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7/25)

7장

레이몬드는 오늘도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하고 의원을 돌려보냈다. 하얀색 장갑을 낀 의원이 제 소중한 음경을 들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으로 한참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문제없다는 불만족스러운 답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젊은 의원이든 늙은 의원이든 진단은 한결같다. 아무 문제없다. 혈기가 왕성하여 지나칠 만큼 건강하다. 그 말의 의미인즉슨, 여든 살까지 아랫도리를 돌리고 다녀도 좆물이 마를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그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제 하체가 여전히 튼실하다면 어째서 평소에 섹시하다고 생각했던 하녀들이나 관능적인 클럽의 미녀들을 관음하는데도 잠잠하단 말인가. 자신이 수도승이 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그는 수도원에 처박혀 있어도 하얀 미사포만 보면 자지를 세울 사람이었다.

리체에게는 여전히 발딱발딱 잘도 선다지만 그래도 레이몬드는 평소와 다른 하반신 건강이 걱정스러웠다. 저주도, 병도 아니라면 역시 각인 현상 때문일까. 그럼 영원히 한 여자에게 묶여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 가정이 자못 공포스러워 레이몬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물론 리체는 끝내주게 기분 좋은 여자였지만 그걸 떠나서 한 여자에게만 속박된다는 건, 죽을 때까지 이 꽃 저 꽃을 찾아다니는 자유로운 나비로 살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던 레이몬드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었다. 그것도 한쪽만 속박되는 관계라니.

홧김에 리체에게 결혼을 운운하긴 했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것 같으니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이런 상황에까지 온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불신과 회의감이 커져 갔다. 게다가 요즘 들어 더욱더 리체에 대한 생각이 자주 나고 멍하게 산책하다가도 퀸으로 가는 마차를 잡아타는 자신의 행동이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망가진 하반신이라도 멀쩡해지면 이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수확이 없었다. 심지어 발기 부전 환자들을 위한 약까지 먹어 봐도 소용이 없다. 리체와 뒹굴 때는 반나절이 지나도 그게 식지 않아 문제만 악화시켰다.

한숨을 쉬며 일어난 레이몬드는 시계를 보고 모자로 손을 뻗다 멈칫했다. 습관적으로 퀸으로 갈 시간을 체크한 것이다.

‘이래서는 안 돼.’

멋대로 움직이는 다리를 단속하고 침대에 걸터앉은 레이몬드가 팔짱을 끼었다. 뚱한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불편해졌다. 결국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와.”

으레 집사의 방문이겠거니 싶었던 레이몬드는 문이 열리자마자 퍼지는 향긋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는 화사한 미소를 지은 이델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레이.”

“외부인을 함부로 출입시키다니, 집사가 정신이 나갔나 본데.”

“집사를 탓하지 마. 너랑 내 사이를 알고 있으니 그런 거지, 뭐.”

“……그래서 무슨 일이야?”

이델리는 침대에 앉아 불편하게 몸을 굳히고 있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곁에 와 앉았다. 그러자 극우성 오메가의 향긋한 페로몬이 간질이듯 레이몬드에게로 넘어왔다. 각인했다고 할지라도 페로몬을 아예 감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는 반사적으로 콧잔등을 실룩였다.

“어제 저녁 파티에는 왜 안 왔어? 내가 친히 초대장까지 줬는데.”

“바빴어.”

퀸에서 리체와 뒹굴고 있었다. 레이몬드의 뚱한 대꾸에 이델리는 약간 기분이 상해 보였지만 다른 때와 달리 신경질적으로 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자존심 강한 그녀가 웬일인가 싶어 곁눈질로 흘끗했다. 이델리는 우울해 보였다. 아름다운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지니 다른 때보다도 처연한 아름다움이 감돌았다. 장미라면 모를까, 안개꽃처럼 흐리멍덩한 꽃은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그녀였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어제는 꼭 왔었어야지. 내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뭔데?”

“…….”

“여기서 해.”

역시 오늘은 퀸에 가지 않는 게 좋겠다. 너무 이렇게 끌려다니는 건 좋지 않아. 내 소중함을 알게 해 줘야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델리가 그의 소매를 살며시 붙잡았다. 퍽 연약한 손짓이었다. 고개를 내려 그녀의 하얗고 고상한 손가락을 본 레이몬드는 떨떠름한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평소와 다른 그녀가 의아한 한편 가슴이 조금 울렁거렸다. 이델리는 성격이 센 편이었으므로 레이몬드는 예전부터 그녀가 약하게 나올 때마다 물러지는 경향이 있었다.

“네가 오지 않아서 외로웠어, 레이.”

“다른 남자들 많았을 거 아냐.”

“어젠 혼자였어.”

“뭐?”

이델리가 눈을 똑바로 맞춰 왔다.

“어젠 네게만 초대장을 보낸 거라고.”

레이몬드는 대충 보고 던져 버린 초대장의 내용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다른 건 모르지만 파티의 시간은 이르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후 술 한잔하기 좋은 시간이었고, 그런 늦은 시간에 남자를 따로 초청하여 부른다는 건 다른 이유가 없을 정도로 의미가 명확했다. 레이몬드가 당황하자 이델리의 표정이 한층 처연해졌다.

“뭐 하는 거…….”

당황한 레이몬드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이변이 일어났다. 입술에 닿는 말캉한 감촉에 그의 눈이 홉뜨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장난질인가 싶어 그녀를 밀쳐내려는데, 그 행동을 눈치챘다는 듯 그녀가 몸을 더 붙여 왔다. 입술이 강하게 비벼졌다. 어쩐지 필사적이고 절박한 느낌이 들어, 늘 도도한 그녀만 알아왔던 레이몬드는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단련된 손이 부드러운 가슴을 가득 움켜쥐었다. 이델리가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했다.

“아…….”

이루 말할 수 없이 요염한 음성이었다. 알파로서, 사내로서의 본능이 크게 움터 레이몬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날 레이몬드는 스스로의 결심대로 퀸에 가지 않았다.

* * *

“요즘 레이몬드 님이 안 오시네. 한동안은 자주 오지 않았어?”

“카이로 님도 마찬가지야. 사이 안 좋은 두 분이 같은 날 오실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

“에이, 그래도 형제인데 설마 칼부림이라도 날까.”

“날걸?”

“에…….”

“난다니까. 어디 한 번 금화빵?”

“팁도 많이 받는 게!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직원들의 휴식 시간. 밥 먹고 할 일 없는 직원들이 커피를 홀짝이며 수다를 떨었다. 리체는 그들 사이에 앉아 조용히 커피만 홀짝였다.

“그거 알아?”

지명하는 손님이 많아 소문에 빠른 남자 오메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쳐다보는 시선이 물어봐 달라는 눈빛이었다.

“뭘?”

“레이몬드 스트리고 경이 클럽에 안 오는 이유.”

“내가 어떻게 아냐? 리체, 넌 아는 거 있어?”

리체는 고개를 들었다. 질문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네?”

“스트리고 경은 여기 올 때마다 너만 찾았잖아.”

“글쎄요, 전 잘 모르겠어요.”

리체의 무심한 대꾸에 종업원은 아쉬운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러자 처음에 말을 꺼냈던 남자 오메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렇겠지. 웬만한 사람들은 모를걸.”

“넌 안다는 거냐?”

“당연하지. 난 웬만하지 않으니까. 정보통 르넬린을 모르시나요.”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레이몬드 스트리고 경이 몇 년 간 공들이고 있는 오메가가 누구야.”

“누구긴. 이델리 그레이스 아냐.”

“그래. 그 오랜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이거야.”

“……!”

“뭐? 진짜?”

“스트리고 경과 그레이스가?”

경악한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리자 제가 물어 온 소식이 일으킨 반응에 뿌듯한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기로는 스트리고 경이 공작저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는대. 지금도 밑이 빠지도록 하고 있겠지.”

“……설마.”

“설마가 아니라니까.”

남자 오메가는 세상 재밌는 소식이라는 듯 키득거렸다. 리체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이 떠드는 내용을 귀에 담았다. 새파란 시선이 스윽 움직였다. 시선이 닿은 곳에 굳은 얼굴의 미하일이 있었다.

“드디어 이델리 그레이스가 레이몬드 스트리고 경을 진정한 자신의 추종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거지!”

“하, 참나. 어이가 없군. 그렇게 공을 들이더니 결국 그렇게 된 건가.”

“아하, 그러고 보니 제논이 스트리고 경을 노리고 있었지?”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스트리고 경 소식에 목을 쭉 빼면서.”

투닥거리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르넬린이 저만 바라보는 청중들에게 속닥거렸다.

“일주일 넘게 저택에 박혀 있다니까, 얼마나 해 대고 있겠어. 뭐, 두 사람 다 섹스 스킬이 어지간하겠어? 그런 둘의 교합이라니 아주 대단하겠지. 그거 구경할 수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걸겠어.”

“웃겨. 네 전 재산이라고 해봐야 쥐꼬리뿐이잖아.”

미하일이 거칠게 일어났다.

말을 꺼낸 남자 오메가가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왜 시비야?”

“시답잖은 얘기 하지 말고 꺼져. 쉬는 시간 끝났으니까.”

싸늘히 말하고 미하일이 나가자, 휴게실은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르넬린이 황당하단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쟤 왜 저러냐?”

“몰라. 저 까탈스러운 성질머리를 누가 짐작하겠냐.”

어깨를 으쓱이는 사람들과 달리 리체의 곁에 붙어 있던 엘자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역시” 하고 중얼거렸다. 리체가 쳐다보자 시선이 마주친 엘자가 실룩 입꼬리를 올렸다.

“이델리 그레이스 얘기가 나오니까 싫은 거야. 그렇지? 요즘 제니스 보르신 공과도 사이가 서먹해 보이던데, 이델리 그레이스 연애 사업 얘기를 들으니 배알이 꼴리는 거지.”

‘눈치가 이렇게 빤한데, 엘자는 이런 데선 둔하구나.’

아무도 모르는 미하일의 마음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리체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미하일과 달리 그녀는 레이몬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조금 의외이긴 했다.

‘날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는데 이렇게 쉽게 갈아타다니.’

자의식 과잉이 아니다. 그녀를 향했던 표정, 몸짓, 말투, 눈빛 등. 그가 보였던 행동 패턴을 생각해 보면 이건 그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이걸로 레이몬드의 마음이 바람 같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사교계의 트러블 메이커란 명성이 아깝지 않은 변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락 하나 없다는 건 특이하지만, 르넬린의 말을 들어 보면 연락할 정신도 없을 만큼 그레이스와의 정사에 몰두하고 있는 듯했다. 르넬린이 전해온 소식은 꽤 흥미로웠다. 두 사람의 정사를 훔쳐볼 수 있다면, 그녀야말로 전 재산을 내놓을 수 있었다. 르넬린의 보잘것없는 재산과 오십 보 백 보 상태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델리는 어떻게 행동하려나.’

레이몬드를 손에 쥐었으니 자신을 내버려 둘까.

‘아닐 가능성이 크겠지.’

그보다는 바로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인내심이 부족해 보였으니까.’

“그나저나 스트리고 백작님은 어떻게 되신 일이람?”

엘자의 중얼거림에 생각에 잠겼던 리체는 무심코 대꾸했다.

“출정하셨어.”

“어, 그래? 근데 어떻게 알고 있어? 아아, 최근에 손님으로 모신 적이 있지. 그때 들었구나!”

엘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체는 실수했다 싶어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그렇다고 말해 주었다. 레이몬드 스트리고에 대한 소식은 지금 알게 되었지만, 카이로에 대한 건 진즉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말하고 갔기 때문이다.

카이로는 분쟁 지역으로 다시 출정했다. 이블린의 도시 정벌에 성공했지만, 이블린 본토에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는 파발이 뒤늦게 도착한 탓이었다. 기껏 정복한 도시를 빼앗기기 전에 급하게 출정해야 했기에 만남은 길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고 곧바로 전장으로 향한 카이로의 늠름했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리체는 새끼손가락의 뿌리를 만지작거렸다. 단순하지만 세련된 디자인의 반지가 만져졌다.

‘이건 내 마음을 나타내는 증표다.’

카이로는 그녀의 손가락에 직접 반지를 끼워 주며 말했다.

‘내가 승전하고 돌아오는 날, 반지를 끼고 날 반겨 줘. 그럼 보답하겠다.’

‘보답이요?’

‘원하는 게 있나?’

‘제가 무리한 거라도 원하면 어쩌시려고요.’

리체의 장난스러운 반문이 우스운 듯 피식 웃은 카이로는 반지가 끼워진 가느다란 손가락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그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나직하게 속삭였다.

‘무엇이든. 결혼이라도 상관없어.’

그녀는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카이로 스트리고는 좋은 남자지.’

리체는 처음으로 그를 연구 대상, 또는 실험체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생각해 보았다.

신의를 아는 고결한 기사. 피륙이 난무하는 전쟁터를 뒹굴면서도 책 읽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 교양 있는 상위 계층. 선민의식이 있고 오만한 게 흠이었지만 성품 자체는 온건하여 부당한 일을 강제하지 않았다. 하위 계층인 그녀를 무시한 적이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델리 그레이스라는 폭우를 피하기 위한 거대한 우산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역할에 카이로 스트리고만큼 적절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약 떠나는 게 여의치 않을 때, 그때는 카이로 스트리고의 곁에 머무는 것도 좋겠지.

최선의 선택지였다. 이델리 그레이스와의 사랑을 이룬 레이몬드는 방해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영영 귀환하지 못할 거라면 모를까. 본 차원으로의 귀환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말도, 글도 몰라 벙어리처럼 지냈던 이곳에서의 시간은 얼마나 고생스러웠던가.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이곳에 떨어진 지 이제 1년. 결코 감성적이라고 볼 수 없는 그녀도 향수병에 걸리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 * *

그 날, 리체는 일을 끝내고 메디치나 치유관으로 향했다. 라스카가 보내 준 고급 마차에 몸을 싣고 가는 동안 마음이 설레서 주변의 풍광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리체의 걸음은 똑바로 라스카에게 향했다. 위풍당당한 메디치나 치유관의 건물 너머 높다란 빌딩들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리체는 눈이 부신 듯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멈추었던 걸음을 재촉했다.

라스카가 미리 말을 해 둔 탓에 그녀는 검문을 받지 않고 그의 연구실로 직행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라스카가 안경을 벗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왔군요, 리체.”

처음 봤을 때는 무미건조한 얼음 같았던 라스카의 검은 눈동자가 반사적으로 반짝거렸다. 언젠가부터 라스카는 그녀만 보면 웃음을 띠었다. 다정하고 따스했다. 변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항상 마차를 타고 오더군요. 수도에서 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일터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있어요.”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가슴을 부드럽게 빨며, 라스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체는 그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침묵했다.

요즘 들어 그는 질문이 많아졌다. 지식 문제였다면 얼마든지 대답해 주었을 텐데 하필이면 곤란하게도 그녀의 개인적인 사정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라스카는 고버트와의 일로 그녀가 술집에서 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분을 증명하는 펜던트는 고버트 때문에 옷 안으로 숨긴 이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라스카는 정확한 가게 이름까지는 몰랐다. 그녀의 침묵에 라스카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군요.”

‘고버트를 불러 물어보면 될 텐데, 고지식한 사람이야.’

리체는 말없이 웃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같은 질문이었다. 전에 물어봤을 때는 말하기 곤란하다고 직설적으로 답했고, 그때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보다 끈질겼다.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건 민망하거든요.”

“아…….”

라스카의 눈빛이 흐려졌다. ‘술집’이라는 단어의 어감을 생각하고 있는 눈치다.

“혹시.”

“아아, 창관은 아니에요.”

속내를 읽혀 찔끔했던지 라스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리체는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의아함, 망설임, 안도감 등이 그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리체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연구 파트너가 술집 여자라서 꺼림칙한 걸까?

“내가 당신의 명성에 누를 끼칠까 봐 불안하다면.”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라스카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만약 리체 양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

“잠깐 생각해 본 것뿐입니다.”

진지한 검은색 눈동자는 차분하지만 뜨거운 열정에 들떠 있었다. 사랑에 빠진 고귀한 청년처럼. 잠시 눈을 깜박이던 리체는 작은 새가 지저귀듯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해예요. 제가 일하는 곳은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하지만 워낙 바쁘고 정신이 없다 보니, 라스카를 초대할 만한 곳은 못 되어서요.”

리체는 그를 단념시키고자 반쯤 거짓을 섞어 말했다. 사실 일하는 모습쯤이야, 별거 없으니 보여주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자신을 지명한다면 인센티브를 받으니 이득이라면 이득이다. 그러나 금전적인 이득 따위는 리체에게 아무래도 좋을 사소한 문제였다.

이미 카이로와 레이몬드, 그리고 이델리 그레이스가 클럽 퀸에 얽혀 있는 상황이었다. 라스카까지 퀸을 드나들게 된다면 분명 골치가 아플 것이다. 리체는 그녀의 실험체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리체 양이 일하는 데 방해가 되지도 않을 겁니다.”

라스카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럼 제가 알아내는 건 괜찮겠습니까? 절대 당신을 귀찮게 굴지는 않겠습니다.”

약간 상심했던 라스카가 다시 살아났다. 어지간히 궁금한가 보다. 리체가 아무 말도 않자 라스카가 머뭇거리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 그때는 저와 밖에서 데이트를 해 주시겠습니까?”

얼굴 아래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엔 옅은 기대와 긴장이 어려 있었다. 리체는 그의 목덜미를 나긋하게 쓰다듬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뭐야, 원하는 게 그런 거였어? 그 정도는 괜찮지.’

라스카는 자신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한두 개의 요청을 들어주는 건 앞으로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한 투자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제가 거절할 수가 없잖아요.”

“…….”

“그렇게 해요, 라스카.”

라스카가 안도하며 숨을 깊게 쉬고, 리체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강한 힘은 그가 그녀의 대답에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드러내었다. 리체는 쓴웃음을 지었다.

“라스카.”

“네, 말씀하십시오.”

“부탁이 하나 있어요.”

“말씀하세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탓에 웅얼대긴 했지만 망설임 없는 목소리가 믿음직스러웠다. 어떤 부탁을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았다.

“마탑에 들어가고 싶어요.”

라스카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그의 눈에 의문은 없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기 어린 시선이라 리체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왠지 제 부탁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네요.”

“하하, 그럴지도요.”

“…….”

“당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엔 마탑만 한 곳이 없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라스카가 싸늘한 눈매를 휘었다. 그러자 얼음이 녹은 봄볕 들판처럼 눈빛이 따사로워졌다. 반듯한 눈가에 애정이 스미었다.

리체는 생각보다도 긍정적인 반응에 얼떨떨해졌다. 이곳에서도 신비스러운 성지 취급을 받는 곳이니 일개 술집 종업원이 출입하기엔 어려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건만.

“마탑 출입증을 써 드리겠습니다.”

흔쾌히 청을 수락한 그가 어깨 안쪽으로 흘러내려 온 리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제 이름을 건 출입증이니 누구도 딴지를 걸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라스카 메디치나가 보증하는 사람입니다. 마탑주께서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니, 저를 이용한다면 탑주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지만 리체는 그의 제안에 담긴 의미를 바로 깨달았다. 보안이 철저한 마탑에 방문한 방문객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 책임은 보증인이 져야 했다. 라스카는 리체로 인해 일어날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름까지 빌려주다니. 내 어딜 믿고.”

리체가 손가락의 관절로 턱을 쓸자 라스카가 신음을 흘렸다.

“믿습니다.”

“내가 마탑에 가서 난동을 부리면 어쩌려고요.”

“…….”

“왜 웃는 거죠?”

“아니에요. 난동을 부리면 뭐 어때요. 리체 양 하나쯤은 메디치나의 이름으로 충분히 포용할 수 있으니, 마탑에 들어가서도 당당하게 굴어도 좋습니다. 내 이름이 그 정도 힘은 있으니.”

평소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라스카가 하는 말이라 리체는 기분이 새로웠다. 오묘한 표정을 보고 라스카가 개구지게 웃었다.

“하지만 리체 양이 난동이라니,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

“당신이라면 수도 한복판에서 내전이 벌어져도 허둥지둥하지 않고 민가의 지하층을 찾아들어가 밖이 잠잠해질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릴 것 같습니다만.”

“예시가 상당히 구체적인데요?”

“왜냐면 저라면 그럴 것 같으니까요.”

“틀렸어요.”

자신만만했던 라스카가 미간을 좁혔다.

“뭐가 틀렸죠?”

리체는 씨익 웃었다.

“라스카는 숨어 있어도 환자들을 돌볼 거잖아요.”

“…….”

“나라면 호위병으로 부릴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걸요. 누가 날 밀고할지 모르니까.”

멍하게 리체를 바라보던 라스카가 입을 다물고 얌전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네요. 그럴 것 같아요. 리체를 곁에서 보려면 호위병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

“왠지 절 선택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리체는 “음” 소리를 내고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라스카의 부드러운 팔뚝을 바라보았다. 젊은 귀족 남성으로서 관리를 위한 적정량의 운동을 즐기는 라스카의 팔 근육은 진흙이 굳어진 사암 같았다. 단단한 심지가 느껴지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녀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라스카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주물럭거렸다. 그가 시선을 내렸다. 검지로 그의 팔뚝을 꾹 찌른 리체가 배시시 웃었다.

“부드럽네요.”

라스카가 얼굴을 붉혔다. 뺨의 붉음은 열정적으로 허리 짓을 하는 남자의 얼굴이 아니라 첫사랑에게 놀림당한 소년의 수치스러움을 닮았다. 리체는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라스카.”

기꺼운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자, 라스카가 얼떨떨해하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손을 입으로 가져가 손등과 손가락에 쪽쪽 입을 맞추며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있어 기쁠 뿐입니다.”

리체도 마음이 흡족했다.

‘일이 쉽게 풀리는구나.’

그녀가 알고 있는 가장 신분 높은 귀족. 카이로라면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블린의 전장으로 출정한 상태였으므로 달리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한 부탁에 생각보다도 더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니, 리체는 금방이라도 귀향할 수 있을 듯해 마음이 벅차올랐다.

쪽, 라스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 한번 고마워요. 꼭 사례할게요.”

라스카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었다.

“우리 사이에 그럴 필요는 없어요.”

조심스럽게 이마에 키스를 되돌리는 그의 입술 감촉을 느끼며 리체는 의문을 떠올렸다.

‘우리 사이라…….’

몸과 마음이 모두 잘 맞는 지적 파트너. 그 정도의 의미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라스카는 알파답지 않은 알파라, 리체는 아주 조금 걱정되었다. 만약 그의 마음이 진지하게 발전한다면, 그건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나는 어차피 본 차원으로 돌아가야 할 몸이야.’

오래가지 않을 마음일 터였다. 그러길 바랐다. 라스카에 대한 걱정도 잠시였다.

리체의 머릿속은 금세 마탑, 마탑주, 차원 이동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 * *

그간 퀸에서 홀로 비밀스럽게 진행해 왔던 임상 실험과 연구에 라스카의 지식까지 더해지자 순풍을 맞은 돛배 꼴이었다. 리체는 금세 알파오메가 형질에 해박해졌다. 몇 가지 특별한 현상을 제외하면 어지간한 건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날 때부터 오메가였던 선천적 오메가들보다도 그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리체는 행복하지 않았다. 풍족해지는 지식의 보고는 짧은 보람과 만족만을 가져다주었다.

이곳이 본 차원이었다면 어땠을까. 많은 학자들과 토론을 나누고, 생각을 정리하고, 좀 더 정교하게 가다듬은 가설을 발표하여 세상을 발칵 뒤집히게 했을 터였다. 동료와 그녀의 연구 가치를 인정해 줄 대중이 필요했다. 라스카가 있기는 했지만, 사막을 걷다 마신 물 한 모금에 지나지 않았다.

리체는 울적해졌다. 이래서 뭐 하냐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동료들은 모르는 걸 알게 되었다는 기쁨도 있지만, 그보다는 돌아가서 이 연구 자료를 발표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라스카에게서 차원 이동의 가능성을 접한 후, 리체의 향수병은 더 깊어졌다.

요즘은 연구보다는 ‘어떻게 하면 본 차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더 골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라스카에게서 마탑 출입증을 얻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마탑으로 향했다.

마탑은 울창한 숲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지만 마탑의 마법사들에게나 그들을 찾는 사람들에게나 위치가 문제 될 건 없었다. 황궁과 같은 중요한 곳들엔 포탈이 존재하여 마탑과 원활히 교류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마탑을 둘러싼 숲을 이용하는 사람은 마법사의 도움이 간절한 일반 민중뿐이었다.

리체도 나무가 빽빽한 숲길을 통했다. 마탑 출입증을 써 준 라스카도 황궁의 포탈을 이용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숲 안까지 가 달라 하자 마부는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저어서, 결국 리체는 마차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했다.

‘혼자 갈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걱정 말아요. 잘 다녀올게요.’

마지막까지 혼자 그 험한 길을 갈 수 있겠냐고 염려하던 라스카였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마탑에서 뭘 하려는지 안다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라스카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 같은 상태였다. 아무리 그가 착하고 순하다고 할지라도 그녀가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미치광이 취급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약을 써서 치료해 준다고 할지도 모르지.’

중반쯤 지나자 다리가 뻐근했다. 리체는 널찍한 바위를 찾아 앉아 종아리를 주물렀다.

‘생각보다 힘들군.’

고개를 들었다. 울창한 나무 위 우뚝 솟아 있는 고적하고 신이한 느낌을 풍기는 마탑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속도대로라면 도착할 즈음엔 저녁놀이 내려올 듯했다.

‘오늘 꼭 마탑주를 만나야 하는데…….’

한 분야의 정점에 위치한 자다. 만나고 싶다고 쉽게 만날 수는 없을 터. 기실 지금 마탑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리체의 표정이 다부지게 변했다. 만날 때까지 찾아올 생각이었다.

리체는 마탑주가 궁금했다. 그의 연구가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었는지, 그 기대로 머릿속이 꽉 찰 지경이었다.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리체는 부지런히 걸어 그날 저녁, 마탑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탑주를 만나기는커녕 마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지나가던 마법사가 이질적인 그녀의 모습을 보고 흥미를 품었는데, 마탑주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더는 듣지도 않고 내쫓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나가게 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자 그녀는 숲 밖에 있었으니까. 마법사의 숲 밖에 선 채 리체는 어깨를 떨었다.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다음날, 리체는 다시 삯 마차를 타고 마법사의 숲에 도착했다. 한 번 왔다고 가는 길이 좀 눈에 익어, 숲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들고 있는 것은 가는 길에 이용할 약간의 금전뿐이었다. 삯 마차에 지불할 값이었다.

그래도 중간에 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좀 더 가까워진 마탑의 형태를 가늠하고 리체는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바위를 찾았다. 엉덩이를 붙이고 딴딴하게 부은 종아리를 주먹으로 누르며 마사지했다.

다리를 푸는 데만 집중하다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귀가 쫑긋거렸다. 이질적인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청력에 집중하려는데.

“하앗!”

정확히 들려오는 야릇한 비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잠시 굳은 듯 움직임을 멈추었던 리체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울창한 나무 사이를 지나자 빈 공터가 나타났다. 나무가 비켜 자란 공터가 따사로운 햇빛으로 물들었다.

덤불의 이파리가 시야를 가려 리체는 팔로 덤불을 조심스럽게 헤쳤다. 소리가 더 잘 들렸다.

“하아아앗, 하읏, 아아아! 나 어떡해, 어떡해요!”

“…….”

“하앗, 너무, 너무 세요, 아아아, 나 죽어요!”

이런 곳에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교성이 울려 퍼졌다. 햇빛이 이파리마다 맺힌 숲의 공터. 자못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리체는 그저 아연해졌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교성은 꽤 컸고 격렬했다. 이 숲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으니 저렇게 방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만.

당황스러움을 지운 리체는 다음 순간, 한심스러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간의 쾌감에 대한 욕구는 참으로 기상천외해서,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참 대단했다. 아마 인간이 가지는 세 욕구 중 가장 격하면서도 끈질긴 건 성욕이 아닐까.

마탑을 둘러싼 숲속에서 짐승처럼 교접하는 커플을 만난 감상은 그것으로 끝났다. 휴식은 충분히 취했고, 아직 다리가 좀 아팠지만 여기서 더 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객실을 잡을 돈이 없으면 동굴이라도 찾을 것이지.’

쯧쯧 혀를 차며 몸을 돌린 리체는 몇 걸음 걷다가 다리를 멈추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교성이 그녀의 발목을 휘어 감았다.

“아앗, 타, 탑주님, 아아! 그, 그만……! 죽을 것 같아요, 하아아앙!”

탑주?

홱 고개를 돌렸다. 숲속에서의 섹스. 불결하고 비효율적인 행위였다. 보통 때 같았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그녀가 만나길 바라마지 않는 탑주만 아니라면 말이다. 저런 사람이 마탑주라는 건 뜨악스럽지만.

리체는 막막함이 밀려들었으나 억지로 납득했다.

‘마탑이라는 거대 단체를 대표하는 수장이 이런 곳에서 섹스할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높은 위치의 인간이라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법은 없으니.’

차원 이동기를 개발한 미래 공학 분야의 선구자도 난교 파티를 즐기기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진리와 지식을 추구하는 이들 중에도 타락한 자는 얼마든지 존재했다.

리체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였다. 몸통이 두꺼운 나무가 가득한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마침내 그녀의 몸통의 두 배는 됨직한 나무 뒤에 선 리체는 공터를 바로 눈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앗, 하, 흐으으…….”

이제는 지쳤는지 신음이 앓는 소리로 변해 갔다. 그러나 퍽, 퍽 하고 살이 부딪치는 소리만은 멈추지 않았다.

리체는 뒤통수를 나무에 대고, 잠시 기다렸다가 고개를 살짝 틀어 장내를 살폈다. 실지렁이 같은 햇빛이 발치에 어른거렸다. 발을 슬쩍 당겼다.

낭창한 몸매의 여자가 부드러운 풀 위에 엎드린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뒤에 선 남자가 허리를 흔들었다. 상의는 입고 있으나 하의는 발치에 벗겨져 있어, 근육으로 짜인 둥그스름한 엉덩이가 훤히 드러났다. 단단히 올라붙어 있어 꽤 탐스러운 뒷모습이었다.

흥분한 알파의 페로몬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독특한 냄새였다. 오래된 바다의 비릿한 향이 코를 따끔따끔하게 찔렀다. 반면 그의 아래에 깔린 여인은 교성을 지르며 꿈틀거릴 뿐, 질척한 색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향도 피워 내지 못했다. 그녀는 베타였다.

가장 위대한 인간 중 하나라는 마탑주가 베타 여성과 길바닥에서 짐승처럼 교미하고 있었다.

리체는 라스카가 마탑주에 대해 언급했던 일을 떠올렸다.

‘오메가보다는 베타를 좋아하신다고 하죠. 그런 성벽에서 알 수 있듯이 조금, 특이하신 분입니다. 생긴 것만으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나이요? 역시 외양을 믿으면 안 됩니다. 저도 그분의 정확한 연세를 모르니까요.’

‘그게 무슨 의미죠?’

‘제가 치료술의 이능이 개화되기 전에도 마탑주셨고, 여전히 그 외모셨으니까요. 제 아버지가 제 나이셨을 적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인간이 아니기라도 한 건가요?’

‘하하, 그럴 리가요. 단지 젊은 시절 시행했던 마법의 부작용으로 신체 나이가 멈춘 것뿐……. 족히 한 세기는 사셨을 겁니다. 그분께는 너무 고분고분 수그리고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공손히 나가다간 무시만 당할 거예요. 마법사들은 본디 본성이 괴팍하니까요.’

단편적인 정보만 들어도 괴팍한 사람인 건 분명했다. 키워드를 뽑아 보자면.

‘노인, 특이한 성적 취향, 관종, 도전적, 흥미 추구.’

거의 마무리 되어 가는 정사를 확인하며 하나를 더 추가했다.

‘이상 성욕자.’

다른 말로 변태.

이런 사람의 정신 상태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추정 나이가 100세라…….

마법의 부작용이든 다른 이유든, 인간이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젊은 채로 살 수는 없다. 평범에서 벗어난 건 언젠가 비정상에 가까워진다. 내면이라고 정상적일까? 마탑주를 동아줄로 생각하고 있었던 리체는 왠지 불안해졌다.

“아으, 응, 타, 탑주님……!”

여인이 신음을 길게 흘리며 땅에 엎어졌다. 근육으로 꽉 짜인 남자의 엉덩이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뒤로 허리를 확 뺐다. 땀에 번들거리는 허리가 꿈틀거리는 기세가 자못 격렬했다.

투둑, 풀숲에 흰 정액이 떨어졌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쉰 그가 건달인 양 여자의 엉덩이를 가볍게 내리쳤다.

“수고했어, 레베카.”

“아이참, 저 들어가서도 계속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몰아붙이면 어떡해요. 방석을 다시 꺼내야겠네.”

“엄살은. 얼른 들어가 봐. 늙은이들이 너 한창 찾고 있겠다.”

“……양심 없으세요? 탑주님 대신에 찾는 거잖아요!”

“유능한 부관을 둬서 다행이야.”

바지춤을 올린 마탑주가 유들거리며 레베카의 엉덩이로 손을 뻗었다. 찰싹! 차진 소리에 속옷의 훅을 채우던 레베카가 진저리를 쳤다.

“좀! 아저씨 같이 굴지 마세요!”

“어허, 앙탈이 심하다. 얼른 들어가 봐.”

리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개를 끄덕인 레베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둥실 올라간 그녀는 마탑주를 향해 “그만 놀고 얼른 돌아오세요.”라고 타박한 후 마탑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듣도 보도 못한 이동 수단이었다. 리체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마법이란 상당히 유용한 것이군. 탐이 났다.

레베카가 사라지고 나서야 시선이 돌아갔다. 탑주가 바지를 대충 추어올리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다소 나른하기는 해도 부하 직원과 대낮에, 그것도 이런 숲속에서 정사를 벌였던 모습이 쉬이 상상되지 않을 만큼 멀끔한 모습이었다. 문란한 모습이 라스카보다는 확실히 알파답다.

리체로서는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문란함이었다. 그게 그들의 습성이라는 데 어쩌겠는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아무래도 저와 잘 맞을 것 같지는 않았다. 대화도 하기 전에 편견을 갖지 않는 건 좋지 않은데. 무엇보다도 그녀는 그의 호감을 얻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제 어떻게 할까? 아는 척이라도 해?’

리체는 시가를 꺼내 피우는 그를 살펴보며 고민했다. 정사를 보기 전만 해도 ‘럭키, 마탑주와 대화할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상당히 애매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만난다면 아무래도 머쓱하지 않겠는가. 첫 만남에서 첫인상만큼 중요한 건 없겠지.

‘역시 지금은 좀…….’

모르는 척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리체는 슬그머니 몸을 낮추었다. 이대로 마탑으로 가 정상적인 절차를 밟을 생각이었다.

단 한 발, 걸음을 뗀 순간.

“어디 가려고요?”

멈칫한 리체는 반사적으로 나무에 등을 딱 붙였다. 그러나 그다지 소용은 없는 듯했다.

“언제 나오나 궁금했는데, 그대로 돌아가 버리네. 볼거리가 별로였어요?”

“…….”

“귀여운 아가씨가 암살자라도 되나? 어딜 마법사 앞에서 몸을 숨기려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리체는 아차 했다. 상대는 ‘마법사’였다. 그녀에게는 낯설지만 통상적으로 마법사란 무슨 기적을 일으킬지 모르는 존재.

마법사가 낯설었던 리체의 실수였다. 보통 사람들이 이능이라 경외하는 것을 마법으로 얼마든지 구현하는 이들이라면, 탐색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하물며 마법사들의 수장임에야. 리체는 자신의 위치는 물론이고 모습까지도 탑주에게 파악되었음을 깨달았다.

바스락.

천천히 나무 뒤에서 나오자 과연 탑주는 ‘오’ 하고 입술을 동그랗게 말했다.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았기에 과도한 표정 변화가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보다 예쁜데.”

저속한 말투에 리체는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은 어느 명문가의 공자처럼 멀끔하고 단정한데 휘파람을 부는 모습은 뒷골목 무뢰배처럼 천박하다.

마탑주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피 냄새가 안 나는 걸 보면 암살자는 아니고, 모르고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사냥꾼이나 약초꾼도…….”

그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시선이 깔끔하게 차려 입은 옷차림에 걸렸다.

“아니고.”

“…….”

“누구신지?”

어느새 물었는지 입술 사이에서 삐죽 튀어나온 궐련의 끝이 붉게 변했다. 흰 연기가 파란 하늘 위로 나비처럼 하늘하늘 날아올랐다.

리체는 그 자리에 서서 탑주를 관찰했다.

마탑주 그라우지 로스티나루스. 추정 나이 100살의 최상급 마법사.

마법의 부작용으로 신체 나이가 멈췄다고 알려진 그는 겉보기로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보였다. 드러나는 성격은 능글맞고 여유로운 듯하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꽤 날카로웠다. 은발에 흰 피부와 잘 어울리는 금테 안경. 차갑게 느껴질 만큼 투명한 안경알 너머 보이는 눈동자는 거의 검은색으로 보일 만큼 짙은 남색으로, 은하수가 흐르는 어둔 밤의 하늘을 연상케 했다.

리체는 금테 안경이 그의 날카로운 눈매나 눈동자의 빛을 가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목적으로 쓰고 있는 걸지도.

키가 크고 늘씬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기사인 카이로와 레이몬드처럼 두터운 체구는 아니었지만 골격의 느낌이 고급스러웠다. 다리를 꼬고 시가를 피우는 그는 입가의 미소 때문인지 사뭇 다정해 보였다. 시선을 끄는 매력의 미남이었다.

여자를 무자비하게 몰아붙이며 섹스하는 타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리체는 라스카의 조언을 떠올리며 공손하지만 비굴하지는 않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탑주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뭐가? 내 야한 모습을 본 게 영광이라는 건가?”

리체는 미간을 좁혔다. 남의 정사 장면을 훔쳐본 건 사실이니 떳떳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상식 밖의 대꾸였다.

“좋아요, 기분이다. 일단 말해 봐요.”

“예?”

“나한테 용건 있는 거 아니에요?”

어쩐지 영업하는 세일즈맨이 된 것 같은 느낌인데. 조금 찝찝했지만 잘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지만, 만나길 바랐던 탑주와 1대1로 대면하는 상황이지 않은가. 정식 절차를 밟더라도 그를 만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눈 한 번 깜박하는 사이 순식간에 숲 밖으로 쫓겨났던 어제의 일을 떠올리자 약간 남은 망설임마저 사라졌다.

“관대함에 감사드려요. 그럼 사양 않고 말씀드릴게요.”

리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목소리를 엄숙하게 깔았다.

“마탑주님께 토의를 제안합니다.”

“……어?”

그라우지가 당황하며 눈을 깜박였다.

“마법사들끼리는 특정 주제로 한 토의가 활발하다고 들었어요. 가끔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고요.”

이 만남을 위해서 거금을 들인 정장을 입은 리체의 깔끔한 모습은 도서관 사서처럼도 보였다.

“아니, 잠깐,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라우지는 장발에 가까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네?”

“난 또, 나 섹스하는 거 유심히 구경하길래.”

유심히?

그라우지가 날카로운 모양의 눈매를 요염하게 휘었다.

“나한테 관심 있는 줄 알았지.”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만…….”

“그래 보여. ‘그쪽’ 관심은 아니네요.”

시시하게, 중얼거리는 그라우지의 눈에서 흥미가 빠르게 식었다. 그 변화를 감지한 리체는 당혹스러웠다. 이래선 안 된다. 그라우지의 도움이 없으면 현재 상황에서 차원 이동은 요원한 일이었다. 다급해진 리체가 준비한 말들을 줄줄이 뱉었다.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라우지는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 본 양 심드렁한 눈으로 궐련만 뻑뻑 피워 댔다.

“말하자면 내가 필요하단 거네요. 아, 내 자랑스러운 자지가 아니라 머리가.”

말미에 따라붙은 혀 차는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되겠죠.”

“뭐, 맞는 말이에요. 봉사 차원에서 일반인을 상대해 주기는 하죠. 하지만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그들이 정말로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에요.”

“…….”

“순진하게 그걸 믿은 거예요?”

“그 말씀은.”

“마법사에 비하면 권세 있는 귀족도 일반인이라고요.”

“…….”

“마법사와의 토의를 원하는 사람은 많아요. 안 그렇겠어요? 머릿속에 도서관이 들어 있는 놈들인데.”

잘난 척하기 쉬운 말인데 그라우지는 덤덤했다. 외려 너무 당연하고 익숙해서 지루해 보였다.

“대화하는 게 어렵진 않죠. 마법사가 좀 똑똑하고 특이한 능력이 있어도 인간일 뿐인데. 근데 아무 하고나 그럴 순 없어요.”

“…….”

“어른과 아이 사이에 동등한 대화가 가능하진 않잖아요. 게다가 마법사들은 시간 낭비를 극도로 싫어하는 족속들이라.”

리체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하자면 너는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라우지는 그녀에게 신분이나 숨겨진 내력이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이미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누군가에게 바보 취급당하는 건 처음이라 리체는 분노하기 이전에 당황스러웠다.

“그런 것치고는 말씀을 길게 하시네요.”

그러나 그 정도로 물러날 거라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걷지도 않았을 것이다.

“응?”

“시간 낭비를 싫어하신다면서, 제게 긴 설명으로 시간을 할애하고 계시잖아요.”

눈썹을 찌푸리는 그에게 차분히 말했다.

“그렇게 친절한 성격도 아니신 것 같은데요.”

손가락 사이에 두꺼운 궐련을 끼운 채 그라우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눈이 두어 번 깜박이고, 푸핫, 실소가 터졌다. 반쯤 감은 눈을 리체에게 고정하고, 타들어 가는 궐련을 깊이 흡입했다.

“하아.”

향긋하면서도 독한 담배 연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맞아요. 내 시간을 사는 데는 억만금도 부족하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겐.”

“그 말씀은 제가 마음에 드셨다는 거고요?”

리체는 당돌하게 물었다. 그라우지는 답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흥미가 감돌지만 그뿐이었다. 섹스 후 나른한 기분에 젖어 있는 남자의 정신을 어떻게 일깨울 수 있을까? 지금 그녀와 대화하는 것도 쉬는 동안 즐기는 유흥에 불과해 보이는데 말이다.

심심풀이.

리체는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 심지어 그 관심마저 빠르게 식고 있다.

“일단 오늘은 안 되겠는데.”

졸린 듯 말꼬리가 길어졌다.

“다음에 찾아오든가. 방금 봐서 알잖아요? 지금은 내가 많이 피곤하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라서.”

늘씬한 몸을 일으킨 그는 우아한 표범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장난기가 그득 스며 있었다.

리체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가 많다지만 저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인’인가?

단연코 아니었다.

리체는 그녀가 속해 있던 연구원의 소장을 생각했다. 나이가 많았지만 굉장한 장난꾸러기라 누군들 놀려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인간이었다. 리체는 히죽 웃는 그라우지로부터 소장의 향기를 맡았다. 그녀는 그런 소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 느낌이 왔다. 완벽하게 맞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1년 전에 느닷없이 사고에 휘말렸을 때에도 느끼지 못한 감정의 홍수였다.

「어떻게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지. 이런 인간에게 귀향이 달려 있다니.」

부아가 치밀어 눈물을 글썽인 리체의 입에서 익숙한 언어가 튀어나왔다.

죽을 듯이 노력해서 이 세상의 언어를 익혔다지만 아직은 본 차원의 것들이 더 손에, 입에, 눈에 익었다.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탑주의 협조를 받아야만 하는 현실이,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이, 갑작스럽게 넌더리가 났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로브를 툭툭 치며 걸어가던 그라우지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돌아가는 길이 힘들다고 중얼거렸는데 들으셨나요?”

리체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 짜증이 난다고 일을 망치는 건 자신답지 않았다. 물론 인간인 이상에야 불규칙한 호르몬과 감정의 변화를 느끼는 건 당연하지만, 그게 일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리체는 금세 냉철한 그녀로 돌아왔다.

“아아, 그렇군요.”

그라우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안경 너머 짙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반쯤 가려졌다. 그는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왜 저렇게 웃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재수 없는 미소까지 소장이랑 똑같네.’

리체는 웃는 낯으로, 속으로만 욕했다.

“아! 이 숲엔 맹수가 나온답니다. 조심히 가요.”

친절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충고한 그라우지가 눈을 찡긋했다. 뒤돌아 걸어가는 그의 뒤에 대고 리체는 조용히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은밀하게 우뚝 선 중지로 그를 배려했다.

조금 더 질척거려 볼까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니야. 저 웃음에 속아 매달린다면 그나마도 상대해 주지 않을 테니까. 마음에는 안 들지만 라스카에게 편지라도 부쳐 달라 부탁해야겠군.’

* * *

리체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던 그 시각, 마탑으로 귀환한 줄 알았던 그라우지는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숲길이 끝나는 곳을 걸어가는 리체에게 닿아 있었다. 투명화와 플라잉을 동시에 걸고 있는 그는 상위 마법을 중첩하여 발휘하고 있음에도 조금도 버거운 기색이 아니었다. 엘리트 사무직처럼 생긴 젠틀한 외모를 가져 어떤 사람들은 그를 마탑의 전반적인 관리를 맡는 허울뿐인 수장이라고 착각하는데, 뭘 모르는 치들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라우지를 아는 사람은 백이면 백 똑같은 말을 한다.

마탑에 웅크린 괴물.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그는 인간의 탈을 쓴 능구렁이가 되어 버린 존재였다.

“흐음.”

숲을 빠져나간 리체가 삯마차를 탄다.

마차가 떠나고, 투명화 마법이 풀린 그라우지가 허공에 나타났다. 알 수 없는 얼굴로 턱을 톡, 톡 쳤다.

* * *

“저를 너무 심부름꾼처럼 여기시는 거 아니에요? 이래 봬도 4급 마법사라고요.”

마탑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호출받아 튀어나온 레베카가 투덜거렸다. 그라우지의 분부로 리체를 숲 바깥 인도까지 내보내자마자 곧장 그를 찾아온 것이다.

“저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난 또, 공주라도 되나 했네.”

“이상한 점 못 느꼈어?”

“이상한 점이요?”

잠깐 생각한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딱히요? 평범했어요. 물론 저랑 있는데도 태연해 보이는 게 신기하긴 했지만, 타고난 성품으로 보이던걸요?”

“그래?”

그라우지가 눈을 빛내자 레베카는 의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시는데요?”

“저 여자, 평범하지 않아.”

웃음기 사라진 얼굴이 차가웠다. 흠칫한 레베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라우지를 흘끗했다.

그라우지의 밑에서 벌써 10년을 일했다. 진지해야 할 때 장난스럽고 장난스러워야 할 때 진지한 그에게 호되게 당했던 적이 몇 번이던가.

지금도 그렇다. 아무리 애인이 없을 때 즐기는 사이라도 그렇지, 방금 섹스한 상대에게 다른 여자의 뒤치다꺼리를 하게 하다니. 성격 파탄자가 따로 없었다.

“평범하다기엔 좀 예쁘긴 했어요.”

“그것도 그렇지.”

그라우지가 냉큼 대꾸했다. 그러곤 레베카의 새초롬한 눈초리에 멋쩍은 듯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와 달리 히죽 올라간 입꼬리는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거 말고.”

“탑주님껜 그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요?”

“넌 내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알고 있지?”

“그렇죠. 10년 전에 만난 여자의 성감대까지 기억하고 계신 분이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잊지 않았단 말이야. 그 어휘, 발음, 악센트.”

묘하게 핀트가 엇나가는데도 용케 대화가 잘 이어졌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여자가 누군데요.”

질문을 듣지 못한 듯 생각에 잠긴 그라우지는 검지로 턱선을 매만지다 손가락을 튕겼다.

“차원 이동자의 언어.”

“예?”

전혀 뜬금없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레베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라우지가 즐거워했다. 그의 눈동자에 진한 흥미가 어려 있었다.

“내가 이 꼴이 되기 전 만난 차원 이동자와 같은 언어를 사용했어. 이럴 수가. 재밌지 않아? 내게 차원의 단초를 제공한 그와 같은 사람을 또 만나게 되다니.”

“저, 정말이에요?”

그라우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직전까지 미심쩍어 했던 레베카가 태도를 바꾸었다. 그녀가 다급히 몸을 돌리자 그라우지가 황당하게 물었다.

“어디 가?”

“그 여자분 데려와야죠.”

“뭐?”

“차원 이동자라면서요? 차원 연구가 정체된 지 3년째예요. 별다른 성과가 없어 이제는 학회에 논문을 들이밀면 ‘또?’라며 비웃어요. 언제까지 거짓말할 거냐고 다들!”

레베카가 당장이라도 리체를 잡아올 것처럼 굴자 그라우지는 점잖은 얼굴로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어허, 아직도 그 늙은 놈들 말에 휘둘리면 어째.”

“탑주님!”

“그러다 겁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

“하지만…….”

“기다려 봐. 어차피 또 찾아올 거야.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누군가 출입 증명서라도 써 주었나 본데, 너는 차라리 그쪽을 캐 봐.”

“아.”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마탑은 왜 찾고 있는지. 뭐, 마지막은 짐작이 가지만.”

씨익 웃는 그라우지의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눈동자가 서슬 퍼런 빛으로 반짝였다. 안경이 가려 주는 것도, 입가에 띤 은은한 미소도 소용이 없었다. 백 년을 살아온 괴물은 두 눈에 그 긴 세월을 품고 있는 사내였다.

레베카가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리자 그라우지는 언제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냐는 듯 즐겁게 흥얼댔다.

“숲 전체에 대단위 탐지 마법을 걸어 둬야겠군. 어린 새가 찾아오면 댕댕, 환영의 종소리가 울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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