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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리체는 깜박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밤새도록 나눈 정사 때문이었다. 카이로는 지칠 줄을 몰랐다. 긴 시간을 잠도 줄이고 달려왔다는데, 거짓말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쉴 새 없이 신음하느라 갈증이 났다. 누가 갔다 놨는지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신 리체는 느릿느릿 일어났다. 온몸이 뻐근했다. 엉거주춤하게 팔을 돌렸다.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카이로가 잠깐 집에 들렀다가 오겠다고 한 것 같은데. 잠결에 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았다.
“하암.”
긴 하품을 하고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았지만 퀸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이아몬드 룸의 문을 열고 나왔다. 바닥을 향한 리체의 시야에 뾰족한 구두 앞코가 들어왔다. 또각, 소리가 났다.
‘응?’
고개를 들자 이델리였다. 움찔한 리체는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소 지은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그 미소에 독이 잔뜩 묻어 있는 듯했다. 독화 같은 미소였다. 리체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졌다.
‘이 여자가 여기 왜?’
이델리가 왜 여기 있는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하기에 앞서 신체가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천적을 만난 듯 사지가 빳빳해졌다. 제 육신의 일인데도 학자로서의 탐구심이 발동해 버린 리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그 이유를 알아냈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 때문이로군.’
전에 만났을 때와 달리 그녀에게서 풍겨 오는 레모네이드의 달콤한 향이 지금은 아주 새콤했다. 산성도 높은 기체에 노출된 것처럼 따끔거리는 피부…….
‘이건 위협하는 페로몬이다.’
문제는 뭐 때문에 이러냐는 거다.
리체는 그녀보다 키가 더 큰 이델리를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안녕, 리체. 좋은 시간 보냈니?”
이델리는 상냥했다. 그녀는 카멜레온 같이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리체에게는 내내 시큰둥하거나 무시하는 모습밖에 보여 주지 않았으므로 리체는 다정한 목소리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목소리와 비례하여 제 피부가 더 따끔거리는 상황에서야.
“참 대단해. 오메가일 줄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삽시간에 냉랭해졌다.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하다니.”
리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야 알겠다.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로와의 일을 들켰다는 생각에 머리에 잡음이 꼈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생각했다. 레이몬드도 아니고 카이로와의 관계에 그녀가 왜 관심을 갖겠는가? 레이몬드가 말하길, 이델리와 카이로의 관계는 애초에 끊어졌다. 아무리 그녀가 그녀의 남자들을 제 치마폭에 가두는 걸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카이로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그럼 그녀에게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이 언짢음과 분노는 무엇 때문일까? 베타로 정체를 숨겨 언짢음은 느낄 수 있다지만 분노는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정체 모를 불길한 기분에 리체는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리체가 침묵을 지키자 이델리의 눈이 뱀처럼 가느스름해졌다.
“백작은 어떻게 꼬신 거니? 그건 좀 궁금하지만……. 그렇게 긴장하지 마.”
“…….”
“스트리고 백작과의 일로 널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
“내가 관심 있는 건 레이몬드거든.”
리체는 머리를 굴렸다. 질문의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레이몬드? 혹시 레이몬드와의 일도 알고 온 걸까? 머리를 굴리던 리체는 식은땀을 흘렸다. 생각을 이어 나가는 게 힘들었다. 극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심각했다.
비교적 차분한 마음에 비해 몸은 그녀의 질문을 듣는 순간 공포심을 느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상위 개체를 만난 하위 개체가 그런 것처럼. 리체는 바싹 마른 목구멍에 침을 흘려보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모른 척하겠다는 거야? 레이가…….”
거기까지 말한 이델리는 말을 멈추었다.
“아, 모르니?”
뜬금없는 말에 리체는 진심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엔 순진한 척이 아니라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하.”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뱉은 이델리가 손가락으로 제 입매를 쓸었다. 손끝에 붉은 화장품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 손가락 끝을 비비며 이델리가 피식 웃었다.
“스트리고 백작은 네가 가져도 돼. 하지만.”
마지막에 악센트를 준 이델리가 리체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긴 금발이 섹시하게 각진 어깨선을 따라 스륵 흘러내렸다.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온 리체의 머리카락과 달리 이델리는 금사로 만든 듯 빛나는 금발이었다.
매혹적인 목소리가 뱀의 움직임처럼 은밀하게 리체의 귀를 파고들었다.
“다른 건 아니야.”
“…….”
“난 내 걸 나누는 걸 정말 끔찍이도 싫어하거든.”
페로몬이 일순 강해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다리에 힘이 빠진 리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눈앞에 빨간 글씨의 메시지 창이 깜빡거렸다.
[강력한 오메가 페로몬이 신체에 침입합니다. 체내 페로몬 농도가 낮아 대응할 수 없습니다.
상태 이상 ‘공황’에 빠집니다.]
불길할 정도로 시뻘건 글자.
그 너머 이델리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소름이 끼쳐 왔다. 위험을 직감한 신체의 반응이었다.
‘나를 죽일 생각인가?’
레몬즙을 그대로 짜낸 것처럼 페로몬이 시게 느껴졌다. 극우성 오메가의 공격적인 페로몬에 열성에 가까운 리체는 반항할 수가 없었다. 금세 숨이 막히고 눈앞이 흐려졌다.
하악, 학.
마른 걸레에서 물을 쥐어짜듯 숨을 몰아쉬는 리체를 이델리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미묘하게 웃고 있지만, 파란 눈만큼은 서늘하게 리체를 주시했다. 절대자가 하찮은 인간에게 벌을 주는 듯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심에 리체는 이가 갈렸다.
알파오메가는 인간 사회의 신분 제도를 떠나 본능적으로 계급을 나눈다. 열성은 우성을 평생 이길 수 없다. 베타가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오메가가 되는 것처럼 아주 희박한 가능성. 유전자에 새겨진 계급에 익숙한 알파오메가들이 오만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 번도 누군가에게 무릎 꿇어 본 적 없는 리체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감정 기복이 크지 않고 이성적인 그녀로서는 드문 감정이었다.
‘우성 오메가.’
‘우성’이란 글자가 머릿속에 크게 박혔다. 그녀의 현재 페로몬 농도 수치는 20.
오메가 페로몬이 알파 페로몬에 반응하는 특성 때문일까?
퀘스트를 하지 않았음에도 페로몬이 늘었다. 레이몬드, 카이로와 퀘스트가 아닌 잠자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수치가 늘고 있었다. 그리고 페로몬 농도가 높아질수록 새어 나가는 페로몬의 기운도 농밀해졌다. 페로몬의 농도는 우성과 열성을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리체는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페로몬을 뿜어냈다. 연구 목적이 아니라 오메가로서 페로몬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미약하나마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에 대항했지만, 긴 부리를 가진 새가 먹잇감인 곤충의 보호색에 영향받지 않듯이 이델리도 마찬가지로 코웃음을 쳐 그녀의 페로몬을 짓눌렀다.
“헉!”
숨을 헐떡인 리체가 허리를 앞으로 꺾었다. 숨이 막혀 온다. 이대로 기절하는 건가……. 흐릿하게 생각하는데 누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산소통에 머리를 처박은 것처럼 신선한 공기가 폐부에 가득 들어왔다. 숨통이 트였다.
허억, 허억.
오메가 페로몬에 압사당할 뻔한 리체는 단단한 팔을 움켜쥐고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저도 모르게 품을 파고들었다. 몸은 본능적으로 살 곳을 찾아 꿈틀거렸다. 그의 품에선 짙은 독무처럼 숨통을 틀어막은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이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살았다.’
리체는 안도하며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다디단 숨 사이로 짙은 쇠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굵고 튼튼한 팔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아 당겼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이델리 그레이스?”
냉엄한 목소리는 죽음의 사자와 같이 흘러나왔다. 당황했던 이델리는 곧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를 걸었다.
“카이로.”
카이로가 혼절해서 늘어지는 리체의 몸을 안아들었다. 이델리의 부름엔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카이로?”
그제야 차가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위에서 아래로 꽂히는 위압적인 시선에 이델리는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어쩜 형제가 이렇게 다를까.’
같은 피를 잇고, 비슷한 색을 가졌는데 레이몬드는 뜨겁고 카이로는 차가웠다. 그녀는 차가운 것보단 뜨거운 게 좋았다. 미지근한 것보다는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애정이 훨씬 흡족했다.
카이로는 그런 의미에서 부적격했고, 그 때문에 어렸던 옛날 카이로를 버리고 레이몬드의 손을 잡았다.
“누가 네게 이름을 허락했나.”
그런데 참으로 묘했다. 이델리는 가녀린 몸을 놓지 않겠다는 듯 꽉 붙든 카이로의 손을 힐끗했다. 이쪽을 향한 시선은 한겨울 냉수처럼 차가운데 저 손은 매우 뜨거워 보이니 말이다. 한 번 만져보고 싶게끔, 먹음직스러운 열기가 느껴졌다.
이런 모습은 카이로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델리는 티 내지 않았다. 자신에게 차가웠던 남자가 고작 열성 오메가에게 뜨거워진다는 건 그녀의 수치였으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녀는 알파오메가의 여왕이었다. 어디서든 품위를 지켜야 했다. 설령 무릎 꿇어 마땅한 알파가 자신을 적대하는 자존심 상하는 상황일지라도.
“좋아요. ‘스트리고 백작’님.”
이델리는 조금도 기분 상하지 않은 것처럼 여유롭게 굴었다. 그러나 속은 지옥 불에 떨어진 양 활활 타올랐다. 뺨을 맞았는데 얌전히 있는 건 결코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혀 속에 칼이 숨어들었다.
그녀는 턱을 약간 치켜올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올라간 눈매에 경멸이 새겨졌다. 푸른 눈으로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리체를 가리켰다.
“재밌네요.”
“…….”
“못 본 사이 취향이 꽤 저급해지셨어요.”
“저급?”
“열성 오메가라. 고지식했던 분이, 입맛이 꽤 바뀌셨나 봐요. 하긴 병영엔 먹을 게 없었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리체를 가리켰다. ‘이거’라고. 카이로는 무심해서 더 차갑게 느껴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델리는 레이몬드와 닮은 그의 형제가, 한때는 얼굴 맞대며 하하 호호 했던 그가 저런 식으로 쳐다볼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뭣 모르는 머저리들이 수군대는 것은 패배자들의 열패감일 따름이지만 카이로 스트리고가 보내는 시선은 진실로 경멸이었다. 두 남자 사이를 오가며 마음을 저울질했던 그녀를 향한 경멸.
저는 얼마나 고결하기에 나를 이따위로 취급해.
발끈한 이델리의 눈에 카이로의 품에 안겨 있는 리체가 들어왔다. 하, 짧은 웃음이 터졌다. 삽시간에 마음이 진정되었다.
단지 양쪽과 데이트를 하고, 키스를 나누었던 것만으로도 나를 경멸했다.
하지만 저 되다가 만 열성 오메가는 어떠한가?
‘지금은 꽤 재미가 있는 모양인데, 이걸 어쩌나. 저 여자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걸 알면.’
입술이 간지러웠지만 이델리는 자물쇠를 채웠다. 과일 하나를 먹어도 적당히 숙성되기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는 법이다. 하물며 이 오만한 백작이 대상임에야. 그녀의 매끈한 미소가 보다 깊어졌다.
카이로가 리체에게 더 많이 마음 쏟길 바랐다. 마음을 떼어 주면 떼어 줄수록 돌아온 반동은 심장을 짓이길 만큼 고통스러울 테니.
‘그동안 잘해 봐.’
물론 카이로 스트리고가 한 사람에게 온 마음을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지금은 꽤 재미를 보고 있는 것 같으니 배신의 칼날이 무르지만은 않을 듯했다.
이델리는 기분이 상쾌해졌다. 감히 자신의 레이몬드를 각인 시킨 주제 모르는 오메가를 혼내 주러 온 방문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 있었다.
‘불쌍한 레이. 각인당한 여자에게 배신당했네. 미워하는 형에게는 여자를 빼앗겼고.’
이델리는 레이몬드가 얼마나 그의 형을 증오하고 질투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를 한심해한다는 것도.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몬드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린 건 봐줄게. 넌 곧 많이 힘들어질 테니까. 그때, 내가 슬픈 널 감싸 안아 줄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벌을 받아. 이건 날 배신하고 감히 다른 여자에게 각인한 벌이니까.’
생긋 웃은 이델리는 몸을 돌려 걸어가는 카이로의 뒤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연락해요.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내치지는 않을 테니까.”
느린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카이로는 아래로 흘러내리는 리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군.”
무심한 목소리에 이델리의 미소가 사그라졌다. 오래지 않아 꼴사나워질 그를 알고 있다지만, 열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가진 악의와는 별개로 의아하기도 했다. 우성 알파도 아닌 그가 어째서 자신의 페로몬에 이렇게 잘 저항할 수 있는 걸까. 이건 카이로의 페로몬이 극우성에 필적한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향해 유혹하는 페로몬을 흘려보낸 이델리는 여전히 꼿꼿하기만 한 넓은 등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짜증 나게.”
구두의 뾰족한 굽이 사과라도 쪼갤 듯이 바닥을 내리쳤다.
* * *
문 앞에 클로징 간판을 세운 퀸의 건물은 다른 때와 달리 아주 조용했다. 그러나 두꺼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끙끙거리는 신음 소리가 가득했고, 물수건을 들고 오가는 움직임이 부산했다.
“큰일 났어요, 사장님! 미하일도 열이 나요.”
“뭐, 걔도?”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낭패스러운 기색이다. 쉴 틈 없이 손을 놀리던 사장은 쯧, 혀를 찼다. 사장실은 난장판이었다. 몸을 운신할 수 있는 직원들이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탓이었다. 그들의 수가 총 열 명이었다. 이들이 지금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의 전부다. 파트타임 직원 포함 서른 명에서 오십 명 사이의 인력을 운영 중인 퀸의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였다. 그나마도 다 베타다.
‘나도 쉬고 싶다.’
퀸은 오늘 긴급 휴무였다. 엇비슷하게 발정기가 온 오메가들이 억제제를 먹고 후유증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히트 사이클, 즉 오메가의 발정기를 사후 억제하는 옵세진은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약간의 근육통과 나른함, 두통과 미열을 동반하곤 했다.
“미하일까지 몸 안 좋으면 내일도 가게는 쉬어야겠는데. 그러게 미리 억제제 먹어 두라니까, 내가 뭐랬어. 꼭 이렇게 일 힘들게 하지.”
사장은 심란한 얼굴이기는 했으나 가게를 열어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인기 있는 종업원들이 모두 알파오메가인 탓에 그들이 없으면 가게를 오픈해 봤자 의미가 없었다. 베타 종업원들이 손님들의 흥미로운 말 상대가 되기를 기대하는 건 가혹한 일이었다.
“가끔 이런 날이 생기잖아요. 올해는 오늘인가 보네요.”
“하긴 발정기는 불규칙하니까.”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갑작스러운 손해에 대한 속 쓰린 마음을 덜어 냈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은 몇 달, 혹은 며칠을 주기로 터졌다. 차이가 있기는 하나, 칼같이 규칙적인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한 공간에 오메가들이 시간을 많이 공유하게 되면 어떻게 된 일인지 발정기도 비슷하게 오는데, 이번이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날은 클럽을 휴무로 돌렸다.
리체가 퀸에서 일하는 동안 오늘을 포함하여 단 두 번 있었던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고생하고 있는 미하일이나 엘자를 찾아가서 이것저것 약을 챙겨 주며 연구 자료를 얻었겠지만, 오늘만큼은 리체도 심드렁했다.
‘몸이 좋지 않아.’
다른 오메가들처럼 옵세진의 후유증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발정기를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다. 혹시 몰랐던 초반을 제외하고는 약을 복용한 적도 없다. 후천적으로 오메가가 되었다고 발정기가 없는 건 아닐 텐데, 뭔가 의심스러웠다.
어쨌든 1년 동안 발정기를 겪어 보지 않은 그녀에게 오메가들의 히트 사이클은 꽤 흥미로운 케이스였다. 수정을 위한 기간이 따로 있다니. 정말 짐승 같은 작자들이지 않은가. 인간과 짐승 그 어디, 알파오메가는 그 사이에 위치했다.
신체적, 외모적, 지능적 능력은 평범한 인간보다 뛰어나지만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는 건 그 모든 매력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게 리체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 흥미로운 상황에 빠져들지 못할 만큼 컨디션이 난조였다.
‘카이로 스트리고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겠어.’
<체력이 좋음>을 두 줄로 찍찍 긋고 <짐승에 비견됨>으로 바꾸었다.
‘이제 적절하군.’
격한 운동을 지속하고 난 뒤처럼 몸 곳곳이 근육통으로 뻐근했다. 카이로의 단단한 몸이 쉼 없이 부딪쳤던 후유증이었다. 부서질까 봐 걱정된다며 그가 나름대로 욕구를 눌러 참았는데도 이랬다. 리체도 그게 싫지는 않았지만, 나중에는 꽤 성가셨다. 너무한 거 아닌가 싶어서였다.
페로몬이 신체에 작용하는 영향은 생각보다도 격렬하고 과격했다. 페로몬 수치가 낮은 지금의 상태로는 이 차원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을 터. 이델리의 페로몬에 본능이 굴복할 때, 리체는 그 점을 명확히 깨달았다.
때로는 몸으로 부딪쳐야만 정확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이델리 그레이스는 희귀한 연구 케이스지만 매우 오만해. 불쾌할 만큼.’
그랬다. 그녀는 불쾌했다.
그날, 극우성 오메가의 위압적인 페로몬에 휩쓸려 몸의 통제를 잃고 혼절했던 일이 수치스러우면서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육체가 통제에 벗어나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다. 회의 중 배탈이 나 뛰쳐나가거나 멀미할 때 속이 울렁거려 토악질을 할 때처럼 통제할 수 없었고, 훨씬 폭력적이라 기분이 나쁘다.
‘페로몬 수치를 더 높일 수만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우성 알파의 페로몬. 지금 그녀에게 가장 안정적으로 알파 페로몬을 퍼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카이로 스트리고다.
침대 시트가 푹 젖어 눅눅해질 때까지 수차례 뒹군 결과 페로몬 수치는 적잖이 향상되었으나 반작용으로 신체 피로도가 상당했다. 레이몬드가 나타나지 않는 게 의아하기보다는 다행이라고 여겨질 만큼.
레이몬드는 이델리가 찾아온 이후 나타나지 않았다. 연락도 없이. 느닷없이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이델리는 집착이 강한 여자야. 레이몬드는 원래도 그녀에 대한 애착이 있었으니, 지금쯤 같이 있겠지.’
매일 찾아올 것처럼 굴던 레이몬드가 더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그 이유밖에 없을 터였다. 역시 결혼 운운했던 건 바람둥이가 곧잘 지껄이는 한때의 달콤한 말에 불과했던 거다. 고작 그런 말에 허비했던 시간이 리체는 조금 아까워졌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레이몬드 스트리고’를 지웠다.
사장이 결심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메디치나 치유관에 치료 물약을 타 와야지.”
리체는 주먹으로 근육이 뭉친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곤 멀뚱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치료 물약이요?”
“이번에는 치료사 나부랭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치유술사의 물약을 받아오는 거야.”
“제가 전에 사 온 것과는 다른가요?”
“그건 치유관의 일개 치료사가 만든 거야. 시중에 팔리는 싸구려 물약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지. 가벼운 감기에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은 그걸로는 어림도 없어.”
매니저가 부연했다.
“제대로 된 치유술사의 물약은 얻기 힘들지. 지난번에 치료사의 물약이나마 많이 받아 챙겨 온 것도 내 사촌 덕분이었고.”
그는 꽤 뻐기는 어투로 말했다. 리체는 메디치나 치유관을 일종의 VIP만 취급하는 병원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본 차원으로 치면 국회 의원이나 돈 많은 재벌들을 주로 상대하는 것과 비슷할까.
메디치나 치유관은 봉사의 개념으로 자선 사업도 하는데, 돈 없는 평민들을 상대로 물약을 싸게 파는 것도 그런 사업의 일종이었다. 다른 곳보다 뛰어난 의약품을 매점매석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한 명당 세 병으로 수량이 한정되어 있다.
“세 병 가지고는 턱도 없는데.”
누군가 투덜거렸다.
“그것도 메디치나 백작 가문의 관대한 지침 때문에 가능한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올 것도 없이 죄다 귀족 가문에 팔릴걸.”
모르는 소리 말라며 사장이 타박을 놓았다. 그 말에 리체는 귀가 솔깃했다.
“치유술사의 물약이란 게, 효과가 좋나요?”
“좋다마다. 손가락 한 마디만 먹어도 웬만한 미열은 싹 나아.”
“근육통도?”
“그 정도야 뭐.”
사장은 피식 웃었다.
“다음날이면 펄펄 날아다닐걸.”
“맞아. 계속 억제제 후유증으로 누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약이라도 먹여야지. 그 덩치 큰 미하일도 축 처졌던데.”
리체는 뒷말엔 그냥 흘려들었다. 치유술사의 물약이 그렇게 좋단 말이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일단 제 몸에 필요하다.
“마차만 불러 주시면 제가 갔다 올게요. 사장님 바쁘시잖아요.”
“안색이 나쁜데, 괜찮겠어?”
“대신 몇 병 더 챙겨 주세요.”
사장은 고민했지만 이내 흔쾌히 수락했다.
수도의 서쪽 성문 근처 외곽에 위치한 퀸에서 메디치나 치유관이 있는 수도 중심가까지는 거리가 좀 있었다. 리체는 메디치나 치유관의 영역에 다 와서 삯 마차에 돈을 지불하고 내렸다.
메디치나 치유관 주변으로 보이는 수도는 화려했다. 길가에 선 가로수는 관리를 잘 받는지 잎이 풍성했고, 조형물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심심함을 덜했다. 규칙적으로 늘어선 가로등 하나에도 도블락의 이름과 상징물이 정교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도는 처음이네.’
만약 더는 퀸에 머무르지 못할 때는 수도로 오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퀸이 있는 휑한 거리와 다르게 사람이 가득한 수도는 외부인 한 명 즈음은 금세 섞여 숨어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금은 넉넉히 필요하겠다만.’
상인들의 좌판과 가격을 확인한 리체는 주머니 사정을 헤아렸다. 퀸에서는 숙식을 해결하는 대가로 적은 봉급을 받고 있어서, 빈약한 주머니 사정으로 수도에 입성했다간 빈한 생활을 면치 못할 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리체는 맞은편에서 빠르게 걸어오던 남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부딪친 곳에서부터 둔탁한 통증이 번졌다.
“아, 죄송……. 뭐야, 술집 년이었잖아.”
리체는 갑자기 화를 내는 남자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은 뛰어오던 상대에게 있었다. 처음에는 사과하려는 듯했지만 차림을 훑어보고는 바뀌는 태도가 부끄러울 정도로 솔직했다.
“조심해, 이년아.”
눈을 위아래로 부라리며 을러댄 남자는 리체와 부딪친 어깨를 툭툭 털고는 빠르게 지나갔다.
‘이거 참.’
리체는 한숨을 쉬었다. 방금 지나간 남자는 귀족은 아니었다. 귀족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장이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한 옷차림이 단정했으니 귀족 가문, 혹은 그에 준하는 집안의 사용인일 것이다.
리체는 자신이 입고 있는 유니폼을 내려다보았다.
차분한 감색 스커트에 하얀 셔츠. 무난한 옷차림이라 이걸로는 그녀가 어디서 일하는지 알 수 없었을 텐데. 둘러보던 리체는 목에 걸고 있는 신분 패를 보고 “아” 했다. 엄지손톱보다 큰 원형의 펜던트는 퀸의 고유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수도에 입성하려면 이걸 차야 한다고 했는데, 이래서야 방금과 같은 불유쾌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입구도 지났으니 괜찮겠지.’
리체는 잠시 고민하다가 옷 속으로 펜던트를 집어넣었다. 쇠 특유의 서늘한 감촉이 가슴팍에서 어른거렸다. 그러고 나서 리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수도의 규모를 가늠하는 대신 거리를 이용하는 인물의 면면을 살폈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이들은 방금 부딪쳤던 남자처럼 사용인 신분일 것이다. 가문의 마차를 타거나 말을 이용하는 이들은 준귀족 이상의 계급. 그리고 나들이를 나온 것처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차림은 누가 봐도 귀족이다.
그러나 그들 중 알파오메가는 없었다. 전체 인구 중 알파오메가가 차지하는 비율은 지극히 낮다.
‘이래서 내가 심부름 가겠다고 했을 때 다들 좋아했던 거구나. 눈에 띄어 시비가 잘 붙으니까. 날 아직 베타로 알고 있으니 그랬겠지. 여기서는 신분을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메디치나 치유관은 귀족들이 많이 사는 수도에서도 노른자 땅인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그 위치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메디치나 치유관의 위세는 종업원에게 들었던 것보다 대단했다. 입장 인원이 제한되어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긴 줄을 이루었다. 리체는 맨 뒤에 서서 자신의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치유관에는 작은 문과 큰 문,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작은 문에는 리체처럼 마차를 대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용했고, 큰 문은 마차가 출입했다. 마차는 가문의 문장을 훤히 드러낸 것뿐이었다. 삯 마차는 없는 걸 보아 아마도 큰 문은 귀족들만 이용할 수 있는 듯했다.
작은 문의 줄은 속도가 꽤 더뎠다. 리체가 앞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동안 마차는 총 열 대가 들락거렸다.
마차를 구경하던 리체는 그 너머를 휙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안력을 돋우었다. 잠깐 본 거라 확신할 순 없지만 아까 부딪쳤던 그 무례한 남자였다.
리체는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안에서 마주치는 건 아니겠지?’
줄을 기다리는 일은 지루했지만 그럭저럭 유용했다.
“저기, 대문으로 치유술사가 나가는군. 아마 귀족의 호출을 받았겠지?”
“우리 어머니도 치유술사의 치유를 받으면 좋겠어. 치료 물약도 효과가 있다지만 치유술사의 솜씨만 하겠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메디치나 치유관에서 물약을 파는 것만 해도 어딘가. 동네에서 가장 큰 의관을 가도 메디치나 치유관의 물약만 못하더군.”
“제국 건국 초기에 치료술 하나만으로 작위를 받은 가문이잖아. 그 실력이 대단하겠지.”
“무엇보다 사용인에게 봉급을 많이 줘서 좋아. 우리 아들도 손재주가 있어 치유관에 지원했다고. 치료술은 없어도 허드렛일은 잘할 수 있다니까.”
“그거 좋은데! 메디치나 치유관은 하인들도 말씨가 친절하잖아.”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의 수다를 듣고 있으려니 리체의 차례가 왔다. 메디치나 치유관에 입성한 리체는 배치된 하인의 안내를 따라 이동했다. 사람이 많아서인지 회랑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리체는 심각한 병마보다는 컨디션을 회복하고 기력을 북돋는 치료 물약이 준비된 방으로 이동했다.
“이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인이 돌아가고 나서 리체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는 이 방의 책임자인 듯한 남자가 얼굴에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오트밀색 튜닉이 거대한 풍채를 타이트하게 감쌌다. 허리에는 꽤 값이 나가 보이는 광택이 흐르는 허리띠를 찼는데, 배가 어찌나 나왔는지 허리띠 위아래로 살이 튀어나왔다. 귀족 나리들처럼 부채를 살랑살랑 흔드는 손은 솥뚜껑처럼 커서, 평균적인 크기의 부채가 어린애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들어가자마자 그와 눈이 마주친 리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이런.’
역시 멈칫한 남자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혈색이 좋지 않은 듯 자주빛 입술이 주름 없이 팽팽해졌다. 리체는 갑자기 속이 역해졌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한 물약을 골라 오시오.”
초반부터 거만한 태도였다. 그녀는 기분이 상했다.
‘귀족가의 하인인 줄 알았지 이곳 직원이라니.’
운도 더럽게 없다. 혀를 찬 리체는 남자를 알은체하지 않고 필요한 물약을 골라 남자가 있는 계산대로 갔다. 노란 바구니 안에 물약을 내려놓자 눈으로 물약의 수를 헤아린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1인 1병 구매 제한이 있소.”
리체는 도블락 제국의 시민임을 증명하는 신분 증서를 내려다보았다. 클럽의 오메가들에게서 얻어 온 신분 증서는 총 네 장이었다.
한 사람당 1년에 살 수 있는 치료 물약의 개수는 3병. 두 병을 사 오라고 했던 사장의 말에 따라 여덟 명을 고른 참이었다. 리체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 사람 당 세 병까지 살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용 규칙이 바뀌었소. 한 병이오.”
남자는 귀찮은 얼굴로 대꾸했다. 리체는 사전 정보와 다른 상황에 멈칫했다.
‘이자의 말에 따르면 살 수 있는 물약은 네 병.’
클럽에 비축할 양을 생각한다면 너무 적었다. 게다가 그녀는 심부름의 대가로 물약을 몇 병 더 가져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몫도 적어질 터였다.
아무래도 남자의 말이 찜찜했다. 낯빛 하나 바뀌지 않는 얼굴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데. 미심쩍은 그녀의 시선에도 남자는 뻔뻔한 얼굴로 되레 뭘 보냐는 듯 인상을 썼다. 리체가 속으로 한숨을 쉬는 순간이었다.
[돌발 퀘스트 발생.
메디치나 가문은 형편이 여의치 않은 평민들을 위해 치료 물약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치유관의 치료 물약은 뒷거래 암매상들에게 인기 있는 품목입니다.
메디치나 치유관의 직원 고버트는 치료 물약을 암매상에게 빼돌려 사적인 이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많은 치료 물약을 빼돌리기 위해 당신에게 배당된 치료 물약을 주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욕심꾸러기를 이겨 치료 물약을 쟁취하세요.
성공 시 보상: 메디치나 치유관의 사과.
실패 시 페널티: 치료 물약을 얻지 못하고 쫓겨남.]
‘이런 것도 퀘스트를 주나?’
리체는 눈동자를 굴려 고버트의 얼굴을 분석했다.
‘형질은 베타. 인상과 말투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돈에 자존심을 파는 소인배.’
전형적이었다. 치료 물약을 충분히 구매하기 위해서는 고버트를 만족시킬 만큼의 추가금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리체는 돈이 없었다.
거짓말을 밝혀내는 건 객관적인 근거 자료뿐. 그녀는 언젠가 사장 몰래 장부를 들춰 보았던 일을 떠올렸다. 사장의 장부엔 돈이 나가고 들어온 기록과 손님들 출입 기록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 양이 매우 방대하고, 기록이 꽤 이전의 것이라 기억력이 좋은 리체도 약간 시간이 걸렸다.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요? 안 살 거면 얼른 나가고.”
못마땅한 핀잔에 리체는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언제부터요?”
“뭐?”
“이용 규칙 말이에요. 언제부터 바뀌었어요?”
고버트는 한쪽 눈을 찌푸리고 리체를 보았다. 별다른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거만하게 대꾸했다.
“지난달부터.”
지난달부터라. 너무 성의가 없는 거 아닌가. 리체는 내심 코웃음을 쳤지만 부러 의아한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달 언제부터요?”
“중순부터! 뭐가 문제야?”
“이상한데요.”
“뭐가 이상하단 거야?”
“저희 가게에서는 꾸준히 메디치나 치유관에서 물약을 구매해 왔어요. 작년 구름이 지는 달에 퀸의 이름으로 치료 물약 10개 구매. 동화 20개 지불. 신분 패는 5개 가져왔고요. 구름이 떠오르는 달에 치료 물약 12개 구매. 동화 24개. 신분 패는 6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1년 치의 기록을 줄줄 뱉자, 그녀를 성가시게 여기던 고버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리고 가장 최근인 저번 달 말일에는 8병을 구매했고 동화는 16개, 신분 패는 4개 가져왔군요.”
“…….”
“그런데 중순부터 바뀌었다고요?”
고버트는 확연히 당황한 기색으로 버럭 소리쳤다.
“이용 규칙이 막 바뀌었던 때라 근무자가 실수했나 보지! 지금 메디치나 치유관의 결정에 불만을 품는 건가?”
적반하장인 고버트의 태도에 리체는 무표정해졌다.
“그냥, 이상해서 말이죠.”
고버트는 그 차분한 태도에 당황했다. 일반적으로 이곳에 치료 물약을 사가는 손님들은 깔끔한 메디치나 치유관에 들어오면 주눅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대체로 수긍하고 주머니를 더 열었는데, 얼굴 반반한 여자가 제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드는 게 아닌가.
얼굴이 제법 괜찮으니 아양을 떨면 선심 쓰는 척 약 몇 병은 싸게 넘기려 했던 고버트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대메디치나 치유관의 사람을 우습게 아는 거냐고!”
“……하아.”
“한숨을 쉬어? 이, 이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르는 잡년이!”
‘나와 대화할 자격이 없는 놈이로군.’
입을 다무는 그녀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고버트가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그래. 그냥 허락된 양만 가져가면 나도 뭐라고는…….”
리체는 홱 뒤돌았다. 고버트는 어리둥절해졌다.
“뭐야, 그냥 가려고?”
리체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버트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구매를 포기한 거라는 고버트의 예상과 달리 리체는 물약을 꼭 사갈 생각이었다.
문까지 걸어간 그녀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청결과 정돈을 기치로 두는 메디치나 치유관답게 흰색 회랑은 적막했다.
그 가운데, 소리를 죽인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회랑의 모퉁이에는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노인을 조각한 대리석 반신상이 있었다. 남자는 그 반신상을 돌아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칼같이 엄격하게 제단된 옷을 입고 있었다.
치유관의 성격을 드러내듯 이곳 직원들은 모두 단정한 차림이었지만 치유술사는 그 정도가 심해 마치 얼음으로 빚어 낸 것 같았다. 의복이 하얀색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언뜻 사제들의 수단과 비슷해 보이는 옷이었는데 아무런 장신구도 없어 수수했고 반듯하게 걸음을 뗄 때마다 밑단이 치마처럼 벌어졌다.
리체의 시선이 그가 어깨에 매단 금색 브로치에 닿았다. 메디치나 가문의 표식이었다.
남자는 메디치나 치유관의 치유술사였다. 신분을 파악한 리체는 거침없이 그에게 걸어갔다. 열린 문으로 리체를 바라보던 고버트는 ‘저게 뭐 하나’ 하는 표정에서 리체가 치유술사를 붙들었을 땐 경악으로 바뀌었다.
“실례합니다.”
정중한 인사에 치유술사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갔다. 평범한 인상이었다. 세상만사 관심 없어 보이는 무기력한 눈빛이었지만 리체는 우선 그가 그녀의 차림을 훑지 않음에 안도했다. 겉모습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치유관 문밖에서 들었던 바에 따르면 허드렛일을 하는 직원과 의학적 지식이 있을 뿐인 치료사에 비해 치료술의 이능이 있는 치유술사는 하급일지라도 그 격이 천지 차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게 미쳤나!”
대경한 고버트가 안에서 튀어나와 리체의 목깃을 붙들었다. 옷이 목젖을 턱, 압박했다. 리체가 캑캑거리자 고버트는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탄식했다. 이년이 미쳤나. 늦었으면 어쩔 뻔했어!
미친 건 당신이지! 리체는 완전히 화가 나서 손톱을 세웠다. 고버트의 솥뚜껑 같은 손등을 긁어내렸지만 고버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치유술사는 의구심 어린 눈으로 리체와 고버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치유술사 특유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제게 닿자 고버트는 땀을 뻘뻘 흘렸다. 눈앞의 치유술사는 치유관 1동의 책임자였다. 치료술의 능력 자체는 하급에 속하지만 가문의 힘을 등에 업어 신분은 높았다.
고버트가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의 무심한 성정 때문이었다. 비단 이 남자뿐만이 아니라 치유술사 모두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치유술사는 사람을 치료하는 일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기보다는 무생물처럼 무덤덤했다. 풍문으로는 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신이 내린 부동심이라 하는데, 그것이 범인에겐 신의 사자를 보는 듯한 경외감을 자아내게 했다.
고버트는 그들에게서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다. 무생물 같은 시선에 두려움을 느낄 뿐.
“무슨 일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신이 돌아 버린 여자가 행패를 부리고 있어서요. 술집 여자라 성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기 온 모양인데 약을 더 내달라고 난동을 부리지 않겠습니까.”
약을 얻으러 온 환자가 난동을 부리는 건 심심찮게 일어났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인간만큼 절박해지는 게 없으므로.
‘하, 성병?’
리체가 입을 열려 하자 고버트가 뒷덜미의 옷을 더 꽉 움켜쥐었다. 심지어는 두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꾹 눌러서 절로 벌어진 리체의 입에서 앓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저급한 원주민이.’
리체는 화가 벌컥 났다. 두뇌파인 그녀에게는 낯선 폭력이었다. 고버트는 이대로 그녀를 하등한 술집 여자로 몰아 쫓아낼 생각이 분명했다.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고 치유술사가 중재하는 게 지금으로써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만, 불행히도 이 치유술사는 정의감 넘치는 의인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조용히 일하길 바라는 직장인인 듯했다.
관심 없다는 눈으로 치유술사가 싸늘히 말했다.
“경비원을 부르세요. 소란 피우지 말고.”
시니컬한 눈빛의 치유술사는 곧장 멀어져갔다. 안심했는지 고버트의 손가락 힘이 약해졌다. 통증에서 벗어난 리체는 멀어지는 치유술사의 낭창한 뒷모습을 보며 분한 눈을 치떴다.
그에게서 미약한 알파 페로몬이 느껴졌다. 오메가 페로몬을 쓴다면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파는 본능적으로 오메가를 보호하고 싶어 하는 법이니. 그러나 리체는 여기서 페로몬을 분출하는 게 과연 좋은 수일까 싶어 잠깐 망설였다.
한편 하마터면 치유술사에게 치도곤을 당할 뻔한 고버트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기는 사람처럼 리체를 쥐 잡듯이 다그쳤다.
“이 미친년이 내가 이대로 놔줄 줄 알아? 감히 이 고버트를 물 먹이려고 해!”
고버트의 손에 끌려가는 리체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깜박였다. 이대로 끌려갔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기세등등한 꼴을 보니 입에 담지 못할 일을 저지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듯했다.
걷잡을 수 없는 위기감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페로몬을 이용하는 건 여전히 달갑지 않았지만 후환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페로몬 억제가 풀어졌다. 실타래가 풀리듯 가느다란 기운이 사방으로 뻗쳤다.
그 순간.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고버트가 다시 리체의 목덜미를 콱 쥐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거세고 우악스러웠다. 리체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새어 나오던 페로몬이 갈 길을 잃고 몸 안에서 흔들렸다. 속이 뒤집힐 듯 메스꺼워졌다. 걸쭉한 크림을 사방으로 치대는 것 같았다.
리체의 연구에 따르면 페로몬은 피부의 모공으로 배출되는 개념이었다.
이미 페로몬은 분출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쯤 누른 향수 스프레이 같은 상태였고, 심지어 상하로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토하기 직전처럼 리체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라, 라스카 도련님! 도련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천한 여자가 난동을 피우는 일이라.”
고버트의 우악스러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자 속이 더 울렁거렸다. 고버트는 지나치게 당황하고 있었다. 아까의 치유술사에겐 얼른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다는 기색이 강했다면, 지금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난감한 눈치다.
극렬한 수치심과 그에 정비례하여 솟아오르는 분노. 그리고 와중에도 피어오르는 학자로서의 호기심에 리체는 필사적으로 목에 힘을 주었다.
“아야…….”
가느다란 신음이 꾸역꾸역 입술을 밀고 나갔다. 당황했는지 우락부락한 그의 손힘이 거세졌다. 하지만 리체는 굴하지 않고 간신히 트인 목에 소리를 밀어 뱉었다.
“아으, 사, 살려…….”
“이게 또 수작을……!”
고버트가 목덜미를 짤짤 흔들었다. 리체는 몸에 힘을 빼고 늘어졌다. ‘어어’ 하며 고버트는 그녀의 몸을 받쳤다. 당장 이 앙큼한 년을 내다 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도련님의 시선이 신경 쓰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도, 도련님. 이 여자가 정신이 이상해서…….”
“글쎄.”
“예?”
“내 눈에는 힘없는 여인을 억압하는 철면피밖에 보이지 않는데.”
숨이 막혀 눈앞이 노래졌던 리체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무심한 목소리를 가까스로 인식했다. 목을 그러쥐던 손이 떠나는 게 느껴졌다. 숨통이 트였다. 리체는 황급히 호흡하며 부족한 숨을 채웠다. 입을 크게 벌리자 부족했던 공기가 대량으로 흡입되었다. 콜록, 콜록. 사레가 들린 리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사정을 얘기해.”
“미, 미친 여자가 갑자기 아픈 척을…….”
“사정을, 얘기하라 했다.”
목을 쥐고 숨을 캑캑 쉬던 리체는 고개를 들었다. 생리적인 눈물이 가득 차 흐릿해진 시야로 희뿌연 실루엣이 들어왔다.
남자는 아까 사라졌던 치유술사와 비슷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차가우나 온화했고, 또한 단호했다. 겁화가 지나간 잿빛 세상처럼 회색 머리칼에 빛을 반사시키는 검은 눈동자는 미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검은색. 이 차원에서는 그다지 흔한 색이 아니었으므로, 이상한 동질감이 들었다.
잠깐 멍해졌던 리체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넋을 잃었던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독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당장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유야무야 보낸 시간이 1년이 넘었다. 모르는 사이 초조함과 불안감이 몸집을 불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도련님.”
라스카가 눈썹을 꿈틀했다.
“도련님?”
“노복이 시, 실언했습니다. 치유술사님.”
고버트는 이미 리체에게서 손을 떼고 양손을 포개 고개를 숙였다. 공손한 자세에도 라스카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말없이 쳐다보고 있는 것뿐인데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버트의 낯빛은 창백해져 갔다.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별건 아닙니다만, 정말로, 그게.”
“…….”
“그러니까 그것이…….”
리체는 손으로 목을 감싸고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라스카의 눈빛이 좀 더 흉흉해졌다. 리체를 곁눈질한 고버트는 ‘당했다’고 탄식했다. 곧 눈을 질끈 감고 술술 얘기했다.
물론 솔직하게 얘기한 건 아니었다. 리체는 그가 본질을 호도할 때마다 그의 거짓말을 짚었고, 고버트는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라스카가 솔직하게 말하기를 종용했으므로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을 실토한 고버트는 한층 냉랭해진 라스카를 보고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재빨리 무릎을 꿇고 절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죄송합니다. 치유술사님. 메디치나 치유관의 규칙을 어긴 점 깊이 반성하겠습니다. 부디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나뿐인가?”
“예, 예?”
“사과할 게 나뿐이냐 물었다.”
중저음의 울림 있는 목소리, 듣기 좋은 톤이지만 감정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무미건조했다. 고버트는 진저리를 쳤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치유술사님. 메디치나 치유관에 걸맞지 않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그게 아닐 텐데.”
“네?”
고버트는 고개를 들어 라스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쳐다봐도 라스카의 냉랭함이 가시는 일은 없었다. 고버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뻣뻣한 목이 구부러지고, 고버트는 두 손을 땅에 짚고 고개를 바닥에 닿을 듯 숙였다. 리체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침묵이 이어졌다.
‘술집 창부라 생각할 테니, 자존심이 어지간히 상했나 보지.’
리체는 쯧쯧 혀를 찼다. 마찬가지로 쯧, 혀를 찬 라스카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과 다르게 꽤 온화했다. 친절한 인상이나 지나치게 기계적이었던 아까의 치유술사와 비교되어서일지, 푹신한 낙엽처럼 부드럽게 다가왔다. 눅눅하고 서늘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존재에겐 따뜻하고 아늑한 그런 낙엽 말이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 냄새에 리체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아…….’
그의 걸음이 이곳으로 이끌린 것은 그녀가 운이 좋아서도, 예기치 못한 우연도 아니었다. 라스카 메디치나는 알파였다. 농밀한 향을 보아 우성 알파인 듯했다.
라스카는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 리체가 의아함을 표현할 틈도 없이 그는 고버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죄는 말뿐이었나 보지.”
고버트의 얼굴빛이 푸르게 변했다가 붉게 변했다가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냉기가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라스카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의 기세였다. 베타인 고버트는 페로몬을 감각하지 못했지만 한층 냉랭해진 분위기까지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고버트는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리체를 쳐다보기는 싫은 듯 시선은 그녀의 발치를 서성였다.
“미, 안합니다.”
“뭘요?”
리체의 목소리는 차디찼다. 이렇게 될 걸 예상하진 못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수치심에 부르르 떠는 고버트가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찔러 댄 목덜미가 아직도 찌르르했다. 고버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슬쩍 틀어 라스카의 눈치를 살폈다. 절망이 한숨이 되었다.
“거짓말, 한 거, 속인 거, 미안합니다. 제가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리고요?”
고버트의 턱이 강하게 불거졌다.
“또……요?”
“더 있잖아요. 기분 나빴는데, 나.”
울퉁불퉁한 낯에 체념이 어렸다.
“술집 여자라고 무시했던 것도, 사죄하겠습니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에 리체는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메디치나 치유관의 하인 고버트의 사과를 받았습니다.
메디치나 치유관의 사과를 얻습니다.]
“이 일에 대한 죄과는 추후 통보하겠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고버트는 억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쳐들었지만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한 라스카의 표정에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고버트가 사라진 자리에, 라스카와 리체만 남았다. 이쪽을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직도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리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안합니다.”
그러곤 고개 숙인 남자를 보았다.
“부끄럽게도, 가문의 식솔이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단 걸 몰랐군요. 메디치나 치유관의 대표로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청구하십시오. 치료 물약은 무상으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담백한 사과의 말과 새카만 머리꼭지에 리체는 왠지 모를 감동을 느꼈다. 사실은 이게 당연한 건데 말이다. 잘못하면 사과하는 게 당연한 건데. 이 세계에서 그 당연한 일을 누리지 못했던 탓인지, 라스카의 진솔한 사과는 리체에게 감명을 주었다.
“괜찮아요.”
눌린 목에서 탁한 목소리가 나왔다. 큼, 목을 가다듬은 리체는 아릿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치료 물약을 얻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물론 라스카가 내민 건 메디치나 치유관의 입장에서는 별것 아닌 보상일 것이었다. 그러나 리체는 상관없었다. 이 일을 빌미로 이득을 취할 생각은 없었다.
라스카는 그렇지 않다는 듯 차분한 시선을 보냈다.
“치료 물약이 아니라면 다른 도움은 어떠신가요.”
“별달리 필요한 건 없어요.”
“정말입니까?”
“네. 치료 물약으로 충분해요.”
“하지만 후천적 오메가로서 불편한 점이 있으실 텐데요.”
“……!”
리체의 눈이 커졌다. 해머로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후천적 오메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 혹시 비밀이었습니까?”
라스카는 굳은 리체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회색 머리카락이 부스스 흘러내렸다. 그는 리체를 흘끗 보더니 난감한 투로 말했다.
“페로몬을 맡고 알았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다른 곳에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페로몬을 맡아 알았다니.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알파오메가도 그녀를 후천적 발현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리체는 라스카가 더 수상해 보였다.
‘설마 이걸 가지고 날 협박하려는 건가.’
충분히 그럴 듯했다. 리체는 이곳에서 후천적 발현자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경험 많은 엘자도 풍문으로만 들었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런 일도 있다더라, 급으로 희소한 것이 바로 후천적 발현자다.
입장을 바꿔서 자신이 라스카였다면? 희귀 연구 케이스가 나타났을 때 가만히 있었을까? 이 남자가 그녀와 동류인 것 같지는 않지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괜히 긴장이 되는 리체였다.
그녀가 여전히 말이 없자 라스카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리체는 한쪽 눈을 치켜올렸다. 온유하면서도 아름답게 생긴 라스카의 이목구비가 약간의 미소에 온전히 드러났다. 무표정일 때는 가려졌던 온화함이 그의 검은색 눈동자에서 슬그머니 새어 나오고 있었다.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러니까.”
말을 더듬은 라스카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었다.
“가문의 식솔이 무례를 저질렀으니 마땅히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제가 후천적 오메가라는 걸 어떻게 알았죠?”
리체는 그를 경계하며 질문을 던졌다.
“말씀 드렸잖습니까. 페로몬 때문에 알았다고요.”
라스카는 자신의 콧방울을 툭툭 두드렸다. 리체는 코를 킁킁거렸다. 살짝 흘러나왔던 그녀의 페로몬이 공기 중에 미약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복숭아 향을 연상하게 하는, 이 페로몬의 단향. 몇 번 경험했었죠. 후천적 오메가는 오메가 중에서도 드문 케이스지만 저는 운이 좋게도 몇 번 겪어 보았습니다. 그때는 이 정도로…….”
잠시 가늠하듯 눈살을 찌푸린 라스카는 숨을 멈추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곤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이렇게 강렬하게 알파를 유혹하는 페로몬이 아니었습니다만.”
“…….”
리체는 자신을 살피는 그를 찬찬히 관찰했다. 마주 응시하는 시선이 탐색의 빛을 띠었다. 문득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고 있음을 깨달은 두 사람은 동시에 흠칫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리체는 라스카에게서 동류의 향기를 맡았다. 그는 치유술사의 신분이다. 본 차원에서도 그랬지만 의사나 치료사는 인간의 신체에 통달한 자들. 이 차원에서의 치유술사는 그런 치들보다도 한 단계 위의 의미인 듯했다.
리체는 신체, 정신, 환경 등 원주민의 전반적인 생태 환경을 연구하는 만큼 라스카가 이 차원의 원주민으로서 쌓아 온 지식이 상당히 탐스러웠다.
그는 뭘 알고 있을까?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리체의 눈에 계산적인 탐욕이 떠올랐다. 그녀는 떠보듯 물었다.
“이 특성에 대해 잘 아시나 보군요?”
라스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본래 형질을 갖고 있지 않으나 후천적으로 형질이 발현하여 알파오메가가 된 자들을 후천적 발현자라고 합니다. 페로몬의 향이 독특한 게 특징이죠. 중요한 건 후천적 오메가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문제?”
“옵세진이 잘 들지 않지 않습니까?”
“옵세진?”
“히트 사이클 억제제 말입니다.”
그녀가 옵세진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라스카는 친절히 설명했지만 리체는 의문에 빠질 따름이었다.
“제 환자는 옵세진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정기 때마다 굉장히 힘들었죠. 약이 들지 않으니 발정기의 신열이 가라앉질 않았고 정염이 오른 몸은…….”
멈칫한 라스카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지만 리체는 뒷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알파와의 섹스를 통해서만 발정기를 잘 보낼 수 있었겠지.’
종업원들과 기타 오메가들에게 듣기로 히트 사이클 때 피어오르는 정염은 다른 때의 성욕과 궤를 달리한다고 했다. 알파오메가를 본능의 짐승이라고 폄하하는 이유가 바로 발정기라 불릴 만큼, 히트 사이클과 러트는 알파오메가란 종족에 있어 가장 큰 특이점이라고 할만 했다.
이성이 마비되고, 지나가는 아무 알파에게나 다리를 벌려 수치도 모른 채 박아 달라 애원하는 일은, 아무리 개방적인 오메가라고 할지라도 뻔뻔히 굴기 어려웠다. 하물며 사교계에서는 교양 있는 숙녀를 가장하는 귀족 영애는 어떠할까.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옵세진은 오메가의 필수품이었다.
그런 옵세진이 효과가 없다는 건 라스카가 말한 대로 꽤 치명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정작 리체는 와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 번도 발정기로 인한 문제를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옵세진의 효과를 체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 그녀는 발정기가 온 적이 없었다.
페로몬을 뿜지 못하는 수준의 열등한 오메가가 된 후 벌써 1년이 넘었으니, 리체는 자신에게는 발정기가 오지 않나 보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카이로와의 잠자리 이후 오메가 페로몬을 분출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환자에게 제 치료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괴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죠.”
“…….”
“그래도 지금은 나름의 성과가 있어 옵세진을 대신한 약을 시험해 보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걸 드리죠.”
옵세진은 선천적인 형질 발현자에 맞게 개발된 약일 것이다. 그렇다면 후천적 오메가와 선천적 오메가의 차이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호르몬? 호르몬이라면 본질적으로는 유전자일까?
그녀는 베타에서 오메가가 되었다. 알파 페로몬이 영향을 미쳤다면, 페로몬은 유전 형질까지 바꿀 수 있는 건가.
‘무서운 일이다.’
일반적인 오메가에 비해 농도가 짙지 않음에도 레이몬드를 비롯한 뭇 알파들이 견딜 수 없어 하는 것도 그 차이점 때문일까. 후천적 오메가인데다 열성이었지만 리체는 자신의 페로몬이 꽤 강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다른 오메가와 직접 비교를 할 수 없었기에 간접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리체는 자신을 바라보는 라스카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의 검은색 눈은 순수한 선의로 가득했다. 그가 그녀의 페로몬을 접했음에도 성욕 한 점 없이 평온한 상태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손님?”
의아한 부름에 리체는 나긋하게 대꾸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아, 이런.”
회랑 저편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라스카는 난감한 시선으로 리체를 바라보았다. 고버트랑 한참 실랑이를 한 탓에 옷이 구겨지고 머리가 흐트러져 차림새가 단정치 못했다.
“그 모습으로 여기서 기다리는 건 어렵겠습니다.”
“괜찮다면 따라가도 될까요?”
“제 연구실로 말입니까?”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한 라스카는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복도 바깥쪽을 가리켰다.
“제 뒤를 따라오십시오.”
리체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걸어가는 라스카의 뒤를 따랐다. 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라스카는 걸음도 차분했다.
정말로 자신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한 그를 보자 리체는 강렬한 호기심에 휩싸였다. 단순히 알파로서 자제심이 강한 건지, 오메가 페로몬에 대한 저항성이 높은 건지 궁금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다시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눈앞에 커다란 창이 떴다.
[퀘스트 발생.
라스카 메디치나는 알파이자 치유술사로 알파오메가 연구학의 대가.
그는 후천적 오메가인 당신을 연구하고 싶어 합니다.
그에게 협조하여 형질 연구를 완성하세요.
성공 시 보상: 연구 데이터.
실패 시 페널티: 없음.]
페널티는 없었지만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체에게는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의욕이 샘솟는 것과 별개로 리체는 주춤했다. 라스카는 이곳에 대한 그녀의 연구적 성과를 상당 부분 끌어올릴 것이다.
‘이곳 차원 원주민에 대한 연구가 끝나면…….’
리체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까지 구조되지 못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어떤 건물 안에 들어와 있었다. 라스카는 살짝 고개를 까딱거리고 문을 열었다. 리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비효율적인 상념을 지워 냈다.
앞으로가 막막하다고 당장 할 일을 하지 않는 건 패배자 같은 생각이었다. 오히려 그런 이유로 연구를 주저한다면 자괴감이 들 테다. 리체는 눈앞의 라스카, 이 차원의 인류학자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그가 가진 오메가 페로몬 저항력에 대한 실체를 알고 싶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협탁을 열어 작은 약병을 꺼내던 라스카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밖에서 기다리시라고…….”
리체는 조용히 몸속의 수도꼭지를 열었다. 페로몬이 자욱한 안개처럼 깔리자 라스카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오메가가 알파에게 페로몬을 보낸다. 의미는 하나뿐이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리체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선의가 옅어지고 경계심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뿐이었다. 끓는 기름처럼 뜨거워지는 욕망이나 불그스름한 색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페로몬 저항성이 있는 게 분명해.’
리체는 깔끔히 페로몬을 거두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던 것뿐이니까. 실례했네요.”
“하아, 다시는 이런 짓하지 마십시오. 불쾌합니다.”
리체는 부러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연약해 보이는 얼굴에 라스카도 표정을 풀었다. 리체가 나쁜 의도로 행동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리체는 그의 순진함이 반가웠다.
“발현한 지 오래되지 않은 겁니까? 페로몬 조절이 미숙하다면 이런 일에 능력이 있는 치료사를 소개해 드리죠.”
그런 건 필요 없다는 듯 리체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러곤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치유술사님.”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이쪽을 살피는 그를 보며 리체는 미묘하게 웃었다.
“제가 탐나지 않으세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한번, 으로 시작하는 수작 같은 말투였다. 길거리 시정잡배처럼 행동할 생각은 없었는데. 리체는 자신이 성급했음을 인정했다. 과연 오히려 흥미가 식은 듯 라스카의 눈이 싸늘해졌다.
“오메가라고, 내가 당신을 탐하고 싶어 할 거란 말입니까. 벌써부터 알파를 유혹하려고 하다니. 유혹에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건 길거리 시정잡배가 아니라 사창가 창녀를 보는 듯이 신랄했다. 너무 성급하잖아. 리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
“성적인 육체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후천적 오메가의 육체를 연구하고 싶잖아요.”
라스카의 눈썹이 움찔했다.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리체는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를 리가. 처음 봤을 때부터 동질감을 느꼈다. 익숙한 검은색 눈을 보며 맡았던 동류의 냄새. 리체는 활짝 웃었다. 본 차원에서 매우 좋은 사례를 발견했을 때 으레 짓곤 했던 흥분한 표정이었다.
“나를 연구할 수 있게 해 드리죠.”
“지금 당신 몸을 제공하겠단 말입니까?”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카가 미심쩍게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것은요?”
“저는 당신의 인간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필요해요. 나는 나를 제공할 테니, 당신도 당신의 것을 내놓아요.”
리체는 검지로 제 머리를 툭툭 쳤다.
“서로에게 좋은 제안이지 않나요?”
라스카는 희한한 제안을 들은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그녀를 응시했다.
“싫은가요?”
“……아뇨. 나쁘지 않군요. 안 그래도 제가 청하고 싶은 것이었어요.”
라스카가 손바닥에 약병을 올렸다.
“이 약은 아직 시험용이라 발정기가 올 때 임시방편밖에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협조가 있다면 약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약을 빨리 완성하면 할수록 형질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적어지겠죠.”
박애주의자일까? 저와 상관없는 환자들까지 챙길 정도로 침착하다니. 폐쇄된 연구실에 떠도는 자신의 페로몬이 느껴지자 리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오메가 페로몬에 수월히 저항하고 있네요. 오메가 페로몬이 당신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는 건가요? 페로몬 저항력이 실제로 존재하는 건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침묵하던 라스카가 입을 열었다.
“딱히 페로몬 저항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문득, 그의 목소리가 불편해졌다. 리체는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점차 가빠지는 호흡에, 라스카는 곤욕스러운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색 머리카락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뿐이죠.”
“…….”
“사실…….”
라스카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큰 손에 하관이 가려졌다. 하나 차마 가릴 수 없는 눈가는 그대로 리체의 시야에 노출되었다. 리체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 내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게 아니라…….’
불그스름한 얼굴로 라스카가 리체를 노려보았다.
“물러나십시오. 그렇게 유혹하는 페로몬을 드러내다니. 어리석습니다. 나는 당신과 그러고 싶은 생각이…….”
리체는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뜻밖의 미소에 라스카가 멈칫했다.
“……없습니다.”
“제안할 게 있어요. 라스카 메디치나.”
물러서기는커녕 리체는 오히려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입술이 그림 같은 호선을 그렸다. 붉은 입술의 움직임은 매우 관능적이었고, 라스카의 시선을 자석처럼 휘어잡았다.
“들어 보겠어요?”
나긋한 목소리를 타고 복숭아 향 페로몬이 넘실거렸다.
잠시 후.
“저는, 이런 건, 이런 건 싫습니다!”
이 방에 들어섰을 때와 똑같이 단정한 유니폼 차림으로 리체는 차분히 대꾸했다.
“저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리체는 뒷말을 애매하게 끌었다. 연구실 의자에 앉아 길게 솟은 성기를 꺼떡이는 라스카는 수치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리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렇게 큰 걸 가지고 계실 줄은.”
“저기!”
“리체. 리체예요, 내 이름.”
“리체 양. 이런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서요.”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려 하는 그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랬었죠. 하지만 치유술사님을 보니.”
리체는 알파 하나를 작정하고 유혹하는 오메가답지 않게 말갛고 순수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보다는 재밌어질 것 같네요.”
두 팔이 의자 뒤에 묶인 채 다리를 벌리고 있는 라스카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제가 이러고 있는 게 당신의 연구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모르시겠어요?”
리체는 맞은편에 있는 협탁 위에 가볍게 엉덩이를 걸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전히 고통받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제 식솔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리체에게 보상하고 싶은 마음에, 또한 후천적 오메가를 이런 데서 만났다는 게 놀라워서, 복합적인 이유로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라스카는 순진한 리체의 얼굴에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속은 게 아닌가 싶었던 마음이 그녀를 보자 멈추지 않는 바람 앞의 횃불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아시다시피 나는 후천적 오메가예요. 선천적 오메가보다 페로몬이 익숙하지 않죠. 페로몬을 잘못 다루다 보면 내가 의도하지 않는 ‘사고’가 생긴다는 것, 치유술사님도 잘 알 텐데요.”
리체가 슬픈 듯 눈을 내리깔았다. 물론 속마음은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과학자처럼 냉철하기 짝이 없었다.
“미숙한 오메가의 강간 미수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저도 이미 알고 있어요. 치유술사님도 그게 걱정되셔서 페로몬 조절 훈련을 해야 되겠다고 말씀하신 거잖아요?”
나긋나긋 말하는 리체에게서 페로몬이 꽃씨 흘러가듯 넘실거렸다. 움찔 몸을 떤 라스카의 매끈한 귀두가 천장을 향해 꺼떡거렸다. 제 반응에 얼굴을 붉힌 라스카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제 조언은, 당신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이미 그에게선 처음 봤을 때의 싸늘한 서리 같던 인상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리체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몸에서 흘러나가는 페로몬의 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녀가 라스카에게 한 제안은 스스로 연구자임을 밝히고 서로에게 자문을 얻는 것이었다. 메디치나 가문의 직계인 라스카와 다르게 리체는 그저 그런 평민 여성, 그것도 세간에서는 술집이라고만 인식하는 클럽의 종업원이었으므로 라스카는 의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런 내색을 일절 내보이지 않았다.
신분만 높은 도련님이 아니라 그런 솔직한 반응이 무례일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교양 있는 남자, 라고 리체는 그를 분석했다.
물론 라스카는 리체가 스스로 밝힌 연구원이라는 직업을 믿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기에는 서로를 결속하는 신뢰도가 높지 않은 탓이다. 대신 그는 후천적 오메가라는 희귀한 상황을 맞이한 그녀가 뒤늦게 알파오메가의 형질을 공부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리체에겐 다행히도 그건 그의 흥미와도 부합하는 주제였다. 열성 알파와 열성 오메가는 우성 형질에 비해 페로몬 조절이 미숙하고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말로가 좋지 않았다.
라스카는 리체에게 도리어 협조를 구했다. 그녀를 연구함으로써 열성 형질들이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게끔 하고 싶다고 말이다.
불감청 고소원이라고, 리체는 냉큼 수락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축적해 온 지식을 풀었다.
라스카의 이야기는 임상 연구로만은 풀리지 않았던 리체의 많은 질문에 답을 주었다. 그리고 라스카는, 리체가 기록한 세세한 연구자들의 데이터와, 다른 차원에서 온 그녀가 제시한 관점을 흥미로워했다. 전통적인 알파 귀족인 그에게는 새로운 시각이었다.
물론, 짐승처럼 열등한 부분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는 당황했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그들은 마침내 페로몬을 보다 면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라스카가 필요한 건 열성 오메가인 그녀의 페로몬. 리체가 필요한 건 우선 페로몬의 조절이었다.
시스템 덕에 페로몬의 수치가 보이는 리체는 어느 정도의 페로몬 농도가 알파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고자 했다.
이건 이론보다 실전이 중요했으므로 리체가 선택한 건 임상 실험이었다. 다행히 대상은 멀리서 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리체는 라스카에 대해서 상당 부분 파악해냈다. 그는 심성이 온유하고 남을 위하는 희생정신이 강하며,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굉장히 조심스러워했다. 고버트를 대할 때 보았듯이 정의로운 일에는 냉철해질 수 있는 사람, 그러나 까탈스럽고 기계적인 연구원들을 많이 접해 보았던 리체가 보기에는 솜 인형보다도 물렁했다.
알파는 자존심이 세고 오메가를 제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라스카는 별종이었다. 여러모로 임상 실험의 대상으로 아주 적합했다.
“아직 부족해요. 가끔 조절 능력이 오류를 일으켜서 말이에요. 페로몬을 어떻게 조절하면 알파를, 적당하게 흥분시킬 수 있는지.”
리체는 발을 까딱거렸다.
“많이도 아니고, 살짝.”
아담한 발끝이 허공을 쓸어내렸다. 꼭 닿지도 않은 성기가 그녀의 발에 매만져진 듯해 라스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새하얀 발이 성기에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또는 어느 정도의 강한 페로몬을 접하면 알파가 이성을 잃는지.”
“…….”
“그런 것들이 궁금해요.”
나긋한 리체의 목소리는 복숭아 향 페로몬에 섞여 꿈결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리스카의 호흡이 가빠졌다.
리체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라스카와 얘기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굉장히 큰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페로몬을 수도꼭지 열고 닫듯 했지만 그건 완전히 닫든지 열든지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중간은 없었다.
레이몬드와 카이로 스트리고 형제를 겪으면서, 또한 이델리 그레이스의 경계를 받게 되면서 페로몬의 보다 세밀한 조절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 참이다.
그녀의 페로몬은 열성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분출하게 되면 상대 알파를 강하게 유혹하는 듯했다. 열성 오메가는 우성 오메가보다 페로몬의 질이 떨어지는 게 정설이었다. 이델리 그레이스가 이 페로몬에 의문을 갖게 되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것이다.
그녀는 우리 밖에서 실험 대상자들을 관찰하는 걸 선호했지, 실험대 위에 올라가 해부되고 싶지는 않았다. 퀘스트로 인해 뭇 알파들과 관계를 맺는 것 정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고통을 감수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곳 차원의 인체 연구는 상당히 야만적이라 특이 케이스가 나타나면 내장까지 파헤친다고 하니, 강력한 뒷배를 갖지 못한 그녀로서는 스스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페로몬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게 된다면 이델리 그레이스의 방심을 유도할 수 있을 터였다.
리체는 협탁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라스카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품 넓은 치료복을 발끝으로 치우고, 바로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라스카는 추행당한 천사처럼 한껏 흐트러져 있었다. 단추가 다 풀린 셔츠가 양옆으로 훤히 벌어져 가슴팍이 그대로 드러났다. 단정하고 깨끗한 흰 피부와 그에 걸맞지 않은 근육이 가로로, 세로로 아로새겨졌다. 군살 없어 보이는 탄탄한 몸이었다. 가슴 양쪽에는 흔적만 남은 분홍색 유두가 달라붙었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젖꼭지를 쿡 찔렀다.
“흐윽!”
라스카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색 엷은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뿜어졌다. 불그스름한 피부색…….
뒤이어 그녀는 킁, 냄새를 맡았다. 이 방을 지배하고 있는 건 달달한 복숭아 향이었다. 그 사이에, 코끝을 싸하게 만드는 허브 향기가 느껴졌다. 박하사탕보다 진하고 씁쓰레했다.
라스카의 알파 페로몬이 공중을 부유하고 있었다. 흥분한 그의 얼굴에 비하면 꽤 미약한 양이라 리체는 감탄했다. 라스카의 절제력은 실로 놀라웠다. 보통 성에 문란한 알파들은 페로몬을 억제하는 데 무능한 편이다. 물론 우성 알파는 제어력이 뛰어나다지만 라스카는 그중에서도 탁월했다.
“지금 이 방을 영역으로 둔 페로몬 농도는 70퍼센트예요.”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 런 식으로 페로몬을 수치화할 수 있다니…….”
입술을 사리문 라스카가 억누른 목소리로 의문을 표했다. 그는 오메가 페로몬이 제 몸을 잠식하는 상황에서도 제 목적을 잃지 않을 만큼 이성적이었고, 침착했다.
리체는 미소 지었다. 멋모르고 캔 땅에서 금광을 발견한 사람처럼 마음이 흡족했다.
‘좋은 연구 파트너가 될 수 있겠어.’
협조적인 알파 파트너로 인해 알아낼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라스카가 마음에 들었다. 리체는 상냥하게 대꾸해 주었다.
“연구 기밀이랍니다. 아카이브를 쌓은 학자라면 누구나 있는 그런 거요.”
“그저 변명하는 것 같습니다만.”
게다가 눈치도 꽤 빠르다.
“어쨌든 지금 기분은 어때요?”
라스카의 눈빛이 당황한 것처럼 흔들렸다. 리체는 그가 대답하기 쑥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이번만큼은 웃지 않고 정색했다.
“이건 연구예요, 라스카 메디치나 치유술사님. 알파오메가 페로몬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열성 형질과 페로몬 조절 장애 환자들을 잘 치료할 수 있지 않겠어요?”
“…….”
“그런 연구라고 생각하세요.”
듣기엔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팽팽하게 곧추선 자지를 사이에 둔다면 말이 달라진다. 똑똑하지만 평범하고 따뜻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라스카는 거침없는 그녀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는, 크윽!”
리체가 발을 들어 솟구쳐 있는 라스카의 성기를 툭 쳤다.
그의 것은 카이로와 레이몬드의 것과 달리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휘어진 부분 없이 곧은 모양에 뭉툭한 귀두가 유난히 두툼했다. 흥분한 성기는 채도가 짙어져 진분홍색이 되었다.
“아주, 순결해 보이네요.”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라스카가 대답을 잘하면 생각해 볼게요. 그래서, 기분은요?”
“……참기, 흣, 힘듭니다.”
리체가 한 번 더 성기를 치자 라스카는 잔뜩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솔직한 대꾸가 부끄러운 듯 다시 입을 다물었다. 리체는 못마땅해졌다. 라스카는 심성도 지식도 지혜도 다 갖춘 훌륭한 연구 파트너인데 지나치게 마음이 여리고 보수적인 게 문제였다. 이 역시 알파오메가답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파트너가 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런 때는 조금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스스로와 나를 연구 대상으로 여기면 좋을 텐데 말이지.’
혀를 찬 리체는 고심하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푸르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총명하면서도 매혹적이라, 라스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성기가 무서운 기세로 부풀어 올랐다.
리체는 라스카의 음란한 모습을 보자 움찔했다. 기묘해지는 마음이 잔상을 피워 냈다. 왠지 옴짝달싹 못하고 끙끙대는 그가 그날, 이델리의 아래 깔려 바르작대던 미하일처럼 보였다.
미하일을 괴롭히던 이델리는 이런 마음이었을까?
성적인 행위에 한해서 이델리는 비할 바 없이 리체보다 능숙하겠지만, 어쩐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바닥을 긁는 것처럼 허스키하고, 그래서 더 귓구멍에 찰싹 달라붙는 듯한 음성으로 조곤조곤 속삭였다.
“궁금해요.”
“흐읏…….”
“치유술사님이 완전히 흥분하게 되면 어떤 모습일지. 지금은, 굉장히 잘 참고 계시는군요.”
리체는 슬쩍 손을 뻗어 분홍색 유두를 손톱으로 긁었다. 라스카는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움츠렸다. 보통 남자들은 젖꼭지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는 반응하지 않지만, 지금의 라스카는 오메가 페로몬에 흠뻑 젖은 살갗을 애무당하여 예민해진 상태였다. 온몸이 성감대가 된 듯했다. 그가 민감하게 굴자 리체는 저도 모르게 붉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라스카는 아니라고 했지만, 페로몬 저항력이 상당해요. 이걸 보면…….”
일자로 뻗은 손가락이 젖꼭지를 누르고 돌리고, 아래에서 위로 훑어 올렸다. 라스카는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그 반응을 주시하며 리체가 중얼거렸다.
“절제력이 부족한 열성 알파는 이미 제게 달려들었을 텐데.”
“그, 그럴 거예요. 당, 흣, 신의 페로몬은, 음, 지나치게, 매혹, 으응!”
리체는 아예 두 손을 다 뻗어 라스카의 양 젖꼭지를 만지작거렸다. 엄지로 안쪽에서부터 바깥쪽으로 부드럽게 굴려 딱딱한 젖꼭지를 말랑말랑하게 풀어 주고, 손톱을 세워 지그시 찍었다. 살짝 빨개진 젖꼭지를 위로하듯 엄지로 다시 다정하게 대해 주자 조그맣던 젖꼭지가 진분홍빛이 되어 발기했다.
리체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거, 먹음직스러워요.”
머리를 숙여 병아리콩처럼 툭 튀어나온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가슴에 입술을 대는 그녀를 보며 라스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잠깐! 하, 아!”
리체는 혀를 내밀어 뾰족한 끝으로 젖꼭지를 쿡 찔렀다. 옆으로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혀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젖꼭지가 점점 더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여자 가슴은 주무르면 커진다는데, 남자 젖꼭지도 그럴까요?”
리체가 신기하다는 듯 묻자 라스카는 부끄러워서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또 한 번 혀로 젖꼭지를 할짝인 리체가 몸을 떠는 그를 눈만 굴려 올려다보았다. 천진한 웃음이 배시시 걸렸다.
“그럼 이것도 연구 주제로 넣어 볼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 모습이 참 깜찍하면서도 요염하여 라스카는 침음을 삼켰다. 허리를 숙이느라 그의 허벅지를 짚고 있던 리체는 손목에 닿는 축축한 느낌에 시선을 내렸다. 진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성기가 꺼떡거리며 손목을 치고 있었다.
리체가 제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라스카가 허벅지를 들썩였다.
“그만, 그만 보십시오.”
리체는 그를 힐끗했다. 얼굴이 빨갛다.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얼굴.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술을 할짝이고 투명한 체액이 방울진 귀두를 살짝 튕겼다. 라스카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다리를 떨었다. 꼿꼿이 곤두선 성기가 바르르 경련했다. 한층 진해진 분홍색의 두툼한 귀두에서 물방울이 빠른 속도로 방울졌다.
이미 귀두는 체액으로 번들거렸다. 리체는 자비 없이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겼다. 툭, 튀어 나간 쿠퍼액이 몸통을 따라 길게 흘러내렸다. 달팽이가 지나간 것처럼 자국이 남은 성기의 몸통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자 라스카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왜요?”
리체의 질문에 그는 입을 벙긋거릴 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리체는 고개를 갸웃하며 검지로 귀두를 둥글게 훑었다. 라스카의 눈빛이 흔들렸다. 괴로운 목소리로 고백했다.
“……쌀 것 같습니다. 그만하세요, 그러니.”
자괴감이 눈빛에 선연했다. 리체는 눈을 깜박이더니 풋 웃었다.
“흥분하면 사정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이, 이런 행위에서 사정이라뇨.”
환자를 위한 연구 행위에서 쾌감을 느끼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치유술사로서의 고지식한 자존심이었다.
리체는 혀를 찼다.
“좆은 이렇게 꼿꼿이 세워 두고 자존심을 부리다니, 치유술사님도 어지간히 보수적이시네요.”
“조, 좆…….”
일부러 선택한 단어에 예상대로 라스카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리체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페로몬을 70퍼센트 정도 사용하면 알파들은 흥분을 억누르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서는 10퍼센트를 유지하는 게 좋을 터였다. 그 정도가 이델리 그레이스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안심시키는 수치로 예상되었다. 라스카처럼 예외적인 상황을 포함하여 5-10퍼센트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
데이터가 정교하지 못하니 오차 범위가 생각보다 크다. 리체는 라스카를 흘끗했다. 이 연구는 이 정도로 됐다. 다른 데이터가 필요했다.
약간의 호기심이 동반된 목적에 리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파 페로몬에 대한 제 몸의 저항력도 궁금해지네요.”
짐짓 진지하게 말한 리체가 다리를 벌리고 라스카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앉아도 될까요?”
입을 헉, 하고 벌린 라스카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건 앉기 전에 물어봐야, 아!”
“흐응.”
질펀한 엉덩이 아래로 성기가 짓눌렸다. 라스카가 신음을 힘들게 참았다. 고개를 갸웃한 리체는 두 손을 라스카의 어깨 위에 올리고 눈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다리를 크게 벌린 탓에 유니폼 치마가 엉덩이까지 말려 올라갔다. 검은 속옷이 드러나자 저도 모르게 그쪽을 힐끗한 라스카는 눈을 질끈 감고 천장으로 고개를 젖혔다. 리체는 쿡쿡 웃었다. 정말로 알파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리체는 가볍게 허리를 흔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델리의 모습을 흉내 내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자 꺼떡거리는 성기가 리체의 속옷과 배에 부딪쳤다. 투명한 쿠퍼액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왔다. 라스카가 나직하게 신음했다.
“흐윽…….”
리체는 코를 킁킁거렸다. 허브티의 냄새. 조금 짙어지기는 했으나 레이몬드와 카이로의 흥분에 못 이긴 페로몬 폭격을 겪어 봤던 리체로서는 그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리체는 상냥하게 충고했다.
“페로몬을 너무 억누르지 마세요.”
“아으, 하, 읏, 제발…….”
“몸에 안 좋아요.”
툭툭, 불끈거리는 성기가 리체의 배 부분 셔츠에 비벼졌다. 셔츠 자락이 쿠퍼액에 젖어 들어갔다. 라스카는 이성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치켜올라 간 눈썹은 꽤 지적이었으나 헐벗은 몸이나 몽둥이를 흔들듯 상하로 꺼떡이는 분홍색 성기는 난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건, 흣, 굉장히 위험한 행위입니다. 이러다가는 두 사람 모두 이성을 잃고 몸을 섞게 될 거예요. 나는…… 나는 업무 관계자와는 관계하지 않습니다.”
라스카의 애원에 리체는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지금까지는 딱 정해진 상대와만 성관계를 했나 보죠?”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답답하다는 얼굴을 보며 리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의 보수적인 성향은 리체에게 있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본 차원에 있을 때의 그녀는 무성애자에 가까웠으므로 성적인 쾌감을 느낀 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달랐다. 쾌감은 짜릿했고, 감각은 황홀했다. 쾌락은 즐기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리체는 라스카가 색달랐다. 기껏 괜찮은 알파 형질을 타고났는데 그걸 억누르다니 조금 아쉽지 않은가 말이다. 문득 리체는 본능에 순응하여 이델리와 붙어먹었던 미하일에게 혀를 차 보였던 일을 떠올리고 침묵했다.
1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녀에게 그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리체……?”
조심스러운 부름에 리체는 눈을 소처럼 끔벅였다. 불안해 보이는 눈빛으로 라스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일자로 다물렸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라스카와 미하일은 다르다. 미하일의 이성은 그의 우람한 근육과 달리 본능의 채찍질 앞에 금세 무릎을 꿇을 만큼 가냘프고 볼품없었으나, 라스카의 이성은 미하일의 겉보기 근육보다 단단하고 굳건했다.
‘하지만 이성은 본능의 껍데기지. 억누르고 있던 게 풀리면 재밌을 거야.’
호기심이 마른 땅 아래 지하수처럼 샘솟았다. 축축한 마음으로 또 한 번, 리체는 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마음에 동조한 페로몬이 스프레이로 분사하듯 짙게 흘러나왔다. 라스카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의 페로몬은, 이상합니다.”
“어디가요?”
리체는 조곤조곤 속삭였다. 천진한 목소리에 매혹이 스며들자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을 물들인 라스카가 더듬거렸다.
“타오르는 불덩이에 기, 기름을 붓는 것 같습니다.”
“아아. 참을 수 없나 보군요? 자지가 불끈불끈하나요?”
짓궂은 말투를 애써 무시한 라스카가 진지하게 말했다.
“열성 오메가의 페로몬은 보통 발현에 영향을 준 상대의 페로몬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리체는 살짝 흔들어 대던 허리를 멈추었다. 라스카의 얼굴에 안도감과 함께 옅은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곧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리체, 당신은 형질 이론만 나오면 눈을 빛내네요.”
하아, 뜨거운 한숨을 쉰 라스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리체는 지식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와 같이 새로운 정보를 접하면 눈을 반짝였다. 그의 말없는 웃음에 리체는 허리를 흔들었다. 어서 입을 열라는 재촉이었다.
“흣, 보통 후천적 오메가는 강력한 알파 페로몬에 잠식될 때 발현합니다. 제가 맡았던 환자의 경우는 그녀의 친오라비 때문이었죠.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았든, 당신의 곁에도 강한 알파가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우성으로 분류되는 알파였을 거예요.”
리체는 해결 못 할 난제를 앞둔 사람처럼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라스카는 충고했다.
“페로몬을 남용하지 마십시오. 제가 겪었던 후천적 오메가들은 뒤늦은 형질 발현으로 페로몬 조절에 미숙했고, 페로몬을 통해 상위 계급의 알파를 유혹하려다 이성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발을 들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리체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어렸다. 충고는 들어 줄 만했다. 하지만 역시, 그런 진지한 얼굴을 하기엔 하늘을 찌를 듯 곤두선 성기가 너무나도 흉흉했다. 쿡, 하고 배를 찌르는 뭉툭한 선단의 감각에 리체는 긴 기둥을 한손으로 움켜쥐었다. 말이 끊긴 라스카가 날카롭게 헛숨을 들이켰다.
라스카의 자지는 손바닥을 델 듯이 뜨거웠다. 리체의 작은 손은 자지를 가만히 잡고만 있었다. 손안에서 불끈거리는 성기는 마치 살아 있는 짐승 같아서 신기했다. 리체는 처음으로 성을 탐하는 어린 여자처럼 미숙하게 자지를 위아래로 느릿하게 훑었다.
“아윽, 리체…….”
라스카는 도리어 그 익숙하지 않은 손길에 극도로 흥분했다. 넓은 등이 앞으로 꺾였다. 리체는 제 어깨에 이마를 묻은 라스카를 고개만 틀어 곁눈질했다. 그의 몸이 가늘게 진동하고 있었다. 온 신경이 성기에 뻗쳐 있었다.
“후우…….”
리체는 집중하며 성기를 조금 더 빠르게 훑었다. 선단에서 흘러나왔던 쿠퍼액이 윤활유 역할을 하여 자지가 손안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 그만하십시오. 여기서 더 하면 안, 정말, 안 됩, 흐읏!”
엄지로 귀두를 강하게 틀어막자 튀어나오려던 쿠퍼액이 짓눌려져 찔끔 새어 나왔다. 리체는 투명한 체액을 동그란 귀두 주변에 펴 발랐다.
“라스카, 우리는 지금 유익한 실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욕망에 물든 단순 섹스로 격하시킬 필요는 없어요.”
“흐, 리체…….”
“게다가.”
리체가 라스카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입술이 붉어진 귓바퀴에 닿았다. 그의 살결은 뜨거웠다. 후, 바람을 분 리체가 속삭였다.
“하면 또 어때요.”
라스카의 몸이 굳어졌다.
“안 될 건 없잖아요?”
살포시 미소 지었다. 고개를 들어 가까이에서 그녀를 바라본 라스카의 눈이 흔들렸다. 리체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뚫어져라 응시했다. 곧이어 고뇌로 흔들리던 검은색 눈동자가 새카맣게 짙어졌다. 보다 본능적으로 변한, 짐승 같은 눈빛. 리체는 흡족하게 웃었다.
돌연 숨이 막힐 듯 강렬한 페로몬이 들이닥쳤다. 숨을 들이켜자 짙은 허브 향과 맵싸하게 느껴질 만큼 강한 박하향이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속이 울렁거리고 배 속이 뜨끈했다. 리체가 눈을 크게 뜨고 라스카를 바라보았다.
라스카는 새카만 눈을 이글이글 불태웠다. 그야말로 알파다운 모습이었다.
“어떻, 습니까. 당신의 페로몬 저항력은?”
얼굴이 확 다가왔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입을 벌렸다. 뜨거운 입술이 부닥쳤다. 작은 입술을 한 입에 삼키고 혀를 내밀어 얌전한 리체의 혀를 낚아챘다.
리체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건 라스카도 마찬가지였다. 섹스를 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연구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듯이, 속은 활활 타올랐으나 겉모습만큼은 차가운 달처럼 냉철했다.
입술을 맞물린 채 리체는 라스카의 검은색 동공을 들여다보았다. 지금까지 쑥스러워했던 모습을 벗어던진 라스카의 눈빛에 가슴이 뛰었다. 몸속을 파고드는 라스카의 알파 페로몬은 마치 송곳 같았다. 아랫배와 가슴뿐 아니라 민감한 부분까지 쿡쿡 찔러 대며 자극했다.
“흐응!”
라스카의 혀가 치열을 훑는 것과 동시에 가랑이 사이가 찌릿해진 리체가 헐떡였다. 라스카가 입술을 뗐다. 딱 달라붙었던 입술이 떨어지자 타액이 가늘게 늘어졌다. 혀를 내밀어 축축한 입술을 핥은 라스카가 몽롱한 눈빛의 리체의 입에 입을 쪽 맞추었다. 여전히 신사다운 입맞춤에 리체가 눈을 깜박였다.
“속옷이 거추장스럽군요.”
열기 흐르는 목소리가 단정하게 말했다.
“속옷을 벗고 제 위에 올라타 주십시오.”
페로몬이 넘실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묘하게 강압적이었다. 잠시 멈칫한 리체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치마는 거의 허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다리 사이의 팬티는 육안으로 보일 만큼 얼룩이 짙었으므로, 리체는 아주 잠깐 민망해졌다. 힐끗 라스카를 바라보았다. 라스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목이 말라와 침을 꿀꺽 삼킨 리체는 얌전히 그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팬티 윗부분을 붙잡았다. 벗기 전에 라스카를 바라보자 그는 홍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눈으로 명령했다.
“벗어요, 리체.”
리체는 천천히 팬티를 벗었다. 통통한 허벅지를 지난 팬티가 저절로 바닥에 툭 떨어졌다. 리체는 유니폼 치마까지 벗었다. 더러워지면 빨아야 되는 게 귀찮았다.
“단추도 풀까요?”
리체가 윗옷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갸웃하자 라스카의 목울대가 도드라졌다. 그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리체가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반쯤 풀리자 꽉 조이는 속옷에 감싸인 가슴이 드러났다. 라스카의 시선이 가슴에 못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눈빛이 꿀처럼 농밀해졌다.
마침내 모든 단추를 다 푼 리체가 옷을 벗자 그녀가 몸에 걸친 건 가슴을 가리는 속옷밖에 없었다. 나신이 된 리체는 다시 라스카의 위에 올라탔다. 맨살에 닿는 그의 피부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좀 전보다는 아니었다. 라스카의 체온이 내려가서가 아니라, 그녀의 체온이 오른 것이었다.
입 안이 자꾸만 말랐다. 알파 페로몬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흥분이 커지자 리체는 도리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그녀의 육신은 알파 페로몬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편일까?
클럽 퀸은 오메가 종업원이 많은 편이었다. 엘자의 경우를 떠올려 보자, 리체는 그녀에 비해서는 강한 편인 듯했다. 미하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대놓고 성교를 나누었던 건 아니었으므로 판단하기엔 수집한 데이터가 빈약했다.
리체가 딴 생각에 잠겨 가만히 있자 라스카는 초조한 듯 눈을 질끈 감고는 허벅지를 위로 쳐올렸다. 자지가 리체의 가랑이 사이를 치고 라스카의 배를 때렸다. 깜짝 놀란 리체의 눈이 동그래졌다. 라스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넣으십시오.”
명령이었지만 마치 애원하는 것 같았다. 리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느릿한 그녀의 태도는 라스카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좀 더 쥐어짜듯이 속삭였다.
“내 자지로 당신을 쑤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천박한 말투에 깜짝 놀란 리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닙니까?”
아니, 딱히 그런 건. 당황하자 라스카가 기다렸다는 듯이 키스해 왔다. 숨은 혀를 감은 라스카의 혀가 그녀의 입 안을 휘저었다. 그러자 잠시 사그라졌던 흥분감이 미친 듯이 샘솟아, 리체는 저도 모르게 그의 뜨거운 자지를 붙잡아 제 음부로 인도했다.
자지는 가야 할 길을 아는 뱀처럼 움직여 그녀의 축축한 구멍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리체가 살짝 엉덩이를 드는 순간, 라스카는 때를 놓치지 않고 허리를 위로 쳐올렸다.
푸욱!
라스카의 길고 곧은 자지가 리체의 안을 꿰뚫었다.
“하, 아!”
리체가 입술을 떼려는데 라스카의 입술이 따라붙었다. 결국 그에게 붙잡힌 리체는 아래로는 성난 남근에, 위로는 그의 혀에게 유린당했다.
끝까지 본능을 억누르려던 라스카는 집요하고 또 집요했다. 흥분이 식지 않도록 끊임없이 장작을 집어넣었다.
리체는 어느새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몰랐지만, 기억력이 좋은 몸은 언젠가 이델리가 미하일 위에서 움직였던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했다. 낭창한 허리가 흔들리며 라스카의 성기를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자 라스카의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굵은 힘줄이 섰다. 단정한 얼굴이 붉어지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이성적인 치유술사의 모습이 아닌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수컷이 되어 라스카는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리체는 반대로 허리를 아래로 내렸다. 보지와 구멍이 딱 맞자 두 사람 모두 눈앞에 별이 튀었다.
“하아, 앙, 좋, 좋아앗!”
“큿, 흑, 그대로, 그대로 움직, 움직이세요, 흣!”
라스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속옷에 감싸인 리체의 가슴은 탑에 갇힌 공주처럼 안쓰러워 보였다. 누군가 공주를 구해야 했다. 라스카는 어깨를 움찔했다. 연구에 방해가 될까 봐 염려된다는 리체의 주장에 의자 뒤로 기꺼이 손을 묶었던 스스로의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라스카는 리체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요구했다.
“손을, 하아, 풀어 주십시오.”
리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목덜미에 달라붙은 그녀는 남자의 꿈속에 출현하는 밤의 요녀 같았다. 라스카는 가슴이 진탕되었다.
“당신의 가슴을 빨고 싶습니다.”
푸른 안개처럼 몽롱한 눈빛으로 리체는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그에게 몸을 붙이고 의자 뒤로 손을 뻗었다. 속옷에 감싸였지만 풍만한 가슴이 상체를 압박하자 라스카는 허리에 힘을 주었다. 사정할 뻔했다. 입술을 악물었다.
스륵. 매듭이 풀린 끈이 아래로 떨어졌다. 손이 자유로워진 즉시, 라스카는 재빨리 움직여 보기만 해도 답답했던 리체의 브래지어를 풀어냈다. 속옷이 흘러내렸다. 풍만한 가슴이 눈앞에 튀어나오듯 등장하자 라스카는 뭐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을 뻗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하얀 살결은 막 반죽을 마친 빵처럼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웠다.
라스카는 본능을 기꺼이 따라 가슴을 한입에 물었다.
“흐으응!”
젖꼭지가 강하게 빨리자 리체는 그의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라스카는 뭉툭한 젖꼭지가 뾰족해질 때까지 집요하게 빨고 흡입했다. 젖꼭지가 얼얼해질 무렵, 리체의 허리 움직임도 약해졌다. 위에서 계속 움직이는 건 체력이 약한 그녀에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
혀를 내밀어 젖꼭지를 할짝인 라스카가 리체에게 자지를 처박은 채로 벌떡 일어섰다. 기사인 카이로와 레이몬드와 비할 바는 아니나 라스카의 몸은 늘씬하면서도, 탄탄했고, 키가 커서 리체를 안고도 무리 없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리체가 그의 몸을 끌어안고 버티자 라스카가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쳤다. 안정적인 자세가 유지되자마자 곧장 허리를 쳐올렸다. 허벅지의 근육이 불거지며 빠른 속도로 자지로 구멍을 쑤시자 리체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앙, 아앙! 앙! 흐아앗!”
“큭, 리체, 당신 보지가 너무, 맛있습니다, 아아!”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라스카가 긴 성기를 그녀의 끝까지 처박았다. 뭉툭하고 뾰족한 선단이 자궁구를 강하게 박음과 동시에 리체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하아아아아!”
바닥을 향한 발끝이 발레리나처럼 휘어진 채 부르르 떨었다. 사정한 라스카가 그녀의 몸을 사랑스럽다는 듯 끌어안고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라스카를 모시는 메디치나 치유관의 어린 시종은 입이 가벼웠다. 몇 마디 운을 띄우자 금세 떠벌거렸다.
“도련님이요? 두 말하면 입 아프죠. 메디치나 가문에서도 굉장히 뛰어나신 분이니까요. 백작님이 돌아가시면 작위를 승계받을 가문의 후계자인데다가, 치료술로는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라스카 메디치나는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재원을 얻다니. 리체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물약이나 타러 간 메디치나 치유관에서 라스카 같은 훌륭한(쓸모 있는) 파트너를 만나다니 말이다.
라스카는 알파오메가 형질 연구 등 인체와 관련된 치료 연구의 대가로서 리체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데이터를 가진 사람, 즉 지식 창고다. 그뿐인가. 툭 치면 물약이 나온다. 더는 섹스 후 근육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리체는 입술이 찢어져라 웃었다. 생각보다 근육통이 아주 성가셨던 것이다.
게다가 성격은 또 어떻고.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고 순진해서, 기꺼이 임상 실험의 대상이 되어 주기도 한다.
리체는 간만에 지식의 바다에 흠뻑 적셔진 듯한 흡족함을 느꼈다. 이 차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고 인식 범위가 한층 넓어진 기분은 섹스의 쾌감과도 비견될 만했다.
리체는 라스카를 상대로 이것저것 시도했다. 그녀를 평범한 열성 오메가로 알고 있는 카이로와 레이몬드를 상대로는 할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그때마다 라스카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리체가 하는 대로 휘둘리다가 인내심의 한계를 넘기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또한 그는 백작의 작위를 가진 데다 알파 계급이기까지 한 상류 계층이라 아는 게 많았다. 그 역시 리체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뭐라고요?”
리체의 목소리가 커졌다. 동그랗게 커진 눈매에다 딱딱해진 눈동자에 라스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방금 어떤 논문에…….”
“아, 다른 차원의 존재 말입니까?”
리체의 눈에 뭔지 모를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라스카로서는 그녀의 속내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저 대체로 차분한 리체가 이렇게 크게 반응한다는 것에 놀라 즐겁게 설명했다.
“그레뉼 학회에서 발표된 논문이라고 합니다. 마법사들이 중심이 되는 학회인데 가끔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꿀 가설이 발표되기도 하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많지요. 아무래도 마법사들은 상상하는 이들이다 보니.”
“차원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온 거죠?”
리체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모습이라 라스카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었다.
“워낙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제대로 들은 것 없습니다만, 제가 아는 바는 이렇습니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의 차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대기권 밖으로 다른 차원이 존재하며, 차원이 열리는 메커니즘을 알게 되면 차원을 이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귓가에 박혀 들었다. 리체는 숨이 턱 막혔다.
“리체 양이 생각하기에도 꽤 허무맹랑하죠?”
“하…….”
“마탑주께서 처음 이 같은 내용을 발표했을 때는 박수도 나오지 않았다더군요. 감히 마탑주를 비웃는 사람은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500여 년 전 대륙 밖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발표와 비슷한 충격이었으니, 아니, 그보다 더하려나요. 적어도 또 다른 대륙의 존재는 증거라도 있었으니까요. 마탑주가 아니라 다른 마법사가 발표했다면 그대로 비웃음 당하고 사장되었을 텐데…….”
“텐데?”
다소 조급하게 대답을 재촉하는 리체의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리체?”
“궁금해서요. 제가…… 관심 있는 주제라.”
“이런 문제를 흥미로워할 줄은 몰랐군요.”
라스카는 그녀의 지적 호기심에 한 차례 놀라며 말을 마저 이었다.
“아무리 허무맹랑한 논문이라도 마탑주가 발표하셨으니 그냥 묻히진 않았고, 한차례 논란이 일었다고 합니다.”
“꽤 권위가 있는 사람인가 보군요.”
“그렇죠. 아무래도 마법의 종주이시니. 게다가 그분은 뭐랄까, 좀 괴짜 같은 구석이 있어서요. 마법의 패러다임을 바꾸기도 했지만 가끔은 사람들을 골리려고 이상한 발표도 한단 말입니다. 이번의 일 역시 그럴지도 모르죠. 요즘 마탑에서 이렇다 할 충격적인 발표가 없었거든요. 이때다 싶어 아무 말이나 지르셨을지도요.”
“아아……. 그래요.”
리체는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동공은 라스카를 잡지 못하고 초점이 흐릿했다.
마탑주.
머릿속에 단단히 입력되었다. 다소 반신반의하는 라스카와 달리 그녀는 그 발표를 믿었다. 믿을 수밖에. 그녀가 바로 차원 이동의 산증인이지 않은가. 그것도 차원 분야에서만큼은 그녀의 본 차원이 훨씬 진일보한 업적을 이루고 있었다.
차원은 존재의 놀라움뿐만이 아니라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가진 문명의 새로운 보고였다. 아직 기술 발전이 더딘 이곳에서 드디어 차원 이동에 대한 실마리를 잡다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1년이 넘는 동안 반쯤 체념하고 있던 그녀의 가슴이 간만에 부풀어 올랐다.
[새로운 정보 ‘차원 이동’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열립니다.]
리체는 눈앞에 뜨는 문구를 읽어 내렸다.
[퀘스트 발생.
마탑주 그라우지 로스티나루스는 당신에게 차원 이동에 대한 정보를 줄 것입니다.
마탑으로 가 그의 호감을 얻어 내십시오.
성공 시 보상: 차원 이동의 가능성(아주 희박한 확률로 본 차원으로의 귀환)
실패 시 페널티: 이 차원 잔류. 마탑의 실험체가 됨.]
보상과 페널티는 심장이 떨릴 만큼 달콤하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성공하면 귀환. 실패하면 연구실 실험체가 된다.
리체의 파란 눈이 한순간 파랗게 빛났다가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