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임신 소동 (20/25)

05. 임신 소동

라스카와 그라우지가 개발한 일종의 심리 치료의 효과를, 다섯 알파들은 금세 알아챘다.

황후궁에서 걸어 나오는 얀테의 걸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당당하고 우아했다. 화려한 열주를 지나 푸른 포석 위에 선 그의 머리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햇빛 부스러기가 녹아내린 듯 금발이 오늘따라 유독 반짝거렸다.

몇 걸음 걷다 발을 멈춘 얀테가 문득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매끈한 손에는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를 내려다보는 얀테의 눈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오묘했다.

‘리체가 말랑말랑해졌어.’

‘확실히. 전보다 화도 잘 내고, 짜증도 잘 내고, 더 많이…… 웃어. 빌어먹게 예쁘게.’

‘너무 좋아. 인형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고 싶어. 너무, 너무 사랑스러워, 씨발.’

그때는 레이몬드가 제 앞에서 또 자랑을 한다고 생각해서 짜증만 치밀었었다.

그런데.

‘다쳤어요? 아파 보이는데.’

손바닥에 닿았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숨결의 느낌은 지나치게 선연해서 간지러웠다. 주먹을 꽉 쥐었다. 숨결 따위가 뭐라고. 가슴이고 아래고 할 것 없이 물고 빨고 하며 더한 짓도 얼마든지 많이 했는데. 그런데 그녀가 직접 상처에 불어 주는 숨결의 느낌이…….

미치게 좋았다.

얀테는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시뻘게진 얼굴은 그걸로는 막을 수 없었다.

레이몬드에겐 주접떨지 말라고 세상 다시없을 얼간이를 보는 것처럼 핀잔을 주었는데 꼴이 우습게 되었다. 그래도 참기가 힘들었다. 심장이 부푸는 것 같다.

‘빌어먹을.’

황제답지 않게 저속한 욕설을 뱉는 그의 낯에 행복감이 줄줄 흘러 넘쳤다.

황제인 그를 걱정하는 사람은 발에 채일 만큼 많았다. 당연하고 또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몰랐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게, 이렇게 벅차는 일인 줄은.

얀테는 조심스럽게 붕대를 입으로 가져다 댔다. 까슬까슬한 붕대에 입을 맞추는 순간 손을 홱 아래로 잡아끌었다. 왠지 낯 뜨겁고 민망했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런 추태를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는 척 걸음을 옮겼다. 황후궁을 빠져나오며 드리워지는 발밑의 그림자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햇볕에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하늘이…….’

뭔가를 내려놓은 듯 독기 빠진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예쁘군.’

* * *

리체의 심리 치료 이후 1년이 지난 현재.

그라우지와 라스카는 무의식에서 리체가 더 솔직해진다는 걸 알아냈다. 솔직한 리체를 보고 싶다라는 욕망이 동력이 되어 결국 시전자가 없어도 무의식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고, 그녀의 무의식에 출입하는 데 성공했다. 두 천재가 머리를 맞대어 개발한 이 기계 장치는 심리 치료용으로 적격인지라 이후 불티나게 팔렸다는 후문이다.

몇 번의 무의식 치료술을 겪은 리체는 전보다 훨씬 솔직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보통의 범인들보다는 무뚝뚝한 편이지만.

그녀는 <연습하는 감정 표현>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출판하기도 했는데, 보다 솔직해졌다고 한들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는 성격이 변한 건 아니었다.

“저번엔 많이 먹더니, 이번엔 왜 손도 안 대?”

레이몬드가 과자와 달콤한 케이크가 가득 담긴 다과상을 내려다보았다. 수도에서 가장 유행하는 디저트 가게에서 사 온 케이크는 보기만 해도 혀가 아릴 만큼 단 냄새를 풍겼지만 손을 댄 기색이 없었다. 홍차만 홀짝이던 리체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오늘은 먹고 싶지 않아. 애써 사 와 줬는데 미안해, 레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입술에 묻히면서 먹는 걸 보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턱을 괸 레이몬드가 빙긋 웃었다. 눈빛이 케이크보다도 달았다. 리체는 헛기침을 하며 포크로 케이크의 끄트머리를 덜어 먹고는, 더 손대지 않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씨발, 귀여워.”

레이몬드의 말에 리체가 쿨럭, 가볍게 기침을 했다. 케이크 탓인지 입 안이 몹시도 달아 홍차를 벌컥 들이켰다.

“아무 때나 그런 말 좀 하지 마.”

“왜?”

레이몬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귀여워서 귀엽다고 하는 건데. 이렇게 귀여운데 왜 다들 차갑다고만 하는지 몰라.”

다리를 꼬며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는 레이몬드의 퍽 방만한 자세를 쏘아보며 리체는 한숨을 쉬었다. 레이몬드가 자신의 반응 때문에 일부러 저러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평생 들어 본 적 없는 귀엽다는 말에 익숙해지는 건 쉽지가 않았다. 찻잔이 비자마자 라스카가 홍차를 채워 주었다.

“고마워요, 라스카.”

“요즘 짜증이 늘었습니다, 리체.”

“그래요?”

그녀의 건강 상태를 면밀히 체크하는 게 주치의인 라스카의 일이었다. 그가 리체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 그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몸에 열이 올랐나 보았다.

리체의 표정이 다소 편안해지자 라스카는 그녀의 뒷덜미로 차가운 손등을 옮겨 꾹꾹 눌러 주었다. 그의 손에는 치유의 이능이 흘러 어루만져 주는 것만으로도 몸의 긴장이 이완되었다. 친밀한 접촉이 이어지는 그들을 감싼 분위기가 이상스럽게 끈적해졌다. 레이몬드의 눈썹이 미약하게 치켜 올라갔다.

“변덕이 심해졌잖습니까. 월경을 할 때가 되었으니 호르몬 문제일 수도 있겠어요.”

“혹시 임신한 거 아니야?”

레이몬드가 툭 뱉었다. 눈을 내리깔고 라스카의 말을 귀담아 듣던 리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가 말해 놓고 놀랐는지 턱에서 손을 탁 뗀 레이몬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동자에 의심과 함께 강한 확신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소리야.”

임신은 무슨 임신! 절대 아니다.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레이몬드의 눈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렸다. 속으로 식은땀이 났다. 뺨이 따끔거려 곁눈질을 했다. 라스카가 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 시선이 은밀하게 교환되었다.

* * *

“회임하신 건 아니라 합니다. 너무 호들갑을 떤 거죠.”

“아, 간만에 경사가 난 줄 알았더니 아쉽게 됐습니다.”

“그래도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낙관하여 볼 것만은 아닙니다. 성혼하신 지 1년이 넘었고, 두 분의 관계도 나쁘지 않은데 아직도 후사의 소식이 없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황후가 임신했다는 소식은 한바탕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황실의 후사 걱정은 피부로 실감 나게 다가왔다. 황제는 안정을 위해서라도 후계를 빨리 갖는 게 일반적이었다. 태자 때부터 태손을 두는 것 역시 흔했으니 젊고 건강한 황제 부부에게 아이가 없는 건 보수적인 귀족들의 걱정을 샀다.

티 파티나 연회에 나설 때마다 리체에게 후계 얘기를 꺼내는 귀족들도 심심찮았다.

“황후 폐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하아…….’

리체는 몸을 일으켰다. 황후궁 바깥에는 일행이 대기하고 있었다. 단순히 일행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그 수가 많았다. 리체는 길의 끝까지 늘어져 있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고, 선두로 시선을 옮겼다.

말에도 순혈이 있다면 저 말은 순혈 중의 순혈일 것이다. 하얀 갈기는 짐승의 털이라기엔 무척 부드러워 보였고 윤기까지 흘렀다. 하얗고 근육질의 몸은 압도적이었고 쭉 뻗은 목과 쳐다보는 검은 눈망울은 순수하며 깨끗했다. 아주 잘생긴 말이었다.

이윽고 리체의 시선은 그 위에 올라탄 사람에게 향했다. 붉은색 망토를 뒤로 둘러매고 금색의 견장을 단 흰 예복 차림. 다른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화려한 차림을 그는 완벽히 소화하고 있었다. 빛으로 빚은 것처럼 화사하게 잘생긴 얼굴에 오만함도 위엄처럼 보이는 차가운 파란 눈동자가 리체에게 닿았다. 기품이 흐르는 이목구비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황후.”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얀테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남부는 이곳보다 따뜻할 테니 여행이 어렵지는 않을 거야.”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오늘 연락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리체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얀테는 못 들은 척 은은한 미소만 지은 채 그녀를 데리고 마차 앞에 섰다. 시종이 재빨리 간이 계단을 내려놓았다. 리체는 얀테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시종을 물리고 손수 마차의 문을 닫아 주기까지 했다. 문이 닫히기 전, 리체와 시선이 마주친 얀테의 푸른 눈이 얄궂게 빛났다.

“소문을 가라앉히려면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좋잖아.”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으로?”

“그 핑계로 널 독점하려는 거지. 황제의 권리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쓰나?”

“하여간…….”

말문이 막힌 리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제의 임무 중 하나인 영지 시찰. 보통 신임하는 신하들과 가는 게 일반적이나 황후를 대동하고 가는 일도 이따금 있었다. 더더군다나 신혼인 상태에서는 부부의 금슬을 보여 주기 위해서 부부 동반으로 영지 시찰에 나서기도 한다.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마차의 진동이 엉덩이로 전해졌다. 불퉁한 표정을 짓는 리체에게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남부까지는 동부나 서부, 북부에 비하여 짧은 편이에요. 비옥한 영지라 성을 들러 보고를 받을 뿐이니 일정도 그렇게 힘들지 않고요.”

리체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상관없는 시녀까지 눈치를 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알겠어. 갑자기 떠나는 게 당황스러웠던 것뿐이야.”

‘이런 건 변하지 않았지.’

얀테를 향해 툴툴거리는데 시녀가 말했다.

“답답하실 텐데 밖이라도 보시겠어요?”

차창을 열자 초록빛 농지가 넓게 펼쳐졌다. 시원한 바람이 훅 들어왔다. 가슴이 뻥 뚫리는 광경이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네.”

“황제 폐하께서 걱정이 많으셨어요. 요즈음 황후께서 답답해하시는 게 아닌가 하고.”

“흐응.”

리체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편안해진 얼굴을 확인한 시녀가 방긋 웃었다.

‘사랑 표현을 더 해 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주제넘은 조언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사이가 좋아지셔서는, 정말 다행이지.’

리체가 한참을 경치 구경에 빠져 있는데, 어느 순간 마차가 멈추었다.

“시종들이 식사 준비를 하는 모양입니다.”

시녀의 말이 과연 틀리지 않아서 곧 리체의 마차로 샌드위치와 소고기가 잔뜩 든 스튜가 올라왔다. 황궁에 있을 때보다 단출한 메뉴기는 하나 재료의 질이 좋아 맛은 나쁘지 않았다.

길지 않은 식사를 마친 리체는 소화를 하기 위해 산책을 나서기로 했다. 마차 밖에서는 얀테가 신하들과 함께 둘러앉아 논의를 하고 있었다. 남부 시찰에 대해 세워 놓았던 계획을 재검토하는 듯했다.

리체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 몇 명의 호위병들만 대동한 채 주변의 평야 지대로 이동했다.

“어디까지 가실 생각이세요? 멀리 돌아보실 거라면 말을 가져오겠습니다. 다리가 아프실 거예요.”

“말?”

“이런 곳에서 말을 타는 것만큼 기분 좋은 것도 없죠. 땅도 부드럽고 풀도 날카롭지 않고 바람은 시원하니, 승마를 하시면 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리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하얀색 보닛 아래에서 검은색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렸다. 푸른 하늘에 솜사탕 같은 몽실몽실한 구름이 배처럼 떠다닌다. 발목에 겨우 오는 풀밭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향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고, 공기에서는 시원한 바람 냄새가 났다.

눈꺼풀이 절로 내려왔다. 리체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시녀의 제안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좋아. 적당한 말 한 마리를 가져와 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리체는 눈을 떴다.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돌리자 듬직한 얼굴의 시녀 대신 신화 속의 아폴론과 같은 금발을 휘날리는 얀테가 있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흘끗했다. 방금까지 뒤를 바싹 따라왔던 시중인들이 저 멀리 있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뻔했다.

“언제 왔어요? 회의 중이었잖아요?”

“금방 끝나서, 황후와 자유 시간을 즐기러 왔지.”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걷기만 했다. 바람에 부드럽게 날리는 수풀을 보자 마음이 차분히 정돈되었다. 리체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남부 지방은 아는 귀족들이 없어서 내가 도움이 되진 못할 거예요.”

“그런 건 생각 안 해도 돼.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니까.”

리체가 그를 응시했다. 얀테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지한 눈빛에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참을 수가 없어졌어.”

“……난 이런 거 싫어요.”

“알아. 다음부터는 먼저 협의를 할게.”

리체는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냐는 뜻으로 쳐다보자 도리어 얀테가 뭐 하냐는 듯 손을 흔들었다.

“말을 타고 싶다며?”

“혼자 타고 싶다는 말이었어요.”

“걱정하지 마. 내 애마는 튼튼해서 황후 한 명쯤은 얼마든지 버텨 줄 수 있으니까.”

리체는 위풍당당한 백마를 흘끗했다. 그래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본 차원에서 동물과는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고, 몸을 쓰는 일은 건강 관리 차원에서 했던 운동을 제외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승마도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데 누군가와 함께 타는 일은 더더욱이나 위험……. 몸이 휙 날아가며 생각이 끊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체는 얀테의 앞에 앉아 있었다.

“노, 놀랐잖아요!”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얀테가 귓가에 입술을 가져와 속삭였다. 그의 향기가 훅 끼쳐 왔다. 새삼스럽게 지나치게 가까운 자세가 의식된 리체의 등허리가 긴장으로 꼿꼿해졌다. 그러고 보니 얀테와 마지막으로 밤을 보낸 게 한 달 전이었던가?

“아까부터 말이야. 뭐가 그렇게 걱정이 돼?”

“딱히…….”

“고민이 있으면 남편과 나눠. 그러라고 한 결혼 서약이 아니었나?”

그 말에 은근히 배인 조롱기에 리체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녀가 묵묵부답으로 무시하자 얀테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신성한 결혼 때문에 그래?”

리체는 흥, 코웃음을 쳤다.

“다 알고서 떠보듯이 얘기하지 말아요. 먼저 말을 꺼내서 골치 아프게 한 건 그쪽이잖아요.”

얀테가 모두가 있는 앞에서 ‘신성한 결혼’을 입에 담지 않았다면 다른 알파들 모두 신성한 결혼을 하자고 조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골머리를 썩을 일도 없었겠지.

“읊으라 해서 읊은 결혼 서약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누가 한 말이 계속 생각나서 말이야.”

“쪼잔해.”

“황실의 행사를 핑계로 대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야.”

“…….”

“황실은 어지간히 사이가 나쁘지 않은 이상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신성한 결혼을 해 왔어.”

“…….”

“게다가 후사를 잇는데도 도움이 되고.”

“그건 미신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 그래도 실제로 아이를 갖지 못했던 황제 부부가 신성한 결혼을 치룬 후 잉태한 경우는 셀 수도 없이 많아.”

리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얀테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날렵한 코끝이 목덜미에 문질러졌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체취를 양껏 빨아들이는 행위에 리체의 어깨가 굳어졌다. 얀테가 긴장 풀라는 듯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하아…….”

맞닿은 몸에서 피어오르는 페로몬에 리체는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나와 아이를 갖는 게 싫은 건가?”

“…….”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이해할 수 있어.”

그답지 않게 힘 빠진 말투였다. 씁쓸한 감정이 느껴지자 리체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전처럼 냉정하게 대할 수 있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당황스럽게도, 이제는 그가 전처럼 싫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황후로서 존중했고, 그녀의 인격을 무시하는 일도 일체 없었다. 무의식에 접촉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이제 리체도 그런 그에게 무신경한 말을 뱉기 힘들었다.

“그렇다기 보다는.”

“…….”

“누구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게 곤란해서 그래요.”

솔직하게 털어놓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다른 놈들은 신경 쓰지 마. 네가 누구와 신성한 결혼을 하든, 널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도?”

리체는 피식 웃었다. 알파들의 독점욕을 알고 있는데 듣기에만 좋은 말이 아닌가.

“응. 나도.”

리체는 뒤를 돌아보았다.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입술을 뗀 얀테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네 의사를 존중해.”

그의 시선이 진지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깔고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광기 어린 눈빛은 수면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다만 깊은 곳에서부터 번뜩이는 기광은 그가 그 자신의 욕망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음을 은연 중 드러냈다. 리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얀테가 오만하게 웃었다.

“뭣하면 다섯과 모두 신성한 결혼을 맺어도 좋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그 처음은 내가 되어야겠지만.”

“……아!”

얀테가 리체의 엉덩이에 하반신을 바싹 붙여 왔다. 당황하는 그녀의 눈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그가 말했다.

“그보다는 황실의 일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다해야지. 잉태한다면 신성한 결혼은 뒤로 미뤄도 좋으니까.”

“잠깐, 아, 잠깐, 얀테! 여기서 뭘 하려는 거야!”

“온 백성이 바라고 있다, 황후.”

골반이 잡히고 리체의 몸이 말의 등 위에서 잠깐 떴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얀테가 리체의 풍성한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바스락. 치맛자락이 구겨지는 소리가 전조처럼 들려왔다. 곧장 뜨거운 살 기둥이 엉덩이 골 사이에 닿아 왔다. 리체는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귀밑을 스치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얀테. 뒤에서 보고 있단 말이에요!”

“아니, 안 보여.”

얀테가 한 손으로 리체의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자신과 뺨을 맞대게 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뺨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말에서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들키지 않아. 내가 가려 줄게.”

“하악!”

“소리 내면 안 돼.”

“으읍…….”

“체통을 지켜야지. 황후.”

이익! 리체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곧장 하얗지만 마디가 단단하게 튀어나온 손가락이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입술에 상처 내지는 말고.”

짐짓 걱정스럽게 속삭였지만 아래의 움직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리체를 꽁꽁 감싸안은 얀테가 다른 손을 치마 아래에 집어넣어 얇디얇은 속옷에 둘러싸인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그러곤 자신의 고개를 더 틀어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길게 빨아들이는 진득한 키스가 이어졌다.

다그닥, 다그닥. 규칙적인 말의 움직임에 의해 몸이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렸다. 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에 리체는 얀테의 손목을 쳐 내는 대신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쭉 빨며 얀테가 웃었다.

“흐윽…….”

리체는 옴짝달싹도 못하는 불편한 자세로 얀테의 공격을 수용했다.

말이 움직이자 리체의 몸이 가볍게 떴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얀테가 그녀의 속옷을 뜯어냈다. 찌익, 찍. 얇은 천이 찢겨 나가고 그 자리를 얀테의 서늘한 손이 차지했다. 부드럽고 통통한 엉덩이 살을 한가득 움켜쥐었다.

“하, 좋아.”

얀테가 리체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고 그녀의 혀를 괴롭혔다.

“흥분돼.”

끈적거리는 흥분이 은은히 감도는 목소리가 리체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숲 냄새를 닮은 페로몬이 피부의 구멍 곳곳으로 침투했다. 약을 먹은 것처럼 몸이 익숙한 흥분에 달뜨기 시작했다. 발정기가 올 때와 비슷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느낌.

하아, 하아. 리체의 급해지기 시작하는 숨을 모조리 빨아 마시며 얀테가 자신의 살 기둥을 잡고 그녀의 엉덩이 골과 허리에 문질러 댔다. 딱딱한 심이 느껴지는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운 살 기둥의 감촉에 리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얀 말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뭔가 불편했는지 말이 푸르릉, 콧김을 뿜어내며 투레질을 했다. 깜짝 놀란 리체의 몸이 굳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얀테가 그녀의 등을 밀어 아래의 구멍을 드러나게 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살 기둥이 파고들었다.

“헉!”

얀테가 신발로 애마의 엉덩이를 가볍게 쳤다. 신호를 받은 애마가 앞으로 튀어나가자 갑작스러운 속도감에 기겁한 리체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애액이 흐르기는 했지만 얀테의 것을 무리 없이 품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질이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성기를 쥐어짜는 압박감에 얀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편한 자세에 채 풀리지 않은 질로 그의 것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자 리체의 낯빛이 해쓱하게 변했다.

“잠……깐, 하, 얀테, 아!”

“자세 때문에 긴장했나? 좀 더 힘주면, 좆이 아예, 잘라지겠어.”

얀테의 얼굴에 희한한 기광이 어렸다. 그가 리체의 눈치를 보며 누르고 눌렀던 본연의 광기였다. 색욕이 튀어나오자 참지 못한 광기가 슬금슬금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모습에 리체는 기함했다.

“이, 이성을 잃지 말아요.”

“난 지금도 충분히 이성적이다.”

“거짓말!”

얀테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녀의 가슴을 찾았다. 옷과 함께 가슴 가리개를 한꺼번에 잡아채 내리자 풍만한 가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얀테가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무자비하게 움켜쥐었다. 자동적으로 리체의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흑, 너무, 세……!”

아래도 위도 자극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버거워하는 리체를 품에 안으며 얀테는 극도로 흥분했다. 아래를 쥐어짜는 질의 감촉도 부드러웠고 녹아서 없어질 것 같은 풍만한 가슴의 촉감도 머리를 돌아 버리게 했다. 불편한 자세라 허리를 움직이고 있지 않은데도, 안에 넣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얀테는 가느다랗게 좁혀진 눈으로 리체의 연약한 몸이 작은 새처럼 바르르 떨리는 걸 내려다보았다. 리체가 동그랗게 변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갑자기, 커져?”

원망하는 얼굴에 얀테가 나른하게 웃으며 골반을 쥐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황후가 이렇게 야하니.”

“아!”

얀테가 골반을 들었다가 그대로 내렸다. 그녀의 질이 미끄럼틀을 타는 것처럼 살 기둥을 뿌리까지 집어삼켰다. 통통한 엉덩이가 허벅지와 아랫배를 깔고 앉자 얀테의 뺨이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소리 지르면 들릴 거다.”

그 말에 리체가 입술을 깨물며 소리를 급격히 낮추었다. 1년간 온갖 것을 배우며 지반을 다졌던 위치인데 이런 은밀한 일을 노출하며 난잡한 황후니 색에 미친 황후니 하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벌써 시중인들과의 거리는 꽤 떨어져 있었지만 감각이 혼재된 리체는 거리감을 알지 못했다.

시중인들에게 어지간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아는 얀테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참는 리체가 귀여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깨무느라 힘이 들어간 리체의 뺨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삽입이 깊어졌다. 허리를 내키는 대로 세차게 흔들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대범한 리체가 긴장하는 걸 보는 맛이 있었다. 말의 움직임이 느려지면 엉덩이를 찼다. 애마가 속도를 높일수록 추삽질의 속도도 빨라졌다.

“앗, 흑, 흐으, 읍!”

치마로 가려진 교접 부위에서는 찔꺽찔꺽, 쯔억쯔억 요란한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끈끈하게 엉킨 애액은 거품을 일으키며 얀테의 허벅지 타고 흘러 말 등에까지 떨어졌다.

얀테는 그녀의 등에 가슴을 딱 붙이고 손바닥으로 풍만한 가슴을 슬슬 문질렀다가 젖꼭지를 비틀며 그녀의 반응을 즐겼다.

어느새 두 사람을 태운 백마는 나무가 빼곡한 숲으로 들어갔다. 허브 향처럼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숲 향이 콧속에 훅 끼쳐 왔다. 시중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리체의 뻣뻣한 등허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흐읏…….”

얀테가 등을 누르자 그녀는 순순히 엎드렸다. 이 자세로는 얀테의 손목을 잡는 게 힘들어 대신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새액, 새액. 힘에 부치는지 헐떡이는 리체의 숨소리가 몹시 감미로웠다.

입술을 핥은 얀테가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대충 옆으로 모아 치우고는 그녀의 골반을 잡아 들어 올렸다. 손을 쫙 펴고는 말랑말랑한 볼기를 주무르며 방아를 찧듯 힘주어 내렸다. 찌걱쯔억! 구멍이 벌름거리며 단단한 살 기둥을 집어삼켰다가 뱉어 냈다.

“맛있나 보군. 거품까지 뱉어 내고.”

얀테가 특유의 음험한 웃음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교접 부위를 훔쳤다. 끈적해진 애액을 리체의 엉덩이 부위로 펴 바르는 손놀림이 쓸데없이 정성스러웠다.

“요즘 들어, 착한 척, 하더니, 흣, 또!”

리체는 이를 갈았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요 1년간은 지나치게 얌전해서 방심하고 말았다. 얀테는 레이몬드와는 다른 의미로 변태스러웠다.

“고작 이런 걸로? 지금도 얼마나 참고 있는데 섭섭하게 그런 말을 해. 참고 싶지 않아지잖나.”

얀테가 혀를 차며 그녀의 엎드린 등을 향해 몸을 내렸다. 두 손으로 골반을 쥐고 빠르게 튕기자 리체가 헛숨을 들이켰다. 거기에 말의 움직임까지 더해지자 불규칙적인 삽입이 정신을 쏙 빼놓았다.

얀테는 리체의 무릎을 접어 그대로 들어 올렸다. 허리가 뜨이는 감각에 기겁한 리체가 고개를 틀었다. 그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말에서 떨어질까 봐 무리한 움직임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보이는 거라곤 말의 몸뚱이를 죄느라 근육이 불거진 그의 탄탄한 허벅지뿐이었다.

얀테는 그녀의 무릎을 들고 당기며 삽입을 깊게 했다. 말 등에서 떨어진 음부에서 찌걱거리며 음란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땀에 젖은 그녀의 볼기가 얀테의 근육질 허벅지를 스윽스윽 스치고 지나갔다. 결합이 깊어질 때마다 아랫배가 수축했다. 얀테가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흣, 하, 놔, 놔 줘, 흐아아……!”

“하하, 아래는 다른 말을 하는데. 너무 조여서, 아, 좋아, 리체.”

말의 목에 리체의 가슴이 부딪쳤다. 부드러운 갈기를 꽉 붙잡고 얀테가 움직이는 대로 휘둘리길 몇 분.

“크윽!”

얀테의 파정하는 순간 점차 커지던 고양감이 파도처럼 솟구쳤다.

“아……!”

새하얗게 탈색된 머릿속에서 생각이 통째로 날아갔다. 얀테가 경련하는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내 황후.”

‘이 사람, 못된 버릇이 들었어…….’

막무가내로 군 뒤에는 꼭 사랑 고백을 하는 버릇이.

“이번엔 그냥 안 넘어갈 거예요.”

리체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이자 맞닿은 얀테의 몸이 떨려 왔다. 어떤 얼굴로 웃고 있는지 상상이 가자 결국 꽁했던 마음이 풀어져 버렸다. 대신 그녀는 팔을 뒤로 뻗어 얀테의 얼굴을 붙잡아 그 뺨에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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