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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10/25)

10장

쾅!

치료실의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성큼성큼 지옥의 전사처럼 들어선 카이로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부를 향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황궁 치유술사가 벌떡 일어났다. 카이로가 리체를 데리고 왔을 때 걱정 말라 안심시켰던 남자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솔직한 반응이었다.

카이로는 남자다운 눈을 가늘게 떴다. 치료실의 문을 열어젖혔을 때부터 서늘함이 스쳤던 뒷덜미의 감각. 그는 그런 종류의 감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리체는 이곳에 없다.

카이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치유술사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히, 히익! 자, 장군. 왜 이러십니까!”

카이로는 머리끝까지 솟구친 화를 다스리려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늘한 치료실 냄새가 콧속으로 빨려들었다. 각종 약품과 병자의 체취가 섞인 가운데 리체의 향은 없었다. 복숭아 향 오메가 페로몬뿐만 아니라, 그녀의 체취도 존재하지 않았다. 꽤 오래 전에 이곳을 비웠다는 의미다.

카이로가 치유술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언뜻 차분해 보이는 눈빛이지만 소름이 끼치는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치료실에서 연약한 궁정인들이나 손님들의 상처만 돌보았던 유약한 치유술사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어딨나.”

카이로의 팔뚝 근육이 불거졌다. 치유술사의 발끝이 땅에서 가뿐히 떨어졌다. 소름 끼치는 부유감에 치유술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 자, 장군! 이러지 마십시오! 사, 살려 주십시오!”

“말해.”

“…….”

“죽고 싶은가 보군.”

높낮이 없이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위압적으로 구는 것보다 훨씬 실감나게 들렸다. 목전에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치유술사가 눈을 번쩍 떴다. 황궁의 치유술사는 준귀족 신분이었지만 이 카이로 스트리고가 재판을 두려워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일도 아니고 그 카이로가 이렇게 예민하게 굴고 있다니. 치정 문제는 황제도 자유롭지 못하다니 과연 그 짝이었다. 보통의 사내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상황이긴 했다. 심지어 빼앗기만 했지 빼앗겨 본 적은 없는 대장군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같은 사내로서 카이로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었기에 치유술사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래도 말이다. 하찮은 자신이 여기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억울함을 호소하기엔 카이로의 추상 같은 분노가 전신을 꽁꽁 옭아맸다.

재판이 열린다 할지라도 자신이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섣불리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자신이 입을 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딱 그런 꼴이었다.

치유술사의 마음에 수많은 번뇌가 스쳐 지나갔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에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

카이로가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치유술사는 발작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돼먹지 않는 말을 해?”

“태자 전하가 원하시는데 일개 치유술사로서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비명처럼 악을 지르자 멱살을 잡은 손이 멈칫했다.

“뭐라고?”

치유술사는 극도의 공포와 불안으로 벌겋게 변한 눈을 강하게 감았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눈꺼풀에 뭉개졌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이 자리는 모면하고 봐야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데리고 가셨어요.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치유술사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탁, 카이로의 손이 펴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치유술사는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뒤로 엉덩이 걸음을 옮겼다. 두려운 시선이 카이로를 향했다.

이미 치유술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게 된 카이로는 리체가 누워 있었지만 지금은 텅 빈 흰색 침상 위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나직이 읊조리는 목소리에 버석한 혼란이 실렸다.

* * *

“하아아아앙!”

거대한 남근이 늪을 파고드는 것처럼 음부 깊숙이 박혔다가 뽑혀 나왔다.

질척한 구멍에서 나올 때마다 촉촉한 붉은 속살이 딸려 나왔다. 마치 자지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따라 나온 속살이 번들거렸다. 자지를 품었을 땐 빨판처럼 오물거렸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몇 번 왕복 운동을 하기도 전에 사정감을 느껴 사출했을 테지만 지금 그녀의 몸을 짓누르는 이는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나가지 말라고 더 쑤셔 달라고 소리 없이 유혹하는 속살을 뿌리치며 귀두까지 빼낸 남자가 다시 강하게 삽입했다.

“하아앙!”

리체가 자지러졌다. 지나친 쾌감에 눈을 까뒤집은 그녀의 눈매는 생리적인 눈물로 젖어 있었다. 활짝 벌린 다리 사이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성기가 기둥처럼 박혀 있음에도 열에 들뜬 여체는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더! 더! 하고 외치는 음란한 몸짓이었다.

“미치겠군.”

입술을 비트는 얀테의 파란 눈에 핏발이 솟았다. 단단히 굳은 입매가 파르르 경련했다. 지나친 흥분으로 머리꼭지가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관자놀이에서 이마까지 솟은 선명한 핏대가 손가락으로 더듬을 수 있을 정도로 굵었다.

“아, 안아 줘, 안아 줘! 멈추지 말고!”

칭얼거리며 훌쩍이는 리체의 땀에 젖은 머리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하게 얀테에게 매달렸다. 미친 듯이 꿈틀거리는 내벽의 조임에 얀테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크읏.”

뼈마디 굵은 손이 리체의 하얀 허벅지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겨 자지를 처박자 리체는 아픈 내색도 없이 신음을 길게 흘렸다. 귓가의 솜털이 온통 곤두설 만큼 야릇하고 색스러웠다. 얀테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고조된 기분과 흥분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는 그의 잇새에서 거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극우성 알파의 특권이라고 한다면, 다른 오메가를 색에 미친 미치광이처럼 만들 수 있지만 그 스스로는 고고함을 지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에게도 오메가 페로몬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만한 절제력이 있다. 그럼에도 얀테는 손바닥에 손톱을 박으며 참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발정기가 온 리체처럼 색에 미친 짐승이 되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짐승처럼 구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이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하, 하앙. 조, 좋아……!”

그의 시선은 제 음부를 단단한 장골과 치골에 비비적대며 흐느끼는 음란한 리체에게 못 박혔다.

기억이 세 시간 전쯤으로 되돌아갔다.

먼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건 무의식이었다. 일종의 직감이 발동했다고 봐도 좋았다.

리스타우프 대공과의 활쏘기 내기에서 시위를 당겼다가 놓는 순간, 복숭아 향기를 맡은 것 같았다. 시선이 팩 돌아갔다. 익숙하지 않은 향기였다. 그러나 잊을 수 없었다. 뇌리에 단단히 기억된 페로몬이었다.

1년 전, 자신을 죽이려 추격하는 황자들의 시위를 피해 이블린에 숨어든 적이 있었다. 몸을 숨긴 중에 러트가 왔다. 우연찮게 동굴에 제 발로 찾아온 여자를 상대로 러트를 보내었다. 극히 만족스러워 본국으로 돌아갈 때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자와 그의 시위들을 절벽 밖으로 떨어뜨려 죽이고 돌아왔을 때 동굴은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잔향처럼 남은 페로몬을 기억했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이 떠오르자 얀테는 순식간에 발기했다. 속이 쓰렸다. 그 후부터 그 여자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른다.

혹시 그녀가 여기 있는 걸까?

하나 시선이 닿는 곳엔 여리여리한 오메가 대신 건장한 기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이로? 저기서 뭐 하는 거지?’

그의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그리고 이내 그가 누군가 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황태자로서, 그의 주군으로서 흥미가 돋았다.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까지 왔는데 저는 보러 오지도 않고 데이트 중이라? 물론 부르지 않았는데 알아서 오지 않았다고 신하를 책하지는 않지만, 카이로라면 다른 할 일이 있었어도 한 번쯤은 들렀을 텐데.

게다가 지금은 리스타우프 대공까지 있지 않은가. 지금 군부의 실세가 카이로 스트리고라면 리스타우프 대공은 이전 시대의 실세이자 뭇 노병들의 전설인 존재. 카이로가 흥미를 가질 상대가 아닌가.

‘누구지?’

카이로의 이상 행동은 그가 안고 있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왠지, 얼굴을 꼭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내심 수하의 여자를 탐하는 상관이 된 것 같아 곤혹스러웠다.

망설임은 짧았다. 얀테는 궁정인을 시켜 카이로를 불러오게 했다. 짓궂게 굴 필요는 없지만 데이트하는 상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을 용의는 충만했다.

카이로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궁정인으로부터 황실 치료사가 카이로를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얀테는 리스타우프 대공과 환담을 나누는 카이로를 흘끗하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일어났다. 황실 치료사에게 어찌된 일이냐 묻자 그는 노심초사하는 얼굴로 쉽게 털어놨다.

‘스트리고 장군님께 전해야 합니다. 그분의 일행이 지금 발정기가 왔습니다!’

흥미로웠다. 그때까진 그뿐이었다.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

“안아 주세요, 제발.”

열에 들뜬 애처로운 목소리.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과거의 목소리가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강하게 찔러 넣어 주면 들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울던 소리, 슬슬 문질러 주면 끙끙거리던 앓는 신음.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소리만 떠올려도 흥분되던 순간이었는데.

동굴에서의 한 달은 얀테에게 음란한 천국이었다. 꿈처럼 사라져 버려 더 욕심나던 천국.

유력한 황위 계승자들을 쳐 내며 목숨의 위협을 받던 순간에도 그녀를 은밀히 찾아다니던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는 알파였고, 적잖은 오메가를 겪어 보았다. 하나같이 야하고 아름답고 섹스에 적극적이었다. 음란하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베타인데다가 섹스라곤 해 본 적 없는 듯 뻣뻣하게 굴던 여자를 이렇게 찾아다니는가. 그녀를 찾지 못하는 1년 동안 구체화되던 의문은 지금 깔끔하게 해소되었다.

“하아, 하아.”

물기 어린 색스러운 목소리. 고양이가 갸르릉 대는 귀엽고, 애가 타는 음성.

속에서 자제심이라는 게 얇아지는 듯하여 얀테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발정이 난 오메가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의 다리 한쪽을 꼭 붙잡고 툭 튀어나온 무릎에 부푼 가슴을 문질렀다. 매끈한 발등은 이미 음부로 비벼지고 있었다.

그는 붉은색 벨벳으로 만든 가벼운 펌프스를 신고 있었다. 리체의 애액이 흠뻑 스며들어 축축해지는 얇은 신발을 느끼며 얀테는 탄식했다.

제대로 발정이 나 있었다. 베타였을 때의 연약한 모습이 아니라 오메가로서 적극적으로 쾌락을 탐하는 모습.

“그래. 오메가가 되었나…….”

얀테의 조각 같은 눈매가 살짝 경련했다. 다시 보길 바랐지만 이런 꼴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의외성에 가슴이 크게 울렁거렸다.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지만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환희였다.

‘기쁘다.’

그는 지금 기꺼워하고 있었다.

‘기뻐.’

왜냐하면 깨달았기 때문이다. 베타였던 리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동굴에 남은 잔향은 네 페로몬이었어.’

그토록 찾던 하진이, 사라진 기간 동안 자신의 맞춤형 암컷으로 변태했다는 사실. 도망친 건 괘씸했지만 이런 꼴로 돌아오다니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나! 얀테의 속에서 음험한 기쁨이 솟아올랐다.

얀테 M. 루세이노. 다른 쟁쟁한 형제들을 제치고 대 도블락 제국의 명군이 될 인재. 성품이 굳건하고 바르며,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그러나 밖으로 알려진 그것들은 모두 이미지 메이킹의 결과였다.

황태자 얀테는 원하는 것을 위해 뱀처럼 몸을 낮추고 기다릴 줄 아는 교활함과 도저히 죽일 길 보이지 않던 형제들을 독사와 같이 살펴보며 기회를 놓치지 않을 줄 아는 집요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음험한 그는 지금, 태자로 책봉당했을 때보다 훨씬 화사한 즐거움에 잠식되었다. 태자가 되었을 때는 노력의 결과를 마침내 거머쥔 것처럼 담담한 느낌이었다면 그렇게 애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던 그녀를 예기치 않게 만난 기쁨엔 못 견딜 만큼 심장이 펄떡거렸다.

“으응, 응, 응.”

얀테가 안아 주지 않자 급기야 발등에 음부를 빠르게 문대며 쾌감을 느끼려 하는 리체의 턱을 잡아 올렸다. 혼탁한 파란색 눈동자에 열기가 득시글거렸다. 1년 전 아침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쉼 없이 안겼던 그때보다 뜨겁고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얀테는 만족감 가득 배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깐의 실수로 놓쳤던 내 작은 새가 이렇게 돌아오게 되다니.”

감회에 젖은 그는 아끼는 보석을 앞에 둔 기분으로 섣불리 손을 뻗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기분을 좀 더 만끽할 수 있을까, 골몰하려던 차에 그의 시원한 눈매가 상하로 커졌다. 푸른 눈동자가 확장된 채 리체에게 못 박혔다. 눈동자 깊은 곳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상의를 죽 잡아 뺀 리체가 창부처럼 칭얼거렸다.

“안아 달라고요.”

하얀 젖가슴을 옷 밖으로 꺼낸 상태로. 가슴에 꽃처럼 얹어진 열꽃에 얀테는 불쾌감을 느꼈다.

“안아 달라고?”

혼잣말하는 목소리가 검은 늪처럼 질척했다.

“어리석구나. 그런 당연한 건 애원하지 않아도 돼.”

그는 그녀를 아주 기꺼이 안을 작정이었다.

* * *

리체는 펄펄 끓는 욕탕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자글자글 달아오르고 갈증이 이는 입에서는 뜨거운 콧김이 훅훅 흘렀다.

달뜬 숨이 입 밖으로 흩어지는 게 느껴지고, 땀에 젖은 두 사람의 피부가 찰싹 달라붙었다. 다리 사이에서 뜨거운 기둥이 뱀처럼 왕복 운동을 했다. 들어올 때마다 엄청난 쾌감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나갈 때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안타까웠다.

자지가 주는 쾌감! 왜 오메가들이 그렇게 문란한지 리체는 절절히 깨달았다.

이렇게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이 기분이 좋은데 문란하지 않을 수 있다면 가히 신과 같은 절제력을 갖추고 있을 테니까.

자지, 자지, 자지!

리체의 머릿속은 온통 굵고 긴 검붉은 성기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혐오했을 어떻게 하면 몸을 더 비틀어 쾌감을 극대화할까, 하는 천박한 궁리나 했다. 그런 자신에 대한 경악이 희미하게 들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안 그래도 성적으로 예민한 오메가의 신체는 발정기에 돌입하자 그야말로 이성과 본능이 서로 자리를 맞바꾼 듯했다. 이성이 손톱처럼 변해 버렸고 그마저도 쾌감에만 집중되었다.

리체는 두 손으로 제 가슴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드글드글 타오르는 쾌감을 어떻게든 분출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스스로 큼직한 젖을 콱 쥐자마자 손이 밀쳐졌다.

얀테의 짓이었다. 그가 큰 손으로 대신 가슴을 주무르자 리체는 비명을 질렀다.

“아주 좋아 죽는군그래.”

얀테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즐겁게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곧장 그녀를 황태자의 침방으로 데려간 그는 안아 달라는 리체의 애원에 충실히 응답했다. 그녀를 침대로 집어던지고 덮치듯 내리누른 그의 자지는 리체가 기대한 만큼, 아니, 기대한 것보다 더 훌륭히 그녀를 짓밟고 휘저었다. 리체는 그녀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과 교접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

투정을 부리며 제 손으로 과실 같은 젖꼭지를 튕기려 하자 얀테가 즉시 제지했다.

“안 되지. 스스로 느끼려고 하지 마. 그런 건 닳고 닳은 창부나 하는 짓이야. 물론 하진은 창부지만, 내 전용이니 내가 주는 쾌감만 받아, 하진.”

정신 나간 소유욕이 짙게 깔린 목소리에 리체는 탁한 푸른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생리적 쾌감으로 고인 눈물로 리체의 눈동자가 해변의 조약돌처럼 반질반질했다. 그녀는 그의 말이 주는 기괴한 느낌도 인지할 수 없었다. 다만 얀테가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아프게 쥐자 그제야 입을 뻐끔 벌렸다.

장군과 기사에 못지않다는 얀테의 악력은 거세었고, 그 힘에 짓뭉개진 가슴이 아팠지만 그 통증마저도 쾌감이 되었다.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다. 큰 솥에 가득 고인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얀테는 그 솥에 물을 콸콸 따랐다. 리체는 솥이 엎어지길 기다렸다. 그리하여 거대한 홍수가 온몸을 가득 흘러넘치길 바랐다. 그때에는 쾌감으로 눈도 뜰 수 없을 것이다.

기대가 된 리체는 땀이 촉촉하게 배어나온 허벅지로 얀테의 허리를 강하게 옥죄었다. 그러고는 자지를 품은 채 음부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체액으로 지저분한 검은색 음모가 얀테의 치골을 문지르자 수풀끼리 서로 뒤엉켰다. 검은 털과 황금색 털이 어우러지는 꼴이 지독하게 음탕했다.

얀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1년이 넘어서야 이 손에 되돌아온 그의 작은 새는 기억 속에서보다 한층 음란해져 있었다.

“빌어먹을.”

돌연 얀테가 욕설을 퍼부었다. 허벅지에 힘을 단단히 주고 음부로 그를 비비적대고 있었던 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공격적인 페로몬을 감지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한 하체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아서, 얀테는 머리끝까지 오른 흥분에도 불구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난 네게 이런 걸 가르치지 않았는데.”

얀테가 짓씹듯 중얼거렸다. 그는 리체를 만난 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더러운 걸 배워 와서는…….”

이블린의 외진 숲속이었으니 근처의 마을에서 여자를 사 왔으리라. 아마도 촌무지렁이일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한 달가량 지내는 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 신하가 데려온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알았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비렁뱅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고쳤다. 그녀는 도블락의 말도 알아듣지 못했고 이블린의 말도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궁에 있었더라면 이런 더러운 신분의 여자는 그의 침방 시녀도 되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서 얀테는 그녀를 대충 러트 기간에 이용하여 성욕만 분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안은 지 하루가 훌쩍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수없이 사출하고 페로몬을 만족스럽게 분출한 뒤 되돌아온 이성은 이 보잘것없는 비렁뱅이 여자를 다르게 보이게 했다. 깨끗하고 하얀 피부와 한 손에 넘치게 큰 풍만한 가슴, 낭창한 허리 따위가 욕망을 자극했다.

처음에는 목석같던 그녀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해 갔다. 그가 박아 주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힘들어하고, 지쳐 했었다. 그때 그녀는 그의 전용 창부였다.

“씹물을 가득 퍼부어 줬는데도 지치지 않고 원하다니, 그동안 도대체 몇 놈이나 이 안에 받아들인 거야?”

얀테의 목소리가 싸늘히 가라앉았다. 마디가 굵은 긴 손가락으로 리체의 음부를 느릿하게 쓸었다. 그가 들어 있는 곳이었다. 뜨겁고 촉촉하고 탐욕스럽게 오물거리는 요물.

“건방지게 다른 주인을 모시다니.”

오메가가 되어 있는 그녀를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리 능란하게 허리를 놀리는 모습을 보니 다른 의심이 피어오르지 않을 길이 없었다.

“도대체, 몇 놈이나, 감히 이 안을 맛보았을까.”

얀테는 뚝뚝 끊어지는 말로 리체를 추궁했다. 물론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으응. 많이.”

“뭐?”

리체가 칭얼거리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부드러운 음모가 얀테의 조각처럼 단단한 살결을 빗자루처럼 쓸어 댔다.

“많이 먹었어요. 많이, 많이.”

“……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매끈했던 관자놀이에 핏줄이 팽팽히 곤두섰다. 그럴 거라고 예상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웠지만 그녀의 입으로 듣기까지 하자 황당하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질투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폭력적인 감정이 갈무리된 얀테의 푸른 눈동자가 짙푸른 색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여전히 음부를 비벼대는 리체의 허벅지 바깥쪽을 단단히 붙잡았다. 살이 움푹 파일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흐으응…….”

리체가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놓아줄 얀테가 아니었다. 그는 리체의 허벅지를 제게로 바짝 끌어당기고 속삭였다.

“다른 놈의 씹물을 얼마나 집어삼켰든 상관없어. 넌 내 오메가고 내 씨를 품을 테니. 다시 놓칠 줄 아느냐?”

“……아!”

새된 비명이 튀어 나왔다. 허리가 들린 자세 그대로 얀테가 자지를 콱 박아 넣었다. 둥글어진 몸체에 직각으로 꽂아 넣은 자지가 흉포하게 리체의 안을 긁어 댔다. 자궁을 뚫을 듯 강력한 힘이었지만 리체는 그 자비 없는 움직임에도 엉덩이를 꿈틀대며 호응했다.

“제멋대로 움직여 대긴. 이렇게 버릇이 없어져서야.”

입술을 뒤틀어 웃은 얀테가 손으로 그녀의 관능적인 둔부를 세게 내리쳤다.

찰싹!

한 대만으로 붉은 손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리체가 엉덩이를 부르르 떨었다. 얀테는 탄력적인 엉덩이를 꽉 쥐고 허리를 아래로 강하게 내렸다. 끝까지 닿았던 귀두가 안쪽으로 거칠게 진입했다. 뿌리를 남겨 둔 채 얀테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지 않은 탓이었다.

처음에는 좋다고 가쁜 숨을 흘렸던 리체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끙끙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픈 모양새였다.

얀테는 섣불리 안으로 진입하지 않고 리체의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가 쪼개질 것처럼 반으로 벌려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틈 하나 없이 자지에 달라붙어 있던 구멍에 공간이 생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얀테의 손가락이 안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귀두가 안쪽 끝까지 닿았다. 뿌리까지 자지를 삼킨 리체의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홉뜨였다. 달싹, 벌어진 입술에서 튀어나온 교성이 꼬리를 길게 끌었다.

“아아아앙!”

얀테는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색스러운 신음에 전신이 오싹오싹했다.

* * *

철썩철썩. 파도가 온몸을 후려치는 것 같다. 리체는 몸이 흔들리는 감각을 그렇게 인지했다. 무언가 파도처럼 몰아쳐 오고 있다.

사지가 뻐근하고 무거웠다. 그런 한편 다리 사이는 기묘하게 뜨겁다. 발이 땅에서 1미터는 떨어진 것처럼 기이한 부유감이 현실을 현실 같지 않게 만들었다.

섹스 중이다. 그것도 미친 것처럼 격렬하게 섹스 중이다.

리체는 눈물 가득한 눈을 가물가물하게 떴다. 희뿌연 시야에 근육이 꽉 짜인 몸이 앞뒤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눈동자를 위로 이동시켰다. 카메라의 무빙 워크처럼 시선이 빨래판 같은 배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마침내 얼굴을 조명했다.

“아…….”

잔뜩 쉰 목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신이 축복한 얼굴. 혹은 신이 직접 빚은 얼굴. 인세의 것이 아닌 듯한 생김새.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하늘 신처럼 푸르른 눈이 이쪽에 못 박혔다.

푹, 하고 자지가 강하게 박혔다. 리체는 날개 꺾인 새처럼 푸드덕 몸을 떨었다. 강렬한 쾌감이 벼락처럼 머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속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왜 또 이 남자와 자고 있지? 카이로는? 여긴 어디지? 동굴인가? 나는 아직 거기 있는 거야?

리체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혼선을 빚었다. 그녀는 1년도 전, 잘못된 판단으로 한 달 간 갇혀 있던 동굴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착각했다. 쾌감에 쾌감이 중첩되어 마침내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현실 같지 않았던 감각이 그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발을 직접 땅에 댄다고 할지라도 걷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듯했던 그 기묘한 부유감.

절망한 리체는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어진 얀테의 거친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실감이 생기며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 애를 배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네가 처음이야, 하진. 별궁의 천것들처럼 피임약을 먹이지도 않겠어. 좋지? 일개 창부에겐 크나큰 광영이니 구멍을 크게 벌려 기뻐하도록 해.”

“아, 읏, 그, 그만, 흐읏!”

“창부에게서 난 애도 사랑스러울지 모르겠어. 널 닮으면 봐 줄 만하겠지.”

“아아아읏!”

길게 신음하는 한편 리체의 이성은 찬물을 뒤집어쓴 양 싸늘했다. 소름이 바짝 돋아 뒷덜미의 털이 올올이 올라섰다.

그래. 섹스 중이다. 시간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둔통으로 말미암아 아마도 만 하루는 지난 듯했다.

염두에 두지 않았던 발정기에 진창에 빠질 줄이야. 리체는 이를 갈았다. 예기치 못하게 발정기가 와 버려서, 카이로를 기다리지 못하고 알파 페로몬을 풍기는 사내에게 안아 달라고 해원했고, 그때 애원한 사내가 눈앞의 이 남자다.

리체는 크게 낙담했다. 어째서 그때 나타난 남자가 이 남자인가. 그녀를 집요하게 강간하고 유린했던 미치광이. 그가 바로 대륙의 하나뿐인 극우성 알파였고, 도블락의 황태자였다.

리체에겐 어느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한 몸이 발정기를 일으켰던 거야.’

차분히 시간을 되짚은 리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낭패도 보통 낭패가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턱이 붙잡혔다. 눈이 마주치자 리체는 부러 시선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두 눈의 초점을 흐리고 고양이처럼 앓는 신음을 간헐적으로 흘려 댔다. 아직도 발정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알파에게 박히는 것 말고는 무엇에도 관심 없는 오메가를 연기했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귀여운 하진.”

날카로웠던 눈빛이 부드러워지며 얀테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턱을 잡았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리체는 할딱이며 숨을 몰아쉬다가 혐오감을 참고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러곤 자지가 박힌 상태의 음부를 위아래로 움직여 그의 금빛 수풀에 비벼 댔다. 얀테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했던 음란한 몸짓이어서인지 얀테는 금세 의심을 풀고 그녀의 골반을 붙잡았다. 퍽, 퍽! 짧게 끊어서 삽입했다. 충격과 쾌감이 어우러져 리체는 연기하지 않고도 연거푸 신음을 뱉어 냈다.

“보지가 아주 부드러워. 이대로 주먹을 넣어도 들어갈 것 같은데. 다른 사내에게 몸을 허락하다니. 순결을 잃어버린 더러운 보지니 주먹도 가리지 않고 맛있게 먹겠지. 어떻게 생각해? 듣고 있어, 하진?”

몸을 앞으로 숙인 얀테가 손으로 길이를 재듯 리체의 음부를 가늠했다. 그 안쪽에는 그의 거대한 자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름이 끼쳐 왔다.

“하앙, 으으으응!”

리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허리를 뒤틀었다. 말은 그만하고 어서 박아 달라는 몸짓처럼 보였다. 실은 리체가 그와 대화를 나누는 걸 저어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 대신 섹스에 집중하길 바랐다. 그 틈에 생각할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그러나 얀테는 도통 리체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야들야들해지고, 부드러워졌어. 자지를 쥐어짜는 힘은 창녀처럼 능숙하고.”

빙그레 웃으며 속삭인다. 그러나 리체는 신음을 흘렸다. 쾌감이 아닌 통증 때문이었다. 골반이 아팠다. 얀테가 골반을 꽉 붙잡은 것이다.

“누가 이렇게 가르쳐 준 거야.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홀렸지?”

리체는 내심 진저리를 쳤다. 집요한 황태자가 두려웠다. 발정기를 맞아 허우적대던 만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했다. 아마 정신없이 떡만 쳐 댔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말은 익숙하게 느껴지니, 그가 얼마나 추궁해 댔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오메가로 발현시킨 이 몸으로 어떤 엄한 새끼들을 집어삼켰는지……. 생각만 해도 화가 나, 하진. 내 슬픈 마음을 알겠어?”

미친놈.

리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1년 만에 만난 자신을 1년 전처럼 만들어 버린 사내. 황태자 얀테 M. 루세이노에게 자신은 소유물이었다. 암컷이었다.

똑똑하고 이성적인 재원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온 학자로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고 있는 리체는 얀테의 취급이 낯설고 언짢았다. 속내는 그랬지만 겉으로는 티를 낼 수 없었다. 다시 한번 그를 만난 이 불운을 안타까워하는데, 그녀가 아무 말 없어도 혼자 마음을 정리했는지 얀테는 아쉬운 투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어떤 수캐가 이 몸을 가졌든.”

리체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아름다운 푸른색 눈이 물감으로 덧칠한 것처럼 무섭게 짙어졌다.

“다시 내 손에 들어왔잖아, 착하게.”

“……흐응, 항!”

뒤늦게 신음을 터뜨렸다. 발정기의 열기가 상당히 가라앉았는지 자지와 쾌락을 갈망하던 마음이 성에가 낀 듯 시렸다.

“이 둥그런 자궁에 씨를 가득 받아, 하진. 그리고 아이를 낳는 거야. 놓치지 않고 잔뜩 받아먹어.”

“하아앙! 앙, 아앙……?”

색에 미친 오메가처럼 충실히 신음을 내던 리체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래 봤자 이 몸은 임신이 안 되는 몸이다. 시스템의 효용에 새삼스럽게 감사하며 얀테의 당당함을 비웃던 참이었는데 아래에서 이물감이 느껴져 왔다. 무시할 수 없는 이물감은 점점 커져서 마침내는 질구를 빠듯하게 채웠다. 동시에 쾌감과 함께 격통이 아래에서부터 치달았다.

변형된 성기의 끝이 마개처럼 안쪽에 흡착되어 구멍을 틀어막았다. 아래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밀어닥쳤다. 리체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노팅!’

처음이 아니었기에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레이몬드가 떠올랐다. 몸을 섞다가 질 내부에 파묻혀 있던 성기의 끄트머리가 부풀어 올랐던 경험은 그리 쉽게 잊혀지는 것이 아니었다.

“넘치도록 퍼부어 줄 테니, 씨물을 맛있게 삼키고 내 아이를 낳는 거야.”

다정하게 말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얀테였다. 리체는 잔여물처럼 남은 쾌감이 일시에 걷힐 만큼 경각심이 들었지만 이내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알파의 노팅은 오메가의 임신 가능성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극도로 흥분했을 때에야 저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특이 현상이지만 다행히도 그녀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나 지금껏 피임을 하지 않았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노팅 현상에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레이몬드가 노팅했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가지 않았던가.

‘걱정할 거 없어.’

상대가 집요한 얀테라는 점이 불길했지만 이건 비이성적이고 근거 없는 불안증에 불과하므로 역시 과하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크게 부푼 성기의 끝이 말랑말랑한 내벽을 두드리고 긁어 댔다. 잠깐 멈추었던 고통이 강물처럼 흘러들었다. 뭉툭하고 면적 넓은 자지가 안쪽을 강하게 찧는데 의연하게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이 행위가 결실을 맺지 못할 것임을 확신하자 안심이 되었다. 그것만은 다행이다,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거리는데.

[임신 잠금 해제 알림.

불완전했던 육신이 수복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차원 적응을 위해 잠금되었던 임신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히트 사이클 기간에는 임신이 가능합니다.]

“아, 안 돼!”

리체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큰 몸부림에 얀테는 기꺼워했다.

“그렇게 좋아?”

리체는 고개를 마구 저었지만 그녀를 바특하게 끌어안은 얀테의 건장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고 도리어 그녀를 강하게 내리누르고 흉폭하게 팽창한 자지로 그녀를 쑤셔 댔다.

공포에 질린 얼굴을 쓰다듬으며 남자는 광인의 얼굴로 흡족하게 웃었다.

* * *

터덜터덜. 리체는 늦은 새벽에야 얀테의 처소에서 빠져나왔다. 발정기에 빠진 그녀의 상태에 안심한 얀테가 미리 궁정인에게 언질해 두는 것을 깜박하여 걸어 나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잠이 든 얀테가 눈을 뜨기 전에, 자신의 부재를 눈치채기 전에 떠나야 한단 생각에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다리 사이가 쓰라리고 원숭이처럼 해 댄 밑이 빠질 것 같았다. 퉁퉁 부은 가슴은 손이 닿기만 해도 통증이 일었다.

황태자궁을 빠져나온 그녀를 검푸른 새벽하늘이 맞이해 주었다.

황태자는 이해 불가능의 대상이다. 섹스하다 죽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이 일시에 물에 젖은 휴지처럼 흐물흐물해지다 흩어졌다.

그를 본 순간에.

검푸른 새벽하늘을 장막처럼 휘두르고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쳐다보는 시선에 리체는 이끌리듯 걸음을 옮겼다. 그 앞에 당도하자 그림자를 담은 새빨간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피곤에 찌든 눈을 보고,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가를 보고, 지친 안색을 보고, 내려앉은 어깨를 보고, 터덜터덜 걸어온 다리를 보았다. 무뚝뚝하지만 걱정 어린 시선에 리체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가 멈칫, 천천히 다물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의 마음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우두커니 그녀를 기다린 그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전혀.

‘변명할까?’

리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알파오메가는 얼굴에 달린 입 말고, 몸짓을 표현할 수 있는 손과 발 말고도, 다른 입이 있다. 빠져나오는 데 집중하느라 씻지도 못했으니 지금 온몸에서 얀테의 페로몬이 풀풀 풍길 것이다.

그 순간, 다리 사이에서 축축한 액체가 주룩 흘렀다. 불쾌감에 몸서리를 쳤다.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변명을 한다면……. 아, 생각하는 게 느렸다. 몸은 힘들어서 간신히 서 있을 정도였고, 크게 갉아먹힌 정신력은 무기력함을 자아냈다.

리체는 생각하는 게 귀찮았다. 노심초사하며 저를 기다렸을 상대의 마음 따위, 걱정했든 분노했든 그저 가만히 내버려 주길 바랐다. 게다가 카이로는 이것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확신했을 게 틀림없었다. 변명이 소용없는 이유였다.

침묵이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리체는 억지로 어깨를 추어올렸지만 금세 다시 힘이 빠졌다.

그녀는 카이로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콧잔등만 더듬었다. 한편으로는 왠지 떳떳하지 못한 스스로가 의아했다. 그는 실험 대상일 뿐이다. 거처가 불타 없어진 지금 잘 곳과 쉴 곳과 먹거리를 제공해 주는 착하고 유용한 실험 대상자. 그가 하찮은 신분인 그녀를 특별하게 여긴다지만 리체는 한 번도 그걸 고맙게 여긴 적이 없었다. 그에게 사랑을 속삭인 적도 없었다. 그러니 딱히 속인 건 없다. 차원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사랑이라니,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차원 인류학자로서 자격 상실이었다. 리체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여전히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래도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는 건 떨떠름했다. 꺼림칙했다.

‘죄책감을 느낄 리는 없을 텐데…….’

리체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뻔히 보이는 답을 회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차원 원주민이라지만, 연구 대상자라지만 그가 자신에게 꽤 진심이라는 건 요 근래 같이 지내는 동안 깨달았다. 그는 그녀에게 지극정성이었다.

대장군이자 백작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생각하면 손수 옷을 골라 주고 소화하기 쉬운 음식을 만들어 먹여 주는 일을 해 본 적 없었을 남자였다. 그런데도 리체는 그와 지내는 동안 하인이 없을 때는 그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아 왔다.

그런 일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걱정이 담뿍 어린 눈빛은 있는 줄도 몰랐던 리체의 마음을 쿡쿡 찔러 댔다. 그가 얼마나 고지식하고 권위적인 알파인지 알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그녀에게 하는 그의 행동이 특별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있을까.

리체는 이성적이고 가끔은 냉철하고 냉혈할 때도 있지만 인도적인 감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잘해 준 사람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그런 이치였다.

“어째서.”

“…….”

“어째서 황태자와…….”

그래서 카이로가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그냥 무시하고 싶다는 마음을 애써 참고 변명을 했다.

“발정기가 왔어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어 연약하게 들렸다. 그가 자신을 살피고 있는 게 느껴졌다. 리체는 좀 더 눈을 내리깔아 그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그때 황태자가 나타나서…….”

“…….”

“그래서…….”

보시는 대로. 그렇게 말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리체는 곤혹스러웠다. 말을 끝맺지 못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실 발정기이든 아니든 카이로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오만한 알파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와 배를 맞춘 오메가를 경멸하니까.

스트리고 형제와 이델리 그레이스 사이에 얽힌 일화를 떠올린 리체는 굳이 변명할 이유가 있는지 회의적이었다. 그래도 도의적인 책임을 지자. 잘 대해 준 인간에게 마지막은 솔직해져야지 않겠는가.

다시 마음먹고 입을 열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움츠러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거칠지 않았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그 손의 온기에 리체는 순간적으로 다리가 비틀거렸다. 안심이 되어서였다.

문득 고목 같은 사내란 생각이 들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벼락이 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뿌리 깊은 나무.

정을 붙이지 말아야 할 차원 원주민에, 연구 대상이었지만 어느새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었던 스스로를 부지불식간 깨달았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안심하는 것을 보면…….

리체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냉철한 인간이라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떨어진 이곳에서 잘해 준 인간 모두를 배척하는 건 어려웠다.

‘그래도 잘도 몸에 손을 대는구나.’

더럽다고 욕설을 먼저 퍼부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낙관할 수는 없었다. 알파란 족속들은 소유욕이 아주 대단했으므로, 자신이 금이야 옥이야 귀애해 준 오메가라 할지라도 다른 사내에게 몸을 허락했을 때엔 차갑게 돌변하는 게 가능했다. 알파오메가들이 대체로 문란하다지만 그건 가벼운 파트너에 한할 뿐, 청혼까지 한 오메가는 그들의 머릿속에 자신의 오메가로 자리매김한다.

그런 오메가가 다른 사내와 잤다? 배신도 그런 배신이 없었다.

이미 알파오메가의 생리와 보편적인 사고 흐름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 리체로서는 결과가 빤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몸은.”

“…….”

“어때.”

리체는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시선은 카이로의 가슴이 아닌 발치를 서성이고 있었다.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여 그의 날카롭고 단단한 턱에 닿고, 더 올라와서는 붉은 눈동자에 멎었다.

배신감과 상처와 분노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던 눈빛은, 붉은 눈동자는, 감정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걱정과 염려였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슬며시 입을 벌렸다.

“어디 아픈 덴 없고?”

“발, 발정기가…… 왔어요.”

리체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리체는 조금 전에 말한 것이 그녀의 상상이었는지 의심했다. 카이로의 반응이 너무 담담했다. 입술에 침을 발랐다.

“발정기가 온 상태로 황태자를 만나서, 그래서…….”

“알아.”

카이로가 말을 끊었다. 리체는 흠칫했다. 그의 입매와 턱이 단단히 굳어졌다. 그러나 거친 노호 대신,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른 알파의 페로몬으로 피클처럼 절여진 아담한 몸을 고목처럼 거대한 품으로 끌어안았다.

“알고 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땀이 밴 쇠의 비릿한 냄새, 무두질된 가죽의 거칠고 따뜻한 냄새…….

카이로의 페로몬이 잔잔히 그녀를 파고들었다. 숲 냄새를 밀어내고 빈자리를 따스하게 채웠다. 리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페로몬으로 알 수 있는 그의 감정. 분노, 슬픔, 그리고 걱정…….

리체는 하아, 한숨을 쉬었다. 역시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페로몬과 달리 겉보기에 그는 마음의 동요가 없는 양 아주 침착했다. 하나 리체는 그가 숨기고 있는 마지막 감정까지 눈치챌 수 있었다. 약간 씁쓸하면서도 매콤하고, 너무 무겁고 어두워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냄새다.

그에게서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향이었지만 리체는 어쩐지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좌절이었다.

“절대 널 다치게 하지 않아.”

“…….”

“다신 누구도 널 다치게 하지 않겠다.”

카이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맹세하듯 속삭였다.

“그것이 설령 신일지라도.”

도블락의 황족들은 신처럼 숭배되고 있었다.

카이로 스트리고는 얀테 M. 루세이노 황태자의 충실한 심복. 강인한 오른팔이자 그를 황태자위에 옹립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

얀테는 카이로의 주군이자 황제였고, 카이로는 얀테의 믿음직한 검이다.

그 둘은 그런 관계였다.

리체는 작지만 긴 한숨을 쉬었다.

‘위험한 생각을 하는군, 카이로.’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피곤해서 토할 것 같았다.

* * *

얀테 M. 루세이노는 앞을 가로막는 각종 난관을 훌륭하게 극복한 사내다. 그가 황태자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당분간은 얌전히 기다릴 거라고 여겼다. 황자들을 쳐 내면서 알게 모르게 힘을 많이 썼을 테니 황위를 선양받기 전에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리라. 황태자가 됐다지만 아직 다른 황자들을 지지했던 세력이 모두 깎여져 나간 것은 아니었으니 그들을 상대할 여력을 충분히 남겨 놔야 했다. 모두가 인정한 정론이었다.

그러나 얀테는 이제 자신의 것이 된 황태자궁에서 정무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돌연 이블린 정복을 선언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결정이었다. 기력이 쇠한 황제가 거의 모든 정무를 황태자에게 맡겼다지만 아직 그는 완전히 뒷방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여전히 황제였고, 그는 근 10년 동안 타국 정벌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가 관심 갖는 것은 제국 내 평화의 유지였다. 그런데 막 황태자가 된 얀테가 황제의 정치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굉장히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황태자가 되었으니 타국 정벌을 만만하게 보는 것이라고. 호기가 넘쳐 총명을 잃었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맹수라고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이들마저 실망을 표하는 결정이었다. 물론 그의 이블린 정벌 선언이 악재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그의 이블린 정벌을 허락하는 직인을 찍었다. 이는 황태자가 뭘 하든 자신은 손대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고, 얀테가 황제가 되는 것이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시사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이블린 정벌 선언은 여러모로 좋은 수는 아니었다. 심지어 얀테의 측근들마저 그가 굳이 왜 그런 무리하게 행동하는지 의아했다. 극우성 알파이자 뛰어난 사내인 얀테를 광신하는 몇몇 신하들은 그에게 범인들은 보지 못하는 다른 수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얀테가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이블린을 정복하겠다 선언한 건 아니었다. 그가 이블린을 탐낸 건 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1년 전에 잃어버린 작고 음란한 새. 우연찮게 손에 내려앉았다가 잠깐 눈을 뗀 사이에 포르르 날아가 버린 자신의 새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블린어를 하지 못했으니 이블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들었지만,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이블린인의 특성을 닮아 있었다. 이블린에 숨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냥꾼이 채 가기 전에 다시 잡아 와야 한다. 하루하루 조급해진 얀테는 황태자가 되자마자 그녀를 찾아 나선 것이다. 군대까지 동원했으니 그녀를 다시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터.

이블린을 완전히 정복하고 나면 나라를 탈탈 뒤집어서라도 찾고 말겠다.

광기에 가까운 염원이 그를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게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대륙에서 제일 강한 검인 카이로 스트리고가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 버린 것이다.

이블린 정복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황태자를 경솔하다 오만하다 손가락질했던 이들은 박수를 치며 경애를 바쳤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얀테에게 부수적인 이득일 뿐이었다.

그는 하진이 돌아오길 바랐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푸른 눈의 요녀. 나의 작고 음란한 새!

그리고 바람대로 그녀를 만났다. 그토록 집중했던 이블린 본토가 아닌, 바로 그의 황궁에서.

얀테는 눈을 떴다. 비어 있는 침상이 눈에 들어오자, 파란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분께서는 새벽녘에 궁을 나가셨습니다. 제가 붙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직 하늘이 어슴푸레한 새벽부터 때아닌 황태자의 부름을 받아 불려 온 궁정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엎드렸다. 머리 위에서는 답이 없었다. 궁정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침부터 황태자의 진노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황태자의 음란한 별궁이 아닌 웬 곳에서 여자를 데려왔을 때는 별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특이하게 여기진 않았다. 황태자의 별궁엔 예쁘고 순종적인 오메가가 많았고, 누구도 황태자의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이하게 생각했다.

방심의 대가는 황태자의 진노였다. 스르릉. 검이 빠져나오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궁정인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년간의 황궁 생활로 자신이 생과 사의 기로에 서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얀테는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다리 하나를 침상에 올린 채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있다. 반투명한 휘장이 둘려진 침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는 심상에 빠진 조각상 같았다.

궁정인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황태자의 충복이 대신 대꾸했다.

“그분에 관해서는 따로 언질받은 게 없어 붙잡을 생각을 하질 못했습니다. 워낙 침착하게 이동하신 터라 전하께 아뢰지 않았단 것조차 몰랐습니다.”

“그래서.”

얀테의 시선이 궁정인에게 닿자 충복은 입을 다물었다. 궁정인은 황태자의 은밀한 밤을 처리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심장이 땅으로 떨어질 것처럼 두려웠지만 혀를 씹어 피를 내면서 말을 꺼냈다.

“예, 예. 그래서 그냥 두고 보았지만……. 아!”

이게 아니다, 싶어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던 궁정인은 촛불이 켜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도 가시는 길을 안내해야 된다는 생각에 어찌 돌아가실지를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늦은 시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책임을 면할 가능성에 기뻐했던 궁정인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가만 있자, 이걸 말해도 되는 건가?’

좀 전과 달리 우물쭈물하게 변한 태도에 얀테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패도적인 알파 페로몬이 압박하자 궁정인은 바닥에 붙을 듯 납작 엎드렸다.

“배, 백작께서 거기 있으셨습니다.”

“……?”

얀테가 한쪽 눈을 꿈틀했다.

궁정인은 시린 마음에 오들오들 떨다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민가였다면 진즉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잠이 들었을 시간이라지만 이곳은 황궁이었다. 하루 중 그 어떤 시간대라도 사방을 주시하는 눈 하나쯤은 있는 법이었다. 황태자가 하루를 꼬박 같이 보낸 상대가 궁을 빠져나갔을 때를, 궁정인은 당연히 놓치지 않았다.

‘물론 그때에는 일이 이렇게 될지 몰랐지만.’

황태자는 알파, 그것도 성욕 왕성하다는 극우성 알파답지 않게 여자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바깥에서는 말이다.

역대 황태자들은 대부분 우성 알파였고, 그들은 아름다운 오메가를 취하는 것을 퍽 즐겼다. 하룻밤에 하나도 아닌 셋이 넘어가는 오메가들을 한 번에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얀테가 황태자궁을 차지하기 전에 이곳에 거하던 황위 계승 서열 1위 황자도 그러했고, 얀테도 자신만의 별궁을 만들었으니 궁정인에게 얀테와 오메가의 정사는 놀라울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그때까지 황태자가 밤새 품은 여자가 별궁의 다른 오메가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룻밤 욕정을 풀 때만 쓸모를 가진 별궁의 부속물.

궁정인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이전에 그러했듯이 그녀에게 황궁에서 탈 수 있는 마차라도 안내해 주려고 했다.

그러던 찰나에 궁정인도 발견했다. 어둠 속에 그림자처럼 파묻혀 있던 남자의 존재를.

그리고 그는 황태자가 밤새 품었던 오메가를 끌어안았다. 매우 소중하다는 듯이.

‘어라라?’

그때까지는 심드렁했던 궁정인의 눈이 번쩍 뜨인 순간이었다.

그 시점에 품었던 의문이 황태자의 앞에 부복하는 지금 불안감과 함께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궁정인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얀테의 시선을 느끼며 입술을 떨었다.

“카이로 스트리고 백작께서 그분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봐도 이 상황이 긍정적으로 여겨지지 않은 탓이다.

‘잠깐만, 그러면 카이로 스트리고 백작과 전하가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경쟁.

무심코 떠올린 단어에 궁정인은 엎드린 어깨를 경련했다. 누가 황태자와 견줄 수 있단 말인가. 감히 떠올릴 수 없는 단어였다. 그러나 상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장군이었다.

죽마고우에서 주군과 오른팔 사이가 된 그들의 관계를 모르는 궁정인은 없었다. 얼마나 각별하고 얼마나 두터운 신뢰감을 자랑하는지!

누구도 그들의 견고한 방패 같은 사이를 뚫지 못할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또한 궁정인은 황궁의 많은 비사를 목격한 인물이기도 했다. 각별했던 부자 관계도 여자 하나 때문에 칼부림이 나고 독배가 오가는 혐오스러운 사이가 되지 않던가.

‘아니야. 그래도 카이로 스트리고 백작이잖아. 그 충정에 설마 엄한 생각을 하겠어?’

궁정인은 애써 고개를 저어 보였다. 황태자에겐 아직 정적이 존재하고, 정국은 안정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오른팔과 같은 카이로와의 반목이라니. 공신 가문이자 병권을 틀어쥔 스트리고 백작 가문이 황태자에게 반기를 든다면.

궁정인은 소름이 오싹 돋았다.

거대한 피바람의 서막이 될 것이다.

궁정인은 지금 자신이 굉장히 중대한 순간에 서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개인적인 생과 사의 기로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집안 전체가 연루될 위기였다.

“카이로가……?”

얀테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듣자 궁정인의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그분을 기다리고 계시던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조용히 귀가하셨을 뿐입니다.”

궁정인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명확히 판단이 서질 않았다. 본대로 고해야 하는 것은 맞으나, 카이로에게 다른 목적, 이를테면 얀테를 속이거나 그의 것을 빼앗아 가는 그런 속셈은 없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나는 카이로 스트리고 백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어설프게 그를 옹호하는 말을 하는 것은, 그러기를 그 자신이 바라기 때문이다.

제국의 실세들이 반목하면서 일어날 피바람에 갈려 나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아, 그래. 카이로. 그래. 카이로가 있었지.”

얀테는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호한 한숨을 쉬었다.

궁정인이 의문 어린 눈으로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는 건 얀테의 무표정한 얼굴뿐이었다.

한편 얀테는 궁정인의 시선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아주아주 복잡한 생각이었다.

‘카이로…….’

잠깐 머저리라도 되었던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을. 얀테는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리체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게 카이로일 것이다. 활 내기를 할 때 느꼈던 이질감은 리체의 페로몬이었고, 그녀는 카이로의 비호를 받고 있던 눈치였으니까.

평소라면 카이로가 자신에게 인사하러 왔을 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보니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진에게 푹 빠져 있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지.’

낯간지럽지만 사랑에 빠진 사내는 머저리가 되는 것이다. 보는 사람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얼굴에 낭만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 또한 그랬으니 카이로가 고작 주군으로 모시는 자신에 대한 인사를 생략한 것 정도야 그다지 특별할 것 없다. 그럴 때가 아님에도 하진을 찾기 위해 이블린을 공격한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면…….

‘하지만 곤란한데.’

얀테는 엄지와 검지로 이마를 의미 없이 문질렀다. 언젠가 카이로에게 우스갯소리로 말한 적이 있었다. 전장의 사신인 그대에게 정열을 품게 하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상대가 설사 이블린의 금지옥엽 공주라 할지라도 결혼을 성사시켜 주겠다고.

우스갯소리였지만 황족의 말은 그 어떤 약속이나 보증보다 무겁다. 막상 이런 상황이 오니 그때의 약조가 제 발등을 찍은 짝이었다.

“스트리고 백작님께 서신을 보낼까요?”

궁정인이 채근하듯 말했다. 태자인 그가 직접 명령하면 여자를 데리고 오지 않을 재간이 없다는 뉘앙스에 얀테는 미간을 좁혔다. 퍽 사나운 웃음에 그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던 궁정인이 소스라치며 바닥에 이마를 꿇었다.

“실언하였습니다!”

“그래. 실언이었다.”

얀테는 냉소했다.

“내 손으로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검 끝을 내 목에 가져다 대라는 것이냐? 나를 조롱하려는 거야?”

“결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스트리고 백작님께 태자 전하 이상으로 여길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얀테는 코웃음을 쳤다. 잘생긴 얼굴에 그어진 빗금 같은 주름은 그의 얼굴을 맹수처럼 사납게 보이게 했다.

“온순한 짐승조차 제 것을 건드릴 때는 이를 드러내는데, 하물며 인간임에야.”

궁정인은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 몸만 떨었다. 얀테의 혀 차는 소리에 목이 거의 수직으로 꺾였다.

얀테는 죽을 자리를 기다리는 궁정인에게 더는 관심 두지 않았다. 말을 하면서 생각이 정리되었다. 만약 그가 이 자리에 오르기 전, 황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웠던 큰형이었다면 당장 카이로를 불러 하진을 대령하라 했을 것이다.

신하의 여자를 빼앗는 것이 껄끄럽다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위대한 황자이며, 원하는 여자 정도는 마땅히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얼빠진 놈이었으니. 그보다 세력은 약했지만 고꾸라뜨리기 힘들었던 교활한 2황자였다면 여자를 갖기 위해 뒤로 흉계를 꾸렸을 것이다.

얀테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두고 봐야겠군.’

심사숙고하며 내린 판단에 예기치 않게 속이 뒤틀릴 만큼 쓰렸다. 꿈에서도 그릴 만큼 목말라했던 하진을 이 품에 안았는데 당장 데려올 수 없다니. 하지만 얀테는 더 인내할 수 있었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악랄한 혈육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몸을 낮추었던 그에게 기다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이로가 하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것부터 확인한다.’

냉철하게 생각을 굳혔다.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건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옆에서 든든히 지켜 주었던 신하이자 친우라는 게 첫째, 그의 힘과 세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 둘째다.

생각해 봐야 할 건 그뿐이 아니다. 자신이 하진의 옆에 있는 카이로의 존재를 알아차렸듯, 카이로 또한 그럴 거라는 사실이었다. 주군이 자신의 오메가를 하룻밤 내내 끈질기게 탐했단 사실을 안 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얀테는 자신의 궁 앞에서 하진을 만났을 당시 카이로가 품었을 감정과 생각이 궁금했지만 경솔하게 추측하는 건 삼갔다.

벌써부터 손이 허전했다.

거듭 다짐해도 마음속에 안개처럼 짙게 깔리는 아쉬움과 미련은 거둘 길이 없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꽉 쥔 주먹 위에 턱을 괸 얀테는 불쾌함을 느릿하게 감은 눈 아래 숨겼다.

내 하진.

게임 속 오메가가 되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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