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4/25)

4장

“아, 아파, 으으.”

“흐으으윽, 사, 살려 줘……. 컥!”

망자의 귀곡성과도 같은 신음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꺼지지 않은 불의 잔재가 제 품으로 쓰러진 병사를 태우는 냄새와 땀과 피가 흙에 스며든 악취가 사방에 진동을 했으나 전투가 끝난 전장을 누비는 병사들에겐 저녁 식사의 빵 냄새만큼이나 익숙했다.

병사들은 쓰러진 적군 시신의 위로 칼을 꽂아 넣으며 확인 사살을 하고 있었다.

푹!

“억!”

시체 아래 깔려 숨죽이던 적군 병사가 단말마를 외쳤다. 아군의 시체를 끌던 병사들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장군!”

“야이, 멍청한 놈들아! 다 죽어 가는 놈도 못 알아차리냐!”

우렁우렁한 고함으로 병사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 남자가 투구를 벗었다. 주륵,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친 남자는 붉은독수리의 백인대장 하먼드였다. 그는 피로에 지친 얼굴을 드러냈다.

“휴우. 이 짓도 거의 끝나가는군요. 장군, 이따 어디로 쉬러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시선은 이번 이블린 도시 정벌의 사령관이자 본인이 속한 붉은독수리의 단장인 카이로에게 향했다.

카이로는 아직까지 들고 있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본래 은빛이었던 칼날은 핏물을 머금어 그 예기를 잃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목을 베었는지 그의 무구가 증명하고 있었다. 핏물에 절은 검은 장갑을 벗고 얼굴을 쓸었다. 뺨에 튄 핏방울이 손바닥에 쓸려 턱까지 길게 묻어났다.

식은 시신의 피보다 검붉은 눈동자와 피가 묻은 구릿빛 얼굴은 그야말로 전장의 악령과 다름없었지만 카이로는 검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겐 신과 같은 존재였다.

하먼드는 그의 두려운 외양에 경외감과 감탄을 동시에 느꼈다.

“이렇게 빨리 전투를 끝낸 건 역시 장군 덕분입니다. 허약한 이블린 놈들이 도망가는 걸 황궁의 반전쟁 주의자들이 봤어야 하는데요!”

언제 피로감을 느꼈냐는 듯 호탕하게 웃는 하먼드에 이어 다른 기사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 멍청이들이야 뭐 하나 맞는 말을 하는 게 없습니다. 이번 정벌이 두 달은 족히 걸릴 것이라 했는데 그 반도 안 되는 시간에 해치워 버렸지 않습니까.”

“엿 먹이고 싶어서 일부러 하나 죽일 때 이 악물고 두 개 죽였지 않냐.”

“허참, 장군도……. 두 개가 아니라 네 개입니다!”

껄껄껄껄, 호탕한 웃음이 터졌다.

“태자 전하께서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얼른 정리나 하지.”

카이로가 피식 웃으며 마무리를 하려 하자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장군들이 음흉한 얼굴로 카이로를 응시했다.

“장군, 이게 그냥 제 느낌인지는 모르겠는데 평소보다 서두르시는 눈치인 것 같습니다? 혹시…….”

낄낄 떠드는 사이 긴장이 풀린 하먼드의 눈에 능글맞은 기색이 떠올랐다.

“혹시 뭐.”

“이블린의 오메가들 때문에 그러십니까?”

베타인 하먼드는 알파오메가의 습성에 대해서는 이론적인 것밖에 몰랐지만, 상관인 카이로가 오메가밖에 안지 못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인의가 사라지고 도덕이 흐려지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은 살의를 느끼고 이어 성욕을 느낀다.

그런 상황에서는 넣고 흔들 구멍만 있으면 되지 알파고 오메가고 베타고 가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나, 카이로는 오메가가 아니고서는 품지 않았다. 그런 그를 두고 성적 결벽 주의자라고 수군대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런 건 그의 위업에 빗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들 전투의 흥분을 여자로 푸는 와중에도 유유자적 검을 손질하는 모습은 눈길을 끌 만했다. 누군가는 그의 신분이 대장군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시선을 보내었는데, 남색이라든가 무성욕자로 의심하기엔 휘하 수하들은 그의 왕성한 성욕을 잘 알고 있었다.

카이로는 전쟁터의 흥분을 모조리 수도의 고상한 여자들에게 푸는 것뿐이었다. 다만 그의 결벽적인 성격이 피와 폭력성이 들끓는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데는 모두 동의했다.

“이블린의 성주를 시키면 가장 예쁜 오메가를 대령할 겁니다.”

“그 얼빠진 성주 놈이 여자 대는 건 약삭빠르게 잘한다데요. 전투 시작 전에는 그렇게 뻗대더니 지금은 시무룩한 게 거시기 거세된 놈 같다니까요. 하하!”

“그냥 진 것도 아니고 완패를 했는데 어디 목 빳빳이 들고 있겠습니까. 저 같으면 창피해서 오줌도 못 쌀 겁니다.”

“어쨌든 장군, 어서 가시죠. 이블린 것들도 저희보다는 장군을 반기지 않겠습니까? 알파오메가 전용 창관이 이런 외곽에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카이로는 피가 흘러 검붉어진 땅에 쌓인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눈빛이 황폐한 땅을 쓸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에 향했다.

이블린은 도블락과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마주한 이웃 왕국으로, 도블락보다 규모는 작으나 대신 문화가 융성한 나라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아담한 몸, 흰 피부는 그네들 민족 특성으로 병사들은 떡치기에 좋다고 시시덕거리지만 카이로는 그들을 보며 다른 이를 떠올렸다.

두 달 전에 몸을 섞었던 클럽의 여자 종업원. 열성 오메가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상대의 머리카락도 꼭 저 이블린인처럼 까만색이었다.

문득 죽은 시신을 보며 그녀를 떠올리고 있단 사실이 불쾌해져 눈살을 찌푸렸다.

하먼드의 지적처럼 저도 모르게 검을 빨리 휘둘렀던 건 사실이었다. 서둘러 이곳을 정리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전쟁이 지겨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제 마음이 이미 도블락에, 그것도 하찮은 알파오메가 클럽에 닿아 있다는 걸 깨달은 카이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떡 정이 든다는 것이 이런 건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임무까지 후순위가 될 정도로 여자가 신경 쓰인 적이 없었건만.

자신의 상태가 낯설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음은 그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일어났고, 그녀를 보고 싶은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장군.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음담패설에도 반응 않고 서 있기만 하는 그의 상태가 이상한지 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금세 무뚝뚝해진 카이로가 입을 열었다.

“내일 적 사령관과 협상을 마무리하면 할 일은 끝인가?”

“그렇죠. 메이어른의 성에서 즐길 생각을 하니 몸이 다 근질거립니다. 이블린의 여자들은 아주아주 아름답다는군요.”

들떠 있는 그들에게 카이로는 찬물을 끼얹듯 차분히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도 되겠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협상은 재상의 일이니 내가 더 있을 필요는 없잖나.”

“그,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막 전투가 끝났는데 몸은 푸셔야 하지 않습니까?”

전쟁을 끝낸 병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술과 푸짐한 음식, 그리고 여자였다. 쌓인 욕구를 적절히 풀지 못할 경우 군령을 어기거나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건 군대의 불문율이었고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누릴 자격이 있는 카이로가 이대로 돌아간다니, 놀란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네들은 즐기게. 나는 먼저 본국에 돌아갈 테니.”

“정말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카이로는 만찬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묘한 미소를 지었다.

“더는 참을 수 없군.”

얼른 그 작은 얼굴을 봐야겠어.

* * *

카이로 스트리고가 황태자의 명으로 벌였던 이블린 도시 정벌 전쟁을 끝낸 그 시각, ‘그의 리체’는 난봉꾼에게 노려지고 있었다. 퀸은 손님들의 취향을 고려한 프라이빗한 가구 배치를 선호했다. 테이블끼리의 거리가 멀었고 파티션도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어 그 안에서 파트너와 즐거운 손장난을 치든 음란한 밀어를 속삭이든 자유롭게 사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 퀸의 1층 구석 자리에 모자를 깊이 눌러쓴 청년이 앉아 있었다. 하얀색 소매가 달린 갈색 웨이스트코트는 헤진 데 없이 깔끔했지만 색이 칙칙하여 눈에 띄지 않았다. 비슷한 색의 폭이 넓은 랭그바브와 그 아래 검은색 퀼로트를 받쳐 입었는데, 하나같이 어두운 색상인지라 언뜻 그림자 속에 녹아든 것 같았다. 남자가 있는 곳이 유독 조명이 비추지 않는 곳이라서 더 그랬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농부나 하급 상인이라기엔 남자의 옷이 고급이란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기골이 장대했고 어깨가 떡 벌어져 위압감을 주기 충분했지만 지금 남자는 챙이 넓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 사람들은 클럽에 놀러 온 촌뜨기 상인이라고만 생각하고 정체를 깊게 따지지 않았다. 그가 마시는 술도 퀸에서 가장 싸구려인 붉은색 럼주였다.

대접처럼 큰 맥주잔에 든 럼주를 꿀꺽꿀꺽 마시는 남자의 고개가 미묘하게 틀어졌다. 모자 아래 드리워진 그늘 속에서 붉은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의 눈동자는 약간 탁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칙칙한 겉모습과 달리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바(bar)에서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고 여성 종업원에게 꽂혀 있었다. 흰 얼굴에 무표정하지만 미소는 상냥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가 셰이커의 뚜껑을 열고 칵테일 잔에 맑은 하늘색 음료를 따랐다. 그것을 앞에 있는 손님에게 건네주자 아까부터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만을 뚫어져라 보던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불꽃이 수놓인 화려한 로브에 단추가 많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뒤를 지나가며 코를 킁킁거렸다. 공작새처럼 부를 온몸으로 뽐내는 남자는 지나가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향수 냄새가 짙었다. 클럽을 출입하는 베타들의 흔한 차림이었다. 나지 않는 페로몬을 그럴싸한 향수로 대체하는 것이다.

남자가 칵테일을 마시며 온갖 찬사를 늘어놓았다. 아름다운 여자를 하룻밤 꼬여 내는 데 사력을 다하는 바람둥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붉은 눈의 남자는 같잖은 수작을 부리는 공작새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 하찮다는 시선은, 여자가 별것 아닌 말에도 웃으며 대꾸하는 것을 보았을 때 처참하게 비뚤어졌다.

“저게 미쳤나…….”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하인의 옷을 입고 들어온 퀸에서 레이몬드는 장난기가 솟았다. 리체의 일하는 모습을 구경할 겸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잡았는데, 그녀가 기대했던 리체의 ‘평범하게 열심히 사는 모습’ 대신에 남자들이 추근대는 것이나 주야장천 보게 된 지금 표정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알파 손님들은 베타처럼 보이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걸 보며 역시 리체에게는 자신이 가장 큰손일 것이다, 하며 내심 거들먹거렸던 레이몬드였으나 이게 웬걸, 페로몬도 없는 베타들이 꽃에 꼬여 드는 벌, 아니 파리처럼 모여드는 게 아닌가.

느끼하게 움직이는 입술이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레이몬드는 듣지 않아도 훤했다. 여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칭찬하고 있겠지. 그가 써먹는 수법들이었으므로. 거기까지는 약간 언짢기만 했을 뿐이었지만, 남자가 리체의 손목을 붙잡고, 리체가 웃으면서 손목을 흔들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간만에 아주 마음에 들었던 오메가가, 다른 놈 앞에서도 암내를 풀풀 풍기고 있는 것이다.

피가 거꾸로 선 레이몬드는 남은 술을 한 입에 털어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조용히 매니저를 불러 주인께서 리체를 지명했다고 알렸다. 레이몬드가 숱하게 댔던 가명을 대자 매니저는 돈 많은 베타 손님이 리체를 어지간히 마음에 들어 하는구나 싶어 의심 않고 방을 잡아 주었다.

먼저 방에 들어간 레이몬드는 리체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그녀를 곧장 낚아채 잡아 뜯듯 옷을 벗겼다.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곧장 옷이 벗겨져 당황한 리체를 보면서도 페로몬을 뿜어 그녀를 흥분시키고 품에 안았다.

시작부터 격렬한 교접에 체력이 약한 리체가 흐물거리며 레이몬드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그러자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몸을 몇 번이고 안으며 화가 풀렸던 레이몬드의 움직임도 달콤하게 변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리체는 여전히 레이몬드와 끈적하게 얽히고 있었다.

“헉, 흣!”

리체의 통통한 엉덩이를 꽉 움켜쥔 레이몬드의 아랫배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이미 수차례 절정에 달한 리체의 아랫도리는 물에 적신 것처럼 흥건했다.

“크흑!”

리체의 안에 물처럼 묽은 정액을 사출한 레이몬드는 성기를 빼는 대신 리체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리체는 잔뜩 지쳤지만 방금 시작된 레이몬드와의 대화에 흥미가 생겨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서요? 알파로 발현한 건 언제였는데요?”

“열두 살 때 즈음.”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한 레이몬드는 리체의 등에 가슴을 맞대고는 그녀의 귀엽게 동그란 귀를 입술로 지분거렸다. 후희를 즐기는 그와 달리 즐길 거 다 즐기고 만족한 리체는 그의 추근거림이 조금 귀찮았다. 그래도 밀쳐 내지 않고 참아 냈다. 색사는 끝났지만 할 일은 남아 있다.

“원래, 알파란 건, 으음, 태어났을 때부터 알게 되는 건가요?”

레이몬드가 가슴을 주무르며 대꾸했다.

“보통은.”

“…….”

“나 같은 경우는 형이 워낙 강한 알파였으니까, 발현이 늦었지.”

“그게 관계가 있어요?”

“있다대. 내 기질이 형에게 눌려 버렸대. 씨발, 태생부터 문제였다 이거지.”

다른 때 같았으면 형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신경질을 냈을 텐데, 정사가 만족스러웠던 덕일까.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순순히 열등감의 근원을 언급했다. 그를 눈치챈 리체는 잘됐다 싶어 내심 쾌재를 불렀다.

“고생이 많았겠어요.”

“낯간지럽게 무슨……. 부모님은 내가 돌연변이인 줄 알았대. 돌아가실 때까지도 날 보지 않으셨지. 베타인 줄 알고 말이야. 아버지는 어머니가 바람 피웠을 거라고 의심했어, 죽을 때까지.”

생각보다 무거운 이야기였다.

“우습게도 부모님의 장례식에서야 내 페로몬이 드러나더라고.”

“왜 갑자기?”

“글쎄. 형이 작위 계승 문제로 집을 자주 비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형의 페로몬 영향에서 벗어난 뒤에 발현이 된 걸지도 모르지. 정말 지긋지긋하게 열등한 몸이야…….”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졌다. 그는 입술을 리체의 마른 목덜미에 묻고는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게 웅얼거렸다. 입 모양으로 알아듣기로는 ‘하지만 네 음란한 몸을 발견한 건 나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약간 불쌍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미친놈.

리체는 이 문제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더 파고드는 건 레이몬드의 정신 건강상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므로.

연구 대상의 상태를 면밀히 파악하는 건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 꽤 중요한 문제였다.

“그럼 오메가 페로몬을 감지했던 건, 언제? 알파 페로몬이 발현된 후에?”

레이몬드는 무심코 대꾸했다.

“그렇겠지. 이델리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

“…….”

“아하, 그랬군요.”

리체의 감탄사에 레이몬드가 움찔했다. 말을 잘못했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다르게 리체는 기분이 상한 게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알고 있는 가장 월등한 오메가의 언급에 가볍게 흥분했을 뿐이었다.

“그럼 처음으로 결합한 오메가는 이델리 그레이스? 아, 아니겠군요. 그녀와는 한 번도 관계하지 않았다고 했죠. 그럼 다른 오메가? 설마 베타인가요?”

레이몬드는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에 리체는 이상한 질문을 했나 싶어 눈을 굴렸다. 문득 그녀의 몸이 뒤집혔다.

팔로 그녀를 가둔 레이몬드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또 왜 저래.

리체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근육질 상체가 보였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었다. 다소 방탕한 생활을 했기는 해도 수련을 빼먹지 않는 그의 신체는 근육이 오밀조밀 잡혀 있어 섹시했다. 큼, 헛기침을 하고 옆으로 시선을 피한 리체가 어물거렸다.

“갑자기, 왜…….”

“넌 정말 이상한 여자야. 그런 것들이 궁금해? 싫은 게 아니라? 왜?”

리체는 어색하지 않게 미소 지었다. 레이몬드는 제법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르지만 단순한 편이어서, 리체는 어떤 말을 해야 그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지 알았다.

“레이몬드 님에 대해서는 뭐든지 알고 싶으니까.”

“……하여간 대답은 잘하지. 앙큼하기는.”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듣기 나쁘지는 않은 듯 입이 찢어지게 웃는다. 그러자 인상이 놀랍도록 개구지게 변했다.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늘 인상을 쓰고 있어 짜증스럽고 거친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다리미로 편 옷감처럼 구김살 없이 깨끗했다. 장난기 많은 소년 같았다.

레이몬드는 리체를 껴안고 침대에서 한 바퀴 뒹굴었다.

그의 품에 꽉 안긴 채 리체는 머리를 굴렸다.

‘뭐, 눈치채진 않았겠지.’

침대 끝까지 데구루루 굴러간 뒤 레이몬드는 리체의 허리를 껴안고 고개를 들었다. 형제는 형제라고 이목구비는 카이로를 닮았지만 그보다는 귀염상이었다.

‘카이로 스트리고는 어른스럽고 성숙한 편이었는데.’

리체는 간혹 그가 언급했던 레이몬드를 떠올렸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 카이로는 이 열등감에 찌든 동생을 상당히 귀여워하고 있는 듯했다.

지나치게 뛰어난 형을 둔 죄로 알파로서의 정체성도 잃어버린 레이몬드의 상처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리체는 제법 다정한 손길로 그의 붉은 곱슬머리를 뒤로 쓱 밀어 넘겨 주고 뒷머리를 토닥거렸다.

인상을 찡그린 레이몬드는 그녀의 손을 잡아채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야.”

신음을 듣고는 물었던 부분을 혀로 간질이고 입술로 문질렀다. 눈매가 얄궂었다.

“이게 어디서 어린애 취급이야?”

입술의 체온이 손가락으로 옮겨 왔다. 야릇한 기분에 리체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을 지그시 주시하며 레이몬드는 혀를 길게 내밀어 가느다란 손가락을 막대 사탕이라도 된 듯 핥았다.

“근데 언제까지 이렇게 귀찮게 만나야 해? 여기 불편한데.”

그에게 손을 맡긴 채 리체는 눈을 깜박였다.

레이몬드는 만남을 비밀로 해 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생각보다는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퀸에 올 때는 가문의 문장이 없는 삯 마차를 타고 오고, 신분도 도련님을 모시는 하인으로 위장했다. 하인에게 레이몬드의 행세를 시키고, 리체를 지명한 다음, 그녀와 뒷방에서 떡을 친다. 지금쯤 하인은 그가 시켜 준 술과 안주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나름 재미있다면서요.”

“처음에나 그랬지, 씨발. 귀찮아 뒤지겠어.”

“불필요한 관심을 받을 필요는 없잖아요. 이상한 시선을 받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건…….”

반박하려던 레이몬드는 생각이 어디에 미쳤는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그래. 다들 내가 이델리에게 껄떡대는 게 그레이스 공작가를 집어삼키고 싶어서라고 멋대로 떠들어 대니까. 다들 주리를 틀어 버려야지.”

“…….”

“알려지면 네게 관심이 쏠리겠지. 그런 건 좀 별로네.”

리체는 ‘그렇구나’ 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언제 알파로 발현했는지, 오메가의 페로몬은 어떻게 느끼게 됐는지를 물었을 때와 달리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았지만 레이몬드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리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있지. 아, 씨발. 왜 이렇게 말이 안 나오냐. 그거 사실 아니야.”

“네?”

“왜 못 알아듣는 척이야. 그거 사실 아니라고.”

레이몬드가 씩씩거리며 리체를 노려보았다. 리체는 도대체 이 미친놈이 또 뭐에 꽂혔는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비록 남부러울 것 없이 성공하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긴 했지만 수치스럽게 여자에게 빌붙어 성공하고 싶지는 않아. 씹, 그럼 쪽팔려서 좆을 떼 버려야지.”

“…….”

“내가 좆도 없어도 여자 하나는 손에 물 하나 안 묻히게 먹여 살릴 수 있다고.”

“…….”

“그러니까 이델리와는,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거야. 알아들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리체는 귀가 멍멍했다. 그 얘길 왜 나한테 하냐는 시선으로 레이몬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을 꾹 다문 레이몬드의 입매가 어딘지 씁쓸했다.

“하지만 그녀를 좋아하잖아요?”

“뭐?”

그런 소리를 그녀에게서 들을 줄 몰랐다는 듯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리체는 그날 이델리 그레이스와 그녀의 남자들을 서빙하러 들어갔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이델리와 레이몬드는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면서 기 싸움을 했지만 그건 상대를 혐오하는 싸움보다는 애정 싸움에 가까웠다.

애초에 사교계의 탕아라고 불리는 두 사람이 서로를 곁에 두면서도 여태껏 몸을 섞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충분히 수상하지 않은가.

그들의 관계는 리체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레이스 공작 영애는 레이몬드님께 다른 여자들과 다른 의미인 거잖아요.”

“그런 건,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레이몬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리체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이 파묻혔다. 머리카락이 간지럽다. 그녀는 레이몬드의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슴살에 파묻힌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너한테 듣고 싶지는 않아.”

“…….”

“아니, 씨발, 생각해 보니까 웃기네. 넌 이델리 얘기를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고개를 든 레이몬드가 물었다. 천장에서 시선을 끌어온 리체는 어떤 표정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무표정을 택했다.

“전 그럴 주제가 되지 않잖아요.”

신분제가 없는 본 차원과 달리 이 차원의 신분제는 꽤 공고한 편이다. 거기다가 한층 복잡하기까지 했다. 알파오메가는 베타보다 좀 더 값을 쳐주고, 귀족 작위를 갖거나 재물이 있는 집안은 능력이 뛰어난 알파오메가를 입양하길 원하며, 작위가 있는 알파오메가가 사교계를 지배한다.

이곳은 유전적 형질과 타고난 환경으로 급을 나누는 사회였다.

여기서 리체는 (대외적으로는)베타이자 알파오메가를 대상으로 술을 파는 클럽의 종업원이다. 즉, 최하류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메가로 형질 발현하였을지라도, 돈 많은 베타만 못한 처지. 그러니 오메가이자 공작 가문의 금지옥엽인 이델리 그레이스를 향해 자존심을 세울 수 없는 게,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당연한 일일 터였다.

사실 이델리 그레이스를 비롯한 그들 알파오메가는 그녀에게는 연구 대상에 불과했지만 최소한 레이몬드에겐 그녀의 말이 잘 먹힌 듯했다.

“……굳이 그렇게 자학할 필요는 없는데.”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속내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레이몬드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리체는 환영했다.

“아, 형에게서 편지가 왔어.”

금방 긴장했지만.

“……형님께서요?”

“어제 집에 가니 배달부가 두고 가더라고. 정벌 전쟁이 곧 끝날 것 같대.”

리체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레이몬드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형이 오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고 말할 거야.”

리체는 움찔했다. 또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전에 했던 말은 그가 흥분해서, 기분에 심취해서 그냥 흘린 말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보다 퍽 진지했다. 그냥 웃으며 넘기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귀찮게…….’

그놈의 결혼. 지겨웠다.

“표정이 왜 그러냐, 씨발?”

그 기색을 예민하게 눈치챈 레이몬드의 얼굴이 삽시간에 사나워졌다. 손가락에도 힘이 들어가 젖꼭지가 아릿하게 아파 왔다.

“죽어도 싫은 표정인데? 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면 뭐야. 좋단 거야?”

약간 누그러진 눈은 리체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전보다 매섭게 변했다.

“씹, 싫다는 거네.”

“…….”

“그렇게 싫냐? 나처럼 별 볼일 없는 새끼한테는 오고 싶지 않아?”

“왜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럼 뭔데? 네가 좆같은 얼굴을 하잖아.”

이 미친 떼쟁이 새끼.

“말했잖아요. 자신이 없다고…….”

리체가 쓸쓸히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꽤 아련하게 보일 것이다. 레이몬드에게도 퍽 잘 먹힐 테고.

예상대로 약간 가라앉았지만 흥분이 가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난 너랑 있으면 좋아.”

“…….”

“너도 그렇지 않아? 그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야?”

그러니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레이몬드를 보며 리체는 그의 청혼이 그다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에게 결혼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벼웠다. 그녀를 부인으로 들인 후에 밖에서 여자를 만나러 다닌다 할지라도 리체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저, 레이몬드 님.”

리체는 철부지 도련님을 달랠 요량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언뜻 큰 용기를 냈다는 듯 숨을 깊이 들이마시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

레이몬드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구겨졌다. 그가 성질을 부리기 전에 리체가 철없는 어린애를 어르듯 나긋하게 말했다.

“저와의 결혼은 레이몬드 님께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을 거예요.”

“뭔 이익. 사업하냐? 결혼에 무슨 이익을 따져. 내가 가문을 이을 장남도 아니고…….”

“그게 아니죠. 레이몬드 님은 충분히 매력적인 남편감인걸요.”

“…….”

“그런데 저와 결혼하면, 그 평판에 흠이 가지 않겠어요?”

리체는 부러 한숨을 쉰 뒤 레이몬드의 품을 파고들었다. 땀내와 체액 냄새가 섞인 야릇한 체향이 맡아졌다.

“레이몬드 님은 언젠가 형님 아래서 벗어나 새롭게 가문을 일으키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 꿈에 저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까?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는 탕아도 좀 더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과연 레이몬드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리체가 후우, 한숨을 쉬는데 돌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놀란 리체가 숨을 멈추었다. 레이몬드가 배시시 웃었다.

“씹, 그딴 건 괜찮아.”

아니, 괜찮으면 안 되는데.

“물론 신부 가문의 힘을 빌리면 훨씬 수월하겠지만, 네가 도움이 되지 않는 만큼 내가 더 열심히 할 거야. 형의 도움을 받기는 싫어. 하지만 그래야 한다면 도움을 청할 용의도 있어.”

“…….”

“그러니까 넌 그런 건 걱정 마.”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너 말곤 싸지도 못해. 누가 이런 병신한테 시집오겠냐.”

“하하……. 그건 그런데…….”

“그렇지?”

그녀는 애써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좀 미뤄 주시면 안 될까요?”

“왜지?”

리체는 이번에는 한껏 흐린 표정을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처럼. 머릿속은 가열하게 돌아갔다.

결혼을 잠시 미룰 수 있을 만큼의 변명거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장 쉬운 건 내밀한 속사정, 즉 가족을 파는 방법인데 그녀가 가족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종업원이 많았으므로 들킬 위험이 크다. 거짓말을 잘해도, 들통이 난다면 최악의 결과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결국 리체는 그저 아련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밀스러운 사정이 있다고 추측하게끔.

레이몬드는 불만스러운 듯이 눈썹을 찌푸렸지만, 결국 한숨을 쉬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알았어. 더는 조르지 않을 테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

“보지가 쓰리든 말든, 당장 좆대가리 처넣고 싶으니까…….”

안쓰러운 게 아니라?

‘날 머리 아프게 하다니, 정말 난 놈이네, 이 원주민.’

레이몬드의 어깨에 턱을 괸 리체는 한숨을 쉬었다.

* * *

카이로 스트리고.

스트리고 백작가의 주인. 출정을 나간 탓에 그의 방은 두 달 간 주인을 잃은 상태였지만 하인들의 정성 어린 손길에 벽난로에선 불이 피어오르고 카펫은 깨끗했다.

끼익.

작은 소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레이몬드는 따뜻한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주인이 없는데도 여전히 고고하네.”

불만스럽게 빈정댄 그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황실의 검으로써 권세를 굳혔던 스트리고 가문. 선대 백작의 무능함으로 쇠락해 가는 듯했던 가문은 카이로 스트리고가 황태자의 가장 충직한 검이 됨으로써 다시금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참으로 안목도, 운도 좋은 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작은 세력의 황자가 황태자가 되고, 나아가 황제가 될 게 명확하니, 황태자가 떡잎일 때 주군으로 선택한 카이로는 어떻게든 될 사람인 게 분명했다. 도박이 완벽히 성공한 것이다.

레이몬드는 벽에 걸려 있는 스트리고의 창을, 이제는 형의 것이 된, 과거 동경했던 가문의 창을 매만졌다. 아련함을 떠올린 붉은 눈은 곧이어 싸늘하게 식었다. 손으로 창을 쳐올렸다.

챙그랑!

떨어진 창을 발로 지그시 짓밟았다. 형에게 모든 관심이 쏠린 가문의 인정을 한 자락이라도 받고 싶어서 아등바등했던 과거가 머릿속을 스쳤다. 수치스러운 한편, 익숙한 좌절감이 발밑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꾸욱. 가문의 보물을 짓밟은 발에 힘이 들어간다.

형, 카이로 스트리고에 대한 묵은 열등감은 켜켜이 쌓인 녹처럼 두껍고 억세었다. 평생 가도 씻겨질 리 없으리라.

어느 때고 잊은 적 없다. 술을 마실 때도, 심지어 여자를 안을 때도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패배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레이몬드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목덜미가 뻐근할 정도로 묵직한 열등감과 패배감이 한순간에 잊혀질 정도로 강렬한 감각이었다.

바로 여자 하나에 의해서.

‘결혼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꺼져 주지.’

형의 영역. 평생 동안 갈망했고, 좌절했고, 그러다가 증오하게 된 그의 공간.

레이몬드는 차가운 눈으로 땅을 나뒹구는 가문의 창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는 형을 이기고, 최고의 기사란 타이틀을 가슴에 당당하게 달고 가문을 박차고 싶었다. 평생 가도 형을 이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을 놓았다.

하루 반나절을 매달렸던 수련도, 금욕적인 생활도 때려치웠다.

그러나 그는 요즘 다시 수련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고 싶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스스로가 그렇게 될 거라고, 전혀 예상한 적 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거절은 짜증나지만, 좋아, 괜찮아. 더 기반을 다진 뒤에 가정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레이몬드는 굳은 얼굴에 미소를 걸었다.

똑똑.

“들어와.”

문을 연 스트리고 가문의 집사가 한 발자국 걸어 들어왔다. 그는 레이몬드 앞에 떨어진 가문의 창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무슨 일이야?”

“마담 에스터의 살롱에서 사환이 왔습니다.”

“뭐 하러?”

“친구분들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 * *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세련된 향초가 곳곳에 켜진 살롱에서, 한 떨기 청초한 꽃처럼 꾸민 이델리는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름다워요, 그레이스 양.”

“오늘은 티아라를 썼네요. 공주처럼 우아합니다.”

“이델리.”

“이델리 그레이스 양.”

추종자들은 알파가 대다수였지만 베타와 오메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찬탄의 대상인 이델리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평소 아첨 듣는 걸 좋아하는 그녀답지 않아서, 추종자들은 의아한 한편 애간장이 탔다. 간절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이델리는 생각에만 몰두했다. 술을 마시려 했지만 거리가 멀어 길게 기른 손톱이 술잔에 부딪쳤다. 티잉, 거슬리는 소음에 이델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술잔을 입에까지 대령할 기세인 추종자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잔을 다시 잡은 이델리는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얼음이 반쯤 녹았음에도 여전히 독한 술이었다. 이델리는 단숨에 술잔의 반을 비웠다. 신경에 거슬리는 것들 때문에 주변인들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극우성이라고 더럽게 비싸게 굴어. 그래 봤자 내 구멍을 맛보면 수캐가 될 작자가.’

그녀를 요즘 짜증나게 하는 건 황태자 얀테 M. 루세이노였다. 황가와 친한 가문의 덕을 빌어 황궁에 출입하는 덴 문제가 없었지만, 그런 이점에도 불구하고 황태자와 친밀한 관계가 되지 못했다는 게 그녀를 짜증 나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친해지기는커녕, 그럴 기미도 요원해 보였다. 자존심 상해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도저히 노릴 틈이 없단 말이지.’

황태자는 발정기를 철저히 관리했고, 그가 선별해서 별궁에 박아 둔 오메가들과만 섹스를 한다고 했다. 난잡한 관계는 지양하겠다는 거다.

그러나 그런 의도와 달리 별궁을 둘러싼 소문은 흉흉했다. 별궁의 오메가들은 성기를 빨기 좋게 이빨을 뽑았다든지, 앞뒤로 다 받을 수 있게 늘 마개를 하고 있다든지, 최음제를 방향제처럼 피우고 있다든지.

소문의 진위 여부가 확인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황태자의 별궁을 일컬어 뱀 굴이라고 불렀다. 수십 일을 교미하는 데 쓰는 뱀이 모여 있다는 의미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런 별궁 따위는 없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소문의 별궁을 눈으로 본 일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그 정도로 색을 탐하는 알파라면 자신을 거부할 리 없다.

황태자가 그녀를 거절하는 이유는 기가 막혔다. 알파오메가 특유의 색을 탐하는 특성이 이성을 잃게 하여 통치자로서 바로 서지 않는다는, 이델리의 입장에서는 속 답답한 가치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껏 극우성 알파로 태어났으면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생각이야. 되는 대로 좆물을 싸질러야 되는 거 아닌가? 그게 본성이잖아. 그렇게 하고 싶을 텐데?’

오늘도 외부인과 관계할 수는 없다며 거부당한 이델리는 기분이 바닥을 쳐서, 홧김에 자신을 하늘처럼 우러러보는 추종자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황태자에게서 받았던 푸대접을 조금이나마 잊기 위해서였다.

눈이 하트가 되어서 자신의 발끝이라도 좋으니 입 맞추고 싶어 하는 이들을 보자 짜증스러웠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 극우성이라지만 그래 봤자 알파. 곧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나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때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추종자가 되어서 제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

미래를 확신한 이델리의 아름다운 얼굴이 슬며시 풀어졌다.

그녀는 문득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응당 들려야 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까칠한 말투 뒤에 숨기는 그녀의 친애하는 소꿉친구. 유일하게 자신에게 막말을 할 수 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레이는 어디 있는 거지?’

뒤늦게 이델리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어디 구석에 앉아 불쌍하게 술을 마시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남들은 비록 자신과의 잠자리를 바라는 그를 비웃으며, 자존심 강한 스트리고의 망나니 도련님이 그레이스 공작가의 금지옥엽에게 푹 빠졌고, 이델리 그레이스가 그런 망나니만은 거절한다고 멋대로들 수군거리지만 진실은 조금 달랐다.

자신이 그런 소문을 조장한 면이 없잖아 있으나 일부러 거절하는 건 아니었다.

어지간한 남자들은 침대로 끌어들여 그들과의 쾌락을 즐기고, 그 강렬한 쾌감을 올가미 삼아 그들을 손에 쥐고 흔드는 방식을 선호하는 이델리가 레이몬드와 자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한 명쯤은 애틋해서 더 강력한 감정을 나누는 ‘친구’로만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그런 낭만적인 생각.

물론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다. 자신과 다른 의미로 여성 편력이 심한 레이몬드를 더 안달 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 번 침대에 들이면 질릴 때까지 여러 번 배를 맞추는 그녀와 달리 레이몬드는 같은 여자와 여러 번 자지 않았다.

싫증을 잘 내는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이다.

‘이제 와서 따라다니는 게 싫증난 건 아닐 테고. 그렇겠지. 지가 감히…….’

아니면 다른 여자가 생겼나?

이델리는 푸스스 웃었다. 다른 여자가 생겼다 한들, 하나도 긴장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 봤자 자신을 욕망하는 마음만 더 커질 테니까.

‘그 애는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하는 바보니까. 좀 방치해 둬서, 내게 더 집착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레이몬드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짜릿했다.

‘그래도 불렀는데 오지 않는 건 짜증나는데……. 확 찾아가 버려?’

자신에게 금지로 지정된 스트리고 가문의 저택. 찾아가면 얼굴을 굳힐 그를 생각하니 손이 근질거렸다. 애타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한데.

뭐가 더 맛있을까. 고민하며 즐거운 상상을 하는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레이몬드였다.

이델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괜히 연락을 받자마자 오는 게 자존심 상해서 엉덩이를 뭉개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불퉁한 얼굴로 제 앞까지 다가오는 레이몬드를 이델리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이, 늦었잖아. 시간 감각도 잊어버린 거야? 멍청이야?”

“뭐래, 미친년이. 앞으로 이딴 식으로 불러 대지 마.”

괜히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한 이델리는 방긋 웃으며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부르지 말라고. 앞으로는 불러도 안 올 거다. 사환에게 시키면 못 알아들을까 봐 직접 말하러 온 거야.”

‘뭐라는 거야?’

이델리는 눈을 깜박거렸다. 레이몬드는 개소리만 지껄이고는 뒤돌아 갔다. 어이, 레이. 아는 척을 하는 사내놈들과 대충 인사를 나누고는 금덩이라도 집안에 숨겨 둔 사람처럼 긴 다리를 움직여 쭉쭉 뻗어 나간다. 그러곤 순식간에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델리는 얼떨떨해졌다.

장난을 치는 걸까. 자존심을 세운답시고 재미없는 장난질을 숱하게 해 댔으니까…….

그러나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뒷모습이 불쾌하도록 단호해서, 뇌리에 잔상으로 남았다. 이델리의 웃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 * *

“도련님.”

카이로의 방 침대에 누워 발끝으로 창을 올렸다가 받았다가 장난을 치던 레이몬드가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는 감히 백작의 방에 난입하여 가문의 창을 가지고 장난치는 레이몬드를 보았음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못 본 척을 했다.

이 일을 알아 봤자 카이로는 어린 동생이 심심했나 보다, 하고 넘어갈 것이다.

너무 뛰어나면 그 아래에 깔린 인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법이었다. 카이로는 레이몬드가 그를 질투하는 줄도, 열등감에 그의 것을 탐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그걸 철없는 동생의 투정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위험을 자초하지 않는 집사는 현명하게 방 안의 풍경을 모른 체하며 알릴 것만 전달했다.

“레이디 그레이스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델리가?”

팔꿈치로 몸을 받친 레이몬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어딨는데?”

“1층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아아, 이 미친년이. 안 본다니까 제 발로 찾아오네.”

기뻐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델리 그레이스가 그를 보기 위해 직접 걸음 했다는 사실에 즐거워했을 텐데 왜인지 시큰둥해서 집사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를 힐끗거렸다.

“알았어. 가 봐. 곧 내려갈 테니.”

집사가 나간 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레이몬드가 한 번의 반동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1층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 이델리는 집사가 내준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스트리고가의 차향은 오랜만이네.”

레이몬드가 맞은편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황태자를 보러 황궁에 갈 시간 아닌가?”

손목시계를 훑으며 대수롭지 않게 하는 흘러나온 말에 이델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반응이 왜 저래?’

황태자를 언급하는데도 얼굴이 무덤덤했다. 으레 보이곤 했던 은근한 질투와 탐색의 눈길이 보이지 않았다. 살롱에서의 모습이 착각이 아니었다. 찻잔의 손잡이를 쥔 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그녀가 어망에 들어오지 않은 황태자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는 동안 레이몬드에게 변화가 생긴 것이다.

충격이었다. 레이몬드가 변할 수 있는 인간이던가? 이델리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인간의 마음은 한낱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보다 못하고, 지독히 변덕스럽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레이몬드의 마음에 대해서는 굳건히 자신하고 있었다. 그게 방심을 부른 것이다. 순간 속이 뜨끈해졌다. 이델리는 당장이라도 레이몬드의 멱살을 붙잡아 흔들고 싶었지만, 티 내지 않고 싱긋 웃었다.

“뭐, 그냥 그렇지. 이젠 좀 재미가 덜해져서.”

“수없이 거절당하고서야 드디어?”

얄미운 대꾸에 이델리는 눈을 흘겼다.

“요즘 바람이 차가워서 그런가, 예전 생각이 나지 뭐야. 오늘 여기 와 보니까 더 그래.”

“옛날 생각, 뭐. 형이랑 만나다가 나랑 키스한 거 들켜서 형한테 쫓겨난 일?”

이게 진짜. 이델리는 날 선 웃음을 흘렸다.

“자꾸 그렇게 굴 거야?”

“알았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서두가 길어?”

“별건 아니고. 예전에는 여기 자주 놀러 왔잖아, 나.”

레이몬드는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이 새롭게 차를 끓여 왔다. 마시지는 않고 티스푼으로 휘휘 젓기만 했다. 열의 없는 그를 보고서도 이델리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미소 짓는 얼굴이 반짝거리는 보석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레이몬드가 그녀를 힐끗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알파로 발현하기 전까지는. 그때 알았지. 네가 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거.”

“……한 순간의 호기심이었어. 그때 네가 내 페로몬을 느낄 수 있었다는 걸 알았으면 조심했었을 거야.”

“…….”

“널 상처 주려는 생각은 없었어.”

이델리는 눈매를 반쯤 접었다. 귀여운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나른해서 특유의 섹시함을 풍겼다. 이델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사내에게 어떻게 들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목소리로 과거를 후회하는 말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레이몬드는 이델리에게 키스하고 싶어 못 견디겠단 얼굴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레이몬드는 응접실 테이블 한쪽에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이델리는 집요하게 그 얼굴을 살폈다. 순간 그의 눈빛이 아련한 빛을 띠었다. 이델리는 안심했다.

“……그랬었겠지. 나도 놀랐어. 나와 키스한 다음 날, 형과 데이트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씁쓸해졌다. 제게 곤란한 상황인데도 이델리는 빙긋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녀에게 있어 방탕한 천성에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괴벽은 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독점하고자 하는 사내들의 욕망을 부추겼다.

이델리와 알고 지낸 시간이 긴 만큼 그녀를 잘 알고 있는 레이몬드다. 그녀의 미묘한 미소에 시선을 맞추었다.

“네가 형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는 가슴이 아팠지.”

“레이, 놀라운 사실을 말해 줄까?”

이델리가 우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내렸다. 레이몬드를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에 야릇한 표정이 피어올랐다.

“그때 너랑 한 게…….”

“…….”

“내 첫 키스였어. 엄청 떨리더라.”

레이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놀라운 ‘사실’을 알려 준다며?”

“바보.”

이델리는 쓰게 웃었다.

“조금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야. 우리는 소꿉친구였잖아. 내 페로몬이 여물기 전부터.”

“흐응.”

“내가 카이로 오빠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실망했던 거 알아.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아하, 알겠군. 날 조롱하려고 여기까지 행차한 거였어.”

“아니야, 멍청아.”

“……지겨운데, 이만 가도 되나?”

레이몬드가 장난스럽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델리의 그린 듯 아름다운 입술이 스륵 열렸다.

“그때부터 넌 날 안고 싶어 했어.”

“…….”

“멍청한 네 하인이 카이로에게 우리의 키스를 밀고하지만 않았다면, 그가 내게 출입 금지 명령을 내리지만 않았더라면, 너랑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몰라.”

‘사랑을 나눈다’라, 레이몬드가 기묘한 어투로 그녀가 선택한 단어를 곱씹었다.

“……이걸 내가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지? 그래서 아쉽단 거야?”

“조금은. 아니, 조금 많이?”

이델리는 킥킥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그렇게 되지 않아서 잘됐다고 생각해.”

“…….”

“그때는 네 성벽을 몰랐으니까.”

“내 성벽?”

되묻는 레이몬드의 얼굴이 답지 않게 퍽 순진해 보여서 이델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통하지도 않는 짓 하지 마, 레이.”

“…….”

“같은 여자랑은 두 번 자지 않는 거, 알파치고도 오만해. 카이로가 사귀는 여자를 꼬여 내는 건 찌질하고. 이게 제일 싫어. 넌 네 형이 먹었던 여자에게 손대고 싶어?”

레이몬드가 희한하단 얼굴로 툭 뱉었다.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 굉장한 변태가 된 기분인데.”

“…….”

“그래서 날 탓하는 거야?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된 게 그것 때문이라고?”

“정확히는 네 더러운 자지 때문이지.”

“어떡하냐. 이걸 순결한 분홍색으로 칠할 수도 없고.”

레이몬드가 제 다리 사이를 손등으로 툭 내리쳤다. 깔깔대며 웃던 이델리는 옅은 미소만 남기고 웃음을 그쳤다.

잠깐, 원인 모를 침묵이 감돌았다.

“어쨌든 나만 잘못한 건 아니란 뜻이야.”

“…….”

“괜찮아. 난 그런 네가 좋은걸.”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카이로에 대한 열등감으로 격화되었다고는 해도, 그가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의 첫사랑이었고, 그렇게 열망했던 육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직 한 번도 갖지 못한 몸이었다.

그 어떤 몸보다 구미가 당겼다. 자지도 반응하는 듯했다. 다리 사이가 간질거리자 레이몬드는 놀라면서도 안도감을 느꼈다. 당장 만져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델리의 눈 때문에 손만 움찔거렸다.

“레이.”

나직하게 부르며 이델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상체는 조여 가슴을 부각시키고, 풍성한 치맛자락으로 우아한 맛을 강조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거미처럼 걸어온 그녀가 그의 뒤에 가서 섰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 남자다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그러곤 그의 팔뚝을 가볍게 쥐었다.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그녀에게서 새어 나오는 페로몬은 끈적하게 레이몬드를 감싸 안았다.

이 공간은 이미 그녀의 페로몬이 장악하고 있었다. 극우성 오메가의 유혹적인 페로몬을 거부할 수 있는 알파는 없다. 어떤 알파든 그녀가 앞에 서면 그녀를 사랑스럽다 느낄 것이고, 침대에 함께 눕는 상상을 할 터였다.

이델리는 딱딱하게 굳어진 레이몬드의 목덜미를 다른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곤두선 귓바퀴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말캉한 입술을 살짝 벌려 귓바퀴를 물자 그의 어깨가 움찔 굳어졌다. 이델리는 내심 웃었다.

‘네가 날 신경 쓰지 않는다니, 그럴 리가 없지.’

무관심 전략은 오랜만이라 생각보다 신경을 써 버렸다. 다시는 이런 깜찍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가득 움켜쥐어 주겠다. 마음 쓰게 한 데 대한 심술이 귀엽게 솟았다.

입술을 뾰족하게 만든 이델리는 손을 더 내려 그의 상체를 끌어안듯 했다.

“레이.”

농밀한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이름이 아니라 주문을 외는 듯했다. 기실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페로몬으로 상대방을 유혹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치미는 성욕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벌떡 일어나 그녀를 안고 싶어 어쩔 수 없다는 눈을 해야 마땅했다.

일반적인,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런데.

“……!”

이델리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홱 몸을 뗀 이델리가 무서운 눈으로 레이몬드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

“왜 반응이 없어?”

“…….”

“묻잖아! 페로몬이 왜 이렇게 잠잠하냐고!”

레이몬드가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자 이델리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이해 못 한 거 아니잖아.”

새파랗게 질린 그녀가 노려보자 레이몬드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극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은 알파에게는 강력한 최음제와 다를 바 없었다.

오메가 페로몬에 반응하는 알파 페로몬이 미친 듯이 뛰쳐나와야 하는데, 레이몬드의 것은 잠시 넘실거리기만 했을 뿐 평소와 비슷했다. 아니, 이 정도면 반응이 없는 수준이다. 이델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약간 놀라운 듯이, 또는 귀찮은 듯이 중얼거렸다.

“아, 그래서였나.”

“뭐?”

“각인했나 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뜻 멍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공황에 빠진 이델리는 그의 상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하!’ 하고 기막힌 웃음을 터뜨렸다. 정신을 차린 레이몬드가 그녀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반응이 격하네. 내 페로몬이 그렇게 좋았어?”

“이 상황에서 농담하지 마.”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답을 찾은 기분이야, 지금. 그래서 당황스러우면서도 속이 시원해.”

“야, 레이몬드.”

레이몬드가 고개를 숙여 이델리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댔다.

“근데 네가 짜증 내는 모습은 예상외네. 늘 그랬듯이 신경 안 쓰는 척, 여유로운 척, 할 줄 알았거든.”

“하?”

“무려 10년이 넘어. 내가 널 ‘사랑’한 지.”

이델리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사랑한다고 한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사랑이 욕망으로 대체되어 들리는 걸까. 둘 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사랑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도 마음이 복잡하네.”

“…….”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와서.”

레이몬드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이델리는 딱딱하게 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복잡해 보이는 눈빛이 찌르면 피를 낼 창날처럼 뾰족했다.

그들의 관계는 애증이었다. 애가 큰지 증이 큰지 알 수 없었고, 그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스릴과 매력을 느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안이 앞섰다.

애보다 증이, 커졌던 걸까?

“잘된 일이지, 이델리?”

“…….”

“네게 귀찮게 섹스를 구걸하는 일은 없게 됐잖아.”

“장난.”

“내가 전전긍긍하는 게 네 즐거움이었을 텐데 아쉽게 됐어.”

“치지 말라고 했어…….”

이델리의 목소리에 분노가 스몄다.

그러든 말든 레이몬드는 이델리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 주었다. 친밀하고 여유로운 손짓이 거슬린 이델리가 그의 손목을 쳐 냈다.

레이몬드는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터앉고 화가 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재미있어 하는 눈빛이었다. 그 표정에 이델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이델리 그레이스.’

사내들이란 여자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안달 내고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굴어야 했지만, 도저히 짜증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이델리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누군데?”

레이몬드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누구냐고, 네가 각인한 앙큼한 오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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