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1. 그녀, 성강희 (1/38)

차례

1. 그녀, 성강희

2. 나는 성강희

3. 꿈을 뒤틀다

4. 혼례

5. 신혼

6. 시나브로

7. 알려 줄까?

8. 흐르는 마음

9. 모사만운 성사채운謀事萬雲 成事採雲

10. 기다리다

11. 귀환

12. 그녀, 재영

13. 꿈을 만나다

14. 폭발

15. 송국에서

16. 뉘시오?

하루는 장자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꿈에서 깨어 보니,

자신은 분명 장자가 아니겠는가?

이는 대체 자신이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지

그는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장자壯者』, <제물론편> 중에서.

위의 이야기는 유명한 호접지몽莊周夢蝶의 고사이다. ‘물아物我의 구별을 잊음’을 비유하는 말로, 장자가 자신과 평생을 동고동락한 아내를 잃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다 저와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 그녀, 성강희

그녀는 정사품 예부 시랑을 지낸 성도종 대감의 금지옥엽으로 사 남매 중 막내였다.

위로 언니 둘과 오라버니 한 사람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아비의 곁에 남은 자식은 그녀 하나로, 나이 차가 많은 형제들과는 거의 정이 없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그녀와 열세 살 차이 나는 오라비는 그가 스물이 되던 해 낙상하여 죽었고, 각각 열여섯, 열 살 차이 나는 언니들은 그녀들이 스물이 되기도 전에 이미 정략적으로 시집간―팔려 간― 지 오래라 정 붙일 새도 없었다.

그녀도 열아홉이 되자 권력욕이 강한 성도종 대감의 입맛에 맞춰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혼인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점찍은 혼처에 엄청나게 반발했다. 왜냐하면 신랑감이라는 이가 원래 문벌귀족 출신이 아니라, 남해의 해적을 토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 새로 장군이 된 평민 출신의 신흥 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신랑감은 아버지가 끈을 대기 위해 제 딸을 넘길 만큼 그리 욕심나는 인재였지만 그녀는 그가 끔찍하리만큼 혐오스러웠다.

그녀는 제 아버지보다 더 핏줄의 정통성에 대한 우월감을 갖고 있는 그런 여자였다.

열아홉에 이루어진 약혼에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혼인할 수 없다고 버티던 그녀는 한 푼도 주지 않고 그냥 내쫓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그와 혼인할 수밖에 없었다. 핏줄에 대한 정통성도 중요했지만 그녀가 여태 누리던 화려한, 만인이 떠받들어 주는 생활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혼인했다.

그녀의 나이 스무 살.

경술년1130년, 청왕의 치세 마지막 해였다.

그는 그녀가 그를 싫어하는 것보다 더 그녀를 싫어했다.

어느 날, 언제나 사람을 무시하고 사치만 일삼던 그녀가 그에게 잔혹한 폭언으로 대들다 무참하게 당한 날이 있었다. 아마 ‘네 더러운 피가 내 몸에 한 방울이라도 섞이게 둘까 보냐, 네 더러운 몸 어디를 나와 닿게 두겠느냐’라는 말들을 늘어놓았을 때일 것이다.

그날 그녀가 한 것은 평소보다 더 심한 폭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날이라면 그런 그녀를 무시했을지도 모를 그가 미움을 터트렸을 만큼 그날은 다른 때보다 그의 마음이 무척 사나워진 그런 날이었다.

오전엔 딸과 잠자리를 않는 것에 대해 장인의 질책 아닌 질책을 받았고, 부모님의 기일인데다 술에 대취했던 그는 그날만큼은 울컥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그녀를 상처 주고 짓밟기 위해 그녀를 범하고 말았다.

다음 날 정신이 깬 그는 ‘그런 여자’와 몸을 섞은 자신을 그녀보다도 더 혐오스럽고 기가 막히게 바라보았지만 그날 벌어진 단 한 번의 일로 그녀는 아이를 가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 남자의 더러운 피가 섞인 아이가 제 뱃속에 있다는 사실에 질겁하며 아이를 없애고자 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안 아버지가 아이를 낳기만 하면 그녀가 평소에 그렇게 탐내던 패물 상자를 주겠다고 약조를 했다.

그녀는 패물에 혹해 아이를 낳기로 했다.

그는 그녀가 어떤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도발로 제가 저지른 짓에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수치스러워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들을 낳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는 다른 여자에게서도 아들을 보았다.

공공연하게 들어온 그의 둘째 부인이 진짜 안주인이 되어 갔지만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했다.

그녀는 아이도 남자도 제 인생에 필요 없었다. 그녀가 낳은 아이는 낳자마자 어미 품에서 버려지다시피 하여 집안의 하녀에게 맡겨졌고, 그가 들인 두 번째 부인의 아들만이 그의 관심을 받고 보듬어지며 길러졌다.

어미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아비에게도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사치와 향락은 그녀가 스물여덟 살이 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라의 영웅일 뿐 아니라 자신의 주인인 왕세자를 왕의 자리에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쌓은 그는 왕의 오른팔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녀가 스물여덟이 되자 가진 것보다 더한 과욕을 부리려 했던 그녀의 아버지는 금상의 반대편에 붙어 버렸고, 그들이 벌이는 일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모든 재산을 국고에 몰수당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몰락한 여파는 바로 그녀에게로 향했다.

자신이 누리던 모든 사치와 부의 원천인 아버지가 몰락했음에도 패악을 부리던 그녀는 그의 집에서 쫓기듯 떠나게 되었다. 아니, 사실 쫓겨났다.

이후 그녀는 바닥의 바닥을 경험하게 되었다.

언니들은 역모에 휩쓸리고 정신이 나간 아버지와 연루되지 않기 위해 아예 나라 밖으로 피신해 버렸고, 그녀만이 남아 아버지를 봉양하며 끼니를 잇기 위해 마지막엔 남의 집 돼지에 주는 음식 찌꺼기를 뒤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녀가 내쫓길 때 갖고 있던 패물이나마 잘 건사했더라면 그런 일을 하지 않고도 보통 집칸을 마련해 평생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제 처지를 실감하지 못한 그녀가 패물을 팔아 가며 사치스럽게 낭비해 버린 것이 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는 예전의 제 처지를 다시 되새기기라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달리는 마차 앞에 뛰어들어 ‘이 마차를 세워라! 감히 뉘 앞에서 그냥 지나가느냐!’라고 호령하다가 말에 치여 죽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서른.

경신년1140년, 수왕 치세 10년의 일이었다.

욕심 많고 정신까지 온전치 못한 아버지였지만 그녀를 마지막까지 붙잡아 주는 끈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살아갈 의지조차 잃게 되었다.

그래도 모진 목숨이라 그녀는 스스로 죽지는 못하고 난생처음 제 손으로 끓인 음식을 팔기도 하고 일을 하여 날품을 팔기도 하며 하루하루 살아남았다.

그렇게 서민들의 삶을 겪어 보니 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저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쫓겨날 때 들었던 ‘그 일’을 기억하느냐며 호통 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는 악연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혼인한 자체가 그에게는 시련이었을 것이다.

증오해 마지않는 여자를 제 부인으로 맞게 되다니, 얼마나 싫었을까. 그녀의 단순한, 혈통 운운하는 그런 타령보다 그는 그녀에게 더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그 적개심에 대한 사연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그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도 그녀는 남의 탓으로 제 책임을 피하며 대들었다.

그때 그가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그 일’의 사정을 듣고도 끝까지 발뺌하고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죽이지 않기 위해 쫓아낸 것이었다.

그녀는 이런 현실에 처하기까지의 모든 일이 제가 자초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일반 백성의 고단한 삶을 겪으며 억눌리는 억울함도 알게 되었고, 저의 악랄함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어여뻤던 외모도 세월과 생활고에 변하고 말았다. 동경 하나도 없어 물가에 비쳐 본 얼굴은 훔쳐 먹던 여물 찌꺼기가 말라붙어 추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지금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덧없고 허망한 삶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제 몸에서 난 아들이 보고 싶었다. 갓난아기 때 버린 아들이 이제야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찾아갔다.

그저 어찌 컸는지 얼굴이나 볼 생각이었다.

정을 붙이기는커녕 서로 원수나 다름없었던 남편에게 들키면 아들의 얼굴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수모를 당하고 바로 쫓겨날 판이었다. 그러니 그와 그의 부인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찾아가야만 했다.

그녀가 찾아갔을 당시 열두 살이 된 그녀의 아들은 동갑인 제 동생에게서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나라의 큰 기둥이자 무장인 그의 사랑과 지도를 직접 받은 사랑하는 아내의 아들과 예전 부인의 아들이 같은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저 같은 어미 밑에서 크는 것보다 동생에게 두드려 맞으며 시종 취급을 당한다 해도 아이에게는 더 나은 일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처음으로 생긴 모성애란 그리움에 몇 날 며칠을 아이를 훔쳐보기 위해 그 집에 찾아갔다.

그러는 동안 필연이라면 필연으로 그녀를 알아본 어떤 하인이 있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아이도 자신을 멀찍이서 훔쳐보는 여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날, 아이는 다른 때처럼 동생에게 두드려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곳을 보더니 모진 눈을 하고서 여자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내 어미야? 날 그렇게도 낳기 싫어했다면서 패물함과 나를 바꿨다지? 당신 몰골을 보니 그깟 패물 쪼가리 몇 개조차 지키지 못했네. 그럴 거면 왜 날 낳았어! 왜 낳은 거야! 당신이 저주스러워. 내가 살아 있는 게 저주스러워. 내 몸에 흐르는 피가 싫어. 당신에게서 이어받은 피를 모두 쏟아 내고 싶어!”

아이는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그렇게 오열하다 그녀에게 다신 오지 말라 소리치고는 달아나 버렸다.

절규하는 아이는 쓰러질 때 눈을 맞았던 건지 흰자위에 실핏줄이 터져 벌게져 있었다. 아이가 흘린 눈물은 피눈물이 되어 있었다.

아이는 제가 태어난 사정까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미에게서 버려진 상처를 가진 것뿐만 아니라, 단지 그녀의 아이이기 때문에 온갖 수모와 조롱을 감내해야 했던 것까지 다 알게 되자 그녀는 가슴이 뜯기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이후 다시는 아이를 보러 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일을 하러 나가지도, 돼지 여물을 훔치지도 않았다. 산목숨이라 의무적으로 먹을거리를 입에 넣고 없으면 굶었다.

그렇게 굶은 지 며칠이 지났다.

그날 문득 그녀는 본능적으로 꺼진 배를 채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산자락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어 터진 맨손으로 한 나무를 발견하고는 그 뿌리 근처를 파기 위해 언 땅을 헤집었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조그만 뿌리 하나를 발견하고 주워 들었다.

그 순간.

발밑에 쌓여 있던 눈에 미끄러진 그녀는 비탈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비탈은 경사가 심했고, 넘어진 그녀는 심하게 구르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한참을 구른 그녀는 어느 큰 나무둥치에 부딪혀서야 멈출 수 있었다.

부딪힌 충격에 잠시 정신을 잃은 그녀의 손엔 아직 그 나무뿌리가 들려 있었다. 눈을 뜬 그녀가 일어나기 위해 몇 번이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녀의 몸은 다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땅거미가 지며 그녀의 몸은 점점 굳어 갔다.

그녀의 눈이 깜박거리며 몇 번 움직였지만 구름에 가려진 하늘에는 별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들인 양 별 하나를 보고 싶었지만 하늘은 그 하나조차 그녀에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점점 감기는 눈 사이로 그녀는 아들의 절규를 되새기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말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아들을 향해 한마디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래도 보고 싶구나…….’

마지막으로 감기는 그녀의 눈 너머로 그가 설핏 지나는 것 같았다.

임술년1142년, 그녀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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