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14/25)

14장

불빛이 약한 어두컴컴한 술집에서는 풍미가 좋은 치즈 냄새가 났다. 적당한 품질의 포도주와 함께 나온 안주에서 풍겨 오는 냄새였다. 치즈를 가공하여 만든 안주를 주로 파는 가게인지 다른 테이블에 놓인 안주 접시에도 모조리 치즈가 올려져 있었다. 포도주에는 치즈가 어울리긴 하지. 리체는 손가락으로 코끝을 훔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장이 갑자기 술 한잔하지 않겠냐며 불러낸 술집은 허름한 외관과 달리 술과 안주 모두 그럴싸하고 그럭저럭 맛이 있었다.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켜자 향긋한 주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카이로와의 식사 자리에서 곁들였던 포도주만은 못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품질이었다.

본 차원에서 곧잘 구입해 마셨던 와인보다는 입맛에 맞았다. 목 너머로 한 모금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부라타 치즈를 올린 카프레제를 입 안에 넣자 상큼하고 고소한 맛이 퍼졌다. 리체는 음식을 음미하며 사장을 힐끗했다.

먹고 마시는 데 정신이 없어 조용하지만 생기 넘치는 가게 분위기와 달리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리체는 부드럽게 씹히는 치즈를 삼켰다. 사장의 살갗은 까칠했고 얼굴빛은 어두웠다. 근래 퍽 마음고생을 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해 그는 운이 없었다. 애초에 잘나가던 가게가 화마에 휩싸여 폭삭 내려앉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시름에 잠겼을 것이다. 그러곤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겠지.

퀸만 한 가게를 새로 짓거나 인수하는 건 어지간한 자금으로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규모는 작더라도 새로운 가게를 여는 것이 확실히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장은 그러지 않았다. 퀸이 있었던 그 자리에 다시 퀸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의 부모 세대부터 가꿔 온 가게라는 것도 있을 테고, 주변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거다.

확실히, 처음 퀸의 보수 작업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퀸의 종업원들은 완공되면 언제든지 불러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손님들 또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 주겠다고 했고. 사장은 인품이 좋았으므로, 그렇게 말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퀸이 예상보다 빠르게 완공된 이 시점, 표정이 밝아야 할 사장의 얼굴엔 먹구름이 껴 있었다.

“얼굴 펴세요, 사장님. 그러다가 저 체하겠는데요.”

“……어어, 나 상관하지 말고 편히 들어.”

“할 말부터 듣고요.”

사장이 우물쭈물했다. 그러더니 리체의 눈치를 흘끗 보고 한숨을 쉬었다.

“도와줘, 리체.”

대뜸 던져진 말에 리체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를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상황 알고 있지?”

다소 침체된 목소리를 듣고 리체는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콧잔등이 찡긋거렸다. 배신을 당한 자 특유의 쿰쿰하고 음습한 절망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리체는 마음 약한 사장이 한심했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그를 위로할 만큼의 의리는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도블락 거리를 혈혈단신으로 헤매던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이었다.

“한스랑 이바인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건 알아요.”

“그들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실상 일할 사람이 열 명도 안 된다면서요? 가게 운영이 빠듯하긴 하겠어요.”

직설적인 말에 사장은 침울해졌다. 입술 사이로 튀어나오는 한숨이 바닥을 뚫을 듯 무거웠다.

“어쩌다 솜씨 좋은 수리 단체를 만나서 빠르게 건물을 올린 건 좋은데 말이야. 언제든지 달려오겠다고 말한 내 사람들이 다 못 온다고 하니까,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어.”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사장님. 미하일도 남았고, 엘자도 있잖아요.”

“그래. 미하일이 남은 건 정말…… 다행이지.”

의외라는 말을 삼킨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성질머리가 좋지 않았지만 노련한 직원들 중에서도 손님들에게 인지도 두텁고 베테랑인 인재였다. 그래서 지금의 퀸에 무척 필요한데, 다행히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장은 감동한 눈치였다. 리체는 그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너는?”

“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리체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주일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그랬지. 일을 계속하긴 어려울 것 같다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맞아요.”

“하지만 당장은 아니지? 그 마법사를 도와주는 일도 지금은 안 하고 있다면서.”

“사장님.”

리체가 확연히 곤란한 말투로 부르자 사장은 이마에 주름을 잡고 몸을 식탁에 가까이 붙였다. 맛 좋은 포도주나 먹음직스러운 안주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오로지 리체에게 못 박힌 눈빛은 간절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도와주라, 리체.”

“…….”

“이미 직원들은 다 빠진 상황이야. 지금 있는 인원만으로는 몇 주도 버티기 어렵겠지. 물론 이것도 예전만큼 손님이 몰려든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빠져나간 단골들을 다시 붙잡을 자신은 있어. 다만 그건 너와 기존의 직원들이 도와줘야지만 가능하지. 재오픈이라 초반은 확실히 분위기를 잡아 둬야 해. 서비스나 음식이나 술이나, 품질이 빠지지 않게끔 해야 한다고.”

“…….”

“응? 리체. 도와줘. 고향에 가기 전, 한 달. 그래. 첫 한 달만이라도.”

리체는 고민스러워졌다. 지금 돈을 벌 필요는 전혀 없었다. 카이로가 있기도 하거니와 그가 없더라도 모아 둔 돈으로 얼마간 지내기는 가능했다.

그라우지가 몇 가지 고비만 넘기면 차원 이동 마법이 완성된다고 말한 바, 본 차원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야 굳이 몸을 써 가며 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나마 관심 있는 차원 원주민에 대한 연구 또한 더는 사례를 수집하지 않을 만큼 수월히 진척된 상황이다. 그러니 사장의 청을 들어주지 않아도 되지만.

눈물을 흘릴 것처럼 촉촉한 사장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체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빚을 깔끔하게 청산하고 떠나는 게 마음도 편하겠지.

“2주. 2주만 도와드릴게요.”

“2주?”

실망하던 사장은 리체의 눈꼬리가 올라가자 금세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도 고마워. 고마워, 리체.”

귀찮음이 가시지 않았던 리체지만, 사장이 연거푸 고맙다고 인사하자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래. 조금만 도와주지 뭐.’

퀸은 술을 파는 만큼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긴 하지만 이제까지 리체는 폭풍의 눈처럼 모든 소란을 피해왔다. 그녀는 퀸으로 돌아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카프레제를 하나 더 집어먹었다.

리체를 만나고 돌아온 사장은 묘하게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꼭 채권자에게 상환 기간을 늘리는 데 성공한 사람 같은 얼굴이라, 엘자는 그의 얼굴을 흘낏하며 마저 할 일을 했다.

고급 편지지와 깃펜을 책상 한편에 두자, 물 대신 포도주를 벌컥 마신 사장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묵은 변을 본 것처럼 경쾌하고 가벼운 느낌으로.

‘가신 일이 잘됐구나.’

요 며칠 우울해하던 사장의 얼굴이 보기 괴로웠던 엘자는 마음이 놓였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랑스러운 페로몬이 번졌다. 페로몬 감지기가 없으면 페로몬을 느낄 수 없는 베타인 사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잔 속의 포도주만 말끔히 비워 냈다.

“말씀하신 거 준비해 뒀어요, 사장님.”

“고마워, 엘자. 네가 있어서 그래도 버티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푸근한 웃음을 터뜨린 사장은 지치고 피로한 얼굴이었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희망의 기운이 흘렀다. 엘자는 눈을 깜박였다. 페로몬이 웅웅거리는 벌떼처럼 동요한다. 사장은 엘자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책상 앞에 앉았다.

“단골손님들에게 모두 돌리려면 두 시간은 족히 잡아야 될 거야.”

엘자는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사장님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입 속에 말이 맴돌았다. 잠시 머뭇거린 그녀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사장을 보고 말을 꿀꺽 삼켰다. 대신 조용히 다른 말을 꺼냈다.

“고객 명단을 가져다드릴게요.”

“고마워.”

엘자가 내려놓은 명단을 훑으며 사장은 한 획도 허투루 쓰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를 편지지에 새겨 넣었다.

“친애하는 카이로 스트리고 백작님께. 신록이 푸르른 도블락의 축복이 장군께 깃들기를.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퀸이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부디 만족스러운 시간을 장군께 선물할 기회를…….”

꼼꼼히 적어 낸 후에 다시 명단을 들춘다.

“좋아. 다음은 레이몬드 스트리고 경. 그리고 홀란드 라이언스 후작과 라스카 메디치나 공에게도…….”

집중해서 중얼거리는 사장의 숨결 아래로 편지지에 묻은 금빛 가루가 살랑거렸다. 깃펜 특유의 묵은 냄새가 글자를 따라 은은히 흐른다. 창밖을 뚫고 들어온 햇살 한 줄기가 사장의 발치를 따뜻하게 물들였다. 사장의 울림 풍부한 목소리가 조곤조곤한 멜로디처럼 흘러나왔다.

소파 한구석에 앉은 엘자는 가만한 시선으로 사장이 몰두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런 방해 없는 평온한 시간, 유력 귀족들의 이름이 차분하고 정갈한 글씨로 초대장에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저렇게 열심히 하다니. 잘됐으면 좋겠다.’

엘자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장은 글자를 멋스럽게 쓰는 데만 몰두했다. 그의 긴 소맷부리가 흔들리자 초대장에 새겨진 이름 위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 * *

다소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 관현악단의 선율에 맞추어 복작거리는 사람들 틈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퀸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입버릇처럼 건네는 정중한 인사에 말쑥하게 차려 입은 손님이 미소를 되돌렸다. 프로페셔널의 정석으로 보이는 모습도 잠시, 주방으로 들어온 직원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 정말 정신없네!”

경쾌한 선율과 느긋한 수다, 술과 달콤한 음식이 가득한 홀의 파티 분위기와 달리 주방은 전쟁터였다. 흐름이 끊이지 않게 술과 음식을 조달하느라 잠시도 손을 놀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직원들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청소와 음식 배달, 테이블 세팅은 직업소개소에서 일일 직원을 고용하여 쓴다고 하지만 손님들을 직접 상대하는 일은 모조리 노련한 직원들 차지였다.

게다가 상대해야 할 건 홀 손님들만이 아니었다. 파티를 사양하고 방에 틀어박힌 몇몇 단골들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하느라 몸이 세 개여도 부족할 판이었다.

“생각보다 손님이 너무 많잖아!”

“거기서 떠들고 있지 말고 음식 내가!”

주방 직원들이 떠넘기는 쟁반을 든 접객 직원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 쉬지도 못하냐! 알바생은 뭐하고 있는데?”

“진작 나가서 일하고 있지!”

직원은 투덜거리지도 못하고 서둘러 홀로 나갔다. 모든 직원이 홀의 손님들을 상대하는 데 동원되었고, 그중에 리체도 있었다.

“여기, 커티샥 한 잔.”

이미 술에 적잖이 취해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중년인의 손에 술잔을 쥐어 주고, 리체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손님들끼리 떠드는 모습,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며 까르르 웃는 모습, 머리를 쓰다듬는 가벼운 스킨십은 물론이고 입술을 빠는 키스까지, 손님들의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직원들을 불러 말 상대로 삼길 좋아하는 단골들도 다른 손님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사장의 수완이 예사롭지 않았다.

‘머리는 잘 썼어.’

재오픈 날, 콘셉트를 파티로 잡자는 건 턱없이 부족한 직원들의 수에 골머리를 앓던 사장이 내놓은 묘수였다. 당초 단골들만 초대하자는 생각도 수정하여 사교계에서 꽤 이름난 귀족들에게도 초대장을 보내었다. 알파오메가의 성비도 비등하게 맞추려고 노력하여 알파 또는 오메가 어느 한쪽의 수가 과도하게 많은 일이 없었다. 이로써 혹시 모를 칼부림과 유혈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용모가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면 귀족이 아니어도 초대를 했는데, 이는 권위적인 귀족들의 불만을 살 위험이 있는 행동이었다. 다행히 분위기는 좋았다.

새로 단장하여 드넓고 세련된 홀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평민과 같은 공간에서 어울리는 게 말이 되냐며 불쾌감을 표시한 손님들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들도 친구들의 손에 못 이기는 척 끌려오곤 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도 신분이 낮지만 매력적인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손님들은 직원을 지명하기보다는 매력적인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길 원했다. 평소 만나 보고 싶었던 사교계의 인사들에게 사람이 몰렸고, 매력적인 이성을 유혹하려는 손님들의 눈은 직원을 향하지 않았다.

그 덕에 직원들은 일일 직원, 즉 알바생들을 총괄하거나 룸을 잡고 들어간 손님들의 상대만 해도 되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쉴 틈 없이 바빴지만 그럭저럭 매장이 돌아가기는 했다.

노련한 직원들은 손님이 보는 앞에서는 결코 조급한 티를 내지 않았다. 주방으로 돌아와서 분통을 터뜨리기는 해도.

머리에 열이 오르고 발바닥에 땀이 찰 만큼 정신없었지만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다들 최근 퀸의 사정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꽤나 성공적인 개장 분위기에 마음이 들떴다.

리체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일을 그만두기는 하지만 사장을 봐서라도 퀸이 망하지 않고 잘되었으면 했다. 물론 그렇다고 직접 손을 보탤 의향까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있는 동안만큼은 제 몫을 톡톡히 할 생각이었다.

주방으로 돌아와 떨어진 술잔을 채우던 리체의 어깨를 누군가 톡톡 두드렸다.

“리체, 룸 손님이야. 지명 들어왔어.”

“룸 손님?”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엘자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홀이 얼마나 재밌는데 자꾸 룸을 잡는 거야. 일할 사람도 없는데! 앗, 사장님이 부르신다. 위층 끝 방으로 올라가면 돼!”

속사포로 불만을 늘어놓다 바람과 같이 사라진 엘자의 뒤를 좇은 리체의 시선이 술잔을 담던 쟁반을 향했다. 그녀는 잠시 후, 어깨를 으쓱이고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자의 말을 듣고서도 리체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글을 곧잘 쓰게 되고 도블락어도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되면서 그녀도 지명하는 손님이 몇 명 생겼으므로. 대체로 베타의 지명이었다.

‘홀은 알파오메가가 많으니까, 위화감을 느껴서 날 불렀나 보군.’

그녀는 아직 베타로 알려져 있었다. 베타 손님도 어울리게 하기 위해 사장이 외모가 괜찮은 평민 베타도 초대한 걸로 아는데, 어지간히 낯을 가리는 손님인가 보다. 대수롭잖게 생각하며 리체는 엘자가 말한 방 앞에 섰다.

똑똑.

“손님, 들어가겠습니다.”

이왕 지명이 들어온 거 좀 쉬다 내려가야겠다. 태평하게 생각하며 리체가 문을 열었다. 새로 짜 맞춘 문은 약간의 마찰음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딱딱한 문의 가장자리를 천으로 마감하여 여닫을 때마다 푹신한 느낌이었다. 이전의 고풍스럽지만 오래된 건물보다 최신식으로 건축된 건물은 아직은 길이 덜 들었지만 쓰임이 편하고 세련되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등 뒤로 문을 닫은 리체는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허브 냄새?’

쌉쌀한 박하 향. 아니, 끝은 달콤한 것이 박하사탕에 가깝다.

리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커튼을 친 안쪽에서 긴 테이블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테이블 상석에 앉은 손님이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났다. 그쪽으로 한 발 가까이 떼며 리체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아.’

리체의 결코 빠르지 않은 걸음보다 안쪽의 손님이 더 빨랐다. 딱, 딱. 구두 소리가 바닥을 경쾌하게 때리고 이내 커튼 밖으로 걸어 나온 남자는 멀뚱히 선 리체를 보고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자 그림자로 빚은 것처럼 차가운 인상이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졌다. 달콤해진 박하 향이 미풍에 실리듯 리체가 있는 곳까지 밀려들었다.

“힘들었어요, 찾느라.”

리체는 눈을 깜박이다가,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남자의 모습에 숨을 깊게 내쉬었다.

“용케 여기까지 찾아왔네요, 라스카.”

일순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놀랐던 그녀는 뒤늦게 미소를 지으며 어쩔 수 없는 곤란함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가라앉혔다.

* * *

스트리고 백작저엔 클럽 퀸의 밀랍 인장으로 마감한 초대장이 두 장이나 도착했다. 우편물을 배달하는 고용인은 똑같아 보이는 초대장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수신인을 확인하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하나는 저택의 주인인 카이로 스트리고에게 배달되었다. 주인이 없었으므로 서재의 책상 위에 우편물을 내려놓았다. 각종 명망 있는 가문에서 보내온 초대장 다발 위에 술집 초대장이 툭 얹어졌다.

다른 초대장 하나는 차남인 기사 레이몬드에게로 전해졌다. 마침 그는 방에 있었으므로 고용인은 직접 편지를 배달할 수 있었다.

“퀸에서?”

편지를 받은 순간 묘해지는 얼굴에 움찔한 고용인은 편지를 전달하고는 어영부영 인사하고 후다닥 뒷걸음질 쳐 나왔다. 요즘은 얌전하지만 며칠 전만 해도 보름달 뜨는 밤 늑대 인간처럼 거칠었던 레이몬드에 대한 기억이 있어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탁!

문이 강하게 닫혔지만 레이몬드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붉은색 초대장에게만 박혀 있었다. 빠르게 글씨를 훑어 내린 레이몬드는 눈을 감고 초대장에 코를 박았다. 종이 냄새가 물씬 올라온다. 그녀의 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만날 수 있겠네.”

레이몬드는 눈을 떴다.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리체와 했던 계약은 유효하여 레이몬드는 수차례 마탑의 부름을 받았으나, 매번 가슴 떨리며 방문한 마탑에서 리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바쁘답니다.’

마탑주의 부드럽지만 뺀질거리는 얼굴을 떠올린 레이몬드의 눈에 불길이 솟았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레이몬드는 음울한 얼굴로 초대장에서 시선을 뗐다. 초대장의 문구는 이미 샅샅이 훑은 후였다.

‘여러 번 경을 모셨던 리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레이몬드는 기분 좋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퀸의 사장이 그를 초대하기 위해 끼워 넣은 문구였으나, 사장은 레이몬드가 이것을 바라 마지않았다는 건 모를 터였다.

리체를 직접 보고 그 체취를 맡고 껴안고, 달콤한 품속에 자신을 묻지 못 한 지가 벌써 며칠이었다. 인내심은 짧아진 촛불의 심지처럼 보잘 것 없었으므로 레이몬드는 하루가 일 년이 되는 것같이 속을 태웠다. 그 와중에 도착한 초대장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주어진 한 모금의 시원한 물과 다름없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 밑이 퀭하고 피부는 거칠거칠한 칙칙한 볼품없는 사내가 그 안에 있었다. 셔츠 바깥으로 드러난 팔은 상처투성이였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 보기 싫게 가라앉은 모양새였다.

차원 이동 마법 테스트. 리체의 말에 따르면 ‘임상 실험’을 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던 것이다.

리체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레이몬드는 그라우지가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그래서 그는 그라우지가 차원 이동 마법을 구동할 때마다 실험자가 되어야 했는데, 마법진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그는 마탑이 아닌 다른 곳에 떨어져 있었다.

한 번은 망망대해의 한복판이었고, 한 번은 태양이 떠나지 않는 뜨거운 사막이었으며, 또 한 번은 온갖 가시나무가 자라는 어딘지 모를 숲속의 정글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실패에 가까운 결과들이었지만 기진맥진하여 마탑으로 돌아오면 마탑주는 몸이 분리되지 않는 것만 해도 성공이라는 끔찍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가 단련된 육체를 가지지 않았다면 분명 차원 이동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혹은 되돌아올 힘이 없어 도중 죽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몸은 고되었지만 리체를 원망하는 마음은 한 톨도 없었다. 부디 뺀질거리는 마탑주 놈이 완성도를 높여 마법을 성공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야 그녀와 단둘이 같은 곳에서 지낼 수 있지 않겠는가.

리체가 이 위험한 마법진 위에 선다는 생각만 해도 머리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기분이라, 호흡이 더 가빠진 레이몬드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미친 것 같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눈을 감자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불규칙한 호흡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거칠었던 숨소리가 점차 가라앉더니, 손을 내렸을 때 붉은 눈동자는 제법 차분해진 상태였다. 평정을 되찾은 레이몬드는 무기력한 기분에 젖어 다시금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따라 느릿느릿 움직였다.

윤기가 사라진 피부와 방금 쥐어뜯어 산발이 된 머리카락, 대충 입어서 구김이 간 옷과 옷에 가려지지 않은 붉고 검은 상처와 흉터까지.

“씨발, 부랑자가 따로 없네.”

못마땅한 중얼거림이 툭 떨어졌다. 사실 혹독하게 자평한 것처럼 최악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파티에 가기엔 확실히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본래 그 명성이 아깝지 않게끔 근사하게 꾸미는 걸 좋아하는 레이몬드는 형편없는 외양이 못마땅해 까끌까끌하게 올라온 수염을 엄지로 쓸었다. 이런 꼴로 리체를 볼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탑주 놈이 사람을 개같이 굴리지만 않았어도 이 꼴은 아닐 텐데. 씹, 그 자식은 저는 잘 꾸미고 다니면서.”

기분이 더 나빠졌다. 위험하다는 리체의 설명은 들었다지만 그라우지가 일부러 엉뚱한 곳으로 보내 고생시킨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라우지는 길 가다가 다리가 부러지길 바랄 만큼 재수 없는 놈이었으나 행색은 어디 명문 귀족가의 사람 못지않게 잘 차려입고 다녔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레이몬드는 그의 차림과 제 모습이 비교되니 거울을 깰 뻔했다.

기분이 바닥을 쳐서, 거울을 노려보다가 홱 뒤돌아섰다. 성큼 걸음을 옮긴 곳은 벨벳, 리넨, 실크, 면 등 온갖 값비싼 옷감으로 만들어진 의복과 희귀하고 다양한 장신구, 향긋한 향수가 잘 정돈된 드레스 룸이었다. 어쩐지 오랜만인 것 같더니……. 생각해 보니 파티는 간만이었다. 비록 파티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술집 홈 파티에 불과하지만.

귀족들의 사교계는 매일매일이 달라지니 지금쯤 사교계의 바람둥이 호칭은 그가 아닌 다른 이가 듣고 있을 터였다. 물론 지금의 레이몬드는 한때는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사교 파티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녀들까지 호출하고 단장한 레이몬드는 퍼석했던 논바닥에 물을 잔뜩 부어 옥토로 만든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푸석한 피부엔 달팽이 진액으로 만든 보습제를 가득 덮고, 거칠어서 갈라지는 머리카락은 동백기름으로 윤이 날 때까지 빗어 댄 결과였지만 기본적으로 얼굴이 못난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몇 가지 미용 도구로 생기를 돋우자 언제 형편없는 꼴을 했냐는 양 근사하게 반짝거렸다.

“아주 멋지세요, 도련님. 파티장에서 도련님이 제일 잘생기셨을 거예요!”

오랜만에 레이몬드가 불러 줘서 솜씨를 발휘했던 하녀들이 신나서 떠들었다. 평소엔 이런 아첨에 피식 웃으면서 거만을 떨어 줬을 테지만 지금은 별다른 반응 없이 거울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런 그의 눈빛은 다소 긴장한 것처럼 보여서, 하녀들은 어리둥절했다. 요즈음 도련님은 정말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하려는 참에 레이몬드가 귀찮은 듯 손을 휘저어 하녀들을 물렸다.

그는 여자의 마음을 퍽 잘 아는 편이었다. 여자들은 말투도 거칠고 다정하지 않은 그를 힐난하면서도 침대에서는 열렬히 환영했으며 다른 여자를 만나지 말아 달라 사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체는 그와 숱하게 몸을 섞었음에도 여전히 무심했다. 그가 이델리에게 혹해 며칠 연락이 없었던 때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자 레이몬드는 비수에 가슴을 찔리는 듯했다. 그 당시 그는 상황 파악을 전혀 하지 못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레이몬드는 리체가 어려웠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그는 그녀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외양만이라도 번듯하게 꾸미고 싶은데, 그녀가 짧은 머리를 좋아하는지, 긴 머리를 좋아하는지, 사내다운 생김새가 좋은지, 신사처럼 부드러운 얼굴이 좋은지도 알 수 없었다. 관심 없는 척하며 리체를 살폈지만 그녀의 취향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긴 머리 손님이든, 짧은 머리 손님이든, 돈이 많은 손님이든, 세력이 큰 손님이든, 잘생긴 손님이든 그녀는 늘 한결같이 옅은 미소를 띠지만 실상은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한 듯했다.

레이몬드는 단지 욕정에 휩싸여서 그녀를 안았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그녀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었다. 그가 얼마나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알면 리체는 눈썹을 치켜올릴 것이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려 킬킬 웃었다.

어쨌든 그녀가 신사 같은 부드러움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녀의 관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신사가 아니라 사제처럼 구는 것도 가능한 일이나 본성과 정반대의 모습을 유지하는 건 퍽 힘든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서 몇 차례 옷깃을 만지작거린 레이몬드는 슬쩍 거울을 들여다보고 머릿속으로는 그라우지와 비교했다. 백 퍼센트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썩 떨어지지도 않는 것 같다는 판단이 선 후에야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신중한 모습은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남자의 태도와 다를 것 없었다.

첫사랑을 다시 보는 소년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세심하고 꼼꼼히 옷을 갖춰 입은 레이몬드의 몸에서는 수줍은 페로몬의 향이 피어올랐다. 향기가 수줍다는 건 우스웠지만 정말로 그랬다. 뺨을 붉게 물들이고 조심스럽게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소년의 심정이 된 양 레이몬드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얼마나 세차게 뛰었냐면, 가는 도중 싫어하면서도 경외하고, 그러면서도 열등감에 증오하는 형을 만나도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어디 좋은 데 가는 것 같구나, 레이.”

레이몬드는 1층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계단에서 멈추었다. 그보다 더 앞선 곳에 집사의 손에서 모자를 받아드는 카이로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형제가 모두 외출하는 날이었다.

레이몬드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그는 말쑥한 신사복을 차려입은 그를 보고 내심 놀랐다. 메마른 갑옷을 입었을 때와 달리 부드러움과 위엄이 공존해서 몹시 근사했다.

“형이야말로, 중요한 초대라도 받았나 보지?”

건조한 말투에 카이로가 혀를 찼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래도. 어릴 때는 잘 따르더니, 어른이 되었다고 형을 멀리할 참이냐.”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레이몬드의 표정이 어지러워졌다. 카이로가 미소 짓는 낯으로 쳐다보자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카이로와 마주치는 게 껄끄러운 이유는 그를 싫어하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옛 우애를 들추며 친근하게 구는 태도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레이몬드는 별다른 빈정거리는 말 없이 차분히 대꾸했다.

“알겠어, 형.”

카이로는 만족스러운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모자의 끝을 매만졌다. 키가 2미터에 달하고 등판은 위에서 굴러도 될 만큼 넓었으며 어깨는 위압적으로 두터웠다. 그 거대한 체구가 신사복에 완벽히 둘러싸인 모습은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레이몬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카이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였다. 그는 요즘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쓰리 피스 착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프록코트에, 안을 받쳐 주는 회색의 조끼와 검은 크라바트, 그리고 넉넉한 바지를 입었는데, 허벅지의 근육이 말처럼 두꺼워 품이 넉넉함에도 딱 맞아 보였다. 체격이 있어 저런 차림이 둔해 보일 만한데도 오히려 세련되어 보였다. 그러면서 근육질 몸을 감출 수 없어 옷이라는 포장을 한 겹 한 겹 벗겨 내고 싶은 욕망이 들게 했다. 매끄럽게 광택이 도는 검은색 구두까지, 흠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차림이다.

저 모습은 틀림없이 오늘 내로 수도 가십지에 실릴 것이다. 전장의 괴수, 오늘은 섹시한 백작님 같은, 자극적이면서도 호들갑스러운 제목으로 말이다. 수도에 발행되는 모든 신문이 카이로의 가장 멋진 사진을 싣기 위해 법석일 터였다. 단지 옷이 좀 잘 어울린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오래된 열등감이 기승을 부려 속이 약간 뒤틀렸지만 다행히 그게 다였다. 레이몬드의 마음은 이미 퀸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차분한 안색을 유지했다. 여기서 조급한 모습을 보이면 카이로는 흥미를 가질 테고, 그 관심이 행여나 리체를 향한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었다.

레이몬드는 사내로서의 본능적인 거부감과 끈적끈적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채 카이로의 눈빛을 받아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카이로는, 고분고분한 대답에 흡족해하다 문득 의아한 시선으로 동생의 차림을 살폈다.

“그나저나 정말로 어딜 가는 거니.”

“…….”

“사실 요 며칠 네가 위험한 짓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닌가 했는데.”

레이몬드는 카이로의 날카로운 시선에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다리를 다쳐 절뚝이면서 귀가하는 모습을 들켰던 터라 가슴이 뜨끔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요 근래는 몸에서 피 냄새가 가실 일이 없었으니, 카이로가 의심스럽게 생각할 만했다.

“오늘은 이렇게 멀끔한 모습으로 외출이라니. 평범한 밤 산책은 아닐 것 같구나.”

“……위험한 짓이라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치고받는 건 이제 지겨운 나이가 됐다고.”

레이몬드는 그를 납득시킬 변명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엉망인 몸을 싸움박질 때문이라고 속이고, 부러 방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블린 여자들이 수도에 들어왔잖아?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맛은 봐야지.”

“너도 이제 일가를 이룰 때가 됐으니 적당히 해라.”

다행히 납득했는지 카이로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도 철없이 군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레이몬드는 저를 한심해하는 카이로의 눈빛에 발끈하는 대신 실없는 웃음만 흘렸다.

“형 같은 사람이 있는데 나까지 열심히 살 필요는 없잖아.”

게으름의 극치를 달리는 말에는 결국 카이로도 눈살을 찌푸렸다.

“내게 소개시켜 줄 여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도 방종하게 구냐는 뜻이었다. 레이몬드는 아차 했다. 그때는 뭐에 씌기라도 했는지 리체 얘기를 꺼냈지만, 지금은 그녀를 소개시켜 주고 싶지 않은 대상 1순위가 카이로였다.

리체에게 자신은 쓸모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멋진 카이로는 절대로 소개시키고 싶지 않았다. 리체가 카이로를 보고 정을 품는다는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아찔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게 됐어. 형은?”

“나 말이냐?”

“형도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는 거 아니었어?”

카이로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무뚝뚝하지만 어딘지 부드러운 얼굴을 보며, 레이몬드는 의문을 떠올렸다.

언제부터 카이로가 저렇게 웃었지?

리체를 만난 후로는 정신이 없어 카이로에 대한 증오든 열등감이든 떠올리지 않았기에 그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건 아주 오랜만이라 할 수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인 살기가 흐르던 대장군의 얼굴이 지금은 카리스마와 위엄이 흐르는 잘생긴 백작 정도로만 보였다. 온유해진 인상은 그를 한층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예전에는 사내들이 유독 그를 따랐다면 지금은 얌전한 아가씨들도 그에게 관심을 가질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돌연 의심이 돋았다. 본능적인 직감이 근사한 모습의 형을 향해 날카로운 가시를 세웠다.

“형은 어딜 가는 건데?”

“꽃집.”

“……꽃집?”

“그래.”

레이몬드가 멍하게 물었다.

“왜?”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 카이로가 웃음을 터뜨렸다.

“꽃집을 왜 가겠느냐. 꽃을 사러 가는 것이지.”

그러니까 카이로 대장군이 왜 꽃을 사러 가는 것이냐. 필요할 일도 없거니와 필요하다면 부하들을 보내면 될 것을 직접 간다니. 같은 사내에게 꽃을 보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할 테고. 직접 꽃을 사러 간다는 정성은, 꽤 신경 쓰는 상대에게나 보일 만한 것 아닌가.

머리를 쓸 필요도 없는 아주 간단한 추론이지만 레이몬드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양 묘한 눈으로 카이로를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황도로 간다면 같이 가도 될 텐데.”

퀸은 수도의 외곽에 있다. 황궁과 반대 방향이었다. 방향이 같더라도 카이로와 한 마차를 타고 갈 일은 없을 것이다. 레이몬드가 단호히 고개를 젓자 카이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또는 아쉽다는 듯 눈꼬리를 아래로 휘었다.

“그럼 먼저 가마. 아, 레이몬드.”

은색 독수리가 장식으로 붙은 검은 지팡이를 건네받은 카이로가 막 생각났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만나는 아가씨와 싸우기라도 한 거라면 너무 자존심 부리지 마라.”

쓸데없는 충고. 레이몬드는 약간의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흥미가 솟았다. 그가 마냥 쳐다보고만 있자 카이로는 답지 않게 참견을 한 게 멋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상심했다고 어릴 때처럼 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동안 아가씨가 널 잊어버릴지도 모르잖니.”

“그, 그거랑은 상관없어.”

레이몬드가 당황해하자 카이로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와 소원해져서 싸움을 하고 다닌 게 아니냐.”

“그런 거 아니야.”

“그때 하는 말을 보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것 같더니.”

레이몬드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희망에 찼던 그 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그라우지의 방해를 받아 리체를 만나지도 못하고 실험만 당하는 신세였다. 어쩌다 자신의 꼴이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어 레이몬드는 내심 한탄했다. 비참해진 레이몬드는 화제를 돌렸다.

“그러는 형은.”

눈으로 그의 멋스러운 모자와 지팡이와 멋스러운 자태를 훑었다.

“그 여자와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야?”

카이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잔잔하고 온유한 인상은 왜인지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레이몬드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설마 연애결혼이라도 돼?”

“왜 설마인 거지?”

“그렇잖아. 형이 연애결혼이라니……. 가문끼리 격 맞는 사람을 찾아 혼약서를 쓸 줄 알았는데.”

“…….”

“그게 형답잖아?”

도블락은 적당한 사람을 만나 맺는 혼약보다는 신성한 나무에서 치루는 맹세의 의식을 결혼의 본질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누구나 신성한 결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범하게 결혼하거나, 지위가 높은 귀족 가문들은 정략혼으로 가문의 세를 불렸다. 레이몬드가 얼떨떨해하자 카이로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굳이 결혼까지 이용할 건 없지.”

“그렇게 말하니 더럽게 궁금해지네. 언제 소개시켜 줄 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뭐?”

“……소개시켜 주고 싶지만, 아직은 문제가 있으니.”

뜨악했던 레이몬드는 김 샌 표정을 하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문제?”

“곧 해결할 거다. 그럼 바로 일을 추진할 생각이다.”

거침없는 대꾸에 놀란 레이몬드에게 카이로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거리가 가깝지 않은 상황인데도 왜인지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라 레이몬드는 기분이 묘한 한편 불쾌했다. 정작 카이로는 아무 생각 없을 테지만,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사단에 입단했을 때부터 단장이었던 그는 우두머리 자리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명령을 받기보다는 명령하기가 익숙한 자 특유의 내려다보는 눈빛이, 그의 카리스마가, 뭇 사람들을 한없이 위축시켰다.

“그러니 레이, 너도 얼른 좋은 아가씨를 만나. 신성한 결혼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형제가 모두 신성한 결혼을 한다면 그것만큼 축복도 없지 않겠어?”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카이로가 문밖으로 나섰다. 레이몬드는 그의 거대한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재밌겠네.”

* * *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바깥과 달리 손님방은 심신을 안정시키는 좋은 향을 피웠지만 그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어색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옷, 잘 어울리네요.”

무알콜에 가까운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리체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얀색 셔츠에 검은색 치마. 퀸의 유니폼은 밖에도 입고 갈 수 있을 정도로 단정하고 깔끔했다.

“일할 때 입는 옷일 뿐인데요.”

“아뇨. 잘 어울려요. 화려한 옷도 잘 어울릴 것 같지만 말입니다.”

의미심장한 느낌에 리체가 라스카를 바라보자 그가 한숨처럼 웃었다.

“괜찮은 의상 숍을 알고 있는데, 리체 양 시간만 된다면 같이 가 봐요.”

“…….”

“전 그러고 싶습니다.”

눈을 내리깔고 수줍게 말한 라스카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차가워 보이기 쉬운 검은색의 눈동자가 별을 품은 밤하늘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예쁜 눈이다. 리체가 감탄만 할뿐 답하지 않자 라스카의 얼굴이 흐려졌다.

잠시 후, 표정을 갈무리한 라스카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요즘 몸은 어떻습니까? 치유관에 들른 지 오래되었잖아요.”

“나쁘지 않아요. 편하게 쉬고 있었거든요.”

목적이 있어 정신없이 바빴지만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라스카는 다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개인적으로 시험해 보는 약이 있어요. 이게 리체 양에게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라스카가 소파에 올려 두었던 가방을 끌어당겼다. 예쁘게 포장된 푸른 물약 다섯 병을 내려놓고, 리체가 쳐다보자 쑥스러운 얼굴로 뒷머리를 쓸어 넘겼다.

라스카의 실력은 현존하는 치유술사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능력을 중시하는 메디치나 가문이다. 그런 곳의 후계자는 아무나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그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리체에게는 아주 훌륭한 선물이었다.

마탑에서 그라우지와 연구를 할 때도 몸이 피로하여 일찍 잠들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체력을 보강할 수 있는 물약은 리체에게 한낱 재화보다 가치가 있었다.

“고마워요.”

리체는 웃으면서 라스카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내려온 회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라스카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치유관이 아니라 이런 술집에서 마주 보는 게 낯선지 어색해하면서도, 입가에는 기쁨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리체의 눈에는 값비싼 회색 냉장고로 보였다. 문을 열면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귀한 약들이 가득한 냉장고다.

분홍색 혀가 붉은 입술을 사악, 훑었다.

‘차원을 넘어갈 때 함께 데려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는 게 아쉬웠다.

‘그나저나 마법진 테스트는 잘 되고 있는 걸까?’

리체는 마탑에 머무르긴 했으나 마법진이 어떻게 구동되고 작동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라우지가 레이몬드를 데리고 테스트를 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무슨 일인지 그라우지가 그녀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민하고 민감한 작업이니 맡겨 달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잘되고 있는지 못내 마음이 불안했다.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다는 그라우지의 말을 믿고야 있으나……. 아니다.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다행히도 작업은 순조로운 게 분명했다. 마법진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복잡해져 갔고, 마법진에 머무는 하얀 빛도 점차 신비함을 더하고 있었다. 이 불안감은 이 일을 그라우지의 손에만 맡길 수는 없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레이몬드를 만나 봐야겠어. 진행 상황을 확인해야 하니까.’

할 일은 그뿐만이 아니다. 카이로와 얀테의 관계도 확인해야 하고, 황태자궁의 동태도 알아 봐야 한다. 따져 보니 역시 이렇게 한가하게 퀸에 머물 때가 아닌 것 같다. 사장이 아무리 간절하게 부탁했어도 수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된 리체가 눈썹을 찌푸렸다.

“……시간 돼요?”

리체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뭐라고 했어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희고 깨끗한 얼굴로, 라스카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일, 시간 되나요?”

리체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시간?”

“네. 수도 중심가에 잘 아는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분위기도 좋고, 음식 맛도 좋아서, 저번에 가족들과 식사했을 때 리체 양도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조곤조곤한 말투. 낮고 차가운 것 같지만 무른 푸딩처럼 부드러운 목소리……. 빨간 귓바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리체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건가요?”

천진난만하게 느껴지는 질문에 마침내 라스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 겁니까.”

“라스카가 데이트 신청을 해서…….”

“아, 잠깐, 잠깐만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라스카가 손가락 틈 사이로 리체를 보고, 그녀의 빤한 시선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주십시오.”

치유관에서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리체는 실소를 흘렸다. 연구라는 명목이 있기는 하나 침대에서, 의자에서 살을 맞대 뒹굴었던 사람이. 그것뿐이겠는가. 그녀의 손과 발 사이에서 자지를 벌떡벌떡 세운 남자가 고작 말 몇 마디에 새삼스럽게 얼굴을 붉히고 쩔쩔매는 게 재밌으면서도 우스웠다.

숱하게 생각했지만 라스카는 정말로 알파답지 않은 알파였다.

리체가 신기하게 쳐다보자 손을 살짝 내린 그가 눈만 드러냈다. 눈 주변이 불그스름했다. 흰 얼굴이라 빨갛게 변한 게 더 극적으로 드러났다.

“창피하게…….”

중얼거린 라스카가 여전히 빨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시선을 피한 채로 또 한숨을 쉬다가, 손도 대지 않았던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건 리체가 마시는 것과 달리 도수가 높은 술이었다. 명징한 사고를 흐린다고 술을 멀리하던 그에게는 위험한 수준으로 독할 텐데, 과연 흘러나오는 숨결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술기운을 빌려 얘기하려는 것처럼 숨을 몰아쉰 라스카가 들뜬 목소리를 냈다.

“아시다시피, 리체 양. 이제까지 저에겐 연구밖에 없었어요. 알파로 태어난 게 아깝다는 소리도 들었죠. 하지만 오메가와 잠자리를 즐기는 것보다는 지적인 충족감이 더 가치 있었으니까요.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최고의 행복이었죠. 그랬는데…….”

라스카가 드디어 리체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황스러운 건지, 설레는 건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지금은 그 무엇도 제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충만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리체 양이 절 찾아오지 않으니 저는, 이치에 맞지 않지만, 그래도 굉장히, 서운해져서…….”

라스카가 다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빠르게 말했다.

“저도, 제가 당황스럽습니다. 환자와 연구만 생각하던 머릿속으로 리체 양과의 미래를 그리고 있어요. 연구실에서 대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분위기가 좋은 레스토랑에서, 살롱에서 연구와는 관련 없는 대화를 하고 싶어요.”

“라스카.”

“리체 양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것들이 다 궁금합니다.”

열정적인 시선이 부닥쳐 왔다.

“그리고 생각하죠. 리체 양이 호감을 느끼는 스타일이 나였으면 좋겠다. 리체 양이 날 좋아했으면 좋겠다. 연인이 되어 데이트를 하고, 약혼을 하고, 그러곤…….”

목소리가 잠겨 들어갔다. 라스카는 다급하게 빈 술잔에 호박색 술을 따르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비워 냈다. 총명했던 눈동자가 느슨하게 풀린 고무줄처럼 힘이 빠졌다.

리체는 굳어졌다.

“상상합니다. 신성한 나무 앞에서 당신의 손을 잡는 내 모습을요.”

아아, 그만.

“그런 생각이나 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멈출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혈류가 빨라진 뺨의 홍조가 한층 도드라졌다. 마침내 손을 내린 라스카가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말 없는 리체를 바라보았다.

“리체 양.”

리체가 가만히 있자 라스카가 망설이다 그녀에게 다가왔다. 멀거니 쳐다보는 그녀의 투명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새파란 눈을 차마 마주 볼 수 없다는 듯 피하고, 조심스럽게 팔을 벌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리체는 잠깐 움찔했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에 안심한 듯 라스카가 보다 적극적인 손길로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성격처럼 따뜻하고 조심스럽게.

솔직한 속마음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좋아합니다.”

그만하라니까.

‘안아 주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지만…….’

리체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라스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건 분명했다.

이런 감정적인 접근은 곤란했으므로, 리체는 대꾸하는 대신 쫑긋거리는 귓바퀴에 손을 가져갔다. 약간 서늘하고 그의 성격처럼 단정한 귓바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라스카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성적인 함의가 짙게 묻어나온 손길에 단단했던 눈빛이 당황스럽게 흩어졌다.

리체는 속으로 속삭였다.

차라리.

라스카, 차라리.

리체는 마음을 바꾸어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 그의 귓바퀴를 선을 적극적으로 따라 훑으며 다른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헤어 젤을 발라 반듯하게 모양 잡힌 머리를 슬쩍슬쩍 건드리고 툭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엄지와 검지로 한 올 한 올 부드럽게 쓸었다.

귓바퀴를 쓸던 손이 그 뒤쪽의 여린 살로 넘어갔다. 뒷머리와 목덜미의 경계를 손날로 꾸욱 눌렀다. 손바닥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자 못 참겠다는 듯 라스카가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가에, 촉촉하게 짙어진 남색의 눈동자.

아이를 대하듯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리체는 턱을 들어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적당히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은 키스였다.

라스카가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혀를 가볍게 튕겼을 뿐이었는데. 자신이 대단히 섹시한 팜므파탈이라도 된 기분이라, 리체는 숨죽여 웃었다. 떨리는 라스카의 숨결과 달콤한 박하 향이 코끝을 기분 좋게 스쳤다.

“……리체 양?”

혀로 그의 입술을 한 번 핥았다. 금세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상하며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 부드럽게 주무르고, 빳빳하게 다림질한 옷깃을 들추어 하얀 등으로 진입했다.

“음.”

흥분과 기대감 섞인 신음을 흘리며 라스카가 리체에게 바싹 다가갔다. 리체가 하는 대로 마냥 호응해 주었던 착한 혀가 조금씩 제 의지를 갖고 그녀의 혀를 휘감았다. 혀를 맞대고 비비며 리체가 고개를 살짝 틀자 입맞춤이 한층 깊어졌다. 리체의 손은 꽤 깊이 이동했다. 툭 튀어나온 둥근 뼈를 만지작거리자 라스카의 등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견갑골은 손으로 만져도 섹시하게 느껴졌다. 리체는 계속해서 둥근 뼈를 애무했다. 손날로 아래를 바치고 손가락으로는 튀어나온 부분을 조물조물 매만지니 뼈를 둘러싼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숨결이 거칠어진다 싶더니, 돌연 라스카가 리체를 확 밀쳤다.

리체가 눈을 깜박거렸다. 라스카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이런 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좋아하잖아요, 이런 거.”

리체가 다정하게 속삭이자 라스카는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리체 양은 지금, 내 입을 막으려고 그런 거잖아요.”

“…….”

“내 말이 곤란해서, 듣기 싫으니까 말입니다.”

리체는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그러나 그 안에 스친 곤란함을 눈치챈 라스카는 더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리체는 죄책감을 느꼈다. 라스카는 그녀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성격도 온순하고, 충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또한 능력이 출중하여 매우 쓸모가 있다. 그런 그가 괴로워하니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려면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할 텐데, 그건 또 그녀가 바라지 않았다.

리체는 다시 그에게 손을 뻗었다. 톡, 톡,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라스카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지막 단추를 끄르자 손목을 붙잡혔지만 리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추를 마저 풀었다. 자연스럽게 젖혀진 셔츠 사이로 오밀조밀하게 짜인 하얀 복근이 드러났다.

리체가 유혹적으로 속삭였다.

“만져 줄까요, 라스카?”

라스카가 고개를 돌렸다.

“아뇨, 이런 건 싫습니다.”

“왜 싫다고 하는 거예요?”

리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라스카는 이미 흥분해 있었다. 긴장으로 팽팽해진 근육과 불룩해진 다리 앞섶을 하고서 거부하는 그를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넘어가 버리면, 다시는…….”

말을 잇지 못한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얼렁뚱땅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고지식한 남자.

리체는 탄식했다. 그를 만지지는 않았다. 다만 목소리가 한층 달콤해졌다.

“하지만 나도 하고 싶어요, 라스카.”

라스카의 눈이 더욱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리체는 곧장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 목 아래 매끄러운 빗장뼈를 짚고 미끄러뜨려 탄탄한 가슴 근육 위에 손바닥을 올리자 라스카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라스카의 체온이 높은 거겠지. 당연했다. 몹시 흥분했으니까. 이런데도 거부하다니.

리체는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복사꽃처럼 발그레해진 볼에 눈동자가 매혹적으로 반짝였다.

라스카가 넋을 잃고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리체는 입술을 한 번 핥고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가슴에서 미끄러진 손이 갈라진 복근의 고랑을 야릇하게 훑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손의 위치에 따라 점차 허리를 숙인 탓에 어느덧 라스카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시선이 같은 위치에서 맞부딪쳤을 때 라스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맞추었다.

라스카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입을 열자 급하지 않게 밀고 들어온다. 라스카답다는 생각에 히죽 웃은 리체는 눈을 살짝 감고, 멈추었던 손을 천천히 이동시켰다.

고랑 파인 배를 지나 내려가자 매끄러운 질감의 천이 만져졌다. 그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틈을 만들고 손을 집어넣었다. 중지, 검지와 약지, 그리고 엄지와 소지까지 모두 바지 속으로 들어갔다. 건조한 열기가 느껴지는 바지 속에서 리체는 여전히 천천히 움직였다.

라스카의 혀가 덩달아 느려졌다. 리체는 눈을 내리깔고 손을 그의 중심부로 이동시켰다. 속옷 위로 단단하고 뜨거운 기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헉.”

라스카가 헛숨을 토해 냈다. 리체가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열기가 보다 직접적으로 손을 덥혔다. 손가락으로 치골을 문지르고 머리카락보다 뻣뻣한 음모를 튕기자 감질 나는 듯 라스카가 엉덩이를 뒤척였다.

그는 어딘지 괴롭히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남자다.

반짝이던 리체의 눈동자도 곧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하아.

토해 내는 숨에 누구의 것이랄 것 없는 열기가 섞였다. 흥분한 알파 페로몬에 체온이 급격히 높아지는 듯했다.

딱 적당히, 기분 좋은 흥분감.

어깨를 붙잡은 라스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리체는 혀를 찼다.

‘여기서 그만해야 하는데…….’

손을 크게 벌려 라스카의 발기한 자지를 붙잡은 순간, 라스카가 턱을 젖혔다.

“흣, 리체 양…….”

리체는 말랑한 그의 아랫입술을 쭉 빨아들였다. 그리고 자지를 리드미컬하게 주무르려는 찰나.

똑똑.

“아읏.”

리체가 고개를 들었다. 흥분에 빠진 뇌를 건져 올리는 느낌으로, 이성이 천천히 돌아왔다.

‘아, 지금 정신없이 바쁜 시간이지.’

리체는 달아오른 라스카의 얼굴을 보며 밀려드는 약간의 아쉬움을 털어 냈다.

바지 속에서 손을 빼자 라스카가 눈을 번쩍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쳐다보는 시선에 리체는 그의 깨끗한 뺨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라스카. 바깥에 일이 생겼나 봐요. 처리하고 올게요. 이건, 만지지 말고.”

불룩하게 튀어나온 아래를 손등으로 슬쩍 누르며 말하자 라스카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럼에도 붉어진 뺨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곧 느리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리체는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일이야?”

밖으로 나오자 엘자가 곤란한 얼굴로 서 있었다. 홀의 일이 많이 바쁜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엘자는 영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누가 널 지명했어.”

“또?”

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 그녀가 상대했던 손님들에게 모조리 초대장을 돌렸다는 걸 모르는 리체로서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귀찮다고 여기는 한편 이 상황이 이상해서 엘자를 바라보았다.

“기존 손님이 있으면 웬만해선 지명 안 받잖아.”

“그게, 웬만하지가 않아서.”

“무슨 소리야? 누군데?”

엘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인상만 썼다.

“레이몬드 경.”

리체는 또 한 차례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곤란한데.’

리체는 곤혹스러웠다.

“근데 뭔가 이상해.”

엘자의 불안한 속삭임이 불길함을 부채질했다. 리체는 라스카가 있는 방을 흘끗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레이몬드를 보자마자, 그녀는 엘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손을 맞잡고 그 위에 턱을 괸 레이몬드는 잘 꾸며진 파티용 레이몬드였지만 허리 아래, 긴 다리가 보는 사람도 불안할 정도로 달달 떨리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리체를 확인한 눈동자가 확장되었다가 이내 사정없이 흔들렸다. 약이라도 한 것처럼 불안정한 모습이라 리체는 가까이 가기가 꺼림칙했다.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레이몬드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다리를 내려다보니 여전히 풍 맞은 사람처럼 덜덜거리고 있다. 그제야 그녀의 반응을 이해했다는 듯 다리 흔드는 것을 멈춘다. 맞잡은 손을 푸는 레이몬드는 초조한 얼굴이었다.

문에 등을 기댄 채 리체는 그의 얼굴과 행동을 샅샅이 살폈다.

‘왜 저러지?’

어디 아픈 것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잘 꾸미고는 있지만 눈 밑도 거무스름한 것이, 의혹이 리체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가만히 지켜보자 레이몬드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무릎에 손을 올려 두고 그녀를 얌전히 쳐다보았다. 리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이몬드?”

“응.”

멀쩡하게 돌아오는 대꾸에 경계를 풀고 그에게 다가갔다.

침대 같은 소파 앞의 길쭉한 테이블에는 반쯤 비운 위스키 한 잔과 손도 대지 않은 과일 안주가 놓여 있었다. 리체는 술잔에 얼음이 없음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오래 기다렸어요?”

“응.”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씨발, 느낌상으로는 반나절 기다린 것 같아서.”

레이몬드를 쳐다보자 그가 웃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웃으려는 것 같았지만 리체는 침울하다 느꼈다.

“어디 안 좋아요?”

“그래 보여? 멀쩡한데?”

“얼굴이 창백해요.”

리체가 손을 뻗자 레이몬드는 흠칫하더니, 곧 마음을 고쳐먹고 그녀에게 얌전히 얼굴을 맡겼다. 리체는 그의 얼굴을 가볍게 매만졌다. 손바닥이 다소 끈적거리는 것이, 유분이 많은 크림이라도 바른 듯했다. 꽃단장을 했을 그를 상상하니 리체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 웃음을 오해했는지 레이몬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많이 안 좋아? 흉해?”

“그건 아니지만…….”

얼굴이 좀 상해 보여도 그는 여전히 여인을 유혹할 수 있을 만큼 잘생겼다. 리체가 고개를 흔들었지만 레이몬드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얼굴을 구겼다.

“밖의 놈들이랑 비교하니까 흉한 거지? 그럴 줄 알았어.”

“…….”

“씹, 사내새끼들이 공작새처럼 우습게 꾸며 가지고서는.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투덜거리는 그의 얼굴이 아주 못마땅했다. 이마가 구겨지고 미간에 사나운 주름이 새겨졌다. 폭력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리체는 그의 화장기가 있는 얼굴을 흘끗했다.

“왜, 마음에 드는 놈이라도 있디?”

사나운 눈빛이 그녀를 향해 쏘아져 왔다. 리체는 황당함을 감추고 짧게 대꾸했다.

“없어요.”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그를 향해 무심히 말했다.

“레이, 오늘 멋지네요.”

“얼굴이 상했다며?”

“그래도 멋있어요. 레이는 잘생겼으니까.”

퉁명스러웠던 얼굴이 살짝 변했다. 입술을 실룩이며 그가 리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내 얼굴이 보기 좋아?”

역시 그는 조금 단순한 면이 있었다. 리체는 옅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보다 확연히 풀어진 얼굴로 그가 이번에는 직접 그녀의 손을 가져가 뺨을 비비고 손바닥에 코를 박아 체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한참 후에야 그에게서 풀려난 리체는 그의 옆에 편하게 앉았다. 레이몬드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앉은키가 맞지 않아 꽤 불편할 텐데도 부득불 자세를 유지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리체의 여린 살갗을 간질였다. 레이몬드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

“바빴어요. 요즘도 마탑에 가고 있죠? 내가 마탑에 있을 때 얼굴을 보면 좋았을 텐데.”

레이몬드가 갑자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놈이 널 만나게 하지 않는 거겠지.”

“무슨 말이에요?”

“그라우지 놈이 아무 말도 안 했어?”

“무슨 말이요?”

의아해진 리체가 고개를 틀어 그를 보았다.

레이몬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는 않지만 대충 귀를 씻고 싶어지는 수준의 욕설인 듯했다.

잠시 후 축 처진 레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실험은 잘되고 있는 것 같아. 장난질하는 것만 빼면 말이지.”

또다시 나직한 욕설이 이어졌다. 리체는 유심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화장 크림으로 가렸지만 역시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이마에는 땀까지 배어 나와 있었다.

몸이 안 좋은 게 분명한데도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그는 고집스러운 어린애를 보는 것 같았다. 위태로웠다. 각인한 뒤의 레이몬드에게선 첫날의 오만하면서도 시건방진 모습을 잘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오늘은 유독 심한 것 같았다. 축 늘어지는 몸이 지친 듯했다.

의혹이 점점 짙어진 리체가 가까이 손으로 반대쪽 뺨을 감쌌다. 레이몬드는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들썩였다가 얼굴에 힘을 주고 참았다.

리체는 말 잘 듣는 개에게 상을 주듯 뺨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눈꺼풀이 스륵 내려와 피로에 찌들었던 붉은 눈동자에 장막을 쳤다. 리체는 그가 안정될 때까지 계속 매만져 주었다. 눈을 감은 채 레이몬드가 물었다.

“오늘 많이 바빠? 널 찾아가려 했는데 하찮은 것들이 한사코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잖아.”

리체는 잠시 침묵했다가 곧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래층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손님들이 많으니, 마주치면 좋지 않을 거예요.”

“여기, 사내새끼들이 너무 많아.”

“…….”

“네게 눈독 들이면 다 죽여 버릴 거야.”

리체는 동작을 멈추었다. 평온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은 흉악한 말투는 목소리에 감정을 싣는 것보다 더 오싹했다.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아서 말이다.

‘라스카가 방에서 나오면 안 될 텐데.’

두 사람이 마주치지 않게 하려면 꽤 신경을 많이 써야 할 터였다. 쯧, 혀를 차는데 문득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손을 씻었나?’

기억이 없다. 엘자가 하도 다급하게 굴어서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손이 방금까지 라스카의 자지를 만졌던 손이라는 것을 인식한 리체는 다소 부자연스럽게 손을 내리고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냅킨을 향해 손을 뻗자 뺨을 만져 주던 부드러운 손길을 잃은 레이몬드가 불만스럽게 눈을 치떴다.

갑자기 허리가 잡힌 리체는 냅킨을 붙잡은 채 굳어졌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향긋한 목덜미에 머리를 박은 채 비비적댔다.

“얼굴, 계속 만져 줘.”

대충 손을 닦은 리체는 아이처럼 레이몬드를 얼러 주었다. 한참 성의를 보여 주자 그의 날카로웠던 분위기가 폭삭 가라앉은 지붕처럼 잠잠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억지를 쓰는 일은 적당히 모른 척했을 텐데 오늘의 레이몬드는 어쩐지 지나치게 불안정해서, 무작정 무시하기가 곤란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응.”

“무슨 일?”

“……말이라고 해. 그동안 널 못 만났잖아. 좆같았다고.”

불만이 잔뜩 밴 꿍얼거림. 심통 난 아이 같은 꼴이다. 리체는 어린애가 징징거린다고 얘기를 들어주는 타입은 아니었다. 아예 징징거림을 상대하지 않는 쪽이지.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색을 하려는 차에, 배에 딱 붙은 레이몬드의 붉은색 머리꼭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알파가 각인한 오메가를 만나지 못했을 때의 고통은 텍스트로만 이해할 뿐 머리로, 가슴으로 온전히 알게 된 건 아니다. 변해 가는 레이몬드의 상태로 ‘저렇게 되는구나.’라고 어렴풋하게 추측하는 정도다. 훌륭한 연구 데이터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더 약해 보이는 레이몬드의 상태가 거슬렸다.

‘각인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따뜻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문지르고 움찔하는 어깨를 한 번 쓴 손이 옷깃 아래로 내려갔다.

뒤늦게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레이몬드가 제지하려는 순간, 리체는 눈살을 찌푸렸다. 손끝에 닿은 거칠거칠한 촉감.

‘이게 뭐지? 딱지 같은 것이…….’

손가락을 벌려서 손이 들어가는 만큼 레이몬드의 등을 더듬었다.

“뭐, 뭐 하는 거야.”

곤란해하는 레이몬드의 말도 무시하고 거침없이 셔츠로 가려진 그의 피부를 더듬었다. 애무를 한다기에는 탐색하듯 기계적이었다. 리체의 눈이 슬그머니 가늘어졌다.

흐읏, 레이몬드의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애무도 뭣도 아닌 손놀림에도 흥분하는 그의 양어깨를 쥐고 뒤로 밀어내자 반쯤 감긴 눈을 끔벅거렸다. 리체가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옷, 벗어요.”

레이몬드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발그레하니 병자처럼 피곤해 보이던 낯에 그나마 생기가 감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번들거리는 눈으로 리체를 흘끗거리며 레이몬드가 셔츠로 손을 가져갔다.

단추를 푸는 그를 보자 리체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분명 조금 전에 라스카도 이렇게 셔츠를 벗었던 것 같은데,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라스카는 귀공자가 수줍어하며 옷을 벗는 것 같았다면, 레이몬드는 그녀가 어디 도망가지 않을까 짐승 같은 눈으로 주시하며 옷을 빠르게 벗어 젖혔다. 마지막 몇 개의 단추가 잘 풀리지 않자 욕설을 지껄이며 그녀에게 바투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리체는 그와 키스하며 손을 내려 셔츠의 단추를 풀어 주었다. 양쪽으로 벌어진 셔츠를 그대로 젖혀 어깨 너머로 밀어냈다.

“혀 내밀어.”

레이몬드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뜨거운 열기가 그의 목구멍을 자글자글 끓게 하는 듯했다. 그녀가 순순히 혀를 내밀자 레이몬드는 마중 나가듯 내민 혀로 그녀의 혀를 맞대었다. 이윽고 맛있는 사탕처럼 쭉쭉 빨아 대었다.

이루 말할 데 없이 야릇한 느낌에 신음을 흘린 리체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의 어깨를 잡고 뒤로 밀었다. 방해를 받은 게 불만족스러운지 레이몬드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왜?’ 하고 묻는 시선에 리체는 혀를 찼다. 그녀는 벌거벗은 상체를 살피듯이 훑었다.

“뭔가 이상하긴 했는데…….”

뒤늦게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을 눈치챈 레이몬드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리체는 상처로 흉하게 얼룩진 그의 상체를 보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레이몬드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그게 더 못마땅하고 의아하여 리체는 눈썹만 치켜올렸다.

“어디서 패싸움이라도 했어요?”

레이몬드의 몸은 엉망이라고 표현하기도 부족했다. 상한 몸. 그게 딱 맞는 표현인 듯했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엉켜 있는 흉터의 선과 팔뚝의 화상 흉터 자국은 징그럽기까지 했다. 패싸움이라는 건 농담이었다. 얻어맞은 정도로는 생길 수 없는 상처들이었다.

그제야 리체는 레이몬드가 왜 이렇게 힘이 없고 창백해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몸으로 휴식을 취하기는커녕 술집에 와서 독한 술이나 퍼마시다니.

리체는 자신이 왜 화가 나는지도 모른 채 그에게 매서운 시선만 던졌다. 레이몬드는 딱히 설명하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리체의 시선이 점점 차가워지자 별수 없었다.

리체는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 알자 싶어 그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말 패싸움을 했다거나 위험한 짓을 해서 몸을 이 꼴로 만들었다고 하면 한심하다고 야멸차게 말해 줄 생각이었다. 레이몬드가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얗게 질린 입술이 비뚤어졌다.

“씨발, 창피하게.”

“진짜 창피한 게 뭔지 알려 줘요?”

“그럴 것까진 없고……. 그렇게 보지 마. 이상한 짓한 거 아니니까. 너는 내가 그렇게 멍청한 놈인 줄 알아?”

“…….”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왜 이렇게 됐겠어!”

“모르겠으니 말해 봐요.”

언제 버럭 소리를 질렀냐는 양 레이몬드는 다시 그녀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나 지금 마탑에서 차원 이동 마법을 테스트하고 있잖아.”

“…….”

“그래서지 뭐.”

생각도 못한 말이 나오자 리체는 멍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레이몬드가 눈을 굴리더니, 리체가 다그치자 얌전히 입을 열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난 후, 레이몬드에게서 그간 그가 겪은 일을 전해 들은 리체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에게 테스트를 받아 달라고 한 건 그녀였다. 차원 이동 마법의 안정성을 시험하기 위한 실험체가 되어, 마법을 완성시키는 데 일조하라 했다.

물론 위험성을 설명하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 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험난한 테스트가 될 것을 알았다면, 처음에 더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리체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가 레이몬드가 이런 꼴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그에게 이 제안을 하지 않았을까?

리체는 레이몬드를 보기 힘들었다. 반항적인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맹목적인 눈빛이 가슴을 쿡쿡 찔러 댔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그녀의 행동에 레이몬드가 차갑게 말했다.

“그라우지 놈이 장난질을 친 것뿐이야.”

“그 사람이 왜요?”

리체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힘이 없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레이몬드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날 골탕 먹이려고.”

리체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레이몬드가 자신이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 핑계를 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라우지가 뭐 하러 그러겠어요?”

“그건…….”

망설이던 레이몬드가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싫어서겠지.”

그게 아닌 게 분명했지만 리체는 캐묻지 않았다. 잘되고 있다는 그라우지의 말을 그대로 믿고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녀의 책임이 컸다.

리체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녀는 연구원이었다. 수많은 관찰 실험, 임상 실험을 진행했고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 왔다.

레이몬드의 가슴팍에 생긴 상처는 화상의 흉터였다. 저런 위험 상황에 처하다니,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오차 범위가 컸다. 실패였다.

‘그라우지가 어째서 얘기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할 말을 잃은 리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 침묵에 레이몬드가 급격하게 불안해진 얼굴로 말했다.

“씨발, 왜 그런 얼굴을 해?”

“하지만 실험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거잖아요? 이래서는…….”

“이래서는 뭐? 그만하려고? 다른 놈 찾으려고?”

고민스러웠던 리체는 거친 어투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이몬드는 초조해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더 열심히 할 거야. 내가, 이거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난 신경 쓰지 마. 너는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할 거야.”

“당신이 어떻게요. 이렇게 다쳐서는.”

헛웃음을 흘린 리체는 복잡한 마음에 이마부터 머리까지 쓸어 넘겼다. 이건 일개 임상 실험자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라우지와 자신의 책임이며, 잘못이지 레이몬드는 이 일에 아무런 책임도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리체가 무겁게 입술을 여는 순간, 레이몬드가 그녀의 허리 옷깃을 붙잡고 조용히 말했다.

“씨발, 난 상관 말라니까. 내가 다치는 거 뭐, 그렇게 해서 마법이 나아진다면 그만큼 넌 안전하게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거잖아.”

리체는 억지를 쓰는 그를 노려보며,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방금 가슴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그가 이럴수록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미안하다는 말의 무게가 부담스럽다. 이렇게 무한한 호의를 보내는 사람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실험에 이용하기에 리체는 아직 인간의 마음을 가진 연구자였다.

“미안해요.”

“뭐가?”

슬금슬금 다가와 손바닥에 얼굴을 붙인 레이몬드가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리체는 그 우스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관자놀이 가까운 곳에 선처럼 그어진 붉은 상처가 있었다. 리체는 상처를 피해 주변의 살을 검지로 가만히 쓸며 말했다.

“이건 실험자 책임이에요. 내가 당신을 위험하게 만든 거죠.”

솔직하게 시인했지만 레이몬드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양 눈을 끔벅거려 리체는 열없이 웃었다.

“그렇게 웃지 마. 너답지 않아. 그냥 이용해 먹어. 다른 생각하지 말고.”

“…….”

“마법 실험은 원래 위험한 거야. 씨발, 넌 그것도 몰라? 내가 비록 마법에 문외한이라지만, 마법 하나를 새로 창조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고 있어. 이런 위험한 과정을 거쳐서 성공에 가까워지는 것도.”

“그런가요?”

“어. 그래서 난 기쁘다고. 그러니까 기분 이상해지는 표정하지 마.”

말문이 막힌 리체의 속눈썹이 나비처럼 하늘거리자 레이몬드가 픽 웃었다. 얇은 입술이 기분 좋게 호선을 그리는 얼굴은 상처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싱그러웠다.

“내가 위험한 만큼 너는 안전해지는 게 좋아. 그라우지, 그 멍청한 마탑주가 너에게 실수해 버리면 어떡해?”

“…….”

“그만큼 넌 나에게 신경을 써 줘. 걱정해 주는 건 기분 좋아. 그래. 지금 표정.”

리체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못 참겠다는 얼굴로 이를 아득 갈았다.

“씨발, 미쳐 버리겠네. 나 지금 자위해도 돼?”

리체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무한한 호의와 애정이 그를 타고 넘어와 맞닿은 손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렇게 맹목적인 건 각인 때문인가?’

모호한 표정으로 리체는 레이몬드의 뺨을 쓰다듬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손길을 즐기던 레이몬드가 문득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요?”

“나오는 길에 형을 만났어.”

카이로. 아무래도 찔리는 게 있느니만큼 리체는 긴장한 채 그를 주시했다.

“대화를 하다가, 간절해졌어.”

“……뭘?”

레이몬드가 들뜬 얼굴로 고백했다.

“너와 결혼하고 싶어. 다른 사람의 축복 따위는 없어도 좋아. 그냥 너와 신성한 나무 앞에 서서, 영원을 맹세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리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레이몬드는 덜컥 겁이 났는지 눈빛이 흐려졌다.

“씨발, 그래. 내 멋대로인 거 알아. 넌 생각해 본 적도 없겠지. 게다가 너는 이곳을 떠날 생각까지 하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이곳에서 결혼은 그녀에게 하등의 의미도 없었다.

“만약에 마법이 성공하고, 우리 둘 다 차원을 이동하게 되면.”

“…….”

“그때는 나와 맹세해 줄래?”

“그곳에는 신성한 나무 따위 없어요.”

“하지만 어느 곳이든 결혼을 하지 않는 곳은 없어.”

“맞아요. 거기도 결혼 제도가 있죠. 하지만 서류에다 이름을 서명하는 것에 불과해요. 그런 것에 집착할 필요 없어요.”

레이몬드가 웃자 리체는 그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이몬드뿐만이 아니라 본 차원에서도 결혼에 대한 그녀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럼 외롭지 않냐고 묻는 그들에게 리체는 도리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시선을 되돌렸다.

지금 레이몬드의 눈빛이 그들과 흡사했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라 리체가 눈썹을 꿈틀하자 레이몬드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 대꾸했다.

“리체 넌 헛똑똑이야. 멍청이, 그 의미가 좋다는 걸 왜 몰라? 어떤 결혼이든 영원을 맹세하잖아. 그게 좋아. 나도 이런 걸 바라게 될 줄 몰랐어. 널 만나기 전까지는.”

입가의 미소는 장난스러웠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너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져. 자꾸, 너무나…….”

억눌렀지만 들뜬 걸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가 이글거리는 열정을 드러냈다. 리체는 그 열정에 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교계의 문제아 레이몬드 스트리고가 이렇게 낭만적인 사람일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전 같았으면 곧바로 곤란하다는 감상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엉망이 된 몸을 확인해서일까. 리체는 기분이 묘했다. 싫다고 대번에 거절할 수 없는 건, 그의 온몸에 가득한 흉터에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일 거다.

게다가 그는 미래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차원 이동이 성공하게 되어, 본 차원에 레이몬드와 있을 수 있게 된다면, 결혼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는 자신을 영원히 배신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돌연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누군가의 존재에 리체는 가시에 찔린 듯한 심정이 되었다.

‘갑자기 그가 왜 생각이 나는 거지? 내가 떠나는 것과 그 사람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카이로나 레이몬드나 차원 원주민일 뿐이다. 연구에 감정을 섞지 않는 건 연구자의 기본 자세였다. 연구자 윤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자각에 리체의 얼굴이 굳어졌다.

‘큰일이야.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어.’

혼란스러워져서, 표정 관리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리체?”

정신을 차리자 레이몬드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심코 내비친 감정의 편린을 재빨리 수습하려는데.

똑똑.

조심스럽게 열린 문틈으로 엘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일이 생긴 듯했다.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리체는 냉큼 몸을 일으켰다.

“뭐 더 필요하신 거 없으신가요? 이건 사장님 서비스예요.”

테이블에 과일 안주를 내려놓은 엘자가 레이몬드의 눈치를 보며 리체에게 눈짓을 했다.

리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자가 나간 뒤 리체는 레이몬드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불만스러웠다.

“가려고?”

“가게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잠깐 나갔다 올게요.”

“일을 해결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밖에 직원들 많던데.”

손님 수에 비하면 결코 많지 않지만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게다가 무슨 일로 널 데려가? 손님이 지명했는데. 뭐 이따위 가게가 다 있어. 이런 데 당장 때려치워.”

레이몬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심술을 부리는 그를 리체는 조금 난처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웬만해서는 지명한 손님 상대를 하는 직원은 다시 지명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어지간한 클럽의 규칙들이 그랬으니, 문턱이 닳도록 술집을 다니며 유흥을 즐겼던 레이몬드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가 불쾌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당장 나가서 엘자든 사장이든 한 소리를 할 것 같은 기세라 리체는 말로 달랠까 하다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레이몬드의 눈썹, 미간, 매끄러운 콧날에도 입을 맞추었다. 미끄러지듯 입술을 내려 온 얼굴에 스치듯 입을 맞춘 뒤에 고개를 들자 레이몬드는 당장 달려들고 싶은 얼굴이었다.

달래려고 했는데 오히려 자극한 건 아닐까. 불안해진 리체는 전보다 상냥하게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알았죠?”

“…….”

“나머진 다녀와서.”

“다녀와서?”

“다녀와서 해요.”

단물로 적시듯 귓바퀴에 숨결이 떨어졌다. 달콤한 사탕을 들고 어린아이를 달래는 꼴이었다. 다행히 효과는 좋았다. 레이몬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자는 어디 가지도 않고 바로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자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사장을 보고 리체는 흠칫했다.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이제야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러고 보니 사장의 안색이 푸르죽죽하다. 대형 사고라도 터졌을까. 그럼 해결하러 가야지 자신을 찾는단 말인가. 감을 잡지 못한 리체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골치 아픈 얼굴을 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한테 할 말 있어요? 바쁠 텐데 왜 두 사람 다 여기 있어요. 안 바빠요?”

“바빠 죽는 상황이지, 그걸 말이라고!”

버럭 소리친 사장이 한숨을 쉬고 무거운 눈으로 문을 힐끗했다.

“스트리고 경은 뭐라고 안 해?”

“기분은 안 좋아하죠.”

“그래도 네가 잘 달랜 모양이네. 그거 하난 다행이다.”

의미심장한 말투에 리체가 멈칫해서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자 사장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사실 알고 있었어. 네가 레이몬드 스트리고 경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말이야.”

리체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그럴 만하다고 수긍했다. 레이몬드와 여기서 섹스를 몇 번이나 했는데, 내심 눈치챌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인인 척 가장을 했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었다. 리체가 궁금한 건 다른 것이었다. 지금껏 모른 척해 왔으면서 갑자기 왜 이 일을 언급하는 걸까?

리체가 눈빛으로 이어질 말을 독촉하자 사장은 지체 없이 본론을 꺼냈다.

“스트리고 장군님이 오셨어.”

듣는 즉시 리체는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널 부르셨고. 지금 4층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중이고.”

잠시 아득해지긴 했지만 리체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2층에는 라스카가, 3층에는 레이몬드가, 4층에는 카이로가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최악이었다.

왜 하필 오늘.

리체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이러다 그라우지까지 오는 건 아니겠지.’

감당 불가의 정보가 들어올 때 뇌가 본능적으로 현실 회피를 시도하는 것처럼, 멍한 생각이 들었다. 오싹하게 소름이 돋은 리체는 고개를 흔들어 현실로 복귀했다.

“이런.”

그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사장은 무표정한 얼굴만 보고는 기함했다.

“이런? 반응이 그게 다야? 카이로 장군이 오신다기에 기뻤다가, 널 지명하시기에 약간 난감했다가, 엘자의 말을 듣고는 정신이 나가 버리는 줄 알았어!”

“…….”

“엘자 말로는 네가 카이로 장군과도 어, 어떤 관계가 있다는데 맞아? 정말이야?”

리체는 난감해하는 엘자를 흘끗했다. 엘자는 카이로와의 일도 알고 있었구나. 모른 척하더니 제법이군. 고개를 돌려 ‘아니라고 말해다오’ 하는 시선으로 간절히 바라보는 사장을 응시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의미가 없을 때는 굳이 할 필요 없겠지.

“네.”

“……네? 그게 다야?”

“카이로님의 저택에서 머물고 있었어요, 지금껏.”

“이런! 이런, 이런, 이런!”

뭉크의 절규 같은 몰골로 사장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리체는 입을 합 다물었다. 일개 술집 사장이기는 하나 귀족들을 자주 대하여 수준급의 교양을 갖춘 사장이 저렇게 채신머리없게 구는 건 처음 보았다.

“진정하세요.”

점잖게 말리는 리체는 그와 대조해서 더 차분해 보였다.

“진정이 가능해야 진정하지. 이걸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해.”

“손님이 온 것뿐인데 왜 그러세요?”

“왜 그러냐니!”

사장은 답답해하며 가슴을 쳤다.

“그래. 네가 외부인이라 아직 심각성을 모른다고 치자. 물론 카이로 스트리고 장군은 알파지. 외도의 기준이 우리 같은 베타랑은 달라서 매우 낮아. 네가 카이로 장군의 파트너 같은 거라면 문제없어. 그런 것 가지고 칼부림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까.”

“사장님, 소리 좀…….”

레이몬드가 있는 방을 흘끗한 엘자가 소곤거리며 손을 내리는 시늉을 하자 흠칫한 사장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그대로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그의 손에 꽃다발이 들려 있더라. 무슨 의민지 모르겠어? 모른다면 알려 줄게. 카이로 장군은 절대, 일개 종업원에게 꽃다발을 선물할 사람이 아니야.”

사장의 얼굴이 시시각각 심각해졌다. 제가 뱉는 말 하나하나에 심적 타격을 입는 모습이었다.

“오, 맙소사. 정말 큰일이군. 그 강경한 성격에 총애하는 네가 자기 동생과 외도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총애라니.”

리체가 불쾌해서 딴지를 걸자 사장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금 그게 중요해?”

“외도라고 할 것까지는 없잖아요. 제가 그와 결혼한 것도 아닌데요. 물론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겠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장군 앞에서 말해. 아니, 아니지. 네 식대로 했다간 분명 카이로 장군을 분노하게 만들 거야. 그러면 우리 모두가 끝장이겠지.”

순식간에 늙은 사장이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합의한 사항이야? 네가 다른 남자와도 그런 사이라는 걸, 카이로 장군도 알고 계시냐는 말이야.”

리체는 눈을 깜박거렸다. 일견 무구해 보이는 그 모습이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앓느니 죽지.’ 사장은 입을 다문 채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쳤다. 만약 방 안에 레이몬드가 없었더라면 비명이라도 질렀을 기세였다. 간신히 진정한 그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리체에게 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 일단 4층으로 올라가 봐. 레이몬드 경은 내가 어떻게든 붙잡아 놓을 테니까. 이쪽저쪽으로 눈치 빠르게 이동하면서, 두 사람이 최대한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

사장이 대책은 이것밖에 없다는 듯 빠르게 뱉자 리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그거예요.”

“말이라도 못하면, 말이라도…….”

사장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대화가 대충 마무리되자 아까부터 뭐 마려운 사람처럼 눈치를 보던 엘자가 입을 열었다.

“사장님.”

“그래. 엘자.”

“메디치나 치유관의 후계자도 리체를 호출하고 있는데요.”

“응?”

사장의 얼굴이 멍해졌다. 엘자는 곤혹스럽게 그를 응시했다.

“2층에 있어요. 도중에 레이몬드 경이 오셨던 거라, 자리를 비운 지 꽤 됐는데. 2층에도 얼굴을 비추어야 할 거예요.”

이건 몰랐는지, 사장은 빳빳한 고개를 리체에게로 돌렸다.

“리체. 너 설마, 라스카 메디치나, 치유관의 후계자와도 과, 관계가 있는 거야?”

리체는 침묵했다. 사장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너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이것저것, 좀.”

“바쁘게도 살았구나……?”

포기한 듯한 사장을 대신하여 엘자가 안주인처럼 리체의 어깨를 톡톡 쳤다.

“얼른 올라가 봐. 시간 조절 잘하고.”

소시민인 만큼 가장 현실적이라 충격에서도 빨리 빠져나온 엘자는 그로기 상태의 사장보다는 믿음직했다.

리체는 4층으로 올라갔다. 다리가 무척 무거웠고,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하인을 시켜 카이로를 저택에 보내면 어떨까. 이 자리에서 그 하나만 빠져도 숨통이 트일 텐데.

라스카와 레이몬드가 모두 여기 있다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카이로까지 생각하니 뇌가 세 조각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일단 제일 최악인 건 이들이 서로 만나는 것이다. 그것만 피한다면 어떻게든…….

리체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예민해졌다. 미소도 띠지 못하고 4층의 문고리를 열었다. 그 순간, 화사한 꽃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멈칫한 리체는 눈앞에 내밀어진 꽃다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발 늦게 카이로가 꽃을 사 들고 왔다는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인사했다.

“안녕, 리체.”

족히 100송이는 되는 듯한 꽃다발은 한 팔로 안기에는 부족해서, 리체는 하는 수 없이 양손으로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묵직했다.

“아침에도 봤는데.”

“점심에는 못 봤잖나.”

꽃다발 위로 카이로가 부드럽게 웃는 게 보였다. 엄숙한 인상의 그와 우아한 꽃다발이 동시에 눈에 들어오자, 어울리지 않을 텐데도 묘하게 보기 좋았다.

리체는 눈을 깜박였다. 다른 때와 달리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나, 지금 당황한 상태야.’

그녀는 제 상태를 정확히 판정했다. 드물게 몹시 당황한 상태였다. 이 방 아래에 레이몬드가 있고, 한층 더 아래에는 라스카가 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작은 폭탄 하나가 터지면 나머지 폭탄들도 연쇄 작용하여 터지게 될 것이다. 꼭 지뢰밭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한 발이라도 잘못 떼면 터지게 될 것 같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부드러운 미소를 띤 카이로의 눈빛이 첫 만남 때보다 훨씬 달콤하다는 사실이 화롯불에 기름을 붓듯 머릿속을 더 엉키게 만들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오래된 속담을 떠올리며 침착함을 되찾으려던 리체는 갑자기 무릎을 꿇는 카이로를 보고는 실패했다. 목이 졸리는 듯한 목소리가 났다.

“……카이로 님?”

한쪽 무릎을 꿇고 카이로가 그녀의 한 손을 가져갔다. 그의 큰 손에 잡힌 그녀의 손은 아기 손처럼 작았다. 카이로는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즘 힘들었던 것 알아.”

“…….”

“일이 정리되기까지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어. 내 능력이 부족하여 그대에게 마음고생을 시켜서 미안할 뿐이야. 많이 불안했지?”

리체의 눈이 슬며시 흔들렸다. 고개를 든 카이로는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와는 얘기가 끝났어.”

“…….”

“그대, 나와 결혼해 줘.”

혀 아래 고여 있던 침이 꿀꺽 넘어갔다. 도블락인들은 누구나 신성한 나무 앞에서 읊는 맹세, 진정한 의미의 결혼을 꿈꾼다. 카이로도 그랬다.

반쯤 예상했으면서도 리체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런 순간이라니.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리체의 표정이 어지러워지자,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살핀 카이로가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었다. 시선이 초콜릿처럼 부드러웠다.

“그날 일은.”

“…….”

“내 마음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아.”

리체는 그가 뭘 얘기하는지 곧바로 알았다.

“태양을 떨어뜨리긴 어려우나 그 빛을 훼손시키는 건 가능한 일이지.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여야겠지만 그대는 걱정할 것 없어. 나만 믿고 따라와.”

“…….”

“실패하면 그대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게 걱정되지만 그 어떤 전쟁보다도 신중하게 굴겠어.”

철석같이 모든 잘못이 황태자에게 있다고 믿는 모습에 리체는 다시 마음이 쿵 떨어졌다.

얀테와 그녀와의 일은 발정기 때문에 일어났다. 물론 그가 아니었으면 발정기가 올 일도 없었을 테고 그와 그녀 사이엔 쉽게 풀 수 없는 악연이 있었으나, 이는 카이로는 모르는 일이다.

발정기가 온 알파나 오메가가 관계를 맺는 건 아주 당연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발정기였던 그녀가 황태자를 유혹한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카이로는 그녀가 잘못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알파오메가 귀족 사회의 정점으로서 그런 생각이 누구보다 확고할 남자인데. 리체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그 믿음에 보답할 수 없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의 눈빛에 리체는 마음이 조여들었다. 요 며칠간 꽤 익숙해진 가슴 통증이었다. 리체는 이게 양심의 가책이라는 걸 알았다. 혹은 죄책감이던가.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데 스스로 놀라움을 느꼈다.

“그런 건 바라지 않아요.”

어렵사리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 태양을 떨어뜨린다니. 아무리 카이로가 날고 기는 대장군이라고 할지라도 황태자와 맞섰을 때의 승률은 결코 높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한낱 치정으로 황가에 반기를 드는 건, 기름을 뒤집어쓰고 폭죽을 터뜨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신이 나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어.’

카이로가 씁쓸하게 웃었다. 깊이 속앓이를 했던 듯 살이 빠져서 날카로운 턱선이 도드라졌다.

카이로는 리체의 한 손을 붙잡고 다른 한 손은 품으로 가져갔다. 리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주색 벨벳 사각 케이스를 꺼내고 뚜껑을 열었다. 아름다운 반지였다.

백금의 반지는 약지에 딱 맞아떨어졌다. 약간 서늘했다. 리체는 꼼짝도 못하고 반지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걸 사 오느라 늦었다.”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한눈에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했기에 새끼손가락에 낀 얇은 링과도 잘 어울렸다.

나는 떠나야 하는 몸인데. 당신이 이러는 건 하등 쓸모없는 의미 없는 행동이야.

반지가 손가락이 아니라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원하지 않은 선물을 한 아름 받아 버린 기분. 리체는 호흡이 가빠졌다. 이상 상태에 빠졌음을 알리는 상태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읽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헤어 나오기 쉽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좋지 않자 카이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 얘기만 나오면 표정이 안 좋아지는군.”

그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아서, 리체는 입술이 바싹 말랐다.

안 돼, 안 돼.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난 어차피 당신 곁에 있을 수 없다고.

이 상황만 모면하자면 승낙하면 된다. 하나 그건 내키지 않았다. 지금껏 그를 속인 적이 적지는 않으나 더는,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거짓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거짓으로 일관하기에 카이로 스트리고는 지나치게 괜찮은 원주민이었다.

‘연구원으로 실격이야. 연구 대상자에게 감정을 섞게 되다니.’

줄곧 느껴 왔던 불안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던가. 리체는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만약 사실을 알고도 카이로 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죠.”

아직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마디 덧붙였다.

“반지도 그때 받고요.”

그래. 이 정도가 최선이다. 리체는 후련한 표정이 되었다.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로가 피식 웃고는 차마 놓지 못한 손가락의 반지를 은근하게 문질렀다.

“그렇다면 이대로 끼고 있어. 그대가 맘 편히 얘기하기까지 언제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지금은 말하기 불편해 보이는군.”

“…….”

“그렇다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속은 바짝바짝 타고 있으니까.”

뒷말은 다소 유쾌하게 흘러나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리체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부드러워진 얼굴은 희미한 도화색으로 물들었다. 뺨은 말랑말랑한 흰 빵처럼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숨결은 달콤했다.

리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카이로에게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몸을 일으킨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워낙 장신인지라 올라선 눈높이가 높았다.

“입 맞추고 싶군.”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따뜻한 게 입술에 닿고 물컹한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흐읏…….”

약하게 신음을 흘리자 카이로는 그녀의 유니폼 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풍만한 가슴을 그러쥐었다. 리체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런 진행이 훨씬 마음 편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젖히며 카이로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따뜻하고 좁은 입 속을 부드럽게 유영하던 카이로가 살짝 입술을 뗐다. 큰 손이 가슴 하나를 온전히 움켜쥐고, 아릿한 자극에 리체가 익숙하게 신음을 뱉을 때, 돌연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 나를 애정해?”

“네?”

헐떡이며 되묻자 두꺼운 손가락이 유두를 짓이기듯 문질렀다. 흐윽. 헛숨을 들이키는 그녀의 귀에 속삭임이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그러기만 하면 돼. 다른 건 어떻게 되든 괜찮으니까.”

아스라하게 잦아드는 속삭임에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떼려는 찰나에 그가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집요하고도 쓸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못내 신경에 거슬려 그의 어깨를 밀어내자 카이로는 약간의 거부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혀가 혀를 거세게 튕기고 오돌토돌한 천장의 요철을 힘주어 훑자 짜릿한 감각이 머리를 쳐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키스를 퍼붓는 카이로의 애무에 리체는 할 말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가슴을 밀칠 때마다 더는 밀어내지 못하게 상반신을 딱 붙인 카이로가 고개를 꺾어 깊이 키스했다. 어느새 허리를 뒤로 젖힌 채 카이로의 키스를 받아 내던 리체는 정신을 차리자 소파 위였다. 발그스름한 눈가에 온몸의 숨구멍에선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녀를 눕히고 카이로는 두어 번 숨을 몰아쉬었다. 긴 그림자가 그녀의 온몸을 덮고, 거대한 체구가 드리워졌다. 기분 좋은 무게감.

리체의 신음 소리에 카이로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대가 흥분하는 게 좋아.”

“……하읏!”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기를. 그대는 생각이 너무 많아.”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말에 리체의 눈빛이 흐려졌다. 카이로에게서 흘러나온 농밀한 알파 페로몬이 거미줄처럼 그녀를 칭칭 옭아맸다.

[경고. 상태 이상 ‘흥분’에 빠졌습니다.]

리체는 이성을 찾지 못했다. 기분이 좋았다. 부러 그를 밀어내고 일어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가슴만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다른 오메가보다 좀 더 이성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 또한 페로몬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구나. 아니, 굳이 이성적으로 굴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을…….’

부드럽고 강인한 혀가 혀를 튕겨 올렸다. 엄지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러 내리고, 드러난 치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다정하면서도 적나라한 손놀림이 흥분을 돋우었다.

리체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손톱이 장식 달린 겉옷을 파고들다 말았다. 그러자 몸을 뗀 카이로가 거칠게 겉옷을 벗어던지고 다시 달려들었다.

가슴을 아프도록 쥐어 짜여, 리체는 맞닿은 혀 너머로 신음을 삼켰다.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부드러운 실크 셔츠와 함께 어깨의 단단한 근육이 짓눌렸다. 카이로가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다.

정신이 조금 돌아왔을 땐 언제 벗겨졌는지 나신이 된 몸으로 카이로와 부대끼고 있었다. 과연 페로몬엔 이성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었다.

페로몬은 알파오메가 원주민들에게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얀테를 만났을 때처럼 발정이 난 건 아니지만 이건 이거 나름대로 이성적인 뇌를 마비시켰다. 마치 마약처럼.

폭력적이었던 얀테의 행위에 비해 달콤하고 부드럽다. 관능적인 신음을 흘리던 리체는 갑작스럽게 배가 뜨끔거려 눈을 번쩍 떴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정신이 강제로 일깨워졌다.

‘뭘 잘못 먹었나?’

곤란한 일이다. 막 배를 맞추려는 시점에 배가 아프다니. 혀를 찬 리체의 표정이 문득 급변했다.

배의 통증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처음에는 참을 만한 정도의 통증이었던 것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는 온몸을 불사를 것처럼 그녀를 집어삼켰다. 이를 악물고 참았던 리체는 결국 입을 벌렸다.

“아, 아악!”

“리체? 갑자기 왜 그래?”

애무를 멈춘 카이로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리체는 대꾸하지 못했다. 꼭 얀테로 인해 발정기가 왔었던 그때처럼 열기가 개미처럼 들끓었다.

[오메가 페로몬 수치: 99.]

[Error. Error.]

[Loading…… 99%]

허공에 뜬 빨간 글씨. 99퍼센트에서 더 올라가지 않는 수치에 리체의 시선이 못 박혔다. 가시지 않은 통증에 두 팔로 배를 감쌌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갑자기 저게 왜 뜨는 거지? 마치 경고하는 것처럼.

리체는 머리를 굴렸다.

알파들과의 섹스로 얼마 전 99에 도달한 오메가 수치는, 그녀가 예상한 것과는 퍽 달랐다. 100에 가까우면 우성 오메가와 같은 페로몬 농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마치 100이 되면 또 다른 단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듯, 99에서 멈춘 채 그대로다.

리체는 변함없이 99퍼센트에서 그대로 깜박거리는 글씨를 노려보았다.

덜덜 경련하는 몸을 카이로가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리체, 리체!”

다행히 이상 증세는 금방 진정되었다. Error를 반복해서 떠올리던 붉은 글씨도 흐릿하게 사라져 간다. 힘이 빠진 리체가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내쉬고 올려다보자 가물가물한 시야로 하얗게 질린 카이로의 얼굴이 보였다. 어쩐지 그와 있을 때마다 까무러치는 것 같다. 리체는 씁쓸한 속내를 감추고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마음이었다.

“이제, 괜찮아요.”

얼굴을 일그러뜨린 카이로가 그녀의 가슴께에 고개를 숙였다.

“제발 그러지 마라. 걱정했잖나.”

들릴 듯 말 듯했다. 건장한 남자의 연약한 목소리에 리체는 머뭇거리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뒤에 숨는다면 그녀의 아담한 몸 같은 건 얼마든지 숨겨 줄 수 있을 듯한 커다란 남자를 쓰다듬는 건 어색한 기분이었다.

웃음이 나서 쿡쿡 웃던 리체는 곧 표정을 굳혔다.

‘방금은 뭐였지?’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통증이 지속된 순간은 짧았지만 체감은 퍽 길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온몸의 털이 바싹 곤두섰다. 그 느낌이 예사롭지 않아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기기엔 마음이 찝찝했다.

덕분에 정신을 차리기는 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후끈 달아올랐던 열기가 푹 식어 있었으니.

“이젠 정말 괜찮아요. 잠깐, 몸이 안 좋아졌나 봐요.”

목소리는 혼곤했다. 리체는 억지로 기운을 내서 발랄한 척을 했다. 카이로가 안도의 한숨을 깊게 쉬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따뜻한 키스를 받으며 리체는 방에 들어오기 전 엘자가 했던 당부를 떠올렸다.

‘빨리 나와야 해, 리체.’

그녀를 전송하며 엘자는 못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눈치껏 빠르게……!’

리체는 벽걸이 시계를 흘끗했다. 2층에서 올라온 지 얼마나 됐지? 아무리 인내심 강한 라스카라도 의구심을 참기 어려울 것이다. 3층의 레이몬드는 어떻고. 지금은 자신의 눈치를 살펴 심한 행동은 하지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인내심이 짧은 남자다.

안 그래도 짧은 인내심이 다 닳아 없어지기 전에 달래 줘야 할 것이다.

갑자기 두통이 이는 듯하여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문제야. 어떻게 해결하긴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리체는 카이로의 결 좋고 튼튼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정한 라스카와 불안정한 레이몬드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현 상황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솟았다가 구부러진 숟가락처럼 내려앉았다.

‘일단, 오늘은 잘 넘겨 보고 그 다음은…… 다음에 생각하자.’

머리가 너무 아팠다. 최근 치료 물약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피로감이 있었는데 오늘의 긴장감까지 더해지자 머릿속이 콱 막힌 것 같았다.

몸 상태를 핑계로 카이로를 두고 나온 리체는 약이라도 먹을까 싶었다. 그러나 주방에 가서 약을 타오기도 전에 계단 층계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뛰어 올라오는 엘자와 사장과 마주쳤다. 그녀를 찾아오는 길이었던 듯 두 사람은 그녀를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니? 얼른 2층으로 내려가 봐. 라스카님이 아까부터 찾고 있다고.”

답답하단 듯 2층으로 끌고 가는 사람은 엘자였다.

“아니, 아니야. 3층부터 가야 돼. 레이몬드 경이 연달아 술을 시키면서 너 어딨냐고 열 번은 물어봤다니까. 이젠 물어보는 게 아니라 직접 찾아올 것 같다고! 눈빛이 흉흉해. 난 감당 못해. 아무도 감당 못할 거야.”

핼쑥한 얼굴로 아래층을 가리키는 건 사장이었다.

엘자가 기겁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사장님. 2층부터 가야 한다니까요. 메디치나 치유관의 후계자예요. 대접이 소홀했다가 불쾌해하면 손님의 절반은 잃게 될 거라구요.”

“그럼 3층은 어떡하고. 레이몬드 경의 성질을 기억 못하는 거야? 당장 뛰쳐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레이몬드 경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라스카님은 온유한 성정이시잖아!”

“이번엔 아니라니까요.”

팽팽히 의견을 내세우던 두 사람이 리체를 홱 바라보았다. 이럴 시간에 빨리 움직이라는 눈빛이었다.

리체는 정말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업자득, 자승자박. 언제고 이런 날을 경계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제 손으로 초래한 문제이니 그녀가 해결해야 하는 건 분명한데 평소처럼 냉철해지지 못하고 눈앞이 막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까지 안 좋으니, 이성인지 영혼인지 모를 것이 머리꼭지를 통해 살짝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오늘만, 무사히 넘어갔으면.’

그녀의 속마음도 모르고 엘자와 사장이 연달아 독촉했다.

“얼른, 리체!”

“뭐 하는 거야. 빨리 내려가야지.”

“알겠어요. 일단 2층부터 갈게요.”

“2층부터?”

두 사람은 희비가 갈렸다.

“라스카는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가서 바쁘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돌려보내야죠. 그는 고집을 피우는 성격이 아니니 레이몬드보단 수월할 거예요.”

“좋은 판단이야.”

“하지만 리체, 레이몬드 경은 당장 조금도 기다릴 인내심이 없는 것 같은걸.”

레이몬드가 갓 오픈한 가게를 엉망으로 만드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사장에게 리체가 피곤한 낯으로 말했다.

“레이몬드님에겐 사장님이 말 좀 전달해 주세요. 내가 지금 몸이 안 좋으니…….”

문득 이렇게 말하면 레이몬드가 더 못 참을 것 같아서 말을 정정했다.

“아니, 상점에 뭣 좀 사러 갔다고요.”

“그걸 믿겠어?”

리체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어요. 차라리 상호명까지 자세히 말해 두세요. 절 찾아서 가게를 나서면, 한숨 돌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치유관의 물약, 남은 거 있죠?”

“어? 그래, 있지. 네가 구해 왔던 거 아직 남았어. 요령껏 잘도 사 온다고 생각했더니 이제 보니 메디치나의 후계자와 친해서 그랬던 거잖아?”

말하다가 깨달은 얼굴을 하는 사장의 옆구리를 엘자가 팔꿈치로 살짝 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 그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리체, 네가 알아서 할 수 있겠어? 홀도 손 놓고 있을 순 없는데.”

리체 대신에 엘자가 대답했다.

“제가 들키지 않도록 돌아다닐게요.”

대충 해결될 가능성이 보이자 사장은 시름 어린 얼굴에 그나마 밝은 빛을 띠었다.

“들키지 않도록, 그게 목표야. 오늘만 무사히 넘어가자고.”

세 사람은 모종의 눈빛을 교환했다.

3층의 레이몬드에겐 사장을, 4층에는 엘자가 카이로를 마크하도록 하고, 리체는 2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착착 세워 두었다. 라스카는 착하니까 잘 말해서 내보내고, 레이몬드는 적당히 보상을 주면서 가라고 하고, 카이로는…….

‘집에서 기다려 달라고 해야겠지. 할 말이 있다고 말이야.’

카이로를 더 속일 순 없다. 집에 가면 솔직하게 얘기할 생각이었다. 차원을 건너왔으며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 생각이라고. 만약 그거마저도 상관없다고 하면, 레이몬드 얘기까지 꺼내야겠지.

하지만 과연 그가 용납할 수 있을까. 어차피 차원 이동에 성공하면 다시 보지 못할 텐데. 굳이 다른 남자를 만나 왔다는 사실까지 말해서 상처를 줄 필요가 있을까? 연구 목적이라고 말해 봤자 그는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순수하게 그 목적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리체는 그녀가 누렸던 정사의 쾌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체는 카이로가 레이몬드처럼 자신을 따라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 카이로가 차지하는 신분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고, 떨치는 영향력도 드넓었다. 그 모든 걸 버릴 정도로 그는 무모하지 않았다. 레이몬드와 다르니만큼 그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으리라. 그와는 여기서 끝인 거다.

왠지 마음이 무거웠으나 걸음까지 늦출 수는 없었다. 2층으로 내려온 리체를 마침 1층에서 올라오던 직원이 발견하고 달리듯이 다가왔다.

“리체, 여기 있었구나!”

“왜 그렇게 뛰어 와요?”

직원의 다급한 얼굴에 리체는 한줄기 불안이 스쳤다. 설마.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사는 동안 처음 봤어! 마탑 알지, 리체?”

싸늘했다.

“알긴 아는데.”

“지금 마탑주님이 오셨다는 거야! 마탑주님! 마법사들의 수장!”

리체는 확연히 불안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직원은 상기된 얼굴로 침까지 튀기며 말했다.

“사장님이 마탑주님께도 초대장을 보냈나 봐! 인맥이 정말, 오늘 놀랄 만한 사람들 많이 봤는데 마탑주는 생각도 못 했어! 멀리서 봤는데 아주 근사하시더라.”

신나서 말하던 직원이 리체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어떻게 알고 널 지명하셨지?”

리체는 비틀거렸다.

“하하.”

“리체?”

“그 사람은 어딨는데요?”

제법 친근한 말투에 직원은 어리둥절했지만 바쁜 상황이었으므로 빠르게 대꾸했다.

“어, 어. 일단 1층의 가장 조용한 방으로 안내해드렸지. 가자. 기다리고 계셔.”

리체의 머릿속이 파르륵 돌아갔다.

1층에 그라우지.

2층에 라스카.

3층에 레이몬드.

4층에 카이로.

네 사람을 무리 없이 케어할 확률, 10퍼센트 미만.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지막엔 분노한 알파들에게 목이 졸리는 상상이었다. 꽤 현실감이 넘쳤다.

“리체, 어디 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직원을 돌아본 리체가 태연히 말했다.

“잠깐만 상점에 갔다올게요.”

“웬 상점? 손님이 기다리고 계신다니까?”

의아해하는 직원에게 그녀는 살포시 웃어 보였다. 무구하면서도 거짓말일랑 못 할 것처럼 신뢰감을 주는 미소였다. 직원은 얼굴을 붉혔다. 쟤가 저렇게 예뻤나?

“먼저 온 손님이 주문하신 게 있어서요.”

“그, 그런 거라면 내가 갔다 올게. 마탑주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아니에요. 손님이 특별히 부탁하신 거라 제가 가야 해요.”

“어어, 어……. 늦으면 안 될 것 같긴 해. 난 일단 사장님께 말씀을 드릴게!”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귀신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여 버린 직원은 어느새 뒤돈 리체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1층의 홀은 여전히 축제 분위기였고, 분위기가 달아올랐는지 꽤 빠른 비트의 음악이 틀어져 있었다. 리체의 약간 빠른 발걸음 소리가 음악 소리에 묻혔다.

1층 문까지 평범하게 의심 받지 않고 걸어간 리체는 그대로 문을 통과한 후, 건물에서 좀 멀어진 뒤 클럽 건물을 흘끗했다. 휘황찬란한 빛과 경쾌하고 신나는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리체는 다리를 놀렸다. 점점 더 빨라졌다.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즈음에는 숫제 달리는 형상이 되었다.

이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다. 연구실에서도 오차 범위를 훨씬 벗어나거나 통제 불가능의 상태가 된 연구 케이스는 폐기 처분 되었다. 그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리체는 엉망으로 엉킨 실타래를 발견했고, 해결하기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아예 다른 신분이 되면 좋을 텐데. 도블락엔 더는 있을 수 없다. 라스카나 레이몬드나 카이로나, 도블락의 유력 인사들이 아닌가.

‘거기다가 얀테 놈은 황태자이기까지 하지.’

카이로가 어떻게 담판을 지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얀테는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집요한 게 보통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지금은 전략적으로 후퇴했다고 보는 게 차라리 맞을 것이다.

도블락에 있을 수 없다면 다른 나라로 가는 수밖에. 여의치 않으면 숨어 있어야 했다. 그런 후에 마탑의 그라우지에게 연락하는 거다. 그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제시해 줄 테니까. 그는 자신을 위해 차원 이동 마법을 만들겠다고 마법사의 서약을 했으므로, 지금으로서는 몸을 의탁하기에 가장 적합했다. 좋아. 이게 최선이다.

리체는 자신이 제법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 여겼으나 그렇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리체는 기이한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싼 풍경이 변하질 않고 있었다. 한참 걸은 듯한데 뒤를 돌아보니 퀸의 멀끔한 새 건물이 지척에 보였다.

힘이 빠졌던 다리가 움찔거렸다. 놀라 주저앉는 대신 다리를 재개 놀렸다. 착각이었을까? 움직이는 대로 변하는 환경에 리체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소매에 땀이 흥건하게 묻어나왔다. 귀신에 홀렸나?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몇 그루의 나무와 대로가 이어졌다. 저 멀리 외곽 지대를 둘러싼 숲이 보였다. 나무들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것을 인식하자, 정신없이 뛰느라 인식하지 못했던 말발굽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저기다!”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목덜미 솜털이 삐죽 곤두섰다. 설마 날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물론 설마가 사람 잡았다. 홱 뒤를 돌아보니 어두운 색 망토를 휘날리며 일단의 무리가 그녀를 쫓고 있었다.

아주 잠깐, 사장이 벌써 알아채고 사람을 보낸 건가 했으나 뒷골목 왈패답지 않게 각 잡힌 무리의 행동에 가능성을 접었다. 훈련된 사내들이었다.

사이의 거리는 꽤 멀었으나 빠르게 이동하는 속도를 보니 금방 붙잡힐 듯했다. 악간 늦추었던 속도를 높이자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이를 갈며 수하들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몇 무리로 갈라지는 것을 확인한 리체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들은 그녀의 퇴로를 차단할 생각이었다. 다치게 하려는 의도는 없는 듯했지만 리체는 안심하지 않았다.

사내들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황실. 황실의 군인들이다. 그리고 리체는 황실하면 한 사람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얀테 M. 루세이노. 폭력적일 정도로 강한 페로몬을 가진 극우성 알파. 이성을 마비시키는, 그녀에게는 가장 두려운 능력을 가진 남자!

겉모습만 그럴 듯한 낯짝이 머릿속을 스치자 설상가상으로 배가 후끈해졌다. 카이로와 함께 있을 때 찾아왔던 그 이상 상태였다.

‘젠장.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지금 그때처럼 경련이 일어나면 그것만큼 최악이 없었기에 리체는 머릿속을 비우려고 노력하며 다리를 재개 놀렸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냈다.

뒤에서 황실 기사들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소음의 크기로 보아 아까와 그다지 가까워진 것 같지는 않았다.

리체는 자신이 아주 잘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무를 이용하여 요리조리 뛰고 있으니 말을 이용해 달리는 사내들을 용케 따돌리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면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을 터였다.

아무리 기를 쓰고 말을 채찍질해도 가녀린 여인의 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어 황망해하는 기사들의 얼굴에 소름이 끼쳤을 터다.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이 조금 전 그녀의 얼굴과 흡사했다.

리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나타나 귓가에 훌쩍 가까워진 바퀴 구르는 소리에 옆을 곁눈질했다.

‘이건 또 뭐야.’

헉, 헉 숨이 차서 한 마디도 뱉을 수 없는 상태로 리체는 눈썹을 말 대신 까딱였다.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안을 들여다본 리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한 손에는 찻잔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펼친 책을 들고 있는 그라우지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싱긋, 피어오르는 미소에 리체는 데자뷔를 느꼈다.

“어라, 클럽에 있어야 할 리체 양이 왜 여기 있는 거죠? 인기가 많아서 워낙 많아 애석하게도 그냥 돌아가는 길인데.”

“그, 라우지?”

“오늘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나 봅니다.”

리체가 의심스럽게 그를 노려보자 그라우지는 뻔뻔할 정도로 해맑은 웃음을 띠었다.

“수완이 좋네요, 우리 아가씨.”

숨이 막히는 데다가 다리까지 아픈 리체의 시선이 한층 사나워졌다. 그라우지는 얄밉게도 그녀의 얼굴을 향해 살랑살랑 부채를 부쳐 주었다. 시원한 바람이 땀 맺힌 피부를 간질였다.

“곤란해 보이네요, 리체.”

“알면, 헉.”

말을 하다가 혀를 깨물 뻔해 끄응 신음을 흘리고 소리쳤다.

“좀 도와주지 그래요?”

시답잖은 ‘척’은 때려치우고. 빈정거리자 그라우지는 손에 들었던 부채를 휙 던졌다. 흙바닥에 떨어진 부채는 곧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볼 정신이 없는 리체는 부채가 사라진 줄도 몰랐다.

그라우지가 불만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시답잖다니. 나름대로 신경 쓴 모습인데. 마음에 안 들어요?”

슬프다는 듯 얄팍한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리체는 던질 것을 찾다가, 마땅한 게 없자 넥타이를 풀어내 마차 안으로 던졌다. 넥타이는 흐물흐물한 모양새로 그라우지의 무릎에 힘없이 안착했다.

“성질만 돋울 거면 꺼져요.”

단호하게 일갈하자 그라우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뒤를 바라보았다.

“황실의 개들이 엄청난 속도로 쫓아오고 있어요. 나를 발견하고 더 빨라졌네요.”

그 말에 리체는 다급해졌다. 그러나 그라우지의 수작질에 순순히 넘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코웃음을 치는 리체를 보며 그라우지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더니 땀이 배어나온 리체의 이마를 확인하고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쩌나, 하는 얼굴에 리체는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 멈추어 섰다.

“뭐하는 거예요? 뒤에서 쫓아오는 놈들 안 보여요?”

“힘들어서 더 못 달려요. 잡아가라 그러죠, 뭐. 기껏해야 얀테에게 잡혀 가는 것밖에 더 되겠어요.”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물론 얀테에게 잡혀 가는 것만큼 악수는 없었다. 그러나 리체는 속마음은 감쪽같이 숨기고 손부채를 만들어 바람을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힘이 빠진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기어코 버티어 섰다.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의 뒤쪽을 흘끗한 그라우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리체 양이 힘들어 보이니 어쩔 수 없네요. 파트너로서 도와줄 수밖에.”

어색하게 대사를 한 직후, 찻잔과 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리체는 적잖이 아쉬워 보이는 얼굴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아마도 도와 달라는 말을 듣고 싶었겠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장난질이라니 진력이 났다.

리체가 싸늘하게 고개를 돌리자 그라우지는 언제 약을 올렸냐는 듯 상냥하게 손을 뻗었다.

“내가 도와줄게요.”

“…….”

“그러니 날 봐요.”

달콤한 목소리가 뱀처럼 귓바퀴를 휘감았다.

잠시 후, 그녀는 마차에 있었다. 마법으로 무슨 처리를 한 건지 단순히 고급 마차라서 그런 건지 내부는 흔들림 하나 없이 편안했다. 턱까지 찼던 숨이 진정되고 이성이 돌아온 리체는 ‘하’ 헛숨을 내쉬고는 마차 등받이에 등을 깊이 기댔다.

한숨 돌리니 슬슬 상황 파악이 됐다. 자괴감과 허탈감에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이렇게 멍청하게 행동하다니 믿어지지가 않네.”

어디선가 낄낄거리는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경황이 없어 그라우지가 듣고 있는 걸 고려하지 못했던 리체는 그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한참 낄낄거렸던 그라우지는 리체가 바닥에서 넥타이를 주워 던지자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웃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리체는 유난히 기분 좋아 보이는 그 얄미운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다.

마차는 쉼 없이 달려 나갔다. 리체는 바깥 상황이 궁금하여 고개를 내밀었다. 마부가 앉아야 할 곳은 텅 비어 있었다. 말조차 없었다. 바퀴 소리만 요란했다. 말 없이 홀로 달리는 기괴한 마차에 흠칫하고, 리체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마법의 힘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하여 기사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달리고 있는데도 마차와의 거리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빠르게 달리는 듯했다.

마침내 이대로는 소용없음을 깨달은 선두의 기사가 한 손을 펼쳐 따라오던 단원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근처에 연락 돌려! 황궁에 연통을 넣어라!”

“뭐라고 보고할까요?”

“마탑으로 간다고!”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다 강하게 스치는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오만상을 찌푸리는 선두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리체는 눈을 크게 뜬 그가 뭐라고 입을 열자마자 마차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그라우지가 둥근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뭘 그렇게 봐요. 내 힘은 아무도 쫓아올 수 없으니 따라잡힐까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마차의 문장이라도 숨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들은 마탑까지 쫓아올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여유로운 목소리. 고개를 돌린 리체는 바로 앞으로 다가온 그라우지의 윤기 흐르는 낯짝에 흠칫하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금색 안경테 너머 날카로운 눈동자가 휘어지는 눈매에 반쯤 가려졌다.

저런 얼굴을 볼 때마다 흉악하고 음험한 본성을 장난스러운 태도로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꺼림칙해하는 리체의 반응에 그라우지는 깃털처럼 사근사근 속삭였다.

“도대체 뭘 걱정하는 겁니까? 그라우지 로스티나루스가 당신과 함께 있다고요. 자존심 상하게.”

하나의 고유 명사처럼 제 이름을 지껄이는 태도가 퍽 자연스러워서 리체는 뭐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그라우지가 웃으며 손등으로 그녀의 콧잔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황실의 개 따위가 무슨 수를 써도 날 쫓아오진 못해요. 그러니까 아까운 기력 헛되게 쓰지 말고 쉬어요, 내 아가씨.”

“마탑이 황실보다 높던가요? 저 사람들, 얀테 루세이노 황태자의 사람이에요.”

그러우지는 눈동자를 위로 올리고 입술을 모았다가, 나름대로 귀여운 표정에도 리체가 차갑게만 쳐다보자 금세 표정을 풀고 실실거렸다.

“뭐, 다시없을 왕재가 나왔다고 아무리 칭송해 봤자 아직은 핏덩어리. 내 상대가 되겠어요?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마탑은 황실과 상하 관계로 맺어진 집단이 아닌 것을요.”

“…….”

“누가 쫓아와도 리체 양을 나한테서 뺏어 가진 못해요. 리체 양이 스스로 내 곁을 떠난다면 모를까.”

“…….”

“그러니까 날 믿고 쓸데없는 덴 관심 두지 마요.”

배시시 웃는 거만한 얼굴에 마침내 리체도 표정을 풀었다. 멀리서나마 들려오던 기사들의 고함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기도 했고, 무슨 말을 하든 유들유들 반응하는 그라우지 앞에서 심각해져 봤자 자신만 우스워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라우지는 즐거운 듯 눈을 반짝이더니 몸을 살짝 들었다. 그러곤 몸을 기울여 손을 리체의 옆에 짚었다. 그러자 리체의 시야는 온통 그라우지로 들어찼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리체는 입술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가 조롱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나저나 그동안은 잘도 모른 척했어요. 라스카 메디치나와 레이몬드 스트리고, 카이로 스트리고에 얀테 라세이노 황태자라. 세상에, 그중 둘은 형제로군!”

“…….”

“내 매력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겠군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손가락만 까딱해도 얼굴 붉히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페로몬 따위 없어도 문제가 없었단 말이죠.”

리체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 날 놀려 봤자 무슨 이득이 있죠?”

“놀리다니, 감탄하는 건데.”

물끄러미 쳐다보는 말 없는 시선에 그라우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어색해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화를 내기 마련인데, 무서워라. 농담도 안 통하는 재미없는 여자예요, 리체 양은.”

“…….”

“그쪽 차원 사람들은 다 리체 양 같은가요?”

가만히 말을 듣던 리체는 의구심이 들어 한쪽 눈을 비뚜름하게 떴다.

“뭐가 그렇게 신난 거예요?”

그 말에 그라우지 주변의 공기가 경직되었다. 들뜬 얼굴이 어색해졌다.

“글쎄, 신난 것처럼 보여요?”

“무척.”

“……리체 양이 내 마차에 있어서?”

고개를 기울인 그라우지가 불확실한 어투로 대꾸했다. 리체는 답하지 않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축 늘어진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며 그라우지가 툭 뱉었다.

“섹스할래요?”

리체는 질색했다. 그 표정에 언제 멍해졌냐는 양 그라우지가 웃음을 지었다.

“장난 그만 치랬죠.”

“진심인데요?”

스릴 있을 텐데, 중얼거리는 그의 반듯한 이마를, 리체는 손을 들어서 뒤로 밀어 버렸다.

밀쳐진 그라우지는 그럼에도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를 자제시키는 걸 포기한 리체가 양손을 들자 그라우지는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매섭게 움직여 붉은 입술을 훔쳤다.

한참 후 진득한 입술이 떨어진 후에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모든 잡스러운 알파를 제치고 당신을 차지한 건 나란 말이죠. 이런 행운이 있을 수가.”

리체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뱀처럼 능란한 혀가 그녀의 혀를 얽었다. 리체의 소리는 키스에 묻혔다. 버둥거리는 리체의 입 안으로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마탑주 그라우지의 득의한 웃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퀸의 3층은 웃음기 하나 없는 적막감이 그릇을 가득 채운 푸딩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숨 쉴 공기도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는 밀도 높은 분위기에서 레이몬드는 가만히 앉은 채였다. 리체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으니, 그 명령을 받드는 중이었다. 하나 단연컨대 이건 그가 인생에서 받았던 명령 중에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꼿꼿이 앉아 있는 자세는 리체가 떠나기 전과 같으나 자세만 그럴 뿐, 거칠게 일어난 머리는 까치집과 같았고, 테이블 위엔 빈 술병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다.

비록 알파가 베타보다 잘 취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위스키 네댓 병은 아무리 알파라 할지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운 양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아까와는 생김새가 다른 직원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레이몬드는 호출에 즉각 응하지 않고 이제야 기어 들어오는 직원을 독사처럼 서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직원은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레이몬드는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입술로 짐짓 평온하게 물었다.

“리체는 언제 오지?”

“위에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10번째 듣는 말인데.”

“……새 술을 가져다 드릴까요?”

“그 말은 8번째야.”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듯한 음산한 분위기에 직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사장의 강권에 이 방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어쩐지 미안해하더라니. 사장의 사람 좋은 얼굴을 떠올린 직원은 사장을 상대로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지금 사장님도 바쁘신 상태라 전달이 안 된 듯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리체를 찾아오겠습니다. 아마 홀에 있을 겁니다.”

“홀?”

“모든 종업원과 손님들이 홀에서 즐기고 있으시니까요.”

직원은 당연하단 듯 얘기했지만 믿음이 가지는 않아서, 레이몬드는 한쪽 입꼬리가 쓱 올렸다.

“이봐. 홀에 있다면 내가 열 번을 불렀는데도 오지 않을 리 없잖아. 너는 이렇게 금방 왔는데.”

“예?”

“비켜. 무능한 것들은 필요 없어. 내가 직접 찾아온다.”

결국 리체의 ‘기다려’ 명령을 포기한 레이몬드는 결심한 후에는 귀신처럼 움직였다. 귀족과 용병 사이 어디쯤에 걸친 사람처럼 다소 거칠게 굴던 그였지만 술이 들어가고 신경이 명검처럼 날카롭게 갈린 지금은 행동이 암살자처럼 세심했다.

어쩔 줄 몰라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는 직원을 지나쳐 방을 빠져나왔다. 3층은 조용한 편이었으나 발바닥에서는 아래층의 소란스러운 흥겨움이 전해져 왔다.

그는 우선 자신이 서 있는 곳부터 뒤지기로 작정하여 닥치는 대로 열어젖혔다. 몇몇 방은 비어 있었고 몇몇 방은 사람은 있지만 리체는 없었다. 레이몬드는 시각과 후각과 청각을 모두 동원하여 리체를 찾았다. 오래지 않아 3층을 모두 돌아본 레이몬드의 시선이 아래층을 향했다가 이내 위층을 향했다.

좁아진 눈매에 붉게 빛나는 눈동자만 드러낸 레이몬드는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온 신경이 리체의 행방에 꽂혀 있었으니, 사냥감을 찾는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4층으로 가는 마지막 계단을 올랐을 때, 잔뜩 굳어진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리체는 어디 있는 거지?”

귀가 번쩍 트였다. 리체. 리체라고 했다. 역시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다급하게 움직인 레이몬드는 4층에 온전히 올라 모퉁이를 돌고 멈추어 섰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 말을 지금 다섯 번은 들은 것 같은데 말이야.”

절절매는 직원에게 싸늘하게 대꾸하는 남자를 본 순간 레이몬드는 우뚝 굳어졌다.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사람. 레이몬드는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형?”

온몸이 철로 만들어진 듯 거대하고 단단한 체구. 전장을 호령하던 어두운 갑옷 차림이 어울리는 그는 지금은 명문가의 주인처럼 세련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집을 나오기 전 마주쳤던 모습 그대로였다.

레이몬드를 발견한 카이로가 동작을 멈추었다. 커진 눈에 저랑 닮으면서도 닮지 않은 동생이 들어찼다. 곧 그의 얼굴도 의아함에 물들었다.

“레이?”

“…….”

“네가 왜 여기 있니? 이블린 여자들을 만나러 간다더니.”

얼떨떨한 목소리에 레이몬드는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아니.”

“아니라고?”

“실은 애인을 만나려고 온 거였어.”

“싸운 줄로만 알았더니.”

“……형은?”

“나 역시 여기서 만날 사람이 있어서.”

대화를 나눌수록 레이몬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4층으로 올라오기 전, 귓가에 박혀 들었던 이름이 신경줄을 까슬까슬하게 갉아 댔다. 조여드는 목에서 간신히 말을 끄집어냈다.

“형이랑, 연애한다는 그 여자?”

카이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 없는 행동에 레이몬드는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설마, 리체?”

순식간에 카이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안 그래도 불편함이 배어 있던 얼굴이 확 굳어지자 태산 같은 위압감이 레이몬드를 내리눌렀다. 술이 깬 레이몬드는 한 발 물러서고 싶은 마음을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 참아 냈다.

“네가 리체를 어떻게 알지?”

레이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 맨 밑바닥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괴물처럼 도사리던 묵은 열등감이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치솟아 열이 후끈 올랐다. 고통스럽게 감정을 삼키는 그의 머릿속은 또 한편으로 복잡하게 엉켜 갔다.

형이 왜?

형이 어떻게 리체를 알고 있어?

왜?

곧바로 답을 내지 못하고 질문만 퍼붓자 불같은 질투가 치솟았다. 열등감과 함께 무섭게 커지는 질투에 창자가 뒤틀릴 듯했다. 배가된 고통에 레이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 새빨개진 눈으로 카이로를 노려보았다.

리체와 카이로를 함께 떠올리는 순간 짙은 불안감과 분노에 집어삼켜지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답을 내지 않았으나 그런 신체의 반응이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말하거라, 레이. 네가 어떻게 리체를 알고 있는 거야. 어디서 들은 이름이냐.”

어디서 들은 게 아니야. 남의 입에서 들은 게 아니라고. 내가, 내가 더 잘 알아.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누가 형 것을 훔쳐간 것처럼 굴지 마. 애초에 리체는 네 게 아니야.

악다구니 치는 속마음의 주둥이를 비틀어 잡고 레이몬드는 이를 으득 갈았다.

“형은.”

“…….”

“무슨 사인데.”

마찬가지로 이상함을 느꼈는지 카이로가 얼굴을 굳혔다. 그는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레이몬드를 미심쩍게 훑어보았다. 그 별것 아닌 동작에서도 오만함과 위압감이 풍겼다.

“집에서 얘기하지 않았냐. 결혼할 사이다. 내가 마음에 품은 여자야.”

레이몬드는 머리가 띵했다.

“……뭐?”

“청혼했고, 긍정적인 답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내 사저에 같이 살고 있지. 이제 네가 말해 봐라. 레이, 넌 리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레이몬드는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떴다. 머릿속에 리체가 차올랐다. 자신이 각인한 오메가.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이 심장을 꽉 부여잡은, 영혼을 속박시켜 버린 오메가. 나의 오메가. 그런데 뭐라고? 카이로가? 카이로와 결혼할 사이라고?

인내가 끝났다. 마음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입술이 달달 떨렸다.

“무슨 개소리야, 씨발.”

“레이?”

“그녀가 왜 형이랑 결혼해.”

“레이,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 이번에는 아니야. 네 거라서 유혹한 게 아니라고. 네 거라서 접근한 게 아니란 말이야.”

일견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그를 보는 카이로의 시선이 사납게 가라앉았다.

완전히 가시지 않은 술기운과 리체의 부재로 인한 불안감에 카이로까지 끼어들자 레이몬드는 참을 수 없었다. 손바닥을 짓누르던 손톱이 기어이 피부 거죽을 뚫고 들어갔다. 찢어지는 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그녀는 내 거야.”

“…….”

“씨발, 내 거야!”

모든 소리가 진공으로 빨려 들어간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떨리는 입술로 레이몬드가 재차 중얼거렸다.

“내 거야.”

“…….”

“나는 그녀 거고. 형 것이 아니야.”

“……?”

“리체는 내 거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레이몬드를 바라보던 카이로의 얼굴이 변한 것은 그때였다. 마침내 무언가를 깨달은 그의 눈빛에 짐승 같은 살기가 휘몰아쳤다. 쳐다보기도 두려울 만큼 위협적인 얼굴에서 사나운 기운이 스멀스멀 번져 나갔다.

“건방진 소리 말거라, 레이몬드 스트리고.”

짓씹듯 뱉은 목소리에 언짢은 분노가 가득 흘러나왔다.

“그녀와 네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네 것이 아니야. 너 역시 그녀의 것이 아니다.”

그래도 동생이라고 카이로는 점잖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범인은 견디기 어려운 강력한 알파 페로몬이 레이몬드를 짓눌렀다. 꺾이려는 다리를 억지로 추어올리며 페로몬에 저항하는 레이몬드의 다리가 후들후들 경련했다.

레이몬드를 무섭게 노려보는 카이로의 무표정한 얼굴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리체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나 보구나. 하지만 레이, 착각하지 말거라. 네가 어떻게 그녀를 알고, 감정까지 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손엔 내 반지가 있어.”

“착각?”

“…….”

“하, 착각이라고?”

레이몬드는 저보다 상위 알파의 페로몬에 눌려 움직이지 못하는 허벅지를 강하게 때렸다. 강하게 씹은 입술이 치아에 찢겨 피가 줄줄 흘렀다.

“그깟 반지가 뭐라고?”

레이몬드는 비웃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높았던 그를 야멸차게 조롱했다.

“청혼? 그녀가 받아들였어?”

“…….”

“그럴 리 없겠지.”

단정적인 어투에 카이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무시무시하게 냉랭한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얼려 죽일 것 같았다.

“긍정적인 답을 기다리고 있단 건, 결혼하겠다고 말하지 않은 거잖아. 내 말이 틀려?”

레이몬드가 비틀대며 카이로를 쏘아보았다. 카이로의 하관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아무 말 못 하는 그를 확인하고 레이몬드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리체는 거짓말을 아주 잘해. 그런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는 건, 형에게 진심이 아니라는 거겠지. 형과 달리.”

“그 입 닥쳐라, 레이몬드.”

“리체는 형이 부담스러웠던 거야. 신분 높은 백작에 도블락의 대장군이 결혼해 달라 하는데 싫다고 거절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 부담스러워서 아무 말 못 하고 피한 거겠지.”

“닥치라 했다, 레이몬드 스트리고!”

카이로가 사자후를 터뜨렸다. 울림이 큰 중저음의 목소리와 그 안에 가득한 분노가 고막을 얼얼하게 때렸다. 주먹으로 먹먹한 귀를 때린 레이몬드는 킬킬 웃었다. 기가 막히고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불안이란 이름의 개미가 심장을 야금야금 뜯어먹고 있는데 희한하게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화가 난 카이로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그의 검을 훔쳐다 장에 내다 팔았을 때도, 그의 애인들을 꼬셔 잠자리를 갖고 그 모습을 보였을 때도 늘 덤덤하게 언제쯤 철이 들 거냐고 어른스럽게 굴었던 가증스러운 자신의 형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마음이 쓰라린데도 기괴한 희열이 가슴을 두방망이질 쳤다. 눈물이 나는데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거 알아? 잠자리에서 그 애랑 할 때, 나 항상 노팅을 하거든.”

카이로는 무표정했다. 그러나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눈썹의 움직임을 귀신같은 눈치로 알아챈 레이몬드에게서 소리가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푹푹 쑤셔서 물이 사방으로 튀기다 보면, 목소리가 참을 수 없이 달콤해지지. 그럴 때면 정말 참을 수 없어. 자지 끝이 부풀어 올라. 빠져나오기 싫은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정말 견딜 수 없어질 때 그 달콤하고 축축한 안에 사출해. 항상 생각해. 임신하면 좋겠다…….”

표정 없는 카이로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불끈거리며 솟아올랐다. 그에게서 뻗어 나오는 날선 살기가 창끝처럼 지독하게 피부를 찌르고 있음에도 레이몬드의 살짝 올라간 입술 끝은 변하지 않았다.

삐죽 올라간 끄트머리가 덜덜 떨렸다. 금방이라도 숨통을 쥐고 죽일 듯한 살기 때문이 아니었다. 카이로를 자극할 만한 온갖 저급한 말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래서 그가 알기를 원했다. 리체와 자신의 관계를. 죽음이 아니라면 갈라놓을 수 없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당당하게 내 거라고 선언했음에도 손끝이 떨릴 정도로 불안한 것은, 카이로가 여자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존재인지 질릴 정도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 어디까지 떠드나 보자꾸나. 인내심이 한계점에 와 있는 게 보이는데도 징징거리는 어린애 보듯 차가운 눈을 하는 그를 보자, 레이몬드의 뇌리에 번뜩거리는 생각이 스쳤다.

아, 맞아.

“각인했어, 나.”

뚝. 또다시 모든 소리가 먹혔다.

카이로는 무표정했다. 올라간 눈썹에 아롱거리던 불쾌감과 짜증이 일시에 휘발되었다. 레이몬드는 또 한 차례 쾌감을 느꼈다.

“뭐라 했느냐?”

“각인했다고, 리체에게.”

“…….”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알파오메가의 각인 현상은 흔하지 않아 알려진 바도 많지 않지만 특별한 현상인 건 변하지 않았다.

육체의 상성이 잘 맞으면 종종 일어나기도 하는 노팅과 달리 각인은 어지간해서는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상대를 아주 간절히 바라고, 육체의 파장이 맞아떨어질 때 각인된다는 게 그나마 알려진 학계의 정설이었다.

지금 레이몬드는 리체와 기가 막히게 황홀한 섹스를 나누고, 뿐만 아니라 마음과 감정을 나누어 각인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몸만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나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해. 그녀가 없는 내 삶은 상상도 못할 만큼.”

“…….”

“그녀가 어딜 가든 따라갈 거야, 나는. 형은 그러지 못하겠지.”

“…….”

“위대한 스트리고 백작가의 주인이니까.”

항상 열등감을 갖고 있던 그 사실이 지금은 짐 하나 없는 여행자처럼 홀가분했다. 부러워 마지않았던 백작위가 지금은 카이로의 발목을 붙잡는 올가미처럼 보였다.

리체의 차원 이동에 대해서는 입 하나 벙긋하지 않을 작정이지만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카이로는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는데 가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짜릿했다.

“그만해라, 레이몬드 스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카이로에게 또 한 마디 더 하려던 레이몬드는 이어진 말에 멈칫했다.

“내가 동생인 널 죽이기 전에, 그만해.”

레이몬드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막히는 살기였다. 무형의 기운이 온몸의 구멍을 타고 들어와 신경을 다닥다닥 끊어 내는 듯했다.

뻣뻣한 몸으로 호흡할 수 있는 만큼 숨을 들이마셨다. 잔뜩 좁아 든 목에서 새액새액, 연약한 숨이 새어 나왔다. 살기와 함께 웅크린 알파 페로몬이 그를 억누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나뒹굴고 싶었지만 레이몬드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 카이로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다면 평생 자신을 증오할 것 같았다.

날카로운 턱을 타고 선홍빛 피가 떨어졌다. 방울진 피가 바닥으로 낙하했다.

흰자를 붉게 물들이고 자신을 노려보는 동생을 응시하던 카이로는 눈을 감았다. 우뚝 선 채 눈꺼풀이 내려앉은 강인하고 잘생긴 얼굴은 고요했으나,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불온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꽤 오랜 시간 눈 감고 침묵한 카이로가 천천히 눈을 뜨고 비교적 차분하게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죽일 것처럼 퍼붓던 살기와 페로몬은 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콱 붙잡은 레이몬드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레이, 너는 내 동생이기는 하나 여자관계가 난잡하여 신의를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토록 쫓아다니던 이델리 그레이스는 어떻게 하고? 갑자기 리체를 사랑한다? 그게 진심이라고 누가 믿을까.”

“……날, 큭, 믿지 못해도 좋아. 이델리에 대한 내 감정은 모조리 정리된 상태고, 리체에 관한 건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아주 새로운, 흐, 감정이니까.”

“그게 영원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나.”

“형이 뭘 안다고…….”

“각인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당분간 내 눈에는 띄지 말아야 할 거다.”

“…….”

“내 오메가에게 각인한 알파만큼 거슬리는 게 없으니까. 각인한 오메가에게 집착하는 건 당연한 특성이겠지. 리체에게 집착하는 널 본다면 네가 아무리 내 동생일지라도 내가 널 가만히 둘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

카이로는 아까의 고함과 비교하면 힘 빠진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으나 그래서 무엇보다 더 진심처럼 들렸다.

“그녀를 곤란하게 한다면 널 죽이겠다, 레이.”

골육상쟁이 벌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상황을 바라보는 눈들이 있었다. 퀸의 직원들이었다. 폭발적인 알파 페로몬에 고통스러워하던 직원은 한결 편안해진 공기에 숨을 들이마시다 소리가 새어 나가 저 둘의 관심을 끌까 두려워 손으로 입을 합 막았다.

그건 소란을 듣고 4층으로 올라온 다른 직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난리야.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계단을 밟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직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장을 발견했다. 동아줄을 만난 것처럼 직원이 사장에게 바투 다가왔다.

“사장님. 크, 큰일 났어요.”

“리, 리체. 리체는 어디 간 거야?”

기어코 두 사람이 만나고 말았구나! 함께 올라왔던 엘자의 얼굴도 핼쑥했다. 평생 소시민적인 삶에 안도하며 다른 길로 떨어지지 않도록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 왔던 그녀는 손도 댈 수 없이 엉켜 버린 상황을 앞에 두고 숫제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엘자!”

사장이 어깨를 움켜쥐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소리를 낮추었다.

“아까부터 안 보여요. 버틴에게는 상점에 뭐 사러 간다고 했다는데.”

“언제?”

“30분 전에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똑똑한 애가 이런 상황에 어딜 가겠어? 그것도 30분 전이라면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사장이 답답하다는 듯 말하자 엘자는 입을 다물었다. 사장도 곧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말없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점차 창백해진 사장이 비틀거리자 엘자가 재빨리 그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그때였다. 뚜벅뚜벅, 간격 일정한 걸음 소리와 함께 라스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 소리가 들려 와 봤는데 마침 사장님이 계셨군요.”

“공자님, 어째서 여기까지?”

라스카는 핼쑥한 사장의 얼굴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정중하게 말했다.

“리체 양을 찾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바쁘단 말만 듣고 오지를 않는군요. 이만 돌아가려는데, 얼굴은 볼까 해서 말입니다. 사장님?”

창백해지다 못해 핏기 하나 없는 사장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라스카는 난처해했다. 그러다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자 카이로와 레이몬드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트리고…… 백작님? 스트리고 경이 아니십니까?”

다 유명한 알파들이라 서로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찌르는 듯한 알파 페로몬이 휘몰아쳤다. 뒤늦게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라스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레이몬드가 “하!” 하며 기가 막히단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넌 또 뭐야?”

카이로와 레이몬드, 그리고 라스카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바로 앞에서 그 아슬아슬한 공기를 맛본 사장은 숨이 막혀 가슴을 움켜쥐었다.

“사장님!”

“에, 엘자.”

“사장님. 정신 차리세요!”

사장의 시야가 가물가물해졌다.

오늘 오픈한 퀸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대체 어딜 간 거야, 리체에에에에에!’

* * *

쨍그랑!

숙면을 위해 들여왔던 침대 옆 도자기 신상이 산산조각이 났다. 날카로운 파열음에 무릎을 꿇고 있던 검은 옷의 사내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물 밑에서 황태자의 어두운 일을 처리해 주는 청소부, 양지의 붉은독수리 기사단과 반대되는 까마귀 기사단의 단장은 이미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걸 놓쳐?”

분노를 억누른 차가운 목소리에 단장은 이마를 땅에 박을 기세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전하.”

“너무 짧아.”

“예?”

“내가 납득하기엔 그따위 말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이 쓸모없는 머저리들.”

별 볼 일 없는 황자에서 황태자가 되기까지, 가시넝쿨과 압정 깔린 바닥을 지나왔던 얀테였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엄격하지만 제 아래 사람들의 실수에도 자비가 없었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단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수하들이 방심……했습니다. 기회를 틈타 아가씨를 모시려고 했었으나 그때 마탑주가 나타날 줄 몰랐습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그래. 마탑주, 마탑주……. 마탑주가 나타났다라.”

턱을 매만지며 얀테가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일견 나른해 보이는 모습과 함께 그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저조한 기분이 페로몬으로 흘러나왔다. 극우성 알파의 분노는 보통의 알파들에게 독약처럼 무거워서, 단장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더 길게, 얘기해 봐.”

“마……탑주는 도망, 가기 10여분 전에 퀸에 들어갔습니다. 흡……!”

페로몬이 옅어졌다. 숨통이 트인 사람처럼 단장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얼음장 같은 눈빛에 그가 재빨리 보고했다.

“그 전에는 3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라스카 메디치나, 레이몬드 스트리고, 카이로 스트리고가 들어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마탑주가 들어갔고, 그로부터 10분이 채 되지 않아 아가씨가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수하들에게 내린 명령은 가능한 한 아무도 모르게 아가씨를 모셔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지켜보기만 했었으나, 아가씨가 갑자기 달리시기에 혹여 저희를 눈치챈 건 아닌지 의심했지만 정황상 자리를 피하시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즉시 접촉하려 했습니다만 마탑주가 아가씨를 마차에 태워 데려갔습니다. 쫓고자 해도 마차의 속도가 워낙 비현실적으로 빠른 탓에…….”

“마탑주의 마법을 보통의 기사들이 쫓기는 힘들었겠지.”

분노가 다소 풀린 듯한 모습에 단장이 안심하려는 찰나, 차가운 목소리가 꽂혔다.

“그녀가 왜 도망치려고 했는지는 알아냈나?”

약간의 침묵도 용납하지 못하고 얀테가 그를 쏘아보았다. 여기서 대답하지 못하면 무능함에 대한 사죄로 손이라도 잘라야 할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든 단장이 양 손을 바닥에 짚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예. 퀸의 직원들을 통해 조합한 정보에 따르면 치정 사건으로 보입니다.”

“정확히 설명해.”

단장은 사실에 가까운 정보를 털어놓았다. 얀테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잠자코 그의 보고를 들었다.

“이미 퀸의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 사이에선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마지막 보고가 끝나고 단장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얀테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가 분노한 정도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질 터였다. 긴장한 단장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큭. 큭큭큭큭.”

뜻밖의 웃음소리에 단장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턱을 위로 쳐들고 웃던 얀테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반개한 눈에 황홀한 빛이 넘실거렸다.

‘하……. 사랑스러운 하진. 앙큼하기도 해라.’

1년 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른 놈들이 그녀의 몸에 올라타는 상상을 하자 손발이 저릿하도록 불쾌함과 동시에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해 가슴이 근질근질했다. 파괴적인 폭력성과 성욕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그 예쁘고 조막만 한 하얀 얼굴이 어떻게 변하여 다른 놈의 자지를 받아들였을까.

라스카 메디치나. 기억이 난다. 연구가로서나 쓸 만한 그 재미없는 목석의 좆은 맛이 있었을까.

레이몬드 스트리고는 꽤 난잡하게 놀았으니 그녀를 즐겁게 해 줬겠지. 하지만 감히 그녀에게 각인을 하다니. 못마땅해진 얀테는 이 불쾌함에 감춰진 자신의 진정한 속마음을 깨닫고 눈썹을 끌어 올렸다.

각인은 흔히 알파오메가의 비극이자 저주로 인식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운명이라고들 했다. 운명. 기분 나쁜 단어다.

왜 자신도 하지 못한 각인을 그깟 망나니 놈이 했는지, 타인이 특별한 현상을 그녀와 공유한다는 사실이 짜증스러웠다.

‘카이로와의 섹스 역시 나쁘지 않았겠지. 그놈과 잠자리를 한 여자들이 수치도 모르고 환장해서 치댔던 걸 보면.’

그럼 누구랑 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을까?

발정이 나서 침까지 흘리며 제 것을 맛있게 품었던 리체를 떠올린 얀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당연히 내 좆이겠지.

아랫도리가 절로 불끈거렸다. 방 안에 야릇한 색기가 풍겨 나왔다.

페로몬의 성격이 달라지자 단장은 의아하게 얀테를 바라보았다가 뒤늦게 그의 다리 사이를 확인하고 감히 그럴 수 없다는 듯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미 단장의 처분 따위는 얀테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천장을 바라보며 리체의 색기 어린 얼굴을 그리던 얀테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번에 놓친 건 상관없다. 별거 아니야. 어차피 내 손에 들어오게 될 테니까. 그녀가 오메가로 발현한 지 약 1년, 내 손으로 피운 꽃이니 내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얼마 전에도 몸을 섞었지. 이제 슬슬 반응이 오겠군. 내 씨물과 페로몬으로 꽉꽉 채운 몸에서…….’

극우성 알파인 그는 후천적 오메가, 그리고 오메가 발현 현상에 대해서 남보다 알고 있는 게 몇 가지 더 있었다.

우선, 오메가의 후천적 발현은 극에 가까운 알파 페로몬을 접해야만 가능하다.

둘, 발현한 오메가는 저를 개화시킨 알파의 페로몬을 필요로 한다. 오메가로 발현할 때 신체에 흡수된 알파 페로몬은 일종의 호르몬이 되어 오메가의 신체를 유지시켰다. 호르몬이 부족해지면 필연적으로 육신은 균형을 잃고 무너지기 마련.

그러니 조급해할 필요 없다. 시간 문제였다.

이것이 바로 얀테가 지금까지 여유로웠던 이유였다. 그는 리체가 제 발로 그의 품으로 걸어 들어올 날을 확신했다. 카이로에게 쉽게 결혼을 허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굳이 강력한 세력이자 쓸 만한 오른팔인 카이로와 반목할 것 없이,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하면 되는 문제였으므로.

나른하게 풀린 입매를 문지르며 얀테는 흡족하게 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