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8/25)

8장

라스카는 리체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편지를 마탑에 전송했다.

“리체가 그 허무맹랑한 차원 이론을 믿는 줄은 몰라서 조금 놀랐지만, 걱정 마세요. 내 얼굴을 봐서라도 문전 박대하진 않으실 겁니다.”

안심시키는 말에도 그라우지를 떠올리자 리체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소장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함부로 판단하거나 속단하기 이르다. 물론 마탑주가 소장이랑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소장은 그랬다. 방금 내린 결정도 순간의 변덕으로 순식간에 뒤집어 버려 보는 사람을 허탈하게 하는.

‘가장 짜증 나는 족속들.’

그저 그런 상급자라면 모를까, 수많은 사람을 대표하는 단체의 장에게 부합할 특징은 절대로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격 나쁜 상사만큼 살의를 일으키는 존재도 없다.

본 차원에서 상사인 소장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렸던 리체는 절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게임 시스템을 빙자한, 이 빌어먹을 차원 이동 기기를 사용하게 된 계기도 소장의 변덕 때문이지 않았던가.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첨단 기기를 처음에는 폐기하라 하더니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조사단을 꾸리라 명령한 탓에, 그녀가 휘말리고 만 것이다.

갑자기 두통이 이는 듯해 리체는 미간을 꾹 문질렀다.

본 차원에 돌아간다면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헤드 헌터가 접근하면 망설이지 않고 갈아타야지.

‘어쨌든 그것도 마탑주의 협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군.’

그놈의 협조를 받는다고 끝인가?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니다. 이렇게 따져 보니 그다지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차원 이동 연구의 진척 상황도 아는 바가 없지 않은가. 라스카의 말을 들어 보면 썩, 발전적이진 못한 것 같은데.

리체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막막하다, 막막해…….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라우지를 다시 찾아가는 길, 그녀는 그녀의 차림새를 신중한 눈으로 살폈다. 숲에서 보았던 흉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그녀는 고민 끝에 깔끔하지만 화사한 옷 대신에 칼같이 각이 선 정장을 선택했다.

* * *

“거기 편히 앉아요, 리체 양.”

리체는 사양 않고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았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기엔 여력이 없었다.

숲의 입구에서부터 지금까지, 리체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의심하느라 신경줄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마법사의 숲에 들어가 몇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나타난 여자는 스스로를 마탑주의 부관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몇 편 보지 않았던 판타지 영화에서 흔히 마법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답게 검은색의 품이 넓은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유려한 굴곡을 드러내는 퀼로트와 하얀 셔츠 덕에 고리타분하기보다 멋스러워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는 늦게 마중 나와 죄송하다고까지 했다. 처음 마탑을 방문했을 때 약속을 잡지 않았다며 잡상인 취급을 받고 쫓겨난 기억이 있었던 리체로서는 이때부터 머리털을 쭈뼛 세우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게다가 마탑주의 부관이란 여자는 과할 정도로 친절했다. 그레 봤자 리체는 그라우지에게 박히며 신음하던 모습이 떠올라 시선을 마주하기가 민망했지만. 부관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 몰라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어쨌든 마중 나온 그녀 덕분에 리체가 마탑으로 가는 길은 일전과 달리 아주 편했다. 레베카가 마법을 쓰는 것 같더니 금세 마탑에 당도했는데, 볼수록 탐나는 능력이었다. 걷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 종아리가 딴딴해질 때까지 숲을 헤매었던지라 더더욱. 리체는 누구나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거냐 묻기도 했다. 마법사들은 오만하다 했으니 무시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상냥한 답이 돌아왔다.

‘뛰어난 지능과 마력 감응력이 있으면 마법을 배울 수 있어요.’

‘마력 감응력이요?’

‘쉽게 말하면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체질인데, 아, 말로 설명할 게 아니라 한 번 시험해 볼까요? 뭔가 느껴지면 말씀하세요.’

하더니 기이한 수인을 맺었다. 마력 감응력이란 게 있으면 저렇게 편리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거다. 두근두근했던 리체로서는 실망스럽게도 그녀에겐 마력 감응력이 없었다.

어쨌든 앞선 두 번의 방문과 달리 그라우지도, 그의 부관도 친절했다. 전과 무슨 차이점이 있나 고민하다 라스카의 서신에 생각이 미쳤다.

‘라스카가 이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나?’

이 정도면 약간의 친분이 있다는 말이 지나친 겸손이 아닌가. 의문스러운 점이지만 무관심한 것보다는 좋은 반응이었다.

“라스카랑은 무슨 사이예요? 그 냉정한 놈에게서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듣다니, 별일이라 생각했지.”

“뭘 알고 싶은 거예요?”

그라우지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입을 열려던 리체는 그의 미소를 보았다. 문득 꺼림칙해져 섣불리 입을 열지 않자 그라우지가 고개를 까딱였다.

“리체 양?”

“아, 그냥 신세를 지고 있어요.”

“신기하군요. 자기 사람은 잘 구분하는 아이인데.”

다 큰 성인에게 ‘아이’라. 기분이 묘해진 리체가 가만히 쳐다보자 그라우지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본론부터 들어갈까요? 여기까지 찾아온 거면 어지간히 궁금한 게 있었나 본데, 그것부터 얘기해 볼까요?”

지금부터 시작인가. 리체는 티 나지 않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은근히 대범한 구석이 있어 긴장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그녀에게 워낙에 중요한 일이다 보니 절로 신중하게 되었다.

“평소에…… 마법사들의 학회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 그래요? 어떤 부분에서?”

신중히 꺼낸 말에 다행히도 그라우지가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리체는 라스카에게서 주워들었던 내용을 읊었다.

“관심을 가진 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원소 마법으로 인간의 유전 형질을 바꾸는 시도나, 탑주께서 13년 전에 발표하셨던 비알파오메가의 마법 발전 가능성 같은 것들이 아주 흥미로웠어요.”

리체는 관심 있었던 분야를 얘기하듯 눈까지 반짝였다. 그녀는 마법사들은 냉정한 척하지만 대개 자신의 연구 실적이나 능력을 추앙받는 걸 좋아한다는 라스카의 조언을 떠올리고 있었다.

통했던 건지, 그라우지는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무렴, 제 칭찬을 하는데 싫어하진 않겠지. 소장을 떠올리고 긴장했던 리체는 다소 안심했다.

“평범한 일반인이 퀴퀴한 학자들이나 흥미 있어 할 것들을 좋아하다니 이거 제 마음이 다 설레네요. 리체 양은 그럼 그중에서 뭐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이 질문에는 리체도 망설이지 않고 즉답했다.

“차원이요.”

“차원?”

의외라는 투에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외하던 마법사를 만나 흥분한 양 굴었다.

“5년 전에 외차원의 존재에 대해 발표하신 내용을 인상 깊게 봤어요. 다른 대륙도 아닌, 보통의 방법으로는 이동이 불가능한 외부의 땅이 있다니 그만큼 신기한 이야기가 어디 있나요?”

“이렇게 내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알았다면 저번에 그렇게 보내지 않는 건데.”

그라우지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기분이 좋은 듯해 리체는 혀로 입술을 쓸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만약 차원이란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여기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

단순히 차원의 존재를 눈치챈 것뿐인지, 아니면 차원 이동의 실마리라도 잡은 상황인지, 그걸 어떻게 경계를 사지 않고 알아볼 수 있을까. 골몰하며 머리를 쥐어짜는 리체는 곧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라우지는 차원에 대해 한참 복잡한 얘기를 꺼냈다. 리체는 평범한 일반인인 척하며, 그런 이들이 보일 법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내심으로는 연구 수준이 미개한 차원의 사람답지 않게 박식해서 놀라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감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그의 말을 경청하는데, 그가 지나가는 듯 물었다.

“그래서 리체 양은 여긴 언제 오게 된 거예요?”

“여기? 도블락 제국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니. 이곳 차원에 언제 왔냐는 말이에요.”

얼어붙은 그녀와 달리 그라우지는 여전히 얄미울 만큼 싱글벙글 웃는 낯이었다.

“수소문을 해 봐도 도블락의 술집에서 일한 내용만 있지 별다를 건 없더라고요.”

리체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라우지와는 어제 처음 만난 사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뒷조사를 했단 말인가.

왜?

어떻게 알아서?

“이렇게 아무런 흔적이 없을 수는 없거든.”

그 말에 리체는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뱉었다.

“제가 그 전까진 산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거든요. 이곳에 연고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죠.”

부끄럽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머릿속으로 소용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하.”

과연 그라우지는 하나도 믿지 않는 얼굴로 탄성만 경쾌하게 뱉었다. 결국 리체는 얼굴의 표정을 지우고 서늘한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리체 양?”

“…….”

그라우지는 손바닥의 넓적한 부분에 턱을 괴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리는 것처럼 싱글거리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렇게 재미없게 굴면 곤란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패는 하나도 까지 않고 이쪽의 것만 궁금해하는 건 너무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무미건조하게 대꾸하자 그라우지의 눈동자에 재밌다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80년 전인가. 정확하진 않아요. 숫자를 세며 살진 않아서.”

팔짱을 낀 그라우지가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물리적인 거리가 약간 멀어졌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리체는 꽉 조여 있던 끈의 매듭이 느슨해지듯 어깨선이 무너졌다. 못내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갓 이 탑의 탑주가 되었을 때 그자를 봤죠.”

‘그자?’

땀을 흘리며 리체는 그의 말에 집중했다. 갑자기 그라우지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외차원의 존재. 나는 그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요.”

내심 숨을 들이키는 그녀를 향해 그라우지가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리체 양 같은 차원 이동자 말이에요.”

리체는 아주 오랜만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냉철한 이성은 충실히 작동하여 이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녀처럼 사고를 겪었든지, 차원의 틈에 휘말렸든지, 어쨌든 다양한 이유로 이곳에 떨어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리체는 흥분했다. 그라우지의 말은, 본 차원의 구조자들이 쉬이 오지 못할 만큼 차원 간 거리가 가깝지 않지만 차원의 틈 자체는 헐겁다는 증거로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차원’의 존재를 알게 되었구나.

하지만 어째서 자신을 ‘차원 이동자’라고 확신하는 걸까?

나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원하는 게 있는 건가.

협조, 그래, 협조.

머리를 굴리던 리체의 안색이 차분히 돌아왔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생각의 흐름은 빠르고 짧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한 것처럼 보였다.

그라우지는 그러나, 뛰어난 관찰력으로 그녀의 어깨가 약간 앞으로 좁혀졌다가 다시 원상태가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한편 리체는 눈앞에 뜬 메시지 창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존재 위기 발생.

마탑주 그라우지 로스티나루스는 당신이 차원 이동자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필생의 꿈인 다른 차원으로의 탐사를 당신으로 인해 이룰 수 있을지 기대하는 중. 그를 설득시켜 협조를 받아 내십시오.

성공 시 보상: 차원 이동의 가능성(아주 희박한 확률로 본 차원으로의 귀환)

실패 시 페널티: 이 차원 잔류. 마탑의 실험체가 됨.]

먼젓번에 메디치나 치유관에서 받았던 퀘스트와 동일한 내용이었다. 그의 호감을 얻어 협조를 받아 내라.

리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여 그에게 초점을 맞추자 언제부터인지 이쪽을 관찰하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티를 내지 않고 리체는 빠르게 말했다.

“설명을 좀 더 해 주시죠.”

그라우지가 설명하길, 그가 발견한 차원 이동자는 총 두 명으로, 한 명은 극도로 호전적이라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했고, 한 명은 꽤 우호적인 편이라 먹여 주고 돌봐 주며 교류를 이어 갔지만 안타깝게도 몸이 약한 상태라 1년을 채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언어를 배우기도 했어요.”

그라우지는 턱을 쓰다듬었다. 회상하는 그의 눈이 날카로움을 덜어 냈다.

「날 도와줄 수 있습니까?」

어색한 발음이기는 하나 틀림없는 모국어. 리체의 눈이 커졌다.

같은 차원 이동자라고는 하나, 같은 소속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차원은 우주의 별만큼이나 많아 셀 수도 없는데 그런 우연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 차원과 그녀의 본 차원은 생각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어째서 그라우지가 자신을 차원 이동자라고 확신했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몰랐죠. 대륙의 모든 말을 꿰뚫고 있었는데 모르는 언어라니. 어디 오지에서 온 건가 싶었죠.”

“그러다가 알게 된 거군요.”

“그래요. 그는 차원의 틈으로 떨어졌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다고 했어요.”

‘차원의 틈!’

리체가 주먹을 꿈틀했다. 차원 이동은 굉장히 섬세하고 복잡했다. 멀쩡히 좌표를 설정한다고 할지라도 이동 중 차원의 틈에 떨어져 완전히 새로운 곳에 도착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리체의 연구소에서는 그런 일을 사고로 처리했다.

떨어진 차원의 위험성을 알 수 없으므로 차원 이동은 매우 위험한 행위로 생각되었고, 본 차원에서도 몇몇 관련 직종의 전문인들만이 차원 이동을 허락받았다. 그런데도 종종 사고가 발생했다.

「리체 양, 당신에 대해 말해 주세요.」

그라우지가 태연하게 그녀의 모국어로 말을 걸었다. 여전히 어색하지만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

리체는 한쪽 눈썹을 미세하게 치켜올렸다.

‘몰래 욕하는 건 불가능하겠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건지부터 얘기해 볼까요?”

“말씀하신 남자와 비슷해요. 차원의 틈 사이에 떨어졌죠.”

게임 기기로 위장했던 차원 이동 기기. 그건 정확한 좌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만약 구조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해도, 차원의 틈에 떨어진 그들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크다. 수많은 차원 중 이곳에 도착하게 될 확률은 로또를 수백 번 당첨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즉 가능성이 백만분의 일의 확률도 되지 않는다. 그걸 이곳에 떨어지고 반개월이 지난 이후에 깨달았다. 구조대를 만나는 건 생각보다 힘들지도 모른다는 걸.

가능하다면 이쪽의 기술을 이용해 차원 이동을 하는 게 좋다. 아니, 구조대의 도움이 불투명해진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일 터. 무의식중에 리체의 자세가 공손해졌다.

“제안드릴 게 있어요.”

입꼬리를 매만지며 그라우지가 그녀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눈이다. 리체는 차분히 말했다.

“알고 싶으신 외차원의 정보를 드리죠.”

“…….”

“그 대가로 저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 주세요.”

“으음, 글쎄요. 그렇게 해 주고 싶어도 가능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차원 이동을 논하기에는 이곳 차원의 수준이 낮다는 것은 알고 있는 바였기에 리체는 실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차원 이동의 가능성은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드릴 필요는 없겠죠. 본론만 말씀드릴게요. 저희 차원에서는 차원 이동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어요. 그러니 탑주께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제공해드릴게요.”

“그리고 나는 차원 이동 장치를 만들어 달라?”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우지는 이번에는 손 전체를 활용하여 입매와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습관인 듯했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거긴 한데.”

그가 그녀를 힐끗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보죠?”

“짐승만 귀소 본능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하하, 뭐, 좋아요. 흥미로워요. 재미있고.”

생각보다 협조적인 반응에 리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려는 찰나, 그라우지가 빙그레 웃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리체는 눈썹을 찌푸렸다.

“제가 제공해드릴 정보로는 충분하지 않은가요?”

“그거야 충분히 매력적이죠. 하지만 일단은, 귀찮아 보이기도 하고.”

일 얘기는 끝났다는 듯 호의적이던 분위기가 돌변했다.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언뜻 음흉해 보여 리체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동기 부여가 있으면 더 열심히 할지도 모르잖아요?”

능구렁이 새끼.

리체는 침묵하다 물었다.

“원하시는 게 뭔데요?”

기다렸다는 듯이 그라우지가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였다.

세 개나?

리체는 일단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고갯짓을 했다.

“첫째, 연구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그 정도야.

“좋아요. 원하시는 모든 정보를 제공할게요.”

“둘째, 필요할 경우 직접 참여한다.”

“그것도 어렵지 않네요. 그렇게 할게요.”

“마지막 세 번째, 이게 가장 중요해요.”

그라우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리체는 덩달아 긴장했다. 온유한 모양의 입술이 열리고, 카스테라처럼 푹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슴, 빨게 해 줄래요?”

리체는 귀를 의심했다. 그라우지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가슴, 뭐? 잘못 들었나. 그렇지. 저런 표정으로 그따위 저급한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착각이었다.

“기왕이면 엉덩이도.”

짐짓 진지한 체하는 눈에 음험한 빛이 반짝였다. 리체는 질린 마음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변태 새끼.」

‘새끼?’ 하고, 그라우지가 눈을 끔벅이며 따라 말했다.

“내 기억으로 그건 욕설이었는데.”

그러더니 뭐 이런 여자가 있냐는 듯 리체를 황당하게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질스러운 언행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소리는 퍽 청량했다.

“너무 이상하게 보지 말아요. 세상에서 아무리 해도 가려지지 않는 건 성욕, 발기한 성기, 그리고 성적 취향이라잖아요.”

성적인 문란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건달 같은 치들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런 이들 중에서도 그라우지의 말은 지나치게 뻔뻔했다. 리체는 하, 실소를 흘렸다.

“그런 말 어디서도 들어 본 적 없는데요.”

“그럴 만해요. 이건 내 개인적인 철학이니까.”

음심이 철학으로 포장되는 게 우스웠다. 그라우지의 태평스러운 낯짝에 리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 이런 작자가 다 있지? 리체는 그가 겉보기와 달리 연세라고 부를 만한 세월을 살았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는 마음에 약간의 의혹이 있었는데 싹 가셨다. 적이 살지 않고서야 이렇게 능글맞을 수 있겠는가. 소장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려 했는데, 역시 사람을 판단할 땐 신중해야 했다. 나이는 나이대로 먹은 늙은이가 처녀의 가슴을 욕심내는 데다가 뻔뻔스럽기까지 하니, 오히려 본 차원의 소장이 만나면 형님으로 모실 듯했다.

그런 주제에 관대한 제안을 했다는 양 너그럽게 웃기까지 하니, 리체는 그 얼굴을 한 대 후려치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하지만 그런 조건들은…….”

“이상해요? 그럼 뭐 돈이라도 요구하면 이상하지 않은 건가?”

그라우지는 가볍게 웃었다. 그의 태도는 시종 진지하지가 않아서, 이 일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리체만 분통이 터졌다.

“살면서 못 본 것도, 안 해 본 것도 없으니 욕심이랄 게 없어서. 갖고 싶은 건 손가락만 해도 품 안으로 들어오는데 무슨 욕심이 생기겠어요?”

“…….”

“그러니 오로지 순간의 흥미와 재미만 좇을 수밖에.”

리체는 다소 놀라 그라우지를 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가벼웠다. 그녀의 눈이 묘해졌다. 보기 좋게 멋스러운 포장지를 갖추었지만 알맹이는 텅 빈 무언가. 순간적으로 그런 이미지가 뇌리를 스쳤다.

황당했지만 사실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요구 사항이 형편없다고 거절할 텐가? 이 차원에서 마법에 관한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는 마법의 종주가 눈앞의 변태였다. 몹시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세상사란 게 원래 마음대로 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게 훨씬 많은 법이다. 그녀에게 대체재가 없는 이상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저와 라스카의 관계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라우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모았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

리체가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직시했다. 그라우지는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지만 여전히 재밌어하는 얼굴이다. 이 남자에겐 모든 게 장난인 걸까. 늙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리체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베타라 그런 거면, 오해예요. 오메가거든요.”

알파인 주제에 베타를 선호한다는 기묘한 성벽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라우지는 한쪽 눈을 치켜떴다. 그뿐이었다.

“영락없이 베타라고 생각했는데.”

“…….”

“뭐, 상관없어요. 페로몬이 싫을 뿐, 오메가라고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

그라우지는 리체가 무슨 말을 하든 제안을 철회할 기색이 아니었다. 리체도 헛수고하지 않기로 했다. 무게 추가 기울자 시간 끌지 않고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생각에 놀란 듯했던 그라우지가 잘 생각했다며 손뼉을 쳤다. 리체는 은근히 가슴을 힐끔거리며 기대하는 그에게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럼 마법사 서약으로 공증해 주세요.”

“마법사 서약?”

당장이라도 포장지를 깔 것처럼 손을 움찔거리던 그라우지가 바로 동작을 멈추었다. 고개를 슬쩍 들어 리체의 얼굴을 보는 그의 낯이 떨떠름했다.

“그건 어디서 들었어요?”

“일반인의 신분으로 감히 마탑의 주인을 만나러 왔는데 아무 준비도 안 했을 리가요.”

리체는 그의 말을 꼬집으며 빈정거렸다.

마법사 서약.

마법사들이 마력을 담보로 하는 서약으로, 일종의 어길 수 없는 계약이었다. 반드시 지켜져야 하므로 중요한 거래에 종종 사용되지만 마법사 서약의 무게는 페널티에 있었다. 마법사가 서약을 어긴다면, 내용의 경중과 어긴 정도에 따라 다르긴 하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심한 경우 목숨을 잃기도 하니 결코 쉽게 응할 일은 아니었다. 리체는 그 서약을 그라우지에게 요구하고 있는 거였다. 우연히 손님으로 왔던 마법사가 술에 취해 떠벌리지 않았더라면 리체의 신분으로는 알 길이 없는 귀중한 정보였다.

과연 내키지 않는지 그라우지가 턱 아래를 긁적거렸다.

“굳이.”

“마법사 서약이 없으면 안 돼요.”

리체의 단호한 대답에 그라우지의 입술 끝이 약간 굳어졌다.

“마냥 예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이리 철저하다니 못된 아가씨로군요.”

안타까운 어조로 하는 볼멘소리에 리체는 코웃음을 쳤다. 저 반응을 보니 확실하다. 이 남자는 그녀를 순순히 도와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장난질이나 치며 조롱을 했겠지.

하지만 리체에게는 다행히도 차원에 대한 지식은 그에게도 중요했던 건지, 아니면 정말 그녀의 몸을 희롱하는 데 관심이 지대했던 건지 그라우지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제가 뭐, 열심히 안 할 것도 아니고. 하하.”

그라우지가 뒤늦게 교양 있게, 신사다운 표정을 지었지만 리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 가식에 속기에는 그가 어떤 인간인지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이 알아 버렸다.

마법사 서약은 그 악명에 비해 복잡하지 않고 간단했다. 그라우지가 손을 한 번 허공에 흔들고 알 수 없는 언어로 뭐라 중얼거린 게 끝이었다. 마법사가 아닌 그녀로서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멀뚱히 쳐다보자 그라우지는 이마에 주름을 잡은 채 웃었다.

“의심까지 하는 겁니까?”

“된 건가요?”

“내 마력에 서약이 새겨졌어요. 어느 마법사에게 물어도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확인해 봐야겠군요.”

리체의 단호한 대꾸에 그라우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철저하게 하는 건데, 그는 리체가 너무 까다롭다며 불평했다.

하지만 서약에 관해서는 그 역시 나름대로 진지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마법사 여럿을 불러서 확인하게 했는데 리체가 그들을 날카롭게 살폈을 때 상대가 탑주라고 거짓말을 해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체는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꼼꼼히 살피며 눈을 빛내는 리체를 향해 그라우지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리체는 그의 눈빛이 거슬렸지만 모른 체했다.

“이제 믿나요?”

마법사들을 돌려보내고 그가 물었다. 리체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연락 주세요.”

“그냥 가려고요?”

리체는 의아하여 물었다.

“바로 오늘부터 착수하려고요?”

“그건 아니지만.”

“…….”

“벌써 가기엔 아쉬운데요.”

리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몸을 일으킨 그라우지의 다리 사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의혹과 충격이 스몄다. 그라우지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마법사 로브를 벗어 평범한 셔츠와 면바지 차림이었는데, 약간 짙은 베이지색 면바지의 가랑이 사이가 달걀을 다섯 개는 넣은 것처럼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엇, 발기했네요.”

그라우지가 머쓱해하며 제 풍성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체는 대놓고 얼굴을 찡그렸다. 가식을 떨어 봤자 알아봐 줄 사람도, 효과도 없기 때문에 때려치운 것이다.

눈빛에 경멸이 어렸다.

“흉하네요.”

“그렇게 질색할 것까지야.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주 좋아한답니다.”

머쓱해하는 것도 잠시, 그라우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발딱 세운 자지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상반신과 하반신을 따로 떼어 놓는다면 모를까.

“사실 리체 양 가슴이 지나치게 내 취향이라.”

어느 시골 외곽 지역 도서관 사서처럼 온화한 얼굴로 그가 빙그레 웃었다.

“리체 양만 괜찮다면, 지금 빨아 봐도 될까요?”

리체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원래 있던 차원에서도 용모가 나쁜 편이 아니었고, 인기도 꽤 있었지만 수재들이 모여 있는 연구원에서 싸늘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그녀에게 대놓고 성희롱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 와서는 술집에서 일하니만큼 희롱이 빈번했으나 이제 보니 그런 건 이자의 적나라한 성희롱에 비하면 아기 주먹질에 불과했다.

‘이런 변태 같은 작자와 앞으로의 일을 도모해야 한다니…….’

눈앞이 막막하여 그녀답지 않게 우울함이 밀려들기까지 했다. 성희롱 늙다리, 소장이 가장 싫어했던 말을 중얼거리자 그라우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에요?”

부러 본 차원의 언어로 욕했던 리체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지금은 별로 빨리고 싶지 않은데요.”

적나라한 거절 멘트에 그라우지는 잠깐 말을 잃었다. 그러더니 우습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싫은데요?”

“그쪽의 얼굴이…….”

리체는 똑똑한 사람들 특유의 지적인 아름다움이 흐르는 영민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장도 중년의 미남자였다. 눈앞의 작자가 소장과 닮은 건 아니었지만, 왠지 리체는 그의 얼굴 위로 소장이 어른거렸다. 속이 울렁거린다.

“취향이 아니라서.”

“…….”

“느끼한 스타일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예상했던 답이 아니었는지 그라우지는 또 한 차례 침묵했다.

“그거 참, 아쉬운데요.”

이윽고 흘러나온 대답은 어쩐지 부아가 치민 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얼굴에 문제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라우지가 어깨를 늘어뜨렸지만 리체는 하나도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얄밉기만 할 뿐. 다만 자존심이 상해 다음으로 미뤄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라우지가 흘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곤 힘없이 중얼거렸다.

“계약은 리체 양이 제 요구를 들어주는 순간부터 적용돼요.”

“…….”

이 작자가.

* * *

“리체 양.”

상의만 벗고 의자에 앉아 있는 리체를 향해 그라우지가 난감하게 웃었다. 리체는 불퉁히 대꾸했다.

“왜 그러시죠? 문제 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리체 양 지금 꼭 진찰받는 환자 같네요.”

그녀는 가슴만 내민 채 단정히 앉은 제 자세를 힐끗하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상관이 있나요?”

“없어요.”

싱긋 미소 지은 그라우지는 리체의 앞에 무릎 꿇었다. 장신인 그가 아담한 체구의, 그것도 앉아 있는 그녀에게 맞출 수 있는 자세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무릎 꿇는 자세를 택한 것이다.

저명한 수장의 무릎만큼 천금 같은 게 어디 있는데 저걸 저리 쉽게. 리체는 혀를 쯧쯧 찼다.

수치도 모르는 인간이다.

리체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라우지가 무슨 짓을 하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무토막을 아무리 핥아 봐라. 반응이 있나.’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위압하여 찍어 누르는 것이었다. 자존심과 자존감이 높은 만큼 존중받지 못할 때의 반발감이 컸으므로, 그런 면에서 그라우지는 고작 세 번째 만남에서 리체의 미움을 산 셈이었다. 물론 그라우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리체는 그라우지를 무뚝뚝하게 바라보았다. 양 무릎을 바닥에 꿇은 그의 눈높이는 리체의 가슴보다 약간 아래 위치해 있었다. 그녀의 위치에서는 그의 반짝거리는 은발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을 응시하는 진지한 시선이 꼭 생사 대적을 눈앞에 둔 듯했다. 유리알 너머 남색 눈동자는 잘 닦인 구두처럼 광택이 돌았다.

좀 전 차원에 대해 대화했을 때보다도 더 진중한 모습이라 리체는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동시에 그라우지가 손을 뻗었다. 이런 상황에 걸맞지 않게 목소리가 꿀처럼 달콤했다.

“예쁜 가슴이네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손이 젖무덤에 닿자 리체는 움찔했다.

‘읏, 손이…….’

서늘했다.

라텍스 장갑을 낀 것처럼 하얗고 묘하게 건조한 손이 주는 느낌이 가히 이질적이었다.

리체가 몸을 굳히자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희고 길쭉한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여 가슴 아래 부분을 감싸듯 잡았다. 풍만한 살덩이가 엄지와 검지 사이 움푹 들어간 곳에 알맞게 안착했다.

“아…….”

그라우지가 탄성을 터뜨렸다. 좁아지는 눈매의 끝이 불그스름했다. 혀가 살짝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 맛보기라도 할 것처럼. 리체는 저가 맛있는 음식이 된 듯하여 기분이 이상했다.

그라우지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얀 가슴살을 조금씩 파고들었다. 조금씩, 조금씩 가슴을 압박하다 마침내 틈 하나 없이 움켜쥐었다. 약간의 통증이 전해지자 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반응을 예민하게 알아챈 그라우지가 가슴에서 손을 뗐다.

‘끝났나?’

그럴 리가 없었다.

가슴을 빤히 바라보던 그라우지가 손을 정면으로 들고, 그대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과실처럼 톡 튀어나온 유두에 꽂혀 있었다. 아직은 말랑한 작은 살점에 서늘한 손바닥이 닿았다. 리체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듯 나무토막처럼 굴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당황하여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라우지의 살갗은 벨벳처럼 부드럽고 또 서늘해서, 피부에 몹시도 자극적이었다. 신경을 갉작거리는 감각이다. 거기에 더해.

리체는 숨을 약하게 들이마셨다. 약간 쓴 듯하면서도 달콤한 알파 페로몬이 숨결에 섞여 들어갔다.

코를 찡긋한 리체의 눈에 집중하고 있는 그라우지가 보였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첫 만남, 그때는 심해의 냄새를 떠올리게 했던 페로몬이, 지금은 또 다른 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페로몬은 바다 생물로 치자면 암컷을 유혹하는 수컷의 구애 같았다.

아래가 젖는 게 느껴졌다. 이런 자에게 반응하다니, 수치스러웠지만 이건 그녀의 정신력이 높은 것과 하등 상관없었다.

‘이 정도면 거의 생리 현상 수준이로군.’

리체는 한탄했다. 오메가와 알파는 자석의 S와 N극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끌어당긴다. 그녀는 알파 페로몬에 반응하는 몸의 반응이 정말로 반갑지 않았다. 오메가 페로몬이 완전히 개화하고 난 뒤, 몸의 변화가 이렇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리체는 혹여 그라우지가 눈치챌까 봐 다리를 슬며시 모았다.

문득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리체는 얼굴을 굳혔지만 그라우지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잠시 후 미소가 살짝 걷혔다. 리체는 입술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가슴에서 묘한 감각이 올라왔다. 미세하게 변화하는 손바닥의 압력에 신경이 쏠렸다. 가슴살을 누르는 손바닥이 바깥쪽으로 가슴을 둥글렸다. 답답할 정도로 느긋하게. 리체는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아랫배에 근육이 잡혔다.

리체는 엉덩이가 자꾸 움찔거렸다. 의자 엉덩이판을 손으로 꽉 붙잡았다.

‘아, 차라리.’

리체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는 것보다 이 작은 움직임이 더 자극적이었다. 부싯돌로 피운 화톳불에 작은 장작을 계속해서 집어넣어 불길이 커지는 것처럼, 감각이 점점 강렬해졌다. 뒤로 물러난 손바닥이 다시 다가왔다. 도장을 찍는 것처럼, 손바닥에 눌린 젖꼭지가 하얀 살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젖꼭지, 귀여워요. 딱딱해지는 거 느껴져요?”

그라우지가 속삭였다. 리체는 말없이 입술 안쪽을 꼭 깨물었다. 그라우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손바닥에 가려지는 가슴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역시…….”

손바닥이 치워지고, 대신 차갑고 말캉거리는 것이 닿았다. 리체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흣!”

결국 소리가 새 버렸다. 대경한 리체는 다시 입술을 사리물었지만 그라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젖꼭지를 혀로 희롱하는 데만 집중했다.

분홍색 혀끝이 젖꼭지 끄트머리를 톡, 하고 건드렸다. 이윽고 젖꼭지 주변에 원을 그리듯 혀끝을 돌렸다. 리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의 혀는 마치 실뱀처럼 능수능란하게 움직여 젖꼭지를 알처럼 품어 조이고 풀고를 반복했다. 혀에 감긴 젖꼭지가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으음.”

신음이 목 안쪽에서 뱅뱅 맴돌았다. 느끼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소장과 닮은 능글맞고 장난기 넘치고 예측 불가인 괴짜 변태는 딱 질색이다. 게다가 나이로만 따지면 완전 늙다리가 아닌가!

그에게 반응하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단한 이성을 뚫고 스멀스멀 움직이는 혀의 감촉이 자꾸만 다리 사이를 자극해 왔다.

그의 혀는 기가 막히게 완급 조절에 능숙했다. 강하게 빨다가 부드럽게 핥으면 아랫배가 꼭 조여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안아 버릴 듯하여 리체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무념무상에 빠지려고 했는데, 리체는 좋은 선택이 아니란 걸 즉시 깨달았다. 눈을 감자 대신 귀가 예민해졌던 것이다.

할짝. 스으. 츄릅……. 온갖 야릇한 소리가 고막을 콕콕 쑤셔 댔다. 결국 리체는 다시 눈을 떴다. 가슴에 달라붙은 그라우지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벌어진 입술 사이, 이에 끼어 있는 젖꼭지가 보였다.

빨개지는 얼굴을 감상하듯 주시하며 젖꼭지를 잘근 씹었다. 리체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

곧장 혀가 아릿한 젖꼭지를 핥아 댔다. 위로하는 것처럼 정성스러웠다. 퉁퉁 불어 버릴 것처럼 젖꼭지를 빨던 그라우지가 혀를 하얀 살 위로 옮겼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가슴살을 쓸었다. 아랫입술이 유두에 걸렸다. 움찔. 다리 사이가 더욱 빠르게 젖었다.

건조하면서도 서늘한 입술이 타액으로 축축해진 젖꼭지의 겉면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간질간질하고 야릇한 감각에 의자 판을 붙든 리체의 손목에 핏줄이 올라섰다.

‘말도 안 돼.’

리체는 경악했다.

‘단지 가슴을 빨리는 것뿐인데.’

아래가 미친 듯이 조여 댔다. 이런 감각을 알고 있다. 절정의 전조였다. 처음의 결심이 무색한 반응이었다.

가슴 조금 빨렸다고 가다니, 그건 안 돼!

그러나 아무리 허벅다리를 붙이고 발부리를 세운다고 해도 한 손으로 파도를 막을 수는 없었다. 허벅지의 살이 파르르 경련했다. 이미 팬티는 푹 젖어 있었다.

리체는 어느새 헐떡거리고 있었다. 신음은 내지 않았지만 숨소리는 거칠었다. 뺨에는 홍조가 분홍빛으로 올라왔다.

그라우지는 이제 혀를 떼고 푹 젖은 젖꼭지를 손등으로 간질였다. 툭 튀어나온 손가락의 관절로 젖꼭지를 살짝 쳤다가 지그시 눌렀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가슴은 그것만으로도 찌르르, 법석을 떨었다. 아래가 미친 듯이 간질거렸다. 구멍이 빠끔대며 아우성쳤다. 더한 것을 원하는 제가 낯설어 리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그라우지의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뭐 하는 거냐고 외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단단한 검지와 중지가 음부를 꾹 누르자 목소리의 힘이 풀려 버렸다. 나직한 탄식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속도를 올린 손가락이 만져지지 않고도 볼록 튀어나온 음핵을 좌우로 비벼 댔다. 이미 절정의 문턱까지 가 있던 리체는 순식간에 절정에 올랐다.

“아아앗!”

비명 같은 교성을 지른 리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의자 등받이에 널브러진 자세는 처음의 꼿꼿한 자세와 딴판이었다.

“좋았어요?”

답할 정신이 없었다. 손발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는 그녀의 사지를 흘끗한 그라우지가 그녀를 보았다.

“흐, 읏.”

신음을 삼키는 얼굴이 발그레했다. 아주 어여뻤다. 지그시 감긴 눈꺼풀이 움찔했다. 나른한 기운을 물씬 풍기며 천천히 눈이 뜨였다. 청명한 푸른색이 드러났다. 그라우지는 움찔했다. 다른 때와 달리 짙은 색기를 품고 있는 눈이 그를 스쳤다.

리체는 지친 것처럼 두어 번 눈을 끔벅이다가 완전히 감았다. 그러나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앞을 보자 언제 일어났는지 그라우지가 바지춤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그라우지의 얼굴은 웃음기가 없었다. 잔뜩 흐트러진 리체를 담은 남색 눈에 조급한 기색이 스쳤다.

“리체 양.”

그윽한 부름에 리체는 “후우.” 나른히 한숨을 쉰 후 중얼거렸다.

“안 돼요.”

“뭐가요?”

“넣는 거.”

순간 그라우지의 열 손가락이 피아노 치듯 짧게 움직였다. 손은 금세 얌전해졌지만 눈빛은 못마땅했다. 리체는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모습보다는 차라리 지금이 더 마음에 들었다.

“리체 양?”

잘생긴 사내가 조르는 것을 단칼에 거절하기는 쉽지 않지만 리체는 가까워지는 그를 발끝으로 밀어냈다.

“안 돼요.”

“왜?”

그라우지는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우리 좋았잖아?’ 하는 시선이었다. 이제껏 여자를 이런 식으로 꼬셨나 보지. 과연, 자신만만할 스킬이긴 했다.

리체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둔 셔츠를 가져와 어깨에 걸쳤다. 고작 절정 한 번 겪었을 뿐인데 힘이 쭉 빠진 팔을 팔에 끼워 넣으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다리 사이의 젖은 팬티가 찝찝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이 작자가 100년 동안 마법이 아니라 여인의 성감대를 연구했나? 손과 혀의 움직임만으로도 능히 여자 수백은 절정으로 보낼 수 있을 듯했다.

약간 피로한 낯을 제외하고는 평범하게 시큰둥한 낯으로 리체는 그라우지의 터질 듯한 아랫도리는 남의 일이라는 듯 시선도 주지 않았다.

“애초에 빠는 것까지만 계약이었잖아요?”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지 그라우지의 유들유들한 얼굴이 쩡, 굳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손이 내려간 것도 계약 위반이에요.”

치마로 덮인 팬티 부분을 가리키고 일어났다. 마지막까지 차림새가 단정한지만 살펴보는 모습은 무정하기 짝이 없었다. 나가기 전 리체가 뒤를 돌아보았다. 멍한 얼굴로 그라우지가 눈을 깜박였다. 얼굴 옆으로 은발 몇 가닥이 맥없이 흘러내렸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연구가 막히거나 진척이 있으면 즉시 연락 주세요.”

‘즉시’를 날카롭게 강조하는 그녀는 말 그대로 사업 파트너 같아, 방금까지 야릇한 분위기를 흘리던 사람을 연상할 수 없었다. 애초에 반쯤은 장난삼아, 단순한 흥미로 리체를 건드렸던 그라우지는 오랜만에 극도로 성난 아랫도리를 보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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