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길쭉한 몸이 복도를 걷는다. 휘청.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레이몬드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 부드러워 보이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주는 귀여운 느낌과 달리 얇고 색이 짙은 입술은 포악하게 비틀어졌다.
‘교활한 이델리.’
그녀를 떠올리자 술에 취한 머리로도 분노가 솟구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색욕도 함께 올라, 다리 사이가 불편했다. 이델리와의 키스로 애매하게 달궈진 몸이 풀어 달라 기승을 부렸다.
성욕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 이델리는 이 상태까지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여유롭게 웃지 않았을 테니. 다시 생각해도 교활한 애였다.
풀리지 않는 성욕에 레이몬드의 기분은 저조해졌다.
흥분시키기만 하고 끝까지 가지는 않는 이델리의 행태로 점점 짧아지고 있는 인내심이 언제까지 폭발하지 않을 수 있을지 스스로도 궁금할 지경이다.
‘나를 가지고 놀고 있는 거지.’
픽 웃은 레이몬드는 허리를 쭉 폈다.
그가 나온 지금, 이델리는 다른 놈을 골라 떡을 치고 있을 것이다. 같잖은 자위를 도와주었던 얼빠진 놈을 타고 있을 수도 있다.
흉흉해진 눈이 텅 빈 복도를 쓸었다. 반반한 오메가는커녕 베타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다른 클럽으로 가야겠어.’
레이몬드는 불편한 바지춤을 느슨하게 풀고 걸음을 옮겼다.
섹스 상대를 구하는 건 퀸이 가장 좋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이델리의 행차로 손님을 받지 않았으니 텅 빈 냉장고 같은 상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클럽이 퀸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리 하나만 건너도 수두룩한 클럽에는 섹스할 상대가 즐비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도 생각만큼 흥이 오르지 않았다.
잘난 형이 집을 비운 지금, 아무나 골라잡아 집으로 데려갈까.
지저분한 걸 경멸하는 카이로의 성정상 최대한 더럽고 난잡하게 노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가라앉았던 성욕이 다시 오르는 것도 같았다.
레이몬드는 킥킥 웃으며 계단을 향해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려는 찰나, 작은 문이 눈에 들어왔다. 착각인가. 왠지 달콤한 향기가 나는 듯했다.
홀린 듯이 문으로 걸어가자 향기가 점점 더 선명하게 맡아졌다.
두근두근.
뛰는 가슴에 레이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모험을 앞둔 소년처럼 가슴이 설렜다. 레이몬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벌컥!
내부가 드러나는 순간, 레이몬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방은 어두웠고 어딘지 모르게 쿰쿰한 냄새가 날 것 같았다. 몇 걸음 움직이면 끝에 닿을 정도로 좁고 가구라고는 소파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몸을 뉘이면 종아리 아래로는 밖으로 삐져나올 것 같았다. 작은 방은 그의 시선을 끌 만할 게 전혀 없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소파에 웅크린 몸을 보자 향기가 머릿속을 치고 들어오는 듯했다.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이 안에 요녀가 있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가랑이를 내려다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성기가 완전히 발기해 있었다. 엉덩이 사이에 힘이 콱 들어간다.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달콤한 페로몬이 무형의 손이 되어 성기를 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레이몬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뗐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요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했다. 파르르 떨리는 뺨을 보자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요녀.
단어가 풍기는 느낌과 달리 작은 몸집의 여자였다. 술에 너무 취한 걸까. 그래서 신경 계통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어째서 이렇게 흥분되는 거지?’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싸고 있어 파란빛 눈 말고는 잘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어딘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분위기가…….
꿀꺽.
‘더럽게 꼴려.’
레이몬드는 침을 삼켰다. 피가 바싹 바싹 말랐다. 어중간하게 달아올랐던 성감이 횃불로 불붙인 장작처럼 화륵 달아올랐다.
‘이 오메가랑 섹스해야겠다.’
레이몬드는 결심했다. 무조건 섹스하고 말겠다. 끓어넘치는 성욕을 이 맛깔나게 생긴 오메가에게 풀어 버릴 것이다.
오메가 페로몬에 유혹된 몸이 무섭게 고양되고 있었다.
반쯤 눈을 감고 자극적인 페로몬을 음미하던 레이몬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미롭게 자지를 간질이던 페로몬이 급감했다. 기분 좋게 손을 적셨던 물이 몇 방울로 쪼그라든 것처럼. 감질난 레이몬드의 이맛살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안타까움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피가 빨리 도는 만큼 술기운도 빨리 돌았다. 레이몬드는 비틀거리며 소파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척, 소파 뒤를 붙잡고 그녀를 가둔 레이몬드가 미심쩍게 말했다.
“뭐야, 너. 오메가 맞아?”
* * *
리체는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단지 자신의 페로몬을 확인하려 한 것뿐이었는데 알파가 꼬였다. 거미줄에 먹잇감이 알아서 찾아와 걸린 셈인데 문제는 이 먹잇감이 달갑잖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득이 되지 않는 섹스는 할 생각이 없었고, 특히 상대가 레이몬드 스트리고라면야, 곤란하기까지 하다.
내심 혀를 찬 리체는 지체 없이 페로몬 억제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수도꼭지가 잠기는 것처럼 페로몬이 훅 줄어들었다.
몽롱했던 레이몬드의 얼굴이 안타까워지더니, 곧장 다가온 그에게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너. 오메가 맞아?”
“…….”
“아니, 제기랄. 머리 아파. 정신이 어떻게 됐나. 분명 베타인데.”
고개를 흔든 레이몬드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 짐승 같은 시선에 리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메가가 알파 페로몬에 저항할 리 없잖아.”
리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알파 페로몬에 저항하는 오메가의 사례도 있기는 했다.
물론 대개는 알파 페로몬을 접하면 가랑이 사이가 축축해지며 성교하기에 적합한 체액을 토해 내어 섹스할 준비를 마치기는 하지만, 상대의 페로몬이 형편없거나 정신력이 강한 경우는 페로몬의 마력에 저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엘자만 해도 허접스러운 알파가 페로몬으로 꼬셨을 때, 정신력으로 물리쳤다고 하니까.’
물론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원하지 않는 상대의 유혹을 거절할 때는 페로몬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하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리체에게는 다른 차원 주민에게 주어지는 스킬이라는 특혜가 있었다.
레이몬드 스트리고, 우성 알파. 대륙에 한 명 있는 수준의 극우성 알파만큼은 아니지만 우성 알파도 몇 되지 않는 소수의 형질이었다.
퀸에서 일하는 동안 리체가 만났던 우성 알파는 채 다섯을 넘지 않았다. 그것도 카이로 스트리고와 제니스 보르신을 포함한 숫자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성 알파인 레이몬드는 나쁘지 않은 상대다. 기회라고 봐도 될까.
‘데이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그럼에도 리체는 망설였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아무래도 좀.’
레이몬드는 카이로의 동복 동부 형제다. 바로 얼마 전에 신나게 떡쳤던 상대의 친혈육인 것이다. 두 사람이 형제 관계인 건 양심이랄지 모럴이라 해야 할지, 어쨌든 마음이 껄끄럽다. 형제 덮밥을 몸소 연출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파오메가라는 특이한 형질 없는 차원에서 어릴 때부터 자라 온 리체는 일부일처제가 익숙했으므로,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지금 여기서 섹스한다고 하더라도 카이로와 레이몬드는 자신들이 같은 구멍에 박았다는 걸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이다.
이 상황을 적당히 넘겨야겠다고 결심한 그때였다.
[돌발 퀘스트 발생.
우성 알파인 레이몬드 스트리고가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의 유혹에 응하여 섹스하십시오.
보상: 레이몬드 스트리고의 알파 페로몬 수집. 오메가 페로몬 수치 +3 증가.]
리체는 허공에 뜬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제 덮밥은 싫다고 했던 방금의 결심이 무색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이 있지만 연구 지적 성취감에 비하면 도덕은 가벼운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제기랄. 내가 착각을 했다고?”
레이몬드가 얼굴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한창 섹스할 생각에 흥분했다가 찬물을 맞은 것과 다름없는 상황.
“말이 되냐!”
잔뜩 신경질을 내는 그를 리체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남자에게서 피어오른 불규칙적인 페로몬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킁킁, 허공의 냄새를 맡았다. 바닷가의 진흙 냄새. 비릿하면서도 눈이 기분 좋게 감기는 페로몬이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답다고 해야 할까.
역시 좋은 데이터다.
아쉬움에 리체는 입맛을 다셨다.
‘이게 있으면 지금까지 수집한 알파 페로몬의 우위를 다퉈 볼 수 있을 텐데…….’
리체의 눈이 도르르 굴러갔다. 총명한 눈동자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아, 열 냈더니 머리 아파.”
술기운이 오르는지 레이몬드는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마에 생긴 주름은 역시나 신경질적이었다.
그 모습에 리체의 파란 눈이 반짝였다. 페로몬에 가려진 술 냄새가 확 끼쳐 왔다.
‘지나친 음주로 인한 두통 호소.’
주량을 초과하여 음주할 경우 알코올 분해 효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까지 오래 걸리고, 술기운이 완전히 깨기까지는 최소 9시간이 걸릴 것이다.
과음한 사람이 단기 기억 상실 현상을 보일 경우는 열 명 중 네 명 정도.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17도 술을 네 병 이상 마실 경우 보통은 열 명 중 일곱 명 이상이 일시적 기억 장애에 시달린다.
리체는 다이아몬드 룸으로 들어간 술이 총 몇 병이었는지 떠올렸다. 아주 많았다.
‘조금만 조작하면 기억을 못할 가능성이 80퍼센트…….’
그 정도면 할 만하다.
리체는 소파 옆 협탁을 더듬었다. 분명 손님으로 온 애인과 즐기던 종업원이 그걸 여기다 둔 걸 봤는데. 손가락에 줄이 걸렸다. 밖으로 꺼내었다. 눈 부분이 뚫린 검은색 나비 모양 가면이었다. 리체는 가면을 썼다.
“으응?”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얼굴을 쓸어내리던 레이몬드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가면을 착용한 리체가 레이몬드를 응시했다.
나비 가면 아래 드러난 그녀의 입술이 오물거렸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자 레이몬드의 시선이 혀끝에 고정됐다.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미소 짓는 붉은 입술은 지독히도 색정적이었다. 레이몬드가 콧잔등을 실룩거렸다.
페로몬 억제를 푼 그녀에게서 어느새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페로몬을 감지한 레이몬드의 눈이 광견병 걸린 개처럼 충혈되었다. 으르렁. 삐죽하게 올라선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씨발, 역시 내가 착각했던 게 아니었잖아.”
살짝 물렁해졌던 레이몬드의 자지가 바지를 뚫고 나올 듯 꼿꼿하게 발기했다.
* * *
오래지 않아 리체는 레이몬드가 변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한 범주의 성적 취향을 벗어나는 걸 세간은 변태라고 한다. 그 기준에 따르면 레이몬드 스트리고는 변태였다.
“흐읏!”
리체는 소파에 엉덩이만 치켜든 자세로 엎드렸다. 물컹한 혀가 엉덩이 골 사이를 핥자 말 못할 소름이 허리에서 어깨까지 내달렸다.
손으로 가죽 소파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에 난 땀 때문에 찌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츄르릅.
레이몬드가 엉덩이 골 사이에 처박은 혀를 놀리자 음란한 소리가 울렸다.
츄릅, 츄르릅.
연약한 그곳의 살이 혓바닥에 쓸렸다. 이러다간 살이 헐어 버릴 것 같다. 걱정이 된 리체가 몸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이었다.
철썩!
따끔한 통증이 엉덩이를 후려쳤다.
“흑!”
리체는 얼굴을 소파에 처박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박은 레이몬드의 붉은 곱슬머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하응, 그만, 흐으응.”
목소리에 신음이 섞였다. 엉덩이 사이를 빨리는 기분은 음부를 빨릴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보다 수치스러웠다. 그 수치가 쾌감으로 바뀌는 순간 리체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아.”
레이몬드의 갈라진 신음을 듣고 제 추태를 깨달은 리체는 엉덩이를 흔들던 걸 멈추었다.
손가락으로 소파의 가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키스할 때부터 엉덩이를 마구잡이로 쓰다듬고 벌리더니, 레이몬드는 리체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번쩍 들어 소파에 엎어 놓았다.
그리고 유니폼 바지와 팬티를 벗기고는 엉덩이에 입술을 처박았다. 쩌억. 수박을 쪼개듯 힘을 주자 토실토실한 살덩이가 양옆으로 더 벌어졌다. 보름달처럼 둥글고 하얀 엉덩이에 남자의 손자국이 붉게 찍혀 있었다.
묘한 감흥을 일으키는 광경에 마음이 동한 레이몬드가 붉어진 엉덩이 살을 입을 벌려 깨물었다.
“아윽!”
깜짝 놀란 리체가 고개를 돌렸다. 엉덩이 살을 모아 깨물고, 잇자국이 남은 곳을 개처럼 핥는 레이몬드의 눈은 게게 풀려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해서 본능만을 좇는 모습이었다.
이성 대신 성욕을 따르는 건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침착해지려고 애를 쓰면서 리체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리 사이에서는 투명한 물이 흘렀다. 알파 페로몬에 반응한 몸이 섹스할 분비를 충분히 마쳤다는 의미였다.
베타가 흘리는 애액보다 양이 많고 미끈거리는 체액은 아무리 큰 자지라도 꿀렁거리며 삼킬 수 있을 듯했다.
레이몬드가 혀를 내밀었다. 다른 이들보다 긴 혀가 음부에서 흐르는 애액을 받아 마셨다.
할짝. 혓바닥 위에 애액이 똑, 하고 떨어졌다. 레이몬드는 맛을 음미하듯 혀로 입술을 핥으며 쩝쩝거렸다.
그의 섹스 스타일은 추잡한 편이었다.
평범한 섹스가 익숙했던 리체는 그가 저급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런 건 별로야.’
이제 그만 삽입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레이몬드가 다시 혀를 내밀었다. 긴 혀가 음부를 마구잡이로 헤집고 쑤셔 댔다.
“하아앗!”
아찔한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달아 리체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그녀의 아랫도리에 얼굴을 붙인 레이몬드는 하얗고 말랑거리는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고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코가 엉덩이 골 사이에 쿡 박혔다. 혀는 축축해진 음부를 쪼옥하고 빨았다. 애액이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리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변했다.
“아아, 아앙, 아응, 으으응, 흐읏!”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레이몬드에게서 흘러나오는 알파 페로몬이 그녀를 자극했다. 공격적으로 실내를 채운 페로몬에 자궁이 요동쳤다.
“흐아아아앙!”
울컥!
음부에서 체액이 비 오듯 흘러나왔다. 레이몬드는 흠뻑 젖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엉덩이 사이에서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은 이마까지 맑은 물로 축축해져 있었다.
흥분해서 풀린 눈동자가 야릇하게 수축되었다.
“씹물도 먹을 만하고.”
“흣!”
“존나 야하잖아, 너.”
쑤욱, 성기가 밀고 들어오자 리체는 고개를 위로 빼고 고양이처럼 길게 울었다.
“하앙.”
나비 가면으로 가려진 그녀의 눈 주위가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무성욕자로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그녀는 쾌감에 면역이 없었다.
그녀가 이곳 차원에서 섹스한 사람은 이로써 셋이 되었다.
두 번째 섹스 상대인 카이로는 몸뚱이는 단단하고 거칠지만 매너 있는 타입이었다. 반면 그와 한 핏줄을 타고난 레이몬드는 몸은 카이로보다 낭창하나, 말이나 행동 따위가 더러웠다.
철썩!
레이몬드의 커다란 손이 리체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리체가 비명을 질렀다.
“아파!”
레이몬드는 그녀의 뒤에 자리 잡아 허리를 앞으로 강하게 내밀었다. 긴 좆이 그녀의 자궁 입구를 찢어발길 듯 사납게 박아 댔다.
“아!”
리체는 고개를 수그렸다. 까만 머리칼이 앞으로 흘려 내렸다. 그녀의 머리를 한데 모아 휘어잡은 레이몬드가 억지로 들어 올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까처럼 허리를 돌려 봐.”
리체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저어 댔다.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직였던 일이 아직도 창피했다.
이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쾌감은 기분이 좋았지만, 그녀는 연구원으로서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 행위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연구하는 이 차원의 원주민들은 바로 이성보다 본능을 우선할 때 가장 짐승 같아지는 자들이었다.
“어서!”
“시, 싫어.”
리체의 거부에 레이몬드의 붉은 눈동자가 검붉게 변했다.
“아앗!”
머리가 아플 정도로 뒤로 젖혀졌다. 리체는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눈물이 찔끔 맺혔다.
그녀가 항의할 틈도 없이, 머리채를 강하게 움켜잡고 레이몬드가 질주했다.
퍽퍽!
퍽퍽퍽!
빠르게 허리를 놀리자 자궁구가 연속으로 찔러졌다. 리체는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페로몬 조절 스킬을 쓸 겨를이 없었다. 활짝 열린 수도꼭지에서 페로몬이 콸콸 쏟아졌다.
열성 오메가의 페로몬은 질이 낮고 그 양도 많지 않으니 필히 섹스의 후유증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리체는 몸의 반응을 조절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본능이 이성보다 앞선다는 증거였다.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레이몬드가 엉덩이를 세게 후려치자 다시 비명을 울렸다.
철썩!
“흐으, 너무 부드럽잖아.”
페로몬에 휘둘리는 건 레이몬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술에 취해서 흐릿했던 눈동자가 지금은 쾌감으로 인해 혼탁했다. 그는 한 손에 들어찰 만큼 앙증맞으면서도 탱탱한 리체의 엉덩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엉덩이는 이미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상처 입은 엉덩이를 뜨거운 손으로 어루만지자 리체는 앓는 신음을 흘렸다.
간드러지는 신음에 레이몬드의 성기가 크기를 키웠다. 안 그래도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리체의 안에서 꺼떡이던 것이었다.
엉덩이를 거칠게 붙잡자 리체가 반사적으로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질이 잔뜩 수축하며 안에 박힌 성기를 짜부라뜨릴 듯 움켜쥐었다.
“헉! 씨, 씨발.”
레이몬드가 양손으로 리체의 엉덩이를 터뜨릴 듯 강하게 쥐고 앞으로 움직였다.
“하읏!”
리체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남자의 좆을 끊어 먹을 엉덩이야.”
레이몬드는 거칠게 중얼거리며 다시 손을 들었다.
철썩!
리체의 엉덩이가 위로 솟구쳤다.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얻어맞을 때마다 충격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이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된 이후 엉덩이를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당혹스러움은 얄궂게도 몸의 반응으로 나타났다. 내벽이 오물거리며 성기를 꽉 죄었다.
“흑, 자지를, 쥐어짤 셈이야? 이대로, 흣, 싸면, 아까워서.”
엉덩이를 뒤로 물린 레이몬드가 구멍에 강하게 박았다.
“안 되지!”
“하아아앙!”
리체가 길게 교성을 질렀다.
레이몬드는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간드러지는 신음 소리, 성감을 부채질하는 기이한 오메가 페로몬, 그리고 가느다란 허리와 그에 대비되는 굴곡진 엉덩이. 낭창하게 흔들리는 몸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머리끝까지 흥분이 차올랐다.
“제기랄, 어디서 이런 게 나타나서는!”
거칠게 소리 지른 레이몬드가 엉덩이를 다시 내리쳤다. 리체는 눈물이 찔끔 났다. 엉덩이가 너무 화끈거렸다. 통증이 이는 그 엉덩이를 잡고 레이몬드가 추삽질을 했다.
딱딱한 장골이 얼얼한 엉덩이에 쉼 없이 부딪쳤다. 아파 죽겠는데 그에 비례하여 흥분이 되니, 리체는 당혹스러웠다.
그녀의 기준으로는 이 역시 변태적인 쾌감이었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이 모든 상황을 분석하고 있던 리체는 레이몬드의 지속적인 추삽질에 점차 머릿속을 비우고 쾌감에 몸을 맡겼다.
퀘스트 성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레이몬드의 사정과 그녀의 사정.
쾌감을 극대화하고 레이몬드를 사정시키기 위해 리체는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레이몬드의 좆이 빠져나갈 때마다 구멍에 힘을 주자 레이몬드는 신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박자를 맞췄다.
리드미컬하게 방아를 찧던 레이몬드는 성기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자 사납게 탄식했다.
“이…… 요녀 같으니!”
리체가 알아듣지 못하게 뭐라고 욕설을 중얼거린 레이몬드는 그녀의 붉게 변한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는 성기를 끝까지 박았다.
귀두가 반복적으로 안쪽의 스폿을 찌르자 리체는 점점 눈앞이 검게 변했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다.
“하아, 하아, 하앙.”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마처럼 리체는 자신의 포인트에 맞춰 허리를 흔들었다.
쑥쑥 손쉽게 그녀의 안을 찔러대던 성기의 속도가 어느 순간 느려졌다. 쾌감에 집중하던 리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내부에서 성기가 커지고 있었다.
과거, 그녀는 첫 번째 상대와의 섹스에서 이런 현상을 겪어 본 적이 있었다.
‘노팅!’
“크윽…….”
커진 성기 끝이 좁은 질을 억지로 넓혔다. 통증과 함께 쾌감이 무시무시하게 커져서, 리체는 신음을 질러 댔다.
노팅은 베타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알파들의 고유한 특징이었다. 성감이 지나치게 달아오르면 성기 끝이 부풀게 되는데, 이는 사정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주로 알파의 발정기인 러트 기간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하나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할 때도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었다.
특히 노팅은 알파오메가의 발정기만큼이나 임신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였다.
‘안 돼!’
정신이 번쩍 든 리체는 재빨리 임신 방지 스킬을 발동했다. 정확한 메커니즘은 모르지만 알파와의 섹스로 인한 임신 가능성을 줄여 주는 스킬이었다.
리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레이몬드가 노팅한 걸 확인하고는 어찌나 놀랐는지, 잔뜩 달아올랐던 쾌감도 식었다.
방탕하게 살아온 레이몬드가 그 반응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의 등에 바싹 가슴을 붙인 레이몬드가 흔들리는 리체의 가슴을 붙잡았다.
“딴 생각을 할, 흣, 여유가 있나 봐?”
심술궂은 손가락이 리체의 젖꼭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하읏!”
가슴이 따끔하면서도 아랫배가 후끈해졌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가슴을 압박하며 허리를 뒤로 크게 움직였다.
노팅으로 커진 귀두가 자궁구를 공격했다. 이전의 성기가 티스푼으로 내벽을 긁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스쿱으로 마구 처대는 것 같았다.
“아, 아으, 으, 으응, 아파아!”
쾌감에 비례해진 통증에 리체의 엉덩이가 경직되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좌우로 흔들리는 리체의 엉덩이를 강하게 붙잡은 레이몬드는 붉어진 눈시울로 결합부를 바라보았다.
분홍색 살점이 오물거리며 그를 야금야금 삼키고 있었다.
“자지를 뿌리까지 삼키고 있잖아.”
감탄하듯 중얼거린 레이몬드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등에 몸을 드리우고는 가슴을 붙잡았다. 젖을 짜는 것처럼 힘주어 주무르자 리체의 허리가 꺾였다.
“아, 아, 아아아!”
엉덩이만 위로 올린 채 무너진 리체의 가슴을 붙잡고 레이몬드는 미친 듯이 추삽질을 했다.
철퍽철퍽!
커진 귀두가 음부의 끝에 걸릴 때마다 리체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시각적으로 흥분한 레이몬드가 손을 뒤로 돌려 엉덩이를 내리쳤다.
“하앙, 앙, 하아, 하아앙!”
“흣, 헉, 허억.”
마치 말에 채찍을 내리치듯 리체의 몸에 올라탄 레이몬드가 빠르게 내달렸다.
부푼 귀두가 음부의 입구를 짓누르고 내벽을 긁으며 안으로 진입해 자궁구를 강하게 찔렀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자 리체는 머릿속이 하얗게 뒤집혔다.
“아, 아, 아, 아, 아아아아악!”
“흐윽!”
입술을 질끈 깨문 레이몬드가 이미 뿌리까지 삽입된 성기를 안쪽으로 더 밀어붙였다.
자궁구에 딱 붙은 성기에서 흰 정액이 콸콸 쏟아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안쪽에 쏟아부은 뒤에야 부풀었던 성기가 천천히 크기를 줄였다.
따뜻한 내부에 그대로 성기를 넣은 채 레이몬드는 땀이 배어난 둥그스름한 어깨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 씨발. 존나 좋았어. 하아, 하. 너, 이름이 뭐야?”
리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깨가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재차 물었다.
“이름을 말해. 그 바보 같은 가면도 벗고…….”
그가 손으로 나비 가면의 줄을 끊어 내려는 순간이었다. 레이몬드의 손이 미끄러지면서, 그가 휘청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리체는 엎드린 채로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반응이 오는군.’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잔뜩 만취한 상황에서 이뤄진 격렬한 섹스, 노팅까지 한 탓에 몸이 완전히 술기운에 잠식당했을 터.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섹스할 줄 몰랐는데. 이놈 완전 종마 아냐?’
얼른 쓰러지길 바라는 그녀의 마음에 응답하듯, 레이몬드가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졸려. 좀 자야겠으니 일어날 때까지, 가지 마……. 절대, 너…….”
레이몬드는 리체의 어깨를 붙잡은 채로 소파에 늘어졌다. 묵직한 무게감이 리체를 내리눌렀다.
후우우, 길게 숨을 쉰 리체가 맑은 바닷물처럼 투명한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퀘스트 완료.
레이몬드 스트리고와의 섹스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을 받으십시오.]
리체는 코를 킁킁거렸다. 바닷가의 비릿하고 기분 좋은 진흙 냄새.
열기로 촉촉해진 얼굴에 배부른 미소가 걸렸다.
1층으로 내려오자 엘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리체!”
과하게 반가워하는 얼굴에 떨떠름히 엘자를 보는데, 그녀는 리체를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리체는 손등을 뺨에 댔다. 열기로 후끈거렸다. 섹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일 것이다.
엘자가 오메가 중에서는 이성적이라고 하나, 그녀 역시 섹스를 재미있는 놀이 정도로 생각하는 건 다른 오메가와 다를 바 없다.
섹스에 익숙하니 리체의 빨간 얼굴이 아파서 그런 건지, 흥분해서 그런 건지 정도는 능히 구분할 수 있을 터.
아니나 다를까. 금세 의심스럽게 변하는 시선에 리체는 눈을 깜박였다.
“몸이 안 좋나 봐.”
거짓말이 능청스럽게 흘러나왔다.
갓 대학을 졸업했을 때의 그녀는 퍽 순진한 젊은 여자였지만 각종 원주민들을 접하다 보니 어느 순간 거짓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일삼는 원주민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시기에 연구를 제대로 끝마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잘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엘자는 납득했는지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그래? 하긴 오늘 수고했어. 이델리 그레이스가 베타는 사람 취급 안 하니까, 뻔하지 뭐.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거야. 사장님이 너 나오면 바로 들어가서 쉬어도 된대.”
“고마워. 그렇게 해야겠네.”
“근데 미하일 못 봤어?”
“미하일은 왜?”
“얘가 없어졌어. 사장님이 너한테도 물어보라 했거든.”
리체는 그게 무슨 큰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멋대로 사는 미하일이 근무 중 이탈한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게다가 오늘은 손님도 없는데.
그녀의 평온한 반응에 엘자는 그게 아니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미하일이 사고를 칠까 봐 그래. 아까부터 기색이 심상치 않았단 말이야. 이델리 그레이스의 남자들 중에 노멀드 경이 있다는 걸 알았지 뭐야.”
“노멀드 경?”
“갈색 머리에 조금 험상궂게 생긴 남자 못 봤어?”
본 것 같기도. 리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자는 끔찍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멀드 경은 보르신 가문의 가신이야! 제니스 보르신 공작 각하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이델리 그레이스를 수캐처럼 쫓아다니다니. 미하일이 알고 눈이 뒤집혔어. 진짜 무슨 짓 벌이는 거 아냐, 이거?”
엘자는 리체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 잠시 말을 멈췄지만 하품하는 소처럼 눈을 끔벅이는 리체를 보고 포기했다.
“하여간 넌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이런 걸 하나도 모르는 거니. 이델리 그레이스는 제 손에 들어온 건 한낱 별 볼일 없는 돌멩이도 내놓지 않는 굉장한 욕심쟁이라고. 그런 사람이 노멀드 경이 계속해서 보르신 가문에 충성하게 가만 두겠어? 옆에서 충동질을 하겠지.”
“그래서 미하일이 화가 났다?”
“그래. 아까부터 그렇게 사납게 이델리 그레이스 욕을 하고는 휙 사라졌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지. 이델리 그레이스에게 주제넘게 깽판을 놓으러 간 거면 어떡하니. 사장님도 걱정이 태산이야.”
말을 마친 엘자가 리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넌 어때, 리체?”
“뭐가 어때?”
“오늘은 마음에 드는 손님 없었어?”
클럽 퀸은 그 특성상 정재계에서 내로라하는 사회 유명 인사들을 친밀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애인이나 정부가 되기를 원하는 종업원들이 많은 편이다.
그런 면에서 엘자는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모험과 도전보다 안정을 꾀하는 전형적인 소시민 타입이라 위험한 행동은 시도하지 않았다.
문득 카이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없어.”
“요즘 명망 있는 귀족 나리들과 많이 만났잖아. 그래도?”
“황금 동아줄을 말하는 거라면, 베타가 잡기는 힘들지. 분수에 맞지 않는 걸 욕심내느라 가랑이가 찢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
“진짜야?”
엘자가 재차 묻자 평소와 다르게 집요하게 느껴진 리체는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자는 지체 않고 입을 열었다.
“너 오메가잖아.”
“…….”
“역시 비밀로 하고 있는 거였구나? 바보. 그럴 거면 이 알파 페로몬이라도 숨겼어야지.”
코를 움켜쥔 엘자가 ‘으으’ 하고 신음을 흘렸다.
“도대체 누구랑 뒹굴다 온 거야. 페로몬 샤워라도 했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게 눈치챘으면서 모른 척하긴. 당황스러워진 리체가 비딱하게 엘자를 바라보자 엘자는 품에서 스프레이를 꺼내 그녀에게 퍼붓듯 분사하고는 남은 스프레이를 손에 쥐어 주었다.
“페로몬 탈취제는 필수야.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반응 보니까 맞나 보네. 그동안 어떻게 베타 행세를 했던 거야?”
“…….”
“이델리가 난리치지 않은 걸 보면 완전 감쪽같았네. 그렇게 놀라지 마. 어디에도 얘기 안 할 거니까. 대신.”
스프레이를 품에 집어넣으며 리체는 말해 보라는 듯 엘자에게 눈짓했다.
“나 사실 지금 미하일 때문에 진짜 걱정되거든. 사장님도 계속 신경 쓰시고. 어디 갔는지를 모르겠으니까. 천지 분간 못 하는 망아지처럼 날뛰다가 허튼 짓이라도 하면…….”
엘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리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이곳이 아무리 유명한 곳이라고 해도 황실에 줄 닿아 있는 이델리의 입김 한 번이면 문을 닫아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최상층에 올라갈 마음은 없을 터.
이델리 그레이스의 눈에 띈다면 클럽 퀸이 문 닫기 전에 본인의 인생부터 막을 내려야 할 테니까. 리체가 보기에 엘자는 조금 얄밉긴 해도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법을 알고 있었다.
문득 리체는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반성했다. 돌아갈 길이 막막하다고 너무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듯해서였다. 원래 차원에서라면 절대 이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방탕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형제 덮밥이라니! 이미 저질러 버린 일에 새삼스럽게 죄책감이 느껴진 리체는 기분이 저조해졌다.
“리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내 말 들었어?”
얄밉긴 하지만 그녀의 태도에 깨달은 게 많아서 리체는 너그럽게 마음을 풀었다.
“알았어. 내가 찾으러 가 볼게.”
“그래 주면 고맙지!”
엘자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를 뒤로한 리체는 다시 클럽의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계단과 맞닿아 있는 직원 휴게실 쪽엔 시선도 두지 않았다.
‘레이몬드 스트리고가 깨어나면 곤란하니 얼른 미하일만 찾아보고 나와야겠어.’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리체는 다이아몬드 룸의 문에 귀를 댔다. 방음이 좋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자랑 사장님도 참, 걱정이 과해. 아무리 미하일이더라도 머리가 있는데 여기까지 쳐들어갔을까?’
정확히 확인하려면 문을 열어 보면 될 테지만.
리체는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불확실한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어 위험을 초래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확인은 했으니까.’
미련 없이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아윽! 흑!”
멈칫.
희미하게 울리는 교성에 목덜미의 털이 곤두섰다. 잠시 망설이던 걸음의 방향이 바뀌었다. 리체는 그렇게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리의 진원지는 다이아몬드 룸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손님용 방이었다. 문틈을 통해 안을 훔쳐보았지만 각도가 맞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다. 아쉽게 혀를 차고 눈을 떼려는데 귀에 익은 교성이 들려왔다. 리체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흐읏!”
다름 아닌 클럽 사람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미하일의 목소리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설마 이델리의 남자들과?’
까다로운 이델리. 그녀의 남자들은 모두 알파다.
사실 알파오메가라고 할지라도 눈만 마주치면 섹스 모드에 돌입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알파오메가 사회는 엉망이 되어 버릴 것이다.
대체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알파오메가는 평소에는 베타처럼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일상을 보낸다. 섹스가 길고 잦기는 해도 베타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발정기가 되면 완전히 달라졌다. 이때에는 페로몬을 조절할 수가 없고 짧으면 하루, 길면 일주일을 방에 틀어박혀 발정기가 지나갈 때까지 섹스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미하일이 갑자기 발정기가 온 것이 아니라면 이델리의 남자들과 섹스를 하는 상황은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미하일은 성욕이 왕성하고 충동적인 편이지.’
미하일을 동경하면서도 질투하는 엘자는 그의 남다른 충성심과 그럴싸한 몸이 아니라면 제니스 보르신이 그를 애인으로 삼지 않았을 거라고 흉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곧잘 하곤 했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리체는 잠깐 고민했다. 미하일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게 됐다. 다들 걱정하는 것처럼 깽판을 치고 있는 건 아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서 사장과 엘자를 안심시켜야지.
하지만 차원 원주민 연구자로서의 호기심이 그녀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그럼 지금 남자끼리 섹스를 하고 있다는 건가?’
원래 있던 차원과 달리 이곳은 동성애가 드물지 않은 편이었다.
알파오메가 형질은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서 동성애가 만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소 미하일은 여성과의 섹스를 고집해 왔기 때문에, 바로 그 점이 리체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개인적인 신념은 역시 알파오메가의 본능을 이길 수 없는 건가.’
사실 통계에 따르면,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도 그 삶을 들여다보면 이성보다 본능의 목소리를 따르는 경우가 50퍼센트를 넘겼다.
평범한 사람들은 10번 중 8번을 본능에 따를 것이다. 식욕의 욕구, 수면의 욕구, 성욕의 욕구. 밤에 먹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음에도 먹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미하일은 본능이 이성을 앞서는 전형적인 타입이었다. 리체는 순순히 인정했다. 남성 오메가와 남성 알파의 성관계는 아직 한 번도 수집하지 않은 데이터다.
‘보고 싶어.’
희귀한 데이터를 향한 욕망에 리체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이내 문고리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몹시 아쉽지만.
‘이게 아니더라도 또 다른 기회가 오겠지.’
무엇보다 미하일의 섹스 장면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
미련을 버리고 몸을 돌리는 그때였다.
“하앗, 너무, 너무 좋아요, 이델리!”
“하아!”
뭐?
홱, 언제 몸을 돌렸냐 싶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리체가 문에 달라붙었다.
문을 살짝 밀어내자 넓혀진 틈 안으로 침대에서 정사를 벌이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한쪽 눈을 틈에 갖다 대고 안을 들여다보던 리체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예산대로 미하일은 거기에 있었다. 내심 상상했던 것처럼 아래에 깔린 것도 맞았다. 그러나 그의 위를 올라탄 사람은 건장한 몸을 가진 알파가 아니었다.
둥근 어깨에 낭창한 허리, 엉덩이 부근에서 긴 금발이 흔들리는 모습은 여성성을 물씬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섹시하게.
리체는 입을 벌렸다. 가녀린 몸이 두툼한 미하일의 몸 위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감각적으로 뒤틀리는 허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하아아.”
귓가를 오싹하게 하는 긴 한숨 소리.
‘정말 이델리 그레이스잖아?’
미하일이 버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의 낯빛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정하려는 듯 콧김을 훅훅 뿜는다. 그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려 하자 이델리가 그의 손등을 찰싹 쳐 냈다. 쌀쌀맞은 행동과 달리 목소리는 달콤했다.
“어딜.”
“……흣!”
“싸고 싶니, 퉁퉁아?”
‘퉁퉁이?’
미하일의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과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호칭에 리체는 눈을 끔벅거렸다.
“제니스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며? 건방진 말을 하더니, 네 좆은 싸고 싶어서 안달을 내고 있네. 흐으응.”
한 번 쿡, 하고 허리를 돌린 이델리 그레이스가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아래 깔린 미하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마에 바싹 선 푸른 핏대가 바르르 떨렸다. 잠시 멍해졌던 리체는 정신을 차렸다.
‘이델리를 싫어하는 미하일이 왜 그녀와 섹스를 하고 있을까?’
흥미로운 호기심이 부풀어 올랐다.
‘그나저나 오메가끼리 섹스하기도 하는군.’
새로운 연구 데이터를 얻어 만족스러워진 그녀의 입가가 진한 호선을 그렸다.
알파오메가는 아무래도 알파와 오메가끼리 관계하는 게 일반적인만큼 같은 형질을 가진 이들과의 결합은 드문 일이었다. 아직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아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반응을 보면 본 차원에서의 동성애 비율 정도 될 듯했다.
특히 알파는 지배하고 리드하는 성질이 강해, 알파끼리의 성관계는 더더욱 드물었다. 오메가는 그 정도로 드물진 않지만, 역시 흔한 편은 아니다.
‘이런 경우엔 베타끼리의 성관계와 다른 게 없는 걸까?’
오메가끼리의 결합에서 자손은 어떻게 잉태되는지, 오메가끼리의 페로몬은 섹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한 게 무궁무진했다.
리체가 새로운 문제에 골몰할 때에도 안쪽의 사정은 점점 더 짙은 열기를 띠고 있었다.
“하으!”
울림이 풍부한 신음 소리가 등골을 간질였다. 이델리가 낭창한 허리를 돌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허리가 움직이는 리듬에 맞추어 흔들리는 모습이 아주 색정적이었다.
리체는 그 기술적인 허리 돌림과 관능적인 분위기, 그리고 신음 소리에 빨려 들어갔다.
“헉, 흐윽!”
미하일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을 흘렸다.
리체는 오메가끼리의 섹스라는 것을 깨달은 때와는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섹스와는 어딘지 달라 보였다. 공기의 밀도가 높았고, 절로 숨죽이게 되었다. 괜히 손까지 저렸다. 그 중심에는 이델리 그레이스가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래에 깔린 미하일의 토실토실한 가슴을 꽉 쥐고 허리를 상하로 팡팡 찧었다. 얄팍한 손가락이 작디작은 미하일의 젖꼭지를 팍 튕겼다.
“네 몸, 마음에 들어. 귀엽고, 감도가 좋잖아.”
열기가 스민 나른한 목소리는 독을 품은 장미처럼 매혹적이었다. 미하일의 눈빛이 풍랑을 맞은 배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제니스 보르신이 널 애인으로 삼은 이유를 알겠어. 어머, 눈빛 봐. 아직도 건방지네?”
이델리가 낄낄 미하일을 비웃었다. ‘내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으면서?’ 하는 뉘앙스가 읽히는 말투였다.
얼굴을 붉힌 미하일이 버럭 소리쳤다.
“저, 저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압니까?”
기세와 다르게 목소리는 불쌍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흥분으로 곤두선 목의 핏줄이 꼴불견이었다.
이델리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네가 제니스의 오메가라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 내 유혹을 거절한 그녀가 선택한 게 이런 거라니 실망인걸.”
“그분은 당신처럼 연약한 몸뚱이는 좋아하지 않거든요.”
미하일이 선택받은 게 자랑스러운 듯 뻐기며 말했다.
리체가 보기에는 매우 모순적인 모습이었다. 입은 연인에 대한 사랑을 속삭이지만 그의 성기가 박혀 들어간 곳은 그가 평소 천박하다고 싫어했던 여자의 음부였다.
‘성격은 괴팍해도 충성심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랫도리 충성심은 해당되지 않는가 보네.’
이델리 그레이스도 리체가 인지한 그 모순을 조롱했다.
“그렇게 제니스를 사랑해? 하긴 감히 내 앞에서 제니스를 욕보이지 말라 지껄여 대기까지 했으니, 건방진 놈. 하지만 노멀드가 누굴 주인으로 선택하는지는 온전히 그의 의지야. 내가 뭐라고 속삭이든지 간에.”
“당신이 노멀드 경과 제니스 각하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던 걸 다 보았습니다! 당신의 심성이 사악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흐읏!”
이델리가 뭘 한 건지 미하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발끝이 파르르 경련했다.
“어머, 그렇게 제니스를 사랑하면서 내 허리는 왜 잡고 난리람?”
퍼뜩 놀란 미하일이 제 손을 응시했다. 가녀린 이델리의 허리를 부러뜨릴 듯이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푸드덕 놀라 손을 떼는 미하일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이델리가 크게 웃었다. 깔깔 웃는 음성은 몹시 색스러웠다.
자신을 조롱하지 말라고 미하일이 외쳤지만, 이델리가 허리를 놀리기 시작하자 다시 신음을 흘렸다.
탁.
리체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표정이 묘했다. 본능이 이성을 이기다 못해 짓누르는 장면을 본 것 같았다.
미하일은 그의 연인이자 영혼을 사로잡은 주인인 제니스 보르신을 진실로 사랑했다. 매일같이 절절한 사랑의 언어가 줄줄이 이어지는 연서를 쓰는 미하일을 모르는 종업원은 없었다.
충동적인 그가 그때만큼은 어찌나 신중한지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데도 적잖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았던가.
그때의 진지한 모습과 달리 방금의 미하일은 그야말로.
‘짐승에 가깝네.’
그런 미하일을, 심지어 오메가인데도 유혹한 이델리 그레이스의 마력은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문득 저런 여자를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는 황태자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을걸. 이델리 그레이스가 찍어서 침대로 넘어뜨리지 못한 남자는 이제까지 없었거든. 황태자 전하 또한 곧 이델리의 침대로 걸어 들어가시겠지.’
엘자의 말이 과장이라 생각했지만 오늘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조용한 복도를 걸어 나오는 리체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성의 세계에 눈을 유혹하는 붉은 등이 켜졌고, 그 안에는 관능적으로 허리를 돌리는 이델리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자 엘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하일은 위층에도 없었어. 어디 놀러간 게 아닐까?”
리체는 자신이 본 것을 어둠 속에 묻기로 했다.
* * *
도블락 제국은 옆 나라 이블린과 달리 검은 머리칼이 흔하지 않았다.
이 차원에 떨어진 초기, 리체가 거지꼴과 다름없는 몰골로 거리를 헤맬 때 퀸의 사장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 이블린인이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런 머리색도 알파오메가가 득시글한 퀸에서는 눈에 띄지 않아 지금까지는 크게 상관없었지만, 벌써 이곳에서 두 사람과 떡치고 나니 신상을 특정 지을 수 있는 머리색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염색해야겠군.’
결심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리체는 퇴근 후 잡화점으로 달려갔다.
“세상에! 머리 어떻게 된 거야?”
염색한 다음날 평소보다 늦게 출근했더니, 바닥을 쓸고 있던 엘자는 금발이 된 그녀의 생머리를 가리키며 입을 떡 벌렸다.
“검은색이 특이하고 잘 어울렸는데! 물론 금발이 안 어울린다는 건 아니야. 예쁜 애들이 안 어울리는 게 뭐가 있겠어. 하지만 그래도!”
호들갑을 떠는 엘자가 염색한 이유를 궁금해하자 리체는 대충 ‘이 머리가 더 보기 좋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성이 안 풀렸는지 더 캐물으려던 엘자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뒤를 돌아보자 미하일이 걸어오고 있었다. 방향을 보니 사장실에서 나온 듯한데,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엘자와 리체를 흘끗 보았다. 리체는 어젯밤 이델리 그레이스 아래에 깔려 쾌락에 몸부림치던 그가 떠올랐지만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뭐가 좋다고 낄낄대고 있냐?”
퉁명스럽게 뱉은 미하일이 홱 지나가자 엘자가 입을 비죽거렸다.
“왜 나한테 지랄이야, 지랄은.”
“미하일에게 무슨 문제 있어?”
“오늘 쉰대. 몸 안 좋다고.”
“……몸이?”
리체에게 더욱 몸을 붙인 엘자가 속닥거렸다.
“아까부터 상태가 이상했거든. 몸이 안 좋다기엔 얼굴이 너무 우울해 보이잖아? 무슨 일이 있기는 있어. 공작 각하에게 이별 통보라도 받았을까? 어젯밤 어디 갔었는지 물으니까 아무 말도 못 하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더라고!”
미하일이 수상하다고 열댓 번을 외치는 엘자에게 리체는 모른 척 시미치를 뚝 뗐다.
리체는 어제 퇴근한 뒤 연구 일지를 꺼내 하루 동안 수집한 데이터를 기록해 두었다. 가장 마지막 데이터는 역시 미하일과 이델리 그레이스의 정사 신이다.
[알파오메가는 짐승에 가깝다.]
어제의 결론이었다. 간단명료하지만 핵심을 꿰뚫고 있지. 머릿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주변이 웅성거렸다.
“뭐지?”
“우리도 가 보자!”
종업원들과 주방 직원들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매니저가 화이트보드에 스케줄을 적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방금 지명이 들어왔어.”
매니저의 애매모호한 얼굴에 엘자는 의아해했다.
“지명이야 흔한 일이잖아요.”
클럽 퀸은 도블락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클럽이다. 환락가의 싸구려 가게들처럼 직원들이 몸을 파는 일은 없지만 최고급 음식과 안주, 그리고 숙련된 직원들의 서비스는 비싼 값에 팔았다.
퀸이 자랑하는 시스템 중에는 마음에 드는 세련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업원 지명제도 있었다.
물론 이는 얄팍한 수였다. 이를 통해 친밀해진 손님과 종업원이 애인 관계를 맺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그런 손님들은 퀸의 단골이자 후원자가 된다. 그걸 노린 술책이었다.
미하일이 제니스 보르신의 눈에 띈 계기도 이 지명제였다. 유명 인사를 가까이서 모시고 그들의 눈에 들 수도 있는 일. 그래서 직원들은 누가 누구에게 지명되는지에 관심이 지대했지만 지명이란 게 이렇게 웅성거릴 만큼 드문 것도 아니었다.
“그게…….”
매니저는 본인도 모르겠다는 듯 관자놀이를 긁적이더니 엘자의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리체를 흘낏했다.
“리체를 지명해서 말이지.”
“네? 리체를요?”
엘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체는 베타잖아요. 누가 리체를 지명해요? 근래에 방문한 손님 중 베타가 있었나? 로드스 자작이에요, 혹시? 베타를 좋아하는 특이 취향이잖아요.”
클럽 퀸은 주로 알파오메가를 타깃으로 한다. 이곳을 찾는 손님은 손님으로 온 다른 알파오메가를 헌팅하거나, 말솜씨가 좋은 직원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물론 직원들도 대부분 알파오메가다.
그들이 베타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베타를 선호하지 않은 건 단순했다. 다름아닌 페로몬의 유무. 항시 페로몬을 은은한 향수처럼 느끼는 그들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베타를 찾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매니저가 엘자의 의문에 답했다.
“지명한 사람이 레이몬드 스트리고 경이야.”
“네?”
“좀 그렇지? 그 사람이 서빙만 시키려고 지명을 할 사람은 아니잖아? 들리는 소리만 해도…….”
의미심장한 말에 직원들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수 초 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시선이 리체에게로 쏠렸다. 레이몬드 스트리고의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뜨끔한 리체는 눈을 깜박거렸다. ‘아무것도 몰라요.’를 시전하는 무구한 눈빛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내는 목소리도 천진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옥의 티였다.
“왜?”
엘자가 비명을 질렀다.
“왜라니. 레이몬드 스트리고가 널 찾는다잖아! 그는 알파오메가고 베타고 가리지 않는 호색한이라고!”
매니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문제야. 뭔가 물어볼 게 있는 눈치긴 했는데.”
“아, 그래요? 리체에게 물어볼 일이 뭐가 있지?”
“스트리고 경이 어제 이델리 그레이스와 함께 온 거 잊었어?”
핀잔을 주자 입을 다무는 엘자를 내버려 두고 매니저가 리체에게 손짓했다.
“아마 어제 있었던 일을 물어보려는 거겠지. 어떻게 된 일인지, 그분이 늦은 밤에 직원 휴게실에서 깨어났거든.”
“도대체 거길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어”, 하고 중얼거리는 매니저의 말에 리체는 가슴이 또 한 번 뜨끔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가 볼게요.”
대답은 퍽 얌전했다.
* * *
문을 닫고 들어가자 방향제처럼 은은히 깔린 레이몬드의 페로몬이 맡아졌다. 리체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그 페로몬을 음미했다.
몇 개의 연구 데이터가 쌓인 지금은 이 원주민들에게 꽤 익숙해져서, 이전에는 못 했던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바로 페로몬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눈치챌 수 있게 된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대강.’
기분이 나쁘면 페로몬은 독한 향수처럼 피부를 콕콕 찌르고, 기분이 좋으면 페르몬도 두 팔 벌려 피부를 감싸 안는다.
‘설명하면, 이 정도 차이일까.’
머릿속으로 새로운 지식을 정리하는 순간이었다.
[스킬-‘페로몬 탐지 초급’을 익히셨습니다.]
시스템의 메시지가 나타나면서, 페로몬이 이전보다 잘 느껴졌다. 좋다 나쁘다 정도로만 판단할 수 있었던 기분을 좀 더 세밀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해야 할까.
콧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페로몬을 차분하게 느꼈다.
이건…….
‘불안?’
리체는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에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다 생각에 너무 오래 골몰했다는 것을 깨닫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빨간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속마음을 드러낼 뻔했으나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하고, 차분한 걸음걸이로 그의 앞까지 다가갔다. 페로몬 억제 스킬을 쓸 수 있는 만큼 강하게 발휘하는 중이었다.
이 남자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뻔하다. 그날 일의 진상을 묻고자 하는 거다.
‘나랑 한 게 꽤 좋았나 보지?’
가게 문이 열리자마자 찾아온 걸 보면.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를 흘끗하고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만 침착하게 먹으면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부르셨어요?”
공손히 말하자 레이몬드는 자못 건방진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보다는 못하지만, 개국 공신 가문의 일원으로서 귀하게 자라온 건 레이몬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분제 없는 세상에서 살아온 리체가 보기에는 여지없이 거만한 투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날 다이아몬드 룸의 서빙을 봤다고?”
“예, 그렇습니다.”
리체는 일개 종업원이 할 수 있는 정도의 필요한 말만 골랐다.
특이하다는 인상을 주는 건 금물.
연구 대상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연구원들이 지켜야 하는 단 하나의 금기 사항이 있다면 그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제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야지 보다 원활한 관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자와 섹스하기를 요구하는 시스템이 없었다면, 연구 체제가 제대로 갖춰진 정상적인 상황이었더라면, 원주민들과 직접 배를 맞춰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역시 욕심을 부리면 이런 곤란한 일이 생긴다니까.’
내심 혀를 찰 때, 레이몬드가 가까이로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잠깐 움찔한 리체는 천천히 그에게 걸음을 옮겼다. 각진 테이블을 돌아 근처까지 가자, 레이몬드가 관자놀이를 괴고는 비스듬한 시선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는 부드러우면서도 정열적인 인상을 가진 남자다. 그의 쨍한 빨간 머리는 카이로의 잿빛이 섞인 붉은 머리보다 강렬했지만 구불구불한 곱슬머리는 약간 귀여운 데가 있었다. 빨간 눈동자는 피를 머금은 것처럼 섬뜩했으나, 탐색하는 눈빛엔 소년 같은 치기가 어려 있었다.
리체는 그간의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레이몬드 스트리고라는 남자를 머릿속으로 조각조각 잘라 분석했다. 분석은 그녀의 특기였다.
‘겉모습은 형과 비슷하지만 그 외의 모든 점에서 차이가 있군.’
그녀는 레이몬드가 제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그 과정까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심스럽게 훑어 올리던 시선은 마침내 그녀의 밝은 금발에 멈추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머리카락 근처에서 엉성하게 배회했다. 헷갈린다는 듯 살짝 찌푸린 미간에 주름이 갔다.
“원래 그 머리였나? 좀 더…… 어두운 색이었던 것 같은데.”
리체는 머리를 굴렸다. 어제 다이아몬드 룸에서 레이몬드는 자신에게 거의 시선을 주지 않았다.
모든 신경을 이델리 그레이스에게 쏟고 있었으니 다른 건 관심 밖이었을 터. 긴가민가한 목소리가 확신을 더했다.
‘술 마시기 전에 봤던 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예? 아, 머리카락 말씀이세요?”
“이 얼굴로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하고 생각할 만한 믿음직하고 순진한 낯으로 리체는 고개를 숙였다.
“딱히 머리에 변화를 준 건 없습니다만…….”
안 그래도 흐릿한 기억에 자신이 없던 레이몬드는 그녀의 단호한 음성에 ‘그런가 보다’ 하는 얼굴이 되었다. 기실 그의 머릿속엔 이런 연약한 여자 따위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 어제는 누구였지? 분명 검은 머리라고 생각했는데…….”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을 흘끔거리며 리체는 머리를 굴렸다.
‘잘 속여 넘겼어.’
그래도 문제는 있었다. 레이몬드가 퀸의 다른 직원들에게 어제 일을 캐묻는다면. 그게 제일 위험하다. 그들의 증언이 가리키는 건 자신이 될 테니까.
“찾으시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리체는 시종 조심스럽고 공손하게 굴었다. 일개 종업원이 스트리고의 혈족을 대하기로는 하등 이상하지 않은 자세였으므로 레이몬드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순순히 대꾸했다.
“어제 내가 여기서 어떤 여자랑 섹스를 했거든. 근데…… 아, 너, 이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야 할 거야.”
어라?
잽싸게 대꾸했다.
“네. 어느 안전이라고요.”
리체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무슨 연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몬드는 어제 일을 비밀에 부치길 원한다.
불감청 고소원이라고, 그건 이쪽이야말로 바라는 바였다. 종업원들을 모조리 불러 그날의 진상을 캐는 일에 대한 걱정은 덜어도 좋을 듯하다.
레이몬드가 왼손으로 왼쪽 얼굴을 덮었다.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어. 머리카락이 길었고…….”
문득 레이몬드의 시선이 리체의 긴 머리카락에 닿았다.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이 허리 부근에서 찰랑였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꽤 길군.”
“붙임머리가 요즘 유행이라서요.”
레이몬드는 알만 하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아, 너도냐. 이델리를 따라 유행했다는 그거. 짧은 머리가 싫증 난다면서.”
흥미가 가신 투로 중얼거리던 레이몬드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리체는 살짝 고개를 들어 제게 닿아 있지만 미묘하게 비껴 나간 그의 시선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는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얼굴이 까칠했다.
“……어쨌든.”
레이몬드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리가 긴 여자였고, 가면을 써서 이목구비는 모르겠지만 예뻤던 것 같아.”
리체는 은근슬쩍 고개를 푹 숙였다.
어젯밤 염색을 해서 다행이었다. 지난번 직원 휴게실은 등 하나만 켜 놓아 어둑한 상태였다. 게다가 머리색이 바뀌면 인상도 바뀌기 마련.
얌전하고 공손한 지금의 자신을 어제의 여자와 비교하는 건 꽤 힘들 것이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레이몬드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리고 무엇보다 페로몬이 이상했어. 그건…….”
묘한 얼굴을 하는 그를 응시하며 리체는 심사숙고했다는 기색을 만면 가득 드러냈다.
“저는 베타라 잘 모르겠지만.”
먼저 자신은 그 오메가가 아니란 걸 은근히 피력했다.
“저희 가게에서 일하는 오메가 중에서는 손님께서 말씀하신 분과 일치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여성과 착각하신 건 아닐까요?”
미리 약속을 잡아 놨던 다른 여자인 게 아니냐는 말뜻에 레이몬드는 긴가민가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이델리가 난리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딱히 불러냈던 사람은 없어. 없었을 거야. 가만, 예전에 만나던 여자 중에 얼추 비슷한 사람이 있었지. 그녀가 근처에 살던가?”
생각에 잠긴 레이몬드를 보고 리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이었다. 레이몬드의 눈이 어둡게 반짝이며, 단단한 팔뚝이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순식간에 레이몬드의 품에 안긴 리체는 코끝으로 훅 닥쳐오는 짙은 알파 페로몬에 몸을 경직시켰다.
페로몬 억제 스킬은 부동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 안의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덜렁거렸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평정을 찾자 불안하게 출렁거리던 페로몬도 잔잔해졌다.
리체는 미약한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래?
불퉁하게 생각하던 그녀는 뒤늦게 평범한 종업원이 보여야 할 태도에 생각이 미쳐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소, 손님?”
두려운 듯이 목소리를 떨자 레이몬드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뾰족한 코가 흰 목덜미에 파묻혔다. 그가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페로몬 섞인 숨결이 살결을 간질이자 그 부분의 살갗이 간지럽고 갈비뼈가 조여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내 페로몬을 느끼려는 거야.’
페로몬 억제 기능은 잘 작동하고 있으나 그녀의 몸은 이 차원에 얽매어 있으므로 시스템이 놓치는 부분이 생길지도 몰랐다.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자, 레이몬드가 그녀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아닌가, 역시.”
페로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레이몬드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봐도 베타는 아닌데.”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그의 반응을 살핀 리체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안도감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로써 의심은 종결되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은 의외였지만 그래도 마지막 남은 의심을 지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저, 손님? 그만 놔주셨으면, 하는데요…….”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리자 레이몬드는 퍼뜩 놀라서 손을 뗐다.
그는 스스로의 손을 노려보더니 언짢은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휙 몸을 돌린다.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그를 보며 리체는 남몰래 가슴에 손을 올리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퀸을 떠나기 전, 레이몬드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뜩잖은 심정으로 뒤를 따르고 있던 리체는 그 시선에 바짝 긴장했다. 막 마음을 놓으려던 참이라 힘 빠졌던 어깨가 미묘하게 치솟았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레이몬드가 사장을 보며 리체를 턱짓했다. 끈적한 설탕물이 떨어져 굳은 것처럼 묘한 공기에 이질감을 느끼고 있던 사장이 허리를 꼿꼿이 하고 몸을 바로 했다. 그의 반응일랑 상관없이 레이몬드는 의심이 한가득 묻어난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 녀석, 정말 베타야?”
“예?”
휙 노려보는 시선에 히끅, 숨을 급히 들이마신 사장은 레이몬드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얽힌 일화를 떠올리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망나니의 지랄인가 투덜거리면서.
“예? 예, 베타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레이몬드는 얼굴을 구기고는 가타부타 말없이 떠났다. 짜증을 내듯 휘날리는 망토 자락에서 까칠한 기색이 흩어졌다.
‘대체 베타인 너를 왜 지명한 거냐’ 궁금해하는 직원들의 시선이 리체에게 향했다. 그녀는 태연히 대꾸했다.
“사람을 착각하셨나 봐.”
그러자 눈을 번들거리던 몇몇 직원들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렇지. 스트리고 경이 별 볼일 없는 베타를 왜 불렀겠어?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
“그러네. 별거 아니었잖아, 뭐야.”
그렇게 그날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는가 했다.
하지만 새벽이 되어 떠들썩한 퀸이 마감할 시각. 예상치 못한 마지막 손님이 찾아왔다.
* * *
“사장님, 마차가 들어오는데요?”
바닥을 쓸던 매니저가 창문 밖을 확인하고는 눈을 끔벅였다.
“이 시간에 누가 또.”
진상임을 직감한 사장은 이마를 짚고 피곤한 얼굴을 휙휙 내저었다.
“마감 시간이라는 거 정중히 안내하고 돌려보내.”
“예에.”
매니저가 나가려는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밖을 내다보던 다른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뭐? 왜?”
“그레이스 공작 가문의 문양 아닌가요, 저 마차.”
그 말에 1층에서 마감 정리를 하던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델리 그레이스?”
어디선가 페로몬이 새어 나왔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페로몬을 느낀 리체가 뒤를 돌아보았다.
미하일이 사복을 갖춰 입은 채 서 있었다. 퇴근하려는 듯했으나 이델리의 이름을 듣고 멍해져 있었다.
이윽고 복잡했던 얼굴에 한 줄기 기쁨이 스쳤다.
사장은 직접 이델리를 마중 나갔다. 마차 앞에까지 가 집사처럼 그녀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하는 사장은 꽤 신사 같았다. 이미 굳어 버린 다른 직원들에 비해서는 표정이 여유로웠는데, 그런 그도 이델리의 요구를 듣고는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이미 주방도 닫아 만족스러운 대접을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오래 있지 않을 테니까.”
이델리 그레이스는 오늘도 아름다웠다.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어제와 달리 오늘의 그녀는 밤하늘에 녹아들듯 어두운 검은 드레스였다. 검은색으로 만든 드레스가 저렇게 화려할 수 있다니. 검은 드레스의 역사를 새로 써도 될 만큼 섹시한 옷이다. 이델리는 입술도 붉었다.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그녀에게서 차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단 한 명, 리체를 제외하고.
그녀는 진즉 한 걸음 물러나 미하일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페로몬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진동이 퍼져 나가는 물결처럼.
이델리 그레이스는 미하일을 만나러 온 것일까?
잠깐 접한 그녀는 남의 눈치를 살피는 위인이 아니었는데. 미하일이 제니스 보르신의 오메가라고 할지라도 아랑곳하지 않을 사람이다.
‘오히려 더 재미있어 하지 않을까?’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앞에 둔 듯 리체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텔레비전 속 막장 드라마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원주민들이 찍는 막장 드라마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또각.
또각.
이델리는 사장의 손을 잡고 가게로 걸어왔다. 클로징 시간에 가게를 찾은 비매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인공인 양 당당했다. 높은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을 치는 소리가 그녀의 등장을 알리는 배경 음악 같았다.
또각.
리체는 제 눈앞에 멈춰선 뾰족한 구두를 보고 눈을 끔벅였다.
‘응?’
손에 필기도구가 있으면 이 모든 상황을 기록할 기세였던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슬쩍 위를 올려다보자 오메가의 정점에 있는 극우성 오메가답게 아름다운 얼굴이 싱긋 웃었다.
“지명 되죠?”
리체는 저도 모르게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장은 자수성가한 서민 출신으로, 본인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이 남달라 상위 계급 알파오메가라고 무작정 몸을 엎드리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무례한 알파오메가를 예의 바르게 쳐 낼 줄 아는 능력이 있다, 라고 생각한 리체는 믿음직스러운 눈빛을 마구 쏘아 댔다.
사장은 놀랐지만 침착하게 대꾸했다.
“저희 직원이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요?”
“실수는 무슨. 그냥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어서 찾아온 거예요. 말 상대는 필요하잖아요? 적당히 달콤한 칵테일 한 잔 부탁해요.”
술이 고파 충동적으로 클럽을 찾았다라. 말은 그럴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델리의 진정한 용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델리 그레이스는 술이 고프면 추종자의 집을 찾아가면 찾아갔지, 절대 혼자서 술집을, 그것도 베타를 술 상대로 고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왜? 여전히 문제가 있나?”
이델리는 떨떠름해하는 분위기에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는 해사했지만 남들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답게 여유롭고 또 한편으로는 거만했다.
리체는 다시 사장을 바라보았다.
한 번만 더!
그러나 사장의 강단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난감한 얼굴로 한 마디 했을 따름이었다.
“예, 독하지 않은 술로 준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싱긋 웃은 이델리가 리체를 바라보았다.
“자리 안내해 줄래?”
변수. 예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이런 식의 돌발 상황은 절대로 반갑지 않은 리체는 못마땅한 심정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리체가 지나갈 때 직원들이 쑥덕거렸다.
“하루에 두 건이나 지명을…….”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직원들을 지나쳐, 리체는 미하일을 곁눈질했다. 그는 입구와 가까운 쪽에 서 있었다.
얼굴빛이 푸르죽죽하다. 이델리 그레이스는 가게에 들어오면서부터 리체와 움직이는 지금까지, 미하일에겐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의 낙심한 얼굴은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의 마음이 이델리에게 어느 정도로 기울어졌는지는, 그 반응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리체는 자신의 상황도 잊고 새삼스러운 흥미를 느꼈다.
‘본능은 알파인 제니스를 따라야 할 텐데 그토록 싫어하던 이델리 그레이스에게 육욕을 느끼다니, 아무리 봐도 특이 케이스야.’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시선을 느꼈다. 따라가자 그 시선 끝에 있는 건 미하일이었다.
그 눈빛은 그녀에게 꽤 익숙했다. 인센티브 두 배가 보상으로 걸린 차원 사이언스지에 이달의 연구원으로 뽑혔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동료들의 눈빛이었다.
* * *
정적이 감돌았다. 리체는 지금 상황이 오전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때 레이몬드 스트리고는 이델리 그레이스처럼 거만하게 앉아 있었고 자신은 자연스럽게 벌받는 아이처럼 서 있었다.
‘이 원주민들은 정말 오만하구나.’
리체는 멍하니 생각했다. 기분이 나쁘기 전에, 왠지 우스웠다. 레이몬드의 페로몬에서는 불안함을 느꼈다면 이델리의 페로몬은 뭐랄까, 후추처럼 싸했다.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뭐랄까. 황당함? 약간의 불쾌함?
리체는 칵테일을 기울이는 그녀를 살폈다. 레이몬드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기대앉아서 이델리는 술을 홀짝였다. 적당히 마시고 가겠다는 말과 달리 그녀의 움직임은 나른한 고양이처럼 느릿느릿했다. 리체의 존재를 까먹기라도 한 것처럼.
리체는 수완 좋은 사장이 딸려 보낸 안주 그릇을 이델리 쪽으로 밀었다.
“술만 마시면 속 버리세요.”
이델리는 내밀어진 안주 그릇을 응시한 뒤 이어 리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뒤늦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맞다. 내가 술 상대 해 달라고 불렀지.”
공기가 많이 들어간 목소리는 고혹적이었지만 리체는 왠지 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페로몬이 살결을 쿡쿡 찔러 댔다.
“그날, 나 봤죠? 우리 방에 서빙 들어왔잖아요.”
“네.”
“내가 그 이후 귀걸이 한 짝이 없어졌거든.”
이델리가 제 왼쪽 귀를 툭툭 건드렸다. 아래로 꽃가루를 흩날리는 나비가 섬세하게 조각된 은빛 귀걸이였다. 한 마디로 값비싸 보였다.
“황후께서 내게 선물해 주신 소중한 건데 어딨는지 모르겠지 뭐야. 내 생각에는 여기서 잃어버린 것 같은데, 찾아 줄래요?”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걸이를 잃어버렸단 말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럴지라도 찾는 시늉이나마 해야 했다.
다이아몬드 룸 이곳저곳을 살피는 동안 뺨이라든가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여기저기 다 뒤져 봤지만 이델리의 귀걸이는 발견할 수 없었다. 이미 직원 셋이 청소하고 나간 곳이다. 찾을 수 있었다면 진즉 찾았을 것이다.
‘아, 혹시 거긴가?’
격하게 움직인 곳이라면 하나 더 있지 않은가. 미하일과 몸을 섞었던 그 방.
아무튼 여기는 없다. 소파 아래에서 고개를 들자 둥그스름한 칵테일 잔 입구에 입술을 대며 이델리가 눈을 휘었다. 휘어진 눈 사이로 보는 눈빛은 리체를 쉴 새 없이 탐색하는 듯했다. 리체는 새삼스럽게 경계심이 들었다.
“여기는 없는 것 같은데, 화장실에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그래요.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고.”
다이아몬드 룸을 나온 리체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진짜 잃어버린 건가?’
자신을 찾은 용건이 그게 다일까?
의심스러운 마음을 품고 리체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과 반대 방향으로.
어느 방 앞에 선 뒤 망설임 없이 문을 열자 환기가 되지 않아 텁텁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손을 흔들어 공기를 흐트러뜨리며 리체는 방을 샅샅이 뒤졌다. 여기까지 없으면 달리 방법이 없다. 이델리가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영 딴 데로 사라졌거나.
10분 정도 찾았을까. 리체는 소파 사이 깊숙한 곳에서 길고 뾰족한 귀걸이를 주워 들었다.
이델리의 왼쪽 귓불에 걸렸던 바로 그 나비 모양 귀걸이다. 귀걸이를 발견한 곳은 손이 닿기 어려워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귀걸이를 들고 다이아몬드 룸으로 돌아가자 이델리는 진심으로 기쁜 듯 활짝 웃었다.
“고마워라.”
“…….”
“이걸 잃어버리면 황후 폐하를 뵐 낯이 없거든요. 물론 요즘은 잘 찾아뵙지 못했지만 그래도, 친히 내려 주신 하사품을 간수하지 못하는 건 불충이라서.”
‘정말 귀걸이를 찾고 싶었구나.’
리체는 긴장했던 마음을 반쯤 내려놓았다.
이델리는 비어 있는 오른쪽 귓불에 귀걸이를 걸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는지 헛손질을 했다.
“아, 제가 해 드릴게요.”
빙그레 웃는 그녀가 귀걸이를 내밀고는 끼우기 편하도록 머리를 한데 모아 뒤로 넘겼다. 이델리에게 바투 다가간 리체는 귀걸이의 끝을 이델리의 귀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뾰족한 끝이 다른 곳을 찌르지 않도록 유의하는데, 이델리가 불시에 공격했다.
“레이몬드가 오늘 여기 왔다면서요?”
톡, 귀걸이가 구멍에 제대로 걸렸다. 달랑거리는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듯 움직이는 귀걸이에서 시선을 뗀 리체가 이델리를 응시했다.
그녀와 같은 파란 눈이 리체를 들여다보았다. 같은 파란색이나 리체의 것이 바다를 닮았다면 이델리는 투명한 유리창을 반사하는 듯했다.
이델리는 바닥까지 보일 듯 반들거리는 눈으로 말을 잃은 리체를 채근했다.
리체는 머리 굴리기를 포기했다.
“네.”
이건 레이몬드 때와 달리 적당한 거짓말로 넘어갈 수 없었다. 작정하고 찾아온 상대에게 얕은 수를 쓰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델리는 아름다운 얼굴을 갸우뚱했다.
그녀의 눈빛은 ‘예쁘장하긴 하지만, 베타일 뿐인데.’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녀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리체는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이델리 그레이스, 원주민 타입 No.7에 대한 연구 기록에 한 줄을 추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유욕이 매우 강함.’
마주한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델리 그레이스의 남자들.
이 명칭은 단지 이델리를 동경하거나 또는 조롱하는 의미만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라고 찍은 대상에 있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리체는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경계를 사 버리면 앞으로의 운신이 힘들어질 텐데.’
클럽 퀸은 흥미로운 연구 대상을 접하기 좋은 환경이지만, 트러블 메이커인 만큼 시선을 태풍처럼 몰고 다니는 이델리가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한다면 연구 진행이 여의치 않을 것이다.
되도록 이곳에서 많은 샘플 케이스를 얻을 수 있길 바랐으므로 리체는 지금의 상황이 퍽 안타까웠다.
이델리가 손을 뻗어 리체의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뾰족한 코가 살갗을 찌르자 리체는 움찔, 어깨를 좁혔다. 무슨 사람 코가 이렇게 뾰족하단 말인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문득 코를 톡 쏘는 레모네이드 냄새가 뇌리를 점령했다.
‘극우성 오메가의 페로몬.’
어쩔 수 없는 탐욕으로 사흘을 굶은 사람이 레모네이드 한 잔을 눈앞에 둔 것처럼 혀 아래 침이 고였다.
리체는 이델리를 어깨에 매단 채 눈을 반쯤 감았다. 탑에 갇힌 공주처럼 매끄럽고 부드럽게 흐르는 금색의 머리칼이 금실을 풀어놓은 실타래 같다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쳤다.
훅, 숨을 빨아들이던 코가 부족하다는 듯 옆으로 움직였다. 가느다란 목에 콧잔등이 비벼졌다. 애무 같은 움직임에 간지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무는데.
띠링!
[극우성 오메가의 위험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건 시스템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리체가 옴짝달싹도 못하고 허공을 노려보자 얼굴을 뗀 이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를 가늠하듯 가늘어지는 눈을 보며 리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냄새는 안 나는데.”
생각을 캐내기 어려운 투명한 시선이 리체의 얼굴에 닿았다. 약간 색기가 느껴지는 나른하고 우아한 눈인데, 일순 번뜩였나 싶었던 참에.
“잤어요?”
“…….”
수면 아래로 숨어드는 잔인성을 발견한 리체는 침음을 삼켰다. 이델리는 두 손에 보물을 가득 쥐고 누군가 하나라도 훔쳐갈까 봐 눈을 부라리는 미다스 왕처럼 흉포했다. 리체는 내심 땀을 흘렸다. 속내가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지나치게 평온한 목소리는 예상 밖이었다. 뒤늦게 그녀의 콧날이 쓸었던 목덜미가 찌릿했다. 틀림없이 소름이 돋아 있으리라.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쳐다보는 시선이 대답을 종용했다. 리체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는지 안 믿는지 변화를 보이지 않는 눈을 보며 레이몬드 스트리고와는 엮이지 말자고 결심했다. 아쉽게도 한발 늦은 감이 있지만.
귀한 연구 대상의 경계심을 받는 것도 안타까운데 여기서 더 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 것이다.
‘아직 늦진 않았어.’
레이몬드 스트리고는 카이로와 형제 관계이니 ‘유전이 형질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에 좋은 대상이었지만 현재로서는 극우성 오메가인 이델리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흐음.”
나직하게 목을 울린 이델리가 손을 탁 뗐다. 그녀에게서 풀려난 리체는 옷깃을 펴고 몸을 바로 했다.
이미 그녀에게서 반쯤 관심을 뗀 이델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새로운 걸 먹고 싶었나.”
내 말을 다 믿지는 않는군. 레이몬드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정도로는 생각하는 듯했다.
리체는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느끼며 다시 한번 레이몬드와 거리를 둘 것을 다짐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느꼈던 대로, 곤란한 남자였다.
“최근 레이에게 소홀하긴 했지.”
마침내 홀로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인 이델리가 윤기가 흐르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씨익 웃었다. 방금의 투명한 무표정이 간데없어, 리체는 다른 의미로도 소름이 돋았다.
미친 원주민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그가 다시 찾아오면 내게 연통을 보내.”
“…….”
“백작가의 별 볼일 없는 둘째 영식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보단 내 명을 듣는 게 네게도 더 이득일 테니. 네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레이몬드의 정부가 되는 것보다 자신의 명을 듣고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는 게 더 매력적일 거라고 말하는 거다. 콩고물 같은 건 관심 없었지만 이델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나 이델리나 그녀에게는 연구 대상에 불과하다.
그들의 총애를 바라는 마음 따위는 차원 연구자이자 인류 연구 학자, 실험실28의 수석 책임, 선임으로부터 연구원의 별에서 태어났다는 칭찬을 받았던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 역시 오늘은 술 마실 기분이 아니야.”
이델리는 반도 마시지 않은 칵테일 잔을 흔들고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별로 맛있지도 않고.”
우아하게 뻗은 몸을 소리도 없이 일으킨다. 리체는 빠릿빠릿한 종업원답게 그녀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움직여 배웅 준비를 했다.
옆으로 몸을 비키고 허리를 숙였다. 스윽, 달콤새큼한 레모네이드 향이 옆을 지나쳐 갔다. 냄새가 코끝을 쓸며 지나가고서야 리체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다리에 달라붙는 형태의 검은 드레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더욱 고혹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문을 열기 전, 고개를 살짝 뒤로 튼 이델리가 리체를 바라보았다.
“아참, 그 종업원 있지?”
“…….”
“덩치 크고 머리 단정한 놈 말이야.”
머릿속이 반짝였다.
누구를 가리키는지 바로 알아들었지만 리체는 섣불리 대꾸하지 않았다.
이델리가 예쁜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이름이, 미하일이던가?”
긴가민가하는 말투에 긴장이 풀린 리체는 웃음을 삼켰다. 이델리는 미하일의 이름을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다.
“아, 네. 미하일이요.”
이델리가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러와.”
“…….”
“건너편 대로에 마차를 세워 둘 테니. 달빛도 약해서, 구름을 타고 오기 좋은 밤이네.”
이델리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가는 걸 보며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호 같은 말은 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은어였다. 주로 들키지 말아야 할 은밀한 만남을 약속할 때 쓴다.
“혹시 누군가 만나거든.”
이델리는 적당한 핑계를 찾는 듯 미간을 좁히고 도톰한 입술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남자들이 환장할 듯한 표정에, 분위기여서 리체는 내심 감탄했다. 유혹이 몸에 밴 여자가 아닌가. 그녀는 엄두도 내지 못할 자태였다.
“종업원이 건방져서 내가 교육한다고 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미하일을 부르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섬세함도 발휘했다.
이델리가 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잊었다는 듯 리체에게 말했다.
“그날 나 본 거,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그날?’
무심코 그 말을 곱씹은 리체가 흠칫했다. 이델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야릇한 미소에 리체는 목덜미가 서늘했다. 가라앉았던 소름이 다시 촘촘히 돋아났다.
이델리가 가고 나서 리체는 즉시 미하일을 찾았다.
퇴근할 생각도 않고 1층 의자에 앉아 있던 미하일은 온갖 세상의 시름은 다 끌어안은 얼굴이었다. 날선 눈으로 노려보는 그를 보자 갑자기 이런 말까지 건네주는 자신의 처지가 조금 한심스러워졌다. 어쩔 수 없이 견뎌 내며 귀를 가까이 대라 손짓했다. 미하일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귀를 대 주었다. 소곤대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더니, 이내 괴상한 얼굴을 했다. 눈은 축 처지고 입술에 쉼 없이 침을 발라 댔다.
파들거리는 입꼬리가 곤란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리체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니폼의 옷깃을 은근 슬쩍 정리하며 미하일이 뒷문으로 빠지려는 때였다.
“쟤 어디 가?”
엘자와 사장이었다. 타이밍도 좋지 않아라. 잠깐 고민한 리체는 이델리 그레이스의 마차 위치를 가늠하고는, 반쯤 사실을 섞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뒤를 흘끗하자 미하일이 엉거주춤 이쪽을 보고 있었다.
“손님이 교육 좀 하시겠다는데.”
엘자는 즉시 인상을 썼다. 최근 미하일의 행실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던 터라 리체의 말을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야, 미하일! 너 또 무슨 사고 쳤어? 자꾸 사장님 걱정시킬 일 할래?”
머리를 쥐어뜯을 듯 손을 든 엘자가 털을 세운 살쾡이처럼 그르렁대며 미하일을 노려보았다. ‘너 그러다 죽는다’는 시선이다.
“손님이라면, 호, 혹시 그분이 말이냐? 이런, 그게 정말이야?”
사장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다름 아닌 이델리 그레이스가 친히 종업원을 교육시키겠다는데,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들킬 줄은 몰랐다는 듯 미하일은 당황하더니, 곧 표정을 고쳤다. 나는 지금 이 부름에 화가 난다. 화가 난다. 화가 난다. 그렇게 암시하는 얼굴이었다. 리체는 이를 악물었다.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선연히 떠오른 분노의 감정은 나름 효과가 있었다. 이 미친놈이 발작하려나 찔끔한 엘자가 입을 다문 것이다.
“뭔 소리예요. 제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요. 그 여자의 못된 심보가 발동한 거죠. 좋아요. 어디 뭐라고 말하는지 구경이나 하고 오죠.”
“하아, 미하일, 좀.”
사장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요즘 이델리의 몇 가지 기행이 그의 예민한 신경을 콕콕 쑤시고 있었다.
“네가 이델리 그레이스 노려보는 게 보는 나도 살 떨릴 지경인데 사교계를 휩쓸며 사는 그 여자가 모르겠니?”
언제 입을 다물었냐는 듯 엘자가 쏘아붙였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사장이 말했다.
“내가 갔다 오지. 아무리 네가 뭘 잘못했다고 해도 내 가게의 종업원을 따로 불러 교육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자존심이 상했는지 불쾌한 얼굴의 사장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미하일이 당황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사장은 팔뚝의 옷감에 구김이 갈 만큼 힘이 들어간 미하일의 손을 내려다보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미하일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갔다 올게요. 저 때문에 사장님이 욕보이면 어떡합니까. 가서 사과하면 돼요. 그리고 바로 퇴근할게요. 내일 봐요, 내일.”
그러곤 누가 쫓아올까 봐 두렵다는 듯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찬물을 끼얹은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엘자가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쟤가 웬일이지. 예전에는 손님에게 술 끼얹고는 사장님에게 해결해 달라고 징징거렸는데. 나이 좀 처먹었다고 철이 들었나?”
“하아, 저렇게 놔둬도 될까. 아무래도 걱정되는데.”
“사장님도 참, 쟤가 간만에 알아서 하겠다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너희들은 이델리 그레이스에 대해 몰라서 그래. 화려한 겉모습을 뒤집어 보면 검붉은 게 줄줄이 튀어나올걸. 이 업계에서 소문 빠른 사장들은 어지간히 알지. 독한 게 말도 못 해.”
걱정하는 사장의 말에 엘자는 ‘그런가요?’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리체는 섬뜩함을 느꼈다. 꼭 저에게 하는 말인 듯했다.
미하일은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그야 나중에는 검붉은 독에 담금질당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당장 죽어도 좋을 듯한 행복을 안게 될 터였다. 걱정해야 할 게 있다면 복상사 정도?
‘둘 다 방아질이 예술이었지.’
한 편의 음란한 작품을 본 듯했다.
어쨌든, 정리하자면 현재로서는 이 정도인가.
[레이몬드 스트리고: 변태
이델리 그레이스: 변태
미하일: 변태]
젠장. 빈약해서 연구 케이스로서의 가치가 형편없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한 마디를 추가했다.
[레이몬드 스트리고: 변태. 엉덩이 좋아함.
이델리 그레이스: 변태. 색욕 왕성.
미하일: 변태. 지조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