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시나브로
그날, 집에 돌아온 채운과 함께 식사를 하던 강희가 수란의 혼사를 논의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서방님?”
“말씀하시오.”
채운이 무뚝뚝하긴 했지만 그는 강희가 저를 부르는 말을 무시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인사말만 하던 처음과는 달리 강희는 요즘 제법 용기를 내어 소소한 얘기를 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물론 제 기준으로지만.
“저희 집에서 저와 함께 온 하녀 수란이라고 아시지요?”
“……알고 있소.”
혼사를 하면 보통 집안의 위세에 따라 십여 명 이상의 하인과 하녀를 딸려 보내기도 하여 강희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단 두 명의 하녀만 데려왔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애심이라는 하녀는 자주 봤고 옆에서 이름도 들어 알지만 수란이라는 이름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해서 답이 늦었다.
채운은 강희가 보름도 안 되어 거의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집안사람들 얼굴과 이름을 다 익힌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단둘인 하녀의 이름도 몰랐던 것이 무안하여 그녀에게 더욱 딱딱하게 답했다.
그러고는 워낙 무뚝뚝한 제 답이 후회되어 헛기침이라도 하려는데, 강희가 먼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수란은 원래 한두 달 있다가 집에 돌려보내려 했었는데 이번에 혼인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렇소?”
채운은 멀뚱히 대답은 하면서도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희가 하는 말 중 집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친정이 아니라 아직도 그곳을 집이라 말하는 것인가. 시집을 왔으면 당연히 이곳을 집이라 해야 하거늘.’
채운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네, 그런데 그 상대가…… 서방님의 종자인 길석이라고 합니다.”
“……길석이와?”
엉뚱한 생각을 하느라 놀라는 것이 조금 늦었지만 채운은 강희가 하녀의 혼사 같은 일을 왜 자신에게 말하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강희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곤 했지만 필요한 말 이외엔 하지 않았다. 그녀의 나직하고 청량한 목소리는 아침저녁 인사말과 그날 식사에 올린 것 중 싫어하는 게 있는지, 다음 날 다른 음식을 차리려는데 괜찮은지 묻는 정도 말고는 잘 들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말이 많아졌다고 생각한 건 강희의 기준일 뿐인 것이다.
그는 강희가 듣기 좋은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자신에게는 무척 아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하지만 자기가 직접 뭐라 말을 건넬 생각은 하지 못하고 내심 못마땅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얼마 전엔 강희가 꽤 망설이면서도 자신이 아직 요리 솜씨가 부족해 전국의 국수 요리를 모아 둔 책이 있어 해 보려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만드는 연습을 열심히 할 테니 먹어 보겠느냐?’라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그때 채운은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라고 또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덕분에 근래 들어 그의 상에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을 것 같은 국수 요리가 자주 올라오는 것을 기꺼이 여기고 있었다.
그는 식탐이 별로 없는데도 유독 그 음식 한 가지가 그렇게도 좋았던 것이다.
사실은 강희가 말한 그런 책은 없었다.
송국에는 여러 종류의 요리법을 적은 책이 있다지만 그것도 국수 요리는 유명한 극히 일부만 적혀 있을 뿐이었고, 책 자체가 귀한 터라 강희는 일부러 구해 그 부분만 따로 발췌해 모으느라 몇 날을 애써야 했다. 그런 이후 애심과 또 몰래 시전을 돌면서 각종 국수에 대한 비법을 배워 와 직접 책으로 엮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채운은 요즘 병영에 있는 게 더 나았던 것 같다고 생각한 건 이미 까마득히 잊고서 그가 이전에 막연히 상상했던 혼인한 남자로서의 여유가 무엇인지 몸소 겪고 느끼고 있었다.
제일 큰 이유로, 집에 들어오면 느껴지는 따뜻함과 돌아왔다는 안정감이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식사를 함께하며 편하게 일상에 대해 말을 나누는 건 동생과 스승님 말고는 강희가 처음이었다. 왕세자와 함께하는 자리는 대화가 언제나 정국에 대한 화제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병사들은 그를 어려워했다.
그렇기에 채운이 자신에게도 이런 편안함을 주는 일상이 주어질 수 있다는 걸 혼인하고서 처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걸 전혀 기대하지 않던 여자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다만 그가 그런 혼란스러운 생각에 허우적대는 걸 눈치채지 못한 강희만 수란과 길석에 대해 더 의논하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이 따로 지낼 방도 필요하고, 너무 더운 때는 피하려고 팔월 말이나 구월 초쯤 날을 잡았으면 하는데, 서방님 생각은 어떠세요?”
“집을 따로 지어 나간다고 하지 않고 여기서 살겠다고 하오?”
‘그렇게 하시오’라고 간단히 답하면 될 일이었지만 채운은 강희에게 일부러 질문을 했다. 그래야 그녀가 그에게만은 유독 아끼는 그 인색한 목소리를 한마디라도 더 들을 수 있으니.
그녀를 매일 보고 있긴 하지만 얼굴만 흘끗 보는 건 답답할 정도로 부족했다. 그의 가슴 어림을 간질여 주는, 작은 미소를 머금은 입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어야 그의 가슴에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이다.
그것도 요즘엔 뭔가 점점 더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지만.
“네, 수란은 물론이고 수란을 통해 길석에게도 물어봤어요. 두 사람 다 강력히 원하던 터라 저도 서방님만 허락하시면 그리하기로 했어요.”
뭐라 더 말해도 좋으련만 그녀는 그걸로 입을 다물었다.
저 나이의 여인네들은 재잘재잘 종일 떠들어 시끄럽기가 한량없다는데, 그의 아내는 도통 말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아까운지 저러고 끝나는 것이다.
“알았소. 당신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소. 아무튼 집안의 경사이니 나도 신경 쓰겠소.”
“네, 감사해요.”
주인 내외의 대화가 일단락되자 그사이 애심이 차를 내왔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마시고 일어서야 하는데 채운은 다 마시고서도 그냥 앉아 있었다.
실제로는 그녀의 눈을 피해 그녀가 들고 있는 찻잔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그것을 보고 있는 이유를 모르는 이가 본다면 노려보고 있다고 여길 정도로.
이를테면 강희처럼.
강희는 자신이 차를 너무 늦게 마셔서 그런가 싶어 괜히 흠칫했다. 허나 뜨거운 차도 아닌데다 사실 그녀도 채운이 마시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벌써 깨끗하게 비운 뒤였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그녀의 찻잔을 노려보는 것이다.
“서방님, 차를 한 잔 더 드릴까요?”
강희는 그가 다른 날과 조금 다른 것 같아 어색하게 눈치를 보았다.
“음, 한 잔 더 주시오.”
매번 됐다거나 바로 일어나던 사람이 한 잔 더 청하기는 처음이었다.
강희는 차 주전자가 벌써 미지근해진 것 같아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차 주전자를 신경 쓰느라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채운은 그것을 따르는 그녀의 품새에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옷은 안에 여러 겹 덧대져 잘 비치지는 않았지만 여름철이라 팔 쪽은 외겹이었다. 그래서 속이 훤히 비쳐 보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강희가 입은 옷이 아까부터 그를 심란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운 날씨에 땀내가 날 법한데도 강희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체향은 그를 달뜨게만 했다.
강희가 입은 옷이 다른 여인네들에 비해 문란하거나 선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병영에서 보면 소매를 어깨까지 걷고 있는 젊은 여인네들도 종종 볼 수 있었으니, 강희는 그런 노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며칠 전부터 조금씩 가벼워지는 옷차림에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가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내인지라 병사들이 유곽에 출입하여 소란을 떠는 것도 엄히 관리하는 이였고, 특히 아내나 정인이 있는 남자가 그런 곳에 드나드는 것을 매우 경시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문득문득 그런 곳에 들어 몸을 풀고 싶은 충동까지 느껴졌다. 가끔 집으로 향할 때는 더욱 절제하기가 힘들어 그런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바로 그가 그렇게 경시하던 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다 성강희란 이 여자 때문이다.
그러면서 집에 돌아와 저를 반기는 강희의 인사를 듣노라면 제가 느끼는 그런 속된 충동까지도 그녀에게 화살을 돌리는 자신의 졸렬함이 부끄럽기 짝이 없게 느껴지곤 했다.
더 심각한 점은 그런 혼란스러움이 줄어들지 않고 점점 심해진다는 것이다. 특히 어젯밤 이후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지난밤이었다.
채운은 며칠째 마음이 싱숭생숭해 마당을 하릴없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들리는 물소리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가 밤새 잠을 설치게 됐다.
그것은 순간의 호기심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찰팍찰팍.
그리고 부속채의 창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무언지 안 순간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무언가가 그를 붙잡는 것 같았다.
처음 물소리와 함께 소곤거리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자리를 피했어야 했다. 그러나 애심의 말소리가 들리며, 그는 땅에 발이 붙잡힌 듯 그곳에 붙박이처럼 계속 서 있었다.
“마님, 벌써 이렇게 더워서 어떡한대요? 하지만 아무리 더워도 밤엔 시원하니 살 것 같아요. 그리고 이리 물을 끼얹으니 정말 시원하시죠?”
“…….”
그때 강희의 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물 끼얹는 소리와 함께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채운은 그것이 강희의 웃음소리라는 걸 깨닫고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안에서 펼쳐지고 있을 모습이 절로 상상되어 머리로 피가 솟구칠 것 같았다.
‘내가 누굴 상대로 이 말도 안 되는!’
자신의 망상에 급히 발을 떼려는 그에게 다시 애심의 말소리가 들렸다.
“마님, 산 아래쪽 계곡이 그렇게 시원하다고 해요. 별로 멀지도 않고요. 물도 얕고 멱을 감기도 좋고 인적도 드물다고 하더라고요. 내일은 수란이와 가 보려고 하는데……. 마님도 가실래요?”
“그렇게 좋은 데가 있어?”
이번엔 강희의 목소리도 또렷이 들렸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이 애심의 말에 무척 혹한 것같이 들렸다.
“네, 주경이랑 세원이, 무인이는 요즘 이틀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간대요. 그리고 하린댁 아주머니도 가끔 가신다고 하셨어요. 수란이가 아이들이랑 같이 갔다 와서 길을 안다고 해서 저도 같이 가 보려고요.”
“그래? 하지만 정말 보는 사람이 없을까? 그래도 거긴 바깥이잖니?”
“거긴 정말 외진 곳이라서 아는 사람도 드물대요. 더구나 그곳까지 주인님의 사유지라 아무나 함부로 못 들어와요. 그래도 정 걱정되시면 발만 담갔다 오셔도 되지요. 그렇게만 해도 얼마나 좋은데요?”
“그럴…… 까?”
그는 귀족적인 제 품행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그녀가 설마 저런 말에 넘어가랴 싶었지만 망설이던 강희의 대답은 그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그도 앞마당에서 훌렁 벗고 등목을 할 수 있는 남정네이기에 자신들보다 꽉 막힌 생활을 강요당하는 여인에게 이것이 얼마나 강한 유혹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아니, 정숙한 귀족 마나님이 야심한 밤에 다 트인 공간에서 무얼 한다는 소리인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채운은 순간 솟구치는 화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자니 여인들이 목욕하며 하는 수다를 밖에서 다 듣고 있었다는 게 바로 들키지 않겠는가. 그리고 저 여자가 밖에서 무얼 하든 말든 그가 간섭할 일이 아니…….
‘아니, 당연히 간섭할 권리가 있다!’
그의 마음 한구석이 버럭 화를 냈다.
비록 시간제한이 있지만 그 일 년 동안 강희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할 그의 안해가 아닌가. 그러니 함부로 나돌아 평판에 금이 가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그의 뇌리 속엔 혼인 전엔 절대 그녀에게 신경 쓰거나 상관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던 것들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분별없는 감정이 그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사나운 소유욕이라는 건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파스스 쥐가 지나가는 소리에 문득 주위를 환기한 채운은 목욕하는 여인들의 옆에 몰래 서서 엿듣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서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가.’
채운은 그제야 붙박이처럼 서 있는 곳에서 발을 떼고 돌아설 수 있었다.
저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에 혀를 차며 방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결국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트기도 전 이른 새벽부터 뒷마당에 나가 칼을 휘둘렀고, 아침에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도 무안해 일찌감치 궁으로 향했던 것이다.
채운의 정확한 지위는 상장군으로 국왕의 친위대인 용호군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인 청왕이 수수왕의 위諱가 세자가 될 당시 그에게 넘겨주어 현재 용호군은 왕세자의 사병화가 되어 있었다.
현재 왕세자의 근거지는 왕이 머무는 중앙궁이 아닌 서궁이었다. 서궁은 동, 서, 남, 북, 중부의 다섯 개 성 중 하나로 채운의 집에서는 한 식경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궁에서 집이 가까운 탓에 그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나 신혼이라고 다들 신경 써 주는 덕분에 떠밀리듯 가야 할 때도 있었다.
채운이 혼인 후 아예 집으로 거취를 옮긴 것도 있지만 강희 때문에 집은 그에게 또 다른 의미가 되고 있었다. 따스하고 안락함을 느끼는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는 의미와 또 혼란스러움을 주는 이가 있어 돌아가기 꺼려지는, 그런 이중적인 감정이었다.
그는 강희라는 여자 때문에 겪는 이 너무나 상반되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감정이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 여자 때문에 자신이 이토록 우왕좌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앗, 졌소. 졌습니다, 장군님!”
만운이 목 아래로 드리워진 칼끝에 항복을 외쳤다.
방금 전 검이 스친 만운의 팔 아래쪽에서도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채운은 그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그 혼란스런 감정을 대련을 하고 있는 칼끝 아래 풀고 있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아직 수양이 부족하구나.’
“…….”
동생에게 겨눴던 칼을 거칠게 거두는 그의 얼굴엔 착잡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만운은 갸웃하며 형을 쳐다보았다. 살짝 스친 칼에 입은 상처는 대단치 않았지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형과 대련을 하며 이 정도의 일은 허다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거칠게 몰아치는 건 평소의 형답지 않은 일이었다.
“형님, 무슨 일이 있는 게요?”
형의 낌새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이자 만운이 채운에게 말을 슬쩍 높여 가며 물었다.
“아니다.”
만운은 잠시 생각을 굴려 보았지만 형이 이상해 보일 만한 특별한 일이 무엇인지 금방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가흔 왕자와 최사립 측의 도발은 언제나 있어 왔던 거였고, 도성 외곽의 훈련 병영은 훌륭하게 다 지어져 병사들의 질이 높아지고 있었다. 훈련 중 사고는 종종 있었던 것이고, 최근 특별히 큰 사고나 부상을 입은 병사도 없었다. 백부장 중 새로 천부장이 된 이들의 훈련도 차질이 없었다.
그렇게 주위의 일들을 정리하자 형의 주변에 있을 특별한 일이란 딱 한 가지로 귀결되고 말았다.
바로 혼인.
혼사를 치르면 사람이 좀 부드러워질 법도 하건만 형은 날로 더 날카롭게 벼려지는 것 같았다. 만운은 역시 소문의 그 여자와 혼인을 한 것이 형을 망친 게 아닌지 슬며시 걱정스러워지고 있었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지? 형수님과 무슨 일이 있는 거요? 역시 소문처럼 그런 여자라…….”
“그만. 말을 조심해라, 만운.”
만운은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가장 사랑하는 핏줄이지만 채운은 그래도 동생이 그녀를 폄하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무엇보다 만운의 짐작처럼 그녀가 잘못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만 자신의 말에 더 날을 세우는 채운의 대답에 만운은 자신의 짐작이 맞다고 넘겨짚었다.
‘역시 그 여자가…….’
만운은 왕세자의 곁을 지켜야 하는 임무가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신혼인 형을 위해 일부러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지금 형의 모습을 보니 그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혼인식에서 봤을 때는 조신하니 예뻐 보이더니 그 형수라는 여자, 역시 소문대로 망종인 여자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을 내린 만운은 기분이 마구 나빠져 형이 아직도 무언가 생각에 잠긴 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까지는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이라도 집에 들어가서 당장 그 여자의 주리를 틀어 볼까?’
만운의 얼굴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혼인식장에서 여러 손님들을 붙들고 농을 하면서 저렇게 예쁜 여자랑 혼인하다니 우리 형은 복 받은 거라고 너스레를 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당치도 않은 생각이지만, 그는 그 여자가 형을 못살게 군다면 제 아비의 부와 제 예쁜 얼굴만 믿고 설친다는 그녀의 얼굴에 칼자국을 내줄 의향도 있었다.
만운은 형처럼 왕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중심은 형이고, 형의 의지에 따라 생각과 의지가 움직이고 있었다. 형은 그에게 우상이고 부모이며, 스승이었다.
만운이 충성을 다하는 이는 바로 제 형이었다.
아직 좀 두고 보긴 해야겠지만 만운은 형을 괴롭히는 여자를 그냥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눈엔 적을 앞두고 있을 때처럼 불꽃이 확 일어났다.
만운이 강희를 두고 하는 애먼 생각들은 일견 유치해 보이긴 했지만 그는 얼마든지 그런 사고를 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치기 어린 열여덟의 어린 나이만 해도 그렇고, 냉정하고 침착한 성질을 가진 채운과는 달리 만운의 성질은 단순하고 또 그만큼 다혈질이었다.
“형, 나도 이제 집에 갈래.”
“응? 저하의 곁은 어쩌고?”
“사람이 형이랑 나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 훈련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무예가 출중한 호위대가 항상 대기 중이니 이제 순번을 돌아가며 호위를 해도 될 것 같아.”
“사람이 부족한 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해서지.”
그러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채운은 만운을 보며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냐, 네 말이 맞다. 네 나이에 벌써부터 밖에서만 떠돌게 할 수는 없지. 그럼 호위 편성만 점검하고 집에 들어올래?”
만운은 역시 이상해 보이는 형을 갸웃하며 쳐다봤다. 집에 빨리 들어가서 그 형수라는 여자의 면상을 빨리 봐야 이상해진 형의 확실한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어, 그럴게. 오늘은 아니고, 저하께 보고도 하고, 한 이삼 일 걸릴 것 같아.”
“그래, 그럼 네가 집에 들어온다고 알려 둘게.”
“응?”
“강희……. 아내도 널 맞을 준비를 하게 해 줘야지.”
채운은 마음속으로 ‘강희, 강희’ 하며 아내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나와 흠칫했다.
하지만 엉뚱한 쪽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만운에겐 그런 게 들리지도 않았다.
“어, 음, 그렇구나.”
만운은 제집에 제가 들어가는 걸 알려야 할 일인가 싶었지만 눈치껏 그리 묻지 않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엔 제대로 덤벼 볼 테냐?”
“좋아, 나도 이제 만만치 않을 거라고!”
“그래, 어디 만만치 않은 호위군 실력을 한번 볼까?”
서로 엉뚱한 상념에 잠긴 채 형제는 칼을 부딪치며 진지하게 대련에 임했다.
그리고 채운이 그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궁에서 나오는 입구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채운은 언뜻 여인이 보이긴 했지만 그녀를 병사들 중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가 채운을 보더니 그를 향해 달려왔다.
“윤 장군님!”
채운은 여인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말을 멈추고 내려섰다.
“뉘시오?”
“저는 한만식 천부장의 여동생 한재영이라 하옵니다. 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때 그? 당시 한만식 부장은 어머니를 뵙고 돌아왔다 들었소.”
“네,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고 얼마나 떨었던지. 후에 오라버니껜 괜한 소란을 떨었다 책을 들었지만 덕분에 어머니는 기력을 찾고 회복하고 계십니다.”
“그것 참 잘되었군. 다행이오. 그런데 이번엔 무슨 일이오? 한 부장은 아직 그 병영에 있고, 시간에 맞춰 간다면 면회가 가능했을 텐데?”
“이번엔 오라버니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장군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나를 말이오?”
“네에…….”
수줍게 고개를 돌리며 볼을 붉히는 재영의 모습은 참 단아하고 예뻤다.
문을 지키던 문지기 병사들은 아까부터 그녀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감히 아녀자를 희롱하다 걸리면 군법에 회부되기에 그저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재영은 채운을 불러 세우고 나서는 주춤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무표정인 채운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그대로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 그가 세워 둔 말이 푸르륵거리며 몇 발자국 움직였다. 가만히 있으니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용건을 재촉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저, 이것을.”
재영은 결국 손에 들고 있던 보자기로 곱게 싼 네모난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저 성의입니다. 정말 그때 너무너무 감사해서……. 정말 별것 아닙니다. 주전부리 몇 개 넣었습니다.”
그러나 채운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고맙소. 마음은 받겠소. 허나 사사로이 함부로 이런 걸 받을 수는 없소.”
아무리 별것 아니라도 이런 걸 받았다간 부하의 가족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오해나 살 일이었다.
“그럼 받으셨다가 병사들에게 나눠 주셔도 됩니다. 그저 성의이니…….”
“그래도 안 되오.”
그의 딱딱한 거절에 재영은 차마 다시 권하지 못하고 그에게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뿐이었다.
“정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어머니가 완쾌하셨다니 기쁜 일이고, 그 인사는 말로도 충분하오.”
“……네.”
그러고서 채운은 재영을 무심히 일별하고는 다시 말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뒤에선 재영이 그가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었고, 보초로 섰던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성의라는데 좀 받지.”
“그러게. 나 같으면 그런 감사는 받아도 될 것 같다.”
“당연하지, 안 받겠냐?”
“낄낄낄.”
그런데 그렇게 웃는 그들에게 그 여인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병사들은 자신들을 통해 장군님께 다시 한 번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려는가 싶어 곤란한 얼굴들이 되었다.
그러나 재영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에게 보따리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 수고하시는 병사님들께 전해 드려도 될까요? 방금 보셔서 알지도 모르지만 성의의 물건이지 수상한 건 아니랍니다.”
재영에게서 얼결에 보따리를 받아 든 병사들은 곱게 인사를 하고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보따리를 풀자 그 안엔 색색의 강정과 경단이 가득 들어 있었다. 보따리는 제법 묵직하여 번을 서는 병사들이 모두 주전부리로 나눠 먹을 양은 충분했다. 그들은 그것을 서로 나눠 먹으며 그 솜씨와 아가씨의 마음씨를 칭송했고,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것은 강희가 알지 못하는 사연이긴 하나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채운은 그때에도 재영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어스름하게 해가 지고 있는 밤에 여인네를 혼자 보내기가 그래서 멀찍이서 뒤따르며 그녀가 집까지 가는 길을 직접 살펴 줬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다른 날보다 더 빨리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채운의 마음속엔 재영의 일은 어느새 지워지고 오직 한 가지 생각만 가득 차 있었다.
‘그래, 오늘 밤 계곡에 갈 거란 말이지?’
집으로 가는 길이 더 멀게 느껴지는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 저녁이 다른 날과 달랐던 건 그래서였다.
요 며칠 끙끙 앓는 것 같은 길석이 혼인한다는 말은 놀랍고 축하할 일이었다.
길석은 그가 꽤 오랫동안 곁에 두었고, 아끼는 종자였다. 다른 때라면 이 소식에 길석을 당장 불러 저한테 먼저 말하지 않은 괘씸함을 몇 마디 짓궂은 말로 괴롭히는 것으로 풀고서 축하하는 의미로 한바탕 굴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놀라운 소식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듣기는 했기 때문에 길석을 굴리려는 계획은 유효했다.
그렇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두 번째 차를 다 마시고도 채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채운이 무슨 할 말이 있는 거라 생각한 강희는 그가 할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한 공간에서 말없이 둘만 있는 어색함이 조금 지나자 콩닥콩닥 다른 감정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하지만 저를 싫어하는 남자에게서 기대할 감정 같은 건 애초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 년 후 놓아주겠다고 약속한 자신이 그에게 감정을 느끼다니, 그 감정이 무엇인지 강희는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그렇다.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좋았다.
굳게 다문 입매가 잘 열리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처음 있는 일이라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고 조금 두렵기는 했지만 강희는 이 순간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의 턱 선을 훔쳐보던 강희는 그가 입을 열자 흠칫했다. 흡사 저도 다 모르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오늘 성 대감…… 을 만났소.”
혼인 전부터 사위, 사위 연발하며 그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성 대감에게 채운은 장인이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코 나온 호칭에 아차 했지만, 강희는 그가 그녀의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엔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마음이 더욱 불편해진 채운은 그녀의 잔잔했던 표정이 그가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에 반색하며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네? 아버지를요?”
“당신의 안부를 궁금해 하셨소.”
“아…….”
강희의 표정이 아련해지고 있었다.
아버지.
그 한마디로 마음이 아픈 것이다. 꿈속이라 현실에선 없었던 일이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마차에 뛰어들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녀와 함께 살던 그분이었다.
반역자로 폐인이 되어 쫓겨난 후, 아버지는 정신을 놓고 헛소리를 하시곤 했지만 가끔씩 옛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해 주시기도 했었다.
널 낳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리고 돌도 안 되어 어미를 잃어 그 불쌍한 핏덩이가 얼마나 가여웠는지, 그래서 떠받들기만 해서 그녀를 망친 건 아닌지.
안타깝게 읊조리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한 것이다.
권력과 부에 욕심이 많고 잘못된 선택을 해서 파멸한 분이었지만 결국 그녀와 생의 거의 마지막을 함께한 분도 아버지였다. 지금은 거의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 부녀간이었으나 그 기억을 갖고 있는 강희에게는 아버지의 존재가 무겁고 애틋했다.
아버지가 평생 부와 권력만 추구했던 이유도 늦둥이인 자신을 낳고 부인을 잃은 탓에 매달릴 목표가 그것밖에 없었던 탓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채운과 이혼하면 아버지께 내쳐진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더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아버지가 무사하시길 바랐다. 다시 그런 허망하고 비참한 마지막을 맞게 할 수는 없었다.
채운이 돌변하여 아버지를 가까이한다 해도 아버지의 상단을 편파적으로 도울 성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수왕이 그것을 허용할 리도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릇된 욕망이 커지던 것도 꿈속의 그녀가 아들을 낳은 뒤부터였으니, 채운과 이혼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막을 여지는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생각을 하느라 아직 그와 대화하는 중이었다는 것조차 잊고 있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근시일 내 뵙고 와도 좋소.”
채운은 부녀간의 정이 어땠는지는 몰랐지만 아버지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눈물을 글썽이는 강희를 보니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아니……. 네, 그럴게요.”
사양하려던 강희는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추진하려던 사업에 아무래도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러자면 채운에게도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먼저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선결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먼저 그걸 타결한 후 채운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채운은 그런 강희를 보며 마음이 또 슬쩍 불편해지는 것이다. 친정에 가란다고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얼마나 머물다가 오려는지, 그 생각을 하자 스멀스멀 기분이 나빠졌다.
하긴 더운 여름에 목욕도 시원하게 하지 못해 계곡에 찾아가려는 여자인데, 그 좋은 집에서 여름을 다 보내고 오려 할지도 모른다.
본 적은 없지만 성 대감의 집 안엔 왕궁에 버금가는 호화로운 욕실이 있다고 했다. 그의 집도 작은 편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건 자신의 기준일 뿐, 성 대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런 집에서 살다가 온 여자이니.
그때 강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아버지께 미리 기별을 하고 집에 계신 날을 잡아 다녀올게요. 요즘은 해도 일찍 뜨고 늦게 지니 아침 일찍 출발했다가 서방님 퇴궁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강희가 하는 말을 들으며 내심 괜히 가라고 했다고 후회하던 채운의 찌푸려진 입매가 절로 풀어졌다.
이런 식으로 조잘거리며 말할 줄도 아는 여자였던가.
하룻밤 머물고 와도 좋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 말은 그의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빨리 다녀올 수 있도록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를 준비하라 일러야겠군.’
그는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전할 말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그리고…….”
“……?”
하지만 그는 채 다 말하지 못하고 말을 멈추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하며 동그랗게 뜬 강희의 눈이 약간 치켜 올라간 그녀의 눈매를 강조하면서 일견 요염해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다 얇은 그녀의 옷과 곱다란 자태가 어우러져 선정적인 기운까지 풍기는 것이다.
밖에서는 해가 완전히 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우는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마저 그런 그의 야릇한 기분을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채운은 그 짧은 사이 속으로 칼을 열두 번은 더 갈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바로 지금, 마음을 닦는 일환으로 칼을 갈 때나 기울이던 정심을 모두 쏟아야 할 만큼 아슬아슬한 무엇이 그를 자꾸만 침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 흠, 내일이나 모레 동생이 집에 들어올 것이오. 그래서 당신이 조금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오.”
그 말에 강희는 기억 속의 만운을 떠올리며 반색을 했다.
“도련님이 드디어 집에 오세요? 서방님도 그러하시지만 도련님은 아직 연치도 어리신데 중책을 맡아 집에 들어오시기도 힘들다고 하린댁이 항상 걱정이었어요.”
“알고 있소.”
꿈속의 그녀는 만운을 제가 벌레보다 못하다 생각하는 천민들보다 더한 정도로 천대했다.
그리고 만운은 그녀보다 더욱 그녀를 경멸하고 미워했다.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알아서이기도 하지만 채운에게 들어 그녀의 만행에 가족을 잃어야 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희는 혼인식 때 만운을 잠시 스치듯 봤기 때문에 그가 지금도 과거의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잘 몰랐다. 사실 그가 알고 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혼인식 때 봤던 만운의 얼굴에선 꿈속에서 항상 그녀에게 보였던 경멸 섞인 증오는 볼 수가 없었다.
‘아직은 모르시는 거겠지?’
강희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가 후회하는 일 중에 만운의 일도 있었던 터였다.
“도련님이 원래 쓰시던 방을 계속 쓰시는 거죠? 별채가 도련님의 것인 건 알지만 그건 도련님 혼사 후에 쓰실 곳이라고 알고 있어서요.”
“맞소. 그런데 그 때문에 할 말이 있소.”
“네, 말씀하세요.”
“만운에겐 우리의 혼사가……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고 싶소.”
“아!”
강희는 속삭임 같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세상에서 동생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채운이 그런 생각을 하리란 걸 알았어야 했는데, 자신은 여태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운이 집에 들어올 때는 당신이 본채에, 안방에서 기거했으면 하오. 불편하겠지만 그래 주시오.”
“네? 네, 그래야지요.”
생각지도 못한 그와의 합방에 놀라고 당황한 강희의 마지못한 대답에 채운의 표정이 확 굳어져 버렸다.
“당신이 무얼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소. 허나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오!”
“…….”
그에 강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는 하릴없이 다 마신 찻잔만 다시 입에 댔다.
“그럼 내 먼저 일어나겠소.”
“네, 서방님. 쉬셔요.”
채운은 강희의 인사를 뒤로하고 성큼 밖으로 나왔다.
성급한 건 풀벌레뿐만이 아닌지 해지기도 전에 뜬 달이 저만치 걸려 있었다. 달이 유독 밝고 둥근 게 해가 완전히 져도 밤이 밝을 것 같았다.
‘강희와 함께 방을 쓴다라…….’
생각지도 않게 불쑥 충동이 일어 한 말이지만 무척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낮에 대련하며 잠깐 비춘 것이긴 하지만 동생은 소문을 듣고 아무래도 강희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각방을 쓰는 걸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만운이 걱정할 일이었다. 만운이 걱정할 만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방을 쓰면 야밤에 함부로 계곡에 갈 일은 생각지도 못할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생각도 못하겠지. 문제는…….’
당장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뒤뜰을 서성이며 난생처음 하는 낯선 고심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녁나절부터 그렇게 뒤뜰에 나와 계속 서성이던 채운은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 강희가 수란과 애심과 함께 집 뒤로 나가는 것을 보고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 *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린 강희가 향한 곳은 애심이 안달하며 가 보고 싶어 했을 만큼 맑고 시원한 계곡물이 기다리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와, 근처에 온 것만으로도 시원하구나.”
“정말 그렇지요? 오시길 정말 잘했지요, 마님?”
벌써 손에 물을 튀기며 호들갑을 떠는 애심에게 강희는 웃으며 수긍했다.
“그래, 참 좋구나. 매일 오기는 약간 먼 것이 아쉽구나.”
“정말 이런 곳이 집에서 더 가까이 있으면 매일이라도 올 것 같아요.”
셋 중 어느 한 사람도 성 대감의 집에 있던 사치스런 욕실에 대한 말을 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
달빛에 밑바닥까지 비추는 물에 손을 넣어 보자 짜르르한 냉기가 속까지 얼릴 것만 같았다.
“아, 시원하다.”
“마님, 발을 담가 보세요.”
“그럴까?”
강희는 신과 버선을 벗어 바위 위에 올려놓고 마침 앉기 좋은 바위에 걸터앉아 물속에 발을 넣었다. 손만 담갔을 때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시원함이 몸속을 내달렸다.
“아!”
절로 탄성이 질러졌다.
물길은 얕고 고요해 목욕하기도 안성맞춤이었다. 강희가 탄성을 지르는 사이 애심과 수란은 벌써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고 반라 차림으로 물속에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와!”
“꺄악, 너무 차가워!”
“아, 그래도 좋다!”
두 여인은 텀벙거리며 서로 물을 튀기고 놀기 시작했다.
여름밤의 물장난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경쟁하듯 물을 튀기던 둘은 아예 서로 뒤돌아서서 눈을 감고 물장난을 하다 잠시 강희를 잊고 말았다.
그러다 먼저 눈을 뜬 애심이 자신들의 장난으로 튄 물에 쫄딱 젖은 강희를 볼 수 있었다.
“앗! 죄송합니다, 마님.”
“송구합니다, 마님!”
“아니다, 괜찮다. 노는 모습만 봐도 참 시원하고 즐겁게 보이는구나.”
“마님…….”
“응?”
“그러지 마시고 여기 같이 들어오시겠어요? 정말 주위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걸요. 오늘 주경이네도 안 온다고 했어요. 저희야 항시 마님의 수발을 드는 이들인데, 뭐 어떻습니까? 들어오세요.”
“마님도 들어오세요. 정말 좋아요.”
수란까지 합세해 강희를 유혹했다.
이전이라면 이런 데 강희가 오는 것은 물론 함께 가자 청하는 것도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더구나 물을 튕기고 노는 자신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강희의 모습에 그들은 용기백배했다.
그리고 벌써 저만큼이나 젖지 않았는가.
그러니 더 적극적으로 그녀를 물속으로 유혹하는 것이었다.
둘은 서로 눈을 찡긋하며 아직 망설이는 강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옷을 벗겨 주기까지 했다.
“갈아입을 옷도 가져오긴 했지만 물속에서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무거우니 벗는 게 나아요.”
“그럼요.”
애심의 한마디에 수란이 맞장구를 쳤고, 어느새 강희도 순식간에 속곳만 하나 입은 반라의 차림이 되었다.
“마님, 마님은 쇤네들이 보기에도 정말 고우셔요. 어쩜 가슴은 이렇게 탐스럽고, 허리는 잘록하신지…….”
“그럼요, 주인님이 보시면 정말 눈이 휙 돌…….”
“수란아! 주책이야. 감히 뉘 앞이라고 그리 함부로 말하니?”
수란은 첫날밤만 치르고 각방 신세인 마님께 할 말이 아니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더구나 애심은 주인의 모든 수발을 드는 처지에 강희가 첫날밤조차 치르지 못한 것도 알고 있어 수란에게 정색하고 화를 냈다.
“앗, 송구합니다, 마님.”
“됐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물놀이나 즐기자꾸나.”
“……네.”
괜한 수다에 자칫 어색해지려는 그때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다 같이 움직임을 멈춘 여인들이 그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너구리 한 마리가 그녀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호호, 물 먹으러 왔는데 우리가 있어서 놀랐나 보구나.”
“너구리가 엉큼하게도 여인네들 목욕하는 걸 구경하러 왔나 봅니다.”
“하지만 언니, 저 너구리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어찌 알아?”
“에이, 수컷일 거야! 그러니 저도 수컷이라고 여인네들의 몸을 저렇게 말똥거리며 보고 있지?”
“그럼 쫓아 버릴까?”
수란이 말과 동시에 너구리에게로 물을 튕겼다.
너구리는 물이 튕겨지는 것과 동시에 잽싸게 달아났고, 애심은 반전된 분위기를 타 능청스럽게 강희에게 물을 묻히고 물속 깊이 끌어들였다.
“마님, 우리 누가 발장구로 물을 더 많이 튀기나 시합해 볼까요?”
“그럴까?”
“호호호호.”
“하하하하.”
세 여인 중 아무도 그곳에 뒤따라오던 이가 있었다는 걸 몰랐다. 그가 여인들이 옷을 벗을 적에 부리나케 돌아섰으며, 대신 그녀들이 들어간 계곡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것도.
또 물 튕기는 소리에 심란해진 그가 기어이 그녀들이 강희의 옷을 벗기며 찬탄을 해 대는 말을 들었을 때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야 했음도 알 수 없었다.
‘그곳까지 왜 따라간 것인가?’
하녀들은 모르고 있지만 여름밤이면 종종 그곳을 엿보는 파렴치한들을 쫓아내려고?
‘채운, 누굴 속이려 하느냐. 오늘 과연 누가 그 미지의 파렴치한이 될 뻔했느냐.’
계곡 입구를 지키지 못하고 되돌아온 그는 연무장이 아닌 계곡과 집 사이의 공터에서 연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최초의 의도는 이룰 수가 있었다. 거의 살기가 쏟아지는 그의 모습에 아무도 그곳으로 발걸음을 하지 못한 것이다.
채운은 칼을 휘두르면서도 강희가 초래한 위험을 막을 방법을 계속해서 강구하고 있었다. 자신이 할 뻔한 짓도 놀랍지만 강희를 계속 이대로 둘 일이 아니었다.
위험이 맞았다.
훤히 드러난 계곡에서 뉘인지도 모를 뭇 사내들이 그녀를 훔쳐볼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방법을 찾아 낸 채운의 눈빛이 번득였다.
강희가 계곡까지 찾아온 원초적인 이유를 해결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방법을 찾고 나자 칼을 휘두르는 그의 몸짓이 그제야 부드러워진 듯 보였다.
그러나 채운은 강희의 야밤 나들이를 막는 데 급급했던 나머지 자신이 최근 눕게 된 불면의 무덤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