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리체, 잠깐만.”
“사장님?”
가게 안으로 걸어가려다 말고 리체는 고개를 돌렸다.
“일찍 출근하셨네요?”
원래 퀸의 출근 1등은 리체였고 사장과 매니저는 마지막이었지만, 요즘은 그 순서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요 며칠 VIP들의 영업시간을 무시한 잦은 방문 때문에 당분간은 가게를 24시간 운영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전에는 매니저가, 야간에는 사장이 출근하는 식이었다.
“손님이 지명했어. 오늘은 바에 있지 말고 방에 들어가.”
“손님 누구요?”
“익명으로.”
“…….”
“또 애들이 뭐라고 하겠네. 어떻게 된 일인지 베타인 네 지명이 요즘 제일 이슈인 것 같아.”
의아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리체는 가슴이 뜨끔해서 서둘러 말을 돌렸다.
“어디로 가면 돼요?”
“최상층, 다이아몬드 룸으로 들어가면 돼.”
“……다이아몬드 룸이요?”
다이아몬드 룸은 전에 이델리와 그녀의 남자들이 사용했던 방으로, VIP 전용 룸이다. 클럽 퀸은 돈만 많다면 작위가 없는 평민도 출입할 수 있었지만 최상층은 제외였다. 고급화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어 하는 사장의 영업 전략으로 최상층은, 특히 다이아몬드 룸은 돈만 있어서는 이용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작위가 있고, 이름값이 있는 사회 명숙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방에서, 저를 지명했다니?
혹시 레이몬드인가 싶었던 리체는 그 가능성은 접었다. 익명의 손님이라는 건 처음 들어보는 탓에 의문투성이였다. 익명인데 어떻게 다이아몬드 룸을 예약했지.
“이름과 작위는 밝히지 않았지만 분명 고위 귀족일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황궁 출입 허가증을 봤어.”
사장은 피곤한 낯으로 덧붙였다.
“알현증까지 있었지.”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위치의 손님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절 왜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렇게 말한 사장은 본인도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리체는 왠지 이 지명이 꺼림칙했다. 지명이 많이 될수록 인센티브가 붙으니, 이 차원에 지지 기반이 없는 그녀로서는 나쁠 게 없었지만 제 정체를 밝히지 않은 자라니 몹시도 수상했다.
리체는 고민할 것 없이 말했다.
“안 가면 안 돼요?”
“리체.”
사장이 곤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떡해요.”
“그런 일이 없도록 할게. 깃털을 가져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호출하면 되잖아. 그럼 상대가 황제 폐하여도 꼭 도와주러 들어갈게.”
리체가 의심스럽게 눈썹을 올렸다.
“황제 폐하여도?”
“그, 저기, 들어가기는 할게.”
“…….”
“황제 폐하는 좀 그렇잖니.”
그럴 거면 말이나 말던가.
리체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한 사장이 얄미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사장은 도블락의 길거리를 헤매던 리체를 불쌍히 여겨 일자리와 숙소까지 제공해 준 사람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이곳도 떠나야 할 거고, 그렇게 되면 다시 만나기 어려워지겠지만 그때의 도움 때문이라도 어지간하면 협조하고 싶었다.
일단 발이라도 담가 보자. 고추장인지 된장인지 맛만 보는 거다.
“……꼭 도우러 들어와야 해요. 들어오기만이라도 해요. 아셨죠.”
“그럼, 대기하고 있을 테니 걱정 마!”
사장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다이아몬드 룸 앞에 당도한 리체는 막상 그 앞에 서자 고민스러운 얼굴로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웬만하면 협조하고 싶지만…….’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걱정이 됐다.
다양한 원주민을 연구하는 차원 인류학자의 기본 소양은 차갑고 냉정한 마음이다.
수많은 차원만큼 원주민들은 그 특성이 다양했다. 몹시 아름답거나 마음을 뒤흔드는 재주가 있는 원주민도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휘둘려 소명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냉철한 심성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 즉 부동심이 중요했다.
리체 역시 그랬다. 그녀는 꽤 잘나가는 연구원이었고, 합리적인 판단 하에 양심이 찔리는 일 정도는 흐린 눈을 하고 모른 척할 수 있었다.
‘일단 누군지만 보자. 해를 끼치려고 했으면 번거롭게 여기까지 와서 날 지명하지도 않았겠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위험하다면 당장 발걸음을 돌릴 수 있을 만큼 보수적으로 움직였다. 일단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익명의 손님이 안에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존재감이 느껴지는 손님이라니. 베타인가. 리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면 알파일까, 의외로 오메가일까.
흐읍,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다이아몬드 룸에 깔아 둔 방향제의 은은한 향과는 다른 냄새가 코끝을 스칠 무렵.
와락.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상체를 감옥처럼 꽉 옥죄었다. 리체는 반사적으로 제 목을 감싼 손목을 움켜쥐었다. 매우 단단하고 뜨거운 살결이었다. 동시에 무두질된 가죽 냄새와 쇠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느닷없이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
그제야 리체는 이 기묘한 손님의 정체를 깨달았다.
‘카이로!’
“잘 있었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약간 쉰 목소리에 부드럽고 젠틀한 말투.
카이로 스트리고가 돌아왔다.
* * *
평소보다 곱게 단장한 이델리는 황태자의 알현실에 앉아 있었다. 알현실의 한 자리를 차지한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황태자를 모시는 가신들이 근엄한 자세로 원형 탁자 주위에 둘러앉았다. 거기서 홀로 아름답고 젊은 이델리는 툭 튀어나온 퍼즐 조각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라면 그녀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가주인 어머니가 병상에 누운 탓에 대리인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다. 대신들이 그녀를 흘끔거렸다. 이델리는 시선을 여유롭게 흘려 넘기며 저보다 스무 살은 많은 그들에게 웃음까지 보내는 여유를 보였다.
어머니는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녀가 굳이 참석하겠다고 한 이유는, 물론 얀테 루세이노 황태자 때문이었다.
가문의 대외 활동, 그중에서도 사교를 담당하는 공작 영애의 신분으로서 위치에 벗어나는 행동을 할 수는 없겠지만 얼굴을 맞대고 시선을 교환하는 기회 하나하나가 없던 감정도 생기게 하는 발판이 될 거다.
떡도 얼굴을 봐야 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레이스 공작가는 스트리고 백작가처럼 공신 가문은 아니었다.
다만 황후를 열 번 넘게 배출하여 가문의 권세가 높고, 그레이스 공작이 어릴 때부터 황후와 친하게 지내 현재까지도 그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사교계의 실세를 꼽을 때 빠짐없이 언급되는 가문 중 하나였다.
아직 황태자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떠들었다.
“이블린의 사령관을 인질로 잡기까지 했다죠. 그자는 이블린 왕의 막내 동생이니 이번 전쟁의 성과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허허, 처음에는 이블린을 욕심내는 황태자 전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겠군요. 이블린을 속국으로 삼으면 그들의 번성한 문명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겠지요.”
“오, 공께서 저와 생각이 같으시군요. 영토 확장의 야욕을 드러내시는 게 황태자 전하답지 않다, 하는 불경한 생각을 감히 품었습니다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과연 태자 전하께서는 멀리까지 보고 계세요. 스트리고 장군을 보내어 이렇게 피해 없이 이블린의 도시를 정벌하다니 말입니다.”
이델리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아직 제위를 물려받지 않은 황태자가 황제가 병환으로 누워 있다고 제멋대로 영토 확장을 하려 한다며, 이건 좀 성급하지 않냐고 떠들어 댔던 게 불과 6개월 전의 일이었다.
황태자가 승기를 확실히 잡기 직전에 그의 세력으로 편승된 귀족이 많았으므로, 황태자에 대한 충성심 또한 그만큼 얄팍했다. 지금 떠들고 있는 이들도 그런 치들이었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반편이들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꼴이란.’
이델리의 신랄한 평가를 눈치채지 못한 대신들이 자기들끼리 희희낙락거리다 또 이델리를 힐끗했다.
“영애께서도 소식을 들으셨는지?”
“네. 대장군이 보낸 파발의 소식을 모르는 귀족이 있을까요?”
“하하. 영애도 관심이 있으셨군요!”
“제국을 위해 무력을 바친 정벌군이 무사히 귀환하길 매일 밤 기도하고 있답니다.”
“영애께서는 아름다운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씨까지도 고우시군요. 신께서 감명받아 틀림없이 정벌군에 가호를 내려 주실 겁니다.”
이델리는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지랄하네.’
이렇게 떠들어 대는 건 비단 이들만이 아니었다. 정벌군이 알린 승전보는 책상에서 펜을 끄적거리던 문벌 귀족들까지 흥분시켰다.
“스트리고 장군이 얼른 왔으면 좋겠군요. 좀 더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도착한다면 따로 자리를 요청해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요?”
“오늘 도착한단 말이 있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군요.”
“아니, 아직도 소식이 없단 말입니까? 저는 이미 도착한 줄 알았는데요.”
“도착했으면 바로 태자 전하를 찾아왔겠지. 오고 있는 중일 거요.”
전쟁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운 당사자이자 책임자인 카이로의 행방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때, 알현실의 커다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루한 기색을 감추던 이델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등장을 가장 먼저 알린 건 궁정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페로몬이었다.
깊은 산골 자락에 자욱이 퍼지는 안개처럼 페로몬이 발밑으로 기어 들어왔다. 차가운 페로몬은 높이 뜨지 못하고 바닥에 깔려 이델리의 발목을 뱀의 혀처럼 핥았다. 그 농밀함에 붙들리는 기분이었다.
과연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이다. 그의 앞에선 누구도 두 다리를 제대로 뻗지 못할 것이다.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심령을 잡아당긴다고 했다. 그 어떤 주술이나 마법이 없어도, 본능을 건드려 발밑에 조아리게 되는 것이다.
황태자가 극우성 알파라는 게 드러난 것은 태자가 되기 전, 황자 신분일 때였다. 형제들이 의문사하고 불유쾌한 스캔들로 나동그라졌을 때 급부상한 인물. 그리고 뒤늦게 사람들이 홀로 말짱한 황자를 의식했을 때 그는 때가 되었다는 듯이 스스로를 드러냈다. 바로 그 충격적이고도 경악스러운 자리에 이델리 그레이스도 있었다.
저게 바로 자신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알파였다. 아니, 오히려 사내들을 내려다보는 데 익숙한 자신이 발뒤꿈치를 들어서라도 시선을 마주하고 싶은 최상위 수컷!
그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자신의 추종자들이니 매력적인 우성 알파니 하는 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극우성 오메가로서 사람들 머리 위에 군림했던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기꺼이 붙잡힐 사람이 있다면, 저이밖에 없으리라.
다른 사내들은 한 손에 쥐고 흔들지언정 저 사내에겐 흔들려 주리라.
경악에 몸을 떨며 황홀히 생각했었다.
그의 충격적인 등장에 감명받았던 탓도 있겠지만 지금도 그 충격이 완벽히 가신 상태는 아니었다.
얀테 M. 루세이노.
도블락의 유일무이 황태자이자 가까운 미래에 확실시된 황제의 재목. 빛이 유려하게 흐르는 화려한 금발에 보석을 박아 놓은 것처럼 파란 눈동자를 한 아름다운 사내였다. 미색이 뛰어난 얼굴과 달리 어깨는 전쟁터를 노니는 장군들처럼 떡 벌어졌고 엉덩이는 종마처럼 탄탄했으며 다리는 늘씬하고 길었다.
그는 마치 신이 손수 빚어 만든 조각 같았다. 그런 외모로 어떻게 지금까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그의 교활함을 방증했다. 지금에 와서 황태자의 음흉함과 현명함을 인지하지 못한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주머니의 송곳은 두드려 평평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제 자질이나 형질을 드러냈다면 1황자에게 진즉 숙청당해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을 터.
‘그 음흉함까지 마음에 들어.’
이델리는 입술을 사악 핥았다.
시끄럽게 떠들던 대신들이 입을 딱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비어 있는 상석에 당당히 자리한 얀테는 빈자리를 힐끗했다.
“스트리고 백작은 아직인가? 중문에 들어섰다지 않았어?”
그를 따라 들어왔던 보좌관이 고개를 숙였다.
“몸이 고단하여 내일 알현하신다 하십니다.”
“그 건장한 몸으로 고단이라니, 별일이네. 애인이라도 만나러 간 것 아닌가?”
“그분이 그러실 리가요. 몸에 밴 피비린내라도 빼셔야겠다고 합니다.”
얀테는 다소 풀어진 얼굴로 가볍게 미소 지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시선만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그의 웃음은 그가 얼마나 카이로 스트리고를 신뢰하고 아끼는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스트리고 백작가는 적어도 수십 년간은 번영하겠군.’
사람들이 저마다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는 가운데 얀테는 손뼉을 짝 쳤다.
“자, 그럼 뭐, 우린 내일 그가 오면 본격적으로 논의할 문제를 꼽아 봅시다. 내일은 회의에 시간을 길게 쏟고 싶지 않거든.”
회의는 짧게, 회포는 길게.
나른히 말하는 태자에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신들이 아부를 쏟아 냈다. 그런 후에야 본격적인 내용이 다뤄졌다.
도블락은 이블린의 도시를 정벌했다. 황태자의 정복 계획이 여기서 끝날 리 없으므로, 다들 앞으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 떠들었다.
평소 때와 같았으면 이델리는 적당히 회의에 참여하며 루세이노 황태자와 시선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황태자는 그녀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차갑게 내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델리는 그와의 그런 눈 맞춤에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이 자리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바라던 황태자인데, 막상 얼굴을 보니 딴 생각이 들었다.
신경이 쓰였다. 거슬렸다. 손가락에 난 거스러미를 저도 모르게 뜯다 그 통증이 점차 더 신경 쓰이게 되는 것처럼.
10년간 깊이 박힌 이름이 자꾸만 수면 위로 부상하려고 들었다.
‘레이, 날 실망시키지 마.’
이델리의 아름다운 푸른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대체 누굴까.’
남의 거에 침 바른 예의 없는 년이.
알파의 각인.
그건 짐승의 각인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알에서 깨어난 오리 새끼가 눈을 떠 처음으로 마주한 대상에 각인하여 졸졸 쫓아다니는 것처럼, 알파오메가의 각인은 각인 상대가 아니면 흥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각인한 상대의 페로몬이 아니면 갈증을 풀어낼 수 없으므로, 이 사람 저 사람 건드리며 문란하게 놀기 좋아하는 알파오메가에겐 꺼림칙한 것이었다.
이 각인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그 명확한 이유는 아직 정확한 설명이 없다. 누군가는 페로몬의 파장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라고 하고, 누군가는 상대에게 강렬히 매혹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체로 각인은 사랑하는 상대와의 사이에서 일어나지만, 드물게 단지 하룻밤을 보낸 상대에게 각인하는 일도 있어 그 메커니즘은 분명하지 않았다.
‘상대가 죽어서야 풀린다던가?’
그런 말도 있었다.
이델리는 사내들의 마음을 퍽 잘 아는 편이었다. 그네들의 분수 맞지 않는 드높은 자존심과 정복욕은, 원하는 걸 갖지 못하게 됐을 때 외려 불타오른다.
‘특히 레이는 더 그렇지. 죽이는 건 최선이 아니야.’
죽은 이는 생각보다 성가신 법이다. 살아 있는 이의 마음에 영원히 남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정말 상대에게 얽매어 버린 거라면. 하룻밤 놀잇감이 아니라면.
‘……그런 건 용납 못해.’
까득, 손톱이 부딪쳤다.
‘그래. 레이를 내 곁에 붙들어 두는 거야.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 아랫도리 가벼운 레이몬드라면 특히나. 그래서 각인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그늘 속에 핀 꽃처럼 검붉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처리해 버려야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레이몬드에게 그녀는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오랫동안 갖고 싶어서, 그 욕망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는 갖고 싶은 마음 자체가 목적이 된 상태이므로. 그렇지만 오랜 시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사랑스러운 반지에 다른 여자의 입술 자국이 찍혔다 생각하니 짜증이 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굴까, 누굴까, 누굴까.
‘누굴까?’
레이몬드는 요즘 어딜 나다니질 않았다. 이것도 희한한 일이다. 섹스 중독일 만큼 매일 밤 다른 여자들의 침대에서 깨어나는 게 일상인 놈이 어울리지 않게.
카이로 스트리고가 여자를 만나고 있다면, 유력하게 그 여자가 범인일 텐데 그의 형은 내내 전쟁터에 있었다. 그전에는 특정한 상대를 만나지 않고 클럽이나 다녔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 클럽. 술을 마시러 자주 갔었지.’
하필이면 그곳이 클럽 퀸이었다. 퀸에서 만난 덩치 큰 오메가 종업원을 떠올린 이델리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알파 특유의 내리누르는 페로몬과 달리 끈적하게 달라붙고 매달리는 느낌이어서 색다른 경험이었다.
‘한번 들를까.’
겸사겸사.
‘레이의 근황도 캘 겸.’
리체라고 했던가?
문득 그녀는 집에 처박혀 있는 그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카이로 스트리고가 도착했다. 아마도 집에서 쉬고 있을 터였다.
‘하필이면 지금 돌아오고 난리야.’
그가 있는 한 이델리는 백작저에 출입할 수 없었다. 십여 년 전 형제를 갖고 놀았다고 분노한 카이로의 접근 금지 명령이 풀리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짧게 고민한 이델리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못 들어가면 나오라 하지, 뭐.’
* * *
스트리고 백작저에 도착한 이델리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백작이 안 계시다고?”
집사는 공손히 손을 맞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트리고 백작 가문의 집사는 투박한 데다 꼼꼼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스트리고를 대신하여 손과 눈이 무척 빠르고 꼼꼼한 인재였지만 성격이 조용해 마치 유령 같은 자였다.
하지만 이델리는 일처리가 깔끔하고 해도 될 일, 안 해도 될 일을 똑 부러지게 파악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스트리고 백작저에서 오래 일한 사람만 아니라도 내 개인 집사로 삼을 텐데 말이야.’
눈치 빠른 그를 아랫사람으로 삼는다면 훨씬 효율적으로 시간표를 짤 수 있을 것이다.
손안에 쥔 반지들은 그 수가 많은 데다가 의외로 내구력이 좋은 게 드물어서 신경을 덜 쓰면 녹이 슬고 망가져 버린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고 반지를 예쁘고 화려한 상태로 간직하려면 가끔씩 만나 주고 웃어 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해 주어야 했다.
이를테면, 만나는 이들이 많아도 그중에선 자신이 제일 특별하다는 희망 같은 것 말이다.
‘물론, 레이와 결혼하게 되면 내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고지식한 카이로 스트리고가 동생을 위해 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반대하는 여자와 결혼했다고 분노하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황태자의 옆자리도 포기할 수 없는데. 이게 문제야. 레이를 정부로 둔다면 가장 좋을 텐데.’
안 되다면, 되게 만들어야지.
이델리는 싱긋 웃으며 레이에게 방문을 알리려는 집사를 멈춰 세웠다.
“아뢸 필요 없어.”
“네?”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거든.”
이델리는 검지를 입에 붙이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모습은 아름답고 귀엽고 또한 섹시했지만 집사는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무례한 요청이었다.
“하지만 레이는 내가 이렇게 하는 걸 더 기뻐할걸. 알잖아.”
집사는 잠깐 고민하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는 기분 좋게 웃고는 훤히 트인 앞쪽으로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레이몬드의 방을 찾아갔다.
끼익. 최대한 조심스럽게 연다고 열었는데. 기름칠을 덜했는지 약간의 소음이 났다. 혀를 찬 이델리는 혹여 레이몬드가 눈치챘나 싶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레이몬드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술과 안주가 차려진 식탁이 아니라 책상에 앉은 그를 보는 건 오래전 같은 가정 교사 아래서 수학한 적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뭐야? 책이라도 읽나?’
이델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개를 약간 구부정하게 숙인 늘씬한 근육질의 뒷모습. 하얀 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어 각이 진 어깨라든가 견갑골이 섹시하게 도드라졌다.
묘한 눈으로 그를 감상하는 이델리의 귀에 신경질적인 소리가 꽂혔다.
“젠장, 편지 같은 걸 써 봤어야지. 이런 걸 좋아하려나? 뭘 갈기든 개소리 같은데…….”
‘편지?’
이델리는 뒤늦게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깃털 펜을 발견했다.
“리체에게…… 아, 씨바알.”
부스럭. 구겨진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아니야. 꽃을 들고 이불 속에서 기다리는 게 훨씬 쉽겠어.”
‘리체.’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그녀는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나 기억을 헤집었다.
문득 이델리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 베타 말이야?’
그 여자의 이름이 왜 레이의 입에서 나오지?
* * *
“하앙!”
끝이 두터운 성기가 내벽을 강하게 찧고 박았다. 카이로의 음경은 평균보다 두 배는 두꺼워서 안을 콱 박으면 숨구멍까지 틀어 막히는 것 같았다.
“하으, 핫, 으, 흐으으으…….”
리체가 숨을 헐떡이자 카이로는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숨을 불어넣고, 혀를 얽어 입 안의 타액을 훔쳤다. 리체는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풀린 눈으로 카이로를 올려다보았다.
바라 왔던 해후 때문일까. 노도처럼 쏟아지는 페로몬의 물결이 그녀의 모든 빗장을 뒤흔들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급하게 안아 오는 탓에 페로몬 억제 스킬을 사용할 겨를도 없었다. 화사하게 번져 나가는 복숭아 향이 짙어졌다.
“하, 리체, 크윽.”
페로몬의 농도가 진해짐과 동시에 리체의 내벽이 그를 오물오물 조이기 시작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카이로는 칼로 썰어도 썰리지 않을 것처럼 두꺼운 두 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번쩍.
리체는 낯선 부유감에 눈을 번쩍 떴다. 근육으로 꽉 찬 카이로의 허벅지에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가 얹어졌다.
카이로는 그 상태로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들어 올렸다. 찔꺽. 그의 허리까지 올라가자 리체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 잠깐!”
푹!
미끄럼틀처럼 성기를 타고 내려오자 순식간에 깊이 들어온 귀두가 안쪽을 찍어 올렸다. 내벽을 깊숙하게 자극하는 날것의 감각에 리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하……악!”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했다. 카이로는 거친 삽입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뺨에 입을 맞추었다. 섬세하고 다정한 행동에 반응하듯 리체의 몸도 부드럽게 열렸다. 카이로의 아래는 흉악하게 움직였지만 눈빛과 손짓은 상냥하기 짝이 없어, 살인귀가 되어 전쟁터에서 날뛰는 그를 상상할 수 없게 했다.
“큭, 리체!”
낮게 으르렁댄 카이로가 그녀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엉덩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 상태로 그녀의 몸을 위로 들고 그대로 내리꽂았다.
“학! 학, 흐, 카, 카이로, 아아악…….”
통증을 동반한 쾌감에 작살처럼 꿰뚫린 리체는 경련하는 팔로 그를 끌어안고 신음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물기 있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자극하자 카이로의 매끈한 이마에 굵은 힘줄이 지렁이처럼 곤두섰다.
힘이 들어간 팔뚝에도 푸른 핏줄이 길게 두드러졌다. 엉덩이를 움켜쥔 손가락이 점토를 누르듯 말랑한 엉덩이를 파고들었다. 그대로 들었다가 내리꽂기를 쉼 없이 반복했다. 푹푹 찧자 촥, 촥 살이 부딪치며 아래가 미친 듯이 자극되었다. 젖은 음부에서 물이 마구 튀었다.
“악, 앗, 너, 너무, 흑, 빨라!”
젖은 살덩어리들이 끈적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음란한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깔렸다. 카이로는 넘치는 흥분에 이를 악물고 배에 닿을 듯 곤두선 성기를 그녀의 안에 강하게 찔러 넣었다.
“……!”
힘이 들어가 경직되는 엉덩이를 움켜쥐고 다시 올려 꽂았다. 왈칵 토해 낸 물이 주르륵 흘러나와 카이로의 샅을 잔뜩 적셨다.
“아, 아, 아아아앗!”
길게 비명을 지른 리체가 자지러지며 앞으로 축 늘어졌다. 카이로는 착 달라붙은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리체는 그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색색, 가쁜 숨을 쉬었다. 바르르 떨리는 몸은 연신 잔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좋았나?”
“주, 죽을 거 같아, 요.”
앓는 듯한 신음소리. 카이로는 느슨히 풀린 얼굴로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안에 박힌 성기는 아직도 부족하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끙, 신음을 흘린 카이로가 리체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웅얼거렸다.
“그대는 너무 작아서, 강하게 안으면 부서질 것 같아.”
불만스러운 기색이 깃든 목소리였지만 카이로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자국이 남은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계속해서 쓰다듬기를 몇 분, 리체의 엉덩이가 움찔 떨렸다. 굳은살이 잔뜩 있는 단단하고 거친 손가락에 여린 살이 쓸리자 야릇한 감흥이 되살아났다. 더불어 안에 박힌 그의 것은 조금도 시들지 않은 채 그대로여서, 스스로 움찔거리며 그녀의 내벽을 자극하고 있었다.
리체는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흥분을 참으며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카이로의 어깨가 움찔 굳어졌다.
카이로에게 끌어안긴 리체는 거대한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여우 같았다.
160센티를 살짝 넘는 그녀를 가뿐히 감당하는 카이로의 신장은 190센티를 웃돌았고, 덩치는 리체의 두 배는 될 듯했다. 게다가 각종 훈련과 전쟁터에서 다져진 육체는 돌덩이처럼 단단해서 한 번 밀어붙일 때마다 거대한 산에 깔리는 기분이었다.
잠자리 매너가 좋지 않았더라면 진즉 아래가 찢어졌을 터였다.
“피곤하진 않아요? 씻고 휴식을…….”
“전혀.”
카이로가 단호히 일축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리가 있나.”
나직하게 웃는 소리에 리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섹스는 기분 좋다. 이 차원에서 알게 된 섹스의 쾌감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이 차원에 떨어진 상황에 대한 불만도 어느 정도 불식시켰다. 하지만 전쟁터를 뒹굴고 와 욕구가 잔뜩 쌓인 카이로는 불타는 돌덩이 같았으므로 체력적으로 부담이 됐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쾌감 역시 벅차 리체는 은근슬쩍 그의 관심을 섹스가 아닌 다른 곳으로 흘리려 했다.
“할 일이란 건 황궁에 보고하시러 가는…….”
카이로가 슬며시 웃었다.
“갑자기 몸이 긴장하는군.”
낮아진 숨소리에 귓가의 솜털이 곤두섰다. 속내를 들켰나 싶어 혀를 깨물었던 리체는 몸이 뒤로 넘어가자 어어,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풀썩.
침대에 떨어진 리체는 눈을 살짝 떴다. 바로 앞에 카이로가 나른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큰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감쌌다.
“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오랜만인데도 잘 느끼는 걸 보면.”
“…….”
“그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 몸을 다른 사내에게 허락한 건 아니겠지?”
부드러운 눈은 그저 장난을 치는 듯했지만 괜히 가슴이 찔린 리체는 시침을 뚝 떼고 눈을 내리깔았다. 촘촘히 드리워진 속눈썹이 눈가의 음영을 만들었다. 처연한 분위기였다.
“그런 적 없어요. 순결한 몸인걸요.”
물론 ‘순결’이란 말은 우스웠다. 처녀인 적도 없고 이 차원에 떨어지고 나서는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 몇 번이나 마음 없는 섹스를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순결은, 애초에 갖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순결을 말하는 리체의 눈은 드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처럼 맑고 깨끗해서 도저히 그녀가 속 시커먼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혓바닥이 긴 문벌 귀족들과 말씨름하는 것보다 수백 수천의 적군 군대와 칼을 맞대는 게 편한 천생 전장의 기사인 카이로가 그녀의 속마음을 훔쳐보는 건 책상물림 문신이 적장의 목을 따 오는 것만큼이나 요원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리체의 천진한 말투에 얼굴 가득 흥분을 드러냈다.
사내답게 잘생긴 낯이 기분 좋게 풀어지자, 그 미소는 얼굴 곳곳 자잘하게 난 흉터에도 불구하고 그를 꽤 부드러운 사내로 보이게 했다.
리체는 갑자기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가는 다리에 입을 벌렸다.
오금을 붙잡고 위로 쭉 올린 카이로가 검붉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무릎이 거의 얼굴까지 올라와서 숨쉬기가 불편해진 리체가 하악,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확인하기 전에는 못 믿겠는걸.”
성기가 빠져 빠끔대는 구멍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얼굴이 가까웠다. 리체는 허리가 반쯤 허공에 들린 상태로 턱을 당겼다. 그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몸이 공처럼 말려 불편했지만 그의 뜨거운 숨결이 자꾸 다리 사이에 닿아서,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출정하는 병사들은 집 안에 둔 예쁜 와이프 걱정에 한숨을 쉬지. 누가 훔쳐 가지는 않을까, 누가 내 와이프를…….”
후욱. 아직 물기에 젖어 있던 음부가 서늘해졌다. 구멍을 향해 바람을 분 카이로의 눈이 느릿하게 휘어졌다.
“따먹지는 않을까.”
“흐윽!”
그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덮은 꽃잎을 양옆으로 벌렸다. 공기가 더 잘 통하는 감각에 리체는 물밖에 내 쳐진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누가 이걸 눈독 들인다고 생각하면 눈알이 뒤집혀서.”
“…….”
“벌써 머릿속으로 얼굴도 모르는 사내의 머리를 맨손으로 깨부쉈다고.”
쾌감이 찌릿찌릿 올라왔다. 리체는 수치스러움과 기대감에 입을 다물고 끙끙거리기만 했다. 카이로는 그녀의 반응을 눈만 굴려 확인하고는 다시 그녀의 구멍으로 신경을 돌렸다.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처럼 진지한 얼굴로 구멍을 만지작거리는데, 허리 아래의 남근은 뭐라도 뚫어 버릴 것처럼 흉흉하게 올라붙어 있었다.
“……예쁜 분홍색이야.”
“…….”
“아주 순결해 보여.”
만족스러운 투로 중얼거린 카이로는 배부른 늑대처럼 미소 지었다. 살짝 혀를 내밀어 음부를 덮었다.
“아……!”
예상 못한 부드러움에 깜짝 놀란 리체가 몸을 튕겼지만 반쯤 접힌 몸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기만 했다.
그녀의 허벅지 뒤쪽을 잡고 자세를 고정한 카이로는 혀를 좀 더 내밀었다. 두툼한 혓바닥이 날름, 음부를 아래에서 위까지 길게 핥아 올렸다. 천천히 깊게 쑤시고 올라온 혓바닥이 음핵에 닿자 혀끝을 세워 강하게 튕겼다.
짜릿!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흐으으읏.”
리체의 고정된 다리가 부들부들 경련했다.
* * *
“하아, 하! 카, 이로 님!”
허공에 흔들리는 다리는 적나라한 교접 장면을 보는 것보다 색스럽게 느껴졌다.
허벅지 뒤쪽이 자꾸만 밀어젖혀져 하반신과 상반신이 붙을 듯했다. 불편한 자세에 리체가 버거운 한숨을 쉴 때마다 달콤한 향내가 퍼져 나왔다.
그녀에게 제 성기를 처박는 카이로는 제 몸의 반밖에 되지 않을 여체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만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후끈 달아오른 섹스의 열기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도 여지없이 전해졌다.
“……!”
문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델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의식적으로 꾹 다문 입 안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분출할 곳 없이 답답하게 맴돌았다.
‘저거 베타가 아니었어?’
아니 그보다.
‘레이몬드는 알고 있는 거야?’
놀랄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베타인 줄 알았던 저 오메가가 깜찍하게 자신을 속이고 레이몬드와 놀아나 그를 각인시켰다는 것은 둘째 치고, 또 다른 섹스 상대가 카이로 스트리고라니?
이건 말도 안 되었다. 이델리는 그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만 해도, 두 형제를 농락했다는 죄목으로 접근 금지라는 치욕스러운 대우를 받지 않았던가.
고작 데이트와 키스를 나눈 자신도 이럴진대, 같은 구멍에 뒹굴었다는 게 알려지면…….
레이몬드에게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심각한 얼굴로 머리를 굴리던 이델리는 이게 자신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쨌든 저 앙큼한 베타가 스트리고 백작과 그렇고 그런 관계란 말이지? 보아하니 하룻밤 장난감도 아닌 것 같고.’
이델리는 귀 좋은 카이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섰다.
베타가 오메가란 사실은 놀라웠다. 하지만 그렇게 페로몬이 미약하다면 열성 오메가일 터.
카이로가 열성 오메가에게 반한 것이다. 단단히 빠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전투가 끝나고 수도에 입성하자마자 입궁하는 대신 여자를 찾을 리 없었을 테니!
‘열성 주제에 제법인걸.’
별 볼일 없는 오메가가 한때 자신의 타깃이었던 카이로를 사로잡았다는 데 이델리는 배알이 꼴렸다. 카이로는 그녀의 페로몬이 잘 통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한두 번 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가벼운 호감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와중에 레이와 키스했다는 것을 들켰으니 그때도 무뚝뚝하고 고지식했던 카이로가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다. 그때 그녀는 너무 어렸고 미숙했다. 그렇게 얼치게 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레이와 카이로 둘 다 이 손안에 있을 텐데.
이델리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뭐, 짜증 나지만 괜찮아. 카이로는 너 가져, 리체. 레이몬드만 눈독 들이지 않으면 되니까.’
제법 너그러워진 스스로에게 미소 지으며 이델리는 관대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신을 농락한 열성 오메가에게 한 마디 경고는 해 주어야 했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면 곤란하지 않은가?
게임 속 오메가가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