성된 신하인 것 말고는 보통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란 걸 모르고 살 줄 알았던 형에게서 저런 얼굴을 하게 만들다니!
형수에겐 정말이지 수만 번 감사해도 모자랄 듯싶었다.
그만큼 채운의 감정은 만운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강희의 마음도.
그런데 정작 형 본인은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갸웃하던 만운은 이 자리만 아니면 딱 하고 손뼉을 쳤을 것이다.
‘아, 이제야 알았다! 형이 근래 들어 왜 더욱더 벼려진 것처럼 보이는지!’
형은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인지 모르니까 저러는 것이다.
제삼자니까, 그리고 형의 동생이니까 형의 마음이 보였던 것이다.
‘알려 줄까?’
만운의 눈에 장난스러움이 팍 치솟으며 슬그머니 고개를 저었다. 목석같은 형에게 목석이 아닌 감정을 갑자기 일깨워 주면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만운은 형의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받고 있는 유일한 동생으로서 형이 가진 감정의 깊이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감정이 자신의 여인에게로 향한다면 얼마나 뜨겁게 불탈지 관심과 기대가 저절로 생기며 흥미로운 것이다.
사실은 저런 형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기도 했다.
정 모르면 알려 줘야겠지만…….
일단은 모르는 체하고 놀려 먹어야겠다고 결정했다.
만운은 식사가 끝나면서 다시 긴장감이 조성되는 남녀를 지켜보며 눈을 빛냈다.
그때 애심이 차와 다과를 챙겨 들어왔다.
“보시다시피 전 먹은 게 속에서 출렁거려 차는 더 못 마시겠습니다.”
만운은 배를 쓱쓱 문지르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둘이 무슨 말을 나눌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일단 두 사람을 자주 붙여 두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궁금증 정도는 눌러 버릴 수 있었다.
복도를 가로지르던 만운은 두 사람이 있는 곳을 흘끗하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이해심 많은 동생을 둔 걸 감사하라고, 형. 그나저나 이제부터 볼만하겠는걸?”
만운의 입에서 후후 하는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뒤에 남은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한 침묵이 흘렀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침묵인 것 같은데도 무언가가 달랐다. 오늘 만운이 오는 걸 기해 강희의 침상이 안방으로 옮겨진 것을 두 사람 다 의식한 탓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걸 의식한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더욱 긴장한 탓에 다른 날보다 더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만운을 따라 곧장 일어나기가 뭣했던 채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더울 텐데 그 많은 걸 준비하느라 뜨거운 화로 앞에서 고생 많았겠구려. 수고했소.”
“아니어요. 정말 하린댁과 다른 식구들이 다 하고 전 정말 조금 거들기만 했어요.”
“아무튼.”
채운은 그러고 입을 꾹 다물었지만 강희는 생각지도 않은 칭찬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강희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그가 그 미소를 보며 함께 웃고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친정에는 사람을 보내 봤소?”
“네……. 그런데 아버지는 예성항을 시찰하러 가셔서 지금 집에 안 계신다고 하셔요. 본래 계획은 사흘 계실 작정이었는데 오가는 시간도 걸리고, 시찰 겸 피서를 겸해서 늦으실 수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오시면 소식을 알려 달라고 하고 기다리는 중이에요.”
예성항은 여름철 해류를 따르면 능숙한 사공은 도성 인근의 양광포에서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엔 반대로 역류하는 해류를 타야 해서 시간이 두 배는 걸리는 곳이다.
십여 년 전 예성항은 멀리 대식국의 상인들은 물론 국제 사신들이 매일 오가는 활기찬 곳이었지만 왜의 해적들이 성한 동안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예전의 영화를 되찾을 것이다.
큰 상단을 운영하는 성 대감 같은 이가 외부 문물 교류가 앞다투어 이루어지는 현장에 갔다가 쉽게 돌아올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 성 대감이 피서라니, 느긋하게 더위를 피하기는커녕 해풍과 태양에 새까맣게 타서 올 거라는 사실을 여기 앉아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랬구려.”
“네, 그래서 서방님께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께 우선 여쭙고 일이 성사될 가능성을 타진한 후에 말씀드리려 했는데, 아무래도 서방님께 먼저 여쭤 봐야 할 거 같아서요.”
“무엇이오? 말해 보오.”
“제가 만들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
강희는 그에게 괜한 핀잔을 받을지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제 의도가 불순하지 않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모든 병의 원인은 더러움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밖에 나갔다 오거나 식사를 하기 전에 항상 손발을 깨끗이 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외부 사람들이 많이 오가면서 그네들의 풍토병이 옮겨 오는 경우도 많아요. 우리 려국의 의원들이 출중한 실력을 갖추긴 했으나 모르는 병이 옮겨 온 후 그것을 알아내어 치료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됩니다. 병이 생기면 그 치료는 의원이 할 일이지만 그보다 앞서 그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깨끗이 씻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저는 일반 백성들에게 비누를 보급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여태 강희가 그에게 한 말 중 가장 긴 말이었다.
채운은 강희가 자신에게 용기를 내어 열성적으로 하는 말을 들으면서 감탄했다. 일견 일리도 있고, 그 의도도 좋았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비누라……. 그건 사치품이 아니오? 일반 백성들이 그 값을 어떻게 감당하고 사용하겠소?”
“그것을 감당할 만큼 싸고 대중적으로 만들면 됩니다.”
“그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이오? 비누는 지금 송국에서 들여온 물품만 있는 걸로 아오만?”
“네, 그런데 만드는 방법만 알면 일반 가정에서도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방법도 의외로 간단하고요. 재료로는 잿물과 쓰다 남은 기름만 있으면 되거든요. 일단 저는 병영에서 군병들에게 비누를 사용하는 습관을 들이게 하고,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면 각자의 가정에도 전파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정말 그것만 있으면 비누가 만들어진다는 말이오?”
채운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왕세자의 곁에 있으니 그도 비누 정도야 본 적도 있고, 써 본 적도 있다.
비누를 사치품이라 하는 건 비싼 곽에 넣어 항상 마른 곳에 보관되어야 했기 때문이고, 그 비싼 값에 평민들은 건들지도 못하는 물건인 탓이었다. 귀족 여인네들은 필수품이라 여기는지 모르지만 그들도 아끼며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거라 들었다. 강희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냄새도 그런 것이리라.
그런 비누를 아무나 쓰도록 만든다고 하니 놀란 것이다.
“서방님이 보신 것들은 향료 등의 비싼 재료를 섞어 만든 것으로 정말 사치품이라 불릴 만한 것들이에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건 백성들이 필수품으로 쓸 수 있는 것이에요.”
“비누라니……. 생각도 해 보지 않았소. 그리고 병사들에게 먼저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니, 진정이오?”
“네. 그것이 재료도 구하기 어렵지 않고 만들기도 쉽지만 잿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위험해요. 백성들이 그만한 기름을 모으기 힘들 수도 있고요. 그래서 전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객잔과 도축장의 기름들을 모두 모아 사용할 계획이에요. 궁중이나 병영은 물론 시전에서 사용하는 적은 기름도 모을 방법이 있다면 모두 다 사용이 가능해요. 첨가되는 향료는 들에 핀 꽃이나 창포, 약재 등 무엇이든 될 수 있고요. 대량으로 전담해서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으면 백성들이 일일이 만들 수고도 덜게 되고, 싸게 공급할 수도 있을 거예요.”
오늘 강희는 목소리를 냄에 인색하지 않았다. 채운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고 생각을 물어보는 것 같자 자신이 생기며,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열성적으로 설명할 맘이 들었던 것이다.
채운도 놀라고 있었다.
사치품으로 알려진 비누를 그렇게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이 얼마나 새로운 생각인가.
채운은 그녀가 하는 말의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그 생각 자체에 감탄이 나왔다. 병영의 병사들에게 먼저 보급한다는 생각도 기발하고 기특했다.
만드는 방법까지 널리 알린다니, 이문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비누를 사용한다고 병을 얼마나 예방할 수 있을지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 얘기인지는 몰랐으나 그렇게 말하는 강희는 확실히 그러하다 믿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비누란 것이 송국에서 물건만 들여오고 만드는 방법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걸로 아는데,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요?”
“원래 비누는 송국에서 먼저 만든 것이 아니라 대식국 너머 서역의 법국에서 만들었던 것입니다. 송국에서 그 기술을 들였던 것이지요. 전 우연히 아버지의 상단 행수들 중 법국에서 들여온 책자를 구한 이가 있어 그 방법을 알게 된 것이고요. 실제로 만들어 보니 정말 비누가 되기에 신기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던 것이에요.”
“그렇소?”
이 대답은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기에 강희는 별문제 없이 답할 수 있었다. 누구든 그런 걸 알려 준 이가 누구냐 묻는 사람이 있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누를 만드는 법의 원래 출처를 밝힌 이유도 있었다. 강희가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해서 사치 품목인 비누의 수출이 막힌다면 송국에서 당장 항의가 들어올 것이다. 그때 그녀의 말처럼 법국의 책에서 배웠다고 하면 배가 아플지언정 그 원래 출처가 법국이라고 하는 데 딴지를 걸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려국의 백성들도 뱃길이 열린 후 그동안 해적들이 쉬이 소탕되지 못한 배후에는 송국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하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송국에 반하는 감정을 갖는 이들이 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고작 품목 하나로 나라 간에 항의가 오고 간다면 양국 간의 불화만 심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어느 정도 하고는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희는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다.
또 이것을 한시라도 빨리 보급하려 조금 서두르는 이유도 있었다. 기억의 오류로 발생한 시간 차를 감안하자 곧 있을 전염병의 창궐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강희가 기억하는 전염병의 참상은 재영이 비누를 보급하고 그 효과를 톡톡히 인정받은 때처럼 대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비누의 효용이 처음 알려졌을 때 채운이 이때 전염병으로 잃은 부하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한탄하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해서 최대한 서두르는 것이다.
그렇게 안타깝게 잃는 이가 그의 장수들 중 누구인지, 그리고 실제로 비누를 만드는 것이 그것에 정말 도움이 될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강희는 이것이 채운에게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물론 모든 전염병이 비누 한 가지로 예방된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는 건 아니지만 잘 씻는 것이 병에 대한 예방책이 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알겠소. 나도 생각해 보리다. 병영에 보급하자면 세자 저하의 재가도 얻어야 할 것이니, 그 절차도 밟아야 할 것이오. 하지만 당신 말대로 대량 생산과 저가 보급만 된다면 못할 일도 아니오.”
“정말요? 그럼 전 꼭 제작에 성공하도록 할게요.”
채운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노라 약조하는 말에 강희의 얼굴이 환하게 피고 있었다.
만운은 안에서 얘기가 길어지기에 궁금하여 들어왔다가 뒷얘기만 조금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 감정도 모르고 있는 형이 행여 바보 같은 소리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듣게 된 형수의 계획은 획기적이고, 그가 듣기에도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비누와 전염병과의 상관관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군에 보급되어 병사들의 일과에 씻는 일이 일상화된다면 코를 찔러 옆에 가기도 괴로운 동료들의 땀 냄새, 발 냄새, 찌든 고린내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있겠는가.
예쁜 사람은 예쁜 짓만 한다더니. 안 그래도 달라진 형 덕분에 특별해 보이던 형수가 더욱 고맙게만 느껴졌다.
‘형, 정말 장가 잘 갔네!’
형이 형수와 만난 것은 십 년 전 못된 귀족 여식의 패악으로 인해 가족들이 망쳐진 이후 형에게 처음 찾아오는 복인 것 같았다.
그때부터 형의 어깨는 더 무거워지고, 마음은 차갑고 딱딱하게 굳었다. 동생인 자신 말고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헌데 지금 형은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영웅이라 떠들어 대고, 차기 왕에게서 벗이라 칭해지는 영예를 누린다고 해도 형에게 언제나 부족했던 그것이 바로 이런 따스함이 아니었을까.
형수는 형에게 그런 걸 충분히 안겨 줄 것만 같았다.
그러니 세상에 다시없을 저 귀한 형수는 떠받들어 줄 만하지만…….
‘그래도 그걸 알기 전까지 형은 좀 놀려 줘야지.’
최고로 강하고 근엄하고 고지식하고 세상의 정도만을 걷던 형을 지금 말고 언제 또 놀릴 기회를 갖겠는가.
대련 때마다 부족하다며 매번 두드려 맞기 때문은 아니다.
진짜로.
* * *
우물곁에서 간단히 물을 끼얹고 침소에 든 채운의 눈에 침상에 곱게 접혀 있는 새 침의가 보였다. 바로 강희가 며칠을 걸려 완성한 모시옷이었다.
침상 위에 얹어진 옷을 별생각 없이 갈아입은 채운은 소매와 바짓부리에 박힌 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이 이 집안 침모인 영찬 할멈의 솜씨가 아닌 건 알 수 있었다. 사치스러움을 경계하여 침모에게 금사 같은 것을 쓰지 않게도 했지만, 글자를 모르는 영찬 할멈이 이런 문양의 수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강희…….”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이름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문 앞에서 일부러 낸 인기척이 들렸다.
그가 들어오란 말을 하자 곧 문이 열리며 강희가 들어왔다.
강희는 조금 수줍은 듯, 혹은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색해 하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먼저 잠자리에 드시오. 난 만운과 할 얘기가 있어서.”
“네…….”
그런데 강희가 그에게 답하며 고개를 돌린 곳에는 미리 준비한 것인지 좀 전에는 보지 못한 이부자리가 침상 옆에 있었다.
그게 당연한 것일 텐데도 채운은 대번에 기분이 나빠졌다.
“당신은 침상에서 주무시오. 요즘 날씨가 아무리 덥다 하나 여인네가 찬기 오르는 바닥에서 자는 건 아니라 들었소.”
“하지만 서방님은…….”
“이 넓은 침실에 내 몸 하나 누울 공간이 없겠소. 하여간 내 말대로 하시오!”
강희는 의기소침해졌다.
가장 편해야 할 침실에서 자신과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그가 꽤나 심기가 불편해졌을 거라 익히 예상은 했지만 불퉁하게 버럭 화를 내고 나가는 채운을 보자 강희는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강희는 꿈속의 기억에 그토록 매여 있으면서도 채운이 만운을 의식해 한 침실을 쓰고자 한 일은 시도조차 없었다는 건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왜냐면 그와의 달라진 일상은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이며, 앞으로 파생될 모든 일이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서로가 느끼는 감정도 달라졌음은 깨닫지 못했으니, 이는 원죄로 따라붙는 그 일에 대한 죄책감과 재깍거리며 달려오는, 그녀가 못 박은 이혼까지의 기일이 머리 한구석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강희는 채운에 관해선 감히 짐작할 수 없었지만 본인의 마음이 다르다는 건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단순히 죄스러운 기분만 드는 것이 아니라 심장 어림 어딘가가 심하게 콩닥거리는 설렘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땀에 흠뻑 젖어 가며 화롯불 앞에 앉아서도 그가 먹을 음식을 만드는 일이 즐겁기만 했고, 며칠간 눈이 뻑뻑해지도록 매달려 옷을 지어도 그가 그 옷을 입은 모습을 상상하면 행복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서며 그가 오롯이 그녀의 솜씨로 지어 다린 옷을 입은 모습을 봤을 때 그가 얼마나 가슴 철렁하게 멋졌는지, 강희는 자신의 떨리는 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어찌 더 키워 가겠는가.
허망하다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제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중이었다.
가진다 해도 이룰 수 없고, 만약 그가 이런 자신을 안다면 또 얼마나 질색할지 지레 두려웠다. 지금만 봐도 저렇게 휑하니 나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이 자신과 그의 사이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저녁에 아버지께 말하기도 전에 그 사업에 대해 그에게 먼저 말한 것은, 긴장한 나머지 불쑥 튀어나온 말이나 다름없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준비했기 때문에 일단 말을 꺼내자 설명이 가능하긴 했지만 말을 하는 중간에도 당치도 않은 일이라 호통을 치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다.
헌데 그는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었다.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대함에 있어서도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그 내용을 진지하게 들을 줄 아는 그는 뛰어난 무예만큼이나 훌륭한 위정자의 재능을 가진 이였다.
그렇다.
그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성강희라는 여자처럼 어울리지 않는 여자가 있을까. 같이 있는 것조차 옛 상처를 헤집는 여자가 계속 그의 옆에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하루 새로 눈 뜨고 일어날 때마다 가까워지는 기한이 그녀에게 헛된 꿈을 바랄 수 없게 만들었다.
생각은 많았지만 시간은 별로 흐르지 않았다.
그가 먼저 잠자리에 들라고 했어도 과연 쉽게 잠에 들 수 있을까?
침상엔 삼베로 만든 모기장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걸 보는 강희의 상념은 다시 그에게로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자는 그가 귓가에 앵앵거리는 모기 소리가 성가셔 잠에나 들 수 있을까 그것까지 걱정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기장을 떼어다 옮기는 설레발을 칠 수도 없고, 혼자 편히 잠들기도 저어되었다.
그녀는 만운을 새로 맞이하기 위해 방을 새로 치우고 음식을 장만하며 하루 종일 온 신경을 쏟느라 피곤했다. 제 방이라면 수를 놓기라도 하련만 미처 수틀을 챙기지 못한 탓에 할 일도 없어 그저 채운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 서방님이 오실 때까지 깨어 있어야 하는데…….’
그녀의 정신은 깨어 있길 원했지만 몸은 그것에 따라 주지 못했다. 강희는 신혼 첫날인 바로 그날처럼 침상에 앉은 채 그대로 스르르 넘어졌다.
그 길로 만운의 방에 간 채운은 강희가 열성적으로 말했던 비누 사업에 대한 계획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 자체는 그리 복잡한 계획이 아니었고, 강희의 말대로 생산이 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니 당장 진행될 사항은 아니지만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만운은 전염병 예방 여부를 떠나 비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자체로 대환영이었다. 채운도 기본적인 청결을 지킨다는 것만 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의견은 해 보자는 쪽으로 일치하고 있었다.
“계획의 성사 여부를 떠나서 복덩이 형수가 들어왔네?”
싱글거리는 만운의 얼굴엔 흐뭇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만 봐도 그가 강희를 맘에 들어 한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만운은 좋고 싫고가 분명한 단순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강희는 만운의 기준으로는 매우 드문, 좋은 사람, 맘에 드는 사람으로 분류된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바깥의 소문이야 어떻든 직접 만나서 저녁상 하나 받은 걸로 그녀가 맘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채운은 은근히 떠보듯 물었다. 동생이 강희를 칭찬하는 것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왜인지는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아 생각하기를 밀쳐 두었다.
“응. 사실 좀 걱정했는데, 형수에 대해선 워낙 소문이 흉흉해서. 그런 거 왜 있잖아? 허영심 많다느니, 안하무인이라느니 하던 거. 직접 보니 난 전혀 모르겠거든? 무엇보다 형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응?”
흐뭇하게 듣고 있던 채운은 마지막 말에 되물었다.
“하긴, 당연하지! 어떤 여자가 형을 안 좋아하겠어? 안 그래?”
만운은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여자가 날 좋아해?’
채운은 누군가 가슴을 쿵하고 한 대 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만운의 너스레는 뭇 여자들이 그러하다는 것이지 강희가 그렇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 여자가 자신을 좋아할 가능성은 없었다. 처음부터 선을 긋고 시작한 혼사이니, 시간만 흐르면 그렇게 끝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 열심이지? 왜 이렇게 잘하려고 노력하는 거냐고!’
채운의 마음이 또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만운이 강희를 싫어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좋아하는 것도 맘에 안 들었다. 저 여린 아이에게 형수라는 자리를 채워 놓고 가정의 따스함을 맛보게 해 주고 훌쩍 가 버리면 버림받은 상처를 어떻게 감당하라는 것인가?
만운은 또래의 누구보다 무예도 강하고 이미 성인으로 제 몫의 일을 하는 이지만 채운에겐 아직도 일찍 부모를 잃고 상실감에 가득 찼던 아이 때 모습 그대로인 어린 동생이었다.
강희의 소문이 아무리 흉해도 덜컥 마음을 주는 모습만 봐도 만운은 아직 그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동생은 정말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혹시 이것도 저 여자의 수작 중 하나인가? 이렇게 사람들을 휘두르다가 한순간에 버리려는?’
채운은 점점 더 화가 났다.
“형, 얼굴이 무서워. 뭐, 화난 거 있어?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냐. 무언가 생각난 게 있어서……. 별것 아니다.”
“그래?”
별것 아닌 게 아닌 것 같지만 캐물어 봤자 말해 줄 형이 아니기에 만운은 화제를 돌렸다. 눈치 빠른 만운은 형수가 형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소리에 형이 놀라는 모습을 이미 본 다음이었다.
‘이거 정략결혼이라 하더니, 정말 서로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보면 볼수록 냄새가 풍겼다.
만운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채운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형, 그런데 오랜만에 집에 오니 좋긴 좋네. 새 옷도 턱하니 지어져 있고. 형도 그거 새로 지은 옷이지? 어? 그런데 왜 형 소매에만 ‘운’ 자가 새겨져 있어? 나는?”
만운은 채운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제 밋밋한 소매를 대 보며 투정부리듯이 말했다. 생전 그에게 샘을 내거나 질투하는 걸 본 적 없던 동생이라 채운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 그럼 네 것도 네 형수에게…….”
‘역시!’
만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형이 겨우 이 정도로 당황해 말을 흐리다니. 그리고 ‘네 형수’라는 말이 얼마나 다감하고 자연스러운지. 그 말이 여태 세상에 둘뿐이던 가족에 형수를 집어넣는 말이란 걸 형은 모르겠지?
“에헤, 됐소. 형, 내 형수에게 단단히 삐쳤소. 흥, 형만 운인가? 나도 운인데! 나도 빨리 장가가야겠네. 에잇, 난 색시한테 ‘운’ 대신 ‘만’이라 새겨 달래야지!”
“……!”
“안 가고 뭐해? 형수 기다리겠어. 나도 오랜만에 온 집이라 일찍 쉬려오. 일찍도 아니네. 형도 얼른 가.”
“그래, 쉬어라.”
“응.”
만운은 채운이 돌아서는 걸 보며 침상으로 향하는 척 몰래 창가의 발을 젖혔다. 여름이라 발만 걷으면 저 감각 빠른 형도 어쩌는지 훔쳐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형은 방으로 향하긴 했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문 앞에 그냥 서 있었다. 만운이 보기에 형은 들어갈지 말지를 놓고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왜 저러지?’
무슨 일에든 망설임이 없는, 하물며 해적 소굴에 한 달 넘게 위장 잠입하기 위해 가기 전에도 형에게서는 망설임이란 볼 수가 없었다.
그때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형마저 잃을까 얼마나 걱정했던가. 그러나 형은 무사히 돌아왔고, 이후로도 승승장구 모든 일에 앞서 나갔다.
‘그런 형이 제 방 앞에서 망설임이라니. 역시 형수와 무슨 일이 있긴 한 건가?’
만운은 생소한 형의 모습에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기다리긴!’
채운은 혼인식 날 한 번 본 적 있는 광경을 다시 보고 있었다. 강희의 자세가 앉은 게 아니라 침상에 꼬꾸라져 있는 게 조금 다르긴 했지만 별반 차이는 없었다.
아직 그가 들어오기 전이라 방에는 호롱에 불이 붙여져 있어 강희의 자태가 훤히 비쳐 보이고 있었다.
제 방이라면 강희는 아마 편한 침의를 입거나 아니면 더 간편히 입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까 그가 나가기 전 입었던 그대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얇은 여름옷이라 비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강희의 모습은 시중드는 이들이 지키고 있는 식탁에서도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데, 부부를 위한 침상에 들어와 있는 그녀를 보자 또 다른 의미로 고혹적이고 요염하게 보였다. 눈이 감겨 있어 그녀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도도하게 살짝 올라간 눈꼬리는 변함없어 살짝 그늘진 그 긴 속눈썹이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새근거리는 그녀는 이미 곤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지켜보기만 하면서도 밤새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마당에 피워 놓은 벌레 쫓는 연기를 피해 들어온 모기 한 마리가 그녀의 볼에 앉으려 시도했다.
위잉, 탁.
그는 강희의 볼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 모기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그러자 깊이 잠든 게 아니었던지 강희가 그 기척에 잠이 깨며 뒤척였다.
잠시 멈칫한 채운은 그녀에게 ‘주무시오’ 하고 짧고 차갑게 말하곤 모기장을 내려 주고 바닥에 깔린 이불에 누웠다.
침상을 내주고 이게 무슨 고생이냐 하겠지만 그에게 바닥에서 자는 것이야 숱하게 경험한 일이라 이불이 깔린 것만 해도 호사라 해도 될 정도였다. 그건 그가 잠이 드는 데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러나 방금 전 잠이 깨면서 숨소리가 달라진 강희가 바로 옆에 누워 있다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바깥에서 바짝 말린 이불에선 햇볕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체취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때문에 채운은 그녀를 더욱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강희의 숨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방금 그녀가 깼을 때는 자는 여자를 훔쳐보던 것 같아 민망했지만, 그는 멀쩡한 모기장도 내리지 않고 잔 탓에 모기에 물릴 뻔한 걸 잡아 줬으니 고마워해야 할 것이라 애써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러면서 똑바로 누운 채 잠들지 않은 강희의 숨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다.
저렇게 긴장하고 잠들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뭣 하려 한 침소에 들자고 했을까.
어차피 본채에 드나드는 하인들은 주인 내외가 어떻게 지내는지 다 아는 마당이다. 굳이 만운에게 이런 거짓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을까? 때가 되면 만운도 알아야 할 일인데,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닐까?
강희와 혼사를 결정할 당시 채운이 느끼던 감정은 의무감, 압박감, 그리고 누를 수 없는 증오였다.
그리고 혼사를 얼마 앞두고 강희가 찾아와 그를 놓아주겠다는 말을 했을 때, 처음에는 포장된 말로 교묘히 모욕을 하러 온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하지만 손에 든 이혼장은 진짜라 결과적으로는 다행이라 여겼다. 원하지 않는 여자에게 평생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먼저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혼인 생활에 불화를 보이면 어떨 것이며, 그런 걸 보여야 그녀가 청구한 이혼에 정당성을 주지 않겠는가. 도리어 강희가 저렇게 애를 쓰면서 다른 이들은 물론 동생의 마음까지 사로잡으면 대체 무슨 연유로 나중에 이혼하겠다는 말을, 그 이유를 댈 것인가 말이다.
또 제가 말한 사업을 벌이고서 그 뒷수습은 어쩌려는 것인지?
만약 성공하게 된다 해도 그것은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도중에 팽개치고 가 버릴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사람이나 사업이나 무책임하기 짝이 없었다.
강희가 그에게 다시 언급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들의 혼인 생활에 기한을 두고,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니 대체 그리 열심인 이유가 무엇인지, 무슨 꿍꿍이인지 채운은 의심스럽기만 한 것이다.
강희의 숨소리가 어느새 고르게 되고, 옅어진 것 같았다.
그도 언제 잠이 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긴 밤을 설친 채운은 새벽닭이 울자 곧 강희가 일어나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 * *
본채의 뒤꼍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는 난데없는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이, 임 씨, 거기 그쪽을 더 파 봐!”
“이쪽으로 돌을 쌓으면 되겠어.”
“이봐, 물막이는 언제 가져올 거야?”
공사에 앞서 물길을 찾는 사람을 불러 우물을 파게 하는지라, 집안사람들은 본채 부엌 앞에 우물이 있는데 왜 또 우물을 파는지 모두들 궁금해 했다.
공사는 다름 아닌 그들 주인의 명에 의한 것이라서 사람들은 다들 의아해 하면서도 한 손씩 거들었다.
“영차, 영차! 그건 기둥으로 쓸 나무니까 조심하라고!”
여러 명의 장정들이 달려들어 땅을 파고 돌을 쌓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그리고 우물 공사가 끝나자 바로 그 위로 건물이 세워졌다.
건물은 주인이 손수 세심하게 설계한 대로 건축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건물 안 바닥에는 평평한 돌들을 깔고, 안에서 물을 부어도 바로 밖으로 빠질 수 있는 물길을 냈다. 아궁이와 큰 솥을 걸어 놓은 모습을 보면 작은 부엌을 새로 지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고쿨우리나라 전통 벽난로이 들어서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목간통이 들어앉는 걸 보고서야 사람들은 그 건물의 정체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형, 저거 목욕탕 맞아?”
“맞다.”
“내가 목욕탕 새로 짓자고 했을 땐 지금 있는 거로도 충분하다며? 사치스러운 걸 질색하는 형이 웬일이셔?”
“저건 사치가 아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집에 들어와 살지 않은 탓도 있었고, 겨울에 불편한 건 사실이지 않느냐?”
그렇긴 했다. 새로 지은 욕실 바닥이 어느 님네들처럼 청자 도기를 사용한 것도 아니고, 돌로 깎아 만든 욕조를 들인 것도 아니니.
하지만 사치스럽다고 하긴 뭣했지만 이 삼복더위에 아직 멀고 먼 겨울 타령이라……. 딱 짚이는 바가 있었다.
만운은 절로 능글맞은 표정이 되었다.
“그래?”
오묘한 표정으로 형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만운의 눈길엔 경망스러운 무언가가 떠올라 있었다.
“너, 방금 참으로 건방진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더구나.”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형님! 내가 언제 그랬다고! 난 단지 요. 즘. 같은 때 하루 다섯 번도 하는 목욕에 저 필수불가결한 목욕탕을 이. 제. 야. 만들어 준 저의가 잠시 의아했지만 그래도 감읍할 따름이오. 정말 훌륭하신 우리 형님!”
만운이 강조하는 말에 채운은 잠시 동생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만운이 지레 알아서 몸을 사리더니 넙죽 인사를 하는 것이다.
“네, 그저 감사히 사용하겠습니다!”
그렇게 만운이 외친 말에 채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기색을 읽고 한 눈치 하는 만운이 당연한 말을 덧붙였다.
“어찌 제가 새 목욕탕을 감히 먼저 써 보겠습니까? 당연히 형과 형수가 먼저 쓰셔야지요. 그런데 두 분이 함께 씻으시려나? 나도 얼른 써 보고 싶은데……. 등목이 아무리 좋다고는 하나 저런 좋은 목욕탕을 놔두고 나도 이젠 우물가에서 씻진 않으려오, 응?”
“만운아.”
“응?”
“조잘조잘하는 걸 보니 심심한가 보구나. 그렇게 네가 목욕을 하고 싶어 하는데, 내 어쩌겠느냐. 그 전에 내가 미리 땀을 내 주어야겠다. 뒤꼍 연무장으로 나오너라.”
“아, 아니오, 형님! 대련은 내 오늘 궁에서도 실컷 하지 않았소? 여긴 집이오! 집이란 말이오!”
“네 편한 대로 말을 올려도 소용없다. 딱 반각 기다리마.”
“히잉, 혀엉!”
놀려도 너무 놀렸다.
형수랑 같이 씻을 거냐고 묻는 건 아니었나 보다. 저 목욕탕만 해도 당장 누구를 위해 지은 건지 뻔히 보이는데 너무 들쑤신 건가?
방금 전만 해도 완공된 건물을 둘러보고 느끼던 기쁨이 순식간에 연무장에서 기다리는 대련의 두려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형을 놀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느라 집에도 연무장이 마련되어 있다는 걸 깜빡한 탓이었다.
“휴우, 앞으로 수위를 좀 조절해야 할 것 같구나.”
처량하게 중얼거린 만운은 칼을 찾아 쥐고 터덜터덜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형을 놀리지 않겠다는 생각은 않는 것이 바로 만운이었다.
새 목욕탕에 든 애심은 탄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세상에, 어쩜! 납작한 돌 사이에 동글동글한 돌들을 깔아서 미끄러지지도 않겠네요.”
“그렇게 좋으냐?”
강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애심에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요, 좋다마다요. 마님 친정의 욕실에야 비하지는 못하지만 바닥이나 벽이 청화 자기가 아니어도 전 좋기만 합니다.”
“…….”
강희는 아직도 친정이란 말을 들을 때면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그 말은 정말 혼인한 여자만 쓸 수 있는 말인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그곳이 내 집도 친정도 아닌 그저 아버지의 집이란 생각이 들 뿐이어서 친정이란 말이 참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애심이, 넌 며칠 전 갔던 계곡에선 그보다 더 좋은 데는 없다고 하지 않았니?”
“호호, 마님도. 그거야 거긴 또 다른 맛이 있는 것이고요. 아무튼 새 목욕탕이 생겼으니 마님은 거기 다시 가지 않으시겠네요?”
“음, ……그럴 것 같구나.”
당장 생각은 그럴 것 같았다.
이 말을 듣자면 채운의 궁리가 성공한 것이라 보아야겠다.
“그럼 주인님께서 마님이 쓰시던 목욕탕이 불편한 걸 아시고 새로 지어 주신 건가?”
“응? 무슨 소리니?”
애심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냥 혼자 해 본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젠 난초 향유를 양껏 써도 되겠지요? 이게 마님의 뽀얀 피부를 더 빛내 줄 겁니다.”
“그렇다고 그런 걸 함부로 쓰면 되겠니?”
강희의 뽀얀 피부는 같은 여자가 봐도 탐스러울 만치 매끈하게 빛났고, 같은 여자가 봐도 침이 넘어갈 정도였다. 애심은 그런 강희의 시중을 드는 것이 은근한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강희가 이전과 가장 달라진 점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사치를 가장 경계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엔 물 쓰듯 하던 향유를 가끔 쓰는 것조차 꺼리는 게 애심으로서는 안타깝기만 했다.
“네, 네, 그럼 특별한 날에만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처음 목욕탕을 쓰는 오늘도 특별한 날로 쳐도 되는 거죠?”
“그래.”
결국 강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심은 강희보다 다섯 살이나 더 많았지만 어떨 땐 그녀보다 더 아이같이 굴 때가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대답에 애심은 신이 나서 목간통 안에 향유를 붓고 물을 찰박거렸다.
목간통엔 옆 칸에서 불을 지펴 따뜻해진 물이 가득 찼고, 다른 한쪽에 놓인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은 또 손이 시릴 만큼 차가웠다.
‘이전 꿈속의 그녀가 이곳에 새로 지었던 목욕탕은…….’
비교를 하지 않겠다.
서방님이 새로 지어 주신 이 목욕탕이 더 맘에 들었다.
‘이런 걸 다 지어 주시다니. 아냐, 설마 이 욕탕을 나를 위한 것이라 착각이라도 할 생각인가? 도련님이 집에 들어오셨으니 만든 것 아닌가.’
유달리 깔끔한 성격이었던 만운을 기억해 낸 강희는 타당한 이유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고쿨을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저기에 불을 지피면 얼마나 더 운치가 있을까.’
아마 한 번의 겨울을 나는 동안은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단 한 계절뿐. 그 불꽃은 새 주인을 위해 피어오를 것이고, 이곳은 그 진짜 주인의 새 향으로 채워질 것이다.
목욕탕엔 난향이 슬금슬금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희의 눈 너머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는 고쿨의 불빛만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만운은 오늘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막 목욕을 끝낸 형수가 안방 맞은편 부속채로 향하는 걸 본 것이다.
그것까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볼일이 있겠거니 하고 지나갔지만 다시 그곳을 지나갈 때 본 장면은 정말 이상했다. 형수는 그 방에서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는지 달라진 차림새로 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두드려 보고 나서 문을 여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안방 앞에서 형수가 차리는 예의가 조금 과해 보였다.
저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행동이 아니었다.
자기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방금 전 형수가 부속채의 방문을 열 때의 바로 그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가 집에 온 이후 날이 갈수록 눈 밑이 푸석해지는 형수의 얼굴에 야릇한 생각으로 형을 음흉하게 쳐다보았건만 그건 애꿎은 상상이었던가 보다.
며칠 전 보았던 형의 모습과 형수가 방 앞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이 서로 닮았던 것이다.
“흐응.”
고개를 갸웃한 만운이 가늘어진 눈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못마땅하다는 소리를 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애초에 그가 짐작하며 기뻐하던 그 감정 때문이 아닌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실은 각방을 쓰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형수와 형의 눈에 깃든 것은 서로를 향한 마음인 게 확실한 거 같아 보였는데…….’
만운은 이제 형이 왜 벼려진 것처럼 날카로워 보였던 것인지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정략혼의 폐해가 아닌가 말이다. 둘이 혼전에 서로 마음을 키울 시간이 없었으니 이렇게 된 걸지도 몰랐다.
역시 정략혼이란 할 게 못 되었다.
한방을 쓰는 척하려니, 둘 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형수의 얼굴이 그 모양이 된 것일 테고, 형조차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형수의 얼굴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니 이건 자신에게 보여 주기 위한 위장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런.”
만운은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혹시 심하게 내외하는 것인가? 설마 첫날밤조차 치르지 않은 건 아니겠지? 여태 아무 일 없었으려고.”
하지만 그의 형이라면 그런 의심도 해 볼 만했다. 혼인 전에는 형수에 대해 질색하던 걸 채 감추지도 못하던 형이었으니.
지금은 아닌 것 같은데도 왜 그러지?
“에잇, 설마 평생 저러진 않겠지. 저 고운 형수를 옆에 두고 무슨 짓이래, 바보 형.”
만운은 자신이 집에 자주 있는 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둘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좀 더 궁에 머물러야 하는 건지 잠시 고민해 보았다.
‘나에게 보이기 위해 억지 합방이라…….’
고민할 것도 없었다.
만운은 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이 집에 있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