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한 달 동안 리체는 매우 바빴다. 사장에게 부탁하여 일하는 시간을 줄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게는 꼬박꼬박 나가야 했고, 손님맞이로 피곤한 몸으로 개인적인 연구도 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차원 이동에 대한 연구까지 추가되었다.
뻐근한 몸을 끌고 리체는 메디치나 치유관을 찾았다. 이제 형질 연구는 문제없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본 차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연구는 난항을 맞았다.
아무래도 이쪽은 그녀의 주력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라우지가 마법의 종주라고 할지라도 차원 이동에 관해서는 그녀가 최대한 많은 도움을 줘야 했기 때문에, 리체는 골머리를 앓았다.
밤잠도 줄이느라 알게 모르게 쌓인 피로를 라스카의 치료 물약으로 가라앉혔다.
이제 리체는 메디치나 치유관의 물약 상점에서 치료 물약을 구매할 필요가 없었다. 라스카가 기껏해야 중급 치유술사가 만든 치료 물약보다는 자신이 만든 것이 나을 테니 자신의 것을 복용하라며 한 아름 안겨 준 것이다.
리체의 안에서 라스카는 물약 창고로 그 위치가 승격되었다. 기실 한 명의 치유술사는 걸어 다니는 병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라스카의 능력은 천금을 주고 살 수 없는 보물과도 같았다.
그의 물약은 일반적인 상점에서 파는 것보다 열 배에서 스무 배 가까이 비싼 데다가 효과 또한 비할 바 없이 좋았으므로 리체는 라스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넉넉해졌다.
치료 물약을 마시고 회복된 체력으로 라스카와 뜨거운 시간을 보낸 리체는 단단한 허벅지를 베고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라스카가 그녀의 얼굴과 몸을 매만지며 아직 남은 피로를 풀어 주었다. 치료술은 본 차원의 물리 치료사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 효과는 마법과 다름없어서, 라스카의 섬세한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온몸이 기분 좋게 풀어졌다.
‘본 차원에 라스카도 데려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었다. 입맛을 쩝, 다시자 라스카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런 표정이에요?”
“내가 어디 있든……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눈을 감은 리체가 웅얼거렸다. 어깨를 매만지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곧 다시 움직여 부드러운 여체의 피로를 풀었다. 리체는 별다른 눈치를 채지 못하고 편안한 손길을 즐겼다.
“라스카?”
한참 얘기하다 문득 대답이 없어 눈을 뜨자 시뻘겋게 변한 라스카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라스카가 헛기침을 하며 눈을 피했다. 귓바퀴가 새빨갛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자 라스카가 빠르게 속삭였다.
“……당신은 정말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내가?”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박하향이 사탕처럼 달콤했다. 코끝이 마비될 것처럼 진한 향기였다. 리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라스카의 붉은 얼굴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라스카가 화제를 돌리려는 시도를 했다.
“마탑주님과 하시는 일은 잘되고 있습니까?”
리체는 그가 더 당황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생각보다 더 잘되고 있어요. 제 기대보다 능력이 뛰어나시더군요. 하는 행동이 하도 기이해 솔직히 반신반의했는데.”
“살아 있는 전설이 아닙니까.”
“전설이라고요.”
사람에게 붙기엔 지나치게 과분한 비유가 아닌가. 리체의 떨떠름한 기색에 라스카가 웃으며 대꾸했다.
“리체 양은 아직 모르나보군요. 그분이 평생 동안 발표한 논문은 천여 편이 넘습니다. 말이 천여 편이지, 한 사람이 하나를 제대로 완성하는 데 최소 3년이 걸린다는 걸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성과예요.”
“그렇게 성실해 보이진 않던데.”
“물론 장난을 친 논문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마법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니, 하늘이 내린 재능이란 그분을 뜻하는 게 분명합니다.”
치유술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일컬어지는 라스카의 말이라, 리체는 그 변태 같은 인간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분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면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시간을 바칠 마법사가 줄을 설 겁니다.”
리체는 그라우지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충성스러웠던 그의 마법사 부관들을 떠올렸다. 그라우지는 인성이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능력은 탁월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도 가슴을 거래 조건으로 내놓지도 않았을 거다. 그 생각을 하자 다시금 수치심이 들어 슬쩍 부아가 치밀었다.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면 미인계도 불사한다지만 창피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연구원 동료들이 알 길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라스카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리체는 정확히 탑주님과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냥 이것저것요.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 너머의 차원을 훔쳐보는 정도라 밖에 얘기할 건 없어요. 기밀이기도 하고.”
정확히 말하면 훔쳐보는 것을 넘어 이동 방법을 강구하고 있지만 리체는 반만 얘기했다. 라스카가 자세한 것까지 알 필요는 없고, 그녀가 떠나고자 한다는 것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감정이란 것은 꽤 거추장스럽고 변덕스러워서 예상 못한 변수를 만들기 십상이다. 라스카가 아무리 순순하고 고분고분하다지만 남녀 간의 정이라는 건 얌전한 사람도 성난 황소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리체는 자신의 계획에 변수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라우지는 비밀을 유지할 테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라우지의 능력은 실로 비범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고작 한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그는 그녀가 말해 준 본 차원에서의 차원 이동의 원리를 완벽히 깨닫고 연구에 착수해 있었다. 그 탓에 리체 역시 본 차원의 기억을 더듬고 공부하는 중이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라우지가 결과로 보여 주니까, 본 차원으로 귀환하고 싶은 마음만큼 잠을 줄였다.
본 차원과 이 차원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마법의 존재였다. 과학 기술로만 따지면 이곳은 본 차원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본 차원에서와 같은 차원 이동 기기를 만들려면 아마 한두 해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수심이 깊어진 리체의 고민을 그라우지는 간단히 해결했다.
‘기계 같은 게 왜 필요하죠? 마법을 두고.’
마법!
마법의 종주라는 칭호가 과분하지 않게, 그는 리체의 말을 들으면서부터 머릿속으로 새로운 마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고대의 허무맹랑한 전설 속 얘기를 제외하고 누구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차원 이동 마법이었다. 본 차원에서 사용하는 차원 이동 기기는 그 개발비와 유지비가 억대를 넘어 조 단위에 이르렀다.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자했던 일을 마법으로 해낼 수 있다니!
그 어마 무시한 가능성에 공학자가 아닌 리체도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이곳 사람들보다 그녀가 더 잘 안다. 그 순간의 희열이 잊히지 않아 잘게 몸을 떠는 리체에게 라스카가 말했다.
“리체, 이게 뭐예요?”
정신을 차린 리체가 라스카를 보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리체의 옷가지를 정리하던 그의 손에는 입구가 찢긴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리체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감정이 떠올랐다.
“직인을 보니 전장에서 찍힌 것 같습니다만.”
가슴이 뜨끔한 그녀는 그가 발신인을 자세히 살피기 전에 그의 손에서 편지를 뺏어 들었다.
“아, 지인의 편지예요.”
싱긋 웃으며 말하자 예의를 아는 라스카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도 묻지 않았다.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리체는 내심 라스카가 교양이 있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편지는 카이로에게서 온 것이었다. 치유관에 가기 위해 가게에서 나왔을 때 만난 집배원이 전달한 거라 품에 넣어 놨는데 하필 라스카에게 발견되어서야…….
리체는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곧 귀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블린 국경 지대랑 이곳까지는 시일이 꽤 걸리지. 집배원이 빠르다고는 하지만 카이로가 말을 달려온다면.’
‘곧’이라는 게 생각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리체는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은 일찍 가 봐야겠네요, 라스카.”
“벌써 말입니까?”
아쉬워하는 투에 리체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라스카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 이럴 때의 그는 순진해서 소년 같았다. 달래기 편하기도 하고. 리체는 빙그레 웃었다.
눈동자를 살짝 떨던 라스카가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리체가 일어나려는 찰나, 고개를 숙인 그가 둥그런 이마에 입술을 길게 묻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조만간 다시 봐요, 리체.”
잠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고개를 갸웃한 리체였지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고 넘겨 버렸다.
* * *
퀸으로 가는 길, 바싹 건조한 공기를 피부로 느끼며 리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근시일 내로 카이로가 도착할 것이다. 축축한 여름에 시작된 전쟁은 공기가 건조해진 최근 무렵에야 끝났다. 이블린 본대를 상대로 연일 대승을 거둔 카이로의 이름은 도블락 전역에 울리고 있었다. 인기가 어찌나 많은지 요즘 거리를 걸으면 카이로와 독수리기사단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영지와 하사품, 또는 특별한 보상을 황실로부터 받게 될 거란 말이 파다했다.
이미 황태자의 심복으로서 입지를 굳힌 백작이니 이번에는 황실이 금지옥엽을 내주어 혈연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가장 우세했다. 꽤 그럴듯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가에 번듯하고 훤칠한 사내가 아직까지 미혼이라는 건 많은 여인들의 방심을 애타게 만들었다.
황태자는 카이로 스트리고에게 황실의 가장 고귀한 여자를 내줘서라도 그를 제 옆에 꽁꽁 묶어 둘 것이다. 작금의 도블락에는 카이로 스트리고만큼 강직하면서도 믿음직한 인재가 없었다. 아직 그가 돌아오지 않은 지금도 벌써부터 마담뚜가 스트리고가에 문턱이 닳도록 돌아다닌다니, 황실을 제하고서라도 그를 남편으로, 사위로 원하는 곳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현재 카이로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리체는 약간 귀찮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숨겨야 할 것이 많으니 그만큼 신경 쓸 일도 많은 탓이었다.
제일 첫 번째로는 그의 동생인 레이몬드와의 관계다. 그뿐인가. 이젠 라스카와 그라우지까지 있으니, 카이로에게 발각된다면 그 고고한 신분에, 성격에,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일은 은밀하게, 암중에서 이뤄져야 했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왔다.
퀸으로 닿는 길까지 오른 리체는 혹시 몰라 카이로가 주었던 반지를 손가락에 끼었다.
‘아까부터 심장이 빨리 뛰는데. 느낌이 좋지 않아.’
이곳을 떠날 때까지는 카이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게 무조건 이득이었다. 이델리 그레이스가 지금은 잠잠하지만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녀의 불안은 비단 카이로의 귀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도 곧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멀리 퀸의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리체는 생각을 멈추었다. 눈이 크게 뜨였다.
거대한 불꽃이 건물을 감싸고 있었다. 가까이 간 것도 아닌데 피부에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서둘렀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건물 주변의 모습이 분간되었다. 퀸의 직원들이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저마다 들고 있는 크고 작은 대야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타오르는 건물에 끼얹었지만 불길을 진화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건조한 공기 탓이었다. 단아한 필체가 놓인 나무 문판이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앞을 지나가려던 직원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건지 다른 이들도 포기하고 건물이 불타오르는 것만 바라보았다.
리체는 바람까지 불어오자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불이 나기는 쉽고 진화하기는 어려운 날씨였다. 그녀는 망연한 얼굴로 1년간 몸을 담았던 퀸의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응시했다. 허탈해 보이는 직원들의 뒷모습이 보이자 리체는 자신도 남들에게 그렇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퀸이 사라졌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리체는 심각하게 혼잣말했다. 기존에는 직원 숙소를 쓰고 있었지만 본관이 저렇게 되어 버렸으니 앞으로도 이용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베타라 알고 있는 그녀보다는 다른 오메가 직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할 테니 말이다.
사장이 다른 거처를 마련해 줄까?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거야.”
생각에 골몰하느라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리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호방한 기운이 풍기는 미소가 여전히 잘생긴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말이 지친 기색으로 투레질을 했다. 리체는 너무 놀라 눈만 끔벅였다. 간신히 한 마디 뱉었다.
“카이로?”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편지까지 했는데.”
“어떻게 벌써?”
“그대를 보려고 달려왔지.”
그의 시선이 이젠 지붕까지 불길에 먹힌 퀸의 건물을 향했다.
“그런데 이런 변고가 있을 줄은 몰랐군. 괜찮은가?”
멀리서 퀸의 불길을 보고 미친 듯이 말을 몬 모양이었다. 리체는 다시금 지쳐 보이는 말을 흘끗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메디치나 치유관을 나서기 전 페로몬의 잔향을 제거하는 약을 사용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날카로운 눈으로 몸 곳곳을 살폈다.
“괜찮아요.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서.”
“다행이군.”
카이로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무뚝뚝하게 잘생긴 얼굴에 옅은 안도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리체는 그제야 그의 행장을 살폈다. 가만 보니 입고 있는 옷이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카이로님, 설마 변경에서 바로 오셨나요?”
고개를 끄덕인 카이로가 그녀를 끌어안으려다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먼지가 묻겠어.”
대신 손을 잡으며, 뭐라 말하려던 카이로의 옆으로 긴 눈이 살짝 커졌다. 그의 시선은 리체의 손가락에 못 박혀 있었다. 눈이 기묘하게 일렁거렸다.
“……빼지 않았군.”
“원하셨으니까요.”
리체의 특별할 것 없는 대꾸에도 뭐가 좋은지 카이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즉시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네? 어디를?”
“그대 집이 사라졌으니 갈 곳은 한 곳뿐이지 않나?”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카이로가 시원하게 말했다.
“아님, 어디 다른 데 의탁할 곳이 있어?”
의아한 눈빛이 꼭 의심이라도 하는 것 같아 제 발이 저린 리체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백작저엔 동생분이 살고 계시다 하셨잖아요?”
그게 문제였다. 백작저에 들어갔다가 레이몬드를 만나기라도 하면!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백작저에 들어가느니 엘자에게 사정하여 그 좁아터진 방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는 게 백번 나았다. 눈칫밥을 아무리 얻어먹은들 치정 사건으로 목이 날아나는 것만 하겠는가.
그게 문제였냐는 듯 카이로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내 이름으로 된 사저가 있으니.”
카이로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려 말안장에 올려 주고 그 뒤에 올라탔다. 승마는 익숙하지 않은 리체가 흔들리는 말 등에 놀라 카이로의 손을 붙잡자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카이로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등에 말캉한 게 닿았다. 카이로가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고 있었다.
“카이로님?”
카이로는 이렇게 스킨십이 스스럼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전쟁터에 서는 것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그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다정하지만 무뚝뚝한 면이 강해 표현이 많지 않았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퀸이 있는 방향을 흘끗했다. 거리는 좀 있다지만 누군가 다가와 이 모습을 목격한다면 낭패였다.
“카이로님?”
리체가 재차 부르자 그제야 카이로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말이 움직였다. 리체를 배려해서인지 느린 속도였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말이 없는 카이로를 의식하여 묻자 그가 잠깐의 침묵 후에 대꾸했다.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
“멀리서 불길을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대를 보고는 다른 누가 처연한 자태에 홀려 낚아채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말미엔 약간의 웃음기가 묻어나왔다. 지나치게 진지한 목소리이지 않은가 해서 긴장했던 리체의 마음도 풀어졌다.
“이제 와선 잘됐다는 생각도 드는군.”
“잘됐다고요?”
“전에 이 일을 그만두고 내 집에 들어오란 제안은 단칼에 거절당했지. 이런 식으로 그대가 내 집에 가게 되니,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모양이야.”
리체는 약간 말을 더듬었다.
“그때 했던 말씀이 진심이셨어요? 저는 영락없이 농담인 줄로만 알고…….”
왜냐하면 카이로답지 않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부담 없이 장난처럼 거절했던 것이고. 그걸 단칼에 거절했다고 표현하다니,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보이고 싶은 리체로서는 난감했다.
“리체, 나는 농담을 하지 않아.”
웃는 것 같으면서도 진중한 목소리에 리체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전쟁터에서 뒹구는 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건지, 그의 표현이 거침없고 솔직했다.
의혹에 찬 리체는 조금 불안해졌다. 이번 일로 이 강성한 원주민과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닌지.
* * *
별장처럼 사용하는 듯한 카이로의 사저는 당연한 말이지만 퀸의 직원용 숙소보다는 훨씬 훌륭했다. 주방엔 식재료가 넘쳐났고 언제든지 꺼내 먹을 수 있는 초콜릿과 건과일 따위의 간식들이 바구니마다 가득했다. 의식주 모두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게 되니 걱정 하나가 던 셈이었다.
시간을 내서 사장을 만나러 가니 그는 며칠 사이 퀭해진 얼굴로 사정을 설명했다. 퀸은 당분간 장기적인 휴무를 갖기로 했다. 건물이 새로 세워질 때까지였다.
원래 퀸이 있던 부지에서 약간 떨어진 땅에 새 건물을 세우기로 했는데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때까지 직원들은 다른 일을 구해야 했는데, 마탑주와의 차원 이동 마법 발명으로 할 일이 많아진 리체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집은 카이로가 제공한데다가 사용인들이 있어 식사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어서, 당분간 돈 나갈 일도 없었다. 그리고 퀸에서 일하며 적게나마 모은 돈도 있기 때문에 생계가 급할 일도 없다. 갑자기 여유 시간이 확 늘었다.
요즘 그녀의 제일 큰 관심사는 그라우지의 차원 이동 마법이었다. 그라우지가 더 빨리 마법을 개발할 수 있게끔 하려면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할까. 그 고민으로 하루 대부분을 소모하는 그녀가 카이로에겐 할 일없이 무료해하는 것으로 비춰진 듯했다.
“승마를 배워 보겠나?”
식사를 하다가 또 생각이 딴 길로 샌 리체는 정신을 차리고 카이로를 바라보았다. 사용인이 카이로의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그는 우아한 몸짓으로 한 모금 마셨다.
“잘 배우면 폴로 경기도 즐길 수 있을 거다.”
리체는 그제야 그가 제게 취미 생활을 권유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할 일이 많은데 그런 데 시간을 쏟을 수는 없었다.
카이로가 또 다른 걸 하라고 들이밀까 싶어 리체는 저택 근처에 볼거리가 많아 산책을 하며 재미있는 것을 눈여겨본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말을 듣던 카이로가 말했다.
“그럼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나. 지금까지는 내가 바빠서 신경을 써 주지 못했잖아. 거리가 좀 있어도 상관없다. 마차로 두 시간 가면 장미가 만발한 장미 공원에도 갈 수 있고. 어디든.”
리체는 집에서 혼자 생각하는 게 좋았으므로 제안이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거절하려는 찰나, ‘어디든’ 데려다준다는 말이 뇌리에 스쳤다.
‘어디든이라…….’
시간이 많아진 김에, 그녀는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중엔 차원 이동 마법이 성공할 경우의 수도 물론 포함되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이곳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고 싶었다.
이곳 원주민들에 대한 데이터는 몇 가지만 빼고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다만 아직 수집하지 못한 데이터가 있는데, 리체는 못내 그것도 욕심이 났다.
각인, 발정기, 극우성 형질.
다른 건 몰라도 이 세 가지만큼은 수집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리체는 아직도 히트 사이클, 즉 오메가의 발정기를 겪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른 차원에서 왔기 때문에 없는 것인가 했으나 라스카와 대화한 후에는 후천적 발현자여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셋 중에 알파오메가의 발정기를 연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붉은 홍등이 켜진 사창가에서 하루만 머물러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발정기엔 사창가를 찾는 이들이 많다니까. 그녀의 몸으로 직접 겪어 보는 게 아무래도 가장 낫겠지만 타인의 데이터를 기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발정기에 비해 각인은 드문 경우라고 했어. 떠나기 전에 발견하게 된다면 운이 좋은 거겠지.’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구하기 힘든 건 마지막,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있는 형질 데이터다.
‘극우성 알파.’
극우성 오메가보다 드물다는 극우성 알파. 그 형질까지 수집한다면 형질에 대해서만큼은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의 완벽성을 위하여, 꼭 필요한 형질이다. 하지만 극우성 알파는 알파오메가의 발정기와 달리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극우성 알파는 한 사람뿐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도블락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바로 그가 황궁의 작은 기둥, 황태자이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린 리체가 입을 열었다.
“그럼 황궁에도 가 볼 수 있나요?”
* * *
제국 도블락. 약 백여 년에 걸친 기나긴 정복 전쟁으로 그 영토를 넓히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명실상부 대륙의 지배자. 도블락 황가의 역사는 대대로 피로 점철되어 있다. 같이 자란 형제를 죽이고 폐하며 황제위에 오른 이가 대다수였다.
이미 다음 대 황제로 낙점된 얀테 M. 루세이노 역시 황실의 역사를 증명하듯 형제들을 거꾸러뜨렸다. 공식적으로 그의 짓이라 공표된 건 아니었지만 아무도 황자들의 공교로운 불행이 우연히 일어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순진하게 믿기에 황궁은 우연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리체는 카이로와 함께 황금으로 조각한 듯한 화려한 대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황궁은 매우 넓어서 다 둘러보려면 하루 종일을 돌아다녀도 모자라다. 혹시 특별히 보고 싶은 곳이 있나?”
리체는 잠시 고민했다. 황태자를 만나 보고 싶지만 카이로가 수상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저야 어디든 상관없지만 카이로 님은 그래도 괜찮으세요? 황태자께서 보시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카이로가 잘생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태자께서는 남의 연애사에는 관심 없으시니 걱정 마라. 이 시각에는 연병장에서 활을 쏘고 계시겠군.”
리체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황궁의 지도는 극비라 볼 수 없었으나 미리 카이로에게 물어봤던 내용에 의하면, 황실 연병장은 후원과 가까웠다. 생각을 마친 리체가 배시시 웃었다.
“황궁의 후원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들었어요.”
후원은 유명한 만큼 아름다웠다. 꽃의 천국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게 만발한 꽃밭에선 향긋한 냄새가 조화롭게 풍겼다. 그리고 리체의 예상대로, 화원에선 드넓은 연병장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연병장을 구경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다른 꿍꿍이를 품고 리체는 무릎을 굽혀 꽃을 구경했다. 시야엔 꽃이 가득했으나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이 뇌리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뭔가 보드라운 것이 귓가를 간질였다. 고개를 돌리자 카이로의 무뚝뚝한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커다란 손에는 개화하여 꽃잎을 활짝 벌린 꽃이 들려 있었다.
뭘 하나 했더니 꽃을 꺾고 있었나. 리체는 심드렁한 마음을 감추고 그를 응시했다. 가느다란 꽃줄기와 굳은살 잔뜩 박인 카이로의 손은 놀라울 만큼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편안했다. 그는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형형한 눈빛은 위압적인 살기가 맺혀 있어 가까이하기 어려운 인상이었는데, 이러고 있으니 인상이 다 훤해 보였다.
“잘 어울리는군.”
툭, 보드라운 꽃잎이 뺨에 닿았다. 줄기를 하늘하늘 흔들며 카이로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휘어진 눈매에 장난기가 묻어났다.
절도 있던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에 리체가 얼떨떨해하자 그가 그녀의 귀 뒤에 꽃을 꽂아 주었다. 그러고선 또 웃는다.
‘뭐야. 이런 게 재밌나.’
부드럽게 풀린 눈에 그녀 자신이 한가득 담겨 있다. 카이로는 온전히 리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그가 지금을 ‘데이트’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예뻐.”
부드러운 시선이 미풍처럼 다가왔다. 반응은 해야 할 것 같아 리체는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까. 성적으로 유혹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엔 약했다.
그녀는 말 대신 행동으로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꽃을 꺾어 카이로의 귓가에 꽂아 주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선홍색 꽃이었지만 역시 건장한 청년이 귀에다 꽃을 꽂은 모습은 어딘지 우스웠다. 리체가 피식 웃자 카이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손을 들어 제 귓가를 더듬거리더니 리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잔잔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웃는 얼굴이 보고 싶더군.”
뜬금없는 말에 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카이로가 큰 손으로 리체의 뺨을 감쌌다.
“이블린의 땅에서 피비린내를 맡으면서도, 불편한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도, 말 위에서 검을 휘두르면서도.”
딱딱한 버터가 상온에서 말랑해지듯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
“생각해 보니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대 웃는 얼굴은.”
리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두질한 가죽 냄새가 짙어진다. 그의 페로몬이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카이로는 강직한 사내였다. 속내를 숨길 필요가 없었던 신분인 탓에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솔직하게 부딪쳐 왔고, 그런 그에게 요령을 피우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전쟁에 나간 사이 여러 수작을 부려 왔던 리체는 슬쩍 눈을 깔아 진지한 시선을 피했다.
“저도 카이로 님이 전장에 나가 계시는 동안 무사히 돌아오시길 기도했어요.”
다소곳하게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카이로는 큰 손으로 뺨을 매만지다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성욕보다는 애정이 느껴졌다. 고개 숙인 리체의 낯에 곤혹스러운 빛이 흘렀다.
‘이런 분위기는 좀 부담스러운걸.’
서둘러 카이로의 팔에 팔짱을 낀 리체는 다른 꽃밭을 구경하자며 그를 잡아끌었다. 그녀가 애교를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카이로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전처럼 낯간지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안도한 리체는 카이로와 나란히 걸으며 꽃을 구경했다.
“카이로 님께서는 황태자 전하와 친분이 깊으신가요?”
“그런 건 왜 묻지?”
“카이로 님이 아무도 주목하지 못했던 지금의 황태자님을 지지하셨다고 들었어요.”
“소년 시절 어울린 적은 있었다.”
“그럼 친우의 관계이신 거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잠깐 고민하던 카이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로 님이 인사하지 않으신다면 섭섭해하시지 않을까요?”
“글쎄. 그가 그런 걸 신경 쓰지는 않을 테지만.”
피식 웃은 카이로가 문득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하를 뵌 적이 있나?”
괜히 뜨끔한 리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속내는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탐하는 굶주린 하이에나 같아도 겉모습만큼은 여리고 순진해 보이는 여자였다. 카이로는 귀여운 걸 보는 눈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안 그래도 그대를 소개할 생각이었으니, 오늘 뵙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 말에 리체는 뛸 듯이 기뻤다. 황태자에게 그녀를 소개하려 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오늘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 의심이라도 살까 긴장하며 단어 하나하나 신중히 골랐던지라 술술 풀리는 상황에 약간 허탈하기도 했다.
카이로는 리체의 손을 붙잡고 후원의 입구에서 가장 먼 곳으로 향했다. 후원은 출구를 지나면 연병장이 보이는 구조였고, 출구와 가까울수록 잘 보였다.
“태자 전하께서는 자주 활 연습을 하시지. 전하를 보기 위해 숱한 궁정인과 귀족이 이 화원을 찾는다. 화원에서 하릴없이 기웃거리는 치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카이로 님도 연병장에서 무기술을 훈련하시나요?”
“그래. 출정하지 않을 때는 빠짐없이 나왔지.”
리체는 무심코 툭 뱉었다.
“그럼 카이로 님을 구경하는 사람도 많았겠군요?”
“…….”
“이토록 멋있으시니.”
카이로는 말이 없었다. 리체가 그를 힐끗하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입꼬리가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그런 편이지.”
나직이 대꾸하고선 헛기침을 한다.
‘이런 면도 있네.’
왠지 그가 귀엽게 느껴져 리체는 미소를 지었다. 덩치도 크고 언행도 살갑지 않은 사내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가슴 근육을 부풀리는 사춘기 소년처럼 구는 모습이 보기 썩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곧 연병장이 보이는 후원의 끝까지 도착했다. 카이로의 말대로 벌써 궁정인이 여럿 있었다. 잘 꾸민 여자들부터 연미복을 세련되게 갖춘 젊은 사내들까지. 꽃을 보는 척 후원을 돌아다니지만 리체는 그들의 신경 끝이 연병장을 향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장군?”
막 후원의 출구를 통해 들어서던 남자가 카이로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기사단원의 복식을 하고 있는 그의 어깨 견장은 카이로의 것과 동일했다. 카이로가 단장으로 있는 붉은독수리 기사단이다.
“오늘은 자택에서 쉬신다더니, 황궁엔 웬일이십니까?”
“잠깐 볼일이 있어서. 자네는?”
“전하를 만나 뵙고 오는 길입니다.”
“궁도를 수련 중이신가?”
“아무렴요. 한창이십니다. 리스타우프 대공이랑 내기까지 하시고 계십니다.”
“내기?”
“지금 세 판 중에 한 판은 전하께서 이기셨는데 대공의 실력 역시 만만치 않아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장군도 참여해 보시죠. 궁도에도 발군이시지 않습니까.”
“내가 끼면 상대가 안 될 텐데. 재미를 망치면 쓰나.”
“아이고, 전하께서 진노하실 수 있으니 그건 안 되겠네요.”
너스레를 떠는 기사는 황태자의 측근 기사단답게 카이로 앞에서도 좀체 주눅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전하께서 활쏘기에 재능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리스타우프 대공이 왕년에 활 하나로 북부를 제패했다고 하는데, 그런 그를 근소한 차이로나마 앞서 나가시다뇨. 과연 극우성 알파라고 해야 할지.”
“전에 나와 내기할 적엔 그 정도까진 아니셨는데. 대공이 전하를 상대로 적당히 예의를 차리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한번 보십시오. 이제 곧 전하 차례이기도 할 테니…….”
기사는 카이로를 후원 끝으로 이끌었다. 리체도 카이로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꽃나무 사이 탁 트인 정경에 연병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중을 드는 궁정인들이 손바닥 크기로 보이는 거리였다.
“저기 계십니다.”
기사의 말에 리체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붉은 천막이 펼쳐진 곳 앞에 두 사내가 서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의 사내들은 옷차림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독보적이었으므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황태자의 내기 상대일 대공은 반백의 머리를 뒤로 깔끔히 넘기고, 그 나이대에 맞지 않는 탄탄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먼 거리에서도 부리부리한 눈매에 번뜩이는 청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청년도 그의 상대가 되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고귀한 태생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대공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는 상의에는 붉은색이 우아한 멋을 살리는 데가제를 입어 넓은 어깨를 강조했고, 하의로는 하얀색의 통 넓은 위사르를 입었는데 꽉 끼는 퀼로트가 아니었음에도 매우 늘씬하고 길어 탄탄한 다리를 예상할 수 있었다. 오히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실루엣이 그 안의 종마처럼 단련된 다리를 상상하게 했다.
신분제 없는 세상에서 살아온 리체의 눈으로도 황태자는 조금 특별해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 저런 모습이리라.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귀태가 흐르는 사내였다. 황태자의 차례인지 그가 활을 과녁을 향해 들어올렸다.
일반적인 활이 아닌지 그 길이가 1미터에 달하는 큰 활이었다. 시위에 화살을 당기는 것도 쉽지 않은지 황태자의 손등에 핏줄이 팽팽히 곤두섰다. 그러나 그 얼굴만큼은 평온한 상태로, 과녁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 순간, 희귀한 형질인 ‘극우성 알파’를 즐겁게 관찰하던 리체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흠칫했다.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와우, 페로몬이 여기까지 밀려드는군요. 과연 황태자 전하시네요.”
누군가가 감탄하는 중얼거림이 귓가를 스쳤다.
페로몬.
이 이질적인 감각은 페로몬 때문인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강렬한 기시감에 머리가 아찔했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녘, 깊은 산중에 들어가 맡았던 푸르른 숲의 냄새. 감히 무릎 꿇지 않느냐며 온몸을 내리누른다. 숲에 들어온 모든 생명을 관장하는 영물처럼 압도적인 기세.
헉, 숨을 몰아쉬었다.
‘뭔가 이상해.’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카페인을 과다 복용한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불안’이 그녀를 잠식했다.
[상태 이상 ‘불안’에 빠집니다.]
리체는 짜증스럽게 시스템 메시지를 치워 버렸다. 그러면서 문득 리체는 이 향이 정말로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질적인 향. 그러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듯한…….
‘언제였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 기억을 되짚어갔다.
그 순간.
피잉!
탄성 소리에 리체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화살이 쏘아져 나간다. 강한 힘을 내며 동시에 폭발적으로 확장된 페로몬이 노도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서서히 몸을 덮쳐 오던 페로몬의 농도가 짙어지자 리체는 몸을 휘청했다.
“리체?”
후각은 시각보다 민감하다. 때때로 향은 과거의 일을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페로몬의 강한 향내가 리체의 눈앞에 과거의 조각을 가져다주었다.
‘하아……. 헉, 흣.’
신음 소리. 살 부딪치는 소리. 어두운 사위.
‘후우.’
만족스러운 한숨. 강하게 끌어당겨지던 감각. 땀에 젖은 피부가 끈적하게 쓸리고 붙는, 약간의 불쾌감. 리체는 가쁘게 호흡했다. 과호흡을 하는 환자처럼 과도하게 들이마신 숨은 폐까지 닿지 못했다. 말소리는 기억할 수 없었다. 의미를 알 수 없으니 머릿속에 남지 않았던 탓이다. 그래. 이건 그때의 기억이다.
리체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의 초점이 풀려 갔다. 과도한 충격과 밀려드는 정보로 불규칙한 숨이 불안하게 흩어졌다. 쾅!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이 차원에 불시착했을 때의 극초반.
팔이 꺾인 인형처럼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기억 속의 사람.
아는 것 없이 무지하여 말의 의미조차 알아듣지 못했던 그 시기의 그녀였다.
활을 쏘는 순간 휘몰아친 패도적인 알파 페로몬에 리체는 속절없이 과거의 기억에 휩쓸렸다.
애초에 기억력이 최상위 인종 수준인 그녀가 뭔가를, 특히 뇌리에 각인될 만큼 강렬한 일을 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때만큼은 모든 게 흐릿했다. 준비되지 않은 차원 이동은 그녀의 내부 감각을 뒤흔들었고, 반고리관은 자리에서 이탈하여 제대로 된 공간감도 갖지 못했다.
남자는 그런 상태의 그녀를 집어삼켰다.
‘이건 또 무슨 재미있는 선물이지?’
그는 이곳의 언어를 할 줄 모르는 자신을 신하 중의 하나가 밀어 넣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베타를 안는 건 재미가 덜하지만, 어쩔 수 없나.’
그리고 안겼다. 일주일, 아니 그 이상인가. 어쩌면 한 달이었을 수도.
매일같이 짐승처럼 뒤엉킨 기억 속에서 시간 감각은 무의미했다. 어떤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그 순간의 질척거리는 감각이 기억 대신 남아 있었다. 남자는 강했고, 벗어날 수 없었으며 집요했다.
천운이 따라 그곳을 빠져나온 이후에는 알 수 없는 신열에 시달렸다. 몇날 며칠을 끙끙 앓고 나자 눈앞에 이상한 상태창이 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유전적 형질이 변화하여 베타에서 열성 오메가가 되었습니다. 페로몬을 개화하고 이 차원의 형질을 연구하십시오.
성공 시 보상: 귀환의 열쇠.
실패 시 페널티: 없음.]
맞다. 그랬다. 그래서 1년 동안 알파오메가, 즉 이곳의 원주민들을 연구했고 이제 차원 이동의 실마리를 잡았다. 명확해진 기억에 리체는 눈앞이 핑글핑글 돌 정도로 어안이 벙벙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기가 막혀 숨통이 조였다.
어째서 왜 오메가가 되었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라스카의 말처럼 베타가 오메가가 된 건 매우 희귀한 일이었는데도.
사실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인간의 정신은 허약한 만큼 방어 기제를 잘 갖추고 있었다. 그런 몸이 본능적으로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성과 본능과 감성이 모두 작동하지 못했던 치욕스러운 시간은 그녀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으므로.
라스카의 말이 맞았다. 오메가가 되었던 건 강한 알파의 페로몬에 지속적으로 잠식되었기 때문이다.
강제적으로 발현되었을 시점,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났기 때문에 불완전한 오메가 상태였고, 다른 알파 페로몬을 접하며 페로몬 농도가 짙어졌다.
베타였던 그때는 페로몬을 감각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알파인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느낄 수 있었다.
강력한 태양빛을 가득 흡수한 숲에 들어온 느낌.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도사린 숲의 주인이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이게 극우성 알파.’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라는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리체는 당황스러웠다. 원래 계획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극우성 알파가 어떤 존재인지 가늠하고, 그의 성품을 살피고, 가능하다면 건수를 만들어 자주 접하는 기회를 만들자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그의 측근인 카이로가 있으니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미래 지향적 계획은 극우성 알파 관찰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을 것을 전제로 했다.
‘실패야.’
리체는 자신이 약한 공황 상태에 빠졌음을 인지했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고 심박수는 평소보다 높으며 호흡은 가쁘다. 끊이지 않고 흘렀던 생각의 흐름 역시 거대한 돌덩이가 박힌 것처럼 삐걱거렸다. 심지어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극우성 알파의 데이터를 모으는 건 포기해야 해.’
적어도 그녀가 오메가인 이상, 극우성 알파를 상대로 수작을 부리는 건 매우 어려웠다.
알파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극우성 오메가인 이델리 그레이스를 만나 보았다. 그래서 그녀를 기준으로 생각했지만 그게 착오였다.
우성에도 급이 있다. 우성 형질이라고 다 같은 급이 아니란 말이었다.
황태자는 극우성 알파 중에서도 상위 인종일 게 틀림없었다. 리체는 그가 기억 속의 그 남자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그에게 접근하려는 모든 계획을 머릿속에서 폐기 처분했다. 그녀는 자신이 공포에 질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다음. 그다음으로는…….’
그녀는 카페인 중독 환자처럼 달달 떨리는 손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몸에서 열이 오르는 듯했다. 생각을 이어 나가는 게 힘든 걸 보면 확실했다. 열이 머리까지 뻗치고 있었다. 정도는 약하나 1년 전 신열을 앓았던 그때와 증세가 비슷했다.
그녀는 우선 이미 몸을 파고든 알파 페로몬을 몰아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리체? 리체!”
강한 힘이 어깨를 붙들었다. 고개를 들자 카이로가 그답지 않게 다급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리체는 다리가 풀썩 꺾였다. 다행히 카이로가 어깨를 붙잡고 있어 땅에 나뒹구는 꼴은 면했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건 어려움이 따랐다.
그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래 봤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라 미약할 따름이었지만 의지는 명확했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저자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몸이, 별로 안 좋아요.”
“마차를 탈 순 있겠나?”
리체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마차의 진동을 감내할 몸 상태가 아니었다. 카이로는 대답을 이해하자마자 지체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리체는 혹여 황태자가 이쪽을 발견할까 카이로의 어깨를 부여잡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차분한 그녀가 이렇게 몸을 떨다니, 단단히 탈이 났구나 싶어 카이로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조금만 참아. 내가 있으니 걱정할 거 없다.”
무뚝뚝한 목소리는 깨지지 않을 돌처럼 믿음직스러웠다. 마음은 안정되었지만 몸은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뜨거운 몸을 보다 단단히 끌어안으며 카이로가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걸어갔다.
“장군! 제가 뭐 도울 거라도……!”
카이로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기사단원은 얼떨떨해져서 카이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투박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는 얼굴이 묘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래. 애인이 아니라 연인이었나?”
그가 모시는 카이로 스트리고 백작은 알파치고는 점잖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여자를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적당히 욕구가 쌓이지 않을 정도로 여자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같이 있는 여자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방금의 일로 생각이 바뀌었다.
여자가 휘청이는 순간 돌변했던 분위기를 떠올린 기사단원은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현재 도블락에서 활동하는 모든 장군들 중에서 단연 첫손에 꼽히는 카이로 스트리고의 위압감이 아직까지도 남아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함께 전장을 누빈 지 5년이 되었지만 저렇게 동요하는 그는 처음 보았다.
“어째 굉장한 걸 봐 버린 것 같은데.”
“랜든 경.”
카이로가 사라진 이후에도 멍청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던 기사단원은 제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돌렸다. 염소수염의 사내가 약간 허리를 굽힌 채 서 있었다.
“스올? 무슨 일이지?”
궁정인들이 흔히 입는 황동색의 장식 많은 쥐스토코르를 걸치고 레이스 프릴이 달린 하얀색 스카프를 찼다. 하의로는 다리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하얀색 호즈에 노란빛 도는 실크로 장식을 넣은 우플랑드를 입었다. 남자는 절도가 있다기보다는 우아한 움직임으로 한쪽 손을 뻗었다. 남자는 궁정인 스올로, 황제를 모시는 말단 궁정인이었다.
근래는 황제의 곁보다는 황태자의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 박쥐 같은 처세에 혀를 차는 이들이 많았지만 딱히 욕을 할 건 없었다. 쇠락해 가는 태양보다 새로이 뜨는 샛별에 몰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물며 샛별에게서 태양의 싹이 보인다면야 다른 이들보다 한발 먼저 노선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행동일 터였다.
반쯤 문인스럽게 굴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인으로서의 자부심이 확고한 랜든은 스올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황태자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태자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의아했던 랜든이 제 이마를 쳤다.
“아! 무기고에 가는 길이었지. 이런. 방금 단장님을 만나느라 깜박 잊었군. 지금 얼른 갔다 오겠네!”
낭패한 표정으로 랜든이 몸을 돌리려 하자 스올이 재빨리 만류했다.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그럴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전하께서 활 말고 다른 것은 겨루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러신가?”
“예, 또한 방금까지 스트리고 백작님과 같이 있으셨지요?”
“그랬지.”
“무슨 대화를 그리 즐겁게 하셨는지요?”
“그걸 보셨나? 전하께서는 장군을 총애하시니 궁금증이 돋으셨나보군. 별건 아니었네만.”
랜든이 습관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이자 스올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비켰다.
얼른 태자에게 가 보라는 무언의 몸짓에 랜든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태자가 부른다는데 지체하고 있을 순 없었다. 랜든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뒤에서 스올은 의혹에 찬 얼굴이었다. 황태자의 명령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던 탓이었다.
‘카이로의 곁에 있던 여인에 대해 알아 와.’
* * *
황궁 의료실의 하얀 침대에 몸이 눕혀지는 줄도 모르고 리체는 어지럼증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번쩍번쩍 떠오르는 과거의 잔상에 머릿속이 혼란했다. 그간 무의식 깊이 가라앉아 흐릿하게 고여 있던 기억들이 이제 와서 폭죽처럼 튀어 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대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공, 태자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말인가? 지금은 곤란한데.”
“중요한 볼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런.”
카이로의 곤란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내 크고 시원한 손이 뺨과 이마를 동시에 쓸었다. 리체는 무의식적으로 그 손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열이 심하다. 왜 이런 거지?”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으니 면밀히 진찰해야 할 듯합니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아가씨의 건강을 회복시키겠습니다.”
“그래. 황궁의 치유술사들은 실력이 뛰어나니, 자네만 믿겠네.”
“염려 마십시오.”
대화가 끝났음에도 카이로의 페로몬은 떠날 기미가 없었다. 황태자가 카이로를 부른단 말이지. 만약 카이로가 가지 않을 경우, 그자가 여기까지 올 수도 있는 건가? 지금 황태자를 마주할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리체는 마음이 다급했다.
억지로 눈을 가물가물하게 떴다. 걱정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카이로에게 입술을 달싹였다.
“너무 걱정 마세요. 좀 쉬면 나을 거예요.”
못마땅하게 입을 앙다물더니, 곧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를 꾹 눌렀다.
“그대는 무른 복숭아처럼 약해서 걱정이 가시질 않아.”
“…….”
“얌전히 누워 있어. 얼른 다녀올 테니.”
그의 말이 조금 낯 뜨거웠던 리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로의 페로몬이 멀어진다. 리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비로소 속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껏 알파 페로몬이 불편하다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몸이 안 좋아서일까, 속이 뒤집어지는 듯했다. 카이로가 떠난 후에야 다소 편안해진 속에 안도하며 리체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치유술사의 차가운 손이 몸 여기저기에 닿았다. 리체는 몸을 움츠렸다. 그의 손은 카이로의 손보다 온도가 낮았으므로, 몸에 닿을 때는 약간 서늘하게 느껴졌다. 치유술사가 혀를 내둘렀다.
“정말 열이 심하군. 보통 이런 갑작스러운 고열은 발정기가 왔을 때 나타나는 게 일반적인데, 베타가 그럴 리도 없고. 해열제도 듣지 않으니…….”
치유술사의 난감한 기색이 전해져 왔다. 리체는 자신이 오메가라고 밝혀야 하는지 짧게 고민했다. 하지만 발정기라니. 이렇게 아픈 게 발정기일 리 없다.
“충격을 많이 받아서 그런 것 같아요.”
“아가씨, 정신이 드십니까?”
반색하는 치유술사를 향해 리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신적인 충격입니까?”
“네.”
리체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짧은 고민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절로 찌푸려지는 얼굴로 자꾸만 올라오는 신침을 삼켰다.
“갑작스럽게 고밀도의 페로몬을 접할 경우 이상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나요?”
아무래도 최악을 달리는 컨디션이 황태자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베타가 아니었군요.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몸이 페로몬을 받아들이기 힘들 경우 페로몬 역류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길어지는 말이 귀를 파고들자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리체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럼 도움이 될 만한 약을 처방해 주세요. 저는 더는…….”
의식이 흐려지는 그녀를 보고 놀란 치유술사가 손을 뻗었다. 하얀 빛무리가 손바닥을 은은하게 감쌌으나 리체의 안색은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이능도 듣지 않다니 심상찮은데.”
치료사가 답답하게 탄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체는 둥글게 몸을 만 그대로 깊이 침잠했다. 팍팍 튀어 올랐던 기억이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었다.
외부의 감각을 차단한 그녀는 곧 이제까지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었던 무의식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 * *
리체가 처음 이 차원에 떨어졌을 때 그곳은 이블린이란 왕국의 영토였다. 현재 도블락과 국경 지대를 사이에 두고 잦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그 나라였다.
어떠한 장비도 준비도 없이 차원을 이동한 후유증은 지독했다. 온몸의 감각이 뒤흔들렸기에 리체는 사태 파악이라든지 이곳의 정보를 습득한다든지 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출중한 요원들이 포진한 실무진과 소수의 연구자들은 생존을 위해 비상 훈련을 받는다. 리체도 기본 소양 교육으로 생존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예기치 못하게 차원에 고립될 경우에는 일단 안전한 곳을 찾게 되어 있었다. 보통은 인적이 없는 지역의 버려진 폐가라든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숲의 동굴을 찾아 몸을 숨기는 게 기존의 매뉴얼이었고 리체도 당연히 매뉴얼에 따랐다.
닭 모가지 하나 비틀 수 없는 지금 사람을 만나는 건 위험했다. 누가 위험하고 위험하지 않은지 판단할 능력이 현저히 부족했으므로 알아서 몸을 사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외진 산골 자락에 떨어진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고 기듯이 움직여 다가갔다. 동굴은 입구에 넝쿨이 커튼처럼 늘어진 상태여서, 당시의 리체가 동굴을 발견한 건 천운이었다. 나중에서야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신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행운이구나. 그런 생각만 했다.
허물어지려는 몸을 정신력으로 지탱했던 리체였지만 동굴에 들어간 이후에는 안도감에 힘이 쭉 풀렸다. 동굴 특유의 어둑하지만 따스한 안락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조사를 명령한 소장이나 이따위 위험한 물건을 발명한 정신 나간 공학자를 욕할 힘도 없었다.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리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동굴 입구에 주저앉아 새카만 안쪽을 응시했다. 바닥을 더듬거리자 아이 주먹만 한 돌멩이가 잡혔다. 그걸 주워 들어 동굴 안쪽으로 던졌다. 보통의 야생동물이라면 뭔가 반응이 있을 텐데 잠잠했다. 리체는 혹시 몰라 다섯 번 더 돌멩이를 던져 보고서야 안심했다.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입구에 커튼처럼 내려온 넝쿨을 젖히며 안쪽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갔다. 그때는 넝쿨의 모양이 동굴에서 자연적으로 나기에는 인위적이란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몇 걸음 떼었을까. 리체는 멈추었다. 목이 따끔했다. 칼이 대어져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은빛 칼날에 식은땀이 솟았다.
“넌 누구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당시의 리체는 이블린어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도블락으로 넘어와 도블락어를 습득한 이후에서야 그때의 남자가 도블락 사람이었다는 걸 어렴풋 깨달았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정체를 묻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 깊은 산중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도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블린의 숲 안쪽에 숨어 있었을 남자는, 냉랭한 목소리였다.
그때 입구의 넝쿨 틈 사이로 옅은 빛이 새어 들어와 남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드러난 얼굴이 사람 같지 않아 리체는 아픈 와중에도 감탄하고 말았다. 태어난 이래로 이렇게까지 잘생긴 사람은 보지 못했다. 일찍이 동굴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대단히 근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귀티가 나는 금발과 깎아지른 곶처럼 매끄러운 얼굴선. 경계심을 품고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는 다이아몬드처럼 차가웠다.
리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가 알아들을 만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도 그가 뭐라고 하는지 몰랐으므로, 섣불리 입을 열기 애매했던 게 컸다.
감탄이 지나고 나자 무기력해졌다. 살아남기 위한 다른 수를 강구하기에는 체력도 정신력도 바닥을 기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고 손짓 발짓을 이용해 대화를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뭐라고 하는 거야.”
문득 남자가 탄성을 뱉었다. 내 뜻을 이해한 걸까?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음을 알고 실망했던 리체의 얼굴도 밝아졌다.
남자가 넓적한 검면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든 채 리체는 눈을 깜박거렸다. 눈앞은 흐렸고, 몸을 지탱하는 무릎은 후들거렸다.
“내 충직한 신하의 짓이군. 이건 또 무슨 재미있는 선물이지?”
“…….”
“이번 러트는 어쩔 수 없다고 했건만, 기어이 여자를 데리고 온 건가. 이블린의 여자처럼 보이는데. 오메가도 아닌 것 같고. 하긴 이런 산골에서 오메가를 구할 수는 없었겠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표정이나 말투를 통해 뜻을 가늠하고자 했던 리체는 점점 힘이 빠졌다.
“베타를 안는 건 재미가 덜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 다음부터는 암전이었다. 남자가 옷을 벗겼고, 반항했고, 그러다 어딜 맞았는지 기절했다. 차원 이동의 충격이 남은 몸은 타격도 참을 수가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다리 사이가 타는 것처럼 아팠다. 남자를 떼어 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욕을 하고, 빌고, 애원하고, 그만해 달라 애걸했지만 남자는 그녀의 모든 요청을 무시하고 광인처럼 난폭하게 허리를 움직여 댔다.
그 이후 기억나는 거라곤 거친 숨소리와 탄성, 뇌가 녹아 버릴 듯한 열기와 지독한 쾌감이었다.
그게 쾌감이라는 걸, 리체는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무성애자에 가깝게 살아왔던 그녀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충격적인 감각이었다. 억지로 당하면서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상황 자체가 리체에겐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정신없이 흔들리고 죽을 것처럼 소리 지르다 목이 쉬었을 때는 감로수와 같은 물이 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남자가 손수 먹여 준 물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마른 목을 적시는 약간의 물로는 땀을 잔뜩 뺀 몸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지독한 쾌감.
온몸이 얼얼한 둔통.
얼마나 강하게 잡혔는지 다리에 빼곡하게 들어선 멍.
빨갛게 열꽃이 핀 가슴.
천국을 노니는 것처럼 기분 좋았지만 그건 평온한 천국이 아니라 뜨거운 칼날 위를 걸어 통증마저 쾌감으로 인식되는 그런 비정상적인 쾌감이었다.
남자는 하루 대부분 그녀를 안았고, 놔주질 않았다. 리체의 체력은 이미 바닥을 기고 있었다. 심지어 날이 갈수록 이상한 냄새가 맡아졌다. 시린 냄새 나는 동굴에서 가득 쌓인 청량한 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그녀가 정신을 잃은 사이 나무 따위를 가져온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밖의 것들이 내는 냄새가 아니었다. 그게 무서웠다.
이대로 있다가는 불구덩이에 떨어져 온몸이 불타겠다, 싶을 때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아주 운 좋게 동굴이 비었을 때였다.
탈력감이 심했고 목은 쉬어서 침을 삼키는 것도 아팠다.
살기 위해서 움직였다. 최대한 멀어졌다.
그렇게 도블락으로 왔다.
그리고…….
번쩍.
“하아, 하아.”
눈을 뜬 리체는 금빛 문양이 수놓인 천장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궁의 의료실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창졸간의 충격으로 생겼던 공황이 가시자 그녀는 본래의 명석한 이성을 되찾았다. 다만 몸은 어쩔 수 없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차가운 손으로 저린 팔을 주물럭거리며 리체는 이를 악물었다.
‘극우성 알파가 그 남자였다니.’
황태자가, 그토록 호기심 일었던 마지막 데이터가, 수집하지 못했던 극우성 알파의 형질을 가진 게 그 남자란 사실은 재앙에 가까웠다. 아니, 재앙이었다.
동굴에 있을 적 남자는 집요했고, 그녀를 잠시도 놔주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 중간에 그녀가 신하가 데려온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도 말이다. 대화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리체에겐 그 점이 굉장히 위험하게 느껴졌다.
얀테 M. 루세이노.
그에 대해선 지긋지긋하게 들어, 그녀가 그런 것들엔 관심이 없었음에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1년 사이 쟁쟁한 황위 후보자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계승 서열 1위가 된 피의 황태자. 범접할 수 없는 상류 사회의 최정점, 극우성 알파. 같은 극우성인 오메가 이델리 그레이스가 끊임없이 추파를 보내는 상대…….
무엇보다도 황제가 된다면 틀림없이 부강하고 강력한 도블락을 만들 거라며 벌써부터 추앙받고 있는 음험한 심계가 그녀는 두려웠다.
리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미치광이가 이 제국의 통치자가 된다니. 얼마 못 있겠군, 이 땅도.’
문득 그녀는 자신이 황궁에 있음을 새삼스럽게 인식했다. 이곳은 그의 앞마당이었다. 황궁의 궁정인들이 사용하는 의료실을 귀한 신분인 그가 행차하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마주치고자 하면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는 가까운 거리가 아닌가. 리체는 떨리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벌떡 일어나려던 리체는 철퇴에 몸을 얻어맞은 듯한 감각에 침대에 엎어져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싶어 얼떨떨했다.
‘몸이 왜 이러지?’
휘적거리던 손등이 침대의 철재 프레임에 닿았다. 그 순간 놀랄 만큼 차가운 느낌에 움찔했다.
‘뭐가 이렇게 차가워?’
가만 있자. 어라. 고작해야 침대 프레임이 얼음처럼 차가울 리 없었다.
한발 늦게, 리체는 침대 프레임이 차가운 게 아니라 제 몸이 지나치게 뜨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 인식하자 몸속에서 불길이 화르륵 솟아올랐다. 꼭 그런 기분이었다. 몸에 용암이 솟는 화산이 생긴 듯했다.
“헉!”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리체는 허리를 앞으로 꺾었다. 이마가 시트에 닿았다. 서늘한 시트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이마를 비벼 댔다. 몸이 너무 뜨거웠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몸 깊은 곳이 뜨거우면서도 박박 긁어내리고 싶을 만큼 간지러웠다. 수천 마리의 개미가 허벅지 사이를 기어 올라와 자궁을 파고들고 속에 침입하는 것처럼 끔찍한 감각이었다.
리체는 침대 위에서 병 걸린 사람처럼 바르작거렸다. 밭은 숨을 쉬자 벌어진 입 밖으로 뜨거운 숨이 뿜어져 나갔다.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이 송곳처럼 박혀 징을 징징 울렸다.
‘박고 싶다. 박히고 싶다. 누군가 박아 줬으면 좋겠다.’
비정상적인 욕망에 리체는 기겁했다. 자신이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정상적인 생각도 뜨거운 파도에 휩쓸려 모래성처럼 흩어졌다.
‘누가 굵고 긴 자지로 박아 줬으면 좋겠어. 더는 가렵지 않게 미친 듯이, 강하게 박아 줬으면 좋겠어!’
제정신일 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각이 머리에서 아우성쳤다. 다리 사이는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미끈한 애액으로 흠뻑 젖었다. 피부는 뜨겁게 달아올랐고 손등엔 불긋하게 발진이 일어났다. 어딜 봐도 정상적인 상태라고 볼 수 없었다. 리체는 제 몸에서 왈칵거리며 쏟아져 나가는 페로몬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몸에서 뿜어지던 페로몬이 복숭아 향기였다면 지금은 복숭아로 만든 잼이 콸콸 쏟아지는 것처럼 비교할 수 없이 농밀하고 끈적했다.
저절로 배배 꼬이는 발가락. 슬며시 벌어지는 허벅지의 살을 아프게 꼬집자 미약하게 정신이 들었다.
‘발정기다.’
리체는 드디어 본인에게 찾아온 이상 상태의 연유를 깨달았다. 오메가들이 조절할 수 없다는 신체의 이상 상태. 자신에게는 오지 않는다고 잠정적으로 판단 내렸던 발정기가 하필 지금 찾아온 것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상태 메시지가 떴다.
[상태 이상 ‘발정기’에 빠졌습니다.
오메가로서 본격적인 시작을 맞이합니다.
발정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십시오.
실패 시 페널티: 죽음.]
무시무시한 마지막 단어에 리체는 아연해졌다.
‘라스카가 준 약이 있어!’
밝아졌던 리체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약은 황궁의 신체 검문을 염려하여 카이로의 저택에 두고 왔다.
‘내가 안이했어. 이 몸은 발정기가 오지 않는 게 아니었어.’
발정기의 스위치가 눌리지 않았던 것뿐이다. 얀테 루세이노의 페로몬을 맡은 순간, 그 페로몬이 몸을 파고든 순간 멈췄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발정기가 시작되었다.
발정기에 정신을 못 차린다는 건 틀린 말이었다. 발정기는 땡볕 아래에서의 아이스크림처럼 이성이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도 빠르고 강하게 이성이 마비되었다. 리체는 제 몸으로 한 번 겪어봤음 좋겠다, 하고 발정기를 궁금해했던 과거의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철없는 생각이었다. 무지하기에 품을 수 있었던 바람이었다.
“하, 하아. 카, 카이로…….”
리체는 침대 시트를 꽉 붙잡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발정기를 직접 본 적은 없으나 라스카와의 대화로 짐승들이 교미하는 시기 따위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 따위로 못 참을 수 있는 거라고는…….
리체는 치료실의 서랍장을 뒤져 찾은 옵세진을 비타민처럼 씹어 먹었다. 정량을 넘어선 양을 복용했는데도 발정열은 가라앉지 않았다.
쳇, 리체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 정도까지 진행된 상태에는 뒤늦게 약을 먹어도 들지 않는다. 발정기를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알파와의 교접뿐. 리체는 바로 카이로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 닥치면 절로 의지하게 되는 사람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위험한 상황이다. 오메가가 발정기 때 내뿜는 페로몬은 자제력 부족한 알파들에게 치명적인 마약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알파들이 손으로 만져질 정도로 농밀한 페로몬을 뿜는 먹음직스러운 오메가를 그냥 둘 리 만무했다.
최악의 경우엔 단체로 굴려질지도 모른다.
마지막 가정을 떠올린 리체는 침대 아래 발을 내린 상태로 멈칫했다. 이대로 나간다면 제 존재를 알파들에게 사방팔방 알리는 꼴이 될 것이다. 부나방 같은 이들을 끌어들이지 않으려면 차라리 이곳에서 카이로가 오기를 기다리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몸이 펄펄 끓고 있었다. 그냥 눈앞에 나타난 아무에게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박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스스로가 리체는 경악스러웠다.
“이건, 무슨……. 이런! 발정기군요!”
낯선 목소리에 리체는 열에 들뜬 눈을 들었다. 흰색 커튼을 헤치고 들어온 안경 낀 남자 치유술사가 입을 떡 벌렸다. 리체는 다리를 움찔했다. 본능적으로 코를 벌름거렸다. 약간 가벼운 초콜릿 냄새.
‘알파가 아니야.’
리체는 실망스럽게 생각했다. 알파였다면 박아 달라고 했을 텐데. 오메가는 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리체는 열기에 쉰 목소리로 색색거렸다.
“카이로님을, 어서…….”
“이를 어쩌지, 정말. 예? 뭐라고 했어요?”
“카이로 님을 불러 줘요.”
“백작님을요? 아, 아. 그렇군요. 그래요. 조금만 기다려요, 어디 나가지 말고!”
리체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로가 온다고 생각하니 풍랑이 일던 마음이 약간 평온해졌다.
* * *
“장군, 어디 불편하신가? 늙은이가 말이 많기는 했다만.”
리스타우프 대공이 쇠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르며 말했다.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는 호방한 노인의 눈매를 카이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리스타우프 대공. 역대 두 번의 황제를 모셨고, 이제 새로운 황제를 모실 사람.
황가의 신하들은 모두 황제를 받들어 모시지만, 그에게 모신다는 건 약간 다른 의미였다. 전전대 황제의 경우에는 그가 직접 황위에 옹립한 업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황가의 가신이지만 누구도 그를 단순히 신하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가 만약 세 치 혀를 나불대는 문관 귀족들만큼의 간교함과 교활함을 갖췄다면 황가는 이미 리스타우프 대공의 수중에 반쯤 넘어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황후 정도는 얼마든지 본인 집안의 여식으로 채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뭇 귀족들에겐 다행히도 대공은 그런 데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도블락의 부강함, 가문의 굳건함을 추구할 뿐이었고 그런 그에게 강한 군대와 무력은 아주 매력적인 관심사였다. 그러니 황궁 최고의 기사단인 붉은독수리의 단장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황태자의 부름에 찾은 응접실에는 태자뿐만 아니라 대공도 함께 있었다. 도중 궁정인의 요청으로 태자가 자리를 비우고, 리체가 걱정된 카이로도 일어나려 할 때 대공에게 붙잡힌 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불편하군.’
카이로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리스타우프 대공이 제게 갖는 관심이 썩 달갑지 않았다.
듣기로 그에게 늦게 얻은 여식이 있다고 했다. 사위로는 제국에서 가장 강한 사내를 얻겠다 했던가?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과연 대공 정도는 되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하며 웃었던 카이로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웃을 수 없었다.
청광이 흐르는 눈을 빛내는 대공은 평소 그의 성정답지 않게 카이로를 붙들어 매고 있었다. 카이로는 그의 시선에서 거미줄 같은 끈끈함을 느꼈다.
“그래. 전하께서는 장군에게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하셨는데 말이야.”
다행히 재고 따지는 거 싫어하는 성격대로 곧바로 본론이 나온다. 카이로로서도 이게 편했다. 본론이 나오기 전에 이런저런 대륙의 정세와 어떤 군대와 어떤 용병단이 특출난지 따위의 대화는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아니, 다른 때라면 명성 높은 대공과 권력, 그리고 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싫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런 주제는 흥미로우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카이로는 치료실에 눕힌 리체가 기운을 차렸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흑단나무처럼 단단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명성답게 카이로는 말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아닙니다.”
“응? 뭐가 아니란 거지?”
“결혼 생각, 있습니다, 대공.”
차분한 대꾸에 리스타우프 대공의 주름진 눈가가 살짝 팽팽해졌다. 이내 힘이 빠진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염두에 둔 상대가 있으신 모양이군.”
카이로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거, 맘이 딴 데 있는 사람을 붙잡고 있었구먼.”
대공은 주름졌지만 방패처럼 큰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그다지 언짢은 기색은 아니었고 호탕한 면모에 카이로는 적이 안도했다.
“혼사가 아니더라도 본 공은 장군과 술자리를 나눌 수 있는 지기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 영광을 이 늙은이에게 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아쉽기는 아쉬운지 대공의 성으로 초대하는 말을 남겨 카이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으로 불러 대공녀와 친해지게 만들려는 생각인 것 같았지만 이것까지 거부할 건 없었다.
“위업을 따질 수 없는 대공의 지기라니,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든 듯 대공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까부터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것 같은데 그만 가 보시게나.”
“다음에 논검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카이로는 지체 않고 일어섰다.
아마 오늘의 대화를 돌아가신 선대 백작 부부가 들었다면 굉장히 아쉬워했을 것이다. 스트리고 가문은 다른 가문에 기대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성한 집안이었으나 그럼에도 리스타우프가와 연을 맺는다는 건 한층 강하게 도약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황가였다면 두 가문의 결합을 반대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의 황제와 곧 황제가 될 황태자는 작은 것에 연연하는 소인배가 아니었고, 스트리고와 리스타우프 두 가문은 황가를 위협할 만한 성정이 아니었으므로 가능할 수 있는 결합이었다.
황가의 두 충신이자 유력한 두 가문의 결합은 국혼만큼이나 이목을 끌었을 터.
카이로 또한 한 가문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가문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문을 위해 리체에게 정부가 되어 달라 하기엔, 그의 마음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를 정부로 두고 싶지 않다. 한 점 부끄럼 가진 마음 상태로 있고 싶지 않다. 그녀를 당당히 곁에 두겠다. 그 마음과 다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온통 차지해서, 카이로는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상식적으로 황궁의 치료실에 있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 리 없다. 황궁의 치유술사들은 메디치나 치유관에서 직접 사사한 자들로 그들이 못 고치는 건 메디치나 혈족들이 와야 가능할 거다. 그럼에도 카이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전쟁터를 전전하며 웬만한 상처는 약도 바르지 않고 넘기는 그에게 품에 폭 안기는 여린 리체는 작은 새처럼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다. 어찌나 걱정이 되었는지 그 리스타우프 대공과의 환담도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느껴질 만큼이었다.
‘리체.’
언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이렇게 커졌던가. 속으로 부르기만 해도 마음이 아릿하여, 카이로는 체면도 생각하지 못하고 숫제 뛰듯이 치료실로 달려갔다.
* * *
리체는 타는 듯한 갈증에 손톱으로 목을 긁었다. 몸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열기에 목구멍과 피부가 바싹바싹 말랐다. 사막에 태어난 선인장이라도 된 기분에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혀마저도 뜨거운 열기로 말라서 까칠한 입술이 닿자 통증이 느껴졌다. 시트를 움켜쥐던 리체는 살갗이 화끈거려 참지 못하고 손을 뗐다.
발정기의 증세는 상상 초월이었고, 심지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피부에 뭐가 닿기만 해도 오싹 소름이 끼쳐 왔다. 입고 있는 옷도 거슬렸다. 옷이 살갗에 스칠 때마다 다리 사이 구멍이 울컥울컥 질척거리는 애액을 토해 냈다. 머릿속에선 자지로 수도 없이 박히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리체는 처음으로 이성으로 중무장했던 자신의 존재를 장담할 수 없어졌다. 철갑처럼 감쌌던 몸 밖의 모든 방어막들이 일시에 해체된, 또는 해체되어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물…….”
갈라진 목소리가 바싹 달아오른 공기 중으로 연기처럼 흘러 들어갔다. 물을 마시고 싶었다. 천 조각만 닿아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상태지만, 물에 들어가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일단은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성대에 물을 적시는 게 먼저였다.
리체는 뜨겁게 달아오른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까. 카이로를 데려온다던 치유술사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리체는 의아했다. 이곳엔 알파오메가인 치료사가 없는 걸까. 이 정도로 농도 짙은 페로몬을 흘리고 있으니 어지간한 알파는 진즉 꼬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찌 됐건 리체에겐 다행이었다. 아니다. 이성은 다행이라 안도하는데 본능은 아쉽다 울부짖고 있었다. 왜 얼른 나타나서 이 먹음직스러운 몸을 집어삼키지 않는 거냐 발광하고 있었다.
‘미쳤군.’
리체는 입술을 꾹 물고 일어섰다. 눈은 치료실 한가운데 있는 사무용 탁자의 물병에 못 박혀 있었다. 한 걸음씩 떼는 걸음이 지독하게 느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달래 가며 바닥에 기둥을 세우듯이 옮기는 탓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물병까지 닿은 리체는 빠르게 손을 뻗어 물병을 낚아채고 얼굴을 향해 병을 기울였다.
물병 안에 가득 든 물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미지근한 온도였지만 살갗에 닿는 감각은 시원했다. 그마저도 곧 뜨겁게 변했다. 리체는 입 안으로 다량의 물을 쏟아 내고 남은 물을 얼굴에 모조리 부어 버렸다. 개미들이 물어뜯고 있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감각이 다소간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한숨을 깊게 쉬는 순간, 온몸이 근지러워졌다. 리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의 효과는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 쥐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서 마침내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은 리체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카이로, 카이로, 카이로.
속으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를 끊임없이 불렀다. 치마가 거추장스러웠다. 입고 있는 속옷은 진즉 젖어 버렸으므로, 질척하게 젖은 감각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리체는 신경질적인 손길로 스커트를 헤쳤다. 손끝이 속옷에 닿을 무렵, 손이 멈추었다.
쿵―.
심장이 떨어졌다.
달콤한, 참을 수 없이 달콤한 향기가 났다. 이제껏 그녀를 괴롭게 하는 갈증. 다른 말로 욕구 불만이 일시에 해소되는, 혹은 더 우악스럽게 기승을 부리는 듯했다.
킁킁. 리체는 콧잔등을 실룩였지만 그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온몸이, 피부가, 감각 기관이, 가까이에 다가온 알파 페로몬을 감지하고 있었다. 마치 개미가 더듬이를 휘젓듯이. 리체의 입꼬리가 환희로 올라갔다.
‘카이로!’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던 리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에 들뜬 얼굴이 굳어졌다.
이 냄새, 이 감각……?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리체의 고개가 자동문처럼 돌아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탓에 역광이 진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이 열렸기 때문인지, 다른 조화가 있어서인지 옅게 느껴지던 페로몬이 폭포수처럼 강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리체가 입술을 금붕어처럼 벙긋거렸다. 다리 사이 뚫린 입도 뻐끔거렸다.
거부할 수 없는 알파 페로몬.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리체는 머릿속으로 경종을 울렸다.
‘안 돼.’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실제의 그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리어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듯 움찔거리는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달달 떨리는 입술이 연약하고도 절박하게 애원했다.
“안…….”
‘안 돼!’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말은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안아 주세요.”
“…….”
“제발…….”
간절히 중얼거리며 리체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너무 큰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해가 살짝 기울어졌다. 역광에서 벗어난 얼굴이 리체의 시야에 정확하게 들어왔다.
“아…….”
리체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탄식을 흘렸다.
황태자. 얀테 M. 루세이노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체에게는 지옥의 신이 굽어보는 것처럼 보였다.
옥으로 깎은 듯한 근사한 입술이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살짝 들뜬 기묘한 목소리가 빠져나왔다.
“하진?”
본 차원에서 그렇게 불렸던 리체는 숨을 헐떡거렸다.
‘안 돼.’
부정의 말은 미친 듯이 매력적인 알파 페로몬 앞에서 모래처럼 스러졌다. 마치 알파를 원하는 구멍이, 오메가의 몸이 저 남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악착같이 지워 내는 듯했다.
절망적이면서도, 가슴이 기대감으로 커다랗게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