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나는 성강희 (2/38)

2. 나는 성강희

기유년1129년 이른 봄.

강희는 눈을 떴다.

주변이 전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사위는 완전히 어두워 시간을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난 그녀의 위로 비단 이불이 스르르 흘러내려 갔다.

‘그녀는 그렇게 죽었다. 그녀의 삶은 정말 그렇게 끝나고 말았는데…….’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버석거리는 이불을 틀어쥐었다.

손안에 느껴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꿈속에서 죽었을 때의 감정이 절절하게 남아 아직도 가슴이 뛰었다. 강희는 저의 손을 보고, 얼굴을 쓸어 보았다.

꿈속의 고생한, 주름진 손이 아니라 어제 저녁 자기 전 본 대로 젊고 고운 소녀의 손이다. 보드라운 뺨이다.

‘그러나 꿈속의 삶도 그녀의 실제 삶이다. 그녀, 성강희가 죽기까지. 오, 그런데 왜 난 자꾸만 ‘그녀’라고 하는 걸까?’

강희는 머리를 저으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아니, 그건…… 나다. 나란 말이다. 내가 바로 그녀가 아닌가. 예부 시랑 성도종 대감의 막내딸, 성강희!’

세차게 저은 머리가 헝클어져 버렸다. 강희는 저의 매끈한 손이 꿈에서의 모습과 겹쳐 보여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며칠째 같은 꿈을 계속 꾸고 있었다. 사실 꿈은 같은 내용이 아니라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긴 일생을 토막토막 이어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죽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마지막 아련한 아들의 절규를 되새기며 눈을 감는 그녀를 보며, 강희는 이것이 이 꿈의 마지막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강희는 며칠 동안 반복했던 질문을 또 같은 말로 되풀이해 물었다.

“내가 정말 성강희가 맞는 걸까?”

강희의 목소리는 목에 무언가 걸린 듯 갈라져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슴에 턱 막힌 후회와 아픔이 사무치게 느껴져서 꿈이 현실인지, 깨어난 지금이 현실인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강희는 머리맡의 자리끼를 더듬거려 마시고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목이 갈라지는 생생한 통증 때문에라도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자신의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답하자면 그녀는 성강희가 누군지,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성강희인지는 확실히 답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 그녀가 가장 의아해 하는 것은 앞으로 그럴 것이란 미래의 일보다 과거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라는 걸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는 것이다.

‘그 패악을 부리던, 사치와 허영이 가득했던 여인이 정말 어제까지의 나인가?’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기억을 읽는 것 같은 위화감,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중 꿈속의 성강희가 저지른 패악은 단순히 위화감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 거부감이 들 정도로 혐오스럽게 싫은 모습이었다. 시장에서 저에게 부딪혀 비단 장포가 더러워졌다고 어린아이를 모질게 패대기치기도 했고, 집에서 일하는 이의 실수로 장신구 하나가 떨어졌다고 허리 굽은 노파의 멱살을 잡아 따귀를 날리기도 했다. 물론 그도 제 손을 더럽히기 싫다고 항상 옆을 따르는 몸종 가실이를 시켜 그리한 것이었다.

어제 입은 옷과 비슷한 옷을 승선의 딸이 입고 있는 걸 저잣거리에서 보았다며 그 옷을 당장 태워 버리고 다른 비단옷을 짓게 만든 것도 성강희가 한 짓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태우고 새로 지은 옷값만 해도 각각 평민들의 일 년 먹을거리를 사고도 남을 사치품들이었다. 그녀가 입기 싫다던 옷을 굳이 태우지만 않았어도 그 옷을 활용할 곳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일부러 가실을 시켜 옷이 다 타는 걸 확인할 만큼 제 것을 나누거나 남들에게 주는 걸 죽어라 싫어했다. 그러면 저까지 더럽혀진다는 것이다.

‘하, 정말 내가 그런 여자라는 건가?’

그러나 다들 그녀를 아씨라 부르고, 누군가 그리 부르면 자신은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자신은 성강희가 맞았다.

그녀가 꿈을 꾸며 가장 불편하게 느꼈던 것이 바로 남의 삶을 엿보는 듯한 위화감이었다. 첫날엔 그것과 함께 충격을, 다음 날엔 거부감을, 또 다음 날부터는 서서히 동화를, 마지막엔 자신의 과거임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꿈이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 있을 일들까지 알게 해 준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자신이 꿈속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확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 ‘네가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예부 시랑 성도종의 삼녀, 성강희’라 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날 불쑥 남의 옷을 입고 남의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이 위화감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차츰 꿈과 현실이 구분되면서 주위를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꿈속에서 지켜보던 누군가의 삶에 들어앉은 것 같은 느낌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이런 비정상적인 자신의 상태를 토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홀로 그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꿈에서 느낀 감정들을 떨쳐 버리려 애쓰고 있었다.

아무튼 꿈은 끝났다.

꿈을 꾼 첫날부터 아침마다 펴 놓고 들여다보던 동경 속 그녀, 성강희와의 바보 같은 기 싸움도. 그녀는 동경 속에서 자신을 마주 보는 앳되고 어여쁜 소녀에게 선언했다.

‘나는 성강희!’

꿈에서 깬 그녀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 * *

며칠간 그녀의 정신을 지배하던 꿈이 끝나자 강희는 이제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속을 답답할 정도로 꽉 얽매는 것은, 이 거북함 중에 가장 거슬리는 것은 저잣거리에까지 파다한 ‘못돼 처먹은’ 성강희의 성질머리였다.

왜 멀쩡한 얼굴을 하고 온갖 사치와 포악을 떨어 댔단 말인가. 그러니 말년에 그렇게 한스럽게 눈을 감지 않았나.

‘그러나 꿈이 성강희, 혹은 미래라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 앞으로 꼭 그렇게 될 거란 뜻은 아니다.’

강희는 절대로 꿈속에서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일찍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 일단 이전의 포악스럽고 저만 아는 꿈속의 그녀를 따라 해서는 안 되었고, 그럴 맘도 눈곱만치도 없었다.

꿈에 취해 있던 며칠간 그녀는 방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누가 오가는지도 관심 없었고, 사실 옆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정신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망연하게 꿈속을 되짚어 보던 며칠을 사람들은 그녀가 아프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의원이 오기도 했고, 까무룩 잠에서 깨면 이마엔 물수건이 얹어져 있기도 했다.

꿈이 끝나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강희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주위의 시선이었다.

한집에 살며 매일 얼굴을 보던 이들이 보이는 것은 조심스런 몸짓과 경계, 두려움 등이었다. 모두들 자신을 꺼리고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눈을 피하고 있었다.

강희는 그 모습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 또한 자신이 만든 상황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우선 이전에 습관처럼 당연하게 했던 행동들을 보이지 않았다. 투정이나 질책, 짜증, 성냄, 비하, 기타 제 아래의 모든 이들을 업신여기는 행동 등을.

그런 강희의 변화는 그녀의 몸종인 가실이가 가장 먼저 알아채고 있었다.

가실이 느끼기에 자신의 주인은 ‘아팠던’ 며칠이 지나고 일어난 후로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자마자 당장 돈을 들고 뛰쳐나갔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강희는 쾌차한 후에도 여전히 집에만 머물고 있었다.

“아씨, 지난번 포목점에 새 비단을 들여온다고 한 날이 오늘입니다. 이제 몸이 나으셨으니 나가 보셔야지요?”

“되었다. 아직은 쉬고 싶구나.”

강희는 눈웃음까지 치며 살갑게 말을 거는 가실에게 무뚝뚝하니 대답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미래라고 생각되는 그 꿈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고 있는 것이다.

가실은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그녀가 봐도 알지 못하겠지만 강희는 가실이 옆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허면 그 옆에 있는 패물 상인에게 뭐가 들어왔는지 묻고 오겠습니다. 제가 보고 알려 드려도 좋지 않겠어요?”

알려 주는 건 뒷전이고, 강희의 위세를 업고 사전 답사라는 명목으로 작은 패물 하나 정도는 거저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허나 그마저도 강희는 시큰둥했다.

“필요 없다. 그만 나가 보거라. 혼자 있고 싶구나.”

“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유독 쌀쌀해진 주인의 모습에 가실은 앞에선 웃으며 나왔지만 문을 닫으며 그 얼굴이 구겨지고 말았다.

어제는 아씨가 지금 쓰고 있는 문방구를 가져오라기에 수란을 불러 시키려 했더니 ‘왜 내가 네게 시킨 것을 남을 시키려 하느냐!’ 호통을 치는 것 아니겠는가.

아씨가 아팠다가 일어나더니 자신에게 갑자기 무에 서운한 것이 있는지 가실은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요즘 그녀는 주인의 잔심부름을 자신이 직접 해야만 했다. 수란이나 애심을 시키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던지라 별로 하는 일이 없던 가실에겐 그것도 꽤 성가신 일이었다.

아씨가 무언가 자신에게 꽁한 것이 있어 그런지도 몰랐다. 허나 어린 시절부터 바로 옆에서 모셔 왔고, 입안의 혀처럼 굴어 왔던 자신이다.

이것도 아씨의 무수한 변덕 중 하나 아니겠는가.

며칠이 지나면 제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던 가실의 눈에 뜰을 지나는 애심이 보였다. 아씨는 아씨고, 오늘 이 화풀이는 해야겠다.

가실은 빨래를 한 광주리 이고 가는 애심의 뒤를 쫓아 기어이 그녀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강희가 꿈에서 깨며 가장 먼저 한 결심은 결코 꿈속에서처럼 최후를 맞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먼저 독하고 어리석기까지 한 제 과거를 떨치고 달라져야 했다.

그 과거를 떨치기 위한 일 순위로 바로 가실부터 멀리 떼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강희라면 제 기분이 나쁘다고 그냥 내쫓았을 것이다. 허나 달라지기로 한 이상, 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내보내야 뒷말이 없다. 더구나 가실은 자신을 거의 십 년이나 모신 몸종이 아니던가.

그러니 명분은 반드시 필요했다.

강희는 자신 앞에서는 웃으면서 제 눈만 피하면 야차같이 변하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요즘 제 뜻을 들어주지 않는 주인에게 불만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분을 찾을 때까지는 그녀를 참아야 했다.

그런데 가실을 떨쳐 버릴 계기는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금세 찾아왔다. 사실 그 일은 계기라 할 것도 없이 이전의 가실에겐 항상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강희가 꿈에서 깨고 나서 처음 보게 된 그 장면은 정말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강희는 그 장면을 보며 참 어이가 없기도 했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자신으로 인해 기인한 것이란 사실에 불쾌하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가실을 참아 주는 며칠 동안에도 자신이 꿈에서 본 것과 현실의 모습을 비교하며 두 모습을 일치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알고 있는 자신의 물건들, 자신의 방, 자신의 하녀들, 자신의 집 주변을 돌면서 새삼스레 친숙해지는 중이었다.

그러다 뒤뜰에 들어서며 그 광경을 목격했다.

“이게 뭐야!”

가실이 큰 소리를 내며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가실은 저랑 동갑내기인 하녀 애심이에게 떠맡긴 빨래에 티끌이 묻은 걸로 탓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애심은 그런 가실에게 연신 사과를 하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시 빨게.”

“이거 아씨가 가장 좋아하시는 속옷인 거 몰라? 이걸 이렇게 해 놓고 어떡할 거야?”

“내가 제대로 빨아 놓긴 했었어. 그런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떨어졌나 봐.”

“그걸 지금 핑계라고 대는 거야?”

“아니, 핑계가 아냐. 미안해. 내가 금방 다시 빨아 놓을게.”

“지금 빨아서 언제 마른다는 거야? 아직 바람이 찬데 내일 당장 마르기나 할 것 같아? 그러게 넌 왜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하는 거야? 지키고 있었어야 할 것 아냐!”

애심의 뒤에서 다른 두 하녀가 그런 가실을 차마 말리지는 못하고 그 장면을 보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지금 가실이 애심에게 다그치는 빨래는 엄연히 가실이 할 일이었다. 저는 강희만 믿고 노느라 제 일도 떠맡기고 저 소란까지 떠니 곱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부엌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았어. 빨래만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어.”

애심은 속상했지만 대들지는 못하고 가실에게 소극적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너, 끝까지 핑계야!”

그러자 가실은 애심이를 으르며 한 대 때리려고 손을 올리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

강희는 벼르던 차에 때마침 적절하게 나설 수 있었다. 아직 ‘성강희’와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킨 건 아니지만 며칠간 거슬리기 짝이 없었던 가실을 상대로 연습한 덕에 원래 성강희의 말투를 흉내 낼 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말투가 필요한 적절한 이 순간, 가실에게 말이다.

“이것 보셔요, 애심이가 아씨의 옷을 이렇게 만들어 놨지 뭡니까!”

그런 강희의 마음도 모르고 주인의 등장에 가실은 반색하며 냉큼 고자질했다.

다른 건 몰라도 강희가 제 옷에 대해선 얼마나 별스럽고 까다로운가. 흙이 묻어 시커멓게 변한 옷을 강희에게 내보이면서 성을 내는 가실은 자못 의기양양해 보였다.

“아, 이 일을 어째!”

가실의 뒤에서는 하녀들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일의 억울함에 불만은 있을지언정 나설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사색이 된 애심을 보며 이제 그녀가 가실에게 한 대 맞는 것보다 더한 고초를 당할 것이라 걱정하며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강희가 가실에게서 옷을 받아 들고는 그녀에게 도로 내밀며 묻는 것이었다.

“이것은 누구의 옷이냐?”

“그야 아씨 옷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이렇게 펄펄 뛰는 것이지요.”

가실은 아직 강희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분노란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이걸 빠는 일은 누가 해야 할 일이냐!”

“네? 아씨, 그건 저, 그게 당연히 애심이가…….”

“이게 애심이가 해야 할 일이었더냐? 애심이는 부엌에서 일하는 아이인 줄로 아는데? 이건 나의 옷이라 하지 않았더냐?”

“네, 그렇…… 습니다, 아씨.”

“그런데 이게 왜 애심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냐!”

“아, 아씨.”

가실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고, 지켜보던 모두의 눈은 동그랗게 변했다.

여태 이런 일에 눈감아 주는 것뿐만 아니라 가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던 아씨였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모두들 놀랄 수밖에.

그러나 강희는 이 순간 무척 화가 나며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꿈에서 충분히 들여다보아서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직접 본 가실의 행태는 차마 보아 넘기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행동을 비추는 거울인지 알기에 더욱더 화가 났다.

결정적으로 ‘그’와 틀어진 악연을 만든 이가 바로 가실이었다.

‘바로 너만 아니었더라면!’

성강희의 못된 성정에 불을 붙이고 작은 일도 큰일로 만든 것 대부분이 가실이가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실은 바로 못된 주인 밑에 어울리는 못된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맵게 주리라도 틀어 쫓아 버리고 싶었지만 모든 원인이 제 탓인 것을, 제 책임인 것을 하녀에게만 떠넘길 일은 아니었다.

다만 강희는 이것을 기회로 가실을 당장 치워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거기 너희 수란이와 매영이는 부엌에 가서 여성댁을 불러오너라.”

“네.”

“네에!”

여성댁은 우두머리 찬모였다.

이 집안의 살림과 하녀들을 관리하는 그녀를 통하면 이 일은 확실하게 처리될 것이다. 강희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가실을 자신의 옆에서 쫓아 버리는 것이 바빴다.

허나 아직도 설마 싶었던 가실은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고, 애심은 점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강희는 이 자리에서 가실과 말을 섞고 싶지도 않고 애심을 다독일 재간도 없어 그냥 여성댁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여성댁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수란과 매영 말고도 다른 하녀와 하인들이 여기저기서 무슨 사달이라도 난 것인가 빼꼼빼꼼 고개를 내밀고 훔쳐보았다.

여성댁은 음식을 만들다 강희가 불렀다는 계집아이들의 말에 놀라서 옷에 간장이 튄지도 모르고 마구 뛰어왔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아씨.”

여성댁은 대령이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싶어 저리 뛰어온 것이다.

그만큼 그녀들이 아는 성강희의 성정이 포악하고 모질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강희는 여성댁이 손에 국자를 든 것도 잊고 거의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온 것을 보고 괜히 불렀나 싶어 미안하기까지 했다. 또 그걸 보자니 참 씁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여성댁, 바쁜데 내가 갑작스레 부른 게 아닌가?”

“네?”

여성댁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강희가 언제나 대충 부르던 그녀의 호칭을 달리하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반 공대의 말투가 평소의 아씨가 하는 말 같지 않게 너무 공손하게 들린 탓이었다.

“아,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아씨.”

강희는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가실이가 내 시중을 드는 일을 버거워 해서 바꿔 주려 하네.”

“허억!”

여기저기서 숨 막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애심이 큰일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레 지켜보던 모든 이들에게서 들린 소리였다.

개중 가실이는 그 반대의 이유로 정말 숨이라도 멈춘 듯 질린 얼굴이 되어 새빨갛게 변하고 말았다.

“아, 아씨, 아씨가 어찌 제게!”

가실은 당장 저를 두둔하지 않는 강희에게 화가 나려 했다. 그래서 눈을 치켜뜨며 감히 주인에게까지 성질머리를 보이는 것이다.

강희는 그런 가실을 무시하며 여성댁에게 다시 말했다.

“여성댁, 애심이가 그동안 부엌일을 하며 내 수발까지 들어왔다네. 그래서 이제부터는 애심이에게 내 수발을 들게 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되겠는가?”

“아, 아니, 아씨…….”

여성댁은 이것이 아씨의 장난인가, 아니면 새로운 심술인가 알 수가 없어 조심스레 강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강희의 표정이 정말 진지한 걸 보고는 황급히 대답했다.

“제게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아씨께서 바라시면 당연히 그리해도 될 일인 것을요.”

“아, 그렇군. 내 먼저 애심이에게 물었어야 하는 것을. 애심아, 넌 어떠하느냐?”

“네? 네, 아씨!”

애심이가 거절할 리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강희에게는 애심이 이 자리에서 거절치 못하고 마지못해 답하는 걸로 보여 후회가 일었다.

‘아, 이런 자리에서 물을 일이 아니었는데.’

강희는 가실을 내칠 것만 생각하느라 미처 그런 부분에는 신경을 쓰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섰다.

“아, 아씨, 저를 정말 내치시는 겁니까!”

그녀의 뒤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운 가실이 원망스레 소리쳤다. 우뚝 걸음을 멈춘 강희는 가실을 돌아봤다.

“네 감히 지금 내게 무어라 한 것이냐?”

서늘한 눈으로 아무 감정조차 보이지 않는 강희의 서슬에 가실은 움찔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쨍알거리며 소리치는 아씨보다 지금 이 모습이 더 무섭게 느껴진 것이다.

“여성댁, 가실은 알아서 하게. 정 이 집에 있기 싫다면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그 말을 끝으로 강희는 다시 뒤돌아섰다.

쭈뼛쭈뼛 눈치를 보던 애심이는 여성댁의 부라림에 부리나케 강희의 뒤를 따라갔다.

그 뒤로 가실의 울부짖음이 들렸지만 아무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가 강희에게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을 알게 된 이상 가실은 완전히 여성댁의 손아귀에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희는 이미 여성댁에게 그 권한을 확실히 쥐어 주고 갔다. 집에서 나가라는 말도 했으니 쫓아내도 된다는 말이었다.

제 주제도 모르고 호가호위하며 꼴사납게 남을 괴롭히고 으스댈 줄만 알던 가실이 정말 아씨에게 뭔가 단단히 밉보여 버려진 것이다.

여성댁이나 다른 하녀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사람들도 가실을 곱게 보지 않았다. 가실이 그동안 같은 하인 종속들에게 한 짓이 있었던 것이다. 하녀들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거나 물건을 빼앗거나 제 일을 떠맡기는 것 등은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동안 가실에게 당했던 일을 그대로 보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가실은 며칠이 지나도 이게 사실이 아니겠거니, 자신보다 아씨의 맘을 더 잘 헤아려 미리 나서서 더러운 일들을 해 줄 이가 없다 여기며 발악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자신이 정말 강희에게 버려진 것을 부인하며 버티었다. 완강한 가실의 태도에 저러다 정말 가실의 말처럼 아씨의 변덕일지도 모른다며 걱정하는 이도 생겼다.

며칠 후 가실은 작정하고 호되게 일을 시키는 여성댁의 말도 듣지 않고 강희가 지나는 길목에 지키고 섰다가 그 앞에 엎드리며 다시 제가 잘 모시겠다고 빌었다.

“아씨, 뭐 때문에 속이 틀어지셨는지 모르겠지만 저가 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아씨의 앞뒤를 살피려면 쇤네와 같은 이가 필요할 터,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성심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면서 강희의 치맛자락을 그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강희로서는 눈살을 찌푸릴 일.

그러나 강희가 그녀를 물리치려는 순간, 애심이 먼저 나서서 그런 가실을 패대기쳤다.

“흥, 우리 아씨가 어찌 너 같은 것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더냐! 썩 가서 맡은 일이나 잘하려무나.”

“아니, 근데!”

가실의 눈도 당장에 도끼눈이 되었다.

가실은 감히 저를 넘어뜨린 애심에게 불을 뿜듯 달려들려 했지만 애심은 이미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가실을 향해 독을 품고 쏘아보는 애심의 기세가 정말 달려들면 금방이라도 다시 넘어뜨리려는 듯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윽, 저, 저것이.”

애심은 단 며칠 동안 기세가 당당해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강희의 완전한 충복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가실의 모진 구박을 받은 원인이 모두 강희의 위세를 업은 탓이었는데도 애심은 단 며칠 만에 강희에게 완전히 굴복했던 것이다.

“아방우리 쪽, 또는 우리 편의 사람, 저년을 끌고 가 주세요! 아씨까지 불쾌하시겠어요.”

가실은 그 길로 하인들의 손에 들려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강희 아씨는 정말 제가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도 가실을 한 번도 다시 돌아봐 주지 않았다.

“아씨, 아씨가 제게 이러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가실은 발악하듯 외쳤다. 그 말에 강희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가던 길로 가기 시작했다.

가실은 완전히 무시된 것이다.

“흥, 나를 어찌 보고……. 내 결코 이대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게요!”

제가 정말로 확실히 버림받은 것을 깨달은 가실은 이 집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강희를 향해 쉴 새 없이 원망을 퍼부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제 방에 들어가 요란하게 짐 싸는 소리가 들리는 뒤로 하녀들이 수군거렸다.

“아씨께서 진짜 가실이 년을 버리실 모양인데?”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진짜 그러실 결심을 굳힌 듯하네.”

“아이, 고소해. 이제 가실이 년 위세 떠는 꼴을 안 봐도 되는 거네요.”

“이것들아, 맘을 곱게 써야 시집을 잘 가지. 그래도 뭐 가실이 년이 오죽했었어야지. 그런데 저년 하는 게 좀 이상한데요, 여성댁?”

“그러게요. 저 지껄이는 소리 하며, 뭔 짐을 저렇게 오래 싼데?”

가실이 이렇게 버티지 않고 이전에 미리 제가 아씨에게 확실히 버림받은 걸 깨달았더라면, 그래서 반항하지 않고 고이 일하거나 아니면 미리 짐을 쌌더라면 그동안 제가 훔쳤던 모든 걸 빼돌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가실은 마지막까지 괴성을 지르며 포악을 떨다 여성댁의 눈에 걸리고 말았다. 그녀가 짐 싸는 걸 지켜보고 있던 하인들 사이에서 이상하더란 말이 나왔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짐을 싸는 와중에도 가실은 강희에 대한 험담을 멈추지 않았다. 그 험담이 담을 넘어 길을 걷는 이들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감히 모시는 주인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는 하녀라니.

그리고 그녀가 짐을 싸는 방으로 쳐들어왔던 여성댁은 하녀가 가질 물건이 아닌 것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가실은 다른 하녀들과는 달리 혼자 방을 쓰고 있었다. 아직 강희의 본심을 확신할 수 없었던 여성댁이 방까지 바꾸라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헌데 그렇게 혼자 쓰는 방이라 그런지 가실은 제 것이 될 수 없는 물건을 많이도 훔쳐다 놓았다. 그 대부분이 강희의 물건인 건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결국 가실은 물건을 챙기는 건 고사하고 매를 맞고 빈 몸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주인을 험담하며 도둑질까지 한 그녀가 몇 대 매를 맞은 것 빼고는 크게 치도곤을 당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랄 수 있는 일이었다.

허나 가실로서는 결코 다행인 일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가실은 독심을 품고 온 사방에 강희에 대한 독설과 온갖 나쁜 소문들을 지어내며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더니, 그 말대로 한 셈이었다.

덕분에 강희에 대한 소문은 더욱 악화되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성도종 대감이 가실을 붙잡아 집에서 쫓아낼 때보다 더한 곤장을 치고, 반병신이 된 그녀를 북방의 먼 곳으로 쫓아냈다고 했다.

그러나 강희의 악화된 소문은 좋아질 수가 없었다.

소문이야 어찌 됐든 강희는 가실이 옆에 없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짐을 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가실을 곁에서 치우는 일과 제 것이 아닌 삶을 사는 것만 같은 이 위화감이 사라지는 것이 같은 말처럼 여겨졌다.

꿈속의 강희가 집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함께했던 가실은 분명 성강희라는 여자를 일컫는 중요한 열쇠, 혹은 다른 무언가였던 건지도 모른다.

‘이것이 진짜 내 현실이겠지? 그리고…… 꿈과는 다른?’

강희는 가실이 옆에서 사라지자 비로소 현실의 자신에게 동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꿈이 아닌 현실로 돌아온 자신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었다.

‘성강희, 이제부터 시작이야. 그러니 이제부터 잘 살면 되는 거야, 정말 잘.’

그러나 꿈은 단순하지 않았다.

가실을 내친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현실은 꿈대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강희의 나이 열아홉.

성도종 대감은 강희의 신랑감을 잡고 혼사를 추진하고 있었다. 가실이 곤장까지 맞고 쫓겨났다는 말을 들은 그날, 강희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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