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혼례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채운의 병영에는 강희가 왔다 간 이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병사들을 위한 보급이 이루어졌다.
딸이 채운을 찾아갔다는 걸 안 성도종 대감이 약속한 날짜를 앞당겨 지원한 물자를 보내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과연 나라 안 십 대 갑부라는 성도종 대감이었다. 그 배포가 대체 얼마나 큰 것인지 병영으로 속속 밀려드는 물자의 양은 산더미라는 말을 무색케 했다. 갑작스레 밀려드는 엄청난 보급에 다들 눈이 휙 돌아갈 정도인 것이다.
견물생심이다.
그래서 채운이 가장 먼저 방비하고 신경 쓴 것이 도둑과 횡령에 대한 처벌이었다.
첫날부터 발생한 도둑질에 군법에 따른 엄중한 처벌이 이루어지며 모든 물자들은 병사들을 위한 것이란 공표가 있었다.
그리고 공표는 곧 현실이 되었다.
제일 먼저 병사들의 식사의 질이 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장비와 의복이 바뀌었으며, 군마와 화살은 여분이 남을 정도였다. 게다가 군 장비들을 수시로 고칠 수 있도록 대장간과 장인들이 바로 옆에 들어와 상주할 예정이었으며, 새 숙소를 지을 자재들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도종 대감의 지원은 시작하자마자 물건과 금전, 인력에 아낌없이 쏟아져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이,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성 대감은 지원이 시작되던 첫날 병영으로 직접 찾아와 생색을 내며 공치사를 했지만 이후 다시 찾아오지는 않았다. 십여 년 만에 뱃길이 열린 덕에 한꺼번에 몰린 서방의 상인들을 만나느라 얼굴을 내밀 시간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하루가 멀다 하고 채운과 왕세자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올 수 없게 되자 자신의 공치사를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 성 대감은 대신 강희를 보내 물건들이 들어오는 일에 차질 없게 만들겠다는 말을 전했다.
최대한 했다는 일이 규방에서 수틀이나 매만지던 딸이다.
설마 성 대감도 딸이 그 엄청난 물자의 수발을 통솔하기라도 기대해서 한 말이었을까. 아마 자신 대신 강희에게 눈도장을 찍게 하고 미리 점수를 딸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강희가 병영에 다시 오는 일은 없었다. 물자를 실은 마차들의 행렬은 거의 매일 이어지고 있었고, 간혹 선두에 사람이 타는 마차가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을 위한 마차에도 상단 책임자들뿐, 강희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채운은 성 대감이 보냈다는 물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책임자 무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 간혹 머리를 땋은 여인의 뒷모습이 있으면 꼭 한 번 확인하면서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이다.
‘왜 오지 않는 거지?’
문득 든 당치도 않은 생각에 채운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누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
그는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할 테지만 그의 마음 어느 한구석에는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할 날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에서 어느 순간 ‘아직 한 달이나 남았다’로 바뀌어 있었다.
물자가 들어오고 단 열흘 만에 병영 안은 물자와 인력으로 북새통이 될 지경이었다. 그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효율적인 관리에 적재적소에 빠르게 배치되며 다들 바삐 일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얼추 병영의 꼴이 제대로 갖추어진 그때, 왕세자가 직접 행차했다.
“정말 대단하군!”
“오셨습니까?”
채운이 수를 맞으며 반가이 인사했다. 새 병영을 짓기 위해 먼저 있던 막사를 철거하고 터를 닦는 걸 감독하고 있었던 터라 그의 몸은 온통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참, 자네가 내게 그렇게 깍듯하게 인사하면 섭섭하다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하.”
“자넨 너무 고지식해. 도성 안도 아닌데 여기서만큼은 날 벗으로서 맞아 달라고.”
“…….”
채운은 수의 말에 빙긋 웃기만 할 뿐 주군을 모시는 수하의 태도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말은 핀잔처럼 하고 있었지만 채운을 바라보는 수의 눈은 반가움과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최근 각국의 사신들이 몰려들며 왕세자의 자리가 보통 바빠진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곳에 온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지금 채운은 병사들과 함께 머물고 있지만 이 일만 마무리되면 그도 도성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든든한 수하이자 벗인 그가 곁을 지키게 되니, 수로서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왕세자와 인사를 나눈 채운은 그의 뒤에 서 있는 젊은 호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그 호위가 반가움으로 눈을 빛냈지만 채운은 인사도 아닌 말을 무뚝뚝하게 건넬 뿐이었다.
“저하를 잘 모시고 있느냐?”
“네, 걱정 마십시오, 형님.”
그랬다. 그 호위는 채운의 친동생인 윤만운이었다.
채운은 동생을 본 것이 기뻤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엄하게 말했다.
“만운, 여긴 사석이 아니다. 난 네 형으로서 묻는 게 아니라 상관으로서 묻는 게다.”
“네에, 네! 장군님, 저 좀 믿어 달라니까요.”
그러나 딱딱하며 엄격한 채운의 어조와는 대조적으로 만운은 그에게 유들유들하게 답했다.
수는 오랜만에 보는 동생에게 인사 대신 꾸짖음으로 대신하는 채운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말은 저렇게 딱딱한 듯해도 자신의 동생이 겪어야 할 위험을 걱정해서 저런다는 것이 눈에 빤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도타운 정을 나누는 저 형제에게 부러움이 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가 채운과 처음 만난 것은 삼 년 전, 가흔 왕자의 외조부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꼼짝없이 죽게 생겼을 때였다. 산적으로 위장한 암살자들은 그의 목전에까지 짓쳐 들어와 있었다.
그땐 정말 이렇게 죽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채운은 그때 기적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해 주었고, 이후 가장 믿는 수하이자 벗이 되었다.
하지만 수가 채운을 자신의 벗이라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목숨을 구해 준 이라서가 아니었다. 그 나이에 성취한 출중한 무예와 비범함, 그리고 가진 힘에 비해 채운이 가진 겸손함과 자신의 출신에 대해 비굴하지 않은 대범함 등 장부로서 누구나 반할 만한 기량을 갖춘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에게 바치는 충성과 신뢰가 이보다 더 깊은 이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채운은 조건을 따질 필요도 없이 무조건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만운 또한 젊은―어린― 나이라고 무시하다간 큰코다칠 무서운 실력을 가진 이였다.
수는 나라의 동량으로서, 그리고 그의 손발이 되어 줄 확실한 인재들로서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 형제를 얻은 게 자신의 가장 큰 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윤 장군, 자네가 직접 이렇게 일일이 다 지시를 하다 보면 끝도 없겠네.”
“아닙니다. 병영의 숙소가 영구적으로 자리 잡는 터라 위치를 잡는 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하께서도 좌부장 김상진을 아시잖습니까. 그는 믿을 만하고 유능한 사람입니다. 지금 들어오는 물자만 정리되면 이 병영의 총괄은 그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정작 좌부장은 보이지 않는군. 어디로 간 건가?”
수는 병영에 자주 오는데다 올 때마다 의례를 차리면 훈련에 지장이 있다 하여 직접 앞에 보이지 않는 한 인사도 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 바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이나 장교들이 일부러 도열을 하고 찾아와 인사를 하진 않지만 좌, 우 부장인 김상진과 황영각도 보이지 않기에 찾는 것이다.
“좌부장은 우부장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마련산에 물자들을 지원하러 갔습니다.”
그 답에 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참, 좌부장이나 우부장이나 그런 일에 직접 움직이다니. 누가 자네의 수하가 아니랄까 봐 고지식한 건 똑같군. 자네가 여기 머무는 날도 이제 한 달이 남지 않았는데, 그에게 일을 다 넘기려면 한시가 급한 게 아닌가?”
“혼사를 치른다고 제가 어디 갑니까? 서두를 일은 아닙니다.”
“그래, 그렇긴 하네만…….”
수는 곧 혼인을 한다는 채운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엔 내심 찝찝함과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성도종 대감이 그에게 힘을 보태는 것은 반길 일이나 그의 여식에 관해서는 자신도 들은 적이 있는 탓이다.
이미 성사된 마당에야 무를 수도 없고, 지금 새로 지어지고 만들어지고 물자를 들여오는 이 현장도 그 혼인에 의한 것이다. 성 대감의 힘이 그에게는 절실히 필요했다. 다만 벗을 판 것 같은 마음을 지울 수 없어 속이 착잡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따지기엔 이미 끝난 일이었다. 누구보다 채운이 다시 들추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나마 조금 가벼워질 수 있길 바라며 슬쩍 농을 비췄다.
“장군의 빈집이 이제야 채워지겠군. 그대의 집에선 가끔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다네.”
“그렇습니까?”
멀뚱히 답하는 채운은 정말 그런가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 농이네, 농! 이 친구는 참, 농도 못 알아들으니…….”
“우리 형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만운이 왕세자에게 속삭이듯, 그러나 일부러 다 들리게 귀엣말을 건넸다.
“아, 그렇지? 자네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야.”
“네, 천만다행이지요.”
“하하하하.”
“하하아…….”
왕세자의 웃음소리에 따라 웃으려던 만운은 엄하게 부릅뜬 형의 눈에 입을 다물었다.
왕세자의 곁에선 마음 놓고 형을 놀리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이러다 쌓이면 형은 당장 대련을 하자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여긴 병영 안이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시치미를 뚝 뗀 만운은 웃음을 멈추고 근엄한 표정을 가장하며 다시 왕세자의 뒤에 섰다.
그러나 채운은 만운이 한 쓸데없는 걱정처럼 그를 붙들어 대련을 하자거나 사이좋게 한담을 늘어놓을 새도 없이 매우 바빴다.
해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지만 남들과 다른 시간을 사는 이들에겐 부족하기만 했다. 오늘도 그에겐 짧기만 한 해가 빨리 저물고 있었다.
* * *
성도종 대감이 병영에 지원을 시작하며 그 물자의 보급에 대해 강희에게 맡기려던 건 사실이었다.
원래 꿈속에서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 대신 병영에 책임자로 가라는 말을 하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펄쩍 뛰며 딱 잘라 싫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곧바로 송국으로 유람을 떠났다.
지금의 강희는 채운과 마주치지 않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그리고 신부 수업을 명분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신부 수업은 단순히 명분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실제로 요리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강희는 요즘 저가 태어나고 생전 들어가 보지도 않던 부엌에 들어가 이것저것 배운다며 여성댁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진짜 부엌살림과 요리를 배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만일 채운이 이 사실을 안다면 오히려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아니, 분명 싫어하겠지만 강희는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꿈에서 돼지 여물을 훔쳐 먹기까지 하던 그녀가 결국 호구책으로 찾을 수 있었던 일은 남의집살이와 음식을 만들어 파는 일이었다.
꿈속에서는 지켜보기만 하던 일들이라 남의 일 보듯 했지만 꿈에서 배운 것들은 강희의 기억 속에 꽤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다만 그 기술들이 몸에 배어 남아 있는 건 아니어서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중이었다.
강희는 배우려는 의욕이 강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손끝이 야무져서인지 여성댁이 일러 주는 대로 곧잘 빠르게 배우는 중이었다.
여성댁은 처음에는 부엌에 쳐들어온 강희를 불편해 하던 것을 며칠 지나지도 않아 금방 잊어버렸다. 그만큼 강희가 진심으로 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시집보내기 전의 딸을 가르치듯 강희에게 살림 전반을 가르치는 데 더 열심이었다. 여성댁은 열심히 노력하고 빨리 배우는 강희에게 이후로도 무엇이든 알려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혼례일까지 고작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배우는 건 이후로도 계속해도 되는 것이다.
강희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면서 손도 베이고 그릇도 여러 개 깼지만 착실히 배워 나가고 있었다. 그중 강희가 제일 먼저 배우고 가장 잘하는 음식은 국수 만들기였다.
“여성댁, 이건 어때? 괜찮아?”
강희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국물을 조금 덜어 맛보고는 같이 맛을 본 두 여자에게 물었다.
마른 새우와 멸치를 우려내 만든 새로운 육수가 자신의 입맛에는 더 맞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도 중요했다. 며칠 동안 만들던 사골을 고아 만든 육수도 괜찮았지만 시전의 입맛을 사로잡던 꿈속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에 처음 도전해 본 것이다.
“아씨, 시전의 심 씨네 가게 국수 같은 맛이 납니다.”
“정말?”
“네, 아씨. 저도 그런데요?”
여성댁과 애심의 말에 강희는 정말 기쁘게 활짝 웃었다.
시전의 심 씨네 가게는 장에 들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가게였다. 저렴한 가격이야 다 그만그만하지만 그곳이 유독 단골과 손님이 많은 이유는 당연히 맛이 좋아서였다.
그런데 저가 만든 육수의 맛이 그 맛과 비슷하다고 하니 기쁠 수밖에.
물론 강희가 만든 것이 그 깊은 맛과 오랜 손맛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그 비슷한 거라 해도 엄청난 칭찬이었다. 예전의 그녀는 왜 이런 소소한 기쁨을 몰랐던 걸까.
세 여인은 강희가 만든 국수로 상을 차려 금세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강희도 어제 심 씨네 가게의 국수를 먹고 왔다. 두 여인네들의 말처럼 자신이 만든 게 그 가게의 국수 맛만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 엄청 발전하여 꽤 맛있는 것 같았다. 아마 재료가 훨씬 고급이어서 그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여성댁이 하는 것처럼 반죽을 척척 치대고 방망이로 쭉쭉 늘리는 것은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더 꽤나 먹을 만한 정도로 발전하는 중이었다.
그러자니 애심과 여성댁은 거의 열흘간 하루에 꼭 한 번은 국수를 먹어야 했다. 애심은 시전에 나가서 사먹는 것까지 합쳐 하루에 두 번씩 먹는 일도 왕왕 있었다.
강희가 그만큼 국수 만들기에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른 여러 가지 요리들도 배우고 있었지만 재료와 반죽하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내는 국수 한 가지만 익히는 데만도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국수를 만드는 데 유독 열심인 이유는 당연히 채운 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즐기고 좋아한 음식이 국수였기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꿈속의 그녀가 나중에 생계를 위해 만들어 팔던 음식도 바로 국수였다.
강희는 문득 꿈속의 그녀가 제 자존심과 허영심 때문에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지 아마도 윤채운, 그를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수 만들기를 생계로 삼을 이유가 없지. 꿈속의 나는 음식 자체를 못했는데, 국수 만드는 법을 익힐 생각을 했다는 게…….’
그러다 퍼뜩 지금 자신이 하는 것도 꿈에서 한 행동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일까? 아니면 꿈을 꾸며 내가 느꼈던 감정일까?’
자신의 감정이지만 도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꿈속 그녀의 일을 남의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왜 그에 관한 감정만은 이렇게 자신에게 바로 대입시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 마음을 다 모르더라도 국수 만들기는 계속 배울 생각이었다.
강희는 아직 스스로의 숨은 마음이 무엇인지 굳이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채운에게 저지른 죄를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마음도 있고, 그와 이혼한 이후 앞으로 자신의 스스로 살아 나갈 방편 중 하나로 이런저런 것들을 준비하는 중이라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국수를 만드는 건 나중에 정말 생계를 위한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희는 이혼 후 아버지에게서 내쳐지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그를 위한 것이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제 노력에 대한 이유를 정리했다.
‘우선 국수 만드는 일은 이쯤 하고, 다른 한 가지가 더 있었지.’
강희는 이문과는 관계없는 다른 사업 한 가지를 더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꿈속에서 보고 배워 둔 것으로, 비누를 만들어 대량으로 보급하는 일이었다.
또한 그 일은 이미 진행에 들어가 있었다. 혼사 준비에 들어갈 비용을 아껴서 비누 공장과 인부와 재료를 준비할 착수금을 충분히 만들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상의하면 그건 필시 이문을 위한 사업이 될 것이다. 제일 좋은 건 혼례 후 채운과 상의하는 것이지만, 그는 그녀가 벌이려는 일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강희는 비누 사업에 관한 한 성공할 때까지 혼자서 진행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회만 된다면 채운에게 말할 기회를 갖고 싶었다. 제일 먼저 군인들에게 보급하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비누는 아직 부유층만 사용하는 것으로, 그 기술이 알려지기 전이었다. 그것은 교역 물품이 들어오는 나라 중 가장 먼 나라인 법국프랑스에서 개발한 기술인데, 송국에서는 자신들도 그들에게 배운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물건만 비싸게 팔 뿐 기술의 유출은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 비싼 비누는 려국에서 당연히 부유층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꿈에서 그의 두 번째 부인이던 재영이 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워 가문의 사업으로 일으키기까지 했다.
꿈속의 그녀가 그 기술을 배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재영이 무언가를 창출해 내고 잘하는 것에 시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비누를 만들어 팔겠다며 아버지께 떼를 써서 경쟁 사업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업은 실패했다.
그녀의 비누는 제 입맛에만 맞게 비싼 재료와 화려한 모양을 고수해 몇몇 고관대작들의 선물―뇌물―용으로나 쓸모가 있었을 뿐 막상 판로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한집안에서 같은 물품으로 경쟁이라니, 세간의 손가락질을 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튼 비누는 꿈속에서 있었던 그녀의 수많은 어리석은 일들 중 하나였긴 했지만 지금 강희가 그 비누를 만드는 법을 알게 된 건 바로 그 덕분이기도 했다.
그때 재영의 사업은 성공했고, 백성들의 극찬을 받았다.
재영이 그녀와 더욱 차별이 되었던 건 그 사업을 일으켰던 이유부터가 달라서였다. 재영은 백성들의 실생활에 파고들어 위생과 편리성에 정말 도움이 되기 위해 비누를 보급하고자 한 것이었다.
실제로 재영이 비누 사업을 일으키고 얼마 후 나라의 삼분지 일이나 되는 지역에서 전염병이 무섭게 돌았다.
그 당시 채운의 봉토에서만 유독 발병자가 드물게 나타나 비누의 실효성이 증명되었다. 덕분에 이후 비누는 평민들의 생활에도 필수품으로 깊이 침투했다.
강희가 비누 사업을 일찍 일으키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크든 작든 전염병의 위험에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벗어날 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희가 비누 사업에 대해 구상할수록 그녀의 생각은 절로 재영에게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비누 사업을 일으킨 이가 바로 재영이었으니까.
강희는 이것이 비록 재영을 따라 하는 것일지라도 이 사업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재영이 그 후에 한 일도 똑같이 할 생각이었다.
재영은 비누 만드는 방법을 어렵게 입수했지만 그것을 공개하여 누구나 알 수 있게 전파했다. 꿈에서 성강희가 재영에게 정말 진 것 같아 분하고 억울해 했던 이유가 바로 그녀의 그런 면 때문이기도 했다.
재영은 그런 생각들을 할 만큼 재기 있고 넓은 아량과 여유로움이 있는 여자였다. 성강희라는 여자와는 대조적으로 대장군인 그와 어울리는 여자였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재영이 채운의 천생배필이라고 했다.
재영은 바로 그런 여자다.
이번에는 그녀가 채운에게 내민 조건 때문에 일 년간의 유예 기간을 얻은 셈이지만 재영이 현재의 생에서도 그의 곁에 있을 거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희는 재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꼬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듭이 지어진 창자 밑으로 숨이 내려가지 않아 컥컥 얹히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꿈속의 그녀가 겪은 일에 대해선 덤덤하게 잊어 가고 있었지만 채운에 대한 죄책감과 재영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열등감인지 질투인지 모를 이 감정만은 점점 생생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니, 성강희?’
강희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씨, 왜 그러셔요?”
애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희에게 물었다.
“아, 아냐. 혼례식이 다가와서 좀 걱정이 되어서.”
“걱정될 게 무에 있습니까. 아씨가 워낙 간소하게 준비하셔서 이미 준비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새 세간도 장군님의 집에 벌써 다 들어갔고, 저희들도 머물 방에 몸만 옮기면 되도록 이사도 다 했습니다.”
“그래, 그렇지? 아, 혼례식 날 주위 마을 어른들 초대는 잘했지? 오시지 못하는 분들께 드릴 떡과 고기, 말린 과일도 차질 없겠지?”
“아이 참, 아씨도. 그거야 아씨가 열두 번도 더 확인하신 게 아닙니까.”
애심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저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에 고심에 찬 표정이 떠오른다.
“그런데 정말 그러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씨 언니들께서도 시집가실 때 패물을 더 챙겨 가신 걸로 아는데, 어떻게 아씨는 가진 패물을 팔아 동네잔치를 하신답니까? 대감께서 혼례 비용을 위의 두 아씨들과 똑같이 책정하신 걸로 아는데, 쇤네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혼례 당일 가장 빛나야 할 아씨 대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신다니요!”
“그래서 혼례복은 네 말대로 그리 준비하지 않았니?”
강희는 애심이 저의 걱정으로 하는 소리임을 알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유, 참 아씨도! 그런 건 다른 여염집 규수들도 그만큼은 합니다요. 하지만 아씨는 도성 최고 거부인 성도종 대감의 여식이지 않습니까! 혼례복이 그 정도인 것도 사람들이 흉볼지도 모릅니다.”
“우리 아버지가 아무리 거부라도 최고는 아니고, 아버지가 거부인 거지 내가 거부는 아니잖니? 그리고 그 혼례복을 두고 그 정도라니. 그런 걸로 흉본다면 그건 흉보는 그 사람의 자질이 그만큼인 거지.”
“아유, 아씨!”
“그만하렴, 애심아.”
“네…….”
애심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기까지 한 강희의 목소리에 투정을 멈춰야 했다. 그러나 애심은 아씨의 혼례복에 대해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했다.
혼례를 준비하는 아씨를 전력을 다해 돕는 것이 요즘 애심의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그런데 아씨는 혼례복이 너무 화려한 것도 좋지 않다 하여 비단에 금사로 수를 넣는 것도 생략하려 했다. 애심과 여성댁이 감히 우겨서 억지로 넣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가실이 그걸 보았다면 정녕 자신이 모시던 아씨인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을 것이다.
사실 강희가 혼례 할 나이가 되면서 그녀가 꿈꾸던 혼수품 목록은 가히 어마어마했다.
이국에서 들여온 보석과 머리가 무거울 정도의 비싼 장신구, 그리고 궤짝 가득 채우고 싶어 했던 색다른 패물들과 송국의 황실에나 쓸 수 있는 비단들.
거기에 그녀가 살 집은 가장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곳이어야 했고, 그런 집이 없다면 새로 지어서라도 가져야 했으며, 가실 외 수발을 들 하녀와 하인들 십여 명도 함께 딸려 가야 했다.
또 나라 안에 세 사람도 가지기 힘든 머나먼 법국의 시계도 혼수품 목록에 올라 있었고, 송국에서 만든 세간들과 천축국의 진주와 남월국의 희귀 애완동물 등등. 일일이 다 꼽기도 힘든 진귀한 물건과 보석, 옷, 집까지 그 목록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바란다고 성 대감이 다 해 주지야 않았지만 꿈속 그녀의 혼례복은 정말 왕비의 대례복에 버금가게 으리으리했었다.
혼수는 넣을 곳이 없어 세간을 다 넣지도 못했고, 패물함은 바라던 만큼 채우지 못했다며 울며 악을 썼으며, 딸려 간 하인들도 십수 명이 넘었다.
제가 원하던 허영과 사치를 반절 이상은 채웠던 것이다.
그런데 강희가 지금 준비하는 혼수품은 그런 것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세간에 대해선 채운의 집사에게 물어 몇 가지 더 추가해야 할 것을 준비했고, 패물은 추가되기는커녕 원래 가진 것을 팔아 잔치 음식을 만드는 것에 보탠 데다 그녀의 수발을 드는 사람은 애심이만 데려가기로 한 것이다.
당장은 수란도 애심과 함께 데려가긴 하지만 그건 강희와 애심이 그 집의 일을 익히기 전까지 도움을 주는 역할로 임시로 빌려 가는 것뿐이지 수란은 도로 친정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허니 그녀를 위한 사람은 애심만 남게 되는 것이다.
대개의 려국 귀족 여성이 자기 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는 걸 고려하면 강희가 채운의 사정을 생각해 당장 그의 집에 들어간 것만 해도 크게 놀랄 일이다. 아마 이전의 그녀 같으면 조용히 받아들이고 수긍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여성댁을 비롯해 주변의 사람 모두가 정말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강희는 이전 그녀의 기본 생활이었던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대신 정말이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그 때문에 애심과 여성댁이 억지로 우겨서 준비해야 했던 것이 더 많았으니, 과거의 그녀가 원래 꿈꾸던 목록을 알고 있던 가실이 만일 이것을 본다면 기절초풍하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이제 나흘 남았네.”
“네, 정말 그렇네요. 아씨, 아씨는 세상에서 제일 고운 신부가 될 겁니다.”
“고맙구나, 애심아.”
강희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그녀의 웃음은 처연해 보이기만 했다. 정작 신부를 곱게 볼 사람은 그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심은 여성댁에게 그리 열심히 살림과 요리를 배우던 주인이 혼례 날이 가까워지자 오히려 슬픈 웃음을 짓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럴 땐 조용히 모르는 체 있어 주는 것이 아씨를 위한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애심은 가실을 내치던 그 순간부터 이전의 아씨와 이후의 아씨가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씨가 정말 변했다는 걸 인식한 주위 사람들은 개과천선이네, 밤새 귀신이 다녀갔네, 산신께 노여움을 타 영혼이 바뀐 것이네, 말들이 많았지만 애심은 아무렴 상관없었다.
애심에게는 지금의 달라진 아씨가 제 주인이라는 것만이 중요했던 것이다.
“아씨, 차를 한잔 올릴까요?”
“그래, 한잔 주련?”
애심이 차를 가지러 재게 방을 나가자 강희는 예전에 미래의 일들을 써 놨던 그 책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꿈에서 깬 후 글을 모르는 가실을 쫓아내면서까지 은밀히 쓴 그 책자엔 꿈에서 보았던 일들이 모두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비교하자면 자신이 달라진 것 말고는 주변에 흐르는 일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혼인을 하게 된 것 아니겠는가.
강희는 당장 며칠 앞으로 혼례가 다가오면서 혼례 이후 가장 큰 사건, 그 첫 번째가 무엇인지를 살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기록으로 한 번 더 살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맨 처음 찾은 기록은 역시나 한재영, 바로 그녀에 관한 것이었다.
‘한재영…….’
기대할 것 없는, 아니, 속죄하는 마음으로 시작할 그와의 혼인 생활이었지만 그녀의 존재만은 참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네가 그녀를 질투할 자격은 없다고 스스로를 질책했지만 마음은 이성을 따라 주지 않았다.
그녀는 재영을 처음 본 그 순간이 혼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있다가 애심이 들어오는 소리에 책을 덮고는 얼른 치웠다.
“아씨, 차 준비해 왔어요. 드시고 하세요.”
이유는 모르지만 침울해 보이는 주인을 위해 차를 따르며 애심은 우스갯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강희는 그녀의 노력을 받아들여 입으론 웃었지만 눈은 따라 웃지 못했다. 마음은 아직 재영을 붙들고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 * *
바로 그 시각.
허락되지 않은 시간에 병영 입구에서 한 처녀가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며 면회를 청했다.
보초는 그녀에게 절대 안 된다, 돌아가라 말하고 있었고, 그녀는 애달게 몇 번이나 매달려 애원하고 있는 걸 그곳을 지나던 채운이 보게 되었다.
“무슨 일이냐!”
“여기 이 여인이 이 시간에 면회를 청하고 있어 그럽니다.”
채운이 돌아보자 보초를 붙잡고 애원하던 처녀가 이번엔 채운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혼자 온 건 아닌지 그녀의 뒤로 시종으로 보이는 하녀가 한 명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여인은 일반 평민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여긴 군 병영이요. 아무리 가족이라도 사사로이 병사를 만날 수는 없소.”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정말 급해서 그럽니다.”
“무슨 일이요?”
“지금 어머니가 많이 아프신데 오라버니를 본 지가 오래되어……. 어머니가 정말 오라버니를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는지요?”
간략하게 듣긴 했지만 그녀의 사정이 딱하긴 했다. 아무리 군법이 엄정하다곤 하나 전시가 아닌 이상 가족의 생사가 달린 일에는 군에서도 인정을 두고 있었다.
“오라버니를? 그가 누구요?”
“한만식이라 합니다.”
“한만식? 천부장 한만식 말이오?”
“네? 오라버니가 천부장이십니까? 그건 잘 모르옵고, 저희 오라버니는 청천 출신으로 올해 나이 스물다섯이고, 궁술 병과에 있다 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신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는데 편지를 보내도 올 수 없다는 답장만 있고 해서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청천은 도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병영과는 도성을 중심으로 정반대 방향이라 튼튼한 남성의 걸음으로도 거의 하루는 걸리는 곳이었다. 여인 둘이 달이 떠오르고 있는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온 사정도 그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청천 출신이라면 천부장 한만식이 맞소. 요즘 얼굴이 안 좋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군. 그렇지만 병영 안은 어수선하니 그대는 예서 기다리시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한재영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장수님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여인의 나붓한 인사에 채운은 웃기만 하며 고개를 저었다.
“됐소. 그 마음만 받으리다. 아무튼 예서 기다리시오.”
그러고는 채운은 병영 안으로 사라졌다.
재영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채운의 뒷모습을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가 옆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에게 그의 이름을 물었다.
“병사님, 저 장수님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곁에서 사정을 다 보고 들은 병사들은 웃으며 채운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의 이름을 듣고 놀라며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볼 처녀가 또 하나 늘게 생겼다 생각하며.
“저분이 바로 해적 두목의 머리를 친 윤채운 장군님이시오. 나라의 영웅이시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영웅을 모시는 병사들 아닙니까.”
“그렇지요.”
“저분이 바로…….”
병사들은 재영의 눈이 깜짝 놀라며 동경의 빛을 가득 담고 그가 간 방향을 다시 보는 걸 새삼스럽지도 않게 보고 있었다. 참으로 자주 보는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처녀도 이제 나흘 뒤 장군님이 혼인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임무에 돌아갔다.
채운과 재영이 처음 만난 날은 바로 오늘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꿈이나 현재나 같은 수순이었다. 다만 이후의 일은 같지 않았다.
아마 강희가 며칠 전 그렇게 찾아왔다가 가지 않았더라면, 혹 이전처럼 혼인하기 싫다며 깽판을 치러 왔다 간 그때라면, 채운은 꿈에서처럼 재영을 마음 깊이 새겼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채운의 마음엔 재영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분명 성 대감이 보내겠다고 했는데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강희 때문에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잠시도 자신을 다시 보기 싫어 안 오는 건가 싶은 울분이 섞여 그의 가슴속은 혼란스러움으로 넘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 꿈과 또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흘이 지나 채운과 강희의 혼례 날이 되었다.
* * *
혼례식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보슬거리는 비가 내렸다.
그런데 아침이 밝아 오자 화창하게 개이며 더없이 맑은 하늘이 되어 있었다.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혼인식을 하기에 정말 축복받은 날이라며 칭찬하는 이도 있었지만 밤새 이어진 비가 폭우가 되어 왕창 쏟아져 이날을 망쳤어야 한다고 악담을 퍼붓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수군거리는 이들이 많아서 애심은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도 들리는 그런 말들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참아야만 했다.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니 어떤 말을 듣더라도 절대 반응하지 마려무나. 소란이 생긴다면 난 슬플 것 같아. 알았지, 애심아?”
아씨는 이런 일이 있을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 아침 그녀에게 단단히 경고와 당부를 했었다.
그때 바로 옆에서 강희를 헐뜯는 목소리를 또 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 저게 뭐야? 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거부 성도종 대감의 여식 혼례식에 예복이 겨우 저거야?”
막상 또 들리는 험담에 애심은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었다. 그녀는 아씨의 당부를 애써 되새기면서 악다구니를 하며 대들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다시 입술만 깨물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당부하던 아씨의 얼굴이 너무나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당신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아씨를 위해 내가 참는다, 참아!’
실제로 강희가 입고 있는 대례복은 정말 아름다웠다. 단지 그들이 예상하던 금은이나 진주, 옥으로 이루어진 장식이 빠졌을 뿐이었다.
‘해태 눈들!’
속으로 하객들을 향해 욕을 한 애심은 제가 직접 준비한 옷임에도 눈을 반개하여 강희의 모습을 새삼 감상하기 시작했다.
대례복은 실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홍색 원삼에 넓은 흰 소매가 유독 반짝여 보였고, 찰랑거리는 푸른 비단 치마는 가녀린 신부를 서너 번은 감을 만큼 넓게 펼쳐져 있었다. 원삼의 흰 깃과 치맛단에 각각 박힌 자잘한 꽃무늬는 일일이 금사로 수놓아져 있었으며, 허리엔 심이 박힌 남색 공단에 길吉과 복福을 뜻하는 금박 무늬를 새겨 넣은 대대를 두르고 있었다.
그뿐인가.
신부의 등에 달린 흉배엔 커다란 봉황이 날듯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강희가 사뿐사뿐 걸어간 뒤로 보이는 자태만으로도 넋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
머리에는 은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화관이 씌워져 있었고, 자주색 비단에 꽃무늬를 금박으로 박아 양 끝에 반짝이는 구슬이 열두 개나 달린 댕기가 쪽을 진 칠보 비녀에 감겨 강희의 아름다운 얼굴 양쪽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운 건 수줍게 걷고 있는 신부의 모습이었다.
유월 초, 신부는 안에 겹겹이 비단 적삼과 마고자를 걸쳐야 해서 한참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날씨에 더울 법도 하건만, 사뿐사뿐 걸으며 나타난 신부에게선 그런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그 고운 자태에 감탄만 하기에도 바빴다.
초대받아 안에 들어온 이들은 물론, 잔치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 모인 거지들도 비록 대문 앞이나 쫓겨나지 않고 혼례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하객들은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와아, 신부가 정말 예쁘네.”
“저 고운 자태를 봐.”
애심은 일부 하객들의 험담에 속이 상해 있었지만 곧 넋을 잃고 강희를 바라보았다.
사실 일부러 흉을 보려는 사람들 빼고는 모두 신부의 아름다움에 홀려 있었다. 신부의 등장에 감탄의 수런거림이 파도처럼 하객들 사이를 흘렀다. 그만큼 오늘의 강희 아씨는 정말 아름답기가 선녀와 같았다.
신부를 꽃 같다고 표현하지만 강희는 그마저도 부족한 것 같았다. 아름다운 신부가 그 큰 눈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은 수줍게 떨리는 한 송이 복사꽃 같았다. 흑단 같은 머리채에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보는 이들의 가슴과 눈을 설레게 했다. 거기에 머리를 곱게 틀어 올려 옷깃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흰 목선에는 같은 여자도 아찔할 지경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고운 얼굴이 오늘은 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붉은 입술만큼 상기된 볼이 도드라져 있어 신부가 얼마나 떨리고 설레며 긴장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축하를 건네는 어른들의 인사에 수줍게 머금은 미소가 그야말로 그림 같은 미인의 자태였다. 그 때문에 어떤 이는 침을 삼키며 신부를 한 번이라도 더 가까이 자세히 보고 싶어 앞 사람을 밀치며 고개를 내밀었다.
제단 앞에 도착한 신부와 눈이 마주친 신랑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오늘따라 원래 치켜진 강희의 눈매가 묘하게 마음을 자극하며 설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녀들이 일부러 그려서 만든 것과는 다르게 그녀의 눈은 요염하지 않고 어여쁘게만 보였다. 마주친 까만 눈동자는 곧 길게 뻗은 속눈썹을 보이며 아래로 향했고, 작게 다물어진 입술이 손대면 붉게 묻어날 것만 같았다.
‘헛!’
저의 생각을 깨달은 채운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생각을 멈췄다.
뉘에게 이런 감탄을 하는 건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부도 그 감탄을 똑같이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채운과 마주친 눈을 급히 내려 떴지만 강희의 가슴은 그의 헌앙한 모습에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관모에 눌린 아래만 보이는데도 그의 선이 굵은 사내다운 얼굴은 여인네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얇은 입술과 우뚝 솟은 코 위로 햇살을 피해 가늘게 뜬 눈매는 마주치는 어느 누구라도 당장에 굴복시킬 것 같은 강한 빛을 발했다.
신부에 비해 단출해 보이는 신랑의 복장은 푸른 장포에 홍색 대대를 두르고 머리엔 관모를 쓰고, 발에는 목화를 신은 모습이었다. 일견 단순해 보이나 봉황과 같이 어우러져 보이는 용무늬 흉배와 신부와 같은 문양의 대대, 금띠가 둘러진 관모와 목화가 과연 평민의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훤칠한 키는 고개를 들어야 그의 턱에나마 겨우 닿을 것 같아 여인네들은 벌어진 입을 닫지 못하고 감탄을 표했다. 비단 장포를 걸친 모습이 늠름하고 기세가 충천하여 칼을 들지 않았는데도 장군의 위엄이 서려 있는 것같이 보였다.
“와아, 신랑도 헌앙하기가 신장 같구나.”
“선남선녀의 결합일세.”
훤칠한 신랑의 외양 자체만으로도 빛이 났기 때문에 나라에서 제일 잘난 신랑감이 이렇게 임자를 만나 사라져 버린다는 것에 눈물짓는 처녀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혼례식은 조상께 다복함과 화합을 비는 절을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진중하며 엄숙하게 이루어졌다.
왕세자도 친우의 혼례식에 참석하고자 했지만 경호의 주체인 채운과 만운이 신랑과 신랑 동생이라 호위를 할 수 없는데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시국에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야 한다는 측근들의 간언이 있었다. 그 자신은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해서 지금 이 자리에는 왕세자가 없었다.
다만 왕세자는 그 마음이나마 전하고자 축하 예물과 사람을 채운의 집으로 보내 정말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던 빈집을 꽉 채워 주었다.
“신부 사배!”
채운은 절을 하는 강희를 쳐다보았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신랑 재배!”
훤칠하고 탄탄하게 단련된 무장의 몸에 신랑의 관복은 너무나 멋지게 어울렸다.
채운이 무릎을 굽혀 절을 하고 일어섰을 때 다시 한 번 하객들 사이에서 여인네들의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우아한 신부의 모습과 어울리는 절도 있고 힘 있는 신랑의 자태만으로도 젊은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혼례식은 그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상을 위한 제례와 도성 인근 용수산에 위치한 절의 주지 스님이 읊는 축사로 긴 예식을 마쳤다. 그리고 갓 맺어진 부부에게 친지와 친우의 덕담과 인사말이 하루 종일 이어질 예정이었다.
강희는 새벽부터 일어나 머리를 다듬어 올리고 화장을 하고 꾸미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했고, 혼례식을 마친 후에도 계속 같은 자세로 앉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겹겹이 입은 옷은 날이 쾌청하다 못해 덥기까지 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옥죄어 오듯 답답하기만 했다. 그 상태로 목을 축일 새도 없이 인사를 받는 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바쁜 혼례식 날이라 옆에 없는 애심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녀의 입은 점점 바싹 말라 가며 어지럽기까지 하고 있었다.
신랑이 먼저 일어나면 강희도 함께 일어설 수 있지만 채운을 찾아온 관료들과 몇몇 친우들 말고도 이 혼례를 축하하기 위해 온 일반 백성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대로 최소한 해가 질 때까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꿈속 그녀 때는 예식이 끝날 때까지 버틴 것이 고작이어서 처음부터 신랑이 혼자 인사를 받는 굴욕을 주었다. 강희는 그 비슷한 일도 만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점점 목이 타 왔다.
애심을 불러 물이라도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누군가에게 불려 간 애심은 돌아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더운 날씨로 땀이 흐르며 그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쉴 새 없이 인사를 하면서 텁텁한 목구멍 때문에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던 강희는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이걸 마시시오.”
한 걸음은 뚝 떨어져 있던 채운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게 물이 담긴 쟁반을 손에 직접 들고서 그녀에게 내밀고 있었다.
“아, 네, 감…… 사해요.”
순간 그의 친절에 당황한 강희였지만 출렁이는 물을 보고선 허겁지겁 입에 댔다.
“그러게 물이라도 달라고 할 것이지, 왜 그렇게 미련을 떨고 앉았소!”
채운은 차갑게 말을 툭 던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희는 입안에 들어오는 물이 그렇게 달고 시원할 수가 없었다.
“정말 고마워요.”
단숨에 큰 대접의 물을 다 들이켠 강희는 그에게 다시 인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쓰러져서 망신을 줄까 봐 그런 것이니 괜한 오해는 마시오.”
“네, 그래도 정말 고마워요.”
짜증스럽고 차가운 그의 말투는 짐짓 귀찮은 일을 다 만든다며 채근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그녀가 목이 마르다는 걸 알고 직접 물을 갖다 준 그의 마음 씀씀이에 강희는 가슴이 사르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말처럼 오해는 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마워요. 정말 오해는 안 해요. 단지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꿈속의 그녀는 왜 몰랐을까요? 약속할게요. 이제부터 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다가 당신이 훨훨 날 수 있게 놓아줄게요.’
그를 바라보며 인사 대신 짓는 미소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아 강희는 축하 인사를 하는 다른 손님을 맞는 척 얼른 고개를 돌렸다.
헌데 채운은 고개를 돌리는 강희를 보며 며칠 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혼란스러움이 다시 솟구치는 것 같아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세상에, 자기가 방금 무얼 한 것인가?
아무리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더워 보인다고 해도 다른 이를 불러 대신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을, 직접 일어나 물을 떠다 준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여자는 왜 이렇게 고운 걸까.
아까 제례를 치른 식장에 막 나타나던 강희를 보며 그는 너무나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에 그대로 그녀에게 시선이 고정되고 말았다. 방금 전에도 물 한 잔에 진심으로 고맙다며 살포시 짓는 웃음이 일부러 자신을 유혹하려는 것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뭐하는 거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이지 미친 게 아닌가!
자기가 누구에게 미소를 지은 건가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저 여인에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채운은 그녀가 웃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리는 것도 맘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원체 싫은 여자라 그런 건가 싶었지만 다른 이에게 웃는 것도 보기 싫으니, 이 무슨 치기 어린 심술인가 싶었다.
허물을 따지자면 옆에 있는 것조차 싫어야 했는데 마음이 그렇지 않아 오히려 더 불편해지고 있었다.
오늘 그녀가 입은 혼례복도 허영과 사치의 정점에 이른 여자라는 오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론 신부로서 아름답게 꾸미긴 했지만 채운도 장군의 반열에 오른 후 귀족들의 혼사에 몇 번이나 참석한 적이 있어 귀족 영애들이 어떤 식으로 꾸미는지는 여러 번 보았다. 그에 비하면 강희가 입은 옷은 오히려 검소해 보일 정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강희는…….
빛이 나게 예뻤다. 다른 여자들은 모두 그녀의 후광에 묻혀 보이지도 않을 만큼 그녀만이 눈에 띄는 것이다.
이 자체가 정말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왜 그때의 그 소녀가 이렇게 달라진 것이며, 또 소문으로 알려진 여자와도 왜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축하가 아니라 비웃기 위해 찾아온 것인지 혼례식을 보러 온 하객들이 그녀에 대해 떠드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성강희가 어떤 여자인가 하는 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구체적으로 그녀가 한 일을 떠들어 대는 이도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어린아이가 그녀의 옷이 곱다며 치맛자락을 만졌다. 그러자 그녀는 평민이 제 몸에 손을 댔으니 그 옷이 더러워졌다며 벗어 던지고 불살랐다고 했다.
그런 여자가 평민 출신의 남자와 혼인을 하다니.
참 두고 볼 일이라는 말이 그의 귀까지 들려왔다. 평민에겐 옷을 만지는 것조차 허용하기 싫어했는데, 부부가 되다니. 어쩔 건가 비웃는 내용이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지만 그 모멸감은 참기 힘들 정도였다. 왕세자를 모시고 대전 안에 들면 대신들에게서 쏟아지던 경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저열한 이들의 조롱을 듣고, 저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강희를 보며 분을 품을 일이 아니건만 저이들이 한 말이 그녀가 자신에게 할 말인 것 같아 울컥 화가 났다.
하지도 않은 말로 책하려 하다니, 소인배가 따로 없었다.
그녀는 물을 마시고 나서 힘이 나는지 다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손님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그는 병영에 찾아왔던 그녀에게 손 하나 대지 않을 거라 을러 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그 약속을 믿는지 그녀는 오늘 그와 여러 번 눈이 마주쳤지만 자신을 의식해 긴장하는 기색은 볼 수가 없었다. 자신과 달리 너무 편안해 보이는 것이다.
헌데도 그는 강희의 아름다운 모습을 의식하느라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흉을 보기 위해 찾아왔던 하객들은 그런 신랑의 얼굴을 하기 싫은 혼인 때문이라며 제멋대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강희는 그에게 물을 얻어 마신 후 정말 더는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요기를 일부러 찾아서 먹고, 애심을 불러 종종 마실 것을 나르고, 볼일도 보며, 저녁까지 무사히 손님을 맞을 수 있었다.
해가 지면서 드디어 신랑, 신부가 한방에 들어 첫날밤을 맞을 시간이 되었다. 강희는 그때서야 자연스럽게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방으로 물러난 강희가 제일 처음 한 일은 다리를 쭉 뻗으며 참을 수 없는 하품을 가리는 것이었다.
‘아, 정말 피곤하다. 그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 들어온 애심이 머리의 화관과 대례복을 벗겨 주는 것도 비몽사몽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애심이 방을 나가자마자 앉은 채로 바로 잠이 들었다.
덕분에 그녀는 신혼 첫날밤에 닥칠 채운과의 어색한 장면을 연출하지 않아도 됐다. 그녀가 은근히 걱정하던, 그에게서 받을 냉대와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다행인 건 강희뿐만이 아니었다.
첫날밤만큼은 의례적이나마 신방에 들어야 했던 채운은 방에 들어오자 앉은 채 잠이 든 강희를 발견했다.
순간 혹시 이것도 자신을 보기 싫어서 하는 연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그때, 그는 도로롱 아주 작게 코를 고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허, 참!”
그 즉시 채운은 자신의 어이없는 오해가 바보같이 느껴져 혀를 찼다.
의자에 꼿꼿이 앉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잠이 든 강희는 정말 피곤해 보였다. 그래서 채운은 어쩔까 생각하며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녀를 안아 들어 침상에 데려가 눕혀 주었다.
그의 조심스러운 동작은 손끝 하나 대기도 싫다던 여자에게 하는 행동치고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튼 강희는 그가 그렇게 안아서 옮겨 눕히는 중에도 전혀 깨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베개를 받쳐 주자 고개를 돌리면서 새근거리며 더 편하게 잠이 드는 것이다.
그 모습은 어찌 보면 참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보통 예식 후 한두 시진 안에 쉬러 들어가는 다른 신부들과는 달리 그녀는 오늘 종일 그와 함께 한마디 인사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인사를 모두 받으며 종일 버티었다.
그런 그녀는 대견하기도 하고, 참 아름답게도 보였다.
‘아니다, 그리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야.’
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은 채운은 흠칫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밖에서 성 대감이 신방의 동태를 살피고 있을 거란 사실을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뛰쳐나가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그의 가족의 불행이 이 여자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정말 소문이야 어떻든 지금 이렇게 누워 있는 이 여자를 사랑스럽게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족의 불행을 몰고 온 그 일을 직접 저지른 것은 그 하찮은 하녀일지라도 원인은 바로 이 여자였다.
다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순간 예뻐 보이는 여자의 외양에 넘어가 그 일을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채운은 강희가 앉아서 잠들었던 탁자에 차려진 술을 따라 입에 털어 넣었다.
그가 마시는 것은 합환주였다.
채운은 강희는 입조차 대지 못한 그것을 그녀의 잔과 자신의 잔에 번갈아 따라 가며 그녀 대신 혼자 다 마셔 버렸다. 그리고 잠든 강희를 알 수 없는 눈으로 한참 바라보던 채운도 어느 순간 벽에 기대어 잠들었다.
정염과 환락이 끓었어야 할 신방에 고요한 밤이 그대로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