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건강하고 문제없고 열성적인 임상 실험자까지 구했겠다.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카이로와 기 싸움을 하는 건지, 암암리에 물밑 공작을 벌이고 있는 건지, 조용한 얀테가 퍽 신경 쓰였으므로 리체는 서둘러 마법의 완성을 서둘렀다.
우아하고 얌전한 백조를 수면 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것처럼 얀테도 그렇다고, 리체의 촉이 연신 경고등을 울렸다.
리체는 당분간 마탑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레이몬드에겐 필요할 때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겼고, 카이로에겐 신변 보호를 위해 마탑에 있겠다고 둘러댔다. 팥으로 메주를 만들어 달라 요구해도 들어줄 듯한 상태인 레이몬드야 신경 쓸 것 없었지만 카이로가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까칠한 피부라든가 거뭇한 눈가를 보면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얀테와 기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마탑은 아무리 위대한 권력자라도 함부로 손 뻗을 수 없는 치외 법권이지. 좋은 선택이다, 리체. 마탑을 생각 못 했어. 조금만 기다려, 데리러 갈 테니까.”
카이로는 피곤이 묻어나는 낯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리체의 보드라운 뺨에 키스했다.
“마탑주에겐 내가 연락을 넣어 놓지.”
“굳이 카이로님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마탑과는 메디치나 치유관 덕분에 친분이 있으니까 알아서 할게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래.”
커이로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상냥하게 속삭였다. 더는 필요 없다고 할 수 없었던 리체는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그라우지에게 틈을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그라우지가 카이로와 그녀의 관계를 눈치채는 건 싫었지만, 카이로를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녀는 그가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다만 벌써부터 그라우지가 웃음 짓는 게 눈에 훤하여 마음이 찝찝했다.
리체는 카이로의 배웅을 받으며 마탑으로 떠났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났다.
* * *
도블락의 검술 명가이자 작금에 있어 대체할 수 없는 공훈을 세운 스트리고가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용인들은 숨소리조차 자제했고, 웃고 떠드는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중 특히 두 곳은 적막하기 짝이 없어 무덤 같았다. 하나는 백작이자 스트리고가의 주인인 장남 카이로 스트리고의 방이고 다른 하나는 차남인 레이몬드 스트리고의 방이다.
스윽, 슥. 기름 먹인 천이 은빛 칼날 위에서 미끄러진다. 붉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칼날에 반사되었다. 카이로는 십 년 넘게 쥐어 이제는 한 팔처럼 익숙한 검을 손질했다. 출정을 앞둘 때마다 그가 치르는 일종의 의식과 같은 행위다. 지금은 출정 상황은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다를 것도 없었다.
카이로는 얀테를 생각했다.
백작위를 승계받기 전, 남은 평생 같은 길을 걸어갈 정치적 동반자로 그를 선택했었다. 친우에서 군신 관계로 바뀐 관계에 얀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기뻐하는 그에게 카이로는 충성을 맹세했다.
귀족가에서 후계자로 자라온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철저히 기사로 살아온 카이로는 얀테의 무한한 잠재력을 알았다. 황자들 중에도 뛰어난 사람이 있었지만 얀테에 비하자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였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태자가 정해져 있지 않다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황자들은 이미 저들만의 지지 기반이 확고한 상태였다.
선대 스트리고 백작은 1황자 파에 가까웠지만 카이로가 선택한 사람은 막내 황자였다. 황위 다툼에 뛰어든 가문은 좋든 싫든 지지하는 황자를 정상으로 올려붙여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순식간에 무너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테니. 지금껏 많은 가문들이 그렇게 몰락한 것처럼.
다행히 운이 따라 도박은 성공했고, 얀테는 황태자가 되었으며 스트리고 백작가는 찬란한 미래를 약속받았다. 남은 문제가 아직 있다손 치더라도 어려울 건 없었다. 그가 주인으로 있는 동안 스트리고가는 융성할 것이다. 카이로의 충성에 얀테는 신의로 보답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카이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날카로운 날에 베인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손수건으로 훔치자 새빨간 피가 배어들었다. 상황이 달라졌다. 얀테는 더는 카이로를 부르지 않았다. 마치 관찰이라도 하듯 조용했다. 평소와 같았다면 술 한잔하자며 일주일에 두어 번은 전갈을 보냈을 인사가 일주일은커녕 이주일이 넘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정무 회의에서의 얀테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카이로의 날카로운 감각은 따끔거리며 이질감을 호소했다. 얀테는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전처럼 언제든지 칼 하나를 쥐어 주어도 아깝지 않을 오른팔을 보는 시선이 아니라, 탐스러운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을 경계하는 시선으로.
카이로는 긴장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도 반으로 똑 자를 수 있는 날카로운 칼처럼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전우로 지난한 전장을 헤쳐 왔던 시간이 있다. 얀테가 그를 아는 것처럼 그 역시 얀테를 알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적어도 혼자 허무하게 나가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말로 하면 전력을 다해도, 그를 거꾸러뜨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문득 카이로는 제가 하는 생각에 위화감을 느꼈다. 군주로 모셨던 사람을 적으로 규명하는 사고의 흐름에 목덜미가 서늘했다. 선대 백작이 저승에서 보고 있다면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멍청한 짓을 한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을 터였다.
카이로는 묵묵히 날을 닦던 천을 내려놓고 칼을 가볍게 휘둘렀다.
휘익!
날카로운 소리가 적막에 잠긴 공기를 찢어발겼다. 마음에 섬뜩한 검명이 새겨진다.
내 여자를 건드려서 화가 난다는,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카이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날 보았던 그녀의 파리한 안색을 기억했다.
얀테가 그녀를 겁탈했다.
그 문장에 카이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머릿속이 미친 듯이 뜨거워졌다.
겁탈했다. 겁탈했다. 그 연약한 사람을.
되뇌고 싶지 않은데 머릿속에 문장이 뱅글뱅글 돌았다.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기 전에는.
천천히 눈을 뜬 그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꽃이 이글거렸다.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감출 수 없는 분노의 잔여물이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넘실거리던 포악한 열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카이로는 칼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까칠한 얼굴에 눈은 부리부리해서 아주 예민해 보였다. 꼭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면 죽을 처지가 된 적대국 성주처럼 예민해진 얼굴이다.
이 못난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카이로는 슬쩍 웃어 보였다. 올라갔던 입꼬리는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축 처졌다.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카이로는 검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훈련장에 가야겠다. 아무 생각 없이 땀을 흘려야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몸이 부드러워질 것이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카이로는 생각했다.
‘리체가 보고 싶군.’
얀테는 분명 강력하고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몸과 정신이 예민해진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리체를 보지 못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황실의 시야는 넓고도 또렷하니, 자신이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운다 할지라도 리체의 신변에 대해서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시된 마탑이라는 도피처는 꽤 훌륭한 선택지였다.
마탑을 방문하려면 마탑주의 승인을 받은 출입증이 필요했다. 문득 며칠 전 출입증 발급을 거절당한 일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삼일 전이었다. 갑자기 리체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 마탑의 방문을 허가해 달라는 요지의 편지를 마탑에 보낸 적이 있었다. 절차가 까다롭기는 해도 명망 있는 고위 귀족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마탑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명문 귀족 가문과의 우호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득이 막대했으므로. 게다가 스트리고 백작가는 마탑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도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바깥 동태가 수상하여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고 이유는 밝혔지만……. 카이로는 조금 찝찝했다. 왠지 핑계를 대는 것 같았다.
얀테가 손을 썼나 의심이 들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마탑을 지배하는 마탑주는 황태자가 지위로 강권한다고 들어먹을 인사가 아니었다.
아쉽긴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황태자 측의 사람들도 마탑에 출입하지 못할 테니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았다.
‘얀테가 곧 나를 부르겠지.’
그 역시 이런 불편한 대치 관계를 달가워하진 않을 테니까.
검을 들지 않아도 창칼이 휘몰아치는 전장과 다름없는 전쟁터가 될 터.
방을 나서는 카이로의 얼굴은 어느새 병사들을 호령하는 대장군의 살기를 뿜고 있었다.
* * *
한편, 예민함에 피부까지 따끔거리는 건 카이로만이 아니었다. 스트리고가 차남, 레이몬드 역시 무척 예민해진 상태로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리체로부터 당분간 마탑에 있겠다는 짤막하고 성의 없는 서신을 받은 뒤로 그의 기분은 내내 저기압이었다.
마탑에 있다는 건, 그녀가 나올 때까지 볼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루가 지나도 눈에서 가시가 돋을 만큼 보고 싶은데 벌써 일주일이었다. 초조함과 불안감이 썩은 고기에 꼬여드는 구더기처럼 득시글거렸다.
“아아, 보고 싶어. 제기랄.”
거칠게 욕설을 지껄인 레이몬드는 침대 시트에 뺨을 비벼 댔다. 정확히는 침대에 내려놓은 리체의 겉옷이었다. 이거라도 가져온 게 다행이었다. 하도 만져 이제는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레이몬드는 외투가 그녀라도 되는 듯 얼굴을 파묻고 숨을 헐떡였다.
레이몬드는 꿈틀거리며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프리컴을 잔뜩 흘린 탓에 속옷뿐 아니라 바지 앞섶까지 젖어 있었다. 답답하게 구겨진 자지가 작은 방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레이몬드는 성급히 앞섶을 풀어 젖히다 제대로 되지 않자 이맛살을 찌푸리고 욕설을 지껄였다.
땀이 배어 나와 끈적한 손으로 간신히 바지춤을 푸는 데 성공했다. 용트림하듯 바지 밖으로 솟구친 자지를 붙잡고 빠르게 문질렀다. 딱딱한 자지가 손바닥에 마찰되어 붉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 발갛게 달아올라 꺼떡거리지만 아무리 문지르고 비벼 봐도 시원하게 정액이 배출되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짜증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시트에 아랫도리를 문질렀다. 프리컴이 줄줄 흘렀다. 그럼에도 사정은 요원했다. 그는 퍽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지를 붙잡았다. 사정감은 몰려오는데 사정이 되지 않으니 은근하게 차오른 욕구 불만으로 신경질이 나고 초조했다.
결국 레이몬드는 자지에서 손을 뗐다. 더는 문질러 봤자 의미가 없다.
“마탑에 가야겠어.”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안정해서 쉭쉭거리는 소리였다.
각인이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각인한 오메가에게 외면받는 알파의 말로는 비참하고 끔찍할 것이다.
레이몬드는 때때로 두려움에 질렸다. 리체에게서 사랑받지 못할까 봐. 그녀에게 자신이 실험 대상자로 쓸모가 있다는 건 알지만, 언제 상황이 바뀌어 버려질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끔찍한 기분에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지는 다시 답답한 속옷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며 꼴사납게 굴 바에는 이쪽에서 쳐들어가는 게 낫다.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의 귀퉁이가 반듯하게 펴졌다. 아직 구깃구깃 주름이 가기는 했어도.
‘리체는 날 버리지 않을 거야. 내가 쓸모 있으니까.’
긍정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뭐든지 잘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대로 마탑에 가서 리체를 만나고, 그녀는 여기까지 찾아왔냐며 사랑스러운 충견을 보는 눈으로 저를 봐 주는 거다…….
레이몬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싹해졌다. 상상만으로도 쌀 것 같았다. 아랫도리가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빌어먹을 하반신은 정액 대신 쿠퍼액만 질질 흘려 댔다. 짧게 혀를 찬 레이몬드는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어던졌다. 기껏 가두어 놨던 자지가 신난다고 뛰쳐나온다.
탁, 탁. 사납고 거친 손짓이 옷장을 마구잡이로 뒤져 속옷과 바지를 꺼냈다. 대충 다리를 넣어 옷을 꿰입은 레이몬드는 꼿꼿한 자지를 말썽꾸러기 다루듯 속옷 안에 집어넣으며 연신 투덜거렸다.
“씨발, 더럽게 불편하네.”
그대로 나가려다 멈칫하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참 볼품없는 꼴이다. 레이몬드의 표정이 일변했다. 아무리 그녀가 보고 싶다 해도 이 꼴로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항상 멋있게 하고 있어도 모자를 판에!
정신이 번뜩 든 레이몬드는 분주해졌다. 찬물로 몸을 씻고 사용인들이 잘 빨아 햇볕에 말린 보송보송한 옷을 입고 베레모를 쓰고 향수를 칙칙 뿌렸다.
거울 속에 비친 그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어디까지나 레이몬드의 시선에서였다. 어디 사교 파티에 떴다면 뭇 여자들이 야릇한 시선을 보내 눈독을 들였을 꼴이었지만 레이몬드의 표정은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괜히 빳빳하게 다림질된 옷소매만 만지작거리고 베레모 밖으로 튀어나온 붉은색 곱슬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한참을 거울 앞에서 서성거린 뒤에야 방문을 열었다.
일주일 동안 방 안에 처박혀 끙끙거리던 차남이 멀끔하게 차려입고 나오자 사용인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명문가의 일꾼들답게 금세 표정을 수습했다.
그런 사용인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레이몬드는 1층으로 내려갔다. 각인한 오메가를 무려 일주일이나 못 본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리체로 꽉 차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는 듯이 걷던 레이몬드의 속도가 급격하게 느려졌다. 그의 큰 눈동자는 정면에 고정되었다.
멀리서 봐도 큰 키, 다부진 체격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삭풍과 같은, 바로 막 훈련을 끝내고 돌아오던 카이로였다.
존경하고 동경하지만 증오스러운 형. 카이로에 대한 레이몬드의 마음이었다. 카이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 누구보다 레이몬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어린 나이에 가문을 훌륭히 이끌었을 뿐더러, 적수를 찾으려면 한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기사다. 그 역시 수재라고 이름 붙여도 충분할 기사의 재능을 타고 났기에, 형인 카이로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그의 재능과 인품을 동경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야망 있는 사내로서,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된 상대에 대한 증오심은 동경과 더불어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그래서 그를 볼 때마다 평정을 잃고 사춘기 소년처럼 굴고는 했다. 떠올릴 때마다 창피스러운 기억이다.
그러나 지금, 레이몬드는 약간의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낄 뿐이었다.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 리체 때문에 다른 감정을 불태울 여력이 없었던 탓이다.
형제 관계에는 뜻밖의 순기능이었다.
카이로가 레이몬드의 앞으로 다가왔다.
“레이, 어디 가는 거니?”
카이로의 부드러운 말씨에 레이몬드는 속이 거북해졌다. 카이로가 제가 그를 싫어하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예전, 카이로와 데이트하던 이델리와 키스했을 때 역시 카이로는 이델리에게 분노했을지언정 레이몬드에겐 ‘어울리지 마라’는 말 한 마디뿐이었다. 그때는 카이로가 이델리를 뺏어 갔다고 생각하여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반항적으로 굴었지만, 지금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해 보면 카이로의 입장에선 오히려 자신에게 뒤통수를 맞은 거였을 거다.
카이로는 이델리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알고 있었다. 이델리가 카이로에게 눈독을 들이고, 데이트하고, 좋은 감정을 키워 가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키스했다. 잘못의 정도로 따지자면 자신이 카이로보다 우세할 것이다.
검술 대련을 하다 재능의 격차에 절망하여 그 앞에서 검을 부러뜨렸을 때도 카이로는 건방지다 하지 않고 일취월장한 실력을 칭찬해 주었다. 그조차도 가증스럽게 보였던 예전은, 그야말로 질투가 눈가리개처럼 눈꺼풀을 덮고 있었던 것이리라.
리체를 향해 온 마음이 쏠려 있는 지금 모든 게 한층 객관적으로 보였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차분해졌다.
“응. 누구 좀 보러.”
순순히 대꾸하는 그가 의외인 듯 카이로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레이몬드는 다소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카이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자체로 흉기일 정도로 단단하고 다부진 몸은 막 훈련을 마쳐 살짝 젖어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과 곧은 시선, 꼿꼿한 척추나 자세 같은 것들이 그를 평생 위에서 타인을 내려다보는 사람 특유의 위압감을 부여했다.
어릴 때는 이게 얼마나 싫었는지 모른다. 그러기 싫어도 그가 지긋하게 쳐다볼 때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경멸스러워지면, 그만큼 카이로가 증오스러웠다. 잔뜩 꼬였던 마음이었다.
지금도 위압감은 여전하지만 레이몬드는 평소와는 다른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어딘지 피곤해 보였다.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밖에서도 그렇고 안에서 보기에도 승승장구하는 그가 고민이 있을 리가…….
레이몬드의 머릿속에 불빛이 번뜩였다.
여자 문제라도 생겼나? 황궁에서 일하는 친우로부터 카이로가 웬 여자와 다정하게 데이트를 하더라던 소식을 전해 들었던 일을 떠올렸다. 여자와 데이트하는 게 뭐 대수라고 호들갑을 떠냐며 면박을 주었지만.
지금 그때의 대화가 떠오른 건 우연이었다. 레이몬드는 내심 고개를 저어 제 생각을 부정했다.
다른 문제가 있겠지. 카이로는 고작 여자 때문에 고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자신이 그를 질투하면서도 거대한 절벽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구나.”
정신을 차린 레이몬드가 카이로를 보았다. 그는 약간 짓궂은 표정이었다.
“가문 사람들이 널 많이 걱정한다, 레이.”
“…….”
“내가 더 신경을 써야 하는데 나도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말이야. 근데 이제 보니 괜한 걱정이었구나.”
레이몬드는 속이 거북해졌다. 어른이 된 어린애를 보는 듯한 카이로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그렇지 뭐.”
레이몬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형은, 왜 정신이 없는 건데? 요 근래 하루 한 번 황실 들르는 것 말고는 잠잠한 것 같더니만.”
“…….”
“집에서 쉬는 거 아니었어?”
“지금이야 조용하지만…….”
나직하게 말한 카이로는 뒷말을 잇지 않고 미소만 띠었다.
뭐야, 역시 여자 때문이 아닌가. 그럼 가문과 관련된 문제인 건가? 레이몬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리체로 꽉 찼던 머릿속이지만 가문의 일이라면 그와 관련이 없지도 않았다. 호기심이 솟았다. 그래서 제법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가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얼굴이 안 좋은데.”
“그런 거 아니야. 요즘 며칠 잠을 못 자서 그래.”
“형은 신경 쓸 게 많을 테니까…….”
레이몬드는 잠깐 머뭇거리다 말했다.
“형을 신경 써 줄 사람도 찾아.”
“…….”
“가문도 안정됐겠다, 형도 곧 적당한 여자를 찾아 결혼해야지.”
걱정이 어린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카이로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할 수 있으면.”
그 대답에 레이몬드의 귀가 번쩍 트였다. 아직도 백작저엔 심심하면 마담뚜가 문을 두드려 댔다. 그러나 늘 결혼에 관심 없는 것처럼 굴었던 카이로가 긍정적인 대꾸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 있는 게 확실했다.
카이로가 만나는 여자라.
퍽 놀라웠다. 물론 이제껏 그가 여자를 만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웬만큼 만나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만나는 상대는 한 명도 없었다. 이델리 그레이스 때만 보아도 그렇다. 아직 어린 나이여서 페로몬이 미숙했다지만 매력적인 우성 오메가였다. 그것도 극우성에 한 발 걸치고 있는 그녀를, 카이로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밀어냈다.
형제 모두를 농락했다는 이유로. 일견 이해가 어려웠다. 아주 매력적인 오메가가 끼어 있을 경우, 대개 알파들은 아무리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라 할지라도 상대 알파의 목을 물어뜯는 게 보통이었다. 그게 혈연이라도 말이다.
그 생각을 하자 레이몬드는 기분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자신을 향한 카이로의 부드러운 눈빛을 피해 시선을 대각선으로 떨어뜨렸다.
“……그렇군. 조만간, 나도 만나는 여자를 소개시켜 줄게.”
그를 마음 깊이 가족이라고 여긴 적은 없으나…….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카이로는 눈을 크게 뜨더니, 시원하게 웃었다.
“그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 그냥 가볍게 만나는 사람은 아닌 것 같구나. 일이 잘 풀리면 나도 소개시켜 주마. 잘하면 비슷한 시기에 겹경사가 생길지도 모르겠는걸.”
리체와 결혼이라,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싫어하는 형이지만 레이몬드는 마주 미소를 보여 주었다.
* * *
결과적으로 레이몬드는 리체를 만나지 못했다. 마법사의 숲에서부터 출입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한편 카이로도, 레이몬드도 마탑에 출입 거부당했다는 걸 모르는 리체는 오늘도 그라우지의 지긋지긋한 수작질을 상대하고 있었다.
“리체 양은 참, 예쁘네요.”
“…….”
“리체 양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사는 게 행복하겠어요.”
“…….”
“리체 양은 어떤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싶어요?”
결국 참다못한 리체가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 아파요?”
결혼을 못하면 단체로 죽는 병에라도 걸렸나.
아주 상쾌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라우지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리체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토하고 싶어서였다.
“나 같은 남자는 어때요?”
“별론데.”
그라우지는 듣지 못한 척 제 할 말만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느낌 처음이거든.”
어디선가 한 번 들어봄직한 전형적인 대사였다.
‘개수작.’
리체의 표정이 좀 더 썩어 들어갔다. 더 나간다면 으깨진 사과처럼 변할 기세였지만 그라우지는 부끄러워하는 숙녀를 보듯 달콤하게 웃었다. 리체는 아니꼬운 와중에도 감탄했다.
“리체 양만 허락한다면 내 모든 논문과 마법에는 당신의 이름이 새겨질 거예요.”
“필요 없어요.”
“딱딱해라…….”
그라우지가 나른하게 웃으며 손가락에 그녀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걸어 쓰다듬었다. 리체는 귀찮은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지만 손은 거미처럼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살날이 얼마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데 결혼은 무슨 결혼. 양심이 있으면 어떤 여자에게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작게 중얼거린 말에 그라우지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누군가 봤더라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겠구나 짐작하겠으나 리체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다 장난질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라우지의 마탑에 머문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에 대해 웬만큼은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진지할 때 장난스러운 얼굴을, 즐거울 때 진지한 얼굴을, 심기가 불편할 때 부드러운 얼굴을 하는 그라우지를 왕왕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얼굴만 보고 그의 속내를 추측하는 건 멍청하고 의미 없는 짓이다.
“이 사람의 진심을 싹 무시하다니. 야멸차네요.”
그라우지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리체는 반쯤 시선을 돌려 무시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능구렁이 같은 작자가 왜 갑자기 이런 시답잖은 장난질을 치는 걸까.’
아무리 기억을 뒤집어 까도 짐작되는 게 없었다. 고개를 갸웃한 리체가 그를 힐끗했다. 시선을 인식한 그라우지가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지적이고 부드러워서 뭘 모르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따라서 웃을 듯한 미소였다. 리체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라우지가 아쉬운 척을 하는 게 보여 코웃음을 쳤다.
‘아, 혹시 그것 때문인가?’
그녀는 일주일 전, 마법사의 숲에 발을 들여놓았던 때로 기억을 되짚었다.
* * *
그라우지는 처음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문자, 아마도 마법 언어의 일종으로 적힌 책을 한 손에 펴 놓고 향 짙은 홍차를 마시는 그는 교양 있는 지식인 같은 모습이었다. 뜬금없이 숲 한가운데서 그러고 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마법사의 숲에서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그 희한한 꼴을 목격한 리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그라우지가 고개를 들었다.
“아, 리체 양?”
그녀는 눈을 굴렸다. 자연스러운 말투. 놀란 듯 깜박이는 눈. 마치 정말 우연히 그녀를 발견하고 놀란 것처럼.
“여긴 무슨 일이에요?”
리체는 저도 모르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라우지는 뒤로 한데 묶은 은빛 머리카락 꽁지를 흔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까지 저 연기를 계속할 건지. 한숨을 쉰 리체는 그에게 걸어가 맞은편에 앉았다.
“모른 척하지 말아요. 카이로에게 연락받았을 거 아니에요.”
심드렁하게 말한 리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으로 정돈한 듯 귀족가의 마당처럼 바닥이 깔끔했다. 게다가 테이블은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여 튼튼하게 마감한 최상품 가구였다. 어디 하나 작위적이지 않은 구석이 없다.
능구렁이 같은 그라우지가 작정하고 속여 넘기려 했다면 이렇게 눈에 훤히 보이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장난이었다. 그는 재미만 있다면 이런 티 세트가 아니라 황궁 다실이라도 옮겨 올 사람이었다.
나이에 맞게 곱게 늙는 것이 미덕이라는 걸 리체는 그를 보며 깨달았다.
“차 한 잔 할래요?”
리체는 그라우지가 고상하게 웃으며 건네는 찻잔을 받아들였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 한가운데서 마시는 차는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일주일에서 이주일 남짓 마탑에 머물 수 있게 됐어요. 이 기간 동안 최대한 마법을 완성에 가깝게 만들어야 해요.”
차분하게 말을 꺼냈지만 그라우지는 홍차만 홀짝였다. 리체가 가만히 쳐다보자 내리깔았던 눈을 슬쩍 들었다. 마주친 눈빛에서 순간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람 좋은 미소에 가려졌다.
“그게 리체 양이 원하는 거라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속이 온통 시커먼 보기만 좋은 빵을 보는 기분에 리체는 마음이 찝찝해졌다. 하지만 마법사의 서약까지 했으니, 그가 자신을 배신할 리는 없었다. 그거면 되었다. 그녀는 마법만 무사히 완성된다면 다른 건 무시할 수 있었다.
“마법을 시범 운영할 대상도 구했어요.”
“원숭이라도 구했나요?”
“아니, 사람이에요.”
그러우지의 시선이 리체를 똑바로 응시했다. 도블락 제국은 황궁과 몇몇 허락받은 가문을 제외하고는 사적인 노비를 소유할 수 없었다. 노예를 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추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리체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제안했어요. 위험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했고. 그러겠다고 하더군요.”
“대가는요?”
“당신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럴 수는 없죠.”
다소 강경한 말투에 리체는 슬쩍 인상을 썼다. 이 부분까지 얘기해야 할까? 하지만 임상 실험은 발명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중요한 단계였다. 문제가 생기면 이전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될 수 있으니 그라우지가 예민하게 구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역시 그라우지는 진지한 목소리로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연구는 극비에 진행해야 돼요, 리체 양. 차원을 이동한다는 사실에 관심 갖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신체 건강한 남성이에요. 이름은 레이몬드 스트리고. 다른 데 발설하거나 배신할 일은 없어요.”
뜻밖의 이름에 그라우지는 잠깐 침묵했다. 비렁뱅이가 아니었더라도 수완이 좋다며 놀랐을 텐데, 레이몬드 스트리고라니.
리체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서 조금 민망해졌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꼴이었다. 다행히 그라우지는 레이몬드와의 관계를 짓궂게 캐는 대신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건, 어떻게 자신하죠?”
“레이몬드가 내게 각인했어요.”
“…….”
“그래서 대가를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는 차원 이동에 성공해서 나를 따라오고 싶은 마음이라.”
그럴 마음은 조금도 없는데 어쩐지 잘난 척이라도 하는 듯하여 리체는 손등에 닭살이 돋았다. 그라우지가 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놀리기는커녕 아무 말도 없었다.
“그라우지?”
리체는 조용한 분위기에 좌측으로 틀었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겨 왔다. 그는 가볍게 주먹을 쥐고 테이블을 툭툭 내리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시선은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 위에 고정되었다. 돌연 그가 피식 웃었다.
“카이로에 이어 레이몬드까지?”
리체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분위기가 수상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든 그라우지는 표정을 바꾸고 활짝 웃었다.
“리체 양 대단하네요. 그 유명한 스트리고 형제를 양손에 쥐고 있다니.”
“농담하는 건가요?”
“감탄하는 겁니다. 좋아요. 어떻게 된 건지 알겠네요. 골치 아픈 문제까지 해결됐으니, 일이 훨씬 빨라지겠어요.”
씨익 입꼬리를 올린 그라우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체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체가 떨떠름해하며 그 손을 잡자 빠르게 품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라우지의 품에 안긴 리체는 장난질 그만하라고 한 소리를 하려다가, 발이 둥실 떠오르자 입을 다물었다.
그라우지가 그녀를 안지 않은 손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고즈넉한 숲의 정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티 테이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증발했다.
그라우지가 리체를 바라보았다.
“마탑에 다시 온 걸 환영해요.”
멀끔하고 지적인 외모에 어울리는 품위 있는 인사였다. 엉덩이를 주물러 대는 손만 아니라면 말이다. 리체가 아니라 엉덩이에 인사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인상을 쓰고 허공에 뜬 다리를 휘둘러 그의 정강이를 찼다.
* * *
그라우지는 발정 난 개와 다를 게 없다.
사람의 가면을 쓴 짐승. 안경까지 걸쳐서 천생 부드러운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라우지는 그 본질은 웬만큼 굴러먹은 양아치보다 시커멓다는 것을, 리체는 마탑에 지내게 된 지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리체는 그라우지와 아침을 같이 했다. 모든 욕구가 마법에 쏠려 있는 마법사들은 미식가가 드물었다. 정확히는 맛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건 그라우지도 마찬가지인지, 아침 메뉴는 우유와 토스트, 시리얼로 퍽 단출했다.
아침에 배달받은 신선한 우유에 시리얼을 말다 말고, 그라우지가 손을 멈추었다. 멍한 얼굴로 시리얼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토스트 귀퉁이를 뜯어먹던 리체도 씹던 것을 멈추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에서도 영감을 얻는 과학자들처럼, 뭐 좋은 아이디어라도 생각난 걸까.
‘차원 이동 마법의 완성과 관련 있는 생각이었으면 좋겠네.’
그라우지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기에 리체는 씹던 빵을 꿀꺽 삼켰다. 덩달아 진지해진 그녀에게 심각한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우유는 달콤한 맛이 부족하네요.”
“……?”
한탄하는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리체의 우유가 먹고 싶어요. 이런 거랑 다르게 달콤하고 고소할 텐데.”
리체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라우지는 음식 투정을 하는 어린애처럼 인상을 쓴 채 투덜거렸다.
“아, 입맛이 없네요. 리체 양의 우유라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빨아먹을 수 있는데.”
그러곤 중대한 발견이라도 했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처녀의 몸으로도 모유를 만들 수 있는 마법을 만들어 볼까요?”
퍽!
리체는 먹던 빵을 그 징그러운 낯짝에 던져 버렸다.
그라우지는 변태다. 짐승이다. 상종하지 못할 색마다.
리체는 매일 시시때때로 새롭게 깨닫게 되는 사실이 안타까워졌다. 정신세계가 의심스러워지는 그라우지가 아니라 그를 파트너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말이다.
“쪽쪽이가 필요해요. 달콤하고 말랑말랑하고, 분홍색 젖꼭지가 달려 있는 거.”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저런 놈이 존경받는 마법의 종주라니.’
리체의 시선에 멸시가 섞였다.
마법사의 숲과 그 숲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마탑. 경외받는 마탑이라는 집단 자체가 하찮아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갖은 노력을 통해 찬사를 받으며 명예롭게 마탑에 올랐던 마법사들이 들으면 억울해할 일이었다.
그라우지는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별로 어렵지도 않다는 얼굴로 보고 그려도 어려운 복잡한 마법진을 슥슥 그리는 신기를 보이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해 댔다.
능력을 보고 감탄하는 순간이 오래 갈 수가 없었다.
바로 이렇게.
“리체 양, 쪽쪽이 좋아해요?”
그라우지가 얇은 입술을 검지로 쓱 훑으며 야릇하게 웃자 막 빗자루를 타고 곁을 지나가던 마법사가 못 볼 걸 본 얼굴로 그라우지를 바라보았다. 불행히 그 와중에도 빗자루는 쭉 전진했는데,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나무에 빗자루 막대가 부딪쳤다. 경악한 표정으로 그라우지를 돌아보느라 균형을 잡지 못한 마법사가 낙엽처럼 떨어졌다.
“으아아악!”
긴 비명이 꼬리를 남기고 사그라졌다. 고개를 돌려 그 꼴을 본 그라우지가 차가운 얼굴로 혀를 쯧쯧 찼다.
그 모습이 꼭 ‘한심하기는’ 하고 말하는 듯해서 리체는 어이가 없어졌다. 수십 년을 고되게 훈련한 마법사가 빗자루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백 년 가까이 마탑을 지배한 마탑주가 쪽쪽이 타령하며 가슴을 빨고 싶어 하는 게 수 배는 한심하고 추접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라우지는 리체와 눈을 마주치고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퍽도 귀여운 척이다. 윽. 저도 모르게 혀를 빼물자 그라우지가 턱에 손을 괴었다. 손에는 마법진을 쉼 없이 그리느라 반쯤 닳아 없어진 초크를 들고, 빤히 쳐다본다.
“왜요?”
“표정이 재밌어서요.”
리체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떴다. 언제 장난을 쳤냐는 양 그라우지가 눈을 반쯤 감고 다정하게 중얼거렸다.
“냉철한 체하지만 반응이 아주 솔직해요, 리체 양은.”
“…….”
“그래서 놀리는 재미가 있지.”
리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라우지는 신기하다는 듯 리체의 눈썹 움직임을 시선으로 좇았다.
“재밌어요?”
“리체 양은 재미없어요?”
어깨를 으쓱이는 그라우지를 향해 리체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꽂혀 들었다. 쪽쪽이 타령을 하는 그의 눈이 어디로 향하는지, 남 관찰하는 것이 습관인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거늘. 성희롱이 아주 일상이다. 새삼 이 남자 아래서 일하는 마법사들과 부관들이 조금, 안쓰러워졌다.
‘이런 변태를 매일같이 상대해야 한다니.’
리체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 틈을 타 피곤하면 침대에서 쉬자고 같지도 않은 수작을 부리는 그라우지에게서 초크를 뺏어 던진 건 그 다음 일이었다.
‘변태 새끼.’
폭력적이라며 눈꼬리를 내리는 그라우지를 보고 리체는 머릿속으로 낙인을 쾅 찍었다. 리체는 진저리를 쳤지만 그들의 그런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퍽 친밀해 보였다.
마탑이라고 마법사들만 있는 건 아니라, 고용인이나 손님들은 별일을 다 보겠다는 듯 생각하고 말았지만 최소 10년 이상 마탑에서 청춘을 보내면서 이곳에 뼈를 묻은 마법사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나 탑주님 원래부터 특이한 분이라는 건 알았지만 저런 모습은 처음이야.”
리체의 생각과 달리 그라우지는 마탑에서 이미지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마법이란 학문에 미쳐 있는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심지어 새로운 마법까지 만드는 그라우지의 존재는 패러다임인지라 존경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물론 성격 면에 관련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괴상한 치들이 워낙 많은 판인지라 그것마저도 별다르게 문제 될 거 없이 약간 특이한 정도로만 치부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지금은 좋게 넘어가기 어려웠다.
나무에 부딪혀 떨어진 마법사는 인상을 팍 쓰고 머리에 묻은 낙엽을 털어 냈다. 추락의 후유증인지 안색이 파리했다.
“괜찮아?”
동료 마법사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비교적 젊은 편인 마법사는 양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어떡하지?”
“뭐가?”
“누가 저 모습을 볼까 무서워.”
마법사의 시선이 탑을 향했다. 중간층에 있는 그라우지는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망막에는 젊은 여자를 향해 추파를 보내던 그라우지의 모습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좋다 이거야. 여자랑 즐기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물론 마법에 더 신경을 쏟았으면 좋겠지만,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그럴 수 있다 쳐. 근데 쪽쪽이? 그건 아니잖아…….”
입을 합 다물고 생각에 잠긴 마법사는 무슨 생각까지 떠올렸는지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마탑은 순식간에 변태 소굴이 될 거야!”
“진정해, 루이스.”
마법사는 울상을 짓고 동료를 바라보았다.
“변태 아래서 수학하는 마법사라니……. 이건 내 인생의 수치야. 그 여자를 쫓아낼까? 탑주가 무지 재미있어 하고 있잖아. 도대체 왜 마탑까지 기어 들어와서는!”
“에이, 난 그 여자 좋더라. 자극적인 페로몬을 갖고 있던걸.”
“맡아 봤어?”
“멀리서만. 탑주가 있으니 접근은 못 하지. 너무 걱정 마. 탑주가 변태 같기는 해도 실력은 확실하니까 우린 그저 그 능력을 잘 빼먹기만 하면……, 헉, 타, 탑주?”
고개를 도리질 치던 루이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가 고개를 홱 들었다. 공중에서부터 그라우지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계단이라도 밟는 듯 안정적으로 내려오는데,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오는 제어력에 울상이던 루이스의 눈에 경외가 스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가운 그라우지의 눈을 보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타, 탑주…….”
“감히 내 뒤에서 뒷말을 하는 간 큰 놈들이 있을 줄이야.”
그라우지는 빙글빙글 웃었다. 그러나 뒷말을 하다 딱 걸린 두 마법사는 따라 웃지 못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그라우지를 익히 알고 있기도 하고, 웃는 낯과 달리 눈동자는 지독히도 싸늘했기 때문이다. 어깨선을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안 그래도 인간의 머리통 내부에 파이어볼을 생성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가 궁금했는데, 잘되었군. 내 마법을 위해 기꺼이 한 몸 희생할 마음이었던 거지? 아주 갸륵해.”
빙그레 웃는 그라우지의 손가락 끝에서 가느다란 불길이 솟아올랐다. 실뱀처럼 작은 불길이지만 마법사는 뒤로 물러서며 몸을 사렸다. 겉보기엔 작아도 옷깃에라도 닿는 순간 끌 새도 없이 순식간에 퍼져 나갈 것이다.
공포에 질린 마법사들을 오연히 내려다본 그라우지는 뱀 꼬리처럼 입꼬리를 뾰족하게 올렸다. 동시에 불길이 마법사들을 덮었다. 불길은 마법사의 주변을 빠르게 맴돌았다. 멀리서 보면 작은 감옥이라도 형성하고 있는 듯했다.
“으, 으아아아악! 탑주!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파랗게 질린 마법사들은 불길에 몸이 닿을까 서로에게 딱 붙어 옴짝달싹하지도 못했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콧노래를 부르며 멀어지는 그라우지의 뒷모습을 보며 마법사들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라우지를 변태라고 부르는 리체는 모르는 사실. 그라우지 로스티나루스는 마탑의 폭군이다. 난다 긴다 하는 가문에서 자라온 자존심 높은 마법사들이 그 앞에서는 싫다는 소리는 또 못 하고 입을 딱 다무는 건 그의 실력이 대단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허리를 숙이고 방 전체에 그려진 마법진을 살펴보던 리체는 옅게 부는 바람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라우지가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양손을 살피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새 초크를 갖고 온다더니.”
“여기 있죠.”
그러면서 손을 편 그의 손바닥 위에는 긴 마법진용 초크가 놓여 있었다. 리체의 무언의 재촉에 어깨를 으쓱인 그라우지가 중간에 끊긴 마법진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리다가 멈추었다.
‘또 뭐야?’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한 그라우지를 미심쩍게 바라보자, 그녀를 힐끗한 그라우지가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아아, 힘이 나지 않는군요. 누가 쪽쪽이를 물려 주면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리체의 하얗고 반듯한 이마에 힘줄이 올라왔다.
‘……저게 진짜.’
“아이고, 힘들어. 역시 나이가 있으니. 하지만 쪽쪽이만 있다면 잘할 수 있지. 암.”
이렇게 그녀를 열받게 하는 사람은 본 차원과 이 차원을 통틀어서 그가 유일했다. 적어도 소장은 일의 경중을 따질 줄은 알았다.
지긋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리체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따가요. 이따가.”
이 가는 소리가 섞여 나왔지만 그라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받았다.
“약속 지켜요.”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라우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초크를 미끄러뜨렸다. 순식간에 완성된 마법진에 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라우지는 마법의 종주답게 지적인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정도쯤은 어렵지 않다는 의기양양한 기색에 리체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럴 걸 반나절이나 끌고 있었어요? 일부러?”
“일부러가 아니라 방금까지는 힘이 안 났는데 리체 양의 쪽쪽이를 생각하니 없던 힘도…….”
“꺼져요!”
새 초크마저 그의 얼굴에 내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