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결혼 경쟁
신성한 결혼은 도블락의 민속 신앙 중 가장 오래된 것이자 현재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몇 안 되는 미신 가운데 하나다.
‘그래 봤자 미신이잖아.’
그렇게 바라는데 못 해 줄 거야 없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어머나, 신성한 결혼의 의미라니요. 당연히 그 의미는 사랑의 결실이죠! 끊어지지 않는 인연을 맺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로맨틱하지 않나요?’
‘그 말이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다섯 알파들이 신성한 결혼을 통해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얻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으니 신성한 결혼에 대한 화제는 더는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리체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웬걸, 다섯 알파는 오히려 불타올랐다.
“신성한 결혼이 우선입니다. 잉태는 그 이후 자연스럽게 이뤄질 테죠.”
“치유술사 나부랭이답게 그런 미신을 믿나?”
“경의 선친 역시 신성한 결혼을 맺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신성한 결혼이야말로 축복을 잉태할 수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리체 양은 어떻게 생각해요?”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에 리체는 답할 말이 궁했다. 그녀는 계획적인 삶을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이번 일만큼은 남들이 흔히 말하는 운명, 즉 하늘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피임약을 끊고 지금처럼 지내다 보면 아이가 생길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이의 아버지를 미리 골라 놓고 행동하기는 싫었다. 다만 광기까지 감도는 다섯 알파들에게 그렇게 할 예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 입에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를 향한 남자들의 시선이 야릇해졌다.
“뭐, 리체의 무책임함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
“무례해, 레이.”
“어쨌든 아이를 낳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신성한 결혼을 미룰 수는 없어.”
“어째서?”
리체의 의문에 그라우지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사는 신성과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신성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아요. 도블락인들이 신성한 결혼을 중시하는 건 리체 양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관습이기 때문만은 아니랍니다.”
“그러면?”
“실제로 신성한 결혼이 효과가 있어서, 라고 해야 할까요.”
리체의 의아한 눈을 향해 그라우지가 입꼬리를 올렸다.
“축복받은 아이를 잉태하는 데 있어서 말이죠.”
“…….”
“잉태의 축복은 도블락의 주신이 영향을 준다는 설이 지배적이고, 나 또한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리체 양은 아이가 건강하길 원하지 않나요?”
묘하게 변한 리체를 향해 그라우지가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결혼의 신성은 난임 자체에도 도움이 돼요. 난임 부부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신성한 나무를 찾는 건 꽤 흔하다고요. 물론 산모가 오메가인 경우는 별로 없지만……. 임신이 잘 되지 않는 건 다른 차원에서 왔기 때문인가. 어쩌면 리체 양은 일종의 돌연변이인 걸까요.”
리체의 육신이 아이를 낳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이제껏 피임약 때문에 임신이 되지 않았다는 건 그녀와 라스카 말고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양심이 따끔거린 리체는 혹여 누군가 그 문제를 파고들까 싶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신성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죠. 이왕이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내가 좋을 것 같고요.”
그라우지가 눈을 찡긋했다.
‘애를 못 갖는다 하지 않았나?’
리체의 표정을 통해 드러난 생각을 읽은 그라우지의 입꼬리가 쭉 내려갔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그의 체질도 신성한 결혼의 효험에 맡겨 보자는 거다.
“허약한 마법사의 씨 따위가 어딜 넘보는가.”
얀테가 말했다.
“쇼윈도 부부가 아닌 진정한 부부가 되기를 원해. 날 네 반려자로 선택한다면, 세상에서 갖지 못할 것이 없어질 거다.”
황제다운 광오한 청혼이다. 질 수 없다는 듯 나머지 알파들이 앞다투어 리체를 유혹하는 말을 던졌다.
서로가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은 알파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순식간에 날카로운 기류가 흘렀다. 저를 사이에 두고 팽팽히 맞서는 알파들의 모습에 리체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또 시작이네…….’
하지만 이번의 갈등은 지난 갈등처럼 간단히 넘어가질 못했다.
그라우지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며 기품 있게 속삭였다.
“마탑의 주인만이 소유할 수 있는 아공간을 선물로 드리죠. 역대 마탑주들이 모아 온 온갖 기기괴괴하고 신이한 물건들이 가득합니다. 천금이 있어도 구할 수 없으니, 분명 리체 양의 마음에도 쏙 들 거예요.”
“뭐 하는 거예요?”
“구혼자 흉내?”
“콘셉 놀이를 하자고요?”
“너무해라. 진심이라고요.”
알파들은 그녀와 진정한 의미의 결혼을 하고 싶다는 욕망과 지기 싫다는 승부욕이 뒤섞인 상태라, 리체에겐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구혼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언젠가 선물로 주려고 했던 건데, 최근에 새롭게 발견된 황금 광산의 소유인장이야. 무의식에서 보니까 명예욕뿐만 아니라 금전욕도 가득해 보이던데, 이 정도면 평생 네가 사고 싶은 걸 다 사도 모자라지 않을 거야.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대륙의 모든 전장을 돌아서라도 찾아줄게.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아니, 안 위험해. 네가 바라는데 어떤 창칼이 날 꿰뚫을 수 있겠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채운 도서관을 만들어 그 명패에 리체 양의 이름을 새기겠습니다.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어느 때고 읽을 수 있게요. 리체 양의 이름을 딴 장학 재단을 세워 아카데미아를 설립하는 것도 제겐 어렵지 않습니다. 메디치나가의 후원을 받은 지식인들이 차고 넘치는 대륙이니, 저명한 학자들이 모여들 겁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루에 한 명씩 그녀에게 구혼했다. 물론 구혼이 끝난 후에는 그들을 음해하는 온갖 말들이 나돌았다. 고작 황금으로 뭘 할 수 있겠냐느니, 괴짜 마법사의 위험한 실패작 따위가 쌓여 있을 아공간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다를 바가 없다느니, 고리타분한 도서관 따위 너나 가지라느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시비가 끊이질 않았지만 어쨌든 마지막 차례가 돌아왔다.
기세 좋은 알파들을 걱정했던 것도 처음뿐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좋은 걸 다 갖다 바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 이벤트를 은근히 재미있어하게 된 리체의 눈이 저에게로 다가오는 카이로를 주시했다.
카이로가 뭘 제안할지 궁금해하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하이에나 같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저벅저벅 다가온 카이로가 리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를 들고 리체와 눈을 맞춘 카이로가 미소를 지었다. 준수한 얼굴이 그리는 부드러운 미소에 리체도 저도 모르게 따라 미소를 지었다. 카이로가 꽃 한 송이를 건넸다. 그녀는 갓 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붉은 장미를 내려다보았다.
“선물.”
아공간을 열 수 있는 수식어도, 광산의 소유인장도, 도서관의 건축도도, 황실 황금 창고의 열쇠도 아니었다.
“……그게 다야?”
누군가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태평하군.”
“역시 이런 일엔 끼고 싶지 않다는 거냐, 카이로.”
리체는 피식 웃었다. 하긴 미신을 믿을 사람이 아니지. 장미꽃을 코앞으로 가져가 향을 들이마시는 그녀의 귀에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그대의 것인데 이제 와서 뭔가를 선물하는 건 의미가 없다.”
리체의 눈동자가 스륵 움직였다. 카이로가 씨익 웃었다. 편안한 웃음이었다.
“그대를 부담스럽게 만들기도 싫고.”
“…….”
“신경 쓰지 말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 물론 가능하다면 날 선택해 주길 바라지만.”
“카이로는 이런 일에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요?”
“내 반려가 관련된 일에 어떻게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겠나? 그래도 내 욕심이 그대의 불편함보다 우선되지는 않으니.”
카이로의 유독 따뜻하게 느껴지는 붉은 눈을 들여다보는데 리체는 가슴이 철렁했다. 뚝 떨어진 심장이 바닥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것 같았다. 구혼의 말들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은근히 불편해져 왔던 게 사실이었다. 카이로의 세심한 말에 은은한 감동이 몰려왔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는 가운데 레이몬드의 비명이 정적을 깨뜨렸다.
“아, 씨발. 이럴 줄 알았어!”
얀테는 시가를 빼물었다.
“저건 반칙이 아니냐?”
그라우지와 라스카가 떨떠름한 얼굴로 첨언했다.
“역시 저놈은 재수가 없군요.”
“……좀 느끼하지 않습니까? 제 취향은 아닙니다만.”
카이로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태도로 싹 다 무시했다. 별안간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린 알파들의 시선 끝에 눈을 휜 채 손으로 입을 가린 리체가 들어왔다. 곧이어 그녀의 얼굴에서 환했던 웃음이 사라지고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 얼굴이 무척 예뻤다. 장미를 내려다보던 리체가 중얼거렸다.
“선택하기 싫어.”
“……리체.”
“신성한 결혼이라는 거, 꼭 누구 하나와 해야 하는 건가요?”
곤란해하는 기색이 얼굴에 스쳤다. 알파들이 서로를 응시했다. 라스카가 다정하게 대꾸했다.
“많이 부담스럽습니까?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알지만 누군가를 선택한다고 예전처럼 싸움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막을 거예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소중해요.”
아직도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익숙하지 않다. 리체는 낯이 뜨거워져 눈을 내리깔았다.
“남들이 알면 돌을 던지겠지만.”
실제로 면전에서 양손에 꽃을 한가득 쥐고 있으니 행복하시겠다는 비꼬는 말을 듣기도 했지 않았던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도덕적 허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역시 이런 건 욕먹을 일이겠지.
“옆 나라 돼지치기는 정부를 수십이나 거느리는데 고작 다섯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게 뭐가 어떻다고.”
리체가 슬쩍 눈을 치떴다. 얀테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왜?”
“아니, 그냥.”
그런 말을 당신에게서 들을 줄은 몰라서.
‘내 기분이 상했을까 봐?’
새삼스러운 기분에 리체의 미소가 짙어졌다. 얀테는 무심코 따라 웃으려다가 큼, 헛기침을 하고 한 손으로 하관을 가렸다. 가리지 못한 귓불이 꽃물을 들인 듯 은은하게 붉었다.
“뭐, 씹, 좋아. 신성한 결혼을 한 사람과만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서로의 진실된 마음이 통한다면 상관은 없어.”
레이몬드가 말했다.
“그래도 그건 정해야겠지.”
레이몬드의 뇌쇄적인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누군가를 침대로 유혹할 때와 똑같은 퇴폐적인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누구와 먼저 하겠어?”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결혼 순서를 정하자는 말을 저렇게 야하게 할 필요가 있는 건가?
리체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신성한 결혼을 한다는 게 중하지, 순서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면 절 첫 번째로 삼아 주십시오.”
라스카가 말했다. 재빠른 대꾸에 리체는 말문이 막혔다.
“처음으로 결혼한 자가 첫 번째 남편이 된다는 건가? 그건 놓칠 수 없겠는데.”
그라우지와 라스카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근사한 모양과는 달리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풀풀 날렸다. 다른 알파들의 사정 역시 다르지 않았다.
첫 번째 남편.
‘아, 또야?’
마침내 미묘한 경쟁 관계를 깨달은 리체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다섯 명이 다 신성한 결혼을 한다면, 첫 번째로 그녀의 손을 잡고 신성한 나무 앞에서 맹세의 말을 뱉는 사람이 굳이 따지자면 조금 더 의미가 있을 터!
그뿐만이 아니다. 첫 번째 남편, 두 번째 남편, 세 번째 남편, 네 번째 남편, 다섯 번째 남편. 누가 봐도 첫 번째 남편의 서열이 가장 높아 보이지 않은가?
“리체를 만난 순서로 하지.”
“개소리하지 마. 리체의 각인 상대인 내가 첫 번째가 되는 게 누가 봐도 당연하잖아?”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결혼 경쟁이 다시금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한참 다툰 끝에 결정권은 리체에게 넘어갔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하아, 난 지금 왜 싸우고들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리체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고혹적인 눈빛에 치열하게 달아올랐던 장내의 분위기가 캐러멜 시럽을 뿌린 듯 눅진하게 누그러졌다.
라스카가 쓰게 웃었다.
“쓸데없는 알파들의 자존심이라고 할까요. 게다가…….”
그가 당신도 알지 않냐는 듯한 눈빛을 했다.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니까요.”
은연중에 수긍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리체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누군가를 고르겠어요?”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리체 양의 선택이라면 반박하지 않을 겁니다.”
라스카가 리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는 레이몬드도, 케인으로 얀테를 겨누고 있는 그라우지도, 팔짱을 낀 얀테도, 팔을 늘어뜨린 채 평온하게 서 있는 카이로도 그녀를 응시했다.
“나는…….”
자신의 알파들과 천천히 눈을 맞춘 리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가장 가까이에 선 카이로에게 향했다. 카이로는 다른 이들의 다툼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 초연했는데 리체의 시선이 닿자 눈동자에 웃음기를 담았다. 따뜻한 우유에 진한 초콜릿을 왕창 풀어 버린 것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난 그럼…….”
* * *
“쯧, 어째서 날 두고 그 재수 없는 놈이랑.”
“에이, 말이야 바른 말이죠, 탑주님. 카이로 장군과 탑주님을 비교하면…….”
서늘한 시선에 레베카는 아차 해서 입을 꼭 다물었다.
“비교하면, 뭐.”
“아, 하하, 장군이 탑주님께 댈 수가 없단 말이죠.”
“요즘 사는 게 행복하지?”
차가워 보이는 은빛 팔이 드러나자 레베카는 사색이 되었다. 신기에 이른 마법 공학으로 만든 왼팔은 마력으로 신경을 연결해 마력이 마르지 않는 한 본래 자신의 팔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데다가, 인간의 피륙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은색의 손이 힘을 주면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설마 말 한마디로 십수 년간이나 뼈를 갈아 보좌한 자신을 위협하겠느냐만은……. 기분이 나쁜 듯한 그라우지를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해?”
어느새 소파 뒤에 몸을 숨겼던 레베카가 하핫, 어색하게 웃었다.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은 그라우지가 픽 실소를 흘렸다. 그 미소에 생명의 위협이 지나갔음을 깨달은 레베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솔직히 황후 폐하께서 누굴 선택하셨든 모두 감정이 상하셨을 거 아니에요. 그럴 바에는 점잖으신 대장군으로 정하자는 마음이었을 거예요.”
“아니.”
“네?”
그라우지는 턱을 괴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리체 양은 그놈을 애틋하게 여기거든.”
내막을 모르는 레베카는 어리둥절한 눈을 할 따름이었다. 알파들과 리체와 얽히게 되며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그라우지는 성격 나쁜 악당처럼 입술을 비틀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오, 그것도 외차원의 속담인가요?”
고개를 끄덕인 그라우지가 비딱하게 다리를 꼬았다.
“마음에 안 들어.”
“탑주님은 대체 대장군의 어디가 그렇게 거슬리세요? 도블락 시민이라면 평민이고 귀족이고 할 것 없이 존경하는 분을.”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한 세기를 살아온 마탑의 그라우지가 누군가를 존경할 리가 없지만, 그래도 카이로 정도 되는 인물을 싫어하는 것도 언뜻 이해는 되지 않았다.
카이로는 반려자가 있는 그녀가 보기에도 상당히 근사하고 매력적인 수컷이었다.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통용되는 카리스마가 그만의 특별한 점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인 사내를 거부할 사람은 없을 텐데.
“그럼 좋게 보일까.”
그라우지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구속 같은 건 모르는 사람처럼 고고하게 굴잖아. 꼴 보기 싫게.”
카이로는 늘 그랬다. 리체를 독점하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얀테와 레이몬드에 비해 그녀를 구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점잖은 척을 해 댄다. 알파라면 흔히 보일 법한 불타는 질투도 없다. 그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신사가 따로 없는 모습이다.
“라스카라면 모를까. 알파인 데다가, 학살을 일삼는 기사라는 작자가 그렇게 욕심이 없다는 건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
물론 카이로는 레이몬드, 얀테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다. 황야에서 홀로 살아가는 잿빛 털의 늑대가 본질적으로는 더 비슷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얽매이지도, 스스로 집착하지도 않는 타입. 아마도 그가 그런 사람이기에 그녀에게 각인하지도 않은 것이겠지만…….
“그래서 더 배알이 꼴린다고.”
그런 주제에 리체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건 불공평하지 않은가.
“괜히 방해하고 싶어지게.”
그렇게 말하는 그라우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퍽 심술궂어서, 레베카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 * *
도블락에는 전 대륙에서 유명한 숲이 하나 있다. 도블락이 제국이기 이전, 왕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는 숲은 신이 축복하여 손수 만들어 가꾸었다는 전설이 진실처럼 전해져 왔다. 신의 숲에는 1000년 동안 한 번도 부러지지 않은 거대한 바오밥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가 도블락인이라면 모두가 신성시하는 신성한 나무다.
바오밥나무와 그 일대는 명성에 걸맞게 정령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신비스러웠다. 장정 열 명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둘레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두껍고, 사방으로 뻗은 수백 개의 가지는 아래로 구부러져 바닥까지 뻗었는데 그 모습이 멀리서 보면 갈색의 천들을 나무에 걸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면 그런 장관이 따로 없었다.
겨울이 와도 시들지 않는 잎은 늘 푸르른 빛깔을 자랑했다. 나무 주변은 에메랄드빛 호수가 펼쳐졌고, 옛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소박한 선착장엔 낡았지만 튼튼한 나룻배 한 척이 마련되어 있다. 나무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고자 하는 남녀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할 것 없이 배를 직접 몰고 가야 한다.
“이상하네요. 오늘도 비가 오다니.”
투두두두둑. 쏴아아아아!
라스카가 빗물에 젖고 있는 바오밥나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화창하기로 유명한 숲에 비가 내린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마치 없던 우기라도 생긴 것처럼 비가 가열하게 내려서, 예정되어 있던 리체와 카이로의 신성한 결혼도 비가 그칠 때까지 무기한 연기였다.
“이거 혹시 신의 뜻 아니야?”
비 내리는 숲을 바라보던 카이로의 무심한 시선이 레이몬드에게 향했다. 기다란 이파리 하나를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으며 레이몬드가 이죽거렸다.
“왜 그렇게 봐? 원한다고 모두가 신성한 결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신이 원하지 않으면 간혹 이런 일이 생긴다는 거.”
“…….”
“결혼 상대를 바꿔. 그럼 비가 그칠 줄 누가 알아?”
기대에 찬 레이몬드의 눈을 바라보던 카이로의 입꼬리가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뜻밖의 미소에 레이몬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신을 믿는 줄은 몰랐구나. 있지도 않은 신 따위, 믿는 자가 얼간이라고 했었지 않니.”
“그랬지만 이번만큼은 신의 존재가 강하게 느껴지는데?”
“…….”
“어쨌든 이런 날씨에 결혼은 무리야. 비가 그칠 때까지 좀 더 기다려 보라고. 설마, 그 며칠을 못 기다리겠단 건 아니지?”
레이몬드가 야릇하게 웃어 보였다. 그를 빤히 보던 카이로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신성한 바오밥나무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이파리를 흔들고 있었다.
* * *
“괜찮을까요?”
문헌을 정리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레베카가 창문을 흘끗거렸다. 구름이 둥실거리는 하늘은 해가 쨍하게 떠올라 있었다. 아주 화창한 날씨다.
“날이 이렇게 좋은데, 거긴 계속 비가 내린다네요.”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기름을 먹인 천으로 케인을 세심하게 닦아 내며 그라우지가 대꾸했다.
“아이참,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황후 폐하와 카이로 장군님의 결혼 말이에요.”
그라우지가 눈을 들었다. 날카로운 시선에 뜨끔한 레베카가 입술을 모으고 부산히 책을 정리하는 척했다.
“뭐, 비가 그치지 않으면 결혼 상대가 바뀌겠지. 걱정할 필요 없어. 카이로의 순서가 뒤로 밀리는 것뿐이니까.”
“…….”
“왜?”
“남자의 질투가 꼴사납다는 생각을 잠시…….”
“뭐라고?”
“아니, 대장군이 화내지 않으실까 해서요. 그분이라면 결계를 쳐 놔도 여기까지 금세 쳐들어올 것 같아서 말이죠.”
“그놈이 이런 일로 화를 내?”
그라우지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리가.”
“왜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놈의 결벽적인 성격은 저 자신이 우스워지는 상황은 절대 만들지 않거든. 이런 일로 화내는 건 우습다고 생각하겠지. 체면을 따지기도 하니, 날짜를 미루면 미루겠지. 아마 지금쯤 내가 한 짓이라는 것도 눈치채고 있을걸.”
“예에? 카이로 장군님이 그, 그걸 어떻게 알아요?”
“자연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마녀뿐이니까. 이 대륙에서 마녀와 사사롭게 연락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잖아.”
마법사는 세상에 기적을 일으키고 마녀는 땅을 뒤엎고 물길의 방향을 바꾼다. 숲에 비를 내리게 한 것은 그라우지의 부탁을 받은 마녀의 소행이었다.
“그분이 알고 있다면 큰일 아니에요?”
사색이 된 레베카가 문을 흘끔거렸다.
“이번 일로 나도 손해가 커. 페이커를 구해다 준 일로도 빚을 졌는데 이번에는 또 뭘 원할지.”
“대장군의 일보다는 그쪽이 먼저인가요?”
“카이로는 걱정할 게 뭐가 있어.”
그라우지는 반짝거리는 케인의 앞머리에 후, 바람을 불었다. 태평스러운 태도였다.
“화를 내 봤자 사람 얼려 죽일 것 같은 눈빛 좀 쏴 주고 말겠지. 신성한 결혼의 일정이 취소될 때까지 여기 있으면 돼. 스트리고가에는 마법사가 없으니 여기까지 올 수도 없을 테고.”
“하지만…….”
레베카는 못내 걱정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사람 얼려 죽일 것 같은 눈빛, 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한 번 그를 본 적이 있는 그녀로서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불안감이 가시지 않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괜한 걱정이겠지.’
빈둥거리는 그라우지를 보며 불안을 지워 낸 레베카가 책을 정리하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런데 마법사는 없지만 황궁의 포털을 이용할 수는 있…….”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이곳은 탑주의 서재였다. 이런 식으로 올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의아하게 고개를 돌린 레베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누구야?”
문을 등지고 있는 탓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그라우지가 몸을 일으켰다가 곧바로 바닥에 처박혔다. 멱살이 강하게 잡혔다.
“윽……. 뭐, 이런…….”
얼얼한 뒤통수의 통증에 미간을 일그러뜨린 그라우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멱살을 붙들고 있는 상대를 확인하자 새카만 남색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카이로?”
짧고 새빨간 머리카락이 강렬한 카이로가 고개를 비뚤게 틀었다.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귀신처럼 서늘했다.
‘어라?’
아무리 카이로가 무섭다고 한들 그라우지는 그동안 코웃음만 쳤다. 그를 위협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홍안 아래에 도사린 잔악한 살기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심한 낯 아래 깔린 고요한 분노가 위압적이기 짝이 없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인가?”
한참 그를 내려다보던 카이로가 몸을 일으켰다. 육중한 무게가 사라지자 한숨을 쉰 그라우지가 투덜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턱!
또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등이 욱신거렸다. 그의 가슴을 밟은 채로 카이로가 황당해하는 그라우지와 눈을 마주했다. 이놈이 미쳤나? 기가 막혀 화도 나지 않았던 그라우지는 카이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땀을 삐질 흘렸다.
“장난질을 길게도 끌더군.”
언제 빼 들었는지 날카로운 단도가 그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저기, 카이로.”
“어딜 어떻게 도려내야 잘했다고 할 것 같나, 탑주?”
“하, 하하…….”
카이로 너머에서 레베카가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화 많이 안 낼 거라면서요!” 벙긋거리는 입 모양이 훤히 보였다. 저건 제 상관이 공격받고 있는데 나설 생각은 않고, 쯧쯧. 팔다리 하나쯤은 가뿐하게 도려낼 것처럼 진지한 카이로의 홍안을 흘끗한 그라우지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나이가 되고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나쁘지 않다고 자부했는데.’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그 무뚝뚝한 카이로 스트리고가 결혼식 하나 취소된다고 이성을 잃는 모습도 보고 말이다.
* * *
다음날, 숲 전체에 장막을 드리웠던 비구름이 물에 녹은 솜사탕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자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푸른 하늘이 드넓게 펼쳐졌다.
“영원을 약속하기에 어울리는 날이군.”
“신기하네요. 그렇게 비가 많이 내리더니 전조도 없이 화창해지고.”
카이로가 대꾸 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가 나룻배 앞에서 손을 내밀자, 리체는 지체하지 않고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나룻배 위에서 내려다보는 에메랄드 호수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리체는 수월하게 노를 젓는 카이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생각해?”
카이로가 물었다.
“그냥.”
“…….”
“좋아서요.”
눈이 마주치자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향긋한 풀 냄새와 산뜻한 공기가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말대로, 영원을 말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아참, 근데 어떻게 한 거예요?”
“무엇을?”
“다른 사람들 말이에요. 따라오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오고.”
리체는 아무도 없는 선착장 쪽을 흘끗했다. 숲 밖에 몇 명의 호위병과 시녀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레이몬드도, 얀테도, 라스카도, 그라우지도 따라오지 않았다. 내심 어떻게든 쫓아와 방해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유치한 짓까지는 하지 않기로 한 걸까?
“내가 한 건 아니다.”
“그럼?”
“레이몬드가 먼저 제안했어. 둘만 갔다 오라고.”
“레이가?”
의외였다. 라스카라면 모를까, 레이몬드는 다른 사람이 점잖게 굴자고 해도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나왔을 텐데 말이다. 못 믿겠다는 듯 눈썹을 휘자,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 카이로가 피식 웃었다.
“놀랄 것 없다.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걸 테니.”
“…….”
“자기가 이곳에 올 때도 방해하지 말란 뜻이야.”
리체는 빠르게 납득했다. 아주 그럴 듯한 이유였다.
나룻배는 호수 아래에서 유영하는 은어처럼 부드럽게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 바오밥나무가 뿌리내린 땅에 도착했다.
카이로의 손을 붙잡고 배에서 안전하게 내린 리체는 뭔가가 눈가에 닿자 한쪽 눈을 감았다. 손으로 훔쳤더니 노란 꽃씨였다. 꽃씨를 손에 둔 채 고개를 들자 노란 꽃씨가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잔잔한 바람에 푸른빛의 나뭇잎이 머리 위에서 휘몰아쳤다.
“아…….”
신비롭고 아름다운 정경을 리체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신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리체, 이리로.”
손에 닿는 온기에 정신을 차리자 이 풍경과 이질적이어서 더 잘 어울리는 카이로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바오밥나무 앞에는 성인 남성의 몸뚱이만 한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귀퉁이가 약간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흠집도 나서 세월의 흐름을 여실히 드러내는 회색의 비석에는 그림 같은 고풍스러운 필체로 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인간의 선조가 신에게 바쳤다는 기도문이다. 지금에 이르러선 결혼 서약의 문구로 활용되고 있다던가? 리체는 신에 대한 경애로도,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도 볼 수 있는 문구를 생각 없이 읽어 내리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겠노라.’
쿵쿵. 거세지는 심장 박동에 갑자기 긴장이 확 되었다. ‘신성한’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하지만 애초에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던 그녀였다. 그들이 하고 싶다고 하기에 하는 것뿐, 특별하게 긴장되는 건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리체는 어색하게 목을 울리다가 카이로를 힐끗했다.
‘어쩐지 민망하네…….’
“음, 그래도 결혼식인데 순서가 따로 있나요? 물어봐도 가면 안다고 아무런 말도 해 주질 않아서.”
“신의 숲에선 인간의 격식을 따지질 않지. 순서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도 돼.”
“…….”
“진심의 언어가 모든 걸 대신할 테니.”
리체는 저도 모르게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카이로가 눈을 휘었다. 홍안이 따뜻한 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리체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대, 이 손을 잡아 줘.”
나룻배 앞에서처럼 내밀어진 손. 직감적으로 이 손을 잡으면 시작된다는 걸 알았다. 호수에 사는 물고기들이 가슴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마음이 떨렸다. 수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화려한 옷과 티아라를 쓴 채로 결혼하기도 했었는데. 아무것도 없이 두 사람으로 충분한 결혼 따위야, 했던 어리석은 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똑똑한 척했지만 역시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들 앞에 섰던 그때보다도 목이 빳빳해졌다. 카이로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피부가, 온몸의 털 하나하나가, 수많은 숨구멍이 그를 향한 듯한 생경한 기분이다.
리체는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카이로의 손을 잡았다. 문득 바람이 불고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뚝 선 거대한 바오밥나무가 그들을 굽어 살펴보고 있었다. 아, 이것이 도블락인들이 그렇게 소중히 하던 나무의 신성일까?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카이로가 정리해 주었다. 두툼하고 거친 기사의 손이, 피부가 쓸릴까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그 손놀림에 마음이 흔들린다.
고개를 들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여느 때처럼 강인한 홍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무뚝뚝한 입술이 떨어지고, 나직한 숨소리가 잔잔한 음악처럼 귓가에 스며든다.
“나, 카이로 스트리고는 축복받은 나무 앞에서 그대를 내 남은 평생의 반려자로 맞이하겠소.”
비석의 기도문이 그의 입에서 변형되어 엄숙하게 흘렀다.
먼 옛날, 태초의 인간이 신에게 바쳤던 순결한 마음을 그대에게 드리겠소.
그가 약속했던 영원의 봄날을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어떤 고난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나무가 되어 그대의 피난처가 되어 주겠소.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그대와 영원히 사랑하며, 기쁜 마음으로 눈감을 것을 맹세하겠소.
리체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도문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기도문을 약간 바꾼 수준이 아니었다.
“카이로 스트리고라는 보잘것없는 사내가, 그대에게 영원히 복종할 것을 약속하겠소.”
이건 그의 진심.
“카이로?”
목구멍이 좁아든 것처럼 목이 졸렸다.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북처럼 울렸다. 심장에서 발끝까지 뻗어 나가는 혈류가 비정상적으로 빠르다.
‘이 느낌은…….’
하지만. 설마.
리체의 표정이 있을 수 없는 일을 목도한 사람처럼 기묘하게 변했다. 카이로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평소처럼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웃음이었으나 그녀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최근에 와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시스템 메신저가 떴다.
[카이로 스트리고가 각인(링크)되었습니다.]
눈이 마주쳤다. 리체는 몸을 움찔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카이로의 눈은 순수한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살짝 커졌던 리체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미소를 지었다. 그와 달리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미소였다.
소유를 알아 버린 고결한 기사는 목줄을 채운 개가 된다.
그녀의 심경과 달리 카이로는 행복에 잠긴 충만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이런 거군. 버려지면 살지 못한다는 건가…….”
리체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카이로가 피식 웃었다. 드물게 장난기가 어린 쾌활한 웃음이었다. 각인한 오메가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알파의 운명을 등에 졌으면서 그는 도리어 홀가분해 보였다.
“사실은 레이몬드가 때때로 한심해 보였다. 그대 앞에서 똥개처럼 구는 모습이 말이야.”
똥개라니. 그가 저속하게 말하는 게 어색해 리체는 헛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카이로와 레이몬드는 피를 나눈 형제 사이가 분명하다.
“평소에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으면서 이럴 때만은 비슷하게…….”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그라졌다. 카이로는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원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된 상황에 의미는 없겠지만, 당신이 내게 매이는 걸 원하지 않았어.”
“어째서.”
고개를 떨어뜨린 리체의 뺨을 카이로가 거칠지만 따뜻한 손으로 감쌌다. 리체가 시선을 들자 카이로가 그녀의 보송보송한 뺨을 엄지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구속당하는 거 싫어하잖아요. 구속하지도 않고, 당하지도 않고 싶어 했잖아요.”
“…….”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은…….”
카이로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랬었지.”
“…….”
“하지만 그건 얀테도 다르지 않았다.”
“이건 상황이 달라요.”
“다르지 않아.”
카이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얀테는 그런데도 기꺼이 구속을 받아들였지. 각인했다는 걸 은근히 자랑할 때마다 사실은 기분이 좋지 않았어.”
리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처음 듣는 그의 속마음이었다.
“그런 얼굴하지 마라. 난 정말, 이루 말할 데 없이 행복하니.”
“…….”
“나의 자유와 결벽은 그대 앞에서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카이로.”
“그대가 없다면 더는 살아가지 못하는 삶이라니. 기사에게 이처럼 낭만적인 기적이 어디 있나.”
리체가 할 말을 잃자 카이로가 고개를 틀어 그녀의 다른 쪽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남자다운 체취가 훅 끼쳤다. 리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게 뭐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알파의 각인은 말 그대로 오메가에게 종속이 되는 거라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만은 평생 각인하지 않을 줄…….”
“그런 건 상관없다. 내가 궁금한 건 하나야.”
카이로가 가까이에서 떨리는 그녀의 파란색 눈을 파고들 것처럼 들여다보았다.
“내가 각인해서 기쁜가?”
“…….”
“그대가 탐욕스럽다는 건 알고 있어.”
“…….”
“그대의 작은 몸에 나만 품을 수 없다는 걸로 미안해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대가 나를 욕망해 준다면, 이 몸은 그것만으로도 족해.”
리체는 카이로의 소매 자락을 꽉 붙들었다. 마디가 붉어진 손가락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평생 사람을 욕심 낸 적 없었다.
불의의 사고로 다섯이나 되는 남자를 품게 되었지만, 언제고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에 흥미를 잃고 누군가 떠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런 체념이 마음 한구석에는 있었다. 각인하지 않은 알파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으니까. 결벽적인 완벽주의자 카이로가 이런 상황을 영원히 감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위해서라도 보내 주는 게 나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겉으로는 자신만만하게 아무도 자신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말했지만 나약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좀 더 솔직해지자면.
“욕심나요.”
“…….”
“당연히, 당신 같은 사람을 어떻게 욕심내지 않을 수 있겠어요?”
리체는 환하게 웃었다. 자신에 대한 희미한 환멸과 카이로에 대한 미안함을 안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카이로가 내게 각인해서 기뻐요.”
“…….”
“당신이 한 맹세처럼, 죽을 때까지 내 곁에서 떠날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을 유일하게 아껴 주는 여자가 나타나도, 당신은 나밖에…….”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부드럽게 다가온 움직임과 달리 입을 틀어막은 입술은 꽤 난폭했다. 리체의 안을 거칠게 헤집은 혀가 빠져나가고, 거친 숨을 쉬는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카이로가 천천히 눈을 떴다. 마주친 홍안이 검붉은 빛으로 넘실거렸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그대를 떠날 일은 없다. 지금 이 순간, 그대보다 기쁜 사람은 나일 거야.”
스스로 제 목에 목줄을 채우고서도 기쁘다고 말한다. 리체는 가슴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북받치는 감정에 카이로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그를 철혈의 카이로로 불리게 했던 특유의 페로몬은 맡아지지 않지만 본연의 살냄새가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의 살냄새를 흠뻑 들이마시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카이로가 속삭였다.
“이제 그대는 내 아내야. 그렇게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소유욕을 느껴. 귀찮게 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데도,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당연하게 그대에게 모든 욕망을 느끼고 있어. 앞으로는 더 많이 귀찮게 할지도 몰라.”
“…….”
“이런 날…… 싫어할 텐가?”
리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카이로는 가만히 그녀를 안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팔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리체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카이로도 바보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네요.”
언제 흔들렸냐는 듯 또렷한 벽안이었다. 매혹적인 눈빛 아래로 복숭아 속살 같은 요염함이 스몄다. 카이로가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그의 순종적인 입술에 입을 가져다 대며 그녀가 속삭였다.
“난 한 번도 카이로를 싫어한 적 없어요.”
입맞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감미롭고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