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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쾅!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흥분된 몸을 가누지 못하며 방으로 들어온 리체는 강한 팔 힘에 휘둘려 테이블 위에 앉았다. 남자의 한 팔로도 둘러멜 수 있을 정도로 가녀린 몸이 휘청거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뺨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는 그녀는 무척 사랑스러웠다.
“앗, 잠깐. 소파에서……!”
“못 참아.”
“소, 손님.”
“누가 손님이야?”
빙그레 웃는 남자의 잇새로 그르렁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체의 검은 머리칼이 테이블 위로 흐드러진 꽃처럼 펼쳐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과 축축하게 젖은 파란 눈동자.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은 달콤했다.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새카맣게 보일 정도로 짙어졌다. 흥분한 그의 페로몬이 덮치듯 리체에게로 쏟아졌다.
“하아읏!”
시선 하나로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며 남자가 뺨을 살짝 깨물었다.
“카이로.”
“으응.”
“갈 때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가는 거다.”
“카, 카이로 님, 하앗!”
찌익. 찢긴 옷이 비명을 질렀다. 터진 단추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평소의 고아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간데없이 그가 성급히 셔츠를 열어젖혔다. 까만 브래지어에 감싸인 거대한 가슴이 튀어나왔다.
카이로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하아.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붉은독수리 기사단의 단장, 카이로 스트리고.
우성 알파 클럽의 일원이기도 한 그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원칙주의자였다.
평생 페로몬을 가득 뿜는 우성 오메가하고만 관계해 온 그는 지금, 드물게 머릿속이 아찔할 만큼의 흥분을 느꼈다.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검은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을 받치듯 잡았다.
가슴이 워낙 큰 탓에 그의 손이 결코 작지 않음에도 밖으로 흘러넘쳤다. 출렁거리는 가슴을 보며 카이로는 입술을 핥았다.
“이렇게 맛있는 걸 숨기고 있는 줄 몰랐잖아. 이런 답답한 옷 안에.”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정찬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리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순진하다. 그 모습 자체가 퍽 훌륭한 반응이었다. 남자를 자극하기에는.
“젠장.”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의 검은 장갑이 브래지어를 위로 올렸다. 튀어 오르듯 손안에 넘치는 그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흐읏, 아, 아파요.”
손가락 사이로 흰 가슴살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가죽 특유의 질감이 가슴에 마찰되자 흰 살이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카이로는 다리 사이에 그녀의 다리를 가둔 채 장갑 끝을 이빨로 물었다. 장갑을 벗는 것뿐인데 그보다 더한 게 벗겨지는 것처럼 야릇했다.
리체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마디가 두꺼운 손은 장갑에서 해방되자마자 다시 그녀의 가슴으로 직행했다.
20년 넘게 검을 쥐어 굳은살로 딱딱한 손바닥이 푸딩처럼 부드러운 가슴을 쥐었다. 너무나도 부드러워 그대로 녹을 것 같았다. 그는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으음.”
단지 가슴을 붙잡은 것뿐인데 다리 사이가 뜨거워졌다. 카이로는 양손으로 가슴을 강하게 짓눌렀다.
“아, 아, 카이로 님!”
“우성 오메가도 아니고, 쥐꼬리만 한 페로몬에 이렇게 흥분하는 건 정말 처음이야.”
움찔움찔. 리체가 다리를 비틀수록 향기가 새어 나왔다.
일반인, 즉 베타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향기. 알파를 참을 수 없게 유혹하는 페로몬이었다.
그러나 노도처럼 흘러나오는 카이로의 짙은 페로몬 농도에 비하면 장난치는 것처럼 미약한 양이었다.
그럼에도 카이로는 헐떡거렸다.
“당장 네 안에 내 좆을 처박고 싶어.”
가슴을 아래로 받치고 터뜨릴 듯 강하게 붙잡은 카이로가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매끈한 쇄골을 입술로 자근자근 씹으며 딱딱한 손가락으로 톡 튀어나온 젖꼭지를 비볐다.
“하으으, 카, 카이로 님. 느낌이 너무 이상해요. 가슴이 간지러워요.”
“적잖이 흥분했구나.”
카이로는 기쁘게 웃었다. 고작 상대 오메가가 기뻐하는 걸로 흥분하다니, 내심 어이가 없었다.
오메가가 그의 페로몬에 반응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기뻤다.
카이로는 낯선 감정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두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우고 은근하게 돌렸다. 풍만한 가슴살에 강인한 손가락이 파묻힌다.
리체의 여린 살은 그의 딱딱하고 거친 손가락 살갗에 쓸려 금세 붉은 흔적이 생겼다. 빳빳해진 젖꼭지 끄트머리를 엄지로 굴리면서 카이로는 벌어진 리체의 다리 사이에 허리를 밀어붙였다.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허락해 줄 텐가?”
무서운 기사단장. 기사도를 중시하는 기사.
카이로는 사내다운 얼굴과 위압감이 느껴지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꽤 신사적이었다. 리체는 붉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카이로는 곤두선 젖꼭지에 혀를 날름거렸다.
알파 페로몬이 그녀의 몸을 은근하게 감쌌다.
오메가에게 알파의 페로몬은 흥분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건 베타들이 사용하는 최음제보다도 강력했다.
그 정성에 반응하듯 금세 열꽃이 피어난 리체는 발간 혀를 내밀며 헐떡거렸다.
카이로의 넓고 말캉한 혓바닥이 리체의 분홍색 젖꼭지를 한 번에 덮었다. 리체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끙끙거렸다.
“흐으읏!”
도취된 흥분에 간지러움을 느끼는 그녀를 더 자극하기 위해 카이로는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그녀의 속옷을 어루만졌다.
팬티 정중앙에 중지를 댄 카이로의 잇새로 짧게 웃음이 샜다.
“페로몬이 미약해도 오메가는 오메가군.”
중지를 가볍게 구부리고 마디로 질구가 있는 부분을 문질렀다.
“완전히 젖었구나.”
리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카이로는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녀를 품에 안고 싶어서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흥분하길 바랐다.
엄지를 음핵 부위에 올려놓고 나머지 손가락은 질구 주변을 아래위로 문질렀다.
“흐아아…….”
축축하게 젖은 팬티가 그의 손가락에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몇 번 문지르자 새어 나온 애액이 그의 손가락을 적시기 시작했다.
팬티를 옆으로 젖혔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맡아졌다. 짙어진 페로몬에 다리 사이가 흉흉하게 불끈거렸다.
그녀의 흥분한 모습을 바라보는 카이로의 단단한 눈매가 불그스름해졌다.
제 아래 깔린 오메가가 흥분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도 가슴이 진탕되었다.
오메가가 알파, 그것도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거부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작정하고 유혹하는 페로몬은.
어지간한 오메가는 눈만 마주쳐도 홀린 얼굴로 다가왔다. 그에 익숙한 카이로는 페로몬을 짙게 뿜어냈다. 그러나 리체는 그가 페로몬을 쏟아부어도 흥분한 기색만 내비칠 뿐이었다. 보통의 오메가였다면 옷을 벗고 달려들었을 만큼 짙은 농도의 페로몬인데도.
‘페로몬 인식 장애인가.’
기껏 마음에 든 오메가가 결함을 갖고 있다니. 혀를 찬 카이로는 습한 팬티 너머로 손가락을 진입시켰다. 이물질이 좁은 입구를 파고들자 부드러운 허벅지가 경직되었다.
“아, 잠깐만, 잠깐만요, 손님.”
“카이로라고 불러야지.”
카이로가 그녀의 뺨을 혀로 핥아 올렸다.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아, 카이로 님!”
애액으로 완전히 젖어 살점이 부드러워졌다.
손가락의 튀어나온 마디가 젖은 살점 사이로 푹 파묻혔다. 몹시도 부드럽고 축축한 늪지대에 흠뻑 빠진 기분에 살갗이 저릿했다.
카이로는 억누른 신음을 흘렸다. 그녀를 흥분시키기 전에 먼저 갈 것 같았다.
‘시선 때문인가.’
바들바들 떨리는 푸른 눈빛이 그의 기분을 고양시켰다. 카이로는 그녀의 떨리는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아, 아!”
촉촉한 음부가 질척한 늪처럼 그의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마구잡이로 휘젓고 싶은 마음을 참고 그는 엄지로 음핵을 지긋하게 눌렀다. 그리고 슬며시 비비자 리체의 눈동자가 더 강하게 흔들렸다.
음핵을 아래로 짓누르고 문지르다가 위로 올렸다. 구멍에서 새어 나온 체액이 손끝을 적셨다. 손가락이 클리토리스를 짓누르고 미끄러졌다. 짧게 자른 손톱이 예민한 분홍빛 살점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아! 아파!”
“아프기만 한가?”
카이로가 손가락을 눕혀 손가락 살로만 클리토리스와 주변의 살을 마구 비벼 댔다.
“흐으응…….”
스위치 켜듯 움직이는 손놀림에 작은 콩알 같은 음핵이 젖꼭지처럼 곤두서기 시작했다. 리체의 손 아래서 남자의 셔츠가 잔뜩 구겨졌다.
“흐, 흐으.”
발발 떠는 허벅지가 흘러나온 체액으로 흠뻑 젖었다. 구멍을 따라 흐른 애액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카이로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손놀림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그녀의 몸.
‘민감하기 짝이 없군.’
성감이 머리끝까지 오른 카이로는 시선을 그녀의 음부에 못 박고 애무에 열중했다.
이마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으며 그는 마침내 중지로 질구를 뚫고 들어갔다. 고작 손가락뿐인데도 강하게 흡입하는 조임에 자지가 발기했다.
“크읏.”
카이로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대로 넣어도 될까?”
리체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질구 안에서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휘자 그녀가 그의 허리를 다리로 감았다. 카이로가 쳐다보니 놀랐는지 푸른색의 큰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누가 봐도 흥분을 억누르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될 것 같은데.”
카이로는 짙게 웃으며 큰 손으로 새하얀 허벅지를 쥐었다.
“카, 카이로 님…….”
“리체.”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무는 얼굴이 아름다웠다.
“하, 하세요.”
“…….”
“아니, 해 주세요.”
연약한 목소리. 눈물을 글썽거리는 예쁜 눈매가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뚝.
퓨즈가 끊겼다. 카이로는 미끈한 다리를 강하게 밀어 올리고 바지춤을 풀어헤쳤다. 위로 튕겨 오른 굵직한 음경을 지체 않고 삽입했다.
“아앙!”
“크윽.”
제대로 풀어 주지도 않은 구멍이었다.
그러나 이미 흥분한 그녀의 몸은 그를 부드럽게 끌어들였다. 뻐끔거리는 내벽의 살이 그의 성기에 강하게 달라붙었다.
카이로는 바들바들 떨며 제 어깨를 쥐는 리체의 손을 붙잡아 손깍지를 꼈다. 그대로 테이블에 그녀의 손을 고정하며 거칠게 허리를 빼고 안으로 처박았다. 리체가 흐느꼈다.
뭐가 이렇게 먹음직스럽지.
카이로는 격한 감정으로 가슴이 진탕되었다. 풍만한 가슴이 흔들리며 눈을 유혹했다. 가슴에 얼굴을 품고 입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젖꼭지를 강하게 물었다.
“아, 아앙, 앗! 카이로 님!”
“힘 풀어. 그럴수록 지칠, 흣, 테니까.”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꿈틀거리는 몸은 긴장이 풀어지지 않았다. 예상 밖으로 안이 너무 좁았다. 카이로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행위가 익숙하지 않은 걸까?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으니 닳고 닳았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크읏, 젠장, 힘 빼라고.”
카이로는 몰려오는 사정감을 참으며 리체의 가느다란 허리를 꽉 껴안았다.
리체가 가느다란 팔로 그의 머리를 끌어안아 가슴에 파묻었다.
입을 크게 벌려 가슴을 베어 무는 카이로는 허리를 움찔거리는 그녀의 움직임에 웃음을 삼켰다. 행위에 익숙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맞춰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였다. 음란한 것이 당연한 오메가답지가 않았다. 페로몬 장애인 것 같았으니 생각만큼 굴러먹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노력하는 모습이 더욱 사랑스러워서 카이로는 그녀의 허리를 으스러질 듯 껴안았다. 온 방에 짙은 알파 페로몬이 자욱하다.
흥분한 카이로의 페로몬이 리체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갔다.
“아, 아아, 이상해, 너무 이상해! 카, 이로 님! 저, 어떻게,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날 더 강하게 껴안아, 좀 더 세게!”
카이로는 더욱 강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그는 리체가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의 머리를 강하게 껴안은 리체는 너른 등판 너머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보지 못하지만 오직 그녀만 볼 수 있는 것이 허공에 떠 있었다.
[미션 성공.
위즈노크 제국의 황실 직속 기사단, 붉은독수리 기사단장 카이로 스트리고와의 섹스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 카이로 스트리고의 호감도 +10, 오메가 페로몬 개화.]
[오메가 페로몬이 개화하였습니다. 보다 강한 페로몬을 분출할 수 있습니다.]
“아아, 아윽!”
말캉한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달뜬 신음과 달리 그녀의 두 눈은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 * *
리체는 도블락 제국의 알파오메가 클럽 ‘퀸’의 아름답지만, 그다지 인기 없는 종업원이다.
그녀의 하루는 집에 콕 박혀 있다가 퀸에 출근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퀸은 유서 깊은 제국 도블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역사가 긴 클럽.
종업원 역시 아무 사람이나 뽑지 않지만 최근 취임한 신임 사장은 마음이 약하여 길에서 주운 그녀를 퀸의 종업원으로 삼았다.
당시의 리체는 말도 못하고 글자도 쓰지 못하여 출입구 관리 기록은커녕 손님 서비스용 초대장을 쓰는 일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하는 일은 매장 청소와 잔을 닦는 것뿐이었는데, 그녀는 일머리가 조금, 아니 상당히 뛰어나 1년이 지난 지금은 직접 블랜딩한 술을 손님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바텐더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사이에 언어 실력도 일취월장하여 이제는 초대장도 능히 작성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그럭저럭 쓸 만한 직원이 된 것이다.
바텐더가 되기는 했지만 리체는 아직도 출근하면 바닥을 쓰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출근한 그녀는 문을 열고 유니폼을 갖춰 입은 뒤에 매장 정리를 한다. 그러고 나면 말단 종업원들이 출근한 뒤 사장과 매니저가 출근을 하는데, 그들의 출근은 퀸의 오픈이 얼마 남지 않지 않았다는 뜻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야 하는 하루. 그러나 오픈 전부터 예기치 않게 소란이 일어났다.
“싫어요! 저 그거 먹으면 알레르기 반응 온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잖아.”
“뭐가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리 그레이스라도 그렇지, 모든 오메가에게 메가진(페로몬 억제제)까지 먹으라는 건 지나친 요구예요. 차라리 옵세진이라면 몰라! 대체 그 재수 털린 예민덩어리가 뭐라고.”
위험한 말이었다. 기겁한 사장의 눈이 매서워졌다.
“미하일!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미하일이라 불린 청년은 자글자글 끓는 조개처럼 입을 여닫기를 반복했다. 치아끼리 맞붙어 딱딱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몹시도 신경질적이었다.
미하일. 퀸의 터줏대감 종업원. 남성 오메가로 전대 사장의 후원과 서비스 교육을 받았다.
클럽을 방문하는 사람은 그의 세련된 서비스를 만족해했으며, 최근에는 클럽 손님 중 꽤 쟁쟁한 여자 알파를 애인으로 삼아 콧대가 저만치 올라가는 중이었다. 리체의 머릿속에서 남자의 정보가 깔끔하게 출력되었다.
발작하기 일보직전인 미하일을 상대하다 안 되겠다 싶은지 골치 아픈 얼굴로 이마를 짚은 사장이 종업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이래?”
종업원들이 하나둘 부름을 받고 가까이로 갔다. 리체도 마찬가지였다.
사장이 진지하게 말했다.
“잘 들어. 오늘 이델리 그레이스가 올 거야.”
“그래요? 한 달 만이네요. 근데 그게 왜요?”
“히트 사이클이시란다. 대단하신 귀족 영애께서.”
“미하일!”
사장의 분노한 눈빛에 미하일은 흥, 콧방귀를 뀌고 팔짱을 꼈다.
다른 가녀린 오메가와 달리 남성성으로 차별점을 둘 거라며 제 딴엔 전략을 세워 놓고 각종 운동 보조제로 키운 가슴이 공격적으로 실룩거렸다.
듣기로는 그의 권력자 애인이 저 가슴에 반했다지, 아마.
리체는 다분히 분석적인 눈으로 미하일을 살피다가 사장이 설명을 시작하자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미하일 말대로 그레이스 양은 히트 사이클이 온 상황이야.”
“그럼 집에서 푹 쉬기나 하지 왜 클럽까지 온대요? 아, 설마 스트레스 풀러?”
“그래. 옵세진(히트 사이클 억제제)을 맞아서 페로몬 웨이브는 오지 않을 테지만 굉장히 예민한 상황인 거지.”
“……그래서요?”
“그래서 우리 측에 요청을 해 왔어.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고 싶지 않으니 종업원들은 페로몬 억제제를 맞아 달라고.”
“미친.”
누군가 욕설을 지껄였다. 미하일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얼굴이다.
“그럼 손님들은요? 이델리 그레이스 집안이 아무리 잘나간다지만 다른 손님들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따로 룸을 잡는다고 해. 종업원들은 서비스를 해야 할 테니까, 페로몬을 풍기지 말라는 거고.”
“지랄이네요. 그럼 술이랑 안주는 지 손으로 가져가지? 어차피 쪼르르 호위하는 알파들 있을 텐데요.”
“불만은 그만.”
사장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투덜거리던 종업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보통 때의 사장은 사람 좋다는 말이 과하지 않지만 화가 났을 땐 예외였다. 선을 지키고 조용해진 종업원들에 사장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미하일처럼 불만 어린 얼굴의 종업원들과 다르게 리체는 무표정했다. 시간은 중요했으므로, 이 소란이 별거 아니라고 판단되자 즉시 관심을 껐다.
[개화한 페로몬 농도 수치: 10]
어제, 페로몬은 거친데 섹스 스타일은 은근히 부드러웠던 기사단장이랑 섹스하고 얻은 데이터였다.
‘농도 수치가 10인 건 어느 정도일까.’
베타의 몸으로 처음 알파와 잤을 때 페로몬이 개화되었다. 그랬다. 이 차원에 떨어졌을 당시 그녀는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였다.
베타는 알파오메가 형질이 없는 일반인. 페로몬 농도 수치가 높은 알파와 몸을 섞으면 베타도 오메가 형질이 생길 수 있다는 데이터를 그때 얻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어 본 결과 그건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리체는 ‘알파오메가의 섹스로 인해 형질이 발현될 수 있다’를 가설로 분류해 두었다.
‘뭘 판단하기엔 아직 데이터가 부족해.’
더 많은 알파오메가를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리체, 오늘은 너 혼자 수고를 해 줘야겠다.”
그녀는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사장은 미안한 얼굴로 설명했다. 기분이 단단히 상해 버린 종업원들은 팔짱을 끼고 사장과 리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베타인데다가 손님 기분 상하지 않게 일머리 좋은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종업원들이 고소를 머금었다. 대놓고 리체를 칭찬하는 속이 뻔히 읽혀서다.
자기들 들으라고 하는 거겠지.
지금 여기서 안하무인 오메가 이델리 그레이스에게 아무 유감없는 건 리체 정도밖에 없으니까.
리체는 종업원들이 어색해할 정도로 감정 표현이 건조했다. 하나 표현만 건조할 뿐 침착하고 차분한 성정인데다가 입이 무겁다는 걸 알아 지금은 종업원들 모두 그녀에게 할 말 못할 말 다 하는 실정이다.
아무리 오만할지라도 제국의 명망 높은 가문의 오메가를 홀대할 수는 없는 법.
사장의 입장에선 침착하고 차분한 리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 알겠어요.”
“이델리 그레이스 패악이 장난 아닐 거야.”
사장과 동료 직원들의 눈치를 보던 엘자가 그녀의 귀에 대고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리체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일을 맡긴 사장도 걱정이 되는지 머뭇거리다가 손뼉을 치고 직원들을 해산시켰다.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일을 하는 리체의 마음은 사람들이 하는 걱정과 딴판이었다.
‘잘됐다. 이델리 그레이스는 꽤 알려진 극우성 오메가. 소문이 자자한 그녀를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겠군. 좋은 데이터가 되겠지.’
* * *
클럽 퀸의 주방은 반짝반짝 광택 나는 금속 소재로 꾸며져 있었다.
튀김 요리, 구이 요리, 볶음 요리 등 손님이 원하는 건 뭐든 만들어 낼 수 있고 술 창고에 구비해 둔 음료 또한 흔한 것에서부터 귀한 것까지 각양각색이다.
리체는 매일같이 주방 사람들이 닦아 내어 깨끗하게 반짝거리는 조리 시설과 장작을 넣지 않아도 불을 피워 내는 화덕을 보며 이곳이 그녀가 살던 곳과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차원에 대한 개념이 희미한 이 세상에, 그녀는 어느 날 뚝 떨어져 내렸다.
‘차원 이동 게이트를 게임 시스템으로 위장하는 시도는 처음이라서 몰랐지. 머리 좋은 미친놈은 어디서든 위험한 존재라는 걸 이렇게 또 실감하게 되는군.’
어쨌든 몇 년 전부터 본 차원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소득은 없었다.
본 차원에서는 차원 연구, 그중에서도 차원 원주민에 대한 연구를 주력으로 해 왔던 리체는 물리적인 차원의 법칙에 대해서는 기본 이상으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누군가 그녀가 다른 차원에서 떠돌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구하러 오는 게 최선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조난자인 셈이다. 하지만 하던 가락이 어디 가지 않는다고, 이곳 차원의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연구하는 것만이 여기서 그녀가 하는 유일한 흥미로운 일이었다.
“리체. 음식 나왔어. 가져가.”
주방장이 서빙 카트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2층 카트는 아래엔 술 바구니가, 위층엔 음식이 놓였는데 서해에서 일 년에 몇 마리 잡히지 않는다는 새우가 붉고 하얀 속살을 보인 채 줄지어 누워 있었다.
그 외에도 치즈와 베이컨, 여린 송아지 살로 구워 낸 바비큐도 있다. 맛있는 냄새를 맡자 든 것 없는 배 속이 꼬르륵거렸다.
‘술 안주라기엔 고급스럽네.’
도블락 제국에 자리 잡은 알파오메가 클럽은 셀 수 없이 많지만 바로 이런 고급스러움이 클럽 퀸을 업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일 테다.
리체는 카트가 끌리는 소리와 술 바구니의 얼음이 달그락대는 시원한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위층으로 이동했다.
이델리 그레이스가 통째로 예약한 곳은 클럽 퀸의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드르르르.
리체는 카트를 끌며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이델리의 특별하고도 까다로운 요청에 따라 알파오메가 종업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델리의 추종자를 보고 싶어서 아쉬워하기는 해도, 얼쩡거리다 불벼락을 맞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델리의 남자들.’
이 차원은 기술은 발전한 데 반해 문화는 옛 유럽처럼 고풍스럽고 신분 제도까지 존재하는 모순적인 사회였다.
이델리 그레이스는 신분 제도의 정점인 귀족 사교계의 트러블 메이커였다.
알파오메가 사회는 문란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기는 해도 겉으로는 고아하고 교양 있는 모습을 가장하는 편이다.
그런 사회에서 추종자들을 몰고 다니며 스캔들을 내는 그녀의 전적은 사교계에 발 담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가장 유명한 건 아무래도 ‘이델리의 남자’란 단어까지 파생시킨 그녀의 남성 편력이었다.
이델리 그레이스가 현재 가장 열을 올리고 있는 상대는 지옥에 발 한 짝 걸쳤다는 황제를 대신하여 최근 각광받고 있는 황태자.
얼굴이 예쁘고 페로몬이 황홀하지만 성격은 개와 다를 게 없다는 이델리 그레이스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거침없는 성격을 가졌으나 사생활은 이상하게 금욕적이라는 우성 알파. 그것도 그냥 우성 알파가 아니라 온 대륙을 뒤져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극우성 알파다.
‘이델리 그레이스의 집착? 다른 이유가 있겠어? 그 욕심 많은 여자가 쉽게 갖지 못하니 더 열광하는 거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그녀에게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하는 대표적인 동료 직원 엘자가 했던 말이다.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비밀을 지키라던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리체는 카트를 정지시켰다.
하얀 백금으로 겉면을 마감한 큰 문 앞에 섰다.
클럽 최상층에 가장 화려하고 넓은 방. 다이아몬드 룸이었다.
리체는 잠시 귀에 신경을 기울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다.
적막한 복도에선 노크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리체가 다시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이 살짝 열리고 고혹적인 목소리가 응답했다.
“들어와.”
이 차원의 원주민 중에는 특이한 형질을 가진 인간들이 있다는 걸, 리체는 차원에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형질이 있는 인간을 알파 또는 오메가, 무형질의 인간을 베타라고 한다.
베타는 쉽게 말해 일반인, 리체가 살던 본 차원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종이다.
반면 알파오메가는 어떠한가. 리체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유전 형질이 발현된 이들이었다.
발정기의 짐승들이 상대를 꾀기 위해서 사용된다고 알려진 페로몬을 뿜어내는 인간들. 알파의 페로몬은 오메가를 유혹하거나 같은 알파를 지배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유혹 페로몬과 위협 페로몬으로 나눌 수 있다.’라고 리체는 연구 일지에 적어 두었다.
오메가 페로몬은 알파를 유혹하는 페로몬을 뿜는다.
알파와 다른 점은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설사 남자라도 오메가라면 임신이 가능하다.
오메가의 임신은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경악스러운 점이었다.
남자가 임신하다니.
‘이 유전자를 적절히 활용할 수만 있다면, 아주 많은 변화가 생길 거야.’
그러고 보면 미하일은 현재 만나고 있는 파트너인, 공작가 여성 알파 제니스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듯했지.
안으로 들어가기 전, 리체는 <페로몬 억제> 스킬을 발동시켰다.
1년 전 오메가로 개화했지만, 바로 최근에야 알파와 섹스한 그녀에게는 오메가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한 페로몬만 쌓인 상태였다. 그러니 그다지 걱정할 건 없으나 만사 불여튼튼인 것이다.
페로몬 억제 스킬은 부동심 강한 그녀의 특성 덕에 생성된 패시브 스킬로, 감당 불가할 정도의 강한 페로몬을 만나면 자동 발동 취소되는 조건이 있지만 평탄한 일상을 영위하기엔 그럭저럭 쓸 만한 스킬이었다.
리체는 머릿속으로 수도꼭지를 잠그는 상상을 했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물방울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리체는 팔꿈치 안쪽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서로를 유혹하는 페로몬에도 등급이 있다. 알파라면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페로몬을 뿜는 이들을 오메가 중에서도 월등한 우성 오메가라고 한다.
그리고 종업원들이 입방아를 찧었던 이델리 그레이스는 우성 오메가 중에서도 극우성으로 구분되는 희소한 존재였다.
‘강력한 페로몬을 갖고 있겠지. 내 페로몬 억제 체제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페로몬 억제는 정신력이 지배당하는 면이 크므로 리체는 섣불리 과한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침착한 성정의 그녀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다이아몬드 룸의 문을 열어젖혔다.
약간 씁쓰레한 약초 냄새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달갑잖은 향에 리체는 숨을 천천히 쉬었다.
‘로바트산 최고급 시가군.’
돈 깨나 있다 하는 귀족 나리들이 사랑하는 시가. 한 갑에 4인 가족 일주일 생활비라, 돈 많은 귀족들과 평민 부호들이나 향유하는 고급 기호품이다.
그 값비싼 시가의 연기가 온 방을 구름처럼 떠다녔다.
약간의 신경 이완 효과가 있는 시가는 섹스하기 전 피우기로도 유명했다. 잘하면 오늘 알파오메가끼리 섹스하는 데이터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옅은 기대감을 품고 리체는 서빙 카트를 밀어 너구리 굴 같은 룸 안으로 진입했다.
내부의 정경은 본 차원에서 보았던 술집의 룸과 비슷했다. 성인 두 명이 뒹굴거려도 될 만큼 큰 흑단목의 테이블 주변으로 장의자가 늘어서 있었다. 술을 마시는 공간 뒤에는 편히 쉴 수 있는 퀸 사이즈 침대와 무료하면 즐길 수 있는 체스와 주사위 게임 따위의 놀이 도구들이 선반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방을 한 번 훑은 리체는 시선을 끌어 내렸다. 장의자에 편히 널브러진 채 시가를 피우는 귀족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다른 방에 비해 두 배는 넓은 다이아몬드 룸이라 그런지, 담배 연기가 빽빽하게 피어오르고 있음에도 크게 답답하지 않았다.
룸 테이블엔 마른안주와 맥주뿐이었다.
“얼른 세팅해.”
설탕을 녹여 바른 견과류와 말린 무화과를 주워 먹던 귀족이 그녀를 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막 소파 앞을 지날 때였다. 등을 뒤로 젖히고 무릎을 꼰 채 시가를 피우던 남자의 콧잔등이 살며시 찡그려졌다. 귀족들은 까다롭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체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암녹색 드레스 코트는 화려했다. 붉은색 머리카락에 배색되는 색임에도 불구하고 알록달록한 느낌 없이 잘 어울렸다. 타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단추 한두 개가 풀어진 셔츠가 야릇한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헤어 젤을 발라 고정된 머리 아래 깨끗한 이마는 반듯하게 잘생겼지만 얼굴을 찌푸린 탓에 균열처럼 주름이 잡혀 있었다. 입술은 갈색에 가까운 붉은색이었고 오뚝한 코의 미끈한 선이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풍겼다. 꽤나 시선을 끄는 남자라는 게 리체의 감상이었다.
남자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왜 저러는 거지? 그녀는 눈에 띄지 않게끔 그를 곁눈질했다.
그때 남자가 귀신처럼 고개를 들었다. 빨간 머리카락에 빨간 눈동자가 무섭도록 강렬했다.
타오르는 듯한 새빨간 눈이 쳐다보자 리체의 어깨가 긴장으로 살며시 굳어졌다.
설마 페로몬의 잔향이라도 맡은 걸까?
‘그럴 리 없어. 억제 스킬은 정상적으로 발동 중이다.’
다행히 우연이었는지 남자는 금세 심드렁해진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벌어진 입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괜히 긴장하게 만들고 있어.’
내심 투덜거리며 몸을 반쯤 돌린 리체는 룸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이델리 그레이스와 그녀의 남자들은 존재감 없는 종업원은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전하께선?”
“결국 안 오시는 건가?”
“편지는 잘 전달했어? 이델리가 직접 초대했는데 안 오시는 게 말이 돼?”
한 남자가 그럴 리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델리 그레이스의 남자들. 그들은 총 열 명이었다. 하나같이 쟁쟁한 유력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극우성 오메가의 위상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리체는 요리에 시선을 두면서도 신경을 바싹 곤두세웠다.
퀸은 고급 클럽이지만, 베타인 그녀가 접할 수 있는 알파오메가는 한정되어 있었다.
알파오메가들 사이에서도 화제인 이델리와 그녀의 남자들을 볼 수 있는 기회에 연구자로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귀한 데이터가 한가득 담긴 보물 상자를 앞에 둔 리체의 내리깐 눈이 은밀히 반짝였다.
접시를 천천히 옮기는 그녀의 귀가 소리를 좇아 움찔거렸다.
“입 닥쳐요, 크리온. 바보예요? 아직도 상황 파악 안 돼? 멍청하게 굴지 마요. 그게 더 기분 나쁘니까.”
“아니, 이델리. 나는 그냥 이해가 안 가서…….”
황태자를 욕하며 그녀의 환심을 사고 싶었던 크리온이라 불린 남자는 예상 외로 까칠한 말에 당혹해했다.
“이델리, 기분 상했어요?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요. 어떻게 당신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거라.”
이델리 그레이스는 언짢은 얼굴로 답이 없었다.
리체는 슬쩍 앞을 곁눈질했다. 이델리 그레이스는 열 명의 남자들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혼자 널찍한 소파를 차지한 그녀가 손을 들자 양옆의 남자들이 재빨리 움직여 한 손에는 시가를, 한 손에는 과일을 쥐여 주었다.
이델리 그레이스는 문자 그대로 조각 같은 미녀였다.
작은 얼굴은 손을 쫙 펴면 가릴 수 있을 듯했고 그 안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상하좌우로 완벽한 균형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로브 아 랑글레즈와 비슷한 풍의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보통 그런 옷들이 주는 점잖은 아가씨라는 느낌과 다르게 관능적이었다. 넓게 퍼지는 스커트에 비해 잘록하게 조인 허리와 그에 반비례하여 강조된 가슴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자 후궁이라는 꽃들에 둘러싸인 아름답지만 위험한 가시나무 같았다.
가슴 아래로 내려가는 윤기 나는 긴 금발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붉은 입술로 시가를 물었다. 하얀색 토시에 달린 보석들이 반짝거렸다.
파란 눈이 아래를 응시한다. 짜증이 난 표정이다. 초대를 했으나 오지 않는 황태자가 짜증의 원인일 것이다.
‘황태자에게 관심이 있다더니, 엘자의 말이 맞았구나.’
리체는 킁, 냄새를 들이마셨다.
‘……레모네이드 냄새.’
짙은 시가 냄새에도 한 줄기 흐르는 청량하고 다디단 냄새가 맡아졌다. 이델리 그레이스의 페로몬 향이다. 리체는 입맛을 다셨다.
페로몬을 가졌다는 특성은 동일하지만 그 페로몬 하나하나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카이로 스트리고는 진흙 냄새와 무두질한 가죽 냄새가 났지. 그는 오랜 시간 전장을 뒹군 기사이자 기사단장이야. 그런 걸 보면 페로몬은 유전 인자뿐 아니라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 걸 수도 있겠어.’
독한 시가 냄새를 뚫고도 느껴지는 강한 페로몬에 리체는 감탄했다.
‘이게 극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인가.’
두어 번 더 냄새를 맡은 리체는 또 다른 냄새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눅눅한 바닷가 진흙 냄새?’
카이로 스트리고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냄새였다.
‘카이로는 출정했으니 여기 없을 테고……. 그럼 이 페로몬은 누구의 것이지?’
은근히 주변을 힐끗거리는 리체에게 이델리의 눈치를 보던 크리온이 성이 난 투로 명령했다.
“뭐하고 선 겐가? 얼른 술을 따르지 않고.”
리체는 시선을 내리고 묵묵히 카트 아래 칸에서 술 바구니를 꺼내 들었다.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요, 이델리. 황태자 전하께서는 꽤 까다로운 분이잖아요. 그분의 행동을 예측하는 건 병상에 누워 계신 황제 폐하도 못 하실걸요.”
크리온은 리체의 손에서 술잔을 가져가 술을 따르고 이델리의 입에 대어 주었다. 리체에게 말할 때와는 딴판으로 다정하게 달래는 태도가 퍽 곰살맞았다.
다짜고짜 술잔을 빼앗긴 리체는 어깨를 으쓱하고 새로운 술잔을 늘어놓았다.
“그런 황태자도 당신과 삼십 분, 아니 십 분만이라도 자리를 같이한다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죠, 나의 이델리. 당신을 만나기 전엔 눈 감은 장님과 다름없었던 내가 이제는 두 눈을 뜨고 당신만 보고 있잖아요.”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델리는 기분이 풀린 듯했다. 짙어진 레모네이드 냄새에 리체는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리체가 내놓은 술잔을 가져가 술을 콸콸 따르던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이델리 그레이스에게만 신경을 집중했던 리체는 뒤늦게 그의 존재를 다시 인지했다. 그 남자였다.
자신이 들어왔을 때 개처럼 냄새를 맡았던 붉은 눈의 남자. 붉은색 색채에 걸맞게 뚜렷한 이목구비가 잘생긴 생김새였으나 비웃음 띤 입술이 삐딱한 퍼즐 조각처럼 어긋나 있었다.
이델리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안 그래도 불편한 심기가 더 상한 듯 바늘처럼 뾰족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레이?”
“…….”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남자가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엄지로 입술에 묻은 술 방울을 훔치고 입꼬리를 올렸다. 거칠다기보다는 날티 나는 분위기가 묘하게 소년 같은 남자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럼 이게 재밌지, 안 재밌겠냐?”
“…….”
“황태자랑 뒹굴지 못해서 화가 나는 거야,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 화가 나는 거야?”
“…….”
“아니면, 둘 다인가?”
궁금하다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에서는 명백한 악의가 풍겨 나왔다.
눅진했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이델리의 얼굴도 서늘하게 굳어졌다. 흥미진진한 상황에 리체는 손도 멈추고 그들을 흘끗거렸다. 다행히 모두가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는 터라 그녀가 훔쳐보든 말든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피우던 시가를 옆의 남자에게 물려 준 이델리가 빙그레 웃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전자가 아닐까 싶은데. 기껏 갖춰 입은 속옷이 아쉬워서 미칠 지경일 거야. 어때, 맞췄어?”
“어머나, 아주 내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구나.”
비꼬는 건지 정답이라는 건지 알 수 없게 모호한 말이었다. 조용한 좌중에 레이몬드만이 이 분위기를 모르는 것처럼 술을 따랐다. 문득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종업원을 흘끗했다. 리체는 그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정체 모를 불안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다행히 그는 이델리의 말에 금세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보답으로 나도 네 생각을 맞춰 볼까?”
“해 봐.”
재밌다는 듯 거만한 대꾸에 이델리의 시선이 레이몬드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거긴 왜 그렇게 세우고 있어. 날 보니까 막 불끈불끈해져? 방정맞은 자지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뭘까?”
손가락으로 붉게 칠한 아랫입술을 훔친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몸짓에도 섹시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즐거움이 번졌다.
“황태자 대신 내 몸에 자지를 박는 거? 아니면.”
“…….”
“내 발을 핥는 거려나?”
등받이에 몸을 묻고 이델리가 테이블 위로 발을 들어 올렸다. 치맛자락이 허벅지까지 내려와 그녀의 늘씬한 종아리가 드러났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발가락이 허공에서 까딱거렸다.
“생각만 해도 자지가 터질 것 같지?”
무심코 그녀의 종아리와 하얀 발에 시선을 빼앗겼던 레이몬드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지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피식 웃음을 흘린 그가 빈정거렸다.
“왜, 오늘은 황태자 대신 나랑 자 주려고?”
그만해, 레이몬드. 옆의 남자가 옆구리를 툭 쳤지만 레이몬드는 술을 한 잔 더 마시며 이델리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이델리도 만만치 않았다. 어지간하면 모욕을 느낄 말에도 오히려 기분 좋은 듯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너 하는 거 봐서.”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이델리가 손안에 들고 흔들었던 술잔을 입술로 물었다. 올라가는 붉은 입술이 얄궂었다.
그녀는 사내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자극받았는지 침묵하는 남자를 의식하며 리체는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 갖지 않았다.
덕분에 리체는 이델리와 팽팽히 설전을 벌이는 레이몬드를 좀 더 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 붉은 눈. 그에 비해 흰 피부와 비율 좋은 몸이 두드러지는 남자는 위험한 매력을 선호하지 않는 리체도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살쾡이처럼 관찰하던 리체는 문득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 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레이몬드 스트리고. 내 오랜 친구야. 너는 내내 나랑 자고 싶어 했잖아. 난 솔직한 남자가 좋아. 질투 난다면 질투 난다고 얘기해. 그게 더 마음에 드니까.”
‘그래. 스트리고, 스트리고…….’
스트리고라면 아는 성씨이지 않은가.
카이로 스트리고.
리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구나. 이자가 기사단장의 동생이군.’
카이로 스트리고는 현재 황궁의 명을 받아 옆 나라와의 분쟁 지역으로 출정한 상태였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그가 지나가듯 말했던 동생일 것이다.
‘귀엽지만 어릴 때처럼 살갑지 않아서 섭섭한 동생’이라 했던가. 귀엽다기엔 반항기 가득해서 날티 나는 양아치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인데.
‘흠, 이건 좀.’
난감해질 수도 있겠는걸.
리체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레이몬드 스트리고는 다행히 이델리 그레이스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 그녀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페로몬 억제 스킬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한 리체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물론 사이 안 좋은 형제가 서로의 잠자리 얘기까지 나눌 것 같진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더 필요하신 게 있다면 종을 흔들어 주세요.”
두 사람은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 나가 봐.”
신경전을 벌이는 이델리와 레이몬드 대신 다른 사내가 말했다.
리체는 문까지 뒷걸음질을 쳤다.
끼이익.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들여다본 내부에서는 이델리가 옆에 있는 남자와 키스하고 있었다. 야릇하게 입술을 움직이는 그녀의 시선은 눈앞의 남자가 아닌 레이몬드를 향했다.
느릿하게 술을 마시며 레이몬드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의 눈빛을 받아 냈다. 저조한 기분을 드러내는 차가운 눈 깊은 곳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들의 알파 페로몬과 오메가 페로몬이 섞이는 듯하면서도 서로를 밀어냈다. 한 병에 넣어 흔든 물과 기름처럼.
킁, 코를 찡그리며 리체는 웃었다.
‘흥미롭네.’
* * *
리체는 문 앞에 서서 대기했다. VIP들은 대개 변덕스럽고 대우받는 걸 좋아한다. 서비스가 늦거나 반응이 재빠르지 않으면 불쾌해하기 때문에 부르면 바로 반응할 수 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리체는 무료한 눈으로 전방의 벽에 있는 무늬를 세다가, 따분한 한숨을 쉬었다.
‘이 시간에 연구 일지나 작성하면 훨씬 건설적일 것을.’
원래 있던 차원에서 그녀는 바쁜 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이곳에 사고로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세상은 차원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연구원인 그녀도 덩달아 눈코 뜰 새 없었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두 건의 새로운 차원 원주민의 특징을 기록하여 보고서로 만들기도 했다.
다행인 건 연구 활동이 그녀의 적성에 맞았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생물, 특히 인간이 흥미로웠다. 그 외에 딱히 좋았던 건 없다. 원래 차원에서의 일상은 바빴고, 관찰할 게 많아 좋았지만, 그게 다였다.
그에 반해 이곳 세상은 다채로운 편이다. 구조자가 오기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도 1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차원의 틈을 발견하기는커녕 차원 이동자도 발견하지 못한 지금, 비관적인 생각이 희망을 밟고 넘어서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누구도 만나지 못한 걸 보면 이 차원은 차원 이동자들도 오기 힘든 곳인 게 분명해. 이대로 가다가는……. 리체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흩어 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정적인 생각은 의욕만 떨어뜨릴 뿐 결코 좋지 못했다. 리체는 애써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섹스의 쾌감도 여기서 건진 좋은 것 중 하나지.’
인간 연구의 일환으로 섹스를 공부하고 경험했지만 즐긴 적은 드물었던 탓에, 성욕은 그녀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정확히는 무성욕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파오메가가 있는 이곳 차원에 와서야 사람들이 왜 섹스에 환장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나름 의미 있는 깨달음이었다.
삼십 분이 지났지만 안쪽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 없이 잠잠했다.
꼬르륵.
리체는 배에 손을 올렸다.
‘배고파.’
주방에서 맡았던 음식 냄새가 생각났다. 고소하고 기름졌던 냄새. 혀 아래에 침이 고였다.
자리를 지킬까.
말까.
잠깐 고민했지만 판단은 빨랐다. 그녀는 종이 울리면 반응하게 되어 있는 마법 깃털을 유니폼 가슴 포켓에다 꽂고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서 인사불성으로 술을 마시는지 섹스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염없이 문 앞만 지키는 건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일.’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나비 날갯짓처럼 경쾌했다.
주방이 있는 1층은 한산했다. 직원들은 개인 약속을 가거나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 눈치였다.
리체는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주방에서 걸어 나오던 엘자가 그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체!”
리체가 주방 안쪽으로 걸어가자, 쪼르륵 달려온 엘자가 은근슬쩍 리체의 옆에 달라붙었다.
“왜 내려온 거야? 이델리 그레이스가 뭐 더 먹고 싶대?”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배고파서.”
“누가? 이델리 그레이스가?”
“아니. 내가.”
쏙, 방울토마토가 입으로 들어왔다. 리체는 반사적으로 씹었다.
방울토마토가 톡 하고 잇새에서 터졌다. 엘자는 흥미진진하게 눈을 반짝이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안에 누구누구 있었어?”
리체는 대꾸하는 대신, 무슨 일이냐며 고개를 내미는 주방장에게 말했다.
“뭣 좀 먹을 만한 것 있어요?”
주방장이 간단히 만들어 준다며 팬에 기름을 두르자 한층 더 허기가 돋은 리체는 입맛을 다셨다.
하나 먹은 방울토마토가 애매하게 식욕을 자극했다.
“응? 리체. 누구누구 있었어?”
쏙. 방울토마토가 하나 더 들어왔다. 리체는 방울토마토를 씹으며 대꾸했다.
“몰라.”
“응?”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어.”
“에에?”
“자, 여기 있다.”
주방장이 리체에게 바구니를 건네었다. 손님용으로 손질한 과일과 베이컨말이가 들어 있었다.
리체는 냉큼 베이컨말이를 주워 들어 입에 집어넣었다. 베이컨 특유의 풍미가 입 안에서 퍼져 나갔다.
행복한 얼굴로 음미하는 리체를 보며 엘자가 투덜거렸다.
“하여간 물어보는 재미가 없어요! 아, 루세이노 전하는? 역시 없었지?”
“…….”
“또 누군지 모른다는 말을 할 참이야? 아, 정말. 보면 딱 알 텐데. 금발에 파란 눈이 딱 왕자님처럼 생긴 분 말이야.”
“그런 사람은 못 봤는데. 루세이노?”
고개를 갸웃하자 엘자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황태자 전하 말하는 거야. 루세이노, 황가의 세컨드 네임이잖아. 좀, 리체. 너도 이제 우리 클럽의 일원이라고. 기본적인 건 알아둬야지.”
머저리를 보는 듯한 시선에 리체의 마음에 묘한 감흥이 일었다. 그녀의 모든 관심사는 흥미로운 형질에 집중되어 있었다. 황가니, 황족이니 하는 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바보 취급이 조금 억울했다.
“없었어. 그래서 분위기가 안 좋았는걸.”
“알 만해. 그레이스가 화가 났구나?”
엘자는 키득거렸다.
“미하일이 들으면 아주 고소해하겠는데. 아, 넌 모르나? 걔가 요즘 만나는 제니스 공작이 황태자의 측근이거든.”
“아아. 들어보긴 했지.”
“미하일은 자기가 황태자의 측근인 줄 아는지, 황실과 친하다고 벌써부터 황태자를 제 것처럼 여기는 그레이스가 뻔뻔하다고 어찌나 욕하는지 몰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자기가 제니스 공작이야, 뭐야.”
리체의 귀에 대고 속닥거린 엘자는 배시시 웃었다.
“좀 더 말해 줘 봐. 루세이노 전하 말고도 이델리의 추종자들은 많잖아. 누가 있었니? 금발의 데세르트 자작? 은발의 레이시언 남작? 아니면 불운한 붉은 머리 스트리고 경?”
노래하듯 중얼거린 엘자가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이델리 그레이스가 까다롭게 굴지만 않았더라도 들어오는 얼굴을 다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레이스가 사람 얼굴은 또 꼼꼼히 따져서 못생긴 남자는 자신을 따르지도 못하게 하거든. 그러니 다들 얼마나 잘 생겼겠어?”
리체는 베이컨말이를 하나 더 물며 그녀가 한 말 중 뇌리에 남은 단어를 중얼거렸다.
“불운한 붉은 머리?”
스트리고라면 아까 이델리와 기 싸움을 하던 그 남자가 아닌가. 카이로의 망나니 동생.
“너 몰라? 얼마 전에 우리 가게에도 왔었잖아.”
대답하려던 엘자의 입술이 합 다물렸다. 그녀의 시선이 주방 입구를 향했다.
리체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소매를 끝까지 걷어 근육질 팔뚝을 그대로 내보인 미하일이 들어오고 있었다.
방금까지 그를 신랄하게 욕했던 엘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미하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방금. 왜 그렇게 놀라? 너 또 내 욕했냐?”
“무슨 소리야. 놀라긴. 그 말 때문에 놀랐다, 지금.”
엘자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방울토마토 바구니를 내밀자 미하일은 새침하게 고개를 젓고는 리체를 바라보았다.
“너 아직도 몸매 관리하니? 단백질만 많이 먹으면 인생에 무슨 재미가 있어.”
종알거리는 엘자를 무시하고 미하일이 리체에게 말했다.
“레이몬드 스트리고 경이 거기 있었나 보지?”
숨길 일도 아니어서 리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있든 없든 궁금한 걸 물어볼 생각이었다.
“불운한 붉은 머리라는 건 무슨 소리야?”
“천재인 형을 둔 수재의 비애라고 해야 하나.”
미하일은 리체의 바구니에서 하나 남은 베이컨말이를 가져가 입에 쏙 집어넣었다.
‘하나 남은 건데.’
아직 배가 고픈 리체는 미하일이 우물거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하일이 앙큼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몸 관리를 해야 해서 단백질을 먹어야 하거든.”
“그러려면 지방이 많은 베이컨보다는 닭 가슴살을 먹어야지.”
“그러냐? 너도 관리 좀 하나 봐? 빼빼 마른 게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씨익 웃은 미하일이 티슈에 손가락의 기름을 쓰윽 닦아 냈다. 리체는 미하일의 근육질 팔뚝을 보며 무심코 자신의 팔오금을 주물렀다. 푹 들어가는 살이 말랑말랑하기 짝이 없었다.
“카이로 스트리고 백작은 본 적 있지? 귀족주의에 빠진 그 기사단장 말이야.”
오만한 카이로.
리체는 그의 별칭을 떠올렸다.
“당연히 알지. 리체는 저번에 그분의 지명을 받기도 했는걸.”
엘자가 너만 높으신 분의 지명을 받는 게 아니란 듯 톡 쏘자 미하일이 의외라는 시선으로 리체를 훑어보았다.
“뭐, 그럼 이해하기 쉽겠네.”
“…….”
“카이로 백작은 태생부터 귀한 귀족 가문 출신이잖아. 어렸을 때부터 꽤 오만한 편이었지. 매너는 좋았지?”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게 다거든. 매너는 좋지만 묘하게 차가운 게 그것 때문이라니까. 우리 정 많은 제니스 님과 다르게 아주 차가운 사람이지.”
기회를 틈타 연인을 칭찬하는 솜씨가 훌륭했다. 미하일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 엘자가 웩 하고 혀를 밀어냈다.
“능력이라도 평범하면 몰라. 남들은 동화책을 읽을 나이에 검술 교본을 읽고 검을 휘두른 남자가 평범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긴 하겠어? 만났던 오메가들은 모조리 귀족 출신이라더라.”
욕망에 물든 눈으로 자신의 몸 위에서 날뛰던 카이로를 생각하며 리체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10살이 되어서 검에 기운을 덧씌울 수 있는 재능이 성인도 채 되기 전에 완전히 꽃피웠는데,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얀테 루세이노 황자의 직속 기사단 단장이 돼 버린 거야.”
“오, 들어 본 적 있어.”
어느새 엘자는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 난리가 났었잖아. 검의 귀재라고 주목받던 스트리고 백작님이 별 볼일 없는 얀테 황자님을 선택했다고.”
“그래. 다들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지. 그분이 극우성 알파였을 줄 누가 알았겠어? 지금 결과를 봐. 세력이 약했던 얀테 루세이노 황자는 황제를 바라보는 황태자가 되었고, 카이로 스트리고는 제국을 쥐락펴락하는 실세가 됐잖아. 언제 들어도 낭만적인 이야기라니까.”
“그렇군. 알겠어. 근데 그것과 레이몬드 스트리고가 불운한 붉은 머리라는 건 무슨 상관이야?”
“레이몬드 스트리고도 기사야. 그것도 수재라고 불릴 만큼의 꽤 뛰어난 기사.”
잠시 생각한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분야의 정점을 찍은 혈육을 둔 동생의 심정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더 대단한 형을 뛰어넘을 수가 없는데 어떻겠어? 게다가 둘째여서 작위도 상속받지 못하니 형을 모시며 기사로 있던가, 다른 주군을 찾아야 하는 처지지.”
연민이 든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상심이 지나쳐서 어릴 때부터 사고를 치고 다니더니, 지금은 다 포기했는지 이델리 그레이스를 쫓아다니는 망나니가 됐대. 소꿉친구였다는 말도 있지만, 지금 봐선 전혀 상상도 안 가는 헛소문이야.”
잠깐 말을 멈춘 미하일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델리 그레이스. 그 색욕만 탐하는 멍청한 오메가에게 빠지다니.”
앞서의 이야기를 할 때는 덤덤했던 그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변했다.
“자고로 존경받을 알파오메가는 우리 제니스 님처럼 욕망을 조절할 줄도 알아야지. 이델리 그레이스처럼 굴면 짐승이랑 다를 게 뭐야?”
엘자는 누구 듣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입 조심해, 미하일. 이델리 그레이스가 들으면 우리 다 쫓겨날 거야.”
“쫓아낼 테면 쫓아내 보라지.”
“너는 보르신 공작님이 거둬 주시겠지만 난 아니거든!”
엘자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하일은 신나게 떠들었다.
“그 소문은 들었냐? 사교계에 이델리 그레이스랑 뒹굴지 않은 귀족 사내가 없댔어. 심지어 베타도 가리지 않는다더라.”
“그건 너랑 잘 맞네.”
기분이 상한 엘자가 툭 쏘아붙였다. 미하일이 불쾌한 기색으로 눈썹을 꿈틀했다.
“뭔 소리야?”
“너도 베타, 알파, 오메가 가리지 않고 자고 다녔잖아.”
“내가 언제?”
“이렇게 모르는 척한다고? 리체 듣는 앞에서 한번 다 까발려 봐?”
엘자가 한쪽 입꼬리를 쭉 끌어올린 비웃는 얼굴로 리체를 가리켰다.
“……이제는 안 그래! 나한테는 제니스 님밖에 없다고!”
“아이고, 그래. 용케 제니스 보르신 공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긴 했지. 그분은 네 난잡한 성욕에 어울려 주시디? 내가 진짜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순정 마초인 척하는 게 웃겨서 얘기한다!”
“야, 입 꿰매 버리기 전에 말조심해라.”
미하일이 얼굴을 붉히고 씩씩거리는 그때, 리체의 가슴팍에 꽂혀 있던 깃털이 바르르 흔들렸다.
“리체!”
분출 직전 화산처럼 부글거리는 미하일에게서 주춤 시선을 뗀 엘자가 잘됐다는 양 리체의 어깨를 툭 쳤다. 눈을 깜박거리며 리체가 쳐다보자 엘자가 그녀의 가슴을 가리켰다.
“호출.”
그제야 리체는 흔들리는 깃털을 붙잡았다. 미하일과 제니스 보르신의 조화를 생각하느라 눈치채는 게 늦었다.
“리체, 얼른 올라가 봐. 그레이스는 성질이 더러워서 늑장 부리면 좋지 않을걸.”
미하일까지 충고하자 리체는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인사불성으로 취한 사람들이 소파에 식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리체가 들어와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역시나 꽤 취했는지 약간 흐트러진 자세로 왼손에 종을 느슨하게 쥔 이델리의 시선이 스륵 움직였다.
“뭐야, 너?”
예쁜 눈을 날카롭게 뜨고 처음 본다는 듯 리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까칠한 반응에 리체는 고개를 공손히 숙여 보였다.
“호출하셔서요.”
눈을 깜박인 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들어온 사람이 너였니?”
그럼 서빙한 직원의 얼굴도 기억하지 않았단 말인가?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리체는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그렇다고 대꾸했다. 이델리는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술잔을 붙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안 되겠네? 오메가는 내 눈앞에 보이지 말라 사장에게 분명히 말해 뒀을 텐데.”
목소리에 불만이 그득 들어찼다. 리체를 오메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처음에 그녀를 봤을 때 무시로 일관했던 것은 베타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페로몬을 억제 중인데 어째서 오메가라고 생각했을까? 아무런 페로몬도 맡아지지 않는데 말이다.
리체는 조용히 대꾸했다.
“손님, 전 베타입니다.”
리체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사실 베타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오메가로 발현하기는 했지만 페로몬 농도는 여전히 낮고, 이 정도는 스킬로 충분히 커버할 수가 있었다.
퀘스트를 깨기 위해 잤던 카이로 스트리고를 제외하고 그녀가 오메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델리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리체를 유심히 살펴보고 피식 웃었다.
“아, 베타였어?”
짧은 말에 무시하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겼다. 금세 관심을 끊은 이델리가 식탁을 가리켰다.
“이거 좀 치워. 냄새가 섞여서 머리가 아파.”
리체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술잔이 엎어져 있었고 포도 다섯 알 정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포도 던지기 놀이라도 한 건가. 어찌나 난장판으로 놀았는지 바닥에도 안주와 술이 떨어져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서빙 카트에 항상 행주를 구비해 놨지.’
리체는 행주로 먼저 룸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몸을 수그려 룸 테이블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쪼그려 앉아서 바닥에 떨어진 과일을 줍는 순간이었다.
화악, 공기 중에 그윽한 향이 퍼졌다. 리체는 코를 킁킁거렸다. 한층 짙어진 레모네이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당황했다.
‘왜 갑자기?’
의문은 금세 풀렸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안개처럼 귓가에 눅눅하게 감겨 들었다.
“이델리, 당신은 정말로 나를 미치게 만들어요, 흐윽…….”
머리 위로 남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리체는 테이블 밖으로 고개를 내밀 것처럼 움직여서,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이델리 그레이스의 남자들 중 제일 침착하고 부드러운 남자라 여겼는데 지금은 잔뜩 흥분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헐떡거리며 남자가 이델리의 어깨를 콱 쥐었다. 들킬까 염려된 리체는 다시 테이블 안쪽으로 뒷걸음질 쳐서 귀를 기울였다. 본능을 자극하는 야릇한 상황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만져 주세요.”
“먼저 혼자 해 봐.”
나른한 목소리가 소곤거렸다.
“그게 더 재밌을 것 같아.”
“아아, 이델리, 이델리.”
정말 혼자서 하는 건지,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찹찹찹찹. 소리는 점점 더 빨라졌다.
“흐읏!”
짧은 신음성. 자욱하게 퍼지는 달콤한 시럽 냄새 같은 페로몬. 알파오메가라면 정신이 몽롱해질 야한 냄새였다.
다소 방탕해지기는 했지만 연구에 미친 연구원답게 담백하게 살아왔던 리체로서는 이런 농밀한 분위기가 혼란스러웠다.
이곳은 문자 그대로 다른 세상이라는 걸, 이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깨닫게 되었다.
“하으, 으, 으으!”
목이 막히는 듯한 신음소리가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살갗을 핥는 소리가 야릇한 숨소리에 섞였다. 체액에 젖은 성기를 마찰시키는 소리가 말초 신경을 뾰족하게 자극했다.
리체는 손등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미열이 오른 것처럼 뜨끈뜨끈했다.
“이델리이, 하으, 조, 좋아요, 좋아, 더, 더 만져 줘!”
찹찹찹찹.
탁, 탁!
“하으으, 이델리! 하으!”
리체의 허벅지가 꽉 붙었다. 가랑이 사이가 간질거리는 것이, 보는 사람도 없는데 민망하여 낯이 뜨거워졌다.
찹찹찹찹찹!
형사에게 쫓기는 탈옥수의 걸음처럼 성기를 마찰시키는 소리가 조급해졌다.
“이델리! 아아아!”
끙끙대는 신음을 끝으로,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천장까지 올라갔다. 고개를 든 리체의 앞에 흰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투둑, 툭.
룸 테이블 밖,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환한 바닥에 점액질의 액체가 뚝, 뚝 흘렀다.
위를 향했던 리체의 시선이 슬그머니 바닥으로 향했다. 술을 훔치기 위해 행주질을 하던 손은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리체는 눈을 끔벅거렸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행주로 액체를 훔쳤다. 그것이 분홍 행주에 진득하게 묻어났다. 사정액이 실처럼 늘어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 게 아닌데도 이렇게 보니 아주 낯설었다.
“이델리.”
방금 사출하여 여태까지 헐떡거리는 남자와는 또 다른, 취한 듯 가라앉았지만 꼿꼿한 심지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이델리.”
못마땅한 기색에도 답이 없었다. 마침내 목소리에 짜증이 어렸다.
“그놈 자지에 취하기라도 했어?”
리체는 정액 묻은 행주를 서빙 카트에 던지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왜, 레이?”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드디어 이델리가 응답했다. 리체는 그녀가 일부러 그의 애를 태우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거기서 구경만 하려니 거기가 가려워?”
“어, 무지막지하게 하고 싶어졌는데.”
약간 까칠하고 퉁명스럽던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지금은 술에 절여진 올리브처럼 부드러웠다. 순진한 처녀가 있다면 그를 달콤한 신사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그 아래 득시글대는 욕망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말이다.
“후후. 지금? 여기서 말이야?”
“장소가 문제야? 왜 이래.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너.”
흐음. 리체가 숨을 들이마셨다.
‘……진흙 냄새.’
묵직한 알파 페로몬이 퍼진다.
알파오메가는 유혹하는 페로몬을 뿜어낼 때 가장 섹시해지는데, 부드러운 머드팩을 온몸에 치덕치덕 바르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이델리를 휘감으며 도발했다.
“선 거 봐. 먹음직스럽지? 그놈보다는 내 게 더 맛있을걸.”
“…….”
“말이 없네. 막상 나랑 선 넘으려니까 그건 또 싫어?”
“취했네, 레이.”
“난 너랑 하고 싶어. 예전부터.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지만.”
“…….”
“너도 그렇단 거 알고 있어.”
이델리에게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리체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마 당황하는 얼굴은 아닐 것이다.
잠시 후, 망설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돼, 너랑은 안 할 거야.”
레이몬드가 피식 웃었다.
“여기 있는 한심한 놈들이랑은 다 잤으면서 나랑 자지 않는 건 무슨 이유야?”
“실례인데. 얘하고는 안 잤거든. 어머, 얘 봐, 너무 좋아서 정신이 나갔어.”
“그 상태로 널 제대로 쑤셔 줄 수나 있겠냐?”
천박한 빈정거림이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된다는 듯 이델리가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도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그거 몰라? 같은 사과라도 제일 높은 가지에 달린 사과가 더 먹음직스럽다. 인간은 손에 닿지 않기 때문에 별을 더 갈망하는 법이지.”
“…….”
“네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잖아?”
“누가 보면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줄 알겠다? 네가 날 그렇게 잘 알아?”
이델리는 리체가 듣기에도 굉장히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모를까.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네가 한 번 자고 버려 둔 여자가 한둘이야? 난 그런 취급 절대 용납 못해.”
“천하의 이델리 그레이스에게 그럴 리 없잖아.”
“확신해?”
“어.”
“난 남자가 확신하는 건 안 믿어. 날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믿지.”
“……재미없는 말이야. 먹고 버려질까 봐 나랑 자기 싫다고?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
“난 좀 더 재밌는 걸 바랄 뿐이야, 레이몬드 스트리고. 너랑은 이게 가장 재밌어.”
처음에는 귀를 쫑긋하고 집중했던 리체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흔한 사랑싸움이 아닌가. 그런 건 관심 없었다.
“이리 와, 이델리. 키스까지 거부하진 않겠지?”
리체는 쭈그려 앉은 채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술과 입술, 혀와 혀가 부딪치는 질척한 소리가 났다. 리체는 가만히 있다가, 소리가 깊어질 무렵 뒷걸음질을 쳤다.
서빙 카트도 내버려 두고 문까지 조심조심 걸어갔다. 그러곤 문을 살짝 열어 밖으로 빠져나왔다.
문을 닫자, 안에서 흘러나오던 쪽쪽거리던 소리가 뚝 멈추었다.
리체는 문을 붙잡은 채 휴우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어떻게 한담.’
주방에서 음식을 주워 먹은 덕택에 배는 채웠고. 그렇다고 문밖에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리체는 고민하다 직원 휴게실로 향했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란 소파가 있는 한 칸짜리 방이 드러났다. 창고 겸 휴게실로 사용하는 공간인지라 단출해서 오가는 직원들이 별로 없었다. 리체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소파에 등을 대고 누운 그녀는 습관적으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오메가 페로몬 농도 수치 10]
‘수치가 10. 이건 어느 정도일까.’
이전, 그녀의 페로몬 농도는 열성 오메가보다 못했다. 형질 자체는 1년 전에 발현했음에도 반년 넘게 누구도 그녀를 오메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페로몬 수치 10도 높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베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겠지.
‘그걸로도 카이로는 내 생각보다 흥분했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
오메가가 아니라면 섹스 상대로 취급하지 않는 그의 눈에 든 것은 확실히 행운이 따른 일이었다.
‘지금까지 수집한 데이터에 따르면, 우성 오메가가 일상적으로 흘리는 페로몬 농도 수치는 1에서 100으로 따졌을 때 70 정도.’
기준은 이델리 그레이스뿐이다. 만나 본 극우성 오메가가 그녀밖에 없었으니.
70은 적잖은 수치였다. 미하일이 흥분했을 때의 페로몬보다 10에서 20정도 높은 거니까.
미하일과 제니스의 정사 장면을 목격한 적 있던 리체는 그때 미하일에게서 흘러나오던 페로몬을 생각했다.
‘흥분한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 수치를 알면 보다 비교가 수월할 텐데.’
우성 오메가의 평소 페로몬 수치를 기준으로 두고 데이터를 재배치한다면 평범한 오메가의 페로몬 수치는 30에서 40.
‘그렇다면 내 페로몬 수치는 열성 오메가와 비슷한 수준이겠어.’
다른 사람은 안 그런 모양이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페로몬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서 나던 페로몬은 달달한 복숭아 냄새였는데.
‘지금도 그럴까?’
궁금해진 리체는 속으로 속삭였다.
‘페로몬 개화.’
달칵, 하고 내부가 느슨하게 풀어진다. 페로몬이 새어 나오는 감각은 몸속에 있는 수도꼭지가 달깍 하고 열리는 느낌이다. 리체는 소파 위에 몸을 나른히 늘어뜨렸다.
“후우…….”
몸 전체에서 페로몬이 피어올랐다. 코를 킁킁거리다가, 보다 정확히 알고 싶어 아예 팔꿈치 안쪽에 코를 박았다.
역시, 전보다 약간 강해졌다.
리체가 한층 변화한 자신의 페로몬을 깊이 음미하는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뭐야! 놀란 리체가 상체를 엉거주춤 들어 올렸다. 저벅. 매끈한 구두가 안으로 들어왔다.
뽀득.
리체가 몸을 더 일으키자 살갗이 소파의 가죽에 쓸리는 소리가 났다.
흐리멍덩한 붉은 눈이 리체에게 정확히 꽂혀 들었다.