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리체 양.”
힘없는 표정으로 침대에 누운 리체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라우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평소처럼 여유로운 얼굴이었지만 희미하게 걱정하는 기색이 묻어나왔다.
“레베카에게 들었어요. 몸은 괜찮아요?”
리체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마탑에 배정된 치료사는요? 당신 부관이 불러 준다고 했는데.”
침대에 걸터앉은 그라우지가 리체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표정이 굳어졌다.
“뜨겁네요.”
“이마만이 아니에요.”
리체의 얼굴은 심각했다. 열이 오른 건 오전 나절부터였다.
‘이번에도야. 얀테 황태자를 생각하니 몸이 이상해졌어.’
그녀는 제 몸에 생긴 문제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우연인가 했으나 오늘 확신했다. 며칠 전, 얀테에 대해 깊숙하게 생각했을 때 가슴에서부터 번진 고통스러운 통증. 온몸에 번지던 열.
마치 발정기와 같은 현상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가라앉고는 했다. 그러나 증세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얀테를 떠올리기만 해도 지끈거리는 통증이 퍼지더니 오늘은 얀테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피부에 땅거미처럼 열이 번졌다.
리체의 몸을 주물주물 만지던 그라우지가 짙어진 페로몬을 맡고 미심쩍게 고개를 갸웃했다.
“발정긴가?”
“억제제 먹었어요. 발정기는 아니에요.”
히트 사이클 때처럼 큰 고통은 아니었다. 하나 몸살이 온 것처럼 온몸에 힘이 없었다.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는데…….’
라스카와 레이몬드, 그리고 카이로. 특히 카이로의 얼굴이 떠오르자 리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혹시 이거?”
눈을 뜨자 그라우지가 약통을 흔들었다. 레베카가 알려 주었던 그 약통이었다.
“맞아요. 그거.”
라스카의 말에 따르면 후천적 오메가에게 옵세진은 효과가 없지만, 혹시나 싶어 먹었던 것인데 역시나 효과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안 좋아지고 있는 듯했다.
라스카가 챙겨 주었던 약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열이 가라앉는 듯하더니 곧 언제 그랬냐는 양 치솟았다. 후천적 오메가를 위한 억제제도 그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약통을 살피던 그라우지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거 옵세진이 아니네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인 그라우지가 뒤쪽에 있는 선반을 가리켰다.
“저기에서 꺼내 먹었죠?”
“……네.”
뭐가 문제인가. 그라우지의 표정이 불길하게 느껴져서 눈썹을 모았다. “아,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그라우지는 리체가 아픈 와중에도 표정으로 짜증을 내자 털어놓았다.
“옵세진처럼 생겼지만 사실 흥분제예요.”
리체는 입을 떡 벌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분명 당신 부관이 옵세진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옵세진은 이거고. 이건 겉모습만 비슷한 흥분제.”
그라우지가 선반에서 같은 모양의 약통을 꺼내 왔다. 선반의 약통은 대부분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그게, 무슨…….”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은 리체의 시선이 약통 안을 번갈아 오갔다. 정말로 똑 닮은 약이 두 약통에 들어 있었다. 그라우지가 약통의 바닥이 보이게 뒤집었다. 바닥에 붙은 라벨지에는 서로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니, 왜 그, 그런 게 거기 있어요.”
억울해서 묻자 그라우지는 난감해하는데도 이상하게 뻔뻔해 보이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기분 좋아지려고. 그거 먹으면 좆물이 물이 될 때까지 뽑아낼 수 있거든요.”
“변태 새끼.”
욕을 들어먹었는데도 그라우지는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욕설에 흥분했는지 눈알이 한층 번들거렸다.
“하하. 어떡해요. 그거 약효가 좀 센데.”
그라우지가 손바닥으로 리체의 가슴을 덮었다. 민감한 몸이 곧장 반응했다. 허리를 꿈틀거리는 그녀의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바로 아래 위치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라우지가 색욕이 넘실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치료사보다 더 효과적인 약이 여깄잖아요.”
“어디에…….”
“여기.”
그라우지가 그녀의 손을 가랑이 사이로 가져다 댔다. 후끈거리는 열기에 오므라드는 손가락을 억지로 펴서 성기를 휘감게 하며 그라우지가 그녀의 귓바퀴를 가볍게 물었다.
“몸에 좋은 약 먹읍시다, 리체 양.”
음부를 문지르던 손바닥을 떼자 투명한 액체가 쭈욱 길게 늘어졌다. 발갛게 홍조가 도는 얼굴로 그라우지가 입맛을 다셨다.
“발정기 아닌 거 맞아요? 발정이 제대로 났는데.”
나직한 중얼거림 아래 침대에 대자로 몸을 뉘인 리체가 다리를 파르르 떨었다. 방금까지 그라우지의 손이 다리 사이를 잔뜩 희롱한 터라 성감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그가 엄지와 검지를 집게처럼 벌린 채 클리를 사이에 두고 위아래로 마구 문질렀다.
“흐으으으응!”
리체가 다리를 모았다. 허벅지 사이에 낀 손목을 비틀며 그라우지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안 되죠, 이러면. 더 느껴요, 더. 약 기운을 모두 밑구멍으로 쏟아 버리는 거예요. 리체 양, 내 말 들려요?”
리체는 반개한 눈으로 그라우지를 올려다보았다. 열 오른 눈, 풀린 초점에 그라우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미소를 짓는 듯하다.
“어떡하죠. 열이 너무 오르면 머리가 이상해질 텐데. 뇌가 곤죽이 돼 버릴 거라고요.”
“흐…… 흐으. 안, 돼애.”
몸이 이상하다. 이상해. 이상해. 리체는 제 맘대로 되지 않는 육체 반응에 병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리체는 덜컥 걱정이 됐다. 그라우지가 이렇게 음부를 주물럭거리는데도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점점 더 그의 손길을 갈구한다. 욕망이 끝없이 솟구쳤다. 정말 발정기라도 온 것처럼.
울 것처럼 칭얼거리는 리체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라우지가 손가락을 구멍에 강하게 꽂아 넣었다.
“이렇게 하면 시원해질 거예요.”
“무슨…….”
자지 주사 같은 소리를 하는 건가. 열이 올라 몽롱한 와중에도 신경질을 내려는 찰나, 자궁 가까이 꽂힌 그라우지의 손가락으로부터 시원한 기운을 느낀 리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라우지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 온 얼굴에 키스를 퍼부으며 손가락을 쑤셔 댔다.
“마법사란 전지전능한 존재랍니다.”
“흐, 흐응. 기분, 이상해.”
“인간의 신이죠.”
오만하게 말한 그라우지가 리체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휘저었다. 내벽의 오돌토돌한 요철이 강하게 긁히자 리체의 눈이 홉뜨였다. 살짝 뜬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라우지는 나른하게 웃고 엄지로 우뚝 선 음핵을 좌우로 비벼 댔다. 리체의 교성이 고양이처럼 높아졌다.
“하앗! 흑, 이상, 아, 좋, 아!”
“이상하단 거예요, 좋다는 거예요? 똑바로 말해야지.”
그라우지는 몸을 비트는 리체의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발그레하게 변해서 파들파들 떠는 리체의 얼굴을 바라보고 만족스러운 기색을 희미하게 띤 채 중얼거렸다.
“하긴 구분할 필요가 있나.”
그가 리체의 달아오른 귓바퀴에 연신 키스했다.
“가슴이 부어올랐어요. 이걸 좋아하는 게 그대로 보여요.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빨아 줄까요?”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 불명의 반응이었지만 그라우지는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 곧장 고개를 숙여 빳빳하게 선 유두를 입 안으로 쏙 빨아들였다. 혓바닥으로 유두 전체를 누른 채 웅얼거렸다.
“이렇게 빨아 주니까 좋아요?”
“하, 아, 으, 응!”
기분이 좋을 때는 이성에서 본능으로 스위치가 전환되어 지나치게 솔직해지는 리체였다.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변한 그녀의 얼굴은 지나치게 야릇해서, 그라우지의 낯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자지 먹고 싶어요? 솔직하게 굴어야 돼요.”
“으, 으응. 응!”
“잘했어요.”
쪽, 뺨과 귀 사이 관자놀이에 입을 맞춘 그라우지가 질척한 늪 같은 구멍에서 손가락을 빼내자 애액이 진득하게 늘어졌다.
잔뜩 쑤셔 대던 손가락을 잃은 구멍이 벌름거렸다.
“아쉬워하지 말아요.”
흉흉하게 곤두선 검붉은 성기가 꽂혀 들어갔다.
“금방 먹여 줄 테니까.”
“학!”
크게 눈을 뜨고 리체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손가락으로 충분히 넓혔다고 하나 잔뜩 부풀어 오른 성기에는 못 미쳤다. 안을 꽉 채우는 감각에 리체의 눈꼬리에 찔끔 눈물이 맺혔다.
삽입의 충격을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그라우지가 마구잡이로 허리를 들썩여 자궁까지 쾅쾅 박아 댔다.
“쉼 없이 하는 게 좋죠? 좋잖아. 안이 막 간지러운데 내 자지가 시원하게 긁어 주니까, 속이 시원하잖아요. 더 강하게 해 주는 게 좋아요? 응? 리체 양, 말해 봐요. 아, 말하기 힘들면 고개라도 끄덕여 봐.”
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성기가 뿌리 끝까지 구멍에 파묻혔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강한 박음질에 뒤늦게 고환이 말랑한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내 딴딴해진 고환이 엉덩이를 계속적으로 세차게 때려 대자 리체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마찰은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이상하게 몸은 점차로 시원해졌다. 열탕에 빠진 것 같은 감각이 산뜻한 섹스의 쾌감으로 덮여 버렸다.
마법사. 그것도 마법의 종주와 하는 섹스는 환상 속 세계에서 치루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섹스를 하면 할수록 시원해진다니, 이 무슨 기이한 현상인가.
색다른 감각에 리체는 쾌감에 떨면서도 두 눈에 초점이 또렷해졌다. 그녀는 좀 전까지 괴롭게 달라붙어 있던 징그러운 열감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놀라움에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라우지를 바라보았다.
“아아.” 하고 탄성을 터뜨린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야하게 웃었다.
“이런 맛이었구나, 리체 양은. 가슴만큼 맛있어요.”
앙, 소리를 내며 유두를 입 안에 물고 혀로 그 끝을 희롱하자 리체는 신음하며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거미줄처럼 길고 얇은 은발 안에 손을 집어넣고 가슴을 들썩였다. 입 안으로 들어온 젖꼭지를 강하게 빨아들이는 그라우지의 뺨에 뽁, 하고 우물이 패였다.
그라우지가 입을 떼자 잔뜩 적셔진 유두가 차가운 공기를 맞아 유륜까지 오돌토돌하게 곤두섰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유두를 지그시 내려다보다 손가락으로 튕겼다.
“아!”
허리를 흔들며 그라우지는 감상하듯 리체를 내려다보았다. 잔뜩 젖은 가슴을 드러내고 엉덩이를 들썩이는 리체가 야릇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절경이네요.”
“…….”
“보기만 해도 쌀 것 같은 모습이에요, 리체 양.”
아직도 풀리지 않은 욕심이 그득한 손으로 그라우지가 발딱 서 있는 음핵을 짓누르고 좌우로 강하게 문질렀다. 그가 보다 편하게 만질 수 있도록 허리를 앞으로 내밀고 리체가 그라우지의 허리에 다리를 휘감았다. 저절로 흔들리는 허리에 그라우지가 “큿” 하고 참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빠져나올 때쯤 강하게 옥죄고 들어올 때는 힘을 빼 더 강하게 들어오게 하는 몸짓. 어느새 본능적으로 방중술을 익힌 리체의 몸은 자지를 손처럼 쥐고 제멋대로 흔들고 있었다. 허리가 속절없이 빠지는 기분에 그라우지의 이마와 관자놀이에 핏줄이 바짝 곤두섰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요? 누가 당신에게 이런 걸 가르친 거예요? 몇 명이나 잡아먹었길래 몸이 이렇게 야해지는 거야.”
사납게 웃은 그라우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짜부라진 가슴의 하얀 살이 손가락 사이로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하앙, 아, 아파, 아파!”
“거짓말하지 마요. 기분 좋은 주제에.”
리체의 입술을 집어삼킨 그라우지가 곧장 혀를 집어넣고 휘저었다. 열기 때문에 녹진해진 입 안에 시원한 기운이 번졌다. 기분이 좋아지는 시원함이었다. 그를 좇아 리체가 혀를 내밀자 그라우지가 놀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애액으로 가득 젖은 손으로 그녀의 목과 턱을 움켜쥔 그가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역시 눈을 감지 않은 리체는 게게 풀린 눈으로 그라우지의 타는 듯한 시선을 받아 냈다.
“이런 생각, 흐읏, 전에는 해 본 적 없는데 말이죠.”
“…….”
“당신과 내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네요. 읏. 그만 좀 조이지 그래요?”
클클거린 그라우지가 더 강하게 성기를 쳐올렸다. 강한 힘에 뒤로 밀려나는 리체의 머리에 손을 올려 고정한 그는 그대로 연속해서 성기를 박아 넣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강한 삽입을 연달아 받아들이는 리체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녀의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을 핥아 올린 그라우지는 머리끝까지 고조되는 흥분감에 미간을 험악하게 구겼다.
능글능글하니 사람 좋은 얼굴을 하던 그의 새로운 얼굴을 보면서 리체는 입을 벌린 채 짐승처럼 헐떡였다.
“하앙! 하, 가, 갈 것 같아!”
“아기, 흣, 갖고 싶어요. 리체 양 자궁 깊숙이 좆물을 쏴 줄 테니까, 예쁘게 수정, 큿, 시켜 봐요!”
“아아!”
“흐윽!”
정자가 꽉 찬 씨물이 질 깊숙한 곳에 뜨겁게 퍼부어졌다. 질 안에서 꿈틀거리는 성기의 감각에 리체가 몸을 바르르 떨자 그녀의 턱을 움켜쥔 채 그라우지가 거친 숨을 흘렸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뱀이 얽히는 것처럼 섞였다.
그라우지는 발갛게 달아오른 리체를 훑어보다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미간에 입을 맞추었다.
“빨간 복숭아 같아. 땀 냄새 나는 살도, 달달해서 씹어 먹고 싶군요.”
“하아, 아…….”
말없이 숨만 몰아쉬는 그녀를 바라보던 그라우지의 성기가 다시 불끈 힘을 얻었다. 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몸은 어때요? 아직 열이 좀 남은 것 같은데, 한 번 더 할까요?”
컨디션은 이제 상당히 괜찮아졌다. 우습지만 자지 주사라는 말이 통용되는 상황이었다.
리체가 힘 빠진 기색으로 고개를 젓자 그라우지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내려놓더니 고민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아직 열이 있어요. 조금만 더, 치료해 줄게요.”
다정한 말에 욕망이 가득했다. 제 욕심을 채우려고 혈안인 파렴치한의 행태에 리체가 기함하려는 찰나, 찌걱, 아직 안에 파묻혀 있던 성기가 움직였다.
“하악!”
리체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 * *
자지 주사를 잔뜩 맞고 나가떨어진 리체를 옆에 둔 채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던 그라우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리체의 눈치를 보고, 그녀가 완전히 곯아떨어졌음을 확인하고는 질린 기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눈에 담긴 비난을 읽은 그라우지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진짜 음침하네요, 탑주님.”
“엿들으니까 좋아?”
“엿듣고 싶어서 엿들었나요. 바로 옆방에서 그러고 계시는데 어떻게 못 들어요.”
투덜거리던 레베카가 스톨 위에 엎어진 약통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 짧은 사이에 사기를 칠 생각을 하셨어요?”
마법으로 리체의 귀에 귀마개를 끼운 그라우지가 스톨 위의 약통을 각각 손에 쥐었다. 흥분제라고 적혔던 약통이 스륵, 사라지고 원래의 글자가 떠올랐다.
그라우지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장난 좀 쳐 본 거지.”
“으으.”
“결과적으론 잘된 일 아니야. 나에 대한 거부감 없이 날 받아들이고, 열도 내렸어.”
“리체 양, 정말 발정기 아니에요? 옵세진을 복용했는데도 효과가 조금도 없다니…….”
남은 약통을 둘러본 레베카가 의문스럽게 중얼거렸다. 리체가 먹은 건 옵세진이 맞았다. 그러나 흥분제라는 그라우지의 말이 먹힌 것은, 옵세진의 효과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체로서는 약이 진짜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을 테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그라우지가 대단한 것이었다.
“발정기 아니야.”
그라우지는 곤히 잠든 리체의 뺨을 매만졌다.
“발정기와 비슷한데 발정기가 아닌 것. 마치 발정기의 전조 증상처럼…….”
그라우지의 눈이 슬며시 가라앉았다.
“내 마법으로도 열을 완전히 몰아내기가 어려웠으니.”
“…….”
“아무래도 라스카 메디치나가 필요하겠는걸.”
점차 낮아지는 목소리가 끝내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퉁명스러워졌다.
* * *
‘돌아가야 해.’
근래 특히 수없이 많이 떠올린 생각을 하며 리체는 얼굴을 찡그렸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지라, 귀향까지 5년을 예상으로 잡았던 시간이 그라우지의 활약으로 훅 줄어들었는데도 느긋해지기는커녕 하루하루가 조급했다.
정해진 궤도를 이탈한 바퀴처럼 이상하게 변해 버린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아슬아슬했고, 거기에 더해 발정기인 듯 아닌 듯 엉망이 된 몸 상태가 조급증을 부채질했다.
퀸을 그렇게 떠나오고 나서, 그녀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라우지가 어떻게 쳐 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덕분에 골치 아픈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잊을 만하면 그들이 떠올라 신경이 쓰였다.
‘카이로……. 많이 충격받았겠지.’
레이몬드에게서 들었던 이델리와의 일화를 떠올려 보면, 카이로는 누군가 부리는 농간에 대해 굉장히 단호한 편이었다.
그와 만나고 있었던 이델리가 레이몬드와 키스했다는 걸 알고는 그녀가 지금까지 데이트했던 여자든, 그 귀한 극우성 오메가든 상관없이 대번에 쳐 내 버렸으니. 뒤돌아보지 않는 단호한 면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잘된 일이야. 어차피 본 차원으로 넘어가면 끊어질 인연이었으니까.’
차라리 그럼 나을 것이다. 마음이 편해지겠지.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뚝뚝하지만 어딘지 애잔한 얼굴로, 얀테의 궁을 빠져나오던 자신을 안아 주던 카이로.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건 떠올리기 어려웠다. 정확히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마법진을 새로 그리다 말고 한 손으로 눈을 가린 리체의 드러난 입술에서 깊은 한숨이 샜다.
혼란스러웠던 그때, 더는 생각하지 말라는 듯 끌어안긴 강인하고 넉넉한 품. 곤란함이 생길 때마다 잡아 주던 손. 비바람이 몰아쳐도 쓰러지지 않을 고목처럼 단단한 품성…….
도움을 많이 받았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시 생각하던 리체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든 걸 알게 된 그에겐 이조차 기만이 될 것이다.
‘진심을 갖고 장난치는 것만큼 악질은 없다.’
오래전 연구소에 진력이 난다며 떠났던 동료가 무거운 눈으로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리체는 억지로 어깨를 추어올리며 가라앉은 기분을 일깨웠다.
‘레이몬드도 화가 났겠지.’
카이로는 그의 역린이었다. 클럽에서 모든 걸 알게 됐다면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라우지에게서 각인에 대해 들었다. 한 세기를 살아온 그라우지는 기록보다도 정확한 면이 있어서, 확실히 도움이 됐다.
영혼이 묶여 버린 오메가를 잃어버리면 불안증이 생기고, 불면증에 괴로워하다 마침내는 비극적인 선택을 한다는 말에 리체는 위태로웠던 레이몬드가 생각났다.
그라우지가 알고 있는 사례는 일전에 라스카가 설명해 주었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각인은 비극적이다. 또한 운명이다. 마음이 맞는다면 온 세상에 둘뿐이니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천국 대신 지옥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레이몬드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리체는 그에게 마음을 주지는 않았지만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둘 만큼 몰인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죽는 건 보기 싫다. 반 개월 전만 해도 이델리 그레이스에게 매달렸던 그를 알고 있으나, 지금의 그는 이전의 그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변해 버렸다.
그의 변태적인 취향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자신이 아니면 죽을 것처럼 목 졸린 표정을 짓는 그를 볼 때면 손을 내밀게 되었다. 내 일 아니라며 매몰차게 등 돌리는 건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마음 편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는 그녀에게 각인했다. 그녀가 돌아보지 않으면 해를 잃은 해바라기처럼 시들어 버릴 것이다.
레이몬드에 관해서 리체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본 차원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한 사람이니까. 카이로 때문에 충격받긴 했겠지만, 만나서 달래 주면 그만일 일이다……. 그런 생각과 달리 리체의 낯은 밝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라우지로부터 레이몬드가 마탑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마탑은 구조가 복잡하여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온갖 왜곡 마법이 걸려 있어 겉보기보다 넓지만, 그럼에도 만나고자 작정한다면 마주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나 그라우지가 방해하는 건가 싶었으나 그것도 아닌 듯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레이몬드는 그의 의지로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는 것이다. 그녀에게 진력이 났다면 다 때려치우고 떠나면 될 텐데 묵묵히 실험체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리체는 그의 속내를 꿰뚫기가 어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
고개를 저은 리체는 이내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날 퀸에 있었던 자가 더 있지 않은가. 라스카. 그의 고지식한 성격을 떠올리니 대번에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앞으로 라스카와는 끝이라고 봐야 되나?’
능력이 출중한 도움을 더는 받을 수 없다니, 약간 아쉬움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치정 사건이란 단어만 우습지 꽤 무서운 성질을 갖고 있어, 다시 만나면 배신감에 칼을 꺼내 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음전한 라스카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마지막으로 얀테가 떠올랐지만, 머릿속에 잔상이 맺히는 즉시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깨끗이 없애 버렸다.
‘그놈은 생각 말자.’
발정기도 아닌데 발정기처럼 몸이 달아오르는 이상한 현상이 찾아올까 저어되는 것도 있으나 그걸 떠나서라도 그에 대해선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얀테는 위험하고, 또한 불쾌하다.
어느새 허공에 멈춘 손으로 초크를 꽉 그러쥐었다. 다시 마법진을 그리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라우지가 왔나? 해서 고개를 들자 웬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을 연상하게 하는 치렁치렁한 로브가 발치에까지 내려와 있었다. 리체는 줄지어 걸어가는 마법사들을 볼 때마다 본 차원에서의 교복을 떠올리곤 했다.
순한 인상의 마법사는 그녀를 보더니 안도한 얼굴을 했다.
“여기 계셨군요. 탑주께서 찾으십니다.”
“그라우지가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글쎄요. 저는 전달받은 대로 말씀드리는 거라.”
마법사는 멋쩍은 기색으로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라우지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리체는 초크를 내려다보고, 주머니에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사람, 어디에 있다고요?”
마법사를 따라 걸어갔다. 그는 탑의 깊디깊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의 층계는 끝없이 이어져 셀 수 없었지만,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이상 문제없었다.
포털에 서서 휙 하는 순간 아래층이었다. 몇 번 반복하자 어느 순간 리체는 1층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순간 이동의 후유증으로 일순 위아래가 구분되지 않아 그녀는 눈을 꼭 감고 균형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이내 괜찮아져 눈을 뜨니 비틀거리며 한 발 떼는 마법사가 보였다. 그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다.
“괜찮아요?”
“아, 예에. 제가 순간 이동은 익숙하지 않다 보니.”
땀을 닦은 마법사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리체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의 뒤를 응시했다.
마법사가 그녀를 뒤돌아보자 그제야 리체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법사는 그녀를 힐끗거리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한 번 옆으로 오라고 권유했는데 리체는 웃으며 거절했다. 마법사는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그녀를 연신 바라보며 마탑의 건물을 빠져나갔다. 머리 위에서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지자 마법사의 파리한 얼굴에도 생기가 도는 듯했다.
마탑은 상인이 드나들기 어려운 깊은 숲속에 위치해 있지만 그렇다고 사찰의 암자에서 볼 법한 소박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바닥에 깔린 포석은 단단하기로 이름 높은 청석이었고, 인어가 정교하게 조각된 분수와 조경에 관심을 가지는 특이한 마법사들의 손길이 닿은 기암괴석과 희귀한 꽃들로 구석구석이 화려했다. 마법사들은 살랑거리는 꽃들엔 시선도 두지 않고 잰걸음을 옮겼다.
그가 숲의 경계를 이루는 그림자에 걸음을 디디려는 때, 마침내 리체는 입을 열었다.
“누구 사주를 받은 거예요?”
우뚝, 걸음이 멈추었다. 뒤를 돌아본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라우지가 부른 거 아니잖아요.”
마법사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표정을 굳혔다. 그 어설픈 얼굴을 비웃으며 리체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날 부를 때 누군가를 시킨 적이 없거든요. 언제든지 눈앞에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다른 사람을 통할 리 없죠.”
“…….”
“얀테 황태자인가요?”
천천히 몸을 돌린 마법사(마법사가 아닐지도 모른다)가 리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박해 보이던 인상이 야비하게 바뀌었다. 그의 속셈을 알고 있어서 그렇게 보인 걸지도 몰랐지만, 리체의 눈에는 그랬다.
“알면서 왜 따라왔나요?”
“얀테에게 할 말이 있어서.”
마법사가 입술을 움찔했다. 얀테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는 것이 기분 나쁜 얼굴이었다. 이쪽을 꾀어서 납치하려 한 주제에 그런 표정을 짓다니.
한쪽 손을 허리에 놓고 다른 손으론 턱을 매만지며 리체가 눈썹을 까딱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 몸이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은데…….”
“몸?”
“수작을 부리는 거면 좋지 않다고 말, 전해 줘요.”
그게 다냐며 마법사가 눈을 깜박이자 리체는 양손을 다 허리에 올리며 한마디 남겼다.
“내 용건은 그게 다예요.”
그대로 몸을 돌리는 리체를 마법사가 돌려세웠다. 황당한 얼굴로 하하, 웃었다.
“잠깐, 잠깐. 거기 서시죠.”
“…….”
“여기까지 따라왔으면서 그대로 간다고요? 안타깝네요.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왔으면 좋았을 텐데.”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마법사가 정면을 향해 손을 폈다.
“이리 와요, 리체 양. 당신을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니까. 저는 당신을 그분 앞에 대령하라는 명령을 받았고요.”
자석이 끌어당기듯 작용하는 인력에 리체는 다리에 힘을 주고 저항했다. 마법사는 아니더라도 특수한 이능을 가진 사람인 듯했다. 리체는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만하죠?”
“당신이라면 그만하겠어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는 마법사에게 리체는 한숨을 쉬었다. 어딘지 꺼림칙해진 마법사가 눈살을 찌푸리자 리체는 한심하다는 듯 눈총을 보냈다.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알은척한 이유가 뭐겠어요?”
“……그게 무슨 말, 어?”
의혹에 찼던 마법사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확장되었다. 리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를 믿어서겠지.”
오만하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그라우지가 탑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검은색으로 점철된 가벼운 옷차림이었지만 키가 크고 늘씬한 몸에선 강력한 절대자의 위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전쟁터에서 마법사 하나는 1개 대대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마법의 종주인 그라우지는 마법사 백 명과도 비견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아군에겐 더할 나위 없는 안도감을 주며 적군에겐 귀신보다 무서운 공포를 안겼다.
그의 시선이 리체에게 닿았다.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에서 풀려났다. 강제로 억제력이 깨어져서인지 심력에 타격을 받은 마법사가 비척거리며 물러나더니 쿨럭, 피를 토했다. 피범벅이 된 입술로 남자가 입술을 떨었다. 공포에 잠긴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 어째서 지금 여기…….”
“황실이 뜬금없이 연락을 했다 했지. 황태자가 얕은수를 썼어. 뭐, 어차피 버리는 패겠지만.”
그라우지가 서늘하게 시선을 주자 남자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비마법사인 리체도 공기가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소리를 내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순간적으로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잠시 후, 리체는 크게 헐떡이는 스스로를 깨달았다. 가공할 힘을 목격하자 예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몸이 떨렸다. 그라우지는 그녀가 본 차원에서 보았던 그 어떤 강대한 무기에도 비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멍한 얼굴로 남자가 사라진 풀밭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리체를 그라우지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런 일을 벌였으면서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여상했다. 오히려 약간 지루해하는 것도 같았다.
“아무리 나를 믿어도 그렇지,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는데.”
이번 일로 말미암아 무슨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리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급격히 몰려드는 피로감에 조용히 대꾸했다.
“얀테의 의중이 궁금해서요.”
“리체 양을 데려가려고 한 건 아닐 거예요.”
그 말에 리체가 고개를 틀자 깎아지를 듯 날렵한 콧날이 보였다.
“그랬다면 감히 내 공간에 고작 반편이 하나만 보낼 리 없으니. 이쪽의 동태를 살피려고 그런 거겠죠.”
한숨을 쉰 그라우지가 리체를 꼬옥 껴안았다.
“리체 양은 인기가 너무 많아서 곤란하네요.”
그녀는 싸늘하게 웃었다.
“이런 인기는 바라지 않는데.”
“욕심도 많아라. 어쩌다 황태자까지 건드려서는.”
“누군들 그 미친놈을 만나고 싶었겠어요?”
멈칫한 그라우지가 파안대소를 했다.
“황태자더러 미친놈이라니.”
“…….”
“그거 마음에 드네요.”
만족감을 그득 드러내며 그라우지는 리체의 뺨에 뺨을 맞대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그라우지는 황실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마탑과 황실 간에는 포털이 설치되어 있을 만큼은 긴밀한 교류를 하는 것 같은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에 잠긴 리체는 이어진 그라우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상 실험은 거의 마무리 됐어요. 축하해요, 리체 양.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왔어요.”
“성공, 했나요?”
리체는 멍해졌다. 귓가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레이몬드 경은 참 튼튼해서, 다행이죠.”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어조로 중얼거린 그라우지가 활짝 웃었다.
“레이몬드 경이 차원 이동에 성공했어요. 리체 양이 묘사한 그 차원을 보고 왔죠.”
리체는 그라우지를 밀어내고 홱 몸을 돌려 얼굴을 맞댔다.
빛이 들지 않는 공간에서의 고양이처럼 큰 눈동자를 더 크게 뜨는 리체는 평소와 달리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확장된 동공은 미세하게 흔들렸고 뺨은 단단해졌으며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어 부지불식간에 꼬리를 밟힌 아기 고양이 같았다. 몹시 귀여웠다. 갑자기 욕망이 치민 그라우지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놀란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고 그 안에 숨어든 혀를 격하게 흡입한 그라우지는 실컷 만족한 다음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네. 성공했어요. 그러니까 리체 양.”
흐릿해진 리체의 눈을 바라보며, 그라우지가 짜증을 내는 건지 기쁜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집에 갈 시간이에요.”
허가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출입 금지 지역. 리체와 그라우지의 마법 연구실은 향하는 복도부터 적막하고 어두웠다. 그러나 안에 비하면 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법이든 사람을 쓰든 청결하고 깨끗한 다른 구역에 비해 이 방은 유독 퀴퀴하고 눅눅했다. 창문을 열지 않아 환기가 되지 않는 탓일지도 몰랐다.
창문의 존재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듯, 몇 번 열지 않은 창문에서 희미한 햇살이 거름망에 걸러진 먼지처럼 부유했다. 바깥에서는 창문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게 마법이 걸린 상태지만, 열면 깨지는 마법인지라 저 창을 통해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지 못한 지도 꽤 되었다.
리체는 안쪽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어둡고 축축한 기분이 드는, 어느 미치광이 과학자의 골방 같은 방이다. 그나마 거미줄은 없었다. 청소를 썩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루 한 번 정도는 쓸고 닦는다는 소리다. 사람을 쓰지 못하니까, 이만큼이라도 깨끗한 건 그라우지의 덕이었다.
희미한 햇빛이 스며드는 방은 공기마저도 무거웠다. 희끄무레한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게, 가만히 서서 눈에 신경을 집중하면 훤히 보였다.
방 가운데만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처럼 허옇게 빛났다. 허연빛은 방바닥을 모두 덮을 것처럼 넓었다. 조금씩 조금씩 넓혀진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빛이었다.
꿀꺽. 거의 매일 보았던 방이건만 지금만큼은 색다르게 다가오는 터라 리체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드디어.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새어 나오려는 긴장된 한숨을 삼키고 방을 휙 돌아보았던 리체의 시선이 급격히 유턴하여 돌아갔다.
새벽이 오기 전 절정의 밤처럼 어두운 한구석에 미묘한 굴곡이 드러났다. 마법진에 모든 신경이 미쳤을지언정 방 구석구석을 기억에 담아 놓았던 리체는 거기에 1인용 검은 가죽 소파가 있었다는 걸 기억했다.
레이몬드는 거기 앉아 있었다. 가만히, 망부석처럼. 생기가 느껴지지 않은 남자의 존재는 찌들고 고리타분한 연구실과 귀신같이 잘 어우러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리체는 눈을 찡그렸다.
“레이몬드? 거기서 뭐 해요?”
어두운 방에서도 빛이 들지 않는 구석에서 희번덕거리는 안광만 보였다. 붉고 어두운 시선. 불을 켜서 드러내고 싶었다.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마음을 자아내는 음산한 풍경이었다.
리체는 가슴이 철렁했다. 퀸에서 봤던 이후로 처음 만나는 셈이었다. 마탑에 있는 건 알았지만 레이몬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고, 그녀도 그를 만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아직도 화가 났을까.
그렇겠지.
리체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살폈다. 남을 믿지 않는 성격이 그가 자신에게 각인했다는 것도 잊고 그를 경계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무겁게 움직였다.
몇 걸음 만에 앞에 다가서자 레이몬드의 시선이 스윽, 그녀의 얼굴로 옮겨졌다.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리체의 눈빛이 살피듯이 변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차원 이동에 성공한 건 기쁘지만, 그 과정에서 이 남자는 멀쩡했을까. 먼젓번 퀸에서 보았던 레이몬드의 온몸 구석구석 가득한 흉터를 기억한 리체는 마음이 못내 불편해졌다.
“레이몬드?”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붉은 안광이 흔들렸다. 리체가 움직인 곳은 보다 햇빛이 드는 곳이라 그의 얼굴이 좀 더 잘 보였다.
하얗게 드러난 날카로운 턱선이나, 떡 벌어졌지만 마른 듯한 어깨 같은 것들이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둠을 장막처럼 두르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찰나, 리체는 그가 눈으로 웃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입을 열자 그녀도 흠칫할 만큼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니까.
“오랜만에 보네.”
“……그러네요.”
짤막한 대꾸에 레이몬드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리체는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겉보기만큼 마음도 침착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웃음을 멈추고 하아, 한숨을 쉰 레이몬드가 씹어뱉듯 말했다.
“씨발. 나, 봤다?”
“뭘?”
“네가 있었던 곳.”
리체가 눈을 크게 떴다. 레이몬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이상한 마차가 돌아다니고, 검은 도로가 눈이 닿는 곳까지 펼쳐져 있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바다처럼 넓은 강에, 나는 그 강 위를 딛고 서 있었어. 강 위에 있는 길에 있었어. 제기랄, 그게 다 뭐야? 난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리체의 눈동자가 어둡게 변했다.
진짜다. 그녀의 세상이다. 잔잔했던 마음 한구석에서 어딨는지도 몰랐던 그리움이 샘솟았다. 레이몬드가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세상을 엿보고 돌아왔다.
“닮았던데, 너랑. 무시무시하게 높은 건물, 번쩍거리면서도 내부를 보여 주지 않는 유리와 뾰족하고 딱딱한 겉면.”
“…….”
“그래서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점이.”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리체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레이몬드가 입술을 짓씹었다. 불안할 때 하는 행동이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거지? 리체는 희미하게 초조함을 느꼈다.
그녀는 타인을 분석하는 데 능하나 ‘감정’에 있어서는 아니었다. 감정은 공감 능력의 영역이므로, 남의 마음을 읽는 것은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객관적인 것, 수치적인 것은 손에 잡힐 만큼 쉽지만 쉴 새 없이 바뀌는 가변적인 마음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 물음표를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레이몬드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레이몬드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그가 지금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리체는 레이몬드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카이로보다 긴 머리카락은 부스스했고 까칠했다. 결이 좋지 않은 머리카락을 휘젓듯이 매만지자 레이몬드의 붉은 안광이 녹듯이 허물어졌다.
“어차피 함께 갈 곳인데. 당신이랑.”
사실을 말했다는 생각이었다. 특별히 과장되게 말한 건 없다. 그의 가라앉은 기분을 풀어 주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러나 몇 마디 말의 효과는 생각보다도 뛰어났다. 레이몬드의 고집스러운 입술이 부드러워졌다. 분위기에도 힘이 빠졌다. 됐다 싶어 손을 무르려는 순간 마르지만 큰 손이 손목을 턱 쥐었다.
눈을 깜박이자 레이몬드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제 머리를 쓰다듬게 했다.
“정말이지. 정말, 나 데려갈 거지.”
“…….”
“혼자 둘 거 아니지.”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습한 물기가 스며들었다. 왜 이러나. 리체는 잠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각인을 떠나서, 이 대륙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알파 귀족이 왜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또 습관처럼 그의 객관적인 조건만 고려했다는 걸 깨달은 리체는 눅눅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한숨을 쉬었다.
“내가 좋아요?”
“좋아.”
“각인 때문에?”
“아니.”
“그러면.”
“씨발, 쪽팔리게. 그걸 말로 해야 알아?”
“하기 싫으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이몬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각인이 아니더라도 좋아. 각인해서 좋아진 게 아니야. 좋아서, 각인된 거지.”
“…….”
“각인 때문에 더 빨리 깨달았더라도.”
점차 사그라지는 목소리에 귀가 눕혀지는 것처럼 신경이 쏠렸다. 리체는 그런 자신이 새삼스러웠다. 객관적으로 레이몬드는 그녀가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경박하고 상스러운 언행은 마음에 차지 않았고, 억지를 쓰는 건 성가셨고, 충동적인 기질로 계획에 변수를 만들 것 같아 불안했었는데, 지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게 신기했다.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마음의 변화라, 리체는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레이몬드가 쓰다듬는 대로 그의 머리를 휘젓다가, 손가락을 휘적거렸다. 거친 머릿결이 손가락 사이로 흐물흐물하게 느껴진다.
목소리가 상냥해졌다.
“걱정하지 마요. 안 놓고 간다니까.”
입술을 잘근 씹은 레이몬드가 툭 뱉었다.
“……불안했어.”
“또 뭐가.”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용기를 얻은 듯, 남자답게 튀어나온 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한 번 침을 삼키고.
“왜 도망갔어?”
그때, 퀸에서. 내가 있는 걸 알면서.
사과 조각처럼 못내 묻지 못했던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저어된다는 듯 눈치 보는 시선은 덤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리체는 수치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그 당시에는 최선이라고 여겼지만 문제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했다. 멍청하게 굴었음을, 레이몬드의 쓰라린 눈동자가 말해 주고 있었다.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더는 있을 필요가 없어서.”
“왜?”
“왜긴요.”
“……씨, 씨발. 계속 생각했는데 난 도저히 모르겠어. 네가 왜 도망갔는지.”
“…….”
“내가 필요 없어서?”
“…….”
“아니면, 카이로에게 들키기 싫어서?”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불안감과 자괴감에 젖어드는 목소리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웠다. 리체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레이몬드가 시큰거리는 눈에 힘을 주었다.
“여기 형이 있었다면 이런 한심한 질문은 하지 않았겠지.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너한테 따지고 싶고, 화내고 싶고, 생각했던 거 다 말하고 싶어. 근데 그게 안 되는데 어쩌라고.”
리체의 기색을 눈치챈 레이몬드가 조급하게 속삭였다.
“…….”
“네 앞에서는, 그게 안 돼.”
“…….”
“씨발, 네가 날 버릴까 봐 무서워.”
눅진하게 낮아진 목소리에 리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에 레이몬드는 울컥한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꽉 다물린 입 아래 하악의 근육이 강하게 불거졌다. 잠시 후, 힘 풀린 입술에서 말소리가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괜찮아. 이렇게라도 볼 수 있으니까. 그래……. 넌 이렇게 왔잖아, 내 앞에.”
정확히 말하면 연구실을 찾은 것뿐이지만, 그가 그걸 모르진 않을 것이다. 리체는 그의 희망 어린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감당하지 못하는 난제를 회피한 후, 애써 대면하지 않았던 죄책감이 물씬 흘러들었다.
무정하고 이기적이라 협소한 인간관계를 맺었던 그녀는 누군가에게 책잡힐 일도 별로 없었으므로 지금의 상황이 낯설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레이는, 내가 없으면 못 사니까. 화가 나도 금방 풀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머뭇거리며 말하고 나니 다소 뻔뻔하게 들렸다. 레이몬드는 멍해진 얼굴로 입술에서 힘을 뺐다. 괴롭힘에서 풀려난 입술이 너덜거렸다. 칫, 비뚤어지는 입술 사이로 허탈한 웃음이 샜다.
“씨바알, 웃기네. 지금까지는 불안하고 초조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 말 들으니까 기뻐, 또……. 병신같이.”
조금 불쌍해 보였다. 리체는 말간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사실 그녀는 그를 진실로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각인된 알파는 오메가와 접촉하지 못하면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지고 끝내는 무너진다. 비극적인 끝을 맞이하는 각인의 결말은 그리 놀라울 게 아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접촉에 헐떡이던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말없이 저를 버리고 도망쳤다니 초조해졌을 것이다.
기쁨을 얘기하면서도 버려진 짐승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을 보다 리체는 불현듯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레이몬드는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을 문댄 리체가 그대로 멀어지려 하자 뒤늦게 그녀의 동그란 뒷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헐떡이며 입이 다시 맞붙었다. 벌어진 입에 말캉한 혀가 밀고 들어왔다. 혀뿌리까지 빨아들이고 혀의 몸통이 얽혀서 타액이 섞였다. 원래도 금방 죽을 것같이 매달리는 키스를 하는 그였지만 그걸 따지더라도 격한 움직임이었다.
리체는 다소 숨이 막혔다. 가쁜 호흡을 쉬자 레이몬드가 조심스럽게 속도를 늦추었다.
“하아…….”
입술을 떼자 은빛 실이 길게 늘어졌다. 리체는 엄지로 느릿하게 입술을 훔쳤다. 레이몬드는 갈급한 표정으로 그녀를 다시 끌어당기려다가 마디가 불거진 하얀 손에 제지당했다.
“자아, 그만, 그만. 더는 곤란하거든.”
그라우지가 웃는 낯으로 리체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은 여느 때와 같이 느슨한 호선을 그리고 있으나 이마의 푸른 핏줄이 위협적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리체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친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반질거리는 안경알 때문에 한결 꺾인 날카로움인데도 둥근 눈매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가 뾰족뾰족했다.
써늘한 시선이 레이몬드를 스쳤다.
“광견병 걸린 개인 줄 알았는데.”
“…….”
“그래도 버려지지는 않았군요.”
갑자기 괜한 심술이다. 리체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그라우지는 그녀를 지나쳐 뒤를 바라보았다. 뒤에서부터 으르렁, 거친 목 울림이 새어 나왔다.
휙 뒤를 돌아보자 레이몬드가 당장 튀어나올 것처럼 어깨를 흉흉하게 부풀리고 있었다.
그라우지는 그의 사나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리체의 부드럽고 말랑한 상반신을 끈적하게 감쌌다. 리체는 목을 움찔 떨었다. 따뜻하고 매끄러운 입술이 귓바퀴를 물고 마사지하는 것처럼 오물거렸다. 시선은 레이몬드에게 박혀 있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타인을 깔아뭉개고 지배하는 게 익숙한 알파에겐 지나칠 정도로 매서운 경고.
눈 깜짝할 사이에 튀어나온 레이몬드의 손이 리체의 어깨를 스쳐 그라우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공기를 날카롭게 찢었다.
레이몬드의 다른 손이 리체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그녀에게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꼭 붙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라우지의 눈에 미묘한 불쾌감이 스쳤다.
“기생충 같아요.”
“뭐?”
“리체 양에게 달라붙어 있는 꼴이 말이에요. 기생충이 아니면 뭐야.”
뇌까리는 혼잣말에 레이몬드는 화내지 않았다. 외려 히죽 웃으면서 리체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라우지는 그녀를 뺏기지 않으려 팔에 힘을 주었다.
레이몬드는 상관하지 않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혀를 내밀어 리체의 드러난 흰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그녀의 바로 뒤에 그라우지가 있음에도 상관하지 않는 태도가 지나치게 맹렬하고 야릇했다. 리체의 앞에서 꼬리 내린 개처럼 빌빌거리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하.”
그라우지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자, 그를 도발하는 데서 리체의 달콤한 목덜미로 관심을 옮긴 레이몬드의 높다란 코가 흰 살을 파고들었다.
“하아.”
두 남자 사이에 끼어 버린 리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뒤쪽에선 귓바퀴를 찌릿하게 문 그라우지의 반듯하고 긴 숨소리가, 앞에서는 빠르고 거친 레이몬드의 숨소리가 번갈아 가며 신경을 자극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싶으면서도, 앞뒤로 짓눌린 가슴이 조금씩 뜨겁게 달아올랐다. 레이몬드가 리체를 더 끌어당기자 풍만한 가슴이 철판처럼 딱딱한 가슴팍에 비벼졌다.
리체는 절로 꼬아지는 다리에 힘을 주다가, 스스로의 상태에 충격을 받았다. 중재해야 마땅할 골치 아픈 상황에서 성감이 자극당했다고 가랑이를 꼼지락대는 꼴이라니. 음탕하고 추잡했다. 이건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메가 페로몬 수치: 99.9999…….]
끝내 100으로 향하지 않는 숫자가 범인인 듯해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다.
어느 날부터 때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발정하는 몸이 문제였다. 자제력 없는 짐승의 꼴과 다를 게 무언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한탄하는 와중에도 아랫배에서 피어오르는 정체 모를 열락의 불씨는 리체를 점점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된 것 같은 감각이 본래 차원으로의 이동을 한층 더 강하게 갈구하게 했다.
그라우지와 몸을 섞어도 열기가 가라앉는 건 그때뿐, 또 상황을 가리지 않고 슬금슬금 대가리를 쳐드는 야릇한 열기가 리체는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오메가 페로몬 수치: 99.999…….
페로몬이 불안정합니다. 조치를 취하여 안정화하십시오.]
9가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가 더는 늘어나지 않을 때 추가된 문구를 눈으로 더듬던 리체는 돌연 조용해진 분위기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금방이라도 엉겨 붙어 싸울 것처럼 으르렁대던 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콧구멍을 파고드는 아릿할 정도로 지독한 단내. 복숭아의 단맛이 공기 중에서, 혀끝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통제에서 벗어나 날뛰는 페로몬이 그녀의 살결 주변에서 얇은 막을 이루고 있었다. 누군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알파 페로몬이 미끼를 문 물고기인 양 흉포하게 흩날렸다.
“……흡!”
목덜미에서 잠깐 떨어졌던 코가 무섭게 파고들었다. 뾰족한 턱이 유려한 어깨선을 강하게 짓눌렀다. 개처럼 킁킁거리는 콧날이 리체의 목덜미와 턱을 잇는 선을 거칠게 쓸었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레이몬드의 건조한 머리칼 안으로 하얀 손가락을 집어넣고 세게 붙잡아 당겼다.
레이몬드는 열렬히 호응하며 코끝으로 리체의 달뜬 살을 애무했다. 아래가 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당장 다리를 벌리고 레이몬드를 집어삼킬 수도 있을 듯했다. 엉덩이 골과 둔부를 빳빳하게 문지르는 성기는 이미 굵게 부풀어 올라 단단했다.
마치 자신이 정말로 이 세계의 짐승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감각.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감각의 소용돌이로 떨어질 것만 같은 아득한 느낌에 리체는 눈앞이 아찔했다.
발정기인가. 그러나 얀테 그놈의 앞에서 재해처럼 닥쳤던 발정기보다는 그 열기가 약했다. 하지만 어느 좆이라도 안에 찔러 넣어 휘저어 줬으면 하는 민망한 욕망은 가슴 속에서부터 용솟음쳐서, 발정기가 아니라 하기에도 뭣했다.
리체는 두어 번 눈을 강하게 감았다가 떴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아직 남아 있는 이성이 머릿속을 희미하게 떠돌았지만 모든 감각은 가슴을 비벼 대는 레이몬드의 뜨거운 온도에 집중하고 있었다.
팔뚝을 붙잡았던 그의 커다란 손은 어느새 옷자락을 아래에서부터 헤치고 들어와 속옷을 위로 올리고 풍만하게 흘러내리는 가슴살을 꽉 붙잡았다. 덩달아 손바닥에 문질러지는 유두는 이미 꼿꼿하게 곤두서서 짓눌리고 있었다.
그 감각에 리체는 아래가 찌릿해서 절로 허벅지를 틈 없이 붙였다. 빠끔거리는 구멍에서는 질척한 애액이 질질 새고 있어, 허벅지의 옷자락이 축축했다.
어떠한 애무도 없이 찔러 넣어도 아무런 문제없이 준비되어 있는 오메가의 구멍. 아파하기는커녕 환희의 신음을 흘릴 것이다. 망나니처럼 살아온 레이몬드가 그녀의 달뜬 육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대번에 그녀의 바지를 속옷과 함께 한 번에 벗겼다. 무릎 위까지 애매하게 내려온 바지였으나 성기를 박아 넣기에는 충분했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성급히 제 바지춤을 푼 레이몬드가 굵은 구렁이처럼 꿈틀대며 꺼떡거리는 자지를 붙잡고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축축하게 숨을 내쉬는 분홍 점막에 단단하고 뜨거운 동그란 귀두가 닿자 리체는 헛숨을 들이마셨다.
이 단단하고 긴 자지가 주는 쾌감을 알기 때문에 은밀한 기대감이 열꽃처럼 피어올랐다. 딱 붙였던 허벅지가 저절로 벌어졌다. 레이몬드의 성기는 그만큼 수월히 안을 파고들었다.
흐윽. 귓가에 뜨겁게 달아오른 낮은 신음이 흘러 들어왔다. 주인의 흥분을 그대로 반영한 성기는 곧 들어갈 뜨겁고 음란한 곳을 바라며 핏줄까지 곤두서 있었다.
벌써부터 프리컴을 찔끔 흘려 대는 동그란 귀두가 이미 충분히 준비된 구멍을 진입하고 들어왔다. 이대로 힘을 주면 미끄럼틀처럼 부드럽게 밀고 들어올 것이다.
기대하며 턱을 치켜올린 리체의 눈이 혼몽하게 뜨였다. 평소의 냉철하고 무심한 리체답지 않게 색욕의 열기로 요염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 돌연 턱이 잡혀 고개가 돌려졌다. 열이 올라 건조한 눈꺼풀을 두어 번 감자 흐릿한 시야에 잔뜩 굳은 얼굴이 들어왔다.
리체는 뒤늦게 제 손이 부드러운 옷감을 가득 움켜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레이몬드가 아니라 그라우지의 옷자락이었다.
앞에서 치댈수록 뒤로 밀려난 몸은 늘씬하고 판판한 그라우지의 상박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촉감 좋은 가슴 옷자락에 주름이 쫙쫙 갔다.
리체가 멍하게 올려다보자 살짝 벌어진 입에서 다디단 숨이 흘러나왔다. 복숭아 향이 가득한 숨이었다. 리체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정신없이 그녀를 응시하던 그라우지의 입술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흐…….”
밀고 들어오는 성기의 압박감을 견디며 구겨지는 얼굴은 피부에 간 주름 하나하나만큼 지독하게 음란하고 음탕했다.
그라우지의 얼굴이 무섭도록 경직되었다. 그의 눈빛은 냉담했지만 불룩 튀어나온 아랫도리만큼은 솔직했다. 레이몬드에 의해 뒤로 밀린 그녀의 탄력 있는 엉덩이가 그라우지의 앞섶을 문질렀다. 그라우지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에 잔뜩 흥분한 레이몬드가 들어왔다.
구렁이가 먹어 치우듯 들어오던 레이몬드의 성기가 쑥 빠졌다. 리체의 안으로 진입한 귀두에서 오는 황홀함을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천국에서 추방된 레이몬드의 눈에 사나운 불꽃이 튀었다.
“뭐야, 씨발!”
리체는 헐떡거리며 그라우지의 옷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휘감으며 몇 발자국 물러선 그라우지는 흉흉한 안광을 흩뿌리는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레이몬드가 발정난 개처럼 달려들자 지체하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무형의 힘에 가로막힌 레이몬드가 방탄력에 의해 뒤로 나뒹굴었다.
기사의 낙법을 활용하여 간신히 흉한 꼴을 모면한 레이몬드는 몸이 균형을 찾자마자 고개를 쳐들었다. 붉은 눈에서 혈기가 줄기줄기 뿜어졌다.
내 암컷, 내 오메가. 그녀에게 뿌리까지 품어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알파의 절규가 포효하는 듯한 신음에서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과열된 분위기였다. 살아온 세월이 무색하게 핏덩이에게 휘둘릴 뻔한 그라우지는 혀를 찼다. 그는 곧 흰 목을 꼿꼿이 세우고 평정을 찾았다.
리체와 닿아 있는 그의 손이 희뿌옇다. 서늘한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리체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자지를 잃은 아쉬움에 몸부림치던 리체의 정신을 일깨웠다.
꿈에서 깨어나듯 푸른 눈동자가 사파이어처럼 맑아진 걸 확인한 그라우지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나를 실망 시킬 셈인가요, 리체 양?”
“……뭐?”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런 꼴이라니. 이래서야 짐승 같은 오메가와 당신이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아무리 귀한 외차원의 존재라고 할지라도.”
차가운 목소리에 차츰 욕망에서 벗어난 리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내가 마법사의 서약까지 한 만큼, 기대에 부응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
“연구를 성공시키는 것보다 자지에 꿰뚫리는 게 좋다면, 그렇게 해 줄 수는 있겠지만.”
리체에게 실망한 걸까, 아니면 다른 놈과 비비적대는 그녀가 꼴 보기 싫은 걸까. 신랄한 말에 담긴 속마음은 누구도 모를 터였다. 뭐라고 더 한 마디 하려던 그라우지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리체의 허리를 감았던 손을 내려 장골을 꽉 움켜쥐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애액이 지저분하게 묻은 검은 수풀이 불룩한 언덕에 음란하게 비벼졌다.
흥분한 건지, 화가 난 건지, 눈을 가늘게 뜬 그라우지가 고개를 비틀어 리체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은 가볍게 쪽, 맞붙었다가 떨어졌다. 그에 그치지 않고 혀로 입술을 휘감으려는 때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꽤 힘이 들어간 손짓에 밀려난 그라우지의 눈이 반개했다.
“이해했으니 이제 그만해도 돼요.”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허리를 뒤틀며 벗어나려는 몸짓을 취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그라우지의 손이 허공에 떴다.
아귀힘에서 풀려나자마자 그와 거리를 벌린 리체는 재빨리 무릎까지 내려간 바지를 추켜올렸다.
축축한 허벅지가 기분이 나쁜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다만 여전히 미미하게 일그러진 눈매는 그녀가 멋쩍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리체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몸이 이상하다고 했잖아요.”
흥, 그라우지가 냉랭하게 코웃음 쳤다.
“드디어 이 차원에 적응해서 평범한 오메가가 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죠.”
리체가 눈을 치켜올렸다.
“그런 꼴을 면하려면 얼른 차원 이동에 성공해야겠고?”
“그래요.”
그라우지가 기특하다는 듯 입꼬리를 늘리며 웃자 리체는 심란한 낯을 숨기지 못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얀테가 연관이 있을 텐데. 어떤 메커니즘이 적용된 건지. 알아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게 아쉽네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라우지가 멍한 얼굴을 했다. 리체가 왜 그렇게 바라보냐고 묻자 표정을 고친 그라우지의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갔다.
“내가 좀 손을 썼다고 해도, 금방 정신을 차리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게, 마법사의 자질을 타고났으면 대성했을 거예요.”
“…….”
“괜히 방해했나 싶군요. 발정 나서 엉덩이를 흔드는 모습이 볼만했는데 말이에요.”
“꺼져요.”
대번에 신경질을 낸 리체가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가 움찔했다. 거기엔 흥분과 폭력성을 갈무리한 레이몬드가 알 수 없는 눈으로 리체와 그라우지를 보고 있었다. 불에 댄 듯 시선을 피한 리체는 다소 뻣뻣하게 움직였다.
“마법진 가동 준비나 해 둬요.”
“분부대로.”
그라우지는 미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마법진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리체에게서는 더는 페로몬이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분출한 페로몬의 잔향이 여전히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워 가슴께를 긁었다. 가슴 속을 진탕시키는 자극적인 페로몬이었다.
이제 페로몬의 영향에서 거의 벗어났다고 생각한 그도 일순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고개를 돌리자 충족하지 못한 성기를 바지 안으로 억지로 욱여넣은 레이몬드가 그를 쏘아보았다. 칼날처럼 매서운 시선이 날카롭게 얽혔다.
연륜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 그라우지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빈정거렸다.
“이젠 좀 정신이 들었나 보지. 오메가 페로몬에 정신없이 달려드는 열등함은 잘 봤어요.”
본래 있던 구석 자리로 걸어가며 레이몬드가 그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엇비슷한 높이의 어깨가 스쳤다. 비웃음 섞인 악의가 속살거렸다.
“리체의 보지에 내 것이 꽂히는 게 싫은 것뿐인 주제에.”
눈을 찌푸린 그라우지가 우아하게 뻗은 긴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문질렀다.
“나도 무게 잡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건 지나치게 천박해서, 원.”
레이몬드의 눈매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그라우지가 냉랭히 응시했다.
정신 나간 짐승 한 마리와 멀쩡한 척을 하지만 속은 돌아 버린 짐승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는 꼴이었다. 적어도 정신 나간 짐승보다 몇 배는 더 살아온 의뭉스러운 짐승은 이참에 눈앞의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를 밟아 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그 하룻강아지는 저주받아 노망나기 직전인 100살 할배의 늙은 자지를 없애 버릴 궁리를 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오가는 시선이 불온한 긴장감을 띠었다.
그때였다.
“그라우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마법처럼 텁텁한 공기가 환기됐다. 이름을 불린 그라우지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리체는 의심스럽게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했다.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던 짐승 같은 두 알파는 아무 일도 없는 척 시선을 받아넘겼다.
그녀는 공과 사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스킨십을 조르고, 치근덕대고, 섹스를 하자고 플러팅해도 화를 내지 않지만 그녀의 목적에 위배된다면 과도에 잘린 과일 조각처럼 베어 나가고 말 것이다.
버림받을까 두려운 하룻강아지 레이몬드는 길이 든 들개처럼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그라우지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흥, 코웃음을 쳤다.
리체는 희뿌옇게 빛나는 마법진 앞에 섰다. 그라우지는 그녀의 측면이 보이는 위치였는데, 굴곡이 미려한 얼굴에 감도는 희미한 긴장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를 보자 그라우지는 방금까지 레이몬드 때문에 불쾌했던 기분이 누그러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상냥하게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리체 양의 안전을 최우선순위로 두고 노력했으니. 숱하게 테스트를 한 이유가 뭐겠어요?”
이즈음에서 그라우지는 레이몬드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리체만 보고 있었다. 불쾌한 마음을 담아 비소했다.
“아까 우리 귀여운 레이몬드 경이 말했던 대로, 리체 양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어요. 지금까지 케이스 중에 마력을 가장 많이 퍼부었다고요. 숨 쉴 때마다 마력을 들이마시는 내가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리체 양의 차원은 얼마나 먼 시공에 있는 건지.”
혀를 찬 그라우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필요하고 헌신적으로 협력하는 그에게도 때때로 심드렁한 리체였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저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설명을 내일 이어 하자 그럴까. 순간적으로 욕심이 일었지만 리체의 반응이 불 보듯 뻔하여 아쉽지만 개인적인 즐거움을 참아 냈다.
“연결된 차원은 지금까지 리체 양이 설명해 주었던 그 차원과 아주 흡사해요. 그곳이 리체 양의 고향이지 싶은데. 9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리체가 좋아하는 수치로 확언해 주자 그녀의 얼굴이 눈에 보일 만큼 환해졌다.
뾰족한 산처럼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건물. 건물 자체가 보석인 듯 반짝거리는 건 건물의 유리 반사광일 것이다. 독특한 복식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팔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고즈넉한 분위기는 간데없이 빵빵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했다는 그 풍경.
그라우지가 어딘지 요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을 꺼낼 때마다 리체의 머릿속은 생생한 풍경으로 채워졌다.
차원 이동 사고가 일어난 지 약 1년 6개월.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뇌리의 풍경은 어쩐지 현실이 아닌 환상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는 더 지내기 힘들었다.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완전히 엉켜 버린 실타래처럼 풀기 어려워졌고, 몸 상태는 시시각각 이상해지고 있었으므로.
이대로 있다간 본래의 자신을 잃고 이 세상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형체 모를 불안감에 리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흰 가운을 상상했다. 흰 가운을 입은 자신은, 각종 그래프와 도표로 점철된 차트를 들고 사시사철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하얗고 청결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냉철하고 건조한 얼굴. 익숙했다. 그게 본래의 그녀였다.
다리를 벌린 채 박아 달라 애원하는 짐승이라니. 향수도 뿌리지 않았는데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다디단 향기와 가랑이 사이를 시도 때도 없이 적시는 음액 역시 낯설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녀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비아냥을 애써 머리 저편으로 넘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다. 생각을 갈무리한 리체의 결심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빨리해요.”
갑작스러운 재촉에 그라우지는 의아해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품으로 손을 넣었다가 뺐다. 그의 손엔 성인 남성의 중지 길이 정도 되는 모래시계가 들려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리체를 보고 그라우지는 미소를 지었다.
마탑의 종주, 마력에게 사랑받는 저주받은 마법사인 그가 으레 짓곤 했던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차이점은 다른 때보다 다정하다는 것이다. 실상 마탑의 종주 정도 되는 위치면 속된 말로 자신감 빼면 시체라고 평할 수 있었으므로, 그의 얼굴은 번지르르한 광채까지 흘렀다.
보통의 마탑주도 아니고, 몇 세대에 걸쳐 처음으로 나온 위대한 대마도사인 그에게 자신감은 덕목이 아니라 삶의 태도였다.
바라만 봐도 여유가 느껴지는 시선이나 설사 황족이라고 할지라도 눈치 보지 않는 태도 따위는 상대로 하여금 무한한 신뢰와 희망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리체의 뾰족한 눈꼬리가 살짝 누그러졌다.
그는 다리가 긴 오래된 원목 걸상의 둥근 판 위에 품에서 꺼낸 모래시계를 탁 올려놓았다.
“이걸로 시간을 잴 거예요. 기억하세요. 이번 시도는 확인용이에요. 정말 그곳이 리체 양의 차원이 맞는지, 맞더라도 이동 중 문제는 없는지. 그 정도만 확인하는 겁니다.”
“문제가 없는지, 그 정도만 말이죠.”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면 자동으로 귀환하게 되도록 설계된 마법이라, 혹여 그곳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 말에 리체의 얼굴는 긴장이 좀 더 풀렸다. 차원 이동이 성공하더라도 저편의 상황에 대한 위험성은 장담할 수 없다.
당초 리체가 제공한 차원 좌표는 연구실로 설정되어 있으나, 근접하게 성공한 것은 한 번뿐이었다.
레이몬드가 묘사한 차원의 풍경은 자신의 차원이 맞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연구실은 아니었다. 기계가 아닌 마법을 이용하는 것이라서인지 좌표의 오차가 컸는데, 이는 공학자도 마법사도 아닌 리체로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였다. 그라우지를 믿을 수밖에.
하지만 연구실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차원 이동이 성공했다는 것만 해도 어딘가. 물론 자동차 도로의 한복판에 떨어지는 위험한 상황도 있을 테니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었지만, 그라우지의 세심한 조치는 그런 그녀를 안심시켰다.
리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라우지가 마법진에 마력을 흩뿌렸다. 우웅, 소리와 함께 마법진의 하얀 광휘가 한층 짙어졌다. 햇볕을 담은 것처럼 눈이 부신 하얀 빛이었다. 어둡고 퀴퀴한 연구실이 순식간에 신비한 마법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하얀 빛무리가 리체의 섬세한 얼굴을 간질였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하얗다.
그라우지의 목소리가 신비스럽게 울렸다.
“준비됐으면 올라가요.”
마법진의 빛에 의해 한층 어두워 보이는 뒤편에서 그라우지가 손짓했다.
긴장 어린 얼굴을 이완하고, 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 떼려는 순간, 차갑게 식은 손목이 강하게 붙잡혔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레이몬드가 절박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레이?”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거칠게 흩날렸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러면 안 되지만, 자꾸만 널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아…….”
그녀는 물끄러미 레이몬드를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엔 그녀밖에 비치지 않았다. 몸과 영혼을 모두 자신에게 속박시킨 남자.
리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포근하고 다정한 미소를 짓고,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각인한 오메가의 체온이 닿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안정감을 느낀 레이몬드가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얼른 다녀올 테니.”
“…….”
“레이. 알겠어요?”
레이몬드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로에게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손길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안심하는 레이몬드의 뺨에 리체는 입을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입술이 단단한 뺨에 꾹 눌러졌다.
입을 떼고 살짝 밀어내자 레이몬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좀 더 밀어내자 마지못해 몇 발자국 더 밀려났다. 살이 빠져 해쓱해진 뺨에 리체의 시선이 닿았다. 레이몬드는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쟁을 목전에 두고 헤어지는 연인들과 같은 애틋함을 풍기는 그 꼴을 바라보던 그라우지의 입술이 아래로 호선을 그렸다. 약간 삐뚤어진 입술은 미소를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
“왜 나에게는.”
끝맺지 못한 말이 공중에서 허물어졌다. 목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린 리체가 그라우지를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잘 부탁해요, 그라우지.”
믿음직스러운 파트너를 보는 눈이다. 신뢰감 담긴 눈빛에 그라우지의 표정도 풀어졌다.
“……나만 믿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굳이 덧붙일 필요 없는 진심을 삼킨 그라우지는 자신이 혈기 왕성한 어린애 같이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어 헛웃음을 머금었다. 겉보기로는 흩어지는 연초 연기처럼 사르르 웃는 얼굴이었다.
리체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기는 하지만 마법사 서약을 한, 실력만큼은 확실한 그라우지를 믿는다. 긴장 한 점 없는 여유로운 태도가 믿음직스러웠다.
차원 이동은 기술이 발전한 본 차원에서도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겪었다. 아직도 간간이 끔찍한 사고를 일으키기에, 검증되지 않는 마법에 몸을 맡기는 게 내심 불안하긴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 볼 수밖에 없다.
행동하기 전엔 장고하지만 일단 결정하면 거침없이 행동하는 리체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게 뻗은 발과 날씬한 발목이 마법진 안쪽으로 불쑥 들어갔다.
우웅―.
마법진의 빛무리가 기름을 뿌린 것처럼 치솟았다. 크라운 모양으로 빛나는 마법진 안에서 하얀 빛을 뒤집어쓴 리체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어둠 속에 녹아든 눈들이 그녀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녹진한 설탕물처럼 끈적거리는 눈빛이 마법진의 하얀빛에 가려졌다.
갈색과 검은색이 혼재된 방의 정경이 흐릿해지고 광휘가 장막처럼 내려온다.
그라우지가 모래시계를 반대로 돌려 걸상에 내려놓았다.
탁.
하얗게 점멸하는 시야에 두통이 일어 리체는 눈을 감았다. 이번 시도가 성공한다면 다음 시도 땐 본 차원에 가 있게 되겠지. 그럼 이 차원에 머무는 것도 끝이다. 완전히…….
가슴이 익숙한 느낌으로 울렁거렸다. 차원 이동을 할 때면 늘 따라오는 메스꺼움이다. 리체는 목구멍을 조여 구역감을 참으며 이동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검게 변한 시야로 예기치 못한 사람이 스쳤다.
‘카이로.’
왼손 약지가 근지러웠다. 반지가 뜨겁게 달아올라 손가락을 옥죄는 것 같았다. 심장이 안타까운 느낌으로 두근거렸다. 참 잘해 줬는데. 아무런 말 없이 퀸에서 벗어난 결정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그에 대해서만은 죄책감이 들었다.
이런 마음은 아무래도, 그거겠지. 그래서 그런 거겠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대로 본 차원으로 가게 되면, 해소되지 못한 마음의 짐이 내내 그녀를 따라다닐 것 같았다. 깔끔하지 않고 찝찝한 건 딱 질색인데.
한 번 더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적어도 그렇게 도망치지 않았다면…….
부질없는 생각이다. 리체는 눈을 더 꽉 감았다.
밖에서 보는 그녀는 유령처럼 흐릿했다. 이내 지우개로 지우듯 신형이 사라졌다.
“아.”
안타까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리체에게 집중하던 그라우지가 정신을 차렸다. 레이몬드가 이를 악물고 리체가 사라진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빛나던 마법진의 선은 끝에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수 초 후 완전히 빛을 잃었다. 꼭 마법진이 그녀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아픈 맹수가 이를 드러내고 허장성세를 떨치듯 충혈된 눈으로 마법진을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시선이 살벌했다. 마력이 쭉 빠져나가 지쳐 버린 그라우지가 픽 웃었다.
“그러다 뚫어지겠는데. 눈독 들이지 말아요, 내 파트너에게.”
짐짓 가벼운 어투에 마법진을 노려보던 레이몬드의 시선이 그라우지에게 향했다.
걸상 옆에서 비스듬히 짝다리를 짚은 그라우지는 내리깐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촘촘한 속눈썹에서부터 오만함이 뚝뚝 떨어졌다. 가소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레이몬드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주제넘게 굴지 말라는 뜻입니다. 레이몬드 경.”
더는 예의 차릴 필요가 없다는 듯 그라우지의 말은 신랄했다. 상대의 냉랭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밝은 목소리였다. 목소리 톤과 달리 눈매는 얼음으로 빚은 양 차가웠다.
레이몬드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알고 있다. 오만방자하고 건방지지만 제 형의 그늘 아래서 열등감을 품고 자란 앙상한 사내. 지붕이 넓을수록 그늘은 깊어지는 법이지. 신경질적인 눈알을 보자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황궁 연회 때 봤을 당시에는 귀족의 품위라든지, 사내의 자신감 따위를 갖추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주인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개새끼에 지나지 않는 꼴이다. 그것도 발정 난 개새끼 말이다.
각인이란 얼마나 무서운 비극인가. 그라우지는 혀를 찼다. 새파란 청년들보다 알파오메가 형질에 덜 휘둘리는 편이라고 하나, 알파로서의 본능이 모조리 한 사람에게 집중된 레이몬드의 모습은 그라우지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얽매이고 싶지 않은 그라우지의 개인적인 성향은 각인 현상을 극렬히 거부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각인이 뭐라도 된 것처럼 리체의 옆에 딱 붙어 있는 레이몬드가 거슬렸다. 못마땅했다. 마치 제가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아무리 혈통이 좋더라도 사방으로 짖어 대는 개는 똥개일 뿐이다. 그런 똥개가 자신을 향해 건방지게 짖어 대고, 제 흥미를 온통 독차지한 외차원의 존재를 독점하려고 하다니.
좀 더 가혹하게 굴릴 것을. 아쉬움에 혀를 찼다. 물론 리체, 리체 하며 틈만 나면 그녀를 보겠다고 요청하는 게 꼴 보기 싫어 실컷 굴리기는 했다. 전쟁터의 한가운데 떨구기도 했으니.
그라우지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건 연구 목적이 아니라 심술의 일환이었다. 그때마다 지금 죽을 운명이 아니라며 꾸역꾸역 살아 돌아오는 꼴을 보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즐거웠다.
상처가 하나씩 늘어난 몸과 말수가 줄어드는 모습에 기이한 만족감을 느꼈다.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자각은 했다. 리체와 관련이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심술부리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깊게 따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점을 눈치챘는지 쳐다보는 눈에 살기가 섞였으나 그런 따끔거리는 기운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풀풀 풍기는 알파 페로몬이 역겨워도 마법의 완성을 위해 적당히 봐주었던 것인데, 주제도 모르고.
역시 밟아 줘야겠다.
“이봐.”
“리체 양을 위한다면 말이죠.”
혀가 부드럽게 튕겼다. 잘 빠진 입술이 우아하게 움직이는 것과 달리 목소리는 흉험한 가시를 품고 있었다.
“뭐?”
“리체 양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잘 생각해 보고 건방을 떨어야 하지 않겠어요, 불운의 기사?”
불운의 기사. 검에 대한 재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천재인 형의 명성에 묻힌 레이몬드의 처지를 동정하는 명칭이었다. 레이몬드에겐 멸칭이기도 했으므로, 쳐다보는 시선에 살기가 넘쳤다.
물론 풋내기 기사의 살기에 겁먹을 그라우지가 아니었다. 그는 싸늘한 웃음을 머금었다.
“실험체면 실험체답게 굴어요.”
“…….”
“건방지게 주인을 탐내지 말고.”
게임 속 오메가가 되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