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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혼 (5/38)

5. 신혼

강희의 예식은 그녀의 언니들의 예식보다 훨씬 간단하게 치러졌다.

일부 귀족들은 납채와 택일, 예식, 비입내비가 궁으로 들어가는 의식 등 왕실의 복잡한 혼례 절차를 다 따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강희에게는 혼담의 시작부터 택일과 기일 통지까지 혼사를 흥정하던 때 이미 다 끝낸 이야기였다. 그리고 채운은 동생 말고는 가족이 없기 때문에 비입내와 비슷한 시댁에 인사하는 과정도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강희가 첫날밤을 치르고 채운의 집으로 가면 모든 예식 절차가 끝나는 것이다.

혼례 다음 날.

앞으로 살 남편의 집으로 향하는 강희는 대례복으로 입었던 원삼 대신 활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입은 활옷은 홍색 비단에 청색 안감을 받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청색은 여성, 홍색은 남성으로 부부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 외 장수와 부귀, 숭고함을 상징하는 문자들도 수놓아져 있었다. 활옷 자체가 원삼 대신 대례복으로 쓰일 만큼 옷에 있는 문양은 모두 건강과 화목함을 기원하는 뜻이 담긴 것들이었다.

강희는 수가 놓인 옷소매를 한번 쓸어 보며 쓰게 웃었다.

이혼장부터 작성한 강희와 채운에게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 때문에라도 강희는 원삼 하나면 됐다며 활옷은 생략하려고 했지만 이것도 애심과 여성댁이 나서서 억지로 준비해 준 것이다.

강희는 단 한 번 입고 옷장에나 걸려 있어야 할 옷을 그리 만드는 것이 아까웠다.

하지만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일을 더 말리기도 뭐했다. 결국 그녀는 나중에 활용할 방도를 생각하며 두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예쁘게 모양을 내는 데 동조해 주었다.

어찌 됐든 그렇게 차려입은 강희는 정말 새색시답게 어여쁘기만 했다.

성 대감은 첫날밤을 치르고 바로 떠나는 딸의 인사를 받으며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딸이 정략혼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아비가 능력이 있어 윤채운 같은 이를 신랑으로 맺어 줄 수 있었던 것을 고맙게 여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딸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둘 사이엔 확실한 끈이 생길 것이고, 성 대감 자신도 장차 왕이 될 왕세자와 더 확실한 연계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이상했던 건 강희가 혼례 준비를 하면서 책정한 예산을 가지고 모자란다 한 번도 투정을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예산을 쪼개 주변 노인들을 일일이 다 초대해 선물을 준비하고, 그래도 모자란 것은 저가 갖고 있던 패물을 팔아 충당하기도 했다니, 정녕 자신의 딸이 한 일이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이었고, 그래서 성 대감은 그런 강희가 기특했던 나머지 전에 딸이 항시 탐내던 어미의 유품이 담긴 패물함을 선물 속에 넣어 주었다.

참 모순되게도 그 함은 꿈속에서 달갑지 않게 생긴 아이를 절대 낳지 않겠다고 우겨 대는 그녀를 달래려고 성 대감이 내놓았던 것이다. 그녀의 몸을 빌었다는 자체를 원망하던 아들이 세상에 나오게 한 바로 그것이었다.

강희는 혼례를 치르고 곧 떠나는 자신을 배웅하러 나온 아버지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나중에 이혼할 자신 때문에 노여워할 아버지를 생각하니 그것이 죄송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죄송하다는 인사 대신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 인사를 했다.

“아버지, 저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제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평생 받고만 떠나서 죄송해요. 가끔씩…… 찾아뵐게요.”

“……!”

성 대감은 딸의 생각지도 못한 인사에 기분 좋은 충격을 받고 잠시 굳어 있었다. 그러나 눈시울이 붉어진 강희의 눈이 가슴에 담기며 절로 딸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오, 아니다. 신혼에 함부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더구나 넌 시댁 어른들이 안 계시니 더더욱 자리를 지켜야 한다. 네가 보고 싶으면 내가 찾아가면 되지 않겠느냐.”

“네, 아버지.”

강희는 눈물을 글썽이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가마에 올랐다.

이 또한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일이었다.

꿈속 그녀는 혼인식부터 신랑에게 망신을 주고, 혼례를 치르는 자리에서마저 평판을 떨어뜨려 아버지께 실망만 안겨 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떠나는 딸에게 눈물을 글썽이기는커녕 딸의 고삐를 잡을 한 가지 강력한 제지 방안으로 일 년은 친정에 찾아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집에 있었을 뿐, 허름한 채운의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를 못 견뎌 했었다.

강희는 이렇게 비밀스럽게 적어 놓은 그 책에서 자신이 미래에 저지른 패악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고 있었다. 똑같은 상황을 맞았을 때 하나하나 비교하며 이전의 행패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그녀가 꿈꾸기 이전에 일어난 일들만은 바꿀 수가 없었다.

‘후회한다고 일어난 일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는 생기지 않을 악행들과 사치와 허영들을 지우는 일에 더 열심히 하면 된다.’

강희는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채운의 집에 도착한 강희는 아련한 그리움 같은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질렀다.

이 집은 그녀가 여태 살던 집처럼 청자 기와에 검은 칠과 금속으로 장식된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으리으리한 집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희에게 아버지의 집은 잠시 머무는 곳이었고, 진정 자신의 집처럼 느끼는 곳은 채운의 이 집이었다.

현생에서의 열아홉 해보다 꿈에서 산 서른두 해가 더 기억에 남아서일까.

어쩌면 그쪽에 더 많이 동화되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채운의 집은 청자 기와가 아닌 흑토 기와라도 정취가 있었고, 흑칠만 되어 있고 금속 장식은 없는 기둥이지만 그 또한 멋스러웠다. 귀족들은 보통 다들 짓는 이 층 가옥이 아니어도 내 집의 편안함이 그만이었다.

그리고 집 안에 굳이 정원을 따로 꾸미지 않아 뒤편에 보이는 대나무 숲이 정원을 대신했다.

남들은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가 스산하여 귀곡성처럼 들린다는 이도 있었지만 강희는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리며 내는 슥삭이는 소리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음악 소리처럼 들려서 좋았다.

‘아, 정말 내가 이곳으로 되돌아왔구나.’

꿈속의 그녀는 대나무 숲을 밀어 버리고 그곳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었다가 관리가 잘 안 되어 모기의 온상지가 되게 했다. 더구나 그 연못에 실수로 하녀 아이가 하나 빠져 죽은 뒤 귀신 부르는 못이 되어 결국 메워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대나무 숲 일대는 영영 늪처럼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망치기 이전의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운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장군님, ……마님.”

강희가 감회에 푹 젖기도 전에 집사가 갓 혼인하여 집에 돌아오는 주인 부부를 맞으러 달려 나왔다.

애심은 짐을 나르기 위해 두어 번 온 적이 있어 집사와 안면을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깐깐한 성격을 가진 것 같지만 인상은 푸근하고 서글서글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긴 했지만 강희를 바라보는 눈에 불편한 마음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집사 이정구는 본래 왕세자의 궁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채운에게 이 집이 하사될 때 함께 오게 된 사람이었다. 그는 나라의 영웅이며 자신의 주인이 된 윤채운 장군을 모시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주인이 혼인할 상대가 성강희라니!

그는 그 사실을 알고 펄쩍 뛰며 할 수만 있다면 뜯어말리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다.

강희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체했다. 자신은 옛날과는 달라졌으며, 이제부터 앞으로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살 거라,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행동으로 보이면 언젠가 진심을 알아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굳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일 년 후면 헤어질 사람들이었다. 그리 생각하면 오히려 정을 붙이려 애를 쓰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 집사. 애심에게 들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네? 부, 부탁이라니요.”

새 안주인의 생각지도 못한 인사말에 송구스러워 하며 집사는 강한 의혹에 당황해 했다.

이정구는 직접적으로 강희를 알지는 못했지만 동생 내외가 성강희가 자주 다니는 시전 골목에서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들은 말이 적지 않았다.

헌데 그가 동생에게 들은 말 중에 딱 한 가지만 맞는 것 같았다. 그건 성강희라는 여인이 도성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최고 미인 중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예쁘면 뭐하는가.

성격이 뭣 같다고 나라 안에 소문이 짜한 것을.

장군님의 안사람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정의 여인이란 말에 못마땅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본 마님은 소문과 너무나 달랐다.

그가 들은 말 중 어느 하나도 그녀가 공손하다거나 상냥하다거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한다는 말은 없었다. 소문의 어느 것도 그녀의 성격이 좋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직접 만난 새 안주인은 그가 바라 마지않는 안주인의 표상과도 같아 보이지 않는가.

이 집사는 강희와의 첫 대면이 각오했던 것과 달라 얼떨떨했다. 그러다 안사람의 가벼운 헛기침에 곧 정신을 차리고 주인 내외의 방으로 각각 안내했다.

가옥은 주인 내외가 머무는 본채와 집사와 하인들이 머무는 별채, 그리고 손님이 머무는 별채와 다용도 창고가 있었고, 창고를 제외한 각 건물마다 부엌이 따로 딸려 있었다.

본채는 보통 개경 귀족들의 집처럼 ‘ㅁ’ 자로 지어진 구조로, 원래는 본채에 있는 큰 방이 부부가 지내는 방이었다. 그러나 채운과 강희는 한 방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부속 별채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귀족이라도 보통 부부는 한 방을 사용하는데, 더구나 신혼인 이 부부는 처음부터 아예 방을 따로 쓰는 것이다. 이 모습 때문에라도 하인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있었다.

하지만 혼인 후 처음으로 제 방에 들어오게 된 강희는 그곳에서 감회에 젖어 있었다.

꿈속 그녀는 이 집에 엄청난 불평과 비하를 해 댔다. 그리고 나중엔 결국 따로 별채를 더 지어 그곳에 나가 살았다. 그런 쓸데없는 사치에 돈을 쓸 수 없다는 채운과 엄청나게 싸워 대고, 결국 아버지를 졸라 제집을 따로 지었던 것이다.

정자나 메워 버린 못도 그 일환이었다.

그녀가 새 건물을 지으며 그곳에 채운 침상과 의자, 가구 등의 세간만 해도 그 사치스러움을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가 죽기 직전에는 일반 민초들이 사는 부엌과 안방이 붙은 온돌바닥에서 생활했다. 그녀가 부유한 생활을 할 때는 겨울이면 항상 화로를 끼고 살아 몰랐지만 몰락해서 처음 사용하게 된 온돌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그러나 그것도 땔감이 있었을 때 얘기지, 말년에 그녀는 결국 얼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강희는 그 온돌의 장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겨울이 특히 싫었던 그녀는 ‘나중엔 비싼 화로보다 훨씬 절약되면서 더 따뜻한 온돌에서 지내야지’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아직 꿈같은 이야기.

여긴 채운의 집. 그녀가 이리저리 개조하고 뜯어고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자기 좋자고 온돌을 이어 붙인다면 그건 이전의 그녀가 했던 짓과 별반 다르지 않은, 피해만 줄 일인지도 몰랐다.

“이제부터 여기가 내 방이구나.”

“네, 아씨. 아니, 마님.”

애심은 강희를 부르다 말고 입에 붙지 않은 새 호칭으로 얼른 바꿨다.

애심이 혼사 전에 이 집에 미리 와서 열심히 꾸미긴 했지만 이 방은 원래 아씨가 쓰시던 방에 비하면 허름하다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마님이 방을 바라보며 새 침상을 쓰다듬는 손길에선 아련한 감상까지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싫어하는 표정이 아니라 애심은 내심 가슴을 쓸고 있었다.

그러나 신혼인 아씨, 아니, 마님과 처음부터 각방을 쓰는 장군님을 보자니, 마님의 혼인 생활이 앞으로 어찌 될지 한없이 걱정이 되었다.

강희는 애심이 그런 걱정을 하는지는 모르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 이제부터 저녁을 준비해 볼까?”

“네? 오늘, 아니, 지금부터요?”

“조금 있으면 해가 지지 않니. 가마를 타고 와서 시간이 너무 오래 지체되었어.”

성 대감의 집과 채운의 집은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편이지만 성 대감의 집에서 출발한 후 여덟 명의 장정이 네 명씩 번갈아 가마를 지고 걸었어도 두 시진이나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수도가 그만큼 넓기도 했지만 산과 언덕을 깎지 않고 산세에 그대로 앉힌 려국의 집들 탓에 빙 돌아돌아 오느라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런데 오자마자 쉬는 건 고사하고 저녁부터 지을 생각을 하다니.

애심은 강희가 집에 들어온 첫날, 낭군의 첫 식사를 자신의 손으로 차려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님은 이렇게 주인님을 생각하시는데…….’

그녀는 채운이 강희와 각방을 쓰고 그리 살갑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이유가 예전 아씨의 소문 때문이라 믿고 있었다.

소문대로의 강희를 가실 때문에라도 실컷 겪었으면서도 애심은 소문과 다른 지금의 강희를 알아봐 주지 않는 주인님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래서 어쩌면 마님의 이런 노력이 소문 때문에 부인을 멀리하는 주인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애심은 강희의 뜻에 따라 짐을 푸는 것도 뒤로하고 함께 부엌으로 갔다.

하지만 부엌에선 이미 이 집의 찬모인 하린댁이 벌써 갖가지 음식을 다 준비해 놓은 후였다.

이전만큼 집이 크지 않은 덕에 따로 떨어진 부엌이라도 멀지 않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 대감의 집과 집의 규모나 하인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찬모는 우두머리라 할 것 없이 한 사람뿐이었다.

강희가 들어서자 저녁을 차리느라 바삐 움직이던 하린댁과 하녀 아이들이 깜짝 놀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앗, 마님.”

“마님.”

“하린댁, 수고가 많네. 벌써들 준비가 한창인 게로군.”

하린댁은 아까 주인 내외가 집에 오셨을 때 단 한 번 인사하며 소개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 주는 안주인이 신기하였다. 속으로는 기분이 좋기도 하고 다소 놀랍기도 했다.

“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하린댁은 마님께 대답을 하느라 숯 위에 얹은 전이 탈 것 같아 그것이 더 안타까웠다. 저절로 그곳으로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처음 마주하는 안주인을 두고 함부로 다른 데로 정신을 파는 것도 할 수 없어 애만 탈 뿐이었다.

그런데 강희가 그걸 보고는 옆에 뒤집개를 집어 재빨리 전을 뒤집었다.

“이것 탈 것 같으이.”

“마, 마님…….”

“하던 일 계속하게. 이걸 다 구우면 되는 겐가?”

강희는 그리 말하며 아예 전을 부치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보는 하린댁과 하녀들은 불편하여 어쩔 줄 몰라 표정이 어색하게 굳고 있었다.

“네, 그, 그렇긴 한데……. 저, 안에 계시면 저희들이 알아서 다 올리겠습니다. 혹여 꺼리시거나 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있으신 겁니까?”

하린댁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안에 고이 앉아 계시면 어련히 알아서 차려다 바치겠는가. 부엌에 들르는 것이야 안주인의 권리라지만 첫날부터 이렇게 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을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했다.

“별로 그런 건 없네. 그리고 너무 불편해 하지 말게나. 오늘부터 여긴 내 살림 아닌가. 내가 친히 살펴보고 싶기도 하고, 나도 거들어 주러 온 게야. 이건 타지 않게 내가 잘 지킬 테니 걱정 말게.”

하린댁과 하녀들은 방금 들은 말을 자신들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서로 얼굴을 보며 눈만 끔뻑였다.

부엌살림이 안주인의 것이 맞긴 하지만 거들러 오다니.

가난한 귀족 여인네도 아니고, 이분은 바로 그 소문 자자한 성도종 대감의 여식이 아니시던가. 그런데 손에 물을 묻히고 불가에서 기름이 튀는 그 일을 정말 손수 하시겠다는 건가?

안주인과 부대껴야 하는 불편함은 불편함대로, 그리고 들어 알고 있는 안주인의 인품과는 다른 강희의 인상에 황당함은 황당함대로, 하린댁과 하녀들의 눈에는 혼란만 가득했다.

뒤따라 들어오던 애심이 그걸 보며 자신과 여성댁 아주머니도 처음엔 그랬었다는 걸 회상하며 빙긋 웃었다.

전을 다 구운 강희가 하린댁에게 또 물었다.

“이만하면 잘 구워졌지 않은가? 어디에다 담을까?”

“네? 그건 여기에…….”

하녀 아이 하나가 재빨리 찬장에서 접시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고맙다, 얘야. 그런데 내가 아직 네 이름을 모르는구나.”

“네? 네, 저, 전…… 주, 주경이라 합니다.”

“주경이? 그래, 몇 살이니?”

“열일곱 살이옵니다.”

“다른 아이들은?”

“저쪽의 제일 큰 언니 이름은 세원이라 하고 열아홉 살이고, 솥 앞에 앉은 저 아이는 무인이라 하고 열다섯 살입니다.”

“그렇구나. 기억하겠다. 고맙다, 주경아.”

눈치껏 접시를 내미는 걸 보니 빠릿빠릿한 아이인 것 같긴 하지만 막상 저에 대해 물으니 바들바들 떨기까지 한다. 강희는 그만 관심을 돌리는 것이 그녀를 돕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이들이야 자신이 여기서 나가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강희는 이전처럼 놀고먹으며 호사나 부리고 앉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자니 이런 식으로 부엌에 쳐들어온 것이고, 그 결심에는 첫날인 오늘이 가장 중요한 때이기도 했다.

부엌은 꽤 널찍했지만 하린댁이 벌써 거의 준비를 끝내 놓은 데다 일단은 주인 내외를 위한 것만 준비하면 되었으니 손이 많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강희는 짐도 못 풀고 따라온 애심은 돌려보내고, 이제 여자들이 북적거리는 부엌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손때가 묻은 찬장은 반질반질했다. 한 칸씩 열어 보자 한쪽으론 옹기들과 자기들이, 다른 쪽으론 놋그릇들이 반짝반짝 닦인 채 쌓여져 있었다.

또 맨 아래쪽엔 은 접시와 은수저들이 곱게 포개어져 있었다.

본 적이 있는 익숙한 문양이 그려진 그것이 강희가 혼수품으로 준비해 온 것들이었다.

“여성댁. 아, 아니, 미안하이, 하린댁. 내 집에서 부르던 것이 습관이 되어…….”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마님.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하린댁은 별것 아닌 일에 고맙다, 미안하다 인사를 하는 안주인의 언사가 참으로 적응하기가 더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는 첫날이라 이리 온 것 같은 안주인이 계속 이런 식으로 부엌에 쳐들어오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소문과는 달리 직접 만난 안주인은 자애롭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신 것 같긴 하나 그것 또한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강희는 은 식기와 수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것 말일세.”

“네…….”

“은 접시는 매번 내기 힘들 테지만 주인께는 항상 은수저를 내어 드리게. 장군은 영웅으로 칭송을 받는 분이시지만 반대로 장군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인물들도 많다네. 그러니 자네가 식재료나 부엌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철저히 감독하고, 항상 각별한 주의를 해 주시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마님.”

드디어 안주인에게서 들어야 할 명령다운 명령을 들은 하린댁은 그제야 마음이 더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린댁, 그녀는 알까. 강희가 부엌에 들어와 대뜸 이런 명령부터 했다면 안주인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는 자신이 그 말을 고깝게만 들었을 거라는 걸.

강희는 크게 한 일은 없지만, 아니, 방해가 된 듯도 했지만 마지막 음식을 내가기 직전까지 부엌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연기와 기름 냄새가 밴 옷을 얼른 갈아입고 저녁이 차려진 방으로 향했다.

그곳엔 채운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제가 늦었지요.”

강희가 서둘러 들어오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오, 식사를 같이 차렸다고 들었소. 앞으론 굳이 그럴 필요 없소.”

채운이 굳은 표정으로 말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강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녀의 손이 간 음식 따위를 그가 반길 턱이 없는 것이다. 허나 그가 이럴 줄 짐작했으면서도 일순 누가 가슴을 퍽 쳐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희는 애써 마음을 억누르고 표정을 펴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영 입을 다물듯 했던 채운이 한마디를 더 툭 던지는 것이다.

“내 말은, 그렇게 부엌에 있다가 굳이 옷을 갈아입고 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오.”

강희는 고개를 들었다.

설마 싫다는 게 아니라 배려의 말이었던 것인가. 강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너무 솔직하게 변하는 강희의 얼굴을 보며 채운은 그녀가 처음에 자신이 한 말을 오해하여 들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게 뭐 별말이라고, 그 한마디에 저런 얼굴까지 한단 말인가.

채운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덧붙이고 나서도 내심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내오던 하린댁에게 오늘 마님이 식사 준비를 같이 거들었다는 말을 듣고, 이건 또 무슨 장난질인지 의심부터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훈련 중 일상에서도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젓가락 대용으로 쓰기도 하는 그에게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은수저가 상에 올라온 것도 못마땅했다.

역시 소문대로 사치스런 제 버릇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냐.

그런 생각에 얼굴이 찌푸려진 순간, 하린댁이 먼저 설명해 주었다.

“마님이 오늘부터 주인님께 항시 이 은수저를 사용하시게 하라 하셨습니다. 손잡이 문양이 정말 곱지요? 그런데 마님은 이게 고와서가 아니라 장군께서 귀하신 몸이라 반하는 무리가 있으니 항시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그걸 사용하라 하신 겁니다. 역시 집안에 안주인이 계시니 다릅니다. 저는 생각도 못했던 것을요…….”

하린댁이 누구던가.

이 집사의 부인이기도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주 멀긴 하나 채운의 친척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채운을 진정으로 따르는 주인으로, 그리고 때로는 친조카처럼 아꼈다.

따질 일은 아니지만 하린댁은 그런 이유가 더해져 꿈속의 성강희가 안주인이 되었을 적에 그녀를 더욱 싫어했고, 재영에게 충성을 바친 여인이었다.

채운은 하린댁의 말에 강희의 모든 행동을 사치스럽다 폄하하려던 제 생각이 부끄러워 괜히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런 기분으로 있는데, 때마침 들어온 강희에게 듣기 좋은 부드러운 말이 나갈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뜸 던진 말에 그녀의 얼굴이 서글프게 변하는 모습에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즉시 내가 지금 무엇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본래의 그의 이성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한 말은 충분히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불쑥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아 한마디 더 했던 것이다.

그러자 대번에 저렇게 자신의 한마디로 울고 웃는 반응을 보인다.

그는 이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더 막막해졌다.

채운은 사실 혼인하고서도 그녀와 같이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또한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손대지 않을 거라며 큰소리쳤으면서도 혼인이라는 말에 주술이라도 걸린 듯 저 여자가 정말 자신의 아내라도 된 것처럼 생각되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걸까?

이런 마음이 들다니, 채운은 스스로를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만일 강희가 ‘그 일’의 주체가 아니었다면 소문 따위야 무시하고 정말 아내로 받아들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눈앞의 여자는 알려진 바와는 다른 여자인 것을.

자신의 속마음을 그도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허면 만약 이 여자가 그때의 일을 알고 용서를 구한다면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인가?

이 여자가 한 일은 어린아이가 개구리에게 돌을 던진 것 같은 일이니 책임져라, 용서를 구해라 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상대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횡사에 짓이겨진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 일로 이 여자를 원망해야 할지, 세상을 원망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생각하며 자꾸만 이 여자를 이해하려는 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 여자에 관한 한 돌로 쌓은 옹벽이던 마음이 어느새 흙으로 빚은 조그만 방패로 변한 것 같았다.

‘이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이를 잃고, 그 때문에 부모님께서 세상을 등지시고, 열 살도 안 된 어린 동생이 부모도 없이 가난하고 불쌍하게 컸던 원한을 어찌 잊겠는가!’

찰나 여러 상념으로 어지러웠던 그의 앞에서는 강희가 젓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매일 시커먼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여인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깨작이지 않고 음식을 맛있게 오물거리는 강희를 보는 것도 점점 불편해기 시작했다. 고소한 기름에 볶은 나물을 집어 드는 모습도 그녀는 너무나 우아하고 예뻤다. 기어이 그녀의 입안을 오가는 젓가락도 대신 집어 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기울자 그는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운은 식사 도중에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깜짝 놀란 강희가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모습도 그는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방금 급한 일이 생각나서 그렇소. 당신은 식사 마저 하시오.”

그는 그대로 도망치듯 방을 나서서 말을 타고 집 밖으로 향했다.

실상은 어쨌든 본가에 온 첫날, 첫 식사.

신혼의 시작인 날이었다.

그러나 강희는 식사 시간도 그녀와 마주하기 싫어하는 신랑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접시마다 소복하게 담긴 찬들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많았다. 그걸 보는 강희의 눈에서 서글픈 눈물이 한 방울 똑 하고 떨어졌다.

그를 위해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이 강희는 매우 즐거웠다.

긴 시간 가마를 타고 낯선 곳에 도착해서도 급히 부엌으로 향했던 건 그래서였다.

그녀는 다만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그가 맛있게 먹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에게 달리 무엇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걸 기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여지없이 불편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강희는 처음이 이렇게 어그러지자 앞으로도 이런 일상적인 자리조차 마련하기가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가 원하지도 않는데 굳이 같은 상에서 식사를 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식사 한 번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정말 그림자처럼, 아니면 그대로 지나치는 바람처럼 살아야 할까.

‘그래, 그저 조용히 포기하고 살면 그만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살기로 마음먹었으니 아예 별개로 떨어져…….’

그렇게 생각하던 강희는 혼자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게 아니다.

겨우 이 정도로 그 알량한 자존심에 또 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한 번으로 포기하려는 마음으로 기우는 저를 발견한 강희는 이것도 참 저 편리할 대로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저를 위한 생각이지 그를 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소한 것도 집 밖으로 말이 나면 그의 평판에 누가 될 수 있었다.

꿈속의 그녀가 처음부터 끊임없이 일으켰던 불화는 그의 명성에 크게 흠집이 되었다. 일 년 뒤 하려는 이혼이 그에게 이런 사소한 소문보다 더한 흠집이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건 그녀가 청한 것이니 그가 비난당할 일은 적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그가 보위에 오르는 수왕의 가장 총애 받는 신하가 된 마당에 누가 있어 그의 위상을 깎으려 함부로 떠들고 다닐 것인가.

강희는 애초에 그와 혼인하기 전에 이미 그를 위한 가장 큰 선물인 이혼장을 주었지만 그래도 그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있는 동안만큼은 무엇이든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 결심하고 있었다.

세간의 이목에야 어차피 성강희라는 여자는 악녀였다. 아무리 불명예라지만 그런 악명을 갖고 있는 여자가 평민 출신의 남편을 참지 못하고 이혼을 청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이 정도는 각오했던 일 아닌가. 채운의 이런 반응 또한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자신은 잘하고자 애쓴 것이라 해도 제 악행과 포악한 성정들을 생각하면 그로선 의심스러울 만했다. 더구나 채운이 자신을 다른 이보다 더 혹독한 눈으로 볼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직 멀었네.’

강희는 반성하며 내일을 기약하자 다짐했다.

앞으로 그의 진짜 부인인 재영이 들어오기까지는 팔 개월 남짓 남았으니,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

강희는 지금부터 팔 개월 뒤의 시기를 꼽다가 꿈속과 계절이 다른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차, 팔 개월이 아니구나!’

그녀는 저의 착오를 깨닫고는 크게 놀라 절로 벌어진 입을 막았다. 이제야 여태 일어났던 일들의 시간 가늠이 틀려진 걸 알게 된 것이다.

꿈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할 당시, 그것은 혼사를 기점으로 한 달 후, 두 달 후― 이런 식으로 시간을 정리해 적었다.

그런 것이 이런 착오를 낳게 되었다.

해年度와 달月을 따져 보자 시간의 착오가 한두 달이 아니었다.

한재영이 이 집에 들어오는 건 꿈속의 그녀가 혼사를 치른 지 팔 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혼인한 시기가 앞당겨졌다.

꿈속의 그녀는 송국 여행까지 감행하면서 혼사를 치를 수 없다 저항하느라 이 시기에는 혼사가 치러지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가 혼례를 치르란 말에 바로 ‘네’라고 답하여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니 계산하자면 혼사는 그때보다 거의 열 달이나 당겨졌다. 이전에 혼사를 치른 건 그녀가 스무 살인 경술년 사월이었지만 지금은 기유년 유월이니, 재영이 들어왔던 신해년 일월까지는 일 년이 넘는 시간이 남은 것이다.

‘그럼 왕세자께서 왕위를 잇는 시간도…….’

앗, 그것도 어긋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혼의 재가에는 별 차질이 없을 것이다. 혹, 꿈과 다른 일이 벌어져 수왕의 승계가 늦어진다 해도 이후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강희는 시간의 착오를 깨달으며 자신이 아는 것과 어그러지는 것이 무엇인지 기록을 모두 다시 검토할 필요를 느꼈다.

비누 사업에 관해선 한재영이 사 년, 아니, 오 년은 뒤에 할 사업이었으니 별로 그르칠 것은 없었다. 아버지의 역모 사건도 자신만 없으면 재발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버지께 그런 기미가 보인다면 열심히 말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따져 보던 강희는 채운에게 했던 다른 큰 실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차!’

그에게 이혼장을 전해 주러 갔을 당시.

다른 여인을 들이지 말아 달라고 했던 그것.

그때는 그것이 제안에 당위성을 주는 것이라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을 따져 보니 그에게 크나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아! 그래서 그가 그때 내게 새로운 방법으로 모욕하러 온 것이냐 화를 냈던 것이구나.’

참으로 점입가경, 설상가상이었다.

그러니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은 여자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갔다고밖에 더 생각이 들었겠는가.

그땐 꿈의 막바지에 피눈물을 흘리며 울던 아이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어 그런 말을 했지만, 시기를 따져 보니 아직 그가 재영을 들이려고 할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미리 준비해 간 이혼장을 내민 것도 어찌 받아들여졌을지 생각하니, 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그를 위한답시고 용기를 그러모아 찾아갔건만 그 자체가 실수였을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아니다. 이혼장은 실수가 아닐 것이다.’

그것이 그를 자유롭게 해 주는 건 사실이니. 그리고 그건 이미 그의 손에 있고, 그는 증오스런 여자에게서 헤어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니.

강희는 이전 삶에서 성강희란 여자가 그를 평생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 그로서는 가장 질색하며 싫어하던 일이었던 걸 생각해 내곤 씁쓸하게 웃었다.

무엇보다 한재영이라는 여인의 존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채운이 그녀를 만난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강희는 그들의 인연이 혼사 이전부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재영이 그의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시간이 틀려지고 나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재영은 하급 관리의 딸이었지만 귀족이었다. 그렇게 단아하고 정숙한 여인이 막 혼인을 앞두거나 갓 혼인한 남자와 인연을 맺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채운의 곁에 그녀가 없다고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그녀가 꿈속 그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아들을 낳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채운은 난잡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와 아이가 생겼던 그 몹쓸 사고 때문에라도 성강희란 여자에 대해 일말의 존중조차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나마 그녀를 부인이라 대접하려던 가면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재영에게로 돌아섰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일로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 더 수치스러워 했었다.

강희는 꿈속의 그녀의 삶을 객관적인 눈으로 봤기 때문에 많은 걸 알기는 했지만 채운과 얽힌 그런 자세한 내막 같은 것은 모르고 있었다. 꿈의 주체가 성강희였기 때문에 그녀가 알지 못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 자신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강희는 한재영, 그녀가 현재 그의 연인인지 아닌지 정확한 사정을 짚어 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알면 어쩔 것이며, 그녀가 현재 그의 곁에 없다 한들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채운에겐 성강희라는 그녀 자체가 안 되는 여인인 것을.

강희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전골이 담긴 상에 올린 작은 화로도 이미 다 식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가 아직 식탁에 남아 있어 하녀들은 상을 치우지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강희가 그 길로 방으로 돌아가자 애심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의 집에서의 첫날밤이었다.

여느 부부 같으면 이런 썰렁한 밤이 되었을까.

고맙게도 애심은 첫날밤이 어땠는지, 장군님은 왜 같이 안 계시는지, 그런 소리들은 하지 않는 눈치를 갖고 있었다.

가실을 내치는 데 바빠 충동적으로 곁에 들인 이였지만 강희는 입속의 혀처럼 구는 애심의 마음 씀이나 행동들이 정말이지 고마웠다.

밖은 휘영청 밝은 달에 창가로 꽃 냄새도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신혼에 어울릴 법한 낭만적인 분위기에 강희는 자조하며 몸을 씻고 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 밤.

그녀의 방문 앞에 채운이 한참 서 있다 간 것은 아무도 몰랐다.

* * *

채운은 병영의 일을 모두 김상진에게 넘기고 도성의 왕세자 옆에 돌아온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같아선 병영에 있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자신의 안사람인 강희는 첫날 하린댁을 시작으로 단 보름 만에 그의 집안사람들을 모두 손안에 넣은 것 같았다.

그녀는 먼저 보름 내내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사람들과 안면을 익히고 이름을 외웠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들에 관심을 보이고, 불편한 점이 없는지 살펴 고쳐 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들였다.

집안을 꾸미는 것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해 놓은 일들마다 고급스럽다고 부러움과 칭찬을 살지언정 어디가 사치스럽고 허영 많은 구석이 있는 여자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요즘 신혼인 점을 감안해 매일 저녁 집으로 일찍 돌아가라 명하는 왕세자 때문에라도 항상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오면 집사가 붙어 그날 있었던 일들을 다 알려 주었는데, 처음엔 소문만 듣고 맘에 들지 않는 안주인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르는 것이 아닐까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첫날 그녀가 행장을 다 풀지도 못하고 그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던 모습은 거짓된 위선이 아니었다.

거기다 가끔씩 들르면 언제나 휑하던 이 집도 안주인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달라진 것인지 안에 들어서면 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그는 왕세자의 채근에 못 이기는 척 집에 들어오면서도 항상 그를 반기는 듯한 집의 따뜻한 분위기에 마음 한구석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예전의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 집에 돌아온 듯한 느낌마저 들어 심장 어림이 묵직해지는 것이다.

그 가정을 뺏은 게 누구냐 따져 보려다가도 자꾸만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 발견하곤 흠칫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차피 이혼장부터 내밀고 혼인한 여자고, 그를 떠날 작정을 하고 있는 여자였다. 느슨하게 그런 여자를 허용했다간 자신만 다시 상처받을 것 같았다.

‘……!’

상처라니…….

또 말 같지 않은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한 채운은 크게 고개를 저었다. 행여 그 여자에게 상처받을 마음 한 자락이라도 내줄까 보냐.

“오셨어요, 서방님!”

오늘도 강희가 본채 입구 밖까지 나와 들어서는 그를 맞았다.

‘정말 왜 이러는 걸까, 떠날 거면서!’

채운은 매일같이 자신을 반기는 강희에게 정말이지 따져 묻고 싶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현숙한 양처인 것처럼 굴면서 사람들 마음을 다 사로잡아 놓고 불쑥 이혼장을 내민다면 누가 믿겠느냔 말이다.

채운은 사람들의 범주에 자신은 넣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 생각 또한 어이가 없었다. 이건 이 여자가 떠나기 직전까지 내내 이렇게 할 거라 기대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 왔소.”

그런 생각 때문에라도 채운은 더 불퉁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리고 들어가는 길에 강희가 지금 머무는 부속채에 먼저 눈길이 가는 걸 억지로 돌리고서 성큼 앞장을 서서 원래 주인 내외가 머물러야 할 본채로 향했다.

어제 이 집사는 은근히 그에게 한방을 쓰지 않는 주인 내외에 대한 염려를 비추는 말을 했다. 일반적으로 그 또래의 보통 남자들은 자식 한둘이 있는데, 이제 갓 혼인한 그가 이렇게 지내다 언제 후사를 볼 거냐는 것이다.

그런 여자의 몸에서 주인의 후사를 봐야 하는 걸 걱정하던 그가 외려 주인에게 왜 한방을 안 쓰는지 의아해 할 만큼 강희는 그들의 마음을 빠르게 얻어 가고 있었다.

강희가 일부러 의도하여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예전의 자신을 반성하고 속죄하는 일환으로 한 행동들에 자연스레 그리된 것이다.

나중에 그녀가 이혼 청구를 하기 전에 벌일 일을 생각하면 그들이 느낄 배신감이 오죽할까 싶기도 하지만, 강희는 이전의 기억 속에 언제나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 자체를 보기 싫어하던 이들이 보이는 호의적인 모습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강희는 자신이 아무리 평판이 나쁜 여자였다 해도 이러다 느닷없이 이혼장을 내민다면 사람들의 의혹이 그를 향해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자신은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난잡한 여자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 소문은 아주 쉽게 퍼지게 되어 있었다.

뭇사람들에게는 그녀의 오명에 그런 추문까지 덧씌워지는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이 못 될 것이다. 강희는 자신의 평판에 대해서는 추호의 미련도 없었다.

만일 신빙성이 문제가 된다면 사람을 구해 연극을 할 작정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먼 곳으로 떠나 아마 정말 꿈에서처럼 다시 국수 장사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당장 열심히 만든 그것은 미래를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은 국수로 할까 하는데, 식사로 괜찮으시겠어요?”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던 강희의 말에 채운은 섬돌에 오르던 발을 멈추고 말았다.

국수는 그의 어린 시절 귀하게 먹던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먹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특별히 음식 투정이나 별식을 찾지 않았던 탓에 그가 그 음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떻게 그걸 알고…….’

아니다. 아마 우연일 것이다.

“……좋군.”

채운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이후 사나흘에 한 번씩은 국수 맛을 볼 수 있었다.

때마다 재료는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처음에 하린댁은 강희가 그렇게 자주 국수 요리를 내는 걸 염려했다.

하지만 매번 질리지도 않고 조금씩 더 찾는 주인의 식성에 곧 그녀는 감탄하고 말았다. 새로 온 안주인이 어떻게 그녀도 모르던 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알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 때문에 채운이 국수를 좋아한다는 걸 그녀들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채운이 첫날 식사 도중 뛰쳐나갔지만 강희는 그것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그와 함께하는 저녁상을 지켰다.

어차피 이렇게 함께하는 식사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은 아슬아슬한 평화를 지키고 있지만 강희는 곧 정국이 위태롭게 흘러갈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금상인 청왕의 건강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기록에 따른 흐름의 시간 착오를 바로잡으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가흔 왕자와 불안하게 대치하고 있던 왕세자의 신변에 심상찮은 위협과 도발들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 곧 채운은 집에 돌아오는 게 힘들 정도로 왕세자의 곁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강희가 아는 것은 이 정도뿐, 그밖에 더 자세히 아는 건 없었다.

그녀의 일생을 알려 준 꿈은, 깨고 난 후 남은 기억에 차등이 있는 것인지, 그와 혼인한 이후의 생이 어땠는지를 더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의 기록은 혼인을 기점으로 작성되었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가늠에 있어서도 착오가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즈음 꿈속의 그녀는 송국으로 줄행랑을 쳤을 때라 려국의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청왕의 건강이 많이 악화된 건 송국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고, 덕분에 강희도 그 일에 대해 조금 짐작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이 순간부터 내년 사월까지는 꿈과는 오롯이 다르게 흘러간다고 생각해야 했다. 또 주변에 일어날 일들을 알든 모르든 어차피 과거와 다른 그녀이기 때문에 굵직한 일들을 제외하고는 앞으로 파생될 일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굳이 과거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 * *

모처럼 한가한 오후.

강희는 모시를 끊어다 채운의 여름옷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사흘간 매달린 덕분에 적삼 한 벌이 다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적삼의 소매에 금사를 써서 그의 이름 끝 자인 구름 ‘운雲’ 자를 새기는 중이었다.

여성댁에게서 제법 야무진 솜씨를 지녔다는 칭찬을 들은 것이 허투루가 아닌 듯 강희의 바느질은 촘촘하고 고른 데다 전체적으로 맵시가 났다. 작고 화려하지 않게 수놓아진 문양이 옷의 태를 더하고 있었다.

모시는 여인의 손에서 두 번 태어나는 옷이라 했다.

첫 번째는 대에서 껍질을 벗기고 째고 삶아 말려서 베틀에 걸어 짤 때 한 번 태어나고, 두 번째는 빨고 풀 먹이고 만지고 다리는 정성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강희는 첫 번째는 하지 않았지만 빨고 풀 먹이고 만지고 다리며 두 번째로 태어나고 있는 옷에 온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마님, 마님!”

수를 놓느라 한참을 한 자세로 구부리고 있던 강희는 애심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들었다. 그런데 너무 집중했던 탓인지 고개를 드는 것이 약간 어지러울 정도였다.

“왜 그러니, 애심아?”

“세상에, 수란이가요오.”

“응?”

“시집을 간다지 뭡니까!”

“뭐? 아, 그래. 수란의 나이가…… 스물둘이었나?”

“수란이는 저보다 한 살 적은 스물셋이고요.”

“그럼 당연히 해야지. 축복할 일이구나. 그런데 누구랑 한다니? 아, 미안하구나. 애심이 너도 적은 나이가 아닌데 내가 여태 신경 써 주지도 못하고…….”

애심의 갑작스런 말에 놀란 강희는 저도 모르게 한꺼번에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이 참, 마님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요. 수란이가 누구와 혼인한다고 하는지 아십니까?”

“응? 왜? 누군데 그러는 거니?”

“세상에, 길석이랑 한다고 합니다!”

“길석이라……. 엇, 서방님의 종자로 따라다니는 그 길석이 말이냐?”

“네, 그렇다니까요!”

길석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불현듯 무언가 생각이 나려다 만 것 같았다. 꿈에서 길석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흥분한 애심의 표정에 잡힐 듯하던 생각은 곧 달아나 버렸다.

“보자, 길석이의 나이가…….”

“스물하나입니다!”

애심이가 그것도 기가 막힌다는 듯 외쳤다.

“그래, 그랬던 것 같아. 둘 다 선남선녀이니 잘 어울리겠네. 그런데 애심이, 넌 왜 그렇게 흥분한 것 같으니?”

“아유, 마님, 제가 놀라지 않게 생겼습니까?”

“응? 여인네 나이가 두 살 정도 많은 게 이상한 건 아니지 않니?”

“그게 아니라요!”

애심은 답답하다는 듯이 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말했다.

“수란이가 여기 온 게 이제 겨우 보름 남짓, 한 달도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혼인을 한다고 하니, 제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거랑 혼인이랑 무슨 상관이……. 어머, 네가 놀라는 이유가, 설마?”

이제야 뭔가 알아차린 듯한 마님을 보고 애심은 쫑쫑 땋은 머리가 흐트러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수란이는 길석과 이전부터 알던 사이가 아니라 여기서 처음 만난 거라니까요. 그러니 둘이 만난 지 딱 보름 남짓, 그 정도란 거 아닙니까. 며칠 전 제가 수란이에게 ‘이제 나도 살림을 꽤 익혔으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 가기 싫은 눈치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니 세상에, 오늘 아침에 저한테 길석이와 혼인하려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랬구나. 어찌 됐든 경사로구나. 방을 나가면 수란이를 불러 주련? 내 축하와 혼인할 준비를 도와야겠구나.”

“네, 마님.”

허둥지둥 들어와 수란의 일을 고하는 애심은 만나자마자 보름 만에 후다닥 혼사를 하겠다는 수란을 앙큼하고 괘씸하게 여기는 듯 일견 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이런 자신들의 일로 마님께 달려가 고할 수 있는 걸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는 냉큼 수란을 불러왔다.

강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냉큼 불려 들어온 수란에게 정말 길석을 좋아하는 건지, 그가 그녀와 같은 마음인 건지, 혹 너무 성급한 결정에 무리하는 건 아닌지, 혼사 후에도 계속 이 집에서 같이 살 건지를 물었다. 그리고 원한다면 자신의 대례복을 빌려 주겠다는 말을 했다.

그녀가 여성댁과 애심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고운 대례복을 두 벌이나 준비한 이유가 빛을 발할 때였다.

수란은 서로 좋아하느냐, 성급하지 않냐는 질문엔 수줍게 볼을 붉히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확고하다는 걸 보여 주었다. 여기서 강희를 모시고 살 거냐는 질문엔 혹 저를 내보내려 하는 건 아닌지 도리어 그것을 걱정하는 터라 강희는 네가 정말 곁에 있길 바란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해 줘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례복을 빌려 주겠다는 말엔…….

“헉, 어버버.”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너무 놀란 수란은 그렇게 입만 벌리고 멍하니 강희를 쳐다보는 무례를 저질렀다.

수란은 자신이 들은 말이 정말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함께 놀라고 있는 애심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 꿈 같은 이야기를 다시 확인하고 싶어 강희에게 되물었다.

“정,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은 강희의 혼례식. 그때 강희가 입은 대례복은 하녀의 신분인 그녀들로서는 감히 꿈도 꾸기 힘든 옷이었다.

자신들이 직접 비단을 끊고 수를 놓아 준비한 옷이지만 그건 강희만을 위한 옷이었지, 그네들은 감히 언감생심 꿈꾸기도 어려운 옷이다.

그런데 그런 옷을 하녀의 혼례식에 빌려 주겠다니.

정말이라면 상상도 못할 영화였다.

“정말로요, 마님?”

옆에서 같이 듣던 애심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저도 모르게 되묻고 있었다.

“그럼. 내가 한 번 입긴 했지만 아직 새 옷이지 않니? 그리고 난 그런 옷을 다시 입을 일도 없고…….”

그 말을 하는 강희는 잠시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똑같은 대례복을 입고서 끝을 준비하던 자신과 기쁨에 눈물이 글썽이는 수란이 괜히 비교되어 마음이 스산해진 탓이었다.

짐짓 쓰린 생각을 지운 강희는 처음 대례복을 만들 때부터 생각했던 자신의 본래 계획을 말했다.

“그래서 너희가 혼사를 치를 때나 대례복을 구하지 못한 주위 사람들에게 빌려 줄 생각이야. 혹, 신랑의 옷도 없다면 내가 마련해 보마. 장군께서도 당신의 종자가 혼인한다는데 옷 한 벌 빌려 주지 않으시겠니?”

저 강희의 입에서 ‘옷 한 벌 정도는 빌려 줄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오다니.

수란은 강희가 예전과는 달라진 걸 느끼고는 있었지만 애심처럼 충심을 다해 모실 정도로 완전히 믿음을 갖기엔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귀한 대례복을 선뜻 빌려 주겠다는 말에 강희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진정으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수란은 제가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잊고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마님에게서 들은 이 말이 정녕 꿈은 아닌지 몇 번이라도 되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정말 그 귀한 옷을 저희 같은 미천한 이가 입어도 되는 겁니까?”

강희는 아직도 의구심 가득한 수란에게 웃어 주며 말했다.

“미천하다니, 신부는 다 귀한 존재야. 그러니 그날에 신부가 가장 빛나야 하지 않겠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려무나. 어느 옷을 입고 싶니? 둘 다 빌려 줄 순 없단다. 하나는 애심이가 입어야지. 너 다음엔 애심이지 않니?”

“마, 마님…….”

강희가 마지막에 한 말은 이미 울고 있는 수란에 이어 기어이 애심마저 울리고 말았다.

안에서 들리는 통곡 소리에 바깥에서 지켜보며 서성이던 이 집사의 눈이 걱정스레 떨렸다. 길석은 이 집사에게도 누님의 아들인 친조카였기에 수란이 허락을 구하러 들어간 일에 당연히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통곡 소리가 들리니, 그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 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웃는 얼굴인 것 같은데도 훌쩍임을 멈추지 않는 애심과 수란이 나오는 걸 보면 더욱 모를 일이었다. 뭔가 안 좋은 말을 들은 것이라면 허락을 구하러 간 수란이 혼자 울면서 나와야 하는데, 두 처자는 방문을 닫은 후 저들끼리 끌어안고 또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울면서 웃기는 또 왜 웃는단 말인가.

나중에 두 처자가 우는 사연을 알게 된 이 집사는 마님에 대해 당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상한 선입견을 심어 준 동생 내외의 말을 다시는 믿지 않기로 작심했다.

안주인이 들어오면서 이 집에도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앙큼한 것, 어떻게 보름 새 혼인할 생각을 하니?”

훌쩍임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애심이 코가 맹맹한 목소리로 수란에게 물었다.

“언니도 참, 나도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고. 그런데 언니가 그새 나보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결정했다고?”

“그럼 어떡해? 아씨, 아니, 마님은 언니 말고 나 하나가 더 있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시는 눈치였잖아. 그리고 살림을 그렇게 빨리 배우실지 누가 알았겠어.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언니가 가라는 소리까지 하니…….”

“참, 그렇다고 혼인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하니?”

“언니도 좋은 사람 생겨 봐. 안 하고 싶은가.”

그렇게 말하는 수란의 얼굴에는 행복한 빛이 감돌았다. 애심은 일부러 약이 오른 척 까다롭게 굴었다.

“뭐어?”

“헤헤, 정말 남 얘기 아니다? 언니도 빨리 혼인하지 않으면 우리들 사이에서 대례복이 금세 다 돌려져서 옷도 바랠걸. 호호, 아, 난 어느 걸로 입을까?”

수란은 옷을 고를 재미에 꿈을 꾸는 얼굴이 되었다.

애심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졌다. 막상 그 옷이 다른 데로 돌려지기 전에 입으려면 정말 수란의 말대로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님이 수란에게 두 옷 다 빌려 줄 수는 없다고 말은 했지만 한 번씩 모두 입어 보고 원하는 걸로 입으라는 이야기를 한 걸 보면 확실히 다른 한 벌은 애심을 위한 배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애심은 옷을 고르며 입어 보는 수란의 성화에 슬쩍 저도 한번 입어 보고는 빨리 신랑을 찾아야 할 것 같아 몸이 달 지경이었다.

실제로 수란의 혼례가 치러졌을 때 신부가 입은 옷을 본 하객들은 놀람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날은 신부가 입은 옷의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지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더 많이 회자되었다.

그래도 신부는 정말 아름답고 빛이 났다. 강희는 제가 두 번 다시 입지 않을 옷을 썩히느니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에 더 행복해 했다.

강희는 수란에게 대례복 말고도 은비녀 하나를 선물해 줬고, 그것은 애심의 마음을 더욱 자극했다. 강희가 ‘너도 혼인하면 주마’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애심이 그 은비녀를 갖고 싶어서라도 주위를 둘러보며 제 신랑감을 찾게 된 건 소소한 후일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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