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그라우지를 표현하는 단어를 셋 꼽자면 다음과 같다.
변태.
마탑의 폭군.
그리고 가슴 성애자.
“흐으읏…….”
배 위로 미끄러지는 서늘한 머리카락의 감촉이 간지러워 리체가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가슴을 내리누르는 무게감에 크게 소용이 없었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리체는 허벅지를 움찔움찔 떨었다.
흡, 츄릅.
가슴에 달라붙은 그라우지에게선 입 안에 잔뜩 머금은 타액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리체의 가슴은 축축하고 뜨거운 입 속에 갇혀 있었다.
그가 혓바닥의 넓은 면으로 유두를 덮고 마구 문지르자 리체의 입에서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리체를 침대에 눕히고 허벅지 위로 올라온 그라우지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제 몸보다 큰 쿠션에 푹 파묻히듯 등을 기댄 리체의 입술 사이에서 달콤한 숨이 새어 나왔다. 할짝. 붉은 혀가 튀어나와 입술을 핥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자극을 받은 듯 그라우지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단추 풀린 옷자락으로 대충 덮여 있는 가슴에 손이 다가왔다. 옷자락을 살짝 들춘 손이 풍만한 가슴을 매만졌다. 잔뜩 빨려서 온도가 올라간 살갗에 닿은 손이 서늘해서 리체는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그라우지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그녀의 가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긴 검지로 셔츠 자락을 툭 쳤다. 젖혀진 셔츠 자락 사이로 그릇 두 개를 엎어 놓은 듯한 반듯한 가슴이 드러났다.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 듯한 형태로 그라우지가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리체 양은 참 아름다워요.”
반쯤 내리깐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남색의 눈동자는 확연히 짙어져 언뜻 검은색처럼 보였다. 리체는 눈만 굴려 자신의 가슴과 그라우지의 넋 나간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말했다.
“그거참, 가슴을 보면서 하는 말이라 기쁘지는 않네요.”
떨떠름한 목소리에 그라우지가 씨익 웃었다.
“물론 리체 양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름답죠.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슴이 최고라는 거예요.”
리체은 황당했다. 칭찬이라고 하는 말일까? 또 놀리려고 하는 걸까.
“필요 없어요.”
“리체 양은 무엇보다 이 가슴을 소중히 보호해야 해요.”
복잡하고 현란한 마법 술식을 읊으면 어울릴 입술에서는 가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얀 살결과 출렁거리는 무게감 있는 살덩이를 봐요. 보기만 해도 내 자지가 발딱 서 버렸잖아요.”
리체는 징그러운 걸 봤다는 듯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 있게요? 가운데 툭 튀어나온 귀여운 살점은 사내라면 한 번쯤을 쪽쪽 빨아먹고 싶을 거예요. 아, 이거 흥분되는데.”
리체는 저도 모르게 귓바퀴를 문질렀다. 귀를 씻어 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점점 형편없어지는 그녀의 얼굴에 그라우지가 킬킬거렸다. 리체는 얼굴을 구겼다. 역시 장난이지.
“더했다가는 이대로 뛰쳐나갈 얼굴이네.”
“잘 아네요.”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그라우지의 손가락이 리체의 하얀 가슴살에 닿았다. 붓으로 터치하듯 무게가 전혀 실리지 않은 가벼운 접촉이었다. 손가락 끝이 가슴을 빙글빙글 돌았다. 콱 움켜쥐는 것과 달리 간지러운 감각이 절로 가슴에 집중하게 만들어서, 리체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그라우지의 굳은살 없이 부드러운 하얀 손가락이 정점에서 먼 곳부터 원을 그렸다. 뱅뱅 원을 그리며 정점으로 가까워졌다. 점점 원의 크기가 작아져 갔다. 손끝이 분홍색 유두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지자 리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마음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끝은 계속해서 작은 원을 그리며 유두 주변을 맴돌았다. 언제쯤 유두에 닿을지. 리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손가락이 멀어지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때 손가락이 급격히 가까워진다.
그러고서는 툭.
리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반응 귀여워요.”
그라우지가 여유롭게 속삭였다. 리체가 인상을 찌푸리자 다시 유두를 툭 쳤다. 한 번 칠 때마다 가슴 끝이 꼿꼿해졌다. 쪼글쪼글해진 유륜을 그라우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도도 좋고, 참, 끝내주는 가슴이군요.”
물건 사러 나왔나. 평가하는 말투에 리체가 뭐라고 빈정거리려는 찰나 그라우지가 가슴 아랫부분을 손가락으로 움켜쥐고, 도드라진 유두를 덥석 물었다.
“아…… 앗!”
할 말이 쏙 들어갔다. 그라우지는 유두를 입술로 오물거리며 다른 가슴을 손으로 매만졌다. 끄트머리를 검지로 둥글리자 유두가 완전히 딱딱해졌다. 그대로 누르니 하얀 가슴살 안에 파묻힌다.
리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는 말이나 행동은 변태와 다름없지만 가슴을 애무하는 기술만큼은 최고였다.
부드러운 입술로 유두를 애무하던 그라우지가 이내 혀를 살며시 내밀었다. 인사하듯 혀를 터치하고 입을 열어 이로 유두를 살짝 물었다. 치아 사이에 끼인 유두를 혀로 핥았다. 피가 잘 통하지 않는 작은 살점에 가해지는 자극은 감각이 단절된 듯 이질적이라서 기묘했다.
흐읏. 신음을 흘리자 그라우지의 혀 놀림이 한층 농밀해졌다. 리체는 가늘게 뜬 눈으로 가슴에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에 달라붙은 그라우지가 손가락으로 가슴을 희롱하다 말고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리체는 자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정말 개처럼 빠네요.”
그라우지가 그녀의 가슴에서 입술을 뗐다. 벌써 애무가 끝난 것일까? 족히 한 시간은 가슴을 가지고 놀던 사람답지 않았다. 실없이 굴어도 명색이 마법의 종주인데 개 같다는 표현에 기분이 상한 걸까.
리체는 잠깐 고민했지만 착각이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 그라우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꽤나 불길한 느낌에 리체가 쿠션에 깊이 몸을 파묻는 순간, 손목이 잡혀 끌어당겨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자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등에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 리체는 손을 움찔했다. 손바닥 아래, 바지에 감싸인 근육질 허벅지가 꿈틀거렸다. 카이로나 레이몬드만큼은 아니었지만 울퉁불퉁하고 탄탄했다. 잠깐 넋이 나갔던 리체는 그라우지가 두 손으로 가슴을 덮자 정신을 차렸다. 귓가에서 속삭였다.
“개처럼 굴 수밖에 없죠. 이런 가슴이 눈앞에서 흔들리는데. 유혹한 건 리체 양이잖아요.”
눈앞의 공간이 일렁이더니 거울이 나타났다. 리체는 뜬금없이 눈앞에 나타난 거울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간을 이동하여 대상을 불러들이는 소환술이었다.
가장자리가 고풍스러운 은색 철제로 장식된 거울은 커다래서 리체와 그라우지의 모습을 한 번에 비추었다. 거울 속에서 그녀는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그라우지에게 안겨 있었다. 그가 뒤에서 속삭였다.
“리체 양도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봐야 해요.”
손을 펼쳐서 가슴을 누르고 앞뒤로 움직였다. 지긋한 압박감에 리체가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상하로 움직이던 손이 보다 크게 움직였다. 가슴을 누른 채 상하좌우로 마구 움직인다. 쾌감으로 몸 깊은 곳이 찌릿거렸다. 가슴에 연결된 신경이 뇌에 보내는 신호일 뿐이란 걸 알지만 그런 ‘사실’을 떠나서 몸은 본능적인 욕구에 휘둘렸다.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이었던 때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하아, 아앙.”
리체의 신음이 커지자 그라우지는 그녀의 뺨에 제 뺨을 붙이고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가슴을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는 딱딱한 유두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리체는 눈을 뜨고 눈앞에 떠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뒷머리를 그라우지의 어깨에 대고 힘을 뺀 자신의 몸은 마치 그라우지의 장난감 내지는 인형처럼 보였다. 타액에 젖어 식었던 젖꼭지가 손가락 사이에서 마찰되어 서서히 달아올랐다.
“가슴을 빨릴 때마다 광대가 불그스름해지는데, 그때마다 설탕을 뿌린 것처럼 젖꼭지에서 달콤한 맛이 나요.”
그라우지가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만져지는 젖꼭지를 바라보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작은 살점이 애처로우면서 야릇했다.
“작지만 기분이 좋아지면 꼿꼿해지면서 커지는 게 아주 귀엽고 야해요. 사내놈들 더러운 자지랑은 다르게 아기자기해서는.”
왠지 모르게 수치스러워진 리체가 젖꼭지를 비벼 대는 손을 붙잡았다.
“그만해요.”
“왜요?”
그라우지가 뺨을 더 가깝게 붙이고, 리체의 턱을 들어올렸다. 리체는 밭은 숨을 쉬며 거울을 응시했다. 그라우지와 딱 붙어 있는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홍조를 띠고 있었고 눈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풀려 있으면서도 뜨거웠다.
리체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그라우지가 묘사했던 그 모습이었다. 일어나기 위해 몸을 뒤척였지만 그라우지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양팔을 꽉 붙들고 몸을 붙인다. 전보다 더 밀착된 몸을 꽉 끌어안고 한숨을 쉬었다.
“귀여워라. 이렇게 부끄러워할 때도 있군요. 처음엔 대담하게 가슴을 깠으면서.”
“내가 언제…….”
리체가 신경질을 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라우지가 한 팔로 그녀를 끌어안고 다시 당겼다. 그라우지는 그녀의 버둥거림에도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아.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려.”
“…….”
“정말 음란하네요, 리체 양은.”
단어 하나하나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다.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본 리체는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라우지는 집요하고 힘 센 변태였다. 떨쳐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리체가 가만히 있자 만족한 듯 나직하게 웃는다. 그라우지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한 손은 가슴을 떨어뜨릴 듯 잡아당기며 흔들고 다른 손은 부드럽게 가슴을 애무했다.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운 채 가슴을 주무른다. 피아노 치듯 리드미컬한 손놀림에 쾌감이 미친 듯이 피어올랐다.
주륵. 다리 사이에서 축축한 것이 흘렀다. 리체는 고개를 젖혀 그라우지의 어깨에 기대고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쾌감에 신음하면서도 아쉬웠다. 지금 박히면 딱 좋을 텐데. 본 차원에 있을 때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욕망이 들끓었다. 그런 리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라우지는 온종일 가슴만 진득하게 애무했다.
결국 리체는 그날 하루 가슴만으로도 세 번을 가 버렸다. 오직 가슴만으로 오른 절정이었다.
움직임이 많지 않았음에도 모든 게 끝났을 때 리체는 탈진해서 침대에 축 늘어졌다. 절정에 몇 번이나 올랐더니 잔뜩 운동을 하고 나가떨어진 것처럼 지친 탓이었다.
그라우지는 얄밉게도 멀쩡하고 깔끔한 낯으로 그녀를 토닥거렸다. 퍽 부드러운 손놀림이었다. 토닥거리는 부분이 가슴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예민해진 가슴은 작은 터치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손을 치웠지만 언제 멀어졌냐는 듯 다시 다가온 손바닥이 가슴을 문질러서, 곧 귀찮아 포기하고 말았다.
어차피 곧 밤이었다. 그라우지는 한창 발정이 난 것처럼 굴어도 늦은 밤만 되면 무슨 꿀단지라도 숨겨 놨는지 제 방으로 향하곤 했다.
지금은 성가신 그라우지를 쫓아내는 것보다 잠이 쏟아지는 게 문제였다.
“리체? 졸려요?”
“…….”
결국 그녀는 방해 말고 그만 가라는 말도 못 한 채 곯아떨어졌다.
* * *
“음…….”
옆으로 뒤척이던 리체는 눈을 반짝 떴다. 뭔가 묘하게 불쾌하다. 이상한 느낌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를 수 초, 어디서 미약하게 바람 소리가 났다. 바람 소리? 아니었다.
리체는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즉시 그라우지의 얼굴이 보였다. 흠칫한 리체는 그의 눈꺼풀이 감겨 있음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았다. 곧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사람이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바로 뒤에, 그녀가 옆으로 누운 방향으로 그라우지가 누워 있었다. 꿀단지를 숨겨 놓은 게 아닐까 의심스럽게 굴 때는 언제고. 리체는 의아했지만 잠든 얼굴에 그도 피곤했나 보다고 납득했다. 다시 잠들려고 했지만 빠르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차원 연구자답게 그녀는 타인과 부대끼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물론 차원 원주민들을 상대하는 만큼 필요하다면 평균적인 것보다는 높은 친화력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개인적인 공간과 시간을 중시했다. 등 뒤에 그라우지를 붙이고 편히 잠들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마탑에 빈방이 몇 개 있으니까.’
그라우지의 어깨를 툭 밀었다. 늘씬한 몸이 스르륵 돌아가 정자세를 취한다. 그대로 일어난 리체는 뭔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했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라우지의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숨도 거칠었다.
‘……?’
리체는 미끄러지듯이 침대로 다가갔다. 언뜻 평온해 보이는 그라우지의 얼굴은 가까이에서 살피니 하얗게 질려 있었다. 코에서 빠져나오는 숨은 산 자의 마지막 생기처럼 가늘었고, 입술 사이로 들락날락하는 숨결은 가시가 일어난 나무판자처럼 고르지 못했다.
‘어디 아픈가.’
리체는 고개를 갸웃하고 손을 뻗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차원 원주민을 관리하며 가장 고생했던 일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도, 의식주를 꼬박꼬박 챙겨야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픽 죽어 버리지 않도록 건강을 신경 쓰는 일이었다. 아무리 세심하게 보살펴도 기후, 습도, 냄새 모든 것이 다른 환경에서는 병이 들기 쉬웠기 때문이다. 풍토병이라고들 했다.
단순히 대륙이 바뀌어도 다른 기후 환경에 병을 얻는데 차원이 바뀐 경우는 어떻겠는가.
고용인들에게 맡기기에는 차원 원주민은 퍽 귀중한 연구 재료였던 탓에, 리체가 사람을 보살피는 기술은 어지간한 의료 계열 종사자보다 쓸 만했다.
“흠.”
이마가 뜨거웠다. 그라우지에게서 손을 뗀 리체는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들어온 그녀의 손에는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이 들려 있었다. 물에 적신 수건을 그라우지의 이마 위에 올렸다. 끙. 그라우지의 잇새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리체 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미간에 깊이 주름이 진 얼굴은 꽤 괴로워 보였다.
“악몽을 꾸는 것 같은데.”
평소와 달리 뻔뻔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모습에 리체는 기분이 묘해졌다. 그라우지도 보통 사람이었구나. 그런 이상한 감상이 들었다.
아무리 마법의 종주라고 해도 사람은 사람이지. 피식 웃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심란했다. 리체는 무의식중에 그라우지를 얼마든지 이용한 뒤 버려도 되는 일종의 도구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약한 모습이 낯설었다.
물리 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본 차원을 살다 온 그녀에게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그라우지는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슈퍼컴퓨터나 로봇 같은 거라면 모를까. 평소 행동 역시 일반인과는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어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은 거의 느끼지 못했으니.
어쨌든 아픈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사고방식이나 언행 따위가 자신과 상극이기는 해도 이 차원에서 가장 협력해야 할 파트너가 아니던가. 이대로 그라우지가 잘못된다면, 차원 이동 연구에 차질이 생길 터였고 그래서는 곤란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리체는 그를 제법 세심하게 살폈다. 젖은 수건이 체온을 순조롭게 떨어뜨렸다. 이마와 뺨에 손등을 댄 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열이 내릴 듯했다. 그대로 손을 떼던 그녀는 희미하게 젖어 있는 목깃을 발견했다. 옷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잠깐 고민한 리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젖은 옷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줄 생각이었다.
셔츠에 손을 가져갔다. 윗단추를 풀자 셔츠 자락이 살짝 벌어져 속살을 드러냈다. 땀이 촉촉하게 배어나온 하얀 살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리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단추를 푸는 데만 집중했다.
다만 이 상황이 어색하기는 해서, 표정은 딱딱했다. 단추를 다 풀고 셔츠를 양옆으로 젖혔다.
리체는 조금 새삼스러워졌다. 그라우지의 맨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목부터 시작해서 가슴까지 다 깐 적이 여러 번인데 반해 그라우지는 셔츠 단추도 세 개 이상 푼 적이 없었다. 그는 차림새만큼은 늘 단정했다.
그라우지의 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떡 벌어진 가슴은 살결이 희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 같았고, 양쪽 가슴에 콕콕 박힌 갈색 유두는 그녀의 것과 달리 좁쌀만큼 작았다. 흔적처럼 보이기도 하는 젖꼭지를 손끝으로 툭 튕겼다. 리체의 무표정한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스쳤다.
두 손가락으로 갈색 유두를 꾹 눌렀다. 엄지로 좁쌀을 뭉개는 것 같았다. 그라우지처럼 빨아 봤자 치아에 낄 수 없을 만큼 작은 살점이었다. 엄지로 유두를 누르고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원을 그리듯 돌렸다. 흔적 기관처럼 작은 유두가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라우지가 작게 신음했다.
“으음…….”
눈을 가늘게 뜬 리체는 손가락을 떼고 점처럼 동그란 젖꼭지를 내려다보았다. 뭉쳐진 것 같기도 했다. 딱딱한 젖꼭지를 검지로 툭 튕기고는 다른 곳을 살폈다. 근육으로 매끄러운 상박이 눈에 들어찼다.
‘별거 없네.’
어깨를 으쓱인 리체는 벗기다 만 셔츠를 양옆으로 완전히 젖혔다. 셔츠가 떨어져 나간 몸을 무심코 바라본 리체는 눈썹을 까딱였다. 배꼽 아래. 칼이 훑고 지나간 것처럼 기다란 흉이 져 있었다. 하얀 피부 탓에 유독 두드러지는 흉터는 번개 모양으로 거칠었다.
기사도 아닌 그에게 왜 이런 흉터가 있을까. 의아한 마음에 손이 무심코 뻗어졌다. 가녀린 손가락이 갈색 흉터에 닿는 순간.
탁!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그라우지가 거친 숨을 쉬었다. 상반신을 반쯤 일으킨 그의 눈은 혼탁했다. 리체를 인식한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리체?”
매끄러운 목소리가 전과 달리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몸은 괜찮아요? 아직 열이 있는데.”
“지금, 뭐 하는…….”
그라우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어요.”
“악몽…….”
리체는 좀체 평정을 찾지 못하는 그라우지가 흥미로웠지만 이번만큼은 호기심을 억눌렀다. 어찌됐건 그는 환자였다.
“더 자요.”
“……자라고?”
그라우지가 기묘하게 말을 따라 했다. 리체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별거 아닌, 그저 자라는 말이었는데.
“안 되지. 나는 잠을 자면…….”
“잠을 자면?”
“싫어, 자는 건.”
스산하게 중얼거리던 그라우지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손목을 잡은 손에도 힘이 빠져 주룩 미끄러진다. 리체는 어깨를 으쓱이고 그의 손을 털어 냈다. 손이 쉽게 떨어져 나갔다. 흘끗 그라우지를 보자 그는 다시 잠이 들어 있다.
침대에 떨어진 그의 손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를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지는 몰랐지만, 리체는 그라우지가 아주 약간 불쌍해졌다. 손을 붙잡자 마디 굵은 긴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쫙 펴졌다가 구명줄이라도 만난 듯 그녀의 손에 매달렸다.
강한 힘에 리체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손을 떼지는 않았다. 손을 잡은 채 몇 분이나 있었을까. 파르르 떨리던 손가락의 흔들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숨소리는 이전보다 안정되었다.
이제 됐다 싶어 부드럽게 손을 빼내려 하자 싫다는 듯 그라우지의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리체가 위에서 꾹 잡아 누르자 다시 얌전해졌다.
그 뒤에 리체는 하던 일을 재개했다. 젖은 셔츠를 벗기고 바지를 벗기고, 땀이 밴 몸을 수건으로 훔친 뒤 말끔해진 몸 위로 이불을 덮었다. 그라우지는 그때까지 조용했다. 완전히 잠에 빠져든 건 아니었고 중간중간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지만 리체는 굳이 말을 걸어서 일어났냐고 묻지 않았다.
아침이 올 때까지, 리체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연구 일지를 읽어 내려갔다. 집중해서 활자를 보다가 간혹 옆을 볼 때마다 그라우지는 잠들어 있었다.
마탑에 온 후 최초로, 리체는 8시간 내내 조용한 그라우지를 경험했다.
‘가끔 이렇게 아픈 것도 나쁘지는 않겠는데.’
일지로 고개를 돌리는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그날 이후, 그라우지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아.”
술식을 수정한 마법식을 그리다 초크를 가져가려던 리체와 손이 스친 순간, 그라우지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타닥!
리체의 손가락을 스치고 떨어진 초크가 두 동강이 났다. 리체는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그라우지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감싼 그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왜 저래?’
리체의 의문 어린 시선에 그라우지의 흰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디 아파요?”
“아니요. 아픈 게 아니라…….”
그라우지가 말끝을 흐리며 한 손으로 입매를 가렸다. 하관을 만지작대며 그녀를 곁눈질한다. 리체는 또 그가 이상한 말을 할 줄 알고 인상을 썼다.
이번에는 또 뭐, 아픈 게 아니라 흥분해서 그런 거라고 하려나. 가슴을 빨게 해 주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할지도. 열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지만 리체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라우지는 우는 얼굴로도 충분히 쪽쪽이를 달라고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 무슨 헛소리든 해 보거라. 이런 심정으로 쳐다보는데 그라우지가 시선을 피했다. 여전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고서는 휙 사라진다.
그 뒤로도 그라우지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뻔뻔함으로 따지자면 누구든 따라갈 자가 없을 만큼 낯짝이 두꺼워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인사가,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연구 일지에 뭘 적다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돌리면 그라우지가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리체가 왜 그러고 있냐고 물어보자 어깨를 으쓱이고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체 입장에서는 슬슬 답답해서 열이 받았다.
그는 정말로 이상하게 굴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이상한 건, 그라우지로부터 어떠한 변태적인 말이나 희롱을 당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무려 만 하루 넘게!
그라우지가 얌전하니 그제야 마탑의 주인이자 마법의 종주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대로 진중하고 지적여 보였다. 다만 영문을 알 수 없는 리체는 찝찝하기만 했다.
뭔가 이상하기는 한데…….
리체는 또 자신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는 그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까지 리체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라우지 로스티나루스의 스위치를 눌러 버렸다는 것을.
* * *
리체는 이상하게 굴고 있는 그라우지 대신 홀로 마법진을 그렸다. 정교한 계산을 토대로 도출한 마법 술식을 기하학적인 그림과 룬어를 통해 발현하는 마법진은 한 획도 틀리면 안 되는 복잡하고도 예민한 마법 도구지만, 진 자체는 마력이 한 톨도 없는 일반인도 그릴 수 있었다.
꼼꼼한 손으로 야무지게 복잡한 마법진을 바닥에 새기는 리체는 불퉁한 마음이었다.
그라우지가 폭삭 내려앉은 카스테라처럼 얌전해진 탓에 차원 이동 연구의 진척이 느렸다.
연구 시간의 절반을 집적거리는 데 쓴다고 해도, 하루 대부분을 붙어 있기 때문에 연구에 투자하는 시간이 적지는 않았던 전과 달리 지금은 어딜 그렇게 숨어 다니는지 보이지를 않으니 큰 문제였다.
‘최선을 다해서 마법의 완성을 돕는다.’
마법사 서약을 떠올린 리체의 입꼬리가 못마땅하게 비틀렸다. 그라우지가 지금 마냥 빈둥대는 거라면 마법사 서약을 어겼으니 탈이 나도 진작 났을 텐데 그렇지는 않고 있다.
‘그의 게으름이 마법사의 서약을 어기는 정도까지는 아니란 건가.’
보다 못해 직접 그리기 시작한 마법진은 아직 절반도 되지 않았다. 조금의 삐침도 용납할 수 없으니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는데도 워낙 복잡하여 한 부분을 완성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리체는 그냥 낙서를 하는 것처럼 슥슥 그리는데도 완벽했던 그라우지의 능숙한 솜씨가 아쉬워졌다.
한숨을 쉬고 초크를 바닥에 긋는 찰나에, 묵직한 바다 냄새가 훅 풍겼다. 멈칫한 리체가 고개를 들자 무거운 크림처럼 매끄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뭘 그렇게 끙끙대고 있어요. 비켜 봐요. 내가 할 테니.”
초크가 손에서 빠져나간다. 리체는 손바닥에 묻은 하얀 가루를 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옆으로 길게 빠진 눈매가 가늘어지고, 그가 눈웃음을 친다. 요즈음 이상했던 모습과 달리 그 얼굴은 평소 그라우지를 떠올리게 했다. 경계하는 한편 다소 안심한 리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장난질도 끝났나 보군.’
무슨 일이었건 그라우지가 나타났으니 한시름 덜었다. 아무리 자신이 마법진을 완벽하게 완성한다고 할지라도 그라우지의 주도적인 협조가 없으면 말짱 꽝이었다. 완성에 가깝게 연구가 진행됐으니 다른 마법사를 섭외하면 어떨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그건 영 믿음직스럽지가 못했다. 차원 이동을 하지도 못하고 차원의 틈에서 괴롭게 말라비틀어지는 일은 결단코 사양이었다.
뒤로 물러난 리체는 그라우지가 미완성된 마법진의 절반을 빠르고 정확하게 그려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과연 감탄이 나올 만한 실력이었다. 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마법진을 거의 완성한 그라우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리체 양은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리체는 불현듯 등허리가 오싹했다. 속된 말로 100년 먹은 노괴물의 입에서 나오기는 퍽 아기자기한 느낌의 단어가 아닌가. 결혼이 인륜지대사라고 하지만 이미 인간의 범주에 있다고 하기에 애매한 그라우지에겐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고작해야 서류로 묶이고 세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관계를 만드는 정도의 제도 따위는. 그런 건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하는 리체는 어딘지 모르게 엄습하는 기시감을 떨치며 대꾸했다.
“사회에서 살아 나가기에 썩 편리한 제도죠. 정부의 입장에서도 필요하고요.”
“편리하다?”
의자에 앉아서 리체는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결혼한다는 건 주류 사회에 편입해 들어간다는 거니까요. 불필요한 시선을 받을 필요도 없고, 정서적이든 감정적이든 충족해 줄 수 있다면 살기에 편리하죠.”
리체답게 건조한 평가였지만 그라우지는 그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도블락인들은 결혼을 꽤 중요하게 여기나 봐요.”
의혹에 차 혼잣말을 하자 그라우지가 몽롱하게 대꾸했다.
“그야 특별하니까요.”
“…….”
“리체가 살았던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나 보군요?”
그녀는 그렇다고 대꾸했다.
“신성한 나무에 대고 평생을 맹세하면, 영혼이 묶여 다음 생도 좋은 인연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해요.”
“민간 신앙인가요? 그런 말을 믿어요, 그라우지?”
웃으며 말했지만 그라우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블락에서 결혼이란 그녀가 아는 결혼이랑은 사뭇 다른 개념이었다. 도블락의 국호가 도블락이 아니었을 때부터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결혼은 혼약서에 서명하는 게 아니라 신성한 나무 앞에 서서 사랑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혼서를 써서 갈라질 수 있는 제도적 결혼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도블락인이라면 아무리 문란한 바람둥이일지라도 결혼에 낭만적 환상을 부여했다. 진정한 의미의 신성한 결혼을 맺는 커플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그런 풍습 때문인지 도블락은 제도적인 결혼도 타국에 비해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결혼기념일은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일이었고, 간통은 중벌로 다스렸다.
그때, 순간적으로 레이몬드가 결혼하자고 청혼 같지도 않은 청혼을 했던 일을 떠올린 리체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레이몬드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런 사람들이 있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소중하게 여겨요.”
리체의 의아한 눈빛에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죽고 나서도 함께한다니, 낭만적이잖아요. 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라, 언젠가 다시 만날 신부를 기다린다면 사는 것도 덜 지루하지 않겠어요?”
허리를 펴는 그라우지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걸렸다. 씁쓸한 기색이 그의 고상한 외모와 잘 어우러져 근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소 같지 않은 모습에 리체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진이 잘 그려졌는지 스윽 둘러보며 그가 툭 뱉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체 양과 함께하고 싶어요.”
그라우지가 빙그레 웃었다. 그 말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대충 넘기려던 리체는 그를 보고 흠칫했다. 뺨이 붉었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어떻게 생각해요?”
장난은 아닌 것 같다. 난감하게도. 리체의 미간에 빗금이 갔다. 쪽쪽이 타령 뒤에 결혼 타령인가. 아무리 종잡을 수 없는 작자라 해도 그렇지, 구간 점프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변태에서 남편으로 신분 상승하고 싶어 하다니. 뻔뻔하기도 하지.’
신랄한 말이 덩어리져서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리체는 힘겨운 표정으로 목 끝까지 올라온 언어의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마법사 서약을 했으니 그라우지는 어떻게든 차원 이동 마법을 완성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수가 틀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마음 아니던가? 그라우지라면 서약에 걸리지 않게끔 요리조리 수를 쓰며 자신을 엿 먹일 수도 있었다.
‘똑똑한 놈들은 이래서 골치가 아프단 말이야.’
리체는 정작 그녀 스스로도 굉장한 엘리트였음을 망각하고 내심 투덜거렸다.
어떻게 잘 말해서 쓸데없는 데 신경을 쏟지 않고 연구에 매진하게 만들 수 있을까. 잘만 하면 연구에 대한 동기를 불어넣어 줄 수도 있겠는데. 그라우지의 입장에선 사악한 생각을 할 때였다.
똑똑.
문이 열리고 그라우지의 부관이 들어왔다. 풀숲에서 섹스하던 레베카였다. 그녀는 아직도 리체가 그 장면을 보았단 걸 알지 못했다. 레베카는 리체를 흘끗 보고,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그라우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마탑에는 그라우지가 한층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거기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리체였다.
그라우지와 숱하게 몸을 섞었던 레베카는 리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애인인지 파트너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관계인 리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 대하는 것은 그라우지 정도의 뻔뻔한 신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래도 힘든 일이었다.
과연 강철 신경을 가진 그라우지는 두 사람과 다르게 한 점 부끄럼 없이 멀쩡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지?”
“스트리고 백작 가문에서 직통 연락이 왔어요.”
“……스트리고가?”
수도를 달구는 유력 가문의 이름이지만, 그라우지에게는 다른 의미의 가문이었다. 리체를 이곳으로 보낸 카이로 스트리고가 수장으로 있는 가문이 아니던가.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보내지 않는 직통 연락이라니.
그가 리체를 흘끗했다. 조금 놀랐는지 눈썹이 살짝 올라갔지만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덤덤했다. 불길함을 느낀 그라우지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난 리체 양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카이로의 연락을 받고 마차에 올라탄 리체는 창밖으로 그라우지를 내다보았다. 그는 웬일인지 우울해 보였다. 뒤로 한데 묶었던 머리카락은 앞으로 흘러나와 있었고, 옆으로 긴 눈매는 축 늘어졌다. 입꼬리 역시 아래를 향해 있어서, 저조한 기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반대로 리체는 카이로의 연락이 반가웠지만 저 얼굴을 보고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리체는 잠깐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죠. 어쨌든 차원에 관해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얘기했어요. 나머지는 내가 없어도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그라우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가 원한다면 리체 양을 카이로 백작에게 보내지 않을 수 있어요.”
그라우지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졌던 입꼬리가 올라가 웃는 낯이었다. 본래 그는 성격이 너구리 같은지라 표정만으로는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맞히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웃고 있어도 기분이 나빠 보였다.
잠깐 고민한 리체는 솔직히 대꾸했다.
“저는 가고 싶어요. 여기도 너무 오래 있었잖아요.”
그라우지의 입술이 굳어졌다.
“리체, 백작을 좋아해요?”
리체는 의아했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예요?”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묻느냐, 같은 빈정거림이 아니었다. 리체는 소처럼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라우지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거라면 머리로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했다. 보통 이런 경우 저런 질문은 ‘질투’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라우지는 질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던가? 게다가 현실적으로,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주는 카이로가 부르는데 단순히 가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하는 건 불합리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카이로는 자신이 단순히 안전 문제로 마탑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그가 이제 괜찮다는데 더 댈 핑계도 없었다. 리체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잠시 예리한 눈으로 그녀를 탐색한 그라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런 얼굴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런데 어쩐지 안심한 얼굴이다. 내가 무슨 얼굴을 했다고? 리체는 손으로 얼굴을 더듬거리려다가 말았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어디서 일한다고 했죠? 리체 양은 바쁘니 내가 찾아갈게요.”
“네?”
“그렇게 질색할 필요는 없는데.”
“오지 말아요.”
단호하게 말하자 그라우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특유의 ‘척’이 드러나는 얼굴에 리체가 바싹 긴장했다.
“하지만 스트리고 가문으로 찾아가는 건 영 불편할 것 같아서. 리체 양이 괜찮다면 나도 상관없지만.”
“……마탑의 주인이 일개 귀족 가문으로 찾아온다라. 황실에서 아주 좋아하겠군요.”
“상관없어요. 누가 내게 뭐라 할까.”
싱긋 웃는 그라우지의 눈은 오만하고 시니컬했다.
“오늘 내일 하는 황제가? 아니면 핏덩이에 불과한 황태자가?”
리체의 눈썹이 꿈틀했다. 얀테 루세이노. 마탑에 있는 내내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이름에 리체의 목 안쪽에 한숨이 고여 들었다. 카이로가 뭘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얀테가 계속 얌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소유욕으로 득실득실 끓었던 파란 눈을 떠올린 리체의 눈에 알게 모르게 시름이 어렸다. 그녀의 침묵을 오해했는지 그라우지가 딴소리를 했다.
“극우성이라지만 내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해요. 이 세월을 그냥 산 게 아니거든. 페로몬은 내게 하나의 향수일 뿐이죠. 물론 리체 양은 예외. 날 미치게 하잖아.”
마차 창틀에 올라와 있는 리체의 손을 붙잡고 그 손등에 느릿하게 키스했다. 얀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떨떠름한 그녀를 보며 그라우지는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일하는 곳으로 찾아갈게요. 아무래도 거기가 딱딱한 백작이 버티고 선 스트리고 가문보다는 편하겠어.”
“…….”
“그래서 어디서 일한다고요?”
“집요하네요.”
심드렁한 반응에 그라우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얼굴을 보니 리체는 갑자기 그가 정말 작정하고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말 안 해 줄 거예요? 알았어요, 그럼.”
사르르, 웃는 얼굴. 리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조심히 가요.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그럴 필요 없는데요. 하지 마세요. 징그러우니까.”
“하하. 리체 양도 참, 부끄러워하긴.”
다시금 썩은 사과 같은 표정을 짓는 리체를 태우고, 스트리고 가문의 마차가 출발했다.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는 그라우지의 입꼬리가 슬쩍 내려갔다. 안경 너머 차가운 남색의 눈동자가 마차의 뒤꽁무니에 새겨진 방패 문장을 응시했다. 검과 전쟁으로 권력을 쌓아 올린 스트리고 가문의 문장이다.
카이로 스트리고는 친분은 없지만 꽤 난놈이라고 생각한 기사. 나쁘게 생각한 적 없으나 지금 그라우지는 머릿속으로 스트리고 가문에 메테오(대단위 화염 마법)를 날리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름이 아깝지 않게 불시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겠지만, 그 정도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카이로 백작은 본성으로 돌아가 전쟁 준비를 하겠지…….’
그라우지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산뜻한 입술 모양과 달리 스산한 미소였다.
공신 가문. 황실의 오른팔. 역대 황제가 가장 신뢰했던 가문. 무패의 역사.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된 스트리고 백작가의 힘은 지금에 와서 귀족 가문 몇이 연합한다고 무너뜨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개 군인 출신 백작의 신분으로 대공처럼 거대한 영지와 성까지 하사받았으니, 다소의 오르락내리락은 있었더라도 그 힘이 만만치 않음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내가 리체 양을 곁에 두고 싶으니까.’
그라우지는 손끝으로 눈가를 매만졌다. 리체의 퉁명스러운 시선을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그러다가 뚝 그친다.
‘그녀가 원하지 않겠지만.’
긴 세월을 사는 동안 깨달은 게 있다. 창조의 힘인 마법으로 할 수 없는 게 없지만 단 하나가 있다면 그건 인간의 마음이다. 그것만큼은 그 어떤 강력한 힘이라도 강제할 수가 없다. 그라우지는 지금의 리체가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나직하게 웃었다. 부러 그런 체하는 게 아니라, 그녀를 생각하면 진심으로 즐거워졌다.
심드렁하고 시큰둥한 눈빛. 처음에는 신기했을 따름이다.
겉보기로 흠잡을 데 없이 예의 바르지만 기이할 만큼 무심한 눈동자. 눈앞의 상대에게 일말의 호기심도 보이지 않는. 아니, 아니다. 호기심은 충만했다. 그게 개인적인 호기심이 아닐 뿐이지.
목적에 충실한 여자라는 건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눈동자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계산적인 눈빛이었다. 그것이 아름다운 눈을 차가운 보석처럼 보이게 했다.
젊은 여자가 어째서 저런 눈을 할까. 자신처럼 긴 세월을 살아온 것도 아니면서. 그게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큰 가슴은 만족스러웠고.
좀 더 알고 싶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거기다가 자신조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던 외차원의 존재. 근 10년 동안 이만큼이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상대는 없었다. 집중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있나.
카이로 스트리고의 요청을 받았을 땐 놀라웠지만 잘됐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없을 것 같지는 않았는데 카이로 스트리고를 애인으로 뒀다니. 그러면서 자신에게 가슴을 허락했다? 문란함은 알파오메가의 미덕.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지만 왠지 충격이었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마탑에서 지내면서는, 점점 솔직해지는 그녀의 반응이 재밌었다. 자신의 앞에서 큰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마탑의 마법사들과 달리 그녀는 대놓고 진저리를 쳤다. 정말 징그럽다는 듯 혐오스러운 눈빛을 마주할 때면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갖고 놀기 재미있는, 큰 가슴을 가진 여자.
그랬을 뿐이었는데.
그라우지의 표정이 묘해졌다. 스트리고 가문의 마차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탐색 마법을 펼친 그의 감각에는 길을 따라 굴러가는 마차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아쉽게도 리체의 존재감은 그렇게 생생하게 느끼기 어렵다.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그림자를 보듯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밖을 바라보고 있다. 틀림없이 무심한 눈빛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라우지의 뺨이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그녀를 생각하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바로 며칠 전부터. 정확히는 그날 밤부터다. 그녀의 옆에서 잠이 들었던 밤.
원래 그는 타인의 곁에서 숙면을 취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고 섹스를 할지언정, 그것도 밤 시간은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밤은 그의 역린이었다.
금지된 마법의 후유증이었다.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라우지는 자신이 강 위에 단단히 박혀 있는 바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은 멈출 수 없이 유유히 흐르지만 그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했다. 진리에 역행하는 현상은 존재를 짓누르는 거대한 허무가 되어 그를 야금야금 삼켜 댔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허무에 완전히 먹히지 않았던 것은 그라우지의 정신력이 여타의 범인들과 궤를 달리하는 덕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 스스로를 봉인시켰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를 향해 마법의 후유증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 지껄인다. 그라우지는 그런 치들에게 시니컬하게 굴었다.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자들이었으므로.
금지된 마법과 그 실패의 후유증으로 그라우지는 평생 달고 가야 할 후유증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거대한 허무로 인한 불면, 그로 인한 악몽이다. 그라우지는 그때부터 수십 년 가까이,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한 적이 없었다. 단잠을 자 본 때가 어느 적인지도 까마득하다.
그라우지에게 밤은 더 이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까만 시간이 아니었다. 남들은 꿈길을 걷는 그 시간에, 홀로 허무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예민한 시간일 뿐.
그랬는데 잠들어 버렸다. 다름 아닌 외차원의 존재인 리체 옆에서.
실수였다. 먼저 잠든 리체를 가만히 구경하다 보니,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잠이 와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그 평화로운 잠기운이 반가운 나머지 마음을 놓아 버렸다.
한편으로는 기대했다. 오늘만큼은 달콤하게 잠들 수 있지 않을까. 리체의 달콤한 향처럼. 그런 기대를 품고 몰려오는 잠을 거부하지 않았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악몽의 형태는 늘 일정하다. 또 단순했다. 그저 하얀 세상이 펼쳐진다. 아무것도 없이 하얀 세상에서 그라우지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하얀 세상은 어둠보다도 끔찍했다. 마치 영원히 저 혼자일 것처럼. 혼자 남을 미래를 예고하는 것처럼. 참지 못하고 사방으로 그가 아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난사하면 하얀 벽이 번쩍거리는 빛을 꾸역꾸역 먹어 삼킨다. 그럼 다시 원점이었다.
그라우지는 그 하얀 공간으로 끌려가는 게 무엇보다도 공포스러웠다.
한 번 머물게 되면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실제로도, 악몽을 꾸면 꽤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이러다 영원히 그곳에 갇혀 있게 될까. 두려움이 불면의 밤을 불러왔다.
어쩌자고 잠이 들었을까. 후회하며 절망에 잠기는 순간 온기가 다가왔다. 수백 번 넘게 겪었던 악몽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필사적으로 온기를 붙잡았다.
온기를 좇아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무심한 리체의 얼굴. 그때 마법에 걸렸을지도.
그라우지의 입가에 건조한 웃음이 걸렸다. 갑자기 왜 저래. 떨떠름하게 쳐다보는 건방진 눈빛에 안심이 되었다. 마음이 내려앉았다가 또 치솟고 다시 내려앉으며 울렁거렸다.
백 년 가까이 살아 딱딱한 돌처럼 메마른 감성에 물을 퍼붓는 충격이었다. 격렬한 감정의 파도에 그라우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그녀를 보며 자존심이 상했다가, 그래도 사랑스러웠다가, 또 웃음이 났다가, 눈이 마주치면 쑥스러워졌다가. 짧은 시간 그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스위치가 눌렸다. 그 밤, 그녀의 손목을 잡은 그 순간에.
“레베카.”
호명하자 부관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순간 이동이었다. 과연 마탑주의 부관다운 깔끔한 솜씨라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은 마법의 주체는 그라우지였다.
그녀의 이름에 마법을 걸어 호명하면 제 앞에 호출할 수 있는 초고난도의 마법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메시지 마법을 써 주면 안 되겠냐고 불평하려던 레베카는 그라우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퀸은 지금 어디까지 보수가 됐지?”
그의 입에선 리체가 일하는 가게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리체에게 어디서 일하냐고 재차 물었던 것과 달리, 그는 이미 그녀에 관해 웬만한 건 거의 알고 있었다. 다만 앞에서는 모른 척 의뭉을 떨었던 것뿐이다.
“반도 완성되지 못했어요. 건물을 올리는 것보다 뼈대 잡는 게 어렵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 추세라면 반년은 걸릴 것 같아요.”
“그건 너무 느리잖아.”
그라우지는 ‘알려 주면 네가 어쩔 건데’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리체를 떠올리며 얼굴을 구겼다. 이내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수리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와 장비를 지원해 줘. 마탑의 이름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 테지.”
“예? 하지만 어떻게…….”
난색을 표하는 레베카와 달리 그라우지는 싱글싱글 웃으며 떠들었다.
“사설 수리 업체를 표방하는 것도 좋겠어. 뭐든지 고치는 공방이라든가? 이름은 좋을 대로 불러. 어차피 천하의 마탑이 그런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놈은 아무도 없을 테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라고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킨 레베카는 답답하기만 했다.
자존심이 깎아지른 산처럼 뾰족하게 높은 마법사들이다. 그들 중에서도 정점에 선 마탑의 마법사를 한낱 술집 건물이나 고치는 일꾼으로 쓰겠다니.
자신도 자존심이 상해 화가 날 일인데 그들이 고분고분 따를 리가 있나. 아무리 그라우지라도 이건 아니었다. 능력에 대한 대우는 해 주셔야지. 못내 불만을 품은 레베카가 말꼬리를 흐렸다.
“반발이 심할 텐데요…….”
그게 실수였다. 싸늘해진 그라우지의 눈빛에 레베카는 심장이 얼어붙었다. 숨소리마저 차가워진 그라우지가 뇌까렸다.
“다시 말해 볼래?”
사람 하나 얼려 버릴 것 같은 시선이나 입가엔 여전한 미소가 감돈다. 그 모순적인 요소가 마탑의 마법사들에겐 지옥의 손짓과 다름없었다. 그와 숱하게 몸을 섞었지만 마탑의 마법사,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레베카 역시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잠시 후, 그라우지의 분위기가 다소 온화해졌다.
“알겠지, 레베카?”
순 제멋대로였지만 그녀는 그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는 데 마음 깊이 안도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제가 잘 전달할게요. 믿어 주세요.”
그 말은 혹시 반발하는 마법사가 있다 할지라도 사뿐히 지르밟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하겠다는 의미였다. 여린 외모와 달리 레베카의 일처리 방식은 다소 사납고 잔혹한 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라우지의 마음에 쏙 들 것이었다.
“서두르도록 해. 난 얼른 우리 리체 양을 보고 싶으니까.”
날개 달린 천사처럼 사르르 웃는 그의 뒤에서 길게 펼쳐지는 그림자를 본 레베카는 공손히 대꾸하면서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길 피했다.
* * *
리체가 마법사의 숲에 들어가 외부와 단절했던 그 시간, 황궁과 스트리고 백작가는 전운처럼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황궁, 그중에서도 황금빛으로 치장된 황태자의 궁에서 얀테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판을 지어야 할 상대. 그러나 저버리고 싶지는 않은 상대. 적지 않은 시간 함께하여 제 아버지보다, 물리쳐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야 할 없느니만 못한 형제들보다 훨씬 믿음직한 상대였다. 하지만 그만큼 힘이 강대하여, 적이 되면 누구보다 깊숙하게 심장을 찌를 수 있는 위험한 친우.
오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 얀테의 얼굴은 차분했다. 친애를 드러내는 의미로 마련한 장소는 황태자궁의 응접실이 아닌 그의 개인 밀실이다. 동방의 향초를 피운 밀실은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기가 흘렀다. 가벼운 옷을 입고 포도주를 기울이는 얀테의 모습은 전혀 무겁지 않았지만, 이는 다 계산된 모습이었다. 이윽고 나타날 사람에게 보여지기를 원하는 계산된 연출. 지략 또한 뛰어난 사람이니 그가 뭘 알려 주고 싶은지 금세 알 것이었다.
‘이곳까지 올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차라리 오지 않는다면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텐데. 생각에 골몰했던 얀테는 문득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걸음에도 성격이 묻어 나와서, 소리는 무겁고 건조했다.
고개를 든 얀테는 밀실 문의 휘장을 젖히고 들어오는 사내를 보았다. 색칠한 가면처럼 웃음이 짙어졌다.
거칠게 올라온 붉은색 머리카락 아래 번듯한 이마. 상처 하나 없는 얼굴은 그의 실력을 방증했다. 전장의 뙤약볕 아래서 태운 구릿빛 피부는 강철같이 단단해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아래 쭉 뻗은 탄탄하고 두꺼운 몸과 넓은 어깨는 마치 인간 병기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하게 만드는 사내.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아니더라도 그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내뿜었을 테지.
얀테의 잘생긴 눈매가 웃는 것처럼 접혔다.
카이로 스트리고, 백작위를 지닌 고위 귀족인 동시에 불패의 기사.
‘이곳까지 올 용기라니.’
단신으로 적군의 성벽을 오른 도블락 불세출의 장군을 두고 한 염려라기엔 그릇이 작은 생각이었다. 얀테는 스스로를 나무람과 동시에 카이로가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 행위를 해석했다.
이전에야 긴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술잔을 맞대었던, 전우애 넘치는 자리였다지만 그건 어느새 과거의 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대치하는 이 상황에서 그의 홈그라운드에 직접 찾아왔다는 건 두 가지 의미였다. 그만큼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대화의 여지가 있거나.
‘둘 다이거나.’
어찌 됐건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카이로 역시 자신이 고민한 만큼 고민했었다는 걸.
‘네 성정으로 보면 날 쳐 내려고 거의 마음을 먹었겠지.’
카이로 앞에 손수 술잔을 내어 주며 얀테는 내심 생각했다. 카이로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받았다.
그가 잔을 내밀자 얀테는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차갑게 보관한 포도주가 긴 병목을 따라 흘러나오자 사방에 향긋한 포도주 냄새가 짙어졌다. 그러나 그건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극우성 알파인 얀테나 우성 알파인 카이로는 서로의 페로몬을 탐색하고 본능적으로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낱 주향 따위는 방해조차 되지 못했다.
카이로는 잔에 따라진 포도주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입에 털어 넣었다. 얀테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내가 거기에 뭘 넣었을 줄 알고.”
“독이라도 탔습니까.”
카이로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얀테는 그에게 나른한 미소를 되돌렸다. 느슨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그럴지도. 너와 달리 난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으니까.”
“그건 그렇군요.”
쉽게 수긍한 카이로는 눈을 빛내는 얀테를 보며 무심히 말했다.
“하지만 이건 당신 방식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절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은 당신에게 너무 얕은 수가 아닙니까.”
“어째서 그렇지?”
“제가 살아 있다면 머리가 있는 뱀을 상대하게 되겠지만, 제가 죽는다면 머리 없이 날뛰는 독수리를 처리해야 할 테니까요.”
흥미로워했던 얀테는 머리를 한 대 맞은 얼굴이 되었다.
“처리하기는 후자가 좋겠지만 더 큰 피해를 입히는 것도 후자일 테죠. 게다가 독수리는 날개까지 달려 있잖습니까. 어디까지 그 광기를 퍼뜨릴 수 있을지, 그건 당신도 예상하지 못할 변수겠군요.”
굳은 얼굴의 얀테는 카이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종 담담한 카이로를 보다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결정을 내린 데 따른 후련함과 뒤통수가 저릿한 경계심이 동반된 웃음이었다. 이곳으로 그를 초청하기 전에, 그의 생각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뭘 하든, 무엇을 내주든 리체를 데려올 것이다.
그 생각이 바뀌었던 건 수하의 보고를 받은 후였다.
‘말씀하신 리체 씨는 카이로 스트리고의 애인처럼 보입니다.’
‘그래. 예상한 바야. 자, 어떻게 하면 나의 절친한 친우에게서 리체를 되찾아올 수 있을까?’
‘그리고…….’
‘그리고?’
‘레이몬드 스트리고, 라스카 메디치나와도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탑과도 연이 있는 것 같으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더 이상의 조사는 불가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
줄줄이 나오는 이름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지.
얀테는 카이로의 눈 깊은 곳에 번쩍이는 청광을 발견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리체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여자였다. 베타였던 주제에, 오메가란 정체성에 더없이 충실했다.
‘카이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그럴 것 같지만, 혹시 몰라 슬쩍 운을 뗐다.
“하진은 어디다 둔 거야?”
“하진?”
“아, 너는 리체라고 알고 있겠군.”
그 순간 흐르는 기이한 푸른 빛. 붉은 눈동자의 카이로에겐 있을 수 없는 색이었으나 실지로 파랗게 보였다. 그야말로 서슬 퍼런 눈빛이다.
그 반응을 유도했던 얀테도 순간적으로 경계심이 들 만큼 소름이 끼치는 기이한 청광이 가라앉고, 카이로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모르는 척할 필요 없습니다.”
목소리는 무덤덤하나 그에 속아 넘어갈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얀테는 그의 차분한 말투와 높낮이 평이한 목소리가 아니라 눈을 주목했다. 숨기기 어려운 눈 속의 감정. 넘실거리는 푸른 빛깔.
저건 증오다.
카이로의 눈에는 그를 향한 증오가 흐르고 있었다.
용납하기 어려운 충신의 변화였지만 놀랍게도, 또는 다행스럽게도 얀테는 그 반응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았으므로.
그날 밤의 리체는 누가 봐도 겁탈당한 모습이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내라면 반감을 갖지 않고는 못 견뎠을 터.
카이로가 그를 바라보았다. 살롱에서 관리받는 뭇 귀족 사내들처럼 매끄러운 피부는 아니었지만 강인해 보이는 살갗에 군살 하나 없이 근육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육체다.
카이로의 시선에 얀테는 소슬한 바람을 느꼈다. 말이 많지 않은 카이로는 눈빛이 무거워서, 그와 얘기해 본 이들은 가만히 시선을 주고받고 있으려면 심장이 바짝 죄어드는 것 같다고 토로하곤 했다.
그 얘기를 귀담아 들은 적 없건만. 카이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머릿속을 추측하고 있어서인가. 얀테는 힘이 들어가는 손을 슬며시 말아 쥐고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카이로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 얀테의 미소를 보고 마음을 정한 듯 입술 주름이 팽팽해졌다.
양옆에서 끊임없이 잡아당기던 종이가 찢어지듯 공기가 요동친다. 동시에 얀테가 말을 던졌다.
“리체는 어떻게 만나게 됐지?”
그 말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낚시하는 심정으로 던져 본 얀테는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궁금하기도 했고, 이 정도로는 카이로가 동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격장지계를 상대했을 카이로라 고작 이따위 말로 평정을 잃을 리가.
과연 카이로는 여전히 동요 없이 덤덤했다. 그러나 그가 얀테의 질문을 못마땅하게 여겼음은 분명했다. 살짝 좁아진 미간과 가느스름해진 눈매를 살피던 얀테는 이어진 굵은 목소리에 눈동자를 멈추었다.
“전하의 부름에 응한 건 허락을 받기 위함입니다.”
“…….”
“저희 같은 이들의 성혼은 황실의 재가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얀테의 눈썹이 꿈틀했다. 후욱. 향초의 불빛이 흔들렸다. 사방이 가로막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밀실에서 기이한 일이었다. 얀테의 바다보다 푸른 눈과 카이로의 피처럼 붉은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위기를 직감하고 흘러나온 본능의 페로몬이 밀실에서 날뛰며 뒤엉켰다.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밀리는 듯 카이로의 페로몬이 움찔했다. 그러나 페로몬만으로 무릎 꿇리기에 그는 너무나도 뛰어난 장수였다.
카이로의 페로몬은 얀테의 페로몬을 유연하게 피했다. 송곳처럼 날카로워진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과 얀테의 찌를 듯한 시선을 앞에 두고, 카이로는 태연하고도 덤덤히 고했다.
“성혼하고자 합니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얀테는 붉디붉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포도주를 잔에 넘칠 듯 따랐다.
“……누구와?”
“누구겠습니까?”
“…….”
“리체를 아내로 맞아들일 겁니다.”
망설임 없이 흘러나온 이름. 얀테는 말없이 카이로를 바라보았다. 밀실에 들어선 이후, 표정 변화가 미약했던 카이로가 웃고 있었다.
방해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정면 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