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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속도를 얼마나 높일 수 있어요?”
“지금도 상당히 진척이 빠른 편이에요. 이 속도라면 바로 다음 주에도 마법식을 테스트해 볼 수 있어요. 시전자의 안전성 체크는 아직 좀 남았지만.”
“차원을 통과할 때의 육체 적합도라면 문제없어요. 내가 있던 곳에서도 적합자 판단을 받았으니까. 그렇지만 차원에 육신이 표류하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몸을 보호해 주는 수단은 반드시 필요해요. 마법으로 이동할 때 통로를 넓히거나 보호막을 두르는 수밖에는 없겠어요. 어쨌든 당장 다음 주에 테스트해 볼 수 있다는 말이죠?”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부은 리체는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라우지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라우지?”
“뭐가 그렇게 급해요?”
리체는 눈살을 찌푸렸다. 차가운 눈빛을 보내는 그녀와 달리 그라우지는 느긋했다. 그는 전과 달라진 그녀의 초췌한 안색과 잠을 자지 못했는지 거뭇한 눈가에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겠냐, 언제 마법식을 사용할 수 있겠냐, 한 달 내로 가능하겠냐.”
“…….”
“비슷한 맥락의 질문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허공에 쫙 펼친 손을 까딱거린 그가 손을 내리고 리체를 빤히 응시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파헤치는 듯한 눈빛이 불편한 리체가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일이에요? 당장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다든가?”
리체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황궁에서 돌아온 지 오늘로 일주일째였다.
돌아온 날부터 이틀까지는 따개비가 된 양 카이로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 얀테의 마수가 뻗쳐 올 것 같았다.
얀테는 집요하고 끈질긴 사람이다. 1년 전에 만난 그녀를 잊지 못하고 카이로를 따돌려 저를 찾아온 것만 해도 그렇다. 어찌나 그의 인상이 강하게 남았는지, 가만히 있다가도 이따금 소름이 돋곤 했는데 그때마다 얀테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터무니없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정말 그렇다면 이보다 으스스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얀테는 움직임 없이 잠잠했다. 당장이라도 휘하의 시위대를 보내 그녀를 손쉽게 잡아들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리체는 머리를 굴렸고, 어렵지 않게 답을 도출해 냈다.
‘카이로 때문이야.’
그녀는 알파오메가 형질 관리에 매진하느라 도블락 제국의 힘의 균형이라든지 유력 가문이나 황궁과의 관계 같은 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 황궁과 연을 맺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트리고 가문의 백작과 새로이 떠오르는 태양, 얀테 황태자의 새끼줄로 여러 번 꼰 동아줄처럼 굵고 튼튼한 관계는 워낙 유명하여 모를 수가 없었다.
‘얀테는 생각보다 참을성이 깊고 이성적인 작자야.’
그래서 더 낭패스러웠다. 원하는 걸 가질 때까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몇 날 며칠이고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니 지금도 어디선가 그가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았다. 당장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블린에 있을 때, 그 축축하고 기분 나쁘게 따뜻한 암굴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탈출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자 리체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얀테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카이로의 곁에 붙어 있는 게 최선이야.’
얀테가 카이로 때문에 자신을 건들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당분간은 카이로를 방공호 삼아도 될 듯했다. 카이로의 비호 아래 있는 동안에는 얀테도 쉽사리 마수를 뻗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비로소 리체는 바깥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카이로도 이틀째 되는 날까지는 그녀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지만 그 다음날부터는 자리를 비웠다.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저가 모시는 상관과 여자를 공유한 상황이지 않은가. 이는 알파오메가 사회에서도 권장되지 않았다. 암암리에 즐기더라도 겉으로 드러낼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물며 체면이 중요한 지체 높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리체는 그가 얀테에게 자신을 넘길까 봐 불안해서 카이로의 곁을 떠날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수라는 판단에 관두었다. 지금으로서는 카이로가 얀테의 위압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쯤 입궁을 했을 텐데 얀테와 만났을까. 궁금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무지한 상황에서 생각에 골몰할수록 더해지는 것은 불안증이었다.
리체는 카이로가 집을 비우는 틈을 타서 마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카이로 덕분에 시간을 벌었으니 남은 건 차원 이동 마법의 개발에 박차를 다하는 것이었다. 침착하려고 했지만 초조함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고 말하려던 리체는 멈칫했다.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언급해 두는 게 신뢰적인 측면에서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라우지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와는 별개로 그와는 이미 한배를 탄 파트너 사이가 아닌가. 사정을 알고 더 노력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어요. 그래서 최대한 빨리 차원 이동 마법식이 완성되길 바라요. 지금까지처럼 어떤 협조든 할 테니.”
“흐음.”
그라우지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턱을 괴고 날렵한 턱선을 매만졌다. 흘끗, 쳐다보는 시선이 묘했다.
“어디서 돈을 떼어먹기라도 했어요? 꼭 그런 얼굴인데.”
“잡담할 기분 아니에요.”
“1년 사이에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이 늙은이보다 더 복잡해 보여요?”
리체는 짜증을 냈다.
“복잡할 거 없어요. 애초에 서로 원했던 게 보다 간절해진 상황인 것뿐이니까요.”
“아니, 그건 아니지.”
그라우지가 싱긋 웃었다. 왠지 얄밉게 느껴지는 미소에 리체가 얼굴을 구겼다.
“내게는 남는 게 시간이에요. 그리고 지금,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순조롭고요. 서약한 것처럼 최선을 다하고 있죠.”
“그래서요?”
생색이라도 내고 싶은 걸까? 그라우지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리체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예요?”
그런 건 별로 수고롭지도 않으니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리체의 무덤덤한 얼굴을 보고 그라우지는 왠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애원이라도 하길 바란 건가. 리체는 곧바로 그의 의중을 깨달았지만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여기서 리체 양이 원하는 것만큼 더 속도를 내려면 난 아예 잠을 줄여야 하는데, 그건 영 쉽지 않은 일이라서요.”
“…….”
“늙으면 밤잠이 줄어든다지만 신체는 한창 때라 그런지 잠이 많은 편이거든요.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서도 그렇고.”
“…….”
“아아, 어제도 이거 하느라 약간 잠을 설쳤더니 피곤하네요.”
하품을 하는 그라우지의 눈꼬리에 맑은 눈물이 찔끔 맺혔다. 하품 자체는 자연스러웠으나 리체는 사기꾼의 가식적인 호객 행위를 바라보는 듯 그를 훑었다. 눈이 마주친 그라우지가 샐쭉하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눈꼬리의 눈물을 훔쳤다.
“오늘은 좀 쉬어 줘야 하나…….”
졸린 듯 눈을 깜박이면서 또 한 번, 흘끗.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매가 늙은 여우처럼 의뭉스럽다. 리체는 혀를 찼다.
“아마 입에 뭔가를 물려 줘야지 사라질 잠기운이겠죠.”
중얼거리자 어떻게 알았냐는 양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모습이 작위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대답은 경쾌했다.
“맞아요. 역시 센스가 발군이에요, 리체 양.”
“…….”
“…….”
“……향이 괜찮은 시가라도 가져다줄까요?”
반짝거리는 눈을 보면서도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비아냥대자 그라우지가 몹시 실망스럽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리체는 기분이 나빠졌다.
“아아, 그런 건 시시하죠.”
리체는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그라우지가 얇은 입술을 양옆으로 끌어 올렸다. 한 세기를 살아온 그는 외양은 청년의 것이나 눈동자만큼은 세월이 스며들어 매우 현명해 보였다. 그라우지는 특별하게 시선을 끄는 매력을 가진 남자였다. 리체는 그가 입만 열지 않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었다.
바로 지금처럼.
“쪽쪽이를 물려 줘요. 달콤하고 말랑말랑하지만 쭉 빨면 귀엽게 딱딱해지는 거요.”
침묵이 감돌았다. 리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뭐…… 뭐라고요?”
“쪽쪽이 몰라요, 쪽쪽이?”
그라우지가 뭔가를 빠는 것처럼 입술을 모았다. 점막 부딪치는 소리는 성적인 함의를 담고 있었다. 리체는 대경실색했다.
‘변태 새끼.’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통탄스러워 한숨을 쉬는데 문득 뭔가에 생각이 미쳤다. 가만, 그게 있었지?
리체는 잔잔하게 웃으며 그라우지를 보았다. 그가 흠칫했다. 저렇게 굴 거면 뭣 하러 저리 변태같이 말하는지. 내심 혀를 끌끌 찼다.
“눈 감아 봐요. 민망하니까.”
툭, 던지듯 중얼거리자 그라우지가 재빨리 높이가 낮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리체가 행동하기 편하도록 자리를 잘 잡는 모습이 더없이 능숙했다.
그는 퍽 고분고분한 태도로 손까지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아아, 심장이 터질 것 같네요.”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설레 하는 목소리와 달리 혀가 입술을 야릇하게 쓸었다. 그러곤 입을 살짝 벌린다.
‘얄미운데.’
리체는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을 좀 더 벌리는 게 좋겠어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입술 틈이 벌어졌다. 말캉한 혀가 보일 즈음, 리체는 품에서 쪽쪽이를 꺼냈다.
“자, 여기.”
무심한 표정과 말랑해 보이는 쪽쪽이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성인 남성의 성숙한 입술에 물려진 것보다는 나았다.
“…….”
“…….”
설렘이 한결 가신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눈을 감고 입술을 오물거린 그라우지가 나직하게 물었다.
“이게 뭐죠?”
“쪽쪽이요. 달콤하고 말랑말랑하지만 쭉 빨면 귀엽게 딱딱해지는 거.”
쪽쪽이는 그라우지의 요구 사항과 한 치의 다름도 없이 부합했다.
“혹시 몰라 준비한 건데 이렇게 딱 알맞게 쓸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
“공방의 신제품이래요. 부드러운 홍현목에 실리콘을 접하여 만든 거예요. 왜 그래요? 공방이 자랑하는 신기술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거라 이 작은 걸 사는데도 금화 주머니를 열어야 했다고요. 나름대로 큰 지출을 한 것이니, 유용하게 써 주세요.”
리체는 능청스럽게 대꾸하고는 쪽쪽이의 둥그스름한 손잡이를 잡고 아기에게 하는 것처럼 흔들어 주었다. 그라우지의 입술 사이로 쪽쪽이의 실리콘 부분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묘한 감촉에 그라우지의 눈매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그가 뻔뻔하다고 할지라도 갓난애나 사용하는 걸 입에 물려니 멀쩡한 기분일 리가. 리체는 내심 조소했다.
“아주 사려 깊군요, 리체 양. 덕분에 어릴 때도 써 보지 않은 걸 이 나이 되어서 쓰게 되네요.”
“얼마든지 쓰세요. 사양할 필요 없답니다.”
결국 그라우지는 교양 있게 굴던 태도를 때려치웠다. 눈을 치뜨고 그녀를 바라보자 리체는 화사하게 웃었다.
“쪽 빠셔야죠, 탑주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못마땅한 얼굴로 한 마디 하려던 그라우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잡이를 잡은 그녀의 손등을 감쌌다. 리체는 한쪽 눈을 치켜올렸다.
그라우지가 쪽쪽이를 쪽 빨았다. 빠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거미가 기어오르는 듯 소름이 돋아 리체가 손을 빼내려 하자 그라우지가 손에 힘을 주었다. 결국 리체는 아기에게 하듯 그라우지에게 쪽쪽이를 물려 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근데 이건, 쪽, 내가 원하는, 쯥, 쪽쪽이가, 아닌데요.”
리체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 젖꼭지 빨고 싶다는 성희롱 상늙은이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내심 흐뭇했었는데, 그 즐거움이 순식간에 가셨다. 뻣뻣하게 굳은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이상한 소리 내지 말아요.”
“왜요? 쪽, 직접, 쪽, 물려 줬잖아요.”
씁, 소리를 낸 그라우지가 혀를 내밀어 투명한 고무를 한 바퀴 쓸었다. 날름 핥고 입술 안으로 들어가는 혀를 보니 소름이 훅 돋아 리체는 손을 쫙 펼쳤다. 장난질은 제가 먼저 했지만 저리 반응하는 걸 보니 닿기조차 꺼림칙했다. 이 남자는 정말 정상이 아니었다.
그라우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리체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그러곤 질색하는 그녀의 손으로 손잡이를 잡게 하고 쪽쪽이를 움직여 댔다. 츄릅. 혀가 쪽쪽이를 핥을 때 나는 타액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리체는 얼굴을 구겼다. 금테 안경 너머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있노라니 리체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가 빨고 있는 게 쪽쪽이가 아니라 제 유두가 된 듯하여, 가슴에 힘이 들어갔다.
쪽, 쪽쪽.
다시 손을 빼려 하자 그라우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쯤 되자 그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리체는 아니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쪽쪽이를 빨았다.
리체는 불경을 외듯 차원 이론의 복잡한 문장을 읊으며 그라우지의 시선과 쪽쪽거리는 야릇한 소리를 흘려보냈다. 100년 묵은 늙은 여우는 그녀가 집중하지 않는 걸 금세 눈치챘다. 할짝. 말캉한 혀가 중지의 가운데 마디를 핥았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리체가 소스라쳐서 그라우지를 다시 보았다.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무하네. 이런 걸 물려 주고서는. 빠는 거라도 봐 줘야 내가 흥분이 되지 않겠어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라기보다는 이것마저 봐 주지 않으면 젖꼭지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 같은 느낌에 리체는 머릿속 상념을 지우고 그라우지를 바라봐 주었다. 그는 만족하고 쪽쪽이를 열심히 빨았다.
흘려보낸 세월의 무게가 어지간한지라 그라우지는 희롱하는 방법에 통달해 있었다. 화류 공자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단지 쪽쪽이를 빠는 것뿐인데 굉장히 수위 높은 동영상을 보는 것 같았으니.
그라우지는 리체의 손을 제외하고 다른 어느 곳도 만지지 않았지만, 마탑을 빠져나올 즈음 리체는 얼굴이 불그스름해져 씩씩거렸다. 다시는 그라우지에게 장난질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리체는 아름답게 꾸며진 단층 저택으로 들어갔다. 카이로의 별장과 달리 화려한 저택은 들어서자 장미향이 났다. 손님들에게 가장 선호도가 높은 향으로, 퀸에 들어서자마자 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뭇 손님들은 퀸을 가리켜 장미 정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곳은 사장이 불타 버린 가게 대신 임시로 이용하는 장소였다. 집주인이 헐값에 내놓은 저택을 사들여서 위치가 외져 사장이 아쉬워했지만 사실 큰 관계는 없었다. 이곳에서 본격적인 영업을 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퀸은 생각보다 마니아층 손님들이 많아서 그들의 요청을 받은 사장이 고심 끝에 임시로나마 영업하기로 결정했는데, 신규 손님은 받지 않고 단골들만 들였다.
직원들의 근무는 자유였다. 지명이 많이 되는 직원들은 자주 출근하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직원들은 오랜만에 가지는 긴 휴가에 여행을 떠나거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임시 가게에서 잡일을 하며 운영을 도왔다.
몇몇 직원들은 완전히 떠났는데, 종잣돈이 모인 참에 퀸이 이렇게 되자 사업을 한다고 나선 이들이었다. 양조장이나 의상 숍 따위의 본인들이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사업을 시작할 거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사랑에 빠진 손님과 함께 살기 위해 떠났다.
리체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카이로가 그녀를 거두기는 했지만 퀸을 완전히 그만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바쁜 카이로가 일을 나가 별장에 혼자 있기 지겨워질 때면 종종 찾아오곤 했는데 놀러 오는 정도에 불과해서, 손님에게 와인 한 잔 따르지 않았다.
리체가 가게 일을 거두는 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음에도 사장이나 직원들은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단골들만 찾는 상황이라 한산했고, 임시 영업을 하기는 하지만 분위기가 썩 좋은 것도 아니라, 살갑진 않아도 매사에 무덤덤한 리체가 와서 툭툭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반갑기 때문이었다. 물론 리체는 그들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직원들은 그녀의 방문을 좋아했다. 그건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리체.”
작은 알림 종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사장이 반갑게 불렀다.
“오랜만에 왔네.”
“일이 있었어요.”
포도즙처럼 가벼운 도수의 와인을 내주며 사장이 그녀의 얼굴을 이모저모 살폈다.
“일? 새로운 일자리라도 찾았어?”
바싹 긴장하여 탐색하는 얼굴에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일하고 싶었다면 퀸에 출근했겠죠.”
무심한 대꾸에 다소 안심한 사장이 얼굴을 풀었다.
“대체 어디서 지내고 있는 거야? 얼굴색은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난 또 네가 굶고 다니는 줄 알고.”
궁금하단 투에 리체는 애매하게 웃었다. 카이로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장님, 어, 리체 왔네.”
가게 영업시간이라기엔 다소 이른 때였기에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오던 엘자가 리체를 발견하고 쪼르륵 다가왔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리체 지내는 곳 얘기.”
“아아, 맞다. 나도 그거 궁금했어요.”
엘자가 리체를 돌아보았다.
“독립하기엔 모은 돈이 얼마 안 될 텐데, 뭐 하면서 지내고 있어?”
“그냥저냥 살고 있죠, 뭐.”
모호한 대답이 성에 차지 않은 듯 사장과 엘자는 궁금하다는 낯을 했다. 뭘 묻든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 리체는 가게를 둘러보며 화제를 돌렸다.
“미하일은요?”
“걔는 데이트.”
“누구랑요?”
리체가 눈을 반짝이자 엘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누구겠어? 제니스 보르신 공이지.”
“아.”
리체는 금세 심드렁해졌다. 순간적으로 이델리를 생각했다. 미하일과 그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는데 말이다.
‘완전히 끝났나?’
이는 그녀의 개인적인 호기심에 가까웠다. 오메가들끼리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에 흥미가 있었으므로. 둘의 상황과 성향을 따져 보면 일회성 만남으로 끝났을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아직까지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후자라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오늘 이렇게 가게를 찾은 건 볼일이 있어서예요.”
“뭔데?”
“사람을 좀 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보다는 사장님이 아는 사람이 많잖아요.”
뜻밖의 말이었는지 사장이 얼떨떨해했다.
“아는 사람이야 많지만 뭐 때문에?”
“제가 지금 어떤 마법사 아래에 속해 있는데.”
“마법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자와 사장이 외쳤다. 마법사라는 단어가 놀라운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체는 그럼 친한 마법사가 있는 거냐며 호들갑을 떠는 두 사람에게 그라우지와의 일을 대충 거짓을 섞어 설명해 주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입이 무겁고, 돈이 많이 필요하고, 이 일에 간절한 사람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건 비밀을 떠벌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야?”
“예. 보안이 생명이라서요.”
리체는 임상 실험자를 찾고 있었다. 실험자는 자신이 무슨 일에 동원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수상하기는 할 테니, 입이 무거워야 했다. 리체는 자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은 차원 이동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여겼다.
“위험한 일은 아니지?”
설명이 미진했는지 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법사의 실험 대상이라니, 보통 사람이라면 꺼림칙한 게 당연했다. 리체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꾸했다.
“위험해요.”
“…….”
“그래서 돈이 급한 사람이 필요하고요. 혹시 실험하다 목숨을 잃으면 당연히 보상도 할 거예요. 그러면 중병에 걸린 가족이 있는 가난한 사람이 좋겠네요. 효심이 깊으면 더 좋고요.”
그래야 가족을 위해 떠벌리지 않을 테니까.
평온하게 말하는 리체를 엘자와 사장이 귀신을 대하듯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리체가 어리둥절하게 묻자 사장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아니,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까.”
“마법사라니, 언제 그런 일에 휘말린 거야?”
엘자는 질린 기색으로 소심히 물었다. 본 차원에서는 숱하게 해 왔던 일이었던지라 리체는 그들의 반응이 더 어색하게 느껴져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골목 밤거리를 뒤지면 있기야 있겠지만, 그 조건을 다 성립하려면 시간은 걸릴 거야. 하지만 금자가 적잖이 들 텐데.”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
그 말에 사장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리체가 얼마나 가난한지는 숙식을 제공한 그가 더 잘 알았다. 물론 리체의 주머니 사정은 여전히 빈곤했다. 그녀가 믿는 건 마탑의 마르지 않는 금고였다. 그라우지가 듣는다면 어이없어 하겠지만 적어도 리체는 당당했다. 그라우지는 마법의 성공을 최선을 다해 이룬다고 서약했고, 그 최선엔 이런 일도 포함되어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 있던 리체는 엘자의 탄성에 정신을 차렸다.
“아! 깜박 잊고 있었다.”
“…….”
“리체. 시간 좀 있지? 너 찾아온 손님이 계신데.”
“날?”
그 순간 리체가 떠올린 사람은 카이로였다. 일한 지 1년이 좀 넘은 데다가 도블락어로 읽고 쓰고 말하기까지 시간이 걸려 실질적으로 손님을 상대한 기간도 길지 않은 그녀를 찾아올 사람은 한 손에 꼽았다. 하지만 카이로라면 굳이 이곳에 올 필요 없이 저택으로 가 있으면 될 텐데.
“어제부터 기다리고 계셨어. 지금은 일 안 한다고 해도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셔서.”
그때 퍼뜩 생각이 났다. 언젠가 일하는 곳에 보러 오겠다는 말이.
‘설마 라스카인가?’
엘자에게서 더는 설명을 듣지 못한 리체는 손님 접객용으로 마련된 응접실을 향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장이나 엘자나 누구인지는 말해 줄 수 없다 했기에 의아함만 증폭되었다.
‘이런 장난을 치는 걸 보면 라스카일 가능성이 크겠는데.’
설마 그라우지인 건 아니겠지. 오전까지 얼굴 맞대며 대화한 사람이니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리체는 응접실 문을 여는 순간까지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응접실 문을 열고, 리체는 자신이 떠올린 후보가 모두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침대 위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어제부터 있었다는데 내내 깨어 있던 건지 잠을 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리체.”
들춘 흔적 없이 반듯한 침대의 시트를 흘끗한 리체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푹 가라앉은 풍성한 곱슬 머리카락. 강렬한 붉은색은 언제나 시선을 끌어당겼지만 오늘은 어둠을 흡수한 양 검붉었다. 그는 몸에 딱 맞는 암갈색의 프록 코트를 입고 있었다. 카라 부분에는 검은색으로 문양이 들어가 있었는데 그의 옷이 으레 그랬던 만큼 화려했지만 평소의 생기 넘치는 활발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코트 안쪽에 받쳐 입은 검은색 셔츠는 남자의 곁을 맴도는 음울함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전반적으로 무게감 있는 차림은 귀족의 품위를 지키기에 딱 알맞았으나 그럼에도 몸에 밴 초조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리체는 무심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기억했던 것보다 습하고 비릿한 바다 내음이 훅 풍겨 왔다.
이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리체는 곤란한 기분이었다. 다시 만날 일 드물 거라고 생각하여 뇌리 한편에 치워 놓은 상대.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다소 멍해졌던 리체는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움찔했다. 그녀보다 머리 한 개는 족히 큰 남자의 그림자가 발치까지 다가왔다.
그는 우울을 좀먹은 붉은 괴물 같았다. 날렵하게 잘생긴 생김새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나 우중충한 표정, 그리고 결정적으로 쳐다보는 시선이 한도 끝도 없는 무저갱에 떨어지는 듯했다.
반짝 정신을 차린 리체는 한 걸음 물러났다가 또 움찔했다. 그러자 남자가 놀라면서도 상처받은 눈을 했다. 질책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에 우물쭈물하던 리체는 돌연 의아해졌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그녀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그의 이름을 뱉어 냈다.
“레이몬드.”
“…….”
“여긴 웬일이에요, 갑자기?”
목소리를 낸 순간 방 안을 점액처럼 채웠던 침묵이 깨어져 나갔다. 숨을 쉬기가 편해졌다. 그런 한편 소름이 돋았다.
레이몬드가 이곳에 찾아오다니. 만약 카이로와 같이 놀러왔다면 어쩔 뻔했는가.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 카이로가 이곳에 들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곤란해하며 동시에 묘한 눈빛을 보이던 엘자를 떠올리자 리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눈에 훤했다.
‘이렇게 속 편히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로군.’
상념에 빠진 그녀는 저를 보는 눈빛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랜만이야.”
리체는 고개를 들었다. 바싹 말라 버석한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고, 미묘하게 시무룩했다. 전의 자신만만한 모습과는 달라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오랜만에 본 레이몬드는 수척해져 있었다. 리체는 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동상을 보는 듯이 그를 관찰했다.
“보고 싶었어.”
“…….”
“도저히 참을 수 없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틈 사이로 물기 스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고 싶었어, 리체.”
리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다. 다만 약간, 시간이 아까워졌다. 성가셨다. 뜬금없이 나타나 보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레이몬드에게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미하일이 이델리를 아직도 만나고 있는지 아닌지, 궁금해 하는 것보다도 재미가 없다.
레이몬드가 손을 내렸다. 드러난 눈과 시선이 마주친 리체는 ‘흠’ 하고 대꾸했다.
“그렇군요.”
그 짤막한 대꾸에 레이몬드의 입술 한쪽이 구겨진 종이처럼 어그러졌다. 그는 못마땅한 듯이 리체를 보다가 그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한숨을 쉬었다.
“널 찾아왔는데, 가게가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한참 수소문해서 왔어. 여기 있는 건 아니라는데, 그럼 어디서 지내고 있는 거야?”
“그냥, 지인의 집이요.”
그래, 작게 중얼거린 레이몬드가 돌연 물었다.
“안 오는 동안 내가 궁금하진 않았어?”
리체는 솔직하게 아니라고 대꾸하려다 말았다. 궁금한 게 있기는 했다.
“이델리 그레이스랑…….”
허공에 뜬 레이몬드의 손가락이 잘게 경련했다. 그 반응을 똑똑히 봤지만 리체는 모른 척하고 말을 이었다.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
“여기서 왜 그 애의 이름이 나오는 거야?”
레이몬드는 자조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델리와 있다고 생각했어?”
리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요?”
레이몬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로 하지 않았어도 답은 나온 거였다. 리체는 지루해졌다. 그를 마주했을 때 들었던 약간의 놀라움도 씻은 듯 사라졌다. 갑자기 레이몬드가 물었다.
“나한테 실망했어?”
리체는 눈썹을 까딱였다. 의아했다. 실망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아니요.”
우습게도 그 대답에 레이몬드가 실망한 얼굴을 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리체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왜 찾아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답답해지기만 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요.”
한숨을 쉬고 말하자 레이몬드가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에 대한 소문은 알고 있어요. 이델리 그레이스를 굉장히 좋아하잖아요? 어릴 때부터.”
뭐라고 반박하려는지 입을 열었던 레이몬드는 힘없이 입술을 붙였다.
“그래서 레이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이델리 그레이스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구나 추측했죠.”
“그래서?”
실소한 레이몬드가 고개를 모로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큰 키에 날씬한 몸이 왠지 축 늘어진 듯했다.
“내가 행복해 보여?”
그녀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그렇지는 않아 보이네요.”
“그래.”
레이몬드가 한숨을 쉬었다. 속으로 그가 쉰 한숨의 수를 세어 보던 리체는 우스워져서 그만두었다.
“난 사실 네가 날 찾을 거라고 생각했어. 며칠 동안 말도 없이 연락을 끊었으니까.”
“제가요…….”
“그래. 난 너한테 청혼도 했잖아?”
애매모호한 리체의 반응에 레이몬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침없었던 그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가 한풀 꺾여 있었다. 레이몬드가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씨발, 근데 연락 하나 안 해?”
“어떻게 연락할 수 있었겠어요.”
리체는 곤란해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속으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당한 심정으로 귀찮다고 연신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제 주제에 감히 어떻게요.”
사실은 이델리의 관심이 다른 데 쏠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레이몬드를 좋게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리체는 온유한 목소리를 냈다. 그가 따지듯이 물었다.
“왜 연락을 할 수가 없어?”
“진심으로 묻는 거예요? 그레이스 영애와 내내 붙어 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연락을 해 본다고요? 방해만 하는 꼴이죠. 제 꼴도 좋지 않아질 거고요.”
어깨를 으쓱이자 레이몬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리체의 마음은 차가웠다. 그에겐 이미 몇 번이나 언질을 주었다. 이델리는 무서우니 행동을 조심해 달라고. 그런데 연락을 왜 안 했냐고 묻는 것인가? 그레이스 공작가에 있는 그에게? 리체는 차라리 내 목을 조르지 그러냐며 내심 코웃음을 쳤다.
레이몬드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방해라니. 이델리와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하지만 좋아하잖아요?”
“……지금은 아니야.”
힐끗 그녀를 보더니 얌전히 말을 이었다.
“난 널 좋아해.”
리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상심한 듯 미간을 좁혔다.
“이델리는, 좋아했었어. 날 몇 년 동안 애태웠어. 미치도록 갖고 싶었지. 그래서…….”
하릴없이 이어질 듯한 변명에 리체는 완곡한 말을 선택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사실 그녀는 지금 퀸의 종업원도 아니니 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리체는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잤나요?”
레이몬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리체는 심상했다. 당연히 긍정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반응은 의외였다.
“아니!”
자는 데 실패해서 여길 온 건가? 리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레이몬드는 제 소리에 제가 흠칫 놀랐다. 리체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확연히 당황한 기색으로 얼굴을 쓸었다.
“아니야. 그런 일은 없었어. 제기랄,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글쎄. 돈 후안,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 율리우스 카이사르, 파블로, 조지 고든 바이런, 라파엘로 산치오, 자코모 푸치니, 술탄 물레이 이스마일(유명한 바람둥이들)과 같은 이들을 만난다면 신이 나서 여성을 절정으로 보내 버릴 100가지 방법을 편찬할 수 있는 인재 정도? 이런 문제라면 그라우지도 빠지지 않겠군.
이런 이들의 특징은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라면 온갖 달콤한 말을 ‘진심처럼’ 꺼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갖고 싶었다면서요? 그리고 이델리 그레이스의 집에서 지낸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요.”
그런데 안 잤다고? 거짓말. 리체의 빤한 눈빛에 레이몬드가 펄쩍 뛰었다.
“맹세코 그녀와 자지 않았어.”
“…….”
“확인해 볼래?”
그러면서 반색하는 그를 보고 리체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경멸스러운 반응에 레이몬드는 쳇, 혀를 찼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졌다. 공손하지만 시종 냉담한 그녀의 표정에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고백했다.
“삽입은 하지 않았어.”
이제야 솔직한 말이 나오는군. 그것 보라는 듯 리체가 조소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정도는, 그냥, 친한 사이에 할 수 있는 거잖아?”
레이몬드가 황급히 변명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었다.
“이델리가 날 붙잡아 놓고 있어서 오지 못한 거였어. 나는 계속 널 보러 오고 싶었다고. 믿음을 의심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이번에야말로 확신했으니까.”
리체는 눈썹을 까딱였다. 그녀의 의문에 답하듯 레이몬드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알고 있잖아.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
리체는 의기소침한 그를 보며 팔짱을 단단히 끼었다.
“이제 알겠네요.”
“응?”
“그레이스 영애가 유혹해서 혹했는데, 막상 시도하려니 발기가 되지 않았군요.”
레이몬드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제 입으로 실토해 버린 레이몬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리체는 헛웃음을 흘렸다.
“왜 갑자기 날 찾아왔나 했더니…….”
“씨발, 그래, 자려고 왔다. 뭐 문제 있어? 염치없는 새끼를 보는 것처럼 하지 마. 여기엔 네 책임도 있다고.”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보자 리체는 흠칫했다. 일주일은 굶은 사람이 간만에 나타난 음식을 보는 것처럼 애절하면서도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레이몬드가 갈라진 입술을 달싹였다.
“전에 말했지.”
“…….”
“너 말고는 안 되는 몸이 되어 버렸다고.”
리체는 이런 상황에서 무슨 소리를 하냐는 시선을 보냈다.
“장난치는 거 아니야.”
레이몬드가 선수를 쳤다.
“씹, 그때는 나도 그냥 하는 말이었지. 일시적인 현상인 줄 알았다고. 하지만 이델리에게도…… 그랬어. 진짜야. 나, 발기가 안 돼.”
“…….”
“리체 너 말고는.”
리체는 여전히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한숨을 푹 쉬었다.
“잘못 찾아온 거 같은데요.”
“뭐?”
“그런 일이라면 치유관에 가야죠, 레이몬드 스트리고 경.”
선을 긋는 호칭에 레이몬드가 움찔했다.
“정신적인 문제인가요?”
“…….”
“아니면 희귀병에라도 걸렸나요?”
여상하게 말했지만 어쩐지 귀를 난도질하는 것처럼 탁탁 꽂혔다. 마음이 쪼글쪼글해진 레이몬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리체는 꼭 바람 난 남편을 잡는 아내가 된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부러 한숨을 푹 쉬고 상냥하게 충고했다.
“잘 모르겠다면 역시 치유관에 가세요. 제가 잘 아는 치유술사가 한 명 있으니 진단을…….”
“그딴 문제가 아니야.”
억눌린 음성에 리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그녀를 어두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은 눅눅한 늪지대 같았다. 한 발을 들이밀면 그대로 가라앉을 듯하여서 리체는 갑자기 기분이 찜찜해졌다.
돌연 레이몬드의 눈빛에서 힘이 빠졌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선은 그를 미성숙한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 패기는 부족하나 활기가 넘쳤던 붉은 눈동자가 지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리체는 새삼스럽게 레이몬드를 응시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대하는 듯했다. 그에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사실은…….”
그는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조심스러웠다.
“너에게 각인했어.”
마침내 그가 고백했다. 리체는 천천히 곱씹었다.
각인.
‘각인?’
그녀의 큰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띠딕, 띡.
머릿속에서 정보가 자동으로 입력된다.
각인.
알파가 오메가에게 인식하는 현상.
강렬한 자극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음.
연인 관계가 아님에도 일어남.
한 번 각인하면 쉽게 풀리지 않음.
각인한 대상에게만 발정이 일어나는 경우가 대다수.
입력 끝.
기계적으로 정보만 나열한 것과 달리 실제 ‘각인’이라는 현상은 보다 복잡하고 비극적이었다.
연인 관계의 각인 현상은 축복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대개 유혈 사태로 끝나기 때문이다. 결혼식을 앞둔 신랑에게 각인한 알파로 인해 축복받아야 마땅할 결혼식이 피로 얼룩졌다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각인은 알파오메가 사회에서 환영받기보다는 터부시되고는 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욕구 불만이었다. 각인한 오메가와 주기적으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경우 그 알파는 욕구가 쌓여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과연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지금 레이몬드의 얼굴도 그랬다. 붉은 눈동자는 확실히 성숙해졌으나 흰자에 가득한 핏발 따위가 그의 상태가 보는 것만큼 안정되지는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팽팽히 곤두선 어깨의 근육은 맹수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보통이라면 얼굴이 굳고 경계해야 마땅할 상황이었다. 당연히 리체도 그를 꺼림칙하게 여겨 경각심을 품었지만, 정작 레이몬드를 향하는 눈빛은 반짝였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각인이라는 케이스를 만난 리체의 마음속엔 연구욕일지 수집욕일지 모를 욕망과 호기심이 득시글 솟아올랐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각인한다면, 각인당한 오메가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건가? 어떤 호르몬 인자가 이런 현상을 만들어 내는 거지? 그것도 아니면 각인 현상 역시 알파오메가 유전 형질처럼 유전적인 특징일까?’
그런 의문이 그녀가 레이몬드에게 가진 한심함과 불만을 일순 앞질렀다.
“각인이란 게, 말만 들었지 이딴 것인 줄 몰랐어. 각인한 오메가만 되기는 뭐가 씨발,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구멍만 봐도 발딱 서던 게 지금은 어린애들이 가지고 노는 헝겊 인형만도 못하다고.”
그 말에는 리체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인형과 비교하는 건 좀.”
레이몬드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런 말을 할 때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가 이를 아득 갈았다.
“고자가 된 기분이야. 병신이 다 되었다고.”
리체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책임져, 씨발.”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아니, 고자가 되면 되는 거지, 왜 그 책임을 그녀에게 지라고 한단 말인가? 억지가 따로 없었다.
“치유관에 가 봐요, 스트리고 경.”
“그따위로 부르지마. 치유관은 씨, 그딴 데를 왜 가? 그놈들이 나한테 구멍을 대 주겠어, 내 자지를 세워 주겠어?”
리체는 당황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꾸했다.
“오메가가 있다면 대 주기는 할 텐데.”
“씨발 그냥 널 안고 싶다고!”
레이몬드가 바락 외쳤다. 분에 못 이겨 울먹이는 그의 눈빛은 비가 잔뜩 내린 늪처럼 끈적하고 눅눅했다.
“그러니까 자꾸 딴말 하지 마.”
빙글빙글 말을 돌리던 리체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레이스가 제안했었어. 내가 자길 아직 사랑하는 게 분명하니 각인했다고 할지라도 섹스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그렇잖아? 십 년 넘게 매달렸던 상대인데.”
한 손으로 얼굴 반쪽을 가린 레이몬드가 사납게 웃었다. 그것도 잠시, 입꼬리가 아래로 일그러졌다.
“날 가지고 노는 걸 즐겼던 그 애가 그렇게 구는 게 재밌기도 했어.”
“…….”
“내가 정말 할 수 없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
“각인했다는 것만 어렴풋 알아챘을 뿐, 그 외에 별달리 달라진 게 없었으니까. 아니, 없었다고 생각했지, 머저리같이.”
레이몬드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힐끗, 리체를 쳐다봤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리체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의아했다. 그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당당하지 못한 건 아는 모양이다. 리체는 연극을 보는 기분으로 레이몬드를 응시했다.
“그래서 그냥 그 애와 있었어. 내 눈치와 비위를 살피는 그 애를 보면서, 십 년 만에 우위에 선 것 같았지.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픽 웃은 레이몬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근데 씨발, 시간이 지날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
“시간이 지나도, 그녀가 아무리 야한 옷을 입고 까칠한 말로 나를 도발해도, 전혀, 전혀……. 정말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만큼 전혀 흥분이 되지 않았어. 고자가 됐나 싶어 덜컥 겁이 나더라니까. 기분이 조금 고양됐을 뿐이지.”
리체는 그가 움켜쥔 아랫도리를 흘끔했다. 손에 가려졌지만 부풀어 있는 듯했다.
“전에는 한번 콱 움켜쥐고 싶었던 가슴을 보여 주는데도 내 머릿속에선 네가 생각나는 거야. 네가 지금 뭘 먹고 있을지, 뭘 하고 있을지, 누구와 같이 있는 건 아닌지. 그 예쁜 가슴을 보고 있는데도 그딴 생각만 들더라고!”
레이몬드는 얼굴을 가릴 것처럼 손을 움찔했지만 꽉 주먹을 쥐는 데 그쳤다. 핏발이 서 시뻘게진 눈이 리체를 향했다.
“그제야 각인이 어떤 건지 알게 됐지. 어떤 의미로는 정말 병신이 다 되었어. 봐, 지금 널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잖아.”
레이몬드가 한 발 다가왔다. 리체는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레이몬드가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내가 역겨워?”
리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해 보자면 그렇지는 않았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는 역겨울 수 없다.
일단 첫 번째로, 각인, 그것도 그녀를 향한 각인이라는 진귀한 케이스가 되어 나타나 주었다.
두 번째, 알파오메가는 원래 타고나길 문란한 족속들이다. 입으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속삭이며 아래로는 아무거나 집어삼킨다. 지나가다 만난 사람과 거리낌 없이 붙어먹는 것부터가 그렇다.
세 번째, 레이몬드는 이델리와 자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네 번째, 설사 이델리와 잤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 그가 그녀와 무슨 사이라고? 레이몬드와는 고작해야 섹스를 한 사이일 뿐이다.
솔직히 리체는 그가 왜 자신에게 각인했는지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섹스가 나쁘지 않아서인가.’
여하튼 이런 이유로 리체는 레이몬드가 역겹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역겨운 게 덜 상처받을 이유였지만, 리체는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담담한 얼굴이라 레이몬드는 그녀의 생각을 눈치챌 수 없었다.
“다시는 나와 만나 주지 않을 거야?”
그답지 않게 레이몬드가 약한 소리를 했다. 리체는 갈등했다.
‘연구하고 싶어. 하지만 찝찝해.’
찝찝한 이유는 명확했다. 카이로 때문이다.
‘카이로가 알면 좋지 않을 거야.’
그는 현재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다. 안 그래도 얀테와의 일 때문에 심란한 사람인데 이런 일로 또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 각인이라는 현상이 탐나기는 해서, 리체는 말을 하기까지 퍽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다.
레이몬드는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도 처분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생각해 봤지만.”
“…….”
“역시 안 되겠어요.”
희망에 반짝였던 레이몬드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해진 눈은 잘생겼지만 반항적인 그를 처연하게 보이게 했다.
리체는 덤덤한 얼굴로 짙은 아쉬움을 삼켰다. 하지만 아무리 아까워도 지금 레이몬드를 가까이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아무래도 카이로가 마음에 걸려.’
문득 리체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퍽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카이로가 걸린다면 비밀 유지에 각별히 유의하면 되는 일이다. 레이몬드와 섹스하면 곤란해질 것을 초반이라고 몰랐던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카이로가 신경 쓰여 레이몬드를 멀리 한다?
모순이다.
카이로가 뭐라고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초기만 해도 카이로는 그저 시스템의 퀘스트를 깨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그다음으로는 여러모로 쓸 만한 상대였고. 그 정도로는 레이몬드나 라스카와도 별다를 것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리체는 카이로에게 유해지는 스스로를 똑똑히 인지했다.
‘그날 새벽부터였을 거야.’
황태자궁에서 나왔을 때.
알게 모르게 지쳐 있던 자신을 책하는 말 없이 안아 주던 카이로가 퍽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그릇이 큰 남자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는 그녀에게 이 차원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리체도 그만큼의 신의는 지키고 싶었다. 약간 남은 아쉬움까지 털어 버린 그녀가 확실히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 이런 일이 생겼으니 레이몬드 님은 다시 이델리 그레이스에게 갈 수도 있잖아요? 이미 신뢰가 깨졌는데 그런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이어 가겠어요. 전 신뢰를 대단히 중시한답니다. 레이몬드 님을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
차분한 대답이었고, 적절한 대응이었다.
그녀 스스로는 레이몬드와 자신이 이런 말을 나눌 사이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녀와 달리 레이몬드는 이 관계를 썩 중요하게 여긴 모양이니. 통상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귀책사유는 바람을 피운 당사자에게 있다. 리체는 이 점을 들어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기로 마음먹었다.
‘양심이 있다면 통하겠지.’
심드렁한 마음을 숨기고 리체는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눈이 살며시 커졌다.
레이몬드가 무릎을 꿇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무릎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리체는 가슴이 철렁했다. 붉은 눈동자가 흘려보내는 눈물은 당연한 말이지만 투명했다. 그는 서럽게 울었다. 커다란 사내가 눈물을 펑펑 쏟는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라 리체는 얼어붙어서 눈만 끔벅거렸다.
“뭐든지 하겠어.”
“…….”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니, 씨발, 이건 거짓말이야.”
횡설수설하던 그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리체를 붙들고 싶지만 마음에 없는 말은 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마음이 드러났다.
“날 버리지 마.”
“…….”
“안아 줘. 안고 싶어. 나 아무래도 널……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아.”
리체는 흠칫했다. 그걸 보고 레이몬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 믿겠지만, 씨발, 나라도 안 믿겠지만 이런 마음은 진짜 처음이라고. 예전에 내가 여자들과 어떻게 뒹굴었는지는 생각도 안 나. 머리통이 이렇게 복잡했던 적이 없어.”
“…….”
“똥 싸다가도 네가 생각나는데, 이런 내가 정상이야? 나도 내가 낯설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
더듬거리며 고백하는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갔다. 뺨을 타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어지간한 말로는 포기하지 않을 기세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리체의 표정이 변했다. 연구 대상자들을 대할 때 으레 짓던 가식적인 표정이 아니라 심드렁해하고 무심한 본연의 그 표정이었다.
울고 애원한다고 마음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타 차원 실험체 중에 불쌍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 중 리체의 동정심을 산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동안 도움이 되었던 공로가 있으니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가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까지 한다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리체의 마음엔 동정심이 단 한 톨도 없었다. 매몰찬 말이 혀끝에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
그 말에 리체는 혀를 살짝 깨물었다.
“뭐든지?”
슬쩍 묻자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못 박힌 시선을 느끼며 리체는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사람이 필요했다. 입이 무겁고, 어떤 어렵고 위험한 상황이라도 감수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사람 말이다.
돈으로 그런 이를 사는 건 운이 따라야 했다. 어려운 일임을 알면서도 사장에게 부탁했던 건 다른 대안이 없어서였다.
차원 이동 마법은 획기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안전성이 검증되어 있지 않았다. 간단한 마법 하나 새롭게 만드는 것도 힘든 일일진대, 무려 차원을 건너뛰는 일이지 않은가. 그라우지가 아무리 마법의 대종사라 일컬어진다 하더라도 안정성은 필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그녀는 차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지, 차원의 톱니바퀴에 갈려 산산조각 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이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라우지는 동식물에 인식 마법을 걸면 된다고 방법을 일러 주었지만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리체도 그 의견에 수긍했다. 차원을 넘어서까지 그 마법이 유지가 될까? 마법의 메커니즘은 신비했고, 리체는 마법의 효용성은 인정했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사람을 이용하면 좋을 텐데.’
이런 위험한 일에 몸을 바쳐 줄 사람을 찾는 건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이다. 리체가 무릎 꿇은 레이몬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희망을 느낀 레이몬드가 젖은 눈을 크게 떴다. 지난날 이델리에게 바쳤던 관심이 모조리 그녀에게 쏟아졌다. 열정과 정욕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남자. 리체의 눈에 비친 레이몬드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쓸모가 있다.
“말했다시피 당신에 대한 내 신뢰는 깨졌어요.”
“갚아 나갈게.”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할까요. 날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데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지.”
“내가 당신을 죽을 자리로 내몬다면?”
리체의 목소리는 의미심장했다. 위험한 실험에 참여하는 임상 실험자들은 실험의 위험성을 사전에 고지받을 권리가 있다. 그 어떤 필요한 실험에서도 리체는 그건 숨긴 적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안위에 관련된 문제에선 늘 솔직했다. 그녀도 그 정도의 도리는 지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응. 당연히.”
“그렇게 쉽게 대꾸하면 오히려 믿음이 안 가는데.”
리체는 시큰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음이 양팔 저울처럼 이쪽으로 기울어지다 저쪽으로 기울어지기를 반복했다. 그걸 귀신같이 눈치챈 레이몬드는 점차 초조해졌다.
“진심이야.”
“…….”
“어차피 지금은 산송장과 다를 것 없다고.”
리체는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마음이 조금 기울었다. 사람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레이몬드를 이용하는 게 적절한가 싶어 망설여진다.
그는 그녀와 정반대로 다른 사람이었다. 가능성 낮은 뭔가에 부나방처럼 달려들다 장렬히 산화하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
‘이델리에게도 그랬겠지.’
마음을 얻기 힘든 타입에게 더 열광하는 취향이 아닌가. 더 어리석게 느껴졌다.
리체는 어깨를 으쓱였다.
“실험을 하나 하고 있어요. 차원 이동에 관한.”
“차원 이동? 그게 뭔데?”
레이몬드가 눈을 끔벅였다. 그는 차원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무식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차원의 개념은 그만큼 낯설었으니. 게다가 레이몬드는 마법이나 학문에 관심 없는 전형적인 기사 타입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에 잠긴 리체가 턱을 매만졌다.
“쉽게 말하면 공간 이동 같은 거예요. 기존의 마법과 달리 아주 먼 거리를 이동하는 마법이죠. 공간 이동 자체도 쉬운 마법이 아니란 건 아나요?”
비교적 흔하게 알려진 마법이라 레이몬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원 이동은 공간 이동과는 비교할 수 없이 위험해요. 난 이 마법을 사용해야 하고요. 안정성을 시험해 봐야 하는데, 그걸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
“날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건 이런 의미인데.”
리체의 어조는 시종 고저 없이 담담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죽을 자리를 권유하는 중이었지만, 리체는 무심하기만 했다. 어찌 됐건 그녀는 선택권을 주었다. 목숨을 대가로 자신의 곁에 있을 건지,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가든지.
‘어느 쪽이어도 나쁘지 않아.’
얼핏 인간의 마음이 없는 것 같지만, 바로 이 냉철한 판단력이 본 차원에서 리체를 중용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레이몬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상대를 붙잡기 위해 그냥 해 본 말인데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 놀란 걸까. 리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레이몬드가 입을 열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차원 이동 마법……. 너, 멀리 가려는 거야?”
‘지금 그런 게 궁금할 때인가?’
리체의 황당한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몬드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확 밝아졌다.
“내가 그걸 시험한다면, 만약 성공한다면, 네가 가는 곳에 나도 갈 수 있는 거군.”
“…….”
“그렇지?”
열렬하게 반짝이는 눈에 리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좌표는 변하지 않을 테니 만약 테스트가 성공한다면 레이몬드도 본 차원에 떨어지게 되겠지.
‘근데 뭘 저렇게 좋아하는 거지?’
리체는 희한한 인종을 보는 눈으로 화색을 띠는 레이몬드를 응시했다.
“그런 거라면 좋아. 얼마든지 시험에 응하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놀러 가는 게 아니에요.”
“응. 알아.”
“잠깐 깔짝이다 말 것도 아니고요.”
“안다니까.”
“모르는 것 같아서.”
“차원 이동 마법이라는 미완성 마법이 있고, 마법을 시범 운영하는 대상으로 날 쓰겠다는 거 아니야?”
정확했다.
“맞아요.”
“얼마든지 할게.”
레이몬드는 냉큼 대꾸했다. 리체는 인상을 썼다.
“이 일의 위험성을…….”
“알아. 위험하단 거.”
레이몬드의 붉은 눈이 순진무구하게 빛났다. 날티 나는 인상에 어울릴 법한 눈빛은 아니었지만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얼굴에 반짝이는 눈동자는 일견 순수해 보였다.
“난 어차피 네가 아니면 살 재미가 없는 몸이야.”
“과장하지 말아요.”
리체가 피식 비웃자 레이몬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어? 각인은 말이야.”
“…….”
“도장이 찍히는 거야, 리체.”
그녀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과장도 호들갑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서술하듯 레이몬드는 담백하게 말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은 목숨이라고 선언하는 거라고.”
“…….”
“말했지? 처음엔 나도 우습게 여겼다 했잖아. 근데 그게 아니야. 난 지금 네가 없으면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아. 말라 죽어 갈 거야. 네가 날 안아 주지 않는다면.”
“…….”
“이러는데 네 제안?”
큭, 그가 거칠게 웃었다.
“그깟 죽음이 대수겠어.”
목소리에 가득 배인 득실득실한 열기가 부담스러운 한편, 리체는 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우습지도 않아, 리체. 씨발, 내가 겁먹는 건 네가 날 안아 주지 않는 것뿐이야…….”
“자고 싶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네요.”
리체의 헛웃음에 레이몬드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에 순수하고도 투명한 욕망이 고여 들었다. 몽롱한 눈빛으로 중얼거린다.
“응. 난 지금도 상상해. 너랑 좆 빠지게 뒹굴고 싶어. 하, 그뿐인 줄 알아? 네 옷을 찢어발기고 커다랗고 뽀얀 젖통에 얼굴을 묻고 미친 듯이 핥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
노골적인 말에 리체는 떨떠름해졌다. 당신, 미친 것 같아요. 가식적으로 굴 때와 달리 시니컬한 말투였지만 레이몬드는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유력가의 자제로서 거만했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욕해도 좋아.”
“…….”
“네가 뭘 해도 좋아.”
“…….”
“말했지. 나 네가 좋다고.”
레이몬드가 한 손을 뻗었다.
“아마 사랑하는 것 같아.”
일순 리체의 말간 얼굴에 고민이 스쳤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리체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레이몬드의 검지를 쥐었다. 왕께 간택이라도 받은 듯 레이몬드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리체의 손등을 덥석 붙잡은 다음 순간, 리체의 몸이 그에게로 풀썩 떨어졌다.
* * *
할짝할짝. 두툼한 혀가 빙판 위를 걷듯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흐응.”
리체는 고양이처럼 엉덩이를 바르르 떨며 신음했다. 엎드린 그녀의 다리는 활짝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 레이몬드가 바싹 달라붙은 모양새였다. 레이몬드의 모양 예쁜 입술 사이로 빨간 혀가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씻지 않았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리체의 몸 곳곳을 핥아 대는 혀였다. 분홍빛 소음순이 혀끝에 의해 이리저리 젖혀졌다. 잔뜩 젖은 민감한 살점은 막 피어나는 꽃잎처럼 생기를 띠었다.
리체의 다리 사이는 레이몬드의 타액과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애액으로 완전히 푹 젖어 있었다. 미끈한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다가 풀썩 꺾였다. 양팔로 그녀를 단단히 지탱한 레이몬드가 혀를 길게 내밀어 통통한 엉덩이 사이의 골을 핥아 올렸다. 엉덩이가 바르르 흔들린다.
그는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빼고 주먹으로 축축한 입술을 훔쳤다. 그러곤 힘 빠져 침대에 엎어진 리체의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삽입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황. 특별히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느끼는 것만으로 진이 다 빠져 버린 그녀는 그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렸다.
꼿꼿하게 선 뜨거운 성기가 리체의 허벅지에서부터 허리까지 훑으며 올라갔다. 이델리와 하지 않았다는 고백이 사실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자마자 싸 버렸던 성기였다. 그는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갈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씨발, 이대로는 몇 번을 싸도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
거칠게 욕설을 중얼거리면서도 레이몬드는 성급히 성기를 들이대지 않았다. 어지간히 갈급할 텐데, 삽입보다도 리체의 온몸을 핥는 데 집중했다. 짐승이 제 짝에게 마킹하는 것처럼 집요했다.
가슴을 침 범벅으로 만든 후 팔을 들어 팔뚝의 안쪽 여린 살에 입술을 묻었다. 혀끝을 내밀어 흰 살을 쓸자 간지러운 리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아…….”
그 반응을 즐기듯 근처를 배회한 혀가 겨드랑이로 향했다. 털이 거의 나지 않은 겨드랑이의 살에 혀가 닿자, 묘한 감각에 리체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었다. 그녀의 온몸을 녹진하게 만든 후에야 혀가 떨어졌다.
힘이 다 떨어진 리체는 침대에 정자세로 누운 채 숨을 헐떡였다. 삽입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피곤하다니…….
레이몬드가 너무 정열적으로 굴어 리체는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갑자기 손이 위로 올라갔다. 눈을 뜨자 레이몬드가 그녀의 양 손목을 붙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훤히 드러난 그녀의 가슴과 늘씬한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타액으로 질척하게 젖은 지금, 리체는 묘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꼭 맹수의 먹음직스러운 한 끼 식사가 된 느낌이었다.
그녀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의 크고 빨간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른 팔다리와 날씬한 배, 허리. 풍만한 가슴과 둥근 어깨에도 시선이 닿았다. 그 눈이 제 얼굴까지 올라오자 리체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왜요, 빨리 박고 싶어요?”
약간 쉰 목소리로 하는 말에 레이몬드의 목울대가 크게 도드라졌다.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변한 것을 알아차린 눈빛이 흔들렸다. 한 꺼풀 감춰 둔 것처럼 속내를 알 수 없었던 리체가 지금은 한 발로 그의 어깨를 누를 것처럼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레이몬드는 침을 삼켰다. 그녀가 변했다면 그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라면 건방지다고 일갈하며 검이든 채찍이든 꺼냈어야 할 오만한 성정의 도련님이 지금은 무릎 꿇고 그녀의 발이라도 핥을 것 같았다. 갈등하던 레이몬드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큰 손에 가슴이 꽉 찼다.
리체는 눈살을 찌푸리고 가는 비음을 흘렸다. 야릇한 신음에 레이몬드의 성기가 한 차례 크게 꺼떡거렸다.
“응…….”
한발 늦게 레이몬드가 얌전히 대꾸했다.
“박고 싶어. 미친 듯이 박아서 널 내 좆물로 범벅을 만들고 싶어.”
페로몬이 물씬 흘러나왔다. 아주 짙고 농밀한 페로몬이었다. 숨이 막히는 듯해 리체는 잠깐 숨쉬기를 참았다.
‘각인을 해서인가?’
레이몬드의 페로몬이 조금 변한 듯했다. 바닷가의 비린내가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점이 매력적이었던 페로몬이 한층 산뜻해졌다. 시럽처럼 달콤하기도 했다. 그런 한편 농도는 더 끈끈해져서, 무형의 기운이 껍데기가 생긴 것처럼 사지를 잡아당겼다.
리체가 그의 변화한 페로몬을 흥미롭게 여길 때, 레이몬드의 두 눈은 고정이라도 된 듯 그녀에게 못 박혀 있었다.
“너는 어때?”
“읏!”
“이렇게 해 주는 게 좋아?”
한 손으로 가슴을 매만지며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유두를 슬슬 문질렀다. 흐응. 리체가 자동적으로 비음을 흘렸다.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자 레이몬드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목을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야릇하게 애무하며 다시 물었다.
“좋아?”
그는 애무를 곧잘 하는 편이었다. 성격이 급해 다짜고짜 성기부터 처박을 것 같지만 의외로 애무를 진득하게 한다. 그게 여자들이 그와의 잠자리를 잊지 못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매너가 좋다는 건 아니었다. 애무를 길게 하는 건 단순히 그가 그렇게 하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욕망이 많고, 그걸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잠자리 파트너에게 퍼붓는 줄기찬 애무도 제 욕심껏, 그렇게 하면 더 흥분되기 때문에. 그걸 사랑받는다고 착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레이몬드의 조롱을 받고 나가떨어졌다.
제 좋을 대로 하는 레이몬드가 파트너가 느끼는지를 세심히 고려하는 배려심이 있을 리가. 그런 이기적인 모습은 리체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확실히 전에는 그랬었다.
각인하면 사람이 달라지나.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려는 찰나.
“자지로 안쪽을 긁어 줬으면 좋겠어? 근질거리지?”
천박한 어휘에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레이몬드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가슴이 아프게 쥐어짜졌다. 손가락으로 살살 돌려져 달아오른 가슴은 통증마저 쾌감으로 받아들여, 리체가 날카로운 신음을 흘렸다.
레이몬드가 핏발 선 눈으로 헐떡였다. 입가에서 침이라도 흘릴 것 같았지만 입술은 매끈하니 멀쩡했다. 대신 허공에서 꺼떡거리는 좆대가리에서 투명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더는 못 참을 것 같아. 네 안에 파묻히지 않는다면 거기서부터 썩어 들어갈 거야.”
“…….”
“무서워 죽겠어.”
“무슨, 핑계는…… 흑!”
두툼한 좆대가리가 음핵을 파헤치듯 눌렀다. 민감해진 살점에 가해진 자극이 가히 벼락과도 같아 리체는 자지라졌다.
“진짜인데.”
“…….”
“터질 것 같아. 벌써 몇 번을 갔는지 몰라.”
자신이 셌을 때는 두 번 정도였는데, 언제 또…….
뜨거워지는 눈을 깜박인 리체가 손을 뻗어 레이몬드의 가슴을 밀어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몸이 너무 민감해…….’
유두가 좀 만져지고 음핵이 짓눌려졌다고 온몸의 힘이 쫙 빠질 정도로 느꼈다. 레이몬드의 애무가 지나치게 짙고 끈질겼던 탓일까? 아니면 그의 변화한 알파 페로몬 때문에?
레이몬드는 온몸을 진득하게 핥는 와중에도 다리 사이는 건드리지 않았으므로, 리체의 여성은 톡 건드리면 꽃잎이 활짝 열릴 꽃봉오리와 같은 상태였다. 레이몬드는 달콤한 애액을 줄줄 흘리고 있는 다리 사이에 좆기둥을 비비적거렸다.
“보지가 흥건해, 리체. 기대하고 있었어?”
“그런 적, 없…… 하앙!”
레이몬드가 좆대가리를 붙잡고 보지를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훑어 올렸다. 발기한 음핵이 꼿꼿해졌다. 턱을 젖힌 리체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레이몬드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흥분한 리체를 핥듯이 바라보았다. 보지를 위아래로 훑는 자지의 움직임이 보다 섬세하고 리드미컬하졌다. 리체가 허리를 뒤틀었지만 어찌나 끈끈하게 얽혔는지, 교접한 성기가 풀어지는 일은 없었다.
끈질기게 음핵과 대음순을 헤치며 뒤집어놓자 리체는 ‘히익’ 허리를 떨었다. 흥분제를 음부에 가득 부어 놓은 것처럼 건드리기만 해도 갈 것 같았다. 리체의 눈꼬리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 가련해 보였다. 레이몬드는 악당처럼 밀어붙였다.
“자지가 좋아? 어? 리체. 말해 봐.”
“…….”
“자지가 좋지? 내 자지가 좋은 거지? 리체. 리체.”
리체가 입을 크게 벌렸다.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던 흥분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끝에 가서는 팍!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흥분이 지나치면 되레 두려워지는 법이었다. 리체는 마구잡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아. 좋아요!”
그 순간, 딱딱하기가 막대기 같은 좆기둥이 리체의 녹진한 구멍을 파고들었다.
“……아!”
리체의 벌어진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살덩이가 아닌 막대기로 쑤시는 것처럼 딱딱한 것이 안을 빈틈없이 꽉 채웠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레이몬드는 한 팔로 리체를 끌어안고 힘주어 콱, 하고 좆대가리를 처넣었다. 안 그래도 내벽 끝까지 닿아 있던 자지가 자궁구를 세차게 두드리니 리체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레이몬드가 몸을 떨었다.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사정한 것처럼 반응이 격렬했다. 그가 그녀의 몸을 탐닉하며 몇 번이고 싸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진득한 정액을 뿌려 댔을 것이다. 떨리는 한숨을 쉬려는 찰나 레이몬드가 울컥, 하고 사출했다. 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레이몬드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내게서 내 냄새가 진하게 났음 좋겠어. 가득 싸서, 아무리 씻어도 내 냄새가 흐려지지 않게…….”
“…….”
“그럼 죽어도 좋아.”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눈을 보며 리체는 점점 무서워졌다. 각인이란 맹목적인 거였다. 알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본 대상을 각인하는 오리보다 더하게, 시간이 지나도 그 대상이 아니면 발정하지 못하는, 각인한 대상과는 피부를 맞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사정할 수 있는, 그런 희한한 현상이었다. 왜 뭇 사람들이 각인을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 칭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레이몬드가 그녀의 목덜미를 핥았다. 지나치게 맹목적인 눈빛이 그를 한결 더 짐승처럼 보이게 했다. 리체는 그의 손을 잡은 게 과연 잘한 결정이었는지 고민스러웠다. 레이몬드는 그녀가 딴 생각에 빠진 걸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쾅!
“악!”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리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레이몬드가 다시 허리를 뒤로 크게 띄웠다가 앞으로 밀어냈다. 입구까지 빠져나간 딱딱한 자지가 쑤욱 들어가 자궁구를 강하게 찔렀다. 더는 속도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레이몬드가 미친 듯이 추삽질을 했다.
팍, 팍, 팍!
쑤걱 대며 자지가 입구를 줄기차게 마찰했다.
“아, 아앗, 흣, 아, 잠, 아아, 아!”
리체는 그가 찌르는 대로 신음을 터뜨렸다. 처음 몇 번은 쾌감보다는 통증이 느껴졌다. 딱딱한 귀두가 느끼지 못하는 애꿎은 곳을 찌르니 아프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과연 눈치가 빨랐다.
그녀가 애무할 때와 달리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방향을 바꾸었다. 찌르는 방향은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다. 아래를 향하던 자지가 몇 도쯤 위로 올라온 것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을 찌르자, 리체는 물 밖에 내쳐진 물고기처럼 입술을 빠끔거렸다.
“……하, 아앙!”
달콤한 비음에 레이몬드의 눈이 번뜩였다. 집중적으로 그 부분을 공략했다. 단단한 자지 끝으로 푹푹 찌르자 리체의 눈동자에 금세 눈물이 들어찼다. 흥분으로 인한 생리적 눈물이었다.
“큿, 리체, 내가, 내가 좋은 거지? 내 자지라도, 좋은, 흣, 거지?”
추삽질을 계속하며 레이몬드가 그녀의 가슴을 한가득 쥐었다. 리체는 몸이 흔들림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그의 말에 대꾸한 것이 아닌데도 레이몬드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쾌감에 잘생긴 눈매가 일그러졌다.
“크윽.”
한 손으로는 풍만한 가슴을, 다른 한 손으로는 벌어진 골반을 꽉 붙잡고 레이몬드가 강하게 쳐올렸다.
푹!
리체의 고개가 팩 뒤로 젖혀졌다.
“……아아!”
희고 가녀린 목에 이슬처럼 맺힌 투명한 땀방울이 주룩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