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그녀의 임신에 얽힌 비밀 (22/25)

07. 그녀의 임신에 얽힌 비밀

“얼굴이 좋지 않습니다.”

라스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핼쑥한 얼굴로 리체가 대꾸했다.

“하도 시달리다 보니.”

“아직도 조르고 있는 겁니까?”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의 오해로 말미암은 때아닌 임신 소동은 다섯 알파들의 머릿속에 상상을 불어넣었다. 바로 자신과 리체를 반반 닮은 아이에 대한 상상이었다. 알파들의 독점욕은 이런 데서도 유감없이 존재감을 발휘했다.

신성한 결혼과 더불어 아이에 대한 열망까지 불태우는 알파들에게 시달린 리체는 볼살이 쏙 빠져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친 그녀에겐 처연한 아름다움이 감돌아서, 평소의 힘 들어간 그녀와는 또 다른 매력을 풍겼다.

잠시 넋 나간 얼굴로 그녀의 날카로운 턱선을 바라보던 라스카가 고개를 숙였다.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입욕제를 풀어 놨습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다 보면 피로가 풀릴 거예요.”

“역시 라스카예요. 내 마음을 훤히 꿰뚫는다니까.”

빙그레 웃는 얼굴에 라스카의 뺨이 불그스름해졌다. 아직도 그녀의 별것 아닌 말에 얼굴을 붉히는 그였다.

“처음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없네요, 라스카는.”

소리 죽여 중얼거린 리체는 라스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무 말 없이 웃어 보였다.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한결같이 자신의 몸을 챙기는 그를 보자 가슴이 곱게 우린 찻물처럼 향긋해져 왔다.

“몸이 많이 지쳤으니, 마사지라도 해 드릴까요?”

수줍은 제안에 리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야한 마사지?”

“설마요.”

라스카가 짧게 웃었다.

‘레이몬드라면 당장 달려들었을 텐데.’

리체가 웃으며 먼저 준비가 끝난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시중을 들기 위해 새롭게 배정된 욕실 전담 시녀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라스카가 앞을 가로막았다. 시녀의 의아한 얼굴에 대고 라스카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오늘은 시중을 들 필요 없다.”

“네? 하지만 메디치나 공, 그러면 시중은…….”

시녀의 팔에 걸려 있던 수건을 자연스럽게 제 팔로 옮긴 라스카가 욕실로 쏙 들어갔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그것도 대단한 세를 누리고 있는 메디치나 가문의 주인이 아무리 황실의 또 다른 주인이라고는 하나 일개 여인의 목욕 시중을 들다니.

입술을 벌린 시녀의 머릿속에 ‘황후의 정부들’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기정사실로, 누군가는 뜬소문으로 알고 있는 정부들의 존재는 사실인 모양이었다.

적당히 뜨거운 물에 절로 기분 좋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라스카가 이런 일까지 직접 할 필요는 없는데…….”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시녀들의 손보다 제 손이 더 기분 좋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요.”

후후, 웃는 리체의 몸이 욕조로 미끄러졌다. 바지만 입은 채 욕조에 몸을 담근 라스카는 완전히 가라앉지 않게 그녀의 엉덩이 아래로 다리를 집어넣었다. 물뱀처럼 엉킨 자세는 매우 친밀하고 스스럼이 없었지만 리체도, 라스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물 온도는 괜찮습니까?”

“응…….”

입욕제의 향긋한 내음이 심신의 긴장을 풀며 몸을 나른하게 했다.

하아.

따뜻한 숨이 입 밖으로 흩어졌다.

“어깨와 허리의 근육이 많이 뭉쳤습니다.”

라스카의 커다란 손이 리체의 딱딱한 근육을 어루만졌다.

“알잖아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지 않으면 또 우습게 보는 거.”

“코르셋 정도는 하지 않아도 될 텐데요.”

“하는 걸 좋아하던데, 흐읏.”

치유의 이능을 가진 라스카의 손이 근육을 부드럽게 풀자 기분이 좋아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깐 멈칫한 라스카가 가느다란 허리를 좀 더 리드미컬하게 주물렀다.

리체는 눈을 감은 채 구시렁댔다.

“여기 사람들은 참 웃겨요.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밤새 얼마나 난잡하게 놀았으면 저럴까 수군거린다니까. 사람이 피곤할 수도 있는 거지. 내가 있던 연구소도 보수적이라서 격식을 따지기는 하는데 여기만큼은 아니에요. 황실에 관심이 많은 건 알겠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과해요.”

라스카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렇게 투덜거리는 것치고는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보여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끊이지 않고 속사포로 이어지는 말은 그녀답게 발음 하나 뭉개지지 않고 명확했다. 온갖 분야의 스승을 초빙하여 역사, 신학, 교양 할 것 없이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한 보람이 있게 완벽한 귀족식 발음이었다.

라스카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어려운 도블락어를 1년 만에 현지인 수준으로 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놀라웠는데, 아무래도 클럽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언어를 익혔던 만큼 알게 모르게 배어 있던 서민스러운 어투가 또 1년 만에 몰라보게 변한 것이다.

“재밌기는 해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엄청 따지는데, 그걸 또 완벽하게 해내면 눈에 띄게 태도가 변해서 성취감이 즉각적으로 느껴지거든요.”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귀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황후 폐하께서 천재라서 가능한 일이죠.”

“갑자기 무슨 아첨이에요, 안 그런 사람이? 천재는 그라우지 같은 사람에게나 붙는 수식어고요.”

리체가 가볍게 웃었다. 귀족들 앞에서는 지을 듯 말 듯 애매모호한 미소만 띠었지만 라스카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져 까르르 소리까지 났다.

라스카는 당연히 그런 편한 웃음이 좋았다. 쾌활한 웃음소리를 듣자 남들이 얼음 조각 같다고 수군거리는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행복감이 피어오르는 얼굴은 녹은 눈처럼 물렁했다.

“어느 정도 인정 욕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무의식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몰랐을 거예요. 남들이 인정해 준다는 걸 좋아한다니 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요……. 아, 으음…….”

매끄러운 검은색 속눈썹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영롱한 푸른 눈동자가 라스카의 얼굴을 비쳤다.

“라스카?”

그는 그녀의 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커다란 손은 허리를 매만지다 아래로 내려가 예쁘게 굴곡진 볼기를 주물렀다. 다섯 개의 단단한 손가락이 풍만한 살을 꾹 눌렀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허리의 근육을 풀 때처럼 단순한 마사지일 뿐인데 부위가 부위다 보니 마음에 근육이 생긴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속눈썹에 자그마한 물방울이 생겼다. 몇 번 눈을 깜박이자 물기가 속눈썹을 촉촉하게 적셨다.

“아픕니까?”

라스카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단 둘뿐인 동굴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큰 것도 아닌데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뿌연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은 향기롭고 축축해서 신들이 숨겨 놓은 천상의 비밀스러운 어떤 곳처럼 느껴졌다. 리체의 새파란 눈이 몽롱해졌다. 또렷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누그러지자 그녀만의 독특한 매혹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왔다.

끈끈하게 얽힌 꿀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빛을 교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슴께를 깔짝거리는 간지러움이 커지고, 목은 바싹 말라왔다.

찰박.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막혔던 신음이 흘렀다.

“하아…….”

신음은 라스카의 키스로 금세 막혔다. 따뜻해진 숨결까지 부드럽게 흡입하는 라스카의 입술은 촉촉하고 따뜻했으며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카이로처럼 페로몬을 뿜지 않는지라 강한 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허브 향을 닮은 특유의 약초 냄새가 폐부를 깔끔하게 소독하는 것 같았다. 먼지 하나 용납하지 않을 듯한 백의의 천사. 늘 그녀가 원하는 대로 수발을 들어 주던 남자의 눈빛이 지금은 묵직한 나무처럼 그녀를 내리눌렀다. 키스하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 그의 잿빛 눈이 신록의 늑대처럼 강렬했다.

라스카가 입을 뗐다.

“하아, 하.”

리체는 축축해진 공기 사이로 부족한 숨을 들이마시며 그를 응시했다.

“허벅지도 근육이 뭉쳐 있네요.”

라스카는 언제 거칠게 키스를 했냐는 양 그녀의 다리 하나를 접고 허벅지를 만져 댔다. 리체는 욕조에 등을 더 붙인 채 그에게 다리를 맡겼다. 라스카가 의원이라지만 치유의 이능을 사용하는 데엔 상한 부분에만 손을 올리면 되어서, 직접 누군가를 주무르는 일은 드물었다. 그 드문 대부분의 경우가 리체를 마사지할 때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마사지 실력은 몹시 좋았다. 빳빳한 고무가 유연한 용수철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리체는 그가 미리 준비해 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달달한 음료가 목구멍을 시원하게 통과하자 구름 위에 몸을 둥실둥실 띄운 것처럼 황홀했다. 포도주를 홀짝거리는 그녀의 눈매가 한결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문득,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흣…….”

허벅지 안쪽을 꾹 누르던 라스카의 소지가 은밀한 꽃잎을 스치며 지나갔다. 리체가 신음하자 그녀를 흘끗한 그가 손을 더 안쪽으로 옮겼다. 단단한 손끝이 대음순 바로 옆을 눌렀다. 시원한 한편 야릇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아, 음, 손놀림이, 많이 늘었네요, 라스카.”

라스카가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리체가 고개를 모로 꺾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눈높이는 엇비슷했으나 왠지 그녀가 그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지나 어깨와 쇄골을 가리고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대비되어 뼈가 드러나는 어깨가 설원처럼 투명하고 가녀리게 보였다. 물기에 젖은 속눈썹과 그 아래 촉촉한 파란 눈동자.

검푸른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라스카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꼭 그녀의 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렇게 쳐다보면, 모든 사내가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전설 속 세이렌이 이런 모습일까.

“폐하께서는.”

라스카가 탁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손가락으로 대음순과 허벅지 사이의 민감한 부분을 훑으며 눌렀다. 쾌감을 닮은 시원한 느낌에 리체는 길고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야한 마사지, 안 한다더니.”

리체가 눈을 휘자 좁아진 눈꼬리에서 관능미가 뚝뚝 떨어졌다. 라스카가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드러난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어, 놀리려고 한 건 아닌데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연인이 이렇게 유혹적인데.”

이번엔 되레 리체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를 흘끔 본 라스카가 아래를 부드럽게 터치했다. 리체가 쳐다보자 그가 붉어진 낯으로 중얼거렸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네요.”

“하하, 라스카가 그런 말 하니까, 읏, 웃겨요…….”

리체가 가볍게 허리를 뒤틀었다. 물 밖으로 드러난 풍만한 가슴 위에 먹음직스러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리체는 입술을 핥으며 다리를 넓게 벌렸다. 여전히 한쪽 다리를 접은 채 은밀한 부위 근처에서 손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체는 쭉 뻗은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물이 찰박이며 그의 몸이 가까워졌다.

“들어와요.”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라스카가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리체는 우습다는 듯 눈썹을 올리며 옆으로 손을 뻗어 그의 하반신을 감싼 젖은 수건을 풀어냈다. 거대해진 성기가 우뚝 솟아올랐다. 킥킥, 짓궂은 웃음소리에 라스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참아 보려고요?”

“…….”

“날 만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됐으면서?”

리체가 다리를 살짝 움직이자 곤두선 성기가 허벅지 안쪽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살에 비벼졌다. 성기가 눈에 보일 만큼 크기를 키웠다. 라스카가 한숨처럼 웃었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닿을 듯 말 듯하게 다리를 퉁퉁 튕겨 대고 있던 리체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빙그레 웃는 라스카의 눈꼬리가 하얀 눈에 뿌려진 복숭아 꽃물처럼 붉었다.

‘라스카에게 이런 색기라니…….’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 순간 크고 단단한 성기가 흉기처럼 안을 파고들었다. 그의 다정한 성격을 보여 주듯 평소처럼 부드러운 삽입이었지만 기분 탓일까? 붉은 눈꼬리를 보는데 가슴이 달군 돌을 집어넣듯 뜨거워져 왔다.

“아, 아아…….”

찰박, 찰박!

욕조의 물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풍만한 가슴과 도드라진 빗장뼈에 부딪쳤다. 물기 때문에 등이 욕조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물길을 헤친 라스카가 그녀의 볼기를 꽉 붙잡아 몸을 고정시켰다. 리체는 땀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에 젖은 사내의 탄력적인 어깨를 움켜쥐고 허리를 휘었다.

“아, 아아, 아, 아아앗!”

“하아, 리체, 리체……. 너무, 너무 좋습니다.”

“흐읏, 라, 라스카아!”

“자꾸만 미끄러지잖습니까. 날 더 꽉 잡으세요. 더 꽉, 세게.”

리체는 입술을 깨물고 손톱을 그의 어깨에 박아 넣었다. 아플 텐데도 오히려 라스카는 더 흥분했다. 거칠어진 숨이 그녀의 가슴으로 떨어졌다.

촤악!

몸을 일으킨 라스카가 욕조 바닥에 무릎을 대고 섰다. 그러곤 그녀의 하체를 붙잡아 올렸다. 미끄러질까 두려워한 리체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게 마음이 든 건지 라스카가 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추켜올려 그녀의 안에 자신을 깊이 박아 넣고 미친 듯이 추삽질을 했다.

“아, 아아, 흣!”

“안이 마구 꿈틀거려요. 가고 싶은가요?”

“응, 아, 라스카, 나, 나 느낌이……!”

“좋아요, 하아, 참지 말고 가요.”

라스카가 한 팔로 그녀의 등을 강하게 안았다. 폭 안긴 안정적인 자세에 리체가 그의 가슴에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며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안이 수축하며 질에 파묻힌 성기를 강하게 압박하자 라스카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크읏!”

푹! 아래에서 위로 허리를 쳐올린 라스카가 그 상태로 입을 크게 벌려 리체의 어깨를 물었다. 땀이 배어 나온 리체의 몸에서는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진동했다. 입 안 가득 복숭아를 깨물고 있는 느낌에 라스카는 혀로 그녀의 마른 어깨를 길게 핥아 올렸다.

“으음…….”

리체는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불편하고 민망한 마음을 추슬렀다. 수건을 깔고 앉았으니 딱딱한 욕조는 문제가 아니었다. 원인은 다리 사이에 있는 라스카였다.

“그렇게 안 해도 돼요. 어차피……, 읏.”

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라스카가 질 내부에서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휘자 손끝에 긁힌 질벽의 감각이 생경했다. 가볍게 몸서리를 치는 리체의 무릎을 달래듯 토닥이며 라스카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안에 사정액을 담고 있으면 불편한 일이 생기잖아요. 잘 때 속옷이 축축해지는 것도 불편하고.”

“내가 하면 되는 일을 굳이…….”

라스카가 피식 웃었다.

“혼자 하는 것보단 제가 하는 게 편하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다. 리체는 꿀 먹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그가 질에서 정액을 긁어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레이몬드라면 정액을 빼내면서 이곳저곳을 건드리며 살살 희롱했을 텐데 라스카는 그답다고 해야 할지, 꿋꿋하게 할 일에만 집중했다. 문제는 그 의무적인 움직임에도 야릇한 감각이 피어오른다는 것이었다.

‘발정기가 올 때도 아닌데 시도 때도 없어. 창피해 죽겠네.’

속으로 투덜거리며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라스카의 손가락이 안쪽을 문지를 때마다 움찔 튀어 오르려 하는 허벅지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한참 말없이 손가락을 놀리는 데 집중하던 라스카가 문득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어, 네?”

음부를 들락날락하는 라스카의 손가락을 쏘아보던 리체가 깜짝 놀라 눈을 끔벅였다.

“안에 사정하면 안 됐는데 참지 못하고. 인내심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그 자제력도 형편없군요.”

자괴감 섞인 자책을 털어놓는 라스카의 얼굴은 약간 씁쓸했다. 레이몬드와 그라우지, 그리고 얀테의 뻔뻔스럽고도 변태적인 행위에 익숙해진 리체는 그의 깔끔하고도 순수하게 느껴지는 자책에 멍해졌다. 곧이어 푸슬푸슬 웃음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라스카가 고개를 들자.

쪽!

라스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숱하게 몸을 섞으면서 색기 있는 얼굴을 하게 된 남자가, 여전히 순수하게 얼굴을 붉힌단 사실이 귀여워 리체는 미소를 지었다. 날카로운 턱과 매끈한 뺨을 손으로 쓰다듬자 라스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아이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가끔은, 그렇게 안에서 터지는 게 짜릿할 때도 있고.”

리체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라스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것도 변했지만 확실히 처음보다는 음담패설에 능해졌군요.”

“그래서 싫어요?”

라스카가 고개를 틀어 리체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눈이 똑바로 마주쳤다.

“더 좋아집니다.”

순수한 고백에 멈칫한 리체의 뺨에 엷은 홍조가 올라왔다. 라스카가 목 졸린 목소리를 냈다.

“그런 얼굴을 하면 또 하고 싶어지는데요.”

농담으로 받아들인 리체가 웃으면서 시선을 내렸다. 파란 눈이 경직되었다.

“저기, 라스카?”

“네, 황후 폐하.”

분명 아까전만 해도 가라앉았던 성기가 몽둥이처럼 빳빳하게 서 있었다.

“갑자기 왜 또 커진 거예요?”

“갑자기는 아닙니다만.”

“그럼?”

“순수하게 정액을 빼내는 손길에도 허벅지가 경련하는 걸 볼 때부터요.”

태연하게 흘러나오는 말과 달리 뭉툭한 성기는 그 기세를 한층 더 흉흉히 드러냈다. 다시 한번 생각하는데 냉미남 같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아랫도리였다.

“정부된 도리로써, 황후 폐하를 즐겁게 해 드려야죠.”

“아니, 마음은 갸륵하지만, 잠깐, 라스카, 눈빛이 이상한데!”

“제 눈빛이 왜요?”

“아, 거기는, 흐윽!”

결국 정액을 빼낸 보람도 없이 라스카의 커다란 것이 부드럽게 풀린 질을 파고들었다.

1시간 후.

“하아, 하…….”

욕조 바깥에 마련된 기다란 의자에 알몸으로 늘어진 리체는 가쁜 숨을 쉬었다. 반면 라스카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리체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아 질 내부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정액을 빼내었다. 이전과 달리 가운을 입어 비교적 단정해 보인다는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다.

“힘을 푸십시오. 몸이 너무 굳어 있습니다. 폐하?”

“…….”

“리체?”

끄응, 신음을 흘린 리체가 중얼거렸다.

“힘 풀면 라스카가 다시 달려들까 봐요.”

“……또 하진 않을 테니 편하게 계세요.”

그러고도 긴장을 풀지 않았던 리체는 라스카의 사심 하나 없는 기계적인 손길에 몸의 힘을 풀었다. 흘끔 시선을 내리자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는 라스카의 손을 따라 하얗게 덩어리진 것이 흘러내렸다. 바닥에 뚝뚝 떨어진 덩어리의 흔적은 눈 뜨고 봐 줄 수 없을 만큼 난잡했다.

“하아…….”

긴 한숨을 쉬면서도 리체는 라스카의 손짓으로 안에서 빠져나가는 정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피임약은 그만 먹어도 되지 않을까요?”

멈칫. 손을 멈춘 라스카가 고개를 들었다. 빤한 시선에 리체는 헛기침을 했다.

“더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서.”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까? 필요로 했잖아요.”

“처음엔 얀테의 아이를 임신할까 봐 싫었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라스카의 투명하고 맑은 시선에 말문이 턱 막혔다. 딱히 민망할 게 없는데도 민망해서 자꾸만 목을 가다듬게 됐다. 리체는 자신의 상태를 가늠하다가, 불필요한 자존심 때문에 드는 마음이란 걸 인정했다. 이제 와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는 게 자존심 상했던 거다. 마음이 편안해진 리체는 솔직하게 토로했다.

“엠바서 백작저의 장남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었어요.”

“귀족들 중에서 그나마 마음이 잘 맞는다고 했던 그 여자 말입니까.”

“아들 자랑을 그렇게 하기에, 궁금해서 갔었거든요. 뭘 애 때문에 나까지 초대하나 싶었는데.”

잠깐 생각에 잠겼던 리체가 풉, 웃었다.

“귀엽더라고요.”

라스카는 의아한 듯 눈을 깜박였다.

“아주 귀엽게 생겼나 보네요.”

“맞아요. 천사처럼 생긴 아이였어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생각이 바뀐 건 아니고요.”

리체는 싱긋 예쁘게 웃었다.

“애들이 노는 걸 보다 보니 궁금해지지 뭐예요.”

“뭐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는 어떤 아이일지.”

라스카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또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어떻게 반응할지 신경 쓰여서, 참. 신성한 결혼 가지고도 저 난리인데 또 싸우고 난리가 나겠죠?”

걱정하는 리체를 바라보는 라스카의 입가에 서서히 웃음이 번졌다. 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웃어요?”

라스카가 깨끗한 손으로 그녀의 발을 들어 그의 가슴에 맞닿게 했다.

리체는 벌어진 가운 사이로 파고든 자신의 발과 라스카의 평온하지만 미묘하게 상기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발바닥에 그의 세찬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라스카가 아킬레스건과 툭 튀어나온 복숭아뼈를 어루만지며 눈을 위로 떴다. 짙어진 회색 눈동자에 그녀는 일순 가슴이 덜컹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내 가슴이 이렇게 떨리는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볼 것도 없을 겁니다.”

* * *

다섯 남자는 눈을 멀뚱멀뚱 떴다.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리체의 얼굴이 워낙 진지하여 아무도 말을 끊지 못하는 가운데, 레이몬드가 나섰다.

“좋아. 잘 들었어.”

“이해했어?”

“……아니.”

“그럼 뭘 들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임신하면, 뭐라고?”

“아무 것도 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얘기해 주면 고맙고.”

“쉽게 말하면 여자는 임신하면 아주 많은 것이 달라진단 뜻이야. 겨드랑이가 까맣게 착색되는 미관적인 변화는 차치하고도 말이야. 에스트로겐 때문에 가슴이 커지고, 태아가 커 갈수록 배가 많이 나오니 허리에 부담도 많이 가지. 출산을 위해 골반이 벌어지고 관절이 들뜨기도 하고. 자궁이 커지니까 하반신의 혈류가 원활해지지 못해서 부종이나 하지 정맥류도 흔하게 생겨. 프로게스테론 때문에 점차 숨도 차게 돼서, 모든 면에서 생활이 불편해지거든.”

“어…….”

“그뿐만이 아니라…….”

처음에는 눈을 또랑또랑 뜨고 집중하던 레이몬드의 눈빛이 살짝 흐트러졌다. 풀린 눈을 하고 리체가 줄줄이 뱉는 말을 듣던 그는 그녀가 말을 잠깐 멈추자 정신을 차렸다.

“물 좀 마시고.”

“응, 얼마든지 마셔, 더 마셔.”

“됐어, 충분해.”

리체가 다시 말을 하려고 하자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시무룩해졌다.

“인간이라는 종을 존속시키기 위해 번식을 본능으로 두고 있긴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임신은 그다지 좋지 않아.”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도도한 얼굴에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레이몬드는 표정을 굳혔다. 아, 이 말이 하고 싶었나! 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씨발. 몰랐어. 아이를 낳는 게 그렇게 네 몸에 안 좋을 줄은. 다시는 아이 갖자는 소리 안 할게.”

“무슨 소리야.”

“임신하면 안 된다는 말 아니야?”

“아니야.”

“그럼?”

리체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

“아이, 갖고 싶어.”

“……?”

레이몬드가 눈을 끔벅였다. 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갸우뚱, 기울어졌다. 변하지 않는 리체를 보면서 원위치로 돌아오는 레이몬드의 뒤로 그녀의 말을 이해한 알파들의 눈빛이 변했다.

난리가 날 거라는 리체의 예상은 정확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리체의 고백. 그건 다섯 알파들에게 내려진 폭탄선언이자 앞으로 있을 일을 예고하는 긴장된 도화선이었다.

다섯 알파들이 아이를 원하는 건 후계를 잇고자 함이 아니었다.

아이는 행복한 가정의 증거.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고 사랑하는 오메가의 관심을 갈구했다. 리체의 사랑을 한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이들에게 아이 아버지의 위치는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합리성을 추구하는 그녀라고 하나 자신의 배에서 나와 손수 키울 아이의 아버지에게 남다른 유대감을 갖게 될 건 당연했다. 그 미묘한 감정과 친밀감까지도 독점하고 싶은 게 다섯 알파들의 본심이었다.

소리 없는 긴장이 폭발했다.

과연 누가 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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