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이델리 그레이스와의 끈을 만들고 레이몬드와는 다시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리체가 결심하는 그때.
적요한 밤을 물기 젖은 소리가 조금씩 잡아먹었다. 커튼으로 다 가리지 못한 탕에서 흘러들어오는 허연 달빛이 침대의 발치를 기어들어갔다. 주변으로 번지며 반사되는 달빛이 침대 위의 인영을 은밀히 관음했다.
탁, 타닥, 탁.
있는 힘껏 손을 놀리는 그의 얼굴이 땀에 젖은 채 일그러졌다.
침대의 쿠션에 등을 기대 누운 적발의 사내. 황태자의 권세를 뒤에 업어 황도 사교계의 명실상부 실세로 떠오른 스트리고가의 난잡한 둘째, 레이몬드 스트리고는 그를 따라다니는 지저분한 소문을 떠올리면 의외롭게도 수음과 친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오늘은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정도가 덜하다지만 어릴 때의 고된 훈련으로 보기 좋게 태워진 갈색빛 손등에 힘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거친 손이 다리 사이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손이 상하로 움직일 때마다 투명한 액으로 뒤범벅된 검붉은 성기가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일 적의 순수를 완전히 잃어버린 타락한 자지는 배에 닿을 듯 흉악하게 곤두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두꺼운 귀두 사이 작은 구멍에서 투둑, 하고 걸죽한 씨물을 토해 낼 것 같았다.
그러나 살갗이 벗겨질 것처럼 강하게 용두질을 하고 있음에도 성기는 쿠퍼액만 질질 흘릴 뿐 도무지 쾌락의 결실을 터뜨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의 잘생긴 얼굴이 가까워지지 않는 목적지를 앞에 둔 사람처럼 애달프게 변했다.
“씹, 병신이 다 됐지, 진짜 내가……. 제기랄!”
레이몬드는 창백한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델리 그레이스의 남성 편력에 못지않는 화려한 여성 편력을 갖고 있는 그였다. 성욕이 돌 때 혼자 처리하는 건 무인도에 떨어지지 않고서야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데 성욕이 솟구치다 못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고 있는 지금, 어째서 여체의 부드러운 구멍이 아니라 딱딱한 제 손에 자지를 비벼 대고 있는지. 레이몬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몇 명이나 이 침대에서 쫓아냈는지, 세는 것도 짜증났다.
언제나 먹음직스럽게 보였던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몸이, 무기질의 인형과 다를 바 없게 느껴져서, 차라리 제 우락부락한 손을 선택했던 그 과정도, 씨발, 어이가 없어서 돌아가시겠다. 이 몸이 정말 병신이 되어 버린 걸까. 좆대가리를 너무 놀려 댔나. 누군가 요즘 밤마다 울면서 저주 인형을 찔러 댄다는데, 저주라도 받게 된 걸까. 온갖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떠올라 레이몬드는 가열하게 수음하는 와중에도 물음표만 떠올렸다.
집중이 좆도 되지 않았다.
“제길, 제기랄.”
끊임없이 욕설을 지껄이며 레이몬드는 성기를 뿌리까지 훑어 올렸다. 심지어 쓰라리기까지 했다. 싸지도 못 했는데!
하, 레이몬드는 실소를 흘렸다.
좆이 아픈 건 이번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는 여자랑 밤새 뒹굴며 7번이나 사정했었다.
지금처럼 꼴사납게 삼십 분째 자위나 해 대다가 살갗이 벗겨지지는 않았다. 전자는 정력을 자랑할 수 있기라도 하지 후자는 찐따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어디 가서 얘기도 못 한다, 이건.
레이몬드는 특별하게 음란한 오메가와 장난을 칠 때를 제외하고는 쓰지 않았던 젤까지 꺼내 들었다.
차갑고 투명한 젤을 손과 성기 위에 가득 부었다. 그대로 부드럽게 성기를 훑자 자극을 받은 성기가 금방이라도 분출할 것처럼 꺼떡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사정하려나. 기둥을 쓸어 올리고 엄지로 상대들이 해 주었던 것처럼 귀두를 세게 문질렀다. 움찔, 하고 허리가 튀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살짝 뾰족한 모양의 귀두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허리를 저릿하게 하는 절정의 파도도 어디까지 왔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제기라알……!
레이몬드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자지를 뽑을 듯 맹렬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좆을 터질 것처럼 가득 쥐었다.
짜증이 가득한 까만 머릿속에 자동 반사적으로 누군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둥그런 어깨와 살짝 작은 키, 늘씬하지만 옆으로 툭 튀어나온 선명한 굴곡……. 낯설지만, 잊을 수 없을 만큼 야한 몸이었다. 그건 그가 평소 야릇한 상상을 할 때 떠올리던 그 몸이 아니었다. 이델리 그레이스는 키가 컸으며, 머릿속 실루엣보다는 어깨의 선이 딱딱했다.
오랫동안 갖고자 했지만 갖지 못한 여자에 대한 열망은 오래된 흙이 단단히 굳어 돌덩이가 된 것처럼 단단했으므로, 그녀를 생각하면 흥분이 몰려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를 떠올려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았던 여체 중에 가장 야한 몸을 가진 이델리 그레이스. 그녀도 다른 여자들처럼 무기질 인형으로 느껴지는 건 아니겠지. 그 두려움에 이델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이델리까지 그렇게 보인다면 자신에게 병이 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해 버릴 것 같았다. 아니면 저주를 처받았든가. 누구든 범인이 있다면 곱게 죽이진 않을 것이다.
파괴적인 생각만 줄기줄기 뿜어지고 있다. 레이몬드는 손을 부스스한 머리카락 안으로 넣어 마구 헤집었다. 괴롭기 짝이 없었다. 이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더라? 레이몬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다. 그때. 이델리와 함께 클럽 퀸을 방문했을 때 이후다.
그날 순간적으로 요녀라고 생각했던 여자와 음탕하게 뒹군 후가 분명했다. 그 이후로 아랫도리 사정이 상당히 괴로워졌다. 증상은 처음에는 느리게 진행되어 크게 문제라고 생각 못 하다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떤 구멍이든 만족스럽게 쑤셔 댔던 자랑스러운 자지.
옛날, 이델리 그레이스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고 성에 눈 떴던 그때 이후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때보다 지금이 더 조절되지 않았다.
하루 온종일 발딱 서 있는데 분출을 하지 못하니, 애매한 흥분이 계속되고 있는지라 몸만 축나는 상황이었다.
레이몬드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그녀를 상상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얼굴.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나비 모양 가면과 야하기 짝이 없던 붉은 입술, 어두워서 검은색인지 회색인지 헷갈리는 눈동자뿐이었다.
한 손으로 쥐면 말랑한 흰 빵처럼 부드럽고 탄력 넘치던 엉덩이가 그의 아래에서 흔들렸다.
얇은 허리는 그가 안을 쑤실 때마다 야릇하게 꿈틀거렸고 새어 나오던 신음은 온몸의 신경을 올올이 곤두세웠다.
‘하아아앙!’
꽉 조이고는 놓지 않았던 음부의 감각.
미친년, 씨발, 다리 더 벌려.
신음 소리 봐라. 꼴려서 뒈지겠어, 미친년아…….
그날 정신없이 뱉어 대던 말과 그에 반응해 애간장을 달게 했던 신음이 심장을 직격했다.
레이몬드는 빠르게 용두질을 했다.
타닥, 탁!
전율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벼락처럼 꽂혔다.
탁, 탁, 탁탁탁!
엉덩이 근육이 꽉 짜이고 어깨에 비해 가느다란 허리가 위로 튀어올랐다.
“흐읏!”
투두둑.
“하아…….”
손이 끈적해졌다. 탈력감에 무겁게 늘어지는 몸을 쿠션에 깊숙이 기댔다.
하아, 흐으. 열락에 잠긴 숨이 하얗게 번졌다. 레이몬드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손수건을 쥔 손에 백탁액이 튀어 있었다.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점액을 신경질적으로 닦았다.
한 번 분출했음에도 성기는 여전히 애매한 각도로 서 있었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흉험하게 일그러졌다.
“미친 좆대가리가 돌았나. 아, 짜증나 돌아 버리겠네.”
이런 식이었다. 사정을 하기까지도 만만치 않은데, 간신히 사정을 하더라도 이놈의 지랄 맞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에 돼지 발정제라도 맞았나 싶었다.
“씨바알. 그년이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잡히면 허벌 구멍을 만들어 버리겠어!”
허무함과 짜증스러움과 쪽팔림에 와악! 소리를 지르며 발광하던 레이몬드는 사정의 탈력감으로 침대에 몸을 쓰러뜨렸다. 다 귀찮았다.
눈을 감자 여지없이 여자가 떠오른다.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여자…….
나비 가면에 뚫린 눈구멍. 새파란 빛이 은밀하게 반짝였다.
레이몬드는 눕혔던 몸을 벌떡 세웠다.
‘파란 눈?’
레이몬드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어느새 나비 가면을 쓴 여자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금발 머리의 여자가 채웠다. 회색인 줄 알았던 눈동자는 사실 파란색이었다. 방이 어두워 일순 착각한 것이다.
레이몬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델리는 아니었다.
다시 찾은 알파오메가 클럽에서 덜덜 떨던 그 베타 여자.
‘아니야. 그게 베타일 리 없지.’
고개를 저은 레이몬드는 그날 있었던 일에 집중했다. 술에 취했었지만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게……. 희뿌옇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뭐야, 너. 오메가 맞아?’
사람 속을 들쑤시다 돌연 증발하듯 사라진 오메가 페로몬.
레이몬드가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가 미심쩍은 뜻 찌푸려졌다.
* * *
리체는 직원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녀가 입소할 때는 몇몇이 지내고 있었지만 다들 귀족의 눈에 띄거나 비슷한 처지의 상대를 만나 클럽을 떠난 탓에 현재 숙소를 사용하는 건 리체뿐이었다.
출근 준비를 끝마치고 숙소에서 나왔다. 숙소 앞은 지저분했다. 취객이 버리고 가기라도 했는지 갈색 술병이 너저분하게 굴러다녔다. 그 아래 깔린 잔디는 누렇게 변해서 쓰레기 냄새에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더러운 잔디밭 옆에는 그다지 깨끗하지 못한 길이 가로로 쭉 뻗어 있었는데, 유흥가로 통하는 길이다. 귀족들이나 여유 있는 부민들이 자주 오가는 마차 전용 도로였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 한 대가 대로를 지나갔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린 리체의 눈에 마차에 박힌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기억을 뒤지던 리체는 카이로 스트리고가 들고 다니던 검집에 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는 걸 기억했다.
‘스트리고 가문의 마차네.’
리체는 고개를 갸웃했다. 카이로 스트리고가 돌아온 걸까?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떠 있었다.
‘영업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마차가 가는 방향엔 클럽 퀸이 있고 거기서 좀 더 들어가면 클럽이 즐비한 유흥가가 나온다. 어디로 가는 마차일까.
잠깐 생각에 잠겼던 리체는 계단을 내려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클럽에 도착했을 때는 그녀의 평소 출근 시간보다는 조금 늦은 시각이었다.
클럽은 어수선했다. 유니폼으로 환복한 리체는 스케줄러로 걸어갔다. 창고에서 술을 꺼내 오던 참이었는지 술병이 든 바구니를 안은 엘자가 리체를 보았다.
“뭔가 어수선한데 무슨 일이야?”
“아아. 별건 아니고 레이몬드 스트리고가 왔어. 하, 진짜 미하일 이런 건 자기가 해야지. 그 근육들을 다 침대에서만 쓰나.”
엘자가 바닥에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투덜거리며 팔뚝을 주물렀다.
“레이몬드 스트리고가 왔어?”
질문은 평온하게 흘러나왔다.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영업시간 전이라 다들 놀랐거든. 원래 이렇게 일찍 오는 분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소란 떨지 말라면서 술만 마시러 왔다네.”
“…….”
“우리 술에 꿀 발라 놨나? 이델리 그레이스도 그렇고 레이몬드 경까지.”
엘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이로가 아니라 레이몬드였나.’
리체는 조금 아쉬웠다. 레이몬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다른 알파 손님보다도 못했다. 그는 눈에 들어간 고추씨처럼 얽히면 머리가 알싸해지는 골치 아픈 종자였다.
레이몬드는 이델리와 엮여 있어 자칫 잘못하면 극우성 오메가의 자료 수집에 문제가 생길 터였다. 또 레이몬드가 그녀에 대한 의심을 버렸다고 할지라도 얼굴을 보면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어느 방으로 들어갔는데?”
“야펄방.”
아펼방이면 1층이다.
‘오늘은 웬만하면 1층엔 내려오지 말아야겠다.’
2층을 전담 마크하겠다고 사장에게 말할 요량으로 뒤를 돌려는데, 엘자가 고개를 숙였다.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리체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싸한 냄새가 코를 덮쳤다.
‘양반은 아니네.’
손님용 룸에서 나온 레이몬드가 한 손으로 이마를 움켜쥐고 있었다.
방에 들어간 지 한 시간이나 되었을까? 도대체 몇 병이나 퍼마셨는지 적색 캐주얼 정장으로 감싸인 몸에선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씨바알, 머리 아파, 좆같애…….”
인상을 찌푸린 레이몬드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너.”
저를 똑바로 가리키는 손끝에 리체는 얼굴이 찌푸려지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머리 아프니까 두통약 가지고 와.”
그러고서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아까부터 그러더니 상태가 안 좋나 봐. 몸이 안 좋은데 왜 클럽에 오는 거람. 자, 여기 약통.”
카운터를 뒤적이고 온 엘자가 약통을 리체의 손에 올려 주었다. 일련의 움직임이 무척 기민했다. 리체는 흰 약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엘자를 흘끗했다. 고민은 짧았다. 리체는 태연하게 말했다.
“나 사장님에게 가야 하는데 네가 갔다 올래?”
“내가? 웬일이야. 손님을 남에게 양보하고. 게다가 저런 거물을.”
제법 긍정적인 반응에 리체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엘자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알잖아. VIP들 까다로운 거.”
“…….”
“사소한 것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니까. 너 보고 가져오라 했으니 네가 가야지.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자기 말 무시하는 거냐며 지랄할 수 있단 말이지.”
레이몬드가 시킨 건 별 볼일 없는 심부름일 뿐이었지만 직접 얼굴을 대면할 수 있는 기회였다. 페로몬을 뿌려대든 예쁜 얼굴로 미소 짓든, 어떻게든 유혹을 할 수 있는 기회.
다른 오메가 같았으면 귀족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에 한 번쯤 흔들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자에게 심부름을 대신 권유했던 것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런 유흥업소치고는 드물게도 안전 제일주의 성향이다.
도리어 그녀는 영양가 없는 일에만 관심을 보였다.
“사장님에겐 왜 가는데? 전달할 말이 있으면 내가 전할게.”
“……아니야. 별거 아니었어.”
리체는 찝찝함을 삼키고 몸을 돌렸다.
“리체.”
리체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엘자가 천진한 얼굴로 말했다.
“물은 안 떠가?”
“…….”
“물 없이 먹는 약 아니야, 그거.”
무표정해진 리체는 눈썹만 올렸다.
“알았어.”
약을 갖고 오라던 레이몬드는 정작 두통약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리체를 세워 놓기만 하고 술에 집중했다. 독한 술을 콸콸 따르고, 얼음과 함께 찰랑거리는 술을 한 번에 들이킨다. 이러니까 술 냄새가 그렇게 나지.
리체는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에 먹힐 것처럼 집중하는 레이몬드를 약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마시라느니, 천천히 마시라느니 하는 말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이런 분위기가 불편해서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엉덩이를 살짝 떼는 순간, 손이 튀어나와 약통을 낚아챘다. 하얀 알약 두 알을 입에 넣었다. 까득, 알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전투적이었다.
“물…….”
“…….”
“이랑 드셔야 하는데.”
기세에 밀린 리체가 뒤늦게 말하자 레이몬드는 그녀를 무섭게 쏘아보더니 물컵도 가져가 물을 벌컥 마셨다.
‘술을 저렇게 마셨는데 약을 먹으면 되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안 되지만, 그렇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리체의 머릿속에 ‘위험한 일’이란 가게에서 초상을 치루는 일이었다.
어쨌든 할 일은 마쳤다.
“그럼 전 이만…….”
탁.
유리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레이몬드가 짧게 명령했다.
“여기 있어.”
리체는 눈을 깜박거렸다. 숙였던 고개를 든 레이몬드가 팔꿈치를 식탁에 대고 머리칼 안쪽으로 손을 깊게 집어넣었다.
턱이 살짝 당겨진 채, 취기가 도는 붉은 눈이 정확히 리체를 향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술을 더 가져다 드릴까요?”
“술 같은 소리하고 있네.”
한층 비딱해진 자세로 레이몬드가 코웃음을 쳤다. 쏘아보는 시선이 리체는 못내 불편했다. 왜 저러는 거지.
“친구분에게 사환을 보낼까요.”
“내 친구는 왜.”
레이몬드가 정색했다. 미친놈.
술을 너무 마셔서 개가 되어 가는 과정은 아니겠지? 그녀에게 술 취한 진상은 광인이랑 다를 게 없었다.
“기분이 안 좋다고 하셔서.”
“좆같은 친구 놈들이 온다고 달라질까.”
“…….”
“네가 해 주면 되잖아. 기분 좋게.”
“예?”
리체가 눈을 크게 뜨자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레이몬드가 코웃음을 쳤다.
“왜 눈을 크게 뜨고 지랄이야. 무슨 생각을 했길래.”
“…….”
“말 상대, 너희가 돈 받고 하는 일.”
아, 말 상대.
지명제가 있는 클럽 퀸은 종업원이 심심한 손님의 말 상대를 해 주는 일이 흔했다.
보통 바에서 손님에게 술을 말아 주던 리체 역시 바텐더로서 손님의 말 상대를 해 준 적이 있었다. 대체로 혼자 와서 심심한 손님들이었지만. 어쨌든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네, 알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말과 달리 리체는 레이몬드의 의도를 경계하며 엉덩이를 좀 떼어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을까? 레이몬드는 다시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가까이 오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술기운인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리체의 예상과 달리 레이몬드는 정말 말이 많았다. 속에 고인 말을 모조리 긁어 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벼운 얘기에서부터 무거운 얘기까지 가리지 않고 떠벌렸다.
‘정말 말 상대가 필요했던 건가?’
긴 이야기를 듣는 사이 조금 긴장이 풀린 리체는 전보다는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는 레이몬드를 지켜보았다. 그의 얘기 속에는 카이로가 많이 등장했다. 내용의 대부분이 형, 카이로 스트리고에 대한 불만이 대부분이었으니 당연했다.
“형이 대단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난 조금 뛰어나기는 해도 평범한 편이지. 내가 처음 황궁 기사단에 들어갔을 때는 날 보러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어. 제멋대로 기대하더니 내가 검을 휘두르자 형보다 못하다며 한숨을 쉬데, 씨발.”
큭큭 웃는 레이몬드의 입술이 비틀렸다. 잘생긴 얼굴에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살기가 짙었다. 그 아래 깔린 자괴감을 리체는 용케 알아차렸다.
‘열등감을 갖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자격지심이 위험한 수준이네.’
그녀는 습관적으로 그를 분석했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을 뿐, 레이몬드 역시 꽤 매력적인 우성 알파였으므로 연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 와서 형제가 모두 알파인 경우는 처음 보니까. 두 사람의 페로몬을 비교한 결과 알파오메가 형질은 유전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퀘스트 성공의 보상으로 두 형제의 페로몬을 모두 수집한 리체가 현재 관심을 쏟고 있는 건 알파오메가 형질과 형질의 유전적 특성에 대한 가설이었다.
“어이.”
“예.”
“술 한잔 할래?”
레이몬드는 혼자 떠드는 것이 질렸는지 술잔을 리체 쪽으로 밀었다. 투명한 호박색 술이 잔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렸다. 잔에 넘칠 듯 가득한 액체를 리체는 가만히 바라보다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술을 잘 할 줄 몰라서요.”
리체는 다른 변명을 댈 것을 후회했다. 클럽 종업원이 술을 못 한다는 건 어딘지 어색하고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레이몬드는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그저 짜증스러운 한숨을 쉴 뿐이었다.
“너무하네. 술친구도 못 해 줘?”
그러고서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낱 술집 직원에게 술친구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만취 상태라면 진상 전문 해결사를 불러야 할까.
물론 퀸에서는 따로 돈을 들여 해결사를 두지는 않았다. 어려운 상대는 모두 사장의 차지였다. 리체가 골칫덩이를 사장에게 떠넘길 생각을 하는 동안 레이몬드의 눈빛은 시시각각 식어 갔다.
VIP, 즉 알파오메가 귀족들은 대접받는 것에 익숙하여 인내심이 짧은 편이다. 리체는 자신의 짧은 망설임이 그의 기분을 적잖이 상하게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낱 클럽의 종업원 신분으로 귀족의 기분을 거스르는 건 좋지 못했다. 당분간은 이곳에 적을 붙일 생각이던 리체는 그에게 밉보여 쫓겨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몇 잔 받아 주고 말자. 이미 많이 꼴았으니 좀 더 마시면 나가떨어지겠지.
리체는 조심스럽게 술잔을 받아들였다. 한 모금을 입으로 넘겼다. 비싼 술이라 부드럽게 목구멍까지 흘러 내려갔다. 지나친 음주는 혐오했지만 리체는 술맛을 즐길 줄 아는 과학자였다.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레이몬드는 반쯤 남은 술을 보고 피식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리체는 마시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더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레이몬드가 본격적인 대화의 화제를 그녀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언제부터 일했어?”
“1년 좀 안 되었어요.”
“베타가 일하기엔 쉽지 않았을 텐데. 아니, 오히려 쉬운가?”
“저는 페로몬이 안 느껴지니까요.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리체는 곤란한 질문은 대충 뭉갰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엔 성심껏 대꾸를 해 주었다.
대화가 썩 만족스러운지 순순해진 레이몬드는 술을 입에 털어 넣고, 그냥 생각났다는 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형도 여길 알 텐데. 본 적 있어?”
“…….”
“들어 본 적도 없어? 카이로 스트리고 말이야. 붉은독수리의 대단한 대장 독수리.”
레이몬드가 키득거렸다. 말투에 형을 향한 질투감이 그득히 묻어나왔다.
카이로? 자주 온다. 몇 번 방문하는 걸 넘어 단골 수준이다.
뭔가 알고 얘기하는 걸까. 카이로와의 관계라든지 그와 있었던 일에 뭔가 눈치를 챘나 했지만, 그러기에는 레이몬드의 표정이 너무 씁쓸했다.
‘우는 애를 달래는 기술은 없는데…….’
리체는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글쎄요, 오메가만 만나시는 분이라 저랑은 큰 접점이 없어서요.”
“그렇지. 그거 아는구나. 하긴 여길 왔다면 모를 리가 없나.”
낮아진 목소리로 혼잣말한 레이몬드가 바보 같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지겨울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이 여기에 올 리가 없지. 그래. 이상한 말을 했네.”
“…….”
“그거 알아?”
“형, 내 형 카이로 스트리고, 결벽증이 있다는 거.”
“……결벽증이요?”
“뭐, 이것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레이몬드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아이스 버킷에서 얼음덩어리를 꺼내 술잔에 퐁당 빠뜨렸다. 술 몇 방울이 튀었다. 얼음이 잠길 만큼 술을 따르고, 잔을 그녀에게로 넘겼다.
이미 조금 마셨던 리체는 거절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이번에도 술은 목구멍을 뱀처럼 부드럽게 타고 들어갔다. 레이몬드는 신세 한탄을 하고 싶어 하는 듯했으므로 술 몇 잔을 마시며 들어 주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잘 마시네.”
자연스럽게 내려온 앞머리를 그대로 두고 레이몬드가 눈가를 야릇하게 접었다.
반항적인 외모에 퇴폐적인 눈매가 술기운에 젖어 한층 요염했다. 남자에게 붙이기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지만 더 적절한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푹 젖은 여자의 아랫도리에서 기어 나올 법한 얼굴. 떠올랐던 생각이 멋쩍어 리체는 은근슬쩍 시선을 떨어뜨렸다.
“형은 인기가 많아. 하지만 먹는 건 오메가뿐이야. 따먹히고 싶다고 불법적인 약을 먹는 베타도 있었지. 미친년들.”
픽 웃은 레이몬드의 눈이 차가웠다. 문득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어때.”
“예?”
“그런 생각한 적 없어?”
일순 곰도 때려잡을 것처럼 기골이 장대한 카이로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신체만큼이나 우람한 자지를 욕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크기만 한 건 아니었지.’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몬드는 그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듯 활짝 웃었다.
“더 마셔.”
경직되었던 그의 페로몬도 부드러워졌다.
술잔을 비우자마자 자동 음수기처럼 잔이 채워졌다. 리체는 난감했지만 진정된 그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한 모금 홀짝였다. 그러면서 슬쩍 레이몬드의 상태를 살폈다. 아까보다 풀린 눈매가 축 처져 있었다.
‘곧이겠군.’
마음의 부담을 풀고 술을 홀짝이는 찰나였다. 반쯤 남은 술병을 흔들던 레이몬드가 두 개쯤 풀어진 셔츠의 옷깃을 젖혔다.
“더워.”
리체가 쳐다보자 중얼거린다. 너는 안 그러냐는 시선에 리체는 어색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워 뒈지겠네.”
레이몬드가 한 손으로 단추를 풀었다. 술에 취했음에도 한 치의 실수 없이 툭, 툭 풀어진다.
술 취한 사람이 저렇게 손을 잘 놀릴 수 있나?
합리적인 의심을 품는 순간, 해일이 일 듯 페로몬이 덮쳐 왔다.
“……!”
리체는 반사적으로 페로몬 억제 스킬을 펼쳤다.
[페로몬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알파 페로몬에 신체가 반응합니다.]
리체가 눈을 크게 떴다.
페로몬이 실처럼 몸에서 새어 나왔다. 마치 레이몬드의 페로몬을 마중 나가려는 듯했다.
입술 안쪽 살점을 강하게 깨물었다. 정신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술기운에 흐려졌던 정신이 억지로 맑아졌다.
[페로몬 억제 스킬을 발동합니다.]
안도하려는 순간.
[제어력이 부족합니다. 스킬이 제한적으로 발동합니다.
스킬 유효 시간 1분.]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60, 59, 58…….]
‘큰일 났다.’
리체는 내심 아차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한 척 눈을 내리깔았다. 베타는 페로몬을 느낄 수 없는 게 당연하니까.
변화 없는 무심한 표정과 달리 속에서는 땀이 뻘뻘 났다.
레이몬드의 가느스름한 시선이 먹잇감을 핥는 육식 동물처럼 몸을 쓸어내렸다. 코끝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진한 페로몬 냄새가 맡아졌으나 뻔뻔하게 모르는 척을 했다. 꿀꺽. 레이몬드가 술을 마시며 그녀를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리체는 그의 목울대가 도드라지는 것에 시선을 맞추었다. 마침내 실망한 시선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흐으, 리체는 입술을 슬며시 벌리고 다급한 한숨을 토했다.
[20, 19, 18…….]
그러는 와중에도 전방에 뜬 숫자는 착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리체는 무릎을 꽉 붙잡았다.
‘생각을, 생각을 해야 해.’
지금의 몸 상태는 터져 나오려는 수도꼭지를 억지로 고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빈 술병을 쥔 레이몬드의 시선이 다시 리체를 좇았다. 리체는 재빨리 테이블 위를 훑어보았다. 술은 부족하고 아이스 버킷의 얼음은 태반이 녹았다. 이거다.
“술상을 다시 들여오겠습니다, 손님.”
다행히 레이몬드는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순간에 무자비하게 쏟아부은 페로몬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남은 페로몬의 잔향은 여전히 독하고 짙었다.
‘아직도 의심을 풀지 않고 있었어.’
차분히 몸을 뒤로 물리는 리체는 행동과 달리 쫓기는 사람처럼 마음이 다급했다.
[10, 9…….]
줄어드는 숫자만큼 그녀의 걸음이 은근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문을 열기까지 리체는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탁. 문을 닫는 순간, 전방에 뜬 숫자는 0이 되었다. 리체는 공기에 녹아드는 것처럼 힘이 빠졌다.
“하아아…….”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영혼까지 토해 낼 것처럼 깊었다. 겉으로는 침착한 모습을 가장했지만 속은 제법 초조했던지라 이마를 쓸자 땀이 묻어나왔다. 땀에선 복숭아 향기가 났다.
페로몬이 미친 듯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리체는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아무도 없는 직원 휴게실에 틀어박힐 생각이었다.
리체는 이를 갈았다. 술을 먹는 게 아니었어. 레이몬드가 아주 잠깐, 안타깝게 느껴지는 바람에 생긴 실수였다. 서둘러 물러나려는 참에, 닫혔던 문이 열리고 손이 튀어나왔다.
“헉!”
경악성을 내지른 리체의 몸이 순식간에 튀어나온 손에 잡혀 문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탁.
닫힌 문에 등이 거세게 부딪혔다. 알싸한 통증을 돌아볼 틈도 없이 붉은 눈이 그녀를 압박했다.
리체는 좌우로 시선을 돌렸다. 레이몬드의 팔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옮기고 눈을 내리깔았다.
두근두근.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세차게 뛰는 고동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리체의 얼굴만큼은 여전히 차분했다. 이마에 맺힌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손님?”
문과 팔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 레이몬드가 천천히 숨을 쉬었다. 스스로의 흥분을 억누르려는 듯했지만 짐승이 으르렁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리체는 입을 합 다물었다. 레이몬드가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댈 것처럼 얼굴을 숙였다.
“오메가였어?”
허스키한 목소리에서 흥분을 감지한 리체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대답 안 해?”
“…….”
“오메가였냐고 묻잖아.”
“네. 오메가입니다. 열성이요.”
페로몬을 풀풀 풍기는 몸으로는 어떤 거짓말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오메가란 걸 밝히는 정도는 괜찮아. 나인 줄 모를 거야.’
속을 다독이며 순순히 대꾸하자 레이몬드가 이를 악물었다. 쉭쉭, 분노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맞잖아, 역시.”
제길, 젠장. 초조한 마음과 달리 겉으로는 무구하게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뱀처럼 가느스름한 눈으로 레이몬드가 코웃음을 쳤다. 리체는 입을 다물었다. 페로몬이 사나웠다. 살갗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페로몬에 리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로 페로몬을 뿜어내는 건 무례한 행동이었다.
‘뭔 놈의…….’
읏, 숨을 들이켠 리체는 흉포하게 날뛰는 페로몬과 달리 무섭게 가라앉은 레이몬드와 눈이 마주쳤다.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오늘 다시 보기까지 레이몬드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는 리체는 지나치게 변덕스럽고 난폭한 레이몬드의 반응이 당혹스러웠다. 뼈째 잡아먹힐 듯한 시선이었다.
긴장으로 몸이 굳었지만 도망갈 곳은 없었다. 리체는 입술을 깨물었다.
‘큰일이다.’
몸에서 열이 오르고 있다. 알파 페로몬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을 무성욕자로 살아온 그녀로서는 아직 낯선 감이 있는 흥분되는 느낌이 스멀스멀 살갗을 타고 올라왔다. 리체는 레이몬드 몰래 허벅지를 비비적댔다.
뽀얀 뺨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야한 색이었다. 차분했던 자세가 순식간에 야릇하게 흐트러졌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귓가와 어깨 사이의 오목한 부분에 고개를 숙이고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뜨인 그의 붉은 눈동자가 흥분에 젖어 번들거렸다.
“왜 거짓말했어?”
쉰 목소리가 리체의 귓구멍을 쿡 쑤셨다.
“그날 나랑 잔 거, 너잖아.”
“……!”
“부드럽네, 귀. 그날도 이런 느낌이었나? 내가 이거, 빨아 줬어?”
레이몬드가 입술로 귓불을 오물거렸다.
“무슨…….”
“…….”
“무슨 말씀이신지…….”
하, 레이몬드가 웃었다. 아까까지의 초조한 기색은 가라앉고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리체는 그의 변모한 분위기가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럼 왜 베타라고 거짓말했지? 이런 술집에선 오메가가 훨씬 유리할 텐데. 급료도 꽤 차이 나지, 아마?”
“…….”
“입술 꾹 닫고 있는 것도 야하네.”
레이몬드가 후우,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페로몬 때문에 자극받고 있는 모습이 분명하여 리체는 눈을 굴렸다.
“……곤란한 일을, 피할 수 있어서요.”
“…….”
“예, 전에 안 좋은 일을 겪었거든요.”
“대답 잘하네.”
무슨 말을 하든 모두 거짓으로 치부할 작정인가. 리체는 미간을 좁혔다.
레이몬드가 손을 품으로 가져가 뭔가를 꺼냈다. 나비 모양 가면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그건 그날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곧 리체는 그게 그날 썼던 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가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레이몬드가 가면을 그녀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고개를 돌렸지만 곧장 잡혔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턱을 잡아 고정시키고 천천히 가면을 댔다. 안을 덧댄 비단의 감촉이 얼굴에 닿자 리체는 눈을 감았다. 곧장 명령이 떨어졌다.
“눈 떠.”
하는 수 없나…….
거기 있을 것을 알면서 구덩이를 향해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리체는 눈을 떴다. 가면의 눈 구멍 사이로 레이몬드를 보았다. 그의 눈이 흥분으로 달아오르는 것을 똑똑히 응시했다.
“……똑같잖아.”
레이몬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흥분과 욕망과 분노와 기쁨이 어우러졌다. 농도가 짙어진 페로몬이 리체에게 쏟아졌다. 숨이 막혀 리체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씨발.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착각을…….”
강한 손이 턱을 움켜쥐었다.
“더 거짓말하면 내 좆으로 네 구멍을 완전히 찢어 버릴 줄 알아. 허벌 보지되고 싶으면 더 해, 응?”
살기까지 어린 듯한 눈빛에 리체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아까는 미친놈인가 의심하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미친놈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비 모양 가면이 바닥으로 팽개쳐졌다. 그 위를 자근자근 밟는 레이몬드의 시선이 리체에게 못 박혔다.
리체는 그의 발 아래 밟히는 기분이었다.
“널 상상하면서 하루에 몇 번이나 한지 몰라.”
“……저기요, 손님.”
“레이몬드라고 불러.”
‘형제가 똑같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영활했던 머릿속은 드물게도 아무런 대안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에게 레이몬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리체는 꼼짝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얼굴만큼은 근사했다. 풍성한 붉은색 곱슬머리가 잘 어울리는 꽤 잘생긴 얼굴이다. 그러나 번들거리는 눈만큼은 미친놈과 다를 바 없었다. 상종하기 싫었다.
“나랑 하기 싫어?”
대답도 듣기 전에 그가 페로몬을 쏟아 냈다. 싫다는 말을 듣기 싫다는 의지가 명확했다.
이럴 거면 질문은 왜 하냐고. 미친놈답게 행동 양식도 미친 것 같다.
페로몬 억제에 실패한 리체는 그의 페로몬을 환영하며 버선발로 마중 나가는 제 페로몬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열에 들뜬 몸이 활짝 열리는 게 느껴졌다.
그의 유혹하는 페로몬을 섹스의 전조로 알아들은 몸이 복숭아 향 페로몬을 뿜어내고 가슴을 부풀게 했다. 이미 다리 사이에서는 편하게 섹스하기 위한 체액이 왈칵 흘러내리고 있었다. 축축한 가랑이가 남세스러웠다.
리체는 하아, 숨을 내뱉었다. 그냥 쉬는 숨까지 달콤한 향기가 속속들이 배어들었다. 그런 반응을 느끼지 못할 레이몬드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까맣게 짙어졌다. 천박한 말투와 달리 꽤 다정한 손길이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어깨를 오므리는 반응을 살펴보다 단정적으로 말했다.
“난 오늘 너랑 섹스해야겠어.”
“흐읏…….”
목덜미가 빨렸다. 기분이 나빠야 마땅한데 흥분이 되었다. 몸을 한 번 섞었다고 그 쾌감을 기억하기라도 하는 건지, 몸이 더한 자극을 바라고 있었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레이몬드의 입술이 다시 귓불로 올라왔다. 재촉하듯 쭉 빤다. 질척한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리체는 반쯤 체념 섞인 결론을 내렸다.
이제 와서 레이몬드를 떼어 내기란 그의 기억을 지우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이었다.
게다가 사실, 조금 흥미롭기도 했다. 섹스의 쾌감을 여기 와서 처음 알게 된 그녀였다. 수십 년 간 누린 적 없는 자극적인 쾌감을 좀 더 맛보고 싶었다.
“대신.”
“대신?”
레이몬드가 몽롱한 목소리로 그녀를 따라했다. 페로몬 덩어리. 리체는 관능적인 그의 눈빛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정면만을 응시했다. 덕분에 달뜨기 시작한 몸과 달리 똑 부러지는 목소리가 나왔다.
“조건이 있어요.”
“조건?”
레이몬드가 눈을 깜박거렸다.
“비밀을 지켜 주세요.”
“……비밀? 네가 오메가라는 거?”
“그것도 그렇고요, 손님과 제…… 관계도요.”
“너랑 나랑 떡친 걸 비밀로 해 달라고?”
굳이 왜 그래야 하는데? 하듯 레이몬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리체는 그가 한심해졌다. 제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까먹었단 말인가. 그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 레이몬드는 자신이 떡쳤던 여자들의 안위 따위,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몇 명은 필시 불쌍한 꼴을 당했겠지.
무시무시하게 아름다운 금발의 극우성 오메가를 떠올린 리체는 덤덤히 말했다.
“무섭거든요.”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했던 레이몬드의 머리가 느릿하게 기울어졌다. 머리카락을 그녀의 어깨에 비비는 꼴이 되었다. 그 상태로 살짝, 혀를 내밀어 귀밑 여린 살을 핥는다. 그가 뿜는 섹슈얼적 텐션에 내심 긴장했던 리체가 펄쩍 뛰어올랐다.
“민감하네.”
왠지 민망한 기분에 리체는 입 안쪽 점막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게 다 오메가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리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이델리 말하는 거야?”
그가 ‘난 또 뭐라고’ 하는 투로 나른히 웃었다.
“그년 성격이 더럽긴 하지. 그래도 난 괜찮을 텐데. 저번에 내가 걔랑 키스한 것 때문에 그래?”
“…….”
“신경 쓰지 마. 패팅 정도야 장난삼아 했지만, 떡 친 적은 없어.”
바람둥이에게 홀려지는 순진한 시골 처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라, 리체는 기분이 묘해졌다. 저를 살살 달래는 레이몬드를 힐끔하고 대꾸했다.
“……그래도요.”
“뭐, 알았어. 입 다무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레이몬드의 손이 리체의 등 뒤로 넘어갔다. 달칵. 문이 잠겼다. 흠칫하는 리체를 폭 끌어안았다.
“있지. 그 알량한 비밀, 잘 지켜 줄 테니까…….”
큰 손이 리체의 빗장뼈와 가슴을 만지작댔다.
“네 몸, 맛보게 해 줘.”
할짝,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은 레이몬드가 다시 그녀의 냄새를 훅 빨아들였다. 분명 정수리 냄새가 날 텐데, 그는 도리어 흥분했다.
“좋긴 좋은데, 생각해 보니 화가 나네. 이 씨발년, 나한테 거짓말이나 해 대고.”
게다가 돌변한 태도로 욕설을 중얼댔다. 리체는 이 미친놈이 손찌검도 하는 건 아닌지 싶어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간질간질한 쾌감을 해소하는 것이었지, 이상 성행위가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참았는지 모르지.”
불룩 튀어나온 바지 앞섶이 리체의 말랑한 뱃살을 비벼 댔다.
“더는 못 참아.”
입술을 깊게 맞춰 왔다. 뜨겁게 느껴지는 혀가 그녀의 것을 얽어 왔다.
왠지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이 원주민을 건드린 건 역시 실수였을까? 혀를 진득하게 빨리며 리체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쾌감이 몸을 잠식하자 당장 해답을 낼 수 없는 불길함은 빠르게 뒤처졌다.
* * *
레이몬드 스트리고와는 두 번째 섹스였다. 술에 취한 첫날의 그가 발정 난 짐승처럼 급하고 거칠었다면, 제정신인 그는 좀 더 집요하고 보다 계획적으로 난잡했다.
눈 밑이 칙칙해서 음침하고 피로해 보이는 낯을 가랑이 사이에 처박은 그는 개처럼 혀를 놀려 댔다. 치덕거리는 물기 어린 소리가 물레방아처럼 끊이지를 않았다.
“씨발년아, 빨리 말해.”
“아읏, 흣, 욕, 좀, 이씨……!”
너만 욕할 줄 아니. 열받은 리체가 욕설을 되돌려 주려는 순간 두 손가락이 구멍에 처박혔다.
“아아읏! 말, 말하는데!”
“닥쳐.”
방금까지 말하라고 했던 주제에 이제는 닥치란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하긴 미친놈의 장단을 어떻게 맞출 수 있겠는가. 묘하게 설득된 리체가 허리를 흔들며 그의 머리를 뒤로 밀었다. 좋은데, 이상하게 좋은데, 그런 만큼 낯설어서 그를 자꾸 밀어내게 됐다.
성가신지 쓰레기를 버리듯 손을 멀리 내친 레이몬드가 음핵을 혀로 간질이며 손가락으로 구멍을 쑤셨다.
“빨리 말하라니까.”
“뭐, 뭐를! 아으응!”
“날 저주한 게 맞지?”
“무슨, 미친, 핫, 소리!”
레이몬드가 질 속에서 관절을 구부렸다. 툭 튀어나온 뼈마디가 내벽을 쿡 찌르자 통증 섞인 쾌감에 입이 헉 벌어졌다.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데 레이몬드는 잘도 개소리를 씨불여 댔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못 싸는 건데, 씨발. 안 죽일 테니까 거짓말하지 말고 사실대로 얘기해. 아, 죽여주긴 할게. 좆대가리로 사정없이 처박아서 죽여 버릴 거야.”
‘미친놈…….’
리체는 고개를 젖혀 마구 흔들었다. 쾌감에 절로 일어난 움직임이었지만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씨발, 독한 년.”
미친놈이 누구보다 멀쩡한 자신에게 욕을 하는 상황이다. 리체는 원래의 저 같았으면 가까이 가지도 않을 종자와 점막을 접붙이고 있단 현실에 잠깐 허탈해졌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걸까. 어떻게 해서든 거부하고, 질색을 해서…… 윽!
레이몬드가 그녀의 몸을 뒤집고 엉덩이를 붙잡았다. 엎드린 채 엉덩이만 치켜올린 자세가 되었다. 리체가 제일 수치스러워하는 자세였다. 팔꿈치로 기어 도망가려는 그녀의 엉덩이를 붙잡고 레이몬드가 쭉 끌어당겼다.
레이몬드가 좋아하는 자세는 분명했다. 그날처럼 엉덩이만 들어 올린 채 엉덩이 골이 핥아졌다. 도망가려다 말고 리체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처 다물리지 못한 입술 틈으로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게 제 입에서 흘러 나갔단 생각에 리체는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았다.
통통한 엉덩이를 양옆으로 벌리고 레이몬드가 음부와 엉덩이 사이 구멍을 동시에 핥았다.
음부를 향해 긴 혀를 내밀자 뾰족한 코가 엉덩이 사이에 파묻혔다. 누군가의 얼굴을 엉덩이 사이에 달고 있다. 누가 보면 죽을 만큼 창피한 모습일 거다. 리체는 소파에 얼굴을 박고 가죽 시트를 박박 긁었다.
“보지 냄새 진해.”
소파 반대쪽에 몸을 눕힌 레이몬드가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리체의 엉덩이를 더 높이 들었다. 리체는 하는 수 없이 무릎을 펴고 몸을 고정했다. 음부와 엉덩이 구멍이 모조리 보일 터였다. 조금이라도 숨기고자 허리를 비트는데 돌연 레이몬드가 구멍에 코를 박고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 자극만으로도 체액이 왈칵 쏟아졌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혀로 핥은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음부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페로몬을 숨길 수 있었지? 약이라도 먹었어? 하아.”
다시 페로몬을 들이마신 레이몬드가 눈살을 구겼다.
“나한테는 숨기지 마. 아니, 숨길 필요도 없지.”
“……흐윽!”
레이몬드가 검지와 중지를 펴서 빼꼼 튀어나온 음핵을 상하로 문질렀다.
“숨기지 못하게 할 거니까.”
가로로 음핵을 비비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차로 빨라졌다. 리체의 허벅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 무릎에서 자꾸만 힘이 꺾였다.
레이몬드는 힘을 더 주어 음핵을 문질렀다. 강렬한 쾌감에 엉덩이가 절로 움찔거리고, 리체는 연거푸 끙끙댔다. 그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손을 빠르게 움직인다. 음핵이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마찰되자 허벅지 살이 마구 흔들렸다.
“하아앙!”
엉덩이에 힘이 팍, 들어갔다. 뭔가를 싸는 감각에 리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뭔가 쭈욱, 밀려 나가는 감각과 함께 음부에서 대량의 물이 흘러내렸다.
학, 흐윽, 흑. 신음하며 리체는 멍해졌다.
‘미쳤어, 나 뭐 한 거야……?’
오줌을 싸는 것과 흡사한 감각에 등골에 서늘함이 훅 끼쳤다. 혹시나 싶어 고개를 숙여 음부를 바라보자 다행히 투명한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안도한 것도 잠시.
그녀의 다리 사이에 기어들어가 음부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레이몬드가 보였다. 그러곤 입술을 핥아 댄다.
‘……?’
투둑. 때맞춰 애액이 그의 입술에 떨어졌다. 그것도 냉큼 핥아먹는다. 레이몬드가 다리 사이를 빠져나갔다. 힘이 빠져 소파에 드러눕고, 다시 다리를 갈라 들어오는 레이몬드를 응시했다. 이제 보니 입술 주변이 온통 물기로 번들거렸다.
“박아 주지도 않았는데 싸고. 이런 몸으로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해?”
* * *
“흐으윽…….”
쑤욱. 쑤욱. 굵은 성기가 파고들 때마다 흘러나오는 신음이 감미로웠다.
“헉!”
금세 뿌리 끝까지 성기를 파묻은 레이몬드는 리체의 말랑한 엉덩이를 쥐어뜯을 듯 움켜쥔 채 바르르 떨었다. 뇌리부터 몸의 구석구석까지 퍼지는 감각에 말초 신경이 타오르는 듯했다.
“하, 흐으.”
신음을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상상했던 쾌감은 조금의 미화 없이도, 오히려 더 강하게 재현되었다.
성기가 제집처럼 찾아 들어간 질 내부는 빠듯했고, 내벽은 쫀쫀하고 부드러웠다. 그뿐인가. 생생한 생명력으로 미친듯이 꿈틀거려 그의 것을 쉬지 않고 자극해 댔다.
미치도록 야한 몸.
레이몬드는 극상의 쾌감을 맛보았다. 흥분으로 가늘어진 뱀 같은 눈이 제 아래 엎드린 여체를 내려다보았다.
감히 저를 속이고 나르려 한 괘씸한 오메가가 뺨을 소파에 댄 채 삽입의 충격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하아…….”
숨결에서 느껴지는 달큼한 향. 기분 좋은 쾌감에 바르르 떠는 어깨가 레이몬드의 가슴을 진탕시켰다. 거대한 도깨비가 몽둥이로 심장을 두들겨 패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킥킥 웃었다.
“이렇게 집중해 버리다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그의 머릿속을 점령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델리마저도.
첫사랑, 첫 욕망, 형에게 갖는 열등감과 발맞추어 자라 온 지긋지긋한 색욕. 그 모든 것들이 이델리였다. 그녀에게서 눈 돌려 품었던 수많은 여자들이 그를 닳고 닳은 남자로 만들었다.
섹스의 쾌감은 질리도록 느껴 보았고, 이제 그런 종류의 쾌감은 짧은 만족감만 주고 한여름 밤의 꿈처럼 힘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이런 건 동정을 뗀 이후 처음인가?’
아니, 그때보다도 지독하게 기분 좋았다. 레이몬드는 조금 쉬었다고 평온해진 리체의 얼굴을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며 허리를 살짝 움직였다.
안을 쿡 찌르자, 내벽이 오물거리며 성기를 압박했다. 아윽, 미친년. 절로 욕설이 터졌다.
“아아…….”
레이몬드는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알 수 없게 바르작거리는 리체의 얇은 허리를 붙잡고 팡, 팡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 아아, 아응! 자, 잠깐만……! 너무, 빨, 아앗!”
고작 열댓 번 왕복 운동을 했을까? 사정감이 밀려와 움직임을 멈추었다.
“흐으, 하, 미친…….”
거친 숨을 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발간 얼굴로 리체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파란 눈이 ‘쉬는 거예요?’라고 묻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레이몬드는 싸기 싫어서 멈추었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입을 여는 대신 아직 벗겨지지 않은 리체의 유니폼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한 손으로 순식간에 단추를 풀어내는 기교를 선보인 레이몬드가 눈을 번뜩였다.
셔츠가 벗겨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하얗고 포동포동한 가슴에 시선이 못 박혔다.
홀린 듯 손을 뻗었다. 가슴을 움켜쥔 레이몬드는 그 부드럽고도 말캉한 감촉에 입술을 짓씹었다.
“빨통이, 씨발……. 씹어서 없애 버리고 싶어.”
무슨 미친 소리인가.
기겁해서 몸을 일으켰던 리체는 젖꼭지를 물어뜯기자 비명 섞인 신음을 토했다.
“아, 아파아앗!”
레이몬드는 가슴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다가 가슴 아래 부분을 콱 눌러 젖꼭지가 더 튀어나오도록 만들었다. 혀를 내밀어 단단해진 젖꼭지를 핥으며 허리를 살짝살짝 흔들었다. 쿠욱, 쿡.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하지만 앞부분이 뾰족한 귀두가 안쪽을 장난치듯 찔러 댔다. 리체는 자지러졌다.
그의 애무는 집요했고 점차 몰려오는 쾌감이 넘실거렸다. 리체는 쾌감에 잠겨 끊어질 듯 말 듯 가는 신음을 끊임없이 뱉어 냈다.
성기가 결합된 상태로 리체의 온몸을 핥아 댄 레이몬드는 그녀의 겨드랑이를 길게 핥아 올리고는 늘씬한 팔을 들어 올렸다. 리체는 양팔을 위로 올린 채 할딱거렸다. 아까보다 혼탁해진 파란색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씨발…….”
성기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안 움직일 수가 없잖아!”
“흐읏.”
쾅! 안쪽을 강하게 한 번 들쑤셨다.
레이몬드는 신경질을 내며 젖꼭지를 잡아 비틀었다. 리체가 흐느꼈다.
시간이 지나 레이몬드의 사정감이 참을 수 있는 정도로 가라앉았다. 그는 손을 들어 리체의 손목을 한꺼번에 잡아 올렸다. 그리고 억눌러 왔던 울분을 담아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푹!
강하게 박고 다시 물러나자 리체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끝까지 밀어 넣으려는 듯 안간힘을 썼다.
“아아아앙!”
이미 온몸이 성감대가 되어 버린 리체는 통증을 느끼지도 못하고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격렬한 반응에 레이몬드는 다시금 사정감이 몰려왔다. 당장이라도 사정하고 싶은 걸 참고는 격렬하게 추삽질을 했다.
탁, 탁!
그 기세가 어찌나 거세던지 음낭이 리체의 흰 볼기를 짜악, 짜악 뺨을 때리듯 두드렸다. 추삽질을 못 이긴 가슴이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분홍빛 유실이 눈을 현혹했다. 레이몬드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하, 더럽게 덜렁거리네.”
찰싹!
리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탐스러운 사과처럼 보였다. 젖은 눈으로 힘껏 노려보는 것도, 그의 성감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레이몬드는 지체 않고 손을 휘둘렀다. 하얗고 둥근 빵을 두 개 얹어 놓은 듯한 리체의 가슴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가벼운 손놀림이었지만 가슴이 아프게 찌릿거렸다.
“아, 아읏, 아, 아파, 아파!”
“지랄하지 마. 씨발, 이렇게 조이는데. 어디서 아픈 척을 해.”
찰싹, 착!
푹, 푹!
허리를 쳐올리며 레이몬드는 계속해서 흔들리는 가슴을 손으로 내리쳤다.
“아앗!”
아릿한 통증의 성질이 변했다. 성감대가 된 몸이 통증마저도 쾌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미친, 미친 것 같아…….’
리체는 눈물을 글썽이며 허리를 튕겼다. 동시에 레이몬드가 아래로 찍듯이 성기를 박았다. 그녀가 허공으로 허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과 그가 아래로 찍는 동작이 맞물렸다. 우연이었다. 우연의 결과물은 실로 컸다.
그녀의 느끼는 부분을 귀두가 정확히 찧자 리체는 눈앞이 아찔했다.
“하아악! 하아아앙!”
귀를 오싹하게 하는 교성에 레이몬드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입술을 강하게 씹으며 그가 다시 손을 가슴으로 내리쳤다.
찰싹!
찰싹!
좌우로 몇 번이고 내리치자 그녀의 양 가슴이 벌겋게 물들었다.
레이몬드는 흔들리는 붉은 가슴을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마찰로 쓰린 살결에 통증을 느낀 리체가 신음 같은 비명을 질렀다.
“흐윽, 아파, 아파요!”
“젖탱이가, 흑, 자꾸, 흐으, 흔들려서, 미치겠잖아. 제기랄!”
양손으로 리체의 붉어진 가슴을 꽉 잡고 레이몬드가 거칠게 추삽질을 했다. 느끼는 부분을 연속으로 박힌 리체는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아아앙!”
절정에 다다른 그녀의 음부에서 맑은 물이 왈칵 쏟아졌다. 동시에 리체의 가장 깊숙한 곳에 귀두를 파묻은 레이몬드는 몸을 굳혔다. 배의 근육 사이 고랑이 움푹 들어갔다. 허리가 가늘게 떨렸다. 구멍에선 여전히 물이 찍찍 흘렀다.
그녀의 몸에 엎어진 레이몬드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곤 리체를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옆에 누운 자세로 어깨를 끌어안고, 그 손으로 톡 튀어나온 분홍빛 젖꼭지를 가볍게 튕겼다.
“아, 아…….”
온몸이 민감한 상태인 리체가 몸을 부르르 떨자 킬킬 웃은 레이몬드가 아래를 힐끗했다.
“계속 싸고 있네. 그렇게 좋았어?”
리체는 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 말이 수치스러웠다. 레이몬드는 질질 흐르는 음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붉은 자국이 가득한 가슴을 널찍한 손바닥으로 슬슬 문질렀다.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좋아. 결정했어.”
“…….”
“너 나랑 살자.”
‘뭔 소리야?’
리체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가슴에 뺨을 기댄 레이몬드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그가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당한 얼굴로 웃었다.
“나를 이런 병신 같은 몸으로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지. 너도 나 말고는 아무와도 씹질하지 않는 거야.”
뭐 이런 어린애 같은 논리가 다 있는가.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 몸뚱이가 너무 음란해서 제한이 필요할 것 같아. 음, 좋아. 결혼밖에 답이 없겠어. 그렇게 되면 너도 아무 데서나 치마를 까지 않겠지.”
도블락에서 간통은 매우 심각한 중죄였다. 그건 문란한 알파오메가 사회에도 적용되었다. 그 문제 이전에 리체는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엉덩이 가벼운 창부 취급은 둘째 치거니와 그의 생각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제 의견은요?”
타당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왜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싫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라는 뉘앙스에 리체는 할 말을 잃었다. 고작 떡 두 번 친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결혼은 무슨 결혼인가.
아닌 게 아니라 리체는 레이몬드를 몰랐다.
그녀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1. 카이로 스트리고의 동생으로 형에게 자격지심을 갖고 있음.
2. 꽤 매력적인 알파.
3. 극우성 오메가인 이델리 그레이스와 묘한 관계.
이 정도였다.
레이몬드 스트리고, 그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정보는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리체는 결혼을 일개 사회 제도로 치부하며 그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상대에 대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결혼을 언급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레이몬드는 자존감은 낮아도 자존심은 꽤 강한 사람이었다. 형을 배제하면 자존감이 그렇게 낮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에 비하면 높은 편이었다.
우성 알파에다 반항적이면서도 퇴폐적인 외모가 매력적이라 그를 침대로 유혹하는 오메가는 수를 셀 수도 없었고, 형에게 댈 수 없을 뿐 검에 대한 재능 역시 능히 수재의 반열에는 들었다.
차남이기에 작위를 승계받지는 못하나 그에게 돌아간 가문의 유산 역시 평민 기준으로 한 가정을 너끈히 건사할 수 있었다.
반면 클럽의 종업원인 리체는 그 직업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베타에서 오메가로 발현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평민 여성 오메가.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인류학자라는 정체성 없이, 그런 평범한 오메가였다면 레이몬드의 청혼을 뜬금없다며 황당해하는 게 아니라 매우 감격하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와의 결혼은 클럽의 종업원 입장에서 로또 맞을 확률과 비슷한 신분 상승이었으니까.
하지만 리체는 재수 없게 이 차원에 떨어진 입장이었고, 지금은 길이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본 차원으로 돌아가겠다는 목적이 분명했다.
그걸 떠나서도 레이몬드와의 결혼은 여러 가지 걸리는 점이 많았다.
일단 레이몬드는 그녀가 형인 카이로 스트리고와 먼저 배를 맞춘 사이란 걸 몰랐다.
알았다간 칼부림이 날 것이다. 또한 그는 이델리 그레이스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이다. 둘 다 최악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리체는 본 차원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비참하게 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그에게 어떤 애틋한 감정도 없었다. 섹스 자체는 기분 좋았지만 말이다.
‘결혼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본 차원에서도 섹스 한두 번 했다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었을 뿐더러 이 차원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 분명했다.
“미친, 암내도 좋아…….”
“……흐응. 좀, 떨어져, 흐, 봐요.”
“결혼하면 잘해 줄게.”
쫍, 쪼옵.
젖꼭지를 빨며 레이몬드가 웅얼거렸다. 리체는 신음하며 마음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상황이 더 안 좋아진 건 아니겠지?’
어쩐지 발바닥이 간질간질한 것이, 들어가지 말아야 할 웅덩이에 발이 빠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