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01.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16/25)

| 목 차 |

01.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02. 그들이 다인플이 불가능한 이유

03. 눈치 게임이 끝났다

04. 무의식 치료술

05. 임신 소동

06. 성욕과 연구의 상관관계

07. 그녀의 임신에 얽힌 비밀

08. 결혼 경쟁

09. 임신 섹스

10. 모두의 아이

01.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헤르만 헤세

빛을 따르는 그림자처럼 삶이 계속되는 한 줄곧 따라붙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고난이다. 리체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앞을 막아서는 고난의 언덕을 아무 생각 없이 넘고, 넘고, 넘는 것이 삶이다. 크고 작은 것의 차이는 있으나 인생의 굴곡은 누구에게나 뚜렷하기 마련이다.

‘무던한 성격은 그래서 살기 편하지.’

리체는 자신의 성격에 불만이 없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공기의 78퍼센트가 질소, 21퍼센트가 산소, 그 다음 아르곤, 이산화탄소 등의 기체로 이루어져 있다면, 삶은 70퍼센트가 무미건조, 25퍼센트가 고난, 4퍼센트가 보람, 나머지 1퍼센트가 변수…….’

고난의 힘겨움보다 보람의 카타르시스가 크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답답하네. 바람이라도 좀 쐬어야겠어.’

사람들이 저마다 얼굴에서 분 냄새를 풍기며 하늘거리는 춤을 추는 홀에서 시선을 떼고 리체는 루세이노 황가를 위해 마련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폐하.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다리가 저려서 잠깐 걷기라도 할 참이다.”

아, 답답해.

바로 따라붙는 시녀들에게 먼 거리에서 따라오라 이르고는 이곳에 들어올 때 눈여겨보았던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얀테와 성혼식을 올린 지 이제 약 두 달. 미라이어 공작 2세의 탄생연은 황후로서 참석한 수많은 파티 중의 하나다. 선물도 전달했고, 적잖이 시간을 죽였으니 할 일은 다했다. 마지막으로 공작의 모친인 대부인과 인사만 하면 오늘 일정은 끝.

‘대부인이 올 때까지는 빈 방에서 쉬어도 되겠지.’

사람들이 대연회장에 모여 있는 탓에 본성의 오픈된 회랑은 적막했다. 눅눅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밤하늘의 선선한 공기가 리체의 피곤한 몸을 흠뻑 적셨다. 약간 풀어진 무표정한 얼굴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회랑을 쓱 훑었다. 빈 방을 찾는 그녀의 걸음이 회랑에 일정하게 울려 퍼졌다.

막 회랑의 중앙을 지나던 참이었다.

“황후 폐하 보셨습니까? 아무도 말 걸어 주는 사람이 없는데 홀로 앉아 있으신 모습이 꽤 안타깝더이다.”

우뚝, 걸음이 멈추었다. 리체는 고개를 돌렸다. 대연회장과 연결된 회랑은 손님들을 위해 쉴 수 있는 휴게실이 달려 있다. 뿐만이 아니라 뒤뜰과 후원으로 이어져 있는 복잡한 구조였다. 소리가 들려오는 건 회랑 너머의 후원에서였다.

‘누구나 지나가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감히 황후의 뒷담을 한다라.’

황족의 권위가 떨어졌다기보다는, 황가를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그녀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그간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닌지라 알 수 있었다.

리체는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었다. 주목받는 위치에 선 자는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말을 듣게 된다. 그것도 보는 입장에서 납득하지 못할 인물이 그 자리에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어둠이 스민 파란 눈동자가 활짝 트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굳이 부인들과 친분을 맺을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아시지 않나요.”

“아, 황후의 알파들 말이죠.”

“그렇게 비웃지 마시죠.”

“비웃다니요. 감탄하는 거지요.”

“상관없는 얘기는 꺼내지 마세요.”

똑 부러진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꽤 차가운 뉘앙스에 대화가 잠깐 멈추었다가 어색하게 이어졌다.

“스트리고 장군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지요?”

“오늘 변방에서 파발이 왔다더군요. 일이 바쁘신 모양이니 못 오시지 않을까요.”

“황후께서 여기 있는데 안 오시겠습니까?”

“세르게이 후작, 말씀을 가려하세요. 누가 들으면 장군께서 황후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줄 알겠습니다.”

또다시 젊은 여자가 불쾌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세르게이 후작이라 불린 남자가 멋쩍은 헛기침을 했다.

“다이아나 영애, 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는데, 더는 황후 폐하와 그분을 엮지 마세요. 그분께서는 단지 황가에 대한 신의를 지키시는 것뿐이니까요.”

“아니, 다이아나 영애. 스트리고 장군께서 황후 폐하의 기사처럼 구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세르게이 후작.”

젊은 여자는 쌀쌀맞은 태도로 그의 말을 일축했다.

“정확히 말씀하셔야죠. 모두가 알고 있는 건 황후 폐하의 남성 편력이지요. 듣자하니 원래는 열성 오메가였다는데, 극우성 오메가로 형질이 재발현한 희귀하고 대단하신 분이 아닙니까. 세르게이 후작께서도 그분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시던데.”

“그 무슨 오해 살 말을 하십니까?”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분의 마력이 대단하단 것이니까요. 극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은 독약과 다를 게 없지 않나요?”

“흥미로운 비유긴 하나, 무슨 의미인지 식견이 짧은 제 머리로는 뜻을 완벽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

“한때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던 그레이스 가문을 생각해 보세요. 그레이스 선대 가주가 극우성 오메가를 낳았을 때, 모두가 예상했던 권세였지요. 몰락한 이델리 그레이스가 제니스 보르신의 것을 탐했을 때 다들 이델리도 끝이라고 수군거렸지 않나요. 하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대단한 제니스 보르신도 이델리를 내치지 않고 끌어안았지 않습니까.”

“하려는 말씀이.”

“그래요. 스트리고 장군께서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하지만 영명하신 분이니 진창을 깨닫지 않으실 리 없지요. 그분의 결벽한 성정은 제가 가장 잘 압니다. 조만간 진흙투성이에 발을 들이고 있단 사실을 아시고 현명하게 대처하실 겁니다.”

진창이니 진흙투성이니. 존칭을 쓰는 것뿐,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그녀를 잔뜩 조롱하고 있었다. 이 대륙의 절대자인 황제가 황후에게 푹 빠졌다는 말은 황후에 대한 호기심과 선망을 불러일으켰으나 또 한편에서는 그녀의 출신이 미천함을 빌미로 경멸하는 무리가 있었다.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시선은 어딜 가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적나라하게 뒷얘기를 하는 경우는 처음 맞닥뜨린 리체는, 의외로 덤덤했다. 올 게 온 것뿐이다.

“다이아나 영애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장군께 한결 같으시군요.”

그것보다는 카이로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다이아나 영애라. 아까 인사했던 젊은 처녀들 중 하나일까?

리체가 마주쳤던 얼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안에서는 점화기를 당긴 듯 그녀에 대한 뒷담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투만 점잖지 온갖 적나라하고 지저분한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어, 자리를 뜨려던 리체는 황당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 몰래 낳은 아이가 셋은 될 거라고? 한 명은 실제로 만나기도 했어? 날 닮았다니,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더 궁금하네.’

소리 없는 실소를 흘린 리체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이곳이 본 차원보다 스펙터클한 것은 사실이나 이런 뒷얘기가 도는 건 거기나 여기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기분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다. 돌덩이를 매단 채 강물 속으로 침잠하는 듯한 삶의 고난은 익숙한 것이라, 그 순간만 참아 넘기면 언제 그랬나 싶게 멀쩡히 생활하게 된다는 것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금 나서서 무엇이 문제인지 요목조목 짚어 주는 건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리체는 귓바퀴를 문지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 아닙니까. 도대체 어떤 매력인지, 원.”

‘다른 데서 쉬자.’

리체가 벽에서 등을 뗀 순간, 돌연 주변이 착 가라앉았다. 묘한 감각에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호기심이 솟은 리체가 자리에 멈춰 섰다.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대단한 분이시지.”

심장을 꽉 채우는 묵직한 목소리. 주변을 감쌌던 적막이 깨진 창문처럼 조각났다. 공기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가시를 세웠다.

“장군!”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더군.”

군인답지 않게 기품 있는 어투였다. 억양이 꽤 강하다. 악의로 넘실거리는 공간을 압도할 만큼.

“어, 언제 오셨습니까? 소식이 들렸다면 당장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내가 먼저 물었다, 세르게이 후작.”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언제 부드럽게 말했냐는 양 삽시간에 무뚝뚝해진 말투는 권위적이었고, 그는 그것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교계에서의 위치가 낮지 않은 세르게이였지만 제국의 대장군 앞에서는 목을 꼿꼿하게 세우지 못했다.

“예, 잠깐 저희들끼리…….”

주눅이 든 후작의 얼빠진 대답에 어디선가 탄식이 들려왔다. 황가의 사정을 제멋대로 떠들었다니, 누가 압박해도 아닌 척 시치미를 뗐어야 하는 일이었다. 무언의 비난에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은 젊은 후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다이아나 영애가 나긋나긋하게 땀을 뻘뻘 흘리는 세르게이 후작을 구해 냈다.

“후작님을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다이아나 영애.”

“강건하신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기쁘네요, 장군. 마지막 만남 이후로 오랜만이 아닙니까?”

“이 무리는, 당신이 끼어들 곳이 아닐 텐데.”

은근하게 건네지는 친밀감은 틈 하나 비집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여자는 숨을 들이켜고는, 이내 침착하게 대꾸했다.

“친밀한 분들과 담소를 나누었던 것뿐입니다. 죄인 취급은 조금 섭섭하네요.”

리체는 다시 천천히 뒤통수를 벽에 댔다.

카이로가 왜 여기 나타난 거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었을까.

그의 결벽성은 자신도 아는 특질이었다. 진창에 발을 들였다는 말이, 그의 입장에서는 틀린 말이 아닐 터였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내게 직접 묻는 게 나았을 텐데.”

“……물어본다면 솔직하게 답변해 주실 건가요?”

“얼마든지.”

“그렇다면 체면 불고하고 묻겠습니다. 대장군께서도 이런 불유쾌한 소문에 오르내리는 걸 싫어하셨을 테니까요. 장군께선 듣던 대로 황후 폐하와 ‘친밀한’ 관계이신지요?”

다이아나의 직설적인 물음에 같이 있던 사람들조차 웅성거렸다. 정숙해야 할 숙녀가 뱉기엔 지나치게 대범했다. 카이로는 곧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영애의 가문인 카드릭스는 부모님 대의 가문 결합으로 스트리고가와 연이 깊지.”

“네! 이곳에서 저만큼 장군을 잘 아는 레이디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저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네.”

연정을 품어 부드러운 꽃잎처럼 흔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카이로의 음성은 야속할 만큼 무심했다.

“하지만 황후 폐하와 관련된 일이라면 염려할 필요가 없어.”

“아,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별것 아닌 일에 다들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지요. 장군의 충성심과 다정함을 착각해서는, 과장되고 왜곡된 이야기가 어찌나 많던지 저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답니다!”

화색이 도는 목소리가 흐드러진 꽃망울처럼 피어올랐다. 그 순간 카이로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꽃잎을 떨어뜨리는 삭풍처럼 불었다.

“무슨 얘기가 나도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장된 건 없었을 거야. 이 몸에 대해서만큼은.”

“네?”

“그분은 내가 충성하는 사람이지.”

“……그, 그렇지요. 황가에 대한 장군의 충성을 모르는 사람은 이 도블락에 없을 테니까요.”

“아니, 제대로 들어라. 나는 ‘황후 폐하께’ 충성하고 있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었다. 치맛자락을 꽉 붙든 젊은 여인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소리쳤다.

“아무리 충심이 깊으시다고 해도 오해할 말씀은 하지 마세요!”

카이로의 넓은 어깨와 거대한 체구가 눈에 들어왔다. 괜히 움찔 놀란 리체는 다시 벽에 등을 딱 붙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충성이라니, 단어 선택이 잘못됐잖아요, 카이로.’

사교계에서의 소문이 귀족의 체면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는 그가 아니니만큼, 유려한 말로 이 자리를 지혜롭게 모면하는 방법을 모를 리 없다. 황후와 얽힌 지저분한 소문은 황가를 향한 충심으로 덮으면 되는 일.

그럴 텐데.

“그분은 내 삶을 걸고, 누구보다도.”

리체는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사로잡혔다.

“충성하는 사람이다.”

그 말에 담긴 뿌리 깊은 감정과 조용하게 타오르는 열정을 그를 흠모하는 여자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마음이 들쑤셔진 여자는 참을 수 없어 몸을 떨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정욕과 착각하시는 겁니다!”

카이로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뭐가 문제지? 내 정염과 충성과 사랑과 존경이 모두 한 사람의 것인데.”

“왜, 왜요? 당신 같은 분이, 어째서 그런 여자를요?”

리체는 눈을 가늘게 떴다. 페로몬, 체취, 외모. 그것은 사람을 매혹하는 요소들이다. 카이로는 그녀의 페로몬에 매혹당했다. 풍만한 가슴과 가녀린 허리를 흡족해했다. 그리고 또…….

또, 무엇이 있을까.

달빛이 반사된 차가운 회랑의 벽이 사람이라도 되는 듯 리체는 시선을 못 박았다. 카이로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전이라면.”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지는 듯했다. 리체는 숨을 길게 쉬었다. 그간 거의 숨을 쉬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게 호감을 보이는 영애를 봐도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

“분노가 느껴지는군.”

“자, 장군.”

카이로는 거침없이 말했다.

“이 순간에조차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고, 이런 상황을 만든 누군가를 향한 경멸을 느끼며,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떠드는 치들에게 환멸을 느낀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이토록 재미없는 본인에게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녀를 사랑해.”

“……그만하세요.”

“숭배하고, 존경하고, 경애해.”

“…….”

“당신들이 쉽게 입에 올리는 그녀는 내가 감히 상처 입힐 수 없을 정도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다.”

귀족적인 어투로 열정적인 사랑을 얘기하는 그는 감히 항변할 수 없을 정도로 굳건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좌중은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울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여자가 울먹거리며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장군이 맞는 건가요?”

그는 간단히 대꾸했다.

“아마 아닐 거야.”

하아. 리체는 터질 것처럼 부푼 숨을 천천히 쉬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뛰쳐나갈 것 같았다. 가슴께를 꾹 쥐고 눈을 감았다. 대리석벽의 냉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와 뜨거워지는 머리를 억지로 식혀 주었다.

‘바보 같으니.’

그의 마음은 알고 있다. 자신의 흠결과 이기적인 성품과 무책임한 모습까지 모두 감싸 안아 주던 드넓은 관용 밑바닥에 깔린 헤아릴 수 없는 성숙한 사랑.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었을 뿐.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정 떨어지게 냉정한 데다 무관심한 자신에게 왜 이렇게까지 진심인 건지.

‘뭐 하러 저런 소리를 해. 잘 넘어갈 수 있으면서, 바보 같이…….’

눈시울이 뜨끈했다. 이렇게 구는 것 때문에, 한 점 흠 없이 무결할 수 있는 그가 쓸데없는 추문에 휩싸이는 게 아니겠는가. 자신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카이로에게 미안했다.

뚜벅뚜벅. 신분을 증명하듯 절도 있는 발소리가 그녀의 앞에서 멈추었다. 리체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전장에서 호령하는 자 특유의 위압적인 카리스마가 어린 눈은 차마 마주하기 어려울 만큼 두렵게 강렬했다. 그 눈에서 시선을 떼면,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 뒤늦게 눈에 들어온다.

“…….”

“…….”

그가 자신보다 머리가 하나 반은 더 작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리체의 꼿꼿했던 어깨 근육이 햇볕에 녹은 얼음처럼 풀어졌다. 스치듯 마주친 눈이 그녀를 끌어안듯 따뜻했다.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대, 저런 소리 귀담을 필요 없어.

“모시러 왔습니다, 황후 폐하.”

정중한 손이 내밀어졌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장갑은 투박한 듯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더없이 그와 잘 어울렸다. 리체가 그 위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은 시점에, 카이로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장갑으로 감싸여져 있는데도 무척 따뜻했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이런 때도 적용할 수 있을까? 그의 다정함이 곧 힘이 되는 것처럼, 손끝에서부터 온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리체는 카이로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달빛처럼 쓸쓸했던 회랑은 힘찬 걸음에 부서져 나가 생기를 얻었다. 리체의 창백한 낯에 조금씩 표정이 생겨났다. 듬직한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당신은 언제나 내 등을 밀어주는구나.’

* * *

3개월 후.

리체는 끝을 모르는 이름의 향연에 질식할 것 같았다.

챌링턴 후작, 레드보르뉴 백작, 제임스커트 공작, 앵바랜스더 백작 등등, 귀족들이 참 많기도 하다.

서른 통.

하루 동안 황후의 우편함에 쌓인 초대장의 수였다. 플러스마이너스 3 정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매일같이 그 같은 양이 쌓인다. 처음 하루 이틀은 황후의 의무라니까, 하면서 꼭 가야 하는 파티를 골라내고 참석했지만 그것이 몇 달 동안 이어지니 진절머리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그녀는 머리 쓰는 일에는 능해도 얼굴과 몸을 꾸며 자신을 마네킹처럼 사람들 앞에서 선보이는 데엔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싫다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도블락 제국은 황후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단 하나, 모든 여인들의 리더이자 귀감이 되는 여성상을 모범적으로 구현하기만 한다면 좋은 황후라고 박수를 받았다.

‘현재 내 평판은 나쁘지 않은 편……이지, 그래도.’

보잘것없는 출신을 가진 황후를 만만하게 보는 귀족들이 발에 채일 것처럼 많았으나 파티에 참석하며 흠 잡을 데 없는 교양과 황실의 사람다운 우아한 자태를 보여 주니 불만도 수그러졌다. 그건 최근 거의 매달 발표하는 마탑의 논문에 그녀의 이름이 빠짐없이 등재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탓도 있었다.

리체가 어지간한 학자들 못지않은 지식을 갖추었다는 데 경탄한 사람들의 생각은 보잘것없는 황후에서 한 수가 있는 황후로 바뀌었다. 정확히 그녀가 노렸던 바대로.

“아무렴, 황제 폐하께서 별 볼 일 없는 여인을 지고의 위치에 앉히셨겠나.”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푹 빠지신 거겠지.”

역시 세상은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의 삼박자로 이루어진다. 돈과 권력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치들도 있지만 리체는 명예도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 가진 가치의 높낮이는 명예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녀는 명예욕이 상당한 편이었다.

성취 욕구와 지식욕이 커서 휴식 시간도 반납하고 연구소에 처박혀서 살았다지만, 명예가 없었더라면 꾸준히 사이언스지에 논문을 제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박식함은 이곳 차원에서도 상당 부분 먹히면서, 그녀는 이제 몸뚱이로 황제를 홀린 황후란 칭호에 더해 마탑이 인정한 지식인이라는 특징이 추가되었다. 음란한 악녀처럼 묘사되던 전보다는 상당히 취급이 좋아졌다.

얼마 전에 파티에서 만난 다이아나 영애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연회장을 떠났던 순간을 떠올린 리체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런 여자’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한 건 좀 심했나.”

어쨌든 이렇게 되면서 조롱에도 조금쯤 여유로워졌다. 밤잠까지 줄이며 찻잔 드는 자세, 스테이크를 자르는 순서, 춤을 출 때 어떤 발로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고 어느 때 손을 우아하게 내려야 하는지, 작은 동작 하나하나까지 익혔던 보람이 있었다.

몸을 쓰는 건 그다지 재능이 없는 리체가 타고난 것처럼 우아하게 보이기까지, 그녀의 노력은 백조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물론 보람은 있었다. 저를 보며 수군거리던 귀족들이 이젠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건 아주 통쾌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하루 이틀이지, 요즈음은 파티장에 나가 보이지 않는 칼에 맞서며 귀족들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슬슬 심드렁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지루해질 때면 찾는 곳이 있다.

“도서관에 가야겠다.”

“채비하겠습니다.”

도서관을 발견한 건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산책이라도 할까 싶어 황후궁 뒤의 드넓은 장미 정원을 정처 없이 걷던 중이었다. 별궁이라기엔 규모가 작은 건물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중 지붕 구조에 돔 형식으로 만들어진 데다 장미 정원 근처에 있어 유리 온실인 줄 알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그녀를 반긴 건 향긋한 꽃 냄새 대신 쿰쿰한 책 향기로, 리체에겐 꽃향기보다 기분 좋고 익숙한 그 냄새였다.

황궁에 도서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중앙 도서관은 드나드는 손님들이 꽤 있어 그곳에 가면 인사를 나누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게 아쉬웠던 와중에 발견한 작은 도서관은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장미 정원 내의 유리 도서관은 오래전 학자 출신의 황후가 만들었던 것으로, 대대로 황후에게 귀속되는 건물이었다. 황후들은 바쁜데다가 내궁을 관리하고 사교계를 드나드는 업무가 끝나고 남은 시간을 휴식을 취하는 데 보냈기 때문에 주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유리 도서관은 쓸쓸히 잊혀지고 있었다. 방문객은커녕 그 존재조차 까먹은 사람들이 많았다.

간만에 등장한 방문객이, 그것도 황후라는 데 혼비백산해서 청소를 하느니 낡은 의자를 새로 바꾸겠다느니 우왕좌왕하는 사서를 말린 것은 리체였다. 그녀는 한눈에 이 아담하고 따뜻한 도서관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다른 누구의 관심도 받고 싶지 않았다.

“사서가 보이지 않네요.”

시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리체도 비어 있는 사서 자리를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서는 신경 쓰지 말라는데도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지라 차라리 없는 게 덜 거슬린다.

직무 유기의 죄를 물어 사서에게 한 마디 하고자 했던 시녀는 약간 마뜩잖은 얼굴로 물러났다. 리체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그녀의 지정석으로 향했다. 유리 온실의 2층, 바깥이 그대로 보이는 통창 창가에 걸터앉았다. 오는 길에 빼 온 책을 펼치자 마음에 안온함이 차올랐다.

‘음,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지.’

몇 달간 얼마나 힘들었던가. 저녁 연회니 플라워 가든파티니 다과회니 하는 것 때문에 하루 온종일을 보내야 하는데다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귀찮게 하는 사람들(대표적으로 얀테, 레이몬드) 때문에 무던한 그녀도 폭발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냉기가 서릿발처럼 두 눈과 입술에서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앞에서 말문이 막힌 그들이 알아서 규칙을 정해 온 덕분에 그 뒤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

규칙이라 함은 이틀 간격으로 데이트하는 날을 정하는 것인데 2일째엔 얀테, 그다음 이틀 뒤엔 카이로, 그다음은 레이몬드, 다음 라스카, 다음 그라우지.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역순으로 라스카, 레이몬드, 카이로, 얀테 순이었다.

이건 무슨 황제의 밤일 스케줄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게 하면 평화로워지긴 할 것 같아 대뜸 수락했다. 그리고 오늘은 아무런 데이트도 없는 날이었다.

형질이 극우성으로 바뀐 이후에는 정사 때문에 헐떡이는 일이 드물어졌으나 그녀는 다른 욕구가 고팠다. 지식욕이었다. 이틀에 한 번 성욕을 원껏 채운 몸은 다음날에는 책의 활자를 빨아들일 것처럼 집중력이 높아져서 요즘 리체의 생활 만족도는 황후가 된 후 최상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어느 판이든 경쟁자의 견제를 받는 건 득보다 실이 많은 편이다. 리체는 하진이었던 시절, 진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회에서 몇 번 수상함으로써 그해 모든 학생들의 견제를 받았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것을 깨달은 바가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이 질투를 하든 견제를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감히 건드리지 않을 만큼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면 그렇다. 황제야말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다. 당연히 얀테는 가장 먼저 그들이 정한 규칙에 흙탕물을 뿌렸다.

‘내가 내 ‘황후’를 만나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 남편이 아내를 만나러 가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하다고.’

그 순간의 분위기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폭풍 전야. 사막에서의 육탄전을 떠올린 리체는 절로 긴장했다. 그때는 특수 상황이었으니 그렇다 치지만 황제를 때리게 되면 무슨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모반의 죄에 휘말린다.

무척 다행스럽게도 치고 박는 개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 그들의 성정을 생각하면 의외인 일이었다.

‘저놈들이 왜 저렇게 순순히 물러나지?’

심지어 얀테마저도 찜찜해했다.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정답이었다. 문제는 다음 날부터 발생했다.

오전, 병영의 병사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황궁 회의에 당도했다. 외부에서 누군가 침입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무장. 의아해하는 신하들을 보며 얀테는 입꼬리를 굳혔다.

‘이런 같잖은 수작을 부리다니, 카이로.’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점심, 마탑에서 타국의 사신과 접촉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마법사들은 귀한 인재라 반출을 엄중히 경계하는 황실에 비상이 울렸다.

‘큰일입니다, 폐하! 마법사들이 외국인들과 이중 서약을 하려는 모양입니다!’

‘폐하, 마법사들이 배신한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폐하, 마법사들이 또…….’

‘폐하아!’

1분마다 보고가 올라왔다. 얀테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주룩 흘러내렸다.

오후, 귀족 사회의 정점인 사교계에서 성토가 이어졌다.

‘용병 길드에서 우리 가문과 거래를 중단한다고 합니다! 거래 중단 목록을 보니 모두 친황제파더군요! 폐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큰일입니다, 폐하. 메디치나 치유관이 갑작스럽게 파업을 선언해서!’

‘당장 늙은 어머니를 치유관에 모셔 가려 했는데 이를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폐하아!’

용병단의 황제파 거래 중지 선언과 메디치나 치유관의 파업으로 당장 일이 급해진 귀족들이 어떻게 좀 해 달라고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온종일 각지에서 날아드는 산더미 같은 문제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던 황실의 가신들은 진이 빠져 굳어졌다. 툭 치면 파스스 흩어지는 모래 기둥 같았다. 얀테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큼지막한 집단들이 하루 사이에 뒤집어지니 황제인 그라도 버틸 도리가 없었다. 얀테는 규칙에 승복했다.

이 일은 얀테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적잖은 영감을 주었다. 다섯 알파들은 이를 테면 오망성이었다. 오망성 다섯 개의 꼭짓점을 각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어느 한쪽이 수상한 낌새를 보일 때 즉각 반응했다. 얀테의 일 이후 규칙을 어기려는 알파들은 없어졌다.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레이몬드가 조용하네.’

얀테가 워낙 막무가내로 행동했을 뿐이지 비협조적인 사람 하면 그를 빼놓을 수 없다. 한 달 전만 해도 새벽을 틈타 황후궁의 담벼락을 넘어오기도 하지 않았던가. 낌새를 눈치챈 그라우지의 제동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차원 이동을 연구하며 공간 이동 마법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그라우지가 어디 오지 구석으로 보내 버렸다고 했는데, 어지간히 외진 곳인지 그 이후로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붉은 늑대 용병단이 다소 소란을 피우는 문제가 발생하기는 했다.

붉은 늑대 용병단은 스트리고가에서 독립한 레이몬드가 창단한 용병단으로, 처음에는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몇 개월 안 되는 사이 레이몬드의 실력과 인맥을 통해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용병단으로 성장했다. 그런 단장이 마탑주에 의해 사라졌으니 휘하 용병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단장이 돌아오지 않으면 더는 좌시하지 않겠소.’

그들의 으름장에도 그라우지는 코웃음을 쳤지만 리체는 머리가 아팠다. 용병단의 소란도 소란인데 레이몬드의 상태도 걱정이었다.

오메가에게 각인한 알파가 오메가와 접촉하지 못하게 되는 건 생존을 위협받는 일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빼앗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얀테에 비해서도 레이몬드는 참을성이 없는 편이어서, 페로몬 샘이 문드러지지 않고 잘 버텨 줄지가 걱정스러웠다.

그녀의 염려와 달리 얀테는 물론이고 카이로도 그를 걱정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라우지가 설정했던 좌표를 찾아 직접 사람을 보내긴 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어디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진 않을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다 보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혀를 찬 리체는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눈살을 구겼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솔직히 처음엔 귀찮게 구는 사람이 없어 편했는데 장장 한 달 동안 소식이 없으니 불안해지잖아.’

집중할 수가 없어 그대로 책을 덮자 도서관의 시중인이 숨죽인 걸음으로 사뿐사뿐 다가왔다.

“폐하, 낯빛이 안 좋으신데 어디 불편하신가요?”

나긋한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걸걸한 목소리에 리체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감히 황후를 내려다볼 수 없기에 무릎을 살짝 굽힌 채 위를 올려다보는 시중인과 눈이 마주쳤다. 일순 리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슴까지 오는 검은색 생머리를 길게 내린 채 정장 스타일의 사서복을 입은 ‘미인’이 그녀의 표정을 보며 눈매를 가늣하게 접어 보였다. 붉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달싹였다.

“책이 재미없으세요?”

“언제…….”

시중인이 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리체가 입을 다물자 그가 제법 사서답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 책은 너무 지루해서 추천드리고 싶지 않거든요.”

그녀는 반쯤 덮었던 책을 흘끗했다. 픽 웃음이 나왔다. 검은색 표지에 은색 박으로 마감을 한 책은 보기만 해도 복잡해 보이는 제목이었지만 실은 플롯이 단순한 통속 소설이었다.

‘읽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그럼 자네에게 추천을 부탁하고 싶은데.”

“맡겨 주시는 건가요?”

미인의 눈이 스르륵 휘어졌다. 특유의 퇴폐적인 눈매에서 색기가 뚝뚝 흘렀다. 꾹꾹 눌러 참고는 있지만 몸 안에 가득 쌓인 페로몬의 향기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재밌는 책을 찾아 줄 수 있다면.”

미인이 활짝 웃었다. 그것마저도 야해서, 리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바로 보셨어요. 저쪽에 폐하께서 관심을 가지실 책들이 많답니다.”

“그리로 가지.”

리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앞장을 섰다. 그녀의 움직임에 좀 떨어진 거리에 시립해 있던 시녀가 다가왔다. 리체는 여상하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거기 있거라. 책을 더 읽으려는 것뿐이니.”

얀테가 손수 뽑아 붙여 준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긴 머리와 다리의 굴곡을 드러내는 치마를 살피고는 이상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리체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황후 폐하, 이쪽으로 오시죠.”

좀 더 여성스러워진 목소리에 리체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큼, 헛기침을 하고는 먼저 몸을 움직이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유리 온실처럼 생긴 도서관은 돔 형식의 지붕을 따라 끝없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2층에서 더 올라가자 공간이 줄어들면서 조명의 빛도 약해져 모닥불을 지핀 겨울 산속의 오두막처럼 아늑한 분위기였다.

또각또각.

시녀에게서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리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몇 걸음 앞서 걷고 있는 그가 보였다. 찰랑거리는 검은색 머리와 잘록한 허리, 옷에 가려져 있지만 탄력이 있어 보이는 엉덩이, 치맛자락 아래로 뻗은 검은색 타이즈는 그것이 감싸고 있는 쭉 뻗은 다리의 각선미를 상상하게 했다.

사서복에 어떻게 손을 댄 건지 저 옷을 입고 있으니 위로 솟은 키도 그렇게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섹시함만 부각되었다.

자세히 보면 분명히 이상한 점이 눈에 띌 테지만 언뜻 보아서는 그저 키가 크고 체격이 조금 건장한 미녀로 보일 뿐이었다. 하루 이틀 허투루 준비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리체는 곡선이 잘 보이는 하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엉덩이는 어떻게 한 거야?”

앞서가던 그가 걸음을 늦추고 고개를 살짝 틀었다. 전보다 날카로워진 턱선과 남자답게 툭 튀어나온 울대가 보였다. 시녀가 있었을 때는 고개를 숙여 가렸던 그 목젖이었다.

“패드가 잘 나와 있던데?”

레이몬드가 여자처럼 툭 튀어나와 있는 제 엉덩이를 허벅지에서부터 쓸어 올렸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끝을 주시했다. 머리 위에서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떨어져 나왔다. 리체가 시선을 올리자 레이몬드가 입꼬리를 휘었다. 여자처럼 화장한 얼굴이 본래 퇴폐적이었던 그의 분위기와 이상할 만큼 썩 잘 어울렸다. 미소 짓는 그는 무척 섹시했다. 리체가 멍하니 쳐다보자 레이몬드가 속삭였다.

“마음에 들어?”

리체는 어느새 바싹 가까워진 그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코끝에서 해안가의 냄새가 맡아졌다. 질척한 바다 같았던 페로몬이 지금은 한여름,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사장을 닮아 있었다.

“조금? 웃긴데…… 예쁘다, 레이.”

리체가 숨을 길게 들이마실 때 레이몬드도 그녀의 목에 코를 파묻고 체취를 흠뻑 들이켰다. 한 단체의 수장이 되면서 무게감을 갖추고 전보다 사내다운 사내가 되었던 레이몬드였다. 오지에 처박혔다가 살아 나왔음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건방진 입매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일그러졌다.

“보고 싶었어, 씨발.”

입술이 부딪쳐 왔다. 리체가 입을 열어 주자 뜨거운 혀가 들어왔다. 키스하며 레이몬드가 그녀의 머리카락 안으로 다급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명주실 같은 검은 머리칼을 휘저으며 다른 손으로는 어깨와 등과 허리 따위를 마구잡이로 매만지고 쓸었다. 손길은 거칠었지만 그간의 그리움이 고스란히 느껴져 리체는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손을 더 내린 레이몬드가 치맛자락 위로 리체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흣!”

입술이 떨어지자 레이몬드가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아, 하아. 리체는 격한 키스에 고르지 못한 숨을 가다듬었다. 그걸 핥는 눈으로 응시하던 레이몬드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젖은 입술로 이마와 관자놀이를 꾹꾹 찍어 댔다. 리체의 머리칼에도 코를 대며 체취를 들이마셨다.

“아, 좋아. 씨발, 이 살 냄새가 계속 생각나서 돌아 버리는 줄 알았어.”

걱정하고 있던 그가 멀쩡하게(그렇다기엔 다소 기괴한 모습이긴 했다.) 돌아오자 리체도 마음이 편안했다. 각인한 알파가 필요했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던지라, 폐부를 깊숙하게 채우는 그의 페로몬과 체취에 눈이 가물가물하게 감겼다. 기분 좋은 안온함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구는 그의 품에 가만히 끌어 안겨 있던 리체는, 아까부터 신경을 쿡쿡 쑤시는 무언가에 결국 얼굴을 뗐다.

“이거, 너무 푹신한 것 같은데.”

리체가 눈앞을 가득 채우는 가슴을 보았다. 너무 커서 재킷이 저절로 벌어져 있었다. 검은 재킷 안, 팽팽해진 가슴 부근의 하얀색 셔츠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는 아래를 흘끗 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러곤 단추를 풀어 살구색 가슴 패드를 쑥 빼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근육이 쩍 갈라진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용병단에서 구르느라 생긴 흉터가 젖꼭지 부근에 새겨져 있었고, 그게 꽤 야릇했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이런 짓까지 할 정도로 감시가 심해서……. 읏.”

할짝. 벌어진 셔츠 사이 드러난 가슴에 혀를 댄 리체가 그대로 눈을 위로 올렸다. 커진 레이몬드의 동공을 보고 미묘하게 웃었다. 그리곤 손을 내려 손가락을 세우고, 치마 가운데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와 있는 곳을 간질였다. 레이몬드의 가슴 근육이 꿈틀거렸다.

후우, 숨을 내쉰 그녀가 네 손가락으로 발기한 성기를 쥘 듯 말 듯하며 손장난을 치자 레이몬드가 거친 숨을 쉬었다. 리체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레이몬드가 이글거리는 붉은색의 눈동자로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응시했다. 리체는 보란 듯이 혀를 내밀어 그의 납작한 갈색 젖꼭지를 할짝였다. 짐승처럼 길게 신음한 레이몬드가 그녀의 가슴을 매만졌다. 다른 손으로는 드레스 등 뒤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그대로 풀어 버리려는 순간, 몸이 밀렸다. 레이몬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억울한 얼굴에 리체는 쌀쌀맞을 정도로 모범적인 얼굴로 말했다.

“도서관이잖아.”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도서관에선 책을 읽어야지.”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내가 왜?”

리체는 한쪽 눈을 치켜올리는 한편, 내심으로는 혀를 내밀었다. 레이몬드는 너무 막무가내다. 인내심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방으로 가면 되잖아.”

그녀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레이몬드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리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꼴을 한 이유를 잊은 거야? 얀테의 눈에라도 띄면 어쩌려고? 또 전쟁터에 가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 않겠어.”

그라우지의 공간 이동 마법에 당하기 이전에는 황제의 명으로 사납다는 야만족을 상대로 한 전선에 내밀렸던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불만은 가시지 않았는지 꾹 맞물린 입술이 꼭 토라진 어린아이의 그것 같았다. 누구라도 침대로 들일 수 있을 만큼 야하게 생긴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는 게 웃겼지만 리체는 겉으로는 여전히 규범이라곤 하나도 어기지 않을 사람처럼 엄격하게 굴었다.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그녀가 책장으로 걸어가며 그의 다리 사이를 흘끗했다.

“집어넣을 순 없어? 보기 좀 그래.”

레이몬드가 고개를 숙였다. 평평한 검은색 치마가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치마를 뚫고 나올 것처럼 발기한 성기 위로 주먹을 눌렀다.

“존나 못됐어.”

리체의 등 뒤로 원망 어린 시선이 꽂혔다.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책장에 가득한 책을 둘러보았다. 1, 2층의 책도 읽을 것이 많아 3층엔 올라오지 않았었는데, 이곳엔 1, 2층과 달리 꽤 진지한 주제의 책들이 많았다. 다만 군데군데 쌓인 먼지와 거미줄이 보이는 것을 보니 관리는 받지 못한 형편인 듯했다. 하긴 게으른 사서가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이곳까지 돌볼 것 같지는 않다. 개중 흥미로운 제목을 발견한 리체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등 뒤가 묵직해졌다.

그녀를 끌어안은 레이몬드가 입술로 귓불을 물었다. 잘근잘근 깨물다가 귓바퀴로 훅, 바람을 불었다.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린 리체의 귀에 속삭임이 흘러들어 왔다.

“그래도 네가 좋아.”

리체는 그에게 안긴 채로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몬드는 막무가내다. 성가시고, 귀찮기도 하다. 그래도 귀엽다. 리체는 웃음을 뚝 그치고 말했다.

“한 달 동안 뭐 하고 살았어?”

리체의 질문에 레이몬드가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자유로워진 리체는 책을 올려다보며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 미친 늙은이가 정말 날 죽이려고 했어.”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그라우지에 대한 비난이었다. 마치 쟤가 나 때렸어, 하며 칭얼거리는 소년 같아 리체가 그를 슬쩍 돌아보았다.

“나한테 이르는 거야?”

“응.”

리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곱게 내린 채, 화장한 예쁜 얼굴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웃음에 레이몬드의 불만 가득한 얼굴도 풀어졌다. 그는 몇 달 사이 꽤 성숙해진 눈빛에 그녀를 담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리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똑똑한 놈들은 상종하면 안 돼. 뱃속에 어떤 흉심을 품고 있을 줄 알고.”

‘쟤가 나 때렸어. 혼내 줘.’가 아니라 ‘쟤가 나 때렸어. 못된 놈이니 친해지지 마.’였다.

리체는 고개를 끄덕여 주며 책을 뽑아내기 위해 책장으로 손을 뻗었다.

“한 달 떨어져 있었는데도, 힘들었어.”

“나도.”

리체는 뒷모습을 보인 채 대꾸했다. 뒤에서 흠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대답을 바란 말이 아니었나 보다.

“한 달이나 안 보여서 걱정했어.”

“응…….”

음탕한 말을 쉴 틈 없이 지껄이던 입이 웬일인지 얌전했다. 쑥스러움이 밴 대꾸에 리체의 뺨에 볼우물이 파였다. 이쪽이 침묵하면 불도저처럼 퍼부어 대면서, 되레 자신이 적극적으로 굴면 부끄러워하다니.

우물쭈물하는 침묵에 괜히 가슴이 간지러워졌다. 리체는 책에 집중하는 척했다. 눈에 띄었던 책은 책장의 꽤 위쪽에 있었다. 리체는 까치발을 들어 책을 건드렸다. 그대로 책을 빼내려던 그녀는 그 위에 얹어진 책들이 들썩이자 눈썹을 까딱였다. 사서가 책 정리도 제대로 안 했는지, 지금 보니 꽂힌 책 위에 또 책이 가득했다. 그녀로 인해 밑에 있던 책이 꺼내지며 덩달아 위에 있던 책들도 같이 딸려 나오고 있었다. 이미 반 이상 뽑힌 탓에 손을 떼기도 애매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쌓인 책이 후두둑 떨어지고 말 것이다.

“레이, 잠깐 도와줘…….”

치맛자락이 올라가는 느낌에 리체는 말을 멈추었다.

“뭐 하는 거야?”

“아까부터 여기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무슨 냄새?”

“야한 냄새.”

그럴 줄 알았다. 리체가 한숨을 푹 쉬었다.

“헛소리 하지 말고 비켜.”

“그러다가 떨어지겠는데.”

리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울어지던 책이 책장으로 약간 들어갔다. 리체의 키가 작아 빠져나온 책을 완전히 넣을 수가 없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는 리체의 치맛자락을 들춘 레이몬드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허벅지에 그의 머리카락이 닿았다. 부드러운 곱슬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다리를 간질이자 힘이 풀렸다. 리체는 책장에서 갸우뚱하는 책을 아슬아슬하게 바라보았다.

“레이, 그만해. 이러다 다 떨어져.”

한편 레이몬드는 어두운 치마 안에서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의 다리 사이를 응시했다. 하얀색 레이스 팬티에서 희미하게 야릇한 냄새가 났다. 페로몬이 아닌, 온전한 리체의 냄새였다. 레이몬드는 솟아오르는 정염을 참지 못하고 대뜸 혀를 내밀었다. 뾰족한 혀끝을 팬티와 함께 질구에 찔러 넣었다.

“흑!”

두꺼운 치맛자락에 막혀 리체의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는 허벅지에 뺨을 비벼 대며 레이몬드는 취한 것처럼 혀를 놀렸다. 곧이어 그녀의 애액과 그의 타액으로 팬티가 축축해졌다. 레이몬드는 검지로 팬티를 옆으로 밀쳐 냈다. 그녀의 냄새가 훨씬 진해졌다. 그는 무심코 혀로 입술을 할짝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 감상을 하는 것처럼 촉촉해진 분홍빛 살점을 홀린 눈으로 관찰했다. 보이는 것만으로도 느끼는지 빠끔거리는 구멍에서 진득한 애액이 주룩 흘러내렸다. 통통한 보짓살에서부터 허벅지까지 느리게 흐르는 한 줄기 애액을 보는 순간, 레이몬드가 그녀의 음부로 달려들었다.

입을 벌리고 거칠게 빨아들이자 허벅지의 경련이 더 심해졌다. 흐윽! 끊어질 것처럼 애절한 신음을 들은 레이몬드의 혀 놀림이 보다 집요하게 변했다. 통통하고 탄력 있는 엉덩이에 얼굴이 비벼지자 레이몬드는 혀로 구멍 주변을 할짝이며 중얼거렸다.

“냄새가 엄청 야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더 진하게 느껴져.”

리체가 뭐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하라는 말 같았지만 정신이 반쯤 나간 레이몬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짙은 체취와 부드러운 살에 취해 혀를 마구 놀렸다. 넓적한 혀를 뾰족하게 만들고 질구에 쑤셔 넣었다. 혀로 삽입을 하는 것처럼 왕복 운동을 하자 새어 나오는 애액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레이몬드는 손가락으로 아직 발기하지 않은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며 애액을 빨아 마셨다. 그러다 클리토리스가 통통해지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는 마구 비볐다.

“레이, 잠깐, 나, 진짜…… 힘 빠져……!”

리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레이몬드는 머릿속이 짜릿했다. 그녀가 평소의 이성적인 모습을 잃어버릴 때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흥분이 밀려왔다.

“그럼 더 괴롭히고 싶어지잖아.”

치맛자락을 헤치고 나온 레이몬드는 눈가를 붉게 물들인 리체를 보고 자신의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그가 입고 있는 것은 바지가 아니라 치마였다. 평소처럼 편하게 풀어내지 못하자 욕설을 짓씹고 치마를 다급하게 위로 끌어 올렸다. 검은색 스타킹을 아래로 내리니 답답하게 구겨져 있던 성기가 크게 튕겨 올라 리체의 허리를 쳤다.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이 자세로 할 건 아니지?”

“넣을 건데?”

“아니, 잠깐만……!”

리체가 바로 위에서 들썩임이 심해지는 책을 보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녀의 풍성한 치마를 한 번에 위로 올린 레이몬드가 질척하게 젖은 음부 안으로 허리를 쳐올렸다. 녹녹하게 젖은 음부에 그의 것이 빠르고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리체는 입을 벌린 채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서 책이 미끄러질 듯 말 듯했다.

“……아!”

뒤늦게 신음이 터짐과 동시에 레이몬드가 추삽질을 시작했다. 성기가 아래에서 위로 쑤걱대자 리체는 엉덩이를 뒤로 내민 채 몸을 움찔거렸다. 책을 신경 쓰느라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녀의 반응을 더 이끌어 내려 했을 레이몬드였으나 지금은 달랐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곤란해하는 리체를 보고는 입술을 핥았다. 안에 들어와 있는 성기의 부피가 커지자, 영문을 모르는 리체는 눈을 세모꼴로 떴다. 그 상태로 그를 노려보았다가 광기가 흐르는 레이몬드의 눈을 보고 흠칫했다.

“레이?”

레이몬드가 책장을 손으로 짚으며 그녀에게 키스했다. 달콤한 키스 후 떨어진 입술이 속삭였다.

“책이 손에 안 닿아? 내가 위로 올려 줄 테니까, 잘 빼내 봐.”

“뭐? 무슨 짓을 하려고…… 하윽!”

레이몬드가 무릎을 굽힌 채 위로 강하게 쳐올렸다. 그녀의 치마를 고삐처럼 쥐고 미친 듯이 추삽질을 했다.

“앗, 흐으, 아, 악! 너무, 빨라, 흣! 아, 레이!”

“흐으, 너무, 좋아, 리체. 아…… 좋아.”

마침내 리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균형을 잃은 책이 그대로 떨어지려는 순간.

탁!

보지도 않고 한 손으로 책을 막은 레이몬드가 리체에게 성기를 쑤셔 박았다. 다리를 떠는 그녀의 머리에 키스하며 그대로 책을 집어넣었다. 까치발을 하면서까지 빼내려 했던 책이 간단히 들어가자 리체는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레이몬드가 그녀의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흘러내린 치마가 아래로 쏟아졌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흔들리는 소리가 추삽질 소리와 뒤엉켰다.

“흑, 아, 자세, 불편, 힘, 들어!”

레이몬드는 버둥거리는 리체의 손을 잡아 책장을 붙들게 했다. 그러곤 거슬리는 치맛자락을 한손에 움켜쥔 채 허리를 앞으로 처박았다.

“흣, 아, 좋아……. 너무 좋아, 리체.”

뚝, 교접 부위로부터 진득한 애액이 떨어졌다. 금세 도서관 바닥에 음란한 웅덩이가 고였다. 그걸 본 레이몬드가 야릇한 표정으로 교성을 참는 리체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맞붙였다. 성기가 왕복 운동을 하는 지점을 더듬자 리체가 진저리를 쳤다.

‘손가락을 넣으려는 건 아니겠지?’

성행위를 하는 데 신체 모든 부위를 쓰고자 하는 레이몬드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안 그래도 벅찬 자세인데 손가락까지 삽입된다면 발을 딛고 설 수 없을 터였다. 그를 떨쳐 내고 싶었지만 책장에서 손을 뗀다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불안감에 책장을 움켜쥔 손에 힘만 가득 들어갈 뿐이었다.

레이몬드는 손을 거꾸로 뒤집어 리체의 음부 위에 딱 붙였다. 손가락 끝에 보지를 드나드는 자지 기둥이 쓸렸다.

“하아.”

만족감이 그득 섞인 뜨거운 한숨이 리체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퍽! 짐짓 나른한 한숨과 달리 허리 아래 움직임은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양심 없는 추삽질이었다. 리체의 신음이 커지자 레이몬드가 입을 벌려 그녀의 발그레한 뺨을 합, 물었다. 볼살이 쭉 빨렸다.

“그렇게 소리 내면 다 들려. 황제의 시녀가 이 소리를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 하지, 마!”

리체가 도리질을 쳤다. 레이몬드는 킬킬 웃으며 입술로 괴롭힌 그녀의 뺨을 혀로 길게 핥았다.

“복숭아 맛이 나는 것 같아.”

“아! 레이, 그만!”

“또, 또 소리 커진다. 뺨 깨물어 보고 싶어. 책을 읽으러 간다던 황후 폐하가 볼이 빨개진 채 나타나면 이상한 소문이 돌 거야. 키스 마크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응? 감히 누가 황후의 뺨에 키스 마크를 새길 거라 생각하겠어.”

“하으, 으읏, 히, 힘 풀려……. 못, 못 서 있겠어.”

책장을 붙들던 손이 주룩 미끄러졌다. 앞으로 쓰러지는 그녀의 손을 붙잡은 레이몬드가 그대로 책장을 잡았다. 그녀의 손등을 감싼 채로 책장을 대신 지탱하고는 질척해진 성기로 질 깊숙한 곳을 휘저었다. 뭉툭한 귀두가 오돌토돌한 안쪽을 강하게 긁고 지나가는 순간 리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흐……읏.”

부들부들 경련하는 다리 사이로 애액이 물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맞닿은 붉은색 거웃까지 흠뻑 젖어 버리자 레이몬드의 눈가가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좋았어?”

그의 팔에 한쪽 무릎이 걸린 불편한 상태로도 절정에 달한 리체는 뭐라고 말도 하지 못했다. 계속 가고 있는 상태라 여진 같은 경련이 이어지는 그녀를 레이몬드는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며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그러곤 드러난 관자놀이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말도 못 하겠어? 그렇게 좋았어?”

“흐으으…….”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을 쿡 찔렀다. 잔뜩 민감해져 수축한 질이 자극당하자 리체가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저에게서 벗어나려는 말랑한 여체를 강하게 끌어안은 레이몬드가 귓가에 속삭였다.

“궁금한 게 있어, 리체.”

“아!”

“도서관에서 음란한 짓을 하면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

말을 하는 도중에도 레이몬드가 허리를 움직였다.

“아으, 흣…….”

“하아, 황후 폐하. 도서관에서는 정숙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야한 물을 뚝뚝 흘리시고는.”

정중한 말투에 비해 내뱉는 말은 천박했다. 황후에 대한 존중이라곤 없으면서 호칭만 황후라 부르는 것은 놀림받는 기분이었다. 리체가 곁눈질로 흘겨보자 레이몬드가 거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서가 돌아와서 이걸 본다면 의아하겠어요. 이게 교양 있는 황후 폐하의 음란한 구멍에서 흘러나온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할 텐데.”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닦고 가야지! 앗!”

레이몬드가 손가락에 클리토리스를 끼우고는 그대로 당겼다. 민감한 살점이 무자비하게 자극당하자 리체가 고개를 젖혔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무게를 안정적으로 받아 내고 느긋하게 그녀의 반응을 즐겼다.

그러나 여유를 부리던 것도 잠시, 열락에 들뜬 그녀의 표정을 보자 못 견디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땀에 젖은 이마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감미롭다기엔 다소 거친 후희를 즐기던 리체는 안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성기의 감각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이몬드가 주문을 외듯 녹녹하게 속삭였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임신해 버리자.”

“이, 양심 없는,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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