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무의식 치료술 (19/25)

04. 무의식 치료술

다섯 알파는 황제궁의 1층 응접실에 모였다. 서로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한껏 분출하는 페로몬이 드넓은 응접실도 좁게 느껴지게 했다. 침묵을 깨고 일어선 라스카가 창문을 열자 신선한 공기가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산뜻한 공기가 심기 불편한 면면들을 스쳤지만 표정을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에겐 문제가 있어.”

얀테가 무거운 얼굴로 시가 연기를 뿜어냈다. 그를 바라보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에 칼날 같은 뾰족함이 어렸다. 리체가 수도원에 머물게 된 후, 그녀를 구심점으로 일시적 평화를 이루고 있던 그들의 관계는 급격히 위태로워졌다.

불온한 마음을 방증하듯 공격적인 페로몬이 넘실거렸다. 미간에 주름을 그은 얀테의 위압적인 시선이 저를 적대시하는 사내들의 시선을 오만하게 받아쳤다.

“표정들이 왜 그러나?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냉정한 눈빛들을 보고 얀테가 이죽거렸다.

“썩은 고기를 나눠 먹는 독수리 새끼들도 아니고, 오메가 하나를 나눠 갖는 알파들이라니. 여자가 없는 야만인도 아니고 말이야. 창피한 일이지. 다들 지금 상황이 불만족스럽잖아? 그만 솔직히 굴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어 미치겠잖아? 기회만 되면 황제인 내 목도 치고 싶어 하는 주제에, 대단히 교양 있게 구는 모습들이 인상 깊어.”

“난 만족하는데?”

비웃음 섞인 빈정거림에 눈치 없이 천진난만한 대답이 이어졌다. 얀테는 인상을 쓰고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초콜릿 향을 입힌 달콤한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음, 이거 보기와 달리 독하네.”

레이몬드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연기를 뿜어냈다. 거리가 있으니 그 연기가 얀테에게까지 오지는 않았으나 얀테는 보란 듯이 손을 휘저어 보였다.

“난 지금도 만족해.”

“…….”

흐트러뜨리지 못한 연기 사이로 레이몬드의 붉은 눈동자가 색스럽게 나른해졌다.

“날 많이 사랑해 주거든.”

“거절하지 않는 걸 사랑해 준다고 착각하는 게 아니고?”

레이몬드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시가를 깊이 빨아들여 연기를 길게 뱉었다. 뿌연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솟아올랐다.

“황제 폐하는 거절을 많이 당하시나 봐.”

조금도 타격받지 않은 듯 대꾸하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얀테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후우, 질투에 미친 알파란 무섭군.”

얀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분위기가 쓸데없이 흉흉해지자 라스카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레이몬드 경도 불안감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겁니다. 황제 폐하만큼은 아닐지라도요.”

라스카가 차분하게 중재했다.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은 얀테의 눈썹 끄트머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이상한 게 아닙니다. 감정이 얄팍한 것뿐이죠. 그리고 그게 우리가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이고요.”

“나는 딱히 불안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라스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습니다.”

소파에 앉는 대신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그라우지가 매끄러운 케인의 검은색 몸신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은색으로 칠한 것처럼 이질적인 그의 왼손을 힐끗한 라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나눈 대화의 수를 따지자면 내가 가장 많겠죠. 주치의로서 그녀의 건강을 가까이에서 살피기도 하고, 그녀 역시 나를 편한 대화 상대로 여기니까요. 그러니 그렇게 죽일 것처럼 노려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

흥, 얀테가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틀었다. 이 일의 발단인 ‘부부 싸움’을 일으킨 얀테는 이 거대한 공간의 주인이자 절대자였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서 가장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이들은 각자 그녀에게 저마다의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 얀테가 그녀에게 가진 가치는 그녀의 말을 따지자면 ‘필수적으로 섭취해야 할 비타민’이다. 딱히 원하지는 않지만 살기 위해서 곁에 둬야 하는 존재. 그와 그녀의 관계에는 다른 이들과 다른 한 가지가 존재한다. 바로 강제성. 감정이 부재된 그 강제성이 날이 갈수록 얀테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었다.

“하진은, 리체는.”

얀테가 한숨처럼 뱉었다.

“심중에 있는 말을 내게 하지 않아. 난 피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진실한 그녀의 속마음이 궁금한 거다. 하지만 리체가 내게 보여 준 모습은…….”

자존심이 상하는지 말 맺음을 하지 않은 얀테의 턱 관절이 도드라졌다. 그러더니 곧 말을 돌렸다.

“가끔 나를 냉정하게 볼 때는, 마음이란 게 없는 여자 같아.”

“그래? 내가 본 리체는 따뜻한 사람인데.”

레이몬드였다. 얀테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솔직하게 얘기해 보자꾸나. 내 황후가 악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천사표는 아니야. 다정하지 않고 오히려 냉정하고 차갑지.”

레이몬드가 즉각 반박했다.

“따뜻하고 착해.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귀찮은 나를 곁에 두지도 않았을걸.”

일순 얀테의 눈에 패배감이 감돌았다. 살심이 드는지 명화처럼 아름다운 눈에 푸른 귀기가 감돌았다. 팽팽히 맞서는 얀테와 레이몬드가 한참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동시에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 순간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말을 꺼낸 사람을 향해 시선이 쏠렸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걸이에 편하게 팔을 늘어뜨린 카이로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속에 의심이 많고, 믿음이 부족하지.”

“…….”

“매일 그녀에게 장미꽃을 보내고 있어. 그녀가 꽃을 볼 때만이라도 내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카이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완연히 부드러워진 철혈의 대장군을 보는 다른 네 알파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침마다 화원을 거닐고, 예쁜 꽃을 고르고, 손질하는 건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다. 그녀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그 사람은 내 표현을 세심하게 헤아리고 있어. 단지 표현하는 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아, 그래서 그 장미꽃이.”

바닥으로 시선을 끌어 내린 그라우지가 중얼거렸다.

“로맨틱하시군.”

진심의 증명. 카이로가 던진 화두가 알파들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분명 과거에 비해서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말하자면 글쎄요, 확신하기 힘들군요.”

그라우지가 케인의 딱딱한 끝으로 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있나요? 만약 내가 당장 마음이 떠났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라우지가 고개를 들었다. 접대용 응접실이 아닌지라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던 알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난 가끔 그런 상상을 해 본답니다. 상상 속에서 리체 양은 알겠다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요. 그게 다예요. 요즘은 이게 내 새로운 악몽이 됐죠.”

그라우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은 원래 변심하는 법이라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까지 짓고는.”

“…….”

침묵이 내려앉았다. 심지어 얀테의 말에 줄기차게 태클을 걸던 레이몬드도 말이 없었다. 분명히, 과거에 비해 지금의 그녀가 보여 주는 친애와 애정은 뚜렷하지만 그건 그녀만 바라보는 다섯 알파들이 만족스럽게 목을 축일 수 있을 만큼 풍부하지는 않았다. 얄팍한 감정에 불안감을 느낀다. 이쪽에서 놓으면 끊어져 버릴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낄 사람은 없었다.

얀테가 중얼거렸다.

“그곳 세계 사람들은 다 하진 같은 거냐? 속마음을 토해 내게 하는 약이라도 있으면 사용하고 싶어.”

“보다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없지야 않지요.”

“그게 뭐지?”

그라우지는 마법사가 흔히 짓곤 하는 우월감이 섞인 미소를 만면에 떠올렸다.

“고대 원시 마법사들의 환수인 맥은 사람들의 꿈을 먹는 짐승이었죠. 이 맥의 피에 심어진 특질을 연구하여 최근에 개발한 마법인데, 꿈을 통해 대상과 접촉하면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비교적 제한 없이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무의식의 경계에 속하는 깊은 꿈까지 들어가게 되면 진실을 듣는 것쯤이야……. 다들 왜 그렇게 보는 거죠?”

“아, 그런 식으로 리체를 만나려고 했다?”

합리적 의심을 하는 레이몬드의 추궁 앞에 그라우지는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담벼락만 넘어도 통구이를 만들더니 본인은 편법을 쓰려고 했다는 말이지.”

“하여간 말 안 듣는 똥개와는 협의라는 게 불가능하군요.”

그라우지가 넌더리가 난다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싸움이 붙으려는 전조에서 고개를 돌린 얀테가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뺨을 툭툭 쳤다. 손가락 사이에 낀 시가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진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구나. 탑주, 시간을 돌릴 수는 없는가?”

레이몬드와의 신경전을 끊어 낸 그라우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마법사라도 역시 그런 건 불가능하겠지.”

“마법은 전지전능하지만, 신은 아니니까요.”

“그녀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게 요즘처럼 안타까운 적이 없다. 내 땅에서 나고 자랐다면 어떤 부모를 가졌고 어떤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 왔는지 낱낱이 알아봤을 텐데.”

알파들은 생각에 잠겼다. 얀테가 한탄한 내용은 모두에게 몹시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한 발 떨어져서 그 사람의 세계를 보라고 했다. 얀테의 말처럼 그녀의 세계를 알게 된다면 리체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터.

“리체의 차원에 가 볼 수는 없을까?”

레이몬드가 제안했다.

“리체와 탑주는 안 된다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가능하잖아. 게다가 나는 실제로 이동해 본 적도 있고.”

꽤 괜찮은 방법이었지만 그라우지는 고개를 저었다.

“차원 이동 자체는 가능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차원에서 뭘 할 수 있다고? 그녀의 흔적을 훑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요.”

“다른 수가 없잖아. 그러게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 시간 이동 마법 하나 개발하지 못했어?”

“이 똥개가 뚫린 입이라고…….”

유독 깊이 생각에 골몰하던 라스카가 말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레이몬드가 동그래진 눈으로 라스카를 바라보았다. 얀테와 카이로도 그를 주시했다. 라스카가 턱을 쓰다듬었다. 고심하던 그의 시선이 그라우지를 향했다.

“탑주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요.”

“내 도움이?”

그라우지가 눈썹을 까딱였다.

* * *

리체가 있는 수도원은 헌납금이 많이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재물을 귀한 책을 구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데 사용하느라 사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규모가 큰 수도원은 신자들을 위한 손님의 집을 두는데, 그랜드다젤 대수도원은 백여 개가 넘는 방을 손님용으로 두고 있었다. 손님용 방이라고 모두 화려한 것은 아니었으나 개중 몇몇 개의 방은 귀족의 저택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고급스러웠다. 리체가 머무는 방도 그랬다.

반투명한 흰색 캐노피 침대에 누운 리체는 라스카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이다.

“나 최면 치료까지 할 정도로 피로하지는 않은데요.”

“가벼운 우울감은 느끼고 있잖습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기분을 좀 더 나아지게 하려는 것뿐이니.”

라스카가 인자한 미소를 띠고 리체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따스한 온기에 리체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어졌다. 그래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아 라스카의 뒤를 흘끗했다.

“그라우지는 알겠는데, 저 사람들도 필요한가요?”

리체의 시선이 닿자 주인을 보면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레이몬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카이로는 안심시키듯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고, 얀테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어색해하는 얀테를 본 리체는 쌀쌀맞은 시선을 거두어 다시 라스카를 보았다.

“그건 내가 말해 주죠.”

리체의 옆에 앉은 그라우지가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객관적인 중재자가 필요해요. 나로서도 이런 식으로 마법을 활용하는 건 처음이라, 문제가 생길 때 다른 누군가의 외부적인 손길이 필요해요. ‘꿈’에 관여하는 일에 다른 사람을 개입시키고 싶지는 않다고 했잖아요. 일단 나도 그러고 싶지 않고.”

할 말이 없어진 리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스카가 부드럽게 말했다.

“수도원장에게 들었습니다. 밤에 잠을 잘 못 잔다면서요.”

“……심각하지는 않아요.”

“리체가 사고로 이곳에 온 뒤로 지금까지, 모든 게 완전히 달라졌잖아요. 쉬어야 할 타이밍인 겁니다.”

리체가 눈을 깜박거렸다. 다섯 남자들이 자신만 쳐다보는 상황이 조금 어색했다. 인내심이 짧은 레이몬드가 기다리다 못해 성큼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얼굴의 윤곽을 어루만지듯 곳곳을 입술로 더듬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살이 많이 빠졌어, 속상하게.”

“딱히 그렇지는 않을 텐데.”

“빠졌어.”

“거울 정도는 매일 아침 보고 있어.”

“내 눈이 더 정확해.”

무슨 억지람.

“라스카 메디치나의 말이 맞아.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쉬어. 널 괴롭히는 건 우리가 해결해 줄 테니.”

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환자 취급할 거 없어. 이 정도의 우울감은 내가 있던 세계에서도 느꼈던 거야.”

“하지만 리체, 지쳐 보여.”

리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랬던가?

‘……그러네.’

얀테와 싸워서 황궁을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사실 그전부터 징조는 보이고 있었다. 몸은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너무나도 급격하게 변했고,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으며, 심지어는 이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이 차원에서 살아가기로 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상태가 다소 곤란하다고 생각하던 차기는 했다.

“그쪽 세계의 표현대로라면 심리 치료입니다. 낯설지는 않지요. 거부감을 느낄 필요 없어요.”

라스카가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 아래로 생긴 옅은 그늘이 섬세한 그의 이목구비와 잘 어울렸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겨울에 태어났는지 여름에 태어났는지가 궁금하고, 몇 살 때 말을 시작했는지 궁금하고,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해지더군요.”

라스카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였다.

“부디, 우리에게 당신을 더 알아 갈 기회를 주겠어요?”

못내 굳어 있던 리체의 표정이 풀어졌다.

“……내가 꺼림칙해하는 건, 라스카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눈썹을 치켜올린 리체가 팔짱을 끼었다. 똑 부러진 어투로 또박또박 설명했다.

“나 같은 차원 관련 종사자들은 정신 훈련을 많이 받는다고요. 제대로 된 안전장치가 없다면 다들 꿈에 갇히게 될 텐데.”

“그러지 않도록 내가 지켜볼 거예요.”

확신 어린 말투. 믿음직스러운 의사의 얼굴이 된 라스카를 본 리체가 팔을 풀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 잔다고 생각하고 눈을 감아요.”

리체는 눈을 감았다. 하얗고 깨끗한 얼굴이 고른 숨을 내쉬고 나서야 라스카는 품에서 작은 아이의 주먹만 한 은색 방울을 꺼냈다.

“메디치나가의 선조께서 우연히 손에 넣어 대대로 금고에서 보관되어 온 귀물 청령입니다. 대상의 숙면을 도와주는 데 사용되죠.”

라스카가 방울을 흔들자 귀가 번쩍 트일 만큼 청량한 소리가 번져 나갔다. 몇 번 방울을 규칙적으로 흔들자 리체의 숨소리가 점차 평온하게 잦아들었다.

리체가 완전히 잠에 빠져들자 라스카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극히 사무적으로 변한 투로 말했다.

“청령은 서방의 광신 종교 집단으로부터 구한 겁니다. 선조께서 거의 죽을 뻔하셨죠.”

“리체에게 말할 때와는 너무 다른 거 아니야?”

“무슨 상관입니까.”

“뭐, 어쨌든 그런 수상쩍은 걸 리체에게 써도 되는 거야?”

“왜 그 집단에서 모든 걸 불사하고 이 귀물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청령은 불면증 환자도 숙면을 취하게 해 주지만 한 가지 더 중요한 효능이 있습니다.”

딸랑거리는 청령의 방울 소리가 파문을 그리듯 끊이지 않고 번져 나갔다.

“청령음은 당하는 대상도 알지 못하는 뇌리 깊숙한 곳의 자물쇠까지 풀어 버려요. 우리는 리체 양의 무의식에 잠입할 겁니다. 다음은 그라우지 님의 차례입니다.”

그라우지는 뚱한 얼굴로 리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투덜거렸다.

“리체 양과 꿈속에서 오붓하게 만나고 싶어 개발한 마법인데, 남 좋은 일만 하게 생겼군.”

청령을 계속 흔들어야 하는 라스카와 마법을 전개해야 하는 그라우지는 리체의 무의식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라스카가 협업을 제안했을 때부터 그 점을 불만스러워했던 그라우지는 아직까지도 마음을 풀지 않고 있는지 얼굴에 심통이 가득했다.

“누구보다 리체 양의 머릿속이 궁금한 건 나란 말입니다.”

“그라우지 님.”

조용한 부름에 그라우지가 라스카를 응시했다. 라스카가 전에 없이 차가운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아쉬운 건 그라우지 님만이 아닙니다.”

음산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그라우지는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새롭게 알게 된 건 숨기는 것 없이 모두 공유하기로 하지 않았나.”

기다리다 초조해진 얀테가 짜증스럽게 말하자 그라우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소파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좋아, 이건 여기서 그만하기로 하지요. 이젠 내 마법으로 너희들을 리체 양과 연결할 거예요. 자리에 앉고 눈을 감아요.”

카이로가 먼저 침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는 소파 하나에 앉았다. 그다음 레이몬드와 얀테가 착석한 뒤 눈을 감았다. 그라우지의 무미건조한 경고가 뒤따랐다.

“무언가 불쾌한 감각이 들어도 거부하지 말아요. 리체 양의 무의식에서 거부당하고 싶지 않으면.”

얀테의 금색 속눈썹이 일순 파르르 흔들렸다. ‘거부당한다’는 말에 뺨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가 황급히 풀어졌다. 일말의 불길함을 느끼는 그의 귀로 그라우지의 고대 룬어 주문이 흘러 들어왔다. 머릿속을 현혹하는 이질적인 언어의 향연에 정신을 빼앗기는 순간, 발밑이 꺼지는 감각이 찾아들며 얀테는 삽시간에 깊디깊은 무의식으로 빠져들었다.

* * *

‘지켜만 보는 거예요.’

눈을 뜨는 얀테의 머릿속에 그라우지가 미리 경고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곳은 일종의 꿈이지만 단순한 꿈이 아니랍니다. 무의식에 심겨진 씨앗이 꿈밖의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발아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섣불리 행동하지 말아요.’

얀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침대 하나, 여기저기 벽과 천장에 붙어 있는 전등, 꽤 널찍한 마호가니 원목 책상 하나, 그리고 옆으로 길쭉한 등받이가 있는 소파와 따뜻해 보이는 감색 러그가 깔린 방은 생활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깔끔했다.

“여기가 어디지?”

오래지 않아 레이몬드와 카이로가 나타났다. 얀테처럼 주변을 확인한 카이로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거처라기엔 단순한 여관방처럼 보이는군. 리체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곳인가?”

레이몬드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마패처럼 생겼는데.”

얀테가 책상 한가운데에 있는 손바닥만 한 사각형의 판을 눌렀다. 그러자 마패 위로 빛이 형성되더니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얀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인터내셔널 임페러 코리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임페러 코리아는 개장한 지 2년이 되지 않은 최신식 건물을 자랑하며 최고급 서비스를 즐기실 수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호텔입니다. 홀로그램 서비스 탭을 통해 이용할 수 있는 호텔 서비스를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상반신만 둥둥 뜬 빛 인간의 설명이 끝난 후에도 객실은 조용했다. 정신을 차린 얀테가 황급히 마패처럼 생긴 서비스 탭을 끄자 빛 인간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

“…….”

“마법인가?”

레이몬드의 얼빠진 목소리에 정적이 깨졌다.

“무의식이니 언어의 제약은 없다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카이로와 레이몬드는 묘한 눈으로 서비스 탭을 응시했다. 제일 나이가 어린 레이몬드가 서비스 탭을 다시 켜서 여기저기를 툭툭 눌러 댔다.

“뭘 하는 거냐?”

“기다려 봐.”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방 한편에 마련된 보관함이 열리더니 음식이 나타났다.

“음식이 생겼어.”

“룸서비스란 거래. 상당히 편리하네.”

레이몬드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화덕 피자를 신기한 듯 살펴보았다.

“리체가 사는 세상은 이런 곳이었구나. 사람들은 다 아래에서 일하는 건가?”

카이로는 다른 부분에 감탄했다.

“무의식인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구현되다니 굉장히 디테일하군.”

“그나저나 리체는 어디 있는 거지?”

얀테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빵, 폭죽이 터지는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은 통창에 가까이 붙었다. 고층인 호텔방에서는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는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커다란 피켓을 발견한 레이몬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글씨를 읽었다.

“이하진, 명예의 전당에 서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한순간에 빠르게 얽혔다.

호텔을 빠르게 내려온 세 사람은 바깥으로 나오자 더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들을 빠르게 지나쳐 갔다.

“모두 한곳으로 가는 것 같군.”

인파의 흐름을 파악한 카이로가 말했다.

“그럼 따라가면 되는 건가?”

세 사람은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뒤를 쫓았다. 온통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라 다른 옷을 입은 자신들이 눈에 띄지 않을까 했는데, 시선을 내려 보니 어느새 그들도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와, 이거 신기한데.”

레이몬드는 느낌도 없이 바뀌어 버린 옷차림을 더듬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하진’을 연호하던 사람들 중 하나가 고개를 돌리고 상냥하게 웃었다.

“하진 님을 믿으시나요?”

“응?”

“아, 처음 오셨군요?”

“어, 뭐……. 근데 어딜 가는 거야?”

“어디긴요. 하진 님께서 명예의 전당에 올랐잖아요! 이 영광스러운 일을 축하하지 않을 수 없죠. 이거 받으세요.”

레이몬드는 그녀가 내미는 것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전단지 속에는 하진의 이름과 사진이 박혀 있었다. 여기 사람들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그녀는 몹시도 지적으로 보였고, 사진에 찍힌 탓인지 냉정한 인상에 카리스마가 철철 흘러 넘쳤다.

“이 모습이 원래 차원에서의 그녀인가.”

낯설어하며 얀테는 전단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서둘러 가야겠어요. 사람이 너무 몰리면 얼굴도 못 보게 될 거예요! 가까이에서 하진 님의 외차원 존재 이론을 들을 기회를 놓칠 순 없죠!”

그들에게 전단지를 나눠 주었던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주변 사람들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세 사람은 한 번 시선을 교환하고는 잰걸음으로 사람들을 제치고 앞서 나갔다. 오래지 않아 거대한 무대가 나타났다. 그 위에 선 리체는 전단지 사진 속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실제 리체라기보다는 무의식의 그녀라는 걸 알지만 반갑기 짝이 없었다. 이번만큼은 세 사람의 반응이 모두 똑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노벨 물리학상. 멜리쳐 지식인상. 이 시대 최고의 인류학자! 이하진 님입니다!”

“꺄아아아악, 존경하는 하진 님!”

“이하진!”

“이하진!”

귀가 떨어질 것처럼 큰 환호성이 잇따랐다. 세 사람의 안색이 다소 창백해졌다.

“……이런 걸 원했단 말이야?”

“무의식은 부끄러울 정도로 솔직하다더니.”

레이몬드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리자 얀테가 말을 이었다. 약간 멍해진 얼굴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거라면 황후의 자리도 나쁠 건 없잖아?”

“그래서 폐하가 그녀를 모른다는 거야.”

레이몬드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폐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자리 따위가 그녀에게 무슨 매력이 있겠어? 성취 욕구, 명예 욕구는 그런 걸로 얻어지는 게 아니지.”

“무식한 용병 따위가 감히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거냐?”

차갑게 핀잔을 준 얀테였지만 레이몬드의 말을 모두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보아 온 리체의 성격도 그랬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무대 위의 리체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카이로가 말했다. 얀테와 레이몬드의 시선도 그녀에게 향했다.

“라스카는 의식도 차원처럼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다고 했는데. 이곳은 욕망편인 건가?”

“아마 이 상황이 끝나면 또 다른 리체를 볼 수 있을…… 뭐야?”

군중 속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얀테가 얼굴을 찌푸렸다. 잘생긴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했지만 마주친 상대의 얼굴은 움찔하지도 않았다.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리체?”

그 순간, 주변을 둘러싼 이들의 고개가 기괴하게 돌아갔다.

“리체?”

“리체?”

“리체라고 했어?”

투두두두둑. 과녁에 화살이 꽂히듯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달라붙었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무슨 짓을 한 거야, 폐하!”

“낸들 아냐. 난 이름밖에 안 불렀단 말이다.”

질린 그들에게 물음표가 퍼부어졌다.

“너희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공명음처럼 웅웅거리는 군중의 목소리에 얀테는 당황스러웠다.

“왜 이러는 거냐?”

“우리 차원의 이름을 말해선 안 됐던 거 아니야?”

카이로와 얀테의 시선을 받은 레이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긴 ‘하진’의 세상이잖아.”

가방끈은 짧은데 그녀에 대해서만큼은 눈치가 꽤 빠른 그였다.

“그럴듯하군.”

이제는 무대 위의 리체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녀였지만 모두가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노려보는 얼굴은 좀 공포스러웠다. 안 그래도 북적거리던 인간들이 더 몰려드는 듯했다. 수백의 기괴한 시선이 주는 위압감에 몸이 굳어졌다. 그들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레이몬드가 소리쳤다.

“뛰어!”

레이몬드는 무대 위의 리체를 향해 뛰었다. 빨리 뛰어온 덕에 멀지 않았던 무대가 훅 가까워졌다. 벌레처럼 달려드는 하얀 가운의 사람들을 밀치고 악착같이 무대 위에 올라서자 사람들 뒤에 선 리체가 흠칫했다. 뒤를 돌아 도망가는 그녀를 잡기 위해 세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레이몬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리가 무거워!”

무대에 오르기 전만 해도 멀쩡했던 다리가 무거운 추라도 달린 것처럼 급격히 무거워졌다. 카이로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방어 기제가 발동했나보군. 훈련을 받았다더니, 침입자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멀리 도망가는 리체의 펄럭거리는 가운을 향한 카이로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녀를 붙잡아야지.”

그 말을 끝으로 카이로가 무서운 속도로 뛰쳐나갔다. 한낱 호텔 룸서비스까지 세세하게 구현할 정도로 섬세하고 강한 의식 세계를 구축한 리체였지만 카이로는 숱한 전장의 사선을 넘고 넘고 넘어온 전쟁의 신이었다. 정신력을 겨루자면 따라올 자가 없었다. 파죽지세로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는 그의 뒤에서 얀테와 레이몬드가 질 수 없다는 듯 속도를 냈다.

훌쩍 가까워진 거리에 기겁한 무의식의 리체가 “악”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그 모습을 보자 실제로 제게서 도망가는 리체를 뒤쫓는 것 같아 오기가 솟은 얀테는 다리를 더 빠르게 놀렸다.

“하하하.”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고개를 틀자 앞서 나가는 카이로가 혼비백산한 그녀가 귀엽다는 듯 웃고 있었다. 얀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놈도 좀 이상해졌어.’

그들은 금방 리체를 따라잡았다. 카이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뒤에서 한 번에 그녀를 붙들어 안아 들었고, 레이몬드는 리체의 왼쪽 손을, 얀테는 오른쪽 손을 붙잡았다.

“침입자!”

리체가 차갑게 눈을 빛냈다. 분하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에 얀테는 아래가 섰다. 불룩 선 바짓가랑이를 발견한 리체가 기겁했다.

“이 변태 놈!”

“하, 내가 서고 싶어서 섰겠나? 이건 불가항력…….”

억울해하는 얀테의 항변을 듣기도 싫다는 듯 리체가 눈을 꽉 감았다.

“여기서 나가!”

쿵!

그 순간 불쾌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본능적으로 그라우지가 말한 절대 거부하면 안 되는 ‘불쾌함’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긴장했다. 그때 카이로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리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술에 키스한 카이로가 입술을 떼지 않은 상태로 속삭였다.

“진정해, 그대. 해치러 온 게 아니야.”

리체가 눈을 깜박였다. 냉기가 한결 가신 눈은 현실 세계의 그녀보다 어리숙해 보였다. 카이로는 그런 그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날 알고 있어?”

“아주 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카이로를 살폈다. 그 얼굴을 본 레이몬드가 손에 힘을 주었다. 카이로보다 뒤처졌다. 또 한발 늦었다. 리체가 애타하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금쯤 누그러진 눈빛에 레이몬드는 왠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리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기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물어보려는 그때, 발밑이 꺼졌다. 눈을 크게 뜬 카이로가 리체를 꽉 끌어안았지만 언제 그녀를 잡고 있었냐는 듯 품에는 아무도 없었다.

“리체!”

카이로의 당혹스러운 외침과 함께 세 사람은 빠른 속도로 검은 구덩이에 떨어져 내렸다.

* * *

어둠이 가시고 나타난 곳은 흰 벽과 나무색 장판이 깔린 거실이었다.

“여긴 또 어디야?”

“가정집이네.”

“이번엔 제대로 찾아왔나 봐.”

얀테가 내부를 빠르게 훑고 말했다.

“이런 좁은 집에서 살았다고?”

“이 정도 넓이면 그렇게 좁지는 않아. 평민 일가족의 집이랑 비슷하네.”

용병들과 곧잘 어울리는 레이몬드는 얀테와 카이로에 비해서 좁은 집에 익숙했다. 그의 말에 얀테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 벽으로 손을 뻗었다. 눈빛이 바뀌었다.

“……어릴 때 살았던 집은 맞는 모양이군.”

그가 벽에 걸린 액자를 들어 보였다. 카이로와 레이몬드의 시선이 액자의 사진에 못 박혔다. 사진 속에는 무뚝뚝해 보이는 젊은 남자와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단정하게 차려 입고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자세가 어른처럼 발랐으나 입가에 머금은 웃음은 천진난만했다.

“작아…….”

“엄청 작구나.”

세 사람은 한참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작은 여자아이가 나왔다.

거실에 서 있던 세 남자는 너무 놀라서 고개를 돌린 그대로 굳어졌다. 사진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리체는 너무 조그마했다. 거실에 느닷없이 나타난 침입자들을 발견한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긴장감이 몰려왔다. 그들이 알고 있는 그녀라면 침착하게 치안대에 연락을 할 것 같지만 지금의 어린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울음을 터뜨린다면 어떻게 달래야 하지? 부모가 뛰쳐나오면 제압을 해야 하나? 온갖 생각이 드는데 까치발을 든 리체가 정수기에 물컵을 가져다 대는 걸 보자 걱정이 싹 가셨다.

너무.

너무나.

귀여웠다.

일곱 살…… 여덟 살쯤 되었을까? 어린 리체는 아주 조그마했다. 100센티미터나 될까? 키가 큰 카이로와 비교하면 허벅지에 겨우 올 듯했다. 단발의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윤기가 흘렀고 젖살이 빠지지 않은 듯한 뺨은 하얗고 보드라워 보였다. 사진에서 봤던 것처럼 표정은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웠지만 검은 눈을 반짝이며 물을 홀짝이는 모습은 무척 깜찍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 레이몬드의 표정이 순두부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얀테도 부드러운 눈으로 물을 마시는 어린 리체를 응시했다.

따뜻한 분위기가 흐르는데.

“하아.”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한숨에 얀테와 레이몬드가 쳐다보자 카이로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체에게서 뭔가 문제를 발견했던 걸까? 얀테와 레이몬드가 표정을 굳히는 찰나.

“귀여워…….”

묵직한 속삭임에 두 사람은 귀를 의심했다. 카이로는 진지한 얼굴 그대로.

“미치겠군.”

주접을 떨었다. 덩달아 긴장했던 두 사람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내가 말했나? 쟤도 제정신 아니라고.”

“폐하께서 할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얀테가 레이몬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너는 그게, 존대를 하는 거냐 뭐 하는 거냐.”

레이몬드는 히죽 웃으면서 대답 대신 휘파람을 불었다. 얀테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니, 여기서 소리를 내면 어떡해?”

얀테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리체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보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얀테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운 입은 리체랑 다르게 우리가 안 보이나 봐.”

레이몬드가 말했다.

“아까 눈 마주쳤는데 모르더라고.”

어린 리체는 종종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레이몬드가 성큼성큼 그녀의 뒤를 따랐다. 리체는 문을 연 채 작은 손으로 책을 쥐고 어린이용 의자에 앉았다. 평범한 동화책처럼 보였지만 책을 펼치니 호텔에서와 같이 빛으로 만들어진 동물의 형상이 떠올랐다.

“문은 왜 열어 두는 거지?”

“방이 답답해서 그런가.”

거실에서도 놀란 얀테는 리체의 방을 보고서는 기겁을 했다. 떨떠름하게 대꾸하고 나자 카이로가 제일 늦게 들어왔다.

“부모가 안 보이는군.”

“그럼 이 집에 리체 혼자인 거야?”

카이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볼일이라도 보러 간 거겠지.”

“리체는 양친이 바쁘다고 했다. 집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었던 모양이야.”

세 남자는 가만히 리체를 지켜보았다. 홀로그램 동화책을 닳도록 보던 리체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는 책장에서 두꺼운 책을 꺼냈다. 이곳의 언어는 모르지만 수학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 나이대의 것치고는 꽤 긴 숫자의 향연을 리체는 슥슥 풀어 갔다.

“어릴 때부터 똑똑했구나.”

지켜보던 얀테가 픽 웃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리체를 지켜보기를 한참, 리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레이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리체는 배를 붙잡고 고민하는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웃던 레이몬드가 인상을 썼다.

“부모는 언제 오는 거야? 어지간한 볼일은 다 끝낼 시간인데. 우리 리체 뱃가죽이 등에 닿겠다.”

다행히 레이몬드의 분노가 임계점에 닿기 전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왔나 보군.”

리체가 짧은 다리로 의자에서 폴짝 내려왔다.

“우리 하진이, 책 읽고 있었어?”

“다녀오셨어요.”

사진과 똑같이 생긴 리체의 엄마였다. 사진으로 봤을 때와 하나도 다른 게 없었다. 다만 몹시 바쁜지 미소를 보인 시간은 짧았고 시선은 리체를 빠르게 스쳐 거실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게 계약 연장을 해야 하는데 서류를 깜박해서 얼른 나가 봐야 해. 하진이, 혼자 있을 수 있지?”

서랍에서 서류를 꺼낸 여자가 신발을 신으며 물었다.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은 3분도 채 되지 않았다.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배가 고파요.”

“엄마가 냉장고에 카레 해 놓은 거 있어. 에이미 불러서 차려 달라고 하면 돼. 저번에는 좀 버벅거리더니 오늘은 잘되더라.”

에이미? 얀테가 중얼거렸다. 집엔 사람이 없었는데 돌봐 주는 누군가가 있었던 건가. 곧 여자가 에이미를 불렀다. 그러자 주방 한편에 있던 원통형의 기다란 무언가가 지잉, 기계음을 내며 다가왔다.

“이 깡통 같은 건 뭐야? 장식품이 아니었어?”

레이몬드가 제 곁으로 다가온 에이미를 신기한 듯 내려다보았다.

“에이미에게 돈도 넣어 놨으니까 다른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시켜 먹어. 단, 면 종류 말고 밥 같은 걸로. 엄마 아빠 오늘도 좀 늦게 돌아올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에이미에게 말하고. 저녁에는 삼촌에게 잠깐 들러 달라고 부탁했어. 삼촌 오시면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알았지?”

리체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딸처럼 착한 딸이 어디 있을까?”

여자는 두어 번 리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금방 몸을 돌렸다.

리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잠깐 들어왔다 사라진 집은 전보다 크고 비어 보였다. 오도카니 선 리체의 얼굴은 슬픔 따위 없이 말갛기만 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세 남자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졌다. 레이몬드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계속 혼자 있는 거야?”

돌연 리체가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곤 또박또박 말했다.

“에이미, 지금 황금쟁반짜장 쿠폰이 몇 장이야?”

둥그런 몸체에 숫자가 떴다.

―25.

“흠.”

리체가 짧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주일 동안 카레를 먹는 건 좀 그래. 영양학 책에서 봤던 걸 생각해 보면, 카레는 나쁘지 않은 건강식이지만 내 몸에 완벽하게 맞는 영양식이라고는 보기 힘들어. 그러니까.”

리체는 어려도 리체구나. 기가 막힘, 흐뭇함 등의 감정이 섞인 눈빛으로 세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는데.

“황금쟁반짜장에 주문을 넣어, 에이미.”

얀테가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황금쟁반짜장이란 게 무엇이냐?”

“몸에 좋은 거겠지.”

앙증맞은 캐릭터 식탁 위는 금세 배달 음식으로 채워졌다. 카이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시커먼 면은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군.”

“여긴 다른 세상이잖아. 저래 보여도 괜찮은 거 아니야?”

레이몬드도 찝찝했으나 그는 리체의 선택을 믿었다. 리체가 조막만 한 손으로 쟁반을 흔들었다. 그러곤 나무젓가락을 쪼개 면을 슥슥 비볐다. 그 표정이 하도 진지하여 무의식적으로 그 모습에 집중하고 있던 얀테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이렇게 집중을 해.”

“조용히 하지, 좀.”

카이로가 일축했다. 그림 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불쾌감을 표시한 얀테도 곧 리체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검은색 면을 빨아들이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입이 작아서 많은 양을 단번에 넣지 못하는데도 열심히 먹는 모습이 눈을 홀렸다.

“저게 보기엔 저래도 굉장히 좋은 건가 봐. 저렇게 열심히 먹다니, 처음 보는 모습이야.”

그 순간, 로봇의 동그란 판에 글씨가 나타나 반짝거렸다.

―영양 성분 불균형. 질 좋은 단백질과 섬유질이 부족합니다.

“…….”

“…….”

“…….”

“아, 배불러. 많이 남았네.”

식탁을 훑어본 리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세 남자의 귀에 똑똑히 꽂혔다.

“역시 다음부터는 시켜 먹지 말아야겠어. 효율성이 떨어져.”

―올해 그 말만 10번 하셨습니다.

“조용히 해, 에이미.”

그녀의 귀찮아 보이는 표정에 세 남자는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저랬구나.”

고민하면서도 제 강압적인 유혹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갔던 리체를 기억한 레이몬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난 진작에 알고 있었다. 이성적인 척하면서 실은 누구보다 본능적이라는 걸.”

얀테가 콧방귀를 뀌었다. 비난하는 어투였지만 리체를 바라보는 눈은 웃겨 죽겠다는 듯 푸른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짜장면을 반이나 남긴 리체는 능숙한 손길로 식탁 위를 척척 치워 냈다. 오래지 않아 말끔해진 식탁과 먹다 남은 음식 쓰레기, 일반 쓰레기가 남았다. 리체는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리며 분리수거를 했다.

세 남자는 어느새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씨발, 저 작은 손으로…….”

여러 번 접촉해도 손이 유령처럼 그대로 통과해 버리는 통에 저 작은 몸으로 빨빨대면서 움직이고 있는데도 조금도 도와줄 수가 없다. 레이몬드는 덜컥 걱정이 되었다.

“설마 계속 이대로 보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이곳은 리체의 과거 기억인 모양이니,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리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카이로가 대꾸했다. 얀테는 어느 순간부터 묘해진 눈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리체를 좇았다.

“부모에게 방치된 아이라…….”

찰싹!

입을 얻어맞은 얀테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눈알을 굴렸다.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후려친 레이몬드가 더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탈탈 털었다.

“이 무슨…….”

“입 좀 닥치시지.”

“미쳤느냐? 내가 뭐라고 했다고?”

“무슨 말을 하든 기분 더러워서 그래.”

이젠 형식적인 공대도 집어치운 레이몬드였다. 얀테는 붉으락푸르락 변한 얼굴로 씩씩거렸다. 카이로는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달관한 눈이었다.

다섯 알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꼭 약속한 것처럼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세 사람이 이렇게 오래 같이 있는 것도 사막에서의 일 이후 처음이다.

띵동.

서로를 노려보던 두 남자의 시선이 현관으로 향했다. 리체가 멈칫하고 고개를 들자 카이로도 현관을 바라보았다. 리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귀신처럼 빠르게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레이몬드가 얼굴을 구겼다.

“누군데?”

리체가 머뭇거리는데 띵동, 도어 벨이 다시 울렸다. 리체가 느릿하게 걸음을 떼는 찰나 잠금장치가 풀어지는 기계음이 들리더니 곧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문지방을 통과해 들어왔다.

매우 못생긴 남자였다. 리체를 바라보는 표정은 엄격하고 험상궂었다. 세 남자는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느꼈다. 그건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남자의 정체 때문이 아니었다. 등장한 남자를 보자마자 무심해진 리체의 얼굴을 봐서였다. 남자가 오기 전만 해도 감정의 동요를 드러냈던 리체가 지금은 긴장을 하고 있었다.

“문 안 열고 뭐 했어?”

남자는 빳빳한 자세로 서 있는 하진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저자는 누군데 쟤가 저러는 거냐?”

아직까지 리체를 향한 서운함이 풀리지 않아 내도록 틱틱거렸던 얀테의 눈에 불길이 솟았다.

“삼촌.”

“이건 무슨 냄새야.”

콧구멍을 벌렁거린 남자가 주먹만 한 코를 찡그렸다. 차가운 시선이 리체에게 내리꽂혔다.

“또 불량 식품을 시켜 먹었구나.”

“…….”

“이러니까 네 엄마가 나한테까지 부탁을 하는 거다. 얼마 전에는 엄마에게 혼자 있을 수 있다고 했다면서 이런 꼴이냐?”

리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없는 얼굴은 하얀 인형 같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삼촌이라 불린 남자가 리체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만은 기분 나쁘게 형형했다.

“네가 이렇게 불안하게 살고 있는데 어떻게 이 삼촌이 너에게서 손을 뗄 수가 있니.”

“…….”

“응? 하진아, 삼촌이 얼마나 바쁜지 알아?”

“…….”

“그런데 하진이 너 하나 걱정돼서 꼬박꼬박 여기까지 오는 거다. 이걸 모르면 안 돼.”

리체가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고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혼자 잘할 수 있어요.”

“하진아.”

남자가 미소를 지우고 얼굴을 굳혔다. 험상궂은 기색이 짙어지며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너 삼촌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랬지. 어디 어른에게 또박또박 말대꾸를 해?”

“…….”

“네가 다른 데서도 이럴까 봐 삼촌은 밖에서도 하진이 걱정이 들어.”

손가락에 굵은 털이 듬성듬성 난 솥뚜껑 같은 손이 리체의 하얗고 부드러운 뺨을 슬쩍 쳤다.

“저 미친놈이.”

이를 악문 레이몬드가 이건 리체의 기억일 뿐이라는 것도 잊고 발로 남자의 돌덩이 같은 등을 찼다. 당연하게도 발이 등을 통과해서 그대로 나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레이몬드가 바닥에 발을 내리꽂았다. 만져지기만 한다면 그대로 경추를 분리할 것처럼 사나운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는 레이몬드는 다른 때와 달리 한 마디 거친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기세가 더욱 흉흉했다.

“그만해라, 레이몬드.”

레이몬드가 무서운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두고 보자고?”

“그럼 지금 네가 뭘 할 수 있지?”

레이몬드가 이를 악물었다. 카이로의 말에 지금 이 순간이 현재에는 실재하지 않는 과거의 조각이라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어떻게 하든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자, 이제 우리 방에 들어가서 재미있는 동화책을 읽자.”

다행히 남자는 리체를 더 만지지는 않았다.

“공부, 하려고 했는데요.”

“또 그 두꺼운 책을 읽으려는 거냐? 이해도 안 되는 책을 뭐 하러 읽어?”

“…….”

“똑똑한 척하는 아이는 친구도 안 생긴다.”

“…….”

“네 나이에는 네 나이에 어울리는 책을 읽어야지. 삼촌 말대로 해.”

리체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건네는 곰이 그려진 동화책을 읽었다.

“소리 내서 읽어야지.”

“……어느 날, 곰 인형이 말했습니다.”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낭랑한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는 모습은 깜찍했다. 다만 리체의 어투는 여느 어린 여자아이들처럼 앳된 구석이 없었고 도리어 귀찮아하는 권태로움까지 묻어났다. 그게 못마땅한 듯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더니 눈을 감고 리체가 동화책을 읽는 소리를 들었다. 가끔씩 실눈을 떠 리체가 바른 자세로 동화책을 읽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데, 그 눈빛이 소름 끼쳤다.

남자는 리체가 동화책을 두 번 더 읽고 나서야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두꺼운 손이 지나칠 정도로 느리게 리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삼촌 또 올게. 다음에는 더 길게 있어 주마.”

리체는 남자가 가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동화책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 두고 어른들이나 읽을 법한 두꺼운 책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겼다. 넘기는 속도가 읽고 있다기에는 너무 빨랐다.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나는데.”

레이몬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이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한 마디 빈정거렸을 법한 얀테도 입을 다물었다.

리체의 얼굴이 다소 밝아진 건 새벽에 가까운 늦은 시각, 부모님이 돌아왔을 때였다. 침대에 누웠던 리체는 바로 일어나 현관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피곤한 부모님을 맞이하는 리체는 얼굴 가득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눈빛은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종일 일하느라 지친 부모님은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다.

“안 자고 뭐 하고 있었어?”

“소리가 들려서.”

“얼른 자.”

“네.”

“아, 하진이 너, 삼촌이 짜장면 먹는 거 봤다는데 또 그런 거 먹으면 혼난다. 밥을 먹으라고 그랬지? 삼촌 아니었으면 까맣게 모를 뻔했네. 하진이 혼자 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엄마 실망시킬래?”

“그만하고 얼른 씻고 자자.”

온몸에서 고기 냄새를 풍기며 고단해 보이는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줄인 여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삼촌 말 잘 들어. 알았지?”

얘기를 듣는 동안 안광의 빛이 사그라진 리체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나 삼촌 싫어요.”

“또, 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삼촌이 바쁜 데도 엄마 아빠랑 친해서 우리 하진이 봐주는 건데 고마워해야지. 무섭다고 싫어하는 게 말이 돼?”

“무섭다고 싫어하는 거 아닌데.”

“전에 그랬었잖아. 생긴 거 때문에 사람 차별하면 안 된다. 우리 똑똑한 딸이 갑자기 왜 그럴까?”

여자는 입을 다문 리체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자, 이제 얼른 들어가서 자.”

뭐라고 더 말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짙은 피로가 여자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다크서클이 가득한 눈가를 본 리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방으로 들어온 리체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부모가 오기 전에는 계속해서 책을 읽고, 학교 과제를 하고, 밥을 먹고, 씻고, 어른처럼 혼자 척척 해냈지만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려 잠을 청하는 그녀는 성인 남성의 반도 채 오지 않는 작은 아이였다.

처음 작은 리체를 보았을 때만 해도 즐거워했던 세 남자의 말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리체가 잠에 빠져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마치 죽은 것처럼 고요했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인데도.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울리는 어두운 방.

“아까 그 새끼, 묘하게 닮았어.”

레이몬드가 얀테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던 얀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뭐?”

“…….”

“설마 나와 닮았다고 하는 것이냐?”

대륙 제일의 미남. 합쳐 놔도, 떨어뜨려 놔도 완벽한 이목구비의 얀테가 어처구니없다며 하,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건 몰라도 리체가 네놈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는 알겠다.”

경멸을 품은 카이로의 눈빛에 얀테는 억울해졌다.

“난 그놈처럼 졸렬하게 굴지는 않았다.”

“…….”

“조금, 심하게 하기는 했지만.”

리체는 제 행동을 강제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강압적인 행동을 보이면 상대를 해 주지도 않는다. 얀테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졌다. 조금 전 본 권위로 찍어 내리려는 못생긴 사내의 행위는 추잡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닮았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 그 순간, 저를 볼 때마다 싸늘했던 리체의 눈빛이 뇌리를 스쳤다.

뭐라도 얹힌 것처럼 가슴이 크게 답답해진 얀테가 이를 악물었다.

“결코 같지 않아.”

“…….”

“나는 그녀를 배려하고 있어. 황후로서 존중하고, 내 반려자로서 대우하고 있단 말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힘을 잃고 수그러들었다.

‘내가 널 수녀원에 처박지 못할 줄 알아?’

‘바라는 바예요.’

‘네 음란함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아…….”

얀테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생각지도 못한 리체의 과거를 대면한 세 남자는 깊어지는 밤과 함께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조금 더 큰 리체는 더 똑똑하고, 도도하게 자라났다.

진학에 관심이 없는 부모를 설득하여 국제학교에 입학하게 된 하진은 돈 많은 집 자식들과 천재 같은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빛을 발했다. 학비도 장학금 제도를 찾아 준비했기 때문에, 입학해 그렇게 되기까지 부모가 해 준 건 반대를 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와, 하진. 이것도 만점이야? 이번에도 1등이겠네. 이럼 대체 올해는 누가 널 이기냐.”

“비앙카가 또 이를 갈겠네. 신입생 중에서 수석으로 들어왔는데 그 이후부터는 번번이 하진에게 지고 있잖아.”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다, 하진.”

첫 시험에 이어 두 번째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둔 하진은 100으로 점철이 되어 있는 성적표를 인쇄하여 집으로 가져왔다. 이제는 온라인으로 전송되는 성적표지만 바쁜 부모님이 시간을 내 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리체는 방문을 열고 텅 빈 방에 들어가 부모의 화장대에 시험지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뒤에서 레이몬드가 조잘댔다.

“대단한 거지. 우리 세계로 따지자면 성 리키아 아카데미아에서 평민으로 들어와 수석을 한 셈이잖아? 나도 아카데미아에 잠깐 다녔지만, 똑똑한 애들이랑은 말이 안 통하던데.”

“그럼 리체랑은 말이 통한다는 거냐?”

카이로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하는 투라 레이몬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야? 당연히 잘 통하지. 윗입으로도, 아랫입으로도.”

찌푸린 얼굴을 풀고 씨익 웃은 레이몬드가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카이로가 혐오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전과 달리 반응이 간결했다. 그들이 리체의 무의식 속에서 지낸 지 이제 6년. 바깥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하더라도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투닥대던 세 사람은 이제 상대가 뭐라 하든 적당히 넘기는 수준이 되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어지간한 학자들보다도 똑똑한 것 같으니. 내가 아주 훌륭한 황후를 얻었어.”

흐뭇해하는 얀테를 향해 못마땅한 눈길이 꽂혔다.

“누가 들으면 리체가 원해서 황후가 된 줄 알겠어. 억지로 그 자리에 앉힌 주제에.”

“무슨 소리냐. 난 설득했고, 그녀는 받아들인 것뿐인데 누가 누구를 강제로 시켰다는 거야?”

발끈한 얀테가 길길이 날뛰었다. 어느 순간부터 강제, 강압, 억지로, 협박이란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 그의 으르렁을 레이몬드는 지겹다는 얼굴로 흘려들었다.

“성적 잘 받았던데, 잘했다.”

세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세 식구끼리 맞는 주말 점심, 무뚝뚝한 아버지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주변에서 부럽다고 난리야. 똑똑하고 혼자서도 잘한다고. 많이 먹어라, 우리 딸.”

어머니가 생선 살점을 발라내어 리체의 밥 위에 올려 두었다. 리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입술을 벌려 생선과 함께 밥을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하얀 뺨이 불룩 튀어나왔다.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다.

그러나 단란한 식탁을 내려다보는 세 남자의 시선은 못마땅하기만 했다. 잠깐 그녀를 칭찬한 부모는 아니나 다를까, 다시 장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기 시작했다.

리체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금세 안개처럼 흩어졌다.

“저런 얼굴을 하다니. 칭찬을 많이 해 줬어야 했나?”

레이몬드가 얀테를 흘끗했다.

“리체가 자기보다 무식한 사람의 칭찬을 기뻐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무식하다고?”

레이몬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트레이드마크인 퇴폐적인 미소는 여자를 유혹하기엔 더없이 훌륭한 무기였지만 사내들에겐 몹시도 얄미울 따름이었다.

한편 부모는 관리비와 임대료가 높아져 걱정하는 말을 늘어놓더니 어느 순간 이야기가 이상하게 빠졌다.

“아, 이러지 말고 상태 동생 불러 보자. 이렇게 세를 올리는 게 어디 있나?”

“하지만 이 일대가 다 그렇게 한다는데 삼촌이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일괄로 올리기는 했다지만 우리 사정 얘기하면 좀 봐줄지 어떻게 알아?”

“하긴 밑져야 본전이니까. 밥은 먹었으려나?”

리체의 입술이 축 처지는 것을 세 사람은 똑똑하게 보았다.

마침 밥을 먹지 않은 ‘삼촌’이 초대되어 왔다. 작은 눈과 주먹처럼 큰 코는 변함이 없었고, 잘 먹고 잘 살아 황색의 피부에 번들번들한 기름이 감돌았다. 주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뱀 같은 눈이 늘씬하게 자란 리체의 몸을 훑었다. 리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렴 형님에게도 그렇게 받을까 봐? 아이고, 원래 내던 그대로 내세요. 하진이도 어렸을 때 내가 업어 키웠잖아. 남이라고 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바쁘기는 한데 손에 남는 건 없고 걱정이 많았었어.”

“그런 걱정 마세요. 언제든지 도와드릴 테니. 형수님, 생선이 아주 맛있는데요?”

“많으니까 더 먹어요, 삼촌.”

웃음이 가득한 화기애애한 식탁. 리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이건 시간이 지나도 눈 뜨고 못 봐주겠군.”

혀를 찬 얀테가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작 그 조그마한 공간을 위해서 저렇게 바쁘게 살고 딸에게는 관심도 없단 말이야?”

“난 리체가 더 의외야. 저자가 기분 나쁘게 해도 가만히 있잖아.”

레이몬드가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들이 아는 리체라면 본인에게 불합리한 일이 닥쳤을 때 누구를 끌어들여서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터였다. 자존심도 강하니 은근슬쩍 훑어 대는 시선이나 손길을 참을 리가 없을 텐데 아직까지도 저 남자의 존재를 인내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이 소중한 거야.”

“저런 가족이라도, 말이지.”

꾸역꾸역 밥을 다 먹은 리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일어났다. 남자의 더러운 시선이 등 뒤에 따라붙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리체의 눈에 종이를 모아 버리는 상자가 눈에 띄었다. 삐죽 튀어나온 종이의 상단에 성적표라 적힌 굵은 글씨가 선명했다. 리체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아.”

“이런.”

세 남자가 머리를 짚었다. 바깥에서는 대단하다는 말을 숱하게 듣는 리체가 정작 집에서는 혼자서도 잘한다는 이유로 방치되고 외면당하고 있었다.

카이로는 무심코 그녀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물론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잘했다.”

리체는 똑똑하지만 책도 안 읽고 만점을 받을 수는 없었다. 시험 기간만 되면 잠을 줄이고 책에 파고드는 그녀를 밤새도록 지켜보았다. 무신경한 부모를 사랑하는 그녀를.

“그대가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아마도 부모에게서 듣고 싶던 말이었겠지만. 그래도 이 말을 그녀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는데, 리체가 자신의 눈을 더듬었다. 그대로 통과할 줄 알았던 손이 카이로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카이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리체가 중얼거렸다.

“지금 누가 말하고 있는 거예요?”

카이로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무의식의 과거에 떨어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놀란 얀테가 성급히 말했다.

“이제 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건가?”

그러나 잠시 후, 스며들 듯이 리체의 손이 카이로의 손을 통과했다. 고개를 갸웃한 리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눈빛이 자신들을 스쳤을 때 세 남자는 긴장했지만 총명한 눈동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뭐야. 알아차린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한숨이 흘러나왔다.

바빠서 밖으로만 나도는 주인을 둔 집은 평소와 달리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당신, 그 여자랑 무슨 관계야?”

“무슨 관계긴, 오해하는 거야, 하진 엄마.”

고성은 방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리체의 방문까지 뚫고 들어왔다.

“오해는 무슨 오해! 네가 그년이랑 같이 있는 거 다 봤는데! 내가 가게에서 땀 흘리며 음식하는 동안 너는 밖에서 바람질이나 하고 있었어!”

“아니라니까! 그냥 일하고 있었어! 분점 오픈하는 건 당신도 찬성했잖아. 그거 도와주는 사람이야. 알고 있잖아? 비즈니스라고.”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랑 손을 잡고 다니니?”

리체는 책을 내려놓았다. 누가 나갔는지 곧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하아. 리체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가게가 바빠지면서 다툼도 잦아지는 두 사람이었다. 부모의 다툼은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제 머리가 제법 큰 리체라지만 현재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건 분명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부모인데 따로 사는 건 안 되는 건가?”

“이해해 주지 않겠지.”

얀테의 말에 카이로가 대꾸했다.

“힘들었겠군. 편안해야 할 집에서 정작 지지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레이몬드가 눈을 내리깔았다.

“애정을 주는 것도 받아 본 사람이 잘하는 거지. 돌아가면 더 많이 사랑해 줄 거야. 날 많이 사랑해 줄 때까지.”

리체를 향한 그의 눈에 애틋함이 어렸다. 당장 그녀를 부둥켜 끌어안고 싶었다. 못 참겠다며 고개 숙인 리체의 머리에 키스를 퍼붓는 그를 본 얀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사건은 여파가 꽤 오래 갔다. 아버지는 내내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그게 아니라고 변명했고, 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리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하루 이틀 정도는 잠자코 지켜보았지만 싸움이 길어지고 이혼 얘기까지 나오자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행동력은 남달랐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학생. 손을 잡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다리를 다쳐서 부축해 주신 거였다고. 그래. 내가, 내가 조금 호감이 있기는 했어. 하지만 맹세코 다른 짓은 하지 않았어.”

무려 아버지의 상간녀를 만난 것이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다행히 이번 일은 오해인 것 같군.”

“리체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자.”

집으로 돌아온 리체는 한참 고민하더니 깔끔한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자 한 자 눌러쓰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뒤에서 편지 내용을 훑어보았다. 경직된 레이몬드를 본 얀테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고 썼는데 그래?”

“그게, 이걸 리체답다고 해야 하나…….”

레이몬드의 난감한 표정에 카이로와 얀테도 다가와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리체의 편지에는 아버지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항목별로 적혀 있었다. 그뿐이었다면 그냥 삭막한 편지겠거니 싶었을 것이다. 편지에는 부부의 줄어드는 대화 횟수와 더불어 함께 밥을 먹은 횟수가 통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곤 아침을 함께 먹는 부부의 이혼율이 낮다는 기사까지 스크랩을 해 붙이는데, 진지한 표정이나 조심스러운 손길 같은 것이 정성스럽기 짝이 없었다.

문제는 이 편지의 수신인이 부부 이혼 상공 회의소 같은 게 아니라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왜 리체가 편지를 못 쓰는지 알겠어.”

레이몬드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학교에서도 문학 수업을 가장 어려워했지 않나. 환경도 환경이지만 성향도 확실히……. 암담하군.”

얀테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목석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 하는 것보다 열 배는 어려울 터였다. 안 그래도 다른 네 알파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얀테는 일순 눈앞이 새카매졌다.

“그래도 양친이라 마음을 많이 쓰고 있다.”

카이로가 피식 웃었다. 레이몬드와 얀테가 다시 편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편지 말미에 적힌 문장의 뜻은 아버지 때문에 상처받지 말라는 리체의 마음이었다. 화가 났다가도 리체가 손짓만 하면 금세 풀리는 세 남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문제없겠군.”

카이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리체가 이 정도로 마음을 표현했으니 당연히 잘 해결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쓴 거니?”

어머니의 지친 얼굴에 서린 건 명백한 원망이었다. 너는 끼어들지 마. 그 뜻까지 못 알아들을 리체가 아니었다.

며칠 뒤, 리체의 편지는 가정 로봇 에이미가 쓰레기를 버리는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분리수거 상자 속에 있던 성적표를 발견했을 때보다 리체는 더 오랫동안 침묵했다. 분리수거장으로 에이미를 보낸 리체는 텅 빈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무표정한 리체를 둘러싼 세 남자들은 말이 없었다.

카이로가 너른 품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널찍하고 따뜻한 손으로 리체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레이몬드는 바깥 공기에 차갑게 질린 리체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리체. 내가 있잖아.”

세 남자는 공통적으로 바랐다. 리체에게 우리가 보일 수만 있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줄 텐데.

리체가 레이몬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리체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바람 소린가?”

세 남자는 짙은 한숨을 쉬었다.

리체는 독립적이었다. 타고난 성향의 영향도 컸지만 환경도 그녀를 독립적이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매일매일이 매우 바빴고, 딸이 원하는 것은 돈을 내주는 것 말고는 대부분 해 줄 수 없었다. 그렇게 지원해 준 것도 어릴 때뿐으로, 그녀가 커서는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학원이든 전문 교육원이든 보내 줄 수가 없었다. 돈을 벌어 오라고 내모는 대신 국제학교에 보내 준 것만으로도 큰 결심을 한 것이었고, 그건 리체도 알았다.

그게 지켜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다행히도 리체는 재능이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어 내는 성취는 점차 그녀를 공부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연구하는 걸 좋아하는 건가 했어.”

지켜보던 레이몬드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불쑥 말했다.

“성취 욕구가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똑똑한 애들은 다 그러니까, 리체는 좀 더 심한 편이라고만…….”

“…….”

“그게 제일 재밌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던 거였잖아. 그거 말고 다른 재밌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없는 게 아니다. 겪어 보지 못한 거지.”

카이로가 무겁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잘 살고 공부를 잘하는 국제학교라고 해도 공부만 하는 건 아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이번 주말에 다른 행성에서 놀고 왔다느니, 홀로그램 파티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왔다느니 하는 놀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데 리체는 묵묵히 책을 읽고 문제를 풀었다. 동적인 공간 사이에 홀로 정적을 유지하는 그녀가 세 남자의 눈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미소를 지을 때는 성적표가 나올 때였다. 그 미소도 오랜 시간 유지되지 않았고, 상위 클래스로 진급할수록 성적을 받을 때도 웃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무표정해졌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이 알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되었다.

“윽, 귀여운 리체가 그리워.”

레이몬드가 울상을 지었다.

“그라우지를 데리고 올 것을 그랬어. 그놈이라도 있었다면 리체에게 우리가 보이도록 할 수 있었을 텐데.”

얀테가 코웃음을 쳤다.

“자기만 보이게 했을 것이다. 점수 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할 테니.”

레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괴팍한 노괴라면…….”

감정도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런 기회를 박탈당한 리체가 커서라고 달라질까? 어린 시절 내내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으니, 그게 당연했을 텐데.

‘내 황후는 마음이란 게 없나 봐.’

시간이 지날수록 얀테의 얼굴은 먹구름 낀 하늘처럼 우중충해졌다.

시간이 더 지나 리체는 몸매에 굴곡이 생기고, 앳되었던 얼굴도 고양이처럼 뇌쇄적인 이목구비를 갖추었다. 말수가 적어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매력까지 풍기니 접근하는 사람이 없을 리가 없었다. 또래 학생이 수줍어하며 고백했을 때, 과거의 기억이라는 걸 알면서도 세 사람은 기분이 나빠졌다.

리체는 오는 사람 막는 타입이 아니었다. 사귀자고 하면 사귀었지만,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때든 자신의 일이 우선인 그녀에게 질려 남자 쪽에서 나가떨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너는 진심이라는 게 있냐?”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있는, 제법 잘생긴 얼굴의 소년이 짜증이 난 말투로 퍼부어 댔다.

“이럴 거면 왜 내 고백을 받아들인 거야?”

“…….”

“너 그렇게 살지 마라. 네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학교에 이상한 얘기 퍼뜨리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소년은 리체가 뭐라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찬바람을 날리며 걸어갔다. 이곳의 언어에도 제법 익숙해진 레이몬드가 주먹을 빠드득 쥐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공부에 방해 안 되게 하겠다며 곁에 있어 주기만 해 달라고 한 새끼가 뭐라는 거야?”

리체는 긴 검은 생머리를 어깨 너머로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하, 어이없네……. 만나 달라고 사정할 때는 언제고.”

“내 말이 그 말이야.”

리체에게 들리지도 않건만 레이몬드가 맞장구를 쳤다. 카이로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인 얼굴이었고, 얀테만이 양심에 찔려 저릿저릿한 가슴을 슬쩍 매만졌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리체는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만으로 조금 전의 불쾌한 일을 떨쳐 냈다. 숙녀에 가까워진 그녀는 정말로 그들이 알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러나 확실히 아직 어리고, 미성숙했다.

“이하진.”

몸을 돌린 그녀는 정면에 떡하니 서 있는 삼촌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너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주춤, 한 발 물러서는 리체의 손목을 잡아챈 남자는 주택가 뒤쪽 으슥한 골목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삼촌이야말로 뭐 하는 거예요. 좀, 놔요!”

리체가 손목을 비틀어 빼내었다.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본 남자의 얼굴은 도깨비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침을 튀기면서 소리쳤다.

“삼촌이 밥 사 준다고 할 때도 공부한다는 핑계로 계속 피하더니 남자나 만나고 있었어? 어린 게 벌써 발랑 까져서는! 바쁜 네 부모가 무슨 생각을 하겠냐! 어!”

리체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얼굴색이 새파래진 채였다. 레이몬드는 가슴을 쳤다.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저번에 리체 손 붙잡고 쓰다듬었던 건 기억이 안 나나 보지? 머저리야? 저런 놈들은 뇌 속에 자체 기억 삭제 기능이라도 박아 놓나?”

남자는 바람난 아내를 대하듯이 굴었다.

“네가 좀 컸다고 소홀히 했던 게 문제였다. 역시 내가 없으면 이상한 놈들이 들러붙는 거야. 하진이 넌 이 삼촌 없으면 안 돼. 내가 꼭 있어야 한다고.”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리체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 목소리가 저를 향했을 때와 엇비슷해서 얀테는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남자가 한 다음 말에 얀테는 대노하고 말았다.

“우리 같이 살자.”

남자가 기광을 번뜩이며 리체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경악한 리체가 한 걸음 물러섰다.

“뭐, 라고요?”

그녀를 더 꼭 붙든 남자가 두꺼운 입술을 움직이며 열변을 토했다.

“안 그래도 너희 엄마가 집이 좁다고 해서, 그때부터 계속 생각했다. 내 집으로 옮겨. 내가 삼촌 노릇 제대로 해 주마. 바쁜 네 부모 대신에 내가 네 부모가 되어 줄게.”

“무슨 소리예요? 삼촌, 아니, 아저씨가 왜요.”

리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놀란 얼굴에 대고 남자가 두 눈을 부릅떴다.

“사랑하니까.”

“……네?”

“하진이 널 사랑한다. 네가 클 때까지 기다리느라 선 자리도 모두 거절했어.”

남자가 얼굴을 붉혔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경악하는데, 그 혼자만 진지한 얼굴로 진심을 내보였다.

“욱!”

리체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헛구역질을 하는 그녀를 보고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 지금은 그렇겠지. 하지만 살 맞대고 살면 달라질 거다. 너희 부모도 처음부터 서로 좋았던 줄 아냐? 어쩌다 보니 널 낳고 바쁘게 살다 보니까 부부처럼 살게 된 거지. 우리도 다를 것 없다. 오히려 낫지.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해 줄 수 있어. 일단 같이 살아 보기라도 하자.”

젊고 잘생긴 남자를 본 늙은 사내는 애써 쓰고 있던 인내의 가면을 벗어던졌다. 드러난 것은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너저분한 수컷의 얼굴이었다. 당하는 자로서는 횡액일 수밖에 없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지저분한 낯.

리체는 더는 헛구역질을 할 여유도 없었다. 성큼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녀보다 두 배는 큰 사내의 힘을 뿌리치고 도망가기는 무진 힘이 들었다. 리체는 인간의 손에 잡혀 날개를 파닥거리는 불쌍한 나비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남자가 입술을 들이밀었다. 침에 부르튼 두꺼운 입술이 그녀의 작은 입술에 찍히려는 순간,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머리를 후려 맞은 남자의 몸이 옆으로 날아갔다. 얀테는 주먹을 뻗은 채로 굳었다. 참다못해 손이 나간 거였는데, 다른 때와 달리 손에 타격감이 제대로 왔다. 머리를 붙잡고 바닥에서 뒹구는 남자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뻣뻣한 고개를 돌리자 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얀테는 한 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내가 보이나?”

“그럼 안 보이겠어요?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그가 반사적으로 카이로와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리체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그녀에게는 카이로와 레이몬드까지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얀테와 마찬가지로 그 점을 눈치챈 레이몬드가 성질을 냈다.

“어째서 너만?”

망나니처럼 사나워지는 얼굴을 보며 얀테는 머리를 굴렸다. 예전, 눈을 가린 카이로의 손을 리체가 느꼈던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그들의 존재감이 리체에게 노출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종종 들 때가 있었는데 이렇게 형체가 제대로 드러난 적은 처음이다. 얀테는 레이몬드보다도 먼저 손을 뻗은 자신의 재빠름에 찬사를 보냈다.

“끄윽…… 넌 뭐야?”

머리를 맞은 충격이 가셨는지 몸을 일으키는 남자의 툭 튀어나온 배를 뒷발로 짓누르며, 얀테가 나른하게 웃었다.

“잘됐구나.”

“뭐? 이 어린놈의 자식이 어디를…… 억!”

그러곤 자연스럽게 다리를 휘둘렀다. 머리를 걷어차인 남자의 눈이 뒤로 휙 넘어갔다. 육중한 몸이 바닥에 쓰러지며, 기절한 남자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남자를 깔고 선 채 얀테가 리체를 바라보았다. 책가방 스트랩을 붙잡은 손등에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흘끗한 얀테는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이블린의 으슥한 동굴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에는 발정기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히트 사이클을 맞은 리체의 페로몬에 취해 발정난 개처럼 굴었고, 그다음에도 그에게 차가운 그녀를 붙들기 위해 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는 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름대로 경계심을 품고는 있지만 닳고 닳은 그의 입장에서는 순진한 토끼처럼 보였다.

그녀가 이렇게 말간 눈으로 그를 쳐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카이로나 레이몬드, 라스카, 심지어 그라우지를 향한 그녀의 따뜻한 시선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녀와 다른 네 알파들을 볼 때마다 속이 쓰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얀테는 입 안이 바싹 말라 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가고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을 보자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이 들었다. 얀테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안녕.”

고작 인사말 한 마디 하는 것뿐인데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누구세요?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거예요?”

가시를 바짝 세운 그녀가 너무나도 귀여웠다. 얀테는 재빨리 자신의 차림을 살폈다. 다행히도 이곳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는 평범했다. 다시 그녀를 응시했다. 말이 없는 그를 경계하는 리체의 눈이 까칠했다. 그러나 어른 여자인 리체의 유리알처럼 서늘한 눈빛을 알고 있는 얀테로서는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경멸하지 않는 것만 해도 행복했다. 뒤에서 카이로와 레이몬드가 뭐라고 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회다.

머릿속에 그 생각만 가득했다. 이곳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푸대접을 받고 혼자인 그녀를 볼 때마다 해 주고 싶었던 것들을,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이다.

막상 기회가 온 상황인데,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의 팔다리를 굳게 만들었다.

얀테는 긴장한 몸에서 힘을 빼며 그녀와 조심스럽게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까…….”

“…….”

“배, 고프지 않으냐.”

“배요?”

황당한 표정에 머쓱해진 얀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는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거냐고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리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냥 지나치다 봤다. 내가 너무 빨라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나 보구나.”

“예?”

그게 말이 되냐는 시선에 얀테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너, 허기져 보이는데.”

얀테는 카이로의 말투를 떠올리며 말했다. 평생 해 보지 않은 다정한 말투인지라 혓바닥에 혓바늘이 돋을 것 같았지만 얼굴만큼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여유롭고 오만했다.

좋은 첫인상을 만들고자 애를 쓰며 얀테가 리체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잘못한 것도 없고 말투도 부드러우니 첫 단추는 잘 끼운 셈일까. 기대감을 가졌던 얀테는 냉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는 리체의 모습에 내심 당황했다.

“사기꾼은 자기 얼굴에 사기꾼이라고 붙여 두지 않는다고 했어요. 사기꾼의 70퍼센트가 인상이 좋다고 하죠. 그렇다고 그쪽처럼 잘생긴 건 아니지만.”

리체의 말에 얀테는 눈을 끔벅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사기꾼이잖아요?”

“아니, 내가 어딜 봐서 사기꾼이야?”

무심코 제 말투대로 내뱉은 얀테가 주먹으로 입매를 문질렀다.

‘이런, 순서가 잘못됐나?’

하지만 내내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것을.

리체는 입으로는 영양 성분을 따져서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배달 음식을 굉장히 많이 시켜 먹었다. 이제 짜장면이 영양가 있는 음식 같은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게 된 얀테였다. 심지어 리체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가볍게 때우는 경우도 많았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단어장을 읽는 리체를 볼 때마다 늘 생각했던 것이 풍족한 식탁이었다.

황궁에서처럼 호화로운 음식은 아니더라도 좋은 것들을 먹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즐길 거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딱딱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카이로와 레이몬드가 쉽게 하는 그 일이 그에게는 무척 어려웠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맛있는 거, 예쁜 거, 비싼 것을 안겨 주는 것밖에.

“내가 뭐가 부족해서 널 데려다가 사기를 치겠느냐.”

얀테는 쯧, 혀를 찼다. 결국 제 스타일대로 말하고 말았다. 때려 치자. 자신이 뭐가 아쉬워서 굳이 카이로를 따라 한단 말인가. 그러지 않아도 지금 리체의 환심은 살 수 있다. 그러니까, 잘만 한다면. 얀테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숨길 수 없는 거만함과 부유함이 흐르는 그 얼굴에 리체의 경계 어린 눈빛이 의심스럽게 변했다.

“어디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거 아니에요?”

“아니다. 그건 네가 배고파 보이는 얼굴을 하니까.”

“내가요?”

의심이 한층 짙어졌다. 얀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체는 살펴보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훑더니 발밑에 깔린 남자를 흘끗했다. 마침 정신이 슬슬 돌아온 그가 고개를 들었다.

“끄응…….”

얀테가 아무렇지도 않게 뒷굽으로 남자의 이마를 후려쳤다.

퍽!

남자의 눈이 뒤로 돌아가고 눈꺼풀이 내려왔다. 다시금 기절한 남자의 뺨이 바닥에 뭉개졌다. 질질 흐르는 침에 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얀테도 리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밥 먹으러 가자.”

리체는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처음 본 사람과 그럴 수는 없어요.”

회의를 하는 것처럼 똑 부러진 말투가 그가 알고 있는 그녀와 닮아 있으면서도 달랐다. 딱딱한 건 어른인 리체보다 지금이 더한 것 같았다. 그게 일종의 방어 기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얀테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처음 본 게 아니라면?”

“……우리가 만난 적이 있어요?”

“응.”

“어디서요?”

“그건 대화하다 보면 알겠지. 그렇게 걱정이 되면 인파가 많은 곳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

“하지만 지금은 좀 바빠요.”

“뭐가 바쁜데?”

“학생이 뭘 하겠어요. 공부하러 가야 해요.”

얀테는 미소를 지었다. 오만한 얼굴에 맺힌 미소는 차가운 조각상에 맺힌 이슬 같았다. 태양처럼 밝은 머리카락에 타고난 귀족같이 하얀 얼굴을 하고 있는 이가 미소까지 지으니 얼굴이 자체 발광하는 것처럼 반짝였다. 리체마저 순간적으로 넋을 잃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부라면 어제도 실컷 했잖아. 가자. 예민한 거 보니 배가 비어서 그런 것 같으니 맛있는 것을 먹여 줄게.”

얀테는 내심 변태처럼 킬킬거렸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런 말을 하며 성기를 쑤셔 박곤 했었지. 그래서 리체는 그가 뭘 먹여 준다는 말만 하면 질색을 하고 노려봤었다.

“정말 딱히 배고프진 않은데요.”

다른 의미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어린 리체의 순수한 얼굴을 보는데 가슴이 저릿했다. 어릴 때에도 접해 본 적 없는 순수가 가슴으로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얀테는 리체의 앳된 티가 나는 말간 얼굴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저기요?”

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꼬르륵 소리가 났다. 무시하기엔 우렁찬 소리였다. 멈칫한 리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신을 차린 얀테는 볼우물이 팰 만큼 웃었다.

“공부하려면 잘 챙겨 먹어야 하겠지.”

입술을 깨무는 리체를 깨물어 주고 싶었다. 그녀의 무의식에 들어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 꿰었던 첫 단추를 이곳에서 만큼은 제대로 끼워야겠다.

얀테의 다짐은 밥이 나오기도 전에 출렁거렸다.

“왜 멋대로 주문을 하세요?”

서버를 보낸 얀테는 당황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리체는 부루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마음의 거리를 드러내듯 의자 등받이에 등을 딱 댄 꼿꼿한 자세가 얀테의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점원이 제일 인기 있는 음식이라고 하지 않았냐.”

“그래도 내가 싫어하는 음식일 수도 있잖아요.”

얀테는 황궁에 있을 때를 떠올렸다. 식사를 할 때마다 얀테는 그가 좋아하는, 또 그녀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음식을 시켰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의견을 들었던 기억?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누군가의 의향이나 취향을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황자로 자라났고 형제들을 제치며 황제가 된 그가 의견을 내는데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무엇 하러 물어보기까지 한단 말인가. 얀테가 뭘 주든 가문의 보물로 삼을 텐데.

번뜩이는 깨달음에 얀테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슬쩍 보자 피식 웃는 카이로와 대놓고 낄낄거리는 레이몬드가 보였다.

“큭큭, 그럴 줄 알았다. 폐하는 리체와 안 맞는다니까.”

“…….”

“어떻게 만났어도 지금처럼 사이가 안 좋아질걸.”

얀테는 단언하는 레이몬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저기요?”

이곳에서까지 전과 같은 취급을 당할 수는 없다. 결심한 얀테는 식탁 구석의 알림 벨을 울려 점원을 불렀다. 리체를 쳐다보자 그녀는 그가 주문한 것을 취소하고 다른 것을 주문했다. 그제야 리체의 표정이 풀렸다.

‘내가 시킨 메뉴는 먹기 싫었구나.’

얀테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게 먹고 싶었어?”

“네.”

순순히 답하는 그녀를 보자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빠르게 뱉었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네 의견부터 신경 쓰지.”

묘한 마음이 들었다. 사과의 말은 술술 나왔고, 생각보다 쉬웠다. 고작.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왜요? 이제는 좀 진심으로 사과할 마음이 들었어요?’

사과를 한다고 황제의 위엄이 상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나.

갑자기 침울해진 얀테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뭘 그것 가지고 그렇게 심각해 해요. 다시 시키면 된 거지.”

고개를 들자 리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쩍 쳐다보는 눈에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게 보였다. 갑자기 우스워진 얀테의 잇새로 웃음이 픽픽 샜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리체를 바라보았다. 앳된 그녀가 사랑스럽고 애틋해서 가슴이 연신 욱신거렸다. 당장 현실로 돌아가면 냉랭한 그녀가 차갑게 쳐다볼 텐데, 그 전까지 이 얼굴을 잔뜩 보고 싶었다.

물을 먹던 리체가 쿨럭, 가볍게 사레에 들렸다. 얀테가 등을 쳐 주기도 전에 기침을 그친 리체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만 쳐다보세요.”

“어?”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예요? 꿈도 꾸지 마세요. 미성년자 추행죄는 형벌이 꽤 세거든요.”

하얀 얼굴로 으름장을 놓는데도 그저 귀여웠다. 잘 생각했다. 당장 경찰을 불러. 리체의 곁에 붙어 떠들어 대는 레이몬드가 거슬렸지만 싹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의심이 많은데 여기까진 날 어떻게 따라왔느냐?”

“……음.”

리체가 머쓱해했다. 뺨을 긁적이는 손가락을 낚아채서 사탕처럼 빨아 대고 싶었다. 얀테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쪽 말대로 배가 고팠나 보죠? 샌드위치 하나 먹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

“아, 또. 왜 자꾸 그렇게 쳐다봐요. 정말 나한테 반했어요? 첫눈에 반했다, 뭐 그런 거예요?”

“익숙한 일인가 봐.”

“익숙하진 않지만, 처음은 아니에요. 그래도 그쪽처럼 나이 많은 사람과는…….”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리체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얀테는 그녀가 누굴 생각했는지 금방 눈치챘다. 그러나 그 남자의 앞에 있을 때와 달리 지금의 리체는 표정이 비교적 풍부했다. 어떤 곳보다 편해야 할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오히려 학교에 있을 때보다 더 딱딱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알고 있는지라 새삼스럽게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그래. 반했다.”

“……예?”

“왜 그렇게 놀라느냐? 물어봐 놓고는.”

“…….”

“걱정 마라. 미성년자 추행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데 그 말을 누가 믿어요?”

“그러는 너는.”

“나 뭐요?”

“아까 날 뚫어져라 쳐다봤지 않아.”

입을 다무는 리체를 향해 얀테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꼰 그에게선 몸에 밴 오만함이 새어 나왔다.

“그건 그래요. 엄청 잘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툭 뱉어진 말에 물을 마시려던 얀테의 눈이 커졌다. 무심코 했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홱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포크를 들어 서버가 가져온 음식을 집으며 리체가 무심하게 말했다.

“이제까지 다른 사람의 얼굴에 혹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에요.”

잘생겼어요. 이런 적 처음이에요. 설레면서 할 법한 말들이었지만 리체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덤덤했다. 그럼에도 얀테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잘생겼다는 말. 셀 수도 없이 많이 들었던 말이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은 숱한 찬사와 비교할 수 없이 달콤했다.

밥을 다 먹은 리체가 말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집에 가려고?”

“네.”

얀테는 어느새 다시 딱딱해진 리체를 바라보았다.

“아직 집에 들어가기엔 이른 시간이지 않으냐?”

“무슨 소리예요? 벌써 저녁때가 지났는데.”

얀테는 대꾸하지 않고 일어났다. 멀뚱히 쳐다보는 리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역시 리체는 리체여서, 그의 손을 잡기는커녕 이상한 물건이라도 보듯 쳐다보았다.

“가자.”

“어디를요?”

“기분 전환하러.”

“네?”

얀테는 미소를 지었다. 그답게 오만하면서도 자신만만했다.

거대한 백화점은 하얀색 조명으로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면서 리체가 중얼거렸다.

“기분 전환이 쇼핑이에요?”

“응. 왜? 실망했어?”

“실망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재밌거든. 괜찮은 걸 잔뜩 사면.”

리체는 그의 미소를 빤히 바라보다 홱 고개를 돌렸다.

“저기로 가 보지.”

얀테가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리체는 얼떨결에 걸음을 뗐다가 딱 붙은 손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네요.”

“뭐가?”

“내가 왜 그쪽을 따라온 거죠?”

“그게 왜 이상해?”

리체가 걸음을 멈추고 얀테를 바라보았다. 얀테도 자리에서 멈추었다. 잠시 시선이 오갔다. 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얀테는 리체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고 말을 아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네요. 아무리 외국인이 많다지만 당신처럼 생긴 외국인이 갑자기 나타나지를 않나, 밥을 먹자고 하지를 않나. 여기까지 따라온 나도 이상하고요. 평소엔 수상한 사람이라면 근처에 가지도 않는데 같이 밥까지 먹고…….”

이곳이 무의식이라서 그런 걸까? 그런 거라면 오히려 얀테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꺼려 하는 리체라면 무의식에서 대면했을 때 더 강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여야 하는 게 맞지 않은가? 처음에는 첫 단추를 제대로 낄 수 있다고 좋아했지만 생각해 보면 기이했다.

게다가 의심을 하면서도 그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지 않았어도 그녀가 정말 싫은 걸 억지로 하는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녀에게 숱하게 거부당해 온 그가 가장 잘 알았다.

‘날 그렇게까지 싫어한 건 아니었던 건가?’

리체를 바라보는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가야겠어요.”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데 발이 먼저 움직였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잘못으로 그녀를 놓칠 수 없다.

“저기요?”

손목이 붙들린 리체가 그를 돌아보았다. 얀테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가지 마.”

“…….”

“가지 마라, 하진.”

애절한 목소리. 흔들리는 파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뜨겁고 녹진했다. 눈빛에 담긴 간절한 감정이 얼굴에 어린 태생적인 오만함을 압도했다.

“어…….”

“…….”

“그, 그래요.”

리체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하진은 뭐에 홀린 것 같았다. 모든 게 이상했다. 이질감의 정체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에게서 기인했다. 옆을 바라보자 금실로 짜 낸 듯 아름다운 금발을 한 외국인 남자가 맞춘 것처럼 눈을 마주쳐 왔다. 강렬하면서도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시선을 붙들었다. 자칫 지나쳐 강하게 느껴질 수 있는 눈빛인데 그 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드러워 보여 거부감이 들려다가도 누그러졌다. 이상하지. 처음 만났을 때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는데 말이다.

‘배우라도 되는 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잘생긴 남자였다. 미용실에서 한참을 매만져도 안 나올 듯한 세련된 머리 스타일. 도자기처럼 반질반질한 깨끗한 피부, 모델처럼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 긴 목과 늘씬하면서도 탄탄한 몸까지. 처음 보았을 때는 당시의 상황도 잊고 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외모였다. 끈질겨서 더 수상한 권유에 휘둘리는 게 이 외모 때문일까?

‘내가 이렇게 얼굴에 약한 사람이었나?’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오늘은 여느 때와 같이 똑같은 하루였다. 물론 평소보다 좀 더 재수가 없기는 했다. 삼촌. 아니, 혈육도 아닌데 그런 친밀한 호칭으로 부르고 싶지도 않다. 규상태. 역겨운 인간. 언제고 사고를 칠 것처럼 불안한 눈빛이 꺼림칙해 거리를 두었는데 오늘 그렇게 마주칠 게 뭐란 말인가. 꼴을 보아하니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함께한 징그러운 그림자였다. 만약 그대로 돌아갔다면 잠들기 전까지 끔찍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다행인 걸까?’

위기 상황에서 영웅처럼 나타난 남자는 돈이 많았다.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옷들을 잔뜩 사면서 하진은 내내 기분이 얼떨떨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유치한 말이지만 동화 속 신데렐라가 된 듯했다. 12시가 되면 이 꿈도 끝날 거라는 걸 아는 신데렐라.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순간의 꿈이라면 잠깐 정도는 즐겨도 되는 걸까. 이상하게 남자를 경계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또 다른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지만 하진은 평소와 달리 몸 안의 가시를 날카롭게 세우기 힘들었다. 화려하게 진열된 상품들을 지나치다가 문득 시선이 멈추었다.

“저기 나 저거.”

“…….”

“갖고 싶어요.”

처음으로 손을 뻗어 갖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점점 매출이 줄어드는 가게에 매달리느라 바쁜 부모님에게는 학교의 학비를 부탁하는 것만 해도 힘든 실정인지라 비싼 옷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었다. 필요 없는 척을 했지만, 관심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 친구들이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의 가방이었다. 하진의 눈에 들어온 건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곡선으로 떨어져 부드러운 형태의 가방이 아니라 벽돌처럼 투박한 가방이었다.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촌스러운 걸?”

파란 눈에 스친 멸시의 기색에 하진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본다. 그리고 저렇게 오만하고 고압적인 남자도 처음 본다.

그녀는 강압적인 인간이 싫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뭔가를 강제하면 있던 정도 뚝 떨어졌다. 그런 반응이 규상태로 인한 트라우마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지만, 싫어하는 마음의 작용까지 어찌하는 건 아무리 그녀라도 힘든 일이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가 역력했던 남자가 그녀를 보았다. 아차 하는 표정을 본 하진은 불쾌했던 와중에도 의문이 들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왜 저렇게 자신의 눈치를 보는 걸까? 관상을 잘 보는 편은 아니지만 몇 마디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눈앞의 남자가 누군가의 명령을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통제하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메리트가 없는 나에게 왜…….

‘아니면 내 얼굴이 취향인가?’

합리적인 의문에 빠져들었던 하진은 갑자기 손에 느껴지는 온기에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손을 잡은 얀테가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다시 보니 봐 줄 만은 하네.”

“미성년자 추행, 안 한다면서요?”

“아, 기분 나빴느냐.”

얀테가 퍼뜩 손을 뗐다.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 왔을 때와 달리 재빠른 물러섬이었다. 사실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거부감이 없어서 더 놀랐다.

“뭐, 됐어요. 아까도 잡았잖아요.”

당황한 하진은 물건을 둘러보는 척했다. 신경은 등 뒤의 얀테에게로 뻗어 나갔다.

그가 고압적인 모습을 보였던 건 그녀가 선택한 가방을 폄하했던 그때 한 번뿐으로, 이후 얀테는 그녀가 뭘 하든 아무런 싫은 내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내뱉는 말은 정반대였다.

“하, 널 대하는 게 능구렁이 귀족 100명을 상대하는 것보다 어렵군.”

귀족? 요즘 시대에 귀족이 어디 있다고? 배우가 아니라 정신병자인가? 그러나 뭐 때문인지, 하진은 그가 선택한 단어보다 그의 언행 불일치의 이유가 더 궁금했다.

“근데 왜 그래요?”

“뭐가?”

“왜 그렇게 좋아해요? 내 기분 맞춰 주고, 이렇게 돈도 많이 쓰는데 그쪽은 뭐가 좋다고.”

날 좋아해서 그렇다기에는, 만난 시간이 너무 짧지 않나?

얀테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 간단한 동작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근사했다.

“네게 사과하고, 네 기분을 맞춰 주고, 네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주고 하는 게.”

“…….”

“재밌어서.”

“이게 재밌어요?”

“그래. 이상한가?”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얀테는 그녀로서는 해석하지 못할 묘한 미소를 짓고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러더니 큭, 웃었다. 왜 웃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대꾸했다.

“네게 손을 댈 때마다 난리를 치는군.”

“무슨 소리예요?”

얀테는 대답은 않고 웃기만 했다. 미묘한 웃음이 왠지 저를 비껴 난 것 같아 슬쩍 옆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정신병자인가?

“왜 재밌냐고 물었느냐?”

하진은 주변에서 신경을 끄고 얀테를 응시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에 하진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정말 어디서 본 사이인가? 당황해서 자리를 피하고 싶어지는데, 그럴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두 발에 힘을 주었다.

현실주의자인 하진은 왕자가 나타나 불쌍한 소녀를 구원한다는 동화 속 얘기를 믿지 않았다. 물론 눈앞의 남자는 잘생기고 돈이 많을 뿐 왕자가 아니고 자신 역시 불쌍한 소녀가 아니지만, 어쩐지 그런 구도가 되어 가고 있지 않나?

남들이 들으면 도끼병이라고 할 텐데…….

생각을 멈춘 하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있는 것 자체가 마음이 편하다.”

남자의 얼굴이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이곳은 내가 살던 곳이 아니고, 내가 무엇을 하든 아무도 모를 테니. 이게 생각보다 자유로운 느낌이구나.”

“……저기요?”

“그동안 왜 그렇게 고집을 피웠는지 모르겠어.”

남자는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그러나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 왜인지 얀테의 눈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기묘한 기시감에 집중하려는 그녀에게 그가 물었다.

“오늘 재밌었나?”

하진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것만 사면 된다고, 시간을 써서 쇼핑하는 것 따위 불필요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정작 부모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쇼핑은 재미가 있었다. 그럴 줄 몰랐는데 즐거웠다. 제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가슴의 답답한 돌덩이가 조금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재밌었어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별거 아닌 말이었는데 남자의 눈이 흔들렸다.

“왜요? 내가 뭐 잘못 말했어요?”

“아니. 네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게 처음이라.”

얀테의 목소리가 낮게 잦아들었다. 하진은 눈을 비볐다. 그의 모습이 흐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보니 멀쩡하다.

이상하네?

“이렇게만 하면 됐던 것을…….”

“…….”

“기대가 되는구나. 탑주가 무의식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했으니.”

하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역시 이상해. 정말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인가? 밀어내려는 찰나, 부드러운 것이 이마에 닿았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뻣뻣하게 굳어진 리체의 커다랗게 뜨인 눈을 들여다보며 얀테가 우아하게 웃었다.

“다음은 네가 더 크면.”

“…….”

“나중에 보자, 하진.”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그제야 그가 정신병자가 아니라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신한 하진은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내 이름을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부르는 건지, 무슨 의도로 내 앞에 나타났는지, 혹시 예전부터 가끔 들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인지……. 질문은 많은데 물어볼 대상이 없었다.

“근데 나중에 보자고?”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의문스럽게 흩어졌다.

* * *

시간이 지나자 얀테만이 아니라 카이로와 레이몬드도 리체 앞에서 실체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추측하기로, 오랜 시간 리체의 무의식에 있었던 탓에 존재감을 얻은 게 아닐까 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리체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실체화할 수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

그러다 보니 알파의 습성상 당연한 수순으로 리체의 시간을 독점하고 싶어 했는데, 세 사람 모두 어린 그녀 앞에서는 싸우지 말자는 것에 동의했다. 무의식의 공간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세 남자를 긴장시킨 것이었다.

한 번에 한 명씩.

극적으로 협의한 세 사람은 나름대로 리체와의 데이트를 즐겼다. 리체가 혼자 있을 때마다, 비난을 받을 때마다, 질투하는 동료들로 곤경에 빠질 때마다 세 사람은 리체의 곁을 지켰다.

이곳이 현실인 줄 아는 무의식의 리체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미 무의식의 공간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낸 세 사람은 그녀의 무의식을 다루는 방법에 익숙해졌다.

레이몬드는 과제에 파묻혀 학교에서만 지내는 리체를 납치해 직접 설계한 휴양지에서 놀았고, 카이로는 소장에게 괴롭힘 아닌 괴롭힘을 당하는 리체의 재벌가 출신 상사 노릇을 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리체가 질색하는 소장이 그라우지와 놀랄 만큼 닮았다는 것인데, 언행뿐만이 아니라 생김새 역시 엇비슷한 데가 있었다. 왜 리체가 그라우지의 변태 행각에 다른 때보다도 진저리를 치는지 알 것 같은 대목이었다.

“탑주에겐 언질하지 말기로 하지.”

얀테가 근엄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공유하기로 협의했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알면 탑주가 충격받을 거야.”

“생각해 주는 척하기는.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그라우지가 계속 소장처럼 굴어서 리체의 미움을 사기를 바라는 거잖아.”

레이몬드가 그의 비열한 계략을 꼬집었다. 얀테는 오만하게 그를 응시하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알면 입 다물고 있거라.”

레이몬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라우지에게 좋을 일은 그도 딱히 하고 싶지 않았다.

카이로는 리체에게 접근하는 고혁진을 퇴치하기까지 했는데, 레이몬드와 얀테는 잘했다며 칭찬하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혁진 씨를 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상해요.”

“무엇이?”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고혁진을 찍어 눌러 쫓아낸 카이로가 리체의 손에 손깍지를 꼈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카이로는 손만 잡아도 숨 쉬기가 힘들어요.”

“……왜?”

“심장이 너무 뛰어서요.”

얀테와 레이몬드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수차례 그녀 앞에 나타났지만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던 레이몬드는 충격받아 눈동자를 떨었고, 얀테는 콧김을 뿜으며 씨근덕거렸다.

“처음 만난 건 난데 어째서 저놈 자식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거냐?”

허탈해하는 레이몬드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졌다. 경련하는 붉은색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무겁게 감겼다. 그는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눈매가 뾰족하게 치켜 올라가고 일자로 다물렸던 그의 입술이 미약하게 호선을 그렸다.

“씨발, 그래. 리체가 누굴 먼저 사랑했든 괜찮아. 리체를 가장 많이 사랑하는 놈은 나니까. 내가 가장 많이 사랑해 줄 거야.”

“그런 것치고는 호전적인 얼굴이다만.”

“어. 카이로에게 지기 싫으니까. 그리고 리체는 나도 좋아해. 내가 할 일은 그녀가 날 더 좋아하게 만드는 것뿐이야.”

“열부 납셨구나.”

빈정거린 얀테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고개는 그대로 둔 채 눈만 굴려 그녀를 힐끗했다. 카이로에게 한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활짝 웃는 얼굴만큼은 썩 괜찮았다.

“그래도 이제 잘 웃기는 하네.”

어릴 때부터 그녀 곁에서 맴돌았던 탓인지, 리체는 그들의 앞에서 만큼은 거리끼는 게 없었다. 처음엔 셋을 경계하고 무시하기도 했으나 무의식의 영역이라 그런지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였다. 가족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겐 여전히 사무적인데 그들에게는 깔깔 웃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게 그 증거였다. 현실 세계의 무심한 리체를 알고 있는 세 남자는 그녀가 그럴 때마다 가슴이 북받쳤다.

리체와 세 남자는 더없이 달콤하고 충만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무의식의 공간에서 떠나야 하는 날이 왔다.

“……떠난다고요?”

하진은 카이로와 레이몬드, 얀테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더운 여름에 연구실에서 땀 흘리지 말라고 끌어당기는 그들의 손길에 못 이기는 척 끌려 나왔더니 하는 말이 저것이다. 따분해지거나 피곤할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나타나는 그들에게 익숙해진 지가 10년이 넘었다. 백일몽 같은 거라 생각했던 만남이 길게 이어져서, 무심코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걸까?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수상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갑자기 관계가 어그러져도 괜찮다고 자신만만해 했었는데.

‘이게 뭐야. 어째서.’

이렇게 충격적이라니.

“오늘이 끝이라고요?”

“끝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이걸 뭐라고 얘기해야 해.”

레이몬드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제 머리를 휘저었다.

수영모 바깥으로 삐져나온 리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준 카이로가 귓가에 키스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하진은 파르르 떨리는 눈을 들었다. 수영복 한 장만 입고 있는 카이로의 단단한 가슴이 보였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싼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익숙한 따스함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떠난다. 마음에 한파가 몰아닥쳤다. 돌연 무섬증이 치밀었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다지도 이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머릿속이 마비될 정도로…….

“안 가면 안 돼요?”

하진은 찰랑거리는 수영장 물에 시선을 못 박았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운 적 없었건만 지금은 안 된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하진은 한숨을 쉬었다. 눈이 뜨거워졌다.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하진은 손가락으로 누골을 꾹꾹 눌렀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눈물을 흘리는 건 딱 질색이다.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얀테가 하진의 손목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하아…….”

뜨거운 숨이 살갗을 간질였다. 그가 눈을 들었다. 이글거리는 파란색 눈동자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았다.

“내가 가는 게 싫은 거냐? 눈물이 나올 만큼?”

하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 반응에 좋아하는 얀테를 노려보자 그가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이렇게 날 원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어 그런다.”

뜨거운 숨이 떨리고 있어서, 하진은 지금 그런 말을 할 때냐고 화를 내려다가 말았다. 레이몬드가 얀테를 밀어냈다.

“떨어져, 착각하지 말고. 우리가 가는 게 싫은 거야. 폐하가 아니라.”

“입 다물어. 거기 나도 포함되어 있잖느냐.”

얀테가 으르렁거렸다. 그리곤 동의를 구하듯 그녀를 흘끗했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얀테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떠난다는 소리에 심장이 조여들었던 하진은 그 환한 얼굴에 울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로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상심 마라.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두툼한 엄지가 눈가를 쓸었다. 굳은살이 잔뜩 박여 딱딱한 손가락인데 어찌나 조심스럽게 만지는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다정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손길이었다.

아쉬워.

가지 마.

마음이 아파.

가지 마…….

눈을 내리깐 리체가 잠겨서 다소 허스키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무엇이든지, 그대가 바라는 거라면.”

“당연한 소리를 해.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

“하, 별이라도 따다 주랴?”

하진은 작게 웃었다.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마지막이라면…… 오늘은 쉬지 않고 사랑해 줘요.”

우뚝, 손가락이 멈추었다.

하진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세 남자가 보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매일 투닥거리던 이들이 똑같은 표정을 짓자 하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솔직하게 말할 때마다 세 사람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듯 굴었다. 끝끝내 설명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의문은 늘 있었으나 특히 이럴 때면 궁금증이 몇 배로 증폭되었다. 어째서 그들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전혀 늙지 않고 첫 만남 때와 똑같은지, 자신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거, 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야?”

레이몬드의 목울대가 도드라졌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그걸 보니 조금 부끄러워진 하진은 어정쩡한 얼굴에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장거리 연애를 하는 커플들은 만나는 횟수 대비 성관계 비율이 80퍼센트에 육박한대요. 애틋함과 아쉬움을 표출하는 데 육체적인 교합만 한 것이 없다는 뜻이겠죠.”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들의 시선이 알쏭달쏭해졌다. 하진은 하핫 웃으며 앞의 말을 단순하게 정리했다.

“여기 위에 호텔 있잖아요.”

더는 헷갈릴 수 없게 하는 말이었다. 세 남자의 브레이크는 해제가 되다 못해 산산이 부서졌다.

* * *

블라인드가 내려오다 만 커다란 통창은 습기로 뿌옇게 변해 있었다. 하얀 시트가 깔린 킹사이즈 침대에는 네 사람이 엉켜 있었다. 그들의 헐떡거리는 신음 소리와 격렬한 행위는 그랜드 킹사이즈도 부족해 보였다.

“이리 올라와.”

멜란지 색깔의 삼각 등받이 쿠션에 등을 기댄 채 카이로가 하진의 동그란 골반을 붙잡아 끌어 올렸다. 엉덩이만 솟구친 채 엎드린 하진의 등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꿈틀거렸다. 그녀의 툭 튀어나온 무릎을 잡고 옆으로 벌린 카이로가 두 손으로 통통한 엉덩이 역시 좌우로 벌렸다. 촉촉하게 젖은 분홍빛 속살이 눈앞에 펼쳐지자 빨간 눈이 흥분으로 검붉게 변했다. 넓적한 혀가 내밀어졌다. 부드러운 살점이 눅진하게 짓눌렸다.

“흐읏!”

처음 겪는 감각에 질이 수축하고 아랫배에 근육이 잡혔다. 몸을 바르르 떤 하진이 카이로의 딱딱한 복근에 가슴을 뭉개며 신음했다. 이 쾌감은 신경 돌기가 자극당하며 도파민이 과다 분비된 탓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알고 있지만, 아는 것과 냉정을 되찾는 것은 별개였다.

‘어, 째서? 나 무성애자였던 게 아니었나?’

학생 때부터 어느 동급생에게도 호감이 생기지 않는 스스로에게 무성애자라는 자체 판단을 한 적이 있었는데, 오판인 게 분명했다.

카이로의 혀가 축축한 살점을 꾹 누르며 질구를 간질였다. 굳은살로 딱딱한 손가락은 음핵을 은근하게 문질렀다. 거친 손가락이 주는 쾌감에 아랫배가 찌릿거렸다. 하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 겪는 감각에 혼란스러운 그녀의 턱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턱을 붙잡은 레이몬드가 흥분에 찬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그 자신의 허리띠를 푸르고 가운을 열어젖혔다. 여기저기 하얗게 변한 흉터가 아로새겨진 탄탄한 근육질 몸이 드러났다. 떡 갈라진 아랫배 아래로 검붉고 딱딱한 성기가 우뚝 곧추섰다. 평생 한 번 보지도 못했던 성기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 상황도 당황스러운데 레이몬드의 다음 부탁은 더욱 난처했다.

“쳐다보고 있어 줘.”

하진은 꺼떡거리는 제 것을 붙잡고 자위를 시작하는 레이몬드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녹녹한 시선에 레이몬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 그렇게, 시선 떼지 마.”

시선만으로도 흥분한 레이몬드를 바라보고 있는 하진의 손을 얀테가 자신의 성기에 가져다 댔다.

“만져 보거라.”

손바닥에 닿는 뜨겁고 물컹한 감각에 하진이 깜짝 놀라 주먹을 쥐었다. 얀테가 미묘하게 웃으면서 오므라드는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펼쳤다. 그러곤 성기 기둥에 손바닥을 붙이고 손가락으로 움켜쥐게 만들었다.

그건 다른 데서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촉감이었다. 마치 단단한 심이 있는 뭔가를 비단으로 감싼 것 같았다. 무척 부드러웠고, 말캉한 듯하면서도 딱딱했다. 정제된 불기둥이 이런 느낌일까? 닿는 곳마다 열기가 솟구쳤고, 뜨거움이 살갗 아래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움직이는 거다.”

얀테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위아래로 움직이게 했다. 꿈틀거리는 핏줄이 피부에 느껴지자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하아.”

나른한 한숨이 귓가에 간지럽게 달라붙었다.

“폐하 보지 말고 나 봐.”

레이몬드가 그녀의 턱을 붙잡아 다시 제게로 돌렸다. 하진은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는 붉은 눈에 사로잡혔다.

“아!”

카이로가 입을 크게 벌려 그녀의 구멍에 입술을 흡착하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하진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떨구었다가 다시 레이몬드에게 턱을 붙잡혀 고개가 들렸다.

“흐응, 응!”

그녀의 빨개진 얼굴에 한층 흥분한 레이몬드의 광대가 불룩해졌다. 꽉 문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하진은 아래를 빨리며 레이몬드가 자위하는 것을 보고, 손으로는 얀테의 것을 만져 주었다. 얼굴을 옆으로 틀 때마다 아직 완전히 서지 않았음에도 거대한 카이로의 성기가 뺨을 툭툭 때렸다. 세 개나 되는 성기에 둘러싸인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기는 했지만 막상 방으로 올라오니 미숙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세 남자는 그녀의 어설픈 손짓에도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설퍼. 어설픈데, 그래서 더 흥분 돼. 이런 리체는 처음 봐.”

‘리체?’

그동안 간간히 튀어나오던 그 이름이 또 나왔다. 하진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표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고.”

레이몬드가 씨익 웃었다. 빳빳하게 선 성기를 훑으며 미소 짓는 얼굴은 더럽게도 야했다. 퇴폐적인 분위기를 온몸에 두른 레이몬드는 침대 위에서 그 마력이 훨씬 강해지는 타입이었다.

하진이 빤히 쳐다보자 레이몬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그라졌다. 흥분한 두 눈이 무척 아름다웠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 아래, 꺼떡이는 성기는 끝에 투명한 물을 맺고 있었다. 만지지도 않고 보기만 할 뿐인데, 가슴이 야릇하게 뛰었다.

“아, 하진…….”

신음처럼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녀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빨아 줄까요?”

레이몬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진은 밭은 웃음을 터뜨렸다. 세 남자 중에서 제일 어린애 같은 레이몬드는 인상을 찌푸릴 때 생기는 미간의 주름이나 몸의 흉터가 충분히 사납게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여웠다. 지금도 빨아 달라고는 하고 싶은데 그렇게 시키기는 싫어하는 갈등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하진은 입술을 벌려 보였다. 혀를 내밀기까지 하자 결국 욕망에 승복한 레이몬드가 그녀의 입술에 하체를 밀어붙였다.

“빨아 줘.”

눅진한 열기로 가득한 눈을 하고 레이몬드가 애원했다. 하진은 얀테의 성기를 꽉 붙잡은 채 레이몬드를 올려다보고, 그대로 입을 벌렸다. 레이몬드의 두툼한 귀두가 입으로 들어왔다. 그건 정말로, 만지는 것 이상으로 기이한 감촉이었다. 귀두 끝에 맺힌 투명한 액체는 짭짤했고, 둥그런 귀두는 뜨겁고 말랑말랑했다. 살갗은 아무런 맛이 없을 텐데 촉감과 체온이 맛으로 느껴졌다. 야한 맛이었다.

남자의 성기는 이런 느낌이구나.

하진이 탐구하는 자세로 성기를 혀 위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그녀의 입은 크지 않았고, 그의 것은 컸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사탕을 빠는 것처럼은 할 수 있었다. 짐짓 장난스러운 혀 놀림에 레이몬드는 안달이 났다. 그녀의 안에 하체를 처박고 싶으면서도 목구멍이 막힐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끙끙거리며 참는 이마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그녀의 손놀림에 만족하지 못해 직접 손을 잡아 용두질을 치게 하던 얀테가 레이몬드의 볼썽사나운 얼굴을 보고 비웃었다. 그러더니 하진이 손에 힘을 꽉 주자 “헉” 하고 경악성을 토했다.

“……부러뜨릴 셈이냐.”

좆이 욱신거린다. 나에 대한 반감을 아직 숨기고 있었냐며, 또 하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얀테가 투덜거렸다. 근엄한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저속한 단어 선택이었다.

한편 그녀의 아래가 완전히 젖어서 풀릴 때까지 신중히 혀를 놀리던 카이로가 얼굴을 뗐다. 잘생긴 입술 주변이 말간 액체로 젖어 있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 카이로의 얼굴은 침대 위임에도 불구하고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눈만큼은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가 하진의 엉덩이를 가뿐히 들어서 아래에 깔린 몸을 빼내고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하도 빨려서 푹 젖은 살점이 벌름거리며 움직였다. 엄지로 엉덩이를 옆으로 밀어젖히고 그 사이를 내려다보는 카이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모습은 흥분한 레이몬드의 아이 같은 표정과 비슷한 데가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알지 못했다.

“처음에 집착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는데 말이지…….”

약간의 결벽 성향이 있는 카이로지만 알파인 만큼 오메가의 정절을 따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몇 귀족들은 오메가의 처녀 유무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주로 오메가에게서 후계를 보는 전통적인 알파 가문들이었다. 카이로는 그들이 유난을 떤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지만 남자의 손길을 알지 못하는 하진의 순결한 구멍을 보자 머리에 피가 쏠리며 하체가 절로 뻐근해졌다.

“그대에 관해서만은 무엇이든 자신할 수가 없어.”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아래를 밀고 들어가는 하체는 흉포했다. 레이몬드의 성기를 입에 문 채로 하진이 눈을 크게 떴다. 아래가 벌어지는 느낌이 나더니 뭔가 거대한 게 밀고 들어왔다. 속이 얹히는 것처럼 답답해지며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헉, 헉 짤막한 숨을 뱉었다. 물고 있던 성기가 혀에 밀려 밖으로 내밀어졌다.

레이몬드는 억지로 밀어 넣고 싶은 마음을 참고, 안타까운 얼굴로 자신의 성기를 붙잡았다. 카이로의 것을 버거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형형한 눈빛으로 보았다.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흣!”

외마디 묵직한 탄성과 함께 귀두 끝에서 진득한 정액이 터져 나와 하진의 어깨와 가슴을 적셨다. 헤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도 몇 방울이 튀었다. 레이몬드는 찡그리듯이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묻은 희뿌연 정액을 닦아 주었다. 아니, 정액을 닦아 낸 손가락을 그녀의 빨간 혓바닥에 문질렀다. 비릿하면서도 쓴맛이 감돌았다. 그러나 하진은 그 불유쾌한 맛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헉, 으흣, 아! 숨, 숨이, 안 쉬어, 흐윽!”

뒤에서 턱턱 박아 댈 때마다 내장까지 입 밖으로 토해지는 듯했다.

“오메가가 아니니 확실히 흠뻑 젖지는 못하네.”

얀테가 그녀의 옆에 앉아 긴장으로 곤두선 그녀의 승모근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처음에는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버거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일그러진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이것도 흥분되는구나.”

페로몬에 반응하는 오메가 육신은 리체의 약점인 동시에 얀테가 그녀를 휘두를 수 있었던 무기였다. 그의 페로몬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그녀의 몸은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교접할 때마다 극상의 쾌감으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반면 하진은 페로몬은 없었지만 그만큼 천천히 음미하듯 느낄 수가 있었다.

“박아 주자마자 좋아 죽는 얼굴도 보기 좋았지만, 이 얼굴도 나쁘지 않아. 야해 빠졌구나, 하진.”

얀테가 홀린 얼굴로 하진의 일그러진 이마에 키스했다. 그대로 입술을 움직여 귓바퀴를 문지르고 긴장으로 딱딱해진 그녀의 뒷덜미를 눌렀다. 팔꿈치로 상체를 받친 하진이 흐려진 눈으로 얀테를 보았다.

“카이로 때문에 이런 눈을 하는 건 마음에 안 든다만.”

얀테가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올렸다. 그의 귀족다운 유려한 손이 카이로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이는 하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더 충분히, 잘 느껴 봐.”

귓바퀴를 입술로 물고 가슴 끄트머리를 강하게 꼬집었다. 동시에 레이몬드가 어느새 다시 발기한 성기를 그녀의 입술에 문질렀다. 아래위로 가해지는 자극에 하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헐떡이는 그녀의 질 내에 정액이 흩뿌려졌다. 정액과 체액이 혼합되어 쯔걱거리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촉촉해진 질 내를 카이로의 두꺼운 성기가 들쑤셨다. 음핵과 연결된 G스폿에 연속적인 자극이 가해지길 몇 번, 전조도 없이 절정을 맞은 하진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하으으응!”

동물처럼 고개를 젖히는 하진을 끌어안은 얀테가 그녀의 젖꼭지를 비틀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레이몬드는 귀두만 그녀의 입 안에 담근 채 기둥을 흔들었다. 곧 두 번째 분출을 맞았다. 걸쭉한 정액이 입술을 타고 내려왔다. 턱 끝에 맺힌 덩어리진 정액이 하얀 시트에 뚝 떨어졌다. 하진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당혹해했다.

“이, 무슨, 짐승 같은…….”

“난잡함에 적응 못 하는 건 똑같아.”

얀테가 야릇한 눈으로 하진을 보았다. 얼굴이 정액투성이가 되어 떨리는 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니 갈비뼈 안의 심장이 커지는 것 같았다. 뻐근한 통증이 일어 아래를 바라보자 성기가 아프도록 발기해 있었다.

“하아, 너무 오래 참았구나. 이젠 내 차례다.”

하진의 등에 입을 맞추며 후희를 즐기는 카이로를 밀어 낸 얀테가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카이로의 거대한 것이 드나들었던 구멍으로 얀테의 성기가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흐읏…….”

얀테가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뜨거워서 자지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축축하고, 좁고, 부드러웠다.

게슴츠레하게 반개한 눈으로 하진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레이몬드가 그녀의 손을 가져가 그의 성기와 음낭을 애무하게 했고, 카이로는 그녀의 입술에 진득하게 키스하고 있었다. 레이몬드의 것을 머금어 정액 맛이 날 텐데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하진을 물고 빨았다.

‘결벽증이 있는 놈이…….’

신기했던 얀테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나도 남 말할 때는 아닌가.’

그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흥분이 밀려왔다. 하진이 그들에게 완전히 정신을 빼앗기기 전에 얀테가 하체를 쳐올렸다.

“흑!”

파르르 경련하는 견갑골이 더없이 기꺼웠다. 성기에 가해지는 쾌감도 쾌감이지만 정신적으로 고무될 때는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는 순간이었다. 현실 세계에서도 무심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땀을 흘리는 그녀를 볼 때마다 어김없이 사정을 하고는 했다.

얀테는 흥분으로 절로 거칠어지려 하는 하체를 억누르며 일정하게, 그러나 리드미컬한 움직임으로 그녀의 아래를 쑤셨다. 오메가가 아닌 하진은 어딜 쑤셔도 좋아하는 몸이 아니었다. 거친 행위는 그녀의 쾌감을 꺼뜨릴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녀가 유독 느끼는 곳은 현실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가 다르지 않았다. 쾌락점이 모인 그곳을 규칙적으로 박아 대자 곧 반응이 왔다.

“잠깐, 아, 잠깐, 뭔가, 이상…….”

얀테는 그녀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추삽질을 계속했다. 속도만 약간 더 빨라졌다. 손을 내려 발갛게 변한 음핵을 끈질기게 문지르며 추삽질을 한지 몇 번, 하진이 입을 벌렸다. 눈꺼풀이 사정없이 경련했다.

“아으으윽!”

자제심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색스러운 교성에 가득 배인 쾌감에 얀테도 머릿속이 아찔했다. 절정을 맞은 하진의 질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수축했다. 몇 번은 더 삽입할 생각이었던 얀테마저 흠칫할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피가 몰린 얀테의 성기 끝에서 결국 씨물이 터졌다.

“헉, 하흐윽…….”

파드득거리는 그녀의 몸을 레이몬드가 끌어안았다.

“리체를 너무 괴롭히지 마.”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얀테가 그녀의 안에 성기를 들이미는 레이몬드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어딜 봐서 괴롭힌다는 거냐?”

하진의 안에 삽입한 레이몬드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신음 소리가 크지 않잖아. 그렇게 기분 좋지 않은 거야.”

“하, 얼굴을 봐. 그게 좋아 죽는 얼굴이 아니면 뭐냐?”

“이 얼굴은 평범한 수준이야.”

하진의 턱을 붙잡고 풀어진 얼굴 근육에 입술을 맞추며 레이몬드가 허리를 쳐올렸다. 앉은 채로 삽입된 하진이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리체의 몸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못마땅한 눈빛에도 레이몬드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부드러운 여체를 강하게 안았다. 그때 하진의 팔이 낭창하게 휘어지며 레이몬드를 마주 끌어안았다.

“봐 봐, 얼마나 좋아하는지…….”

레이몬드가 행복한 웃음을 짓자, 지켜보던 두 알파의 눈에 불길이 솟구쳤다.

누가 가장 그녀를 즐겁게 만드는가.

침대 위에서의 총애를 차지하려는 옛 궁중 후궁들처럼 세 남자 사이에서 때아닌 경쟁이 붙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

몇 시간 전에 해가 진 통창 밖은 이젠 별이 점점이 뜬 깜깜한 밤이었다. 끊이지 않은 정사에 하진은 신음을 흘렸다.

“아, 아…….”

‘목이 완전히 쉬었어.’

그녀는 처음치고는 과도한 쾌감과 자극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운동과 거리가 먼 몸은 몇 번의 절정을 맞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축 늘어졌는데 자극은 멈출 줄 모르는 전류처럼 계속 전해져 오니 느끼는 것이 괴롭기까지 했다.

“아, 흣, 그, 만, 이제 그만, 좀, 쉬어…….”

“아직 안 돼, 하진. 마지막이잖아. 쉬지 않고 사랑해 달라며. 아직 내 사랑의 반의반도 주지 않았다고.”

귓불을 빨며 레이몬드가 하는 말에 하진은 섣불리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을 후회했다. 또 한 번 쾌감의 파도가 몰아쳤다. 질이 수축하자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레이몬드가 신음을 흘리며 사정했다. 흐물흐물해진 그녀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바닥난 그녀의 체력과 달리 집요하고 진득했다.

하진은 침대에 늘어진 채 가는 숨을 쉬었다. 호흡할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입과 질, 배 속을 가득 채운 정액의 냄새였다. 남자의 맛이 너무 짙어 정신이 혼미했다. 하진은 가물가물하게 뜬 눈으로 진득이 젖어 버린 몸을 애달프게 어루만지는 남자들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얀테의 눈이 일그러졌다. 왜 저런 얼굴을 할까? 지친 머릿속으로 희미한 의문이 떠오르는 그때.

“사랑해.”

하진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의 벗은 가슴에 녹녹해진 입술이 내려왔다. 다물린 입술은 다시 열리지 않았으나 피부에 진득하게 비벼지는 입술에서 말 없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머릿속에 입력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지나쳐 타인은 발밑의 돌멩이처럼 여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안 보여…….’

손등에도 입술이 닿았다. 고개를 돌리자 카이로가 눈을 내리깐 채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맛보고 있었다. 빳빳하게 모양이 잡혔던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자연스럽게 이마에 내려왔다.

날카로운 눈매도 누그러지고, 한층 부드러운 분위기를 내뿜는 그에게서 하진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린 카이로가 넋을 잃은 그녀를 보고 입술을 올렸다. 그는 위엄이 어린 강인한 이미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 섹시해서, 레이몬드와 같은 핏줄을 잇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대, 하고 그가 속삭였다. 자신을 보는 찰나, 녹을 듯이 부드러워지는 나른한 눈동자는 꿈에서 깨어나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나의 하진, 나의 리체.”

피가 뜨겁게 끓고, 몸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났다. 레이몬드가 그녀의 얼굴을 끌어안고 얼굴 곳곳에 키스를 퍼부었다. 강아지가 달려드는 듯 간지러웠다.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레이몬드가 빤히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눈을 한 그가 확신 어린 어투로 말했다.

“어디든 상관없어. 이 세계에서 널 만났더라도 난 사랑에 빠지고 말았을 거야.”

“읏, 레이몬드. 잠깐만.”

그가 혀를 내밀어 뺨을 길게 핥아 올리곤 허스키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난 널 사랑하고 말았을 거란 확신이 들어. 페로몬이 아니더라도, 순수한 체취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아. 씹, 이곳에서나 도블락에서나 난 네가 없으면 안 되는 목숨이야. 버리면 안 돼, 리체. 아니, 하진. 날 네 신체 일부분으로 여겨 줘.”

하진은 두 눈을 꽉 감았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 텅 빈 뱃속을 가득가득 채웠다. 농밀한 충만감이 머리끝까지 미쳐, 도리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도…….”

그녀의 예쁜 입술이 경련했다. 평생 부모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한 번 꺼낸 적 없는지라 못 견디게 어색했다. 머뭇거리느라 그녀는 자신이 입술을 연 순간부터 세 남자가 귀를 기울여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도 좋아해.”

들릴 듯 말 듯 속삭이자 얼굴이 화끈거리며 뜨거워졌다. 동그랗게 몸을 만 채 파고드는 하진을 받아들인 세 남자는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온갖 체액으로 미끈거리는 피부에 쉼 없이 입술을 맞추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게 된 그들의 존재가 리체의 무의식에서 서서히 지워질 때까지 입맞춤은 멈추지 않았다.

* * *

‘엄청 기분 좋은 꿈을 꾼 것 같아…….’

리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 위가 시끄러웠다.

“내게 한 말이야.”

“미친 소리. 누가 봐도 상황에 취해 한 말이었다.”

“폐하는 낭만도 없고, 머리도 없는 건가?”

“이놈이 무엄하게…….”

“마지막에 리체에게 말한 게 나였어. 내 말을 듣고 좋아한다고 했다고. 이 하찮은 용병 대장도 아는 걸 어찌 부정하시나?”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리체 양이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고요? 이럴 줄 알았지. 하, 노력은 나와 메디치나가 했는데 말이죠.”

“리체가 살던 차원에 이런 말이 있었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번다고.”

이 말은 아나? 웃음기 어린 레이몬드의 빈정거림에 라스카가 기분 나쁜 투로 조용히 대꾸했다.

“잘난 척이 심해진 걸 보니 리체 양의 무의식에서 알아낸 게 많았나 보군요, 레이몬드 경. 카이로 대장군을 좀 보십시오.”

“카이로처럼 닥치고 있으란 말이냐?”

“그래도 눈치는 원래 빠르셨죠.”

“네 그 말투도 오랜만이라서 봐준다.”

“실제로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니까. 다시 들어도 믿어지질 않는군.”

“…….”

“근데 리체는 언제 일어나는 거야?”

시선이 얼굴 위로 닿는 게 느껴졌다. 눈을 감은 그녀에게서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눈길은 금세 떨어졌다.

“얼른 눈 뜬 걸 보고 싶어. 누구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건지도 물어봐야지.”

“아뇨. 리체 양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겁니다.”

레이몬드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라스카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렇게 의식체가 누군가의 무의식에 진입한 적이 처음이라 정확히는 말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무의식에서 일어난 일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무의식은 말 그대로 의식이 닿지 못한 곳이니까요. 꿈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편할까요. 꿈속에서는 생생했던 일도 잠에서 깨어나면 금세 흐릿해지는 것을요.”

“말도 안 돼. 얼마나 좋았는데!”

“안타깝게 됐습니다.”

전혀 안타까워 보이지 않았다.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에서 묘한 고소함이 느껴졌다.

하아, 라스카까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리체는 더 이상 자는 척을 할 수 없어 눈을 떴다.

“너 여기 정확히 아는 놈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레이몬드의 음산한 목소리가 멈추었다. 눈이 딱 마주쳤다. 찌푸렸던 미간이 반듯해지고 좁혀졌던 눈매가 시원시원하게 트였다. 비틀렸던 입술은 완벽한 호선을 그리고, 반항적인 눈동자는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리듯 환해졌다. 맹수처럼 잔인한 사나움이 간데없어진 얼굴은 잡지 표지를 장식해도 좋을 정도로 섹시하고 근사했다.

두근.

‘어라, 두근?’

“리체.”

그녀는 바싹 다가온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다행히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리체는 침착하게 주먹을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란 토끼 같은 눈들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은근히 기대가 어린 듯도 했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지만 드물게도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뜨거운 물을 가득 담은 욕조에 한 시간 넘게 반신욕을 하다 나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뇌가 푹 익어 버렸다.

“리체, 기분은 어떻습니까?”

“어지러운 느낌이 들면 얘기해요. 리체 양은 마력이 잘 들지 않는 체질인지라 미약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어요.”

라스카와 그라우지가 그녀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리체는 마른 입술을 할짝였다. 곧장 물컵이 내밀어졌다. 시선을 올리자 얀테였다. 마음에 묘한 감흥이 퍼져 나갔다. 몸을 일으키고 그에게서 물컵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스치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오므릴 뻔했다.

‘잠깐, 나 왜 이렇게 민감하게 구는 거야?’

이마에 서늘한 체온이 닿았다. 카이로가 미간을 좁히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아픈가? 얼굴이 빨간데.”

눈썹의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카이로의 눈은 겉보기에는 그저 빨간색으로 보일 뿐이나 가까이에서 보면 색의 구분이 확실했다. 홍채는 피처럼 새빨갛지만 동공은 검은빛이 섞인 갈색이었다. 오묘한 빛에 홀려 버릴 것 같았다.

‘침착하게. 평소처럼…….’

한 품에 안기에도 모자랄 만큼 커다란 꽃다발을 든 채 하얗고 건조한 연구소에 서 있는 그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런, 평소처럼이 안 되잖아!’

문득 카이로의 따뜻한 숨이 입술을 간질였다. 그가 손 대신 이마를 마주 댄 것이다.

“더 빨개졌어. 열이 나는 것 같군. 뭐가 잘못된 게 아닌가?”

그가 얼굴을 뗄 때까지 리체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들숨과 날숨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흔들렸다. 온몸이 불수의근이 된 것 같이 제멋대로 긴장하고 제멋대로 경련했다. 리체는 속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사춘기 소녀가 보일 법한 반응이었다. 자신과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았다.

“이거 안 되겠군.”

카이로가 얼른 약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할 기세라 리체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빠르게 나온 세 마디에 카이로가 멈칫하고 그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처음 몇 초간은 그와 눈을 마주했지만 얼마 안 있어 또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침대 위에 놓인 손가락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미쳤어. 경악한 리체는 손가락을 단단히 얽은 채로 힘을 주었다.

“그대, 혹시…….”

리체는 얼굴을 찌푸렸다. 말을 멈춘 카이로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머리가 조금 아프네요.”

내려다보는 시선에 물을 마셨는데도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 왔다. 잠시 후, 카이로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쉬어.”

중저음의 편안한 목소리에 어깨의 힘이 스르륵 풀렸다.

쉬겠다며 모두를 문밖으로 내쫓은 리체는 마지막으로 방문이 닫히자 끈 풀린 인형처럼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아, 정말…….”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지간한 일로는 얼굴색도 변하지 않는 그녀지만 지금은 얼굴 어딜 만져도 열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의식 치료니 꿈 치료니 하는 걸 거부하는 건데! 본 차원에서도 통하지 않았던 최면이 여기서 이렇게 간단히 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무의식에서 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라스카의 말과 달리 리체는 원망스러울 만큼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건 그녀의 뇌와 의식이 보통의 사람들과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의 경험이 현재의 그 자신을 만든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그녀는 밑바닥까지 탈탈 털린 셈이었다. 벌거숭이가 된 기분이다.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거리낄 게 없는데도, 그녀의 가정 환경부터 그녀가 뭘 하고 지냈는지까지 모두 보고 들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얼굴의 열기가 빠지질 않았다. 리체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몸을 뱅글 돌린 리체는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회색 빛깔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은데, 민망해 죽겠는데, 한편으로는 마음이 충만함으로 꽉 차 있었다. 리체는 조심스럽게 가슴에 손을 올렸다. 꿈에서 깨기 직전 침대 위에서 그녀를 찾아왔던 그 만족감이 꿈밖으로까지 쫓아온 듯했다.

“나한테도 트라우마가 있었단 건가.”

과연 라스카와 그라우지는 대단했다. 이런 걸 일종의 심리 치료라고 볼 수 있는 걸까? 리체는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무의식에서의 대화를 상기하면 세 사람이 과거의 그녀를 만났던 건 그녀가 어렸던 시점. 부모의 관심을 갈구했던 그 시절이다. 그때의 시간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제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뜻밖이었다. 튼튼한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어도 어릴 때의 상처란 건,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욕구가 희박한 스스로가 느끼기에는 남달랐던 성취 욕구와 성공 욕구. 기질 탓이 크겠지만 부모에게 관리받지 못했던 과거의 환경이 아예 영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많은 것을 욕망할 기회를 박탈당했던 상실감의 반작용일지도.

성취감은 그녀가 느낄 수 있었던 가장 큰 쾌감이었다. 중독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라스카가 물었던 적이 있다.

‘여기 남은 걸 후회하지 않겠어요?’

그때는 확실히 대답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대답할 수 있을 듯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차원 이동 시도를 포기하고 이곳에 남겠다고 결심하면서 후련했던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 탓도 있었으나 궁극적으로는 행복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과 있으면, 나 혼자 있을 때보다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리체는 피식 웃었다. 상쾌했다. 내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닐까. 언젠가부터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았던 응어리가 묵은 때처럼 쓸려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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